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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여호수아 3:1-3 / 제사장과 언약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여호수아

여호수아 3:1-3 / 제사장과 언약

정인순 2018. 7. 22. 15:56

음성     동영상    Youtube

 

 제사장과 언약

 

 

이근호

2018년 7월 22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3:1-3

(3:1)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서는 건너지 아니하고 거기서 유숙하니라

(3:2) 삼 일 후에 유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3:3)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강은 건너가라고 흐르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멈춰서라고 흐르는 겁니다. 인생에 있어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길게 살아도 결국은 주님 앞에 멈춰설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겁니다. 멈춰서는 이유는, “내 백성인지 아닌지”를 구별하기 위함입니다. 이게 바로 ‘거룩 색출 작업’입니다.

거룩하지 않는 자는 요단강 건너편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약속의 땅은 그냥 일반인이 봐서는 보통 땅입니다. 하지만 약속의 상자를 앞장 세우면 없던 의미가 새롭게 나타납니다. 이렇게 되면 약속의 땅은 곧 ‘없었던 땅’이 되는 겁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없었던 땅’에 들어갑니다.

지금껏 인간치고 이 ‘없었던 땅’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광야’를 통해서 충분히 보여주셨습니다. 광야는 물도 없고 양식도 없는 공간입니다. 죽으라는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그럼에도 살아남았다면 이는 인간들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생명’되시는 분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실 때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이스라엘과 동행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살아남을 때, 그냥 살아남아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살아남아야 하는 겁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 하며는 “나는 살아야 한다”는 고집이 주님과 동행할 때는 용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광야에서 고생 많이 했다고 보상책으로 제공되는 땅이 아닙니다. 살아 있기에 들어가야 하는 땅도 아닙니다. 자기 삶이 우선이 되는 그 어떤 인간도 용납하지 않는 땅이 ‘약속의 땅’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의해서 제공되지 않는 신앙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들이 신을 연상하고 그 기준에 준해서 신을 믿겠다고 하면 이 와중에서 ‘나는 이미 죽었음’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지 않는 거짓 믿음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 있었다면 이는 이스라엘이 살만한 가치가 있었어가 아니라 주님이 다른 생명을 준비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 ‘다른 생명’이란 거룩이며, 그 거룩은 약속에서만 나오는 생명입니다. 노아에 있어 약속이란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것이지만 오늘날에는 ‘내가 죽어있음’이 약속의 내용이 됩니다. 따라서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과 접속되어 있는 자들이 오늘 본문에서 언약궤를 매는 제사장들입니다.

이들은 스스로에 의해서 치장해서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으로 제공된 요소로 인하여 사는 이들입니다. 이들의 신체에는 제물의 기름과 피가 묻어 있습니다. 이로서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되, 냉혹하고 냉정하고 기계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책무가 있습니다. 이성이나 감정이나 심지어 혈육이나 가족에 정마저 날카롭게 잘라내어야 될 자들입니다.

오늘날에는 모든 성도가 다 제사장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오늘날 성도에게도 외부적인 요소가 덮쳐집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한 일서 2:27) 이게 바로 거룩입니다. 즉 인간이 자신의 것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세계가 약속의 나라인 겁니다.

그렇다면 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이 그냥 말씀으로 하실 것이지 왜 싯딤 상자라는 구체적인 형체를 가지고 이스라엘 앞에 나타나는 겁니까? 그것은 ‘약속’이 인간의 지혜에서 도출되는 것이 아니기에 인간이 침범할 수 없는 ‘비워있는 공간’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비워있음’이 그냥 빈 공간이 아니라 ‘천함, 보잘 것 없음, 흠모할 것 없음’으로 채워집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자신들이 살아 있다고 여기는 한, 자기 생존권과 자기 주도권을 포기할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그냥 하나님 계시는 공간이 ‘빈 공간’으로만 남아 있으면 그 ‘빈 공간’을 인간들이 부담없이 추가적인 의미의 공간으로 기존의 자기 공간으로 연합시켜 버립니다.

하지만 그 ‘빈 공간’이 ‘쓸데없는 것’으로 채워지면 인간들은 여기서 분노를 느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인간들은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자기 생존 위주의 본심을 들키게 되는 겁니다. 즉 ‘자기 죽음’을 인정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고려하되 일단 ‘나 생존이 우선이다’는 식으로 버티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되면 “내가 살만 하기에 하나님께서 날 살려내신다”는 논리로 전환됩니다. 약속의 땅에서는 이런 인간 우선 논리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열왕기하 2:19-22에 보면, “그 성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우리 주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 좇아 다시는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그 물이 엘리사의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날에 이르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무 것도 상관없는 소금을 도입하므로서 약속이 우선이지 인간의 생존이 우선되는 것이 이 약속의 땅에서 사는 법칙이 아님을 선지자를 통해서 말해줍니다.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한 자들이 천국을 가게 될 때, 그 앞에서 사람들은 평소에 자기 위주로 사는 생리가 다 들통나는 겁니다.

구원이란, 죽은 자를 살려주시는 겁니다. 왜 우리는 평소에 죽은 자의 행세를 하는지 약속 앞에서 늘 발각되며 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수시로 불평하고 반항한 죄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송민선

194강-여호수아 3장 1–3절(제사장과 언약)

201807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3장 1–3절입니다. 구약성경 322페이지입니다.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사람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지 아니하고 거기서 유숙하니라, 사흘 후에 유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약속의 땅을 앞두고 선뜻 건너가지 않습니다. 약속의 땅에는 약속의 땅이 있다고 해서 갈 수 있는 땅이 아니고 들어가 봤자 약속 못 지키면 추방되어야 하니까 약속과 더불어 가야된다는 겁니다. 약속과 더불어. 약속이 주가 되고, 약속이 갑이 되고, 우리가 을이 되는 그런 종속관계를 유지해야만 그 약속에서 약속만 도드라지게 들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약속이 없어 버리면 자기 자신의 가치만 자꾸 드러내려고 해요. 약속과 같이 가게 되면 약속이 용납을 하지 않습니다. 광야라는 곳은 물 없는 곳이고 양식 없는 곳이에요. 그런데 어쨌거나 살아남았잖아요. 그렇다면 그 광야를 40년 동안 통과하면서 물도 없고 양식도 없는데 어떻게 살아남았느냐. 그건 거기에 하나님이 함께 살아계셨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양식 없고 물 없는 척박하고 삭막한 환경, 거기에서도 그들이 살아남은 것처럼 그걸 그대로 약속의 땅으로 옮겨보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는 물도 있고 양식도 인간이 노동을 하면 얻게 되어 있어요. 그렇지만 어느 때를 잊어서는 안 되느냐 하면 바로 양식도 없고 물도 없었는데 살아남았다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양식도 없고 물도 없다면 인간은 죽는 거예요. 죽어 마땅한데 살아난 것은 하나님은 생명이라는 사실을 그들을 통해서 보여주기 위함이에요. 우리 성도가 오늘날 살아가는 것은 내가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주님이 생명이라는 것을, 길이라는 것을, 진리라는 것을 비천한 우리를 통해서 마음껏 보여주기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낮 설교에서 우리를 기호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무엇을 지목해 버리면 그것은 나에게 와서 의미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도 그 노래를 아시겠지만 보통 하나님께서 성도를 볼 때에 예수님을 경유해서 봐요. 우리를 볼 때에. 우리를 그냥 보지 않고 예수님이 옆에 있다고 치고 성도를 봐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영이 왔기 때문에.

“이거 인간도 아닌 게, 어?” 하면서 옆에 보니까 변호사 예수님이 계시잖아요. “이거 인간도 아닌 게, 어? 예수님 안에서 신부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이 뭐냐 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던 불신자하고는 다르게 대우를 받는 거예요. 다르게 다루어지는 겁니다.

주님보시기에는 주님이 모든 성도에게 골고루 주어졌기 때문에 주님 있는 것은 그 사람, 그 사람이 주님 보시기에는 주와 함께 있는 그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면 신사동 그 사람이 되는 겁니다. 신사동 그 사람이라는 것은 희미한 등불 밑에서 얼굴 마주쳤고, 만나자고 했는데 자정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도 오지 않는 그 사람, 그 신사동 그 사람이 내가 기다렸던 내 사람이란 말이죠.

주님 보시기에 그 사람이 아니고 나에게 의미가 있는 신사동 그 사람, 노래 한번 불러 봐야 돼요? 우리는 맨날 나에게 의미 있는 걸 찾아요. 나에게. 나에게 의미 있으면 광야에서 못 살아요. 광야에서 못 삽니다. 광야라는 곳이 어느 정도 재미있느냐 하면 죽음에서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발라서 하나님께서 건져 냈잖아요? 그 죽음의 의미가 그걸로 종결되었다고 착각한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의 피, 그 어린양의 죽음을 확대시켜 놓은 것이 광야의 죽음입니다. 이거는 죽음을 이용하지 말고 죽음에 동참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죽음에 동참하는 것은 이 더운 날 땡볕에 일하고 그런 힘든 고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생각했던 나에게 왔던 모든 것을 신사동 그 사람처럼 전부다 나에게 다 연관시키는 그 연관이 이제는 뭔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비로소 현재의 지금이 되었다는 겁니다.

누구를 만날 때에 예수님께서 만나게 해 주셔서 만나는 거예요. 항상 주선자가 예수님이 주선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기도제목에서 자기 인생가지고 반항하지마라고 했지요. 주님 보시기에는 아주 적절한 겁니다. 최적의 상태예요. 아주 멋있어요. 그래야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약속이라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 여기 3절에서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라고 되어 있어요. 언약궤를 보거든 건너가라. 언약궤를 보거든 건너가는 이유가 요단강이 인간적으로 막 건너야 될 강이 아닙니다.

죽을 때 그냥 죽으면 안 되죠. 보통 요단강하면 나오는 노래가 ‘요단강 건너서 만나리’ 장례식의 장례 이야기죠. 요단강 건너서 만나면 안 만나집니다. 요단강 건너기 전에 미리 언약궤를 만나야 돼요. 그리고 언약궤를 그냥 만나면 안 됩니다. 언약궤를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그 관계성이 형성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언약궤의 긴 시간의 그림자가 바로 나라는 겁니다. 나는 그냥 그림자예요. 내가 본체가 아니고 내가 인생의 주인공이 아니에요. 예수님 이야기의 긴 그림자가 나의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주인공은 주님이기 때문에 주님과 미리 만나지 아니하면 요단강을 건널 수가 없어요.

나중에 나오겠습니다만 실제로 요단강 건너갈 때에 주님께서 얼마나 철저하게 조사를 잘 했는지 요단강 물이 불어나되 저 쪽에 30km 전에서 멈추게 했어요. 그게 거의 100리 가까이는 안 되지만 엄청난 거리죠. 여기서 경상 가는 거리 쯤 될까? 더 멀지요. 그렇게 긴 거리동안을 요단강에서 물이 흐르지 못하도록 차단시켜 놓은 거예요.

그러면 건너가는 사람에게는 물이 차단된 것을 모르고 그냥 건너가면 안 되죠. 어차피 홍수로 흘러서 못 들어갈 곳인데 주님께서 흘러가는 저쪽 상류를 막았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마른 땅을 건너가고 있음을 받아 들여야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을 경유해서 내 인생을 하루하루 보자고 말씀드린 겁니다.

자기는 예수 믿고 편하다고 해가지고 당연히 편한 걸로 여기시면 안 됩니다. 누가 저 상류를 막아 놓았어요. 상류를 막아 놓았다는 말은 그러면 그 보는 언제 터지는가? 내가 약속과 결별될 때, 약속을 잊어버릴 때, 약속이 뭐가 중요해라고 생각할 때에 상류에서 물이 흘러 들어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답답해하지요. ‘어찌하여 내게 이런 일이 생깁니까?’ 라고 하죠.

죽은 인간 살려 놓으니까 또 살려고 하잖아요. 자, 그렇다면 그걸 말로하면 되는데 왜 언약궤라는 싯딤나무로 만든 그 상자를 왜 앞장세우고자 하는가? 시청각 교육을 하려고 그렇게 언약궤를 앞장 세워야 하는가? 라고 할 때에 언약궤를 누가 가장 가까이에서 접속하는 지를 봐야 해요. 그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여기 3절에 나온 레위사람들 제사장입니다.

레위 사람들 제사장이라는 사람은 여기서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사람이에요. 어떤 대표적인 사람이냐 하면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에 이렇게 가까이 해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자예요. 이 레위인들, 특히 제사장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거룩한 사람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잘못 생각하면 윤리적 도덕적으로 어떤 도사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건 바리새인들이 그 짓 한 거고요.

제사장에서 거룩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신체 부위에서 자기가 아닌 다른 외부적인 요소가 주류로서 자기를 지배하는 형식을 갖는 것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제사장들에게는 피가 뿌려져요. 복장도 물론 자기 스타일이 아니고 주께서 지정한 유니폼을 입지만, 하나님의 제물의 피와 기름이 묻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제사 지낼 때마다 그런 거예요. 이것은 외부에서 통제가 있고 흔들고 있다는 겁니다. 외부에서 나를. 아까 기도할 때도 그랬지만 이 사람들은 하나의 과제를 받은 거예요. 과제를 받은 사람들은 자기편이 몇 명인지, 구경꾼이 몇 명인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과제 주신분이 지금 지켜보기 때문에, 주님이 지켜보기 때문에 충실히 그 과제를 할 뿐이지 내가 지금 착실히 공부하는데 나보고 사진 찍고 칭찬해 줄 사람 몇 명 있는지 두리번거리면서 찾으면 안 돼요.

그래서 성도가 외롭다고 하는 것은 지금 자기 과제를 놓친 겁니다. 주님 한분만 있으면 돼요. 종이 되어서 시킴을 받는 종 있고 주님 있으면 됐지 뭘 더 필요로 하십니까? 뭐 연극 벌입니까? 관객들 찾고 있어요? 제사장들은 이 언약궤를 메는 순간에 백성들과 결별해야 됩니다. 백성들이 죽든 말든 자기 관할이 아닙니다. 자기 관할 사항이 아니에요.

제사장의 특징은 냉혹하다는 거예요. 냉정한 킬러처럼. 굉장히 냉정해야 돼요. 왜냐 하면 백성들의 총 숫자보다 더 무서운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죠. 그리고 제사장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 혈육 관계도, 가족관계도 주의 일을 할 때에는 접어야 돼요. 그거 의식하면 안돼요.

꼭 기계 같습니다. 하지만 기계와의 차이점은 기계는 피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죠. 그런 차이점이 있을 뿐이지 제사장은 자기의 감정, 이성 다 접어야 됩니다. 엄중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과제를 수행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신경 쓸 수가 없어요. 물에 빠져 죽든 말든 그건 자기들 일이고 자기들은 할 거 해야 합니다.

이게 바로 거룩입니다. 날카롭지요. 면도칼로 잘라버린 겁니다.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과제를 받고 주의 지시를 따르는 사람, 오늘날 모든 성도가 거룩한 제사장들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의 말씀처럼 모든 성도가 바로 제사장들이에요. 그래서 요한 일서 2장 27절에 나온 것처럼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거예요. 외부적인 요소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어요.

이번 수련회에 할 말씀 잠시 해 볼까요?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풀을 발랐다는 말이에요. 개인과 개인 사이에. 그걸 강정이라고 언젠가 이야기 했는데 쌀과 쌀 사이에 엿을 바르면 강정이 되잖아요. 거룩한 거, 풀(glue)을 바른 거예요. 풀을 발라버리면 개인이 개인적으로 행동을 못합니다. 남들 보기에 혼자 일해도 그 성령의 풀 때문에 집단의 일을 지금 티 나게 일하는 거예요.

혼자 일해도 여럿이 하는 일이고 여럿이 일해도 혼자 일이기 때문에 개인이냐 전체냐, 전체냐 부분이냐는 것은 성령 안에서는 해당사항이 없어요. 혼자 뭔가 꾸준히 해도 그건 주의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골프 쳐도 주의 일이라니까요? 크루즈타도 주의 일이에요. 본인이 주의 일 하고 있으면 주의 일이에요. 주님의 과제를 받고 지금 숙제하고 있는 거예요. 숙제 치고는 좀 신나는 숙제지만 숙제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제사장 모습입니다. 그러면 이게 제사장 모습일 때 다시 말씀 드려서 왜 그들에게 하게 할 때 그 나무상자를 가지고 하게 하느냐는 이 말은 지금 나무 상자에 주목을 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말이 참 어렵죠? 아무것도 아니란 사실, 비어 있는 것이 이스라엘을 인솔하고 있고 이끌고 있다는 것을 지금 이야기 하고 위해서 그 비어 있는 장소에 아무것도 아닌 것을 거기에 배치를 하는 겁니다.

이게 역설이에요. 아무것도 없음을 우리 같으면 아무것도 없이 빈 공간으로 남겨둬야 하는데, 빈 공간으로 남겨두는 것보다 더 큰 효과가 뭐냐 하면 아무것도 아닌 걸 거기에다 집어넣는 거예요. 그게 바로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라는 말씀과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 품에 안기는 거,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집나간 탕자, 불의한 청지기, 이런 불의한 것들을 빈 공간에 두는 겁니다.

모든 자가 욕하도록, 모든 자가 되먹지 못했다고 욕하도록, 못 믿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믿어 버리면 그건 불교가 되는 거예요. ‘나는 아무것도 없는 것을 믿는다’가 되어 버려요. 그러면 아무것도 없으면 우리에게 반격이 되지 않아요. 우리에게 화를 초래할 요소가 되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런데 되지도 않는 세리와 창기가 만약에 천국을 간다면 이거는 평소에 자기의 경험과 거룩을 유지하려는 그 사람에게는 이거는 도발적인 사태가 벌어지는 겁니다. 바로 그 방법을 사용하는 거예요.

강도가 구원받는 거 보세요. 그것도 살인강도가 예수님 옆에서 구원 받는 거 보세요. 같이 옆에 있는 것은 지옥 갔지만.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이끌 때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만나를 통해서 계속 주신 겁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빈 공간과 결부해 보면 계속해서 자기를 비우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주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만약에 내 자식이 사법고시 했다 해도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금메달 땄다 해도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제가 지난번에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신보라라는 그 개그우먼이 상 받을 때에 여자부분 최고 개그 상을 받으니까 소감을 이야기 했는데 “나는 이 상도 중요하지만 이것보다도 예수의 피가 더 좋다” 라고 전국에 생중계 되고 있는데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생중계인데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교회목사에게 얼마나 세뇌를 받았느냐, 평소에 목사가 그런 일이 닥칠 줄 알고 이렇게 멘트를 날리라고 사전에 준비를 했는지 그건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건 상당한 용기예요. 그것도 장래에 종교적 색채가 짙다고 출연 정지시킬 수 있는 문제인데 상당히 큰 용기란 말이죠.

그렇게 떠벌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말고 평소에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나에게 과도한 착함을 요구하고 희생을 요구할 때, “난 그거 못해. 왜? 난 아무것도 아니니까?” 거기에 적절히 적용될 수 있는 말이죠. “너는 착할 수 있는데 왜 안착해?”, “아무것도 아니니까” 이게 잘못된 적용 아닙니다. 제대로 된 적용이에요.

사람에게는 선악이 있기 때문에 자꾸 가치 있는 쪽으로 나오려고 합니다. 뉴질랜드에서 어떤 목사님이 저에게 어떤 질문을 했어요. 그 질문 내용이 열왕기하 2장 19절인데요. 그 질문 내용을 같이 한번 풀어 봅시다. “그 성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우리 주인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 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그 물이 엘리사가 한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에 이르렀더라”

이 대목에서 질문이 뭐냐 하면 “소금은 왜 붓습니까?”입니다. 토지가 기름지지 못한 척박한 토지라 소산물이 나오지 못하는데 그걸 엘리사에게 부탁했어요. 갑자기 생산물이 안 나오니까 조치를 취해 달라 하니까 소금을 가져오라고 한 거죠. 그래서 소금을 가져와서 부으니까 땅이 아주 기름진 땅이 되어서 많은 곡식이 열렸다는 거죠. “왜 소금입니까?” 가 질문이에요.

그래서 제가 답변했죠. 무관한 것이 모델입니다. 무관한 것이. 인간이 예상 못한, 하나님이 이러할 것이라는 예상을 빗나가게 함으로써 너는 약속 없이는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약속이 살기 위해서 종속된 상태에서 사는 것이지 약속을 이용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약속이 살아났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노출시키기 위해서 종속된 상태에서 네가 살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들에게 곡식이 안 되고 어려울 때는 원인이 뭐냐 하면 “우리는 곡식이 잘 돼서 제가 배부르고 만족해야 됩니다” 라는 그 자체가 이미 약속의 땅의 뜻에 위반되는 거예요. 약속이 주가 되어야 하는데 좋은 땅에 살아서 내가 잘 먹고 잘 살아야 된다는 것이 주가 되어야한다는 거예요.

이걸 역전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상류의 물을 터뜨려 버리는 겁니다. 너는 들어올 수 없는 땅에 들어왔다는 것을 다시 인식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아이고, 곡식 지어도 곡식이 없네요?”라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거 당연한 거 아니야? 그게 원래 주제에 맞는 거야. 굶어 죽는 것은 너의 주제에 맞아.” 라고 하시는 거죠. 그런데 약속 때문에 우리가 사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약속 좋지요. 약속 알지요.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거 모를 리가 있습니까?” 합니다. 주님은 “아니야, 너희들은 몰라” 라고 하십니다. 왜 모릅니까? 내가 살아야 된다는 것이 약속을 가려버린 거예요. 내가 살고 살면 주님 더 좋게 예후해 드리고 하면 순서가 바뀐 거예요.

나는 죽는다 할지라도 주님만 높아지면 그걸로 족하다는 이런 세계, 이런 세상에 들어왔는데 그게 아니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세상에 들어 온 거예요. 주님께서는 약속의 땅을 힘들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무 상관없는 소금을 침으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되었어요. 그러면 그 다음에 또 만약에 거름을 줘도 안 될 때는 그 사람들이 또 뭘 동원하겠습니까?

소금 동원할 거예요. 그게 인간이 얼마나 무식한지를 보여주는 거예요. 이러한 예수님의 예상 못함이 뭐냐 하면 부활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는 겁니다. 죽음과 부활, 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냐하면 눈으로 예상이 되거든요. 살아 있는 내가 어떻게 하면 천당 갈지 하면서 필요한 것은 다 주워 모으면, 무슨 요소가 여기에 들어 있지 않느냐하면 내가 죽었다는 사실이 빠져 있는 거예요.

내가 죽지 않았는데 나에게 믿음이 생긴다면 그런 일은 없습니다. 믿음이 이미 왔습니까? 그럼 나는 죽은 자예요. 이건 뭐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믿든 안 믿든 나는 몰라요. 이게 약속이라니까요. 노아는 방주 만들기가 약속이라면 오늘날 우리 약속은 뭐냐 하면 ‘나는 이미 죽었다’라는 조건 하에 신앙이 온 거예요.

죽었다는 조건 하에 주님이 갑이 되고 나는 을이 되는 그런 관련성이 맺어지는 겁니다. 아까 기도 할 때 했지만 자기 인생 반항하지 마세요. 반항이라는 것이 뭐냐, 나부터 살고 그 다음 주님 섬기겠다는 이런 거래 같은 흥정 같은 거예요. 그건 예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상 되는 건 아니에요.

우리가 앞으로 당할 것은 앞으로 예상 못할 일들이 어떻게 다가올지 알 수 없습니다. 예상 못할 일에 많이 다쳐요. ‘주님 그걸 못 참겠는데요.’ 못 참는 이유가 있죠. 모든 걸 아침 눈만 뜨면 예상 가능한 일만 하는데. 예상 밖의 일은 다 놓치는 거예요. 은혜 받아 놓고도 그걸 놓치는 겁니다. 은혜 받아 놓고도.

차 운전 할 때만 공격하는 게 아니에요. 사고 나도 괜찮은데 사고 안 나고 교회 왔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주님께서 요단강 상류에다 물을 끌어 놓은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룰루랄라 물 없으니까 우리가 통과 할 수 있겠다고 하는 거죠. 통과해도 소용없어요. 예수님을 경유해서, 예수님을 높이라고, 예수님을 인정하라고 주님께서 우리를 아무 차사고 없게 하신 거예요. 예수님을 경유해서 하라고, 예수님을 증거 하라고 그렇게 하신 겁니다.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말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는 것은 우리 것을 받지를 않으시고 예수님 것을 통해서 받은 의와 믿음과 소망 사랑 전부다 예수님 것을 받습니다. 우리가 할 것은 밥풀떼기처럼 옆에 붙어 있으면 돼요. 예수님과 붙어 있는데 그게 우리가 예수님을 이용한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과제를 줘요. 숙제를 준다고요.

“오늘은 골프 쳐라, 오늘은 차 바꿔라, 아파트 넓혀야지”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우리에게 과제를 줘요. “KTX 여자 직원은 이제 10년 만에 돌아 와야지. 그것도 6급 경력 사원으로.” 당연한 권리 아닙니다. 우리는 어떠한 권리도 없고 다만 우리의 권리는 주님의 주신 것을 누릴 권리만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상한 주님 가지고 주님과 사귀려고 쓸데없는 짓 많이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기뻐하시겠지, 저렇게 하면 싫어하시겠지 하는 것이 오해이고 곡해인 것을 이제는 알았습니다. 무슨 짓을 해도 주께 영광이 되려면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주님 시키는 대로 움직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