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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창세기 29:31-35 / 레아의 자식들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29:31-35 / 레아의 자식들

정인순 2017. 11. 29. 21:33

 

 

레아의 자식들

 

음성                 동영상


이근호
2017년 11월 29일                         

 

본문 말씀: 창세기 29:31-35

(29:31)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하였더라

(29:32) 레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29:33) 그가 다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총이 없음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도 주셨도다 하고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29:34)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29:35)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가 그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생산이 멈추었더라

야곱은 두 명의 아내를 가졌지만 둘 다 사랑하지는 않고 분명하게 한 명만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로부터 아기를 갖게 하지 않게 하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야곱의 사랑하는 그 사랑을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도리어 야곱이 사랑하지 않는 아내에게서 연발로 네 명의 아들을 태어나게 하십니다. 이로 인하여 자식에 대한 인식 속에다 야곱이 두 아내에 대한 차등적인 인식을 확장시켜 나갑니다. 즉 야곱의 뜻대로 자식이 태어나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아내에 대한 사랑의 차등이 곧바로 자식의 개체수로 이어지지 않음을 분명히 보이시는 겁니다.

야곱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개별적 감정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사적인 감정의 장애를 넘어서서 ‘육’이라는 보편적 평지를 자아냅니다. 아무리 인간들의 순수하고 절실한 사랑이라고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육’이며 하나님의 언약에 협조할 수 있는 성질이 못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반대의 반대’로 맞서십니다. 야곱이 사랑하지도 않는 여인에게는 하나님께서는 네 명의 자식을 낳게 하시므로서 상대적으로 야곱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인에게는 그 어떤 하나님의 복도 0이 되게 하십니다. 이는 야곱이 자리하고 있는 ‘언약의 자리’에 대해서 새로운 내용을 공개하는 계기가 됩니다.

세상의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 자식이란 어디까지 부모 소속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9장에 나오는 노아와 그 자식들 관계에서, 노아는 가차없이 자기 자식에게도 저주를 선언해버립니다. 이를 통해서 '자식은 나의 것‘이라는 관행이 언약 속에서도 통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만약에 자식을 저주한다면, 그 자식이 누구에게서 나온 자식이겠습니까? 이는 곧 아버지 자신을 저주하는 바가 됩니다.

하지만 언약은 그런 위계를 무시합니다. 그 이유는, 자식을 통해서 아버지를 돌아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즉 언약 안에서는 아버지가 자식을 낳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버지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생각해놓은 언약의 자식’이 태어나게 해서, 그 언약적 내용으로 인해 아버지가 자신의 위상을 다시 정립하게 만듭니다.

최종적으로 이 사실이 드러나는 곳은 마태복음 1:19-20입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즉 언약이란 이 역사 속에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그 증거가 남겨져야 되는데 그것이 바로 ‘자식의 출현’입니다.

이 자식의 출현에 대해서 요셉은 남편으로서의 권리가 박탈당합니다. 여자 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기에 남자는 자신의 자식을 통해서 소급해서 ‘언약에서의 자기 위상’을 재정립되어야 될 존재입니다. 즉 결코 자신의 자식을 낳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통해서 등장한 겁니다.

이런 신약적 사정이 이미 야곱을 통해서 등장합니다. 야곱에게는 이미 언약이 사다리를 통해서 하늘로부터 지상까지 이릅니다. 그런데 그 사다리적 요소가 야곱의 육 앞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아예 야곱의 육을 관통합니다. 마치 건물의 비상계단이 옥상에서부터 지하실까지 단계별로 이어지는 모습이 건물이 두 동강 나면서 확연히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천사에 이끌려 최종 도달되어야 될 지점은 어디일까요? 그 지점은 이미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 이삭이 최종 갔던 바로 그 지점이어라야 언약은 아브라함부터 야곱까지 연속되어짐이 증명합니다. 그곳은 바로 ‘아들의 죽음 자리’입니다. 창세기 22:2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즉 자식을 낳았다고 다 언약의 자식, 약속된 자식,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 자식은 이 육의 세계에서 죽어야합니다. 따라서 이 이삭의 자리까지 야곱이 도달하면서 거기에서 야곱 속에서 이스라엘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들들부터 시작해서 나중에 12아들이 다 놓고, 그것을 총집합하면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마치 해산물 멍게에서 껍질을 버리고 알맹이만 취하는 것과 같습니다. 택배왔을 때, 포장지는 버리고 속 물건만 취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껍질 역할, 포장지 역할이 바로 ‘야곱의 라헬 사랑’입니다. 이 야곱의 육 속에다 ‘사다리 기능’ 멈추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어집니다.

예를 들면 세 번째 아들인 ‘레위’의 경우, 역대상 6:1-3에 보면, 다음과 같은 사다리가 연속적으로 적용됩니다. “레위의 아들들은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요 그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요 아므람의 자녀는 아론과 모세와 미리암이요 아론의 자녀는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며”

야곱 속으로 들어온 사다리는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 등장할 때까지 그 언약적 작용이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레아가 낳은 4 명의 아들은 실은 야곱의 자식이나 레아의 자식이 아니라 장차 오실 예수님의 기능과 관련성을 보이는 ‘하나님의 아들’ 곧 이스라엘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르우벤’, ‘하나님의 들으심=시므온’, ‘하나님과의 연합=레위’, ‘하나님께 찬양=유다’라는 예수님의 기능이 스펙트럼처럼, 부채살처럼 펼쳐집니다.

이 모든 것이 야곱의 육, 그리고 그런 남편의 사랑을 경쟁적으로 차지하고자 하는 두 아내의 시기와 질투심 속에서 끄집어진 언약적 결과들입니다. 야곱은 알았습니다. 자식 생산에 있어 자신의 사랑이 전혀 힘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따라서 오늘날 성도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같은 입장을 취해야 합니다. 구원에 있어 자신의 그 어떤 권리행사도 할 수 없는 입장에 있음을 말입니다. 야곱은 오늘날 성도의 대표자적 입장을 보여줍니다. 인간적으로, 육으로 참으로 누구를 사랑하지만 그 개별적 사랑이 ‘육’이라는 보편성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다루어지면서 비로소 그 육의 평지 위에서 참된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서 실제적으로 주어졌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못난 저희들 속에서 예수님의 기능이 작렬하고 있기에 사적인 소원이나 희망이 도리어 우리에게 징벌임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16강-창 29장 31-35절(레아의 아들들)1711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9장 31-35절입니다. 구약성경 42페이지입니다.
 
창 29:31-35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하였더라 레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그가 다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총이 없음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도 주셨도다 하고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가 그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생산이 멈추었더라.”

야곱이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은 언니 레아가 아니고 동생 라헬입니다. 따라서 야곱의 입장에서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에게서 먼저 자식이 태어나게 되면, 내가 라헬을 사랑한다는, 남편으로서 아내를 사랑한다는 그 사랑이 하나님 앞에 수긍이 되고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야곱이 사랑하는 그 라헬에게는 자식이 없어요. 자식이 없었고 자기가 사랑하지 않는 여자, 덤으로 얻어진 그 언니, 그리고 안력이나 인물도 부족한 그 언니, 상대적으로 곱고 아리따운 라헬은 자식이 없고 못생긴 레아에게서 자식이 먼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자식이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야곱으로 하여금 뭔가 선택을 해야 되고 결정을 해야 될 순간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내가 원치 않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저 자식이 과연 나의 자식이냐 아니냐를 생각해야 돼요. 사랑하지 않는 여인에게서 자식을 낳았을 때 저 자식은 내 자식이라고 이야기하기가 굉장히 난처하고 곤란한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사랑하지 않는 여자에게서 자식을 낳게 되면, 그 자식을 내 자식이라고 해버리면 상대적으로 누가 삐지고 소외되는가 하면, 정작 자기가 끊임없이 줄기차게 정말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마치 자신의 아내 아닌 것처럼 비켜나고 마는 겁니다. 내 안에서 제외되고 마는 거지요.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한다면 야곱으로 하여금 사랑하는 아내에게서 자식이 태어나게 했을 것이고 그러면 야곱은 주저 없이 이야기했을 거예요. “저 여자의 자식은 곧 나의 분신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 했을 텐데 왜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피하고 그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가?

그 이유는 야곱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약속이 깊숙이 들어가 있어요. 이번에 포항에 지진이 났습니다만 지진이 아주 크게 났다고 칩시다. 그래서 큰 건물이 있는데 그 건물이 지진 때문에 중간부터 끊어져서 두 동강 났다 칩시다. 건물을 바깥에서 봤을 때는 안에 들어 있는 비상계단이 보이지를 않아요. 그런데 두 동강으로 건물을 단면으로 쪼개면 안에 들어 있는 비상계단이 옥상에서부터 내려와서 지하실까지 내려간 것이 보일 겁니다.

그게 사다리에요. 야곱이 받았던 그 사다리, 야곱은 그 사다리가 자기에게 와서 스톱이 되는지 알았지요. 야곱은 하늘에서 시작해서 야곱 나의 의사결정, 나의 결심, 선택 선에서 스톱이 되는지 알았어요. 하나님께서 사다리를 통해서 준 언약은 그 다음부터는 내가 거기에 따르고 순종하면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사다리가 야곱을 뚫고 야곱의 내부까지 파고 들어왔어요. 건물 두 동강 나면 지하실까지 끊어져 내려가듯이. 그러면 이것은 하나님의 그 사다리 내려오는 약속을 야곱이 나서서 관리할 것이 아니고 야곱도 그 분위기에 휘말려서 미끄러지듯이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천사들의 인도함을 받아야 되는 겁니다. 야곱도 미처 몰랐던, 야곱보다 더 낮은 자리, 최후의 자리까지 천사들의 인도함을 받아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 인도함을 받는 자리가 뭐냐? 그 자리까지 인도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사랑하는 여자에게서는 자식을 주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에게서 자식을 네 명이나 먼저 낳게 한 겁니다. 그것이 야곱을 인도하는 방법이에요. 야곱에서 스톱된 그 언약을 야곱까지 언약 속에 포함시켜서 야곱이 주가 아니라 언약이 주가 되어서 야곱을 이끄는 방식 중에 하나가 야곱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자식이 없는 겁니다.

이런 방식을 제가 이야기하면 이해가 잘 안될 텐데요. 창세기 9장 25절에 보면 노아가 자식들에게 축복하는 대목이 나와요. 유명한 대목입니다. 노아가 술 취해서 벌거벗었을 때에 거기에 대한 자식들의 평가에 따라서 자식 셋과 손자 하나에게 노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축복과 저주를 합니다.

이 대목을 보면서 뭘 알 수 있느냐 하면, 노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 노아언약이라 하는데 그 노아언약에 의하면 자식이라도 아버지입장에서 관여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어느 자식치고 아버지 이름으로 저주한다는 것, 이것은 자기 자식이 아닐 경우에나 해당되지 그 자식이 내 몸에서 난 나의 분신이고 나의 연속, 나의 연장, 나의 확대라면 그 자식을 저주하는 것은 곧 자신을 저주하는 것이기에 이것은 모순되거든요.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면 이렇게 해야 돼요. 내가 자식을 낳았다고 하면 안돼요. 나를 통해서, 나를 파이프 같은 수단으로 삼아서, 나를 가지고 주님께서 주님의 자식을 내 몸을 통해서 낳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걸 한마디로 말해서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구체성을 가지는데 이 역사 속에 실제로 나타나려면 반드시…….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해도 그것은 거짓말이에요. 사랑한다고 해도 그것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소망합니다, 이런 것 다 소용없어요. 하나님께서 직접 오게 되면 우리를 가지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식을 이 땅에 실제적으로 구체화시키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식을.

네가 난 자식 말고. 빨빨대고 돌아다니는 그 자식 말고. 하나님의 자식, 언약과 관련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자식이 생기지 너의 자식이 생기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반대로 부모가 그 자식을 통해서 도로 배워야 되는 겁니다. ‘아, 내 대에서 몰랐던 것, 내 자식 대에서 새롭게 하나님께서 그 언약의 깊이를 더하면서 나에게 더 많이 알게 하시는구나.’

다른 말로 하면, 내 안에 축복만 있기를 원했지만 내 안에 저주도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자식을 낳고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해보니까 나는 저주받을 수도 있었는데 축복이 웬 말인가, 축복이 웬 뜻인가, 이렇게 자식을 통해서 파악하는 겁니다. 이러한 언약적인 속성이 결정적으로 만료가 된 것이 마태복음 1장 19절부터 나옵니다.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남편인데도 불구하고 아내에 대해서 남편의 권리를 박탈하는 겁니다. 네 자식 아니라는 거예요. 네 자식이 아니다. 그러면 “내 자식은 누구입니까?”를 묻지 말고 “하나님이 지정한 자식을 위해서 나는 어떤 식으로 관여되고 결부되어 있습니까?” 이렇게 물어야 되지요.

하나님의 언약이 마지막에 남편 요셉마저 그 권리가 박탈되고 아내에게 나타난 그 자식으로 인하여 아버지 요셉마저도, 엄마 된 마리아마저도 구원을 받는다면 이 원리가 처음부터 언약에 담겨 있었던 겁니다. 그 언약의 원리는 뭐냐?

언약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은, 아버지 입장에서 미리 예상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내 몸에서 나온 자식이 내가 예상한 것과 얼마나 틀어지고 얼마나 반대가 되어 있는가를 깨닫는 것이 새삼스럽게, 뒤늦게 다시 제대로 언약과 관계를 맺게 되는 기회를 자식을 통해서 제공받는 겁니다.

벌써 난해한 부분이 나왔는데요. 난해하지만 제일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다고 하기 전에 그 가문에 야곱보다 먼저 언약을 받은 사람이 있어요. 할아버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을 때에 아브라함도 ‘내가 언약을 받았구나.’ 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자기에게 찾아온 세 명의 천사가 아브라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태어날 그 자식에 대해서 세 명의 천사도 주목하고, 따라서 아브라함 너도 거기에 주목해야 된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낳은 자식은 있지요. 이스마엘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파견된 세 명의 천사는 거기에 대해서 전혀 관심 없어요. 정말 언약이라면 말로만 언약이 아니고, 말로만 약속이 아니에요. 역사 속에 구체화된 증거물이 있어야 돼요. 그 증거물은 자식을 통해서 태어나는 겁니다. 그 증거가 뭐냐? 창세기 22장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식이라고 낳았다고 해서 다 자식이 아닙니다. 낳은 자식이 다 아버지를 살리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받으시기 위해서 하나님 쪽에서 제공된 자식이 아버지를 통해서 나온다면 그 자식 때문에 아버지가 거꾸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언약사람이라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언약의 핵심은 뭐냐? 자식 낳기. 자식이 없다면 그것은 언약은 꽝! 꽝이에요. 구약성경을 달달 외우는 사람들이 유대교입니다. 현재 유대교에서 언약, 약속, 어릴 때부터 다 외웁니다. 하지만 그들은 꽝이에요.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언약대로 성취된 아들을 만나본 적이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주어졌건만 하나님의 아들이 왔건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보면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줬건만, 구체적으로 역사적으로 왔건만 그들은 그것을 모르는 거예요. 관련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 한 둘이 아니지요. 한둘이 아니지만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번제로 드린바 되었습니다.

이 땅에 죽기 위해서 오신 분이에요. 자살한다고 받는 것이 아니에요. 가룟유다도 자살했어도 안 받잖아요. 아버지에 의해서 주어졌고 그리고 그 아버지에게 갈 때는 죽음을 통해서 도로 번제로 드려지는 그 기능을 보이는 자식, 그 자식이야말로 인간의 모든 육과 관계없이 영적으로 오셔서 영적으로 영의 사람을 만들어서 가실 하나님의 언약의 마지막 아들입니다.

아들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거예요. 아버지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구체화된 아들을 믿고 구원받는 겁니다. 불교는 도 닦는 거지요. 아들이고 뭐고 없어요. 자기 잘나면 대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형편상 가까운 교회를 가게 되고, 또는 시가 때문에 부산에 간다 하면 시댁이 다니는 교회에 가게 되지만 어떤 교회가 진짜 교회냐 하면 이런 교회가 진짜 교회에요. 성경 본문 가지고 설교를 논리적으로, 기술적으로, 휘황찬란하고 아름답게 하더라도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더 살아남읍시다.” 하는 이것은 사탄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설교를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마지막에 “그러니까 지금 죽어도 괜찮아요.” 이렇게 하면 성령이 있는 교회에요. “지금 죽어도 괜찮습니다.” “이 꼴로요?” “이 꼬라지, 저 꼬라지 그런 것은 묻지 마시고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는 것을 마지막 내놓아야 돼요.

“주의 은혜로 삽시다.” 이것은 전부 사탄이 설교하는 거예요. 악마가 그 입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교회 고를 때 간단한 거예요. 이렇게 해서 삽시다, 라고 나온다면 무조건 이것은 사탄이고 “그러니까 우리가 더 살아봐야 희망 없습니다. 죽읍시다.” 하는 이것이 성령 받은 교회에요.

약속의 구체화는 그것입니다. 야곱은 구약이기 때문에 신약 요셉과 마리아 때까지는 아직 이르지 못했어요. 그래서 야곱 본인의 생각은, 하나님의 약속을 줬다면 반드시 내 자식이 태어나야 된다는 겁니다. 내 자식이 구체화되어야 돼요. 그래서 야곱은 내가 사랑하는 라헬에게서 내가 사랑하는 자식이 태어나기를 얼마나 고대했을까요?

하나님이 인정하는 자식이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내가 사랑한다는, 내가 어떤 여자를 사랑한다는 이 자체가 하나님이 인정한 사랑일 것이라는 거지요. 사랑해서 동침해서 자식을 낳았다. 그러면 내 사랑도 하나님의 언약에 인정받는 사랑으로서 등록이 되니 얼마나 그것을 학수고대했겠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야곱이 사랑하지 않는 여인에게서 무려 네 명, 연발탄도 이런 연발탄이 없어요. 네 명이라는 자식을 연속으로 낳았어요. 하나님께서 야곱의 사랑하는 여인을 생각한다면 하나 낳으면 이쪽도 하나 낳고, 이런 식이면 비겼다 치자고 할 수도 있는데 레아만 일방적으로 아들 넷을 연속으로 낳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과연 이 자식이 나의 자식이 맞는가. 내가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에게서 자식이 태어났을 때 과연 이 자식이 나의 자식 맞나, 할 때 야곱에게 그 자식은 자기자식이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야곱의 자식은 이 땅에는 없습니다.

마치 아브람의 자식은 이스마엘이지만 아브라함의 자식은 이 땅에 없어요. 왜? 이삭은 죽어야 될 자식이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은 소멸되고 이 땅에 잠간 있다가 없어지는 거예요. 자식이 없다는 것은 내가 구원될 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서 나를 소외시켰다는 뜻이에요.

나 너하고 언약 이야기 안한다, 나는 너와 흥정 안한다, 네 도움 받아서 내 언약 성취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야곱은 착각했어요. 사다리가 내 앞까지 왔으니까 “주여, 주의 뜻대로 내가 십일조 드리겠습니다.”하고 자신만만했는데 이 사다리가 자기 내부를 거쳐서 그 끝에 가보니까 자기는 어디로 가야 되는가?

이삭이 번제물로 죽어야 되는 그 자리, 야곱 본인이 끝까지 가야 될 자리가 그 자리였어요. 이삭의 죽는 자리가 곧 자기가 죽는 자리였어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허락한 것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말씀을 잘 지키는 나의 그 몸을 허락한 것이 아니고 자기 몸이 어떻게 죽느냐, 언약에 의해서 죽느냐, 그 죽는 자리를 언약의 마감자리로 주신 겁니다. 내가 죽는 자리, 신약에서는 십자가의 자리지요.

십자가자리에요. 내가 나서서 설치면 안 됩니다. “저 착한데요. 말씀대로 산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누가 봐도 하나님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바르게 살아서 영광돌리겠다고 얼마나 내가 애를 썼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난 너하고 거래한 적 없는데? 되도 않는 네 몸 가지고 왜 자꾸 언약에 집어넣느냐?” 말이지요.

너를 통과한 것이 뭐냐는 말이죠. 너를 두 조각 내고 통과한 것, 너를 죽이면서 통과한 것. 그것은 뭐냐? 야곱을 통해서, 그의 아내 둘을 통해서 열 두 아들이 나왔는데 그 열두 아들을 집합해보자는 말이지요. 집합하면 이름이 네 자로 돼요. 이스라엘. 아, 하나님은 이스라엘하고 언약을 맺은 것이고 야곱은 껍데기입니다.

여러분, 택배 받고 난 뒤에 포장지는 버리잖아요. 알맹이는 버리고 포장지 쥐고 그거 자랑 질 하는 것이 어디 있어요. 야곱은 껍데기였고 그 안에 이스라엘 들어 있는데 그 이스라엘은 야곱의 자식이 아니고 언약의 자식, 하나님의 자식이 나온 거예요. 하나님의 자식을 위해서 야곱이라는 육을 이용한 겁니다.

그냥 이용한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은근히 노리지요. 야곱은 반대로 생각했거든요. 내가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열 두 명이 너무 많다면 한 여덟 명쯤 낳고, 그 다음에 덤으로 온 여인에게서 한 네 명쯤 낳아도 봐준다, 8 대 4로 봤는데 거꾸로 되었어요. 거꾸로 되어서 오히려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네 명, 사랑하지 않은 여인에게서 여덟 명.

그래서 합했는데 그게 이스라엘. 결국 이스라엘은 야곱의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식을 하나님께서는 “못난 놈!” 그 야곱을 통해서……, 야곱은 자기가 사랑하는 그 여인, 그게 사랑인지 알았어요.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타락이었습니다. 육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어떤 여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필수적이고 이 땅에 꼭 필요한 거예요. 깨지기 위해서. 내가 주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것. 내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듯이 그 사랑 가지고 주를 사랑한다? 어디, 되지도 않는 사랑을 들이밀고 있느냐는 말이지요.

우리가 그런 사랑을 하게 되면요. 그 사랑의 주체인 나를 내가 절대 죽이지 못합니다. 내가 사랑한 여인이 나로 인하여 죽을 때 그 여인을 사랑했던 나도, 하나님이 그 여인을 죽임으로서 나도 같이 죽이는 거예요. 그걸로 열 두 아들은 마감이 되어버립니다. 이제 그만 낳겠다.

사랑하는 여인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야곱도 자기가 죽은 자임을 안 이상 더 이상 하나님의 아들은 나올 구석이 없어요. 나올 기반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야곱이 못되게 굴 때, 야곱이 착각할 때, 그 반대를 반대로 할 때 계속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등장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 창세기 35장 18절, 라헬이 베냐민 낳고 죽습니다. 라헬은 자기 아들 이름을 베노니, 슬픔의 아들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압니다. “이 여인아, 걱정하지 말라. 슬픔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은 이 땅에 인간들이 자기 사랑에 취해서, 자기 사랑에 미쳐서 “하나님도 나와 손잡았다. 나 아니면 하나님일 안 된다.” 하는 이런 미친 인간들로 인하여 죽어야 될 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등장하는 겁니다.

우리는 세상 끝까지 타락해야 되고 우리는 우리 사랑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좀 말이 이상하지만 우리는 우리사랑을 끝까지 포기해서는 안돼요.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의 십자가가 얼마나 고귀한지를……, 반대가 있어야 반대의 반대가 있잖아요.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 그거 육입니다. 그거 엉터리입니다. 사기입니다.

왜냐하면 주체가, 사랑하는 주체가 나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그것을 빌미로 자기를 안 죽이려고 해요. “주를 사랑하는데 저를 치면 안 됩니다. 주를 사랑하니까 제 인생 힘들게 하면 안돼요. 주를 사랑하기 때문에 남에게 욕 얻어먹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 저 주와 동업자거든요.” 그런 짓 하다가 아, 이게 바로 주님의 일을 훼방하는 인간의 전형적인 본색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본색을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수단으로 삼아서 그걸 집어넣어 주신 겁니다. 창세기 오늘 본문을 더 구체적으로 봅시다. 창세기 29장 31절에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걸 통해서 레아와 라헬 둘 다 불임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불임여성이에요. 그 다음에 아버지 이삭의 아내 리브가도 불임여성, 애를 못 낳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두 아내도 아기를 못 낳아요. 아기를 못 낳는다는 말은, 여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남편 되는 인간들에게 문제가 있어요.

그래서 지난 시간에 참 어렵지만 이야기를 했듯이 여자를 통해서 남편을 변화시키는 겁니다. 여자라는 것은 이름이 없어요. 남편 누구누구의 여자기 때문에 대표이름이 없어요. 누구누구의 소속(belong to), 소유된 거예요. 소유되었기 때문에 정말 소유되었다, 진짜 그 여자를 통해서 남편이 변화된다면, 확실하게 여자는 소속되려면 그 증거가 뭐냐? 자식이 있어야 돼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레아가 하나님에 의해서 태가 열려서 자식을 낳았는데 레아는 그것을 뭐라고 해석하느냐? belong to, 여자가 남편과 똑같이 육에 속했기 때문에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제야 남편이 나를 사랑할거라는 겁니다. 32절에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은, 지금 야곱이 레아를 지금까지 줄곧 사랑한 적이 없다는 뜻이에요. 사랑한 적도 없는데 사랑하지 않는 여인에게 하나님께 자식을 주십니다. 르우벤은 “보라 아들이라.”는 뜻이에요. 두 번째 아들 이름이 시므온인데 “하나님의 기도를 들었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 아들 이름이 레위인데 “남편과 연합이 되었다.”는 겁니다. 네 번째가 유다인데, 드디어 남편과 연합된 것을 확실하게 도장 찍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레아입장에서는 어디에 자꾸 집착하느냐 하면, 어떻게 하면 저 라이벌 되는 동생보다 내가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 하느냐, 야곱이라는 육을 내가 독차지 하느냐, 자식을 낳으면서 그런 의미를 계속 새기는 겁니다. 그런다고 해서 남편 야곱이 아내를 사랑할 턱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자식은 야곱 자식도 아니고 레아자식도 아니에요. 여기에 나오는 이름들을 보게 되면 결국은 파노라마처럼, 스펙트럼처럼 열두 아들을 좍 펼치게 되는데, 그 펼친 이름들이 뭐냐? 보라 아들이다, 하나님께서 들으셨다, 연합한다, 찬송한다, 이런 이름들은 장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시고, 하나님께서 야곱과 레아같이 자기가 갖고 있는 육으로서 하나님의 아들 됨, 하나님의 딸 됨을 증거 하려는 모든 육적인 것에 대해서 영적 전쟁을 벌이는 자식들로 주신 거예요.

육의 한계를 못 벗어나는 인간들을 향하여, 자식을 낳아놓고 내 자식이라고 우기는 모든 육의 외침에 대해서 “아니야. 이것은 하나님의 자식들이야.”라고 싸움을 벌일 때 필요한 모든 기능들을 가지고 태어난 겁니다. 지금 전혀 말이 되는 소리가 아니라는 투인데…….

지금 레아가 자식 낳기를 기다리잖아요. 자식을 낳아야 남편의 사랑이 확증이 되니까. 그런데 육의 소망은 육의 징벌이에요. 우리가 이 땅에서 뭘 기대하고 소원하잖아요. 우리가 기대하고 목적하고 뭔가 목표로 한다는 그것이 우리가 평생 담당해야 될 벌을 받고 있는 겁니다.

소원이 없었으면 벌을 안 받지요. 아이큐 50이나 40정도. 스트레스 안 받지요. 암 걸릴 일이 없습니다. 너무 소망이 많아서 스트레스 받아서 위암이 걸리고, 암이라는 암은 온 몸에 퍼지고요. 기대가 너무 많아요.

“주여, 이 정도는 되어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하나님의 성도인 것을 남에게 좀 티내지 않겠습니까? 뭐하십니까, 하나님? 좀 내 인생 편하게 해주시고 ‘예수 믿고 복 받았구나.’ 하는 소리 듣게 해 달라”는 그런 요청, 교회 앉아 있거나 집에 있거나 기도할 때마다 계속해서 어떤 기대나 소원, 소망, 요구사항, 예상되는 어떤 것, 거기에 대한 맹세, 끊임없이 쏟아냅니다.

지금 우리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그걸 레아가 하고 있고, 야곱이 하고 있고, 라헬도 하고 있어요. 참 이름이 부끄럽습니다. 보라 아들이라, 주께서 들으신다. 아들이라, 들으신다, 연합했다, 찬송한다, 이것은 다 누구에게나 해당될 이야기냐 하면, 장차 오실 예수님의 기능에 속합니다.

예수님의 기능은 육과 싸우는 거예요. 육과 싸우시는 영적인 분이에요. 이스마엘과 싸우는 이삭 같은 겁니다. 야곱과 싸우는 이스라엘 같은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야곱을 주저앉게 만들고 야곱 속에서 끄집어내는 거예요. 멍게 따듯이, 택배포장지 뜯듯이, 혹은 굴 따는 것처럼. 쪼개서 울컥 하는 그것, 그것 끄집어내는데 이걸 쪼개고 끄집어내는 거예요.

이걸 쪼개기 위해서 우리는 쪼개지는 값을 해야 돼요. 이게 뭐냐 하면, 우리는 날마다 나만의 숨겨진 소망이 있고 소원이 있어요. ‘나는 망해도 좋은데 우리 딸자식, 아들자식만큼은 잘되기를 바랍니다. 이것도 기복신앙인 것을 알기는 알지만요.’ 이렇게 하지요. 이름도 한나, 유다, 성경에 나온다고 이름도 고상하게 지어요. 노아, 이런 식으로 성경에 나오는 것 다 갖다 붙이는데 그 이름이 인간에게 벌 내리고 있는 중이에요.

한나도 아닌 게 한나 행세 하고 노아도 아닌 게 노아가 뭔지도 모르지요. 요셉도 아닌 게 요셉처럼 굴고요. 야곱도 아닌 것이 야곱처럼 굴고. 우리의 모든 이름은 주님 앞에 쪼개져야 될 이름입니다. 그걸 야곱이 보여주는 거예요. 야곱이 자식을 낳을 때 그 자식은 사실은 아버지 어머니를 고발하는 자식들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입니다. 이름은 열두 가지지만 그걸 합치면 예수 그리스도에요. 어디서 구원한다? 죄에서 구원한다. 바로 육에서 건지시는 영의 이름이 이겁니다. 영의 기능이에요. 네가 구원되고 난 뒤에는 ‘아하, 아들이 구원했구나.’ 구원되고 난 뒤에는 ‘주님의 기도가 응답되었구나.’ 구원되고 난 뒤에는 ‘주님 때문에 우리가 주님과 연합되었구나.’ 구원되고 난 뒤에는 ‘내 안에서 주님으로 인하여 찬양하는구나.’

그러기 위해서 그 이름의 기능이 들어오게 되면 야곱과 똑같은 쪼개짐의 기능이 성도에게 그대로 반복되게 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우리의 대표자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랑은 평생 가도 지울 수가 없어요. ‘주여, 내가 사랑하지도 않는 저 여자에게서 연발탄으로 아들 네 명이나 주다니요.’ 야곱이 얼마나 걱정을 하겠습니까?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은 제로니까요. 그래서 라헬이 야곱 보고 30장 1절에서 뭐라고 하느냐?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이렇게 했거든요. 그러니까 2절에 야곱이 하는 말이 “야곱이 라헬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부부싸움까지 벌어졌어요. 지금 자식이 없다는 것은, 야곱은 비록 라헬을 사랑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야곱과 라헬이 받아들이기는 너무나 힘든 거예요. 하여튼 못생긴 게 자식은 순풍순풍 잘 낳아요. 레아는 네 명이나 낳았는데 라헬은 한 명도 없으니까.

그러니 얼마나 기고만장하겠어요. 브닌나가 한나에게 약 올리는 것 보세요. “아이고, 자식도 못 낳는 것이 그게 무슨 하나님의 축복이야. 난 아들이 있잖아.” 한나는 그 이야기 듣고 자식이 없으니까 자기는 저주받은 줄 알았어요. 왜냐? 자식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의 복이 끊어졌다는 이야기거든요.

“아이고, 복이 끊어진 지질이도 복 없는 여자. 자식도 없이.” 그러니까 한나가 약이 올라서 기도했잖아요. 기도하니까 하나님의 응답이 이것이었습니다. 이 패역한 시대에서는 자식 없는 여자가 복된 여자라고. 그게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옵니다. 참 말이 어려워요. 자식은 없는 여인의 자식이 많은 자식보다 더 복되도다.

이게 얼마나 말이 어려운지. 자식이 없으면 자식이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자식이 없는데 자식이 있다는 거예요. 없는데서 나온 자식이 자식자랑하는 모든 것보다 더 복되다, 이 원리가 언약의 원리고 구원의 원리고 천국의 원리에요. 왜 자식이 있는데도 없다고 합니까? 내 자식이 아니거든요.

주님의 자식이 약속대로 나라는 도구, 통로를 통해서 순풍, 하고 나온 거예요. 성도는 다 마리아 같아요. 자기자식을 낳은 것이 아닙니다. 성령에 의해서 자식을 낳은 거예요. 물론 마리아처럼 생짜로 낳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오해를 통해서, 착각을 통해서 자식을 낳지요. 내 육을 통해서.

육을 통해서 딸을 낳았습니다. 딸을 낳은 게 아니지요. 육을 통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들을 낳은 게 아니지요. 육을 통해서 딸이나 아들을 낳은 것이 아니고 육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낳지요. 진짜 어려운 이야기다. 자식을 낳았는데 예수님을 낳았다면 누가 그걸 믿겠어요?

자식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기능을 찾아야 돼요. 왜? 내가 야곱 같은 인간이고, 내 소망, 내 소원밖에 몰랐던 그 죄를 자식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기능을 통해서……, 보라 아들이라, 들으셨다, 연합되었다, 찬송했다, 야곱이 이걸 보고, 나중이야기입니다만 레아가 라헬을 보고 이 자식들이 우리들 자식이 아니야, 라고 그들은 나중에야 아는 겁니다.

특히 레위 같은 경우, 역대 상 6장 1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레위의 아들들은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요 그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요 아므람의 자녀는 아론과 모세와 미리암이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레아가 “나는 이제 남편과 연합했어. 너는 안했지?” 이렇게 항상 동생을 의식해요. “너는 연합이 안 되었지만 나는 연합되었다는 증거로 복을 주셨어.”하고 레위를 낳았지만 그 레위에서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접근해가는 자식들이 계속 나옵니다. 아론과 모세와 미리암…….

그러니까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이 낳은 자식이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 예수 그리스도를 거꾸로 순서 밟아서 이 못난 놈, 이 못난 야곱과 못난 라헬과 못난 레아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자식 열두 명을 준 거예요. 이게 바로 야곱의 사다리입니다.

야곱의 사다리는 본인들이 이루는 것이 아니에요. 야곱이 이룬 것이 아닙니다. 쪼개지라고 준 겁니다. 레아도 그렇고요. 레아도 자랑할 것도 못돼요. 주께서 은혜로 주셨는데 어디 자기 자식입니까? 라헬도 시기하면 안돼요. 남편 사랑 좋지요. 하지만 그 남편 사랑이 육적인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남편 속에 있는 사랑, 남편이 죽고 튀어나온 그 사랑, 육과 육의 만남의 사랑이 아니라 육을 쪼개고 그 쪼개진 그 안에 들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그 사랑이 언약의 완성으로서 우리는 구원받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쪼개질 야곱의 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삭처럼 제단에 누워야 될 우리 몸인지도 모르고 더 살려고 하고, 하나님 덕분에 오래 살려고 하고, 잘난 척 하고 싶어 하는 우리, 진즉에 죽어 마땅함을 계속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깨닫는 그 자체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기능이 작용하고 있는 증거로, 기쁨으로 찬송하면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