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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창세기 28:15-19 / 하늘의 문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28:15-19 / 하늘의 문

정인순 2017. 11. 1. 21:36

 

 

하늘의 문

 

음성               동영상


이근호
2017년 11월 1일                

 

본문 말씀: 창세기 28:15-19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28:16)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28:17)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28: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28:19)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하늘의 원리가 땅에 와서도 멈추지 않고 끝장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모든 땅의 원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겁니다. 땅의 인간들은 하늘의 염원하고 상상합니다. 실제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고 그저 저 좋은 천국을 사모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착각은 모두  인간의 육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계시한 것은 그동안 하늘과 땅이 통하는 고정적 채널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야곱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복의 근원’을 따낸 입장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따낸 성과를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다니요!

야곱은 감격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알아주신다는 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자신의 소원을 들어줄 줄 알았습니다. 야곱은 하늘과 땅이 통하는 유일한 공간에서 자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자신감이 충만합니다. 모든 것을 알게 된 성취감을 지울 길이 없었습니다.

그는 벧엘을 하나님이 상주하시는 성전으로 규정하고 거기에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제단을 쌓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인생은 아직도 많은 남아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통해서 이루시겠다는 그 뜻에 대해서 여전히 모르고 있습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자기 해석만 갖고 있을 뿐입니다.

즉 ‘하늘의 문’과 ‘하늘의 문’에 대해서 인식하는 인간의 견해와의 차이점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벌리시는 일에 야곱 본인이 긍정적으로 다루어질 것이고 짐작한 겁니다. 요즈음 식으로 말해서, 하나님은 일단 ‘나’는 반드시 천국에 넣어준다는 조건 하에 천국과 지옥에 대한 지식을 주실 것이다 고 여기는 오해말입니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결정은, 일단 자기 자신에 대해서 우호적이고 좋게 평가하는 것을 전제로 하게 됩니다. 이래서 ‘개인구원론’은 악한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나타남에 전적으로 마음 빼앗긴 것은 오늘날에 참으로 모범적 태도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세상 전부를 무가치있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가족이 되었던 일가친척와 친구가 되었든 교회가 되었든 간에 그 모든 인간을 개무시할 요량이 아니라면 정신을 주님에게 온전히 모으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이는 곧 ‘땅의 원리’는 일체 ‘하늘의 원리’에 부합되는 것이 없음을 아울러 알아야 합니다. 즉 이 땅에서 사람들 사이에 그 어떤 평가를 받든지 상관없이 ‘하늘의 원리’는 따로입니다.

야곱에게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나타났음에 대해서 ‘나는 문제가 없음’이라는 입장에서 반응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나타난 그 장소를 ‘하늘의 문’, 곧 ‘하나님의 전’이라고 단정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공간을 세상의 중심으로 보고, 다시 자신이 이곳으로 돌아오게 되면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야곱의 이러한 생각은 오해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야곱을 활용하시지만 정작 ‘복의 근원’은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되시는 겁니다. ‘하늘의 문’은 인간들이 들어오라는 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에 천국을 펼치기 위해 자신이 출입하시는 문입니다. 따라서 그 ‘하늘의 문’은 일체 인간들을 들여보내지 않는 문입니다.

즉 인간은 결코 천국에 들어설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문입니다. 여전히 인간의 입장에서는 ‘천국으로 통하는 문’은 없는 겁니다. 요한복음 ·1:51에 보면,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천국의 문, 혹은 성전은 오직 예수님 뿐이십니다. 야곱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해서 일련의 하나님의 자기 공작, 자신의 공사를 하시려는 겁니다. 그 공사의 절차는 이렇게 됩니다. ‘꿈→역사→하늘의 문’  그리고 역순합니다. ‘하늘의 문→역사→꿈’으로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꿈의 세계란 곧 인간의 손에 포착되지 않고 발견되지 않는 하나님만의 세계입니다. 그 꿈 안에 하나님의 계획이 담겨 있고 이로 인해 야곱의 몸은 ‘하나님의 스스로 진행시켜 나가시는 하나님의 공사장’이 됩니다. 창세기 35:11에 보게 되면, 야곱은 벧엘에 다시 와서 다음과 같은 추가적 약속을 부여받게 됩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이것은 야곱 중심의 역사를 말합니다. 역사란 이 세상에 남겨진 흔적의 연쇄입니다. 역사란, 역사 자체에서 해석이 불가능하고 꿈의 세계에서만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런 경우가 다니엘 2장에 나오는 느부갓네살의 꿈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곧 거기서도 ‘꿈→역사’가 됩니다.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특심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단 2:31-35)

이 역사를 타고 이 땅에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아버지의 뜻은 이렇게 지켜야 지키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데 그것은 바로 세상와의 접촉을 통해서 ‘죽음’을 유발하는 삶입니다. 즉 ‘죽음’이 말씀의 성취요 하늘의 문이요 하나님의 전입니다. 이는 곧 ‘살아있는 자’들은 결코 들어설 수 없는 세계를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따로 만드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6:24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에게 주어진 모든 하나님의 뜻은 야곱을 죽게 합니다. 그리고 그의 육에 의해 가리워졌던 진짜 하늘의 문, 곧 이스라엘(=예수님)이 출현합니다.

이 예수님께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모든 인간은 결코 천국에 갈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시키셨습니다. 철저하게 천국은 지상으로부터 막혀있는 곳입니다. 이 ‘막혀있음’을 이 지상에 드러내는 것이 바로 ‘천국의 문’입니다. 이 아무도 갈 수 없는 곳으로 예수님께서 친히 들어가시므로서 예수님의 피를 앞장 세우신 성령님이 오셔서 그 천국을 허락하십니다.

그곳은 바로 우리 인간이 상상하는 나라가 아니라 오직 ‘아들의 나라’였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는 백부장처럼 주님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면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나라가 오직 주님의 허락으로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12강-창 28장 15-19절(하늘의 문)1711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8장 15-19절입니다. 구약성경 41페이지입니다.
 
창 28:15-19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야곱이 지금 누구와 이야기하고 누구를 쳐다보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하고만 상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순간 야곱은 인간을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저 사람과 어떤 관계를 이룰까, 라는 계산을 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한 야곱의 결정적 변화는 나중에 형 에서를 만날 때 에서를 보고 주여, 라고 하면서 일곱 번 엎드려 절하는데 그것은 다시 말해서 인간 자체에 대해서 완전히 개무시 하는 거예요.

상대할 자가 하나님인데 어디 상대할 데가 없어서 인간하고 상대하겠어요. 성도의 자유, 자유, 하지만 사실은 인간들을 개무시 하는 그것보다 더 큰 자유는 없습니다. 인간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으려면, 형제고 가족이고 다 무시할 수 있으려면 야곱처럼 하나님께 모든 마음이 다 빼앗겨야 돼요.

자기에게 찾아온 그 주님 앞에 혼이고 영이고 마음이고 몽땅 다 거기에 쏠려버리면 이 세상에 대해서 그다지 신경 쓸 일이 없어요.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이 자기와 관계한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 그 사람은 누가 이겼느니, 누가 졌느니, 인생 성공이니 실패니, 하는 그런 논박 같은 것은 이야기 꺼리도 되지 않습니다.

야곱이 이렇게 하나님을 봄으로써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땅의 원리와 하늘의 원리가 완전히 다르다는 겁니다. 이 말은 땅의 원리를 아무리 충실하게, 땅에서 그냥 바르게 산다 할지라도 그 땅의 원리는 하늘의 원리에 손톱도 안 들어가지요. 그러면 하늘의 원리가 뭐냐?

땅의 원리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하늘의 원리에 대해서는 도통 모르게 되어 있어요.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언급하게 하셨다는 말은 그동안 하늘과 땅이 연락책이 없었다는 거예요. 소통이 없었다는 겁니다. 채널이 없는 거예요. 하늘과 땅을 서로 연결할 수 있는 공식채널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전에 아브라함과 이삭은 우발적이었습니다. 고정된 채널이 없는 거예요. 고정된 채널이 없다는 말은 인간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 맘대로 살았다는 겁니다. 그 중에 하나가 야곱이에요. 야곱도 자기 맘대로 살았어요. 형에게 이기면 장자권, 축복권 받는다는 그런 것도 땅의 원리의 일부에 속합니다.

이제 하늘의 원리를 딱 투입하고 난 뒤에는 그런 땅의 원리대로 형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는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예요. 하늘이 그냥 자기에게 덮쳐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정신, 이러한 생각을 이 본문뿐만이 아니고 인생 살아가는 날 끝까지 계속 유지되기를 바랍니다.

이 야곱의 사고방식이. 세상 인간을 개무시하는 사고방식이 끝까지 유지되기를 바라요. 세상 떠드는 소리에 현혹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우리가 성경말씀을 제대로 인정하면서도 세상의 구시렁거리는 소리에 신경 썼다면 그것은 정말 야곱의 문, 하늘의 문과 무관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어요.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라고 했는데 이것부터 우리는 시비 걸고 나가야 됩니다. 야곱이 분명히 하나님의 그 원리와 법칙에 대해서 수긍을 하면서도 자기 자신에게 뭐가 문제인지는 미처 간파하지 못했어요.

뭐가 문제냐 하면, 하나님께서 문이라고 지정한 그것과 야곱이 그것을 문이라고 인식하는 것과의 차이, 인간 야곱이 ‘야, 이곳은 하나님의 문이다.’ 할 때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성을 두고 ‘이곳은 문 일거야. 아마 다른 것은 문이 아닐 거야.’라고 생각한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육을 가지고 있으니까.

육이라 하는 것은 기존의 시간과 공간성 안에서 살잖아요. 이 세상 안에서 살기 때문에 다른 곳은 문이 아니고 이곳은 문이라는 인식을 가졌을 겁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야곱의 잘못된 생각이 계속 나와요.

21절부터 보면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라고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이 말 이거 헛방입니다. 안됩니다. 지금 야곱이 앞에 있는 말씀과 야곱의 이러한 자기 의욕과 차이가 나는 이유가 뭐냐? 15절에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거든요.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하나님이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야곱은 눈에 뵈는 것이 없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되든 그것은 상관없이 하나님이 꽉 차 있는 거예요. 하나님으로 충만한 겁니다. 다른 인간들이 거기에 들어갈 틈새가 없어요. 틈새가 없으면 그 자체가 완전체고 야곱이 메시아가 되어야 될 텐데 야곱이가 뭐가 문제냐?

야곱의 육이 문제에요. 야곱의 육신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야곱은 오해합니다. 하나님이 너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는데 야곱의 육신은 그 하나님을 자기가 붙들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을 소유의 대상으로 본 거예요. 찾아왔으니까 가질 만 하다고 여긴 겁니다. 붙들 수 있다고 본 겁니다.

뭐가 빠졌느냐 하면, 오늘 15절 말씀에 의하면 하늘의 문은 친히 하나님이 만듭니다. 그런데 야곱은 생각하기를 하나님과 자기가 협동해서 만드는 줄로 알고 있어요. 하늘의 문이 야곱을 죽입니다. 그 원리가 이렇게 돼요. 처음에 야곱이 본 문, 벧엘, 하나님이 이렇게 약속한 것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꿈에서 나왔어요.

오늘 설교내용이 너무 난해하기 때문에 미리 간추려서 말씀드립니다. 꿈에서 시작해서 역사로 전개되고 역사가 하늘의 문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하늘의 문이 거꾸로 역사를 통해서 꿈으로, 죽음으로 귀환되는 겁니다. 꿈에서 시작해서 역사로 해서 하늘의 문이 여기서 성취되다가 성취된 하늘의 문이 다시 역사를 통해서 꿈의 나라, 주님의 나라,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로 다시 귀환되는 코스를 밟아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요. 꿈에서 역사가 나온다는 말은 다니엘 2장 31절에 보면 나옵니다. 워낙 유명한 대목입니다. 느부갓네살이 꿈을 꿨잖아요. 느부갓네살이 여기서 환장을 합니다. 꿈 내용도 다 잊어서 모르겠고, 꿈 내용도 모르는 채로는 해석할 수가 없지요.

하지만 느부갓네살은 뭔가 탁 걸리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모르면 나는 안 돼, 라는 것이 있어요. 이걸 지난 낮 설교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기억나지 않지만 지워지지 않는 것, 뭔가 기억나지 않는데 도저히 트라우마처럼 지워지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 이게 얼마나 괴로울까요? 목에 걸린 닭 뼈같이 이게 얼마나 자기를 힘들게 하는지.

신의 계시라는 것이 그런 거예요. 내 쪽에서는 붙잡을 수 없고 저쪽에서는 붙잡으니까, 평소에 인간은 자기가 아는 것에 대해서 설명해가면서 인생을 살아가는데 저쪽에서는 일방적으로 붙들고 내 쪽에서는 붙잡지 못하니까 이것은 미치는 거예요. 내가 나가 아닌 겁니다.

붙잡힌 나를 모르는 이상은 지금껏 내가 살아온 인생은 헛방이라는 것을 감 잡고 모든 대신들 다 불러서 내가 꾼 꿈의 내용 못 알아내면 다 죽인다고 했어요. 이런 횡포가 어디 있습니까? 지금 횡포가 눈에 뵈는 것이 없어요. 느부갓네살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인간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 억압으로 신하들에게 강박하는 것은 그만큼 자기를 억누르고 있는 하나님의 뜻이 세상의 원리를 완전히 개무시할 정도로 강압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도바울 인생 보세요. 그게 사람 사는 겁니까? 불속에도 물속에도 맘대로……. 사도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종잡을 수가 없어요. 자기계획을 못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니까 자기가 계획 잡은 대로 다 성취될 것 같습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혼쭐나고 있다는 뜻이에요. 주께서 나를 어디에 집어던질지 본인이 감을 잡을 수가 없다는 뜻이에요. 하늘의 것이 완전히 억누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느부갓네살은 답답하고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다 죽여 버린다고 할 정도로 횡포를 부리니까 다니엘이 그걸 이야기하지요.

머리는 금, 가슴과 팔은 은, 배와 넓적다리는 놋, 종아리는 철, 발은 얼마는 철, 얼마는 진흙이라고 한 이것이 뭐냐 하면 역사에요, 역사.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낸 그 꿈이 역사화 될 때, 자, 역사는 그 자체로 진리냐, 라고 묻는 거예요. 그 자체로 진리가 아니에요. 역사는 해석된 역사가 진리에요.

그런데 역사는 자체적으로 해석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오늘 본문의 야곱처럼. 자기 몸이, 자기 뜻이 참된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살아야 되니까. 하나님의 뜻이,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는 것이 좋기는 좋은데, 문제는 ‘그 천국이 뭐냐, 지옥이 뭐냐?’ 하는 것을 내가 해석하고 인식할 때는 반드시 전제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반드시 천국사람이고 그것은 당연한 거고……’ 거기서 출발해요. ‘나는 지옥 가서는 안 되고 천국 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거고……’ 거기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것은 엉터리천국이 되는 겁니다. 열두 제자 다 그렇게 실패했고 가룟유다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예수님 자리에서 해석하지 못하고 ‘나는 예수님한테 잘 보였으니까 예수님의 그 말은 나를 구원하기 위함일 것이다.’라고 여기면서 예수님의 이야기와 합치된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러면 목사님, 그렇게 생각 안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하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오늘 설교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늘의 문은 닫힌 문이에요. 열린 문이 아니고 닫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문의 특징은 뭐냐? 들어오라는 문이 아니고 밀어내는 문이에요.

들어오지 말라는 문이에요. 이 해석이 좀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1장 50절부터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했어요.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한다는 이것은 꿈 이야기잖아요. 그 꿈 이야기가 예수님의 현장성, 인자이신 예수님에게 적용이 된다는 말은, 예수님이 지금 어디에 사시는가 하면 역사 속에, 인간들 사는 이 땅에 오셨어요. 꿈이 역사가 되었고 그 꿈이 역사 안에서 실현된 그 완성을 인간들은 배척해서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하늘의 문은, 벧엘은, 벧엘이 하나님의 문이거든요, 하나님의 전, 하나님의 문은 이 땅에 완성을 보는 동시에 인간들에게 닫힌 문이 되는 거예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문이 되는 겁니다. 그게 하늘의 문의 완성이에요. 이 말은, 땅은 영원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나 권한이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겁니다.

갈 수 없는 곳, 그게 천국이에요. 하나님만 사는 곳, 그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지금 야곱은 오해하고 있어요. 야곱은 돌베개를 한 이곳이 하나님의 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전은 신약에 오게 되면 고정된 것이 아니에요. 움직이는 겁니다.

하나님의 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성전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움직일 뿐만 아니라 그냥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죽었다가 나타내 줄때만 나타나는, 부활의 능력으로서 성령으로 나타낼 때만 나타나는 성전으로서의 하늘의 문이고 그 문의 완성상태입니다.

논리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성급하게 신약부터 제시를 했는데 그러면 문제는, 이렇게 착각하고 있는 야곱은 어떻게 됩니까, 야곱은 구원 못 받는 겁니까, 라는 생각이 들 거예요. 15절 다시 읽어보게 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계속 관리하고 거기에 하나님께서 작업을 거셔요. 그 작업 거는 내용이 창세기 35장 11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이게 역사에요.

야곱의 몸을 통해서 많은 왕들이, 국민들이 나오도록 조치하는 겁니다. 야곱을 통해서 야곱과 대적했던 그 형 에서(에돔)도 하나의 나라가 되고, 그리고 이스라엘 나라에서도 왕들이 많이 나와요. 야곱의 몸을 통해서 역사를 만드는 거예요. 그렇다면 창세기 27장 29절에서 아버지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게 뭐냐?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야곱이 복의 근원입니다. 이 이야기는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이 받았던 그것을 구체화시키는 거예요. 야곱까지 계속 가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복의 근원이 야곱이냐, 아니면 예수님이냐를 분명히 해야 돼요. 즉 야곱이냐, 하나님 자신인가.

이 복의 근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부탁하는 것이 아니고 꿈과 야곱을 만나게 해요. 다시 말해서 복의 근원은 야곱 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야곱이라는 땅 쪽에 있는 것이 아니고, 꿈이라는 숨겨진 하늘 쪽에 복의 근원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야곱은 착각하기를 땅에 있는 자기 자신이 복의 근원인줄로 알고 있어요.

하나님이 자기하고 동업하는 줄로 알고 있었어요. 하나님은 야곱을 이용하는데. 오늘날 성도들의 착각이 그거 아닙니까? 주일 낮에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성도에게 개인구원은 없어요. 성도의 몸은 주께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현장입니다. 하나의 무대가 돼요. 우리는 이 무대를 많이 쓰시라고 제공할 뿐인데, 물론 제공하나 마나 주께서 우리를 붙잡고 사용하지요.

이러한 야곱이 본받아야 될 사람은 나중에 신약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입니다. 백부장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제가 다시 돌아오게 되면 십일조를 드리겠노라고 하지만 백부장은 그렇게 하지 않고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 8:9)

예수님께서, 세상에, 엄지 척! 이만한 믿음을 처음 봤다고. 이게 뭐냐 하면, 제가 오늘 설교 처음에 한 거예요. 세상을 개무시하는 겁니다. “인간들아, 감히 너희들이 나를 평가하지 마.” 나는 저분하고 일대 일로 대응하고 있는 거예요. 저분만, 주님만 쳐다보고 사는 거예요.

내가 언제 너희들 평가에 호응해주고 맞춰주는 그런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가득 찼어요. 그리스도의 성전입니다. 그리스도의 결실물이에요. 그리고 그 백부장에 대해서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면서 바로 그 백부장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천국의 주인 되시는 분이 직접 이야기했어요.

우리는 안 가봤으니까 천국을 모르잖아요. 그런데 천국의 주인 되시는 분이 “어떤 사람이 갑니까?” 할 때 “이런 사람이 간다.” “어떤 사람입니까?” “세상 개무시하는 사람,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 오직 주님에게 꽂혀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하는 사람.”

그런데 백부장이 군대 사표 냈습니까? 사표 낼 필요 없어요. 그러면 기도원에 가야 됩니까? 그럴 필요 없어요. 지금 자기가 있는 직장, 모든 가정이 주님이 만들어준 현장성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백부장의 이런 믿음 안에는 뭐가 삽입되어 있느냐? 여기서 야곱이 중요합니다.

백부장은 천국 가도록 이미 수시합격 했거든요. 수시합격 한 그 백부장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야곱이 들어 있어요. 놀랍게도 철없는 야곱이 들어 있습니다. 복의 근원이 된다는 축복을 야곱이 받았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공사를 시작하는 거예요. 지상의 하늘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공사를 시작하는데 공사의 그 현장이 야곱이에요.

그런데 야곱은 착각해서 벧엘이라는 이 장소가 하늘의 문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점차 뭘 느껴야 되느냐 하면, 장소가 문제가 아니고 본인의 인격체 자신이 움직이는 하나님의 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나중에는 그것을 본인이 알아요. 지금은 그걸 몰라요. 나중에 요셉이 등장할 때 비로소 알아요.

어쩔 수 없는 그 약속의 땅 벧엘을 버리고 애굽으로 양식 얻어 먹으로 갔을 그 때에 비로소 가나안 땅이냐, 애굽 땅이냐 하는 것이 별 문제가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하늘 문을 구성하는데, 완성하는데 있어서. 그러면 뭐가 핵심이냐 하면, 야곱 본인의 인격체 자체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공사, 작업이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의 아들에게 축복할 때 팔을 어긋맞게 한 거예요. 애들 둘 자리 바꿔서 팔을 나란히 축복할 수 있는데 굳이 팔을 어긋맞게 하는 것은, 내가 땅의 원리를 가지고 하늘의 원리를 알려고 했던 어리석음이 주님의 약속에 의해서 나는 드디어 땅에서 하늘로, 하늘에서 땅으로 바뀌어졌다는 이 축복을 이제는 대대로 이 요셉의 아들들에게도 전수하노라. 그래서 어긋맞게 한 겁니다.

이 땅에서 자기는 나그네 인생이고, 이 땅에서 살아온 것은 뭐냐? 육을 갖고 있는 인간이기에 모든 것이 착각이고, 모든 것이 어리석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을 훼방할 수밖에 없는 몸을 지니고 살아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언약은 이 어리석은 몸 안에다 놀라운 하나님의 원래의 뜻을, 공사판을 만들어서 거기에서 완성을 시킨 그 하나님의 언약만 찬송하리라, 주님의 작업만 찬송하리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야곱에게 남아 있는 일은 뭐냐 하면, 교체작업에 들어가는 거예요. 이러한 착각을 하는 야곱, 벧엘이라는 장소가 중요하고, 십일조를 드리겠다느니, 어쩌고 하는 그 착각을 교체하려면 야곱은 하나님에 의해서 죽어야 됩니다.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는데 야곱이 중첩된 거예요.

꿈, 하나님의 계시죠, 그 꿈이 역사가 되어서 지상에 하늘 문을 이룰 때 이 지상에서의 하늘의 요소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피 흘리고 죽임을 당하는 그곳이 바로 하늘의 문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늘의 문이 이 땅에 왔을 때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늘의 문 같으면 메카라고 해서 거룩한 하늘로 통하는 채널, 기지 같은 그런 것이 있어야 될 텐데 주님께서는 죽음을 유일하게 하늘의 문으로, 완성으로 만들어놓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어떤 인간도 하늘의 문에 들어갈 자격이 없음을 분명히 하는 이것이 하늘의 문에 담긴 취지의 완성이에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어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가 하나님나라의 정신으로서 영원토록 이어지게 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데 들어온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약속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피조물만 그 하늘나라의 문이 되고 그 문으로 들어갈 수가 있는 겁니다.

아무도 못 들어가는데 들어갔다. 따라서 이 사실을 오늘날 우리 안에 장착이 되고 우리 안에 들어있게 되면, 제가 아까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모든 이 세상 근심 걱정이라는 그것은 결국 예수님과 다른 원리로 살기 때문에 마귀로부터 계속해서 달라붙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와 다른 원리.

예수님은 이 땅에 죽으러 오셨잖아요. 죽으러 오셨거든요. 주님의 뜻은 뭐냐? 내가 죽으면 된다는 겁니다. 주기도문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 그 땅에서 이루어진 것, 다 이루었다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부활 때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에요.

부활되고 난 뒤에 약 올리듯이 “다 이루었다.” 이렇게 하지 않고 십자가에 죽을 때 다 이룬 거예요. 그러면 성도의 자유함이라든지, 대범함, 당당함이라 하는 것은 결국 뭐냐 하면, 그 죽음부터 시작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 죽음에 기초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쉽게 말씀드릴게요. 간단히 하면 이런 겁니다. 죽음이라 하는 것은 없어짐이거든요.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이 죽음이다. 그러면 애초부터 없었으면 좋을 뻔 했다 하잖아요. 욥도 그런 이야기했는데 애초부터 안 태어났으면 좋을 뻔 하지 않았느냐 하지만 주님께서 관심 두는 것은 네가 있느냐 없느냐에 관심 두는 것이 아니고 “너는 죽어야 해.”라는 그 사실이 중요한 거예요. “너는 죽어 마땅해.”가 중요한 거예요.

“죽어 마땅해.”를 실어 나르는, 그 죽음을 실어 나르는 운반체로서 ‘죽어 마땅해’를 실어 나르기 때문에 우리는 천국에서 살아야 될 이유가 생기는 겁니다. “주여, 저는 죽어 마땅합니다.”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죽어 마땅함, 야곱처럼 죽어 마땅함, 그 운반체가 야곱과 중첩되어 있는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야곱은 죽어야 되고 그 죽은 야곱을 살리기 위해서 야곱이 죽고 난 뒤에 새롭게 등장한 야곱, 이스라엘이 야곱을 운반하는 겁니다. 수레에 이동시키는 겁니다. 요새 운반하는 수레에 대해서 절실하게 느끼고 있어요. 레고 장난감이 있는데 외손녀하고 기차놀이 열심히 하고 있거든요. 기차놀이 하다보면 자꾸 짐을 싣는다고요.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내가 구원받으면 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지금 뭘 싣고 다니느냐를 보겠다는 거예요. 이게 하늘의 원리에요. 그런데 땅의 원리는 뭐냐 하면, 주객이 반대가 되어가지고 짐이나 뭔가를 실어 날라야 될 그 객차가 자기가 앞서서 “천당 보내 주세요. 저 죽어서 좋은데 가게 해주세요.”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야곱처럼.

이걸 레슬링 하듯이 뒤집기를 하면 안 되겠습니까? 이걸 뒤집기 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 따라오라고 안 합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네 죽음을 하나의 대상체로 보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네 죽음이 필요한 거예요. 내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나의 죽음이 필요한 거예요.

이걸 누가 알겠어요? 이게 성경에 나오니까 하는 말이 아닙니까? 다시 정리해 봅시다. 야곱은 자기가 지금 꿈을 봤어요. 야곱은 착각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꿈을 꿨다는 거예요. 아닙니다. 꿈이 야곱을 갖고 있어요. 분명히 오늘 본문 15절에 그게 나와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자기는 내가 꿈을 꿨다는 겁니다. 네가 꿈을 꾼 것이 아니고 그 꿈이 야곱을 이용한 거예요. 사용해서 하나의 공사발주를 한 겁니다. 움직이는 그 인격체에다가. 그러면 야곱은 뭘 보여주느냐 하면, 하늘나라갈 수 없는 인간의 그 면면들을 야곱은 다 보여줘요.

“이 장소에 다시 오겠습니다.” 하면서 그 장소가 중요하고, 앞자리에 앉아야 은혜 받는다는 그런 것처럼, 또 반복되는 것이 중요하고, “십일조 드리겠습니다.” 하는 내 행함이 중요하고. 야곱이 그런 식으로 형에게 안 지려고 싸웠던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이삭의 하나님입니다. 이삭의 하나님이 뭡니까? 죽음을 드러내는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언약은 이 땅에서는 죽음 외에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완성을 안보여주는 겁니다. 피 외에는 다른 언약이 없어요. 내 피와 내 살 외에는 다른 언약이 없는 겁니다.

믿는다는 것이 뭘 믿느냐? 우리가 보통 믿는다 하잖아요. 아까 제가 백부장 예를 들었습니다. 믿음이 있다는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완성한 그것, 그냥 쉽게 피라고 합시다, 피, 다 이루었다, 피, 십자가, 그것을 담을 그릇을 사용할 때 그 때 그릇 입장에서 ‘믿는다’ 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이 이야기 하면 다 이해될 거예요. 없는 것이 그냥 없어버리면, 없다, 없다, 그 ‘없다’로 끝나는 거예요. 그러나 그냥 ‘없다, 없다’가 아니라 ‘있었는데 죽었다가 없다.’가 되어버리면 그냥 애초부터 없었던 것 하고 지금 죽었다가 없어진 것과 차이가 뭐냐?

‘있었는데 죽었다’가 그게 새롭게 드러나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누가 앞장서서 보여주느냐 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로 다 보여준 거예요. 나 여기 아기로 태어났다. 두 살 되었다. 그리고 소년 때는 부모님과 같이 성전에 갔다. 그리고 거기서 논쟁을 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 죽었다! 실패네. 실패지요. 그런데 예수님 죽일 때 열 두 제자를 포함해서 아무도 안 믿었어요. 그러니까 오늘날 성령을 통해서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이 얼마나 귀하냐 이 말이지요. 세례요한이 대단하지만 세례요한보다 더 큰 이가 천국의 이 작은 자라는 말이지요.

여자에게서 난 사람 중에 세례요한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없지만 그 위대함은 신약의 작은 소자하고는 잽이 안 되는 거예요. 세례요한은 어디까지나 자기 몸의 있음 가지고 보였지만 신약의 백부장 같은 경우에는 생각도 못했는데 그냥 선물이 와버린 거예요. 백 프로 주님 것으로 충만해버린 겁니다.

그러니 남들의 믿음이 있다느니 없다느니, 하는 그런 평가에 놀아날 필요도 없고 “너나 잘하세요.” 하면 끝나는 문제에요. 내가 보여줄 것은 오직 십자가만 자랑한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나오는 그 말씀. 나는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리고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너희가 정말 영이 있다면 이거 하나는 기억해야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 필요 없다. 그리스도가 죽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 필요 없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헌금 얼마 해야 됩니까, 성찬식은 몇 분을 해야 되고, 일 년에 전도 몇 번 해야 되고, 가족을 위해서 중보기도는 해야 되는지, 그런 쓸데없는 질문 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야곱은 이 하나님의 꿈의 내용에 의해서 점차 죽어가게 됩니다. 결정적으로 공격을 누가 하느냐?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을 공격합니다.

야곱은 공사판이에요. 꿈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본래의 원리가 땅과 만났을 때에는 지지직, 하고 터지면서 죽음 외에는 어떤 것도 진짜로 하늘과 땅이 만난 사건은 아니다. 죽음사건만이 진짜 만남의 사건인데 지지직, 하고 방전이 일어나요. 그 죽음 사건, 그것은 장차오실 예수님께서 하늘의 모든 원리를 가지고 이 땅에 왔을 때 진짜 하나님, 진짜 천국의 문,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외에는 없습니다.

마가복음 1장 9, 10절에 보면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뭘 봐야 됩니까? 하늘이 찢어지고 갈라지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그동안 인간은 인간대로,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완전히 막혀 있다는 겁니다. 철벽처럼 아무도 천국에 갈 수 없었다는 거예요. 전부 다, 모든 인간이.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지심으로……, 변화산에서 초막 셋 지을 필요 없어요, 엘리야나 모세까지 대기상태에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은 언제 별세하십니까?”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주님은 언제 별세하십니까? 빨리 돌아가세요.” 왜냐하면 엘리야가 “나는 하늘의 문이 아닙니다.” 모세가 말합니다. “나도 하늘의 문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지요. “나는 하늘의 문이 아닙니다.” 천국은 철벽, 절대로 안 넣어줍니다. 아무도 갈 수가 없어요.

오직 예수님이 가셔서, 가시고 난 뒤에 예수님의 영이 임한 사람만 백부장처럼 거기에 가게 됩니다. 그 백부장의 특징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뿐이에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제 인생 없습니다. 주님의 인생이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움직이는 하늘의 문이라는 사실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부활하신 주님이 문이라는 것을 저희들이 온 몸으로 보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