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이하림 300강-YouTube강의(도박판 세상) 20200204-이 근호 목사
제300강, 제목은 ‘도박하는 인생’. 도박하는 것이 나쁘다. 보통 다 그렇게 이야기하죠. “왜 나쁜데?” 라고 물으면 사람들이 얼른 답변을 못합니다. 도박이 왜 나쁘냐하면 인간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사물을 가운데 두고 그 사물, 물건, 그것을 누가 먼저 뺏느냐에 대한 싸움이거든요. 목적이 사물이 되는 게 문제에요, 도박이 나쁜 것이.
그렇게 되니까 꼭 고스톱치고 포커치는 도박만 나쁜 게 아니고 전혀 그런 도박 없이, 자기 사업을 구상한다든지 취직을 해서 밥먹고 살겠다 하는 그 모든 의도, 목적이, 최종 목표가 돈과 관련되어 있다면 그것이 도박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사람이 무엇을 얻어야 되느냐고 언급이 되어 있느냐 하면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된다고 되어 있어요. 잠언서 16장 32-33절에 보면,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라고 해서 인간의 자기 마음을 자기가 얻는 거예요, 자기 마음을. 이 말이 참 굉장히 난해한 말처럼 들리죠. 잠언 16장 19절을 보면,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제가 도박 이야기하면서 꼭 도박판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처음에 이야기했죠. 세상 전체가, 자본주의 사회 전체가 도박판입니다. 도박판인데 그들의 마음은 어디 가 있느냐 하면 사람의 마음을 얻고 그 사람 마음과 함께 낮추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고 탈취물을 얻고자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탈취물을 얻고자 하는 자를 잠언서 16장 19절에서는 ‘교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처음에 했던 잠언서 16장 32절에 보면 ‘자기 마음을 다스린다’라고 되어 있거든요.
잠언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살아야 될 이유, 목적이 내 마음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하는 여기에 초점이 모아져야 돼요. 자, 성도로 하여금 구원받고 난 뒤에 천국으로 데려가면 좋겠는데 안 데려가고 우리 인간 입장에서는 자꾸 지연시키고 밍기적거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지금 우리가 세상에서 탈취물을 얻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탈취물을 얻고자 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자기 마음을 감추는 용도로써 재물, 돈으로 나 이렇게 잘났다 하는 식으로 정작 자기 마음이 교만하다는 것을 교묘하게 숨기고자 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말씀하셨죠.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제가 지금 문제삼는 것은 뭐냐 하면 돈이 얼마나 많이 있느냐 적게 있느냐 그걸 묻는 게 아니고 ‘사는 이유가 어디 있느냐?’ 그걸 묻는 겁니다. “당신의 마음은 하나의 돈입니까, 겸손한 자, 낮아진 마음과 함께하는 그 마음을 원하고 있습니까?”라고 지금 묻는 겁니다.
이 세상에 있는 인간 중에서 가장 마음을 낮추셨던 분은 예수님입니다. 다른 분은 예수님의 마음과 비교가 안되겠죠. 빌립보서 2장 5절에 이런 말씀 있죠. 돈을 얻으라 했습니까, 이 마음을 품으라 했습니까? 예, 곧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했죠. 사는 목적 자체가 내 마음 말고 예수의 마음이 내 안에 들어와서, 뭐 우리는 원래 죄인이니까 징계를 하든지 때리든지 우리는 상관없어요. 맞아도 마땅한 존재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때려주고 나무래주고 이끄시고 하면서 세상 끝을, 사물과 물체를 확보하는 쪽으로 가던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앞에서 내 마음이 어떻게 비칠 것인가 그런 식으로 마음이 쓰여진다면 그 사람은 행운아입니다.
그래서 잠언서에서는 그런 사람을 뭐라고 하느냐면 생명을 얻었다고 해요. 이게 좀 무서운 말인데요. 마음이, 낮아진 마음에 관심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생명이 없다는 말과 동일한 말이 되는 겁니다. 잠언서 16장에 보면 또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데 9절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하고 해놓고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을 왕의 입술에 주셨다. 그래서 왕의 하는 일은 내 마음이 제대로인지를 판정하는 재판관이다.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예수님은 심판주고 재판관이죠.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온다는 말은 주님께서 영원히 함께할 그러한 생각이라면 항상 우리 마음은 주님 앞에 점검받아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점검받을 때 점검받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고 있고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 안에 문득문득 말씀이 자꾸 떠오르는 거예요, 말씀이.
만약 오랜만에 동창생 만났다면, 동창생 만나서 즐기면 되는데 성도한테는 어떤 마음이 드냐 하면 ‘좁은 길로 가라. 큰 길로 가는 것은, 여러 사람이 가는 것은 분명히 멸망으로 가는 길이다’ 같이 식사하러 가면서도 예상 밖에 그런 마음이 딱 드는 거예요. 그리고 동창생 만나서 누구는 잘 살고 누구는 몇 평짜리 아파트 산다고 할 때 어떤 마음이 드느냐 하면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그런 말씀이 떠오르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그리고 창세기 같은 경우에는 ‘베가본드, 방랑자. 우리 성도는 이 땅의 방랑자다’ 그런 생각.
이게 평소에 성경공부를 많이 해서가 아니라, 이때는 어떤 말씀 끄집어 낼까 지금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그 상황 속에서 내 마음을 주장하고 장악하는 것은 바로 죄인된 내 마음이 아니고 말씀이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깜짝깜짝 놀라면서 감사하면서 받아들이는 거예요. 내 자아를 말씀이 지금 관장하고 있는 겁니다. 이건 내 마음 속에 이미 뭐가 들어왔다? 말씀이 일방적으로 침투해가지고 내 마음의 공간을 말씀이 휘젓고 다닌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움직이는 말씀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본인이 성경구절을 얼마나 외우느냐하고 전혀 관계없어요. 그러니 그 말씀이 우리를 항상 훈계하고 견책한다. 이것은 잠언서 15장에 보면 나와 있어요. 훈계하고 견책한다. 그리고 잠언서 첫 장을 이야기하면 ‘아들아 내 말을 들으라’. 그래서 세상 사람하고 만나도 우리 마음속에는 어떤 소리가 들리느냐 하면 ‘아들아 내 말을 들으라’ 이 살아있는 잠언서의 말씀이, 내가 일부러 호출하지도 않았는데 그 말씀이 떠오르는 거예요.
특히 잠언서 16장에 보면, 저는 이 말씀을 좋아하는데, 25절에,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는 말씀이 나와요. 이 사망의 길이라는 말을 좀 깊이있게 설명을 해드린다면 인생은, 인간이라는 것들은 그냥 인간 지 잘났다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이 있는 게 아니고 이 세상의 끝이 끝나게 되면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달랑 그 두 가지의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의 시그널로 드러내기 위해서 이 세상은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이 섞여 산다는 이것이 성도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몰라요. 왜? 잘난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잘 사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도박판에서 돈 딴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요. 이 도박판에서 판돈 난 얼마 건지지도 못했어. 얼마나 자괴감이 들겠어요. 인생 이렇게 사니 내가 왜 사나 이런 생각이 들거라 이 말이죠. 그러나 우리는 내가 잘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사망의 길과 멸망의 길을 표시하기 위한 이정표로서, 하나의 sign으로서, 시그니쳐라고 하죠, 하나의 표식으로서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 말씀이 있는 것을 굉장히 영광스럽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301강-YouTube강의(세상의 범위) 20200204-이 근호 목사
제301강, 제목은 ‘피할 데 없는 세상’. 제목이 좀 길죠? 피할 데 없는 세상. 피할 데 없는 세상이라 할 때 인간들이 보는 세상의 범주가 있을 거예요. 바운더리. 저기까지가 세상이다, 우주다. 천문학자들이 망원경가지고 별을 보면서 보이는 저 광활한 우주가 대자연의 전부라고 생각하죠. 그것은 너무 철없는 생각이에요.
이 세상의 끝이 어디고 세상의 바운더리는 어디까지이냐 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안만들었기 때문에 우리가 결정짓지 못하고요. 세상을 만드신 우리 주님이 오셔서 세상 끝을 이야기해줘요. 뭘로 해주느냐 하면 예수님의 말씀으로 세상 끝을, 윤곽을 잡아 줍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에 보면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라고 되어 있어요. 성경 좀 보는 사람한테는 이게 뭐 난해구절이다, 어떻다, 수동태가 어떻고 능동태가 어떻니 이야기들을 하는데 이 이야기는 이렇게 단촐하게 이해하시면 돼요. 주님께서 오셔서 말씀을 해주셔야 주님 안에 세상 전부가, 주님 말씀 안에 다 담겨 있는 거예요.
인간이 생각하는 우주의 공간범위라 하는 것은 저 광활한 지평선 너머까지 미지의 무엇이 있을 거라 생각하죠. 그러면 가도가도 끝이 없죠. 거기 가게 되면 지평선이 또 계속 이어지니까.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오실 때는 그걸 주님 말씀의 바운더리, 세숫대야라 할까요? 세숫대야 안에 다 담겨 있습니다.
말씀이 이야기하는 그것이 세상의 끝이에요. 말씀의 끝이 세상의 끝이에요. 그러면 여기서 이제 머리 좋으신 분은 세상의 끝이 어떻게 된다고 아실 거예요. 세상의 시작과 끝은 바로 알파요 오메가, 예수님이 시작이고 예수님이 마지막입니다. 그 가운데 세상이 있어요.
그러면 그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세상 시작과 끝이 그게 전부라는 것을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처리했느냐 하면 마태복음 11장 13절 말씀처럼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라고 되어 있죠. 그러니까 그동안 하나님께서 세상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기 위해서 창세기부터 모세 율법부터 계속 주신 거예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자기 몸체가 작다는 것을 느끼죠. 그리고 세상은 자기 몸체보다 넓다는 것을 느끼잖아요. 그러면 주눅 들어요. 내가 나이가 서른인데 40되면 어떻게 될까, 50되면 내가 어떤 모습일까. 자꾸 세상의 폭을 나름대로 넓혀 본다고요. 지금 내가 있는 것보다 훨씬 세상은 클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나 구약성경에 주신 모세 율법과 선지자들의 율법에 보면 선지자들의 율법과 말씀 안에, 예언 안에는 세상의 끝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가까이 그 말씀 안에 다 담겨 있어요. 내가 여기 한국 살다가 미국 가면 어떻게 될까 하는데 성경에서는 미국이나 한국이나 둘다 말씀 안에 같이 들어있는 이웃마을이에요. 그걸 요새 지구촌이라 하지요, village. 지구촌. 옆집이다 옆집.
우리 몸체가 작고 세상은 넓으니까 자꾸 기죽는데 성경 말씀은 한국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고, 선지서의 말씀이나 모세의 율법이 미국에도 똑같이 적용되니까 미국이 크겠어요, 말씀이 크겠어요? 당연히 말씀의 범위 안에 미국이고 중국이고 다 들어있죠. 만약에 내가 북한간다. 말씀대로 살면 되지. 그게 북한에 산다 생각하지 말고 ‘말씀 세계 안에 산다’고 하면 이건 굉장히 간편하게 간단하게 이해되는 거예요.
나는 앞으로 나이 40되면 뭘 하지, 여기 살다가 싱가포르 가서 살면 어떻게 더 형편이 나아질까. 자꾸 범주를 자기 딴에 넓힌다고 하는데 가봤자 말씀 안의 세계에요. 하나님의 예언서 세계고 율법 안의 세계고 그리고 그 세계는 세례요한 때부터 침노를 받는 세계. 침노의 대상, 멸망의 대상, 곧 심판의 대상이란 말입니다. 세례요한이 외친 것은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고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던 천국 개념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파괴시키기 위해 온 거예요.
인간들이 알고 있는 천국은 잘못된 천국이라는 겁니다. 이미 인간들이 아는 천국은 세례요한의 말씀에 의해서,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공격을 받고 있는 겁니다. 무너지라고. 부서지라고. 그러면 인간들이 알고 있는 천국은 뭐냐 하면 기껏 아는 자기의 세계, 세상 그 너머에 천국이 있다는 거예요. 이게 잘못된 겁니다. 왜냐면 내가 아는 세상 자체가 규정을 잘못했어요. 그게 진짜 세상의 전부가 아니거든요.
저들이 생각하는 ‘세상 너머에 천국이 있다’까지 포함해야 그게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는 그 세상마저도 사실은 이 세상입니다. 인간들이 기껏 생각하는 아이디어들을 끄집어 내봤자 인간들이 아는 범위 내에서 철없는, 어설픈,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마 이게 전부일 거야라고 곡해하는 세상이에요. ‘이 세상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 있다. 합쳐서 온세상이다’ 라는 이 자체가 세상에 대한 곡해에요. 잘못된 생각이에요.
진짜 세상은 내가 상상하고 거기다가 말씀을 맞추지 마시고 죽고 난 뒤에는 예수님이 천당보내 주겠지 하지 마시고 이미 천국이 말씀 안에 담겨서 우리에게 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천국은 어디 있습니까? 바로 내가 생각하는 내 중심의 생각을 깨는 것. 그걸 지적하는 것. ‘그건 엉터리야’라고 나무래 줄 때 바로 그 나무램. 그 때 우리가 말씀에 의해서 지금 침략을 당하고 있는 겁니다. 말씀은 공격이고 나는 그 말씀에 의해서 공격받고 있는 거예요. 그거 손 놓으라고. 무너지라고. 그게 다가 아니라고. 니가 생각하는 상상이 진짜 다가 아니라는 거죠.
얼마든지 여분의 것이 있거든요. 그래서 인간은 말씀을 못지킵니다. 왜? 사람이 말씀을 지키려고 하면 ‘아마 말씀은 요런 뜻일거야’ 지가 일방적으로 범주를 정해버렸어요. ‘나 이거 지키면 말씀 지켰다고 난 그렇게 자부하겠어’ 이렇게 나오거든요.
예수님도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실제로 몸으로 간음하면 간음죄고 실제로 몸하고 동침하지 않으면 이건 간음죄에 해당 안되겠지’ 라고 생각해서 나는 간음죄 안짓겠다고 하는 자들을 주님께서는 예수님 말씀으로 범위를 어떻게 해버립니까? 범위를 확 넓혀버리지요. 마음 속으로 음란을 품은 자는 다 간음함이다. 어디 돌멩이 들고 누구를 칠려고. 니가 칠 쨉이 되냐 이 말이죠. 니가 니도 모르면서 니가 세상을 알아? 모르지? 모르는 게, 네가 뭐 남을 판정내리고 심판관으로 자처하느냐. 네가 심판하는 그것이 다 엉터리라고 말씀이 오히려 “남을 비판하는 너희가 비판받을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판단을 잘해서 멀쩡하게 살아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판단을 잘해서 세상에 잘 대처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주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뭐 보답이 안되겠지만, 보답하는 길은 뭐냐. 나 죄인입니다. 나 모릅니다. 나 무식합니다. 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되는 거예요.
‘내가 이 은혜를 누릴만한 그런 자격자가 됩니다’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그걸 완전히 포기하는 거예요. ‘말씀이 나를 공격해서 그 당했다는 그것으로 인하여 나는 구원받았습니다’가 되는 거예요. 내가 말씀을 지켜서, 내가 쟁취해서 구원받은 게 아니고 말씀이 나를 때려주니까 내가 생각하는 말씀의 범위와 넓이와 깊이와 그 폭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월등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주님의 이름은 기묘자에요. 아주 묘해요. 여분의 것이 있고 초과적이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초과합니다. 능가합니다. 바다와 같은 은혜. 우리가 어떻게 다 알고 갚겠습니까. 그저 그 은혜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죄인 맞습니다. 고백하면 되는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