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이하림 302강-YouTube강의(배제와 삭제 시편 35:1) 20200218-이 근호 목사
제302강, 제목은 ‘배제와 삭제’. 같은 말처럼 보이죠. 예, 같은 말 맞다고 봅니다. 그런데 같은 말 같은데 좀 자세히 보게 되면, 배제가 될 때는 ‘나’라는 것이 있고 밀어내는 겁니다. “저리 가” 할 때는 배제가 돼요. “저리 가”하면 나한테는 없지만 내가 밀어낸 저쪽 편에는 그 상대가 여전히 있겠죠. 그게 배제가 되는 겁니다, 밀어내는 것. 그런데 삭제라 하는 것은 delete, 아예 존재 자체를 없애 버립니다.
인간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배제를 하고 그 다음에 뭘 하느냐 하면 삭제를 해버렸죠. 삭제를 한다는 것을 멸절이라고 이야기하고. 멸절, 싹 다 없애버리는 거예요. 옛날에 히틀러가, 나치들이 유대인들을 배제했을까요, 삭제했을까요? 그냥 다른 나라에 밀어냈겠습니까, 아니면 아예 단단하게 잡아서 눈 보는데 앞에서 없애버렸을까요? 삭제해버렸죠. 없애버렸어요.
삭제를 한다는 말은 좀 어렵게 말해서 “네가 없었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겠다” 라는 겁니다. 어렵게 할게요, 여러분들 수준이 되니까. “너와 함께 있던 그 시절이 난 딱 싫어”, “나만 있고 네가 없던 그 시절에서 새로 출발할게” 그게 ‘삭제’가 되어버립니다.
배제는 뭐냐 하면, 내 영역, 바운더리가 있는데 “내 영역에 들어오지 마” 정도가 배제가 되는 겁니다, 밀어붙이는 것. “네가 어디서 어떻게 살든 난 몰라. 어째든 간에 내 영역에 들어오지 마.”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 배제라 하는 것은 결국 수동적인 경향이 많아요, 수동적인 경향이. 삭제라 하는 것은 적극적이고. 인간들은 예수님을 삭제했습니다, 없애버렸습니다. “이 땅에 아예 그런 존재가 있었다는 것 자체가 나는 그게 딱 싫어” 그것은 삭제가 되겠죠.
정리하게 되면 인간들이, 불신자들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배제를 하는 게 아니고 근원적으로 삭제되는 존재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삭제해버리면 절대자로 남는 것은 누구냐 하면 인간들만 남겠죠. 이게 바로 인간을 통해서 나타나는 악마의, 그 악한 영의 원래 노림수에요. 그 노림수는 아담에 속한 모든 인류가 다 물려받았습니다. 하늘의 태양이 둘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밀어내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없애버리고 싶어요. 아예 그래요, 아예 없애버리고 싶어요.
만약에 어느 교회에서 자기가 당회장 목사로 있는데, 그냥 목사하고 당회장 목사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정권을 쥐었다 이 말입니다, 당회장. 당회장 목사가 있는데 나를 반대하는 다른 일단의 일반 교인들이 아래층에 또 다른 목사랑 해가지고 11시에 윗층에서 예배드리는데 아래층에서도 예배드리면 그 아래층에서 예배드리는 그 새로 온 목사를 그냥 배제하겠습니까, 삭제하겠습니까? 배제가 아니고 아예 삭제해요. 삭제한다고요. “니는 그냥 ‘여기 하지 마세요’ 정도가 아니고 우리 노회에서 니 다시는 목사 못하게 목사측에서 아예 이름을 빼버리겠어.” 이게 삭제거든요.
가정 문제도 그렇고 사람이 독이 오르면 배제 정도가 아닙니다. 삭제입니다. 주님께서 그냥 ‘한마디 하다가 사람들에게 밉상받았다’가 아니라 철저하게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악마성, 삭제하라는 그 의도를 주님은 온몸으로 표현하고자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죄라는 것은 그냥 “아이고 나쁜 짓했구나, 앗, 실수” 정도로 해서는 죄를 몰라요. 죄를 알려면 나 빼놓고 삭제하겠다는 그 본심을 들추어주는 누군가와 만나야 돼요. 누군가를 만나야 그게 돼요.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단순히 ‘잘 해봅시다’가 아닙니다. 진짜 주님을 만나게 되면, 주님에 대해서 ‘호의적이 아니다’ 정도가 아니라 갑자기 내 속에 어떤 새로운 진짜 복음을 가지고 나타난 분을 삭제해버리고 나를 사랑하고 위해주는 엉터리 주님을 그 삭제된 자리에다가 대체하려는 의도가 우리한테는 생기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나는 나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렇다면 성경에서 이러한 인간들의 행세를 구약에서부터 이미 언급하고 있어요. 시편 35편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1절,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지금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나’라는 것은 신약에서 예수님이라고 보면 되죠.
예수님이 딱 오니까 갑자기 여기서 없던 다툼이 발생되는 거예요, 시편 35편에 의하면. 그러면 시편 35편의 그 말씀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라면, 우리 이 현실이 말씀의 현실이잖아요, 현실이 오게 되게 되면, 우리가 주님을 믿으면 다투는 분이 아니에요. 좋게 지내는 사입니다. 그 주님은 우리가 만들어냈기 때문에.
그런데 진짜 주님을 만나게 되면 시편 35편이 가동이 돼요, 작동이 된다고요. 그러면 나는 주님과 끊임없이 다투는 자가 돼요. 그러면 주님이 뭐라고 합니까? 주님이, 아버지께서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시편 35편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내 쪽에서 뭔가 주님을 잘 믿으려고, 뭘 하려고 하는 이것이 위선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위선에 불과한 것. ‘나의 허점과 나의 약점은 감추고 좋은 것만 끄집어내서 우리 좋게 지냅시다’ 하는, 나의 위선도 챙기면서 구원도 받는 이런 수작은 시편 35편에 근거해서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시편35편에 오게 되면 우리는 배제정도가 아니고 삭제 정도까지 끝까지 삭제되는 주님의 삭제되는 그 지점, 그게 십자가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시편 35편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는가? 십자가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율법적 기능을 하게 됩니다. 여기보면 4절에, “내 생명을 찾는 자들이 부끄러워 수치를 당하게 하시며 나를 상해하려 하는 자들이 물러가 낭패를 당하게 하소서”
언제 우리가 주님을 제대로 만났다 말할 수 있는가 하면 나의 작은 욕심이 도리어 나에게 부끄러움으로 되돌아올 때 ‘아...참 나 이거는 죄가 아닐거야. 최소한 이 정도는 있어야지’ 여겼던 아주 극히 겸손하다고 여겼던 그 욕구조차도 그게 주님을 섭섭하게 하는 태도라는 것을 내가 반대로 되받아서 그걸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남는 것은 뭐냐 하면 “주여, 지금 주어진 모든 것이 과분한 겁니다. 나한테 이런 것이 주어질 필요 없는데 너무 많은 혜택을 주시고 너무 큰 사랑을 주셨습니다.” 를 알 때 그것은 뭐냐. 내 모습은 철저하게 주님과 다투는 사람이었는데 이런 자를 하나님께서 큰 은혜로 용서해줬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돼요. 그렇게 되면 뭐 범사에 감사하겠죠. 그리고 쓸데없는 불평과 불만,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정도입니까? 라는 그런 소리는 나올 수가 없어요.
오늘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배제와 삭제는 그냥 주님을 “나중에 봅시다” 로 밀어내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주님이 없고 나만 영원하고 잘되기를 바라는 그 본색이 드러나는 그 자리는 오직 진짜 십자가 지신 주님과 만나야 진짜 자기 정체가 드러나는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한테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일에 오직 감사하다는 말 외에 나올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303강-YouTube강의(기다림과 막연함 누가복음3:4) 20200218-이 근호 목사
제303강, 제목은 ‘기다림과 막연함’. 이것도 아까 ‘배제와 삭제’처럼 유사한 단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애써 분리해야 될 이유가 있어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소망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오실 주님을 기다린다고 하죠. 그래서 소망한다는 것은 오실 주님을 기다린다, 기다림이죠. 그런데 기다림 그 안을 깨보면 막연함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인식을 잘 안할 경우가 있어요. 막연한 거예요.
“아이고, 뭐 되겠지. 오시겠지” 이건 막연함이거든요. 기다림이 아니고 막연함이에요. 막연하면 “아이고, 뭐 오시면 오고 말면 말고” 이건 막연함이고, 기다린다는 것은 온 몸과 마음과 정성을 거기에 초점이 맺혀 가지고 다른 세상의 여타의 것들은 내 기쁨이 되지 못하는 것이 기다림이죠.
망부석이라고 들어봤죠? 망부석. 전쟁나간 남편 또는 배 타고 나간 남편을 마냥 기다리다가 기다림이 너무 도가 지나쳐서 딱딱해져서 바다 쪽을 향하여 돌이 됐다는 전설. 어떤 부인이 너무 기다린 거예요. 그 부인에게 뭐 돈줄까, 뭐 어디 상줄까 이런 건 필요 없어요. 오직 한 사람에, 그 사실에 모든 게 꽂혀버린 겁니다. 꽂히는 거예요.
그러면 막연함과 기다림이 차이나죠? 이걸 달리 말씀드립니다. 막연하면 아무런 증거, 근거도 없이 무작정 기다리는 것은 막연함이 되고 기다린다는 것은 그 흔적이 이미 도달해 있는 거예요. 이건 막연함이 아니고 진짜로 오실 분이 오신다는 그 확실한 증거 안에 이미 자기가 놓여져 있는 거예요.
달리 말해서 본인 자체가 그 증거가 되는 겁니다. 내가 누구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달라졌다는 자체가 주께서 재림하신다는 증거물로써 나는 여기에 존재한다 이 말입니다. 나를 만약에 모독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모독하는 것이 되도록 그런 식으로 거기에 마음이 다 빼앗긴 거예요.
그러면 그 증거에 대해서 그런 사례에 있는 사람을 우리가 성경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지요. 누가복음 3장 4절에 보면 선지자가 나옵니다, 선지자.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선지자는 막연함일까요, 기다림일까요? 선지자가 막연함이 아니고 기다림인 이유가 선지자가 본인이 선지자 하고 싶어 되는 게 아니잖아요. 이것은 이미 자기가 선지자 되게 하신 그 자체가 기다림이 실효성이 있음을 그 시대에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자기가 선지자 된 겁니다.
21세기 이 시대에 주님께서 확실히 오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미리 성도된 거예요. 다른 사람이 그러죠. “에이, 예수님이 오시겠나. 말뿐이지. 안올 수도 있잖아.” 할 때 “나를 봐” 라고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돼요. “나를 봐. 나는 완전히 망부석이야. 나는 뭐 다른 세상 기쁨 같은 거 없어. 나는 주님 보고싶어. 그게 내 소망의 끝이야. 내 소망의 전부는 주님 만나는 그거야. 그것만 학수고대하고 있어.” 하는 그런 내 마음으로 달라졌다는 거예요. 옛날에는 그런 마음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그게 달라졌다는 거예요. 그건 뭐냐면 이사야의 말씀이 나에게 적용이 됐다 이 말씀입니다.
자, 그런데 그것이 이사야서의 말을 인용한 게 아니고 제가 누가복음 이야기했죠? 누가복음에서 이사야의 말을 방금 인용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이사야의 말이 적용된 사람이 있을거라 이 말입니다. 그 사람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오느냐.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이 이사야의 말을 누가 하느냐? 세례요한이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에 있어서는 이미 이사야가 자기 안에 완료가 된 거예요. 이사야는 기다림이지만 세례요한은 그 이사야의 기다림 그 자체가 되는 거예요. 이사야의 기다림의 그 자체가 되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그러면 세례요한은 세상을 볼 때 어떻게 보느냐 하면 모든 것을 평탄케 봐요. 모든 높낮이가 있던 골짜기가 세례요한에 와서는 완전 불도저로 밀어버린 거예요, 완전 고속도로가 된 거예요. 첩경, 주께 가는 길이 온갖 어떤 난관이라든지 온갖 어려운 자갈밭 있는 것이 예수님이 보이는 끝으로 바로 쫙 펴진 거예요.
그런데 펴진 것을 보려면 누구하고 마음상태가 동일해야 되냐면 세례요한과 동일하게 되어야 돼요. 세례요한은 뭐냐 하면 본인을 위해 살지 않고 내 뒤에 오실 분, 예수님이 계시다는 조건 하에 본인은 지금 이 땅에 출생한 거예요. 누가복음에서 계속 하겠지만, 세례요한의 출생이 세례요한을 위한 출생이 아니고 누구를 보여주기 위한 출생입니다. 예수그리스도와 연관된 출생을 한 거예요.
그러니 세례요한보고 “당신의 본래 자립적인, 독자적인 의미는 뭡니까?” 물으면 세례요한은 이야기안합니다. “나한테 독자적이라는 말을 묻지 마세요. 나는 누구와 연계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누가복음에서 세례요한은 성령 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누구하고 연계된 인생. 애를 키우든지 뭘 하든지 누구하고 연계된 인생이에요. 자꾸 나보고 너 똑똑하다, 잘났다, 너 못났다, 왜 그런 식으로밖에 인생 못사느냐 할 때 독자적으로 나를 평가할 생각하지 마라. 나는 그냥 내 자체가 김기다림, 최기다림, 박기다림이에요.
그 기다림이 막연한 게 아니고 예언한 것이 주의 말씀이 내 안에 장착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을 볼 때 예수님의 안목으로 보는 겁니다. 그 안목이 뭐냐? 신분, 재벌, 뭐 가난하다, 잘났다, 못났다, 남자, 여자, 남녀노소, 학력, 인격이 어떻고 전부다 그런 차이는 불도저가지고 밀어버립니다.
새로 시작하자는 거예요, 새로. “주의 말씀대로 새로 시작하자.” 다 밀어버려요. 누가 잘났나 못났나, 누가 승자냐 패자냐, 니 평생 고생했나 편하게 살았나 그거 따지지 말자. 독자적으로는 따지지 말자. 그냥 밀어붙이자. “니 안에 이사야 있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어? 니 이사야 있어?” “너도 이사야 있어? 너도 이사야 있어?” “나도 이사야 있는데.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 있는데.”
말씀에 의해서 가동되는 인생. 말씀에 의해서 기다림이 기다림으로, 그리움이 그리움으로 활성화되는 인생. 그게 바로 오늘날 성도라는 이름의 선지자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고 예수님을 전한 선지자로서 이 땅에 우리가 그런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세례요한 볼 때 “그래 훌륭했었어. 세상에, 목 베일 정도로 순교자였어. 하지만 옛날 이야기야. 지금은 그 분은 안계셔.” 이렇게 되면 곤란합니다. 세례요한이 한 것은 어떤 용기? 각오? 결심? 자기의 실력? 지혜? 아닙니다. 이사야에게 있던 말씀이 그냥 덮쳐버리고 그 이사야의 말씀을 주신 분은 오실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세례요한을 먼저 태어나게 하셔가지고 집어넣고 세례요한에게 있는 그 말씀과 예수님 자신을 일치시키죠.
그 원리, 그 구조가 우리한테도 그대로 작용되는 겁니다. 못났다, 자기밖에 모른다, 이기주의다, 예수는 생각도 못했다,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밖에 안섬긴다, 이단이다, 우상이다. 그런데 예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복음 집어넣고 십자가 집어넣어서 예수님과 연결시켰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세상을 볼 때 주눅 들지 마시고 협박, 공갈 받지 마세요. 누구로부터 협박이나 공갈 받지 마세요. 우리 그런 자리의 사람, 그런 신분 아닙니다. 협박, 공갈은 십자가만큼 센 협박, 공갈이 없어요. 제대로 받았어요. 죽어 마땅하고 주 앞에 버림받아도 할 말 없습니다. 당연한 겁니다. 버림받아도 당연하다. 십자가까지 낮아질 대로 낮아진 사람이 뭘 더 이 세상에 무슨 호강하겠다고 더 기대하겠습니까?
기능은 말씀을 실어 나르는 수레, 리어카, 또는 1톤 화물차,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는 뒤에, 짐칸에 있는 화물을 삽으로 퍼내면 되죠. 내 인생을 이 말씀이 주도했다는 그 사실을 퍼내면 되는 거예요, 퍼내면. 그 앞에서 뭐 곁들여서 “나는 실력있다. 나는 믿음있다”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그냥 말씀만 드러내는 거예요. 그게 바로 성령을 위한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의 위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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