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여호수아 2:15-20 / 라합의 구출 전략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여호수아

여호수아 2:15-20 / 라합의 구출 전략

정인순 2018. 7. 15. 22:41

 음성 동영상 Youtube

 

 라합의 구출 전략

이근호
2018년 7월 15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2:15-20

(2:15) 라합이 그들을 창에서 줄로 달아내리우니 그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하였음이라

(2:16) 라합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렵건대 따르는 사람들이 너희를 만날까 하노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 사흘을 숨었다가 따르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 길을 갈지니라

(2:17) 두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로 서약케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2:18)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내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2:19)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서 거리로 가면 그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누가 손을 대면 그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2:20)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로 서약케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기생 라합은 이방여인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족속의 일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껏 하나님의 일관된 원칙에 의하면서 기생 라합도 당연히 자기 민족과 더불어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에 의해서 예외없이 멸망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기생 라합의 구원이라는 ‘예외’가 발생된 것이 더 이상해보입니다.

이 예외 조항의 발생으로 인해 인간들이 기존 갖고 있는 구원관의 수정을 촉구하는 바가 됩니다. 즉 인간은 자신들의 판단에 의해서 괜찮아 보이고 좋아 보이면 다 수용하고 간직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수정’이 이루어질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아라 해서 내가 그 구원을 받았는데 내쪽으로 수정할 게 없다”는 식이 됩니다.

사람들이 이처럼 ‘자기 것 챙기기’ 식으로 구원을 어쨌든 ‘나의 구원’으로 전환하려고 한다면 이는 참된 하나님의 구원부터 점점 멀어지는 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구원욕을 도리어 공박하기 때문입니다. 즉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기생 라합 쪽에 세우지 말고 멸망당한 여리고성 토착민 쪽에 세워봅시다.

그렇다면 그 토착민들에 있어 ‘구원’은 곧 ‘나 행복’이라는 의미로 종결됩니다. 내가 세상 살면서 행복하면 더 바랄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원리가 우리 인간들에게는 너나 할 것이 몸에 흠뻑 젖어있습니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 도리어 ‘행복에서 오는 만족’입니다.

건강이나 여유로운 재산과 평화로운 가정 분위기. 적절한 취미나 노동 같은 것이 이런 행복을 낳는 요소가 됩니다. 이는 곧 “살던 대로 살게”를 반영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판에 외부에 적이 나타났다면 이는 곧 나의 행복추구를 훼방하는 짓이 될 것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힘을 합쳐서 성 밖에 나타난 적을 물리치는데 주력하게 됩니다.

이게 자연스러운 몸의 현상입니다. 자신이 살던 행복이 외부의 적이 깨는 것을 반기는 자는 정신병자이고 정상인에게는 너무나도 부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바로 이 자연스러움을 세상에서는 ‘正常(정상)’이라고 하고 성경에서는 이것은 비신앙, 혹은 비구원이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 파괴를 반긴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닙니다.

이 특이함이 오늘 본문에서는 여리성 밖에 포진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위상으로 야기된 효과로 보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여리고성 내에 쳐들어오기 전에 벌써 쳐들어왔을 때나 생겨나는 효과가 특이하게는 기생 라합 가정에 일어났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원리와 원칙을 알기 위해 기생 라합집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주목하는 입장은 신자의 입장이 아니라 불신자의 입장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자가 아닌 자들은 무슨 의미든지 모두 ‘자기 좋은 쪽’으로 ‘자기 편한 쪽’으로 ‘자기 정당한 쪽’으로 일방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즉 ‘의미’와 ‘의미 작용’이 다른 겁니다. ‘의미 작용’이란 ‘나의 이익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치 않는 일에 내가 일방적으로 말려 들어간 형식으로 다루어지고 있음을 감지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에 의해 배역을 맡은 출연진에 해당됩니다. 각 배역들은 자기를 위한, 혹은 자기 행복을 위한, 혹은 자기 구원을 위해 의미를 버리고 마구 하나님에 의해서 쓰여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타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진즉에 세상에 알리고 싶은 구원의 원칙이 나타납니다.
 
그 구원의 원칙은 바로 ‘없음’에서 ‘있음’, 그리고 그 자체가 ‘심판의 기준’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통해서 발생되는 시그널입니다. 구원의 비밀스러운 신호입니다. 누가 독점해 있거나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필연적으로 움직이는 그 움직임이 조합되어 생겨나는 원칙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산 속으로 3일 동안 숨겨줍니다. 이는 곧 여리고성 사람에게는 ‘이스라엘 정탐꾼’이 더 이상 ‘없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즉 구원이나 천국은 이 세상에 없는 겁니다. 혹시 교회에서 천국을 말하고 구원을 말하는 것은 참으로 있어서가 아니라 재미로 지어내보는 개념들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모든 몸짓이나 생각은 자기 존재 의미로부터 출발해서 자기 존재의 잘남과 옳음을 증명하는 식으로 되돌아옵니다. 따라서 아무리 천국과 구원과 하나님을 언급해도 그 모든 것은, 그렇게 말하는 본인들의 주장의 옳음을 확인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세상을 향해 날려보는 겁니다.

의미란 이처럼 자기 존재와 관련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나는 망해야 돼”라는 식으로 천국과 구원을 언급하든가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남들이 그 사람을 욕하고 광신도라고 평해도 도리어 본인이 본인을 향한 평가가 더 냉혹하게 작용하는 법입니다. 즉 남들이 나를 욕하기 전에 이렇게 변해버린 자기 자신이 더 당황스러운 겁니다.

기생 라합과 정탐꾼 간의 맺은 맹세는 바로 ‘붉은 줄’ 하나로 요약됩니다. 이 붉은 줄을 타고 정탐꾼이 성밖으로 빠져나간 일은 그 일로 마감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사건이 추후에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덮칠 때 유일한 구원 방식으로 조성된 겁니다. 이게 바로 없는데서 하나님의 조치에 있어 발생된 특이한 구원의 방식이고 원칙입니다.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존재 의미를 버리고 정탐꾼이 다녀간 그 경로만을 생각해야지만 여리고성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처럼, 오늘날도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세워놓아야 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즉 ‘대한민국만세’을 용납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독립만세’만 용인하는 겁니다. 한번으로 확정된 원칙을 영원토록 적용된 구원과 심판의 기준으로 삼는 겁니다. 이 세상을 다녀가신 예수님의 경로만이 의미가 있고 나머지는 의미가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의미를 십자가 앞에서 챙기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송민선 

 

193강-여호수아 2장 15–21절(라합 구출 전략)

 

201807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2장 15–21절입니다. 구약성경 322페이지입니다.

“라합이 그들을 창문에서 줄로 달아내리니 그의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주하였음이라, 라합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렵건대 뒤쫓는 사람들이 너희와 마주칠까 하노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서 사흘 동안 숨어 있다가 뒤쫓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의 길을 갈지니라, 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서 모으라,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가서 거리로 가면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손을 대면 그의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하니, 라합이 가로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시그널이라는 것이 있죠. 신호라는 거.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이 어떤 중심점이 있는데 그 중심점과 관련돼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 땅에 만드시고, 이스라엘과 접촉이 되고, 이스라엘과 관련이 있는 그 현장에서 장차 오실 하나님의 구원방식이 문득문득 여기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드러나면서 두 가지를 구분해야 되는데 인간들이 평소에 자기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보는 관점을 일단 우리가 알아야 돼요. 무슨 말인가 하면 본인이 믿음 있다고 자꾸 흉내 내지 말고 자기 자신을 무엇으로 보느냐 하면 ‘나는 전혀 믿음이 없고 믿음 없어도 괜찮아’ 라는 마음으로 출발을 해야 돼요.

그런 마음을 누가 보여주느냐 하면 여기 있는 여리고성에 있는 일반 주민들의 마음을 그대로 먼저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됩니다. 포항에 지금 뭐가 있느냐 하면 포항 해수욕장에서 불꽃축제를 할 계획이 있다는 거예요. 그 뉴스를 보면서 우리 가정에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저 돈 있으면 지진 일어났을 때 아직 집에 못 들어 간 사람들 집이나 좀 사주거나 빌려주든지 하지, 그 돈 수억을 가지고 공중에 다 날려 버리고, 집 없는 사람들은 아직도 벌벌 떨고 있고 그러면 되겠느냐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을 때, 그 생각을 분석해 보는 겁니다. 분석해 보면 어떤 것들이 데이터에 쫙 나와 있느냐 하면 일단 배 따뜻하고 잠 잘자는 것이 최고이고, 돈 있는 인간들이 노닥거리면서 불꽃축제 해서 사람들 관광용으로 판다. 그러니까 이것은 현재 기본도 안 되어 있는 배 따뜻하고 배부른 상태가 안 되는 이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제쳐놓고 흥청망청 노는데 빠지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에 위배된다는 거죠. 그래서 그 예산보다도 지진 일어난 지역 사람들에게 집을 먼저 사주는 것이 옳다는 겁니다. 이게 우리의 상식이거든요.

여기에 전혀 뭐가 포함되지 않느냐 하면 믿음이라는 게 포함이 안돼요. 제가 말한 바로 믿음 없이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지금 우리네 세상입니다. 믿음 없이도 잘 살기 때문에 구태여 믿으려고 할 필요도 없고 오히려 믿음이 방해가 된다면 나는 안 믿으련다는 쪽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해요.

믿음? 그게 뭔데? 예수? 그거 내가 왜 믿어야 되는데? 라는 쪽으로 얼마든지 자기 마음 정돈을 할 수 있는 것이 대세입니다. 세상만이 대세가 아니고 우리 자신도 대세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보아야 시그널, 구원의 시그널이 얼마나 찾기 힘든 지를 우리가 느낄 수가 있어요.

여리고성 사람들이 조선 사람이라 보고 바깥에 쳐들어오는 이스라엘이 일본사람이라 본다면 지금 일본 사람들이 조선인들을 치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어디 소속이냐. 우리는 바로 조선 사람이죠. 일제 36년 되기 전에 조선 사람이고 대원군 밑에 있죠. 그러면 정신을 합하고 몸을 합하고 마음도 합해서 저 일제에 대해서 무조건 우리는 배격해야 됩니다.

그런데 일본이 와서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우리를 배격하면 너희는 선진국이 될 수 없는데?” 라고 하게 되면 갑자기 조선 땅에 배신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신식 문물들을 받아들여서 언제까지 우리가 유교 주장할 것이 아니고 이제는 우리도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과학이라든지 뭐든지 발달시키자는 현상이 일어나면서 외부의 사건이 자극이 되어서 내부에 균열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시그널이에요. 시그널. 어떤 신호.

어떤 신호냐 하면 늘 그곳에 한 통속처럼 있던 것이 분리될 수 없는데 분리가 일어나는 시그널. 이것은 외부의 요인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거죠. 외부에서 뭐 하나가 주어졌는데 내부에 분열이 야기되었다면 지금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갖고 있는 위상, 이스라엘이 해야 될 의무와 역할을 지금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유대 민족이 하나같이 로마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라고 여겼던 그 시대에 하늘에서 오신 성령을 통한 예수님으로 인하여 내부적 분열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뽑았던 12제, 물론 하나는 마귀지만, 12제자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어떻게 해석을 했든 일단 따르고 보자는 그 세력. 사도행전 강의 처음부터 다 하게 되는데...

그렇게 예수님 따라봤자 마지막에 남은 것은 120명이었어요. 사도행전 1장에. 그 많던 사람들 다 가버리고 120명 남았다고요. 그러니 믿음이 뭐가 있어요? 언제든지 뒤집어 질수 있죠. 마가의 다락방에 120명 모였습니다. 제가 가 봤잖아요. 120명 들어가기엔 좀 비좁은데 빡빡하게 들어가면 들어갈 만 해요. 봐야 돼요. 현장 검증해야 돼요.

변심이라는 것은 원래 없는 거라고 봐야 돼요. 나라가 하나가 되어야지 그렇게 쪼개져가지고 싸워야 되겠습니까? 이미 살아왔던 대로 살자는 겁니다. 그게 우리 몸에 편해요. 이스라엘이고,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그냥 살던 대로, 상식적으로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고 그렇게 살던 대로 사는 게 우리 몸에 딱 맞아요.

내 내부적으로 어떤 균열과 분열이 일어난다는 것은 내가 용납이 안돼요. 불안해서. 이러다가 망하는 게 아닌가? 혹시 내가 이단에 빠졌나? 내가 불안하다니까요. 그런데 그게 예수를 믿는 다는 하나의 시그널인데요? 우리는 이렇게 계산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죄 용서한다니까 죄 용서하는 예수님을 좋은 분으로 인정해서 그 죄 용서를 받아들이겠다는 겁니다. 뭐 대부분의 교회가 그렇죠.

그러나 성경에 보면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죄 용서를 받았으면 내가 죄 용서를 쥐는 것이 아니고 죄 용서가 나를 쥐고 마음대로 사용해버려요. 그러면 죄 용서 속에 들어있는 예수그리스도의 그 자유성을 위해서 우리는 들썩들썩 하면서 그 안정되게 살아갔던, 평온하게 살아갔던 나의 그 모든 모습이 시그널로 변해요.

예수님이 나와 함께 있다는 시그널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너희들 눈에는 예수님이 안 보이고 나 혼자 있는 것만 보이지만 나는 알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을. 이게 미친 소리 아닙니까? 이게 미친 소리거든요. 우리는 교회에 가서 시키는 대로 예배 잘 참석하고 헌금이나 잘 하라는 이런 종교 놀이로 끝냈으면 좋겠어요. 종교놀이로. 장로 되고 권사 되고 이 놀이 있잖아요. 친목단체가 하는 이런 놀이로 끝냈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성령이 와버리게 되면 들썩거린다니까요. 장로고 목사고 그런 것도 개무시 해버리고. 그리스도께서 가만히 두질 않습니다. 시그널이라고 하는 것은 기존의 제도와 법을 뚫고 나오기 때문에 그러면 이건 남들이 나를 욕하기 전에 내가 남을 욕할 수밖에 없어요. “대충해라. 대충.”

주위에 안 믿는 식구가 나에게 그렇게 대충 믿으라고 질책하기 이전에 그 정도 상식을 우리가 모르겠어요? 우리도 나를 대충 살고 싶어요. 그런데 가만히 놔두질 않는데 어떻게 합니까? 오히려 우리가 더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냉혹하게 쳐다봐야 돼요. 혹시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척이나 하고 있지 않은지. 영어로 ‘As if’라고 하죠. 마치 성도인 것처럼 행세 하고 있지 않는지를.

점검에 또 점검을 해야 돼요. 정말 들썩거리는 것이 주의 뜻인지 아니면 내가 이 짓하지 않으면 내일이나 모레나 혹시 벌 받을까 싶어서 벌 받는 거 두려워서 나한테 손해나는 것을 겁내가지고 뭔가 무서움 때문에 내가 억지를 부리고 있지는 않은지를 스스로 냉혹하게 냉정하게 점검해야 됩니다.

본인이 본인에 대해서 더 냉정하면 냉정할수록 타인의 시선에 대해서 자유롭게 돼요. 거기에 구애받지 않게 돼요. 내가 내 자신을 냉정하고 냉혹하게 평가하지 않기 때문에 남이 뭐라고 하면 벌벌 떠는 거예요. 내가 나에게 가혹하게 해 줘야 어지간한 평가에 떨지 않습니다. 지금 오늘 본문에 기생 라합은 좋아서 어쩔 줄 모릅니다. 조국을 버리고, 배신하고, 이 지긋지긋한 여리고 성에서 탈출을 한다는 것은 본인의 인생에서 이거는 있을 수 없는 예상 밖의 일이에요.

사람이 땅을 떠나서 하늘로 간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짓이죠. 그 말도 안 되는 짓이 지금 시그널처럼 여리고 성이라는 제한된 도성에서 일어난 거예요. 거기에서 출연하는 출연진은 뭐냐 하면 외부에서 올라오는 이스라엘인데, 땅도 집도 없는 이스라엘이 등장합니다. 여기에 여리고성 내부에 출연진은 뭐냐 기생 라합, 그리고 기생 라합의 분리를 용납하지 않는 그 당시 다른 주민들, 여리고성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병사들과 다른 주민들 이 세 종류의 출연진들을 통해서 뭐가 뽑아져 나오느냐 하면 구원이라 하는 것은 구원이 어떻게 성사되는가 하는 그 법칙을 뽑아내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목사님 그럼 누가 구원 받았고 누가 방해하고 누가 도와줬습니까?” 라고 궁금해 하죠. 그런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에요. 인간의 모든 질문은 내가 여기 이 육의 덩어리가 존재한다는 전제로 모든 질문이 자기와 관련해서 질문이 나오거든요. 그게 인간들이 갖고 있는 의미인데 주님께서는 인간이 알고 있는 그런 의미를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에요.

‘의미’가 아니고 ‘의미작용’입니다. 의미작용. 의미작용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자기에게서 나오는 그 의미를 일체 용납하지 않습니다. 의미와 의미작용이라는 것의 차이가 상당히 어렵죠? 어려우면 쉽게 예를 들겠습니다. 글쎄, 이 예도 어려울지 모르겠어요. 흔히 말하죠. 어떤 다른 사람들이 맘에 안 들면 “생각이 있어? 없어?” 라고 짜증내면서 이야기 하죠. “생각이 있어? 없어?” 라고 짜증내는 것과 “너 돌대가리야!” 라고 짜증내는 것은 같은 말로 들리지만 사실은 듣는 사람으로서는 완전히 달라요.

“생각이 있어? 없어?”라는 말은 네가 평소에 점잖은데 이번 일은 내가 납득이 안 되고, 좀 정신 차리라는 식으로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생각을 집중해서 다시 생각해 보라는 뜻에서 어떤 희망과 가능성을 제공할 때 “생각이 있어? 없어?” 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너 돌대가리야!” 하는 것은 너는 어떤 옳은 생각을 해도 근본적으로 영 내 마음에 안 맞는 다는 그런 뜻이에요. “생각이 있어? 없어?” 라는 것은 일종의 동사와 동사가 함께 있는 부사구 같은 역할인데, “너 돌대가리야!” 라는 것은 완전히 존재를 확정 짓는 명사입니다. “너는 백날 해봐야 소용없어.” 이거예요.

그러면 하는 사람은 똑같은 의미로 말을 하더라도 듣는 사람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너의 눈 밖에 났다는 말이지?”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사람이 어떤 말을 할 때 화를 내는 이유가 순간적으로 당신 똑바로 하라는, 전에는 잘 했는데 이번에는 못한다는 이런 경우에는 그렇게 화나지 않아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런데 너는 뭘 해도 안 된다는 식으로 그 의미를 존재 중심까지 파고 들어와서 의미를 새겨버리면 그 사람은 화내게 되어 있어요.

구약에 와서 등장인물들에 대해 흔히들 저에게 묻죠. “사울이 악신 들렸는데 지옥 갔습니까? 천국 갔습니까?” 라고 맨날 그 존재에 대해서 물어요. 그건 가롯 유다에게 물어 봐야지 구약 사람에게 묻는 게 아니에요. 기능적으로 봐야지 그건 묻는 게 아니에요. 그 일, 역할을 할 뿐이에요.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못가서 지옥 갔습니까?” 이런 거 묻는 거랑 똑같아요.

구약의 등장인물은 그냥 등장인물이에요. 출연진입니다. 연극배우고 탤런트 배우입니다. 그 사람이 살아가는 것과 역할 맡은 것이 달라요. 따라서 누가 구원 받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출연진이 모여서 구원이 무엇이냐, 구원은 어떤 원칙을 뿜어내면서 타나나느냐를 보여주는 거예요. 뿜뿜이. 그 어떤 원칙들을 뿜어내면서 보여주느냐는 겁니다.

여리고성 토착민의 입장에서는 구원은 없고, 용납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그들이 말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 민족이 망하는 것과 똑같기 때문에 이거는 자신의 존재 입장에서는 이건 용납이 안 되죠. “우리 선진 조국을 위해서 조선 민족의 이름을 다 일본식으로 바꿔서 나까무라, 요시무라로 바꿉시다.” 이건 용납이 안 되죠.

그런데 예를 들어 어떤 시골 촌사람이 대구에 와서 취직을 하는데 취직할 때가 없어가지고 일본사람이 경영하는 큰 문방구 점원으로 취직할 때, “당신의 취직은 시켜줄게. 머리 좋고 싹싹하니까. 그 대신 이름을 조선 이름 쓰지 말고 일본식으로 바꿔라.” 라고 하면 얼마든지 바꾸죠. 얼마든지.

그런 사람 있어요. 우리 할아버지. 자수성가 했습니다. 이름 바꿔서. 물론 나라 팔아먹은 것까지는 아니지만 살기위해서 이름 바꾸는 거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보고 돌대가리라는 소리 하지 않는 한 그 정도 요구는 감수할 수 있는 겁니다. 이처럼 인간이 하는 의미와 의미작용이 달라요.

그 의미작용을 하면서 구약은 뭐냐 여리고성의 토착민 입장에서는 구원은 없습니다. 아니, 없어야 돼요. 없어야 돼. 구원이 있다는 말은 여리고성에서 구원이라는 말을 언급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나는 그 바깥에서 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의해서 지근지근 밟혀서 지옥 불에 들어가야 되는 그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끼리 행복하게 있음을 인정하는 거거든요.

우리끼리 행복하고 편안하고 서로 의롭고 바르고 착하게 살아가는 이 모습이 외부에서 오는 이스라엘 보기에는 지근지근 밟혀서 마귀와 같이 지옥 불에 가게 될 그 행세를 그대로 지속하고 있는 모습인거예요. 그래서 이 여리고성의 취지를 가지고 아주 행복하게 나름 착한 사람에게 복음을 이야기 해 보세요. 그 사람들은 역겨운 겁니다.

“혹시 생각이 있거든 교회 다녀보세요.” 이건 용납하는데 “이 돌대가리야!” 와 똑같은 거예요. 너는 지옥 가야 돼. 그거와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같은 식구 중에 안 믿는 사람에게 복음 전해보세요. 복음이 먹히질 않습니다. 너 알고 나 알고 어릴 때 다 아는데, 선지자가 자기 고향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이유가 없어요.

우리는 다 같이 안다는 입장에 있어요. 기생 라합이나 거기 토착민이나 똑같이 알아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구원이 일어난다는 것은 없습니다. 구원은 없습니다. 이렇게 시작해야 돼요. 여리고성에 구원은 없습니다. 이거는 여리고성에 사는 사람들이 용납을 안 해요. 왜? 지금 산다는 것이 옳다고 인정한 상태에서 다른 객소리는 파고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구원은 없다면 기생 라합은 뭐냐 이 말이죠. 여기서 기생 라합은 뭘 아느냐 하면 구원은 없는데 외부에서 쳐들어오기 전에 가까이 온 것만으로 이쪽에 구원이 생겼다고 보는 겁니다. 기생 라합이. 참으로 신기하죠. 저쪽에 있고 이쪽에는 없는데 아직 성 밖에 이스라엘이 있는데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 하나님이 이쪽에 하나님의 그 작업이 발생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거는 말이 안 되거나 미쳤거나 둘 중에 하나예요. 같은 말이지만. 이건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예를 들면 내가 여리고성에 토착민이다. 광장에서 복음 전하다고 연설을 하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러분들은 해골입니다. 여러분이 거울에서 보는 자기의 모습은 해골이라는 마네킹에다가 고운 옷을 입힌 겁니다.” 이렇게 하게 되면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라고 이렇게 나올 사람 아무도 없어요. 돌로 쳐 죽여 버리죠.

“내가 왜 해골이야? 뭐 뼈 조립체야?” 옷은 입었는데, 홈쇼핑에서 이쁜 옷 사서 입었는데 이게 해골에 옷 입힌 거예요. 아직까지 죽음이 안 찾아 왔어요. 지금 살아 있어요. 멀쩡하게. 죽는 것은 나중 문제예요. 그 전에 치매라는 현상이 있어야 하지만 그건 어쨌든 나중 문제예요.

그런데 저쪽에 오는 이스라엘은 그 나중 문제를 지금의 문제라고 하지 아니하면 너희들은 천국 못 간다는 뜻이에요. 무슨 말이야 하면 살아 있을 때 죄용서 못 받으면 죽어서도 죄용서 못 받는다는 거예요. 그리고 살아있을 때 죄용서 받는다는 그 현장이 어떤 모습이냐 하면 살아 있어도 해골에 옷 입은 채로 다닌다고 자기를 스스로 보는 거예요.

죽음이 안 왔는데 죽음이 왔다고 쳤을 때 내 모습이 어떤가를 미리 당겨서 보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소통하기가 힘들죠. 왜? 그 구원은 상식적인 선에서 이 땅에는 없는 거예요. 그 없음을 여기 본문 16절에서 보여줍니다. “라합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렵건대 뒤쫓는 사람들이 너희와 마주칠까 하노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서 사흘 동안 숨어 있다가 뒤쫓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의 길을 갈지니라”

사흘을 숨겼어요. 사흘 동안 숨은 거예요. 숨었으면 있더라도 없는 거예요. 기생 라합에게는 있지만 일반 토착민한테는 이스라엘 정탐꾼은 없는 겁니다. 구원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없어요. 천국도 없고 그냥 사는 대로 조선민족으로 사시면 되는 거예요. 그게 마음 편하고 그게 우리 정서에 맞아요. 구원은 없는 겁니다.

그러나 누구는 아느냐? 기생 라합은 알아요. 너희들 눈에 안 보이지만 내가 산으로 숨겼거든. 며칠 동안? 3일 동안.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죽음으로써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이 공연한 헛짓이 된다는 거예요. 그건 인간의 승리예요. 예수님이라는 별난 인간이 설쳐서 그건 일시적인 해프닝에 끝났고 우리가 사는 것이 정상적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이 죽임을 당함으로써 그걸 증명해 내는 겁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의 일상생활이, 내가 하는 일이 정상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식으로 거기에 자연스럽게 살고 싶은 그런 마음이 더 우세하지 않은지를 우리가 생각해보면 그게 맞아요. 우리는 여리고성 토착민을 닮았어요. 기생 라합은 너무 특이해요. 너무 특이해요. 그런데 말입니다, 어떤 성령으로 왔다 하면 성령은 우리에게 역할을 주거든요.

우리는 기존의 사람과 똑같은데 새로운 독특한 출연 역할을 맡아 버리면 남들이 생각을 못하는 식으로 세상을 봐야 되고 더욱 중요한 것은 남들이 나를 보는 거 말고 십자가 지신 주님이 나를 보는 새로운 안목으로 의미가 아니라 의미작용에 우리가 말려들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느껴야 된다는 겁니다.

내가 예수 믿는 식으로 지하철타면서 뭐 나눠주면서 “예수 믿으세요!” 이러지 말고, 내가 전도 한다고 아프카니스탄, 아프리카가고 그러지 말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의미작용, 내가 골프치고 놀고 해외여행 간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배타고 놀러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핑계가 좀 이상한 핑계가 되었는데 크루즈여행을 간다면 가야 돼요.

왜? 주님이 시킨다면. 오늘 여러분 괜찮은 변명하나 건졌습니다. 골프를 쳐야 된다면 쳐야 돼요. 이게 의미작용이라면. 다시 말해서, 이로써 내가 세상에서 강제로 뜯겨 내는 작업이라면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마음껏. 그걸 놀러가는 것조차 주의 일이라면 반대로 어렵고 힘들고 몸 아픈 것도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남이 나를 욕한다면 그것도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성질나서 대들었다면 그것도 주의 일이 됩니다.

어떤 것도 책임질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외부의 강력한 자석 앞에서 나는 하나의 자석에 끌리는 작은 조각, 철 조각이 되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그 조각들이 모여서 어떤 원칙을 들어내는데 그게 뭐냐 하면 구원은 없다는 겁니다. 사흘 동안 없었다. 나머지 남아 있는 것은 붉은 줄이죠. 이제는 십자가의 피입니다. 이런 이야기 하려고 하니까 내가 용납이 안 됩니다. 또 알레고리가 슬슬 시작 되려고 하는데. 내가 나를 질책하고 싶어요. 냉혹하게.

의미라면 질책해도 돼요. 이건 알레고리고 엉터리 해석이니까. 그러나 의미작용이라면 기생 라합이 기억하는 것과 붉은 줄이거든요. 붉은 줄이 뭐냐 하면 바로 붉은 줄은 자기 것이 찾아와서 자기의 도움을 받아서 구원이 없는 동네에 잠시 왔다가 다시 하나님께로 갔던 그 정탐꾼의 경로가 그 마지막 경로가 붉은 줄이었고 그 경로가 그냥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붉은 줄을 계속 내세워야 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뭐냐 하면 갈라디아서 3장 1절을 닮았어요.

십자가 사건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했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왔다가 아버지께로 가는 경로에 대해서 거기에 관심이 쏠려야 특이한 역할을 맡고 있는 의미작용에 속한 기생 라합과 같은 존재라는 말이에요. 이렇게 설명해도 알레고리라고 할거예요. 그러면 제가 또 근거를 대겠습니다.

억지부리지마라고 욕할 수도 있어요. 여러분, 대한독립만세와 대한민국만세는 달라요. 대한독립만세라는 것은 1945년에 그때 불렀던 만세 이름이 대한 독립만세예요. 그런데 1948년 8월 15일에 했던 대한 정부 수립이후에는 대한독립만세 하면 안돼요. 대한민국이라는 정부수립을 만세 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대한정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대한독립만세만 고집하고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대한 독립에 있어서 인간은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의미를 내 쪽에서 만들어 내요. 그리고 성경 해석을 들을 때도 ‘나에게 뭐가 유리합니까?’ 라고 의미작용이 아니라 그냥 의미만 자꾸 챙기려고 합니다. 내가 나로부터 뜯겨져 나가야 돼요.

오늘 목사님 설교는 나에게 이게 유리하다는 그런 식의 해석은 잘못된 겁니다. 땡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어떤 생각을 하던 그것마저 주님이 이 땅에 왔다 가셨던 그 과정을 여러분은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뭐냐 하면 붉은 줄, 이 붉은 줄을 다시 잘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서 모으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이 뭐냐 하면, 이건 거짓이 아니에요, 붉은 줄을 가지고 그 붉은 줄의 의미에 모두가 그 당시에 역할들이 모여서 최종 결과물이 뭐냐 하면 붉은 줄이에요. 이 붉은 줄에 대해서 의미를 거기서 뽑아내면서 정탐꾼은 이스라엘에 합류합니다. 그리고 난 뒤에 돌아가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뭘 이야기 하느냐하면 붉은 줄을 이야기해요.

붉은 줄 그 다음에 우리가 구원 받았다고 하면 이건 알레고리예요. 그런데 이건 엉터리 해석이고 붉은 줄에 뭐가 있느냐하면 19절에 보면 “그의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하니” 그러니까 이 붉은 줄에 기생 라합뿐만이 아니고 기생 라합의 말을 듣고 붉은 줄이라는 이 법칙에 전부다 붉은 줄의 이름으로써, 어린양의 피의 이름이죠, 그 피라는 주님이 일으킨 의미작용의 사건 하나에 가족이 아니라도 다른 사람이 모인다면 기생 라합의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내치지는 않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생 라합의 가족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차피 여리고성은 폭파되어야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나 스스로 죽어 마땅함을 인정한다면 그리고 새롭게 들이닥친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주도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 주도권 앞에서 이미 스스로 붉은 줄 앞에서 본인의 존재 자체를 포기하라는 이 말입니다.

십자가 앞에 나를 부인하고 나를 포기하는 거예요. 십자가 역할만 하기로 작심하고 나는 내 나름대로의 의미를 자폭하는 겁니다. 19절 다시 보면 “그의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하니” 라고 해서 그 붉은 줄이 물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붉은 줄에서 구원 될 자와 구원 되지 않는 기준의 증표로써 시그널로써 이 붉은 줄을 계속 활용하겠다는 거예요. 언제? 구원의 날 이스라엘이 쳐들어 올 때.

그러면 붉은 줄이 여리고성에 살아 있다는 말은 곧 눈에는 안보이지만 이스라엘이 저쪽에 있다는 것을 여리고성 사람들이 알아야 돼요. 붉은 줄만 있어도 여호와 하나님이 계심을 알아야 돼요. 십자가만 있어도 하나님은 십자가 기준으로만 적용해서 마지막에 작살낸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존재의 의미작용이잖아요. 알레고리 아닙니다.

3일이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만 3일 동안에 뭐가 중요하냐 하면 없다가 있다는 거예요. 없었는데 있다는 겁니다. 십자가는 과거 사건으로 없어졌어요. 그러나 성도에게는 이게 유일하게 영원한 사건이에요. 십자가 사건. 갈라디아서 3장 1절하고 마치겠습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드냐?"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안 믿는다는 것부터 출발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특이한 현상에 대해서 감격하고 이젠 자기를 위해서 산다는 것이 그게 잘못된 신앙인 것을, 아예 신앙 없는 징표인 것을 깨닫고, 없어야 될 우리 자리에 십자가와 연계해서 우리를 다루시는 주님의 그 구원 작업에 우리가 그 탈출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