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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창세기 28:20-22 / 야곱의 서원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28:20-22 / 야곱의 서원

정인순 2017. 11. 8. 23:03

 

 

야곱의 서원

 

음성               동영상


이근호
2017년 11월 8일               

 

본문 말씀: 창세기 28:20-22

(28:20)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28:21)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8: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야곱이 신나게 하나님에게 서원하고 헌신을 약속했다는 것은 자기 나름대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 확신은 바로, 하늘과 땅의 연결 채널이 야곱 자신의 몸을 통해서 확정되었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언약은 이제 야곱 본인의 인생으로 확고하게 되었다고 자신만만해 한 겁니다.

‘장소(벧엘)+인물(야곱)=언약의 확정’으로 이해한 겁니다. 이 하나님의 작업지침에 대해서 지상에 있는 야곱의 입장에서 자기 쪽에서 그 언약의 내용을 담을 형식만 제시하면 된다고 여겼던 겁니다. 그 형식이 바로 벧엘이라는 신성한 장소의 보존과 기억입니다. 곧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찾아올 때에 유일한 장소라고 벧엘이 최종 낙점을 보았다고 믿었습니다.

또 다른 형식은 야곱의 본인의 위상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창세기 14:18-20에 나오는 형식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곧 야곱은 본인을 ‘지극히 높은 제사장 멜기세덱’과 같은 일을 하는 자로 하나님께서 확정시켜 놓았다고 믿었던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제사장이란 존재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일한다는 사실이 이미 아브라함을 통해서 알고 있는 바입니다.

야곱의 입장에서 이로서 ‘형식+내용=언약 완성’이라는 원칙을 하나님께서 충실히 수행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모르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인간들이 산 채로 만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니까 언약의 내용을 담을 형식을 야곱이 제시했다고 해서 야곱을 살려주시는 분이 아니신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죽음’, 그것도 ‘언약에 의한 죽음’ 안에서만 인간을 만나십니다. 바로 이런 작업을 위해 사다리를 통해 무수히 많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명대로 분주하고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는 언약 성취에 필요한 영적 지형에 대해서 천사들이 동원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천사들이 조성하는 ‘영적 지평’을 밥상이라고 간주하면 야곱은 그 밥상 위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생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들이 말하는 인생이란 인간 본인이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천사들이 언약의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언약 작업에 참여하게 된 자들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도록 유도하게 되는 겁니다. 야곱은 비로 자기 딴에 위대한 제안을 했다고 자부하지만 언약의 완성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죄’라고 규정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육으로서의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죄’ 형태로 달라붙게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나간 죄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회수됩니다. 그 과정 속에서 인간의 죄의 실태가 최종적으로 다 밝혀집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복의 근원‘으로 삼으신 것은, 야곱을 통해서 ’죄의 극한까지‘ 나타내게 하려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 땅에 주시는 것은 ‘죄의 극한’을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은 죄를 모릅니다. 죄의 극한은 죄를 내보내신 하나님을 만나봐야 압니다. 무슨 용도로 죄를 사용하시는 지는 하나님을 만나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하여금 ‘죄의 극한’을 체험케 하십니다.

죄의 극한이 감지되는 순간은 바로 야곱이 직접 하나님을 만나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본인을 계속 살려내면서 하나님과 상관하겠다는 것은 있지도 않는 다른 신을 만들어 가지고 종교 오락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본인이 이왕 사는 것, 고통과 아픔없이 행복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예외없이 사람들은 남들로부터 위로받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스스로 해명이 안 되는 상처를 품고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처가 되는 그것만 치유가 된다면 모든 것이 원만할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언약을 보내어 죄를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취지를 방해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으로 하여금 몸 전체가 다 죄인 것을 알게 하는 기회를 줍니다. 천사들이 그런 식으로 야곱의 인생을 몰고 갑니다. 야곱이 ‘복의 근원’이 된 것은 곧 ‘죄의 근원’. 바로 그 곳이 곧 ‘복의 근원’됨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제안한 형식으로 그대로 언약의 틀로 사용하시되 정작 그 형식을 완성자는 따로 마지막 때에 예수님을 보내시어 완성시키십니다. 영원히 고정된 성전은 과연 누구시며. 십일조를 최종적으로 다 완수하신 영원한 제사장은 과연 누구신가를 알려 주십니다.

언약을 담는 형식을 죄라고 규정하시므로서 거기에 담길 언약의 내용은 ‘죽음’외에는 없습니다. 즉 ‘언약에 의한 죽음 체험’에 합류된 자만이 자신이 제안한 그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채택되지 않음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은, 인간들은 일체 언약의 일을 할 수 없는 자라고 확정을 내리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온 몸이 다 저주받을 몸으로 아버지으로부터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하물며 일반인들이야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야곱처럼 언약의 인도함을 받게 되면. 인간의 그 어떤 서원이나 맹세나 결심이나 헌신의 가치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헌신을 이용하십니다. 즉 인간들이 제안한 형식 자체를 언약의 내용을 받아주어서 그 형식의 붕괴를 통해서 언약의 내용성을 드러냅니다. 구원받겠다는 의지로 인간이 내놓는 모든 헌신과 서원을 거부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언약의 고정성과 영원한 확정성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파트너로 삼아 성취시킨 것이 아닙니다.

극한의 죄가 있는 곳에서만 최종 의가 드러납니다. 죄도 없으면 의도 없습니다. 주님 자신이 스스로 궁극적 죄인으로 아버지 앞에 서셨기에 그 일에 죽은 자로 참여된 자가 바로 ‘주님과 관계 속에 놓여있는’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에서 우리 인간의 보편적인 극한의 죄를 발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13강-창 28장 20-22절(야곱의 서원)1711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8장 20-22절입니다. 구약성경 41페이지입니다.
 
창 28:20-22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야곱이 이러한 선언을 일방적으로 하는 것은 우리 보기에 참 속 시원합니다. 야곱은 이미 자기가 챙길 것은 챙겼다는 것이지요. 세상의 미래까지 본인은 완벽하게 파악이 되었다고 자부합니다. 마음껏 하나님에게 자기를 던져 넣어도 자기는 손해 볼 것이 없고 특별히 야곱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찾아왔을 때 가장 근본적으로 무슨 걱정이 날라 가버렸는가?

자기 인생 실수할 수가 없다는 것, 자기 인생을 잘못되게, 틀어지게 살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찾아왔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에게 시원하게 자기가 헌신하면 되는 거지요. 그 점에 대해서 야곱은 굉장히 자신만만한 겁니다. 그 헌신을 26절에서는 “야곱이 서원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미 모든 것이 알려진 그 마당에, 모든 일이 내막이 완전히 드러난 마당에 주저할 것이 없어요. 거기에 자기 몸을 그냥 던지면 되는 겁니다. 야곱이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자신을 던졌는데 이것이 야곱의 큰 오류라는 사실은 나중에 밝혀집니다. 야곱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17절에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것은 확고하게, 하나님과 지상이 통하는 유일한 그 채널이 확고하게 영원히 고정되었다는 겁니다. 영원히 고정되었다는 말은 더 말을 이어가게 되면, 최종성이 이미 자기에게 밝혀진 입장, 마지막 궁극성, 최후의 마지막을 이미 확고하게 자기가 잡았다는 겁니다. 잡았기 때문에 자기 인생에 대해서 뭘 해도 실수할 리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겁나는 것도 없고요. 그런데 야곱이 시작부터 뭔가 모르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문을 통해서……, 본문에는 하나님의 사자라고 되어있는데 사실은 복수개념으로 천사들이 내려오고 하나님이 오실 때 야곱이라는 나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자기가 죽지 아니하면 못 만난다는 사실을 생각지도 못한 겁니다.

나 살아 있고 하나님이 살아계실 테니 살아 있는 두 주체가 만난다고 생각한 겁니다. 죽어야 만날 수 있는 분을 야곱은 내가 안 죽고도 만날 수 있다고 여긴 겁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늘의 문으로 지정을 해줬다는 말은,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방식으로 나를 죽인다는 그 뜻으로 생각해야 되는데, 하나님이 오게 되면 내가 복의 근원이니까 하나님이 나를 잘 봐서 하나님이 나를 살려줄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이것은 아버지 이삭을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잡을 때 이삭이 제물이 되어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야곱은 깊이 있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야곱의 생각이 이렇게 자신만만하고, 약간의 건방을 떤다고나 할까요, 자신감이 충만한 그 결과가 어떤 결과였느냐?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약속,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 약속, 언약을 가지고 오게 되면 왔을 때 그 형식은 야곱인 자기가 그 형식을 만들어드리겠습니다, 하는 제안을 먼저 했어요.

그게 서원의 내용입니다. 그 형식이 뭐냐 하면, 22절에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라는 형식 안에다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의 약속을 제가 담아내겠습니다, 그렇게 된 겁니다.

형식은 야곱 본인이 만들고 안의 내용은 하나님이 채우면 죽이 잘 맞는 이야기라 그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 그것 때문에 절 찾아왔잖아요. 하나님은 이 땅에 하늘문을 여셔서 꿈에 나에게 찾아온다고 언질을 주신 것은 그 오신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을 이제는 우발성이 아니고, 그때그때가 아니라, 한 장소에서 확고하게 덥석 붙잡을 수 있도록 영원한 고정성을 확보한다면, 그 고정성을 확보했다는 그것을 다른 사람이 알아볼 수 있는 형식에 대해서는 제가 만들어드리겠습니다.”라는 제안을 야곱이 한 거예요.

아주 객기가 보통 객기가 아니지요. 그런데 지금 이 야곱의 오해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언약의 내용이 오게 되면 그것은 지상에 있는 모든 형식을 전부 파괴시켜 버립니다. 부숴버려요. 이 지상의 모든 형식을. 왜냐하면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언약의 형식은 이제 신약시대에서는 알 수 있습니다. 형식 없는 형식인데 그것은 죽음이에요.

“하나님, 이 정도 하면 주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인간은 서슴없이 내 쪽에서 형식을 제시하기 마련이에요. 왜냐하면 형식을 제공하면서 나도 같이 살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안 죽을 수 있기 때문에. 형식을 제공한 쪽을 죽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이렇게 모시겠습니다.” 하는 그 나를 하나님이 설마 죽일 리가 없다는 거예요.

왜? 내용은 형식이 없으면 담을 수가 없기 때문에. 더 알기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언약은 야곱이라는 이 몸, 이 몸이라는 형식에다가 담았고 그래서 몸을 갖고 있는 야곱은 뭐냐? 언약의 지상 관리인으로서 지상의 언약을 관리하는데 그냥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최종성과 영원한 고정성을 확보한, 유일하게 그 정보를 알고 있는 내가 그 형식을 제공하면 그 형식에다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 아브라함언약, 이삭언약을 담으시면 되잖아요, 라는 제안을 한 겁니다.

아주 야곱이 신이 났어요. 형식이 이 땅에 통하지 않는다는 이 말은, 끊임없이 교회 내에, 또는 성경말씀 안에서 찾을 수가 있어요. 예수님께서 46년 만에 지은 성전을 다 헐어버리라고 했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다 형식이고 또 예수님께서 결정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도록 기성정치권에 빌미를 준 이유가 성전에서 난동을 부려서 그래요.

거기에 도저히 그들이 못 참아서 그렇게 한 겁니다. 그리고 더 재미있는 것은 마리아, 마르다 가정이 있습니다. 그 집 오빠가 나사로인데 그 세 남매가 얼마나 예수님을 잘 섬겼겠습니까? 나름대로의 형식이 이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형식에 대해서 오빠 나사로를 죽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자기 가정에 모셔서 정성껏 대접하는 그 형식조차 주님을 온전히 담아낼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야곱이 서원하기 전에 왜 미리 언질을 주지 않았는가? 여기서 야곱의 객기, 야곱의 큰 소리 치는 것, 야곱의 자신만만함, 이것은 모든 인류에 대한 대표성을 띄고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실 때 너무 신이 나서 “제가 아낌없이 하나님 앞에 서원하고 헌신하겠나이다.”라는 인간들의 본성 속에는 하나님도 산채로 오시고 나도 하나님 앞에서 산채로, 지금 이대로 만나겠다는 겁니다.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지킬과 하이드>라는 오페라에 나오거든요,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나만의 꿈 나만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이 순간. 야곱은 본인이 살아 있다는 것을 토대로 해서 이 살아 있는 나를 하나님께서 인증을 해줬으니까 인증을 해 준 그 순간, 지금 여기, 내가 살아 있는 이 순간 하나님과 악수 먹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펼치는데 좋은 일 해 봅시다, 이렇게 나간 거예요.

그러면 야곱이 하나님과 좋은 일 하기 위해서 자기 쪽에서 형식을 제공하고 내용은 하나님 쪽에서 제시하게 되면 짝짜꿍이 잘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야곱이 제시한 형식은 어디서 가져왔는가를 보게 되면, 21, 22절에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라고 한 이것은 성전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모시는 건물이에요. 하나님을 모시는 구조물이거든요. 돌에다 기름 발라서 제사하면 그 자리, 하나님께서 다른데 가지 않아요, 꼭 그 자리에서 인간을 만날 것입니다, 라고 한 거예요. 성전이라 하는 것은 한 장소로 최종적으로 고정된 것입니다. 만남의 장소가 영원히 확고한 거예요.

그 다음에 문제가 뭐냐 하면, 두 번째가 22절에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했는데 생각을 해봐야 돼요. 지금 야곱이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는데 십분의 일을 누구한테 드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야곱은 지금 십분의 일을 바칠 상대가 없어요. 결국 이 말은 뭐냐? 창세기 35장에 보면 야곱이 벧엘에 와서 자식들 앞에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벧엘이라고 이름합니다.

14절에 “야곱이 하나님의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라고 되어 있거든요. 이걸 봐서 야곱은 본인을 제사장으로 여기는 겁니다. “제가 하늘과 땅을 통하는 중개인이 되겠습니다.”라고 한 거예요.

야곱이 자기가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겠다는 그 제안을 함으로서 영원히 야곱 본인을 하나님의 모든 언약, 약속을 독점하는 유일하고 확고한, 그것도 최종적으로 확고한 것으로 자기의 육신을 제공하고 하나님은 그 육신을 가지고 제사장 삼아서 하나님의 언약이 펼쳐지도록 해보겠다는 겁니다.

야곱이 지금 놓친 것이 하나 있어요. 그게 뭐냐? 사닥다리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그 자체를 지금 놓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을 인간하고는 이야기를 안 합니다. 인간하고는 거래도 안하고 흥정도 안하고 의논도 하지 않습니다. 왜? 이미 죽을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일을 해도 천사 앞장세워서 하나님이 직접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이 직접 나서서 성취시킵니다. 이게 신약에 나오거든요. 그러면 이 천사들이 와서 뭘 하는가? 아브라함 언약, 이삭 언약, 또는 야곱에게 준 언약대로 이 지형을 바꿔요. 지형, 또는 지평을 바꾼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게 무슨 이야기냐? 밥상을 차려놓고 거기에 야곱을 하나의 생선으로 놔두게 되면 천사들이 밥상을 흔들어버려요.

흔들어버리면 그 밥상위에서 이리 떼구르르 굴렀다가 저리 굴렀다가 정신을 못 차리는 겁니다. 그런데 야곱은 천사가 언약대로 자기의 인생길을 지형을 바꾼다, 모든 환경을 새롭게 언약에 맞도록 바꾼다는 생각을 감히 못하고 내 인생을 하나님께 관여하는 줄로 생각하는 거예요. 오늘날 은혜 받았다는 인간하고 똑같은 겁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를 통해서 대표적으로 인간이 갖고 있는 죄의 극단, 극한의 죄는 무엇인가, 그 죄를 대표적으로 끄집어내기 위해서 은혜를 줬는데 인간들은 은혜 준 것을 가지고 동업하는 줄로 알고 있는 거예요. “이제 하나님께서 내가 어디를 가든지 지켜 주옵소 서.”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하는 이야기하고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이게 일종의 헌신이고 서원이거든요.

천주교 신부들 신부 될 때 땅바닥에, 시멘트바닥에 십자가의 모양새로 엎어지고 그 뒤에서는 그 신부의 가족들이 막 울고 그래요. ‘내 아들 장가는 다 갔다.’ 그래가지고 울고불고. 장가 못간 다고 울면 안 되잖아요. 내 아들 주께 바쳐서 감격스러워서 운다고 남들에게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아이고, 내 아들 버려놓았다. 장가도 못가고 집안 제사는 누가 모시나.’ 그렇게 하겠지요.

어쨌든 간에 이게 서원이고 이제 하나님께서 나를 찾으시고, 나같이 필요한 인재니까 주께서 불러서 사용했다는 겁니다. 내가 보면 참 가관이에요, 가관. 야곱은 자기가 그렇게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 되는 것과 하나님의 제사장 되겠다는 그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었느냐 하면, 창세기 14장 18절에서 얻었습니다.

창세기 14장 18절에는 아브라함이라는 자기 할아버지하고 멜기세덱이 만나는데 멜기세덱이 뭐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제사장이에요. 지극히 높으신 분이니까 야곱이 생각하기를 사다리를 설정하신 그 지극히 높으신 분, 그게 멜기세덱이라면 그 멜기세덱에게 알려줬던 그 원칙을 하나님께서 이제 야곱 나에게 확고히 박아버렸다고 아주 신바람이 난 거예요.

내가 지극히 높은 거니까, 다시 말해서 나는 하나님과 땅을 통하는 유일한 중보자니까 이제는 “하나님이여, 제가 하나님 앞에 십일조 드리겠습니다.” 십일조라는 말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창세기 14장에, 아브라함이 지극히 높으신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기원이 된 거예요.

그런데 야곱은 십일조를 아브라함처럼 드리면서도 십일조를 받는 제사장 본인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것은 아까 창세기 35장을 통해서 말씀 드렸지요. 자기가 유일하게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인데 자기 말고 누가 또 자기보다 높은 제사장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계시했던 아브라함과 멜기세덱과의 관계가 이제는 야곱 본인 대에 와서 확고하게 고정되고 정착되었다고 야곱은 그렇게 믿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의 언약대로 천사가 야곱의 지형을 바꿔버리면 야곱은 떼구르르 굴러서 ‘어? 내 몸은 고정되어 있는데? 나는 영원한 하나님의 복의 근원인데?’ 이런 소리 하다가 좌로 굴러 세우고, 우로 굴러 세우고, 엉망진창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어지러워요. 막 토하고.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런 계시를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이 들어갈 자리를 못정해서 야곱을 불러낸 것이 아니고, 야곱을 특별히 사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의 자리를 어떻게 마련하느냐? 야곱은 (하나님의 장소, 벧엘이라는 장소 + 자기라는 인물, 장소 + 인물 = 하늘의 문, 언약의 정착) 이런 공식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이 아니고 언약은 어디에 정착되느냐? 언약은 이 땅에 죄가 극대화되는 그 지점에다 하나님의 언약이 보이게 되면 하늘의 문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뭐가 나오는가 하면, 죄가 나와요.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그 언약, 언약으로부터 나오는 그 죄, 하나님께서 죄를 뿌려놓고 그것을 회수를 하시는 겁니다.

파리 잡을 때 붙이는 끈끈이 있지요. 오전에 붙여놓고 오후에 보면 그 끈끈이에 새까맣게 파리가 붙어 있잖아요. 주께서는 죄를 죄다 긁어내는 끈끈이를 하나님의 언약의 이름으로 이 땅에 던져놓고 그걸 돌돌 말아서 회수를 해버리면 인간의 죄의 극한까지 회수가 되는 겁니다. 그 회수가 되는 그 지점이 바로 유일하게 하나님의 생명과 의가 나오는 지점이에요.

죄가 없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찾을 수가 없어요. 죄가 없으면 의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죄를 긁어내되 죄의 극한까지 가야 돼요. 그 죄의 극한에 누구를 보낼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찾아와서 야곱으로 하여금 인류를 대표해서 죄의 극한까지 보게 하시는 겁니다. 체험하게 하시는 거예요.

야곱이 해야 될 남은 일은 천사가 와서 보조해서 밥상을 흔들어대게 되면 떼구르르 구르면서 야곱은 ‘어? 내가 복의 근원인데 내 인생이 왜 이렇게 어지럽지? 왜 내 뜻대로 안되지?’ 하다가 누구 앞에 와야 되느냐 하면, 결국은 죽어서야 만나는 그분을 산채로 하나님의 사자와 얍복강가에서 만나게 되는 겁니다.

만났을 그 때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언약을 주신 이유에 대해서 비로소 압니다. 유일하게 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유일하게 죄의 극한까지 체험한 자로 만납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은혜로 주지 아니하면 우리는 죄의 극한을 몰라요.

우리는 기껏 내가 선하기 위해서 ‘이것은 죄, 이것은 의’ 그렇게 해서 상식선에서 알고 있는 죄를 끌어 모아서 죄라고 알지 신약적으로 하면 십자가지신 주님과 직접 맞닥뜨리지 아니하면 우리는 아직도 “회개했는데 왜 일이 꼬입니까?” 구시렁구시렁, 계속해서 구시렁거릴 것이 남아 있는 겁니다.

구시렁거릴 것이 남아 있다는 말은 어떤 오해를 갖고 있느냐 하면, 사실은 모든 인간은 이상스럽게 공통점이 뭐냐 하면, 자꾸 남에게 위로 받으려고 해요. 23개월 애부터 시작해서 치매 걸린 노인까지 자꾸 뭔가 옆에서 외롭지 않게, 친근하게 위로해줬으면 좋겠다, 하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태어나요. 그런데 상처가 뭔지를 대부분 사람들이 몰라요. 상처가 있기에 위로를 받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상처가 왜 생겼는지, 그 상처가 뭔지, 그 상처가 왜 지워지지 않는지. 본인이 상처 있음을 알고 아무리 기쁜 순간이라도 며칠 못가요. 며칠 지나면 갑자기 기쁜 만큼 허무와 허탈이 찾아오는 이유에 대해서 몰라요.

애가 공부를 잘하고, 수시에 합격하고, 축하, 축하, 하는데 그런 위로가 결국 몇 시간 며칠을 못 간다니까요. 왜 나는 태어날 때부터 상처가 있고 가슴에 아픔이 있고 그 아픔은 도대체 누군가로부터 일시적으로나마 위로를 받아야 되는 상처를 왜 지니고 있는지. 이게 없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지요. 모든 사람이 다 그래요. 모든 사람이 다 성냥팔이 소녀입니다.

뭔가 외롭고 쓸쓸해요. 가질 대로 가졌고 배울 만큼 배웠는데 이 허전함은 해석이 안돼요. 납득도 안 되고 이유도 몰라요.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 옵니다.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힐링이라 하는데 힐링은 커녕 킬링해버려야 돼요.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오해한 것이 그겁니다. 그 상처만 낫게 하면 다른 것은 온전하니까 별 탈이 없을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상처가 그 사람을 낫게 합니다. 구원시켜 줍니다.

상처가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나올 수가 있어요. 그 상처 빼놓고 주변이 다 죄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상처는 아픔인데 그 상처, 아픈 그것이 당연한 거예요.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아픈 것은 당연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안 아픈 대부분의 분야가 나답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난 늘 웃어야 되고, 난 늘 즐거워야 되고, 난 늘 기뻐해야 정상인데 그 놈의 육신의 가시처럼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와서, 그것만 좀 해결해주면 하나님 믿지 말라고 해도 믿겠다는 거예요. 지금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상처를 냅니다. 다른 사람보다도 야곱에게 주는 이유는 야곱이 복의 샘물이기 때문에, 복의 우물이기 때문에, 복의 근원이기 때문에.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죄의 극단, 최종적인 죄, 상처의 극단, 마지막 상처는 왜 일어났는가? 왜 상처는 있어야 되는가? 인간은 날 때부터 왜 허전한가? 왜 자꾸 위로해줘도 또 위로해야 되고, 사랑해줘도 사랑받기를 또 원하는가? 쾌락을 즐겨도 또 쾌락을 원하고, 많이 가져도 또 욕심내고. 이멜다처럼 구두가 수백켤레가 되어도 또 구두 사러 나가는 중독자처럼. 인간은 해답도 모르고 왜 그런가?

그것은 언약이 와 닿은 야곱 외에는 다른 사람은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야곱에게 언약이 왔다는 것은 언약하고 흥정하고 동업하기 위해서 온 게 아니에요. 인류를 대표해서 인간의 내막을 극한까지 다 파헤치는 거예요. 야곱이라는 이름이 누구의 이름인가하면, 예수님 이름입니다. 왜?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고 이스라엘은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에.

야곱은 지금 예수님의 기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야곱의 상처는 어떻게 하느냐? 방법은 간단해요. 야곱으로 하여금 야곱이 갖고 있던 위세와 서원, 헌신한 것, 그것을 하나님께서 형식으로 받습니다. 야곱이 생각했던 그것, 십일조 드리겠나이다, 그리고 이곳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겠습니다, 철딱서니 없이 자기 잘났다고 내뱉은 그 형식, 틀을 다치지 않고 언약의 내용으로 그대로 가져와버립니다.

그대로 가져와놓고 그 형태에 맞추어서 야곱과 중첩되어 있던 오실 메시아를 그 형틀에 맞춰서, 야곱이 이루지 못한 그 틀의 완성, 그 형식에 맞는 내용을 독생자 자기 아들을 보내서 그대로 수용을 하는데 그 방식이 뭐냐? 상처가 있는 그것을 전체로 확대시켜 버려요.

보통 상처라 하는 것은 평소에 웃다가 혼자 있으면 외롭잖아요. 그것은 일 바쁘면 또 잊어버린다고요. 하나님께서는 작은 암세포를 온 전신에 퍼트려 버려요. 한 군데가 상처가 났다, 혹은 고장 났다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부분이 아픈 것이 아니라, 몸 전체가 안 아픈 곳이 없이 다 썩고 오염되었고 다 하나님의 언약을 훼방하는 하나님의 원수 된 모습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야곱의 몸을 가지고 확산을 시켜 버립니다.

확산시키기 위해서 돕는 자들이 누구냐? 천사들이 도와줍니다. 천사들이 흔들기에 들어가요. 흔들기에 들어가면 처음에 요만하다고 생각한 상처가 인생에 멀미가 나도록 흔들든지 안 그러면 타이타닉처럼 침몰해 버리면 그 때부터 하나님 앞에 서원했습니다, 헌신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는 입바른 소리가 다 날라 가버리고 “주여, 왜 이러십니까? 제가 뭘 남보다 못했다고 이렇게 심하게 흔들어대십니까?”

그런 고백을 하는 사람이 욥이에요.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이 또 요나입니다. “저를 왜 죽이십니까? 저를 왜 물에 빠트리는 겁니까?” 시키는 대로 한 선지자인데. 욥도 마찬가지지요. 흔들면 흔들수록 안의 암세포가 점점 더 작은데서 온 천지에 다 퍼져버립니다. 퍼져버리면 내 선악체제에서 얼마는 잘했고 얼마는 못한 것이 아니고 잘한 구석은 전무, 전혀 없다는 것, 온 전체가 하나님의 저주의 덩어리로 완전히 뒤집어씌우는 겁니다.

요것,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님은 어느 한군데 저주를 비켜간 곳이 없어요. 거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주님, 내가 딴 것은 잘했지만 이것은 못했지요? 이 못한 부분만 용서해”달라고 자기 관리, 자기체크에 나서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모습이 아니에요. 자기 몸 전체 다가 주 앞에 저주받을 몸으로서, 죄된 몸으로서 제시되었습니다. 그만큼 인간들은 죄에 대해서 모르고 그만큼 주님은 죄의 극한을 알아요. 마지막 때를 압니다. 하나님께서 끈끈이, 언약이라는 끈끈이를 세상에 뻗어나가게 해서 세상의 모든 죄를 다시 말아버리면 회수가 되지요.

회수가 되면 나오는 결론, 마지막 최종 종착점은 뭐냐 하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문이 될 수 없고 그 누구도 제사장 될 수 없고, 그 누구도 구원받을 자 없다는 것이 확정되어 버려요. 그 확정되면 그 확정된 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의를 다시 쫙 펴버리면 그동안 하나님의 언약으로 관계 맺었던 야곱과 이삭과 아브라함은 의의 참여자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의인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연합이라고 해요. 주의 일에 말려들어갔다. 그래서 그 사람은 의인으로서 천국 갑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살리시는 하나님, 이삭을 살리시는 하나님, 야곱을 살리시는 하나님이 아니고, 아브라함에게 찾아간 그 하나님이 하나님이고, 이삭에게 찾아간 하나님이 그 하나님이고, 야곱에게 찾아간 하나님이 그 하나님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보고 싶으냐? 아브라함을 보아라. 이삭을 보아라. 야곱을 보아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라. 예수님이 말씀하기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다른 하나님은 없습니다. 온통 저주받으시고 그 저주를 십자가에서 그냥 받으시는 그 하나님 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들이대시는 것은, 모든 인간이 야곱 같은 허세, 야곱같이 하나님의 언약을 훼방하고 있음을, 그게 바로 죄인 것을……, 서원했습니다, 헌신했습니다, 그게 바로 죄거든요.

그 허세와 허풍, 하나님과 내가 동업해서 뭘 하겠다는 것, 이게 문제였습니다. 야곱은 언약이 들어 있어서 언약대로 움직이는 존재, 쉽게 말해서 언약의 벌레, 언약의 지렁이, 지렁이인데 그 안에 인공지능 들어 있는 것 같아요. 지렁이인데 언약에 의해서 꿈틀거려야 할 때는 꿈틀거려야 되고, 천사와 씨름할 때는 씨름 할 수밖에 없고. 이것은 인공지능처럼 언약이 자기를 조종하는데 본인도 얼마나 자기욕심대로 살고 싶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용납이 되지를 않고 허락이 되지를 않습니다. 이런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했다. 이것을 세례라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연합을 세례라고 하거든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은 그 사람 속에서 극한의 죄를 보이면서 마지막 최종적인 의를 동반해서 세상에 소개하는 기능, 이것이 모든 공통된 언약의 사람, 성도의 공통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허풍도 만만치 않고 주님의 은혜 받았으니까 보답한다는 식으로 오지랖 펴면서 잘못된 신앙으로 주님 앞에 내세울 것 내세운다고 우겼습니다. 주여, 헌금했습니다, 봉사했습니다, 희생했습니다, 섬겼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 자체가 죄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