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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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2017년 11월 22일
본문 말씀: 창세기 29:14-20
(29:14) 라반이 가로되 너는 참으로 나의 골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달을 그와 함께 거하더니
(29:15)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나의 생질이나 어찌 공으로 내 일만 하겠느냐 무엇이 네 보수겠느냐 내게 고하라
(29:16) 라반이 두 딸이 있으니 형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29:17) 레아는 안력이 부족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29:18) 야곱이 라헬을 연애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춘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년을 봉사하리이다
(29:19) 라반이 가로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29:20)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년을 수일 같이 여겼더라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로서 죄가 아닌 것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의 행동에 그 어떤 하자도 찾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지요. 하지만 그 아곱도 실은 범죄의 아담의 육신을 연속입니다. 흔히 인간들이 ‘자연스럽다’는 말은 ‘죄가 아닌 중립성을 지닌다’로 이해합니다.
이런 주장은 곧 대자연의 순진무구성 속에 자신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나온 겁니다. 자연은 결코 순수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하나님께서 새겨 넣으신 질서가 있고 무늬가 있습니다. 얕은 개울가라도 인간이 발을 담그게 되면 물살이 주는 저항성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대자연 안에 범죄한 인간이 개입하므로서 대자연은 함께 울고 있습니다. 함께 탄식하면서 썩어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대자연이 인간을 향해 하나님이 주신 원칙을 가지고 저항하고 반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감정이 생겨서 사랑하는 자와 만나 결혼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다고요?
아닙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같은 인간이면서 남자와 여자를 구분지어 다른 모습으로 창조하셨겠습니까? 여기에 실은 하나님의 원칙을 무시하고서, 단지 이미 남자이니까 혹은 혹은 이미 여자이니까 이제부터 남자 혹은 여자답게 살면 문제될 게 없다는 식으로 살아가신다면 이는 벌써 자연의 저항에 부딪친 겁니다.
인간들이 오늘 본문 같은 야곱의 결혼에 관한 내용을 대하게 되면, 자신의 결혼의 정당함과 결부시키기 일수 있습니다. 즉 “야곱도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희생하면서 기어이 결혼에 성공했듯이 나도 내가 사랑하는 여인을 얻기 위해 노력해서 결혼을 성사시킨 것은 참 잘한 일이다”고 자부하기 일쑤입니다.
이런 성경해석이 바로 ‘육적 자율성’의 정당함을 인정받기 위해 성경해석 것으로서 악마적 시도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함이지 결코 우리의 잘남을 증명하기 위한 용도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은 언약을 짊어진 사람입니다. 벧엘에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에 친히 사다리를 열어 언약을 실어나르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에 주어진 그 언약의 완성자가 나중에 지상에 나타나게 되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야곱이 혼인을 통해서 예수님의 의미를 미리 드러내는 것이 오늘 본문의 취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로 인간을 구분하신 이유부터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창세기 2:24에 나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범죄하기 전의 상황입니다. 비록 남자, 여자 두 사람이 있더라도 어디까지나 ‘한 몸’ 곧 ‘하나’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 들어가게 되면, 남자와 여자는 서로 대립관계가 성립됩니다. 곧 ‘너는 너, 나는 나’를 굳히는 시기에 접어든 겁니다.
이는 그 이후의 인간에게는 결코 두 사람이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연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자연의 상처’. 혹은 ‘자연의 실패’입니다. ‘자연의 화근’입니다. 자연이 저주받은 것은 인간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있던 그 문제성으로 인하여 처벌이 대자연으로 확대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에게는 ‘흙’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셨고, 여자에게는 ‘생명’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흙과 생명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하나됨’을 성사시키려고 하시려는 겁니다. 곧 남자는 여자를 만나 자신의 소멸됨을 확인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여자는 ‘소멸될 수 없는 그 남성’ 속에 ‘생명의 터전’을 고대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 둘 사이에 개입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자의 후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후손’이란 남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성(女性性)’을 말합니다. 여성성이란, 이름이 없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대표이름은 남자가 갖습니다. 하지만 그 남자의 운명이 변경되는 것은 대표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 여자를 통해서 성사되게 하십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경우에 두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하갈과 사라입니다. 병렬적으로 아브라함은 각각의 남편 노릇을 합니다. 즉 두 명의 아내가 있다는 말은 남편이 둘이다는 뜻입니다. 아브람이 그러하고 아브라함이 그러합니다. 이 두 명이 한 사람에게 중첩되어 있는 겁니다.
하지만 야곱에게 있어서는 병렬적이 아니라 직렬적입니다. 즉 야곱이 죽어야 이스라엘이 등장합니다. 두 명의 아내는 이 두 종류의 남편을 구분 짓는 기능을 하게 되는데 죽어 마땅해서 흙으로 환원되어야 될 남편과 생명으로 등장될 남편을 알려줍니다. 원래 족보에 있어 여자의 이름은 빠집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족보에서 단지 4명의 여자만이 족보에 들어가게 되는데 모두 외부적 요소를 담고 있는 여인들입니다. 특히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는, 본인은 한 명이지만 남편이 둘이 됩니다. 한 사람은 우리아 장군이요 다른 한 사람은 솔로몬을 생기게 다윗입니다.
그렇게 해서 죽어 마땅한 흙같은 존재인 남성, 곧 가문을 ‘이름없는 여성’의 개입으로 생명을 얻게 하는 겁니다. 야곱의 경우, 야곱이 사랑하는 여인이 사랑하지 않는 여자보다 먼저 죽게 됩니다. 이는 곧 야곱 인생의 패배입니다. 그동안 야곱이 승리와 승리로 연속되었다고 하지만 그 결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로 부각되게 하는 성질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 라헬은 자식 생산에 있어 라이벌이 레아에게 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앞에서 ‘야곱’이라는 이름의 운명입니다. 사랑하는 여인마저 조기에 잃게 된다는 것은 곧 야곱이라는 죽음의 존재가 이스라엘이라는 생명의 운명자로 변경되기 위해 희생되기 위해 야곱 인생에 개입된 ‘사랑의 아내’였던 것입니다.
승자가 되기를 원했던 그 야곱의 속성을 진정 구원해낸 것은 라헬이라는 여성성입니다. ‘여자의 후손’이란 이처럼 소멸되어야 될 남성의 운명에서 ‘생명’을 싹틔우는 역할을 통해서 이 역사에 미리 등장한 겁니다. 바로 이런 징후가 바로 진정한 대자연을 완성시킬 질서요 무늬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죽음없는 구원은 없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15강-창 29장 14-20절(두 아내)1711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9장 14-20절입니다. 구약성경 42페이지입니다. 창 29:14-20 “라반이 가로되 너는 참으로 나의 골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하더니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나의 생질이나 어찌 공으로 내 일만 하겠느냐 무엇이 네 보수겠느냐 내게 고하라 라반이 두 딸이 있으니 형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레아는 안력이 부족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야곱이 라헬을 연애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년을 봉사하리이다 라반이 가로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년을 수일 같이 여겼더라.”
그 뒤에 줄곧 나오는 내용은 이것입니다. 야곱이 삼촌집에서 일을 하는데 노동의 대가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보수로 뭘 요구하는가? 야곱이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처음 만났던 라헬이라는 여자가 곱고 아리따웠습니다. 상대적으로 언니보다 동생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 딸과 혼인만 한다면 제가 그것을 보상으로 여기겠습니다, 했더니만 삼촌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7년 동안 열심히 봉사를 했습니다. 얼마나 사랑했으면 7년 보내는 것을 마치 수일같이, 며칠 지난 것같이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21절부터 그 다음 이야기는 야곱의 뜻대로 되지를 않았어요.
결혼식 하는 날, 동생 라헬을 좋아해서 그 동생과 혼사를 치르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날 밤에 라반이 속임수를 써서 동생 대신 언니를 집어넣었습니다. 아침에 보니까 언니였어요. 야곱이 깜짝 놀라서 “왜 이렇게 하십니까?”라고 하니까 “우리 동네에서는 동생이 언니보다 먼저 시집가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서 그렇게 했다.”
사기 친 겁니다. 야곱이 원래 사기를 쳐서 형의 장자권을 빼앗은 것처럼 사기 친 인간이 도로 사기를 당한 거예요. 일단 그렇게 되었으니까 7일 동안 혼사는 이루어졌어요. 그 다음에 “그러면 제가 원했던 라헬은 어떻게 됩니까?” “7년 더 일하는다는 조건하여 너에게 줄게.”해서 무려 14년 동안 일을 해서 정말 자기가 원하는 여자와 결혼을 했다는 그런 이야기에요.
이런 이야기는 남녀가 사랑해서 결혼하는 이야기거든요. 이게 성경에 왜 나오는가 하면, 메시아가 나중에 이 땅에 오십니다. 메시아 오기 전에 메시아가 어떤 식으로 이 땅에 오는가를 알려주는 것이 구약이고 오늘 본문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장차 올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이 대목을 이해를 해야 될 텐데 이 대목을 아무리 봐도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이야기가 보이지를 않는 거예요.
그러면 이 이야기를 그리스도와 관련지으려면 야곱이라는 사람이 아담의 자손이잖아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어디로 가져가야 되느냐 하면, 처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들 그 때로 가져가 줘야 돼요. 왜냐하면 그 때 아담이 하와와 혼인했고 부부가 된 일로 인하여 계속해서 인류가 번식을 해 왔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이 땅에 번식시키고자 했고 그 번식하는데 있어서 인간이 개인적으로, 이왕 번식하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부부가 되어서 사랑하는 배우자로부터 자식을 얻겠다는 본성을 하나님께서 주입시켰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거하고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님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러한 본성을 하나님께서 허락했다는 그것은 장차 예수님을 허락한 것과 동일한 차원에서 허락을 하신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들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자식 낳겠다는 것이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여겨지는데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에요.
근원적으로 따져봐야 돼요. 하나님께서는 인간 만들 때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지 말고 아담의 하나의 몸속에 남성과 여성이 다 있어서 자식을 낳게 할 수도 있는 능력이 충분히 하나님에게 있잖아요. 그런데 왜 남자와 여자를 따로 구분 지었느냐 하는 그 이야기입니다.
이게 나중에 예수님이 오시는 것과 관련되어 있어요. 세상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어졌거든요. 사람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어졌고 사람을 만드는데 남자 50퍼센트, 여자 50퍼센트로 구분을 지은 것도 그리스도의 그리스도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남자와 여자를 같지 아니한 구조로서 만들어놓은 거예요.
그러면 남자와 여자를 따로 구분해서 만들어놓았다는 그것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는 것과의 관련성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밝혀내야 됩니다. 야곱이 흔한 인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메시아적인 인물이에요. 메시아적인 인물이라 할 때는 언약이 거기에 함께 있습니다.
이미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꿈에 사다리를 통해서 천사들을 왕래시켜서 야곱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사들과 만나고 천사들을 통해서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또는 완성과 관련된 내용을 야곱의 인생 속에 듬뿍듬뿍 집어넣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본문을 사람들이 보면서 어떤 식으로 해석이 되는가, 그 인간들의 선입감을 분석해 볼 필요가 있어요. 인간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한다는 것을 자연스럽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그것부터 시비를 걸어야 돼요. 그게 과연 자연스러운 일인지. 아니면 자연에 대한 상처인지.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이 땅에 옴으로 말미암아 자연은 저주받게 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저주받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누가 자연을 이렇게 신음하게 만들었고, 자연을 탄식하게, 썩어가게 만들었는가? 그것은 그 속에 인간이 들어왔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인간 때문에 완전히 자연을 망쳐놓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것도 모르고 내가 남자 좋아하고 여자 좋아해서 결혼하는 그것은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결혼식장에서 부부가 되는 이것이 무슨 죄냐,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누굴 좋아해서 결혼하는 것을 자연스러움이라고 보는데 남자와 여자가 따로 구분되어야 되는 이유를 알려면 창세기 2장으로 돌아가야 돼요.
창세기 2장에서 남자와 여자가 구분되는 원칙을 알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창세기 3장에서 부부가 자식을 낳았을 때에 ‘아, 2장과 3장 사이에 죄라는 것이 들어왔구나.’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자연스럽게 사랑하고 그래서 당신과 결혼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결혼해서 애 낳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것은 죄가 아닙니다.” 하는 그런 소리가 나와서는 안돼요.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을 만드시고 동물들을 보여줬는데 다 짝이 있어요. 인간에게는 짝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동물들에게 짝이 있음을 보여주고 그 다음에 아담을 잠들게 해놓고 갈빗대를 취해서 아담의 짝을 만들어준 것은, 자연에 어떤 짝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해서 심어놓은 자연의 질서, 무늬가 되는 거예요.
똑같이 만드는 것이 아니고 구분지어서 수컷, 암컷으로 짝을 이루었다는 이 말은 이 하나님 안에 있는 내부적인 사정을 이 자연의 질서라는 이름의 무늬를 자연 속에 담아놓은 거예요. 이것은 정말 쉬운 예인데요. 발목까지 차는 개울물을 걸어보세요. 여름에 피서한다고 발목까지 차는 맑은 시내를 걷지요.
그 때 뭘 느끼느냐 하면, 물이 없이 걸을 때와는 달리 물속에서는 발이 물에 부딪히면서 어떤 무늬가 생겨요. 뭔가 장해요소로 인해서 걸치는 것이 느껴지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인간들이 죄 짓고 난 뒤에는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없어요. 하나님이 없으니까 이 자연을 허구로 봐서 인간이 마음 놓고 이 자연을 장악하고 자기 원하는 대로 이용하고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는 어떤 무장해, 장해 없는 대상으로 보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거기서 나온 사고방식이 자연과학이라는 사고방식이에요. 자연과학에는 하나님이 없어요. 이것은 인간이 다루기 나름이라는 거예요. 허락받을 필요 없다는 겁니다. 내가 이용할 대로 이용하는데 누구의 허락을 받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자연자체가 어떤 물결 같은 질서의 결, 무늬가 있어요.
그것대로 안하면 그것에 부딪히게 되고 그것은 죄가 되는 겁니다. 이제부터 난해하더라도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2장 끝에 24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둘이 한 몸을 이룬다.
죄 짓기 전에는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창세기 3장에 들어오게 되면 둘이 하나가 된다는 그 사고방식은 완전히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창세기 3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대립관계로 유지하게 만들었습니다. “누가 따먹었는가?” “저 여자가 사탄에게 속아서 따먹고 여자가 먹게 해서 내가 따먹었습니다.”라고 남자와 여자를 대립관계로 만들어버렸어요.
대립관계가 되어버리면 창세기 2장 24절의 두 사람이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물 건너 간 겁니다. 이미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대자연을 인간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사용하라고 준 것이 아니고, 대자연 나름대로의 하나님께서 원리 집어넣었던 질서라는 것이 있는데, 그 질서와 인간이 대자연을 바라보는 그 안목의 질서와 얼마나 상충되고 이것이 껄끄럽고 죄가 되고, 그래서 그 죄에 대한 벌을 유발시킨 요인이 된다는 사실을 인간으로 하여금 이 세상을 살면서 혹독하게 경험하게 하는 겁니다.
인간은 자연을 통해서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살만한 인간이라는 것, 사는 것이 정당하다는 증거를 과학적으로 법칙을 만들면서 찾고 있어요. 그러나 자연은 절대로 인간을 정당화시키는 증거를 내놓은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을 힘들게 하는 증거를 내놓을 뿐이지요.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내가 어떤 여자를 사랑한다. 그게 죄에요. 사랑해서 결혼했다? 그거 죄입니다. 야곱이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서 결혼했다. 우리는 보통 성경 보면서 그것을 죄라고 여기지 않지요. 그게 만약 죄라면 기혼자가 이 성경을 보게 되면 ‘그러면 내가 결혼한 것이 죄였어?’ 이렇게 되기 때문에 ‘설마 그럴 리가?’ 이렇게 돼요.
그리고 남녀가 결혼해서 아기 낳는 것을 자연의 이치라고 하는 거예요. 누구 맘대로 자연의 이치에요? 누구 맘대로? 자기 맘대로 자연의 이치에요. 인간들이 성경을 해석할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이 책을 인간의 자율성, 육적인 자율성을 가지고 성경해석을 시도합니다.
육적인 자율성이라 하는 것은 뭐냐? 결국 나는 나고 너는 너라는 겁니다. 나는 나고 너는 너가 되어버리면 뭐가 빠져버리는가 하면,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는 그 가능성은 완전히 날라 가버려요. 나는 영원히 나고 너는 영원히 너라는 거예요.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는 나를 위해서 결혼했다는 거예요. 이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대자연을 주신 것은 그 대자연의 목적이 있어요. 그 목적이 요한복음 14장 10절에 나옵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분명히 인간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이 세상 살아가면서, 나는 나고 너는 너예요. 결혼을 하든 뭘 해든 관계없어요. 영원히 나는 나고 너는 너예요. 나를 위해서 네가 있을 뿐이지 너 위에서 내가 있다는 그런 것은 죄 지은 이상 인간에게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태어난 것부터가 자연의 실패에요.
인간은 실패자로서 깨끗한 자연 속에 끼어들어서 자연에 호작질을 하는 거예요. 그렇기에 자기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반성하거나 책임지지 마세요. 수백 번 이야기합니다만, 반성하거나 책임진다는 것은 마치 잘만하면 내가 죄 안 짓는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착각들을 하기에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반성을 한다는 것은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주장이거든요. 얼마나 그것이 오만한 생각입니까? 회개하는 것도 위험해요. 회개인지 반성인지 구분도 안돼요.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인간 자체가 또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는 인간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도마가 예수님을 볼 때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뭐냐?
자기 눈에는 분명히 예수님 육체 하나가 보여요. 자기 눈으로 예수를 볼 때 예수님육체 하나에요. 자기와 똑같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 안에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 안에 내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틀린 것이 아니고 누가 틀렸느냐 하면 제자들이 틀린 겁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서 틀렸다는 말은 지금 제자들은 죄악 된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잘못보고 있는 거예요. 잘못보고 있는 태도에서 예수를 믿겠다고요? 그게 믿는 겁니까? 욕보이는 거지요. 지금 하나님께서 야곱을 보내신 것은 뭘 시도하는가 하면, 죄짓고 난 인간이 결혼하면 계속 두 사람이에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결혼시킨 것은……, 인간은 서로 속이잖아요. 야곱도 속고 속이고. 인간은 자율성 때문에 절대로 둘이 하나가 될 수 없어요. 둘이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을 둘이 하나 되게 하심으로서 야곱은 오실 자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미리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14장 20절에 보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도대체 두 사람인데 어떻게 서로 안에 들어옵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오늘 설교에서 핵심, 우리의 임무는 이제 정해졌습니다. 어떻게 둘인데 하나가 될 수 있는가? 그걸 오늘 본문에서 찾아보면 되지요.
어떻게 찾는가 하면 아내가 하나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아내를 둘을 이야기해줬습니다. 아내가 둘이라는 것은 남편이 둘이라는 뜻이에요.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아내가 둘이잖아요. 사래와 하갈. 남편이 하나인데 그 남편이 병렬로(나란히) 아브람은 아브라함과 함께 있고 아브라함은 아브람과 함께 있어요.
아브라함 안에 아브람이 들어 있고 아브람 안에 아브라함이 들어 있어요. 그 사실을 두 명의 아내로 아브라함이라는 남자의 언약적인 구조를 바깥으로 표출해 주는 겁니다. 이게 병렬적인 방법이라면 야곱적인 방법은 병렬이 아니고 직렬이에요. 야곱이 죽고 난 뒤에 이스라엘이 등장하는 겁니다.
아내가 둘이 되게 되면 야곱은 죽고, 앞서 가고 뒤서가고, 이것은 야곱이고, 아브라함은 나란히 둘이 함께 있고. 나란히 함께 있는 것과 둘이 있는 것의 차이점이 뭐냐? 아내가 둘이라면 남편이 둘이라는 뜻인데 공통점은 둘 다 중첩되어 있다는 거예요. 겹쳐져 있다는 겁니다.
겹쳐져 있는데 어떻게 이것이 둘이 되느냐 하면, 이름이 바뀌어요.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뀌듯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뀝니다. 그러면 창세기 2장에서 두 사람이 하나가 되면서 하나 되었다는 증거를 뭘 로 보느냐 하면, 아담이 부부의 대표이름이 돼요. 대표이름은 남자가 갖는 거예요.
대표이름은 남자가 갖고,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야 되는데 죄짓고 나서 두 사람이 둘 일 경우에는 이름 없는 여자 쪽에서 이름 있는 아담을 하나 된 아담, 남편으로 만드는 역할을 두 명의 여자 쪽에서 실시를 하는 겁니다. 너무 어려워서 거짓말 하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이름이라는 것은 그 존재를 대표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담이라는 이름을 줬으면 그 아담의 이름에 하나님의 계획이 들어 있기 때문에 아담의 이름은 절대로 깨지거나 와해되거나 할 수 없어요. 끝까지 아담은 마지막 아담, 두 번째 아담까지 완성을 봐야 됩니다. 그런데 전에 있는 아담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아담과 하와가 분리되어 있어요. 두 사람이 한 몸이 못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분리된 이름을 줬어요. 아담에게는 흙이라고 하는 거예요. 흙이라고 줬고 여자에게는 하와, 생명이라는 이름을 줬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둘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 원래계획이고 이게 자연의 질서, 그 무늬에 맞아요. 창조의 원리에 맞다는 말이지요. 지금 이게 깨졌거든요.
두 사람이 하나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줬는데 언약이 개입하면서 언약은 장차오실 이름을 가지고, 장차오실 아담의 이름을 가지고 언약 속에 미리 집어넣습니다. 집어넣게 되면 남자는 여자를 통해서 자기의 소멸을 고대합니다. 흙이니까. 그냥 죽으면 흙이 아니에요. 참 이런 것이 어려운데요.
아담의 이름이 흙이라는 것은 반드시 생명이라는 여자 앞에서 흙이에요. 여자를 개무시해 버리면 아담은 자기가 사람인줄 알고 있다니까요. 흙이 아니고 자기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게 남자의 허세 아닙니까? 그래서 술 먹고 집에 들어오잖아요. 그 허세 때문에. 흙 주제에. 흙이라는 것은 소멸하는 것, 흙으로 환원되는 겁니다.
다시 원래 없던 자리로 환원되는 것, 소멸이에요. 소멸의 기능을 남자가 보이는 겁니다. 실제로 나이 60넘고 70가까이 되면 서서히 가정에서 남자는 소멸된 존재지요. 별로 말발도 안서고요. 돈을 못 벌어오는데 말발이 설 리가 있습니까? 졸혼의 대상이 되고요.
남자가 흙이기 때문에 반드시 흙의 기능을 해줘야 돼요. 그러면 남자가 흙의 기능을 함으로서 남자는 구원을 얻는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맞은편에 누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생명 되는 어떤 분이 계셔야 돼요. 어떤 분이 아내지요. 어떤 여자 분이 계셔야 돼요.
남자는 여자를 통해서 소멸되기를 원하고 여자는 소멸되는 남자 안에 터를 잡는 것, 그렇게 터 잡기를 원해요. 그렇게 될 때 뭐가 생기느냐? 지금 창세기 3장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장차 구원은 여자의 후손이에요. 여자의 후손은 남자를 낳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의 후손은 여성성을 낳아요. 여성성, 여자의 후손은 여성성을 낳는데 여성성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 땅에 일체 이름을 갖고 있지 않는 분이 등장해요.
이 지상에 이름이 없는 분. 이 지상에 이름이 없는 분이 누구냐? 보통 가정에서는 여자가 이름이 없어요. 마태복음 1장에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여자는 빠져요. 이삭은 야곱을 낳고……. 마태복음 1장에서 누가 누구를 낳고, 할 때 여자는 다 빠집니다. 그러나 유난히도 여자가 들어가는 대목이 딱 네 개 있어요.
참 신기하지요. 보아스는 룻에게서, 여기에 여자가 들어가요. ‘룻에게서.’ 여기서 룻은 이방여자를 말합니다. 이방 여자는 구원받은 노선, 언약노선이 아니고 언약 바깥의 노선이에요. 다시 말해서 언약노선의 구원명단에는 없는 여자에요. 이름이 없는 자가 이름 있는 자로 하여금 언약대로 주님이 부여한 이름들을 구원시키는 기능이 외부에서 주입되는 겁니다.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삭을 낳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우리아의 아내에게서’라고 합니다. 밧세바라 하지 않고 ‘우리아의 아내’라고 여자를 등장시키면서 또 하나의 남자를 들고 나옵니다. 전에 야곱에서는 여자가 둘, 남편이 둘, 아브라함도 여자 둘이 남편이 둘입니다. 동일인물이지만 겹쳐져 있기에 둘이에요. 한 남자는 하나님의 이름이니까.
그런데 이쪽에서는 뭐냐 하면, 여자 하나에 남편이 둘 나와요. 우리아와 다윗. 그래서 밧세바는 결혼을 두 번 합니다. 밧세바와 우리아가 결혼해서 그 남편을, 사실은 죽이는 거지요. 자기 여자, 밧세바의 팔자 때문에 남편은 억울하게 죽지요. 팔자 센 여자입니다. 남편을 죽이는 여자지요. 남편을 죽이는데 그 우리아의 희생 때문에 죽었던 다윗이 살고 다윗언약 속에 몽땅 들어 있는 택한 백성도 그 우리아의 아내 때문에 몽땅 다 천국에 가요. 구원을 받는 겁니다.
족보에는 여자 이름이 빠지니까, 남자이름으로 가니까 14대, 14대, 14대로 기록을 해놓은 거예요.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 그렇게 한 거예요.
새로 다시, 원래 14-15-14인데 한 대를 빼서 14-14-14로 정리한 거예요.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허황되다는 생각이 들것 같아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자기의 자율적인 것을 정당화하면서 성경을 봐요. “주여, 제가 존재하는 것이 정당하기 때문에 이제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제가 어떻게 살면 더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습니까?” 독자적인 자기자율성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요. 나는 나다, 라는 식으로 성경해석에 들어가는 겁니다. 자기만 구원받으면 된다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나만 구원받겠다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래 만든 이 창조세계를 완전히 호작질하는 사탄의 요소가 돼요. 자연의 상처입니다. 그 자체가 실패작이에요. 성경대로 믿어서 구원받겠다는 자체를 성경이 용납을 안 해요. 그 자체가 사탄의 짓이라니까요.
하나님께서는 관계입니다. 내부적인 관계를 외부적인 관계로 나타냈기 때문에 누가 개인적으로 구원받는가가 아니고 너와 너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느냐를 보는 겁니다. 너와 너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느냐 그 말이지요. 나 여자고 너 남자인데, 분명히 너는 너고 나는 나인데, 숫자로 하면 2인데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하나가 되게 할 수 있는가? 그 비밀이 뭐냐? 그 비밀로 인하여 둘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제가 지난 화요일에 가락교회 공부 다 마쳤는데 어떤 목사님이 그런 질문을 해요. “어떤 사람이, 로마서 6장에 보면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에 이제 성도는 의인이라 죄지으면 안 된다고 하는데 어떻게 답변해야 됩니까?” 그런 식의 질문을 했어요. 제가 이렇게 답변했어요.
그 사람은 자아가 두 개가 아니고 달랑 하나가 되어서 자기 구원만 생각하는 거예요. 의의 종이라 하니까 하나님이 나를 의의 종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나는 이제부터 의만 행하지 죄는 안 짓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 뭐냐 하면, 주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라 했어요. 주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요.
그 관계가 하나님의 의에요. 그래서 의를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유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의의 종이 되는 거예요. 주님이 우리한테 준 그 관계가 어떠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다뤄지고 있는 종이 되는 겁니다. 개 경주할 때 보면 그냥 경주하지 않습니다. 뛰라고 한다고 뛰는 것이 아니에요.
개 경주 할 때 앞에 먹잇감을 개보다 빠른 속도로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앞에 두면 개들은 경주하는 줄도 모른 채 그 맛있는 먹잇감을 쫓기 위해서 부지런히 뛰다보면 나중에 1등하는 거예요. 개한테는 상금 주지 않습니다. 개한테는 그 먹잇감 주면 그게 상금이에요.
우리는 주님의 의의 개에요. 주님이 허락하신 죄 사함, 그것 바라보면서 뛰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나쁜 일 하는 것이 죄가 아니고 뭐가 죄냐 하면,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저주를 받아요. 주님의 죄 사함에 대해서 외면해버리는 그것이 바로 지옥 갈 자들입니다.
거지가 뭘 잘했다고 천당 갑니다. 주님의 의 때문에 구원받는 거예요. 세리 창기가 무슨 짓을 했다고 천국을 갈 자격이 있습니까? 아무 자격이 없어요. 간음한 여인이 뭘 했다고 죄 용서를 받습니까? 간음한 여인이 간음한 그 짓이 잘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간음한 여인을 사용하신 거예요.
왜? 이런 여자도 주의 의가, 주의 일방적인 하나님의 의가 거뜬히 천국에 데려갈 수 있는 의가 예수님에게서만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도 자의적인 결정에 의해서. 그 사람이 이 땅에서 뭘 했는가를 일체 묻지를 않아요. 일체 안 묻는다니까요. 여러분이 만약에 하나님의 재판정에 들어섰다 합시다.
묻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주의 의가 있느냐?”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성령이 있느냐?” 그리스도의 성령이 있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고 그게 사람이에요. 일곱 살 때 뭐 했느냐, 스무 살 때 뭐 했느냐, 60살 때 뭐 했느냐, 그거 안 묻습니다. 그것은 행함 책에 기록된 사람에게 묻지요.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생명에 관한 것만 묻습니다. 이미 출제문제 다 공개되었어요. 생각만 해도 너무 가벼워서 날 것 같아요. 정말 날아다닐 것 같아요. 너무 좋아서. 너 감기 걸렸느냐, 그런 것 안 묻습니다. 올해 또 걸렸구나, 그런 것을 묻지를 않아요. 애 대학 들어갔느냐, 그런 것 안 묻습니다.
사람이 성경 보면서 자기자율성으로 자기정당성을 노리고 성경을 보니까 ‘결혼생활 바르게 해야지.’ 여러분, 바른 결혼생활 없습니다. 참 성경해석부터가 잘못됐어요. 그 이름을 위하여 두 명, 레아와 라헬을 제공함으로 말미암아 그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게 만들어버려요.
이름이 바뀐다는 것이 뭐냐? 운명이 확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운명은 어디에 있느냐? 이름 안에 들어 있어요. 야곱이라는 이름이 야곱의 운명을 지금까지 데려왔지만, 직렬적으로, 이제는 두 아내를 만남으로서 결과적으로 사랑했던 아내가 죽어요. 형과의 경쟁에서 이겼다고 자부한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경쟁에서 사랑하는 아내를 일찍 죽임으로 말미암아 근원적으로 자신은 패배자가 돼요.
남자로서 사랑하는 여인과도 살 수 없는 자라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다 져버리는 패배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야곱은 져서 이긴 사람이에요. 야곱이 마지막에 이기려고 했던 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그 상대자가 하나님이었습니다. 나는 이기고, 이기고, 또 이기고, 삼촌한테도 이기고, 그렇게 이겨왔던 그 이김이 결국 하나님을 공격하는 힘으로 작용한 거예요. 사탄의 힘으로 작용한 거지요.
자기를 축복한, 꿈속에서 사다리타고 내려와 자기를 축복한 분과 대척관계, 원수가 되는 육적요소를 갖고 살아왔다는 것을 야곱이 깨닫고 그 다음부터 창세기 33장에서 아예 알아서 형에게 져버립니다. 주여, 일곱 번 절하면서. “제가 형에게 졌나이다.” 진자가 진정 승리자요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라 하는 것은 모든 인간들의 유혹을 거꾸로 뒤집어놓은 거예요. 십자가 없는 대표적인 신학이 뭐냐? 워치만니 신학이에요. 왜냐하면, 육에서 혼, 혼에서 영으로 옮겨가면 구원받는다는 이 주장은 중간에 뭐가 빠졌느냐 하면, 십자가가 다 빠져버렸어요. 반전이 빠졌어요.
차라리 영에서 혼으로, 혼에서 육적인 더러운 인간으로 사는 그 자들이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워치만니를 거론은 안하지만 지금 교회의 모든 신학이 그겁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스타 만들고, 영웅 만들고 신 만들어 주기 위해서 환장한 동네가 교회에요.
남자는 여자 앞에서, 여성성 앞에서, 예수님이지요, 이름 없는 사람 앞에서 자기가 소멸되기를 바랄 때 진정 그 사람은 소멸되면서 생명을 얻은 자입니다. 그리고 여자는 생명이면서도 남자를 만나서 남자의 더러운 육 안에 하나의 아내로서 들어가는 거예요. 거기에 터 잡는 거예요. 죄 속에 생명이라는 이름의 여자가 터를 잡는 겁니다.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 더러운 남자 속에다 더러운 줄도 모르고 거기에 탁 앉아서, 남자는 온갖 짓을 하는데 여자는 그 자식을 끝까지 건사해서 다 키워내잖아요. 대부분의 여자지요. 다는 아니고요. 그렇게 해서 이 세상의 진정한 자연의 무늬는, 그냥 내 욕심대로 좋은 여자 만나서 사는 것이 이 자연이 있는 이유가 아니고, 어떻게 남인데도 그 관계 때문, 언약적인 그 관계 때문에 둘이 하나가 될 수 있느냐?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의 신부가 되고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의 신랑이 될 수 있느냐? 이름이 바뀌는 거예요. 이제는 내 이름이 아니고 남편 되시는 주의 이름으로 바뀌게 되면 주의 이름이 우리로 하여금,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주께서 그렇게 해주신다는 약속을 야곱의 언약의 이름으로 예수님 오시기 전에 일치감치 오늘 본문에 자연적 무늬로서 그들의 본성 속에 새겨놓은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자연스럽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지옥으로 가는데 자연스러운가를 깨닫게 됩니다. 자기 잘났다고 자기 정당화를 위한 자연스러움이 주님의 대척이 되고, 원수가 되고, 이것이 흙적인 본성인 것을 저희들이 늘 깨닫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