복음과 믿음
호세아 13:9-11 / 왕을 주신 이유 본문
이근호
왕을 주신 이유
2020년 7월 15일
본문 말씀: 호세아 13:9-11
(13:9) 이스라엘아 네가 패망하였나니 이는 너를 도와 주는 나를 대적함이니라
(13:10) 전에 네가 이르기를 내게 왕과 지도자들을 주소서 하였느니라 네 모든 성읍에서 너를 구원할 자 곧 네 왕이 이제 어디 있으며 네 재판장들이 어디 있느냐
(13:11)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이스라엘이 애굽나라에 처음 만들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애굽나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구박하게 하셨습니다. 애굽 나라 제도는 인간 세계에서는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자연스러운 운영체계입니다. 이 국가제도를 통해서 인간들은 사적인 행복을 구체화하고 가시적으로 누리고 싶어합니다.
즉 인간이란 행복을 추상적이지 않고 힘을 실질적으로 느끼는 상황 속에서만 누릴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라는 것이 단순히 여러 종족들의 연합체나 단합체로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권력체’로서 존속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단순히 한 개인으로서 너와 나로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공통적으로 하나의 힘에 예속되었음을 느끼면서 서로를 만나야 안심을 하는 겁니다.
지배하는 층과 지배받는 층을 보장해주는 데서 ‘권력 안에 있다’는 안정감을 느끼는 겁니다.
이 안정감을 법으로 유지됩니다. 국가 운영이 ‘권력체’로 운영된다는 것은 법이 제대로 실효성 있게 운영된다는 겁니다. 법의 절대성을 실질적으로 살리기 위해서는 국가 시스템 안에서 들어올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간의 구분지어져야 하는 과정이 계속해서 필요합니다.
누가 법의 혜택을 완벽하게 누릴 수 있는 쪽이냐 하는 것은 법의 혜택에서 완벽하게 배제된 자들의 계속 출현해주어야 현실적 사실이 됩니다. 법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자들은 그 나라에 노예가 됩니다. 종이 됩니다. 그리고 법의 혜택을 입은 사람은 자유민이 됩니다. 노예나 종들은 스스로 자기 정체성을 구성하는데 있어 국가 권력으로 공격받게 됩니다.
출애굽기 1장에서는, 바로왕이 체제유지를 위해, 그 나라의 법에 의해서 보호받지는 못하지만 계속 붙들고 있어야 될 종족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그들이 바로 히브리인들이었습니다. 경제적 토대가 정치적으로 안정화를 가져오고 이 정치적 구체성이 자기들이 믿는 종교적 정체성을 확립합니다.
그들 자유민들이 믿고 있는 신을 증명하는 차원에서 애굽 나라에서는 종으로 부릴 민족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런데 바로 이스라엘이 이런 정치적 정황에서 만들어집니다. 즉 ‘이스라엘’이란 이 세상 나라의 법에 호소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출애굽기 1:17에 보면,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세상 나라의 명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해야 하는 원리들로 채워져야 하는 겁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일부로 세상나라로 하여금 히브리인들을 구박하게 한 겁니다. 즉 이 세상 나라에 미련가질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이 세상 나라 입장에서 보면 ‘없는 나라’입니다.
이 ‘없는 나라’라는 취지를 이스라엘만큼은 유지해야 합니다. 즉 세상 나라들이 그들의 역사를 유지하기 위해서 시도하는 모든 것들이 이스라엘에게는 적용하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8:5-7에 보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나라처럼 살고 싶었던 겁니다.
이는 ‘왕’이라는 자리가 자신의 ‘여기 있음’과 연결되어 진다고 믿었던 겁니다. 즉 ‘여기 있는 나를 위하여 왕이 필요하다’고 본 겁니다. 세상 나라 같으면, 왕이라는 존재는 백성의 안위와 행복을 위하여 필요한 권력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애굽나라에서 발생된 이스라엘의 경우처럼, 이스라엘의 왕이란 결코 백성을 위한 왕이 아닙니다.
도리어 왕을 위하여 백성은 ‘없는’ 데서 ‘있게’ 된 것입니다. 즉 내가 먼저 있고 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왕이 먼저 있고, 그 왕을 위한 백성들이 등장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갖는 이러한 이방나라와 다른 특성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분노하므로 왕을 주시고 진노하시므로 왕을 폐위시키신 겁니다.
이는 왕이 있다가 없어지는 것처럼, ‘너희 자신들도 당연히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내가 이 땅에 있기 위하여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진정한 천국의 왕이 먼저 계시기에 그 왕을 위하여 백성이 생겨나는 겁니다. 북이스라엘에는 19왕이 나타났다가 소멸합니다.
여로보암 1세 → 나답 → 바아사 → 엘라 → 시므리 → 오므리 → 아합 → 아하시야 → 요람(여호람) → 예후 → 여호아하스 → 여로보암 2세 → 스가랴 → 살룸 → 므나헴 → 브가히야 → 베가 → 호세아가 바로 그 왕들입니다. 그런데 이들 왕가들은 늘 오래 이어지지 못하고 부하나 백성들에 의해서 왕가 족보가 아닌 다른 자들에 의해서 왕이 이어집니다.
이는 혈통의 정통성을 잇지 못하고 힘의 원리에 의해서 왕 자리가 형성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곧 혈통적 요구와 소망이 힘 가진 자에 의한 국가권력으로 구체화되는 겁니다. 이러한 어수선한 왕계통은 하나님으로부터 ‘우상숭배 죄’와 관련지은 처벌 형식이라고 단정 받게 됩니다. 즉 인간들이 왕을 찾는 심정이 우상숭배를 하는 심정과 동질이라는 겁니다.
‘있음’,에서 비롯된 역사가 국가로 이어지고 이 국가가 또한 역사를 이어가기 위해 인간의 힘이 동원됩니다. 이렇게 되면 국가란 인간의 혈통적 요구사항과 연결되어 있는 국가관이 됩니다. 인간은 우상이 본인에게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본인들이 신을 찾을 때, 그 신은 인간의 욕망의 이미지가 됩니다.
따라서 우상이 아닌 참된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왕되심을 알리 왕을 따로 준비해주셨습니다. 이 왕의 등장은, 그 이전에 인간의 왕의 허무성이 먼저 드러나야 합니다. ‘인간의 있음’에서 출발하는 그 어떤 지도자도 하나님에게는 진노와 분노를 유발하는 요인임을 이해하는 자들이 발생되어야 합니다.
즉 내가 원하는 신을 내가 찾을 때, 이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우상에 불과함을 우리 자신이 먼저 알아야 합니다. 내가 살기 위하여, 내가 존속하기 위한 힘이 필요해서 찾는 신이 바로 우리가 만든 우상입니다. 우상이 아닌 참된 신은 우리 인간에게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찾아오신 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살고 싶어서 신을 믿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50강-호 13장 9-11절(왕을 주신 이유)2007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13장 9-11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67페이지입니다.
호세아 13:9-11
“이스라엘아 네가 패망하였나니 이는 너를 도와주는 나를 대적함이니라 전에 네가 이르기를 내게 왕과 방백들을 주소서 하였느니라 네 모든 성읍에서 너를 구원할 자 네 왕이 이제 어디 있으며 네 재판장들이 어디 있느냐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이스라엘 나라에 왕이 있었다는 것은 누가 생각해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왕이 있다는 것을 두고 이스라엘에게 왕이 필요하다고 이해해서는 아니 되는 겁니다. 왕이 있을 때에 그냥 당연하게 있다고 여기지 말고 ‘왜 이스라엘에게 왕이 필요하지?’라는 그런 의문을 가져야 됩니다. 여기 11절에 보게 되면, 왕이 있는 이유가 뭐냐? “내가 분노함으로 네게 왕을 주고”라고 되어 있어요.
분노해서 왕을 줬다는 말은, 왕이 없어야 마땅한 나라에서 왕을 찾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왕을 찾는 그 인간의 번성에 대해서 내가 화내고 있다는 그런 뜻에서 왕을 세웠다는 겁니다. 왕이 있게 되면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각해서 왕을 주셨구나, 라고 오해를 하겠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왕을 줘놓고 왕을 도로 폐해버립니다. 소멸시키지요. 소멸시킬 때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해서 왕을 줬는데 왜 소멸시키는가?’ 이렇게 오해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폐했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왕을 주지 아니하고, 또 폐하지 아니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뭘 놓치게 되고 빠트리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노하고, 진노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빼먹게 되는 겁니다.
줘놓고 빼앗아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원하지 않아야 될 것을 원한 존재들이다.’ 이스라엘이 그것을 생각해야 되고, 원하지 않은 것을 원했다는 말은, 내가 원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분노를 유발할 거리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요청했다, 이렇게 보셔야 돼요. 그리고 그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라는 것이 그냥 왕 주고 빼앗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그들이 왕 친화적이면서 그 왕이 이방나라에 포로로 잡혀가면서 국가가 와해됩니다.
와해되면서, 왕이 없다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이스라엘 국가 자체도 없어져야 될 나라라는 사실, 소실되어야 할 나라라는 것을 그들이 눈치 채야 돼요. 나라가 없다는 말은 더 궁극적으로 말해서 내가 이 땅에서 없어져도 되는 존재라는 사실에까지 이르러야 돼요. 내가 이 땅에서 없어져도 되는 존재.
제가 두 가지 경우를 예로 들 테니 여러분이 이분들이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아주머니가 계신데 그 아주머니가 젊을 때 시집왔어요. 그런데 남편이 술주정꾼이라. 그래서 가정을 돌보지 않고 돈만 생기면 술을 먹었습니다. 술주정꾼 남편을 둔 이 아주머니는 그래도 자식이 둘이나 되니까 자식 키우기 위해서 열심히, 남편이 그렇게 학대해도 바깥일 열심히 하다 보니까 나중에 뇌신경에 문제가 생긴 것도 모르고 그냥 노안이 와서 눈이 어둡다고만 생각한 거예요.
나이 한 50쯤 되어서 뇌신경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고야 네 번을 수술했는데 다 소용이 없고 이제는 60이 넘었는데 완전히 시력을 상실했어요. 시력만 상실한 것이 아니고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가? 뇌종양까지 왔습니다. 그분이 하는 말이, “내가 살아온 것은 죽지 못해서 살아온 한평생이다.” 그렇게 했어요. 자, 이 아주머니의 문제점이 뭡니까?
남편 탓 할 수도 있어요. 내리사랑이라고 자식 낳았으니 짐승이라도 새끼 키우는 본능이 있잖아요. 사람인 이상 자식을 키우는 것이 어미의 도리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키웠는데 그 와중에 자기는 장님이 되고, 돌아보니 죽지 못해 살아온 한평생이라, 그렇게 했습니다. 이 아주머니 문제점이 뭐냐? 그것은 여러분에게 넘기겠습니다. 너무 충격적이라서.
또 한 사람이 있어요. 자식이 놀음에 빠졌어요. 정신없이 놀음에 빠진 그 자식을 위해서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면 늘 무릎 꿇고 자식이 제정신으로 돌아오기를 기도를 했습니다. 나중에 그 어머니가 죽게 되었는데 왜 죽었는가? 간절히 기도한다고 무릎을 꿇다보니 무릎에 탈이 나서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그 어머니는 자식이 필리핀에 가서 놀음이나 하고 있는 그 잘못을 자기가 메우기 위해서 아침에 나가서 담배꽁초를, 꼭 누구처럼, 담배꽁초를 줍는 거예요. 꽁초 하나하나 주울 때마다 내 아들이 진 빚이 백 원씩 없어지게 하옵소서, 그런 마음으로 했다는 거예요. 그 아들 이름이 황 기순 이라고 개그맨이지요.
이 두 부인네의 잘못은 뭐냐? 본인이 이 땅에 살아야 될 이유를 전혀 몰라요. 그리고 왜 죽어야 되는지 그 이유도 모릅니다. 아무도 옆에서 그 이야기 해준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본문 9절에 “이스라엘아 네가 패망하였나니” 그 이스라엘을 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이 듬뿍 담겨 있습니다.
자식을 위해서 희생했는데 왜 술주정뱅이인 남편에게는 벌을 안 내리고 자식을 키우려고 애썼던 그 부인네한테는 장님이 되는 형벌을 내렸는가? 자식을 위해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는데 왜 무릎 때문에 병들어 죽게 되었는가? 그리되면 자식으로 하여금 효도할 기회조차 박탈되는데 왜 이런 비극이 있느냐? 뭐 이런 사연들은 세상에 굉장히 많거든요.
어릴 때 교통사고가 나서 30년이나 돌본 그런 사람도 있고 온갖 사람들이 있는데 도대체 여기에 대해서 인간은 어떤 해답을 내릴 수 없는 이유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여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내가 이 땅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누가 알아듣겠습니까? 하나님이 화를 내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자체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삼아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다는 사실, 누가 그 이야기를 알아듣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들었어요. 이스라엘을 만들 때 어떤 식으로 만들었는가? 그것은 바로 출애굽에 보면 1장부터 나옵니다. 출애굽기 1장에 국가가 나오는데 애굽이라는 국가가 나와요. 그 국가가 무슨 일을 해요. 어떤 일을 하느냐? 히브리인들이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출애굽기 1장 12-14절에 보면,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를 엄하게 하여 고역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역사가 다 엄하였더라.” 이렇게 나와 있지요.
이것은 뭐냐 하면, 국가가 유지되고 국가를 하나의 권력통치시스템으로 운영하려면 어떤 자들이 필요하냐 하면, 국가의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서 그 국가에 종속된 자들이 필요한 거예요. 그것을 쉽게 말해서 노예라고 이야기합니다. 종, 노예. 국가의 법에 보호받지 못하면서 그 국가에 꼭 필요한 존재로서 그 국가가 붙잡고 있는 대상들, 국가의 법으로 보호해주지 않으니까 그 국가의 법 밖으로 내버려졌으면서도 국가는 그렇게 내버려진 자들이 꼭 필요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애굽나라 속에서 히브리인들을 그런 처지에 놓이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행복하기 위해서 살고요,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한데 그 조건이 뭐냐? 다른 사람이 나를 때리거나 나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게 했을 때 법에 호소하면 국가가 그것을 갚아주는 보호, 일종의 자장, 자석의 힘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자장처럼 힘이 작용하는 그러한 영역 속에 있을 때 인간은 안심하고 행복을 느끼는 겁니다.
그러나 히브리노예를 자유인이 그냥 죽여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그냥 죽어야 돼요.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이스라엘 자체가 이러한 애굽나라에서 그 당시 국가법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죽음으로 내버려졌다는 것이 바로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가 이 인간세계에서 꼭 히브리인의 이스라엘의 신세와 동일하게 만들어진다는 것을 성경구약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애굽왕이 산파들보고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면 살려라, 이렇게 했을 때에 출애굽기 1장 17절에 보면,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산파들이 애굽왕의 말을 안 듣는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했다고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지켜주셔서 죽어야 될 아들들이 안 죽고 계속 살아 있는 거예요.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러면 오늘날 교회가 뭐하는 곳이냐 하면,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이지요.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것은 세상 어떤 말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해서 예배하는 거예요.
부산강의에서 이야기했지만 사도행전 4장 19절에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인간의 말에 순종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더 낫다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면 교회라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인정하고 주님의 살아계심,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이 엄연히 함께 계심을 인정하고 그분에게 찬양과 합당한 경배를 드리는 것이 교회고, 교회가 그렇게 할 때 그것을 예배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배드리라 말라, 를 누가 시건방지게, 누가 누구에게 명령해요? 정 세균총리가 하나님입니까? 재미있는 것은 정 세균총리가 그렇게 명령했다 해서 그놈의 3백만 원, 그 이야기 또 나옵니다만, 그게 무서워가지고 모임도 안 나오고 교회도 안 나오고 도대체 그러면, 하나님은 살아 있다, 지옥이 있고 천국이 있다는 이야기를 성도가 이야기 안 해주면 이 세상에서 누가 이야기해줍니까?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고 그 이야기를.
여기 산파들도 거대제국의 왕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다는데. 3백만 원이 하나님의 명령보다 더 무서워. 더 두려워.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증인되기 위해서 된 거예요. 성령이 임하면.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성도가 아니지요.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증인 되라고 한 겁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될 때 아주 적합한 환경이 어떤 환경이겠어요? “너는 국가의 노예야. 우리 말 안 들으면 너는 죽어.”라는 환경이 예수님의 증인되기에 아주 적절한 환경이잖아요. 그런 명령이 없었더라면, 그런 압박과 협박과 공갈이 없었더라면 내가 지금 신자인지 아닌지도 분간이 안 되고, 국가에서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든 말든, 모이든 말든, 하나님이든지 예수를 찾든 우리는 신경 안 씁니다.
이러면 ‘이거 뭐 쉽게쉽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구나.’ 했는데 마침 적당하게 코로나 바이러스 바람 불게 해주시고, 사람들이 마귀에게 빠져서 죽기를 무서워해서 벌벌 떨고 있는 이 판에, 전부다 무서워서 벌벌 떠는 이 판에 이스라엘의 출현 이스라엘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하나님께 실습시킨 거예요.
그 이스라엘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제 소멸, 없어집니다. 이스라엘은 없어지면서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진노하고 무엇 때문에 분노하는가를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줬지요. 이스라엘이 망하는 이유는 윤리 도덕적 추잡한 짓해서 망한 것이 아니에요. 우상숭배 했습니다. 개인적인 윤리도덕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고 우상숭배에요. 집단적으로 우상숭배 한 거예요.
구약 보게 되면,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우상숭배에 대해서 얼마나 지적했습니까? 제가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것이 우상숭배인 증거를 말씀드릴게요. 북이스라엘이거든요. 북이스라엘에 왕이 19명이 있는데요. 첫 번째 여로보암 왕, 보통 나중에 같은 이름의 왕이 있을 때 먼저 왕을 1세라고 해요. 여로보암은 우상숭배를 아예 정책적으로 시행했습니다.(왕상 12:28,29)
두 번째 왕 나답은 그 아들인데 아버지 못지않게 우상숭배를 했다가 신하 바아사에 의해서 살해당해요.(왕상 15:28) 세 번째 왕 바아사는 여로보암의 혈족, 그 집 족보가 아닙니다. 그 바아사(3대)가 모반을 해서 왕위를 찬탈한 뒤에 여로보암 집안사람을 모두 죽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호세아 13장 11절에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하나님이 분노함으로 왕을 준 거예요. 왕을 줘서 자기 할 일을 해야 돼요.
그게 뭐냐? 앞에 우상숭배 한 여로보암왕조를 다 죽이는 겁니다. 그러고 난 뒤에 엘라(바아사의 아들)라는 왕이 있는데 그 왕은 2년 동안 통치하다가 전쟁 중에 술이 취한 상태에서 시므리에게 살해당합니다.(왕상 16:8-10) 이럴 때 예후라는 선지자가 전에 선임 왕 바아사에게 나타나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보잘 것 없는 너(바아사)를 이스라엘 왕이 되게 했다. 그런데 너는 우상을 섬겼으니 성안에서 죽는자는 개들이 먹을 것이고 들에서 죽은 집안사람들은 새들이 먹을 것이다.(왕상 16:1-4) 그래서 바아사의 아들 엘라가 네 번째 왕이 되었고 다섯 번째 왕이 시므리인데 이번에는 예언대로 바아사집안 사람들을 다 죽이고 왕위에 올랐습니다.(왕상 16:9-10)
이것이 예언의 완성이거든요. 그리고 단 7일 만에 반대파에 패해서 자기 스스로 불속에 뛰어들어 자살했습니다.(왕상 16:18) 요새 화두 아닙니까? 누가? 이스라엘의 다섯 번째 왕 시므리가. 그 다음에 군대장관 오므리(6대왕)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12년 동안 통치하는데 이스라엘최강의 왕으로서 제법 나라를 건사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우상을 섬겼다는 말이지요.
그 아들 아합이 있는데 아합은 일곱 번째 왕으로 이스라엘 역사 중에 가장 악한 왕이고 우상을 섬겼는데 자기 아내 말을 들었어요. 아내가 이세벨인데 이세발이 바알을 섬겼던 거예요. 바알을 섬기는 외국여자를 데려다가 그 아내의 말을 전적으로 순종해서 바알이라는 우상을 섬긴 거예요.
미가야 선지자가 아합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저가 가로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그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왕상 22:17) 목자가 없어진다는 말은 아합왕이 죽는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아합왕은 아람전쟁에서 죽습니다.(왕상 22:35)
그 다음 왕이 여덟 번째 아하시야 왕인데 역시 바알을 열심히 섬겼어요. 아하시야는 아합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다락에서 떨어진 후 병상에서 죽었습니다. 엘리야와 다투다가 죽었어요.(왕하 1:17) 그 다음에 아홉 번째 왕 여호람(요람)은 좀 특이한 왕인데 이스라엘에서 비교적 선한 왕인데 바알신상을 모두 없앴습니다.(왕하 3:1)
하지만 비겁하게 예후라는 군대장관이 왔을 때에 살려고 도망치다가 뒤에서 쏜 화살을 맞고 죽었어요.(왕하 9:24) 아합-아하시야-여호람, 전부 다 아합가문에 속한 사람들인데 이 가문이 전부다 바알을 너무 섬겼어요.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긴 거예요. 우상섬기니까 예후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아합 집안사람들을 모두 몰살시켰습니다.(왕하 10:17)
몰살시킬 때 신앙적으로 몰살시킨 것이 아니고 정치적자만심과 성질대로 한 거지요. 나 건드리면 죽는다, 하고 객기를 부려서 다 죽였어요. 그래도 이게 왕이 돼요. 열 번째 왕입니다. 하나님이 분노함으로 왕을 준 거예요. 그 다음에 예후의 아들이 열한 번째 왕 여호아하스인데 우상을 또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 때 아람나라 현재 시리아의 침략을 받아서 휘하 군대가 거의 섬멸되고 이스라엘이 약소국가가 돼요.
그 다음 열두 번째 왕은 요아스인데 역시 우상숭배, 그 다음 왕이 열세 번째 여로보암2세, 역시 우상을 섬겼어요. 이 때 유명한 요나 선지자가 활동한 그 때입니다. 41년이나 통치했지만 우상 섬겼고요. 그 다음은 그 아들 스가랴가 열네 번째 왕이 되었는데 6개월 동안 통치했고 살룸이라는 사람에게 모반을 당해서 백성들 앞에서 살해당합니다.(왕하15:10)
그 다음 왕은 열다섯 번째 살룸이지요. 살룸왕은 즉위 1개월만에 므나헴의 반란으로 살해당하고(왕하 15:14) 열여섯 번째 므나헴왕은 앗수르의 침략을 받았지만 조공을 바쳐서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그리고 므나헴의 아들이고 열일곱 번째 브가히야왕은 2년 만에 신하 베가의 반란으로 살해당합니다.(왕하 15:25)
열여덟 번 째 베가왕은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서 많은 땅을 잃고 백성들은 포로 잡혀가고 이 때 반란을 일으킨 호세아에 의해 살해당하고(왕하 15:30) 열아홉 번째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인데 포로 잡혀가서 앗수르의 감옥에 갇혔습니다.(왕하 174)
이스라엘이 왕들에게 반란, 쿠데타, 적들의 공격, 자살, 이런 것으로 하나님께서 주면서도 그 모든 사태가 우상숭배라는 것 때문에 생겼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는 거예요. 왜? 우상 숭배하는 사람에게는 그게 우상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하나님께서 그 인간을 죽여 버릴 때 이유는 딱 한가지에요. 우상을 섬겼다는 이유입니다.
우상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아, 내가 약속을 통해서 알려준 그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약속을 통해서 하나님을 이야기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신을 믿느냐? 그 신을 믿는 이유가, 사무엘상 8장 6절에서 7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왕을 찾는데서 그 이유가 나와요.
백성들이 늙은 사무엘선지자에게 찾아와서 요청한 거예요.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나라와 같이 왕을 달라고 했는가? 이게 우상숭배, 우상을 섬기면서 그게 우상이라는 느낌이 안 드는 이유와 관련성이 있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은, 혈육이 내 집안이 있고 그 집안에서 내가 출생했다는, 내가 있고, 우리 가정이 있고, 혈육이 있다는 것, 혈육이 있고 그것을 역사적으로 이어나가면서 그걸 국가로서 모양새를 갖추려고 했던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의 사고방식으로 결국 하나님에게 평가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역사라 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스스로 지워나가는 서술이거든요. 인간은 왜 삭제되어야 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역사에요. 그런데 그들은 삭제라는 생각을 상상도 못하고 내가 여기 있고, 우리 집안이 여기 있고, 혈육이 여기 있고, 그리고 그 혈육을 키우게 되면 국가라는 규모 있는 시스템 그것이 우리의 가족과 나 자신을 살린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 국가가 국가 되기 위해서는 최고 지도자를 인간에서 뽑아 올려야 된다는 겁니다. 같은 우리 인간에서 뽑아 올려야 된다는 것. 그래서 그들이 생각하는 왕은 뭐냐 하면, 자신의 혈육과 이어지는 왕, 인간의 생각과 연결되는 왕, 내가 여기 있다는 것 자체가 인정받을 수 있게 만드는 그런 왕, 영웅적인 왕입니다.
그 왕을 사람들이 추대하고 존경하는 이유는, 그 왕을 부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왕이 왕 되어야 될 목적과 여기 있는 내가 소망하는 것과 일치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왕의 자리와 내가 끊어져야 되는데 이게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창세기 10장에 노아의 4대 후손이 나와요. 노아의 4대 후손 이름이 니므롯입니다. 9절에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군이 되었음으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같은 특이한 사냥군이로다 하더라.” 니므롯이 고대바벨론제국이 시조거든요. 현재 이란 땅에서 출발한 고대제국입니다. 그 니므롯이 영웅이에요.
영웅이라 하는 것, ‘여기 존재하는 인간이 더 크게 존재하고 안정성 있게 안 죽고 오래 살 수 있기 위해서 나보다 더 센 힘, 더 큰 힘을 가진 자라면 존경해 마지않겠다. 그 분에게 종속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분의 덕으로 나와 내 가족이 역사적으로 더 오래오래 이어지면 좋겠다.’ 그런 소망 때문에 왕을 추대했고 그 니므롯왕이 세운 탑이 바로 바벨탑이잖아요.
그렇다면 사무엘상 8장에서,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하신 말씀이, 그들이 왕을 구하는 것은 나를 위함이 아니고 본인들을 위함인 거예요. 여러분에게 물을 테니 속으로 답변해보세요. 내가 있고 복음이 있습니까, 아니면 복음이 먼저 있고 내가 있습니까? 묻는 내가 나쁘지요. 여기가 복음 모르는 세상이라면 이걸 묻는 내가 욕 얻어먹을 짓이에요.
“하나님이고 예수고 다 사람을 위해서 있으니까 사랑의 하나님이지.” 전부 그런 소리 한다고요. 그게 바로 우상이라는 말이지요.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천지창조 할 때 하나님이 먼저 계시고 그 다음에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지극히 지당한 이야기를 왜 해야 되느냐?
너무나 근원적이고 너무나 기본적이지만 이 기본조차 인간에게는 먹히지를 않는 거예요. 심지어 교회 내에서 먹히지를 않는 거예요. 인간들은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를 인정 못하겠다는 거예요. 나를 진노하거나 분노하지 않는 다른 신을 신으로 나는 인정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게 바로 하나님이, 언약이 없는 우상이지요. 아까 이스라엘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다시 말씀드릴게요. 이스라엘은 기존의 나를 보호하는 국가로부터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고 학대받는 형식으로 만들어진 것이 이스라엘이에요. 애굽에서부터. 애굽나라는 이스라엘을 죽이려고 하고 그 나라를 없애려고 했습니다. 그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의 완성은 천국이고요. 혈육이 존재하고 있다는 그 있음, 존재하고 있다는 혈육으로부터 국가가 되어서 인간은 왕의 자리를 추대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반대로 없는 왕, 인간들 위주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왕을 주시는 거예요. 마지막 때에.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이 주시는 왕은 어떤 분이냐를 알기 위해서는 기존의 인간 왕이 결코 하나님 앞에 왕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증거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증명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추대하고, 인간들이 아무리 왕을 원해도 벌써 왕을 원한다는 그 자체가, 왕을 추대했는데 왕이 뭘 잘못했다, 그게 아니라 왕이 있어야 된다는 그 의식자체가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의 이유가 되는 거예요. 우리에게.
“우리에게 왕을 주옵소서.” “왕이 왜 있어야 되는데?” “나 살기 위해서.” 그러니까 네가 왕을 찾는다는 자체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위해서 네가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애굽에 있는 보통 애굽 사람들처럼 “나라가 있어야 돼.” “아니, 이스라엘은 그게 아니야.” “우리는 왕이 있어야 돼. 나라가 있어야 돼.” 그게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지도자가 있어야 돼.” 그게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이스라엘은 없어요. 내가 없다, 이 말이에요. 이스라엘도 없고, 내가 없고, 혈육도 없어요. 없는데 장차 오실 왕, 그 왕이 친히 자기백성을 만들어나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장차오실 그 예수님이 바로 언약의 하나님이거든요. 주의 이름이다, 그 말이지요.
우리는 이 땅에 없어져야 돼요. 하지만 없어지는데 이유는 알아야 돼요. ‘아, 없어질 만 하기 때문에 없애는구나. 내가 여기 있다는, 여기 있다는 내가 그냥 가만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목적과 소망을 요구할 때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목적과 소망과 어긋나는구나.’
뭐 이름이야 예수 부르고, 삼위일체 여호와 찾아도 그것은 이름뿐이고 실내용은 그 안에 ‘나는 무조건 안 죽어야 돼. 나는 무조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아니다. 나는 무조건 사랑받아야 돼.’ 이런 내 욕심과 내 욕구, 살아 있는 나는 무조건 안 죽어야 된다는 그 욕구가 우리를, 우상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이쯤해서 다시 아까 예를 들었던 그 분들 생각해 보세요. 자식 키우려고 자기 몸까지 버려가면서 나중에 장님 되고 뇌종양까지 걸린 그 분이나, 필리핀에 가서 놀음하고 있는 그 자식을 위해 돌아오라고 기도하면서 무릎 나갔는데 결국 그렇게 해서 자식은 돌아오기는 했다만 자신은 무릎 때문에 돌아가신 그 어머니나, 도대체 그들이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자식 잘 키우는 그것이 뭐가 그렇게 큰 죄냐 그 말이지요. 우상숭배가 죄에요. 우상숭배가!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게 죄에요. 언약을 모르는 게 죄입니다. 내가 있고 자식 낳았다. 혈육관계잖아요. 그 혈육관계가 전부인 거예요. 내 자식, 그냥 내 외손자, 외손녀, 모든 것을 거기에 다 쏟아 붓는 거예요. 남의 새끼가 아니고 내 새끼이기 때문에.
그리고 하는 말이 “내가 뭐가 잘못되었는데? 나쁜 짓 한 적도 없고, 간음이나 살인 한 적도 없고.” 나쁜 짓 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본인이 우상숭배자인 것도 모르고. 이 이스라엘사람들, 왕을 찾는 이스라엘 사람들, 이 사람들이 왜 왕을 찾느냐 하면, 기존의 여호와의 말씀이 허황되고 보통 허황된 것이 아니거든요.
“너희들 사람 말 듣고 예배 안모이면 벌금 7백만 원 때린다.” 하나님께서 만약에 그렇게 이야기했다면 “3백만 원보다 7백만 원이 더 세니까 교회 가자.” 하겠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이야기를 안 하니까 하나님이 허황된 거예요. 하나님이 허황되다는 말은 자기가 믿는 신 따로 있고 진짜 하나님자체를 우상시하는 거예요. 나를 위한 하나님이 따로 있기 때문에 진짜 하나님, 호세아 선지자의말씀은 전부다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호세아가 고난 받지요. 선지자가 죽음을 당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이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간음한 여인을 값을 주고 산다고. 사람들은 호세아 선지자의 그런 행동이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간음한 여인, 집나간 여인을 값을 주고 사온다는 것은 이상하다. 처음부터 간음 안하면 될 것이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라는 그 모습이 전적으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엉터리고, 진노의 대상이고, 분노의 대상이라고 완전히 규정이 될 때만 진짜 하나님이 나타나시는지, 그 이유가 본인들에게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거예요. 자꾸 하늘에 있는 금복주 할아버지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처럼이나 생각하지 이 땅에 와서 십자가 피 흘린다는 것,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 피 흘리고, 미움 받고, 채찍 맞고, 뺨맞고, 침 뱉음 당할 때 인간들은 생각합니다.
왜 그리 분산스럽냐, 그 말이지요. 왜 그렇게 처참하게 오시느냐는 말이지요. 좋게 해도 얼마든지 우리가 믿을 수 있는데 왜 그리 망가진 모습으로 오시느냐,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네가 망가졌거든, 네가! 네가 망가졌다고! 우리자신들이 망가졌거든요. 망가진 지도 모르지요.
진짜 하나님의 왕은 이스라엘의 인간적인 근원과 연결되지 않는, 오히려 미움 받는 왕을 이 땅에 준비해 줬습니다. 어느 이스라엘도 이분이 왕인지 알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열두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따라서 백성은 없습니다. 이 땅에 천국백성은 없어요.
어떻게 하느냐? 왕이 오셔서 성령을 줌으로써 자기 주제파악을 하면서, 내가 사는 이유가, 내 혈육이나 보존하려고 여기에 태어난 게 아니라는 사실. 그분은 나의 왕이 되고 나는 나에게 왕이 아님을 아는 거예요. 내가 왕이 아니에요. 우리가, 내가 주인공이라는 이것은 악마로부터 그런 성질을 물려받아서 그런 것인데 우리는 왕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의 백성이에요.
따라서 모든 책임은 왕이 지지 우리가 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그분의 노예에요. 우리는 그분의 종입니다. 종이 뭐 했다고 대접받을 이유 없어요. “우리는 할 바를 했을 뿐입니다.” 하는 그 말이 적절하지요. 마태복음 8장에서 백부장이 하는 말이, 9절에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 그 관계, 그 관계성, “나에게는 내 머리 부분이 따로 있고 나한테는 아예 머리 같은 것이 없고 나는 그분의 기계입니다. 로봇입니다. 그냥 로봇이라도 우리는 좋습니다.” 이것은 우리보고 멸망하고 새로운 시작을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작은 또 역사가 되잖아요.
새로운 시작하라는 말이 아니고, 우리가 몰랐던 원초적인 창조의, 죽음 이후의 원래적인 그리스도의 창조에 합류하고, 거기에 참여하고 그 나라의 사람이 되는 거예요. 따라서 하나님의 분노하심, 또 진노함으로 왕을 줬다는 말은, 곧 우리 자신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주님이 우리를 없애는 방향으로 우리 일생을 그런 식으로 이끄시는 겁니다.
없어도 좋으냐고 묻는 거예요. “네가 없어도 좋으냐? 예수님만 계시다면, 주님의 복음이 있다면, 주님의 역사만 있다면 저의 역사, 저의 있음과 그 역사는 없어도 상관없어요.” 그것보다 더 주님을 찬양하는 고백이 또 있겠습니까? 없어요. 그게 가장 주님을 찬양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있게 한 것은 주의 은혜였어요. 우리가 사도바울 같은 그런 고백으로 이 땅의 모든 이것이 우리가 있을 세상이 아니라는 것, 오늘날도 주어지는 이 모든 상황을 통해서 그것을 똑바로 파악할 수 있는 선지자 같은 영, 영이 있어서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호세아 같은 선지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 나라를 줘놓고 멸망시키는 주님, 그 가운데서 너희 자신이 바로 신 노릇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누구의 종이 되어도, 누구의 백성이 되어도 그것이 인간으로서는 최고의 영광이고 감사할 거리인 것을 저희들이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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