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란에서의 야곱
음성 동영상 Youtube
이근호
2017년 11월 15일
본문 말씀: 창세기 29:9-13
(29:9) 야곱이 그들과 말하는 중에 라헬이 그 아비의 양과 함께 오니 그가 그의 양들을 침이었더라
(29:10) 야곱이 그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서 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떼에게 물을 먹이고
(29:11) 그가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내어 울며
(29:12) 그에게 자기가 그의 아비의 생질이요 리브가의 아들됨을 고하였더니 라헬이 달려가서 그 아비에게 고하매
(29:13) 라반이 그 생질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맞추고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니 야곱이 자기의 모든 일을 라반에게 고하매
사람이 누구를 만난다는 것은 자기로부터 벗어나는 기회가 될 수가 있습니다. 벧엘을 통해서 야곱은 친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장래를 책임진다는 사실을 접하고 감격했습니다. 자신의 체험된 바로 그 사건을 위하여 그는 자신의 전부를 던져 넣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자신을 표출했습니다.
이러한 야곱의 고백은, 흔히 오늘날 기존의 자기 목숨을 안전하게 지키고 더 키우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겠다는 분위기와 전혀 다른 겁니다. 인간이 근근이 억지로 찾아내는 그런 신을 야곱이 만난 것이 아닙니다. 예상치도 못했는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오신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야곱도 합당한 각오를 보여주었습니다. ‘죽어도 좋다’는 식입니다. 인간이 찾아가는 신 같으면 이런 각오를 보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깝고 귀한 것이 곧 자신의 목숨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기 목숨을 계속 어떻게든 지키고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면 이 세상 온갖 근심과 걱정을 묻히고 다니게 마련입니다.
마치 자석이 지나가는데 쇳가루가 안 묻히기를 기대하는 것이 어리석은 생각인 것처럼, 자기가 자신을 지키겠다는데 있어 세상은 쉬지 않고 걱정과 근심을 다가와서 들어붙게 됩니다. 차라리 죽으면 될 일을 말입니다. 하지만 자살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벧엘은 야곱에게 있어, 하늘의 것이 왔기에 땅의 것이 아깝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준 곳입니다.
그러나 하란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하란은 야곱의 할아버지인 아브람이, 하나님이 지시하신 가나안 땅에 정착할 때까지 대기해 있는 곳입니다. 즉 아직도 ‘아브람’이지 ‘아브라함’은 아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바로 그곳에 지금 야곱은 벧엘을 거쳐 하란에 도착했습니다. 벧엘에 있어서는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찾아왔지만 하란에서는 야곱이 자신의 야망을 위해 양보없는 투쟁을 벌리 게 된 시기가 됩니다.
벧엘이 영의 영역이라면 하란은 육의 영역입니다. 문제는 인간은 육에서 바로 영으로 전환되는 방식이 없다는 겁니다. 육은 얌전하게 영의 처분을 기다리지는 않습니다. 육은 육 나름대로 자기 구원을 위해 분투노력합니다. 실은 바로 이 점이 문제입니다. 갈라디아서 3:10에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은 육에 대해서 자신의 꿈을 홀로 달성하도록 하나님께서 놔두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율법, 즉 법을 퍼붓습니다. 그러면 육은 법적으로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 쉴새없이 “이것은 되고, 저것은 안 되고”하는 것으로 자기 관리를 멈추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식으로 자기를 지키려는 그것은 자신을 지옥으로 데려갑니다.
영원한 저주의 구렁텅이로 미끌어져 가게 만듭니다. 그것은 율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육은 자신을 ‘살리려고 한다’는 점이 화근입니다. 법이 있는 한 완벽한 법이 아니면 인간은 법적 조치에 의해서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점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최선을 노력을 한 만큼 보상이 잇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요한복음 3:4에 보면,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라는 말이 나옵니다. 니고데모는 거의 절망적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자신의 육으로 기어이 들어가 보겠다고 애써보지만 참으로 불가능한 노력입니다. 육은 취소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육을 가지고 육이 처음 시작한 그 장소로 돌려서 그 육으로 하나님 나라 들어갈 만한 영적 사람으로 출발을 한다는 성립될 수 없는 논리입니다.
니고데모도 압니다. 자신의 아이디어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지만 달리 도리가 없는데 어쩌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이미 벧엘 체험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하란으로 내려갑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야곱의 육이 어떻게 야곱의 영으로 바뀐 것인지 그 내력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없는 야곱’을 만나려 하란으로 가게 됩니다. 지금 ‘있는 야곱’이 ‘없는 야곱’을 만나는 겁니다. ‘없는 야곱’이란 현재의 야곱이라는 육이 있게 한 기원적 야곱을 말합니다. 야곱의 개인적인 노력으로 자신의 육의 원천을 찾아갈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 마중을 나와야 합니다.
그 마중 나오는 자들이 바로 ‘두 명의 아내’입니다. 야곱을 ‘없는 야곱’으로 견인할 두 명의 아내는 야곱으로 하여금 ‘육이 원천’으로 이끕니다. ‘육의 원천’을 통해서 야곱은 개인적으로 법을 지키는 것을 자신의 육을 지키는 것이 성사될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즉 지금의 야곱이 있기까지 ‘이것은 해서는 되고, 이것은 해서는 안 되는 짓’ 같은 것이 성립되지 않는 것이 육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육이란 뭘해도 원래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2장과 창세기 3장의 차이로 알려집니다. 창세기 2장에서는 남자가 먼저요 여자는 나중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3장에 가면, 남자는 죽음(흙)이요 여자는 생명입니다. 여자쪽에서 죽어가는 남자를 살려내게 됩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되는 분은 ‘남자의 후손’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남자에게서 떼 내어진 여자가 남자를 살리는 언약(약속)를 구성요원입니다. 이 원리는 야곱의 할아버지 때에도 시행되었습니다. 과연 ‘아브라함’이 품고 있는 언약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두 명을 아내를 동원시켜 밝혀줍니다. 한 아내는 하갈이요 다른 아내는 사라입니다.
이 두 아내는 아브라함의 본질을 품고서는 각자 다른 코스로 사라집니다. 사라진 그 여인과 아브라함이 맺는 코스가 아브라함에게서 발산된 영원한 축복과 저주의 노선이 됩니다. 야곱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에게도 두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아내 라헬은 ‘오른손의 아들’(베냐민), 곧 ‘하나님의 아들’을 나타내 보이고서는 일찍이 야곱에게서 사라집니다.
그 아내의 죽음이 야곱을 육에서 영으로 이끈 근거가 되고 그 근거가 바로 벧엘에서 내려온 천사들의 업무가 되는 겁니다. 이처럼 언약적 죽음이 아니고서는 언약적으로 약속된 생명에 들어설 수가 없습니다. 신약에서는 이 중첩된 사건이 곧 십자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법적으로 자기를 살리려하지 말고 십자가 앞에서 죽어도 상관없는 존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14강-창 29장 9-13절(하란에서의 야곱)1711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9장 9-13절입니다. 구약성경 41페이지입니다. 창 29:9-13 “야곱이 그들과 말하는 중에 라헬이 그 아비의 양과 함께 오니 그가 그의 양들을 침이었더라 야곱이 그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서 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떼에게 물을 먹이고 그가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내어 울며 그에게 자기가 그의 아비의 생질이요 리브가의 아들됨을 고하였더니 라헬이 달려가서 그 아비에게 고하매 라반이 그 생질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맞추고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니 야곱이 자기의 모든 일을 라반에게 고하매.”
여동생이 시집가서 애를 낳았습니다. 그 애는 조카가 되겠지요. 그 조카가 자기의 삼촌을 다시 만나서 기뻐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 야곱이 삼촌을 만나기 전에 먼저 우물가에서 사촌여동생인 라헬을 만났지요. 라헬을 먼저 만나고 라헬이 아버지에게 알려서 상봉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곳이 하란이란 곳입니다. 이곳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 현재 이스라엘 땅으로 오기 전에 대기했던 그 장소입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란으로 와서 거기서 대기했습니다. 아버지가 죽고 난 뒤에 자기 조카 롯과 함께 하란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다시 현재 이스라엘 땅으로 온 겁니다.
하란은 터키와 시리아의 국경지대죠. 거기서 현재 이스라엘 땅으로 오는데 거리는 약 1천 킬로미터라고 보면 됩니다. 저 아래쪽까지 하면 1천 3백 킬로 정도까지 거리가 떨어져 있습니다. 야곱이 하란에서 자기 외삼촌을 만나기 전에 먼저 베델에서 만난 분들이 있어요. 누굴 만났는가 하면, 천사들을 만났습니다.
꿈속에서 천사들이 사닥다리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어요. 그 때 야곱은 그 장소에서 뭘 느꼈느냐 하면, 자기가 목숨을 내 놔도 괜찮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우리가 교회 나와서 설교 듣거나 말씀을 볼 때에 어떤 경지까지, 어떤 느낌까지 가져야 되느냐 하면, 나는 이제 더 안살아도 괜찮아, 라는 그런 감이 와야 돼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진리고, 예수님은 길이고, 예수님은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을 발견하는 순간 더 이상 내가 내 목숨에 연연할 하등의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논리적으로 그렇지요? 맛있는 과일을 주는데 썩어빠진 과일을 손에 쥐고 있다면 썩어빠진 과일은 아낌없이 내 버리는 것이 뭔가 손에 맛있는 과일이 들어왔다는 티를 확 내는 것이 되잖아요.
따라서 교회는 목숨에 연연해하는 곳이 아니고 목숨을 버리는 곳이에요. 내 목숨을 버려도 괜찮은 것을 알지 않고 그것을 만나지 않는다면 괜히 왔다 갔다 한 거예요. 교회 괜히 온 거예요. 목숨을 유지하려고 온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얍삽한 짓이 되는 겁니다.
교회 와서 말씀을 듣는 그 짧은 순간이지만, 그게 한 시간정도의 시간이지만 그 한 시간 빼놓고 나머지 세상에서 수십 년 보낸 것, 어느 것이 값어치 있는가를 따져봐야 돼요. 그래서 이스라엘 같은 경우에는 안식일이 있는데요. 1, 2, 3, 4, 5, 6, 7, 할 때 그 제 7칠일이 그냥 일주일 중에 다른 월요일, 화요일과 동일한 날이 아닙니다.
그 제 7일, 마지막 안식일을 위해서 예비적으로 6일이 있는 겁니다. 안식일이 없다면 그냥 안식일 없이 일주일 보낸다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여섯, 여섯 ……, 이렇게 돼버려요. 그러면 그것은 일생생활이나 하는 이방인하고 똑같은 겁니다. 우리가 교회 와서 말씀 듣고 “주여, 이 시간 목숨 가져가도 괜찮습니다.”이렇게 될 때 세상에서 교회 오면서 가져왔던 모든 근심걱정 같은 것은 다 실없는 것이고 부질없는 거예요.
온갖 걱정 근심, 세상 살면서 산다는 자체가 마치 걱정근심을 다 끌어 모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지남철이 쇳가루 있는 곳에 지나가기만 해도 온 쇳가루가 다 붙는 것처럼 인간의 몸을 가지고 세상 살아가게 되면 온 몸에 근심걱정이 다 붙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말씀, 십자가복음 앞에 딱 서게 되면, 그것은 쓰레기봉투에 쓰레기 담아 오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수세미가 있잖아요. 하수구 구멍이 막혔을 때 수세미를 가지고 하수구를 쑤십니다. 그러면 까끌까끌한 수세미 끝에 찌꺼기, 먼지 같은 것이 걸려들잖아요. 쑤셔보면 뭔가 걸려든다는 것, 아직도 육적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어떤 순간에 영적이 되어버리면 쑤셔도 근심걱정이 안 달라붙어 있어야 돼요.
쑤시면 걸려든다는 말은 이런 뜻이에요. 법적으로 살아간다는 거예요. 뭐냐 하면, 이것은 되고 이것은 안 되고. 그러니까 작대기가지고 쑤시면 온갖 쓰레기가 다 드러나요. 이것은 되고 이것은 안 되고. 그런데 영적으로 살게 되면,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고. 왜냐하면 주께서 그렇게 허락했기 때문에. 주께서 그렇게 허락하신 거예요.
마음 아주 독하게 먹고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데 일이 내 뜻대로 안 된다. 그러면 그 순간부터는 걱정근심이 수세미 같은 나, 육에 달라붙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듣는 순간 그것은 다 쓸데없는, 그것은 내가 벌일 일도 아니고 내가 만들어낸 일도 아닌데 왜 걱정을 내가 하느냐는 말이지요.
우리네 인생이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이 일궈낸 주님의 인생이라면 쓸데없이 걱정을 왜 내가 하느냐는 말이지요. 그 걱정하는 이유가 물론 크게 보면 이 세상에 사탄이 있기 때문에 그런다고 하지만,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하나님께서 이 법, 율법, 법이라는 것을 인간이 의식한다는 자체는 아직도 인간이 자진해서 걱정근심하고 자진해서 죽어가고 있다는 뜻밖에 안돼요. 왜냐하면 이 율법이 어디로 인도하느냐 하면, 저주가 있는 곳으로, 지옥으로 자꾸만 인도하거든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왜 있느냐 하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보면, 자꾸만 걱정근심이 있는 법이 있는 곳으로 계속 데려가는 이 자기백성을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것은 해도 되고 이것은 안 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뭘 해도 의가 될 수 있도록 십자가를 지신 거예요.
뭘 해도 우리한테 책임을 안지우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거예요. 열 명 전도하려고 했는데 한 명도 전도 못하고 달랑 나 혼자 왔을 때 꼭 열 명 전도해야 된다는 법을 누가 만들었느냐 그 말이지요. 본인이 법 만들어놓고 본인이 걱정한 거예요. ‘그 레벨에 도달 안하면 나는 어떻게 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그동안 왜 주어졌느냐 하면, 그동안 마귀에게, 사탄에게 속한 인간들이 뭘 로 자기 자신을 다지고 다졌느냐 하면, 법을 동원해서 ‘나는 이 정도 되고 이런 사람이다.’라고 자아를 구성하고 형성해 왔다는 것을 주께서 감안해서, 그럴 것 같으면 저주받아라, 해서 율법을 주신 겁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는 모든 것이 저주아래 있게 하신 거예요. 그렇게 법 좋아하고, 법 잘 지켜서 반듯하게 살아서, 반듯하게 산 그 내 모습이 진실로 내 모습이라고 우긴다면, 그런 식으로 하려면 지옥이나 가라, 그 말이에요. 지옥 가는 자들이 꼭 그런 자들이에요. 할 것 하고 안할 것 안했기에 괜찮지 않느냐.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하란에 오기까지 벧엘에서 야곱은 뭘 봤느냐 하면, 지금 내 인생, 내 운명, 내 팔자라는 것은 내 손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았어요. 진짜 횡재를 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찾아와서 자기 자신을 하늘문으로 사용한다는 그 순간, 이것은 자기가 기대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원했던 것이 아니에요.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덮친 겁니다. 그렇다면, 덮쳤다면 덮친 대로 있어야 돼요.
덮친 데서 또 자기 나름대로의 자기인생을 따로 정립할 하등의 피곤한 짓을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야곱이 벧엘을 통과해서 다시 하란으로 갑니다. 하란으로 간 이유가 뭐냐 하면, 왜 하란은 아니고 벧엘이냐 하는 겁니다. 성도가 성도되기 위해서는 누구를 만나야 되는데 벧엘에서 천사를 만나는 것이 성도되는 것이고 그 외의 사람을 만나는 것으로 왜 성도가 되지 못하게 하느냐를 야곱으로 하여금 경험케 하는 거예요.
그리고 제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하란이란 곳이 아브라함이 대기한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도착지점, 약속의 땅으로 가기 전의 대기 장소인데 하란은 약속의 땅이 아니에요. 하란에서 대기한 상태에서 약속의 땅으로 오면서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뀝니다. 아브라함으로 바뀌면서 아내가 두 명이 생겨요.
이것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소개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구원을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준비된 구원이 무엇인가, 천국이 무엇인가, 영생이 무엇인가, 아브라함을 통해서 소개하려고 하는 겁니다.
소개하려면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를 다 이야기해야 돼요. 육적인 아브라함과 영적인 아브라함, 이게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육적인 아브라함이 어떻게 영적인 아브라함으로 바뀌었는지 이것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알려줬습니다. 지금 야곱이 하란으로 간다는 말은, 아브라함이 갔던 그 경로를 야곱도 답습하는 겁니다.
육적인 아브라함에서 나중에 영적인 아브라함으로 가는 그 경로를 되풀이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육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바뀐다는 이 말을 제가 쉽게 했습니다만, 사실은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아무리 생각해도 묘수가 떠오르지 않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대목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 4절에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교회에서 사람을 전도한다는데 전도를 너무 쉽게 생각해요. 예수 전하는 것은 전도 아니에요. 제대로 된 전도라 하는 것은 육에서 난 인간을 영으로 나게 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지금 우리를 대표해서 예수님한테 따지고 있는 겁니다. 항의하는 겁니다.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천국 못 간다, 영생 못 얻는다 하니까, 어떻게 육으로 된 인간이 다시 태어날 수가 있느냐는 그 말이지요. 지금 진지하게 묻는 거예요, 진지하게! 이걸 이 세상 어느 생물학박사에게 물어보세요. 이게 되는가?
인간 육을 가루로 만들어서 dna 축출해서 엄마 뱃속에 집어넣으면 새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안 되는 거예요. 안 된다는 말은, 구원 못 받고, 천국 못 간다는 이야기에요. 그리고 벧엘 백날 가봐야 하늘문 안보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 전부가 불가능한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 왔다가, 교회에 자기근심걱정 가지고 왔다가 불가능을 맛보고 다시 갈 때는 그 근심걱정을 가지고 똑같이 가요.
온 보람이 하나도 없어요. 육으로 교회 왔다가 육으로 다시 집에 가는 겁니다. 목숨을 내놔야 될 텐데 내놓을 건더기를 찾지를 못해서 가져온 육의 목숨 그대로 가지고 ‘걱정 근심이나 좀 적게 하자’ 하는 식으로 가버려요. 그러면 그 사람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게 돼요.
제가 아까 했잖아요. 성도라 하는 것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니고, 그까짓 거 나를 위해서 살았던 목숨 이제는 팽개치고 그만 살려도 상관없어요. “죽여도 상관없습니다. 주여, 여기에 나는 목숨 걸었습니다. 이제 죽이든 살리든, 때려죽이든 맘대로 하세요. 나는 기분 좋습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사람이 자기 목숨 부지한다는 것은 모든 근심걱정이 다 붙어 있는 거예요. 제가 부산에서 강의를 하는데 어떤 분이 전화를 하면서 근심을 해요. 미국에 계시는 어떤 분, 버지니아에 계신분인데 머리가 터져서 죽게 되었다고 걱정을 하고 있어요. 첫 번째 강의 끝나고서.
강의하는 그 마음이 갑자기 무거워졌습니다. 첫 번째 강의한 내용이 바로 그거였거든요. 사람이 죽기를 무서워한다는 것은 아직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세상이 주는 근심걱정은 안 따라 올라야 안 따라올 수가 없도록 다 따라와요. 자연스럽게 다 붙게 되어 있다고요. 지남철 가는데 쇳조각이 안 붙겠습니까? 다 붙지요.
예수를 믿는 것은 이 목숨 유지하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 하잖아요. 사도바울의 편지에. 죽이더라도 너무 아쉬워하지 말라고 십자가지신 거예요. 지금 죽더라도. 나 죽으면 근심걱정 다 날라 가는 겁니다. 두 번째 강의를 하는데 얼마나 마음이 무거운지. 제가 무슨 말을 하리요.
지금 죽으라고 이야기하는데 ‘죽으면 안 되는데 어떻게 합니까?’하는 식으로 나오는데 뭐라고 답변하겠습니까? 주께서 머리 터져 죽게 하시면 죽어야지요. 군에서 제대하는 사람이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그러면 교회 왜 왔습니까? 복음 왜 듣습니까? 안 죽으려고 애쓰면 안돼요. 그러면 그것은 십자가 없는 예수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진 것은 “여기야 여기!” 나랑 같이 죽자고 부르는 거예요. 그냥 아무데서나 번개탄 피우고 죽으면 안 되는 거예요. 번개탄 피우지 말고, 물에 빠지지 말고 여기에 빠지라는 거예요. 제가 오늘 아침에 운동하다가 마태복음 10장 29절 그 대목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운동하는 길에 파출소가 있는데 파출소 지나서 돌아오는데 까만 개 한 마리가 좀 까불까불 까분다 싶었어요. 까불다가 휙 하고 길을 가로질러 가는 거예요. 위에서 오던 101번 버스가 그걸 그냥 밀어버렸어요. 버스 운전사가 뭔가 꿈틀 했는지 가다가 버스를 세우고 보는 것 같아요. ‘내가 뭘 친 모양이다.’
그게 30센티 앞에서 일어난 일이에요. 1미터도 안돼요. 바로 내 코앞에서 일어났어요. 내장이 파열됐어요. 강아지인데 부들부들 떨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9절에 보게 되면,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내장 파열도 안 된다는 거예요.
아버지께서 이 세상 저런 짐승의 운명마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저렇게 죽을 수도 없다는 거예요. 저 개가 천년만년 사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내가 버스 가고 난 뒤에 기척이 없기로 장갑 낀 손으로 ……, 물론 목줄 같은 것도 없었어요. 새벽에 혼자 집 나와서 까불거리다 그런 거예요. 거의 죽어가는 것을 주인 찾아가라고 인도에 올려놓고 돌아왔어요.
그걸 보면서 사람도 똑같다는 거예요. 만약에 집에 다섯 식구 있잖아요. 강아지 다섯 마리 있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인간들은 존엄성과 고귀함을 이야기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강아지하고 똑같아요. 아니 강아지보다 더 못해요.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그게 주님의 안목이에요. 살리는 방법은 뭐냐? 네 꼬라지를 알라는 거예요. 네 주제를 알라는 것.
육은 육이기 때문에 죽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어떻게 삽니까, 라는 질문을 던진 거예요. 야곱이 경험했던 것은 두 가지입니다. 벧엘은 살리고 하란은 죽이는 곳이에요. 벧엘의 의미, 벧엘의 가치를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하란에 내려가게 한 겁니다.
야곱은 자기 자신이 아직도 누군지를 몰라요. 야곱 본인이 얼마나 육적인지를 감을 못 잡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천사 만났다고 까불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란에 다시 가게 합니다. 하란에 가게 되면 인간의 육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육이냐 말이지요. 그런데 인간의 힘으로는 육에서 영으로 못가요.
왜? 육은 취소되지 않기 때문에. 다시 엄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합니다. 취소가 안돼요. 육은 문제가 있어요. 문제 있는 육이 영으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 육을 어떻게 하느냐? 야곱을 보세요. 야곱은 육의 원천을 찾아갑니다. 육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 출처를 찾아가게 돼요.
인간에게 자유를 주게 되면 인간이 우울증에 걸린다는 논리가 있어요. 맞는 이야기입니다. 많은 자유가 인간을 더욱더 우울증으로 만들었어요. 취직해서 꼬박꼬박 월급 타면서 출퇴근할 때는 우울증에 안 걸리다가 개인사업 차리고 난 뒤에 우울증 걸립니다. 사업은 근무시간에 하루 거의 20시간이 넘어요.
손님 안 올까봐서, 돈이 아까워서 잠을 못잘 정도에요. 직장에 있을 때는 8시간 근무하고 퇴근하면 월급 나오니까 놀자고 하다가 자기 사업체 차리고 나서는 자영업자는 살기 위해서 몸부림칩니다. 이것은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자기가 자기를 파괴하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파괴하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울증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울증 증세의 특징 중 하나가 갈라디아서 3장 10절이에요. 법적으로 자기를 지키는 겁니다. 이것은 되고 이것은 안 되고. 하여튼 우울증 특징이 그래요. 맨 날 내가 지금 정당하냐, 내가 옳게 했는가, 나쁘게 했는가, 맨 날 자기를 살펴요. 독자적입니다. 이게 바로 전형적인 육이에요.
그런데 자기만 쳐다보는 사람이 뭘 모르냐 하면, 그렇게 힘들게 지키고자 하는 육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당최 아는 사람이 없어요. 뭔가 덩어리 하나 얻어놓고 그 덩어리 하나 평생 지키려고 하다가 지키지도 못하고 나중에 그 덩어리짐에 치어서 죽는 거예요. 이왕 육체라는 이 덩어리를 줬으니까 반듯하게 해본다고 하니 온갖 법이라는 법은 다 짊어집니다.
이것은 되고 이것은 안 되고. 이것은 지킬 것, 이것은 안 지킬 것. 그러니 그 법적인 무거운 짐을 감당을 못해요. 우울증 걸린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항상 긴장상태에 있어요. 이야기 하면 긴장상태, 굳어져 있어요. 어깨고 어디고 전부 다. 도망갈 준비부터 갖추고 있고.
야곱은 하란을 경험했습니다. 하란의 경험은 뭐냐? 육을 경험해야 돼요. 야곱이 육을 경험하는 하나님이 주신 방법은 뭐냐 하면, 여자, 여성을 만나는 겁니다. 이게 창세기 3장 15절과 관련되어 있어요. 아브라함은 아브라함 자신이 누군가를 알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에게 한 명의 여자가 아니고 두 명의 여자를 붙여줬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아내 두 명이 중첩되어 있는 거예요. 좀 어렵더라도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육이 있기 때문에 육의 원천은 내가 없는 곳, 내가 없는 상태를 알아야 거기서 나왔다고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내가 없는 상태. 그러니까 나는 누구를 만나야 되느냐 하면, 내가 없는 나를 만나야 돼요.
내가 없는 나를 만나는데 이게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내가 없는 나를 만나는데 그 없는 나는 누구만 알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만이 알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없던 나를, 현재 육으로 몸부림치면서 걱정 근심하는 나를 만나도록 주선하는데 누가 나를 마중을 나와요. 그 마중 나오는 자가 오늘 본문의 라헬입니다.
여자지요. 원래 창세기 2장에 보면 남자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남자의 의미를 더욱 더 부가하기 위해서 여자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창세기 3장에 보면 남자는 어느 쪽에 가까우냐 하면, 남자의 이름 자체가 죽음에 가까워요. 흙이니까. 남자 쪽은 죽음이고 생명 쪽은 누가 가까운가 하면, 여자 쪽입니다. 하와, 그 이름이 생명이에요.
여자 쪽이 생명에 가깝습니다. 처음에 창조할 때는 남자가 여자를 이끌었다면 창세기 3장에서는 여자 쪽이 남자를 이끌어요. 그런데 그 여자 쪽에 약속이 부여되는데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이기도록 역사는 정한 원리대로 진행이 된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죽어가는 이 모든 육체는 생명에 의해서, 생명을 만날 때 비로소 내가 왜 죽는지, 최초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왜 이 육은 걱정근심을 사서 하는지, 왜 우리는 법적으로, 법적으로 자기 자신을 살리는 헛된 짓을 하는지가 밝혀진다는 겁니다.
왜 법적으로 자기 자신을 살리려는 짓이 왜 헛된 짓이냐 하면, 살리려고, 살리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지옥에 가까워요. 바르게 살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한 발자국 더 지옥으로 빠지고 있는 중이란 말이지요. 미끄러져 가고 있는 중이에요. 세상 사람들이 이걸 몰라요. 이걸 모릅니다.
중국 어느 가난한 마을인데 기독교신자가 15퍼센트쯤 된답니다. 기독교신자의 비율이 제법 센 마을에 시진핑이 명령을 내렸어요. 예수 사진 떼고 내 자신 붙이면 경제적으로 도와준다. 이렇게 한 거예요. 예수 사진 떼어서 다른 곳에 붙이는 식으로 하지 말고 예수 사진 떼고 거기에 자신(시진핑)의 사진을 붙이면 복지혜택은 물론이고 그 마을이 잘 먹고 잘살게 해준다고 한 겁니다.
그 뉴스를 보면서, 제발 시진핑 같은 그런 명령을 중국에만 하지 말고 우리 한국교회에다 좀 해줬으면 좋겠다. 교회 오는 사람들에게 월 2백만 원 보장해 줄 테니까 예수 믿지 말고 문재인 믿으라는 이런 이야기를 왜 안하느냐 이 말이지요. 그런데 그런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지요. 왜냐하면 한국교회가 믿는 예수는 예수가 아니고 시진핑이니까. 부자 되게 해 달라고 빌거든요.
도움 얻기 위해서 교회 오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리 해봐도 도움이 없으면 쾡, 하고 냉정하게 뿌리치고 ‘내가 예수한테 득볼 것 뭐 있나. 내 목숨 내가 알아서 살려야지.’ 그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것을 야곱이 이제는 삼촌 집에서 옴팍 경험을 해야 되는 거예요.
육에서 영으로 갈수가 없어요. 육에서 영으로 갈 때는 현재 있는 나 말고 원천적인, 하나님 품안에 있는 나를 만나야 돼요. 하나님 품안에 있는 나는 나의 육의 시작점이에요. 육의 원천입니다. 그 만나게 하는 인도자가 두 명의 아내입니다. 두 명의 아내는 야곱과 결혼해서 둘 다 소멸되고 사라져야 돼요. 야곱을 견인하게 되는 겁니다.
하란이란 곳이 바로 그런 곳입니다. 벧엘은 야곱이 아무것도 안 해도 그냥 하늘문이 열리고 천사가 찾아온 거예요. 그런데 하란은 야곱의 본성을 유감없이 드러내야 되는 겁니다. 걱정근심을 유감없이 해야 돼요. 속임을 당합니다. 속고 속이고. 삼촌한테 속았습니다. 결혼할 맘도 없는 여성, 눈이 안 좋은, 요새 같으면 두꺼운 돋보기안경 낀 사람하고는 결혼하기 싫어요. 아무리 1+1이라지만 싫은 것은 싫어요.
그런 싫은 결혼을 억지로 해야 되고, 사랑하는 여인에게서는 자식도 안 나오고, 결혼할 맘도 없었던 언니로부터는 네 명의 자식이 쏟아져 나와 버리고. 그러니까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이 따로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여인의 언니를 자꾸 집어넣는 거예요. 이것은 야곱의 소원, 육의 본성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겁니다.
속은 거예요. 네가 라헬을 좋아하니 7년만 일하면 결혼시키겠다고 해놓고 7년을 일하고 난 뒤에 “우리 마을에서는 동생이 언니보다 먼저 시집가는 법이 없어. 그러니까 7년 더 일하면 동생도 줄게.” 이래서 무려 21년이나 일을 했지 않습니까? 그러니 약이 올라서 나중에 야곱도 삯을 나눌 때 유전적인 노하우를 발휘하지요.
얼룩덜룩 무늬가 있는 자기 양은 튼튼한 새끼를 낳게 하고 삼촌의 양은 비실비실하게 만들었다는 말이지요. 좋은 것은 자기가 갖고 질 떨어지는 양은 다 삼촌 줘버리고. 그래서 얻은 재산이에요. 그래서 얻은 열두 아들이라는 말이지요. 이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야곱의 모습과 똑같아요.
그 야곱은 그냥 죽으면 안돼요. 육이라는 것이 얼마나 골칫덩어리인가를 다 보여주고 그리고 그 육은 하나님 만나서 죽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육을 영으로 바꾸는 방법은 그냥 육을 죽인다고 영 되는 것이 아니고 언약적인 방법으로 육이 되어야 되고 언약적인 방법으로 영이 되어야 돼요.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를 방금 했습니다. 언약적인 방법으로 육이 된다는 말은, 네가 율법을 어기고 양심을 어기고 세상의 상식을 어겨서 지은 죄가 되면 안 된다는 이야기에요. 그런 것은 원초적인 육 말고 그 이후에 나온 육을 의미하는 겁니다. 진짜 어려운데요. 지금 육을 가지고 내가 개과천선한다고 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육이 무엇과 연결되어야 되느냐 하면, 원초적인 육과 연결되어야 돼요. 쉽게 말해서 창세기 3장의 그 아담과 연결되어야 돼요. 그 아담과 연결되려면 우리는, 나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라고 하기 이전에 내가 만나야 될 여성을 만나야 돼요. 여기서 여성이라 하는 것은 남성의 반대말인 여성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간 그 여성, 언약적여성을 만나야 돼요.
그래야 여자의 후손이니까. 여자의 후손이니까 여자부터 만나고 그 다음에 후손을 만나는 거예요. 그런데 여자가 두 명이라는 말이지요. 그 두 명의 여자와 야곱과의 관계를 통해서 야곱은 자기가 원천적으로 법을 어겼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최선을 다해서 바르게 살려고 해봤자 이 육은 죄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 두 명의 여자가 견인해서 야곱으로 하여금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게 만들어요. 자기는 속여서 삼촌의 재산을 강탈했고 두 여자를 통해서 열 두 아들까지 얻었으니까 이만하면 육적으로 성공했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만큼 성공했다는 그 말은 이제는 죽을 때가 되었다는 그 말이에요.
이제 네가 육대로 다 했으니 그 육의 원천과 영의 원천, 구원하는 하나님과 직접 얍복강가에서 만나서 야곱은 거기서 죽게 됩니다. 야곱은 죽고 야곱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인간으로 나타나지요. 그 인간 속에 하나님의 요소가 들어갈 때 비로소 육에서 영으로 거듭나게 되고 그리고 야곱은 벧엘로 다시 오게 됩니다.
하란을 거쳐서 다시 벧엘로 오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거듭났던 그 야곱의 모습이 창세기 33장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3절에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그리고 에서에게 말하는데 8절에 “야곱이 가로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또 10절에 보면,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야곱은 지금 옛날 형과 싸웠던 그 야곱이 아니고 야곱을 야곱 되게 했던 원천, 처음자리, 그 처음자리의 야곱의 모습, 하나님 앞에서의 제대로 된 자기 모습,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하는 그 모습, 그 모습으로 지금에서 앞에 서는 겁니다.
마치 제가 내장이 파열된 개 앞에 서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개나 나나 똑같다. 이 땅에서 누가 이기고 지고 그런 것이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근심걱정이 이 세상에 왜 생깁니까? 남에게 안 지려고 생기잖아요. 꼭 이기려고. 참 웃음 나오지요. 정말, 정말 쓸데없는 짓을 한 거예요.
똑같은 개 같은 존재인데 지면 어떻고 이기면 뭐가 그게 대수입니까? 하나님께서 원천적으로 모르는 진짜 야곱을 마중 나오기 위해서 서서히 라헬이라는 여성을 주입시킵니다. 아브라함은 하갈과 사라 이 두 여인을 통해서 누구 자식이 날 살리는가를 깨닫는 것처럼, 라헬과 레아 두 아내를 통해서 베냐민,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내가 영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생산한 영적인 사람으로 될 때 그냥 육이 아니고 언약의 육이 되는 그 자리가 언약적으로 영생을 얻는 자리에요.
그 둘이 하나로 중첩된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그게 바로 신약의 십자가에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살므로 우리가 사는 것, 이 원리, 이 원리가 여러분 속에 있다면 예배 마치고 더 살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믿음 있다, 은혜 받았다 해놓고는 다시 세상에 나가면 온 걱정근심은 다 달라붙는 이 현실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살려고 하는 것이 문제고 화근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