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이하림 308강-YouTube강의(하나님의 낭비 마태복음13:4) 20200421-이 근호 목사
제308강, 제목은 ‘하나님의 낭비’.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이야기를 하셨죠. 그 씨 뿌리는 이야기를 하면서 11절에 보면 천국의 비밀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 천국의 비밀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를 지목해서 하는 이야기라 그렇게 생각하죠. 그런데 어느 누구도 이 씨 뿌리는 농부가 씨를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 그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그 낭비된 씨와 우리 자신을 일치시킨다는 사실을 몰라요.
낭비란 말은 뭐냐 하면 씨를 뿌렸으면 그 뿌린 씨가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씨 뿌린 이야기를 들어보게 되면 낭비도 보통 낭비가 아니죠. 씨는 많이 뿌려놨는데 4종류의 밭 중에서 3종류의 밭은 허비한 거잖아요. 씨를 허비했죠.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절대로 낭비가 없이 적재적소에 딱 했으면 반드시, 필히 어떤 열매가 딱딱 맺힐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이스라엘 역사를 봤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랑으로써 포도나무를 심겼죠, 이사야, 예레미아 같은 데 나오거든요.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들포도가 열렸다. 먹을 수 없는 포도가 열린 거예요. 또 감람나무 심어놓으니까 돌감람나무가 나왔다 이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농사하는 방법도 몰랐는가? 하나님은 제대로 농사할 줄도 모르는구나.’ 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왜 잘못되었는가 하면 인간들이 합리적으로 생각한 그 합리성에 하나님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하나님이어야 진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을 우리가 낭비하고 싶습니까? 그렇지 않죠. 우리는 손해 보기 싫어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게 문제인 줄 몰라요. 손해를 안보겠다는, 나는 어떤 희생을 했으면 반드시 그 결과를 얻고 나는 손해 보는 장사는 안하겠다는 그 인간본성. 그것을 하나님께서 내치는 방법은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인간들이 생각하고 있는 선입관에 주님이 의도적으로 포착되지 않으려고 하는 거예요.
인간의 합리성에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장단 맞춰 주지를 않습니다. 인간들은 왜 합리성을 주장하느냐 하면 합리적으로 인생을 살고 반듯하게 살면서 그 결과가 뭐냐 하면 ‘괜찮은 나’라는 것이 주어지는 겁니다. 내가 예상한 그러한 반듯한, 누가 봐도 의롭기 짝이 없는, 누가 봐도 참 ‘인생 잘 살았네, 성공 했네’ 라는 것을 미리 예상하고 싶어 해요. 그걸 건지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난 그렇게 딱 내가 괜찮은 인간이고 싶은데 누가 와서 “아이고, 너는 시간과 돈과 정력을 너무 낭비했다.”고 하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되게 기분 나쁘죠? ‘그럼 내가 뭐 대충 살았단 말이야? 내가 생각도 없이 인생을 그냥 헛되게 살았단 말이야?’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누가복음 15장에 유명한 이야기, 탕자 이야기 나오죠. 여러분한테 제가 물을 필요도 없습니다. 첫째 아들이 칭찬받았습니까, 둘째 아들이 칭찬받았습니까? 물을 필요도 없죠. 성경에서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허비했기 때문에. 내가 구상한 인생이 와장창 철저하게 부서지고 무너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은 어땠습니까? 아주 계획적입니다. 첫째 아들은 다 계획이 있어요, 나름대로의. 바로 그것은 아버지가 어떤 입장인 것을 첫째 아들은 전혀 모르고 내가 생각한 것이 곧 아버지의 생각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둘째 아들도 그런 줄 알았죠, 둘째 아들도. 아버지 생각과 내 생각이 일치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둘째 아들이 망가지기 전에 그랬어요.
그런데 망가지고 보니까 내가 아버지 유산 빼내가지고 독립하겠다고 할 때에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었지, 절대로 아버지 생각이 아니었다는 걸 알죠. 그러면 둘째 아들이 구원받는 것은 뭐냐? 그 차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겁니다. “내 생각과 아버지의 생각은 결코 같지 않았다.”라는 사실이 자기 안에 드디어 들어오게 된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십자가가 복음이 되는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구원,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 내가 생각하는 천국은 결코 천국이 아니었고 하나님이 아니었고 구원이 아니었음을, 그 차이에 비로소 눈을 뜨게 된 거예요.
사람들은 눈 뜨면 소경 아니라 하죠? 그러나 눈 뜨는 것이 소경이라는 사실. 그리고 눈 감긴 것, 나는 남들이 눈 감았다고 생각한 그것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는 육체적으로 눈을 떴느냐 감았느냐로 장애자, 비장애자냐를 결정하는 인간들의 생각과 하나님 생각은 달랐다. 그 달랐음, 차이 남, 괴리, 벌어짐, 간격. 그것을 영광스럽게 간직해야 됩니다, 영광스럽게.
사람들이 이 점에 대해서 왜 자꾸 억지로 안 들으려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만남보다도 매일같이 누구와 만나냐면 같은 인간들끼리 만나거든요. 인간들끼리 만나다 보니까 상대방을 비난하고 또는 상대방을 좋아하면서 어느새 나는 내 개성을 상대방, 타인들을 통해서 참고재료를 가지고 내 안을 채우고 있었던 거예요.
남을 욕하면서도 욕한 사람을 이미 본받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나라는 것이 없고 흉내 내는 식으로 평생을 살다 보니까 내 것이 없고 남의 것이 다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니 이건 뭐냐? 같은 인간들끼리 공통적인 것이 자아로서 구성요소가 된 겁니다. 그러니까 뭐가 부러우냐 하면 낭비 없이 알뜰살뜰하게 산 사람보고 굉장히 칭찬하고 싶고 부럽고 어떤 사람은 너무 부러워서 질투하고 싶고 미워하고 싶죠.
만약 어떤 나이 많은 할머니들이 이야기하면서 “우리 아들 장가가는데 며느리 하나 참 잘 봤다. 며느리가 낭비가 없어. 얼마나 알뜰살뜰한지” 낭비 없는 것이 자랑이 된 거예요. 그런데 어떤 할머니가 말하기를 “며느리 하나 들였는데 그 며느리 바람났다. 그 며느리 바람나가지고 다시 돌아오는데 값을 주고 산다고 내가 애먹었다.” 같은 친구들끼리 “아들이 혹시 호세아 아니십니까?” 그걸 누가 물어보겠어요.
그러니까 이 성경의 세계가 얼마나 낯선지...낯설죠. 예수님이 그 정도로 낯설어요. 우리가 조작하고 우리가 창안해 낸 그 예수는 내 잘남에서의 연장에서, 확장에서 이어진 가짜 예수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충분히 납득이 되는 이 하나님이 잘못이라고, 이게 엉터리인 것을 깨닫고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 차이. 왜 의인을 거부하는가? 왜 낭비 없는 인간을 지옥에 보내시는가? 바로 그 차이를 주께서 찾고 계신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309강-YouTube강의(공감과 눈물 로마서12:15) 20200421-이 근호 목사
제309강, 제목은 ‘공감과 눈물’. 공감한다. 얼른 보면 굉장히 쉽습니다만 이 공감한다는 것이 제대로 된 공감은, 인간은 불가능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자신들의 살아온 세상 경력이 다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이 살아오면서 각인된 그러한 감정이나 체험은 자기만의 고유의 것입니다. 고유라는 것은 이 세상에 둘이 없는 거예요. 오직 자기 거예요, 자기 것.
똑같은 체험을 한다. 예를 들어 야구장에서 한 커플이 둘이 같이 어떤 팀을 응원한다 합시다. 나는 두산, 나도 두산. 어떻게 보면 같은 팀을 응원하니까 공감이 쉽게 되는 줄 알죠? 그러나 그 두 남녀가 야구장에서 같이 야구를 보더라도 그 눈에 들어오고 몸으로 체득이 되는 모든 미세한 감각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오늘 야구장에 갔던 기억을 되살릴 때 절대로 기억이 동일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현재 똑같은 체험을 하더라도 그 체험을 편집하는 의도는 그 사람이 평생 동안 살아왔던 과거에 준해서 쨀 건 째고 붙일 건 붙이고 느낄 건 느끼고 뺄 건 빼고 그렇게 하게 되어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고유의 것, 자기만의 고유의 것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에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백 번 거짓말 한다 하지만 거짓말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거짓말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 마음과 내 마음이 같습니다.” 이것은 구라죠. 김구라입니다. 이구라, 김구라. 이건 구라입니다. 아부하는 거죠. 상대방에게 아부한다는 것은 언제든지 당신을 배신할 수 있는 여지를 두고 아부를 하게 되어 있어요. 아부한 만큼 대가를 얻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 이 말이죠. 이건 뭐 부부도 마찬가지고 모든 관계가 다 그래요, 모든 만남이.
제가 이렇게 말하면 “설마 성령을 받은, 같은 그리스도 몸의 지체된 사이라도 그렇습니까?” 라고 묻고 싶죠. 세상 사람들이야 뭐 악령이 있으니까 성령 안 받았으니까 자기밖에 모른다고 이해하는데, 천국을 같이 간다고 하고 다 같이 주님 앞에 선택받은 성도끼리도 과연 공감이 되지 않습니까? 그들도 따로 따로 고유의 것으로 남습니까? 이게 이제 궁금하죠.
성경에 마음과 뜻을 같이하여 함께 하라 할 때에, 로마서 12장 15절에 보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여기 ‘함께’라는 말이 나와요. 그 다음에 16절에 보면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같이’라는 말이 나오죠. 이렇게 할 때에 사람들의 문제는 이걸 기대한다는 거예요. 기대하는 게 잘못이에요.
사람이 뭔가 기대를 하고 은근히 그렇게 되기를 원하고 있다면 이미 그것은 공감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이것은 본래 고유의 것으로 작용합니다.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사람의 현재 모든 감정과 느낌이라 하는 것은 지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기만의 과거의 것에서 항상 편집한 것이고 조작한 거예요. 구성하고, 조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아내가 “여보, 집에 쌀 떨어졌어. 애도 있고 살 길 막막한데 쌀이 떨어졌다.”하고 남편한테 이야기했다 칩시다. “여보, 쌀 떨어졌어.”하니까 남편이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어? 이러면 돼? 쌀 사게 돈 주면 돼?” 이렇게 말하는 것과, “그동안 당신 마음고생 많이 했쪄? 마음고생 많이 했죠. 아이고, 내가 제대로 당신 그런 걱정 안하도록 그렇게 해야 되는데. 아이고, 이 못난 남편 만나가지고 호강하겠다고 기대했는데 호강은 못할망정 세상에 쌀 떨어지게 했구나. 미안해.”
똑같은 상황, “여기 돈 있어.” 똑같은 돈을 주고 쌀 사오라고 돈을 주는 상황이라도 어떻습니까? 돈이 있어 쌀 샀다는 사실은 동일하지만 그 과정이 완전히 다르죠? 남편은 자기 고유의 것을 순간적으로 포기하고 어느 자리에 가느냐면 그 사람이 아프다는, 아내가 마음 아팠을 것이라는 것에, 자기 고유의 것을 포기하고 아내의 것에 겹쳐버립니다.
“당신에게 그런 걱정을 안 끼쳐야 되는데. 당신이 나를 전적으로 의지했는데 이런 걱정하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 아내는 사과 받으려고 이렇게 했던 것도 아니고 쌀 떨어졌다는 소리만 했는데 남편이 그것까지 계산해서 할 때, 아내가 똑같은 돈을 받아도 기분이 괜찮겠죠? 그만큼 아내가 왜 기분이 좋았을까요?
그것은 순간적으로 남편이 자기 앞에서 자기 고유의 것을 부인하고 부정하는 모습을 보였거든요. 자기 고유의 자기 개성을. “나 잘못한 거 없어. 왜 그 때 돈 달라고 안했어?” 이런 식으로 자기 정당성을 주장한 게 아니고 ‘나는 옳았다, 나는 그르다’는 그 자리 자체에서 잠시 벗어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남편은 자기 자리가 순간적으로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 자리가 없는 거예요. 그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할 때 이것은 어떤 경우에 이런 생각이 드느냐 하면 인간으로서 자기 고유의 자리를 스스로 아니 성령에 의해서 그딴 거 신경 쓰지 말라는 거예요.
자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사람들이 자기 고유의 개성을 고수하는 것은 무슨 자리가 확보되어 있느냐 하면 과거부터 계속 누적된 나만의 자리, 나만의 것이 유지되어 있으니까 그런 거예요. 그런데 복음을 안다는 것은 십자가를 아는 거죠. 성령을 받게 되면, 십자가의 영을 받게 되면 내 고유의 자리를 하나님 앞에 인정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인정 안 받죠.
그럼 과거에 내가 야구장에 가든 뭘 하든 간에 그것은 누구의 지시에 의해서 간 거예요? 주님께서 야구장에 가게 하셨고 지금의 내 아내, 내 남편을 만나게 했다 이 말이죠. 내 고유의 것을 주장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지금, 내 고유의 것을.
성경 말씀에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라”할 때 이것은 윤리적, 도덕적으로 충분히 이 본문 가지고 자기의 선한 양심과 성품을 과시하는 의미에서 아내 다독거리고 아까 했던 말 있잖아요, 흉내 낼 수 있어요. “나 때문에 고생 많았지?” 말로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위로해놓고 좋아서 히히히, 혼자 웃고 있고 얼마든지 그런 이중 플레이를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성경에서는 그거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이 말씀대로 살았느냐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 “너 지금 어디를 쳐다보고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어디를 쳐다보고 있느냐. 내가 아내에게 이런 위로를 해주면 그 사람은 얼마나 믿음 좋다고 나를 이해할 것이냐 그런 꼼수를 쓰지 말라는 말이에요, 꼼수를. 내가 어떤 말을 하면 저 사람이 내가 아내를 사랑한다는 마음을 알아주겠지 그런 목적성을 두고서 말하고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통해서도 아무것도 아니지만 15절 말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이것은 내 능력으로 이렇게 할 수가 없어요. 그게 할 수 없는데 할 수 없다는 그 모습이 그야말로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결과를 낳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결과를 낳는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경유했습니까? 주님 십자가 앞에서 내가 아무것도 아닌 죄인이라는 사실을 경유해서, 그 내용을 품고 타인에게, 같은 성도에게 다가설 수 있도록 성령께서 말씀대로 나에게 이런 상황을 만들어줬기 때문에 그래요.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절대로 마음을 같이 안 해요. 그러나 성령이 오게 되면 내 개성, 내 자리가 포기되니까 너도 십자가 바라보고 나도 십자가 바라보니까 십자가로 용서받은 그것으로 주고받으니까 성도끼리는 “미안하다, 죄송합니다” 할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뭐가 미안한데? 뭐가 죄송한데요. 그저 주님께 감사하고 같이 만남 자체가 고맙소, 참 고맙소. 이유도 없이 존재한다는 자체가 고마울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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