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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충성모
안양20160311a히11장 23절(나는 없다)-이 근호 목사
오늘은 히브리서 11장 23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라고 되어 있지요. 초반에 제일 먼저 나온 단어가 “믿음으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믿음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히브리서 12장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믿음은 누구의 믿음이냐 하면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이전부터 예수님의 믿음의 흔적들을 이렇게 깔아놓았다는 겁니다.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동화에 보게 되면 숲속에 간 애들이 집을 못 찾아올까 싶어서 처음에는 식빵을 놓았는데 그것을 새들이 다 먹어버렸어요.
계산을 잘 못한 거지요. 그래서 돌멩이를 두고 돌아오잖아요. 그 코스를 지금 히브리서 11장에는 쫙 조약돌처럼 깔아놓은 거에요. 그러면서 내가 믿은 게 아니고 나로 하여금 이런 생활을 하도록 조장하신 분은 이 노선의 마지막에 오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마지막을 히브리서 1장에 이렇게 기록해놓았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되어 있지요. 그것을 히브리서 11장에 구체적으로 나열한 겁니다.
이 말은 선지자들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부분이고 여러 모양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액자 하나에 담긴 그림을 패널로 나누었다고 보면 돼요. 목욕탕에 보면(촌스럽지만) 타일 그림 같은 게 있지요. 하나하나 떼어내면 그림이 안 되지만 같이 붙여놓게 되면 목마른 사슴 같은 그림도 있고 산에서 폭포가 내려오는 그림도 있잖아요.
그것처럼 예수님의 마지막 때를 미리 보여줬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그들(선지자들) 속에 마지막이 들어 있습니까 안 들어 있습니까? 제가 지금 말끝을 올린 거에요. 묻는 겁니다. 들어 있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이것은 오는 세대를 말합니다.) 이미 마지막이 되기 전부터 중첩되어 있었던 겁니다. 벌써 어렵게 시작하지요.
사람은 “과거, 현재, 미래로 가봐야 안다.”는 쪽도 있고 “아니야, 안 가봐도 이미 그 마지막이 너희들과 함께 있어.”라고 겹치게 된 그것이 선지자의 기능이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의 질문입니다. 이렇게 겹치게 되면 그 선지자의 말을 그 당시 사람들이 알아 들을까요 못 알아 들을까요? 못 알아듣지요. 오늘 오신 분이 답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야 강의가 되지요.
그러면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왜 합니까? 참 이상하잖아요. 사람이 말을 할 때는 알아먹으려고 이야기를 하는데 못 알아듣는 말을 왜 하나님이 하시게 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은 알아들어서 구원을 받는 게 목적이 아니고 구원이 되고 안 되고는 구원을 받는 너희들의 판단이나 선택의 문제를 벗어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어서 좋은 데에 가고 싶어해요. “지옥 갈래, 천국 갈래?”라고 하면 바보같이 “지옥 가겠습니다.”라고 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일은 무슨 살기는 또 얼마나 살았다고 가기는 좋은 데에 가려고 설치잖아요. 그러한 모든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닌 겁니다.
미리 와서 건짐을 받아야 되는 사람만 건짐을 받아요. 못 알아듣는데 믿게 되었다는 현상이 일어나야 돼요. 그러면 두 가지가 나타나야 되지요. 첫 번째는 나는 못 알아들었다가 있어야 되고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게 되었다는 이 두 가지 요소를 다 알아야 되겠지요.
그러면 첫 번째 묻습니다. 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못 알아들을까요? 금방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오면 스톱이 되지요. 그러면 인간은 미래를 모르지요. 그렇다면 현재 그 다음에 미래는 과거에 했던 것을 참고해서 그냥 시도해댈 뿐이지요. 그러면 이것은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것을 뽑아낸 하나의 상상 혹은 기대가 되겠지요.
그래서 내가 은근히 기대했던 것을 이야기하게 되면 이것은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도를 구원할 때는 내가 이런 식(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개념)으로 알아듣는 이야기를 한 게 아니고 이미 나는 못 알아듣는다는 것으로 규정이 났어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나의 믿음, 나의 소망, 나의 사랑으로 구원 받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믿음, 소망, 사랑은 이미 과거에서 내가 경험한 것을 자료로 하여 미래의 것으로 억지로 밀어붙이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못 알아들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게 되었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첫 번째것은 나는 열심히 행하는데 그 행함으로 구원 되는 것이 아니고 그 행함으로 한 것을 나는 못 알아들었다는 것이 발각되고 노출되어야 되겠지요. 첫 번째 나온 어려운 겁니다.
내가 의도했던 모든 것은 무산 되었다는 쪽으로 받아 줘야 내 인생이 지금 내가 꾸려가는 인생이 아니고 이미 미래에 계신 주님께서 주님 좋으라고 일방적으로 출생케 했고 일방적으로 이끄는 방식이 되는 겁니다. 원리가 그래요.
말을 못 알아들었는데 믿게 되었다는 것은 내가 못 알아들었다는 것을 우리가 감추고 싶더라도 감추지 못하고 오히려 노출되어야 되고 발각되어야 되고 내가 의도한 모든 것은 삐하고 무산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의 얼굴을 보니까 여러분들의 미래는 다 무산되었습니다.
하여튼 내 뜻대로 되는 법이 없어요. 기도를 억쑤로 하고 백날 해도 소용이 없어요. 모든 것을 뭔가가 막아선다는 말은 네가 어떤 기대를 하는 그 아이디어가 어디에서 나왔느냐 하면 네가 평소에 고집했던 과거는 이렇고 현재는 이렇니까 미래는 이래야 된다는 나의 막 되먹은 고집을 주(미래)께서 그것을 차단시킨 겁니다.
눈치채면 안 돼요. 우리가 눈치채고 우리가 이해해서 믿어버리면 안 돼요. 그러면 내가 열심히 알아서 구원 받는 셈이 되어 버려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십자가라는 걸림돌이 빠져버린 셈이 돼요. 십자가가 없으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순종해서 구원을 받으면 되는 겁니다.
순종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내가 알아들었다는 말이 되거든요. 그런데 십자가를 되풀이 해버리면 주께서 무슨 식으로 하든 나는 내 식대로 살고 주님은 그렇게 하라는 거에요. 이게 중요한 거에요.
‘네가 그렇게 살아도 나는 기어이 너를 천국에 보내고 말리라. 왜? 너의 출생 자체가 네 뜻이 아니고 고스란히 내 뜻만 담아내야 될 그릇이기 때문이야.’ 그렇게 이끄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세의 인생을 보면서 모세의 어떤 부분을 부각하겠습니까? 모세의 잘난 부분을 부각하겠지요?
그러나 여기에 보면 모세에 관한 부분은 모세가 예수님을 곡해하고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 뜻대로 한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평가했느냐 하면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실패하고 실수한 그 대목도 긍정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겁니다.
그 한 예가 24~26절,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입니다.
이것은 처음에 모세가 애굽 사람을 쳐죽이고 히브리인하고 다툴 때의 그 마음이 아니에요. 이 마음은 언제의 마음이냐 하면은 자기가 할 도리를 다 해봤는데 씨도 그게 안 먹히고 모세가 이렇게 해놓고 “나는 여러분을 위해서 이렇게 했기 때문에 나를 따르라.”라고 하니까 따르기는 커녕 그냥 신고해버리지요.
그러니까 모세가 얼마나 다급했겠습니까? 그때 모세의 태도는 간단했습니다. 도망쳤습니다. 지명수배자가 되어서 도망을 쳤잖아요. 그 도망치던 그것을 주께서는 모세의 실수나 모세의 죄악으로 보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믿음에 있어서 반드시 일어나야 될 일로 포함을 시켜버립니다.
왜냐하면 미래에서 보게 되면은 과거나 현재에 일어났던 그 모든 일은 우연이 아니고 필연적으로 일어나야 될 일인 겁니다. 그러면 모세에게 그렇게 하나님께서 찾아오게 될 때 모세의 옆구리를 쑤시면서 아무리 닦달을 하고 공격을 해도 내가 다시 애굽에 나타난 것은 누구의 뜻이라고 하겠어요?
그것은 내 뜻이 아니고 주의 뜻이고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하는 겁니다. 자, 여기에서 여러운 것은 한 번 해봅시다.(사실은 별로 어렵지 않지요.) 여호와께서 보내신 거거든요 이 말을 좀 더 해보겠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와서 있고 애굽 나라를 바라봅니다. 애굽 나라에 모세가 등장할 때부터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데요. 애굽 나라에 모세가 등장했을 때 하나님이 나를 보냈다고 한 것은 이 시점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애굽에서 나갔다가 다시 왔던, 그러니까 애굽에서 자기가 떠났던 그 모든 사건까지 포함해서 주께서 여기에 나를 세운 거에요.
그러면 모세가 투사로 독립운동을 한다고 할 때에 결국 그 아이디어도 나를 보내신 여호와의 아이디어 속에 이미 포함이 된 거에요. 그렇게 해서 실패한 인간을 보냈다는 말은 모세의 공로, 모세의 자기 행함의 가치들을 주 예수님 앞에서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주도한 것을 주님께서 인간에게 빼앗기지 않는 겁니다. 이 실패의 와중 속에서 모세는 나는 누구냐? 하는 문제를 다시 한 번 정립을 해야 되는 거에요. 쉬운 게 아니지만 그냥 해봅시다. 쉽게 예를 들겠습니다.
자, 여기에 지우개가 있지요. 옛날의 의미라고 하는 것은 이것이 지우개라고 하면 그걸로 오케이 했습니다. “이것을 지우개라고 합시다.”라고 다 동의했어요. 그런데 이 지우개라는 것에 의미가 있어 보이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이것이 지우개입니다.”라고 하면 여러분들의 가슴이 뜨거워지고 은혜를 받고 그럽니까?
“왜 쌩뚱맞게 강의하다가 지우개 이야기를 합니까?”라고 묻지요. 그게 중요한 거에요. 이게 지우개라고 하면 그 다음에 나오는 질문이 있어야 돼요. “무슨 의도로 이것을 들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다시 말해 “왜 하필 이 시간에 우리를 보고 ‘이것이 지우개다.’라는 이야기를 하십니까?”를 묻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 인간의 주체라고 하는 것은 질문을 하면서 자기의 주체가 정립이 돼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자꾸 예를 들어야 돼요. 어려우니까요.) 남편이 갑자기 “오늘 날씨 좋다.”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면 오래 살아본 아내는 알아요. “오늘 또 슬슬 낚시 가려고?” 이렇게 나온다고요. 다른 사람은 무슨 뜻인지 몰라요.
“왜 오늘 날씨 좋다는 이야기를 내 앞에서 하는데? 응, 낚시 가는 것 허락해달라 그 말이지?” 그러면 그 사람이 날씨가 좋다고 한 그 말에는 ‘나는 낚시를 좋아하거든. 그러니까 낚시를 좋아하는 내 주체를 오늘 마음껏 발휘하기 위해서 당신이 좀 내가 낚시하러 가더라도 허락해줘.’라는 의도가 담겨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어떤 말을 내뱉을 때는 자기의 욕망을 떼고 이야기할 수가 없는 거에요. “날씨 좋다.” “고마 집구석에 그냥 있으라고.” 이렇게 답변이 나오게 되면 길 가던 사람들은 저 부부의 대화가 뭔가 이해가 안 된다.라고 하겠지요. 이해가 안 되지요.
‘하나님이여 왜 저(모세)로 하여금 바로 애굽에 데려다 놓지 않고 애굽에서 실패케 하십니까?’라고 묻는 것은 하나님께서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을 구원함이 아니라(이스라엘은 구원을 못 받았어요. 나중에 두 명 빼놓고 다 죽었으니까요.) 너희에게 지시하는 내 앞에서 너 자신이 누구냐고 이 예수님 입장에서 새롭게 파악되는 그 관계인 믿음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인 거에요.
만약에 제가 모세인데 남자만 해도 40만 명을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냈습니다. 그러면 다들 오해하는 게 ‘40만 명이나 건져냈기 때문에 모세 본인은 당연히 약속의 땅을 보겠지.’라고 생각하겠지요. 지도자급이니까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당사자 모세는 어디에서 비로소 본인을 압니까? 반석을 지팡이로 가리켜야 되는데 약속을 땅을 앞두고 모세가 어떻게 했습니까? 성질이 나가지고 바위를 두 번 쳤잖아요. 어지간하면 하나님도 봐줘야 되지 않습니까?
바위를 치는 이유가 하나님을 모독하려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저 양들을 이 목자의 입장에서 건질까?’ 하는 순수한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하겠다는 충성된 심정으로 했잖아요. 그런데 그런 행동을 보고 주님은 누구를 나무랩니까? 모세를 나무래지요.
그렇다면 모세는 약속의 땅에 못 갔으니까 그러면 지옥 간 거에요? 마태복음 17장에 누가 나타납니까? 변화산에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지요. 그리고 예수님과 이야기한 주제가 뭐였습니까? “예수님 언제 돌아가십니까?”라고 했지요. 그 이야기가 누가복음 9장에 나옵니다.
산 위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을 예수님께서 산 밑에 내려와서 그대로 제자들한테 이야기해요. “인자가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하리라” 산 위에서 이야기한 그 테마가 그대로 내려왔다는 말은 모세와 엘리야에게 해당되는 그 사항이 이제는 본격적으로 산 밑에서 기다리고 있는 9(12) 제자에게 그대로 십자가가 입혀지는 방식으로 그들이 이제는 행동에 나서야 될 입장에 와있다는 뜻이거든요.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주제는 예수님을 모세가 어떻게 드러내느냐 있다 이 말입니다. 왜 그것을 강조하느냐 하면은 모세가 애굽에서 사람을 건져냈다고 하면 사람들은 자기 구원이 너무 급해가지고 잘난 모세 덕분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기 구원에 그냥 매이게 돼요.
자기 구원에 매이게 되면 내가 과연 구원 받을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서 오해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적어도 하나님은 나를 버리시면 안 되지.’라는 생각에서부터 우리가 구출되어야 돼요. 나는 당연히 구원 받아야 된다는 생각이 삐하고 무너져야 되는데 세상에 자기를 포기할 인간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습니다.
인간은 응애하고 태어나면서부터 이기주의에요. 나르시즘이거든요. 젖을 안 주면 엄마, 아빠한테 무조건 앙탈을 부리는데 젖을 줘야한다는 계약서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누워있으면 안아달라고 하고 안아주게 되면은 또 놀아달라고 하고 잠이 안 오면 잠재워달라고 하고 모든 게 전부 다 자기 위주로 돌아가야 된다는 거에요.
그 어린애가 어른이 되었다고 그 속성이 달라지지 않아요. 그 주체는 고스란히 환경에 의해서 다른 내용으로 바뀔 뿐이지 자기가 위주인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에요. 쉽게 말해서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어떤 위인도 본인이 의도해서 구원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그 말은 인간은 자기 고집대로 쭉 간다는 거에요. 성질을 고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성질 고치지 마세요.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되어서 성격 고친다는 그런 망상은 갖지 마세요. 본인이 성격을 고쳐서 구원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베드로도 성격이 안 바뀌고 그대로 갔어요.
내 식으로 구원 받는 것이 하늘나라에 가로막혔음을 우리가 결과적으로 수용하게 되면 그것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돼요. 왜? 그 순간 나는 못난 자가 되기 때문이에요. 사람이 언제 행복한 줄 알아요? 내가 못났을 때 그리고 주어진 모든 것 하나하나가 은혜로 주신 귀한 것임을 알 때 행복하지 말라고 해도 행복해요.
내가 죄인 되었을 때 가장 행복해요. 그런데 언제 행복이 깨지냐 하면 죄인 된 것을 내가 알 때 행복이 깨져버립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도 할 수 없어요. ‘그래 맞아. 나는 죄인되었으니까 구원 받았지.’라고 하면 행복은 삑하고 날아가 버렸어요. 그게 3초도 안 걸려요. 행복이 날아갈 때 감사한 거에요.
‘주여, 죄인입니다.’라고 할 때는 그렇게 편하다가 ‘드디어 나는 죄인 되었으니까 십자가만 증거하면 구원되었지.’라고 하는 순간, 갑자기 그 나를 관리하려고 하면 또 골치가 아파요. 이걸 언제까지 지속시킬지 골치가 아픈 거에요. 또 자기 인생을 관리해야 되고.. 이러면 아까 그 행복은 끝났습니다. 또 다음 차례, 죄인될 때까지 한참 기다려야 됩니다.
히브리서 11장의 주제는 “예수님이 너희 속에 나타났다.”입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을 믿었다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 인생을 이렇게 몰아세웠잖아요.’라고 믿음을 증거해야 될 사람들이 바로 히브리서에 나온 믿음의 조상들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자기들(그들)이 실패한 것을 주님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실패해야 된다.”라는 쪽으로 바꾸신 거에요.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예수님과 겸해서 나올 이야기지, 모세 개인의 성품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한 번 다시 봅시다.
24절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 “거절하고”라고 되어 있는데 거절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본인이 거절했습니까? 아니면 모세는 본격적으로 공주의 아들이라는 권력을 이용했습니까? 질문이 진짜 간단해요. 답변도 간단하고요. 이용했다 거절했다 어느 쪽입니까? 이용했잖아요.
그런데 누가 그 이용함이 안 먹히도록 했습니까? 주께서 안 먹히게 했지요. 그러니까 결국 그것을 주님의 믿음에서는 거절한 것으로 해주시는 거에요. 왜? 어차피 모세가 한 게 아니고 주님께서 그렇게 모세를 몰아세웠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럴 때 모세는 ‘주여, 이것은 제가 한 게 아니고 주께서 하셨습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를 이어봅시다. 여러분들이 아시는지 내가 테스트하는 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복습을 계속해야 돼요. 어려워서요.
여기에 지우개가 있고 그걸 지우개라고 한다고 했지요. 그러면 “목사님 왜 그것을 지우개라고 쌩뚱맞게 이야기를 합니까?” 이 말은 ‘이게 지우개라는 말을 저희들은 원치 않았습니다.’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에 있어서 내가 원하는 것이 따로 있겠어요 없겠어요?
있는데 그것은 과거부터 은근히 노린 겁니다. 제가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오는 것은 오직 이것 하나밖에 없다고요. ‘보상’. 망가진 내 인생 언제 회복될 수 있느냐?‘ 망가진 인생을 하나님을 믿어서 보상받겠다는 거에요. 결핍된 것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거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이미 전제되어 있지요. ‘주님이여 이것은 괜찮은데 지금 다른 게 모자랍니다.’ 하고 이미 우리가 결재를 쓰고 그걸 드리지요. 주께서 어떻게 합니까? 일체 받지 않습니다. “이게 지우개다.”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주님이여 그게 궁금한 게 아니에요. 내 인생은 언제 다시 원상복귀됩니까?’ 그게 궁금한 거에요.
그런데 이렇게 하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못 믿는, 내가 미처 몰랐던, 내가 안고 있는 현재 나의 주체가 되는 거에요. 주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또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지금 어떤 상태인가를 깨우치기 위해서 우리가 하는 모든 기대를 무산시키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렇게 건짐으로 말미암아 내가 구원 받는 것은 네가 나하고 협력하고 상의해서 나를 순종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일방적으로, 오히려 떼찌떼찌하면서 우리가 얹은 모든 손을 뿌리친 그 능력으로 그렇게 하시게 된 거에요. 그럴 때 믿음으로 구원 받았습니다가 된다 이거에요. 히브리서에 담긴 내용이 그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신다고 치고 정말 아는지 복습해봅시다. 히브리서 1장에 보면 선지자들이 나오거든요. 모세, 요셉, 에녹, 노아,... 부분으로 이야기한 데도 있고 모양으로 이야기한 데도 있는데 옛날에는 선지자들에게 부분과 모양으로 했던 그분이 마지막 때는 어떻게 하지요. 아들로 하지요. 그러면 이 부분과 전체에 대한 실체와 연결이 되었습니까 안 되었습니까?
연결이 된 거지요. 이 연결을 뭐라고 한다고요? 두 자로 “믿음”이라고 한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이 부분과 모양이 나름대로 믿음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믿음이 있지요. 이 믿음은 깨져야 되는 거에요. 그러면서 믿음도 아닌데 믿음의 세계로 갔다는 말은 여기에서 십자가 때문에 그렇지요. 지금 이 이야기가 중요해요.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인인데 의인이 되었잖아요. 그러니까 십자가가 계속 들어가야 돼요 안 들어가도 돼요? 계속해서 들어가줘야 돼요. 왜냐하면 이 부분과 모양 속에 십자가가 들어있어있었고 (우리는 지금 십자가 이후에 십자가를 믿잖아요.) 그러니까 십자가 전에 십자가와 같은 기능이 이미 신자들 속에 부분과 모양으로 작용했던 거에요.
더 알기 쉽게 말해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가자고 할 때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 가겠습니다.”라고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이게 미쳤나? 우리는 애굽에서 그냥 편하게 살고 싶지 나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 출애굽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머리에는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이 잘 된 겁니까 꼬인 겁니까?
그런데 모세가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까요 못할까요? 이해하지요. 왜냐하면 그들과 똑같이 본인이 바로 애굽에서 정권교체하자고 부르짖던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그러던 사람이 실패했잖아요. 자기는 앞당겨서 실패했고 주께서는 실패자를 그들에게 보였으니까 그들은 옛날 자기와 동일하게 실패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모세에게 찾아온 그분께서 동일하게 똑같이 집단적으로 그들에게 작용을 해줘야 되겠지요. 그러면 모세는 본인이 할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거지요. 자기를 보낼 때 나를 이끌어냈던 그 동일한 분이 나를 통해서 그들을 다뤄야 되겠지요. 안 나가려고 합니다. 열 가지 재앙을 때리고 난 뒤에 마지막에 (나간 게 아니에요.) 바로 왕이 살살 빌었던 거지요.
“제발 좀 나가주세요.” 그래서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애굽에서 나왔던 겁니다. 그런데 나온 후에 그들의 마음(주체)는 어떻습니까? “야! 약속의 땅으로 가자.”였습니까? 처음에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약속의 땅이라는 멋진 세계를 기대하면서 기분 좋게 나왔잖아요. 그래서 홍해를 건너갈 때 찬양을 했잖아요. 그런데 주께서 준비한 게 뭡니까? 완전 고속도로였어요? 광야지요.
우리는 구원 받아 마땅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이 마음을 주께서 긍정적으로 보실 거라고 생각하고 나왔는데 광야가 나타나니까 그들은 애굽을 보지요. 그리고 모세한테 대들지요. 모세는 성질이 나가지고 지팡이로 가리켜야 되는데 두드렸습니다. 자, 같은 연극 무대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정황들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주님의 말을 알아들은 사람은 없었고 그들의 힘으로 천국에 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실패를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벌여주시는 겁니다. 그 동안 우리가 실패해왔던 이유는 주체 안에 담긴 내용, 어떤 썩어빠진 게 들어있는 게 본인인 줄을 본인이 몰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정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라고 했던 것, 그런 주체 안에 있는 내용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주께서는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습니다.
궁지에 몰아넣으면 우리는 불평이 되고 불만이 되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서 감사해야 될 것은 이 주님만 아시는 계시책에 히브리서 11장 24~26절이 따로 기록이 되어 있어요.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광야의 사람들은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이걸 몰라요.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다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화를 내고 있는데 이미 모세에 대해서 좋은 평가(내신성적)가 마련되어 있어요.
그러면 평가가 마련된 곳은 이미 구원에 성공하신 예수님 안이에요. 그리고 그 안에 이미 마련되어 있는 거에요. 모세는 개판이고 백성들도 엉망이지만 평가하시는 분, 주님이 자신의 십자가에 근거해서 평가하기 때문에 모세가 실패하는 것이나 다른 모든 일들을 마땅히 일어나야 될 일로 예수님 안에서는 해석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천국에 가게 되면 우리는 미안하지요. 부끄럽고 고맙고 감사하고 면류관이 백 개 있으면 백 개를 다 던지고 싶고 천 년, 만 년 동안 찬양하라고 해도 그보다 더하게 억만 년을 찬양하고 싶고요. 자기가 구원 받는 데에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것을 감사해서 면류관까지 반납하게 되지요.
그게 바로 히브리서 12장에 나오는 허다한 증인들입니다. “또 바보 하나 올라온다. 기다리자.” 선배들(고참들)이 있는 거에요. “온다. 온다. 또 온다.” 아브라함 들어오지요, 요셉이 들어오지요, 모세가 들어오지요. 그 다음에 누가 들어옵니까?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 32절을 잠깐 한 번 보겠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여기 기드온 다음에 바락이 나오지요. 바락은 남자는 남자인데 여자 치마폭에 가서 피해버린 비겁한 남자지요. 자기가 할 일을 여자한테 미루고 자기는 여자 뒤에 숨어있는.. 일은 여자가 하고 이름은 바락(남자)이 차지하고..
삼손은 하나님이 주신 힘을 가지고 여자를 밝히다가 자신의 눈알을 뺏긴 사람이고 입다는 깡패이고.. 이런 사람들이죠. 이런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은 우리의 과거, 현재의 입장에서는 없어요. 그런데 미래에서는 이들이 다 믿음으로 일을 했다는 거에요. 구원 문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일을 시켰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우개가 지우개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리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해야 되느냐 하면 그들에게 있던 주체 내용이 지금 동일하게 똑같은 식으로 그러한 실패와 실수를 반복하는데 주님이 보시기에는 이것이 일어나야 될 실수고 해야 될 실패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실패하지 않으려고 하지 말고 인생 실패, 실수 안 하려고 하지 마라.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막 살아라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진공 속에서 막 사는 게 아니고 주께서 마련해준 애굽이라는 환경 속에서 내 주체가 엑스레이 사진을 찍듯이 부딪혀봐야 내가 얼마나 성질이 더러운지 (안 그래도 알지만) 더더 더러워져야 돼요. 더러워지는 게 아니고 더러운 게 있어요. 우리는 자꾸 ‘여기까지만!’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주께서는 ‘아니, 더 끄집어 내야 돼!’라고 하십니다. 왜? 그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겼기 때문이에요.
그 죄는 그 죄를 알고 개과천선해서 씻을 문제가 아니고 그걸 알고부터는 오직 십자가가 아니고서는 해결될 수 없는 죄까지 나와야 되지 ‘이걸 알았으니까 이제 정신을 차려서 두 번 다시 이런 나쁜 짓을 안 하겠습니다.’ 이런 각오와 이런 결심은 주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겁니다. ‘이제는 바르게 살겠습니다.’는 없어요.
23절 봅시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라고 되어 있잖아요. 이 여인이 굉장히 용감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사실은 그렇게 용감한 게 아니고 가만히 했지요. 그렇다면 이 모세의 엄마가 한 행동은 안 들키려고 애를 쓴 거잖아요.
그런데 이 안 들키려고 한 행동이 주님 안에 있던 계획이라는 거에요. 말을 하면 어려워지는데 지금 모세 엄마가 모세를 안고 있잖아요. 그러면 이 주변에 둘러싼 게 있는데 그것은 바로의 권력이에요. 그런데 이 바로의 권력을 모세의 엄마가 무서워합니까 안 무서워합니까? 여기에는 안 무서워했다고 되어 있는데 무서워한 정도가 아니라 벌벌 떨었어요. 이게 바로 우리의 주체다 이 말입니다.
성경 공부하고 있는데 갑자기 국정원에서 들어와가지고 하면 우리는 “다음부터는 모이지 맙시다.”라고 한다 이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비유를 말할 때 두 가지의 경우를 가지고 이야기했어요. 네 가지 경우 중에 두 가지를 뽑아보면 하나는 세상을 사는 게 겁이 나서 믿음을 포기한 경우도 있고 그 다음 단계에 들어가면 ‘세상 좋은 일과 기쁜 일, 행복한 일이 많은데 이 성경을 왜 보지?’라면서 세상의 쾌락에 빠져가지고 성경을 안 보는 경우가 있잖아요. 어쨌든저쨌든 간에 말씀을 버리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 말이지요. 열매가 없기는 마찬가지거든요.
우리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에 휩싸여 있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주체는 스펀지가 되어 가지고 이 권력이 그대로 스며들지요. 이것을 쉽게 말해서 ‘눈치 본다. 약간 더 세게 말해서 코치 본다. 그것을 고상하게 표현하면 의식한다. 누구를? 타인의 시선을.’이라고 하는 거에요.
‘내가 이렇게 하면 우리 시집에서 뭐라고 이야기할까? 우리 친정에서 쌀 한 가마 주더니만 쌀 끊어버리지는 않을까?’ 그렇게 될 수가 있어요. 인터넷에 그런 글이 있답니다. 어떤 며느리가 추석 때 시집에 안 가고 자기는 몰디브로 가면서 시집에 안 가는 이유가 시어머니가 너무 간섭해서 그렇습니다.라고 했대요.
그러니까 시어머니가 “야야 네 심정을 내가 몰라서 너무 미안하다. 실은 이런 얘기를 안 하려고 했는데 앞에 집이 팔려가지고 한 60억 생겼고 앞에 도로가 나서 한 40억 생겼는데 추석 때 내가 큰 선언을 할란다. 너희 빼고 나머지 아들에게 줄게.”라고 하니까 며느리가 하는 말이 “아이고 시어머니요 내가 친정에 보낼 편지를 잘못 보내가지고 시어머니한테 보냈습니다.”라고 하니까 시어머니가 하는 소리가 “야야 요새 나도 늙어가지고 눈이 잘 안 보여가지고 만 원짜리를 가지고 억이라고 잘못 썼다.”라고 했답니다.
돈이라는 권력에 못 당한다는 말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주체는 그저 기도하면 돈, 교회가면 돈, 우선 돈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이 꽉 들어차 있으면서도 우리는 미처 그것을 모르고 그저 주께 영광, 주님께 영광이라고 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이것을 강제로 폭로시켜야 되잖아요. 폭로시키는 그 선한 일을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잘 되게 해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막 살아야 되지요. 살면서 머리를 긁적긁적 하면서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를 느껴야 돼요.
내가 아까 어떤 목사님하고 이야기를 했지만 치매에 걸리면 어떻게 합니까? 한경직 목사님도 치매에 걸렸지요. 90세에 치매에 걸리면 이해해주는데 60살에 걸리면요? 정신차리면 된다고 하는데 치매가 정신차린다고 안 올 문제입니까? DNA 문제인데요.
이미 내가 받은 구원이 중복되어서 우리 주체 안에 들어있어야 돼요. 그러면 ‘주여 지금 무슨 짓을 해도 나는 죄인 맞습니다.’라고 지적할 수 있는 주님의 안목이 미리 와 있어야 돼요. 어떻게? 성령을 통해서요. 성령은 마지막 때에 부어주신다고 했잖아요. 그 마지막 영이 미리 와 있으면 뻔히 팔짱을 끼고 보는 거에요. ‘네 맘껏 멋대로 살아. 그래. 뭐 해봐. 그래. 해봐. 해봐야 네 주제 파악을 하지.’라고 따스하게 지켜보는 여유, 그게 바로 자유 아닙니까?
나는 개판인데 지켜보시는 분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면 이것보다 더 기쁜 자유가 어디 있겠어요. 나는 원래 못났는데 자기 반성을 하고 순종을 해요. 무슨 순종이 돼요 안 되는데.. 돈 떼어먹을까봐 무서운데 무슨 순종이 됩니까?
여기에 나온 사람들이 다 똑같이 우리처럼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의 삶에 대해 새로운 평가를 해주시는 거에요. ‘너는 몰라도 내가 네 안에 들어있었고 그래서 네 뜻대로 안 되었지. 내가 그렇게 했다. 내가. 왜 그렇게 한 줄 알아?’
오직 아들의 십자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만큼은 미리 겹치듯이 그것을 알아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거에요. 그게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자, 그래서 우리는 일단 정리를 했습니다.
모세의 엄마는 무서워했어요.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아들을 숨길 리가 없어요. 자기 누나 미리암이, “엄마 내가 처리할게.”라고 하면서 몰래 물에 띄우고 하는 그런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안 나오지요. 그만큼 벌벌 떨었다는 거에요. 벌벌 떨어요.
그리고 모세를 바구니에 띄웠잖아요. 만약에 공주가 그때 목욕을 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됩니까? 두 살배기 어린애가 침대에서 떨어졌는데 10 시간 방치해서 나중에 죽듯이 그냥 떠내려가서 굶어죽었어요. 어린 모세가 뭘 알겠어요. 자기가 알아서 밥 챙겼습니까? 떠내려가서 죽었어요.
그리고 물에 빠졌다고 했는데 이것은 물이 빠진 정도가 아닙니다. 죽음에 빠진 거에요. 그래서 모세의 이름이 물에서 건져냄이에요. 물에서 건져낸 것은 바로의 공주가 아니고 사실은 주님이 배치해 놓은 공주에 의해서 건짐을 받은 거에요. 그리고 건짐을 받은 아기의 이름이 모세지요?
그 모세를 보냈다는 말은 모세뿐만 아니고 모세를 뒤따라오는 모든 사람들도 그와 같이 물에서 건져냄을 당하는, 쉽게 말해서 죽음에서 건져냄을 당하는 상황(경험)을 겪어야 돼요. 그런데 그들이 홍해에 갔다 오고 난 뒤에 그 경험의 의미를 알았어요 몰랐어요? 몰라요. “우리를 왜 죽이려 하십니까?” 이렇게 나온다고요.
분명히 죽음에서 건져 나왔으면 “예, 그만 살아도 됩니다.”라고 나와야 될 텐데 “고생하려고 우리가 나왔습니까? 나는 애굽에 있는 수박이 먹고 싶다.” 그런데 수박 먹고 뭐 할 겁니까? 십자가를 말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거에요. 그런데 이게 지식뿐이에요.
지식일 뿐이고 ‘십자가를 알았으니까 이제는 주여 기도하면 내 뜻대로 응답해주세요.’라고 하는 거에요. 그래서 그것을 무산시키기 위해서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너는 살 자격이 없어.’를 되풀이해서 십자가는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 참, 죽은 놈이 무슨 할 말이 많아.’ 이것이 반복되게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에요.
주님만 살아있으면 되지 우리가 왜 살아야 됩니까? 주님도 살아있고 나도 살아있는 법은 없어요. 주님이 살아있으면 나는 죽은 자가 되고 주님이 없으면 내가 산 자가 돼요. 지난, 지난, 지난 낮 설교에 했잖아요. 사랑이 떠오르면 나는 사라지고 사랑이 없어지면 내가 떠오른다고요.
그대 앞에 서면 나는 작아지고 그대가 없으면 나는 으쌰으쌰 하고.. 그래서 그 사랑 이야기할 때 분명히 이야기했거든요. 손자가 이쁘면 그 엄숙하고 점잖은 할아버지도 완전히 애한테 잘 보이려고 쭈쭈쭈쭈 하게 되지요. 그런데 애가 커서 말을 안 들으면 음, 하고 대번(금방) 또 자아로 돌아오잖아요.
그래서 오죽했으면 주님께서 어린애 같은 신앙을 가지라고 이야기하셨겠습니까. 어린애 같은 신앙이 없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는 말은 어린애는 자기는 안 보이고 자기를 보호하시는 분만 크게 보인다는 의미에요.
그 뒤에 나오는(26절) 능욕을 받고 하는 이야기는 그들이 자발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해석을 그렇게 해주는 거에요. 참 좋게 봐도 대단히 좋게 보는 겁니다. 그게 오늘날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거에요. 그렇다고 나 잘났다고 하지 마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 처리하신다는 말을 우리를 좋게 보는 식으로 표현하셨다고 여겨야 합니다.
‘네 죄를 내가 가져갔다. 네가 받을 저주를 내가 가져갔다. 다른 말로 하면 너는 처음부터 저주를 받아도 마땅해. 인생 고생한다고 군말하지 마. 너는 원래 고생을 해도 마땅한 저주를 받을 자야.’라고 하시면서 ‘나는 너를 좋게 본다.’라고 나오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 앞에서 할 말을 잊어버립니다. 애가 공부 못한다고 너무 닦달내지 마세요. 주의 뜻입니다. 그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이에요.
그 다음에 27절을 봅시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여기는 더 이상 이야기할 게 없어요. 전부 다 이러지 않았어요. 그런데 전부 다 뒤늦게 이런 좋은 평가를 내리시는 거에요. 왜냐하면 우리를 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이 하신 일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평가를 내리시는 거에요. 그래서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네 죄를 내가 가져갔다.’라는 말의 되풀이입니다.
만약에 이렇게 해석하지 않고 다른 식으로 해석해봅시다. 24~25절에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라고 되어 있잖아요.
이것을 그대로 생각하면 우리는 뭘 해야 됩니까? 안양 땅이고 서울 땅이고 팔고 남은 돈은 교회에다 갖다 바치고 우리는 보따리 싸들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해야 돼요. 왜? 잠시 안양의 죄와 tv의 낙을 누리는 것, 모든 쾌락적인 것, 내가 기뻐하고 즐기는 것은 다 끊어버리고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받기 위해서 홀로 고려장하는 것처럼 그저 며칠 기도할 양식만 챙겨서 깊은 산속(기도원에 가면 사람 굶어죽었다고 119에 신고들어오니까 안 됨)에 가가지고 고난을 받아야 돼요. 그러면 구원 받습니까? 어떻습니까?
왜냐하면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고난 받기를 더 좋아하고”라고 했지요. 만약에 이 해석이 아니고 다른 해석이라면 우리가 이대로 살아야 돼요. 그러면 죄악의 낙을 다 끊어야 돼요. 그 죄악의 낙은 애굽에서 주어진 것이니까 처자식이고 뭐고 다 버리고 깊은 산속에 홀로 가가지고 거기에서 자살(굶어죽는 것)해야 되지요.
그러면 자살을 했다고 칩시다. 그런 위인들이 한둘이 아니에요. 그러면 그 사람은 구원은 받았겠습니까 어떻겠습니까? 그 사람 속에 뭐가 있겠어요? ‘주님이여 보시옵소서. 내 주체 괜찮지요?’ 뭘 자랑하겠어요? 갑자기 죄는 날아가 버리고 주님의 공로도 날아가 버리고 죄가 날아가면 주님의 대신 공로도 다 날아가 버려요. 뭡니까? 나 잘났다가 나오겠지요. 그런 해석을 교회마다 합니다.
그것은 목사 본인이 모델이 되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야 목사가 갑질을 할 수 있어요. ‘어디 씨, 아마추어가 프로를 닮으려고 해? 나는 성경말씀의 모델이 된다. 나처럼 돼라.’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아마추어들이 바빠서 못하는 것을 목사 혼자(목사는 일주일에 이틀만 일하면 되니까 할 일이 없잖아요.)자기가 이대로 사는 것을 보여주면서 차별화, 계급화 시키는 데에 이런 것을 이용해요.
“뭐 하십니까? 여러분. 여러분 돈을 전부 가정에다가 인테리어 하고 교회는 이렇게 비가 새는데 교회에다가 돈 안 바치고 여러분 아파트 평수나 넓히고. 히브리서 11장 24절, 25절 이 모습이 눈에 안 보입니까? 여러분 초등학교 안 나왔어요? 보세요. 이 말씀이 폼으로 있는 게 아닙니다. 이 말씀대로 살라고 이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을 찢어서라도 지켜야지 왜 여러분 가정만 이렇게 세상 낙을 누리고 교회에는 돈 한 푼도 안 내려고 벌벌 떨고 왜 이렇게 삽니까? 그게 고난 받는 겁니까? 천국 안 가렵니까?”
교인들은 반박이 안 되네요. 왜? 그런 식으로 세뇌를 받았기 때문이에요. ‘뭐라고 반박하지?’ 말이 다 맞거든요. 그래서 하는 말이 “그러면 누구처럼 됩니까?”라고 하면 “나처럼 되면 돼.”라고 하는 거에요. 교주 하나 또 생겼어요. 보이지 않는 것을 하려면 보이는 것에 실망을 해야 됩니다.
보이는 목사, 보이는 교회, 보이는 단체, 모든 것에 실망해야 돼요. 그래야 보이는 것에 매료될 수밖에 없는 엉터리 같은 주체를 까발리는 것이 보이지 않는 주님이 동행했기 때문에 나온 결과라는 것을 우리가 믿을 수가 있습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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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20160311b히11장 23절(나는 없다)-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28절에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라고 되어 있지요.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는 누가 정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제시하신 것이고 제시하실 때에 무엇을 벌칙으로 내세우셨습니까? 누구든지 피를 바르지 않으면 죽는다지요.
그러면 피를 바르는 재앙이 몇 번째 재앙이지요? 질문에 답변을 해주셔야 재미있어요. 10번째 재앙이지요. 10번째 재앙은 무슨 재앙이었습니까? 무엇을 담보로? 죽음이에요. 하나님의 구원이 어디에 나타나는가? 질문이나 답변을 할 처지도 못 되고 헥헥 거리면서 죽음으로 집어넣어놓고 그때 무슨 이야기를 끄집어 내요? 구원을 언급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죽은 자가 구원을 받는 게 아니에요. 죽은 자는 그냥 죽은 자이고 죽은 자를 재료로 해가지고 주께서는 뭔가 일을 만들려고 하지요. 보통 생각으로는 찰흙으로 장난감 모형을 만든다고 하면 우리는 나타난 장난감 모양을 보면서 ‘그래도 찰흙은 있어야지.’라고 하잖아요.
어떤 조각가한테 찰흙을 주고 만들어 보라고 했을 때 잘 만들어서 조각가한테 “참 잘 만들었습니다.”라고 칭찬해주면 찰흙을 제공한 쪽에서는 은근히 기분이 나빠요. ‘찰흙은 내가 제공했는데 나도 한 몫했는데..’라는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내가 죽음을 제공했다면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안 되는 이야기입니까? 말이 안 되는 이야기에요.
“죽음 줄게. 뭐 내놔라.”가 안 돼요. 베드로가 헛소리를 한 거에요. “내가 죽을 지언정 주를 따라가겠습니다.”라는 말은 안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구원의 세계는 내 죽음을 가지고 어떻게 해보는 세계가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중간에 있어서 죽음을 죄로 바꿔버립니다. 그러면 간략하게 죄가 구원이 되느냐는 문제가 되어 버려요.
죄가 구원이 되겠습니까? 죄는 구원이 되지를 않아요. 죄는 그 값을 치러야 됩니다. 그러면 구원은 뭐냐? 주님의 의거든요. 그러면 의는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우리의 죽음에서 나왔을까요 예수님의 죽음에서 나왔을까요? 예수님의 죽음에서 나왔지요.
그러면 우리의 죽음은 뭐냐 하면 우리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을 대비시켜가지고 우리가 구원을 받는 근거는 나의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와 함께 죽기 위해서 투입되신 그분의 죽음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구원과 의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하나님께서 하시고 싶은 겁니다.그렇게 해서 만든 게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홍수가 있기 전에 노아가 방주를 만든 것을 아시지요? 방주를 만들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습니까? 노아의 말을 들으면 ‘아, 방주 잘 만든다.’밖에 안 되는 것이잖아요. 방주 안에 들어가야 되겠지요. 그러면 방주를 만드는 아이디어는 노아의 아이디어에요 노아를 사용한 아이디어에요? 노아를 사용했지요.
그러면 이 방주에 대해서 노아가 어떤 권리가 없지요? 자기가 계획한 게 아니니까요. 그것을 창세기 4장에서는 노아언약이라고 합니다. 이 노아언약이라는 것을 얼른 들으면 이 노아가 어떤 협조와 보탬이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노아가 협조한 게 아니고 노아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에서 언약이 나왔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노아언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모세는 모세언약, 다윗의 경우에는 다윗언약이 되는 거에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죽음으로 몰아넣는 이유가 죽음을 재료로 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겠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죽음에 들어가게 되면 그 죽음에 외부에서 이 죽음에 참여하신 분이 있어요. 출애굽 때는 어린양이 참여했지요.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의 죽음을 보고 “야, 네가 죽도록 충성한 것이 참 대견하다.”라고 해서 구원을 받습니까 아니면 우리 속에 참여하신 어린 양을 보고 우리를 그냥 넘어가는 겁니까? 어린 양의 피를 보고 그냥 넘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피를 문 앞에 페인트칠하듯이 칠하고 사람들은 그 문간에 서있으면 안 돼요.
다시 방주 안에 들어가듯이 피가 발린 그 문 안으로 어린 양의 그 살점을 뜯어먹으면서 옹기종기 모여있어야 돼요. 그러면 주님은 누구하고 상대합니까? 우리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의 죽음을 보고 구원하십니다. 이 말은 네가 뜯어먹든 할례를 행하든 간에 일단 어린 양을 죽여서 우리는 이미 상대할 자격이 없는 죽은 자가 된다 이 말이지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죽은 자요”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와 상대합니까? 내 안에 살아있는 예수님과 상대해서 우리를 구원해내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 받고 난 뒤에 하는 모든 일은 “주께서 하셨습니다.”가 되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나는 뭘 하든 간에 이래서 죽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주께서 하셨습니다를 다 보여주는 일을 성령 안에서 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별로 어려운 말이 아니에요.
제가 언약을 이야기하니까 강도사님인데 다음 달에 목사가 되시는 어떤 분이 언약으로 이렇게 다 풀리는 것을 가지고 언약으로 안 보니까 “제가 뭘 인식해야 되고 구원을 받고 난 뒤에 뭘 또 인식해야 됩니까?” 백날 자기 이야기를 하더라는 거에요. 그런데 언약으로 다 풀어버리니까 인식이라는 것은 따질 필요도 없이 깔끔하게 다 된 거에요. 성경이 다 풀렸다고 할까요 해답이 나와 버린 겁니다.
28절에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라고 하는 것은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예를 정하도록 모세를 이용했다고 보면 됩니다. 그 다음에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라고 한 것은 믿음이라는 것을 중간에 매개로 해서 하나님께서 만든 과정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처리하면서 그 생산물로 구원을 시켜주는 방식으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29절에 보면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라고 되어 있지요. 이것을 제가 설명할 텐데 설명이 아주 쉽습니다. 홍해를 사이에 두고 애굽 사람의 사고방식과 이미 홍해를 건너온 이스라엘의 사고방식을 비교해볼 때 애굽 사람들은 모르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는 게 있어요. 그게 뭘까요? 애굽 사람들이 아는 것은 홍해에 들어가게 되면 죽는다는 거에요. 그러면 돌아서면 되는데 이미 이스라엘 사람들은 건너갔잖아요. 그러니까 ‘너나 나나 같은 인간이다.’라는 생각을 하는 거에요.
이것은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고 누구나 눈에 보이면 다 같은 사람으로 느끼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내뱉는 언어에 같은 의미를 지녔을 것이고 그러므로 충분히 소통이 된다고 여겼던 겁니다. 옛날에는 홍해가 있었잖아요. 그렇다면 지금의 홍해는 뭡니까? 홍해가 있어서 구원이 성사가 되었는데 그렇다고 물속에 들어갈까요? 물속에 들어가면 빠져 죽는데요?
지금은 홍해 같은 기능을 무엇으로 합니까? 이것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홍해가 위로 올라가요. 그러면 이것이 언약이 되는 겁니다. 울산이나 부산에 가보면 부둣가에 골리앗 크레인이 있어요. 콘테이너를 자석을 이용해서 옮기잖아요. 그러면 이 쪽에 있는 모든 일들을 바로 우리가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일단 언약 체계인 골리앗 크레인 안으로 올라가요.
그러면 거기에 예수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려올 때에는 그냥 내려오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내려옵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홍해는 복음의 언어입니다. 복음의 외침입니다. 그러니까 너나 나나 같은 인간이니까 같은 언어로 이야기하게 되면 소통이 되고 통해야 되는데 네가 하는 이야기를 내가 못 알아듣고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자꾸 아니라고 하는 거에요.
그것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어서 홍해로 가로막기 때문에 ‘같은 인간이다.’가 아니라 ‘같은 인간이 아닌’ 거에요. 뭔가가 첨가되었어요. 죽음이 첨가된 인간과 죽음이 없는 인간의 차이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오빠를 살려내라고 닦달을 했잖아요. 그런데 오빠가 죽었어요 살았어요? 사람들이 보기에는 죽었기 때문에 누이동생이 오빠를 살려내라고 했지만 주님은 내 안에서 잠자고 지금 살아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확인해주려고 울면서 오빠를 살려주시는데 그 전에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그 오빠 나사로는 홍해를 건너온 사람이에요. 홍해의 의미가 올라가서 예수 안(어린 양 안)에서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구원을 받았으면 죽어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있는 거에요. 사는 것, 죽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죽는 게 무서우냐 하면은 죽는 것이 무서워서 마귀의 권세에 눌려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 말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말을 내뱉을 때 그냥 내뱉는 것이 아니고 “너 그러면 죽는다.” 하고 무서워 벌벌 떨면서 말을 내뱉는데 성도는 “그게 뭐가 무서워?” 하는 식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수용해버리는 거에요. 그러니까 소통이 안 되는 거에요. 벌써 몇 번째 하는 지 모르겠습니다만, 여기 지우개가 있고 “이것이 지우개다.”라고 할 때 성도가 이게 지우개라고 할 때는 이게 지우개가 됐든 뭐가 되었든 상관이 없다고 하는데 불신자는 “그게 지우개라는 말을 왜 하는데?”라고 해요.
이것은 나라는 주체 안에 죽기를 무서워서 벌벌 떠는 게 있기 때문이에요. 그것에 대해서는 제가 아까 남들(시댁, 친정, 자식)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를 이야기했지요. “쉿, 입 다물어. 당신이 그렇게 복음(말씀)에 미쳐버리면 남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우리 가정이 어떻게 되겠느냐 우리끼리는 이야기하지만 큰집에 가서는 성경이 어떠니 그런 이야기하지 마라.”라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어요.
그걸 강압적으로 한다는 것은 이미 벌벌 떠는 어떤 권력이 있어요. 이 가정은 외부에서 지켜보는 시선에 맞추어야 한다는 그런 권력 같은 것이 있어요. 내 자식은 그래서는 안 되고 너는 이래야 된다는 그런 게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내가 살아있을 경우에는 그렇지만 이미 죽어버린 사람한테는 그런 게 없어요.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은 내가 그 전에 어떤 세계에 있었던가를 회상하면서 다시 끼어들듯이 덤으로 사는 인생을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유를 가지고 살 필요가 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여유만만하게 살아야 되겠습니다. 이게 지식이에요. 주님은 무슨 사태를 일으키셔서 정말 나의 본색은 주님의 적이구나를 깜짝깜짝 놀라면서 깨닫게 하시는 거에요.
지식으로는 ‘뭐 어때?’ 하지만 벌금이 나오면 화가 납니다. ‘기도하고 준비했는데 하필 그 경찰이 나를 잡습니까?’ 화가 나게 마련이에요. 그럴 때 ‘아차, 또 십자가! 십자가가 나타나면 나는 사라져야 되는데 십자가가 없어지니까 또 내가 도드러졌구나.’를 다시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그 다음부터는 두 번째 시간 중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되겠습니다.
너무 어려워서 내가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될지를 모르겠는데요 그걸 하기 위해서 여기에 30절을 봅시다.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라고 되어 있지요. 제가 질문부터 먼저 할게요. “나는 내 안에 어디에 있습니까?” 이게 질문이에요. 나라는 게 내 머리에 있습니까 가슴에 있습니까 어디 뭐 엉덩이에 있습니까 발에 있습니까? 나라는 게 어디에 있느냐 이 말입니다.
만약에 내 영혼 안에 내가 있다면 내 영혼을 내가 지어낸 거라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도 헛수고가 되겠지요. 내 안에 내가 어디에 있느냐 말이에요. 이게 왜 중요하느냐 하면 로마서 7장과 관련이 되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내 안에 또 다른 법이 있어서”라고 되어 있거든요. 결론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나는 없고 두 개의 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나를 상정해요. 왜냐하면 법이 있으니까 지키고 싶어서요. 내가 지켜서 “나 법 지켰다.”라고 함으로써 괜찮아 보이는 나를 자꾸 만들어 내려고 해요. 우리에게는 “나”가 없고 두 개의 법이 상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두 약속이 내 안에서 충돌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면 나는 정녕 없는 것이냐 하면 아니, 있어요. 어디에 있느냐? 두 개의 세력이 충돌해서 생겨버린 결실물들이 바로 나인데 그 나를 가지고 곤고한 나, 철학적으로 말해서 분열된 자아라고 이야기합니다. 뻔히 지키고 싶은데 욱하는 성질, 이래서는 안 되는 줄을 아는 것, 내가 마음에 드는 여자를 봤는데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는 것, 이러면 안 돼 이러면 안 돼 하면서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것, 우리 사이는 이런 사이가 아니야.라고 백날 해도 소용이 없어요.
분명히 철 없는 7살짜리 우리 애가 약해보이는 애를 내가 보는 앞에서 때렸어요. 그러면 누구를 나무래야 돼요? 내 애를 나무라야 되는데 나무라는 척을 하면서 “잘했어. 잘했어. 잘했어. 얻어맞는 것보다 휠씬 좋아. 괜찮아. 빨리 빨리 피해.” 이상하게 자식은 나의 존재의 연장 혹은 확대로 봐가지고 무조건 내 팔 안에서 용납이 돼요. 용서가 되고요. 관대하다고 하지요. 내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무조건 싸고 도는 거에요.
여기에서는 법을 초월해요. 그 법을 초월한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법으로 찾아오십니다. “그래 놓고도 네가 의인이다.” 이것은 로마서 2장에 나와있어요. 유대인들이 할례를 행했지요. 창세기 17장에 보면 분명히 약속을 했습니다. 문자적으로 할례를 행하면 거룩한 백성이다. 그런데 할례를 행했던 유대인들이 누구를 죽였습니까?
할례가 소용이 없네요. 유아인처럼 어이가 없어요. 왜 신체에다가 할례를 하면 소용이 없다고 합니까? 그렇게 되면 문자적으로 할례를 행하면 거룩한 백성이라는 창세기 12장의 약속은 깨져버려요. “그러면 뭘 해야 합니까?”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는 거에요. 이 말은 마음을 네가 잡고 마음을 도려내야 된다는 거에요.
제가 어릴 때부터 멍게를 좋아한 편에 속해요. 옛날 (초등학교 말고) 초등학교 때 길가에 가판을 해놓고 멍게를 팔았잖아요. 그런데 추운 날 벌벌 떨면서 멍게를 잡을 때 어떻게 합니까? 앞에 입구인지 항문인지를 잘라내면 누런 게 튁 튀어나오는데 그렇게 하고 멍게를 주지요. 우리 마음이 멍게라면 정말 나쁜 것을 도려내고 싶어요. 너는 다른 것은 괜찮은데 그 욱하는 성질이 못 됐으니까 가위를 가지고 그것을 자르고 싶어요. 그게 할례거든요.
좋은 쪽과 나쁜 쪽을 구분해서 나쁜 쪽을 잘라냄으로서 좋은 쪽을 선한 쪽으로 유지하는 거에요. 이것을 유대인들이 해왔어요. 예수님이 놀리지요. “너 왜 오른눈을 안 빼지?” 놀려도 보통 놀리는 게 아니에요. “오른눈이 범죄하거든 빼버려라. 나머지 눈을 가지고 깨끗해야 천당에 가.” 그러면 나머지 눈은 괜찮습니까? 그 눈이나 이 눈이나 마찬가지지요. 그러면 또 빼야 됩니다. 지금 주님이 놀리고 있는 거에요. 이 말의 뜻은 그 뒤에 나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지금 내가 말을 쉽게 풀이하자면 정말 쉽습니다. 내가 여기에 있고 내 손으로 멍게를 잡았어요. 튁 하고 물이 튀잖아요. 법이 뭐냐면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는 거거든요. 그래서 내가 일단 내 마음을 끄집어내요. 그러면 내 마음은 대상이 되고 나는 이 대상(마음)을 관리하는 주체가 되는 겁니다. 마음이라는 말이 어려우면 양심이라고 합시다. 양심을 끄집어내놓고 내가 관리하는 거에요. 그러면 내 양심을 내가 조리하게 되고 내가 처치하게 되면 그렇게 하는 내 마음은 따로 있어요 따로 있지 않아요? 따로 있지요.
그러면 양심을 끄집어냈는데 양심이 두 개이고 마음을 끄집어냈는데 마음이 두 개가 되어버려요.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시는 인간의 모순입니다. 마태복음 7장 1절에 보면 “네가 비판하는 그 비판을 그대로 받으리라” 그렇다면 이 말씀대로라면 비판할 때는 네 속에 들보를 빼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들보를 빼려면 내 마음을 대상으로 남겨두고 마음을 하나 더 상정해가지고 ‘들보가 어디쯤에 있지?’라고 하면서 집게로 뽑아내야 돼요. 그러니까 이 말은 뽑아내면서 내 마음은 ‘이것은 들보이고 저것은 들보가 아니다.’라는 판정을 누가 내립니까? 내가 내려야 됩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그렇게 온전하다는 것을 보장해줄 수 있는 제 3의 마음을 하나 더 상정해야 된다는 논리에요.
‘그런데 그 마음은 괜찮습니까?’ 마음을 무한대로 또 상정해야 돼요. 거울 앞에 있는 거울에다가 또 거울을 배치해보면 거울을 보면 거울 속에 내가 무한대로 촘촘히 있잖아요. 이게 불교의 딜레마입니다. 도 닦은 나를 또 닦아야 되는 거에요. 또 이것이 성화론의 한계 아닙니까? 괜찮게 성화된 나를 또 자기 부인하고 낮아졌기 때문에 분해하는 그 마음도 교만이라서 또 버려야 되고 그래서 어떤 사람은 책 제목에다가 내려놓음이라고 했어요.
몽골의 선교사가 지은 책인데요 내려놓은 그 마음을 내려놓았다고 누가 판정을 내립니까? 본인이 내리지요. 그 마음은 안 내려놓은 거에요. 딜레마입니다. 딜레마에요. 그래서 이렇게 정리하시면 간단합니다. 우리 속에는 자아가 없는데 주님이 주신 두 개의 법이 충돌하다가 보면 거기에서 자아라는 것이 발생되어서 ‘주님, 저는 살아야 되겠습니다.’라는 울부짖음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그렇다면 내가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라고 외치는 것이 정당할까요 정당하지 않을까요? 문제도 어려운 것을 냈네요. 만약에 이것이 정당하다면 문제가 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내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한 것이 돼요. 그렇다면 아까 이야기할 때 정답을 냈습니다. 주께서 주신 법에 의해서 결과물로 만들어진 것이 자아라면 그렇게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말은 누구의 솜씨가 돼요? 주님이 나한테 작용해서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혜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맨날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라”는 마음이 수시로 일어나게 해주시면 주님 앞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제 말은 걱정하지 말라는 거에요. 주께서 알아서 그렇게 해주시는데 다만 그런 일에 대해서 훼방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나는 이래야 돼.’라는 나가 계속해서 일어나는 거에요. (그것이 나르시즘, 이기주의잖아요.)
‘내 구원을 받으면 나는 땡이다. 이제부터는 알아서 산다.’ 이런 마음이 자꾸 드니까 그것을 그냥 방치할 수가 없어가지고 계속해서 주께서 찾아오시는 거에요. 다시 한 번 29절을 보면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험하다가”에 대해서 사사기에 보면 이런 것이 있지요.
기드온이 말하기를 솜을 놓고 “솜만 이슬이 몽땅 적시게 하시고 다른 것은 바짝 마르게 하옵소서”라고 하니까 주께서 그렇게 해줬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솜이라서 습기를 모은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바꿨어요. “이번에는 솜은 가만히 있고 바깥은 축축하게 해주시옵소서” 그러니까 그대로 해줬거든요.
그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은 제가 아까 첫째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주의 일을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결국 나는 누구냐와 관련된 거에요. 하나님의 관심사는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고 그것을 알기 위해서 기드온 전쟁을 벌이신 거에요. 하나님이 누구신가? 우리에게 시험 받으셔서 돌아가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없는 것 때문에 많이 당하신 분이 하나님이에요. 우리는 수시로 틈만 나면 시험하잖아요.
그래서 이 본문(29절)을 보시고 그 애굽 사람을 누구라고 생각하면 됩니까? 바로 오늘날 나라고 생각하시면 정답이십니다. 그리고 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홍해를 건너온 이스라엘 사람이 되는 거에요. 혼자 바빠요. 이스라엘 사람이 되었다가 다시 애굽으로 갔다가.. 그렇게 함으로써 그 홍해만 부각되면서 ‘참 내가 주님 보기기에 이미 죽은 자이지.’ 죽은 자가 살았는데 그 사람이 다시 산 입장에서 다시 죽어가야 될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뭘 보여주려고? 잘남을? 아니, 믿음만 보여주려고요.
그 다음에 30절을 봅시다.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이 여호수아 6장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한 번 봅시다. 여기에 구약이 있습니다. 신약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우리하고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범위는 ‘태어났다. 하나님께서 일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에 죽었다.’이지요. 구약은 사람이 태어나서 죽는 게 연극 무대였습니다. 그런데 신약(신약의 연극무대)는 ‘사람이 태어났다. 죽었다. 사흘 만에 부활한다. 영생을 얻었다.로 끝나지 않아요. 또 소급합니다. 우리가 출생하는 것도 창세 전부터 예정된 것이다.’ 이렇게 되겠지요.
그러면 창세 전부터 시작해서 부활, 재림까지 이미 범위를 아울러서 하는 해석이 신약의 해석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해석은 뭡니까? ‘죽으면 안 돼. 죽으면 끝이야. 죽으면 실패야. 죽으면 소용없어.’ 이게 끝인 거에요. 그래서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그것을 과도기라고 하는데 이 과도기가 마태, 마가, 누가 복음입니다.
이때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에 옆에 있던 조눈객들이 예수님한테 따지지요. “이미 그 소녀는 죽었는데 왜 이제 오십니까?” 아까 이야기한 마르다와 마리아와 같이 이야기해요. “죽어서 이미 종쳤는데 진작 오시지 왜 죽고 난 뒤에 왔습니까?”라고 말하지요. 그 말이 오늘날 우리에게 충분히 납득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면서 평소에 편안하게 살아가는 자아는 이 육신 때문에 불신자의 자아를 매일같이 반복하니까 주께서 알아서 반복해서 십자가의 은혜로 마주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거에요. “구약아 이리 오너라. 신약으로 대치해줄게.” 이거거든요. 우리는 ‘죽으면 안 돼. 죽으면 안 돼.’ 애기가 아프면 ‘안 돼. 이 성경공부고 뭐고 어느 병원에 입원했는데?’ 우리에게 그처럼 다급한 게 없어요.
딱 까놓고 이야기해서 그렇지요. 남의 자식이 문제가 아니고 내 자식이 문제에요. 죽으면 끝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지시하신 것은 멀쩡하게 살아있는 이삭을 죽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그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지요. 믿음의 모델 케이스에요. 그리고 그 믿음과 동일한 믿음의 계열에 속한 믿는 자라고 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네 아들을 바치라고 어느 날 꿈에 계시로 이야기한다면 바칠까요 안 바칠까요 바치지 말까요? 몇 번일까요? 3번이 정답입니다. 바치지 마세요. 큰일나는 소리입니다.
지금은 신약시대에요. 바치지 마세요. 바친다고 구원 되는 거 아닙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언약이고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언약이에요. 내가 돈을 바치고 아들을 바쳐서 신학교에 보낸다고 구원 되는 게 아니고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이 확정된 상태에서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듯이 우리 대신 아버지께 바친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아들의 자격으로 아브라함언약에 의해서 대신 바쳤기 때문에 교회의 설교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 초점이 마지막으로 도달되어야지 헌금합시다. 기도합시다. 전도합시다.로 끝나면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면 또다시 구약으로 돌아간 셈이 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신약은 창세 전부터 해서 이미 마감(모든 것이 끝남)이 되어 버렸으니까 부활, 재림까지 아울러서 해석이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입장에서 신약 성경을 보세요. “분을 품되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마라”라고 할 때 “그러면 해가 지고 난 뒤에 분을 품으면 됩니까?”라고 자꾸 구원 받으려고 하지 마시고 이미 구원된 사람으로서 해가 지도록 분을 품는 이런 인간이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구원을 받은 입장에서 이렇게 넉넉하게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다시 볼 수 있는 그런 여유로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아멘? 아멘.
제발 좀 여유롭게 사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 5장에 “주님이 너를 사랑한 것처럼 너도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나오잖아요. 그러면 그것을 쭉 보세요. 보고 나서 ‘사랑하면 끝나지.’라고 하면서 입 싹닦고 ‘사랑하면 되지, 내가 뭘 사랑할 필요가 없어.’라는 마음이 내 속에 늘 울렁거리면서 ‘나르시즘(이기주의) 또는 자아도취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죄를 위해서 주께서 책임지셨군요.’라고 이미 끝난 사건을 회고하듯이 ‘내가 이렇게 더러운 존재밖에 안 되는군요.’ 바라보시면 모든 것이 행복합니다.
그리고 마음껏 자기 속에 있는 성질을 내보여주세요. 내가 개를 안 좋아하잖아요. 예의상 개를 좋아해야 되는데 안 좋아지는 걸 어떡해요. 누굴 봤는데 얼굴이 붉어졌다면 붉어지세요. 죄 아닙니다. 붉어지든지 안 지든지 간에 이미 구원 받은 상태거든요. ‘아니야, 마음으로 간음하면 안 돼.’ 그러나 마음속으로 간음을 안 하고 싶어도 나오게 되어 있는 게 그 마음인데 그걸 누가 말립니까? 얼굴에 집게 꽂아놓고 ‘참아야 하느니라.’ 하고 은장도를 가지고 허벅지를 찔러봐야 피부과에 가서 치료만 더 받지 아무 짝도 소용이 없어요. 기도하고 싶어요? 하세요. 억지로 하지 말고 그냥 편한 대로 사시면 결국 그것이 전부 다 내 마음 대로 사는 것, 멋대로 사는 거에요. 죄가 드러날 겁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구약적 이야기인데 신약적으로 해석을 어떻게 하는가에 대해서 30절을 봅시다.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라고 했지요. 신약으로 어떻게 해석하는가를 보기 전에 구약으로 해석해 봅시다.
여리고 성이 여기에 있어요. 성문이 있고 해자(건너오지 못하도록 한 것)가 있고 다리가 있고 그 다음에 성 위에 깃발을 해가지고 여리고 성의 군사들이 ‘오기만 해봐라.’ 하고 촘촘히 활 쏜다고 전부 대기하고 있다 이 말이지요.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와서 이러한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여리고 성은 단단한 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 밖에 있습니다. 이 속에 누가 개입하십니까? 하나님이 개입하시지요. 개입할 때 어떻게 하시는가를 신약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법보다 위에 있는 원칙으로 여리고 성이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당시는 모세 율법 시대이기 때문에 법 위에 무엇이 없어요. 이 말은 법대로 해야 된다는 거에요. 법대고 해야 되는데 그들은 법대로 못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숨어있는 법 위에 있는 것대로 한 것으로 쳐줘요. 왜냐하면 그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법대로 지키기 못해도 법대로 지킨 것으로 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법을 잘 지켜서가 아니라 그들 속에 동행한 자가 있기 때문에 주의 법을 지켜서 무너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을 돌되 그냥 돌면 안 되고 언약궤를 앞장 세워서 은나팔을 불고 법궤는 제사장이 포위하고 제사장이 중심으로 그들이 앞장 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줄줄이 따라오면서 하루에 한 바퀴, 안식일에 일곱 바퀴를 돌았습니다.(법이지요.) 그 사람들이 이대로 했지요? 그런데 이대로 했으면 법을 지킨 것이 아니겠어요?
아까 제가 분명히 법대로 했다고 했는데 이게 엉뚱하지 않습니까? 돌았잖아요. 그런데 뭐가 빠졌지요? 보폭은 몇 센티로 돌라고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돌 때 속도는 얼마로 하라고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자기 맘대로 돈 거에요. 세칙을 안 준 거에요. 제사장이 양을 잡았어요. 히브리서에 보면 아무리 양을 잡아도 법대로 한 것이 아니에요. 사람마다 다 달라요. 양을 베는 각도, 칼을 몇 센티로 갈아야 된다는 세칙을 안 준 거에요. 지금 제가 말한 것의 취지를 머리가 좋은 사람은 약간 아십니다.
데살로니가서에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나오지요. 감사할 때에 세칙을 줬습니까 안 줬습니까? 안 줬지요. 기도할 때 무시로(시도 때도 없이) 기도하라고 했지 세칙을 주지 않았습니다. 몇 시에 기도하라고 줬습니까 안 줬습니까? 안 줬지요. 그런데 요한과 베드로는 기존의 전통대로 오후 세 시 기도 시간에 기도했지요.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기도를 오후 세 시에 해야 됩니까?
이 말은 모든 인간은 주님과 나 사이에 자기가 행동을 하려면 자기 나름대로의 실천할 것 같은 법을 인위적으로 조작해 낸다는 겁니다. ‘나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볼 거야.’ 이것도 법이에요. ‘평일에는 두 장 보고 주일날에는 세 장 볼 거야.’ 이게 법이라니까요. 법없이 산다는 것은 거짓말이에요. 왜? 법을 본인이 만들어 내기 때문이에요. 이걸 징크스라고 하지요.
‘나는 축구 할 때 양말을 안 갈아신어.’ 이것도 징크스에요. 여러분마다 징크스가 다 있을 겁니다. 다 있어요. ‘애를 때릴 때 손으로 때리지 않는다.’ 이것은 엄마(자기)가 지어낸 거에요. 우리나라 법에 손으로 때리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고함을 지를 때 30초 이상 고함을 지르지 않는다.’ 이게 다 자기가 만든 법이에요. 왜? 그렇게 될 때 왠지 자기가 정당해지고 뭔가 그 법이 착한 일을 한 것 같아요.
법은 누가 만드느냐 인간의 육신에서 법이 나와요. 그 법이 있는데 다른 법이 온다니까요. 다른 법이 오니까 내게 있는 법 감정으로 그 법(십계명)을 지킬 것 같아요. 아니, 지켰다고 치고 싶어요. 내 자아가. 이렇게 하루에 한 바퀴, 안식일에 일곱 바퀴, 총해서 13 바퀴를 돌고 나서 여리고 성이 무너지니까 “우리가 이렇게 행해서 무너졌습니다.”라고 말을 함으로 쓱 우리 기분이 좋아지고 싶어요. 이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그 다음에 아이 성을 칠 때(이때는 몰랐습니다.) 그 속성이 나옵니다. 아이 성을 가볍게 봤습니다. 우습게 보고 얕잡아 봤어요.
그러면 묻습니다. 얕잡아 보지 않았으면 아이 성을 정복했을까요 정복하지 않았을까요? 어려운 질문을 내가 했어요. 얕잡아 안 보고 중요하게 봤으면 이겼을까요 안 이겼을까요? 마찬가지로 진 거에요. 왜냐하면 주께서는 얕잡아 봤다고 핑계를 대는 거에요. 그것이 법 위에 주님이 계신 거에요. 제가 며칠 전에 아벨과 가인의 이야기를 했지요.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법을 줬습니다. 그 법으로 말미암아 희생자가 있었지요? 아벨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한 벌칙을 주잖아요. 그런 어려운 이야기는 짧은 설교 시간에 못해요. 벌칙이 그 법의 진수를 이야기합니다. 벌칙을 봐서 그 내용이 어떤 것이냐 구체화시킬 수 있어요. 벌칙이 없는 없는 법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숙제 해라.” 아무도 안 합니다. “시험에 이거 나온다.” 확 해요. 벌칙을 통해서 법의 내용을 추후적으로 소급해서 파악이 되는 거거든요. 그 벌칙의 내용은 안 죽고 번성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의 벌칙? 가인의 벌칙? 아닙니다. 죄의 벌칙입니다. 죄의 증가입니다. 죄에 시달리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벌칙이에요.
그래서 오늘날 벌칙은 ‘내가 한 일이 착한 일일까 나쁜 일일까? 분명히 남들 다 새치기를 해서 나도 새치기 했는데 내 양심이 가만히 있지를 않네.’ 이게 우리가 당하는 벌이에요. 죽을 때까지 평생 동안 ‘내가 지금 맛있는 것을 먹는데 우리 애는 이것이 없는데.. 이걸 택배로 보낼까? 그러면 이번 달 생활비가 많이 없어지는데? 안 보내면 엄마 혼자 맛있는 거 먹는다고 할 거고..’ 이게 벌칙이에요.
법을 의식하는 것이 벌칙이라니까요. 내가 착했는가 착하지 못했는가가 벌칙이라니까요. 그런데 강도와 세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벌칙이 없어요. 간통하다가 잡혀가지고 용서 받은 사람은 벌칙이 없습니다. 간음한 여인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너를 정죄한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지요 그때 여인이 대답하기를 “아무도 없나이다” 아무도 없는 거지요. 이게 복음이에요. 아무도 없는 거에요. 벌벌 떨 이유가 없어요.
얼레리 꼴레리 하고 주홍글씨 박아가지고 “너는 간음한 자다.” 하는데 박으려면 박아라. 내가 알아서 수놓을게. 수놓으라고 하세요. 남의 시선, 평가, 판단이 아무 상관이 없어요. 왜? 그들은 심판주가 아닙니다. 심판주에 의해서 미리 당겨서 순회재판을 받은 거에요. “이리 나와.” 다른 사람이 보고 있는데 물어요. “너를 누가 정죄하더냐?” “정죄한 사람이 없나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이것이 법 말고(외에) 다른 법, 그러니까 옛술과 옛부대가 있어줘야 새술과 새부대가 있어요.
새술은 죄인을 부르러 온 것이다 이거에요. 부르러 와서는 죽은 자로 만들고 죽은 자에게 예수님이 자기의 죽음을 합세해서 내가 죽었다고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함께 죽음에 근거해서 이 죄인을 의인이 되게 할 때 그 의가 있는 곳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 혜택을 받고 있는 거에요. 지금 5시 5분 전이거든요. 내가 장담할게요. 5시만 되면 이걸 다 잊어버려요. 깔끔하게 잊어버립니다.
이 복음을 알았으니까 여기를 나가면 좋은 행운이 찾아올거라고 생각을 해요. 예, 행운이 찾아올 겁니다. 이 복음의 구절에 맞춰서 인생을 몰고 가십니다. 그게 행운입니다. 우리의 뜻대로 말고 주의 뜻대로 원치 않는 길로 가게 될 거에요. 미국에 가신다고 했어요? 좋은 일이 또 기다립니다. 주께서 아주 멋드러진 일로 시공간을 초월해서 기다립니다.
여리고 성이 그렇게 해서 무너졌습니다. 그들(구약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하지 않았어요. 법대로 했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신약은 창세 전부터 구원 받아야 될 자들이기에 그때 너희들은 내가 함께 동행해서 믿음으로 성을 돈 것으로 쳐주시는 거에요. 십자가 안에서. 그래서 십자가를 경유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해석이 주어져야 됩니다.
구약에 그것(십자가)의 흔적이 있어요. 그들 속에 언약궤가 그들과 동행했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언약궤가 동행한 거에요. 언약궤가. 언약궤를 쥐는 것이 언약을 완성하는 겁니까 언약궤를 앞장 세워서 제사장이 함께 돌면 언약궤가 움직이는 겁니까 아니면 언약궤가 그들을 이끌고 간 겁니까? 언약궤가 이끌고 간 거에요. 그래서 그들은 여리고 성을 보면 안 돼요. 성이 무너질 거라고 보지 마시고 이미 성이 무너졌다고 봐야 돼요. 이게 새로운 묵시적 시관관입니다.
눈앞에 여리고가 이중 삼중으로 있더라도 ‘끝! 너는 완전히 벽돌 잔해야!’라고 볼 줄 아는 주어지는 겁니다. 그걸 내 눈으로 보면 안 돼요. 내 눈으로 보게 되면 들어가서 물건을 훔칠 생각을 해요. 나도 같이 무너져야 돼요. 여리고 성도 무너지고 나도 무너지고.. 저 여리고 성을 점령한 그 첫 발길은 나와 함께 동행했던 언약의 주님께서 그것을 접수해서 우리에게 그냥 선물로 주는 거에요.
그 선물이 아까 질문하셨던 관계입니다. 유리 파이프. 선물을 주는 거에요. 그러면 선물을 받은 나를 좋아하면 안 돼요. 선물을 가져다 주신 그 택배 아저씨가 좋아야 돼요. 그러면 우리는 내가 구원 받은 게 좋은 게 아니고 택배 아저씨가 나를 떠나지 않고 계시다는 그것이 좋은 거에요.
그러니까 여리고 성의 무너짐은 매일같이 되풀이 되는 겁니다. 동창생 친구가 이번에 50평 아파트에서 100평짜리로 넓혔다면 그것이 우리한테는 여리고 성처럼 ‘나는 뭔데?’ CF에 그런 것이 나오지요. “우리 집에 얼음 나온다.”라고 하니까 옆에 아이가 “우리 집은?” 하고 엄마한테 사달라고 조르지요. 친구가 아파트를 100평짜리로 옮겼는데 우리 집은 지하에요.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함께 동행하시는 분은 깜빡 잊어버리고 그걸 차지할 욕심에 ‘주님이여 내가 어떤 법을 지키고 기도를 며칠 하게 되면 저 내가 얻고자 하는 100평짜리 아파트를 내 소유로 등기시킬 수 있습니까?’를 슬슬 계획하는 거에요.
십자가 믿을까요 언약 믿을까요 아는 것은 다 동원해요. 이렇게 하지요. 그때 주께서 은혜를 주시면 100평짜리에 살다가 지옥 가는 것이 더 좋으냐 거지 나사로가 되어서 천당에 가는 게 좋으냐 창세 전부터 천국까지 늘어나니까 해석(적용)을 넓게 봐야 돼요. 아파트가 문제가 아니고 더 범위를 넓혀보게 되면 결국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임이 더 좋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지요. 그게 3초 갑니다.
깨달았으니까 내놓으세요. 깨달았으니까 100평짜리 내놓으세요. 그럼 주께서 지금 네가 사는 곳이 100평짜리다. 왜냐하면 네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고 너를 죽임으로써 얻은 것이다. 날마다 죽여가면서 주어진 10평짜리 아파트, 원룸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막 살으라는 말을 하면서 뒤에 덧붙이는 게 있어요. 작은 것 하나 귀한 줄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걸 꼭 덧붙이기를 제가 원하고 있습니다.
막 살아라. 그래야 작은 것 하나, 하물며 이런 모임도 우리 뜻이 아니고 다 주의 뜻입니다. 작은 것 하나도 반짝반짝 빛나는 다이아몬드 보석같이 귀하다 이 말이지요. 목에만 다이아몬드 하지 마시고 우리 속에 다이아몬드가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다 알아서 우리에게 제공한 선물인데 우리의 노동으로 얻은 것처럼 그렇게 생각한 것은 그동안 세상 살면서 스펀지처럼 세상의 세속의 정신이 우리 속에 꽉 찼기 때문에 생긴 현상인 줄 압니다. 이런 죄인을 위해서 대신 죽으셨사오니 이제 주님만 수시로 스펀지에서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