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여호수아 3:7-10 / 이방민족과의 관계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여호수아

여호수아 3:7-10 / 이방민족과의 관계

정인순 2018. 7. 31. 19:47

음성       동영상    Youtube

 

 이방민족과의 관계

 

이근호
2018년 7월 29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3:7-10

(3:7)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리라

(3:8)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3:9)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3:10) 또 말하되 사시는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정녕히 쫓아내실 줄을 이 일로 너희가 알리라

요단강 건너가는 것이 어떻게 이방 민족으로 철수시키게 하는 결과를 낳는건가요? 요단강 건너기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이방민족을 미리 다 추방하시든지 아니면 다 죽어버리게 하시든지 할 수 있는게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는 이유는 ‘경계선 만들기’과 관련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본인들이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함께 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실시하시는 일관된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 그 이후의 사정’에 대해서 익히 아는 집단과 그렇지 않고 자신이 왜 죽는지도 모르는 채 그냥 악착같이 살겠다고 버티는 집단을 구분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구분 사이에는 일관된 원칙에 의해서 경계선이 조성되게 됩니다. 이 일관된 원칙이 언약입니다. 쉽게 말씀 드려서 인간은 자신의 몸으로 인해 주변에 자기를 둘러싼 시간과 공간을 염두에 두게 됩니다. 다 자기 몸을 확인하고 설명하기 위한 시간과 공간입니다. 즉 “나는 누구의 집안에 속하고, 나는 어느 대학을 나오고, 누구하고 혼인하고 〰”라는 이야기들은 자기 몸을 시간적으로 설명하는 겁니다.

그리고 “나는 이곳에 살다가 며칠 후가 되면 서울에 가서 산다”라고 말하는 것은 곧 공간적인 위치로 자신을 소개하는 겁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는 그 설명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원리를 배제한 채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할 때 같이 구성한 시공간성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 만들 때는, 죽어서는 아니되고 사는 장소도 생명나무와 같이 있던 곳이고 그리고 시간의 흐름이란 반복되는 안식일층으로 구성된 시간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범죄하고 난 뒤에 살게 된 땅은, 그냥 흔히 보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가 폭발하는 땅입니다. 대홍수가 나도 할 말없고 하늘에서 전면적으로 유황불이 떨어져도 이의 달 수 없는 곳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실을 ‘언약’ 안에 담아서 동행하시는 하나님편으로 통해서 이스라엘에게만 적용하십니다. 이 적용이 요단강 기적을 유발한 겁니다. 범죄한 인간들의 사회에서는 여전히 ‘죄 지은 후의 시공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준한 현실관을 구성됩니다.

홍해는 갈라지지 말아야 하고, 홍수로 범람되는 요단강은 도중에 바짝 마른 땅이 나올 리가 없다는 겁니다. 신약적인 사례로 말할 것 같으면, 인간은 물 위를 걸을 수가 없고, 인간의 개인용 도시락으로 5000명을 배불리 먹을 수 없다는 것이 인간 세계의 상식입니다. 그래놓고 인간들은 이런 상식을 정상이라고 여깁니다.

어떤 인간의 피가 죄 씻음을 가능케 하는 피로 보지를 않습니다. 이게 바로 이방민족들의 의식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자신의 최후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방민족은 자신의 최후에 대해서 그저 갈데까지 가보면 되겠지 하는 식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지식도 이들과 같은 수준합니다.

하지만 동행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범죄에 몸으로 이해되는 시공간을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몸에 합치되는 시공간을 적용하므로서 이스라엘은 그 체험을 하게 되는 겁니다. 단순히 ‘신기한 기적’을 체험한 것이 아니라 본인들의 최후를 미리 맛보게 된 체험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우리가 저들을 이겼다”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신 분에 의해서 이방민족을 이겼다”가 됩니다. 이스라엘은 요단강 기적을 체험으로서 구원될 자와 그렇지 않는 자를 가름하는 기준 및 경계선 노릇을 하게 됩니다. 즉 이스라엘은 단순히 ‘요단강을 건넜다’가 아니라 요단강 자체가 이스라엘과 더불어 이동하는 셈이 됩니다.

기준점의 이동입니다. 이게 언약궤를 짊어지는 이유입니다. 언약궤이 이끄는대로 이스라엘이 지시받게 됩니다. 요단강을 멈추게 한 위력으로 약속의 땅의 본 주인들이 채워질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이 아니라 언약의 위력입니다. 기준점의 현실성입니다.

인간이 자체적으로 정한 기준점과 경쟁하게 됩니다. 인간들은 자꾸만 ‘나의 구원’에 집착할겁니다. 그럴 때마다 언약은 그 시도를 무산시키고 좌절시킬 겁니다. 언약이 主(주)가 되어여지 인간이 主(주)가 되면 아니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을 설명해 줄 획기적인 기적들을 찾고자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도움 받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인간들은 사정없이 하나님에 의해서, 소위 개인적으로 노리는 기적들이 무가치함을 지적받아야 합니다. 즉 인간들이 소원하는 기적들은 ‘자기 몸의 구원’을 위함입니다. 이런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 소원은 이방민족들이 할 짓입니다. 즉 약속의 땅에 합류될 없는 족속들이 행할 일입니다. 요단강 기적은 곧 ‘인간의 최후’, ‘인간의 죽음’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기적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기적이란 곧 ‘인간을 죽이는 기적’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이 인식에 이스라엘이나 성도는 철저해야 합니다. 죽어 마땅하기에 따로 자기를 위한 기적을 고대하거나 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벌리시는 모든 일들은 ‘주의 몸’을 위한 기적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기존입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 부자를 부러워합니다.

하지만 그 부자가 막상 지옥에 가보면 물 한 방울 없는 가난한 자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진정한 위상은 이 인간 세계에서 규정할 것이 아니라 언약 안에서 규정지어지고 확정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런 안목으로 인해 성도는 이 세상에서 누구를 만날 때에 상대방이 거북스러워 하게 마련입니다.

사람 대 사람이 만남이 서로를 이용하겠다고 만나는데 성도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함께 있기에 세상이 좋아하는 것을 탐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성도다움이란 곧 그 자체가 이 세상에서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경계선으로 사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우리 자신이 세상의 경계선으로 다루어짐을 영광스럽게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송민선

195강-여호수아 3장 7–10절(이방민족과의 관계)201807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3장 7–10절입니다. 구약성경 323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또 말하되 살아 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실 줄을 이것으로 너희가 알리라”

요단강을 안 건너가고 이방 민족을 쫓아낼 수 있는 능력이 얼마든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그 요단강을 꼭 건너가는 것과 그리고 이방 민족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는 것과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보통사람으로서의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는 공간이라는 지평은 그냥 있는 거거든요.

내가 여기 있다가 저기 가면 지평도 같이 따라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냥 땅은 그대로 있고 내가 이동했을 뿐이고 내가 여기 있다가 다른 데로 가게 되면 땅은 그대로인데 내가 걸어서 그쪽까지 이동한 것이 돼요. 약속의 땅이라는 것도 이방 민족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땅이 있는데 그 다음에 우리가 산다고 그렇게 생각하죠.

사람들은 그런 일상적인 생각이 그런 상식이 창세기 3장의 의미를 뽑아낼 수 없다는 것을 몰라요. 창세기 3장에서의 땅이라는 것은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변화가 뭐냐 하면 네가 안 살아야 될 땅이라는 것의 그 변화를 땅에서 계속 뿜어주고 있어요. 원래 사는 곳은 생명나무 있는 에덴동산에서 살아야했던 것이 너라는 존재인데 지금은 거기에서 이탈해서 현재의 대지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땅은 원래 있는 것이 아니고 땅이 거기의 원칙에 맞춰서 저주를 뿜어내는 겁니다.

요즘 날씨 덥잖아요. 그래도 지옥보다는 따뜻합니다. 왜냐하면 물 한 방울은 그래도 남아 있잖아요. 지옥에 가면 정말 물 한 방울도 없어요. 그래서 제가 광주강의에서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은 없다고 이야기 했어요. 물 한 방울도 없이 얼마나 가난합니다. 나라는 입장은 땅에서 누구냐고 규정짓지 말고 내가 지옥 갔을 때 나는 누구며, 내가 천국 갔을 때 나는 누구인지가 그것이 영원히 확정된 가치예요.

나라는 가치는 그쪽에서 정하는 겁니다. 지옥 천국 넘어가서 나는 누구냐가 되는 거예요. 이 지상에 있을 때는 그건 아주 유동적입니다. 그것 가지고는 몰라요. 바로 이방 민족들이 창세기 3장과 관련된 땅위에 살고 있다는 그 관계성을 모르고 그냥 ‘땅 있네. 그냥 개간해서 살자.’ 안 그러면 ‘그냥 귀촌해서 살자’ 이런 식으로 뭐 도시에서 와서 촌에서 살면 행복한 것처럼 그렇게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방 민족 오늘 본문에 보면 요단강을 건너가지 않았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너 나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가라’가 되는 겁니다. 요단강을 건너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요단강 건넌 경험 있어? 없어?” “없어.” 그러면 나가야돼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강을 건넜어요. 그러면 이방민족 입장에서 보면 “저 민족은 요단강을 건넜데. 건넜단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렇게 될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요단강을 건넌 게 아니고 요단강을 짊어지고 오죠. 이스라엘이 움직이는 것은 요단강 자체가 움직이는 거예요. 천국과 지옥의 경계선 자체가 움직이는 겁니다. 왜냐하면 요단강을 건널 수 없는데 건넜다는 새로운 언약적인 체험이 담긴 족속이 이스라엘 민족이에요.

이스라엘민족이 새로운 사건을 경험하게 되면 그들이 사건을 가진 것이 아니고 사건이 그들을 지배하게 되는 겁니다. 그들은 사건을 증거 하기 위해서 새로운 존재로 위상이 바뀌는 거예요. 움직이는 요단강이 되는 거예요. 제가 아침에도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우리가 한평생 살았을 때에 “주여, 우리는 한평생 살았습니다.”라고 이야기 할 때 하나님은 달리 이야기하죠. “너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사건.

사건은 이름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존재가 되어야 이름을 붙이는데 사건은 이름을 붙일 수가 없어요. 그래서 구원은 주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주님만이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면 사건이 존재 되려면 어떻게 하느냐. 주님이 십자가를 이미 경유해서, 다시 이야기해서, 인간의 인생의 모든 것이 우리가 가보지 못한 그 끝자락을 주께서 이미 경험하셔서 그 끝자락에서 성령을 통해서 다시 우리에게 방문하셔서 주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하시느냐 하면 이름을 붙여 줍니다.

프러포즈하는 거죠. 그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이름이 있더라도 그 안을 쪼개보면 그 이름을 누가 나를 불러주느냐에 따라서 주의 이름이 되는 겁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라고 누가 불러주느냐는 말이에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 누가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느냐가 우리의 이름이에요. 마지막에 주님이 프러포즈해서 신랑이 신부에게 프러포즈해서 불러준 이름만이 영원히 가는 거예요.

내가 있는 이름은 중간에 우리의 존재와 더불어 소실해 버립니다. 드라마를 즐겨보지는 않습니다만 이렇게 후딱 보니까 이런 대목이 나와요. 남자가 여자에게 프러포즈를 하는데 그 음악당 전체를 빌렸어요. 좀 사는 사람이라 다 빌렸습니다. 그렇게 해놓고 복도에다 뭐를 놓았느냐 하면 자기 사랑하는 여자가 어릴 때 좋아했던 캐러멜을 이렇게 한바구니 담아놨어요. 캐러멜 먹고 오라는 거죠.

오니까 남자는 안 보이고 그냥 스케치북이 딱 놓여 있어요. 제일 처음 들추니까 이름이 나옵니다. ‘미소야..’ 한 장 더 넘기니까 ‘나는 원칙에 준한 사람이다. 그냥 촌스럽게 프러포즈할게.’ 한 장 한 장 넘기는 겁니다. 마지막 넘기면서 그 남자가 피아노치고 노래하면서, 노래도 되게 못 부르면서 그렇게 하고 꿇어앉아서 반지 주고 프러포즈하는 거예요.

이걸 순서를 반대로 해봅시다. 스케치북에 ‘주님께서 더운데 대구에 살게 하시고’ 그다음 스케치북 넘어가면서 또 ‘겨울에 영하 20도로 내려가고’ 그러면서 스케치북 쭉 마지막 장까지 넘어가고 마지막에 이름을 불러줍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거기에 순서가 성경 순서예요. 너는 어떤 네가 장식하는 네가 계획하는 스케줄대로 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른 스케줄, 주님의 스케줄대로 가는데 그 스케줄을 다른 말로 두자로 ‘언약’이라고 해요. 오늘 본문에 8절에 보면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에게” 라고 나오는데 제사장에게 언약궤를 메게 했지만 사실은 그 멘 언약이 새로운 스케줄을 개발합니다. 언약이라는 프로젝트 안에 그들이 말려들어 간 거예요.

이걸 요즘 시대로 하면 “너 교회 갈래? 교회 될래?” 라고 하는 그 이야기와 똑같은 겁니다. 사도행전은 교회라는 거 없어요. 교회라는 거는 그때그때 되는 겁니다. 그럼 교회는 왜 있느냐? 교회는 교회를 가리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일종의 트릭을 쓰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는 안 만들어도 생기는 게 교회예요.

교회를 만든다는 거는 이미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만들어진 교회는 교회 아닙니다. 사람들이 사도행전 보면서 교회를 만들 때 뭐로 만드느냐 하면 예배, 교제, 봉사, 선교로 만들어요. 이게 뭐예요. 네 가지. 완전 사(네)가지가 없어야 돼. 이게 뭐예요? 이게 뭡니까? 그거 하는데 필요해서 헌금과 교육이 필요해요.

세상에 교회를 그렇게 만드는 게 아닙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예수님의 피로 만들어요. 피의 응집됨이 그게 교회입니다. 이거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이 이스라엘을 휘감았다고 할까요? 휘둘린 거예요. 아침대로 이야기 하면 나의 몸에서 발생되는 시간과 공간은 나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예수님의 몸, 그러니까 천국이죠, 예수님의 몸을 위한 새로운 시간과 공간이 여기에 도입됩니다.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한, 예수님 여기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새로운 시간과 공간이 있기에 성경에서는 인간이 당황스럽고 난처한 소위 기적이라는 이름의 난처한 일들이 벌어져 버려요. 그러니까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기적이 일어난 것이 비상식적이라고 여기고 마치 우리가 사는 우리 몸을 위한 이 시공간은 정상적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그게 요한계시록에 일곱 나팔, 일곱 대접에 다 깨져버려요.

우리는 뭐가 정상적이고 뭐가 비정상인지를 구분 자체가 되질 않습니다. 내가 익숙해지니까 정상이고 예수님 몸 때문에 바다가 풍랑이 잔잔해지면 그걸 비정상으로 봐요.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면 그걸 비정상으로 본다고요.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면 그걸 비정상으로 봐요.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의 죄를 용서한다고 하면 그걸 비정상으로 봅니다. 인간이 반성하고 노력해서 구원받는 것은 정상으로 봅니다.

이 거꾸로 된 거 어떻게 할까요? 이거 완전히 거꾸로 됐거든요. 이거는 대중들이 교회가 그렇게 되기를 기대했기 때문에 그 고객의 구색에 맞춘 거예요. 교회는 다니는 것이 아니고 교회는 주께서 친히 만들어 주십니다. 어린아이가 엄마가 인형 사주면 좋아하지요?

그런데 어린아이가 모르는 게 있어요. 엄마 눈에는 아이 자체가 인형이에요. 인형을 갖고 놀든 말든 인형이 없어도 그 아이는 그냥 이뻐요. 물론 아들과 딸이 약간 차이는 있을 수 있어요. 어쨌건 간에 부모는 그 자식 자체가 이뻐요. 이유가 없어요.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 몸에다가 이스라엘 하나님이 함께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중심의 시공간,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시공간을 휘감아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만이 계실 때에 같이 발생되는 시간과 공간을 이스라엘의 시간과 공간으로 휘감아 버려요.

그러면 그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기적적으로 건너 간 사람으로 대우받으면서 이제는 약속의 땅에 진입이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 사람은 뭐가 되느냐 하면 흔히 말하는 정상적인 다른 이방 민족에게는 상당히 거북한 존재가 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또 말하되 살아 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실 줄을 이것으로 너희가 알리라” 우리가 이 대목을 보면서 능력 많으신 하나님께서 다 쫓아내고 주인장 다 나가고 빈 주택 아파트에 우리가 그냥 들어가도 되는데 왜 이렇게 하시느냐하는 겁니다.


이제부터 어려워요. 어렵습니다. 아니 다 비워놓고, 다 쫓아내고, 다 죽게 해놓고 그 다음에 빈 공간에 이스라엘을 넣으면 그래도 이스라엘이 더욱더 감사하죠. 하나님께서 이 좋은 땅을 공짜로 주셔서 감사하다는 이 공짜 개념이 저절로 생길 텐데 왜 저들이 버티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요단강 건너가서 이스라엘이 그들과 맞닥뜨리는 쪽으로 그들을 쫓아내게 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은 이미 인간을 죽은 자로 봐요. 죽음 이후에 존재를 이스라엘로 만들어 놓고, 아직 자기가 왜 죽는 지도 모르는 것을 이방민족으로 만들어 놓고, 언약이 뭐냐 하면 요단강을 빠져 죽으라고 거기에 있게 하는 거예요.

빠져 죽어야 되는데 나 때문에 살았다는 하나의 그룹을 가지고 이방 민족을 대하게 되면 이방민족은 “너의 죄를 알렸다? 너는 너의 주제파악도 안 되고 살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 그러나 이미 죽었다가 살아난 자만 살아야 하는 땅에 살아보려고 살아 보려고 애쓰는 인간은 여기 살 필요 없어.”라는 취지로 쫓아냄으로써 결국 언약이라는 것이 최종적이고 유일한 기준이라는 사실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알려주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문장이 좀 길었지만 쉽게 말하면 새로운 시공간이, 그것도 이미 죽어 마땅함을 아는 집단과 죽으면 안돼라는 집단을 맞닥뜨려서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죽음에서 살려내는 그 솜씨를 자랑하기 위해서 자기의 죽는 이유도 모르는 민족들 이방인들을 내쫓는 거예요.

여러분 가운데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바라기는 우리 교인들이 다 성령 받기를 원하는데, 성령을 받은 사람을 이렇게 만나게 되면 되게 거북스러워요. 흔히 하는 수작이 안 통해요. 수작이 안 통해. 왜냐하면 인간의 만남은 이용할 것을 빼먹기 위해서 하잖아요.

이렇게 잘 해주고 이렇게 알랑방귀 뀌면 저쪽에서 뭔가 보답을 해 주겠지 하는데. 어떤 사람이 성령이 들어와 버리면, 언약궤가 덮어 버리면, 요단강이 그냥 덮쳐버리면, 홀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이렇게 함부로 대하려고 하면 주변에 있는 그, 물리학 용어로 자기장, 문학적으로는 아우라, 그 주변에 있는 그 주님의 펜스(fence) 때문에 무엇을 쑤셔 넣어도 안 들어 가요.

무슨 수작을 하고 그래도 이 칼날이 들어가지를 않아요. 흠뻑 빠지든지, 너무 은혜롭고 감사하다는 표현을 하고 그래야 되는데 멀뚱멀뚱해요. 사가지가 없어요. 뭔가 주고받는 게 있어야 이게 인간된 도리 아닙니까? 이방인들에게 도리라 하는 것은 서로 좋은 것 주고 물물교환 하는, 좋은 것 주고 내놓을 거 내 놓아야 되는데 중간에 주님이 함께 계셔버리면 결코 인간들의 본래의 자기의 취지나 그 뜻대로 그냥 가만히 두지를 않아요.

그것을 더 쉽게 알게 되면 평소에 자기가 찍었던 사진, 여고시절이나 청년 때 찍은 그 사진, 군에 가기 전에 기타들고 찍었던 사진 있잖아요, 멋있고 뱃살 하나도 없는 사진, 서른 즈음 이전에 찍은 사진, 그냥 봐도 이쁜 사진 그런 사진을 꼽고 다니는 사람과 자기 엑스레이 사진을 지갑에 꼽고 있는 사람과의 차이점이, 어떤 사람 말하기를 자기 엑스레이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나의 죽음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 같다고 이야기해요.

세상에 자기의 엑스레이 사진을 지갑에 꼽고 늘 쳐다보는 사람 같으면 진짜 이상한 사람이죠. 거기에는 개성이 없어요. ‘나’라는 게 없어요. 그냥 시커먼 것과 뼈, 갈비뼈인데 영과 음의 교차인데 이게 누구인지도 모르겠어. 나라고 하니까 나인지를 알죠. 평소에 거울 앞에 보는 내 모습 아니에요. 그러나 내 진짜 모습이 그 모습이에요. 뼈와 흙으로 된 거예요.

그거는 요단강을 거치지 않으면 모르게 되어있어요. 신약에서도 십자가를 거치지 않으면 모르게 되어있다고요. 왜 살립니까? 이 엑스레이 사진이 나인데 왜 나를 살리지요? 이런 사고 방식을 가지고 대인 관계에 나서 보세요. 상대방이 굉장히 거북스럽습니다. 공통된 대화내용이 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저쪽도 엑스레이사진을 끄집어내야 이야기가 돼요. “내 엑스레이사진이 더 이쁘다. 내가 더 튼실하다.”하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없지요.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굉장히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당사자 이스라엘은 굉장히 거북합니다. 그냥 살던 데로 살고 싶어요. 주님과 함께 살기 싫어요. 솔직히 말해서. 주님은 죽고 난 다음에 만나고 싶어요. 벌써 오시면 내 원대로 내 뜻대로 이게 안돼요. 원치 않는 삶이거든요.

여러분 조수석 잔소리가 뭔지 아시죠? 조수석 잔소리. 조수석에 아내를 보세요. 아내가 계속 잔소리를 해댑니다. 그러면 운전하다가 운전 못하겠다고 좀 짜증을 내지요. “고만 좀 해라. 내가 알아서 할게.” “알아서 하는 꼬라지가 저래 5만원 나왔나?”하면서 과거까지 끄집어 내 가지고 계속 잔소리를 해대는데 아내 하는 말이 그게 사랑이라는 거예요.

그거는 결코, Never, 결코 사랑이 아니에요. 자기 살기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자기 사랑이지 남편 사랑해서 그런 거 아닙니다. 다만 과정을 좀 집는다면 “네가 살아야 내가 산다”라고 할 수 있는데 주님이 우리 조수석에 앉아 있으면서 끊임없이 잔소리를 할 때 창문 열고 내보내고 싶어 하지요.

그러나 인간이 처음 에덴동산 살 때는 우리가 조수석에 있어야 할 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주가 되고 우리가 보조원이 될 입장인데 마귀의 유혹 받아가지고 완전히 뒤집어 졌잖아요. 주께서는 천국은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곳이 천국입니다. 따라서 천국가기 전에 훈련되어야 돼요.

내가 원하는 내가 아니라 주님이 원하는 나로 훈련되어야 돼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미 우리를 죽은 자로 만듭니다. 어떻게? 우리를 십자가 앞에 세웁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현재 십자가 앞에 서 있는 너는 네가 아니고 나를, 이 예수가 필요로 해서 아직도 유지시켜주고 살게 하는 하나의 예수님의 증거물로써 예수님과 연관된 관계자로서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지금 이스라엘이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떠나야 될, 보따리 싸야 될 이방 민족과 너의 차이점이 뭐냐? 네가 잘나서 가는 게 아니고 너는 하나님과 함께 있고 요단강에 빠져 죽어야 될 너희를 살게 한 주님이 함께 있고 그들 이방 민족들은 단지 그 하나님이 없다는 이유, 그 이유뿐이에요.

그들이 더 점잖고 착하고 예의바르고 그런 사람들 숱하게 있습니다. 단지 그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경험이 없어요. 죽었다가 살아난 경험이 없으니 그냥 살고자살고자 아등바등 애를 쓸 뿐입니다.

자, 끝으로 제가 이렇게 계속 이야기 했지만 따지고 보게 되면 우리 자신도 이 성경 들을 때는 그런가 하지만 성경 듣고 돌아서게 되면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니냐. 그럴 때는 어떻게 하느냐. 이 세상은 양으로 따지는 세상이고요, 천국은 관계의 끈으로 따지는 세상이에요. 집사님 안경 들어서 보여드리고 싶은데 나중에 끝나고 보세요. 안경과 뒤에 끈이 있어요. 누가 뱀같이 생겼다고 뭐라 했다는 끈.

우리는 관계를 보여줘야 해요. ‘이 만큼 잘살았습니다. 이 만큼 착했습니다.’ 이러지 마시고 주님이 주신 관계있잖아요, 기생 라합의 붉은 끈, 그 관계만 찾고 그 관계만 보여주면 돼요. 어설프게 딴 거 솜씨 보이려고 하지 마세요.

어느 외국계 회사 다니는 아주 유능한 여자 직원이 있는데 그 직원이 사장하고 결혼을 했거든요. 라면도 못 끓여요. 한국 사람이 라면도 못 끓여요. 한국여자랑 이태리 남자가 결혼을 했는데 라면을 누가 끓이느냐 하면 그 이태리 남자가 끓여요. 여자가 굉장히 무능해요.

무능해도 괜찮아요. 이태리에서 잘만 살고 있어요. 라면 못 끓여도. 그리고 그 새댁은 아침에 늦잠 잔다고 지금까지 5년 동안 한 번도 아침을 해 준적이 없어요. 아침은 누가 해 주느냐하면 그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다 해요. 제 아내가 그걸 보면서 시집 잘 갔다고 해요. 바로 그겁니다.

우리는 좀 염치없지만 지금 이 염치가 아니고 사실이에요. 팩트. 따질 문제가 아니고 팩트. 라면도 못 끓이죠. 기도도 못하죠. 헌금도 못하죠. 맨 날 농땡이에요. 농땡이. 양적으로 따져요. 네가 잘 산다면 나도 잘 산다는 양적으로 따지는 건데 주님께서 원하는 것은 관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이미 내가 이미 죽어야 될 이유를 가지고 지금의 행세를 한번 비춰보란 말이죠. 그러면 내가 해서 구원받지 않는, 내가 행한 것을 일체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욱더 확실하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마귀는 계속 이방 민족을 통해서 “그래도 뭐 해야지. 뭘 해야 천당 가서 상급 받지.” 계속 우리를 쑤시고 있는데 우리는 라면도 못 끓여요. 라면 먹고 가라는 것도 없어요. 라면도 못 끓여요. 아무것도 못 해요. 그 관계. 주께서는 언약으로만, 언약으로만 구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짊어지는 언약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확정 시켜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살아서 하나님 기쁘게 해보겠다고 뭔가 해 보지만 그건 얼마나 그것이 어설프고 주님 보시기에 딴 걸 찾는다는 것을 저희들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