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송민선 191강-여호수아 2장 1–6절(문책성 탐색) 201807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2장 1–6절입니다. 구약성경 321페이지입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어떤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중의 몇 사람이 이 땅을 정탐하러 이리로 들어왔나이다,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그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정탐하러 왔느니라,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이르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나 어디로 갔는지 내가 알지 못하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을 따라잡으리라 하였으나, 실상은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냥 빈 공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빈공간이 아니라면 거기에 누가 있느냐 하면 나를 똑 닮은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거기에 있겠지요. 따라서 그 약속에 땅에는 우리를 닮은 우리의 사고방식과 동일한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공격한다는 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우리가 날마다 우리 자신을 공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나 같은 인간은 천국 못 간다는 것을 분명히 할 수 있어야 돼요. 그래야 나도 못가지만 너도 못가는 것이 성립되는 겁니다. 불가능이죠. 천국 자체가 구원 받는 자체가 불가능이라는 것을 명심 또 명심해야 됩니다. 전에 열두 명을 통해서 정탐하라고 했는데 그 정탐함 결과는 실패였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 2장에서 여호수아가 또 정탐꾼을 보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이번 정탐하면 성공한다는 것이 아니에요. 너희는 어차피 실패할 수밖에 없는 거고, 정탐 하나 안하나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거죠. 전에 대표자 12명이 정탐을 했을 때는 어떤 사고방식으로 정탐을 했느냐 하면 우리는 괜찮은데 적들은 문제 있다고 정탐을 한 거예요.
그러나 그 정탐으로 인하여 40년 동안 달랑 두 사람 빼놓고 다 죽었습니다. 이제 오늘 보는 이 본문에 두 사람이 정탐하는 것은 그것밖에 안 되는 인간이 과연 여리고성을 함락하겠느냐는 것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안되기 때문에 어떤 점에서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넘어가는 거예요.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실 때에 어떤 인생을 살게 하시느냐 하면 문책성 인생을 살게 하세요. 계속해서 다그치시는 겁니다. “이러니까 너는 안 되는 거야.” 그것이 우리에게 복음으로 들려와야 돼요. ‘아, 나는 안 되는데 안 되는 인간을 들어가게 하시는 구나.’ 이럴 대 그 폭만큼 감사와 은혜가 계속해서 살아 있게 되는 겁니다.
사람 건드리면 삐지잖아요. 이거는 우리뿐만이 아니고 여리고 성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서 승리하게 하시겠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 우리하고 똑같이 성깔 부리는 사람이고 자기 꺼 있는데 자기 꺼 누가 넘보면 내 꺼 누가 넘보면 기분 더럽듯이 그쪽도 그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분 나쁘게 하시기 위해서 정탐꾼 보낸 거예요.
네가 뭐 잘났느냐는 식의 인간의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성질을 다시 한 번 분명히 들춰 주는 겁니다. 이렇게 되게 되면 이거는 몸과 몸이 부딪혀서 약속에 땅에 들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정탐꾼 두 명이 들어가죠. 다시 이야기 합니다. 이들이 정탐꾼 보내는 것은 그 불가능함을 분명히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갔더니만 그들이 어디 들어갔느냐 하면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꼭 라합 앞에 기생을 붙여요. 기생과 연관을 시킵니다. 라합이라는 기생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들어가니까 누구든지 우리 꺼 건드리면 가만있지 않죠.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자손 몇 사람이 땅을 탐지하러 왔나이다.” 라고 누가 고발 들어간 거예요.
하나님께서 일을 추진하실 때에 가슴 덜컥 내려앉지 않도록 하시면 좀 어떻습니까? 좀 수월하게 가기만 하면 길이 쭉 열리듯이 이렇게 하면 좋은데 ‘안 될 거야.’ 하면 역시 안 되고 ‘실패할 거야.’ 하면 역시 실패로 끝나요. 뭔가 내 쪽에서 실패로 여기면 그걸 가상히 여겨서 좀 기회를 주면 되는데 여지없습니다. 아예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그게 아까 말씀드렸던 문책성 인생이에요. 인간은 절대로 자기를 문책하지 않잖아요. 주님이 우리를 문책해 주시는 겁니다. 천국을 네가 기대하는 자체가 천국이 네 주제하고 안 맞는다는 거죠. 천국이 어떤 세계인데 네가 거기 들어가느냐는 거죠. 이것은 사도행전 13장 38절에서도 마찬가지로 사도바울이 설교하면서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살리신 이를 하나님께서 죽었던 사람을 살림으로 말미암아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전하는 이것이다” 라는 것이 설교 핵심입니다. 사도바울이 설교하시면서 “네가 회개하면 구원해 줄게”가 아니고 “네가 반성하면 내가 천국 보내줄게”가 아니고 “네가 착하게 살면 이정도 착하게 살면 천국간다”가 아니고 어떤 사람을 힘입어서 죄사함이 우리에게 엉뚱하게 주어지는 거예요. 엉뚱하게.
이게 믿어진다는 것은 이건 뭐 자존심이 없는 겁니까? 아마 붕괴되었을 거예요. 자기의 자존심, 자기가 지키고자 하는 최후의 마지막 마지노선마저 무너져야 돼요. 우리 모든 인간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개척하는 겁니다. 그것도 알뜰살뜰해요. 어디에 조금이라도 헛되이 안 쓰고 빈틈없이 알뜰하고 계획적으로 한푼한푼 얼마나 착실합니까?
그거 착실하다고 구원해 줍니까? 아니거든요. 착실하면 착실할수록 자기에 대한 문책이 점점 없어지는 겁니다. 이정도 착실하고 이정도 성실한데 아무리 봐도 흠 잡을 데가 없어요. 그러면 흠 잡을 데 없는 모습으로 지옥가면 되겠네요. 바로 이러한 사정에 있는 완벽에 완벽을 기하는 삶을 사는 우리에게 내 쪽이 아니고, 내가 얼마나 철저한 지가 아니고 나와 상관없는 저쪽 나라에 내부사정에 있는 기생 라합이 정탐꾼을 살려준다는 겁니다.
이 계획은 주님의 계획이지 우리 인간들이 이스라엘 쪽에서 기대한 계획이 아니에요. 여호수아가 정탐꾼 보내면서 ‘저쪽에 누구 괜찮은 사람이 우리 정탐꾼을 살려줘야 할텐데’ 라고 기대하지 않았어요. 정탐꾼이 갔는데 이 사람들이 바보같이 들키기는 왜 들킵니까? 이건 여호수아 계획이 사단 난겁니다. 사단 났어요.
아마 스파이 정탐꾼들 들키게 되면 병력을 두 배나 더 증가시킬 것이고 오히려 난공불락이 될 뿐입니다. 여호수아의 모든 계획이 무산 될 수밖에 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그 쪽이 자기 지키는 것과 내 쪽이 내 것 지키는 것과 동일하게 살아가거든요. 인생 뭐 있어요? 똑같이 살아가요. 똑같은 원칙 가지고.
세상은 지루할 정도로 한결같이 동일해요. 그쪽 여리고성 사람들은 뭐냐? 왜 그렇게 세상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는가? 우리가 그만큼 착실해서 돌아가는 겁니다. 우리가 분란을 안 일으켰으니까, 말썽을 안 일으켰으니까 이마나도 고요하게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나 살면 살수록 생기는 그 피로감을 어떻게 처리하려고요?
너무나 살아가는 것이 동일해요. 4년마다 돌아오는 월드컵, 그때마다 대목 보는 치킨 집, 똑같은 순환구조잖아요. 똑같은 순환구조. 특이 사항이 없어요. 고요하게 살고 싶은 거 좋아요. 좋긴 좋은데 지루해요. 너무 한가해서 짜증나요. 여기서 우리는 외로움과 그리움을 분간할 줄 알아야 됩니다.
외롭다는 것은 홀로 있어서 자기 생각으로 외로운 거고, 그리운 것은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을 찾는 거죠. 자기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그 쪽에 어떤 대상이 없어서 그리워지는 거고, 외롭다는 것은 뭐, 개나 고양이나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자기 생각만 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리움이라는 것이 없어요. 인간이 그립다고 하는 것은 외롭기 때문에 그립다고 하는 것이지 그리움을 위해서 나는 외로워해야 한다는 원칙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이 여리고 성의 특징은 뭐냐 하면 ‘그냥 가는대로 가자’ 예요. 살던 대로 그냥 사는 거예요. 그쪽도 마찬가지고 이쪽도 마찬가지고 오늘날 교인들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 찾는다고 별 인생 없어요. 똑같은 인생입니다. 원칙이라는 것은 내 편한 대로 사는 것이 원칙이라고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입장 바꿔 생각해야 돼요. 이제 이스라엘 입장이 아니고 여리고성 입장으로 우리가 잠시 이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동하게 되면 고요하게 살고 아주 평온하게 사는데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인 정탐꾼이 쳐들어왔다고 했을 때에 우리가 여리고성 시민이라면 우리는 어떤 걸 느끼겠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이 말을 제가 쉽게 했지만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예요. 사도행전을 공부하다 보면 사도행전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베드로가 설교하는 대목이 나와요. 설교대목이 나오고 많은 사람들이, 수천 명이, 오천 명이 베드로를 따라서 예수 믿는 자가 돼요. 사도행전 초반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그럴 때 대제사장들이 베드로를 체포해요. 체포해서 감옥에 집어넣었는데 감옥이 흔들려가지고 베드로가 따로 빠져나와요. 빠져나오니까 감옥에 있다가 빠져나온 베드로를 다시 체포해서 또 세웁니다. 참 질기지요. 그럴 때 제사장이 이번에는 감옥에 안 집어넣어요. 채찍질 좀 하고 예수 전하지 마라하고 그냥 내 보내요.
방면하고 난 뒤에 그 다음 한 말이 있어요. 그 다음 말이 굉장히 중요한데요, 뭐라고 하냐면 “이 사람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냐?” 하고 자기들끼리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자기들끼리 회의하는 장면이 나와요. 그 장면에서 우리는 뭘 생각하느냐 하면 우리 자신을 자꾸 베드로 편에 세우는데 그거는 현실과 동떨어진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에게 미쳐서 예수 전하는 사람이 우리에게 왔을 때 정말 거기에 동조할 까요? 아니면 그걸 귀찮게 여길까요? 우리의 본성은 귀찮게 여기는 겁니다. 우리는 고요한 걸 좋아해요. 일상적인 걸 좋아하고 평온한 삶을 원하고 있어요.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을 전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저 사람을 어떻게 처리하면 우리가 그냥 사는 데로 고요하게 살 수 있는가?’ 를 우리는 본성상 먼저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자꾸 예수 편에 서지 말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입장에 서서 그들 편에서 예수 전하는 사람을 다시 바라보게 되면 예수 전하는 사람을 바라보고 미워하게 되는 그 성격과 감정이 결코 낯설지 않아요. 우리는 얼마나 일상적인 것이 고요하기를 원하는지 몰라요.
오히려 우리는 누구 편에서 화내느냐 하면 이렇게 예수 전하는 사도들에 대해서 약간의 분노를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였던 그 민중들의 심정을 우리는 이해하는 정도가 아니고 당연하다는 식으로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썽 없는 인생. 우리가 얼마나 꿈꾸던 인생입니까?
연금 좀 있고, 살만 좀 빼면, 지금까지 고생했으니까 이제 좀 편히 쉬어야겠다는 것이 얼마나 꿈꾸던 거예요. 아무리 하나님이지만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지, 하나님이 이럴 자격이 있는 지 생각하게 되죠. 이런 생각들이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의 본성이 거짓말을 안 합니다.
우리는 기존 교회가 싫어요. 왜냐하면 자꾸 일거리를 만들잖아요. 우리교회가 좋아. 예배 참석만 하면 끝나니까 아무 일도 없어요. 아무 일도. 아무 일도 없이 정말 잘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천사가 와서 우리교회를 여리고 성으로 간주해서 정탐꾼을 보냈을 때에 과연 우리가 우리의 일상을 자진해서 폐기하겠습니까? 이게 바로 기생 라합입니다.
누가 라합에게 기생이라고 놀립니까? 일상의 고요함을 자기 민족과 더불어 포기한 겁니다. 자기 민족과 더불어서. 그렇지 않고서는 기생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주는 이 사건을 도무지 우리는 납득을 할 수 없습니다. 이해가 안 됩니다. 제가 처음에 이야기 했잖아요. 사람 사는 거 똑같다고요. 고요한 생애를 보내는 것이 우리가 꿈꾸던 겁니다. 희망사항이에요. 제발 남들이 내 것을 터치 안했으면 좋겠어요.
집값도 안 내리고 아파트 값도 안 내리면 좋겠어요. 제발. 마구 뛰는 것도 원하지 않아요. 그냥 약간만 올라가면 좋겠어요. 주식 사놓은 것도 약간씩만 올라가면 좋겠어요. 말썽 없이. 아이들도 건강하고 말썽 없이 자라면 좋겠어요. 공부는 못해도 괜찮아요. 한 2등정도만 해도 괜찮아요. 그냥 고요하게 말썽 없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이 살기 좋은 세상에 누가 왔다. 그리고 나의 이 포지션 자체가 망한다. 이거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입니다. 얼씨구나 하지 않습니다. 제가 지난 수요일에 말씀전하면서 동요하나를 언급했죠.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이 가사 내용을 풀이하면 내가 살았던 고향이에요. 성도는 이곳이 내가 살았던 고향이 아니고 내가 살았던, 언젠가는 이별해야 될, 끊어져야 될 그런 세상에 우리가 지금 아직까지 발목 잡혀 살고 있는 거예요.
따라서 이 세상에 흔들리고 요란하면 우리는 오히려 반겨야 됩니다. ‘때가 되었구나, 때가 되었어. 두 사람이 맷돌을 갈다가 한 사람이 올라가는 때가 되었구나. 인자가 올 때가 되었구나.’ 라고 오히려 반겨야 돼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봅니다. 기생 라합은 기적이다. 정말 기생 라합은 기적이다.
참된 믿는 자는 이스라엘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정탐꾼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기생 라합이에요. 여호수아는 바로 하나님이 기생 라합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 정탐을 하게 하신 겁니다. 왜냐 하면 정탐꾼이 기생 라합에 의해서 빠져나간 통로가 있어요. 그것은 바로 붉은 밧줄을 타고 내려갔거든요.
기생 라합은 나중에 구원 받을 때 당시에 정탐꾼이 통과했던 의지해서 탈출에 성공했던, 구원에 성공했던 그 붉은 밧줄을 창가에 걸게 되면, 여호수아가 말하길 “그 붉은 밧줄 보고 그 밧줄 있는 가정만 기생 라합의 가족인 줄 알고 끄집어 내라” 주님께서 이 땅을 빠져나갈 때에 십자가 피로 빠져 나가셨어요.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영생이 없다”라고 하셨어요.
그 살과 피를 우리 아파트 가정 창가에 걸면, 십자가 피를 걸면 그냥 걸기만 하면 안돼요. 한시라도 이 땅이 뭉개지는 것을 우리는 기쁜 소식으로 용납할 용의가 되어 있다는 마음가짐이 아니면 십자가 걸어놔도 그것은 장식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교회 잘 됐으면 하지 마세요. 교회 창가에다가 기생 라합의 붉은 밧줄을 걸어야 돼요.
교회보다 천국을, 친목단체보다 천국을, 이런 마음이 한결 같아야 됩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정탐꾼을 보낸 이유는 이미 그들은 정탐해야 안심하는 망가진 영혼들이에요. 그리고 그들을 정탐꾼을 보냄으로써 너희들이 들어가야 될 그 여리고 성에서 살아가는 거나 너희들이 평소에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하는 거나 거기서 거기고 똑같아요.
내 것 건들이면 화낸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교회 갔다 문 열고 나가면 꼭 마찬가지예요. 내일도, 월요일도 고요하게, 화요일도 고요하게, 아무 문제없기를. 그러나 주님께서는 문제를 유발시킵니다. 이게 뭐냐 하면 겹쳐져 있는 두 판을 강제로 찢어요. 그러면 일상과 초월이 갈라지는 겁니다.
이런 경험이 있어야 돼요. 하루 경험 중에서 일상적인 것이 전부라고 알고 있었는데 일상적인 거에서 초월적인 것이, 주님의 약속이죠, 초월적인 것이 이렇게 갈라지는 느낌을 받을 때에 나는 이 세상에 살아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것을 수시로 수시로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라는 것은 내가 설친다고 바뀔 세상은 아닌 거예요. 제가 이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을 바꿀 생각 하지 마세요. 남편 성질 바꾸고, 아내 성질 바꾸고 그런 거 하지 마세요. 인간은 안 바뀝니다. 나도 안 바뀌는데, 내가 안 바뀌면 남도 안 바뀌는 거예요. 우리 바뀌었습니까? 안 바뀌었어요.
내 것 건드리면 화내는 거 바뀌었습니까? 미쳤습니까? 그걸 바꾸게? 등신도 아니고. 그걸 왜 바꿔요? 악착같이 내 것 챙겨야죠. 내 것 안 바뀌면 옆에 있는 부부도 안 바뀌고 자식도 안 바뀝니다. 안 바뀌는 세상에서 구원을 받는다? 이거는 누구 하나 이 세상 포기하고 희생이 되는 사람이 있어야 돼요. 기생 라합입니다.
자, 기생 라합을 만남으로써 멸망 되어야 할 곳에 구원자가 있다는 말은 이스라엘은 당연히 멸망되어야 되지만 기생 라합같은 그 요소가 들어 있을 때만 이스라엘이 구원이 될 수가 있어요. 기생 라합 덕분에 정탐꾼은 살았습니다. 정탐꾼은 이스라엘의 대표자입니다. 일단은. 정탐하는 그 순간에는 대표자로 두 명 왔으니까, 이스라엘 대표하는 두 명과 기생 라합에서 그 정탐꾼은 완전히 무능력한 거예요. 왜냐하면 적군 속에 있으니까.
우리는 마귀가 지배하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이 세상을 이길 수가 없어요. 완전히 포로 된 입장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주께서 주신 분에 의해서 우리가 거기에 보호를 받게 되면 우리는 그 보호가 주님의 보호라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보호 받을 때 우리는 무능자가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으로 살아도 이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사는 환경도 믿음, 소망, 사랑으로 절대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나의 고요함뿐이기 때문에, 주의 영광이 아니기 때문에 주께서는 우리의 것을 살릴 가치도 없고 귀하게 여길 이유도 없습니다.
정말 귀하게 여길 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바보 등신 같은 나밖에 모르는 인간을 살려 내기 위해서 준비된 희생자가 나를 위해서 희생했다는 그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그 사실을 보호하려고 하시는 거예요. 나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위해서 희생하신 그 분을 보호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가치, 예수님의 복음의 실효성을 보호하는 거, 그게 천하의 죄인인 우리를 보호하는 목적입니다. 목적이에요. “너 누구를 위해서 뭘 자랑 하려고?” 라고 묻는 거예요. “저는 기생 라합 자랑합니다.” 그게 바로 그거예요. “창가에 있던 붉은 끈을 자랑합니다.” 그거예요. 그게 주께서 원하시는 겁니다.
여리고성 사람이나 이스라엘 사람 똑같아요. 여리고 성이나 이스라엘 구분하지 말고 같이 만나서 한 십일 동안이라도 만나서 대화해 보세요. 대반에 친구 됩니다. 지금은 남북으로 갈라져 있지만 십일 동안 합숙하면 대번에 친구 돼요. 나는 재벌 집 아들이고 너희들은 못사는 구둣방가게 자식이라도 둘이 만나서 일주일에 두 번씩 식사하고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면 나중에 어찌 될지 모릅니다. “아버지, 엄마 결혼 하세요.” 이렇게 나올 수도 있어요.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이미 한 거 드라마 이야기 하나 더 해보겠습니다. 누나가 나이가 찬 남동생을 좋은데 결혼시키려고 선을 보라고 합니다. 선보려는 남동생은 직업이 의사예요. 그런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런 중요한 말을 남깁니다. 복음적으로. “선 봐라.” 이렇게 말하니까 “나 사귀는 사람 있어요.” 이렇게 대답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 “너 하나님 믿어라” 했을 때 “믿습니다” 라고 하면 안돼요. “저는 예수의 사람이에요.” “믿어라. 저 믿기 전에 이미 예수 사람이에요” “너 몸 아픈데 예수 이름으로 건강해야지. 아니요, 몸 아파도 예수 사람이에요” 예수의 사람을 여리고 성에 이렇게 집어넣은 거예요.
이스라엘은 기생 라합에게 한 수 배워야 되는 겁니다. 살아도 나의 살았던 고향에 불과해요. 직업이 기생입니다. 술집여자이지요. 매춘부라고 해도 돼요. 하지만 모든 인간에게 십자가 앞에서 직업과 전통과 문화 그리고 종교, 이런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주님 따라서 주님처럼 희생한다는 게, 주를 위해서 희생한다는 게 의미 있죠.
우리는 공짜로 구원받은 겁니다. 물론 횡재지만 우리는 반항해요. 고요하게 살고 싶어서. 우리 중에 누구 한명 희생했으면 좋겠다. 누구 하나 희생했으면 좋겠다. 아까 장로님이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이제 그만 하려고 합니다.” 16년 동안 했다는 거예요. 참 희생하신 거예요. 미안해요. 그 이야기 듣고 얼마나 미안한지, 화장실 청소한 것도 미안하고, 미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자꾸 생각이 나요. 문책성 희생 때문에 제가 도로 문책 받았어요.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문책 당해도 쌉니다. 그 예수님 자리가 기생 라합의 자리입니다. 기생 라합은 이 여리고성 정복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건 뒤에 주께서 계속 인도하실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가 착실해서 구원 받는지 알았고 착실해서 이만큼이라도 사는지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불신앙인지 주 앞에 마음껏 문책 당하는 생애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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