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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306강, 307강) 계기, 당연함 200407 본문

유튜브 강의(이근호)/유튜브 강의

(306강, 307강) 계기, 당연함 200407

정인순 2020. 4. 7. 20:39



306강             음성              동영상


307강             음성              동영상


녹취:이하림


306강-YouTube강의(계기 시편137:1)

20200407-이 근호 목사


제306강, 제목은 ‘계기’. ‘계기를 줬다, 계기가 있었다’ 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모르고 나중에, 현재에 와서 과거를 돌아보면서 ‘아하, 내가 지금이 있기까지 이러한 일들이 우연히 발생되었구나.’ 돌이키면서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것. 그런 것이 계기가 되겠지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지금 오늘의 내가 있었을까?’ 라고 감사하는 경우 또는 고마워하는 경우, 그런 경우 같은 것을 계기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에서 계기를 본다면 결국은 이겁니다. ‘천국 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떻게 방향틀기를 시도했는가’ 그게 계기가 되겠죠. 만약에 주께서 그 때 일을 벌이지 아니하였더라면 나는 지옥 갈 뻔했는데 하나님께서 그 때 마침 계기를 주셔서 나는 지옥가지 않고 천국가게 되었다. ‘정말 하나님 감사합니다. 돌이켜보니까 고맙습니다.’ 라는 경우를 성경에서 계기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지옥 갈 뻔했는데 천국 갔다’ 그걸 어떻게 알죠? 내가 그냥 있었으면 지옥가야 되는데 지금은 천국 왔다고 했을 때, 그러면 천국 갔을 때의 그 사고방식과 지옥 가는 사고방식이 같을 리는 없겠죠. 자, 그냥 무심코 무심코 동일하게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면 계기라는 것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 너무나 획기적으로 다른 생각을 가지면서 세상을 보는 경우. 전혀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러한 사태가 일어났을 때 그걸 계기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계기를 잡아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면 어느 순간에 “야, 참 그 때 당신을 안 만났으면 나는 큰일 날 뻔했다.” “왜?” “당신 만나서 이렇게 잘 먹고 잘 사니까 그 때 안 만났으면 난 가난하게 되었을 거니까.” 라고 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지금 내가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 오늘 부자가 되었는데 그게 내일까지, 모레까지 계속 된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계기가 하나같으면 ‘야, 그때 그일 안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 하는데 그렇게 생각했던 그 과거의 나한테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다. 그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다.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라고 자부했는데 나중에 그보다 더 시간이 지나서 보니까 그건 전환점이 아니고 ‘나를 오히려 망치게 한 착각이었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세 번째입니다. 첫 번째, 당신을 만나서 내가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서 ‘그 때 안 만났으면 나는 거지될 뻔했는데 지금 부자가 되었다. 고맙습니다’ 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그다음 5년 뒤에 생각해보니까 ‘당신을 안 만났으면 내가 더 부자 되려고 시도하다가 사기꾼한테 걸리는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 아닌가?’하고, 오히려 좋게 생각했던 전환점이 그것은 나에게 참으로 치욕스러운 순간이라고 도로 반전을 일으키면서 해석할 수도 있잖아요. 그렇죠? 그게 두 번째. 세 번째로, 처음에 당신 만날 때는 굉장히 좋았는데 나중에는 좋은 게 아니고 ‘내 인생 망쳤다’ 라고 생각했는데 세 번째 보니까 ‘그 망쳤다고 생각한 것이 정말 좋았다’ 이렇게 세 번째 또 다른 각도로 계기를 잡는다면 도대체 한평생 동안에 그런 수정되는 계기를  몇 번이나 겪어야 됩니까? 10번 겪어야 되겠어요, 20번 겪어야 되겠어요?

뭔가 잘될 때마다 ‘당신 덕분에’ 또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덕분에 잘되었습니다’ 라고 하다가 한 5년, 10년 지나서 인생 망치면 ‘그 때 그 교회 안가야 되는데’ 라고 생각하는 경우. 그런 경우에 지난 해석을 반성할 겁니까, 그걸 버릴 겁니까? 그 때 잘못되었다고 단정을 내려도 지금 잘못되었다고 여겼던 지금의 판정이 5년 후에 또 엉터리판정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확정할 수 있어요? 그러니 사람이라는 게 어떤 경우에 잘됐다, 못됐다 조급하게, 성급하게 판정내리면 안되는 겁니다. 내 인생의 결정적 계기였다는 말을 함부로 하면 안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정말 그때 아니었으면 나는 지옥 갈 뻔했다. 그때 아니었으면 정말 구원 못받을 뻔했다’는 결정적 경우에 있어서 그 전과 후에 어떤 질적인 차이가 있는지 그건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계기가 있기 전에는 어떤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느냐 하면 선과 악을 따지는 방식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선과 악을 따지는.

나는 선한 쪽일까 악한 쪽일까. 그리고 내가 만약에 악한 짓을 하면 ‘어떻게 선한 쪽으로 바뀔까’ 라는 의식. ‘내가 악했으면 내가 선으로 바뀌어야 내 장래가 나중에 보장되고 만약에 선하면 절대로 악에 빠지지 말고 선한대로 유지를 해줘야 나중에 천국까지 무사히 골인된다’라는 의식. 이 자체가 선악구조 안에 여전히 사로잡혀있는 꼴입니다. 이것은 바로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탓한 것은 뭐냐? “선해라”가 아닙니다. 네가 왜 선과 악의 굴레에 빠져버렸느냐? 그 굴레에서 못 빠져나온다. 그래서 너는 죽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저주를 내리고 심판을 내리는 이유는 선과 악의 의식에서 못 빠져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따먹지 말라, 그 세계를 알지 말라고 당부했건만 따먹고 난 뒤에 그 세계에 푹 젖어버렸거든요.

사람의 의식이라는 것은 이렇습니다. 내가 나쁜 짓하는 것은 재미있을 수 있어요. 하지만 나쁜 짓하고 난 뒤에 거기에 따르는 초조감과 들킬까봐 겁내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다 지켜보신다는 어떤 저주, 징벌 그런 것에 대해서 평생 시달리게 되어있어요. 나쁜 짓할 때는 짜릿하고 재미있죠. 하지만 과거에 나쁜 짓한 것을 혹시 들키게 되면 내 인생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내가 공들였던 인생도 망쳐버리면 어떻게 해.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내가 회개하고 반성하고 ‘하나님께 잘못되었습니다’ 용서를 구할까?’ 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교회오신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의 결정적 계기를 만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선과 악에 갇혀 있는 사람입니다.

자, 그러면 선과 악 사이에서 항상 방황하고 초조하고 불안 떨고 공포스럽고 완벽하게 되지 못하면 가슴 두근거리고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되겠어요? 어떤 계기가 있어서 ‘아, 나는 구원받았다. 천국가는 사람이구나’ 아는 경우가 어떤 경우입니까? 그것이 예를 들면 시편 137편에 나옵니다. 1절,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온, 다시 말해서 약속의 땅에 있는 예루살렘이죠,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던 그곳. 그곳의 중요성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 때는 몰랐어요. 몰랐는데 거기서 쫓겨나고 난 뒤 바벨론 포로 잡혀가고 난 뒤에 알았습니다. 그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시온을 기억하고 울었도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은 뭐냐? “바르게 살아라”가 아닙니다. 이제는 선악에 그만 휘둘리라는 말이죠. 생명나무, 하나님이 주신 이 생명나무는 그동안 우리가 선악에 휘둘린 게 악마의 장난에, 늪에 빼도박도 못하게 거기서 놀아났던 겁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착하고, 아무리 악을 버리고 착하게 살아도 여전히 완벽하지 못한데서 오는 초조감과 심판받을 두려움, 그리고 하나님의 저주, 악마가 주는 협박, 공갈에 쫒기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이 시온이라는 게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 생명나무를 자기백성에게 주시기 위해서 거기에 일을 벌인 거예요. 시온은 제사드리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제사, 사람이 드리는 제사 아니에요. 하나님이 약속대로 이렇게 드리라고 한 제사, 제물, 제사장 그들이 활동하는 곳이 시온이고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겁니다.

이것은 곧 뭐냐? 생명나무로서 네 죄를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겠다는 법칙이에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기에 살면서 이 용서라는 게, 법칙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어요. 몰랐는데 시편 137편에 바벨론에 포로잡혀 가보니까 아, 용서보다 이 세상에 더 소중한 게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끝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용서받으면 우리가 좋다는 말이 아니고, 용서받은 우리 자신보다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이 우리보다 더 소중하게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용서를 낚아채라는 뜻이 아니고 용서를 위한 증인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위한 증인되라고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누가 너를 고소하더냐” 그런 말씀 나오거든요. 이제 누구로부터 우리가 심문받지 말고 고소당하지 마시고 당당하시기 바랍니다.


307강-YouTube강의(당연함 창세기6:9)

20200407-이 근호 목사


제307강, 제목은 ‘당연함’. 이 당연함이라는 말을 딱 들어보게 되면 우리가 그 당연한 내용을 알고 싶을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앞길에 대해서 굉장히 불안을 갖고 있어요. 어떤 걸 해야 내 가는 길, 당연한 길을 가고 있는지, 그 당연한 내용에 대해서 미리 챙겼으면 좋겠다. 미리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렬합니다.

‘내가 당연히 가야될 길을 미리 알려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마땅히 해야 될 일을 이렇게 하게 하시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굉장히 생각을 많이 하고 기대를 많이 하게 되겠죠. 왜냐하면 사람들은 늘, 실수하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실수할까봐 미리 염려하는 지금의 마음상태가 더 큰 문제에요. 자칫하면 마귀에 시험든단 말이죠.

어느 길을 갈지. 내가 공부는 좀 하는데 법대를 갈지 의대를 갈지. 의사해서 돈 버는 건 좋지만 내 취향에는 안맞고, 법대를 가는 건 좋지만 요새 변호사들 경쟁이 심하다 하니까 그것도 걱정되고. 그래서 마땅히, 오늘 제목처럼 당연하게 ‘뭐가 내가 당연히 해야 될 것인가. 그걸 하나님께서 미리 알려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겠죠. 그러나 그걸 미리 알고 싶다는 그 생각을 이미 인간들이 하고 있다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

인간들이 뭐든지 당연하게 알고 미리 알고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데 생각해보세요. 그거 누굴 위해서 그렇게 알고 싶죠? 하나님이십니까? 아니면 본인의 잘됨과 본인의 행복과 본인이 이만큼 우수하다는 것을 자랑질하려고 그렇게 하십니까? 창세기에 보면 모든 만물은 하나님을 위해서 만들었지, 개인적인 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진리를 알려주고 앞길을 미리 알려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누가 하느냐? 점쟁이들이 하죠. 무당들이 하는 겁니다. 무당이 나쁘다 하지 마세요. 무당 찾는 사람이 더 나빠요. 그리고 구체적으로 무당을 찾지 않더라도 모든 인간은 은근히 누가 와서 내 하루, 이틀 후의 일을 미리 알려주면 좋겠다는 생각. 그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세상을 운영하는 모든 중심이 나였으면 좋겠다. 세상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 잘되는 중심으로 회전하고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거죠.

지구, 수성, 화성, 태양계의 모든 도는 행성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가니까 여러분 태양이 굉장히 부럽죠? 그러나 천문학자에 의하면 태양도 은하계를 중심으로 돈답니다. 본인이 중심이 아니에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 은하계가 좋겠다 싶죠. 은하계가 우주를 중심으로 또 돈다는 거예요. 중심이 어딘지도 모르게 돈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이 세상의 어느 것도 내 중심으로 하게 되면 무조건 정답 아닙니다. 그리고 내 중심으로 내 잘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무조건 진리 아니에요.

그러니까 성경을 내 중심으로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렇게 보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마귀의 시험들 가능성이 굉장히 큰 겁니다. ‘하나님이여, 내 인생 이렇게 어렵게 되었습니다. 도와주세요.’ 도와는 줘요. 그런데 그 말이 뭐냐? 내 중심으로, 나 잘되게, 내가 장래에 펴게, 내가 원하는 장래로 잘되게 해달라는 식으로는 하지 마세요. 이렇게 고치세요. ‘하나님 저를 예수님 중심 자리로 되돌려주세요. 예수님 중심을 바라보면서 예수님 위주로 살게 해주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그러면 주께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내 중심으로 살려면 네 중심 포기할래?” 이렇게 나오시겠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따르라는 주님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신앙인들, 그들은 어떻게 살아서 천국에 무사히 골인했는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창세기 5장 21절부터 보면 이렇습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이렇게 되어있죠. 여기 ‘동행’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자, 에녹은 어떻게 살아서 천국에 골인했다고요? 동행입니다. 혼자 산 게 아니라는 뜻이죠. 같이 살았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 있죠? 거지 나사로가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에요. 동행했는데 거지된 겁니다. 그리고 오순절 사도들이 사도바울과 베드로, 전부다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에요. 동행했는데 이 땅에서 죽도록 고생했습니다. 재벌된 거 아니에요, 몸 건강한 게 아닙니다. 강도 안만나고 바다 위에 위험도 없고 그런 거 없었어요. 매도 맞았어요, 사도 바울은.

동행이란 말은 내 위주로, 하나님이 나 잘되기 위해서 동행해 주시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뽑아 세운 자기의 비서 또는 요새 말로 하면 매니저. 위에서 다루는 매니저가 아니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심부름꾼 매니저, 그런 사람이 바로 동행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거기 백부장이 나오는데 백부장이 예수님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이게 바로 동행이에요. 동행의 특징은 뭐냐 하면 늘 주님한테 지시가 있다는 겁니다. 주님의 지시가 있다는 것은 내가 함부로 나에게 지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동행을 거부해버리면 남는 것은 뭐냐 하면 매일 삶을 내가 나한테 지시하는 식으로 삶을 살아가야 돼요. 그러면 내가 나한테 지시하게 되면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 초조하게 됩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요. 무엇이 당연한 것인지,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우리가 그걸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지금이 초조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죠. 그 말이 맞아요. 그리고 “죽으면 죽으리라” 그 말도 맞는데 혼자서 오기 부려서 그런 이야기 하면 안되고 하나님과 든든한 동행이 있기 때문에 주님이 오늘도 동행하시는 것처럼 내일도 동행하시기 때문에, 오늘 동행하신 것을 생각할 때 ‘내일 되면 알아서 또 일이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거예요.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마시고 지금은 그 나라 의를 구하면 돼요, 오늘은.

자, 그 다음에 우리가 생각할 것은 동행한다면 ‘동행하고 있다, 안하고 있다’를 어떻게 측정하느냐?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기 창세기 6장에 보면 또 한사람, 동행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창세기 6장 8절부터 보게 되면,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9절을 보면,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여기 동행이라는 말이 나오죠.

‘동행했다, 안했다’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측정하느냐 하면 그 뒤에 13절부터 쭉 나오는데 너무 길기 때문에 간단히 줄여서 말씀드리면 노아는 하나님 앞에 뭘 만들어요. 만드는 게 뭐냐 하면 잣나무로 방주를 만들라고 14절에 보면 그렇게 나옵니다. 그 14절에 나온 방주를 18절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여기 언약이라는 말이 나오죠.

자, 정리해봅시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증거가 뭐냐 하면, 세상 사람들은 도저히 못알아듣는 하나님의 약속이 마음속까지 들어왔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약속이. 자, 약속이 있는데 노아 약속, 모세 약속, 다윗 약속이 있는데 그 약속의 마지막 약속, 더는 약속이 없는 약속이 있어요. 그게 뭐냐? 십자가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만 자랑했어요. 십자가가 내 앞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속까지 들어와버렸어요.

그러면 약속이 들어와서 들어온 약속과 더불어서 살아가는 것이 그 당시의 노아라면 오늘날 성도는 뭐냐 하면 약속과 더불어 노아처럼 있기 때문에 동행이라 말하고 동행이 되면 당대의 의인이라는 소리를 들어요, 당대의 의인. 오늘날 시대에 의인은 누구냐? 바로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작용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성도죠. 하나님이 동행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뻐서 동행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하나님이 직접 집어넣어준 십자가의 약속을 바깥으로 드러내는 그것이 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는 겁니다. 동행하게 되면 끝까지 동행하죠, 성령께서. 끝까지 동행하시면 그 사람은 바로 당연함, 그 사람의 마땅함. 그것은 그 사람의 장래가 천국행으로 정해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