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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여호수아 1:7-9 / 율법과 땅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여호수아

여호수아 1:7-9 / 율법과 땅

정인순 2018. 6. 10. 15:56

음성            동영상

 

 율법과 땅

 

이근호
2018년 6월 10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1:7-9

(1: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1:9)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에 여러 가지 요소가 함께 나옵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이 나옵니다. 그리고 율법이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오십니다. 이들 요소들이 뭉쳐서 형성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언약의 완성’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들만이 있어서는 언약완성, 곧 천국이 생겨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들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 대자연의 성질의 일부가 되어 같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러움은 곧 ‘저주스러움’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인간이라고 우겨도 창세기 3장에 나와 있듯이 인간은 자연의 저주 앞에 버텨낼 재간이 없습니다. 살고자 애쓰는 바로 그것이 죽음과 저주를 가속화 시킵니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이유는, 인간을 둘러싼 이 대자연이 어떤 정해놓은 방향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서 저항하지 못한 채 어디로 가는지 끌려가고 있는 중입니다. 자연만 방향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과 그 완성은 쪽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은 대자연 안의 그 원칙에 묶여있는 신세이며 이스라엘 같은 경우에는 율법의 완성을 드러내기 위해 심하게 간섭받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어떤 집안에 가장이 되는 남자 혼자만이 즐길 자리에 나머지 가족들이 어쩔 수 없이, 마지 못해 따라가 주는 정도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달라져야 합니다.

‘달라져야 한다’는 것은, 전의 사정이 어떠하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달라짐’에 대해서 인간들은 결사적으로 저항하기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두려워 말라’, ‘마음을 굳게 하라’라는 식으로 계속해서 각오를 단단히 하라는 식으로 조언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수월한 코스를 가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수월한 길로, 즉 마음을 담대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수월하고, 좌일까 우일까 헛갈리지 않을 정도로 바른 길만 보이는 식으로 인도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렇게 되면 ‘달라짐’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달라짐에 모델이 있습니다. 모세입니다. 출애굽기 2장에서 모세는 자기 백성을 애굽의 압제에서 벗어내고자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으로 스스로 몰아세우십니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니라”(출 2:11-12)

하지만 과연 이 방식이 율법적으로 좌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면 정로일까요? 아닙니다. 모세는 생각하기를, 올바른 취지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도와줄 줄 알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시작하기 전에 자신이 시작한 일을 시작했고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고 여겨지니 스스로 그 일을 철수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도우심’은 전에 모세가 경험하는 그 방식과는 다른 방식이 될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 나라에서 단신으로 벗어나 시내산 근처에서 양을 치며 살았습니다. 이때 모세가 먼저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찾아오셔서 본적적으로 주님의 일을 개시하셨습니다.

이 때, 모세에게 주어진 것이 ‘율법’입니다. 따라서 ‘천국 백성의 달라짐’은 바로 모세처럼 ‘자기 일의 실패성’은 근거하게 됩니다. 즉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은 약속의 땅에서 모세가 실패한 그 실패를 단체적으로 경험케 하는 겁니다. 율법이 약속의 땅이란 ‘공간적 구원’을 통해서 율법 정신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특정 지역에 머물면서 이스라엘은 국가 이스라엘로 발전하지만 내부적으로 멸망의 조짐을 보였습니다. 이때, 도로 율법 정신으로 돌아가기를 외쳤던 자들이 선지자들입니다. 이들 선지자들이 소개한 땅은 점차 ‘공간적 지역’ 개념을 벗어나게 됩니다. 예레미야 23:18에 보면,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선지자가 생각하는 ‘율법 완성’의 의미에서 땅은 벌써 지상의 공간적 영역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 대신 ‘시간적 구원’을 소개합니다. ‘완료와 미완료’의 차이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즉 지상의 모든 일은 기껏 해봤자 ‘미완료’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완료를 보여줄 그 시간이 다가온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완성을 향하여 이동하는 율법’의 성질을 이해해야 하고 그 완성이 어떤 사건으로 나타나는가를 더불어 알아야 합니다. 모세 모델과 같습니다. 자기 딴에 열심히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부하지만 결국 모세는 시내산 밑으로 홀로 살 생각으로 갑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버리지 않습니다. 기어이 찾아오십니다. 이와 같은 원리로, 인간들은 율법을 통해서는 천국에 적합하지 않는 자기 자신을 봐야 합니다. 인간은 저주받은 동네 출신이라서 율법이나 하나님의 말씀이나 복음이 참으로 어색합니다. 거부하고 싶은 내용으로 들려집니다.

자연스러운 것은 ‘혼자 멋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고 싶은 것’ 바로 그것입니다. 아무런 목적도 없고 살 이유도 모르는 채 자연 안에서 몸부림치면서 사는 겁니다. 뚜렷한 진리를 율법 완성에서 찾지 못하면 이런 허무한 삶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완성으로 오셔서 어디에도 없는 율법완성으로 성사된 ‘그 길’이 되셨습니다.

‘길이 생겼다’는 말은 비로소 존재 목적과 이유가 밝혀졌다는 겁니다. ‘나를 위한 길’이 아니라 ‘율법 완성을 위한 나’로 전환되는 겁니다. 이점이 바로 ‘달라짐’입니다. 달라짐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 ‘달라짐’은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솜씨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성취된 완성의 혜택을 입는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백성들입니다.

그 전에 인간들은 율법 안에서 좌로나 우로나 계속 치우치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초의 모세처럼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천국은 아들의 나라이니 우리 자신들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마다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송민선

188강-여호수아 1장 7–9절(율법과 땅)

201806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1장 7–9절입니다. 구약성경 320페이지입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대로 한다면 여기에 존재하는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첫째는 이 말씀을 듣는 본인들이 있을 거고, 여호수아 및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죠. 또 뭐가 있느냐 하면 율법이 있습니다. 지시하는 율법이 주어지고 또 누가 계시냐 하면 마지막 9절에 보니까 네 하나님이 너와 함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계시고 이스라엘백성 있고 그 다음에 율법 있고 이 세 가지 재료가지고 어떤 레시피를 통해서 무엇을 구성하려고 하시는 가부터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합니다. 율법이 빠지고 하나님 빠지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면 내 편한 데로 살겠죠.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율법 빠지고 하나님 빠져도 우리는 우리만 있는 게 아닙니다.

율법 모르고 하나님 몰라도 함께 있는 게 있는데 그게 자연이라는 겁니다. 자연, 대자연이죠. 해, 달, 별 그리고 땅 같은 거, 우리의 삶의 터전, 그런 게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주변에 있는 대 자연이 우리에게 결국 줄 수 있는 게 뭐냐 하면 저주밖에 없어요. 생로병사라고 하죠. 불교가.

불교를 보면 사람들이 정말 바보 같은데, 왜냐하면 본인이 잘못해서 고생한 게 아니거든요. 자연 자체가 자연스럽게 인간을 소멸시켜 버립니다. 공중에 나는 먼지나 티끌이 처음부터 티끌이 아니고 처음부터 먼지가 아니에요. 뭔가 처음에는 어떤 형체가 있는데 바람에 깎이고, 압력과 온도에 영향으로 부서져서 이게 먼지가 되고 하나의 찌꺼기가 되고 흙이 된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날라 다니는 것이 혹시 피부에 닿거든 누군가 죽은 뼛가루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특히 대전 현충원 가까이 갈 때는 죽은 뼈가 날아다니다가 붙었다고 보면 됩니다. 그 먼지나 우리나 지금 살아 있으니까 이거는 먼지고 나는 사람이고 하지만 그 이야기 하는 것도 몇 십 년 안갑니다. 몇 십 년 지나가면 같은 먼지 동기생 됩니다.

같이 섞여서 누가 인간이고 먼지고 구분 안 됩니다. 그냥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자연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연 속에서 소멸되고 해체되어 날아간다고 생각하세요. 이게 창세기 3장 이야기거든요. 우리가 죽는다는 게 인간으로 있다가, 그것도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이것이 자연이 발휘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인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줬다면 이 말은 자연에 불구한 자연에 섞여서 자연으로 귀환할 수밖에 없는 자연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는 너희들을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려고 그것 때문에 율법을 준거예요. 율법을 주신 것이. 율법 주실 때부터 “우리가 인간이다” 라고 우기면 안돼요.

우리가 전에 안양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인간의 어떤 행위, 존재는 방향성을 지닌다고 했습니다. 방향성을 지닌다는 말은 어딘가로 가고 있는 중이에요. 버스타면서 내 집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버스는 자기 집이 아니죠. 버스를 타고 어디로 가고 있죠.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인생을 사는 것이 내 집이 아니에요. 어디로 가고 있어요.

지금 어디로 가느냐를 우리가 몰라서 지금 문제가 되고 그냥 가는 거예요. 410번 타고 왜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타고 있는 거예요. 진짜 바보 같은 사람들이 길을 갈 때 자기가 정해놓은 번호를 보고타야 되는데 버스가 빨리 온다고 그걸 타면 엉뚱한데 간다니까요. 빨리 오는 게 물론 기다리는 수고를 안 해서 좋지요. 빨리 오면 되죠. 그런데 빨리 오는 것을 타면 엉뚱한 데로 간다는 겁니다.

이십대 후반부터 아가씨들이 결혼하려고 남자들 만날 때 두 타입이 있어요. 빨리 오는 차를 타는 아가씨와 이차 저차 다 보내고 괜찮은 나 맡는 차타겠다는 아가씨가 있는데 거기다가 선 100번 봤네~, 200번 봤네~ 하잖아요. 차 200대 그냥 보낸 거예요. 문제는 자기도 같이 고물 된다는 사실을 깜빡 했다는 거죠. 마음에 안 든다고 다 보냈는데, 진짜 그래서 자기 마음에 딱 맞는 버스 오게 되면 좋지요. 결혼도 하고.

그런데 해봤자 저번에는 혼자 가다가 이번에는 둘이 어디로 가느냐 모르기는 마찬가지예요. 혼자 모르는 거나 둘이 산다고 해서 모르기는 마찬가지예요. 혹시 여러분들이 결혼생활 하면서 아내에게 “지금 우리 어디로 가느냐?” 라고 물어본 적 있어요? 그런 건 묻는 거 아니라는 식이죠.

율법은 컨베이어시스템처럼 자동적으로 움직여요. 율법은 우리말 안 듣습니다.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말을 듣지요. 율법은 움직이는데 인간은 안 가려고 버티고. 지금 이런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는데 우리는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안 가려고 버티죠.

그러나 율법은 고집스럽게 우리를 데려갑니다. 데려가면서 조건이 있어요. 변해야 되고 달라져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달라져야 된다는 이 원칙은 지금이 어떤 상태인데, 이 상태로는 율법이 도착하는 그 나라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되요. 그래야 달라짐이 의미가 있잖아요.

달라져야 된다는 것이 빠져 버리면 ‘이대로 갈래.’ 가 됩니다. 이대로 안 되는데요. 그러면 율법이 있으나 마나 한 것이 됩니다. 율법은 달라지라고 준건데 준 율법을 버리고 ‘나 이대로 갈래’ 하면 나중에 달라졌는지 확인할 때 안 달라졌죠. 그리고 안 달라졌으면 못 들어가죠.

엄마와 아들이 함께 열심히 삽니다. 엄마는 아들을 내 마음에 맞는 아들로 만들기 위해서 온갖 투자를 다해요.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이 가겠다는 거예요. 엄마는 못 떨어져 있겠다고 아들 가는 곳에 자기도 고집스럽게 따라갑니다. 가다 보니까 어디로 가냐 하면 논산 근처로 가요. 논산에 뭐가 있어서 가는지 따라가 보니 거기서 “아들만 들어오고 아줌마는 집에 가세요.” 라고 한단 말이죠.

기껏 평생을 따라왔는데 엄마는 논산 훈련소에서 엄마는 못 들어갑니다. 물론 이런 엄마도 있어요. 머리 깎고 그 자리에서 입대 같이 하는. 그런데 그건 너무 오지랖이죠. 50대 아줌마는 군에 지원 못하거든요. 그래서 헤어져야 돼요. 교회라는 곳은 말씀 중심이 되어야 되지 안 변하겠다고 버티는 것은 곤란하거든요. 이렇게 말씀은 우리를 변하게 하는데 어떻게 변하게 하는가?

천국에 적합한 사람으로 변하게 하는 거예요. 그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우리가 가는 곳이 이미 정해져야 된다는 겁니다. 401번, 402번을 타든 급행 1번을 타든 이미 정해져야 돼요. 천국입니다. 천국이라는 것이 거기에 도달 된다면 천국은 무슨 나라냐. 예수님의 나라예요. 예수님의 나라라면 우리가 가기 전에 무슨 이야기가 소중하고 무슨 이야기가 우선이냐 하면 예수님 이야기가 우선입니다.

삼성이 또 졌어요. 6등, 7등 막 내려갑니다. 대구 사람들의 희망은 삼성 라이온즈밖에 없어요. 야구 맨날 져요. 얼마 전에는 꼴등했습니다. 그러면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냐 하면 삼성 라이온즈가 5등 6등 되어서 가을에도 야구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삼성나라에 갑니까?

여기 우리가 가는 인생은 움직이는데 어디로 움직이느냐? 예수의 나라예요. 자, 계모임에 참석했습니다. 한 여섯 명 되는데 혼자서만 복음 알고 나머지 5명은 이야기를 하는데 무슨 이야기냐 하면 증권이야기, 돈 번 이야기, 자기 아이들 이야기 등등 쭉 나옵니다. 그거는 버스 창가에 언 듯 언 듯 스쳐지나가는 한시적, 임시적인 거예요. 좋지요. 집 넓은 데 이사 가고 좋지요.

그러나 그건 빨리 잊어야 돼요. 과거에 볼모잡혀서는 안 된단 말이죠. 잊고 가야되는데 그중에서 그 계모임 가운데 어디로 가는지 아는 사람은 본인밖에 없어요. 예수의 나라에 가는 걸 본인밖에 몰라요. 그거는 명절 되어서 친정에 가든지 시댁에 가도 마찬가지예요. 고추농사 지으면 고추이야기만 나와요. 예수 이야기는 나오지를 않아요. 친정가나 시댁가나. 어디서 예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없어요.

물론 예수 이야기하죠. 예수 이야기 5분하고 야구 이야기, 정치 이야기, 트럼프 이야기 한 3시간정도 하고, 다이어트 이야기 4시간 하고 한 3분간 예수 이야기 하다가 다시 다른 드라마 이야기 하고. 우리가 설교 다시 돌아가게 되면 이게 있다는 겁니다. 뭐가 있다는 거냐 하면 우리 앞에 율법이 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리고 하나님이 계시다는 거.

다 이유가 있어요. 달라져야 되고 바뀌어야 된다는 겁니다. 바뀌려면 현재 그 상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 상태는 예수의 나라에 적합하지 않아요. 천국에 적합하지 않아요. 적합하지 않다는 이 소식을 우리는 계속 맞바람처럼 덮고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달라져야 되는가. 달라지는 방법에 대해서 여호수아 1장에서 알려줍니다.

“네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지 마라” 라고 했어요. 그러면 율법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느냐. 율법을 두 조각 내야하죠. 칼로 두 조각내서 좌측 끊어내고 우측 끊어내고 이렇게 끊어내게 되면 거기에 정통적인 길이 나오겠지요. 그런데 떡이나 빵이나 케이크 같은 것을 잘라보면 그 중에 길이 있습니까? 없어요. 좌 아니면 우. 중간 지점이 없어요. 잘라진 단면만 나오지 중간에 정통 길이 안 나옵니다.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 하느냐 하면 인생에는 길이 없어요. 지난번에 말씀드린 이창동 감독의 ‘버닝’ 이라는 영화를 말씀드렸잖아요. 그 영화의 주제가 뭐냐 하면 오늘날의 젊은 사람에게 길이 없다는 겁니다. 방황하는 거죠. 길이 없어요. 흉내 내고 뒤따라가는데 길이 없어요. 여러분의 자녀들 생각해 보세요. 그 아이들이 길을 알고 갑니까?

길이 없으니까 좌충우돌 그냥 자기 편한 데로 이거 쑤셔보다가 이거 때리치고 저거 해보다가 그냥 계속 샌드백 치듯이 그냥 세상에 대해서 문 두드리는 짓거리만 하면서 계속 청춘을 다 보내고 있잖아요. 청춘을. 길이 없어요. 원래 길은 없습니다. 원래 길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길은 코앞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길을 율법이 막아 놓고 하나님이 막아 놨어요. 이스라엘에게.

율법 속에서 길을 찾아야 돼요. 그러면 율법 속에서 길을 찾다보면 율법에 위반되고 어그러질 수밖에 없죠. 그 때를 가리켜 여호수아에게 미리 이야기 한 겁니다. “네가 좌로 치우쳤다. 우로 치우쳤다”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여호수아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네가 백날 해 봐야 율법의 정답은 너는 모르고 기껏 좌로나 치우치든지 우로나 치우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앞으로 너에게 들이닥칠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놓치지 말아야 될 것은 나의 부족함과 나의 연약함과 나의 모자람과 내 힘으로 내가 달라지지 않음을 분명하게 그걸 날마다 알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그 사실로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돼요. 해보고 안 된다고 성경 집어 던져버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원래 성경은 성경 말씀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고 성경말씀의 그 본질을 누가 밟고 있고 누가 방해하고 있고 누가 누구 때문에 훼손 되었느냐를 보여주는 게 성경 말씀이에요. 말씀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인데 예수님이 누구에게 상처 받았습니까?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상처받았죠?

오늘날 누구에게 상처 받았습니까? 누가 오늘날 성령을 근심되게 합니까? 로마서 8장에 보면 기도하는 당사자가 성령을 근심되게 해요. 기도하는 당사자가. 기도 안 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밤새 잠이 안 온다면 밤새 기도하라는 순간이에요. 기도하라는 신호죠. 그러나 우리는 알아요. 기도해도 소용없다는 걸. 그런데 그 소용없다는 걸 알아야죠. 소용없다는 걸.

정답 이야기 해 드릴게요. 우리가 율법을 보란 말은 지키라는 말이 아니고 못 지키는 것이 나라는 그것이 정답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정답이에요. 로마서 3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율법이 주어져야 우리 주제파악이 되죠. ‘아, 예수의 나라는 내 목적이 아니고 율법 속에 계신 그분의 목적이고, 그 분의 목적에 우리가 편성되었을 뿐이구나. 길이 없는 곳에 길을 열어서 가게 하시는구나.’

내 힘으로 찾을 수 없는 그 길. 그래서 우리는 길이 하나밖에 없어요. 오직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만이 길이에요. 예수님이 없으면 길이 없는 거예요. 예수님 나타나지 않으면 길이 없는 거예요. 예수님 없는데 우리끼리 모여서 길 만들자고 하면 안 됩니다. 이명박이 불도저 가져와도 안돼요. 그쪽 길은 감옥 가는 길인데. 길이 없으니까 남은 것은 부딪치는 몸부림밖에 없습니다.

무엇이 행복한지를 따지지 마세요. 우리가 행복할 자격이 되냐는 것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 말씀의 생각이에요. ‘우리는 행복할 자격 없습니다’를 알 때 없는 행복 다시 날아들어 옵니다. 있지도 않는 행복이 중간에서 구름처럼 웅성웅성 몰려들기 시작해요. 내 주제파악이 된다면.

근데 행복을 찾아 가니까 있는 행복도 다 날아가 버려요. 결국 행복 끝은 죽음밖에 뭐가 더 있겠습니까? 제가 언젠가 이야기 했죠. 우리가 마지막 들을 이야기는 이거라고요. “그분 가셨습니다.” 우리가 관속에서 마지막 들을 이야기는 숨을 거두었다는 거예요. 숨 거두기 위해서 얼마나 악착같이 살았습니까? 숨만 안 쉬면되는데. 이 쉬운 거. 이 숨 거두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노력했습니까? 보란 듯이 성공했노라. 성공하면 숨 안 거둬집니까? 출세하면 안 죽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준 것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마라고 조건을 붙인 것은 그 율법을 제일 먼저 받은 사람이 있어요. 모세입니다. 율법 이전에 모세, 그 모세가 모델이 되어서 율법에 의해서 모세같이 이끄는 겁니다. 지금 구약의 여호수아 안에서는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모세 율법이기 때문에. 모세가 모델이 돼요.

그러면 모세가 처음에 어떤 인간이었느냐 하는 것은 출애굽기 1장에 나오죠. 출애굽기 1장에 보면 모세가 한 열심 합니다. 자기 민족이 고난 받는 걸 못 봐서 정의감에 자기라도 나서서 우리 민족을 애굽에서 해방시키려고 했어요. 완전히 이건 운동권이죠. 그래서 몸을 던져서 사람하나 살리려고 했는데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았어요.

출애굽기 2장에 보면 12절에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마치 일제 시대에 일본 사람 쳐 죽인 거와 똑같은 거예요. 독립투사죠.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본겁니다. 우리 히브리인들이 언약도 없는 이 애굽 사람들에게 구박 받을 리가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에 좌우로 치우치는 거예요. 모세가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이런 모세가 달라졌어요. 달라져야 구원받습니다. 어떻게 달라졌는가? 달라지는 방법이 아주 간단해요. 도망쳤어요. 뭘 포기하고? 그 열심, 열성, 천국가려고 시도한 모든 노력, 그게 소용없다는 걸 깨닫는 거, 여러분도 그렇게 달라지시기 바랍니다.

갑자기 율법 부담주다가 부담이 싹없어지죠? 기분 좋지요? 이게 복음입니다. 내가 율법 지켜서 복 받고 구원 받겠다는 그 시도 자체를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모세는 어디까지 포기했느냐. 하나님까지 포기했습니다. 나 이제 혼자 살래. 역시 이게 딱 적성에 맞아요.

저나 여러분도 혼자 사는 게 적성에 맞아요. 하나님 믿는 거 좀 이질적이에요. 낯 설기 짝이 없어요. 우리는 출신이 이 저주 받은 땅의 출신이기 때문에 저주 받은 티를 내는 것이 우리 품성에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20년 교회 다니다가 안 나와 보세요. 처음에는 벌 받지 싶죠?

십일조 하다가 그 다음날 안 해 보세요. 굉장히 벌 받을 거 갖죠? 두 달만 안 하면 아무 일 없습니다. 교회 안 나와도 아무 탈이 없어요. 오히려 교회 다니면서 벌 받을까 벌벌 하는 그 사람이 불쌍해요. 정말 아무 일이 없습니다. 아무 일이. 뭐였지? 아무 것도 아니잖아. 교회 다녀도 안 다녀도 무슨 변동 사항이 있어야 하는데 없잖아. 괜히 돈 다 빼앗기고.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 했어요. 평생을 교회에 속아서 돈 다 갖다 버렸답니다. 있는 돈 다 바쳤답니다. 화가 나서 그 교회 계속 다니겠답니다. 이게 아니라고 말하러.

모세는 혼자 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움에 합치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믿는 다는 것은 정말 억지 중에 억지예요. 안하면 편한데 또 안 하면 지옥 갈까 싶어서 겁내는데 오히려 교회 안가면 지옥 간다는 그것이 마귀의 시험이 아닌가를 한번 돌아보세요.

내 몸에 맞지도 않는 걸 걸치고 있으면 불편해요. 옷이 큰 건 ‘좌’, 옷이 작은 건 ‘우’. 그러니까 좌로나 우로나 우리는 자연스럽게 빠질 수밖에 없어요. 율법의 정로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이 뭐냐 하면 그 땅에서 망해야 된다는 겁니다. 망하는 것이 율법의 요구사항이에요. 로마서 3장에 “율법이 주어진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게 함이라”

포루투갈 정통카페에서 한국의 가수들이 노래를 불러요. 노래를 부르는데 앞에 음식점인데 뭐라고 써있냐 하면 ‘이 공연을 할 때는 조용히 하세요.’ 라고 써있습니다. 조용히 하세요. 이걸 오늘 본문에 적용하면 율법 앞에서는 조용히 해야 돼요. 그리고 그 율법이 인도하는 데로 다른 말로하면 하나님이 인도 하는 대로 가는 길이 율법이 인도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도하는 길이 율법이 인도하는 곳이고 율법이 인도하는 길이 하나님이 인도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 없이는, 언약 없이는 절대 일 안 해요. 언약의 하나님이니까. 그 가는 길을 가게 되면 뭔가 굉장히 어색하고 내 몸에 안 맞는 것을, 이 길이 나에게 안 맞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달라져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율법조차도 안 맞는데 천국 가봤자 우리 몸이 맞을 리가 있습니까? 죄만 있는 곳에 적합한 몸으로 이렇게 습성화 되었는데 체질화 되었는데 이 몸이 천국 간다는 말입니까? 거기 가서 데모하려고요? 분명히 천국 대법원에 가서 데모할 거예요.

평소의 우리 마음이 율법과 안 맞는 거예요. 그러면 약속의 땅에 간다는 것은 그거는 하나에 뭐였나 하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 봐야 ‘아, 우리는 약속의 땅에 안 맞구나.’ 라고 알 수 있잖아요. 그것 때문에 약속의 땅이 꼭 필요했던 겁니다. 이걸 공간적 구원이라고 해요. 이스라엘이 구원에 있어서의 공간적 구원입니다. 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그 무대는 지리적으로 실제 있는 땅이에요.

얼마 전에 갔다 왔거든요. 그 땅이 지중해에서 요르단까지 정해진 그 무대가 셋팅이 되어 있어요. 요단강 건너서 여리고 성, 길갈, 세겜, 이렇게 가는 거, 거기에 전부다 무대 장치가 셋팅이 되어 있어요. 그게 공간적 구원입니다. 그 공간적 구원은 이스라엘 멸망하고 난 뒤에 공간적 구원은 이제는 없어요. 이미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기 전부터 그런 징조가 보였습니다.

예레미야 23장 18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 있습니다.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석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냐” 지금 예레미야는 천상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선지자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속해 있어요. 그런데 지상은 하늘나라에 안 속해요. 왕들이 지상에, 그 약속의 땅에 그냥 붙잡고 있는 거예요. 오랫동안 살았으니 그 기득권을 보장하라는 말입니다.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궁중 족발 집 했으니까 쫓아내지 마라는 말과 똑같아요. 서촌에 궁중족발이 월세내면서 있었는데 건물 주인이 바뀌면서 세를 약간 올렸어요. 원래 300만원 내라고 했는데 약간 올려서 1200만원으로 올렸거든요. 4배 올렸어요. 자기 쫓아낸다고 둔기로 건물 주 때려서 구속 되었어요.

내 땅에서 내가 살고 싶은 게 적합하다는 이 말이죠. 그럼 하나님은 뭐라 하시냐. 지금 그 테스트가 끝났다는 거예요. 이 땅은 나그네라는 겁니다. 붙들 수 있는 아파트고 빌라고 뭐 붙들 수 있는 게 없어요. 좋았던 시절 끝났습니다. 세상 좋은 거 있지만 이 몸이 안 좋은데, 몸이 안 받쳐 주는데 좋은 것이 없어요.

저 만나는 성도님들이 이야기해요. “목사님, 복음 듣고 난 뒤에 재미있는 게 없습니다.” 그거 변한 거예요. 그거 변하신 거예요. 아침 드라마도 재미없고, 돈 좀 있다고 맛집 찾아다니는 것도 그렇게 맛있는 맛집 없어요. 어떤 90세 넘은 할아버지는 밥 먹을 때마다 설탕을 마구 타서 먹어요. 고쳐보려고 해도 그게 몸에 배었어요. 우리는 달콤한 설탕이 자연스럽지 천국의 복음은 설탕이 아니라 독약처럼 느껴집니다. 듣기 싫어요. 짜증나요. 귀를 막아버려요. 안 됩니다.

공간적 구원은 우리에게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어느 특정 지점이 은혜 받는 다는 거 다 거짓말입니다. 앞자리 은혜 받고 그런 거 없어요. 특정 공간이 보장해 주는, 어떤 기도원이 보장해 주는 구원은 없습니다. 그럼 뭐가 남는가? 공간 없으면 시간이 남아요. 시간. 그게 선지자입니다.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그때는 완료될 것이다. 이게 바로 공간적 구원이 아니고 시간적 구원이에요.

기다려라. 곧 오신다. 왜 오시느냐. 완료거든요. 지금은 미완료지만 완료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미완료 때 어떻게 가르치나. 미완료 때 완료가 되는 그 요인 속에 이 모자라고 부족한 우리도 보탬이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이 멸망하는데 남들보고 멸망했다고 손가락질 하는 게 아니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요인을 날마다 내 육체에서 내 욕망이 계속해서 정말 똥오줌 싸듯이 내 배설물들이 내 주위에 퍼져 나가는 거예요. 내 욕망을 주체를 못해서 퍼트리니까 다른 사람이 내 욕망에 걸려 들어서 같이 가족 분위기 이상해져 버리고 모든 게 엉망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제가 교사라는 직장생활을 잠시 한 적이 있어요. 그 때는 복음도 믿으면서 직장 생활을 했어요. 하면서 학생들에게 양심의 가책되는 것이 늘 있었어요. 이제 와서 고백하는데, 뭐냐 하면 아침에 기분이 좋으면 아이들이 어지간해도 방긋방긋 웃으면서 잘 받아주고 아이들을 사랑으로 훈계합니다.

근데 아침에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다 하면 그날은 아이들 죽었어요. 담배피우는 아이들 평소에는 10대밖에 안 때리는데 그 날은 20대 때립니다. 오늘 잘 걸렸다 하면서.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풀어야 돼요. 안 풀면 우리가 정신병자 돼버려요. 미친 사람 돼요.

샌드백이 치던지 분풀이를 하든지 바깥의 욕망은 삭인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누굴 대상으로 해서 마구 던지든지 뭘 해야 된다니까요. 예수님이 그 맞는 역할을 해 주신 거예요. 이게 복음 아닙니까? “때려라, 그래 때려. 그렇게 성질 나냐? 그래, 다른 사람 때리지 말고 날 때려라.” 주께서 멍들고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 믿는데 내 뜻대로 안되느냐. 주께서는 “날 때려라, 날 때려. 날 밟고 날 죽여.” 그런 식으로 주님과 우리가 엮여져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마지막 때 이룰 것이라는 그 이룸이 신약에 오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는 걸로 끝났어요.

십자가 있는 장소가 구원의 장소가 아니고 ‘이루었다’는 그 시간적 완성이 내 안에까지 들어 올 때 내 안은 다 이룸이 돼요. 그 이룸이 되면서 과거가 다 공존이 됩니다. 십자가 다음에 부활이 아니에요. 십자가 안에 부활이 같이 들어 있어요. 죽음과 생명이 같이 들어 있어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입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거예요.

같이 죽고 같이 살아 있는 분이 같이 있다 그 말이죠. 그러면 그 분은 왜 죽었습니까? 내 분통 때문에 돌아 가셨어요. 그러면 왜 내가 구원 받았습니까? 그분이 나 때문에 흘린 그 피가 그 흘려진 그 희생이 도리어 가해자를 용서해 주는 겁니다.

용서는 사람에게 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남을 용서할 자격도 안 되고 쨉도 안돼요. 용서는 복음을 사이에 두고 가능해요. 복음 없는 용서는 하지 마세요. 그건 나의 자랑이 되고 복음 없는 용서 받지 마세요. 그 용서는 나중에 뒤틀리면 그 성질대로 또 다시 시작돼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용서는 예수님이 주선되어야 돼요. 예수님이 중재 되어야 합니다. 복음 앞에서 다 같이 못난 자로서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고 율법의 완성입니다. 끝으로 한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율법이죠. 아무도 못 지킵니다. “마음 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죄다” 아무도 못 지킵니다. “맹세하지 마라” 못 지킵니다. “돈을 사랑하지 마라” 못 지킵니다. “좁은 길로 가라” 못 지킵니다.

하지만 그 못 지키는 것과 십자가의 피 흘림과 연관시키는 사람은 예수님의 완성됨을 증거 하는, 율법의 완성을 증거 하는 하나님의 천국의 백성입니다. 천국은 예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만 주가 되고 우리는 높이고 또 높이기만 하면 그걸로 우리 기능은 완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동행하여 주옵소서. 율법 못 지킨다고, 잘 안 믿어진다고, 내팽개치고 복음 들리지 않는 곳으로, 율법 없는 곳으로, 말씀 없는 곳으로 내빼지 않도록 하옵소서. 그 앞에 있으면서 넋 놓고 십자가의 그 은혜에 너무 놀라서 너무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