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송민선 189강-여호수아 1장 10–15절(정복 지시)201806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1장 10–15절입니다. 구약성경 320페이지입니다.
“이에 여호수아가 그 백성의 관리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진중에 두루 다니며 그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양식을 준비하라 사흘 안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사 차지하게 하시는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들어갈 것임이니라 하라, 여호수아가 또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너희의 처자와 가축은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쪽 땅에 머무르려니와 너희 모든 용사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보다 앞서 건너가서 그들을 돕고, 여호와께서 너희를 안식하게 하신 것 같이 너희의 형제도 안식하며 그들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그 땅을 얻게 되거든 너희는 너희 소유지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쪽 해 돋는 곳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차지할지니라”
이 이스라엘은 야곱의 언약에 의해서 생겨날 수 없는 자손들이 생겨 난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언약의 백성이 아닌 자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애굽의 사람들이에요. 애굽에 살던 바로의 백성들은 언약이 없고, 여기에 본문에 나와 있는 여호수아와 함께 있는 이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생겨난 백성입니다.
따라서 이 약속의 땅, 안식의 땅이라 하는 것은 언약의 백성이 된 자들에게만 허용되는 땅입니다. 언약이 없는 이방인에게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방인들에게는 천국이라는 것은 없어요. 지옥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보면서 ‘아, 나는 이 좋은 땅에 들어가야지.’ 라는 이런 생각하지 마시고 내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새로 만들어진 존재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언약 없이, 언약이 없는 것을 ‘반언약’ 이라고 하는데, 언약과 관계없이 언약을 무시하고 싸우는 쪽에 속하는 인물인 지를 봐야합니다.
제가 처음에 설교 시간에 이야기 했습니다. 언약이 없는 사람들은 애굽적이라고 했습니다. 애굽에 있는 사람들은 언약이 없다는 것은 뭐냐 하면 그들은 할례라는 것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에요. 자기의 대대로 내려오는 가문이나 혈통 이거 붙들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할례라는 것은 그 가문과 혈통을 절단 내는 겁니다.
단멸, 단절이라고 하는데 할례라 하는 것은 육으로 나지 아니하고 영으로 난다든지, 다른 말로 하면 육으로 나지 않고 약속이 개입해서 그 약속으로 새로운 노선이 형성되어서 약속노선에 새롭게 편입된 대상의 집합, 무리가 바로 언약의 백성입니다.
세상의 모든 민족들은 조상제사를 드리지요. 하지만 이스라엘은 조상제사 지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조상으로 인하여 자기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도 언약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항상 제사는 언약이 중심이지 조상이 중심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추도예배 같은 것은 어떻게 되는 가? 추도예배 할 때 주인공이 있기 마련이에요. 그 주인공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볼 때에 죄인입니다. 그래서 추도예배는 죄인을 위해서 드리는 예배가 추도예배예요. 아주 정의 내리기 쉽습니다. 죄인을 높이고 죄인을 부추기는 게 추도예배예요.
그러니까 그 추도예배는 꼭 드려야 되는 겁니다. 말이 희한하게 되는데 뭐냐 하면, 우리 아버지가 우리에게 교육시킨 것이 얼마나 비 신앙적인가를 다시 확인 시켜주고, 확인 사살하는 예배, 그 아버지를 닮은 내가 또 이 순간 예수님의 십자가의 뜻과 얼마나 위배되게 살아가는 가를 확인 사살하듯이 다시 말씀을 주시면서 돌아보게 하는 시간, 이것이 추도예배의 의의니까 추도예배는 드려야 하겠죠. 앞에 추도는 빼고요. 그냥 무시로 예배드리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의 백성이니까 하나님께서 순하게 이들을 언약의 땅으로 가게 하겠지, 땅은 언약의 땅이고 백성은 언약의 백성이니까 아무 문제가 없겠지 했는데 여기 문제가 큽니다. 왜 문제가 크냐 하면 이들이 언약의 백성이라 하는 것은 완전한 배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안에 들어 있는데 그것이 애굽적인 성질이 위에 겹치고 겹치고 또 겹쳐 있다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한 겹을 뜯어내면 되죠. 빵에 보면 이런 게 있잖아요. 얇은 밀가루 껍질이 계속해서 겹쳐서 쌓이고 쌓이고 한 게 있어요. 페이스추리라고 하죠. 껍질만 있는 빵, 안 쪽은 아무것도 없고요. 인생이란 태어나면서 언약에 의해서 구원받은 백성이라도 세상 살아가면서 겹겹이 먼지가 쌓여있어요. 언약은 그걸 제쳐버리죠.
저는 그걸 유물 파괴라고 하는데 고고학에서 땅 깊숙이 있는 모래먼지에 묻혀 있는 그것을 사람들은 모래더미로 여기지만 그 유물의 흙을 다 떨어내게 되면 정작 그 사람의 본질은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 성도라 할지라도 매일같이 언약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언약을 덮는 식으로 우리 육신이 작용하기 때문에 계속 덮고 덮고 또 덮지요.
그게 교회에서도 예가 있는데 사람들이 성경말씀을 보면서도 앞에 요란스럽게 찬양집회를 많이 해요. 찬양집회를 그렇게 하는 이유가 감정을 고조시키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북 치고 장구치고 드럼이랑 기타도 하고 이렇게 하게 되면 사람이 감정이 업 되죠.
감정이라 하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을 자신의 본심을 순간의 감정으로 그냥 대충 속여 보려는 짓거리입니다. 따라서 감정을 전부다 제거해 봐야 돼요. 감정을 다 제거 하는 방법은 쉽습니다. 부흥회하고 은혜 받아서 할렐루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 와가지고 “집에 가스불 안 꺼서 불나가지고 지금 소방차 왔습니다” 하면 감정이고 뭐고 갑자기 현실로 확 돌아서죠.
감정이라 하는 것은 일종의 놀이나 오락 같은 거여서 찬양의 위험성이 그렇게 위험한 겁니다. 찬양이라는 것이. 자기 자신을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조종하려고 하지만 실제적인 것이 오히려 그 순간에 감춰지게 되죠. 그래서 감정을 걷어 내는 방법 그리고 그들의 본성을 들어내는 방법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싸우게 하는 것, 싸움에 나서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싸움은 무엇의 싸움이냐 하면 인간의 유한성과 그리고 하나님의 무한성과의 싸움이죠. 인간의 유한성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모든 관계가 인간 대 인간의 유한적 관계를 가지고 자기 자신을 억지로 가져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잡지사에 글을 실면서 생계를 유지 한다 칩시다. 이런 사람들을 자유 기고자, 프리랜서라고 하죠.
조선일보나 동아일보에 글을 기고해서 원고 비 받고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 또는 영화를 찍더라도 자기 영화가 없고 누가 필요하거나 스텝이 필요하다 하면 거기에 뛰어들어서 일하는 사람들 또는 보조 연기자들이 있는데 만약 자유 기고자가 글을 써서 원고 비 받는데 어느 날부터 자꾸 청탁이 줄어들어요. 자꾸 줄어 들면 자기 생계가 위태롭겠지요?
그러면 그 때부터 인간의 유한적 인과 관계를 따지기 시작해요. 내가 왜 청탁 일자리가 줄어들었지? 관심사가 남북통일로 가서 그런가? 아니면 월드컵으로 빠졌는가? 아니면 경제 사정이 원래 나쁜가? 경쟁자들이 많아서 그런가? 신문사에 예산이 부족한가? 그때부터 온갖 유한한 관계성을 전부다 도출해 냅니다.
목적은 하나예요. ‘왜 내 생활비가 많이 안 들어오지?’ 딱 그거 하나 때문에 그거 하나 중심으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다시 분석하기 시작하고 점검하기 시작해요. 인간이 자기 인생을 점검한다는 자체가 벌써 이건 뭔가 잘못된 겁니다. 여러분들이 컴퓨터 키보드 판에 타자 칠 때 타자 일일이 다 보고 치려고 하면 맨날 틀려요. 그러면 타자 칠 때 어떻게 하느냐 안 보고 치는 겁니다.
안 보고 치면 제일 안 틀립니다. 인생은 그냥 가는 거예요. 그냥 사는 것이지 점검하고 따지고 분석하고 원인 찾고 그러면 그 자체가 일방적으로 세상을 평가하는 것밖에 안돼요. 나의 생존에 유리한 방식으로 일방적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세상은 내 중심으로 안 돌아가는데 갑자기 세상의 모든 시사까지 동원해서 ‘신문사에서 글 좋다고 칭찬하더니만 요새는 끊겨서 집세도 못 내고 왜 이렇게 살지?’ 하면서 불안 불안하기 시작한 거예요.
이게 바로 애굽입니다. 언약이 없어요. 언약 중심이 아니고 내 중심으로 나만 살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나만 살면. 나만 감정으로 업 되면 그만이고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고 내 살림살이 나아지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한국당이 패배했다. 그 원인을 분석해 보니 홍준표가 너무 심한 말을 했고 문재인의 평화기조 덕분에 그 쪽은 표가 많이 나왔다. 이렇게 따지는데 그거는 잘못된 거예요.
세상은 한국당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언약 중심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이러한 정치적인 변화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그 만큼 많이 줬거든요. 줬음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이야기 나오고 한국당 이야기 나온다고 하면 이 페이스추리 껍질을 벗겨야 하는데 벗길 기회를 또 놓쳐 버린 거예요.
‘이번에 떨어진 것은 홍준표 때문에 그렇다’ 하면서 자꾸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이 세계가 무조건 잘 되어야 한다는 일방적 세계를 옹호하고 정당화하기 위해서 또 외부적인 원인을 가지고 자기를 덮어씌우는데 그렇게 되면 주께서 벗길 유한성이 더 많아지게 되어 있어요.
유한성을 벗겨 내게 되면 거기에 뭐가 남게 되느냐하면 필연성이 남아요. 필연성이라는 것은 요지부동, 어떤 일이라도 이미 확정된 모습 그대로 노출되는 것이 필연성이 돼요. 그 필연성은 십자가 앞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뭐냐 하면 십자가 앞에서 필연적으로 저주의 대상이고 심판의 대상입니다. 필연적으로 그래요.
그러면 이미 우연성, 내가 힘든 것은 어떤 남 때문에 그렇고, 부모가 안 도와줘서 그렇고 하는, 그런 거 다 거덜 내고 정말 십자가 피 앞에서 똑바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되게 되면 이거는 확정된 겁니다. 이거는 요지부동이죠. 그게 뭐냐 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안식입니다.
최종 지점이 그 지점이에요. 더 이상 어떤 변화가 주어진다 할지라도 이 자리는 요지부동, 변하지 않는 거, 딱 창조 전에 이미 확정된 그 자리를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맛보게 하시는 겁니다. 좋다 나쁘다 내 쪽에서 따지지 마세요. 우리는 그걸 따질 입장이 안 됩니다.
주신 자리가 영원한 영생의 자리라면 그 원인에 대해서 내 행함을 집어넣지 마세요. 오히려 내 행함은 뜯겨 나가야 할 것이지 내가 이 만큼 노력했기 때문에 영생의 자리를 확보했다는 그런 잘못 된 자리를 갖고 있으면 안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은 왜 그렇게 주어지는 가? 그 주어지는 이유는 제가 쉬운 예를 들면 우리가 자신을 넓은 주차장으로 보느냐 아니면 로터리로 보느냐하는 겁니다.
주차장들은 차들이 와서 거기에 주차를 계속 하게 돼요. 계속 쌓이게 된단 말이죠. 로터리라 하는 것은 돌고 빠져 나가요. 돌고. 우리 인생이라 하는 것은 왔다가 만나다가 만나고 사라지고, 만나고 사라지고, 왔다가 벗겨지고 왔다가 벗겨지고 할 것들이에요.
철 따라 옷 같은 경우는 여름에 인견을 입기도 하는데, 인견이 참 시원하다고 해요. 그런데 그거 가을철 되면 못 입죠. 여름 되면 여름 옷, 가을되면 가을 옷, 이런 것처럼 한번 왔다가 가버리는 거예요. 여러분들도 이런 생각을 많이 했을 건데 ‘이번 일만 되면 나는 더 소원 없다’ 하는 경우 있죠? 그러나 그 일 되어 보세요. 얼마 안가서 굉장히 시시하고 식상해요.
만일 어떤 분이 우리교회에 한 20억 주고 예배당 지으라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믿음이 다 좋으니까 ‘또 쓸데없이 예배당 지어야 하나. 그런 귀찮은 일 해야 되나?’ 라고 다들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화장실도 밑으로 내려가면 되지 뭐 꼭 옆에 있어야 되나? 꼭 20억 자리 건물 들어서서 이렇게 편하게 살아야 되나?’ 이렇게 되는데 혹시 여러분 가운데서 ‘와, 20억 들어와서 예배당 지으면 나는 이런 설계를 제안해 볼까?’ 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지어 봤자 6개월도 안가서 별로 좋아지지 않아요. 그냥 시시해요.
손녀가 멀리 있는데 와서 5개월만 같이 한번 살아 봤으면 하시죠? 제가 죽는 줄 알았습니다. 3개월 있기로 했는데 몸이 아파서 2개월 더 연장했을 때 ‘도대체 나의 안식은 어디 있는가? 나의 필연적인 자리는 어디인가?’ 라고 생각하게 되죠. 로터리처럼 한번 와 봐야 돼요.
와보고 세상의 온갖 맛있는 거, 즐거운 거, 행복한 거, 그거는 네가 경험 안했기 때문에 그것이 마치 안식인 냥, 천국인 냥 여기지만 그냥 바람같이 왔다가 바람같이 사라지면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말아야 돼요. 오늘의 설교 핵심은 뭐냐 하면 우연적인 요소는 어차피 다 뜯겨져 나갈 거니까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속히 다 떨어져 나가는 것이 좋아요.
내 것이라고 쥘 필요가 없단 말이죠. 자식도 그렇고 뭐든지 다 로터리로 왔다가 헤어지고 왔다가 헤어지고 하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그 일에 대해서 이 우연적인 요소와 필연적인 요소가 도착하는 그 상황에서 그들은 전쟁을 해야 되는 겁니다.
먼저 이 요단강을 보게 되면 요단강을 건너갈 때에 언약궤를 앞장 세워서 요단강을 건너가게 하세요. 요단강을 건넌다고 하는데 전에 홍해 건널 때에도 마찬가지고 요단강을 건널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 강을 두고 들어가라고 하면서도 들어가지 마라고 이렇게 옆에 장애물을 두느냐는 말이죠. 홍해도 마찬가지고 요단강도 마찬가지예요.
진퇴양난의 지경에 빠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면 그 안식의 땅은, 다시 어렵게 말해서 그 필연적인 내 자리는 내가 구경해 봐야 경험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이 단절을 통해서 경험하게 하시는 겁니다. 언약의 사람이 되어야 언약의 땅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언약의 사람이 되려면 언약을 덮고 있는 애굽적인 요소를 뜯어내야 되는데 그 뜯어내는 방식은 우리 힘으로는 안돼요.
우리로 하여금 내 힘으로 했는데 안되는 게 있어야 돼요. 안되는 게 있어야 되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포기하는 게 있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자신을 굉장히 가치 있는 존재로 대단한 존재로 착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가지고 천국에 보내시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우연적인 요소로 인하여 내가 마치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고 오히려 나를 무시하지 마라는 식으로 나서는 거예요. 월요일 저녁 8시인가 9시에 한국과 스웨덴이 축구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계산해요. ‘그래도 0:0으로 가자, 1:1로 가자, 2:1로 이길까?’ 라고 하는데 지는 건 없어요.
그런데 만약에 8:0 추천하면서 손 들면, 그것도 우리가 지는 것으로 8:0 추천하면 그게 정답이에요. 뭐든지 예상하는 것에 대해서 자기를 무시하고 들어가야 됩니다. 나를 무시하지 않으면 사는 게 괴로워요. 사는 게 굉장히 힘들어요. 성도로 사는 지혜라는 것이 무지하게 간단합니다. 본인을 상대가 나를 무시하는 것 보다 더 무시하는 거예요.
이걸 ‘자기를 미워하라’ 라고 하는데 자기를 무시하면서 상대와 싸움에 나서게 되면 그건 백전백승입니다. 질 리가 없어요. 왜? 자기가 벌써 패배를 인정했는데. 이길 생각을 안 하는데, 이미 이길 생각을 안 한다는 그 자체가 필연적이에요. 왜?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패배자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인간도 아니니까. 그 고정된 자리에 필연적인 나의 위치, 나의 입장, 천국에서의 내 모습, 내 처지를 미리 당겨서 나를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면 감사와 감사, 고마움과 고마움 외에는 아무것도 남을 것이 없고 다 기쁨으로 충만하지요. ‘거봐, 내가 8:0으로 진다고 했잖아.’ 하면서. 4년마다 돌아오는 월드컵이라는 것이 필연적이 아니고 우연적이죠. 저도 괜찮을 정도로 우리의 소속은 천국의 소속이 되는 겁니다. 약속으로 구원받지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이긴다고 내가 천당 가는 건 아니거든요. 감정적인 요소 이런 것은 다 뜯어내야 합니다.
바로 여기 13절부터 나오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이 므낫세 반 지파와 갓 지파는 자기 사는데 급급해서 싸울 생각 안하고 목초지를 보고 성급하게 민수기 32장에서 “저 땅을 나에게 주세요. 나는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살 생각만 했어요. 그러니까 여호수아가 그걸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네가 언약적인 싸움, 다시 말해 우연적인 것이 뜯어지는 싸움에 그 상황에 네가 참여하지 않으면, 네가 이 땅을 차지해도 고마워 할 줄 모르고 감사할 줄 모른다.” 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무조건 하나님의 언약에 있어요. 아무것도 안했는데 들어왔다면 굉장히 미안하죠. 아까 준비 찬송할 때에 ‘부족하나’ 라고 했는데 내가 부족한 건 맞아요. 8:0이니까. 부족한데 영접해 주시는 거예요. 이게 미치는 거예요. 앞뒤가, 원인과 결과가 이 세상적 관점으로는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어떻게 부족한데 나쁜 짓은 다 했는데 어떻게 영접이 되냐는 말이죠.
언약 때문에, 이미 확정된 언약이, 하나님의 십자가 언약이 부족한데 영접이 돼요. 그러면 이 세상에서 사람들 앞에 나설 때, 안 믿는 가족들 앞에 나설 때, 이것만 가지고 나서시길 바랍니다. “그래, 나 라면도 못 끓이고 설거지도 못해. 하지만 주께서 이런 나를 영접해 준다고.” 부족하나 영접해 주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거. 이 전쟁을 남과 전쟁하지 말고 나부터 내 안에서부터 제일 마지막 최후에 3차 전쟁은 내 안에서부터 매일같이 이루어집니다.
부족하다. 하지만 영접이다. 마귀는 말합니다. 괜찮아져야 천국 간다. 맨 날 이 싸움, 우리 힘으로는 뜯을 수 없습니다.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부족함을, 주께서 피 묻은 손으로 계속 뜯어 내셔서 우리의 부족한 것을 보게 하시는 겁니다. “너는 이것 밖에 안 된다. 하지만 나는 너를 영접한다.” 이 기쁜 복음의 소식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식, 우리가 가고 싶은 곳, 하지만 그들이 용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직면했습니다. 주어진 상황 하나 하나가 주의 복음을 거스르는 전쟁터라는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