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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여호수아 1:5-6 / 모세 언약의 연속성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여호수아

여호수아 1:5-6 / 모세 언약의 연속성

정인순 2018. 6. 3. 16:02

 음성           동영상

 

 모세 언약의 연속성

 

이근호
2018년 6월 3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1:5-6

(1:5)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의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1:6)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모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모세 뜻대로 하나님께서 따라주지 않았다는 점이 담겨 있습니다. 이점에 유념해야 합니다. 언약은 하나님과 모세가 협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언약은 일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탁하는 식으로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언약의 언약됨을 알리기 위해서 처내어야 될 인물에게 찾아듭니다.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를 못했는데 바로 그 ‘못 들어감’을 통해서 언약이 품고 있는 그 뜻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인간의 기능이란 바로 이런 겁니다. 인간들이 언약에 기대를 걸고 집착하는 것은 실은 엉뚱한 취지를 발산하기 때문입니다.

한 예를 들면, 새벽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쪽 하늘에 떠있는 달을 본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왜 저 달은 하늘에 존재하고 있지?”라는 면으로 생각해 봅시다. 이것은 달이 없어져야 한다는 뜻도 아니요,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간에 달이 있다는 취지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달 떠 있음을 보고서, “내가 시키지도 않는데…”라는 느낌을 불현듯 떠오른다는 것은, 의식보다 더 깊은 층에, “세상은 내가 시킨 것들만 내 앞에 존재하는 것이 마땅하고 옳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음을 들킨 겁니다. 즉 이런 생각이 옳으냐 아니냐라고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품고 있는 본성은, 뭐든지 ‘시키는 자’로의 권리를 안고 있는 절대자 자태를 지니고 있는 식이다 는 겁니다. 그 어떤 존재든지 ‘내게 좋아지려면 나의 명령으로 인하여 그 자리에 나타나야 한다’는 일방적 성질이 음성적으로 발휘되고 있습니다. 물론 일상생활에서 이 점을 들키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예를 쓰게 됩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양보하는 것 같고, 내 주장을 철회하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내 본성을 다 커버할 수는 없습니다. 묻지도 따지지 않고 내가 원하는 좋은 세상이란 내 지시에 따라 존재하는 것들의 모임으로서의 세상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은근히 고대하는 언약이란 그 안에 자신들의 이런 소원을 수용하는 언약이기를 바라는 겁니다.

모세 언약에 의하면, 이 약속의 땅에서 살면서 풍족하고 여유롭고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주제도 모르는 채 그 결과만 따먹으려고 합니다.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 제발 그 결과만 자기에게 건네지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되면 언약이 진행되는 그 과정이 누락이 되는대 ‘언약 완성’을 성급하게 선언해 버리는 꼴이 됩니다.

큰 서점이나 도서관이나 서류들을 모아놓은 관공소에서 좁은 면적을 활용하기 위해서 슬라이딩 선반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겉에서 보면 분명 그 책장 뿐인데 그 책장을 옆으로 밀면 그 책장에 가리워졌던 뒤쪽의 책장이나 서류공간이 새롭게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언약에 대해서 인간의 무지함으로 인하여 기존의 인간들이 알고 있는 언약의 본질은 치워지게 됩니다.

언약에 대해서 잘못된 이해를 갖고 있기에 참된 언약의 취지는 가리워져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치우는 방식이 바로, 이스라엘보다 더 강력하고 잘 사는 민족들을 이스라엘 주변에 배치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과정은 빼먹고 그저 본인들이 잘 사는 결과만을 챙기려는 이스라엘 민족들은 주변의 강하고 잘 사는 이방민족의 생활 풍습과 종교 생활을 선호하게 됩니다.

이래나 저래나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언약의 결과’처럼 보이는 것을 챙기면 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이런 여망에 주시하지 않습니다. 실패로 돌려버립니다. 본인들의 축복욕심이 바뀌어지지 않는 한 감추어진 진짜 언약은 본연의 취지를 나타나지 않게 하십니다.

즉 달은 오로지 예수님의 지시에 의해서 새벽 녂에 나타나 있는 겁니다. 그 달의 입장에서 볼 때, “왜 달은 내 시키지도 안 했는데 내 눈에 보이느냐?”라고 그 인간을 제거해버립니다. 즉 바로 그 근원적 사고방식 자체가 예수님 중심에 대드는 태도가 되는 겁니다. 약속의 땅의 완성은 ‘내가 거기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언약에 의해서 내가 바뀌어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약속의 땅 주변에 이스라엘이 부러워할 만한 민족들을 포진시켜 놓고 걸핏하면 가나안 땅을 침노하게 하시는 그 취지를 아는 것이 언약의 완성입니다. 이 세상에 나를 위하여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평소에 나의 심성에, 나를 부추겨서 ‘나 중심’이기를 요청하는 그 억지스러움을 밝혀주기 위함입니다.

인간이 언약에 관심이 없을 때 나오는 것은 바로, ‘나 존재의 절대성 확인작업’입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인간들은 ‘씹는 재미’로 세상을 살게 됩니다. 의도적으로 인간들은 자기 앞에서, 나에게 무차별적으로 씹힐 대상을 포착하고자 합니다. 세상의 일상의 무료함과 외로움은 이런 식으로 해소합니다.

적과 아군으로 구분지어놓고, 내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내 앞에 존재하는 자들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하게 망가지는 것을 찾는 작업에 나서게 됩니다. 세계 정치가 이런 식입니다. 연속적으로 전쟁이나 싸움을 벌리는 겁니다. 그래서 삶의 긴장도와 삶의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된 언약은 바로 이런 인간들의 본성들이 언약에게 씹힐 대상으로 삼아버립니다. 전쟁은 적들과의 전쟁 이전에 이스라엘 내부에서 꾸준히 이어집니다. 이스라엘 내부가 정리되지 아니하면 적들과의 전쟁에서 승리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신들이 언약의 본 취지를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교회 와서 복을 찾는 심보는, 평소에 남들에게 지기 싫어하고 뽐 낼만한 거리들을 수집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싸움을 빙자해서 자기 싸움을 벌리고 이 세상을 자기 절대성을 과시할 장으로 삼는 겁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이 스스로 발휘하면서 언약을 가리는 것들을 치워버리게 됩니다.

이러한 언약과 취지를 통해서 평소에 자신이 기대한 언약관과 축복관에 문제를 발견하는 자가 곧 복된 자입니다. 이런 자가 이미 약속의 땅을 느끼는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십자가 앞에서 치워지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송민선

187강-여호수아 1장 5–6절(모세언약의 연속성)

2018060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1장 5–6절입니다. 구약성경 320페이지입니다.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모세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을 모세언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언약. 하나님께서 모세가 훌륭해서 “내가 너의 뜻대로 해줄게”가 아니라 모세는 훌륭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모세를 만날 때 연결되는 선이 있어요. 그것이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제공했고 모세는 그 언약을 두 팔에 안고 산에서 내려 왔습니다.

그렇다면 모세와 하나님의 관계는 언약관계입니다. 약속 관계예요. 모세에게 언약한 것은 모세의 아이디어도 아니고 모세가 예상한 내용도 아니에요. 모세는 그냥 하나님이 계약한 것과 항상 티격태격하는 요소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모세 본인도 자기 뜻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모세의 뜻을 동조하지 아니하시고 거기에 휘둘리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자기 열심으로써 그냥 언약이 이루는 그쪽을 향하여 꾸준히 갑니다. 가면서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탈락 사태가 일어나요. 그런데 이 탈락 사태가 모세에게 실패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되고 내 뜻보다 더 원대하다는 거, 더 거대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된 겁니다. 그리고 나 아니더라도 내 후손에 여호수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계속 이어져 나가는데, 여호수아에게 준 것은 여호수아 언약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모세 언약이에요. 그래서 모세는 죽었지만, 실체가 없이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 언약 속에 모세는 죽든 말든 상관없이 모세 언약이 모세의 운명이 되는 겁니다. 모세 언약이 모세를 대체하는 그러한 모세의 자리가 되고 영역이 되는 겁니다. 그 언약 안에는 예수님 계신 거죠.
예수님이 나 대신 돌아가셨다는 말은 주님이 나의 인생을 몰수하고 이제는 주님의 인생으로 바뀐 그 세계 속에 우리를 일방적으로 손잡고 끌어당긴 겁니다. 이게 바로 언약만이 우리보다 더 우선되고 먼저 된다는 것을 계속해서 이스라엘 통해서 알려주고 있죠.

그러면 이 언약을 우리가 평소에 이렇게 알았으면 그냥 언약 믿고 살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모세도 마찬가지고, 여호수아도 마찬가지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항상 언약에 들어온다는 동시에 언약과 반대되는 것이 이미 인간 속에 둘러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언약의 반대되는 것이 뭐냐? 언약에 반대 되는 것이 뭐, 언약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논리적으로 쉽게 넘어갈 것이 아닙니다. 언약의 반대말은 쉽게 말해서 씹는 재미로 살아가는 것이 언약에 반대되는 겁니다. 사람은 씹는 재미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살맛이 나요.

그 씹는 재미를 하려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아주머니들이 너무 외롭다하지 마시고 선거판에 뛰어드는 겁니다. 선거판에 청바지 하나 입고 죽자 살자 적을 공격해야 돼요. 이게 사는 재미가 거기에 있어요. 민주당 조져야 되고, 저쪽은 또 한국당 조져야 되고, 홍준표 저것은 천하에 없어져야 할 지옥 갈 인간이고.

상대를 알든 모르든 상관없어요. 씹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내가 살 용기가 있다는 겁니다. 이게 언약 아닌 겁니다. 언약 아닌 것은 나의 행복을 위해서 내가 임의로 적을 만들어서 이유도 모르고 무조건 공격하는 겁니다. 북한의 김정은이 북한 주민들을 통치하는 방식이 그 방식입니다.

외부에 적을 만듭니다. 적을 만들어서 내부에 모든 불평불만을 해소하는 겁니다. 그 방법을 계속해서 사용하여 온 거예요. 적을 코앞에 두고 우리끼리 이러면 안 된다는 겁니다. 단결해야 되고. 신천지가 그 방법을 쓰는 거잖아요. 기존교회 비판함으로써 내부에 결속이 이루어지고 1년 예산은 2천700억이고. 신천지의 이 방법은 기존 교회에서도 그대로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언약은 그게 아니에요. 자기 내부를 보게 하는 겁니다. 제가 얼마 전에 구미를 간 적이 있는데 광고판을 봤는데 이런 광고판을 봤어요. 구미의 나이트클럽 이름이 호박나이트클럽입니다. 호박나이트클럽인데 내용을 보니까 11시 이전에 온 33세 여성에게는 현찰로 4만원을 준다는 겁니다.

왜 4만원 가지고 유인해가지고 11시 이전에 오게 하느냐하면 이제는 부킹하면, 부킹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잘 모르죠. 그냥 넘어가고. 부킹이 되면 4만원 현찰만큼을 다 뽑아 낼 수 있으니까, 남자에게 그 돈을 다 받아내면 되니까. 그곳이 어장관리가 잘 되어 있다는 뜻이죠. 고기가 많으니까 오라는 겁니다. 남자들보고. 그 대신 여자 분들이 좀 볼만해야겠죠.

그것이 바로 세상이 원하는 언약입니다. 약속입니다. 자기에게 이득이 되는 어떤 기적적인 것을 원하는 거. 심지어 이것이 교회에 그대로 적용되어 교회들도 그런 식으로 언약을 해석합니다. 교회에 오시면 여러분들에게 행운이 찾아오고 부킹됩니다. 복이 부킹이 되고, 그 복을 얻을 수 있다는 거죠.

교회는 그것을 무엇이라고 하느냐하면 기적이라고 합니다. 제가 또 드라마를 하나 봤는데, 잘 안 보는데 하나 봤는데, 어떤 사람이 총을 쏴요. 총을 탁 쏘는데 주인공 부부를 향해서 총알이 가다가 중간에 천사가 막아주니까 중간 뚝 떨어져 버렸어요. 총알이 그대로 가지 않고 강력한 천사의 힘에 의해서 막아졌어요. 주인공이 안 죽도록 하기 위해서. 세상에서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해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느냐 하면 그걸 기적이라고 착각하는 인간을 그 기적 밖으로 끄집어내는 기적을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합니다. 부킹 잘되고 행복하려는 그 기대와 노림수가 전혀 필요하지 않는 나라에 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이 여호수아 본문을 설명할 때에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하는 바로 이 대목, 이 대목은 젊은 교회 청년들 교회 갈 때에 잘 하면 후방으로 빠질 수 있다는 거고,

또 교회 신축 할 때에, 교육관 지으려고 예배당 신축 하면서 모을 때에 바람잡이가 와요. 바람잡이가 와야 헌금을 빼낼 수 있어요. 바람잡이가 주로 쓰는 본문은 여호수아 1장의 5-6절 부분입니다. 뒤에 보면 더 유명한 게 나와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면 반드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겁니다. 이 교인들을 보고 윽박지르는 거예요. 약속의 땅 갈 건지 말건지 윽박지르는 겁니다. “주의 말씀대로 할 거야? 말거야? 정말 가고 싶다면 내라! 돈 내!” 하는 그런 원리예요.

성경말씀에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하게 하라. 네가 교회에 목돈 냈다고 너는 안 망한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게 하라. 주를 위해서 쓰는 것은 주께서 헛되이 쓰시지 않는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대목이 있잖아요. “심은 대로 거둔다” 이런 것도 있고.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걸 바로 반대로 뒤엎어 버리는 말씀이에요. 어떻게 되느냐 하면 기존에 인간들이 알고 있는 인간 내부에 내장되어 있는 약속과 달라요. 도서관이나 책을 많이 넣은 곳이라든지 또는 책장을 보게 되면, 아파트에 주차 겹쳐서 하듯이, 겹쳐서 진열된 책장들을 많이 보셨을 거예요.

그러면 책을 찾는데 그 도서관에 책이 없다 할 때는 눈에 보이는 책장을 옆으로 죽 슬라이딩해서 밀면 뒤에 숨겨져 있는 중첩된 다른 책장에서 책꽂이가 나오죠. 왜냐하면 책 매장은 좁고 책을 많이 읽을 때는 이렇게 중복해서 겹쳐서 책장을 만들어요. 주님께서 인간이 언약을 생각할 때 자기 기대와 자기 포부, 호박나이트 클럽같은, 자기 나름의 기대를 가지고 오는 이런 기대들을 옆으로 슬라이딩하면서 확 밀어버리는 겁니다.

이걸 밀어주지 아니하면 뒤에 감춰진 그 진짜 언약의 내용이 나올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그 말은 진짜 언약을 언약대로 그 절차를 밟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부러 가짜들을 중복해서 약속의 땅에 침투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 역할들을 이방민족이 해야 합니다.

“언약대로 하면 잘 산다, 복을 받고 잘 산다”“라고 하나님이 약속했잖아요. 그러면 사람은 언약은 관심이 없고 결과만 따 먹고 챙기려고 해요. 사람은 ‘잘 산다’에 꽂혀 있으니까 힘세고, 잘살고, 여유 있고, 풍족하고, 평안한 여생을 보내는 민족들을 주변에 쫙 배치를 해버려요. 이게 중복된 책장이에요.

‘잘산다’에 마음이 먼저 가버리니까 결과만 따 먹으려고 먼저 가버리니까 ‘저거는 교회 안가도 저렇게 잘 사는데... 저거는 교회 나와도 대충 얼굴만 보여도 저렇게 부자 되는데...’
자꾸만 ‘잘산다’에 꽂혀 버리니까 잘사는 목적을 먼저 설정해 놓고, 그 다음에 수단으로 하나님께 순복, 충성, 그리고 시키는 거 다 하는 거예요. 모든 걸 다 하는 거예요. 그저 나와 내 가족 잘 살기만 하면.

중요한 것은 ‘내가 옛날에는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라고 바꾸어지는 그 교체되는 과정, 그 과정이 우리의 기도와 고백으로 나와 줘야 돼요. ‘저는 이렇게 알았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악마의 속임수였습니다.’ 라고 하면서 슬라이드 하나를 미는 거예요.

밀고, 밀리기 때문에 비로소 발견된 것. 그 밀릴 때 주님이 밀어주기 때문에 나도 같이 밀려줘야 돼요. 나 빼놓고 앞에 있는 것만 밀면 안돼요. 우리는 책장을 밀지만 언약에서는 나도 같이 밀려들어가야 돼요. 제가 하루는 새벽에 운동을 가는데 새벽에 가니까 달이 아직도 떠 있어요.

달을 보면서 계속 빨리 걷기 운동을 하면서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시키지도 않는데 달은 왜 거기 떠 있지. 내가 시키지도 않는데. 이 말이 뭐냐 하면 인간은 내 중심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만 세상에 박혀 있기를 내가 원하고 있어요. 이거는 내가 일부러 원해서가 아니라 본성이 그래요. 본성이.

세상이 눈에 띄는 것은 다 내 마음에 맞아야 돼요. 내 마음에 안 맞는 것이 내 앞을 가로막으면 이거는 짜증나요. 화납니다. 지난 수요일 날 쓰레기 봉지 뜯는 개 이야기 했지요. 짜증나는 거예요. 내가 주차하는 곳에 다른 차 주차하면 짜증나는 거예요. ‘내가 안 시켰는데 왜 네가 너의 차를 주차했느냐? 뭐든지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지.’ 라는 이게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도 현실과 관계없이 내가 내 깊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이 진심은 뭐든지 내 시키는 대로 움직여 나가기를 내가 원하고 있다니까요. 이건 이래서는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본성입니다. 이거는 본성입니다. 본성.

달이 뜨는 게 내가 만들지도 않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달이 있어요. 그러면 입장 바꿔서 달 입장에서 한번 봅시다. 내가 보기에는 낮에 뜨는 달은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달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필요 없어요. 내가 필요 없다고요. 결국 결론은 뭐냐 하면 나는 필요 없는데 지금 나 등장하고 있는 거예요. 이거 필요 없으면 치워버려야 돼요. 주께서 치워 주십니다.

왜 필요 없는가? 내 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필요 없는 거예요. 내 중심으로. 내가 여기 있는 한, 내 생각을 하는 한, 남들에게 피해를 줘요. 주님에게 당연히 피해를 주고. 내 생각하는 순간 남을 아프게 한단 말이죠. 여러분, 가족들 대화 가운데 가족들이 갑자기 기분 나쁜 이유가 뭡니까? 내 생각에 몰두하기 때문에 기분 나쁜 거예요. 내 생각에.

어떤 남자가 오토바이 타고 싶다고 면허증 따겠다고 하는데 장모가 와서 말립니다. 그래서 투표했어요. 마을 사람들이랑 투표해서 장모가 이겼어요. 왜 장모는 말리느냐 하면 사위가 오토바이 타다가 자기 딸이 과부가 될까봐서 그러죠. 오토바이 타면 이거는 넘어지고 자빠지고 자기 딸이 자칫 과부 될 수 있기 때문에 말린 거예요. 심지어 그 사람이 오토바이 면허 따기 위해서 이장하고 막 연습 하고 있는데 작대기 들고 와서 장모가 막 때립니다. 그 사위 이름은 이만기입니다. 투표를 해서 주민이 10명인데 4:6으로 장모가 이겼습니다.

왜 주민들은 이만기가 오토바이 타는 것을 싫어하느냐하면 그 사람들은 이만기의 오토바이와 관계없어요. 왜냐하면 누가 앞으로 오래 살 것인가가 중요해요. 그 동네에서 앞으로 장모랑 오래 살 것이기 때문에 장모 말 들어야 돼요. 세상은 자기가 오토바이 안 타도 사위 오토바이 타면 막 달려 들 듯이, 모든 세상은 내게 필요 없는 것은 없어져야 되고 내가 원하는 것은 또 필히 있어야 돼요. 반드시 있어야 돼요. 이 쓰레기를 치워야 됩니다.

주께서 이 쓰레기 안 치우면 언약이 나타나지 않아요. 세상은 예수님 중심이지 내 중심이 아니거든요. 내가 주님 앞에 쓰레기입니다. 이 쓰레기를 내 힘으로 어떻게 치웁니까? 아까워서 못 치우죠. 언약이 치워줍니다. 우선 모세 하나 쓰레기 치웠고, 그 다음에 여호수아에게 모세 언약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뭐라고 하셨냐 하면 “네가 그 땅에 들어갈 수 있다” 라고 해요. 들어갈 수 있는데 조건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이렇게 했거든요. 하나님의 언약이 언약대로 시행되는데 있어서 너의 심정은 어떤 심정이냐 하면 벌벌 떨 수밖에 없고 초초할 수밖에 없고, ‘아, 내가 이렇게 망하는 구나’ 하는 망할 수밖에 없는 정황들이 계속 주어지는 거예요.

여러분 호박나이트에 11시 이전에 가는 아줌마가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냥 가서 4만원 받으면 되고, 남자가 술 사주면 술하고 안주 맛있게 먹다가 나중에 튕기고 나오면 되거든요. 이건 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게 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런데 왜 달은 떴느냐 이 말이죠. 내가 시키지도 않은 달은 왜 떠 있느냐 이 말이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이근호 네 중심이 아니고 달 중심이라는 거예요. 나는 달을 보고 귀찮아하는데 달은 달답게, 달다움을 위해서 네가 좀 살다가 모가지 날아가는 제거 대상이 되는 겁니다. 언약의 땅, 약속의 땅에는 누가 계시는가? 언약의 주인공이 살 곳이에요.

이건 뭐, 겁도 없이 뭣도 없이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당부하는 겁니다. “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너 천국 가려면 마음을 단단히 먹고, 심지어 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일조차도 천국 만들기에 지장되는 게 아님을 미리 간파해야 된다. 너의 오빠가 죽는다 할지라도 마르다, 마리아야, 오빠는 다시 살아 날 테니 깜짝 놀라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거기에 너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라” 라고 말씀하시고 젊은 오빠를 죽이고 말았어요.

그러니 이 언약이라는 해석을 우리가 얼마나 잘못 생각하는 지요. 단단히 먹어보았자 그 땅에서 그들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방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방되고 언약은 살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 없어요. 나 중심은 작살나고 주님 중심은 작살 난 내 중심에서 피어나오고요.

마치 삼손에 의하면 사자는 죽고 죽은 사자 안에서 꿀이 생산되고. 그 꿀이라는 것은 이 젖과 꿀이 흐르는 이 약속의 땅에 너희가 살고 있다고 하는 증표거든요. 약속의 땅을 누가 망쳤느냐 하면 그 땅을 찾는 너희들이 망쳤다는 겁니다. 천국을 누가 망칩니까? 바로 마태복음 8장에서 천국을 망친 자는 아브라함 본 자손들이 망쳐놓았어요. 그리고 백부장은 천국에 들어가고 아브라함의 본 자손들은 쫓겨나서 울면서 이를 간다고 했어요.

하나님의 언약을 증거 함에 있어 모세도 구경도 못하고 이제 여호수아에게 맡겨졌다는 이 말은 그 땅이 우리가 예상하는, 나에게 좋으라고 하는 땅이 아닌 겁니다. 기존에 우리가 생각한 그 땅이 아니죠. 그러면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그 땅을 제대로 안다면 우리는 뭘 포기해야 합니까? 씹는 재미로 사는 걸 포기해야 합니다. 오히려 달에게 내가 씹혀야 돼요. ‘저 쓸데없는 달, 낮에 뜨고 말이야. 저거 내가 만들지도 않았는데 왜 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하면 그 달이 나에게 “그러니까 너는 잠시 있다가 써먹을 거 써먹고 내팽개쳐야지” 라고 달이 이야기 하는 겁니다.

내가 시키지도 않은 내가 기대하지도 않은 그것이, 그것이 나로 하여금 “네가 바로 십자가의 원수고 훼방자다” 라고 지적질 하기 위해서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설교 전에 장로님께서 질문을 했어요.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해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존에 알고 있는 작은 자는 가난한 자라고 알고 있었는데 성경을 다시 보니까 지극히 작은 자라 하는 것은 아무 세상에 기대하지 않고 예수님만으로 족하다고 하는 그 사람이 지극히 작은 자라는 것을 아셨다는 거예요. 그리고 기존의 교회가 성경을 반대로 거꾸로 가르친다는 것이 탄식이 된다는 조로 장로님이 이야기 하셨어요.

여러분 기존 교회는 천국을 상품으로 걸었습니다. 결과 따먹는 것에 사람들이 급급하다는 것을 간파한 거예요. “잘만 하면 그 땅에 가는데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게 하고 교회에 충성하시면 여러분 그거 따낼 수 있습니다” 라고 이렇게 가르치는 겁니다. 치워 버린다는 거, 십자가 앞에서 뭔가 치워버리고, 교체되어야 된다는 그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치울 때 우리가 치울 수 없어요. 십자가가 너무너무 좋게 생각되면서 어느새 내 생각을 안 하는 순간이 올 거예요. 그게 일부 치워진 순간입니다. 내 생각이 안 나는 순간이 있어요. 별로 길지는 않아요. 짧지만 보람 있어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순간 이제는 씹는 재미보다도 주님 앞에 씹히는 재미, 내 주제 파악이 되는 재미, 그 재미가 최고의 재미이고 그 장소가 주와 함께 있는 약속의 땅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사는 사람들과 어쩌면 이렇게 똑같은지, 남들 우쭐대는 거 같이 우쭐대기에 편성해서 그런 재미로 살지 않았습니까? 난데없이 나타난 달처럼 난데없이 나타난 그 십자가 앞에서 다시 우리의 몰골을 되비치어서 갈 수 없는 나라에 가게 하신 주님의 언약의 완성을 마음에 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