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송민선 192강-여호수아 2장 8–11절(라합의 고백)201807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2장 8–11절입니다. 구약성경 321페이지입니다.
“또 그들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뭔가 우리가 성경에 나와 있는 고백, 이 고백을 하게 되면 우리가 무슨 유혹을 받느냐 하면 똑같은 고백을 하면 나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똑 같은 고백은 절대로 이루어 질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글자로 되어있으면 그것을 그대로 외우면 되겠지만 그 고백이 나오게 된 상황은 우리가 만들어 낼 수가 없어요.
인간이 만드는 것은 항상 있는 곳에서 있는 것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없는데서 있는 것을 창조하죠.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미 있는데서 있는 것은 소용이 없어요. 이미 내가 여기 있고 내가 고백한다고 해서 그 고백이 나를 구원하지는 않습니다.
없는데서 나오는 고백이어야 한다는 거죠. 없는데서 나온 고백이라면 현재 있는 나를 주님께서 개무시하는 상황이 벌어져야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고백 내용은 우리가 보다시피 아주 간단해요. 기생 라합에게 찾아온 정탐꾼은 기생 라합 자신에게 찾아온 것은 아니지만, 기생 라합이 자기를 찾아온 정탐꾼에게 말하기를 “나는 당신 민족을 안다. 소문 아주 멋있게 났더라. 광야에 있던 그 들판의 경로에 있던 왕들이 꼼짝 못하고 당신들 앞에 패배 했더라. 그리고 홍해 사건은 이 동네에서 유명하다. 바다가 갈라져서 건너왔다는 말을 듣고 누가 겁내지 않겠느냐? 따라서 우리 쪽 사람들도 당신 민족을 두려워한다.” 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그러면 그 고백이 어떤 지식이나 정보에서 나오는 고백 같으면 우리도 어느 정도는 하겠다 싶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당신 나라가 어떻다는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고 기생 라합의 이런 고백은 이제는 당신의 등장 앞에 나의 있음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렵죠? 쉽게 말하면 태풍입니다. 태풍의 특징은 태풍의 소재지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태풍은 작년에 불었던 태풍이 그 장소에 가면 태풍이 없어요. 늘 거기에 상주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태풍은 대기의 우발적인 요소가 결합되어서 갑자기 생기는 거죠. 이 이스라엘 백성이 뭐냐 하면 태풍 같은 겁니다. 다른 민족은 있음을 유지하려고 하는 반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태풍으로 활용합니다.
이렇게 태풍의 진로 앞에서 어지간한 건 다 없어지잖아요. 그런데 이것이 이스라엘 개인의 자질 같으면 기생 라합도 안 믿습니다. 그런데 기생 라합은 뭘 보느냐 하면 정탐꾼 당신들의 단결성이라든지 정신 상태를 보는 게 아니고 여호와가 함께 있는 걸 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있는데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이동 중이라는 겁니다.
태풍처럼 움직이고 있어요. 움직이고 있으면서 뭔가 어떤 방향을 향하여 줄기차게 회오리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태풍의 힘이 여호와에게 있기 때문에 기생 라합은 이스라엘 사람을 안 믿습니다. 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쪽 사람이나 이 쪽 사람이나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기생 라합이 믿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 보잘 것 없는 그 민족을 다루니까 그 보잘 것 없음이 의외의 놀라운 힘을 발휘하더라는 그 사실을 기생 라합이 받아들인 겁니다. 보잘 것 없는 데 의외인 것.
그러면 이런 고백을 한다는 것은 기생 라합 본인을 사람 앞에 내세우는 것이 아니에요. 그 보잘 것 없는 것을 다루시는 그 태풍의 힘을 가지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고백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태풍은 지난 날 이렇게 홍해를 가르고 오면서 광야에서 여러 민족을 친 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사죠.
여기서 중요합니다. 기생 라합은 과거사를 믿는 게 아니에요. 지금 정탐꾼이 자기에게 찾아 온 것이 여호수아의 지시가 아니라 이거는 여호와 하나님과 자신의 만남입니다. 그걸로 이해하는 겁니다. 드디어 태풍의 눈이 자기 집까지 온 거예요. 태풍이 자기 자신에게까지 온 거예요. 슬슬 비바람 치기 시작합니다. 바람 불기 시작합니다. 그 흐름의 언저리에 자기가 도달 했다는 사실, 들이 닥쳤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기생 라합의 입장에서 이 고백의 중요한 점이 뭐냐 하면 본인이 여호와를 찾아가지 않는 다는 점입니다. 여호와께서 찾아오신다는 이 찬스, 이 기회를 아주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심지어 무엇보다도 소중하냐 하면 그동안 내가 나를 지켜야 하고 내가 나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그 사실 조차도 여호와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죠. 이유가 뭐냐 하면 정탐꾼이 오리라는 것을 본인이 예상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정리합시다. 구원은 예상 못한 일. 그리고 고백이란 그 예상 못했음을 고백하는 것. 사전의 철저한 준비에 의해서 구원을 쟁취한 게 아니에요. 예상 못한 식으로 찾아오는 겁니다. 이번 수련회에 사도행전을 하는데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태풍 같아요. 그리고 성령이 오시면 특징이 뭐냐 하면 예상을 안 한 거예요.
사도바울이 터키 북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하나님의 영이 막습니다. 막고 밤중에 사도 바울에게 어떤 아저씨가 등장해요. 베뢰아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건너와서 우리를 좀 도와 달라고 합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이 이쯤에서 계시가 와야 하는데 하면서 예상한 적이 없어요. 그냥 무작위로 주께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이 뭐냐 하면 주도권이 사도바울에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예루살렘교회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도권은 인간에게 없다는 것이 사도행전에 핵심이에요.
모든 구원은 주님이 택한 자를 알아서 건지는 겁니다. 이고니아 성에 갔을 때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성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라고 나는 계시를 받았다는 겁니다. “이 성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이 백성을 사도 바울 자신이 모종 심어놨습니까? 아닙니다. 자기는 몰라요. 그 모름을 고백해야 됩니다. 그 모름을.
회개할 때 미리 예상하고 회개하면 안돼요. ‘회개 하면 이런 조치가 있고, 이런 혜택이 있을 것이다’ 라는 예상을 하면 그건 회개가 아닙니다. 그건 그 회개를 회개해야 돼요. 회개라고 하는 것은 떠 밀어서 해야 됩니다. 그리고 떠 밀고 난 뒤 어떤 결과를 노려서는 안돼요. 그거는 계속해서 있음이 있음으로 나가면 안 됩니다. 있음은 없음이 되 버려야 돼요.
그리고 내가 없어도 괜찮아요.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와 함께 전쟁을 했던 특징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만 계시다는 겁니다. 자기들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하고 나하고 있다가 아니라 그냥 주님만 계신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사느냐? 주님만 계시기에 계신 주님이 우리를 이렇게 아직도 계속 붙들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계속 우리를 이렇게 붙들고 있다는 것을 개의치 말고 그냥 주님만 계시다고 해도 주님이 자기 원하는 백성 불들고 있는 것이 저절로 되는 겁니다. 이 고백이 오늘날 성령을 받은 태풍과 함께 사는 우리에게는 이 고백이 수시로 이루어져요. 어떤 사람은 하루 일곱 차례, 어떤 사람은 일 년에 세 차례, 어떤 사람은 십오 년에 한 차례, 횟수와 상관없이 이것이 수시로 일어납니다.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계시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 내가 여기 있다는 소리를 하면 주님이 화낸다는 사실, 섭섭해 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자꾸 내가 있다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걱정거리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내가 있음에서 걱정거리가 나와요. 나 있음을 의식하지 않으면 걱정거리도 같이 일어나지 않는 법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면 주님이 계셨기에 일어난 일이거든요. 주님이 계셨기에.
7월 중순에 장로님 딸이 셋째를 출산한답니다. 세 번째. 그 아기를 생각할 때에 뭐 ‘딸 낳고 싶다, 뭐 하고 싶다’ 이런 여러 가지가 있겠죠. 그러나 주님이 계셨기에 생긴 현상이라면 ‘어떻게 다 키우려고...’ 라는 걱정 근심을 내 쪽에서 구태여 할 필요 없어요. 말려도 생길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세상 모든 일이 그런 거예요. 이게 나중에 ‘말릴 걸...’, ‘네명 낳으라고 할 걸...’ 하면서 나중에 자꾸 돌아보는데 나중에 하는 것은 사서 고생하는 겁니다.
기생 라합의 고백 속에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보면 기생 라합은 이 고백이 우발적이라는 거, 자기가 예상 못했는데 나에게 들이 닥친 것이 인간적인 일도 아니고, 평소에 자기가 구원받고 싶어서 한 일도 아니고 그냥 이렇게 이상한 만남이죠. 정탐꾼을 숨겨 줬으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집에 확 들어왔다는 사실을 자기로서는 이걸 기적으로 보는 겁니다. ‘이게 웬 떡이야! 웬 횡재야!’ 하면서 감사하죠.
그렇게 들어 온 순간 자기 자신이 별로 중요치 않아요. 이제는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다루실 것이냐는 문제가 남았습니다. 자, 어떻게 다룰 것인가? 전쟁입니다. 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광야에 있을 때에는 여기에 전쟁했던 아모리 사람 시혼과 옥, 이 두 왕에 대해서 나와 있지요? 그러나 그 전쟁은 어디까지나 과거에 있었던 여호와 전쟁이고 지금 전쟁은 뭐냐 하면 이 정탐꾼을 무사히 내가 지켜주느냐는 싸움이 벌어지는 겁니다.
이 기생 라합의 이러한 고백이 우리 생각에는 그냥 옛날 일이고 하나의 에피소드로 끝날 것 같은데 이게 의외로 성경에서는 굉장히 중요시 여깁니다. 우리는 기생 라합이 정탐꾼 숨겨줘서 구원 받았다는 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면서 간단하게 취급하지만 마태복음 1장에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장 4절에 보면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 보아스를 낳고” 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우연한 만남인가요? 어떻게 이렇게 만나냔 말이죠. 기생 라합이 누구하고 결혼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죠.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살몬하고 결혼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택한 백성의 어떤 결단이나 결심, 절대 이런 것으로 구원하지 않는 겁니다.
결심 안하고 싶어도, 고백 안하고 싶어도, 반드시 윽박질러서라도 성경에 나오는 구원 받을 만한 고백이 나올 만한 요소를 폭풍처럼, 태풍처럼 유발시켜 주는 겁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에 말려든 것을 우리는 두고두고 감사해야 돼요. 만약에 우리가 주의 일에 말려들지 않으면 우리가 누구 일을 하느냐 하면 내 일만 고민하게 돼요.
그러면 내가 내일 고민 안하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데, 내가 내 일을 고민하게 되면 그 결과가 장담 못합니다. 안 좋은 결과가 생겨요. 세상 사람들 다 자기 일 생각하잖아요. 자기 일 생각하는 건 좋은데 성경을 안 봤으면 그냥 그렇다 하겠지만 갈라디아서 6장 8절에 보게 되면 자기 일에 신경쓰는 사람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여기에 보면 ‘위하여’ 라는 말이 나와요. 어떤 목적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자기 몸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썩어질 것을 거두고” 목적입니다. 목적. 사람은 행동하는데 어떤 목적이 있잖아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썩어질 것을 거두고” 어떤 목사가 개척교회를 하면서 자기는 주의 종이고 자기가 참된 목사고 자기를 위하여 목회를 테스트하고 목회가 잘 되는지를 신경 쓴다면 교회라는 이름의 썩어질 것을 거둔다는 거예요.
만면에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라고 했어요. 그러면 성령을 위해서 심으면 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성령을 위해서 심는다는 말은 갈라디아서 6장 8절에 의하면 나를 위해서 심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성령을 위해서 심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건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에요. 아무리 주를 위해 성령을 위해 산다고 해도 이미 내가 내 몸을 의식하는 한 이건 꼼수가 됩니다. 꼼수가 돼요. “내가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해서 오직 성령을 위해서 심었습니다.” 라고 하면 주님께서 “그걸로 끝이냐?” 물으시면 “이렇게 하면 뭐 주시겠지요.” 하면서 머리 긁적거리는 그런 것이 반드시 있어요.
가정이 어려울 때나 몸이 아플 때 기도를 많이 하잖아요. 그 이유가 뭐예요. 자기 몸을 위해서 심는 거예요. “그렇게 일방적으로 이야기 하면 안 되잖아요.” 하면서 섭섭해 하지만 그럼 평소에 기도했어요? 안 했어요? 안 하거든요. 뭔가 태풍이 불어야 돼요. 쉽게 이야기해서 인간은 자기 몸을 포기를 못합니다. 그런데 위기가 와요. 이 몸을 쥘 만한, 지킬 만한, 사수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거. 왜? 늙어가고 죽어 가니까. 내 가정을 내가 지켜봐야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제가 울산강의 할 때에 레위기 20장에 그런 대목이 나와요. 남의 아내와 간음한 자는 둘 다 죽이라는 대목이 나왔어요. 그걸 설명하면서 “간음을 안 하는 것이 자기 가정 지키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함입니까?” 라고 물었어요. 간음을 안 했다고 자랑질 하는 모든 인간은 자기 가정 지키기 위함이에요. 그건 갈라디아서 6장 8절에 의하면 자기를 위해서 심는 거기 때문에 이건 썩어질 것을 거두니까 간음 안하고 지옥에 가요. 평생 간음 못해보고 지옥 간다니까요?
인간이 어떻게 자기를 위해서 안 삽니까? 그러니까 이 성경 말씀이 늘 우리가 곱게 지킬 수 있는 그런 말이 아니에요. 울산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뉘앙스가 어떤 뉘앙스냐 하면 “목사님 말씀대로 살아야 되는데 요새 내가 사는 것이 너무 편합니다. 너무 편해서 말씀을 안 보게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얼마나 솔직한지.
너무나 안정적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 볼 이유가 없다니까요. 그분은 곱게 자기 육체를 위해서 심는 중입니다. 아무 탈 없이. 그래서 에베소서 6장에서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하죠.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우리의 씨름이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오늘 기생 라합의 고백과 더불어서 이렇게 역어집니다. 뭐냐 하면 우리의 몸을 위해서 살지 말고 우리의 몸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가 있어요. 몸을 위해서 살지 않고 성령을 위해서 살겠다는 것도 자기의 몸을 위해서 사는 거예요. 자기의 이 구원을 위해서. 이 구원을 위해서 사는 것이 자기의 몸을 위해서 사는 거예요. 구원을 위해서 살면서 지옥 가는 거예요.
정작 하나님의 일은 뭐냐 하면 우리에게는 있음이 있기 때문에 관심이 없어요. 다만 우리를 통해서 뭘 뽑아내느냐 하면 예수님의 자기 의를 뽑아내는 겁니다. 아까 예배 전에 불렀던 찬송가에 그런 게 있어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말이 나오거든요.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지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하나님의 일이 피 가지고 일을 하는지. 너무 갑작스럽지 않습니까? 너무 논리 비약이 심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바르게 살아라.” 는 납득이 가는데 “자기 피로 말미암아~”, 그 다음 말이 있어요, “자기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 라고 되어 있어요. “예, 뭐 의롭다 하면 뭐든지 믿겠습니다” 하지 말고 따져야 돼요. “왜 피 입니까? 내가 착할 수 있는 능력도 있고 성경도 좀 알고 바르게 살 수 있는 자질도 있다고 자부하는데, 왜 피 입니까?” 라는 질문을 해야 돼요.
그것은 인간은 자기의 몸을 다룰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났어요. 인간은 내 몸을 다룰 수 없습니다. 다뤄봤자 썩어진 것밖에 나오 질 않아요. 그래서 이 구약 전체는 뭐냐 하면 인간이 자기 몸을 다루는데 실패했던 그 사례집이 바로 구약입니다. 인간이 자기 몸을 다루는데 실패한 거예요.
자기 몸을 다루어서 하나님 앞에 바르게살기를 원하지만 그 바르게 살겠다는 결과물의 보따리를 이렇게 해쳐보면 거기에 누가 들어 있느냐 하면 듬직한 잘 돼있는 내가 거기 들어 있어요. 기생 라합과 다르죠? 기생 라합은 주의 일에 부딪친 것을 감지덕지 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이용해서 “나도 주의 일을 하면 내가 살지요?” 라고 하면서 보따리에 싸서 자기 자신을 너무 귀하게 간수하고 지키려는 의도가 강해요.
아침에도 그렇게 이야기 했지만 사람이 성실하게 산다고 운명이 바뀌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실수 한다고 운명이 바뀌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그냥 물살 같아서 개울가에 물살이 중력에 의해서 높은데서 아래로 내려가잖아요. 내려가면서 물이 이럽니까? “어, 자갈 돌 있네. 피해 가야지.” 이런 거 없잖아요. 그저 부딪치는 대로 물살이 내려가게 되어 있어요. 상류에서 하류로.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내려가는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 하면 또 거짓말처럼 들릴지 모르는데 그게 아니고 마태복음 6장에 보면 그게 나옵니다. 마태복음 6장 27절에 보면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 할 수 있느냐” “들풀을 봐라 누구 작품이냐, 참새 봐라 누구 작품이냐” 솔로몬이 모든 영광으로 옷을 입었지만 아궁이에 집어넣는 들풀만도 못하다고 했어요.
내일 아궁이에 집어넣는 들풀의 영광이 솔로몬이라는 인간이 하는 모든 영광보다 낫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뭐냐? 풀보다도 못하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쓸모없다는 정도가 아니고 인간이 하나님의 의에 훼방자고 방해자가 돼요. 그래서 기생 라합은 자기 직업이 뭐냐, 어느 나라 민족에 속하냐는 것은 신경 안 쓰고 그냥 당겨서 미리 항복하는 거예요.
이스라엘과 함께 있었던 그 여호와 하나님의 태풍 같은 전쟁에서 알아서 기는 겁니다. “졌습니다. 주님 저를 덮쳐주시옵소서. 저를 그냥 밟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섞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하면 구원 되느냐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라니까요. 구원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
그러면 하나님의 의는 뭐냐? 너 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예수님의 피를 들어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왜냐면 그 피 안에는 모든 율법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 피가 있음으로써 율법 근처도 안 간 우리가 율법 다 지킨 사람으로 대우 받습니다. 물론 이걸 또 노리면 안돼요. 이걸 노리면 자기 수작과 자기 작전으로 나가요.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그냥 집에 가만히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내가 가만히 집에 있더라고 이거는 주의 뜻에 의해서 가만히 있는 겁니다. 주의 뜻에 의해서 무탈한 거예요. 다만 우리는 아무 탈이 없으니까 성경도 안 보고 그러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것을 통해서도 지금 그리스도의 의,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의 피만의 능력을 우리 주께서 친히 손아귀에 쥐고 우리로 하여금 끄집어내는 작업이 충실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매일 같이 자신의 기대, 자기 자신의 응원, 자기 자신의 목적과 계획 같은 거 너무 세우지 마세요. 그거는 자기 손가락으로 자기 눈을 찌르는 것과 같습니다. 너무 앞일이나 계획 목적 그리고 소망 같은 거 미리 허세 부리듯이 설정하지 마세요. 그냥 들풀처럼 바람 불면 넘어지고 이쪽에서 불면 이쪽으로 넘어지고, 16강 못 들어가면 안 들어가면 되고, 삼성 라이온즈 깨지면, 깨지면 되고, 그러다 죽으면, 죽으면 되고 이게 우리의 고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싸움이 마귀와의 싸움인데 마귀가 노리는 것이 우리 자신이 잘 되는 것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이게 썩어질 것밖에 안 되는 것을 노리는 악마에 비해서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통해서 날마다 그리스도의 피, 하나님의 의만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