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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여호수아 1:1-4 / 여호수아의 등장 /2018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여호수아

여호수아 1:1-4 / 여호수아의 등장 /2018

정인순 2018. 5. 27. 16:18

 음성 동영상 Youtube

 

 여호수아의 등장

 

이근호

2018년 5월 27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1:1-4

(1:1)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1:2)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1:3)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1:4)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모세는 죽었습니다. 모세는 짧고 하나님의 프로그램은 깁니다. 짧은 모세 인생에 긴 하나님의 언약 프로그램이 개입한 겁니다. 마치 인간의 유전자 속의 DNA처럼 말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바라보는 안목에는 자아의 불멸성이 작용합니다. 비록 자신을 죽지만 살아있는 자식에 본인도 같이 살아 있다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에 조상제사가 있는 겁니다. 모세의 경우, 모세 아버지의 살아 있음이 아닙니다. 모세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언약이 있습니다. 비록 모세는 죽어도 하나님의 언약은 중지되지 않고 그 완성을 보게 됩니다. 모세 언약은, 모세만 구원받는다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모세와 함께 애굽에서 나왔던 그 이스라엘의 구원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적 입장에서, 언약이나 약속의 땅이나 광야나 하나님의 프로그램이나 이스라엘이나 이런 것은 없습니다. 그저 일반적인 산과 들과 바다와 해와 달과 하늘이 있을 뿐입니다.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상관없이 그들 눈에는 이런 것들 밖에 안보입니다.

오늘날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나 아니 다니나 보이는 것은 세상이 다입니다. ‘약속의 땅’이라든지, 성령이라든지 광야라는 것도 없습니다. 광야라는 것도 그냥 사막이 있다고 '광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이 부족하고 양식이 부족하고 단백질이 부족하다고 광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이나 모세에 대해서 원망을 해야 광야가 성립됩니다. 광야는 존재적 개념이 아니라 사건, 즉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비로소 등장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빼버리면 그냥 광활한 붉은 모래 들판으로서 사람이 살 수 없는 장소일 뿐입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약속의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젖과 꿀이 흐른다고 해서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가당치 않는 하나님의 조치, 예상 못할 하나님의 개입이 성사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건으로서의 ‘약속의 땅’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약속의 땅 만들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 작업에 이스라엘 백성은 ‘불신자’로서 들어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먼저 번에 홍해를 건너온 선배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간 광야를 유리하면서 다 몰살했습니다. 후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배를 죽는 것을 봤다고 해서 이들이 신자되는 게 아닙니다. 이들의 운명은 모세 자리에 연이어 들어가 여호수아가 인도합니다.

여호수아에게는 모세의 경우보다 더 깊은 언약적 뿌리를 갖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근원에 있어 진전을 보이게 됩니다. 즉 이스라엘이 전에 보다 더욱 더 자신들이 불신자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기회를 맞이하게 됩니다. 약속의 땅은, 불신자와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적 프로그램의 만남으로 성사됩니다.

이 작업을 위해 이미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이방민족들이 필요합니다. 이들의 사고방식이나 이스라엘의 사고방식이나 대동소이합니다. 자신들이 이 땅을 차지할 만해서 차지하고 있다 는 정신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언약적 사건은 생소합니다. 단지 그들에게 
자기네들이 거기에 있다는 존재의식 뿐입니다.

마치 요즈음 사람들에게 있어, 오로지 “나 여기 있음”만 생각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광야는 모든 것을 끝장에 내는 곳입니다. 사람들이나 그 무엇이나 죽게 되면 ‘I'가 못되고 ’it'가 됩니다. 즉 ‘그것’이 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게 있어 ‘그것’이었습니다. 사물이요 물체에 불과합니다.

하나님만이 ‘I’가 되셔서 시체 같은 ‘it'를 끌고 인도하셨습니다. 즉 죽음의 세계에서 그들이 벗어난 것은 만나를 드러난 한 말씀의 현존 때문이었습니다. 곧 프로그램의 현존입니다. 언약이 그들을 다루고 있었던 겁니다. 이로서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목숨보다 더 우선되고 더 소중한 겁니다.

이처럼 ‘약속의 땅’이란 이스라엘이 소유할 수 있는 부동산이 아니라 함께 참여해서 형성해야 될 세계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바다를 찾을 때는, 다음과 같은 경우입니다. 첫째는 바다내음을 맡고 바닷물에는 안 들어가는 경우가 있고, 둘째는 수영복 가져가서 바닷물 속에서 노는 경우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셋째는, 이왕 바다에 왔는 것, 조개나 미역이나 전복을 뜯어서 수입을 얻고자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바닷물이 되기 위한 경우는 없을 겁니다. 즉 바다가 관찰하고 구경하고 분석하고 소득을 얻을 생각은 할 수 있지만 ‘내가 곧 바다다’라는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프로그램은 우리 자신을 출렁이는 언약의 일부로 여기십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시켜서 한 일임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불신자입니다. 이 불신자를 데리고 하나님께서 천국을 만들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 방식은 외부에서 뜯어내는 방식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이스라엘이나 오늘날 성도들은 불신자들이기에 세상의 힘이 주눅들어 그들처럼 돈이 없음에 좌절합니다. 그들의 삶을 부러워합니다. 그들처럼 살지 못함에 대해 하나님께 원망합니다. 이런 죄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막강한 외부 세력과 만나게 합니다. 이스라엘은 주저없이 그들의 힘을 부러워하면서 굴복합니다.

하지만 이런 이방민족의 움직임과 이동까지 모두 하나님의 언약적 프로그램이 제대로 가동되고 있는 증거들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얼마나 자신들이 불신자인가를 더욱 혹독한 현실 속에서 발견하도록 하는 겁니다. 그 방식은 마치 유적지에서 발굴단이 외부에 덮힌 흙들을 하나 둘씩 뜯어내는 방식과 같습니다.

유물이 스스로의 힘으로 바깥 공기와 접촉할 수 없듯이, 이스라엘이 스스로 힘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정체를 노출시킬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그들은, 그들을 덮고 있는 악마의 권세를 하나님의 힘으로 뜯겨져 나갈 때, 하나님 백성들이 얼마나 세상 위세가 무서워서 버들버들 떨고 살고 있는가가 노출됩니다.

성도는 이집트의 미이라처럼 황금마스크를 쓰고 살아야 합니다. 마스크 안의 신체는 죽은 시체입니다. 하지만 빛나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인해 죽을 성도도 삽니다. 그래서 성도는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자랑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평소에도 얼마나 많은 기적들이 은혜로 성도를 인도하는지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송민선

186강-여호수아 1장 1–4절(여호수아의 등장)

2018005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1장 1–4절입니다. 구약성경 320페이지입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모세가 죽었다고 두 번씩이나 나와 있지요? 사람은 하나님보다 생이 짧습니다. 사는 게 짧아요. 인간이 알면 뭘 알겠습니까? 그 짧은 인생 살면서. 그 짧은 인생 속에 긴 주님의 말씀과 계획이 침투되어 있다는 이것이 바로 복이라 할 수 있지요.

나는 짧게 죽지만 주님의 남은 일은 변함없이 추진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산다는 것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명이 있어야 되는데 나는 죽어도 좋으니까 주님의 계획은 줄곧 계속 지속되게 하옵소서. 주님이 집어넣은 프로그램이 계속 풀리게 하옵소서. 이렇게 되는 겁니다.

흔히 옛날 사람들 환갑잔치 할 때에 자식들 많이 있으면 참 복되다고 하잖아요. 이게 오늘날 식으로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나의 DNA가 50%까지 내 앞에 쭉 퍼져있는 거예요. 손자들은 15%까지 내려가요. 8분의 1로. 그러니까 이건 나는 죽어도 우리 자손이 살아 있는 한 나는 계속 살아 있는 거예요. 내 DNA는. 그리고 그들이 제사까지 올려준다면 나는 제사 속에서 계속 살아 있으니까 이게 얼마나 인간이 고집하는 자기 불멸성이고 연속성입니까?

이거는 그냥 속에 담아 있는 내용이 아니고, 왜 딸 말고 아들을 나아야 하느냐, 제사를 지내는 것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고, 아들은 왜 제사를 지내야 하느냐면 부모 잊지 말고 자식 속에서 죽은 내가 네 속에 살아 있겠다는 그 욕망과 욕심, 그게 모든 민족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들이 세상을 보는 한계예요. 그것까지밖에 못 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고 여호수아도 마찬가지예요. 지난 낮 시간에 이야기 했지만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통해서 그들이 불신자라는 것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불신자를 버리지 왜 끌고 다녔느냐, 먼저 선배 불신자는 다 죽였어요. 40년에 걸쳐 다 죽이고 이제 후배 불신자들을 데리고 들어갑니다.

그들은 신자 아니에요. 불신자들뿐입니다. 불신자들뿐인데 선배는 죽이고 후배 되는 40년 이후 되는 자녀들은 다 데리고 갑니다. 그렇게 데리고 들어가서 하나님이 하시는 프로그램이 뭐냐 하면 불신자가 어떻게 백성이 되느냐 하는 그 전환과정, 그 바꾸어지는 것을 하나님의 변함없는 프로그램이 개입해서 성공을 시킨다는 것을 증명해 보고 싶은겁니다.

그러면 이 약속의 땅이라 하는 것은 발을 딛고 들어간다고 해서 약속의 땅이 되는 건 아니에요. 그냥 불신자 혼자 들어가면 약속의 땅도 지옥이 되어 버립니다. 불신자 + 하나님의 프로그램 그리고 계획과 같이 겹쳐질 때 그게 약속의 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은 없는 겁니다. 없어요. 인간 혼자서는 약속의 땅이 없어요. 마치 예수님이 없는 것처럼. 나만 있고 예수님 없는 것처럼.

그 당시 여호수아의 함께 했던 백성들도 똑같은 입장입니다. 눈에 보이는 게 다예요. 눈에 보이는 거 외에는 없는 겁니다. 이건 분명히 해야 되요.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예수님 봤다. 꿈에 봤다’ 이렇게 착각들 하시면 안 됩니다. “어떻게 생겼는데?” “어떻게 생겼더라.” 보면 전부다 어디서 본 것들의 잔상이 남아서 한 것들이죠. 끊임없이 우리는 매일같이 불신자로 전락되는 것이 주님의 프로그램입니다.

거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스스로 신자가 되고자 하는 부질없는 노력을 하게 되죠. 이 원리가 이렇습니다. 교회가 되려면 불신자의 모임이 되어야 하는데 불신자의 모임이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불신자임을 더욱더 확신하는 모임이 교회여야 하는 겁니다. ‘우리는 불신자 맞다. 우리 힘으로 아무리 교회 만들어 봐야 소용없는 것이다.

소용없다. 그리고 맞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하는 노력을 해 봐야 기껏 80년 90년 밖에 안 되거든요. 우리는 짧아요. 80년 투자해서 영생 얻는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거는 염치없는 짓이죠 . 우리 집에서 교회까지 오는 샛길 있잖아요. 거기 뒤에 샛길 있는데 거기를 걸어오는데 누가 글을 하나 붙여 놨어요. ‘누가 호박 두 덩이 빼갔나? 한번 들키면 손가락 부러뜨려 버린다.’ 이렇게 쓰여 있어요. 가시면서 한번 보세요.

아침에 이야기 한 것처럼 자기 고유의 것을 건들은 거예요. 자기 고유의 것을. 그 사람이 할머니거든요. 그 할머니가 뭘 모르느냐 하면 주님께서 호박 두덩이 가져가도록 했다는 것을 몰라요. 주님의 프로그램을 몰라요. 그래서 그 할머니에게 예수님 걸리면 예수님 손가락 두 개 부러집니다.

우리 사는 게 그래요. 내 것 손대면 예수고 하나님이고 다 부러뜨려 버립니다. 하나님의 프로그램은 어디서 나오는가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옵니다. 십자가에서 프로그램이 풀려져 나옵니다. 그걸 사건, 또는 언약 사건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불신자로 확정했어요.

불신자로 확정되고, 약속의 땅만 없는 것이 아니라, 광야라는 것도 없어요. 광야라는 것은 그냥 사막 있다고 광야 되는 거 아닙니다. 제가 또 그 동네 가 봤잖아요. 참, 자랑질 또 자랑질. 아무튼 제가 그 동네 가봤잖아요. 사막이 있다고 해석 거기에 광야가 있는 게 아니에요. 물 없고 양식 없고 단백질 결핍된다고 이게 자동적으로 광야가 되는 게 아닙니다.

거기에 뭐가 섞여야 되느냐 하면 원망이 섞여야 돼요. 원망.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섞여야 되고 전갈이 와서 물어뜯어야 되고 이 모든 것이 프로그램화 되어 있어야 돼요. 그럴 때 광야가 광야답게 나오는 겁니다. 제가 아침에 이 세상이 광야라 한 것은 죽음의 끝장을 보자는 겁니다. 인간이 어느 정도로 독한지. 인간이 어느 정도로 주님의 손가락을 부러뜨리는지.

인간이 평소에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대들고 반항하고 원망하는지. 집에서 놀면서 교회는 안 나온다고 하잖아요. 내가 아침에 들었어요. 식사하다가. 집에서 놀면서 교회 안 나와요. 지금 한두 명이 아닙니다. 다 해당되는 거예요. 집에 가족들. 자식들.

창조주나 심판주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아요. 유일한 현실은 내가 여기 있고 내 의미는 내가 알아서 하기 나름이라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앞으로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이렇게 만들어 지고 저렇게 만들어 지는 거예요. 그러한 것을 여러분들이 보면서 뭘 배워야 하냐면 ‘저 것이 바로 성경에 있던 광야다’ 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갈 필요도 없어요. 가면 좋지만 꼭 가야만 구원 받는 건 아니에요. 제가 많이 양보하고 있는 겁니다. 요새 말이 자꾸 변해요. 전에는 갈 필요 없다고 했는데 이제는 가면 괜찮다고 하고 이게 변하는 인생이에요. 언제까지 변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그 모습인 거예요. 예수님이 뭐라고 해도 귓구멍으로 들어가지도 않는 내가 그런 인간이었어요. 그런데 내가 어째서 주님을 아느냐 이 말입니다. 그게 신기한 거예요. 예수 안 믿는 게 신기한 게 아니고 예수 믿는 게 신기한 것을 안 믿는 남은 식구들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제자리를 찾아가 봐야 합니다. 이거는 내 노력이 아니에요. 내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내가 결심해서 될 문제가 아니에요. 인간이 결심해 봐야 교회 만들기 밖에 없어요. 그거는 절간입니다. 아무 의미 없어요. 교회 만들기도 아니고, 십일조 해도 아니고, 성지 순례해도 소용없고, 그런데 왜 내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 라는 말씀이 인정이 되고 고개가 끄덕여 지는 지, “잘 하셨습니다. 참 당연하십니다” 라는 말이 수긍이 되는지, 이거는 나 혼자 있는 게 아니고 어떤 분이 달라붙어 있다는 뜻입니다.

시편 75편 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프로그램은 우리가 이해하고 이해 될 문제가 아니에요. 시편 75편 3절도 같은 말씀인데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거민은 소멸되리라” 이 말에 앞뒤가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께서 땅의 기둥을 세웠어요.

주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어요. 만드니까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 살라고 땅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생각이에요.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인간이 소멸되지 말아야 된다는 말이죠. 살게 하려고 만들었는데 소멸된다는 것이 앞뒤가 안 맞는 모순적인 내용이잖아요.

인간은 받아들이기 힘든 거예요. 제가 만약에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서 지옥을 만들어 놓았습니다”라고 말하면 앞뒤가 안맞는 이야기잖아요. 사랑의 하나님 같으면 지옥을 아예 없애 버려야죠. 이러면 지옥 간다는 말도 하지 말아야 돼요.

“지옥은 아예 없으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내가 키워가지고 천국 다 보내 줄게요. 내 노를 모두 거두고, 인간이면 다 천국으로 오너라. 내가 조치해 줄게.” 이럴 때 우리는 이걸 사랑이라고 해요. 자식들 중에서 다 귀한 자식이라고 할 때는 자식들이 사랑의 부모라고 아는데 “내가 자식 낳았지만, 어떤 자식은 내가 진짜 밉다”“라고 말하면 어느 자식이 부모에게 참 사랑이 많다고 하겠어요?

인간들은 하나님을 이해 못합니다. 왜냐면 태생이 불신자예요. 이미 태어날 때부터 불신자예요. 하나님보시기에 전부다 정신병자고 미친 인간들입니다. 미친 인간들인데 그 미친 인간들 앞에 주님께서 나타나니까 그 예수님이 미쳤다고 하는 거예요. 서로가 서로를 미쳤데요. 이거는 뭐 통합될 문제가 아닙니다. 화합될 문제 협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세가 죽었어요. 모세도 인생을 짧게 살고 죽었어요. 죽고 난 뒤에 여호수아가 인수인계 받았습니다. 불신자들입니다. 불신자들을 그냥 모세처럼 옛날처럼 이끌어 가버리면 이 들은 또 죽습니다. 광야에서 몰살당하듯이 또 몰살당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모세 말고 여호수아에게 인수인계 한 것은 여호수아 방식이 모세 방식보다 약속이 보다 더 깊이 있게 진척되는 겁니다.

사람이 살면서 보통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린다는 그런 거 훈민정음에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뿌리를 확 박아 버린 거예요. 이 땅에. 보다 더 약속의 땅에 주님의 언약의 기초에 더 뿌리박는 조치가 모세 때 말고 여호수아 때에 주어지는 겁니다.

뿌리가 더 박히는 거예요. 어지간히 흔들어서 흔들리지 않는 그 뿌리가 더 박히는 겁니다. 그러면 그 뿌리가 박힌다는 말은 그 만큼 백성들이 뭘 느껴야하느냐 하면 주님의 은혜를 보다 많이 알게 되는 경우를 말하는 겁니다. 그러면 은혜를 안다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안했는데 주님이 하셨네’ 라는 양이 더 많아 지는 것을 뜻합니다.

제가 낮에 마음을 낮추라고 했죠? 마음을 낮추게 되면 뭔가 날라 가는 게 아니고 그냥 전에는 내가 노력해서 얻었다는 것조차도 이제는 주님의 거져주시는 은혜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주님 자신의 프로그램 속에 집어넣어요.

우리로 뭘 하게 하느냐 하면 우리로 불신자 인 것을 더욱 돈독하게 만들어요. 불신자로 만들어 버리면 우리 자신에게 기대하고 희망을 건 것을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겁니다. 포기하게 만든다는 말은 그 만큼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입니다. 교회 안다니는 자식마저도 내 자신이 불신자라는 것을 되비치기 위해서 죽으라고 교회 안가는 자식을 바짝 내 곁에 두면서 또 부모에게 빼 낼 것은 다 빼내게 하시는 거죠.

고등학교 때에는 “교회 나오면 얼마 줄래요?” 이런 거라도 있었는데 이거는 교회도 안 나오고 또 달라하는 것은 무슨 자격으로 달라하는지. 그 뽐 새, 그 행 새가 어쩌면 그렇게 우리를 닮았습니까? 자식을 통해서 나의 끝장을 보자는 그런 뜻이죠. 나의 끝장을 보자는 거. 내가 그런 자였었는데 무슨 이런 횡재가 있습니까? 시키지도 않는데 교회 나오고, 시키지도 않는데 헌금내고, 시키지도 않는데 교회 봉사하고, 내가 미친 건가? 아니면 뭘 노리고 하는 짓인가?

스스로 자기 안에 어떤 프로그램이 작동되고 있다는 거. 그 십자가의 뜻만 나오는 프로그램이 지금 나를 휘감고 있다는 말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 이미 차고 들어와서 침투해 들어와서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라는 이것이 아주 공포스럽고 협박으로 들리는 것이 아니고 다행으로 들리는 거예요.

‘나는 불신자이기 때문에, 주여,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제발 좀 중지시켜 주옵소서. 내가 나 사랑 안하기, 내가 나 미워하기를 주께서 나를 찾아 온 능력으로 지금도 매일같이 나에게 그 능력을 행사시켜 주옵소서.’ 그것이 바로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모세 때에는 그냥 끌고 다녔잖아요. 여호수아는 난감한 상태를 정면으로 몸으로 부딪치게 만들어요. “감당되나? 너희들 수준으로 감당 되겠느냐? 한번 봐라” 이 말이죠. “뭐? 네 인생이 네 인생이라고? 감당 되겠어?” 한번 보라는 이 말이죠. 안되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불신자이기 때문에 감당 안되는 게 당연하다는 겁니다.

세상이 그렇게 고요하고 평화롭게 살아지지 않습니다. 하나 예를 들면 바닷가에 갔을 때 여러 가지 경우를 생각하는데 첫째 경우 짭조름한 바다 냄새 맡으며 바다 구경만 한다는 경우도 있고, 바닷가에 갔는데 수영복 챙겨가지고 바닷물에 몸을 한번 담가 볼까하는 경우도 있을 거고, 기왕 바닷가에 갔으면 해녀처럼 바다 속 깊숙이 가서 미역이나 전복이라도 따서 기름 값이라도 벌려고 하는 그런 경우도 있다는 말이죠.

그러나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경우 보다 바다를 뭐로 보느냐, 하나의 ‘그’ 영어로 ‘It’ 으로 하나의 대상으로 보는 거죠. 나 여기 있고 당신은 여기 있고 바다는 그것으로 여겨서 관찰하고, 관람하고, 분석하는 대상이 되는 거죠. 그러나 광야에서 주님께서 만나를 줌으로 말미암아 “너는 맛나 없이는 죽은 몸이야”라고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나를 ‘I’로 보지 않고 ‘It’으로 보게 하시는 거예요.

‘나’라는 물체가 여기 있다는 식으로 보게 하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가 쇠 덩어리 되고 물체 덩어리 되면 내가 스스로 내가 움직인다는 것은 주제 넘는 일이에요. 주께서 놓여져 있는 대리석 같은 나를, 돌멩이 같은 나를 오늘도 아침에 깨워줘야 돼요. 알람으로 깨우든지, 6시 뉴스로 깨우든지 하여튼 깨워주셔야 해요. 안 그러면 햇빛 들어오는 커튼 걷어서 깨워주든지 매일같이 나를 살게 할 때, 나는 나가 아니고 ‘It’라는 그것이 되고 나는 주님이 나 대신 ‘I’가 되어 주시는 거죠. 주체가 된다는 이 말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주체가 될 때 우리는 그 ‘It’는 어디에 쓸모가 있느냐, 우리가 바다를 구경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바다의 물방울 하나하나가 되게 하는 겁니다. 우리가 움직이는 모든 것이 언약의 바다, 언약 프로그램에 일부로 가담되어서 내가 출렁이고 내가 움직이는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주의 뜻에 보탬 되는 식으로 오늘도 아침 기상나팔 불러서 나를 깨우게 하는 겁니다.

내가 주님의 프로그램의 일부가 되는 거예요. 그러나 거기서 나를 ‘I’라고 쓰면 안 되고 ‘It’ 그것으로 봐야 해요. 주님이 다루시는 대상으로 봐야 됩니다. 그걸 오늘 본문에서 뭐라 하느냐하면 1장 1절에서 나옵니다. ‘여호와의 It’ 여호와의 종이에요. 우리는 여호와의 종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종이 되는 게 아니고 주님이 여호와의 종이 되는 프로그램에 종의 역할과 기능을 맡긴 거예요. 그래서 막 사세요. 왜 막 살아야 되느냐 하면 막 살지 않고 조심스럽게 살아 버리면 내가 나를 여호와의 종으로 변계 시키는 수작에 나서게 됩니다. 그거는 불신자 정도가 아니고 이거는 신자로 행세하는 악마의 부역자라고 어떤 분이 표현을 해요. 그분이 국문과 출신입니다.

악마가 시키는 대로 하다 보면 자기를 절대화 시키는 자기 주체성을 꼭 쥐게 된다는 겁니다. 내가 했다는 겁니다. 내가 기도하고, 내가 헌금하고, “목사님, 내가 뭘 할까요?”“라고 하면서 꼭 내가 나온다는 겁니다. 내가. ‘It’가 아니고 ‘I’로 나온다는 거죠. 그러면 주님의 프로그램은 어떻게 진행이 되느냐 하면 주님의 프로그램으로 데리고 가요.

불신자잖아요. 지금 불신자라는 말을 한 두 번 한 것이 아닙니다. 불신자를 데리고 약속의 땅의 구성되는 벌어지는 공장에 재료로 집어넣어요. 집어넣게 되는데 여기에 마주 오는 게 있어요. 마주 오는 게 뭐냐 하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는 영원히 저주 받을 수밖에 없는 지옥 가는 이방 민족과 마주치게 하는 겁니다.

마치 기도 하신 것처럼 교회 나올 때 복음 듣고 밖에 나오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지옥 갈 사람들을 만나잖아요. 그런 감각 없어요? 뭐 나에게 돈 줄 사람들이에요? 전부다 지옥 갈 사람들 만나는 거예요. 만났을 때 우리는 불신자이기 때문에 우리의 습성은 지옥 갈 사람과 동일해요. 동일합니다.

그러면 자진해서 고개를 숙입니다. 전에 이야기 했듯이 취직할 때 “저를 기계로 사용해도 저는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저한테 물병 던져도 저는 웃겠습니다.” 뭐 이런 거죠. 물병 던지고, 가위 던지고, 서류 봉투 던져도 얼른 줍는 거죠. 자식들이 둥지에서 입 벌리고 있는데 월급 받아야 살거든요.

마귀는 나를 알고, 우리는 마귀를 잘 알잖아요. 마귀가 없으면 어떻게 먹고 살고? 지금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이방인이 살던 땅 위에, 약속의 땅 위에, 사실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이방인의 땅입니다. 이방인의 땅을 약속의 땅으로 바꾸려면 프로그램이 제대로 잘 돌아가야 해요.

그 프로그램이 돌아가야 하는데 그 땅에 살 위인과 자격자는 아무도 없어요. 왜냐, 이스라엘 백성들도 불신자이니까. 하지만 혜택이 있어요. 그들만큼은 모세 언약이 주어진다는 거예요. 모세 언약을 다시 말씀드리면 장차 예수님 십자가 사건에서만 풀려나오는 그 능력, 그 언약의 능력이 미리 앞당겨서 모세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전달되는 거예요.

그러면 불신자와 프로그램의 만남입니다. 그들에게 이방 사람을 만나게 되면 이거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음매, 기죽어.’ 하는 거예요. 완전히 기 팍 죽어서 살아요. ‘하나님은 뭐 하시나? 우리에게도 돈 좀 주지.’ 이런 식으로요. ‘나 교회 20년 다녔는데 이제 부자 될 만 한데 왜 부자 안 되지? 살림살이 좀 나아져야 하는데 예수 그렇게 믿어도 나아지는 것도 없고.’ 뭐 이런 식으로 세상이 부러워 죽는 거예요.

심지어 여호수아에서는 그들에게는 강력한 칼이 있고 이스라엘은 칼이 없어요. 그들에게는 강력한 군대, 무기 다 있고, 전술도 다 있어요. 이스라엘은 하나도 없어요. 게임이 될 수가 없어요. 완전히 패배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덮칩니다. 덮치게 되면 이스라엘은 그대로 함몰 당하죠. 그렇게 되면 뭘 느끼느냐 하면 ‘내 힘으로 약속의 땅 되기는 글렀다’ 이걸 분명히 해요.

쉽게 말하면 내 힘으로 천당 가기는 글렀다. 왜? 나는 이렇게 세상 속에 살다 보니까 이렇게 불신자인지를 내가 나를 보면서 깜짝 놀라겠다. 깜놀이에요. 그동안 주님 사랑한다는 거 전부다 위선적이고 전부다 거짓된 거예요. 이걸 ‘Fake love’ 라고 합니다. 방탄 소년단 제 3집의 대표곡이 ‘Fake love’ 예요.

속이는 사랑이에요. 속이는 사랑. 혹시 사랑하면 저들이 가지고 있는 돈이 나에게 올까 싶어서. 주께서 덮쳐 버리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유적지가 돼요. 유적지에서 유물을 발굴 할 때에는 외부에서 뜯어주는 방식을 씁니다. 여기에 바로 여호수아가 동원됩니다. 여호수아는 이미 하나님의 천사와 계약이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천사와 계약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 어디에 나와 있느냐 하면 뒤에 나옵니다. 5장 14절에 미리 볼까요?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다” 군대장관은 전쟁하는 기능의 천사지요.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되 나의 주여 무슨 일을 하리이까?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너는 나의 It 이다” 나의 종이라는 말이죠.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I’ 가 되고 너는 ‘It’, 종이 되는 거예요. 너는 시키는 대로 해라. 그러면 불신자 되는 이들을 저희 스스로의 힘으로 이방 민족을 못 이깁니다. 저 막강한 군대를 못 이겨요. 이제는 외부에서 어떤 때는 강력한 다이나마이트로 어떤 때는 망치로 어떤 때는 솔로. 유물 발굴 할 때는 솔도 필요하고 망치도 필요하고 다 필요해요.

살살 다루어야 할 때는 아주 살살 다루어야 해요. 나는 우리 교인들을 전부다 붓으로 다루고 싶어요. 혹시 상처 입을까 싶어서 걱정이 되어서. 무슨 말을 못하겠어요. 어쨌든 간에 발굴하고 파내야 해요. 우리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워낙 불신자니까. 자기만 챙기니까. 그냥 안 다치고 천당 가게 하옵소서. 맨날 소원이 이거예요. 맨날 소원이.

주께서는 그걸 뜯어 낼 때 뜯어내는 위력이 십자가의 승리입니다. 승리예요. 뜯겨 낼 때. 내가 불신자인 걸 다시 깨닫게 될 때, 주께 나는 신자이고 나는 할 만큼 했다고 복 받을 만큼 했다고 했는데 내가 내 인생 산다는 것은 지금 죽어도 ‘왜 죽입니까?’ 라고 할 말 없을 정도로 평소에 주께서 은혜로 도와주셨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겁니다.

끝으로 저는 이것을 애굽의 미라로 표현하겠습니다. 미라가 황금 마스크를 쓰잖아요. 황금 마스크를 떠야 되는데 석고 부어가지고 틀에 맞도록 해서 황금 마스크를 씁니다. 황금 마스크를 씌워 버리면 그 사람은, 미라 주인공은 죽어도 황금 마스크가 청춘의 심볼이에요.

젊을 때, 가장 빛날 때의 인생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우리 불신자에게 예수님 자신의 형상을 황금 마스크처럼 쓰고 다니게 하는 겁니다. 신자가 뭐냐, 성도가 뭐냐,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성도가 아니에요. 황금 마스크 없으면 성도가 아닙니다. 그 황금 마스크가 죽은 우리를 다시 부활해 냅니다. 진짜 나는 불신자요, 죄인 중의 괴수지만, 주님께서 그 죄인을 의인되게 만들고 성도되게 만들기 위해서 주님께서 피 묻은 황금 마스크를 우리 얼굴에다 덮어 씌워버립니다.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만 자랑하라고, 그런 식으로 마스크 쓰고 평생을 살라고, 그것이 바로 구원받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백성의 자세입니다. 나중에 이들이 여호수아 죽고 난 뒤에 황금 마스크를 벗어버립니다. 왜? 답답해서. 자기 자랑 못해서. 자기 자랑이 황금 마스크에 막히니까. 그게 짜증나는 거예요. 내가 이 만큼 잘 났는데 십자가 앞에 잘리니까, 십자가 비키라고 하면서 십자가 없는 교회, 십자가 없는 복음, 십자가 없는 설교 듣기를 찾아다니는 겁니다. 한국교회 개혁해야 된다고 하면서 이런 식으로.

여호수아는 더욱 강력하게 이들이 주님의 은혜에 더 뿌리 깊게 박히지 아니하면 구원 될 수 없는 대상인 것을 보여주는 것이 여호수아인데 4년간 신명기 끝나고 이제 여호수아 시작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의 마음에 무엇을 덧씌우고 있는지 깨닫게 하옵소서. 십자가 앞에서 우리를 죄인 되게 하시는 이유가 우리 구원 자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과 피 흘리심과 아픔과 고통과 죽으심을 잊지 마라 하신 주님의 영원의 영생의 마스크인 것을 저희들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