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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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2017년 10월 18일
본문 말씀: 창세기 27:46-28:9
(27:46)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을 인하여 나의 생명을 싫어하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면 나의 생명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28:1)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부탁하여 가로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고
(28:2)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너의 외조부 브두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너의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
(28:3)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하사 너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28:4)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 주사 너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너의 우거하는 땅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28:5) 이에 이삭이 야곱을 보내었더니 밧단아람으로 가서 라반에게 이르렀으니 라반은 아람 사람 브두엘의 아들이요 야곱과 에서의 어미 리브가의 오라비더라
(28:6) 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취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라 하였고
(28:7) 또 야곱이 부모의 명을 좇아 밧단아람으로 갔으며
(28:8)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 아비 이삭을 기쁘게 못하는지라
(28:9)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취하였더라
일상의 가정사에 하나님께서 친히 관여하게 되면, 흔히 말하는 행복한 가정생활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정의 이상형(理想型)이 깨어집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고대하는 규격화된 삶을 파기시켜 버립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단절’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절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이 지상에 두 개의 상이한 현실관이 있어야 합니다. 이 현실관을 저는 frame프레임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프레임이란 영화를 촬영할 때, 카메라 렌즈가 차지하는 범위를 말합니다. 혹은 뼈대, 골조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자건거 뼈대, 자동차 뼈대에 대해서 프레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그림의 액자, 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이 그림답게 되려면 바다 물 위나 거대한 모래사장에 그릴 수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바람 불면 다 사라집니다. 하지만 미술관에 전시되려면 규격이 갖춘 틀 속에 제한되게 그림이 그 안에 놓여지게 됩니다. 어쨌든 모든 이 세상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자연적으로 세상을 보는 프레임이 구성되기 마련입니다.
그 프레임 안에서 세상을 살면서 새로이 경험한 것은 액자 안에 그림에 추가로 덧칠하는 것처럼 보다 화려하게 될 수는 있지만 그 틀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러고서는 그 내부에 ‘단절’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이 지상과 완벽하게 단절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단절성을 이 세상에 표현해내게 하는 방식이 바로 ‘언약’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죽음 태에서 자식을 낳게 했습니다. 바로 이런 게 단절입니다. 인간에서 시도하는 구원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봉쇄하고 차단하는 겁니다. 끊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 공통점이 없습니다. 이런 언약을 앞장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야곱의 아내 찾기에 개입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장치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이라는 남자와 아내라는 여자를 만나고 해주고 그 둘 사이에 명주실 하나로 연결시켜 보는 겁니다.
참으로 세상적으로 생각해서 둘이 한 마음이 되어, 같은 마음이 된다면 이 둘은 같은 속도와 같은 거리를 유지하면서 부부생활을 하기에 명주실은 끊어지지 않을 겁니다. 마치 사이좋게 춤이 같이 추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결혼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남자, 곧 야곱쪽이 짊어지고 있는 게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입니다.
반면에 여자쪽은 그냥 육적인 생활을 하고 온 여자입니다. 즉 남자인 야곱은 프레임 2중으로 되어 있습니다. 두 개입니다. 반면에 아내되는 쪽은 프레임이 하나입니다. 요한복음 3:31-32에 보면,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프레임이 두 개입니다. 하늘도 알고 땅도 아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의 운명이 이러합니다. 그러니 야곱과 아내의 관계를 잇는 명주실은 끊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각자 존재하는 상황이 다른 겁니다. 그렇다면 아내들이 회개해서 야곱의 수긍하고 받아들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식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도리어 반대입니다. 야곱의 두 개의 프레임 중에서 육적인 프레임을 아내쪽에서 몽땅 인수받습니다. 그렇게 해서 마치 야곱이 형 에서와 치열하게 싸우는 것처럼 이 두 아내도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웁니다.
야곱의 이러한 사정과는 반대로 에서는 평범한 아내와 혼인하게 됩니다. 즉 하나의 육적인 프레임을 가진 에서나 역시 하나의 프레임을 가진 여자와 결혼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그 자식은 하나의 프레임을 지닌 자식이 됩니다. 창세기 3:15에 의하면 이 자식은 ‘여자의 자손’이 아니라 에서라는 ‘남자의 자식’이 됩니다.
야곱의 아내가 둘이 되어야 하는 것은 마치 아브라함에게 아내가 둘이 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가 둘이 되기에 이를 통해서 ‘두 개의 상반된 언약 계열’이 이 지상에 등장하는 겁니다.(갈 4:24)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내 찾기에 관여하신 이유는, ‘남자의 자식’이 아니라 ‘여자의 자식’으로 역사 속에 등장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여자의 후손’이 나오는 원리는 창세기 4:1에 나옵니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이 본문은 마치 하와가 남편하고 동침해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자식을 얻은 것으로 되어있지만 실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와의 몸을 통해 ‘여자의 자식’을 낳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식, 곧 ‘여자의 자손’을 낳는데 보조 역활이 아니라 도리어 여자가 보조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여자의 후손’은 흔한 인간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사람이 되는 인물’입니다. 야곱의 두 아내는 경쟁적으로 자식을 낳게 되는데 여기에 야곱은 손도 쓸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여인들의 태를 열어주어야 자식이 생산되기 때문입니다. 마리 아브라함에게 사라와 같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진정으로 아내로 여기고 사랑했던 라헬이 죽지 말아야 할 나이인대로 불구하고 죽게 됩니다. 그것이 창세기 35:17-18에 나옵니다.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라헬은 육적으로 생각해서 언니에게 사랑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 한탄스러워서 마지막으로 나은 자식이름을 ‘슬픔의 자식’으로 지었지만 야곱은 그것은 ‘오른손의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로 짓습니다. 이는 진정한 ‘여자의 후손’은 오로지 언약의 힘으로 등장되고 그 방식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즉 구원받아야 될 성도는 오직 언약완성자의 죽음 속에서만 탄생되고 그들만 천국갑니다. 이로서 성도의 삶의 중심은 죽음입니다. 죽음은 삶의 끄터머리에 달라붙은 현상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중심이었습니다. 이 ‘죽음’을 전도해야 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죽기 위하여 죽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10강-창 27장46절-28장9절(아내 찾기)1710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7장 46절-28장 9절입니다. 구약성경 40페이지입니다. 창 27:46-28:9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을 인하여 나의 생명을 싫어하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면 나의 생명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부탁하여 가로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고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너의 외조부 브두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너의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하사 너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 주사 너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너의 우거하는 땅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이삭이 야곱을 보내었더니 밧단아람으로 가서 라반에게 이르렀으니 라반은 아람 사람 브두엘의 아들이요 야곱과 에서의 어미 리브가의 오라비더라 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취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라 하였고 또 야곱이 부모의 명을 좇아 밧단아람으로 갔으며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 아비 이삭을 기쁘게 못하는지라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취하였더라.”
사람이 자기 아내를 찾는 작업에서 하나님께서 관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관여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생각해놓은 자식을 생산하기 위함입니다. 그 자식은 약속의 자식, 또는 언약의 자식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언약이 없었으면 생겨날 수 없을 자식을 내가, 하나님이 관여함으로서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얻을 수 없는 언약의 자식을 이 땅에서 생산하게 번성하게 하겠다는 겁니다.
야곱이 아내 찾는 작업 이전에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의 부인을 찾는 작업에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개입했다는 것을 우리가 알잖아요. 그러면 자식을 낳는데 왜 아내가 결정적 요건이 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 됩니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부부, 혹은 결혼이라 하는 것은 남자 있고 여자 구해서 같이 붙어사는 거지요.
그러면 잠시 실험을 해 봅시다.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고, 가는 명주실로 양쪽을 연결해 보는 거예요. 각자 자기 집에서 살다가 새로운 가정을 꾸렸습니다. 명주실로 연결을 지읍시다. 그러면 부부생활 시작, 하면 이 남자와 여자 사이에 명주실이 끊어지겠는가, 유지되겠는가를 생각해 봐야 돼요.
생각이 같으면 이게 안 끊어질 거예요. 그런데 둘이 마음 맞는다고 가다가 보면 명주실이 끊어지지요. 끊어진다는 말은 남자 혼자 온 것이 아니고 여자 혼자 온 것이 아니에요. 여자가 처녀로 살던 그 환경이 여자가 등장하면서 같이 동반해서 거기에 첨부 되어 있고 남자도 마찬가지에요.
남자가 몸만 달랑 온 것이 아닙니다. 남자의 평소의 그 가정의 모든 상황이 같이 결부된 거예요.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그리고 야곱의 언약으로 뭉쳐진 야곱이 여기에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명주실로 부부가 되는 어떤 여인이 있다면, 물론 여자를 찾는 작업에서 아직 여자가 확정되지 않았는데, 그 여자는 전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과는 무관한 육적인 삶의 상황에서 살다가 육적 요소를 짊어지고 둘둘 감고 야곱을 만나는 거예요.
그러니 당연히 보조를 같이 할 수가 없어요. 댄스를 함께 출수가 없는 거예요. 박자가 안 맞는 겁니다. 시가는 시가대로 놀고 처갓집, 친정은 친정대로 노는 겁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하는 것이 아니고 두 개의 서로 다른 환경이 만나서 하나님의 언약자식을 배태해 내는 겁니다.
그런데 언약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줬거든요.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줬다는 말이지요. 아브라함이 자기 집안의 딸하고 결혼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 여인을 다른데서 데려왔잖아요. 물론 족보상 아브라함의 가문이고 친척입니다만 아브라함의 가정 내에 있는 여자는 아니잖아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식을 서로 환경이 다른데서 어떻게 이끌어내는가? 성경에서 이렇게 합니다. 의도적으로 그 명주실을 끊어버려요. “아브라함과 이삭의 가문이 보통 가문이 아니다. 복의 가문이야. 그러니 여인아, 네가 잘 모셔야 된다. 그리하면 네가 경건한 자식, 하나님의 언약의 자식, 천국 가는 자식을 만든다.”
우리 같으면 그렇게 나오겠는데 그렇게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 연결된 명주실을 끊어버립니다. 끊어버리는 이것을 가지고 단절이라고 해요. 끊어지거든요. 단절이 되어버리면 이것은 처음부터 육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 언약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내막이 완전히 폭로가 되는 겁니다.
언약이라고 해서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막 건져내는 것이 언약이 아니고 인간은 구제불능이다, 인간은 천국 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언약 없는 쪽에서 언약 있는 쪽으로 흡수 통합되는 것이 아닙니다. 잘 들으셔야 돼요. 언약 있는 쪽이나 없는 쪽이나 둘 다 그 가정 조건이 구비되는 것이 아니고 파기되어 버려요.
파기되면서 그 차이점, 그 단절의 경계선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요소가 하나님의 언약의 자식을 낳게 되어 있습니다. 초장부터 황당한 이야기처럼 되는데 이게 황당한 것이 아니기 위해서는 좀 더 친절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친절하게 하면 이해가 되실 거예요. 언약을 모르는 여자 쪽의 가정은 하나의 프레임을 가집니다.
거기에 비해서 야곱 쪽은 두 개의 프레임을 갖습니다. 프레임(frame)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영화촬영에서 나오는 용어입니다. 카메라 화면의 사각형을 프레임이라고 해요. 우리말로 번역하면 골조, 뼈대. 자전거프레임, 자동차프레임, 어떤 골조, 뼈대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저는 그림의 액자 쪽으로 프레임을 잡고 싶은데, 그 의미를 그렇게 주고 싶은데 왜냐하면, 아무리 좋은 그림이라도 경계선이 없으면 그림이 성립이 안돼요.
바닷물에다 걸 수가 없잖아요. 모래 위에다 그리면 파도치면 다 헛수고잖아요. 액자가 틀이 딱 잡혀 있어서 그 틀에 그림이 들어 있어야 전시장에 걸 수 있지 않습니까? 프레임이라는 말을 인간에게 쓰는 이유가, 모든 인간은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떤 골조, 뼈대가 갖춰져 있어요. 그 뼈대 안에서만, 프레임을 가지고서만 현실을 구성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모든 인간 그 한사람이 프레임을 하나씩 갖고 있습니다. 이게 육적인 사람들의 특징들이에요. 모든 인간의 특징이 그래요. 전부다 자기가 세상 보는 그 프레임, 틀이 딱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렇게 살아왔는데, 라는 거기서 짜인 프레임이 있어요. 그 바깥에서는 잘 몰라요.
만약에 여행을 간다면 프레임이 약간 넓어지겠지요. 넓어졌지만 기존의 것을 포기하지 않은 채 면적만 넓어질 뿐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가정은 프레임이 두개입니다. 중첩된 현실, 이중현실인데요. 이걸 전에 다중현실이라고 했는데요. 야곱 뒤에 이스라엘이 있거든요.
그리고 아브람 뒤에 아브라함이 있었고 사래 뒤에 사라가 있었어요. 이삭은 아예 프레임도 없고요. 죽음 뒤에서, 죽고 난 뒤에 다시 태어났으니까요. 요한복음 3장 3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땅에 속한 자는 땅의 것만 생각하는데, 땅의 프레임만 이야기하는데 하늘에서 온 나는 하늘의 프레임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늘의 프레임을 가지고 땅의 육신을 입었으니까 예수님의 프레임은 두 개가 되는 겁니다. 땅의 세계도 알고 하늘의 세계도 알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천국 갈 수 없어요. 두 개를 다 갖고 있어야 돼요. 거기에 비해서 예수님 당시의 세상 사람들은 프레임이 하나밖에 없어요.
땅에서 와서 그냥 면적만, 상식과 교양 넓히기에 바빴지, 그 프레임에 그대로 덧칠하고 물감을 빨간색, 노란색으로 칠할 뿐이지 그 틀 자체, 육의 틀에서는 못 벗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야곱의 프레임은 두 개고 누가 그의 아내로 채택될지는 몰라요. 육의 프레임은 단 하나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만나서 부부인데 이 부부가 정상일 수가 없어요. 댄스를 해도 박자가 안 맞아요. 명주실이 끊어진다고요. 끊어진다는 말을 강조하고 싶은데 이게 왜 중요한가 하면, 성도는 이 세상사는 것이 불편해야 됩니다. 모든 것이 규례에 맞으면 안돼요. 다른 사람들이 땅에서 사는 그것을 부러워해서도 안 되고 그것을 따라가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규격이 없어야 돼요. 그게 파기되어야 됩니다. 아마 주께서 파기시킬 거예요. “주여, 나는 이런 식으로 평범하게 살겠습니다.” 하는 그 프레임, 그 틀, 규격을 주께서는 용납, 용서하지 않고 깨버립니다. 그렇게 깨지면 어떻게 되느냐? 우리는 프레임이 하나밖에 없는데 하나밖에 없는 프레임이 깨지게 되면 우리 입에서 어떤 고백이 나오는가?
“주여, 저 어떻게 살아요?” 이렇게 되거든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요, 가 매일의 삶이 되어야 돼요. “저 이러다가 죽겠어요.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중구난방입니다. 그냥 평범하게 살면 안 되겠습니까? 왜 저에게 평범한 삶이 안 됩니까? 온 호작질을 다하고 왜 찢어버립니까?”
그게 또 다른 프레임을 만났기 때문에 찢어지는 거예요. 여러분 그것을 비정상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웬 떡이냐, 그렇게 생각해야 돼요. “이게 무슨 난리야?” 전부 다 멱살 잡고 흔드는 것 같아요. 쓸데없는 과거 프레임 쏟아낸다고 멱살 잡고 막 온 몸을 흔들어서 다 떨어지는 것 같아요.
그러면 우리는 옛 프레임이 버릇이 있어서 그 깨어진 조각 하나 들고, 옛날에는 이렇게 살았는데 깨져버렸으니까 그 깨진 조각을 원상복구해달라고 깨진 조각을 찾으면서 몸부림칩니다. “주님, 전에는 거울을 예쁘게 봤는데 거울이 다 금이 가고 깨져서 조각나버렸습니다. 내 분신 같은 조각을 어디서 다 찾습니까? 금식하고 헌금하고 기도할 테니까 옛날처럼 그 온전한 나로 원상회복 해”달라는 겁니다.
내 모습, 내가 그렸던, 내가 이상적으로 그렸던 내 모습, 그 제일 큰 조각을 들고 교회 와서 나머지 조각 맞춰달라고 금식기도 합니다. 어떤 분과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집사님 내부에 뭐가 있습니까?” 하니까 그 집사님이 자기에게 억울함이 있다는 거예요.
억울함이 있으면 교회 나와서 행패를 부리게 돼요. 아랫배에 물차는 것을 복수라 합니다. 개구리 배처럼 볼록하게 물이차서 튀어나와요. 그 물이 뭐냐? 억울함입니다. 그 억울함이 어디서 생기느냐 하면 결핍에서 생겨요. 내가 구상한 나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으니까 열심히 주 앞에 말씀 듣고 헌금하고 기도하고 봉사하는데 이게 계속 결핍된 것이 꾹꾹 눌리면서 내부에 물이 차는 거예요.
그래서 그랬어요. 십자가 끝이 뾰족하잖아요. 그거 가지고 복수 찬 배를 콕 쑤셔서 그 억울한 것을 빼내야 된다고요. 빼낸다는 것이 뭐냐 하면, 나도 죄인입니다, 그 이야기 하는 것인데 그런데 그분은 빼내지를 못하는 이유가, 억울한 사람은요, 죄인 되는 것을 싫어해요. 왜냐하면 내 인생을 망가트린 그에게 복수를 할 때 의인이 되어야 복수가 시원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내가 주님 말씀 듣고 죄인이라고 해버리면 저 사람에게 복수를 못하게 되고 복수를 못하게 되면 내 한 맺힌 것은 어디서 보상받습니까?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대로 십자가보고 내가 죄인인 것은 인정은 하겠는데, 머리로서, 지식으로서는 인정을 하겠는데 내 몸은 주님 십자가가 와 닿지 않고 주님이 그다지 좋아지지 않습니다.” 하는 거예요. 솔직하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데 참 감사하지요. 그래서 생각해 봤습니다. 도대체 그 잃어버린 결핍, 그 억울함, 그게 어디에 갔는가를 찾아보니까 예수님과 도마가 만날 때 예수님이 도마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 손가락가지고 ……, 도마가 육신입니다. 65억 모든 인간은 억울하고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교회 나와서 행패를 부리거든요.
인간들이 교회 나오는 이유가 행패부리기 위해서 나오고 있어요. 그 인간의 억울한 손가락이 있잖아요. 복수, 배에 물이 찬 그 손가락을 가지고 창자국에 집어넣어요. 그리고 못자국에 집어넣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억울함과 모든 파괴된, 깨져버린 유리조각들, 그게 어디에 있느냐 하면, 전부 다 예수님의 창자국 속에 들어갔고 못자국 속으로 들어가서 예수님 속에 다 들어갔어요.
그러면 우리의 억울함을 찾으려면 그 못자국속에 머리 집어넣고 창자국속에 머리 집어넣어서 예수 그 안에 들어와야지요. 들어와야 돼요. 들어오게 되면, 잠입하게 되면 우리는 졸지에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내가 복수하는 이상으로 얼마나 철저하게 복수하는가, 우리는 박수칠 일만 있고 할렐루야 찬양할 일만 남았어요.
왜 내가 복수합니까? 그러면 그것은 내가 주가 돼요. 이것은 천국이 아니라 내 나라 돼요. 그것은 지옥 가는 겁니다. 주께서 인간들이 복수하고 한 맺힌 것을 풀려고 하는 그것을 뻔히 다 압니다. 죄 지은 인간들을 모르겠어요? 주께서 인간 속에 왔는데. 그래서 그들의 그 원한과 복수를 주께서 대신 다 심판해주시는 거예요.
그것도 하자 없이, 너무 오버하지도 않고, 이에서 난 것은 이로 눈은 눈으로, 율법대로 정확하게. 그리고 그 보상은, 우리는 원상회복을 원하지만 주님은 원상회복정도가 아니고 죄지은 우리를 의인되게 만듭니다. 이것은 예상도 못한 축복이에요. 너무 과도한 복을 주십니다.
그게 어디 있느냐? 예수님의 창자국 속으로 들어가야 되고 못자국 속으로 들어가야 돼요. 들어가야 그 안에 이미 다 준비되어 있는 거예요. 왜 죄를 지었는데 우리가 의인됩니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들어오라고 했는데도 안 들어오고 자기 힘으로 원상회복한다고 반 죽여 놓고 “까불기만 해봐!” 한 다음에 “주여, 이제 속이 시원합니다. 이제 예수 믿으렵니다.”
자기가 복수를 해놓고 들어 가버리면 주께서는, 네가 복수를 했는데 예수님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필요 없는 나라에 우리가 왜 가지요? 가면 안 되지요. 인간의 두 개의 프레임 중에서 이 하나의 프레임이 그냥 고요한 프레임이 아닙니다. 결핍된 것, 한 맺힌 것, 억울한 것, 내 인생 내가 원치 않는데 왜 이렇게 되었느냐 하는 그런 분노 같은 것, 그 액자 안에 갇혀서 그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하다 보니까 프레임이 하나밖에 없는 거예요.
그 프레임을 야곱에게 붙여준 동시에 그 여자가 ……, 보통 여자는 한명 하고 결혼하거든요. 야곱은 두 명과 결혼합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아브라함언약이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언약은 아내가 두 사람입니다. 하갈과 사라 두 사람이지요. 두 명의 여자와 결혼하도록 주께서 관여해서 그 다음부터 여자가 하는 일이 뭐냐?
야곱이 갖고 있던 내용물을 다 이전시켜요. 다 뽑아내서 두 여자가 몽땅 가져가버립니다. 그러면 야곱은 껍데기가 돼 버리고 제 2의 야곱이 누구냐 하면, 두 여인이 돼요. 왜 야곱이 하나에서 두 여자의 모습을 통해서 두 개의 야곱이 되어야 되는 이유가 뭐냐? 두 프레임 사이에서, 육적 프레임이 영적 프레임으로 이동하려면 그 차이, 단절을 이 땅에서 구체화하는 작업이 있어야 돼요.
그 차이의 구체화는 야곱이 못하고 야곱을 고스란히 다 빼먹은, 야곱의 성격을 몽땅 가져온 두 여자 사이의 싸움을 통해서 야곱이 어떻게 해서 육에서 영으로 달라졌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 여인들은 야곱을 쪼개는 여인들이에요. 야곱의 성격을 그대로 가져와 가지고, 야곱이 형하고 싸운 것이 전반전이라면 후반전은 레아와 라헬 두 여자의 싸움이 형과 야곱이 싸웠던 그 싸움을 반복해서 재현시킵니다.
그러면 왜 남자 문제를 남자로 해결하지 않고 여자한테 전이시키는 식으로 하나님이 관여해서 여자의 싸움으로 하게 했는가? 모든 자식들은 다 남자의 자식들이거든요. 남자의 자식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에서가 프레임이 하나밖에 없어요. 프레임이 하나밖에 없는 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여자와 만나요.
그래서 아무리 자식을 낳아도 에서의 자식이고 그 에서의 자식의 나라가 에돔이라는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니라 에돔이에요. 그것은 에서의 자식들이에요. 그런데 아브라함의 자식들은 아브라함의 자식들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져요. 아브라함은 사라지고 여자의 후손이 돼요.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여자의 후손이 된다고요. 황당하지요.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게 어떻게 되는가? 두 여자가 싸우는데 야곱의 요소가 아니면 싸울 일이 없습니다. 다시 합시다. 여자들은 프레임을 하나씩 갖고 있어요. 하나씩 갖고 있는데 아내가 둘이 되었습니다. 언니와 동생 둘이 아내가 되었어요.
둘 다 육적 프레임을 갖고 있어요. 육적인 프레임을 갖고 싸운다는 그 내용이 사실은 야곱이 갖고 있던 속성, 야곱이 형과 싸웠던 육적인 속성을 그대로 다 빼돌린 거예요. 쏙 빼내서 여자의 속성으로 달라졌습니다. 그러면 여자의 속성은 육적인 프레임이기 때문에 하늘의 일이 아니고 땅의 일이거든요.
그래서 무조건 남자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아주 피 터지는 싸움을 하는 겁니다. 그 가운데 야곱은 손을 쓸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식에 관한 권한은 야곱에서 떠나버렸어요. 떠나버리고 하나님께서 태를 열어줘야 비로소 그 때 그 때마다 자식이 생깁니다. 자식을 낳아도 야곱은 팔짱끼고 ‘저 자식이 대체 누구 자식이냐?’ 이것은 하나님이 관여한 하나님의 자식이에요.
그러면 언약의 자식은 남자와 여자와 관계해서 태어나지 않습니까, 하는데 아닙니다. 그러면 어디서 태어나요? 하나님과 여자와 관계해서 자식이 태어나요. 그게 창세기 4장 1절에 나옵니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분명히 아담이라는 남편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했는데 하와가 잉태를 했거든요.
잉태를 했는데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여기 여호와로 말미암아, 라고 되어 있지만 원어에는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자식 낳았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버리면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니까 번역을 ‘말미암아’로 했지만 하나님이 보조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보조역할을 했느냐 하면, 하와가 하나님의 자식을 낳는데 보조역할을 한 거예요.
그래서 남자의 자식은 에서 쪽이나 하라고 해요. 에서나 하고 오늘날 인간들이나 하라고 해요. 자식 낳으면 내 자식이다. 아버지 닮았으니까 자기자식 맞아요. 맞는데 그런 자식은 프레임이 하나에요. 육에서 나서 육이에요. 육에서 영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을 다 아시지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여기에 여자의 후손이 나옵니다.
여자의 후손은 하나님이 개입해야 여자의 후손이 생기지 사람과 사람이 아무리 관계해도 여자의 후손이 생기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프레임이 에서처럼 하나기 때문에 자식 낳으면 자기자식 낳는 거예요.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하는 그런 자식이 안 나와요.
그러면 그런 자식이 그전에 있었는가? 가인이 있었고 그 다음에 또 누가 있었습니까? 이삭. 아브라함이 사라를 통해서 이삭을 낳았는데 그 이삭은 세 명의 천사의 자식이에요. 보통 아버지가 이름을 짓잖아요. 이삭은 이름을 누가 지었느냐? 아브라함이 안 지었습니다. 사라가 안 지었습니다. 들러리입니다.
이삭의 이름은 하나님이 개입해서 하나님이 지어버렸어요. 그리고 그 자식의 계보를 아브라함의 계보를 따르지 않습니다. 사라의 계보를 따라버려요. 사라의 계보를 왜 따라야 되느냐? 사라의 계보를 따라야 맞은편에 하갈의 계보, 이쪽 계보가 성립하면 동반해서 저쪽 계보가 성립하면서 저쪽은 육의 계열, 이쪽은 영의 계열이 되어서 그것을 갈라디아서 4장에서 두 언약이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언약을 두 개 세웁니다. 프레임이 두 개가 등장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두고 단절을 지상에 현실화시킨다. 또는 단절을 이 지상에 구체화시키는 작업이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단절입니다. 왜 단절인가? 어떤 인간도 구원받을 인간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에 실리지 아니하면 어떤 인간도 구원받을 인간이 없습니다. “목사님, 그러면 라헬의자식이 여자의 후손이고 언니 레아의 자식은 여자의 후손이 아닌 겁니까?” 이렇게 질문할 수 있는데 그것은 질문자체가 틀렸습니다. 양쪽 어느 자식도 여자의 후손이 아니에요.
그러면 열 두 아들을 낳은 그것은 뭐냐? 야곱은 팔짱 끼고 보면서 내 자식이 아니라고 했고 하나님이 관여해서 태를 열어서 자식을 낳았는데 그러면 그 자식들은 여자의 후손이고 하나님의 자식들이 맞는 거 아닙니까, 하는데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는 이유가 어디에 나오는가? 창세기 35장에 나와요.
창세기 35장에, 죽지도 않아야 할 나이에 누가 죽느냐 하면, 야곱이 사랑했던 라헬이 죽어요. 17절에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베노니’라는 뜻은 슬픔의 아들. 엄마가 자식 낳으면서 자식은 살았는데 자기가 죽어가니까, 그 자식 크는 것을 자기가 못 보니까 자신은 슬픔이고 그래서 슬픔의 아들, 슬픔의 자식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프레임이 하나에요. 육에서 낳은 육의 자식으로 생각한 겁니다. 다시 말해서 라헬은 언니한테 패배한 거예요.
마치 야곱한테 패배한 에서 같은 더러운 기분이 든다 이 말이지요. 에서나 라헬은 그냥 육적이라고 보면 돼요. 육적인 야곱의 재판이고 육적인 에서의 재판이라고 보면 됩니다. 막 싸우는 거예요. 그런데 야곱이 그걸 ‘베노니’라고 부르지 않고 베냐민으로 부른 거예요. 그 베냐민의 뜻이 뭐냐 하면, ‘오른손의 아들’ 이에요.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여자의 후손은 여자가 죽어야 되는 거예요. 이게 중요합니다.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인데 죽음 속에서 나오지 아니하면 천국에 어느 누구도 못갑니다. 천국 가는 자식이 죽음 속에서만 나와야 돼요. 살아 있는 인간은 천국 못갑니다. 라헬은 맞아요, 육적인 여자에요. 하지만 라헬은 야곱이 갖고 있던 두 개의 프레임의 내용을 뽑아냈습니다.
야곱이 진짜 사랑했던 여인은 라헬이에요. 언니는 1+1 세일 식으로 들어간 것이고 정말 야곱이 사랑했던 그 라헬이 야곱이 품고 있던 두 프레임, 다중현실, 이중현실, 이중의 프레임을, 라헬이 남편의 내용물을 뽑아서 본인이 가지고 죽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하나님이 튀어나오는 구체화, 여자의 후손, 악마를 이기는 여자의 후손, 베냐민, 하나님의 아들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냥 독생자가 튀어나온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설교 다시 해 봅시다. 야곱은 두 프레임을 갖고 있어요. 시가 쪽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채택되는 여자는 한 프레임밖에 없어요. 그냥 평범한 보통 여자에요. 그런데 야곱하고 결혼을 함으로 말미암아 본인도 모르게 언약관계에 휘말리게 되는 겁니다.
언약관계라는 것이 뭐냐 하면, 어떻게 육적인 인간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느냐 그 문제를 이 지상의 역사 안에 언약의 성취 속에서 그 논리성이, 그 원리가 파악이 되는 겁니다. 그 파악되는 원리는 이미 아브라함, 이삭을 통해서 짬짬이 보여줬어요. 신기하지요. 없는데서, 임신 못하는 여자인 사라가 자식을 낳았으니까.
우리는 생각하기를 아브라함 그 때 뿐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아, 그 때 기적적으로 이삭을 얻었겠지.’ 아니에요. 언약이 주어지면 주어질수록 계속 없는 자식인 이삭이 태어나는 그것이 반복이 되는데 다만 그 내용이 점점 더 구체화돼요. 세밀해 집니다. 어디까지? 어떤 인물, 어떤 아저씨가 와서 십자가에 죽는 거기에 접근하기 위해서 점점 더 구체화의 내용이 덧붙여지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서 생긴다? 야곱의 일상 가정사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일상 가정사에 하나님께서 관여하니까 결국은 라헬이라는 야곱이 진짜 사랑했던, 정말 사랑했던, 자기는 없어도 그 여자는 있어야 되는, 그렇게 사랑했던 그 여자가 하나님의 자식을 낳고 죽어버려요.
이것은 야곱이 원했던 것이 아니고 야곱에게 관여했던 하나님이 원하신 바입니다. 어떻게 악마를 이길 수 있는, 천국갈 수 있는 자식이 오느냐? 그것은 이 땅에 죽음이라는 현상, 그것도 특이한 언약적죽음이라는 현상을 통해서 보여 지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 야곱의 가정은 야곱이 아니고 그 죽은 라헬이 야곱언약의 중심이 되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마태복음 2장에 보면 나옵니다. 마태복음 2장에 동방박사 이야기하고 베들레헴의 어린 애들 다 몰살시키고 18절에 보면,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여기에 라헬이 나와요. 라헬, 이 여자가 야곱 가정의 중심입니다.
이 말은 뭐냐? 이 땅의 죽음이 우리 인생의 중심이 되는 거예요. 아무리 하나님을 안 믿어도 자기가 죽는다는 것은 외면할 수 없는 결정적인 현실입니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 죽음은 끄트머리에 오는 것이 아니에요. 죽음은 이미 우리 중심에 자리 잡고 그 죽음이 회오리치는, 허리케인처럼 태풍이 치는 그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죽음은 마지막에 달라붙어서 꺽, 하고 죽는 것이 죽음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우리 중심을 차지하고 있어요. 믿음은 그 중심을 믿어야 돼요. 그 중심의 죽음을 믿어야 돼요. 우리는 죽기 위해서 죽어야 되고 죽기 위해서 살아야 돼요.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죽기 위해서 등산가야 되고 죽기 위해서 골프하라고요.
논리가 비약되어서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요. 죽음이 중심이에요. 죽어야 되는데 왜 살았느냐? 이것은 이중현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성도에게만, 언약이라는 것은 이 땅에 죽음이라는 유일한 현실로서 우리에게 다가왔다. 언약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이 죽음을 중심으로 삼은 겁니다.
그런데 에서, 하나의 프레임밖에 없는 에서들은 이중현실이 아니고 단일현실이기 때문에 이왕 살았으니까 죽을 때까지 악착같이 살아보자고 나오는 겁니다. 살아보자고 나오니까 복수의 물이 차이는 겁니다. 한이 맺히는 거예요. 예수 믿을 때 믿더라도 나를 힘들게 한 저 인간 망하는 꼴 보고 내가 속 시원한 마음에서 평안하게 예수 믿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한테는 주께서 그런 조건, 어어어어어어~, 다 헤쳐 버립니다. 인간이 맞추는 모든 인생의 규격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런 규격으로 나는 살아보겠다는 거예요.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서의 결혼입니다. 에서는 야곱처럼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사람하고 했어요. 그것도 아버지의 압력을 받아서 친족 중에 찾아서 또 결혼했지만 다 자기가 원하는 사람하고 했어요.
왜? 자기자식 낳으면 되니까. 나는 죽어도 내 자식을 낳아서 내 자식이 조상 제사를 지내게 되면 나는 살아 있다는 겁니다. 살아 있기에 계속 살겠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의 그 원한과 분노와 울분과 결핍성, 그리고 자살충동, 그게 다 어디서 나왔습니까? 프레임이 하나밖에 없어요.
사는 것이 정상이고 죽는 것이 비정상이라고 여기는 그 프레임, 그 비언약. 그러나 언약의 완성 주님께서는 이 땅에 죽으러 왔습니다. 처음부터 죽으러 왔습니다. 아까 이야기했지요. 못 들으신 분을 위해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인간의 모든 억울한 것. 알아요. 프레임이 한 프레임밖에 없기 때문에, 육에 속해있기 때문에.
그 억울한 것, 한 맺힘. “도마야!” 손가락 잡아 당겨요. 우리 외손녀도 맨날 손가락을 잡아당기는데 손가락을 잡아당기면서 “이 창자국에 네 손을 넣어봐라. 그리고 이 못자국을 만져봐라. 이 못자국이 왜 생겼을까요? 이 창자국 왜 생겼을까요? 네가 살아야 된다는 그것 때문에 내가 죽었잖아.”
이 특수한 죽음, 이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다시 만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내 만날 때 그냥 이 땅에서 살던 대로 가정 이루어서 자식 낳고 잘 살아보라고 결혼한 줄 알았습니다. 주여, 그 규격을 다 깨버리고, 흐지부지되고 그 중간에 죽음이 되었음을 알려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주님의 죽음 속에서 하나님의 새생명 주신 것처럼 이제는 죽어야 될 우리가 주님 생명 안에서 주님의 죽으심을 마음껏 전도할 수 있는, 그 죽음을 전도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