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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충성모 요한복음 10장 26절(가락-없음)160503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0장 24절 끝에서부터 26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되어 있지요.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성경을 보는 핵심을 메시아론으로부터 추적을 해야 됩니다.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것이 있어요. 그래서 당신이 메시아냐, 아니냐를 굉장히 중요시하게 여겨요. 그것이 이 성경 해석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봐야 된다는 이유에요.
구약은 메시아가 오실 것을 이야기하고 신약은 이미 왔었음을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니까 메시아라는 존재가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다린 구원자지, 이스라엘 외부의 민족이나 나라들이 기다린 신의 형태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성경을 보려면 메시아라는 하나의 틈을 통해서 들어가줘야 되는 겁니다. 성경에 의하면 메시아를 빼고 하나님을 거론한다는 것은 반칙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메시아는 생각을 하지 않고 “저, 구원 받겠어요?”라고 자기의 구원부터 성급하게 들이대고, 또 목회자들은 고객(왕)이 그것을 원하니까 “이렇게 행하시면 구원 받습니다.”라고 하지요. 중간에 메시아는 날아가 버렸어요. 메시아는 빼버렸어요. 기껏 메시아를 집어넣는다는 게 문제를 더 크게 틀어지게 만들었어요. “당신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면 메시아를 만나면 됩니다.”라고 하면 메시아 이전에 나 구원부터 먼저 시작을 하고 수단으로 개입되는 것이 메시야지요.
그러면 메시아는 옆구리를 차고 들어온 셈이 되는 겁니다. 나는 주가 되고 옆으로 차고 들어온 것이 메시아라면 메시야는 빨리 볼일 보고 빨리 나가버려야 되지요. 자, 예수 믿었다. 볼일 봤으면 빠져주세요. 그리고 나는 내 갈 길, 아버지한테 가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구원론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구원론만 달랑 남는 거에요. 교인들이 맨날 목사한테 묻는 것이 그거거든요. “저, 어떻게 하면 구원 되겠습니까?” 질문 자체가 메시아론이 아니에요.
이스라엘이라면 “메시아는 언제 오겠습니까?”라고 하겠지요. 왜냐하면 그들은 구원론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구원이에요. 개인 구원이 아니고 이스라엘 나라의 구원이라고요. 달리 말해서 어떤 나라의 일원이 됨으로써 구원이 확보되는 것이지, 개인적으로 설친다고 구원이 되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시작하면서 했던 이 몇 마디만 가지고도 2000년 기독교 역사가 얼마나 처음부터 다른 종교인지를 말해줍니다.
완전히 다른 종교를 만들어놓은 거에요. 성당의 천주교, 기독교도 마찬가지로 전혀 성경과 상관이 없는 거에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 메시아론의 노선에 따라서 오신 겁니다. 이미 구약에 깔려진 메시아론에 맞추어서 주님이 오신 거에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가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성경(그때는 구약 자체가 성경이니까) 아마 이런 모습으로 이렇게 오실 것이라고 딱 틀을 만들어놓았는데 이게 안 맞는 겁니다. 예수님이 맞지를 않아요. 지금까지 한 것을 한 번 정리해봅시다.
구약의 입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나라를 만들어요. 그 나라의 이름이 이스라엘이고 이것을 포함해서 출애굽기 4장 24절에 나오는 것과 같이 아들이라고 해요. 이게 아들이에요. 그러니까 개인을 가지고 아들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집단화된 아들만 아들이에요. 개인으로는 아들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집단으로 이스라엘 전체가 구원되기 위해서는 학력이라든지, 지식이라든지, 아이큐, 혈액형 같은 것을 무시하고 새롭게 투입된 하나에 종속되도록 그렇게 조치했습니다. 그게 어린양의 죽음입니다.
피를 가지고 문설주에 바르지요. 그러면 심판하시는 죽음의 사자가 와서 뭐만 확인하면 됩니까? 이 사람이 서울대학에 갔는지 이대를 나온 여자인지, 재산이 얼마이고 통장은 몇 개인지를 보는 게 아니고 문설주에 피만 보지요. 피만. 그래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보면 “너도?”, “나도!” 하는 공통점이 형성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 남녀노소를 상관없이 어린양의 피로만 구원 받았다는 거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40만이라도 숫자는 40만이지만 이러한 동일한 공통점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딱 한 사람입니다. 그걸 단일화라고 합니다.
그런데 단일화라고 해도 되지만 여기에 어떤 의미를 더하면 동일시 또는 동일화라는 말을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현재 인간에게도 유아 시절,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에 동일화가 일어나요. 사실은 그게(동일화) 착각이거든요. 그런데 이 동일화라는 말이 사실은 말은 쉬운데 사실 따져보면 굉장히 어려운 말입니다. 저 사람이 나와 같은 것을 동일화라고 하지 않아요. 보통 상식으로는 “저 사람이 나와 같습니다.”라고 감정을 이입해서 동일화하잖아요. 그게 아니고 그 사람 쪽에 내가 포함이 되면서 동일화가 돼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원하는 동일화는 “내게 맞추어진 메시아가 오세요.”가 아니라 “저는 동일화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어떻게 나타나시든지 주께서 원하시는 동일시의 요구에 후딱 제가 끼어들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하는 형태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신약의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면 굉장히 많이 나와요. 대표적인 것이 “예수 안에서 하나(한 형제)가 된다”라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왜 예수 안에서 한 형제가 되느냐 하면 서로 똑같은 입장이거든요.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랑(용서)을 받았기에 너희도 서로 사랑(용서)하는 것이 마땅하니라”(에베소서 4장 32절)
누가 에베소서 4장 마지막절을 한 번 읽어볼까요.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에 ‘서로’라는 말이 나오지요? ‘서로’라는 말은 그렇게 해서 이미 우리는 한 통 안에 들어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에베소서에 보면 성령이라는 단어를 1장부터 해가지고 주르르 막 쏟아부어 놓았어요. “성령으로”, “성령으로”, “성령으로” 그런데 그 성령의 의미가 뭐나고 할 때는 반드시 육과 대비된 상태에서 성령을 언급하거든요.
그러면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육은 뭡니까? 내가 행함으로 하는 것이 육이 돼요. 그런데 “내가 구원 받은 것은 나의 행함으로 말미암지 않고 주님으로 말미암습니다.”라고 하면 영이 되는 겁니다. 수동적이고 피동적이지요. 그러나 내가 능동적으로 나가면 육이 되어 버려요.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고 난 뒤에 율법을 지키니까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네가 성령을 받은 것이 네 행함이냐, 믿음이냐 네가 분명히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놓고 왜 행함으로 율법을 지키려고 하느냐”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어버리면 이미 율법을 다 지킨 것이 되어서 남아 있는 율법이 있을 리가 없는데 왜 네가 새삼스럽게 율법을 지키려고 하느냐”라는 겁니다. 그런 영은 없다는 거에요. 쉽게 말해서 수상하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수상한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십자가를 들이대는 거에요. 십자가를. 십자가를 들이대는 방법 중에 하나가 할례 받지 않은 사람과 할례를 받은 사람이 같이 식사를 할 때 거기에서 내빼느냐, 아니면 형제라고 인정하느냐는 겁니다.
율법의 준수 여부라는 기준 자체가 십자가 안에서 이미 소멸되었는지를 확인해보게 되면 그 사람이 성령을 받은 사람인지, 육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채 성령을 받은 흉내를 내는지가 들통이 나는 거에요. “십일조를 했나, 안 했나?”, “나는 했어.”, “그러면 너는 잘못 되었네.”라고 하면 그 사람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 아니에요. “안식일 지켰어, 안 지켰어?” 이런 것을 따지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 아니라고요. 그 사람은 흉내를 내는 사람이에요. 모방하는 사람이에요.
성경에 나온 것을 자기가 스스로 자기 것으로 현재 자기가 하고 있는 것에다가 이미지화 시켜서 억지로 성경 자체를 자기와 동일시시키는 겁니다. 자기는 꿈쩍도 안 하고 성경이 와서 자기와 동일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메시아론적으로 봤을 때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셨기 때문에 낯설게 등장하셨는데 낯설게 등장한 것은 다른 게 아니고 너와 나의 모든 차별을 다 없애버리는 거에요.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이런 것을 다 없애버리고 전부 다 부셔버린 그 망치와 자기를 동일시하겠다는 겁니다. (이름을 이제 망치로 바꿔야 돼요. 좋은 이름은 아니지만 하여튼..)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이제는 막 살아도 되지요?”라고 하는 물음은 전혀 성령을 받은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생각이 엉뚱한 데에 있어요. 지금 막 사는 게 그리워요. 막 살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이에요. 성령은 전혀 좋지를 않아요. “이제 내가 어떤 짓을 해도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 그 자유가 그리운 거에요. 내가 주님 앞에 무시당하는 그 자유가 자유가 아니고 나는 생생하게 그대로 살아있으면서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이제 주님도 나한테 탓할 거 없지요.”라고 뽐내고 싶은 마음이 너무 성급해요. 그게 그리운 사람은 여전히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육에 속한 사람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막 사세요.”라는 말밖에는 없어요. “막 사세요.”라고 해야, 들통이 나요. 본색들이 나와요. “시키는 대로 막 살았습니다.”라고 하면서 은근히 막 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과 “정말 내가 한 모든 짓이 소급해서 막 사는 짓이였군요.”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나뉘어요. “어떤 짓을 해도 십자가로만 구원해줬으니까 십자가 앞에서 어떤 짓도 내가 막 사는 짓, 의미 없는 짓이 되었군요.”라고 감사하는 사람이 분류가 된다고요.
사실은 사도 바울이 막 살은 사람이에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도 막 살았고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막 살았는데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율법에 흠이 없다”고 했고 예수를 믿고 난 뒤에 막 사는 방법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막 살은 거에요. 어차피 둘 다 막 사는 거에요. 그런 식으로 한 겁니다. 스데반 집사, 빌립 집사도 마찬가지에요. 자기가 누구를 전도하겠다고 사막에 간 것은 아니거든요. 주께서 가게 하시니까 간 거에요.
그래서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론을 따라서 오신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는 이 세상을 현실판 또는 현실지형이라고 표현할 수 있거든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그냥 현실이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 현실에 예수님이 등장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가 빠져나갔어요. 오실 때 역사적으로 오셨고, 빠져나갈 때 역사적으로 나가시지 않았습니다. 역사라는 것은 이 편평한 현실판이잖아요. 이 판에서 돌아가시면은 예수님의 시신이 남아있어야 돼요. 시신이 보고싶으면 남쪽 몇 km 네비게이션을 켜고 찾아가서 보면 있어야 돼요.
그런데 주님이 오실(합류할) 때도 어디서 오셨는지 모르지만 나갈 때는 여기(현실판)에 구멍이 나버렸지요. 시체의 무덤이 없잖아요. 이게 바로 단절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무덤에만 예수님이 안 계신 게 아니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는 이 사람들이 그냥 기존에 속해있던 이 판, 현실판 자체에 구멍이 나 버린 겁니다. 그래서 제가 대구강의에서 이걸 가지고 총맞은 것처럼이라고 했잖아요. 구멍이 나버려야 돼요. 왜냐하면 이 현실판 속에는 우리도 포함이 되잖아요. 우리의 마음도 거기 현실판에서 기성 세대의 모든 사고 개념을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받잖아요. 그래서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남들로부터 인정 받기 위해서,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사랑 받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뭐 사랑까지는 너무 거창하고, 남으로부터 인정 받기 위해서 우리는 부지런히 노력합니다.
여러 번 제가 이야기했습니다만 돌아가신 아버지의 무덤 앞에 소주하고 오징어를 가지고 가가지고 “아버지가 제 출세를 못 보시고 돌아가셔서 얼마나 제가 원통한지 모릅니다.” 하고 흙밖에 없는 무덤에 엎드리는 것은 그동안 평생을 아버지를 의식하고 살아왔다는 것이라고 했지요. 아버지가 요구하는 대로 거기에 완전히 종속이 된 거에요. 아버지가 만들은 그 형틀이 있어요. 그 형틀에 맞추어야 내가 아들이 된다고 착각을 하고 산 거에요. 아버지가 한 대로 해야 비로소 ‘나’가 되는 거에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안 하면 그 때 나는 존재하지 않아요.
그것을 가지고 ‘아버지의 이름으로’라고 합니다. 벌써 주의 이름으로 구원 받는 것하고 연관성이 있지요.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주께서 저를 주께 합당하게 만들어주셨잖아요.”라는 고백이에요. 내 이름으로 주의 이름을 만들어낼 수 없어요. 내 이름으로 하는 것은 우리가 현실판에서 조작한 거에요. 거기에 구멍이 뚫려야 돼요. 총맞은 것처럼. 탕,탕,탕. 대구강의할 때는 그림까지 그렸어요. 완전히 서부 영화에 나오는 장고처럼 창호지에 총을 쏘아 보세요. 창구멍이 찢어진 흔적이 있지요. 그 찢어진 흔적이 에베소서 6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라는 거에요. 그 예수의 흔적을 사도행전 9장의 버전으로 이야기하게 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찾아오시니까 사도 바울이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는 말이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하시지요. “네가 내가 죽은 줄로 알고 마음껏 핍박했잖아. 죽은 줄로 알로 마음껏 핍박한 그 세계와 단절된 그런 내가 너를 방문했다.”라는 겁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개인적으로 잘못을 했다는 것이 아니고 네(사도 바울)가 속해 있는 현실판 전체가 잘못 되어 있다는 거에요. 이것을 사도 바울은 “세대”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에서 “이 세대”를 헬라어로 아이온이라고 합니다. 길게 이어진 시간대를 “세대”라고 합니다. 보통은 이 세대 다음에 오는 세대가 있잖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렇게 보지를 않습니다. 영이 왔으니까 그런 겁니다. 이 세대 위에 중첩되어서 오는 세대가 같이 이중으로 겹쳐있는 거에요. 이중으로 겹쳐있으면서 아랫(이) 세대는 윗(오는) 세대의 그림자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오는 세대는 원형이 돼요.
그래서 오늘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역사 속으로 뛰어들고 이 원형의 세대가 이 표면 위에 올라옵니다. 이게 올라올 때마다 제가 생각하는 게 있는데, 007 영화에 보면 분명히 백두산 천지처럼 호수 같은데 사실 가까이 보게 되면 호수가 아니고 세계를 멸망시키는 못된 닥터 노가 밑에 미사일을 숨겨놓고 페인트칠을 해놓았습니다. 그래서 007이 물이 아닐거다.라고 하고는 거기에 돌멩이를 하나 던져 보니까 출렁거리는 것이 아니고 틱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하 요새를 폭파시켜 가지고 007이 인류를 구원하고 본드 걸이 뽀뽀하고 카메라가 내려가면서 007 영화가 끝나잖아요.
밑에 있는 것이 갈라지면서 숨어 있는 원형판이 위로 치밀어 올라 오는 거에요. 그러니까 개인이 있으면 개인을 둘러싼 세대라는 현실판 속에 우리가 일부로 있는 것처럼, 홀로가 아니고 예수님은 묵시 세계를 이끌면서 그 대표자로 오신 거에요. 그러니까 주님이 올라오면서 기존의 현실판에서 이해하는 하나님의 개념, 또는 구약 성경의 율법 개념과 예수님 혼자만이 아는 진짜 율법의 개념이 예수님의 모든 말씀 활동 가운데서 충돌이 되지요. 그러니까 마태복음 5장 8절에 보면 “내 말과 내 복음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선지자들도 그와 같이 핍박을 받았느니라” 이것이 바로 축복이에요.
현실판에 있으면서 오는 세상에 소속되는 이런 복을 받은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요. 없잖아요. 정말 선지자들이 놀라운 존재들입니다. 자꾸 선지자들이 개인으로 왔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선지자 하나가 투입되게 되면 선지자가 몰고 오는 새로운 현실판이 등장해요. 선지자는 홀로 오는 게 아니고 주위에 선지자만이 아는 현실판이 주어져서 기존의 세상보기와 다투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렇지요, 특히 에녹 같은 경우에 우리는 그냥 에녹이 안 죽었다는 것만 생각하는데 유다서에 보게 되면 에녹은 선지자입니다.
나는 그냥 안 죽는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오는 세대에 심판에 대해서 예언한 사람입니다. 그 예언이 노아 때 마감이 됩니다. 그것은 수요일날 설교를 들어보면 알아요. 노아가 세상을 끝내버립니다. 그래서 인류사는 노아 때로 이미 끝나버렸어요. 한 명도 살지 않고 다 죽었어요. 노아는 살았다고 이야기하지 마세요. 왜냐? 이 땅에 있는 것은 다 죽었으니까요. 노아는 이 땅에 있는 게 아니고 오는 세대를 보여주는 낯선 세계를 따로 형성했지요. 그걸 두 자로 방주라고 합니다. 방주 안에 있었지요. 마치 신약에 예수 안에 있는 것처럼 방주 안에 있었고, 그 방주 안은 물에 심판 받을 땅을 위에서 지배하고 있었지요. 왜? 물속에 다 잠기고 자기는 물에 동동 떴으니까 위에서 쳐다보면 옛날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했던 사람들이 전부 물에 다 잠겼어요.
주께서 일을 아주 깔끔하게 처리했어요. 내일 또 설교하게 되면 그 내용에 대해서 좀 더 심도 있게 이야기할 겁니다. 모든 인류사는 끝났어요. 땅의 인류사가 끝났다는 말은 땅의 역사의 기승전결도 끝나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오는 새 땅에서의 역사는 기존의 역사와 연결시키면 안 돼요. 그건 반칙입니다. 오는 세대를 보여주기 위해서 없어진 땅 위에 새 땅이 오는 겁니다.
그러면 새 땅이 유지되는 에너지는 어디에서 옵니까? 그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국에서 뽑아낸 에너지를 예고편처럼 미리 당겨서 이 땅에 온 거에요. 그걸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악인과 선인에게 햇빛과 공기를 준다” 김정은도 생수를 먹는다니까요. 김정은도 심장이 뛰고 있어요. 그 악한 인간도 햇빛을 마시고 있습니다. 왜 그래요? 그 악한 사람에게 그러한 혜택을 주지요? 죽여버리지 않고. 제가 오늘 강의 처음에 말을 했는데 다시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학력이나 지식이나 돈 같은 것의 차이를 안 뒀지요. 하나에 예속된다고 했지요. 왜? 이스라엘 자체가 한 아들이니까요. 여러 아들이 아니에요. 하나의 단일 집단으로 보는 거에요. 단일 집단이기 때문에 40만이 있더라도 하나의 원칙에 예속되어야 됩니다. 그 하나의 원칙이 뭐라고 했습니까? 어린양의 피지요. 하나님의 심판하는 천사가 문설주에 발라진 어린양의 피만 확인하는 거에요.
심판이 아주 간소해요. 기도 많이 했느냐, 십일조 했느냐는 묻지도 않고 어린양의 피가 묻은 것만 봐요. 하나님의 뜻은 일괄되게 갑니다. 그처럼 노아의 방주 사건이 끝나고 새 땅이 되어서도 장차 예수님이 행하시는 그 원리를 미리 앞당겨서 땅에다가 꽂아놓고 심어주는 바탕의 효용도 때문에 땅이 있는 겁니다. 이렇게 사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유지되고 햇빛과 공기를 주는 것을 무지개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걸 조직신학에서는 자연계시라고 하고 일반은총(바빙크)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일반은총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무지개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악하냐, 선하냐, 착하냐, 경건하냐, 네가 이란 사람이냐, 북한 사람이냐, 한국 사람이냐를 전혀 따지지 않습니다. 몇 년 전에 인도네시아에 큰 해일이 났을 때 분명히 죽은 사람 가운데에 하나님의 성도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있지요. 있는데 해일이 등장해버리니까 다 죽었지요. “나, 성도입니다. 왜 이러십니까? 주여.” 이런 거 없어요. 같이 휩쓸려서 같이 죽어 버려요. 성도가 아닌 우성도(우씨는 실명을 거론해서 죄송합니다.)라도 안 돼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모든 인간은 십자가 앞에서 다 잘났다는 소리를 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겁니다.
노아가 방주 안에서는 살았지만 노아 자기가 살던 고향은 물속에 잠겼지요. 그 고향은 노아 본인이 살던 고향이잖아요. 결국 노아는 그 땅과 함께 죽어야 되지요. 노아를 살리는 것은 노아의 믿음이 아니고 그 비행물체 같은 방주가 노아를 살리는 겁니다. 이걸 한 번 가상해 봅시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잖아요. 그런데 본인이 자기가 만든 그 방주에 안 들어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기도 심판을 받을까요, 안 받을까요? 받습니다. 내가 좋은 답변을 얻었다고 고함을 지르는데요, 이게 왜 좋은 답변이냐 하면은 내가 그 다음 질문을 해볼게요.
어떤 장로가 자기 기업체의 땅을 바쳐가지고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그 사람은 구원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예배당 지은 것으로 구원을 받을까요, 안 받을까요? 못 받지요. 그러면 그 장로는 누구를 믿어야 돼요. 자기가 내놓은 별도의 것들을 신경써야 됩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봐야 됩니까? 십자가만 바라봐야 되지요. 그러면 돈을 내나 안 내나 십자가만 바라보면 구원을 받지요. 그런데 돈을 왜 냅니까? 해도 소용이 없는 짓을 왜 하느냐 이겁니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하겠지요. “구원을 받았으니까 우리 후손들을 위해서 내가 예배당을 지어야지..” 그런데 사람은 한 번 자기가 행동을 하게 되면 거기에서 자기의 의미를 지울 길이 없어요. 이게 화근이 돼요. 이게 자기의 손가락으로 자기의 눈을 찌른 셈이 됩니다.
제가 지난 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하여튼 교회 말썽은 봉사하는 사람들이 한다고 했지요.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렇게 나는 봉사하는데 너는 왜 안 하느냐라고 할 것 같으면 아예 봉사하지 말라고 했지요. 그래서 우리교회는 봉사를 아무도 안 하는데요. 그런 사람은 봉사하지 마세요. 사람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게 되어 있어요. 그것 때문에 주께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는 거에요. 붕 떠야 된다는 거에요. 단절 당할, 멸망 당할 이 땅에서 떠나야 되는데 그냥은 못 떠나요. 예수님이 왔던 코스대로 떠나야 돼요. 예수님이 죽고 부활했다면 너도 이 땅에서 죽고 부활해야 돼요. 안 죽고 부활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죽어야 되는데 죽는 방법은 자살 같은 게 아니고 산상설교로 죽여버려요. “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았어, 몰랐어?” “알았어요.” “가, 지옥으로.” 이게 주의 방법입니다. “네가 남을 판단했어, 판단 안 했어?” “판단했어요.” “이게 어디에서.. 너는 온전히 말씀을 못 지켰기 때문에 지옥에 가야 돼.” 이게 노아의 입장에서는 물심판, 홍수를 퍼붓는 과정입니다. 말씀대로 물을 움직이고 그 홍수(물)가 마치 율법 같은 기능으로 이 땅에서 살고자 하는 이 현실판을 덮쳐버리지요. 이렇게 보게 되면 성경은 아주 간단해요. 알지도 못한 외부에서 날아와서 우리를 납치하듯이 데려간다. 끝. 굉장히 간단해요. 분명하고도 간단한데 꼭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기다려도 안 데려가면 어떻게 합니까?” 그럼 답변은, “네가 뭔데 네가 구원 되기를 고대하느냐? 네 주제 파악이 안 되었다. 네가 정말 너를 안다면 ‘구원 안 해줘도 되고요, 지옥에 보내도 괜찮아요. 주님의 뜻이라면 지옥이라도 제가 서슴없이 가드리겠습니다. 저는 죄인이니까요.’라고 나와야 된다.”입니다. 그것을 로마서 11장에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불순종 가운데에 가두워 두심은 오직 긍휼로만 구원 되기 위함이라” 아주 간단하게 나오는 이야기에요. 어떤 한국에 있는 고신측 출신의 목사님인데 이 이야기를 듣고 그걸 미국에 가서 박사학위 논문으로 썼어요. 『출애굽기 10장에 나오는 바로의 강퍅함에 대해서』가 그 논문의 제목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11장에 보면 바로를 강퍅케 하시는 이유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불순종 안에 가두어 두셔서 오직 긍휼로만, 긍휼로만 다른 말로 하면 오직 은혜로 남은 자만, 일체 행함이 섞이지 않은 은혜로 남은 자만 건지기 위한 작업이고 그 작업에 모든 인간이 이미 다 말려 들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을 다시 요약해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현실판이 현실이라고 우리는 철떡같이 믿었는데 예수님이 오셔가지고 위로 올라오면서 같이 대비를 해보니까 이 현실판은 진짜 예수님이 몰고 오는 이 진짜 현실판(이걸 실재라고 합니다.)에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거에요.
가짜를 만든 이유는 진짜가 밑에서 올라오고 진짜를 몰고 오신 분은 예수님이신 것을 더욱 더 부각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주님이 주 되시기 위해서 우리는 가짜가 진짜라고 그렇게 착각하면서 살게 했다 이 말입니다. 그걸 방금 실재라고 했지요. 우리가 그걸 믿으나 믿지 않으나 항상 거기에 있는 것을 실재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한쪽 벽면이 전부 다 책이라고 상상합시다. 우리 집사님이 공부를 되게 많이 해서 책이 쫙 꽂혀있습니다. “김대리, 책 한 권 찾아봐라.” 그래서 김대리가 책을 찾는데 책이 하도 많아서 못 찾겠는 거에요. 그래서 머뭇거리는데 “여기에 있잖아.” 하고 뽑아놓으면 “아, 거기에 있었네.”라고 소급해서 뒤늦게 알지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지옥에 갈 사람이 따로 있고 천국에 갈 사람도 따로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알아요, 몰라요? 모르는 거에요. 모르면서 우리는 자꾸 더듬거리면서 찾기만 하는 거에요. ‘내 이름이 어디쯤 있나? 내 이름이 어디쯤 있나?’ 아무리 노력해서 찾아도 못 찾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까 개인을 구원하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단일화된 단체를 구원한다고 했지요. 왜 단체를 구원한다고 했습니까? 어떤 개인의 개성이 많더라도 예수님이 계시한 그 원칙에 의하면 그 모든 개성과 그 모든 dna의 차이나는 것을 깡그리 덮어버리고 오직 십자가 하나에 종속된다고 했지요.
그 십자가 지신 분이 오셔가지고 “십자가 져서 구원 될 애가 여기도 있네.”라고 하게 되면 ‘아, 거기 있었구나. 내 이름이 거기에 있다는 말이 아니고 주께서 택한 자가 거기 있었네. 주님에 의해서만 우리가 알려지네.’라고 받아들이면 그 사람은 소급해서 이름이 기록 된 성도가 되는 거에요. 말을 해놓고도 내가 어렵게 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렵게 할 수밖에 없어요. 이보다 더 쉽게는 못합니다. 내가 거기에 있어서 내가 찾아내는 게 아니에요. 주님이, “여기 있잖아.” 이런 식이 아니고 주님은 항상 우리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주님은 주님의 이름으로만 실시해요. “전체 이스라엘이 여기 있잖아.”라고 할 때 성령을 받아서 “주께서 그렇게 하십니다.”라고 고백한 사람만 그 집단에 포함된 개인이 되는 거에요.
그런데 개인으로 출발해가지고 “나도 끼워넣어줘.”라고 하게 되면 그것은 메시아론이 아니고 개인적인 구원론이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은 탈락이 되는 겁니다. “나 예수 믿어서 구원 받았어.”라고 천국에 가서 자기 자랑을 할 거에요. 그러나 천국에 가면 개인으로 자랑할 것을 완전히 없애버렸습니다. “나는 열심히 믿었어.” “아니야, 나는 조금 믿었어.” 상급에 차등이 있지 않아요. 어떤 믿음도 개인적으로 믿은 믿음은 다 탈락이 되어 버리고 주께서 주신 믿음만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어요. 내 믿음을 끄집어내봐야 주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고 네 믿음을 끄집어내봐야 주님이 선물로 준 믿음이에요. 어느 누구도 자기의 것을 자랑할 게 없어요. “오직 자랑할 것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는 자랑할 게 없다” 그걸 바로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교회”라고 하잖아요.
교회가 되기기 힘든 게 아니고 교회는 불가능합니다. 교회는 주님이 와서 지적을 해줘야 되지 우리가 교회를 찾아가는 게 아니에요. 만들기를 시도하는 게 아니에요. 그건 항상 실해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실패하는 가운데에서 배경으로 실재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요. 실패 가운데에서 비로소 진리가 뽑혀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항상 소급적으로 되어집니다. 내가 실시한 그 순간부터가 아니라 그걸(실패) 통해서 뒤돌아보니까 전부 주께서 이미 다 나한테 그런 식으로 몰아넣도록 조치를 해주신 것을 알게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실패를 기준으로 그전까지는 내 행함이고 지금부터는 내 믿음이 아니라 처음부터 나는 아무것도 행한 것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일날 설교에 몽땅 바꾸라고 했잖아요. 몽땅 바뀌면 내 인생이 내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이 되잖아요. 그러면 내가 걱정할 수 있는 남아있는 내 인생이 없어져 버려요. ‘비 안 온다고 우산을 안 가져왔는데 비가 와서 어떡하지?’라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를 맞아도 내 인생이 아니고 비가 내리는 것도 내 뜻이 아니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아무 걱정도 할 필요가 없어요.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지요. 오늘같이 폭풍 가운데에서 “네가 로마에 가 있어야 된다”라고 했잖아요. 그걸 생각해보면 앞으로 할 일도 주의 일이고 로마에 가는 것도 주의 일이에요. 그러면 자기의 계획이라든지 자기의 기대라는 게 남아 있지를 않아요. 그런 자기의 기대도 없으니까 걱정할 건덕지가 같이 없어져 버리는 겁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목사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굉장히 걱정을 많이 하시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교인들의 운명은 목사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손에 달려 있어요. 주께서 지금 목회를 잘하고 계시는데 목사가 자기 목회가 안 된다고 해서 목회 실패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기대를 따로 챙긴 게 되는 거에요. 그런 걱정은 오는 세대에서 물에 전부 다 잠겨버려야 되는 거에요. 그럼 걱정할 게 없으면 할 것도 없느냐는 문제가 생기겠지요. 걱정할 게 없으면 ‘걱정할 것 없다, 걱정할 것 없다.’ 이것만 합니까? ‘난 걱정이 없어. 아무 걱정이 없어. 지금 불이 타올라도 걱정이 없어. 지금 온 아파트에 불이 나도 난 걱정이 없어. 이불장에 24장 깔아놓아서 그걸 찾을 필요도 없어. 아무 걱정이 없어.’ 이래야지 되겠어요?
해외에 나가 있는 제 딸이 저한테 동영상으로 묻는 거에요. “우리 교회 목사가 기도는 형식을 가지고 해야 된다고 하는데 분명히 저건 엉터리다. 그런데 반박을 어떻게 하면 돼요, 아빠?” 그래서 제가 성경을 잘 모르는 딸이니까 단촐하게 1,2,3으로 이야기해줬어요. 1. 기도는 예수님만 한다.(히브리서 7장 25절) 오직 주께서 기도하심으로써 우리가 구원을 받는 거다. 2. 성령님만 기도한다.(로마서 8장 26절~28절) 우리가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아버지의 마음을 아시는 분(성령)이 친히 기도함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룬다. 3.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를 안 하면 못 배기도록 하시는 이유는 우리 속에 평소에 담겨있는 죄가 기도라는 형식으로 구토를 하는데 그 구토물을 보게 되면 하나같이 (예수님은 말씀으로 기도하는데 우리의 기도는) 말씀은 전혀 없이 나의 욕심과 욕망과 아담의 죄만 토해놓는데 이러한 죄만 토해놓으라고 주께서 기도케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하시는 거다.
애가 아픈데 기도 안 할 수가 있습니까? 사업이 안 되는데 기도를 안 할 수가 있습니까? “주여 살려주옵소서.”라고 기도하겠지요. 저는 드라마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데 세상 풍조를 알아야 되기 때문에 억지로 봅니다. 그런데 보다가 도저히 재미가 없어서 안 보는 드라마가 있어요. “태(양의) 후(예)” 이건 정말 짜증나는 드라마에요. 왜냐하면 군대 이야기가 나와요. 나는 군대 이야기가 나오면 짜증이 나요. “군대는 말입니다.” 나는 군대는 말입니다가 싫은데 그 중에 딱 하나 건질 게 있어요. 송혜교의 차가 우르크 절벽에 기울어져요. 차가 까딱거릴 때 다급해서 송중기한테 살려달라고 전화를 걸잖아요.
그게 바로 평소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음가짐이에요. 예수고 하나님이고 삼위일체고 백날 해도 우리에게는 딱 하나만 들어있어요. “살려주세요. 뽀빠이.” 평생을 두고 반복해서 하는 모든 헌금과 기도와 교회 다니기, 열심히 성경 공부하기의 방향은 딱 한 가지밖에 없어요. ‘남은 죽든 말든 저는 살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예수님과 정반대입니까?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보존하리라”(요한복음 12장 25절)라는 말씀과 대충돌을 일으키잖아요.
그런데 젊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딱 하나밖에 없어요. 되지도 않는 종교 기술을 누룽지 긁듯이 딸딸 다 긁어서 던져보세요. 남는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살려주세요. 뽀빠이.” 이것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교회는 그들을 붙들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살고 싶은데 못 사는 이유는 박근혜가 잘못되어서 그렇다.”고 정치적으로 몰아갑니다. 그러면 성령의 모임인지 정치 모임인지가 분간이 안 되지요. 그 다음부터 세월호 이야기 나오지요. 그리고 전에 새누리당 총재했던 사람의 아들이 마약한 이야기부터 해가지고 정치 이슈가 다 튀어나오는 거에요.
그러면 그들은 어린양의 피에 예속되는 것이 아니고 정치적이 불만에 예속이 되겠지요. “이번에 찍어서 선거 혁명을 일으켜야 돼.” 그러면 그들은 정의를 부르짖는, 정의가 강같이 흐르는 참 거듭난 성도라고 우기겠지요. 그러면 목사는 좋지요. 우기든 말든 관계 없이 교인들을 붙들고 있으면 돈이 되고 또 나중에 목회자로서 자신의 위상이 생기니까 속으로는 씽긋이 웃고 있고 자기들은 정치토론한다고 “문제인 또 나와야 돼.”라고 하면서 시간 다 보내고 카톡 막 보내고 좋지요. 그걸 다 뜯어보면요 딱 하나밖에 없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그렇게 데모할 때 앞장 섰던 학생들이 삼성 그룹에 들어가 보세요. (자기가 속해 있는 삼성 말고) 현대 조지고 현대에 들어가면 삼성 조진다고 난리가 나요.
그래서 환경은 주체를 바꿉니다. 환경에 맞도록 해버려요. 예수님은 새로운 환경을 몰고 왔어요. 이것은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환경이 바다에서 올라오는데 낯선 것이 아니고 원형적인 거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창세기 3장 이후부터거든요. 그러니까 창세기 1장에 있던 환경에는 인간이 없어요. 왜? 예수님과 아버지밖에 없으니까요. 또 하나님의 신이 어두운 가운데에 운행했고요.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만이 아는 내막이에요. 예수님이 오실 때에 그 원초적이 내용이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상황으로 들이닥치니까 메시아론에 입각했던 그 이스라엘 사람들은 “저 사람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하고 굉장히 낯설어 하는 거에요.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 듣는 거에요.
여기에서 오늘 본문과 관련된 용어 하나가 같이 올라옵니다. 그 용어가 “양”이에요. 이제 한 번 봅시다. 26절에 “너희는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했지요. 사람을 보고 양이라고 하면 돼요, 안 돼요? 안 되지요. 양을 보고 양이라고 하면 말이 맞는데 사람을 보고 양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 중간에 생략한 게 있습니다. “너희는 내 양이 아니요”라는 말은 쉬운 현대말로 고치면 “너는 인간도 아니다.”라는 겁니다. 그 말을 구약 성경에 입각해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사람이라고 해서 사람이라고 쳐주지 않아요.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연관되어 있는 관계망 속에 있을 때 사람이 되는 겁니다. 목자의 양이 될 때만 하나님 앞에 사람으로 인정을 받아요.
그걸 시편에서는 인자라고 합니다. 인자를 풀이하면 사람의 아들, 쉽게 말하면 진짜 아들이 돼요. 그래서 구약 성경에 보게 되면 이방인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개입니다. 그래서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서 “나는 잃어버린 양을 위해서 왔다. 나는 개한테 주지 않는다.”라고 하니까 “저 개 맞고요.”라고 하지요. “저 개 맞는데 행여 티오가 남은 게 있을지 알겠습니까? 아들이 먹다 버린 것을 먹을 수 있으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가 떡이라면 그 떡을 이 개 같은 나에게 주게 되면 저는 개가 된 입장에서 구약 성경의 관계망 속에 포함이 될 수 있지 않습니까?”라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아들이 되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저도 주님이 보시는 그 같은 안목에 넣어주세요.”라는 뜻이에요. “주님이 세상을 보시는 그 현실을 저도 같은 현실로 볼 수 있는 하나의 일부로서 집어넣어주세요.”라는 뜻입니다. 이게 바로 장차 신약에 오게 되면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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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장 26절(가락-없음)160503b-이 근호 목사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하였으므로 메시아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우리가 생각하는 메시아하고 예수님이 생각하는 메시아하고 차이점을 언급을 한 적이 있어요.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양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양의 개념은 “나 양입니다.”라고 손을 든다고 양이 아니고 먼저 목자가 “너는 양이야.”라고 인정을 해줘야 양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목자가 어떤 목자인지 10장 15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죽음을 통해서 목자(메시아)가 발생되고 그 메시아의 행위를 이해하는 자만이 양이 돼요. 죽음을 통해서 목자도 생산되고 양도 같이 생산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기존의 메시아 노선하고 다르지요. 아까 충돌된다고 했잖아요. 다르다는 겁니다. 그러면 기존의 목자 개념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지요. 이스라엘은 목자(선지자)가 있습니다. 그러면 기존의 양의 개념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기존의 양의 개념도 있지요. 기존의 메시아론을 갖고 있는 유대인들이 현실판 속에서 자신을 양으로 보지요.
아까 이야기를 빨리 했습니다만 천천히 해보겠습니다. 원형이라는 말은 인간은 배제하고 난 뒤에 성부와 성자만 참여했던 그 창조에 본래 담겨 있는 원리와 원칙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런데 목사님은 왜 자꾸 성부와 성자만 이야기하고 성령은 빼십니까?”라고 하는데 잠언서 8장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과 지혜로 창조하셨는데 그 지혜가 예수님이에요. 그리고 요한복음 1장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내가) 하나님(아버지)과 함께 계셨으니”라고 했잖아요. 함께 지으신 거에요. 왜 성령을 빼느냐 하면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그 창조에 모델이 있어요. 예수님을 모델로 해서 천지를 창조하신 거에요.
그러면 그 모델이 뭡니까? 죽었다가 살아남으로 주가 되시는 모델을 모델답게 하기 위해서 모든 피조물들은 만들어졌습니다.(골로새서 1장 16절)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오직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졌어요. 그것이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완전히 달라진 점이에요. 전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복음을 알고 난 뒤에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을 알게 되었어요. 누가 그것을 동의해요? 하나님 아버지가 동의한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너무 찾는다고 하다가 지옥에 가지 마세요. 아버지가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 2인자로 간주해가지고 재벌 아들은 치우고 나는 재벌 총수하고 놀겠다고 자꾸만 아버지한테 가요. 소위 신학교수들이요. 총신 교수들로부터 해가지고 장신교수들.. 소위 교수라는 자들이 말이에요. 교수라는 사람들은 개척교회가 싫어가지고 도망간 비겁한 사람들이에요. 말씀을 알면 개척교회를 하면 되는데 개척교회를 하면은 밥을 못 먹고 살거든요. 그래서 독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가지고 나중에 신학교에 취직하려고 하는 거에요.
그렇게 다시 와서는 한국 교회의 기복신앙이 어떠니 하고 잘난 체하는 거에요. 목사들은 우리한테 한 수 배워라. 내가 답답해서 벌써 몇 십 년 전에 썼지요. 신학교수의 10가지 무지한 점에 대해서요. 자기들도 다 봤을 거에요. 봤으니까 내 옆에 있을 때 그런 소리를 했을 거라고요. 개척교회를 할 만한 자신감은 없고 그저 공부를 많이 해서 신학교수로 취직을 할 생각만 하고 있어요. 사대보험 다 되잖아요. 신학교에서 1년에 보너스를 300% 준다지요. 그래놓고 주를 위해서 한다는 거에요. 기껏 하는 게 이사야를 인용해요. “다 목사겠느냐, 학자의 영을 받았다.”는 거에요. 세상에 그런 엉터리 같은 해석이 어디 있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십자가 피 앞에 목사니, 학자니, 장로니, 집사니 그런 구분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피만 바라봅니다. 그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에요. 그러면 왜 어떤 사람은 집사이고 어떤 사람은 장로입니까? 그것은 집사가 되는 식으로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목사가 되는 식으로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어떤 사람은 장로가 되는 식으로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어떤 사람은 권사 시번했다가 시번에 다 떨어지는 식으로 죄인인 것을 고백하라 이 말이지요. 어떤 사람은 전도사하다가 그만 두는 식으로 고백하기도 하고요. 모든 각자의 개성들은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지요.
이미 이스라엘에 양과 목자의 개념이 있습니다. 이것이 원초적으로 올라와요. 예수님과 아버지만 아는 그 비밀이 올라옵니다. 세상 모든 피조물들은 예수님과 관련성이 있게 천지가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그게 정답인데요, 그 누구도 예수님과의 관련성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껏 아는 것이 있는데 “해는 해에게 말하고 달은 달에게 전하니” 인간을 빼놓은 피조물들은 예수님을 알아요. 그리고 또 예수님을 아는 피조물이 마귀에요. “예수여 우리를 멸망시키러 왔나이까” 마귀는 창세기 3장 15절에 근거해서 마귀를 아예 멸망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이 왔다는 것을 알아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자의 역할은 뱀의 후손의 머리를 치는 거에요. 그러면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어야 돼요. 우리라면 예수님의 발꿈치에다가 밴드를 하고 안 물리도록 조절을 하겠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물려야 돼요. 그래야 메시아에요. 독에 물려 죽어야 그분이 메시아에요. 그게 창세기 3장 15절에 이미 처음부터 언급한 하나님의 약속이고 그 약속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만이 아시는 것이고 인간은 몰라요. 아무것도 모릅니다. 거기에 근거해서 이것이 올라오게 되면 결국 이쪽(현실판)에서의 목자(목자는 목자끼리)와 양(양은 양끼리)과 대비가 되겠지요.
그들은 양이고자 하지만 사실은 양이 아니고 그들이 목자라고 하지만 목자가 아니고 도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있는 양을 ( )를 쳐서 그냥 비워놓읍시다. 그러면 이쪽 우리가 사는 현실판에서 양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양은 없어요. 다만 목자가 아니라고 외치면서 치고 들어오는 목자가 있겠지요. (이걸 self 목자라고 하는데) 스스로 자기를 목자라고 하시는 분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왜 너는 이 목자 그룹에 속하지 않고 단독으로 목자라고 하는냐?”라고 한다면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나는 죽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면 현실판에 있는 목자는 (대비가 되니까) 결국 죽어야 될 목자가 아니고 양을 뜯어먹고 살찌울 목자가 되고 그 목자를 양들이 목자라고 지금 곡해하면서 따르고 있는 입장에 있는 겁니다. 현실교회를 잘 반영해주고 있지요. 교회의 당회장을 공격하면 목사가 화를 내는 게 아니고 그 교인들이 분노해서 화를 냅니다. 왜냐하면 목자를 모시려고 돈을 낸 밑천이 많이 들었거든요. 교황이 완전치 않다고 하면 교황이 화를 내지 않아요. 성당 다니는 사람이 화를 내지요. “우리 파파를 왜 그리 욕하냐, 우리 파파가 얼마나 착한 파파인데..”
그런데 파파는 착한 시험쳐서 되었습니까? 정치적인 힘으로 되었는데요. 추기경이라고 하는 것은 정치적인 자리에요. 정치라고 하는 것은 힘을 얼마나 바운드리에 많이 모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얼마나 순수하냐가 아니고 자기 편을 얼마나 많이 끌어모았느냐입니다. 어차피 투표할 거잖아요. 그렇게 되면 표수가 많은 쪽이 갑이 되고 안 그러면 을이 되는 겁니다. 계속 갑이 되어서 승진이 된 사람이 교황입니다. 그전은 추기경이고 그런 거에요. 우리 누가누가 고아원을 잘 돌보나 시합하자 그래서 주교가 되는 게 아니에요. 줄을 잘 서야 돼요. 그러면 그 줄을 누가 결정하느냐 하면 교인들이 결정해요.
이 신부 싫어요, 저 신부 모셔오세요. 왜? 저 신부는 하바드 대학을 나왔거든요. 이쪽 신부는 고등학교 나왔으니까 이 신부는 치우고 하버드 대학 나온 사람을 하게 되면 하바드 대학을 나왔다고 그 동네 유지와 고학력자들이 그 성당을 다 갈 거에요. 그런데 성당에 간다는 것은 그만큼 부동산이 많이 투입이 된다는 거에요. 그러면 성당이 커지겠지요. 커지면 커진 만큼 갑질을 하고 나중에 주교 자리에서 발언권이 세지면 그 사람이 추기경이 되는 거에요. 그러면 로마 교회하고 연결이 되고요. 이건 뭐 감리교나 장로교나 모든 단체가 그렇습니다.
그걸 이렇게 정리하면 돼요. 교회가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요소는 필히 십자가 복음을 틀어막는 요소가 되는 겁니다. 이게 명제에요. 명제. 교회가 교회를 유지하려고 어떤 시도를 하든지 그 시도는 반대로 십자가 복음을 틀어막는 힘으로 작용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십자가냐 아니면 교회냐 둘 중에 하나가 되어야 돼요. 십자가 복음을 전해서 교회를 만드는 그런 꼼수는 쓰지 마세요. 그런 꼼수는 안 통해요.
교회는 한 군데밖에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없어요. 고린도에 있는 교회들이에요. 에베소에 있는 교회들이에요. 교회가 많다는 말은 교회가 한 군데밖에 없다는 겁니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하늘에 있는 천상교회 하나밖에 없어요. 분점이 아닙니다. 본점이 있고 분점이 있는 게 아니에요. 머리가 되시는 분의 지체로서의 교회,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하나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네 교회, 내 교회라고 하는 것은 말이 성립이 안 됩니다. “어디 이 교회를 다니다가 저 교회를 가느냐?” 그게 말이 안 돼요. 어디를 가도 변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이 교회에요.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왔다갔다 해도 괜찮아요. 안 변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에요.
여기(아래의) 양은 비워놓았습니다. 이쪽 현실이 전부이기 때문에 기존의 목자와 양밖에 없어요. 기존의 목자에 대해서 예수님이 공격했지 어느 누구도 양은 목자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목자가 나쁜 목자라도 바꿔치기를 하기를 원하지 목자 자체를 부정할 수가 없어요. 왜? 목자가 없으면 자기들은 구원자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좋든 싫든 목사는 하나님이 다스리지 우리가 어떻게 해?” 맨날 이런 핑계를 대면서 목사가 어떤 짓을 해도 그저 은혜를 은혜라고 해가지고 결국 (목사가) 나갈 때 전별금 다 해줘서 보내요. 또 예배당에서 돈을 해줘야 되는데 장로가 그 일을 해야 돼요. 그래서 뺀질이 집사는 장로가 안 되려고 해요. 돈 내라는 소리를 하면 끔찍하니까요.
목자(예수님)가 이 목자(현실판)를 침으로써 더불어 양을 쳐버려요. 목자도 아닌 것을 목자라고 하는 양도 나쁘다는 겁니다. 어떻게 너를 뜯어먹고 착취하는 목자를 도대체 뭘 보고 목자라고 하느냐는 겁니다. 목자를 쳤다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해서 목자인 것을 양들아 너희들은 파악했느냐?”라고 묻는 겁니다. 그런데 파악을 할 리가 있습니까? 파악을 못하지요.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면 양들아 너희들은 말씀에 근거해서 양이 맞는지를 스스로 돌아보았느냐?”라고 묻는 거에요. 돌아보기는 뭘 돌아봐요. 안 돌아보지요.
그러면 이 세상에는 인간이 없는 거에요. 인간 자체가 없는 거에요. 인간이라는 것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이 되어야 되고 예수님과 연관이 된다는 말은 예수님이 주신 말씀, 언약과 연관성이 있어야 되는데 이들은 자기 개인적인 구원의 욕구 때문에 목자를 만들어놓고 “얼추 구색을 맞추어놓았으니까 하나님께서 교회, 이스라엘로 인정해 주시겠지.”라고 하면서 버티고 있는 거에요. 그동안 얼마나 징후들이 많습니까?
제가 방금 징후라는 말을 했는데요, 징후라는 말은 숨겨진 의미가 있는 사건들이 바깥 표면으로 나올 때 그걸 징후라고 하는 거에요. 정신분석학에서 그렇게 이야기해요. 증상입니다. 감기에 걸리면 기침을 하고 열이 나지요. 늘 그런 것은 아니고 감기에 걸렸을 때 그렇지요. 그러니까 기침과 열은 인간의 신체의 표면에 올라온 감기의 흔적이 남은 것으로 증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 감기에 걸렸어요.” 이것은 증상입니까, 증상이 아닙니까? “요게 안 아프구나, 입이 살아가지고 큰 소리 치는 것을 보니까..” 그게 아니고 “으어어.” “어디가 아픈데?” “으어어, 말하지 마.” “어유, 감기네.” 이렇게 되어야 증상이지요.
주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에 위반된 증상으로 구약 성경을 깔아서 그들에게 보여준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데 언약궤를 뺏기지요, 이것이 증상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를 앞장 세우고 공격을 하려고 했는데 져버렸어요. 그 다음에 조그만 아이 성을 침략했는데 얕잡아 보다가 지고 36명이 죽었잖아요. 이것이 증상입니다. 구약의 사사기에 보면 이방민족한테 억압을 받지요. 8년간 숨쉬고 20몇 년간 억압 받고 그렇지요. 이것도 증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를 돌로 쳐죽이지요. 이게 증상입니다. 불길해요.
대표적인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에 땅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몽땅 거덜이 나가지고 하나님의 성전은 불에 타버리고 언약궤도 불타버리고 언약궤에 있는 제사 기구들은 바벨론 제국이 와가지고 강탈해가지고 마르둑 신전에다가 두는 것, 이것이 증상입니다. 뭔가 낌새가 어둡다는 거에요. 거기에 등장한 게 있는데 그것이 스가랴, 다니엘과 같은 묵시(계시) 문학입니다. 해석을 해도 해석이 안 됩니다. 단어는 있고 이 단어가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단어인데 그 단어의 의미가 응축이 되고 전이가 되어 버렸어요. “네가 백날 파보고 연구해봐라. 원어 분석 백날 해봐. 안 가르쳐주지.”라고 마치 꼬깃꼬깃 저항하는 것 같은 느낌의 단어들이 묵시 용어, 상징으로서 등장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울지요. “흐흐흑.” 왜냐하면 봐도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들으니까요. 그러니까 천사가 와서 “울지 마라 다윗의 자손이 이기었느니라”라고 하지요. 예수님이 어떻게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겼습니까? 십자가 피로 이겼잖아요. “찌른 자도 볼 것이요”라고 요한계시록 1장 7절에 나옵니다. 그 이긴 자로서 푼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모든 요한계시록의 단어와 문장에 뭘 집어넣어 놓고 해석해야 된다고요? 십자가의 의미를 집어넣고 해석해야 된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십자가의 의미를 집어넣으면 다 이루었다가 되는 거에요. 다 이루었다를 다른 말로 하면 이미 구원을 받은 넉넉한 입장에서 ‘내가 어떤 코스를 밟아서 구원이 되었지?’ 하고 기분이 좋은 마음으로써 보는 책이 요한계시록이에요.
그걸 제가 요한계시록 수련회 할 때 가위,바위,보라고 했지요. 가위,바위,보를 같이 내야 되는데 “가위,바위,보.” 하고 안 내는 거에요. 먼저 주먹을 낸 것을 보고 보자기를 내는 거에요. 가위를 내니까 주먹을 내는 거에요. 이건 뭐 하나 마나에요. 한 텀 쉬고 가시는 거에요. 이게 요한계시록입니다. 이미 넉넉하게 이긴 입장, 다른 말로 하면 첫 번째 부활에 속한 입장, 이미 부활한 입장에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지형도나 작전도를 보듯이 보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미 인생을 다 살고 죽었다가 살아난 입장에서 내가 한평생 어떻게 살았지? 라고 돌이켜 보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굉장히 세상 살기가 가뿐해져요.
젊은 사람들이 보기에 노인들이 보기에 굉장히 불쌍하지요? 꾸부정해가지고 참 불쌍한데요. 그런데 결국 여러분들이 다 노인이 됩니다. 노인이 되어서 젊은 사람들을 보게 되면 안타까워요. 왜 그런가 하면 앞으로 고생할 것을 생각하니까.. “아이구, 애가 지금 초등학교 2학년? 아이구 저걸 언제 대학 보내나.”라고 굉장히 걱정이 돼요. 나중에 대학만 가면 됩니까? “앞으로 취직도 못하고 시집도 못 가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이 된다고요. 그런데 내가 아예 노인네라고 생각을 해보세요. 그러니까 껍데기는 아직도 피부가 탱탱하면서 속은 노인의 마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것처럼 아주 초월한 느낌으로 그렇게 사시면 돼요. 그러면 문제가 있을 때에 세상의 풍파를 다 겪은 것처럼 허허 웃지요.
없는 목자가 새로 등장해서 있는 목자를 부정해버리고 그와 동시에 양들도 다 쳐버립니다. 목자도 아닌 걸 목자라고 하는 너희들도 수상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양은 없어요. 목자가 양을 만듭니다. 죽음을 통해서 양이 나와요. 그렇다면 양은 “저 양으로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면 안 되고 내가 어디에서 양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내가 마포대교에서 자살해서 양이 된 게 아니고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 속에서 양으로 기어 나온 겁니다. 따라서 그 양이 양 됨은 항상 어떤 연관성을 가져야 되는데 그것은 십자가 때문에 양이 되었음을 양이 되고 난 뒤에는 평생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되지요. “이미 죽었는데 나는 벌써 살았거든” 이런 뜻으로 살아야 돼요.
이 단어가 아까 중첩된, 이중화된 세계라고 했지요. 겹쳤다 이 말이에요.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이 서로 주고받고 상호 교류하면서 예상밖의 현상들이 일어나는 거에요. 그러기 위해서 기존의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고 그냥 기존대로 살게 되면 툭툭툭툭 예상 못할 현상들이 계속 불거져 나온다는 겁니다. 예상대로 생각한다면 사업을 하든 공부를 하든 이미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거지요.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앞당겨서 미리 창조성을 가질 수 있는 사람만이 제대로 이 세대를 이끌어갈 수 있는 선두주자다라는 식으로 그렇게 설명을 합니다.
예수님 같은 경우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양이 나왔고 그 십자가 죽음 안에 같이 들어있는 것이 있어요. 부활입니다. 그러니까 부활도 십자가 죽음 안에 포함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활이 복음이 아니고 뭐가 복음이라고 했지요? 십자가가 복음이에요. “십자가 + 부활 = 복음”이라는 말은 되는데 더 정확히 말해서 십자가가 복음이고 부활은 그 안에 들어 있어요. 부활은 십자가의 활성도 때문에 생긴 거에요. 십자가 사건을 퍼뜨리기 위해서 부활의 능력이 있는 겁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죽음 때문에 생긴 사건이고 부활은 그 죽음의 힘마저 이겨내 버린 그 힘이 십자가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있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부활의 힘으로 십자가를 증거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알고 부활을 알자는 말은 없어요. 이것은 반칙입니다. 이건 잘못 된 거에요. 부활을 받았으면 부활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증거합니다. 부활은 반드시 십자가를 집어넣어서 하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되면 양됨의 능력은 십자가에서 나오는 능력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이 양을 양이 아닌 양으로 바꾸는 능력이 따로 있겠어요, 없겠어요? 모든 것을 이긴 상태에서 모든 것을 이겼다는 증거물로 양이 나와버리면 그 양에 대해서 누가 타치해서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그런 능력이 남아 있겠습니까, 안 남아 있겠습니까? 남아 있지를 않지요. 그게 오늘 본문 10장 28절에 나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지금 이것을 설명하는 데 이만큼 오래 걸렸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라고 했어요. 28절을 두 자로 줄이면 “없다”입니다. 오늘 강의 제목을 “없다”라고 정해야겠어요.
그러면 믿음은 뭡니까? “없다”를 믿는 게 믿음이에요.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는 게 아니고 주님이 책임지기 때문에 나라도 내 운명을 지옥에 가도록 바꿀 수가 없다”가 믿어지는 거에요. 그러면 옆에 친구가 “너는 무슨 재주가 있어서 그걸 믿나?”라고 하거든요. 그건 나한테 물을 게 아니지요. 왜? 나의 나됨은 주님과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내 인생을 내가 조치하는 게 아니잖아요. 내가 메이크업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소급해서 보세요. 소급해서 보게 되면 난 죽은 상태, 바짝 마른 뼈인데 살아계신 분이 어떻게 어떻게 해서 나를 양이 되게 했잖아요. 뼈가 움직여서 자기 자랑하고 이런 것은 없어요. 바짝 마른 뼈인데 주님이 오셔서 양이 되게 했으면 그 현상을 뒤늦게 소급해서 수용하면 그게 바로 믿음의 내용입니다. “나의 구원은 나의 행함으로 말미암음이 아니요”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술술 나와요. 그러면 옆의 친구가 있다가 “나는 안 되는데?”라고 하는데 그 말에 내가 “나도 옛날에는 안 되었는데 지금은 되네.”라고 하는 거에요. 좀 약올립시다. 그 약올리는 게 전도에요. 전도할 때 “안 되지? 믿지 마. 믿지 마.”라고 하세요. “아우 믿고 싶어.” “아니야, 너는 끝났어. 안 돼. 안 돼.” “조금만 가르쳐줘.” “안 돼. 나도 어쩔 수 없어. 나도 내 마음대로 안 되었었어.”
사도 바울이 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했는지 아시겠지요? 사도 바울, 빌립 집사, 스데반 집사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성령 충만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아서 오는 세대에 속하니까 옛날 세대도 알고 오는 세대도 둘 다 알아요. 그러니까 느긋해서 하는 말이 “주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느긋한 입장에서 여유롭게 용서가 되는 거에요. 저들은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한다는 거에요.
전에 언젠가 강의를 할 때, 대구강의인가요, 전도할 때 그냥 “지옥 가지 마세요.”라고 전도하지 마시고 “어어어, 그렇게 가면 안 되는데?”라고 하라고 했지요.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것을 그렇게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누가 누구를 부러워해야 돼요? 안 믿어지는 사람이 믿어지는 사람을 부러워해야 돼요. 사실은 부러워하면 이미 믿는 사람이지만요. 부러워한다는 것은 뭔가 감을 잡은 사람이에요. 촉이 온 사람이에요. 그런데 부러워하기는커녕 “미쳤나?”라고 하지요.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아무도 나에게서 빼앗을 수가 없다”라고 되어 있는데 사도 바울은 이 말의 취지를 달리 표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4절을 봅시다.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누가 정죄하리요” 정죄를 받지 않을 근거는 무엇입니까? “죽을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정죄하지 않았다고 이미 간이 판결을 내렸어요. 그 판사님, 최종적인 심판주가 미리 당겨서 와가지고 “너는 죄 없다.”라고 소급해서 판결을 다 내려버렸다는 말이에요.
이게 어려운 거에요. 이렇게 정말로 의인으로 주님으로부터 판정을 받은 사람 옆에는요, 반드시 마귀들이 들끓게 되어 있어요. “네가 착각해서 성경을 보고 억지로 ‘나는 정죄함이 없다’라고 열댓 번, 천 번을 해서 그렇게 되었지?”라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너는 어떻게 해서 정죄함이 없었는데? 기도를 얼마나 오래 해서 네가 의인이 되었는데?” 자꾸 행함을 가지고 들이대요. 왜? 마귀가 행함으로 들이대기 때문에요. “네가 반성을 몇 번 하고, 회개를 몇 번 하고 어느 목사의 설교를 듣는데?” 계속해서 어떤 행함을 이야기해요.
그러면 성도는 로마서 8장의 말씀대로 할 뿐이에요. “주께서 우리 대신 죽었기 때문에 아무도 이 죽으심을 취소할 수 없다.” 왜? 목자의 죽으심의 열매가 양(성도)으로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이 갖고 있는 의가 젤리처럼 축 늘어진 거에요. 말랑말랑한 사탕을 늘이면 늘어지잖아요. 목자가 갖고 있던 의를 쭉 늘인 것이 성도의 의가 되는 거에요. 그걸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예수 안에서 의”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도 하나님의 의이고 거기에서 쭉 늘어진 우리도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런데 이 근거는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아버지 앞에서 예수님 홀로 다 이루신 자기의 업적, 말씀의 성취 때문에 그렇게 된 거에요. 그렇기에 우리를 보고 탓을 하면 안 돼요. 진짜 우리는 억울해요. 괜히 성도(의인)가 되었어요. 아무것도 안 하고 의인이 되었는데 자꾸 옆에서 시비를 거는 거에요. “성경 몇 독 했어, 방언 몇 시간 했어, 십일조 어떻게 했어, 선교 헌금 얼마 냈어, 전도는 몇 명 했어, 가정은 전부가 신도가 되게 만들었어, 봉사는 어떻게 했어, 고아원은 몇 번 돌봤어?”라고 온갖 것을 다 끄집어내는 거에요.
아까 빨리 했기 때문에 복습하는 차원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믿을 때 뭘 믿으라고 했습니까? “없다”를 믿으라고 했지요. 그 다음에 로마서 8장에서는 무엇이 없다고 했습니까? “정죄함”이 없다고 했지요. 세례명(이름)을 “없다”라고 바꿔야 돼요. 아예 없는 거에요. 죄도 없고 영생을 빼앗길 리도 없어요.
그러면 꼭 이렇게 물어요. “목사님 그러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되네요.” 내가 참 환장을 하겠어요. 몇 번을 설명해도 돌아서면 마찬가지인데요. 무엇을 노동했기에 없는 데에서 생겼다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남아가지고 아무것도 안 해도 생겼으니까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전에는 뭘 꿈지럭거려야 생겼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기도를 해야 기도의 응답이 생기고 전도를 해야 복을 받고 헌금을 해야 복을 받는 것이 세뇌가 되어가지고 전도, 헌금, 교회 봉사, 교회 출석, 아무것도 안 하면 안 되는 줄로 알고 있는 거에요. 그 자체가 하나의 교회인 줄을 모르고요.
그러면 뭘 하면 됩니까? 뭘 하면 되는 게 아니고 뭘 시켜요. 예수님이 다 해주셨잖아요. 그러면 생각해보세요. 왜 우리가 나서서 내 구원을 설치지 않고 오죽 못났으면 예수님이 대신 다 했겠습니까? 이미 일을 다 처리해놓고 리와인드를 하는 거에요. 우리가 도대체 무슨 짓들을 했기에 주님께서 일체의 행동에 대해서 묻지도 따지지도 문제를 삼지도 않고 십자가로만 구원을 했는지를 cd를 틀어놓고 주께서 우리가 한 행동들을 다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가져간 죄를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 다시 풀어내게 되면 그 풀린 죄에 따라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되면 그것이 우리의 남은 인생입니다.
주께서 수거한 그 쓰레기를 다시 구원 받은 우리한테 안겨주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쓰레기짓을 하는 거에요. ‘아, 이 쓰레기 같은 짓 때문에 구원해주셨구나.’ 이 쓰레기 같은 짓이 바로 열심히 기도하기, 전도하기, 꽃꽂이 하기, 피아노 바치기, 새벽 기도에 나와서 애 대학에 들여보내기 등등이에요. 이게 왜 쓰레기짓인지를 그때는 몰랐는데 십자가가 성령을 통해서 침투할 때마다 ‘사람이 오른손으로 무슨 일을 하게 되면 반드시 이것이 무슨 의미로 남는구나.’를 알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육체 속에 각인이 되어 있는 거에요.
산상수훈에 보면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며은 “도무지 맹세하지 마라” 하여튼 뭘 걸고 맹세하든지 (뭘 거는 게 문제가 아니고) 도무지, 일절 맹세하지 마라에요. 미래의 설계는 네 몫이 아니라는 거에요. 미래의 설계를 하지 말라는 것은 평생동안 그 짓을 하라는 뜻이에요. 이제 말이 통하지요. 이제 말이 통한다고 믿고 싶습니다. 여태까지 “이번 주에는 무슨 행운이 찾아와야 되는데..‘라고 하면서 벌벌벌 떨면서 기도했는데 이제는 평생동안 그 짓을 하라는 말이지요.
성도는 결국 그것이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주께서 다 가져갔던 그 죄, 주께서 죄라고 규정했던 그 죄를 내놓습니다. 내놓을 때 사도의 권면과 율법을 통해서 내놓지요. 아까 사도의 권면을 봤지요. 에베소서 4장 32절,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라고 하지요. 이 말씀을 들으면 이 사도의 권면이 우리의 죄를 유발하기 위해서 말씀을 통해서 다시 끄집어 나오지요. 그러면 우리는 말씀을 듣고 무엇을 합니까? “주여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옵소서.”라고 하면서 사랑을 하지요.
그런데 꼭 자기의 마음에 드는 사람, 이쁜 아가씨만 사랑해요. 못 생긴 사람은 전도도 안 해요. ‘너 같은 것은 복음 들을 가치도 없어.’ 꼭 이쁜 사람, 돈 많은 집 아들, 성격 좋은 아이들에게만 관심을 둬요. 교회에 어떤 사람들만 모이느냐 하면 서로 생각이 같고 급이 비슷한 사람끼리 모이게 되어 있어요. 꼭 쳐진 사람들은 자기가 알아서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참 위험한 말이다마는 할 수 없어요. 꼭 배운 사람들은 배운 사람끼리 모이고 없는 사람들은 없는 사람끼리 위로한다고 또 모이고 그래요. 흑인들 교회는 흑인들만 모이고 백인들은 백인대로 하는 거에요. 그리고 어깨동무 하고서 하는 말이 “형제, 자매 사랑합니다.”라고 합니다. 사랑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요. 자기들 취향에 맞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요. 패가름, 편가름은 사람이 유아 때부터 가지고 있던 자기의 성향이고 부모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도저히 그걸 바꿀 수가 없어요.
그 다음에 계속 봅시다. 28절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라고 했지요. 예수님이 이렇제 자신만만한 것은 그전에 이미 아버지하고 이야기가 끝났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아버지한테 기도하지 말라는 거에요. 아버지 폐하의 알현은 나만 하지 너희들은 아버지를 볼 능력이 안 되고 보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아버지 앞에 나설 수 있는 자격이 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할 때 예수님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예수님하고 의논이 돼요. 어른들이 이야기하는데 뭣도 모르는 아이들이 끼어들면 안 되지요. “너는 뭣도 모르고 끼어들지 마라”라고 내놓잖아요. 자꾸 우리가 끼어들면 안 돼요. 끼어들면 자꾸 내보내요.
그러니까 기도는 우리 맘대로 하되 전부 아버지의 기도 응답대로 뜻이 이루어져 가고 있어요. 그걸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우리는 고맙게 여겨야 됩니다. ‘아,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다 아버지한테 예수님께서 허락을 받고 나한테 주신 선물이구나.’라고 받아들이면 돼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는 걱정할 거리가 없습니다.
그 다음에 29절에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라고 나옵니다. 지금은 안 그런데 제가 어릴 때, 제가 십대일 때는 애를 많이 낳았는데요. 그때는 애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때입니다. 마을에 있는 아저씨와 아줌마들이 장난을 치면서 간난 애를 마치 럭비공 패스하듯이 슉 던지면서 “받아라.”라고 하면 받아요. 지금은 상상도 못하는데 어릴 때 생각에도 ‘저러다가 애가 떨어지면 어떻게 하려고 하지?’ “자, 애 간다. 여보 받아라.”라고 하면서 애를 공처럼 주고받아요. 지금 29절이 그 꼴입니다. 아버지는 예수님을 주면서 “간다.”고 하고 예수님은 받고요. 우리가 무슨 럭비공입니까?
창세 전에 양을 주고받고 하는 것은 아버지가 결정을 지은 거에요. ‘앞으로 몇 년 후에 믿게 해줄 거요?’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예수님 안에서는 몇 년 후라는 게 없어요. 5년 후에 믿더라도 딱 믿는 순간, 창세 전부터 이미 믿기로 작정되어 있다는 것을 소급해서 알게 돼요. 시험 문제가 그렇거든요. 만약에 5월 7일에 중간고사 시험을 본다고 합시다. 그러면 아이들한테 시험지를 주잖아요. 그런데 5월 7일에 시험일 보니까 5월 6일날 공부한 것만 나오는 게 아니에요. 시험지를 받아놓고 보면 3월, 4월달에 공부한 게 다 나오잖아요. 시험은 5월 7일에 보는데 막상 내용은 이미 지나간 내용이 나오잖아요. 그렇지요? 이 예가 어렵지 않지요.
막상 예수를 믿고 오는 세대에 속해 보니까 오는 세대는 미래고 과거고 다 나와요. “목사님, 미래는 안 나오잖아요.”라고 하는데 미래는 요한계시록에 나오잖아요. 마태복음에도 “마지막 때에는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그때는 장가도 아니 가고”라고 나와요. 다 우리의 이야기에요. 생명책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될 것이라고 다 나오잖아요.
오늘 강의를 하면서 제가 시작을 뭐라고 했습니까? 구원론으로 시작하지 마시고 뭐로 시작하라고 했습니까? 메시아론으로 하라고 했지요. 메시아론으로 해야 우리가 하나님은 언약대로만 일하신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언약대로 일하신다면 이방인들은 개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같은 인간인데..”라는 말을 하는데 인간은 없어요. 개냐, 자기 아들이냐입니다. 왜냐하면 언약의 그물망에 걸려들어서 의미가 규정되는 것이지, 단독적으로 신체가 있다고 해봐야 이 신체는 흙일 뿐이에요. 그러니까 단독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거론하면 안 됩니다. 언약으로써, 언약 안에 캐취 되어야 합니다.
박병호 선수가 자기 집에서 공을 쳐가지고 옆집 담을 넘겼다면 홈런입니까, 홈런이 아닙니까? 자기 혼자 노는 게임이지 그게 뭐 홈런이에요. 지정된 야구장에 가서 133피트를 쳐야 홈런이잖아요. 3루타를 쳤는데 우리나라로 보면 이게 홈런이라는 겁니다. 하도 운동장이 넓어서요. 우리나라에 와서는 홈런인데 미국 메이저리그에 가서는 3루타가 된 거에요. 박병호 알아요? 야구선수. 노는 게임이 있다니까요. 그 게임이 언약 게임이에요.
노아가 착하다고 비를 안 맞는 게 아닙니다. “착하니까 나는 우산 쓸 거야.”라고 하면 죽어요. 방주 안, 언약 속에 들어가야 돼요. 착하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 안에 들어가야 돼요. 용서 안에 들어가야 돼요.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피 안, 복음 안에 들어가야 된다는 것의 반대말은 뭡니까? 교회 안에 들어가는 것은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그러면 교회에 다니지 말까요?”라고 하는데 교회에 가는 것이 일상생활이더라도 거기에서 뭘 뽑아내서 들으라는 거에요? 복음을 끄집어내야 돼요. 교회에 가서 축도 받았다라고 하면서 오지 마시고 ‘오늘 주신 주의 복음은 뭐냐? 십자가의 복음이 어떻게 활용될 내용을 주셨는가?’를 끄집어내야 돼요. 그래야 일요일만 신자가 아니고 월, 화, 수, 목, 금, 토요일도 신자가 될 것이 아닙니까? 그 원리가 월요일, 화요일에도 이어지니까요.
그 다음에 29절을 봅시다.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라고 했는데 만유보다 크신 것이 당연하지요. 만유를 만드셨으니까요.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이 29절의 말씀을 위해서 천지가 창조된 거에요. 예수님의 활동성을 보여주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주가 되실 때 아버지께 영광이 되고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지 않으면 영광이 되지를 못합니다. 이 만유의 목적은 예수님의 주 되심을 위해서 만유가 피라밋처럼 받아올리는 거에요. 예수님은 꼭대기에 서고 나머지, 마귀든 뭐든 간에 천사들도, 인간들도 예수님을 어깨동무해서 마지막 최종 정점에 세우기 위해서 그렇게 만유가 되어 가는 겁니다.
(오늘처럼) 폭풍이 분다면 평소에는 ‘아이 우산을 안 가져왔는데..’라고 하는데 지금은 ‘주여, 또 주께서 십자가의 희생으로 비를 오게 하시는군요.’라고 보시라 이 말입니다. 그리고 남한테 떠벌릴 필요가 없어요.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으니까요. 혼자 생각하면 돼요. 갑자기 머리가 많이 빠져서 대머리가 되었다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죽을 때 미련없이 죽으라고 빠지게 하셨구나.’ 이렇게 복음으로 끄집어내면 돼요. 모든 것을 말이에요. 아내가 반찬을 못한다면 ‘있는 반찬이라도 감사하라고 주셨구나. 주님의 희생이 중요하지 반찬이 중요하냐.’이렇게 자꾸 일상속에서 끄집어내는 거에요. 그런데 백날 해도 소용이 없어요. 온갖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어요. 삼성이 1등했는데 맨날 져서 몇 등 하는지 모르겠다고 그러고 우리나라 축구선수 손홍민은 골도 못 넣는다고 하고 계속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어요. 그렇잖아요. 성적이 조금 내려갔네라고 한 바탕 하고요.
그 다음에 조금 봅시다. 30절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이것은 설명을 해야 돼요. 이게 왜 어려우냐 하면은 나와 아버지 자체가 하나가 아니에요. 그렇잖아요. 나 따로, 아버지가 따로 있는 이상은 이미 하나가 아니지요. 이게 말이 돼요? “1+1=1”가 말이 됩니까? 1+1이 1이 되려면 더하기에 들어가는 1과 이퀄에 들어가는 일이 같은 1이겠어요, 아니겠어요? 같은 1이 아니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걸 설명한다고 물방울이 여기 하나 있고 또 하나의 물방울이 있으면 합해서 큰 물방울이 된다는 거에요. 큰 물방울이 되어 버리면 1과 1이 안 남아 있어요. 1과 1이 남아 있으면서도 1이 되어야 돼요.
그러니까 이 세상의 어떤 현상으로도 이걸 설명할 수가 없어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라는 것을 어떤 것을 가지고 오더라도 이게 설명이 안 돼요. 왜? 인간의 모든 언어는 인간에게 유통되는 겁니다. 인간들에게 납득이 되는 의미가 담겨 있어요. 소쉬르라는 언어학자는 언어를 이렇게 봤습니다. 기호는 기표와 기의로 결합되어 있다고 봤어요. 그런데 라캉이라는 학자는 기의는 모른다는 거에요. 모르는데 기표가 “혹시 이것은 맞나?” “이것은 맞나?”라고 자꾸 하는데 본래에 닿지를 않아서 미끄러진다는 거에요. 그 의미가 정확하게 맞는 기표는 없어요. 백날 해봐도 여분의 것이 나와요.
“당신을 사랑해.”라고 하면 여자가 “사랑이 뭔데?” “이쁘다는 말이지.” “이쁜 게 뭔데?” “사랑하고 이쁘다.” “그게 뭔 소린데?” “좋다는 소리야.” “좋은 게 뭔데?” 계속 물어요. 그러면 도대체 이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어요. 남자한테 되게 좋은데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는 것처럼요. 뭔가 모르는 게 매사에 나와요. “아따, 시원하다.” “시원한 게 뭔데?” “아이고 마셔 봐. 마셔 봐. 너도 마셔 봐.” 그런데 마셔 봐도 둘이 또 달라요. 방금 5초 동안 온도가 그만큼 내려가서 그 시원함이 유지가 안 돼요. 왜?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에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인간 세계에서 중간을 끊어버려서 반칙을 하는 거에요. “그만 됐다. 대충 됐다.” 대충 됐다를 두 자로 진리라고 합니다. 대충 된 거에요. 이걸 수학에서 어프로치라고 합니다. 0.001%를 가지고 “됐다. 확률대로 그만 그것은 이퀄로 잡아라.”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과학이라는 것은 진리가 아니고 편리입니다. “아이고 나한테 편리하면 됐지,” “누구한테요?” “나한테.” “네가 뭔데?” “인간이거든.” 성경에는 인간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어딜 봐서 인간인데요? 당신은 왜 살아야 되는데요? 흙이 될 건데요. 곧 영감이 되고 할머니 될 건데 왜 살아야 되는데요?” “몰라. 뭐. 살 때까지 살지.” 그러니까 모르지요.
모르면서 양이라고 우기고 모르면서 목자라고 우깁니다. 길과 진리는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안 겁니다. 죄는 죄를 지어서가 절대로 아닙니다. 주제파악이 된 거에요. 어디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요. 주님 안에 있다 보니까 뭘 해도, 어떤 착한 일을 해도 죄인인 것을 아는 이 느긋함이 생긴 거에요. 내가 나를 만든 것이 아니고 천지를 창조하신 주께서 주님의 형상대로 만든 거에요. 그때 주의 형상이 들어갑니다. 주의 형상대로 만든 거에요.
주의 형상을 뜯어보면 아버지의 모든 율법을 다 이루었다가 형상이 돼요. 마태복음 5장에 일점일획이라도 남김없이 내가 다 이루리라는 그 이룸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우리에게 이루이짐으로 들어오다 보니까 우리가 졸지에 예수 안에서 의인이 되었어요. 이것이 기분이 좋은 일인지 부끄러운 일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간에 그렇게 판결을 내렸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는 살아가면서 여러분들이 알아야 될 앞으로 남아 있는 여러분의 행복한 미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와 주님이 하나가 되어서 우리로 그 하나 속에 끼어들어가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나가 될 자격도 없는데 얼싸안고 하나가 되게 해주신 것은 이것이 우리의 소원이 아니고 주의 소원인 것을 우리가 겸손하지만 흔쾌히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마쳤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