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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창세기 27:41-45 / 저주의 분노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27:41-45 / 저주의 분노

정인순 2017. 10. 11. 21:43

 

 

저주의 분노

음성               동영상

 

이근호
2017년 10월 11일                   

 

본문 말씀: 창세기 27:41-45

(27:41) 그 아비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을 인하여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27:42)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하나니

(27:43)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 피하여

(27:44)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날 동안 그와 함께 거하라

(27:45)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성경 말씀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입니다. 모호한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 그 원리가 다 스며들어가 있으며 그 말씀에 준해서 모든 것이 움직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내용을 그냥 흔한 과거사로 넘겨서는 아니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분명하고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에서의 분노입니다. 저주입니다. 에서는 동생 야곱에게 저주를 퍼붓습니다. 마치 가인이 아벨을 죽이려고 드는 것과 같습니다. 왜 분노할까요? 그것은 자기가 자기 운명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서 분노하는 겁니다. 자신은 그냥 동생 운명의 들러리에 불과함을 참을 수 없었던 겁니다.

세상 돌아가는 시나리오가 에서 자기중심이 아니라 야곱 중심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 돌아가는 원리가 도저히 자기로서는 납득이 되지를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속이는 자가 복을 다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에서가 보기에 악을 행한 자가 복을 받고 악을 행하지 아니한 자신에게 저주가 돌아간다는 이 사실이 너무나도 불합리하기 때문입니다.

에서가 알고 모든 인간이, 모든 인류가 동의하는 바는 이러합니다. 선한 자는 복을 받고 악한 자는 저주받는 것이 세상 이치요 정의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모두 악마의 입에서 나왔다면? 이러한 상식적이고 당연한 세상 원리가 악마의 인간을 속여 왔던 무기라면?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로서 날때부터 싸웠습니다. 사이좋게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이 곧 창조의 비밀과 관련 있습니다. 처음 아담이 만들어졌을 때는 싸움이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단지 넘지 말아야 될 선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 선은 바로 금지의 선으로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실과를 따먹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악마가 아담부부를 유혹해서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는 이 세상에 싸움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은 ‘선악을 아예 알지 말아야 한다’는 선이 가장 원천적 선인가 아니면, 선/악 사이의 선이 가장 원래적인가에 관한 싸움입니다. 즉 사람은 악하지 아니하고 선하면 천국가는가 아니면 선과 악과 상관없이 이미 결정난 것인가의 싸움입니다.

선한 자가 유리하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에서의 생각이며 모든 인류의 상식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야곱편에 설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에서편에서 서서 에서의 울분과 서러움과 분노를 충분히 이해해야합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인 그 인간은 참으로 복을 받을 자가 아니라 저주받을 자라는 그 확신을 에서는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모든 인류가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속이는 자’, 야곱에서 복이 돌아가게 하십니까? 그것은 이미 이 세상이 ‘속이는 자’ 악마의 천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모든 상식은 실은 모두 거짓말이고 거꾸로 된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 악마의 속임수에 대해서 속임수로 대응하십니다.

따라서 상식에 따라 속지 않으려는 자가 지옥갑니다. 하나님께서 속임의 방식으로 참된 원천적 선(線)을 제시합니다. 기존의 선과 악 사이에 선을 긋고,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것으로 구원된다는 악마의 선(線)과 싸움에 나섭니다. 즉 이 세상에 심판에 관한 두 가지 기준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 곧 악마가 주장하는 선한 행위란 그 출발이 어디서부터 시작이 되는 걸까요? 가브리엘 마르셀이라는 실존주의 철학자는 인생을 ‘도상(途上)의 존재’라고 했습니다. ‘길 위의 존재’가 인생이라는 겁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묵묵하게 자신의 길을 가야만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겁니다.

즉 사람이 70세를 살고, 100세를 살아도 그가 아는 것은 그가 태어나서 알고 경험한 기억들의 누적입니다. 그 기억 안에 담기는 원리는 바로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 악마로부터 세뇌받은 원칙인 ‘선악을 아는 지식의 원리’입니다. 선하게 살면 장래가 잘된 운명이 될 것이고 악하게 살면 장래가 어두워질 것이라는 운명관을 말합니다.

애초부터 우주의 원천과 기원과 창세 전에 하나님과 장자와 연결된 진리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11에 나오는 원리를 모릅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즉 개인의 운명은 그 사람이 태어나서 ‘길 위에 인생’에서 어떤 행위를 했느냐와 전혀 상관없습니다. 그러니 악마에 붙잡혀 사는 에서형 인간들에게 있어 분노의 저주가 울분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즉 “왜 우리 인간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권한을 주지 않느냐”고 항변쪼로 터져 나오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왜 우리는 누구의 복된 운명을 위한 들러리로서 우리의 뜻이나 행함과 없이 저주받아야 하느냐?”는 식으로 대드는 겁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서 에서가 야곱보고 저주를 퍼붓는 것 같지만 실은 야곱은 없습니다. 야곱은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분과 중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에서가 야곱을 공격하는 것은, 야곱과 중첩된 예수 그리스도를 공격하는 바가 되고, 이는 곧 거꾸로 방향을 틀면, 에서가 예수님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에서와 포개져 있는 악마가 에서를 통해서 장자 되시는 예수님을 저주하는 바가 됩니다. ‘야곱이 없다’는 말은 이미 모든 인간은 에서에 속해져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에서형에 속한 자들 중에서 야곱형으로 바뀌게 됩니까? 여기에 있어 우리는 두 가지 타이프Type의 시간론을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를 A 타이프 시간형이라고 한다면 이는 과거-현재-미래를 함께 적용받게 되는 시간론입니다. 다른 하나를 B 타이프의 시간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사건 전과 후’를 따지는 시간론입니다. ‘~사건 이전’ 과 ‘~사건 이후’로 나뉘는 시간론입니다.

이것을 적용시키면,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여 축복권을 따내는 사건 이전에는, 야곱이나 에서나 모두 과거-현재-미래 수순을 밟습니다. 하지만 이 축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사건 이후에는, 야곱이 복을 받는 게 아니라 복을 받은 사건화로 달라진 야곱이 됩니다. 즉 신약식으로 말해서, 십자가 안 믿다는 ‘십자가 믿는 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나는 죽고 ‘십자가로 사건화 된 나’로 다른 존재가 되는 겁니다.

에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건 이전에는 그냥 평범한 맏이지지만 사건 이후에는, ‘저주로 사건화된 존재’가 되는 겁니다. 즉 ‘사람의 선한 행함으로 미래가 좋아진다’라는 악마의 주장을 대변해주는 저주의 인물이 되는 겁니다. 거짓 선(線)을 원래적이라고 고집하고 속이는 기능을 내놓은 인물이 되는 겁니다.

제 3자가 볼 때에는 에서가 그다지 악한 인물이 아니지만 성경을 달리봅니다. 왜냐하면 그의 위치가 하늘의  ‘장자’가 꽂히는 자리인데 에서는 그 특이점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즉 이미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더 이상 바리새인처럼 선과 악을 논하는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따라 망령된 자냐 아니냐를 결정나버리는 겁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히 12:16)

에서형 인간들을 평생을 두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주합니다. 자신이 마치 자기 인생에 여전히 구심이 된다고 우기기 때문입니다. 길 위에 존재가 이러합니다. 반면에 야곱은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희생, 곧 사랑이 나타납니다. 자기 자신이 자신에게 문제거리 조차 알 된 존재로 아무 것도 아님을 압니다.

그래서 사랑의 은사는 ‘오래 참고, 오래 견디는 겁니다.’(고전 13:7)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 자신이 중요한 중심이 아님을 깨우쳐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09강-창 27장41절-45절(저주의 분노)1710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7장 41절-45절입니다. 구약성경 39페이지입니다.
 
창 27:41-45
 
“그 아비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을 인하여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하나니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 피하여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하라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성경에 구약의 이야기는 쉽게 그 정황이 납득이 되는데 신약에 나오는 이야기는 굉장히 모호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나는 날마다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아난다는 것, 도저히 이것은 실습을 해도 그렇게 못해요. 너무 신약은 허황돼 보이는데 비해서 구약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이지요.

그래서 신약을 먼저 본 사람은, 이것은 하나의 이론이고 가설이다, 그렇게 이야기하지만 신약이 이론이나 가설이 아닙니다. 실제현실입니다. 왜냐하면 신약이 나오기까지 구체적인 현실이 구약에 나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게 되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이 궁금하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을까, 하나님은 일을 어떻게 하는가, 라고 모호하게 여기지 마시고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딱 보게 되면, 하나님은 방금 읽었던 이 식대로 일하십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에 어떤 원칙이 있는데 그 원칙의 징후로서, 징조로서 성경이 성령에 의해서 기록이 된 겁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 천국 간다, 허황된 이야기가 절대로 아니에요.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 일을 발생시켰듯이 우리의 평소의 지루한 일상도 다 복음적 원칙에 준해서 하나님의 징조로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본문을 보면서 구약의 복음을 여기서 발췌해 내야 돼요. 그냥, 아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네, 이러면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겁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여러분이 아다 시피 저주받은 형이 약이 올라서 동생 죽이겠다고 덤벼드는 그 대목이거든요.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는 어디 편에 서야 되느냐 하면, 이게 구체화되려면 야곱 편에 서지 말고 에서 편에 서야 돼요.

왜냐하면 에서 편에 서서 동생에 대해서 분노를 유발할 때 그게 이성적으로, 상식적으로 분노할 만합니다. 누가 이상하냐 하면, 야곱이 이상해요. 야곱에게 복을 주신 하나님이 이상하지 에서 쪽에서 출발해 버리면 에서는 정말 상식 있는 사람입니다. 나쁜 짓 하지 않았는데 저주받았고 속였는데 속여서 축복을 빼앗아 가버렸어요.

이게 우리 인간이 사는 세계의 상식이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한국교회가 전부 다 이단이라는 이야기가 다 근거가 있는 이야기에요. 에서가 왜 이렇게 분노하는지 그 이유를 봐야 됩니다. 분노하는 이유가 에서는 자기가 출생해서 자기가 행한 것, 반듯하게 사는 것부터 출발해서 자기자리를 규정했어요. 나는 별반 나쁜 짓 한 적 없다고 규정한 겁니다.

가브리엘 마르셀이라는 철학자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을 ‘도상의 존재’라 합니다. 도상의 존재라는 말은 ‘길 위의 존재’라는 말입니다. 마르셀은 프랑스 최초의 실존주의 철학자인데 인간은 길 위의 존재라는 겁니다. 내가 태어나서 길을 가는데 어디로 갈지는 모른다는 거예요. 그런데 야곱은 길 위의 존재가 아니고 원천을 잡았어요.

장자라는 것이 뭐냐? 이 우주와 창세전의 원리 그 자리가 장자의 자리입니다. 야곱의 출발은 창세전부터 출발하고 에서의 자리는 어중간한 중간부터 시작한 거예요. 원천을 모르고 중간부터 시작하니까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사람은 선하면 장래가 풀리고 사람은 악하면 벌 받게 되어 있고 지옥가게 되어 있다고 에서는 철석같이 믿은 겁니다.

그에 비해서 야곱은 이미 누가 천국가고 누가 지옥 가는지 운명적으로 확정되었다고 하는 이야기에요. 이거, 지금 이거 겁나는 이야기입니다. 세상 판 다 뒤집어야 돼요. 교회 판이고 윤리 도덕이고 다 뒤집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오늘 연세 많은 분 안 나오셨지만, 사람들의 상식이 길어봐야 백 살이에요.

백 살 동안 살아봐야 백 년 동안 누적된 그 상식이라는 것, 자기가 태어나서 기억나는 한 두 세 살 때부터 백 살까지 집약된 그것이 상식이에요. 도상의 존재입니다. 길 위의 존재에요. 그 길 위의 존재가 아무리 백 살을 살고 구십을 산다 할지라도 누적된 것은 뭐냐 하면, 사람은 착하면 뭔가 나중에 잘 될 가능성이 있다는 그게 전부입니다. 그게 에서에요.

그래서 에서의 상식적인 입장은 모든 인간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내용을 알려면 우리는 야곱 자리에 가면 안 되고 출발을 어디서부터 해야 되느냐 하면, 에서부터 해야 돼요. 그러면 우리는 뭘 이해할 수 있느냐? 에서의 울분이 충분히 이해가 되는 겁니다. 이해가 되면서 우리가 무슨 결론에 이르냐 하면, 어느 누구도 복음을 받아들일 위인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됩니다.

에서의 상식은 에서를 에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어요. 착해야 천국 간다. 이 상식을 도저히 인간은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뭔가 착한 일 하고 난 뒤에는 이번 주 복이 올 것 같아요. 남에게 도움을 주고 난 뒤에는 뭔가 행운이 보상으로 주어질 것 같아요. 이 에서의 상식에서 무슨 수로 벗어납니까? 벗어날 위인이 없어요.

그래서 저는 과감하게 결론 내립니다. 이 세상은 에서밖에 없다. 이 세상 모든 인간은 저주받아야 합당하다. 저주 받을 사람밖에 없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저주가 딱입니다. 원천은 숨겨져 있었으니까. 원천을 우리는 알 수 없으니까 태어나서 누적된 지혜와 도덕과 윤리, 항상 출발점을 그거부터 하는 거예요. 도상의 존재, 길 위의 존재입니다.

예수 믿은 것 다시 뒤집어 버립시다. 내가 교회 다녀서 예수 믿는 것이 에서적 사고방식에서 출발하지 않았는가를 한번 뒤돌아보세요. 예수 믿는 착한 일 때문에 내가 구원받습니까? 그게 아니거든요. 우리가 에서 쪽을 변호합시다. 우리가 에서의 변호사가 됩니다. 아버지가 완전히 자기의 축복을 밀어줬습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장자로 밀어줄 때 자기는 그만한 자격이 있다고 본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내가 이 가정의 중심이라고 여긴 겁니다. 감히 도상의 존재가. 중심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들러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나는 누구의 보조가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누구의 보조가 되어버리면, 들러리가 되어버리면 그것처럼 기분 나쁜 일이 없어요. 왜냐하면 내 독자적운명이 사라져버리니까.

누구 빛내기 위해서 있는 존재라는 것은 사람의 자존심을 긁어도 그보다 더 긁을 수가 없어요. 쉽게 말해서 나는 나를 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그 말 자체가 사람을 울분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 죽이고 싶어요. 오늘 본문에 죽인다는 말이 한두 번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에서가 야곱을 죽인다는 것은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과 똑같아요.

내가 뭐가 못나서 네 들러리냐 그 말입니다. 세상에, 아버지를 속이고 자기를 속이고 하나님도 속이는 그 나쁜 놈이 복을 가져가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세상이 어디 있느냐 그 말입니다. 지금 에서의 분노가. 도대체 우리의 신앙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야곱 들어 있어요, 에서 들어 있어요? 말로야 복음, 십자가, 입만 떼면 십자가고 말로만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진짜 바닥을 보세요. 바닥은 에서입니다.

중도에 선과 악을 행한 것이 자기운명과 전혀 상관이 없어요. 인생 도중에 선과 악을 행한 것과 자기 운명 달라지는 것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그러면 사람 사는 것 소용없네.”라고 하지요. 그 말이 맞아요. 소용없어요. 왜? 우리는 이미 저주가 딱이기 때문에 저주 받을 놈이 무슨……, 시체가 무슨 착한 일 한다고 시체에서 벗어납니까? 그런다고 산 사람 돼요?

자기한테 자기행위를 집어넣으면 자기를 살립니까? 뼈가 스스로 살아납니까? 에스겔 37장에 그렇게 되어 있던가요? 아니거든요. 본문을 시간 내에 하기 위해서 아주 집약해서 하겠습니다. 이것은 설명하려고 들면 몇 시간을 해야 되니까 집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도대체 에서의 분노가 누구를 겨냥한 것이냐 하는 겁니다. 에서는 동생을 향하여 분노하지요.

그런데 여러분, 야곱이 없습니다. 자기가 분노를 터트릴 야곱이 없어요. 왜냐하면 야곱이 나중에 이스라엘로 바뀌면서 야곱은 소실되어 버립니다. 날라 가버려요. 그것을 신약으로 하면 우리의 옛사람은 십자가에 죽어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야곱의 자리가 중첩이 되어 있어요. 야곱과 다른 분이 같이 중첩이 되어 있어서 도중에 그분이 야곱을 죽여 버립니다.

야곱 죽이고 대신 등장하는 분이 이스라엘로 등장해요. 그러면 형 에서의 분노는 눈에 보이는 동생을 향해서 퍼부었는데, “네가 속여 놓고도 내 복을 가져가? 이 나쁜 놈, 너 죽고 나 살자.” 이런 식으로 나갔는데 에서의 그 분노가 그냥 인간 대 인간의 분노가 아니고 그 배후에 야곱으로 하여금 창세전의 원리에 의해서 그냥 복이 와야 될 그러한 프로젝트를 진행시킨, 그러한 작업을 하신 분이 따로 있어요.

에서가 야곱 배후에 있는 예수님보고 저주를 퍼부었다는 것은 그 경로를 따라가게 되면, 하나의 반동에서 튕겨 나오게 되면 예수님의 적이 에서가 아니고 에서와 중첩되어 있는 악마가 에서를 통해서 야곱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하도도록 하는 그런 장치가 구체적인 개인 가정사를 통해서 실제적으로 이 구약으로 주어졌습니다.

왜 처음부터 두 아들이 싸우느냐 그 말입니다. 제가 그걸 분명히 이야기했는데 다 잊어버렸지요. 왜 이들이 싸우는가? 쌍둥이라고 늘 싸우는 것은 아닌데 왜 싸우는가? 지금 악마가 인간세계를 속였잖아요. 악마가 인간세계를 속였으니까 세상은 모두 악마에게 속아 넘어갔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대응은 뭡니까? 속은 데다 속임을 가지고 이 판을 바꾸는 거예요.

너희가 속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안속아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니까 내가 거기에 대응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이 세상 사람들이, 나는 반듯하다, 누굴 속이는 것은 나쁘다, 하는 그 속임수를 가지고 주께서 대응해버리면 주님한테 속임을 당하지 않은 자가 지옥 갑니다. 나는 남 속이는 거짓말을 못하겠다는 자들이 지옥가요.

야곱은 천국가고 에서는 지옥 가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뭐냐 하면, 왜 싸우는가 하는 문제거든요. 처음 창세기 2장에서는 싸움이 없었습니다. 싸움이 없었고 뭐가 있느냐 하면, 선, 라인, 선만 있었어요.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라인만 있었습니다. 이 선, 라인을 넘어오지 말라고 했어요.

그 때는 싸움이 없었습니다. 금지의 선만 있었지요. 그런데 악마가 아담을 유혹해서 아담이 그 선을 넘어버렸어요. 선을 넘고 난 뒤에 그 때부터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선이 원초적인 원래 선이냐, 아니면 선과 악에서 악에 넘어가지 않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그 선이 그게 원래 선이냐의 그 두 선과의 싸움이 벌어지는 겁니다.

악마는 나쁜 일 하면 지옥가고 착한 일 하면 천국 간다는 것을 계속 우깁니다. 모든 인간은 그게 상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종교란 것이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려고 믿잖아요.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렇게 나쁜 짓을 해, 라는 이 말이 은연중에 뭐라는 겁니까? 우리가 아는 선, 선악을 알았기에 때문에, 악은 하지 말고 선 쪽으로 나가라는 것이 우리의 해야 될 일이다, 라고 했는데 그게 저주받을 에서동네, 이 세상 모든 인류지요, 모든 인류의 보편적인 악마에 속아 넘어간 결과입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은 뭐냐? 원래의 선을 찾아가는 거예요. 창조 때, 또는 창조 이전, 아담이 범죄 하기 이전의 원래 선으로 넘어가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선악을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자체가 이미 그 선을 넘어버려서 저주 속에 풍덩 빠져 있는 모습들이 그런 모습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악하게 살지 않고 바르게 살게 되면 나중에 뭔가 좋은 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게 저주가 딱 이라는 증거물이 되는 겁니다.

참, 성령 받지 아니하면 이 상식을 벗어날 수가 없어요. 설교 다시 해 봅시다. 어렵습니다. 에서가 지금 분노하고 있거든요. 야곱을 죽여 버린다고 하고 있어요. 자, 분노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는 겁니다. 왜 분노가 나오느냐하면, 아버지 속이고 자기 형 속였잖아요. 그런데 복은 누가 가져갔는가? 속인 놈이 가져갔어요.

그런데 피해는 누가 봤는가? 속임을 당한 자기는 저주가 임했다는 말이지요. 뭐 이런 게 다 있어요? 그것을 제가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도상의 존재라고 했습니다. 길 위의 존재. 야곱에게는 장자가 있어요. 장자라는 것, 하나님과 아들관계를 장자라고 합니다. 숨겨져 있는 창조의 비밀입니다. 야곱에게는 원천이 있다는 말이지요. 거기에 비해서 에서는 원천은 몰라요. 그냥 이 바닥에서 태어난 거예요.

그런데 그 바닥이 이미 저주의 바닥이에요. 저주의 바닥의 출생자로 태어났는데 태어나서 하는 저주의 짓거리가 뭐냐 하면, ‘나는 반듯하게 살았는데 나쁜 놈에게 다 빼앗겼다. 그래서 억울하다. 미치겠다. 하나님이 뭐하시나?’ 이러한 증거물이 도상의 존재, 길 위의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에서와 야곱이 서로 싸우게 했다고 했습니다. 오늘 설교가 어렵기 때문에 풀이하는 거예요. 싸웠는데 그 싸움이 뭐냐? 선(線) 싸움이에요. 처음에는 싸움이 없었는데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악마 쪽에서 내미는 것, 선하게 살아야 되고 악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그 선과 악 사이에 선을 그어서 이대로 살아야 된다고 우기는 그것이 악마의 소리고, 아예 선과 악과 우리의 운명이 상관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원래 하나님께서 원천적인 하나님의 선이었던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좀 더 어려운 것을 해 봅시다. 그러면, “목사님의 말대로라면 어느 선이 맞는가,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 천국 지옥의 기준은 어느 선이 맞는가를 가지고 싸운다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런 선의 싸움을 하지 않는데요?” 우리는 그저 일상생활을 하지요. 우리가 누구와 싸웁니까? 싸우는 것이 취미에요? 아니지요. 그저 일상의 자기 일을 하지요.

제가 예를 들 테니 속으로 답변을 해보세요. 조성진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23세인가 한데 피아니스트입니다. 한국에서 최초로 쇼팽콩쿨에서 우승했어요. tv에서 피아노 치는 모습이 나왔어요. 조성진이 선(線) 싸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과 악의 싸움도 아니에요. 그냥 피아노를 치고 있어요. 그것은 에서입니까, 야곱입니까? 질문입니다.

자기는 피아노를 전문으로 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냥 피아노를 쳤습니다. 또 한 가지, 어떤 주부가 앞치마 두르고 식구들이 아침 식사 한 설거지를 합니다. 그것은 선(線)싸움을 하고 있는 겁니까, 그냥 일상의 일을 하고 있는 겁니까? 그것은 선(線)싸움이 아니고 일상의 일이지요. 그러면 조성진이라는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치는 것은 예술적인 기쁨을 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것을 두고 일상의 평범한 실제적인 일이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아까 뭐라고 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복음과 하나님의 계획은 일상적으로 이미 징후로서 보여준다고 했지요. 하지만 일상적인 것과 하나님의 창세전의 비밀과 연결시키려 하니까 연결이 잘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연결시키는가, 그 연결을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지금 조 성진은 자기전공이 피아노기 때문에 피아노를 치지만 피아노 치는 그 행동을 하는 순간 자기는 지금 선(線)을 만들고 있습니다. 어떻게? 조성진이 피아노를 쳤어요. 누가 봐도 1등인데 피아노 치는 그 끝에 본인이 웃었어요. 왜 웃었는가 하면, 마지막 두 음이 소리가 안 났어요. 혼자서 자기가 실수한 것을 알지요.

우레 같은 박수가 나왔는데 자기는 웃는 거예요. 오늘 실수했다고. 실수 했다는 그것이 뭐냐 하면, 내가 실수 안하면 선이고 실수를 했기에 그만큼 마이너스라는 겁니다. 설거지 하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목사님, 종교와 관계없습니다. 이건 그저 우리 일상의 일입니다.” 일상의 일을 하면서도 반드시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내가 잘했다, 못했다, 새로운 선을 지가 생산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그 선에 의해서 자기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 자기 미래에 대해서 단언해버리지요. 미리 선언해 버립니다. 짐작해 버리고. ‘난 완벽하지 못했어. 다음에는 잘해야지.’ 이게 바로 에서입니다. 그런데 조성진이 피아노를 누가 봐도 잘 쳤는데 어떤 심사위원이 조 성진에게 10점 만점에 1점을 줬다고요. 만약에 다른 사람이 우승을 했다면 조성진이는 그 사람에게 울분과 분노를 유발합니다.

내 선과 악의 기준에 의하면 내가 더 선인데, 저건 나보다 실력이 떨어지는데 왜 저게 가져가는가, 해서 분노를 유발하지요. 이 세상이 에서천지가 아니고 뭡니까? 그렇다면 문제는 도상의 존재에서 원천의 존재로, 에서에서 야곱으로 어떻게 옮겨가느냐가 문제지요. 그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시간론에 있어서 A타입의 시간론이 있고 B타입의 시간론이 있어요. A타입의 시간론은 뭐냐 하면,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가는 것은 A타입의 시간론이에요. 두 사람이 길을 갈 때는 둘 다 과거에 저촉 받았고 둘 다 현재를 지나고 있고 둘 다 미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둘 다 똑같이 과거 현재 미래로 지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B타입의 시간론은 뭐냐 하면,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전이냐 후로 가려지는 것이 B타입이에요. 어떤 사건이 일어난 그 전이냐 후냐, 이렇게 이어지는 겁니다. 에서와 야곱이 팥죽 먹을 때는 나란히 둘 다 과거 현재 미래로 나란히 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속이는 야곱에게 축복 주는 사건을 유발시켰어요.

사건을 유발시키면 드디어 둘이 갈라집니다. 사건 이전과 사건 이후, 사건 이전의 에서와 사건 이후의 에서가 다르고 사건 이전의 야곱과 사건 이후의 야곱이 달라요. 신약적으로 말해서는 십자가 이전의 우리와 십자가 이후의 우리가 다르다 그 말입니다.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그 다음에 사건 전에서 후로 넘어가면서 그 동일한 인물이 아니에요. 동일한 개체가 아닙니다.

사건의 속성을 각자 할당 받고 갈라지게 되어 있어요. 에서가 저주받는 것이 아니고 저주가 사건화 된 에서로 바뀌고, 야곱은 야곱이 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복이 무엇인가를 증거 하는, 복이 사건화 된 그런 야곱으로 바뀐다 그 말입니다. 개체는 동일한 개체지만 속성이 바뀌어버리면 다른 인간이에요. 그래서 예수 믿고 난 뒤에 우리가 다른 인간 되는 겁니다.

십자가 알고 난 뒤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나라는 인간이 예수 믿는다 하잖아요. 그것은 지옥 갑니다. 그 인간이 정보 하나 얻은 거예요. 그런데 진짜 십자가 사건화 된 성도는 뭐냐 하면, 내가 십자가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증거 하라고 나를 늘 죽여 버리는 겁니다. 뭘 죽여 버리느냐 하면, 나 십자가 믿고 천국 갈게, 라는 그 인간을 십자가사건이 그냥 두지 않고 죽여 버려요. “너를 위해서 십자가 진 것이 아니다. 이 인간아.”

십자가증거하라고 우리를 구원해 놓은 거예요. 십자가 이야기 들으면 내가 십자가를 아는 정보를 하나 더 추가하게 되면 구원되는 것처럼 느껴질 겁니다. 그게 아니고 십자가 사건이 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사건이 주가 돼요. 그리고 나는 그 사건을 증거 하는 증거물이 되는 겁니다.

야곱과 에서의 관계에서 에서가 화가 난 이유가, 자기가 장자였는데 갑자기 저주를 받는 동시에 동생의 축복을 드러내는 시다바리가 된 거예요. 축복과 저주사건이 주어지자 말자 이제는 내가 잘못해서 저주받은 것이 아니고 저주받기 위해서 내가 동생한테 당해야 된다는 그런 시다바리, 들러리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이것.

사람이요,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보다 더 기분 나쁜 것이 있을까요? 누구에 종속되기 위해서 내가 산다는 이것이 얼마나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는 겁니까? 도상의 존재, 길 위의 존재는 항상 어릴 때부터 내가 주인공이에요. 그런데 원천을 아는 존재가 나타나서 원천과 도상이 존재, 비교해 보니까 ‘원천을 위해서 도상이 존재는 모두 시다바리가 된다, 하나의 보조가 된다.’

이것은 참을 수 없는 분노입니다. 그 분노가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어지지요.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위한 들러리에 불과하다. 골로새서 1장 16절의 말씀. 이걸 참을 수 있습니까? 심지어 이 들러리는 기존에 알던 선(線)싸움, 선이냐 악이냐의 싸움이 아니고 아예 선과 악이 필요치 않다는 그 영역과 선에 대한 영역과의 치열한 싸움에 들어가는 거예요.

선해야 천국 간다는 것, 악하면 지옥가고 선하면 천국 간다는 이 주장과, 천국과 지옥은 인간의 선과 악과는 상관없다는 그 주장의 싸움입니다. 로마서 9장 11절에 나오지요.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부르시는 이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증거 하라고 그들의 운명이 이미 확정되었다, 라는 그 싸움입니다. 제가 당부하고 싶은 것은 “목사님, 로마서 9장 11절이 있습니다.” 이걸 당부하고 싶은 것이 아니고 그게 여러분의 실생활에 사건화 되어서 나오느냐, 그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어요.

더 나가야 돼요. 에서와 야곱이 둘이 같이 가다가 사건이 터져 버립니다. 사건이 터져 버리면 둘이 갈라지지요. 갈라지면서 지옥 가는 사람은 기껏 하는 것이 “나를 왜 중심에서 이탈시킵니까?” 하는 분노와 울분만 토하는 인생만 남았어요. 내가 착한 만큼 보상이 없다고 울분을 토하는데 이제 중요한 것이 남아 있다고 말씀드린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이건 참 너무 어려운 건데요.

어렵지만 일단 해봅시다. 자, 이 질문을 해 봅시다. 에서가 뭐가 잘못되었는가? 에서가 잘못한 것이 뭐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에서는 잘못한 것이 없어요. 잘못한 것이 없어서 지옥 가는 거예요. 이 말을 여러분이 납득을 해야 돼요. 잘못한 것이 없어서 지옥가요. 왜냐하면 항상 바르게 살아야 된다는 그것 때문에 지옥 간다 이 말이지요.

그 마음자세가 뭐냐? 선과 악에서 나는 선한 쪽에 서면 천국 간다는 기준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히브리서 12장 16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했는데 여기서 장자가 지옥 간다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장자는 망령된 자로서 지옥 간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에서 입장에서 출발해 보라고 했지요. 에서는 항상 바르게 살고자 했지 나쁜 짓 한 적이 없어요. 나쁜 짓 안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망령된 자라고 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에서가 갖고 있는 것이 장자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오늘 설교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이 오시지 않을 경우에는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나은 사람이 없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꽂히고 난 뒤부터는 그 때부터는 자체적으로 내가 얼마나 선했느냐 하는 것은 완전히 무시당하는 거예요. 무시당하고 이 예수에 대해서 네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늘나라 장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 하는가, 그것으로 망령된 자냐, 아니면 귀한 자인가, 그것으로 기준이 끝나버린다니까요.

내가 스스로 바르게 사는 것은 아무짝도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원천이거든요. 예수님은 야곱에 중첩된 이스라엘이고 원천으로 오신, 이 우주의 기원으로 오신, 창세전의 비밀로 오신 분이라는 말이지요. 성경에 분명히 그렇게 나와 있는데 제가 아까 물은 것처럼 평소에 우리의 일상은 어떠냐 이 말이지요.

설거지 할 때 어떤 생각이고 피아노 칠 때 어떻게 했느냐는 말이지요. 조 성진 피아노 치는 이야기 했지요. 마지막 음 틀리게 쳤다는 것을 말씀 드렸지요. 나도 어디서 들은 이야기지만. 실제로 봤어요. TV에서 소리가 안 나왔어요. 우리의 모든 세상 일상이 잘해야 된다는 쪽이잖아요. 그런데 그 순간 우리는 뭘 날려버리느냐 하면,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되어버려요.

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개무시 해버리는 순간이 돼버립니다.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 만들어버렸어요. “에서는 잘못이 없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네가 장자에 대해서 모르지? 모르지? 모르니까 네가 망령된 자다.” 야곱은 장자에 대해서 알았어요. 원천이니까. 그 장자가 이 마지막 때에 예수님 이름으로 이 땅에 꽂혀버렸습니다. 이 땅에 와 버렸어요. 마지막 심판은 그 택하신 자,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로 끝나버립니다.

자, 그렇게 되면 그 다음문제가 뭐냐? 그러면 예수님을 믿어주면 될 것이 아니냐. 그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제가 어렵다는 거예요. 예수 믿으면 될 것이 아닌가? 예수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예수님 앞에서 골칫거리, 문제꺼리조차 안돼요. 나라는 인간은 예수님 앞에서 시다바리기 때문에 내가 어떤 잘못을 했습니다, 착한 일 했습니다, 그 자체가 주님한테는 “무슨 이상한 소리야? 신경 뚝 꺼라.” 이렇게 우리는 문제꺼리가 안될 정도로 사소한 존재에요.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요. 그런데 악마는 우리로 하여금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큰 문제로 자꾸 인식을 시켜버립니다. 그렇게 해야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분노로 도전하고 반발하도록 악마가 부추길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에 누전되어서 불이 났다. 교회는 문제꺼리도 안돼요. 그런데 “주여, 불났습니다. 재산이 5천만 원이 나갔습니다.”

그것은 기도 할 꺼리도 아니라니까요. 내가 몸이 아프다. 이게 문제꺼리입니까? “몸이 아픈데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내가 왜 몸이 아픕니까, 하나님. 바르게 살 테니까 건강하게 해주세요.” 이 한마디 한마디가 에서 입장,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격분, 분노하고, 울분을 터트리는 모습입니다.

시다바리거든요. 들러리에 불과합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문제꺼리도 아닌데 마귀가 자꾸 우리보고 에서 되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리고 “네가 네 인생의 중심으로 꽂혀야 돼. 네가 들러리 되는 것이 말이 돼? 말이 안 되지. 기분 안 나빠? 기분 나쁘지. 네 인생은 네가 개척하고 네가 관리하는 거야. 네가 얼마냐 잘하느냐에 따라서 네가 천국가고 네가 못하면 지옥 가는 거야. 예수 똑바로 믿어. 잘 믿어야 돼. 안 그러면 지옥 가.” 이게 바로 마귀생각이잖아요.

제가 오늘날 교회가 이단이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겁니다. 교회에서 하는 설교가 전부 다 이런 이야기에요. “주의 말씀에 순종합시다. 경건합시다. 거룩하라 했으니 거룩합시다. 제대로 낮추면서 살아갑시다.” 결국 관심사가 뭐냐? 나는 중요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도상의 존재에 대해서는 안중요해요. 원천이 중요하지 나는 안중요하다 이 말이지요.

이미 사건이 터졌잖아요. 사건이 터진 이상 아직도 내가 중요하다는 그 인간은 저주의 기능으로서 이미 뒤에 빠져버리고 “나는 개 같은 수로보니게 여인입니다. 나는 그냥 예수님의 기능만 나온다면 영광이지요.”라는, 이미 축복의 기능으로, 하나는 저주의 기능으로 새로운 존재로서, 개체로서 주님께서 사건을 통해서 만들어버렸다니까요.

사건 전 후로 갈라졌어요. B타입의 시간입니다. 무슨 사건의 전후. 십자가전후. 십자가 안과 밖. 그렇게 된 겁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러면 이 저주받은 에서는 분노와 울분을 터트리면서 평생 도상의 존재, 길 위의 존재로 살아간다면, 그렇다면 야곱은, 성도는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겁니다. 성도는 이제 바르게 사는가?

절대로 바르게 살지 않습니다. 성도가 바르게 산다면 지금까지 설교한 것은 다 도루묵이 되는 겁니다. 도루묵이라 하는 것은 선조대왕 피난길에 너무 맛있어서 은어인줄 알고 좋아했는데 나중에 다시 먹는데 ‘옛날 시시한 묵이구나’ 해서 도루묵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마지막 이거 없으면 도루묵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 믿었으니까 선하게 살면 안돼요. 그것은 선과 악, 악마가 제시한 그 기준 안에서 마귀의 지옥 갈 사람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뭐냐? 희생입니다. 선과 악을 넘어서는 것이 희생, 양보지요. 사랑이지요. 줄 때 줘버리는 겁니다. 어차피 내 운명은 확정된 거니까. ‘그래. 너 잘났다.’ 하고 희생하는 겁니다.

‘잘 먹고 잘 살아라. 불 심판 받아라.’ 그냥 내주는 거예요. 사랑은 무례하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며……. 왜? 거 뭐 가치도 없는 거니까. 어차피 시다바리니까. 들러리니까. 그 선악에 대해서 귀담아 듣지 않는 겁니다. 그냥 줘버리는 거예요. 그게 희생이고, 저주받은 사람은 누굴 향하여 저주가 나오지만 축복받은 야곱은 “나도 주님 앞에 잃어버린 존재인데 주께서 쓰시는 대로 하기에 나 같은 것 상대하지 마. 나는 상대할 가치도 없어.” 이게 바로 성도의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참 수십 년 속았습니다. 도상의 존재, 길 위의 존재면서 뭘 안다고, 바르게 살면 낙이 있을 걸, 라는 그것이 마귀의 소리인줄 몰랐습니다. 착하게 살면 복 받을 것을, 라는 일반적 상식이 악마의 상투적인 교리인 것을 우리가 몰랐습니다. 주여, 선을 넘겨 주옵소서. 선도 악도 없는 세계, 그게 영생의 세계인 것을, 주의 세계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