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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충성모
안양20160513a히11장 35절(표백)-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5절할 차례입니다. 제가 한 번 읽어볼게요.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되어 있지요. 히브리서를 보게 되면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분명히 천국에 간 사람들이에요. 12장 1절에 보면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라고 되어 있지요. 천국에 간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그들은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정리가 되지요. 성도란 이 땅에 살면서 예수님을 증거한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증거했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자기를 증거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나의 잘났음을 증거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형편이 잘 되면 자기를 자랑하고 싶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걸 아시고 (여기에 나오는 예수님을 증거한 사람들의 특징들처럼) 당사자도 참 당황스러운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는 거에요. 본인이 의도하지 않고 본인이 기대하지 않은 인생으로 하나님이 자꾸 몰아붙이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건 내가 결심했는데.. 이건 내가 기대했는데..’라는 것이 자꾸 틀어지는 거지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왜 당신 인생은 당신 마음대로 안 돼?”라고 물으면 그제사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이 “나의 인생은 나를 증거하는 인생이 아니고 주님(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렇게 나를 몰아세웠어.” 이런 고백이 저절로 나오는 거지요. 훈련을 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고 저절로 그 고백이 터져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가 이렇게 정리가 됩니다. 항상 정리하는 것을 염두해두셔야 됩니다. 한 번 써볼게요. 나의 증인이 아니다. (나의 증인을 가위표하겠습니다.) 그러면 나의 증인이 아니라는 말은 세상 모든 사람은 자기의 증인이 된다. 자기의 잘난 맛에 살아가는 거에요. 이게 대부분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성도다 마찬가지고 틈만 나면 자기의 잘난 맛에 살고 싶어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한 거에요. (예수님의 증인은 공표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하신 것은 나의 증인에서 강제로 예수님의 증인이 되도록 조치가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개입한 거에요. 노아는 취미 생활로 방주를 만든 게 아닙니다. 커다란 배 만드는 게 취미인 사람이 어디 있습니다. 그건 아니거든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하고 아브라함이 자기의 아들을 바치는 게 취미나 즐거움이 아니에요. 이것은 얼토당토않은 획기적인 사건이 개입이 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증인이 된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의 인생을 전부 통합해버리면 어떤 인생이 됩니다. 아브라함의 인생, 이삭의 인생, 모세의 인생, 노아, 에녹의 인생을 다 끌어모으면 하나의 꽃다발, 부케처럼 이 땅에 태어나서 십자가에 죽어서 부활하시기까지의 예수님의 공생애가 나옵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모든 성도들의 일을 전부 조합하면 예수님의 공생애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성경의 모든 말씀을 해석할 때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터뜨리는 방식으로 해석을 하게 되면 OK이고 그렇지 않은 해석은 다 엉터리 해석이 되는 거에요. 야곱이 이삭에게 특별음식을 바쳐서 복을 받았다고 해석을 하면 이것이 엉터리 해석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문자로 보게 되면 그 말이 맞아요. 또 에베소서 5장에 “너희는 용서를 받은 것처럼 서로 용서하라”고 나와 있는데 이것을 “우리가 용서를 받았으니까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자”라고 문자로 보면 맞기는 맞는데 무엇이 빠져버렸습니까? 예수님의 공생애가 빠져버렸지요. ‘내가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자. 그래 공경하자.’라고 해버리면 예수님의 공생애가 빠져버린 겁니다. 어버이날 설교에 보게 되면은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보란 듯이 모범이 되어서 안 믿는 사람에게 본이 되기 위해서 부모께 효도해야 됩니다. 그래야 여러분들이 오래 삽니다.”라고 해버리면 무엇이 빠져버렸어요? 예수님의 공생애가 빠져버린 거에요. 내가 오래 살고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린다 이 말이지요.
부모한테 효도한 것이 자기의 자랑이 되어 버리면 제가 가위표를 친 나의 증인이 아니었고 예수님의 증인이라는 예수님의 개입이 빠져버리는 겁니다. 다시 할게요. 모든 인간은 자기의 잘난 맛에 살아가요. 그런데 여기에 성경 말씀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러면 해석 작업이 일어나는 겁니다. 지금 해석 작업이 잘못 되어 있다는 것을 제가 이야기하는 거에요. 나의 증인이 되고 싶은 그런 심보와 성격을 가지고 성경해석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나오는 게 ‘역시 나는 잘났어.’라는 말이라면 이 사람은 천국을 가는 사람들의 공통점에서 누락이 되어 버려요. 합세가 안 된다고요. 사실 그런 해석을 여러분 주위에서 많이 듣고 있습니다. 기존교회에서도 그렇고 심지어 같이 교회에 다니는 남편이나 자식의 해석에서도 많이 듣고 있어요.
그러면 우리는 복음을 알았으니까 ‘그게 아닌데..’라는 느낌은 있는데 도대체 논리적으로 말을 못하겠는 거에요. 뭔가 아닌데 어느 지점에서 틀어지는지를 모르거든요. 히브리서가 이걸 설명하는 거에요. 허다한 증인들이라는 것은 다들 자기의 증인이 되고 싶어서 환장했는데 강제 조치로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서 주님과 만나는 자들로 그들이 성도라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해도 이걸 잘 아는 사람은 ‘내가 내 해석을 제대로 해서 예수님의 증인하면 되잖아.’라고 우길 수가 있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의 강제 조치가 빠져있고 그 다음에 그 모든 해석이 예수님의 조합에 포함이 되는 식, 다시 말해 예수님의 공생애로 마감이 되어야 되는데 예수님의 공생애로 마감이 되는 해석은 예수님의 영이 임해야 가능해요.
“이거 이거 예수님의 공생애에 넣어주세요.”라고 뇌물을 준다고 주께서 “그것도 괜찮네.” 하고 받아주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의 성령에 의해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증인이 되도록 조치가 되어 버리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예수님의 공생애에 합류가 되는 같은 성질의 것이 되는 겁니다. 여기까지 이해가 되셨지요. 전체가 이렇게 된다고 하고 이제는 예수님의 증인에 대해서 언급하는 겁니다. 오늘 히브리서 11장도 마찬가지고요. 이렇게 된 것을 한꺼번에 이야기하면 이렇게 정리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적 역사는 없다.’입니다.
개인적 역사의 고리, 역사의 연결은 의미가 없다, 사적 역사는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결혼을 하셔가지고 성인이 되어서 다른 동네에 살다가 우연한 기회에 옛날 국민학교 때에 물장구 하고 수영하고 놀고 공차고 했던 고향을 지나가게 되면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있어요. 그 광경과 더불어 중첩되어서 그때 있었던 일들이 한꺼번에 확 추억으로 밀려오듯 기억이 납니다. 옛날에 옆집에는 누가 살았고 옆집 개는 무슨 개였고 옆집의 할아버지는 언제 어떻게 친절을 베풀었고 했던 장면들이 겹쳐서 막 나오지요. 그게 사적 역사가 돼요. 또 그때가 그리울 수가 있어요. 그때를 그리워해요. 그리고 그리운 동시에 지금의 나의 현재의 위치와 그때 어릴 때의 내 치가 연결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걸 가지고 역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아까 히브리서를 보시면서 느낀 점은 이것은 결코 그들의 역사가 아니라는 거에요. 개인적인 역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개인적인 역사를 용납하지 않는 사건에 대해서 언급하는 거에요. 제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면 우리는 괜찮은 나의 역사, 교회를 잘 다니는 나의 역사를 그대로 쟁반에 담아서 “하나님 은혜로 이렇게 살았습니다.”라면서 드리고 싶은데, 하나님은 그 쟁반을 엎어버리지요. 그런 것을 역사로 안 받고, 그때 있었던 사건 있잖아요. 돌발적인 사건만 추려서 받아버립니다. 주께서 유발한 사건만 회수하듯이 가져가버려요.
아브라함의 인생, 노아의 인생 전부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노아의 인생 전부라고 하면 노아가 어릴 때는 어떻게 살았고 밥은 하루에 몇 끼를 먹고.. 그런 것은 성경에 안 나옵니다. 안 나오지요?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방향을 틀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란 지역에서 떠나게 만드는 것, 갈대아 우르 지방에서 떠나게 만드는 것, 그런 사건들이 중요한 거에요. 내가 내 인생 중에서 괜찮은 걸 뽑는 게 아니고 주께서 알아서 뽑는데 그 뽑는 것의 근거는 예수님의 공생애가 된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미리 앞당겨서 (노래의 전주처럼) 그냥 끼어들면서 우리를 사용했던 그 사건들만 주께서 회수하는 거에요.
우리는 내가 잘한 것, 괜찮은 것, 십일조 바치고 하는데 그런 것을 안 받아요. 내 인생이 와장창 구겨지는 것, 내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백날 엮어봐야 하나님께서는 그걸 다 배타시하시고 그걸 보이콧하시고 그걸 아니라고 하면서 내팽개치는 역사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그 계기들만 뽑아세워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나 성도나 죽을 때까지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게 없다는 말이 계속 유효한 겁니다.
분명히 제가 이렇게 히브리서 11장에 근거해서 언급한 겁니다. 천국 가는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의 인생의 잘난 맛을 보는 게 아니고 주께서 채택해서 중요 사건을 뽑아내는 겁니다. 분명히 성경에서 그런데, 막상 평소에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게 되면 성경의 이야기는 왔다가 사라지는 바람 같은 것인가 몰라도 그냥 왔다가 그냥 가버리고 다시 돌아서면 개인적 역사에 대한 의미 부여에 또 매진합니다. ‘내가 이렇게 함으로써 내 인생을 얼마나 고귀한 인생으로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느냐.. 지금껏 제대로 살아왔듯이 오늘도 제대로 살고 이것이 모아져서 내일도 제대로 살아서 내일 주께서 오신다면 “그것 참 잘 살았네. 훌륭하게 살았네.”라고 칭찬을 받야야지..’ 하는 사적 역사를 또 속에 콱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매일같이 예수님의 간섭과 관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적 역사가 나의 증인이 되거든요. 나는 이렇게 해서 이렇게 살았습니다.라고 하는 나의 증인, 겸손한 것 같은데 사실은 겸손하지 않고 자기의 역사 속에 자기가 파묻혀서 거기에 매료가 되는 거에요. 그걸 나르시시즘이라고 해요. 나르시시즘이라는 것은 자기애라고 하는 거든요. 물속을 보다가 물속에 비친 자기의 모습이 너무 이뻐가지고, 다른 여자가 아닌 자기의 모습에 매료가 되었어요. 그래서 자기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 물속에 뛰어들어서 죽어버렸다는 신화가 있어요. 그래서 거기에서 피어난 꽃이 있었으니 그 꽃의 이름은 수선화입니다. 영어로 수선화를 나르시스라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아무리 다른 사람과 사귀더라도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인간의 속성을 그렇게 신화로 표현한 겁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을 끌어낼 수가 없지요.
그 점을 잘 이용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누구든지 지옥에 가기 싫거든 오른손이 범죄하거든 찍어버려라.” 존재하지 않는 자만이 지옥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아요. 예수님께서. 지옥에 빠지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벌써 너희들에게는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능력이 없다.”라는 이야기입니다.
12일날 개봉하는 영화에 ‘곡성’이라는 영화가 있지요. 전에 제가 곡성이라는 곳에 한 번인가 가본 일이 있어요. 곡성에 광주 모임에 오시는 조집사님이라는 분이 있어가지고 곡성에서 공부를 한 차례인가 두 차례인가 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굉장히 반가워가지고 그 영화를 봤어요. 곡성이라는 곳이 광주 근처에 있는데 그곳이 아마 유명해질 거에요. 그 영화를 보게 되면 마지막에 실패로 끝나요. 그 곡성 지역에 마귀(악마)가 덮쳤는데 그 악마를 쫓아나기 위해서 일광이라는 이름의 박수(남자)무당부터 해가지고 일본에서 건너온 무당까지 다 합쳐서 여기의 귀신을 쫓아내려고 했는데 마지막의 결론은 다 실패로 끝났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 내면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게 그 영화의 주제에요.
그러면 그 영화를 보고 이런 복음적인 내용을 십자가 마을에 올리시면 참 좋겠습니다.라고 하는데 스릴러 영화를 줄거리를 다해가지고 올려버리면 다음부터 보고싶은 마음이 없어요. 끝은 남겨놔야 된다는데 그건 내가 싫거든요. 마지막까지 다 해놓아야지.. 결국 성공하지 못하는데 공포영화 같은 공포를 직접 보고 들어야지 말로 때울 수는 없고요. 그런데 인간의 내면에 있는 공포는 어디에서부터 오느냐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 공포가 인간의 행복을 방해하잖아요. 행복하고 싶은데 뭔가 불안 요소와 공포가 방해를 하잖아요. 그러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기의 공포를 벗아나고 그걸 떼내는 그런 분투와 노력이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방법이 돈을 많이 벌게 되면 넉넉하니까 공포가 조금 없어지고 대신 애가 갑자기 아프다든지 집에 불이 나든지 부도가 나게 되면 그 불안의 진원지에 가까이 가게 됩니다.
이걸 인간이 경험상 압니다. 어릴 때 아버지가 부도가 나가지고 잘사는 집인데 보증을 잘못 서가지고 나는 고등학교도 못나오고 하는 이런 이야기가 하도 많기 때문에 소원이 뭐냐 하면 그것은 “나는 보란 듯이 부자가 되어가지고 아버지, 엄마한테 집을 사주고 동생들한테 집을 사주겠다.” 연애인들이 전부 그런 소망들이 다 있어요. 아이돌 같은 사람들 말이에요. 그 말은 인간 안에 뭔가 불안감과 공포심이 있다는 거에요. 그러면 제가 이야기를 하면 반박하실 거에요. “저는 그런 게 없는데요?” 보통 그런 게 없는 사람은 없지만 덜한 사람이 있어요. 어릴 때 좀 살았던 사람들이 공포심이 없어요. 옛날에 방앗간을 했다든지 과수원을 했다든지 술도가를 했다든지 이런 사람들은 커서도 돈을 쓰는 품새가 당당해요. 돈이 없어도 팍 써요. 성격이 나쁜 게 아니고 남을 배려해주지요. 곧 없어도 큰 소리는 혼자 치고요. 이상하게 또 그런 사람 옆에는 사람이 들끓네요. 돈이 없어도 있는 것처럼 보여가지고요.
그런데 어릴 때 못살은 사람은 돈이 있어도 그저 깍쟁이고 벌벌(부들부들) 떨고 그래요. 제가 곡성 이야기를 끄집어내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인간은 자기 증인이라는 것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의 증인이 집단, 대규모의 역사가 아니고 개인적 역사, 사적 역사라고 했습니다. 자기 증인으로부터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가 누락된다고 했지요. 이런 오류의 대표적인 것이 요새 유행하는 신천지의 요한계시록 강해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설명할 때 자기 증인의 신분으로서 하다보니까 자기의 내면에서 공포와 불안감이 여과없이 바깥으로 표출이 되는 거에요. “666 맞으면 지옥 갑니까?” 이런 것 있잖아요. 그 해석들을 보게 되면 내 역사가 천국으로 이어지는 역사가 되기 위해서 자기의 역사를 못 버리는 거에요. 자기의 역사를 구기지를 못해요. 자기의 역사 안에 자기가 들어있으니까요. 자기의 잘남을 증명하기 위해서 요한계시록을 보고 열심히 시키는 대로 다 하는 거에요. “죽도록 충성하라”라고 하면 죽지는 못하지만 죽은 척이라도 하면서 충성을 하고 “이기는 자에게..”라고 하니까 요한계시록 풀어주는 교회에다가 돈을 바쳐가지고 자기의 이기는 폼을 다 내고.. 그들이 전부 사기꾼들인데 거기에 다 말려들고.. “어린양을 따르는 자는 거룩한 행실과 함께 어린양을 신부로 따른다”라고 하니까 자기 딴에 결백증이 있어가지고 그야 말로 노이로제처럼 자기의 속에 나쁜 병균을 떼어내듯, 자기 심령을 표백하듯이 그렇게 하는 거에요. 표백을 하게 되면 결국 oxy를 만나게 됩니다. 표백을 하기 위해서 교회에 다녀요. 자기 영혼에 때묻은 것을 늘 표백하기 위해서요. 이게 불교거든요. 그것도 그냥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진짜 불도에 심오한 사람들이 하는 일과 똑같아요. 이들이 전부 요한계시록을 하는 집단이고요. 자기의 증인이 되는 아집이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는 (아까 제가 설명해드렸듯이) 예수님이 관여해버리면 자기의 증인은 가위표를 치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증인이 되면 자기의 인생에서 뭐가 나와야 된다고 했습니까? 우리 복습하듯이 해봅시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면 자기의 모든 인생속에서 예수님의 공생애가 나오지요. 예수님의 공생애가 나오게 되면 사적 역사는 쥐포를 찢듯이, 김을 구워가지고 손으로 부수듯이 다 산산조각이 나버려요. 어제의 사건과 오늘의 사건을 이을 이름새가 없어요. 어제의 사건과 오늘의 사건에 아무 연관성이 없어요. 이모부가 돌아가셔서 참석을 못한다고 했는데 어디 이모부가 돌아가신다고 예고를 했습니까? 그러니까 연관성이 없어요. 하루하루를 주께서 개입해서 인도하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이 말은 너의 사적 역사를 자꾸 뭉치지 말라는 거에요. 그래봤자 내가 또 개입할 테니까..
우리한테 주어진 이 모든 상황이 곡성입니다. 곡성이라는 영화의 제목을 보면 집단 통곡을 말하거든요. 하여튼 온 곡성 내에 있는 사람은 악마가 와서 다 죽이니까요. 그리고 악마를 내쫓는다든지 악마가 달아나는 게 아니고 마지막에 결국 악마가 “너희가 아무리 해도 나를 못 이기지..”라고 하는 게 이 영화의 끝이에요.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이게 뭐지? 왜 이렇게 끝나지?’라고 하면서 찝찝한 마음으로 집에 가는 거에요. ‘악마는 그러면 살아있다는 말이지?’라고 하는 거에요. 용한 무당이 와도 소용이 없어요. 될 것 같은데 인간이 자기 자식을 좋아해가지고 그것도 실패로 끝나요. 중간에 딸이 귀신이 들려가지고 있는데 용한 일광이라는 박수무당이 와가지고 그 악마를 잡았어요. 마지막에 못을 박는데 아버지가 자기 딸이 귀신 들려가지고 고통스러워하니까 “굿하는 것 그만 둬. 나는 내 딸을 내 식으로 살릴 거야.”라고 하니까 악마는 히죽 웃으면서 “아휴, 악마 죽을 뻔했다.”라고 다시 깨어나가지고 결국 실패로 끝나고 나중에 박수무당도 결국 마귀에 들려가지고 악마의 편이 되어 버려요. 그 영화의 마지막에 이 세상 모든 것이 마귀의 편이라는 거에요. 그게 어떤 인간도 악마의 힘에서 벗어날 위인은 없다이고 그걸 제가 해석하기를 어떤 인간도 마음속에 불안과 공포를 제거할 수 없다라고 한 거에요.
그래서 등장한 게 있는데 그것이 종교에요. 종교는 표백을 강조합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자식이 잘 되어도 뭔가 불안하지요? 그 불안한 것은 여러분들의 죄 때문이고 욕심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오시면 이걸 깨끗하게 처리해주겠습니다.” 그래서 말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그 환경, 그 건축 구조물도 그렇게 만들어요. 그 대표적인 것이 천주교의 성당과 교회와 절이잖아요. 절의 입구부터 절 출구, 마지막에 부처 있는 상까지 전부가 다 의미가 있어요. 소슬 대문부터 마지막까지 전부 다 욕심을 없애서 죄를 없애는 절차를 밟는 거에요. 그렇게 밟으면서 마지막에 본전에 가서 엎어져가지고 손바닥을 뒤집어가지고 백팔 번뇌 절을 하게 되면 내려갈 때는 깨끗하게 표백이 되어서 내려가고 또 죄를 짓고는 또 올라와가지고 시줏돈 해가지고 불전함에 넣으면 어떤 사람에게 파리채로 끄집어냄을 당하곤 하지요.
불교에서 그렇게 하듯이 심지어 천주교 성당 구조도 위에서 보게 되면 십자가로 되어 있어요. 제단이 있는 곳이 팔이고 밑에는 예수님의 본체로 되어 있습니다. 이 제단이 있는 곳에 제단화가 있는데 이 제단화는 유명한 르네상스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렸고 그들은 이 제단화를 그려서 생계를 유지한 사람들입니다. 성 베테딕트 성당에 가면 마찬가지로 이런 구조로 되어 있어요. 보통 성당도 다 이렇게 십자가 모습으로 되어 있어요.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인간은 가시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자기의 내면에 이미 형성된 마음의 구조와 결합시켜서 자체적으로 속에 있는 불안과 공포심으로 씻음으로써 기대하는 행복을 임시로나마 맛보려는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악마가 그 짓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악마는 계속해서 “성경을 봐라. 율법을 봐라. 뭘 지켜라. 십일조를 해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안 하게 되면 불안감이 더 심한 거에요. 그러나 하게 되면 잠시나마 마약처럼, 박하사탕처럼 불안감을 잊을 수가 있어요. “교회에 안 갔으니까 너 이번 주는 벌 받을 준비해라.”라는 식으로요. “애가 고3인데 네가 새벽기도를 안 나가고..”라는 식으로 내가 나한테 채찍을 가지고 때려주는 거에요. “엄마가 이렇게 태만하니까 엄마의 기도가 응답이 될 리가 있어?”라는 식으로 내가 나한테 하는데 마침 목사나 부흥사가 내 내면의 소리를 바깥으로 표출해주니까 ‘이게 맞는 모양이다.’라고 해가지고 놀아나는 거에요. 결국은 자기의 증인에서 못 벗어나는 거에요. 이걸 못 벗어나니까 마귀한테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공포와 불안을 안고 있다는 것의 원인은 자기의 내부 문제거든요. 그런데 본인이 본인 내부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모순이에요. 물에 빠지면 외부에서 건져줘야지, 물에 빠진 본인이 본인의 운동화 끈을 잡아당기면 발만 올라가지 자기의 몸통은 빠지는데요. 안 되잖아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증인들밖에 없는 이 인간 세계에 이미 포위되었다는 것을 아는 거에요. 거기에서 “너희는 포위되었다. 항복하라.”라고 외칠 때에, 구약의 여리고성에서 나팔소리로 외치는 것처럼, 내가 포위된 게 아니고 나와 나를 묶게 했던 악마가 주님으로부터 지금 항복(패배)의 통보를 받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와버리면 내가 처해있는 위치를 알아요. ‘아, 십자가 앞에서 내가 나한테 스스로 항복하라는 거구나.’ 십자가 앞에서 항복하게 되면 내 역사에, 나는 5월 몇 일날 항복했다가 아니라 이 역사판 자체가 허구였다는 것을 안다는 겁니다. 헛방인 거에요.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오게 되면 내가 굳혀놓은 내 역사가 뾰로롱 한 방에 안개처럼 다 날아가 버리고 없어져요. 그리고 주께서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하심이 있을 뿐이지요. 그럴 때 우리는 그 순간, 내가 구원을 받았다가 아니라 주의 증인이 된 거에요. 예수님의 공생애의 효과를 보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의 공생애를 증거하기 위해서 오늘 내가 이 땅에 살게 만든 겁니다. 이 땅에 안게 만들고 이 땅에 모이게 만든 거에요. 그렇게 한 거에요.
그러면 나의 역사가 아니고 증인들의 역사가 되고 이 증인들의 역사를 예수님의 공생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증인들의 역사가 조합이 되면 그게 바로 예수님의 공생애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육으로 태어나서 십자가와 부활로 이어졌지요. 이것이 그대로 증인들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혜택이) 입혀집니다. 그들은 육으로 태어났으나 (첫째 부활이 예수님이라면) 우리는 그 다음 부활로서 십자가의 용서를 받고 의인이 되어서 천국에 합세를 합니다. 이 논리가 전혀 복잡하지도 않고 간단하지요. 지금 믿어지느냐 아니냐는 다른 문제고요. 논리가 간단하지요. 예수님의 증인들이 모아진 게 예수님의 공생애다. 그러면 예수님의 공생애의 효과와 혜택을 적용 받게 되게 되면 예수님에게 주어졌던 모든 결과가 증인들에게 공히 주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은 첫 열매가 되고 이 사람들은 그 다음 열매가 되어가지고 예수님의 갔던 나라에 이 사람들이 가게 되는 겁니다. 이 예수님과 이 사람들의 관계를 가지고 예수님의 증거한다는 의미에서 믿음이라고 하지요. 이게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입니다.
논리적으로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마는 믿는 느낌이 자주 오느냐는 제 소관이 아니고 주님의 소관이기 때문에 그건 제가 관여할 바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했던 것을 요약해서 한 문장으로 이야기하면 유일한 한 분(1)을 인정하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이 사람이 믿는 자입니다. ‘1’을 인정하게 되면 나는 ‘1’이 아니고 ‘0’이 되지요. ‘1+0’은 그냥 ‘1’로 남아야 돼요. 그런데 이것을 제가 그냥 ‘0’이라고 하지 않고 십자가 마을에 어느 글을 쓰면서 ‘-0’이라고 한 적이 있어요. 이 ‘-0’이라고 하는 것은 ‘0’이 자꾸 주님이 안 보이는 쪽으로 미끌려가는 속성이 있다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죽을 때까지 육신을 안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제가 수요일날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진짜 노아처럼, 욥처럼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믿음이라고 주님만 바라봤는데 실제로 그들은 근심한 것도 많았고 괴로운 것도 많았습니다. 이론상 그들은 하하히히 웃으면서 “천국에 보내주세요. 지금 죽여주세요.”라고 해야 될 텐데 실제로는 상당히 힘든 인생이 많았습니다. 왜 그런가? 육신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누구나 마찬가지에요. 육신이 있기 때문이에요. 자녀가 힘들게 되면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더라도 대들었던 거에요.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한 번 봅시다. 육신을 갖고 있어서 신앙적이지 않은 것이 있더라도 주께서 우리 육신보다 더 쎈, 영적으로 관여를 해줘버리면 유일한 한 분만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 35절에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라고 했는데 자기의 자식이 죽었는데 다시 되살아난 사례들이 구약성경에 나옵니다. 특히 남자가 없이 여자만 사는 입장에서 그런 경우가 많아요.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지요. 뱀의 후손과 남자가 싸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자라고 할지라도 주 안에서 죽어버리면 남자도 여자가 되지요. 예수님의 여자가 되어 버려요. 나의 남자로 살다가 성령을 받아버리면 예수님의 여자가 되어야 되지요. 그런 의미입니다. 갑자기 가슴이 나오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쉽게 말해서 여자가 되지 않으면 주님의 신부가 되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젠더(性)은 성경에서 특별한 의미를 함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남자지요. 남자지만 예수님을 여자의 후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자가 난 한 아들,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지요. 악마를 이기는 약속에 따른 여성성을 그대로 물려받은 속성의 아들이라고 설명이 될 수가 있는데요, 여기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엘리야가 나옵니다. 17장 8~9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르밧에 가면 누가 나오느냐 하면 과부가 나와요. 여자에게 남편이 없어요. 방금 내가 이야기했지만 남자도 성령을 받으면 여자가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모든 성도는 이 땅의 남편을 믿지 말라는 뜻이에요. 믿을 게 따로 있지, 예수를 믿어야지 남편을 믿으면 안 돼요. 주 안에서 남편을 공경하라고 했어요. 그냥 남편이라는 이름 때문에 공경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어제 밤 9시 50분경, sbs에 어떤 할머니가 등장을 하는데 할머니가 통나무를 지고 가는 것을 봤어요. 할머니의 허리가 ∧ 모양이 되었어요. 왜 그런가 하면 20년 동안 통나무를 허리에 진 것에요. 말을 못할 정도로 비참해요. 이 할머니는 약간 정신에 이상이 있는 사람인데 남편한테 그렇게 얻어맞았어요. 그런데 이 여자가 그렇게 얻어맞으면서도 견딘 것은 아들 둘을 자기의 힘으로 살리겠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남편이 죽고 난 뒤에 아들 둘을 살리는 거에요. 그런데 왜 통나무를 지느냐 하면 통나무를 갖다 주면 돈이 되잖아요. 돈을 모아서 아들에게 주겠다고요. 이미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아요. 학대 받는 여인들은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남편의 세계 속에서 자기가 못 빠져나와서 그래요. 사나 죽으나 남편이 없이는 안 된다는 거에요. 내가 남편한테 얻어맞아 죽어도 이 집의 귀신이 되어야 된다는 게 있어요. 옛날에는 복음도 없었으니까 마귀의 사상으로 중무장 되어 있다고 보면 되거든요.
얻어맞는다고 해서 진짜 하늘나라한테 동정을 받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본인의 의식이 세상것 외에는 천국의 주님에 관한 소식이 들어온 적이 없을 경우에는 어떻게 탈출을 하고 어떻게 살더라도 여전히 그 사람은 마귀의 권력 지배하에 속합니다. 아까 이야기했지만 성도는 누구의 증인입니까? 예수님의 증인이지요. 예수님의 증인은 나의 증인은 가위표하고 예수님(주님)이 관여해서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고 했지요. 이 논리가 간단해도 돌아서면 또 다 잊어버린다고요. 예수님의 증인은 없어요. 나의 증인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개입해버리면 여기에서 예수님의 증인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나의 증인으로 살게 되면 결국 남편 집의 귀신이 되든지 아니면 남편이 있다 할지라도 여성운동가처럼 남편을 우습게보고 독립을 하든지 간에 여전히 그 사람이 예수님의 증인이 아닌 것은 마찬가지에요. 어느 쪽이든.
안중근 의사처럼 남북통일을 부르짖고 신사임당처럼 5만원짜리 지폐에 나왔다, 다시 말해서 나의 증인이 되면 이 사람에게 불안과 공포가 사라집니까? 나의 증인은 나의 역사라고 했지요. 이 사람은 맨날 표백 작용만 생각하는데요. “건드리지 마. 나는 이 정도로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냥 남편한테 얻어맞아서 진짜 정신병자가 되든, 아니면 남편을 갈아치워서 나이 50이 될 때까지 세 번이나 결혼을 해도 이 사람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증인이고 여전히 마귀적이에요. 따라서 남편을 어떻게 가르칠 생각을 하지 말고 나부터 남자를 따라가는 여성에서 그냥 주님의 신부로 바뀌면 돼요. 지금의 세상에서 여자라고 하지만 사실은 모델이 여자가 아니고 남성으로 되어 있어요. ‘여자지만 남성처럼 강하게’ 이것이 모델이 된 이상은 육신은 여자지만 실제로 마음에는 남자의 사고방식이 들어있는 거에요. 김두한의 딸처럼, 여장부처럼 그렇게 설쳐대도 여성의 남성화일 뿐이지 남성적인 것을 지향하는 것은 남자와 마찬가지가 되어 버려요. 그러니까 여자의 후손이 아니고 남성, 뱀의 속성을 그대로 유지한 셈이 된다는 말입니다.
아까 했던 것을 다시 봅시다. 열왕기상 17장에서는 과부가 등장합니다. 과부가 등장하는 취지가 있는데 그것은 스스로 설 수 없는 여인입니다. 농경시대, 땅을 개간해서 사는 시대에 남자가 없다는 것은 그저 있는 재산을 팔아먹어 가면서 겨우 겨우 끼니를 이어야 될 정도로 처참한 지경이 되는 겁니다. 노동력은 생산력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노동력이 약하다면 결국 그 과부는 가난할 수밖에 없어 마지막에 가뭄이 드니까 다들 못 살게 되었고 다른 사람을 도와 줄 여력이 사르밧 과부까지 오지를 못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모질게도 마지막 먹고 죽으려고 하는 그 밀가루와 기름까지 날름 자기가 먹습니다. 13절에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이 그 과부에게 개입한 거지요. 그 과부는 자기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보낸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자기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에요.
교회에 나올 때 다 그렇잖아요. “나왔습니다. 찰칵!” 인증 사진 한 번 찍고, “나왔으니까 복 주세요.” 하고 후닥닥 거기에서 튀어나오면 되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개입은 그게 아니고 그렇게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을 옴팡 삼켜 버려요. 그 삼키는 방식은 우리의 역사를 아예 남겨두지 않는 방식으로 삼켜 버립니다. 그게 바로 죽음이라는 거에요. 내가 아는 죽음이 아니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비로소 느껴지는 죽음이 있어요. 이것이 예수님의 공생애의 죽음, 과거로의 연장선에 참여하는 방식입니다. 내가 아는 숨 끊어지는 죽음 말고, 생생하게 눈 똑바로 뜨고 살아있으면서 ‘이게 주님의 인생이지 내 인생이 아니야.’라고 느껴지는 나의 소멸, 나의 느낌이 사라짐에서 오는 그 희열, 행복이 있어요.
개를 볼 때 ‘저 개는 얼마를 주고 샀고..’ 이게 아니고 ‘너는 왜 거기에 있고 나는 왜 여기에 있지? 주께서 둘 다 꽂아놓았구나.’라고 느껴지는 거요. 주님에 의해서 개와 나와 20cm 거리에 (지금 등을 돌리고 있지만) 같이 앉아 있잖아요. 개가 성경공부에 참여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면 놀랄 거에요. 이게 훈련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지요. 어쨌든 주께서 개는 틀고 있고 나는 그냥 앉아 있게 하실 때 순간 날아간 것이 있습니다. 어제까지 나는 어디 있고 오전에 어디에 있었다는 것이 생각이 안 나지요. 이것이 그때그때 나의 소멸, 나의 죽음이 되는 겁니다. 죽는다고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주님과 연관된 존재로서 여기에 살아가고 있다면 이건 내가 살게 한 것이 아니고 나를 있게 하신, 주님의 살아계심, 주님의 증인, 주님의 증거를 이런 마음가짐으로 드러내게 하시는 거에요.
엘리야와 그 사르밧 과부가 만남으로써 이제 과부가 의지할 것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왜? 마지막 남은 그 밀가루 통, 그야말로 “희야(경상도 말로 형이라는 뜻), 한 입만 줘. 혼자 다 먹나?”라고 했는데 안 볼 때 보란 듯이 혼자 오뎅을 다 먹어 버린 거에요. 형제 간에 보면 그런 일이 안 많습니까? 엘리야가 지금 사르밧 과부한테 그렇게 해요. “선지자님, 그것 좀 남겨주시고..”라고 했어도 보란 듯이 다 먹어 버려요. 이젠 의지할 것이 없습니다. 의지할 게 없다는 말은 의지할 게 죽었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내가 의지했던 것을 어디에 숨겨뒀습니까? 내가 있는 자리에 엘리야가 등장했지요. 이제 엘리야 안에서 새로운 나가 등장합니다.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래는 날까지 그 통의 밀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계속해서 나오는 거에요. 이것은 과부의 통, 과부의 참기름 병이 아니라 엘리야에게 있는 통과 참기름 병에서 계속 나오는 거에요. 꼭 화수분같이 뽑아도 뽑아도 나오고 나오고 또 나오고 또 나오고 또 나오고 또 나오고.. 계속 나오는 거에요. 그런데 그 밀가루하고 기름을 사르밧 과부와 그 아들이 먹고 마셨다면 그 과부와 아들은 누가 살려주고 있는 거에요? 엘리야를 앞장 세운 여호와 하나님께서 살려주고 있지요. 그러면 사르밧 과부와 아들은 누구를 증거하는 겁니까? 하나님을 증거하는 거지요. 그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고 그것이 신약의 예수님의 공생애를 말하는 겁니다. 장차 예수님의 공생애의 효과를 앞당겨서 사르밧 과부와 아들은 톡톡히 보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혜택을 줬으면 이제 우리라면 사르밧 과부와 아들이 이 복음적 취지를 알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거잖아요. 그런데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인간에게는 육신이 있다고 했지요. 열왕기상 17장 17절에 보면 “이 일 후에 그 집 주모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그러니까 18절에 그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야기를 할 때 공손합니까, 분개합니까? 분개하지요. 떡을 우리가 굶어죽지 않게 줬는데 왜 멀쩡한 아들을 죽이십니까?라고 하는 거에요. 아들이 살아 있고 과부가 살아 있잖아요. 이 살아있다는 방향이 미래 쪽으로 끌려가야 되거든요. 미래에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지요. 그러면 십자가는 뭡니까?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들을 버리신 작용이잖아요. 그러면 가까이 가면 갈수록 여인의 아들이 살아야 돼요, 죽어야 돼요? 죽어야 돼요. 이 여인의 아들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내 아들, 내 역사, 내 증인, 나라는 것도 이미 엘리야한테 떡과 기름을 얻어먹는 순간, 나의 역사,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될 텐데 육신이 있기 때문에 그걸 모르고 그냥 엘리야한테 혜택을 입은 것으로 생각을 한 거에요. “아이고, 고맙습니다. 우리 가정을 살리려고..”라고 생각을 하는 거에요.
마치 교회에 가서 “주여, 주여, 열심히 기도하니까 기도의 응답을 받아가지고 암이 나았어요. 고맙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거에요. “역시 주님이 살아계시군요.” 이런 간증이 문제가 되는 이유가 정작 나의 역사를 가위표해야 되는데 기도해서 병이 나았다, 기도해서 감기가 나았다, 기도해서 애가 공부를 잘했다.고 하는 나를 없애라고 주신 응답인데 오히려 자랑질을 하고 있는 거에요. “나처럼 기도해봐라. 실망하지 않고 기도하면 너도 복을 받는다.” 정답을 말하면 “나처럼 기도하면 너는 죄인인 것을 알 것이다.”라고 되어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나처럼 기도해봐라. 나처럼 십일조를 안 하다가 하니까 교회도 부흥되고 나도 30배라는 것이 거짓말인 줄로 알았는데 진짜 30배, 60배가 되어서 진짜 감당을 못했다. 나 복권 두 번 됐다.”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이런 의식 자체가 십자가와 연계해서 이것은 없어야 되는데 이 놈의 육신 때문에 없어지지 않는 거에요.
“열심히 기도했는데 왜 일이 꼬입니까?” 이런 경우는 지금도 숱하게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합니까? 아들을 죽이지요. 그러니까 본색이 나온 겁니다. 그게 아까 히브리서 11장에 나왔던 것처럼 여자가 자기의 것을 죽여놓고 부활로 받기도 하는 거지요. 19절~22절에 “엘리야가 저에게 그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취하여 안고 자기의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24절에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오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을 알았다는 거에요.
그래서 구약에 아무리 알아 봤자 신약의 어린아이보다 더 못하다는 거에요. 백날 화봐야 여전히 육적인 자기의 기대치가 있잖아요. 그러니 성경말씀을 보면서 자기의 증인으로부터 성경을 보니까 “나 이런 혜택 받았다. 말씀대로 믿으니까 되대?” 이런 것은 다 마귀적 해석이고요, ‘아, 내가 하루하루 사는 것이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이 제공했던 주님에서 나온 인생이구나. 주님의 공생애의 연장선에 연결된 그러한 주 예수의 생을 사는구나.’ 이런 것으로 믿어지시길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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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20160513b히11장 35절(표백)-이 근호 목사
봅시다. 열왕기하 4장에 보면 이번에는 엘리사가 등장합니다. 그가 수넴 여인을 만납니다. 아까 엘리야의 경우에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죽었지요. 그런데 이 수넴 여인은 남편이 있고 아들이 없어요. 그래서 부부가 엘리사에게 대접을 하고 난 뒤에 엘리사가 예언을 하기를 16절에 “돐이 되면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라고 나와 있지요. 그런데 그 있는 아들이 죽었어요. 죽을 때 “내 머리야 내 머리야” 하더니만 “낮까지 어미의 무릎에 앉았다가 죽”었습니다. 죽고 난 뒤에 사환을 데리고 엘리사를 찾아왔어요. 그런데 엘리사가 무엇 때문에 저 여인이 찾아왔는지를 뻔히 압니다. 그래서 “숨기지 말고 네 고민을 이야기해보라.”라고 말하니까 “아들이 죽었습니다.”라고 했어요.
29절에 “엘리사가 게하시(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너는 사람에게 인사도 하지 말고 그냥 그 여인의 집에 가라”라고 하지요. 그리고 난 뒤에 32절~34절에 보니까 “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아이의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리니” 아이가 드디어 살아났습니다. 아까 보았던 엘리야의 경우하고 비슷한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고 하지요. 열왕기상 17장에서 아이 위에 엎드리는 것은 유사한 겁니다.
이것을 설명할 때 이렇게 설명해요. 보통 세상에서는 A라는 하나의 일이 벌어지고 연속해서 B, C, D, 이렇게 미래를 향하여 일이 진행되잖아요. 해석을 할 때 D로부터 해석을 해서 C, B, A 순서로 해석을 해나가요. 그 한 예는 제가 아까 예를 든 것처럼 어떤 사람이 만약에 몸이 아파서 기도를 하니까 몸이 나았다라고 합시다. 그러면 ‘야, 기도하니까 몸이 나았네.’라고 되어 버려요. 그러니까 A: 몸이 아프다. B: 기도했다. C: 몸이 나았다. 가 되어서 내가 의도했던 대로 A(병이 나음)가 되어 버리면 이것은 잘못된 거에요. D로 가야 되지요. ‘내가 이렇게 몸이 아픈데 기도해서 병이 낫겠다는 이것이 바로 십자가 앞에서 내 죄구나. 야, 나는 죄인이 맞구나. 주님(하나님)의 능력인 예수님을 사적인 내 병 낫는 데다가 도용할 정도로 나는 내 위주로 살았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이것이 바른 것입니다.
몸이 아파서 기도할 때는 자기가 죄인인 줄을 모르지요. 성도로서 당연히 해야 할, 착한 일, 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다가 기도의 응답이 십자가로 드러날 때 내가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만이 산 자가 될 때 앞에 있는 모든 사람은 죽은 자가 되는 거에요. 죽은 자가 병에 걸렸을 때 기도를 했다는 말은 죽음(죄)이 살아있다고 표현을 해도 무방(가능)합니다. 살아 있는데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고 죄가 나를 가지고 살아 있는 셈이 되니까 죄가 살아 있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오해하기를 내가 살아있다고 자꾸 우기는 거에요. 살아있는 내가 어떻게 기도해서 어떻게 헌금해서 어떻게 착한 일을 해서 복을 더 받아볼까, 살아 있는 내가 어떻게 하면 더 넉넉하게 살아볼까 해서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십자가 앞에서 진짜 살아있을 권리를 가진 분은 예수님밖에 없지 다른 사람은 살 권리조차 없었어요. 이왕에 이미 죽은 잡니다. 죽은 자 안에 죄가 살아있고 저주가 살아있고 심판이 살아있었던 거지요. 이것을 오늘 나온 엘리야나 엘리사의 이야기를 통해가지고 결합이라고 하시면 돼요. 인간이 홀로 자기의 생각을 할 때는 자기의 주제 파악도 안 되고 자기의 존재 의미가 뭔지를 몰라요. 하나님이 나를 볼 때에 나를 어떻게 보는지 내가 홀로 있을 때는 몰라요. 중보자와 같이 있을 때, 중보자와 결합이 될 때, 중보자에게 일어난 일을 통해서 그 의미가 나의 의미가 될 때 그게 내 의미로 확정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어 돌아가심으로써 죄인인 내가 의인이 되어 버리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말은 더 극단적으로 말해서 주님의 의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죄를 더 짓는 게 아니고) 죄인이 되어야 돼요. 죄를 더 짓는 것하고 죄인인 것하고는 다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지만 핵심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데에 있지, 죄를 더 지어서 죄인으로 만들자고 하는 데에 있는 건 아니에요. 모르면 녹음해놓은 것을 다시 들으면 되고.. 예수님과의 결합을 통해서 인간이라는 피조물은 결국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예수님 증거용이지, 따로 “내가 이만큼 잘났습니다.”를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건 아니다 이 말이지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남의 것을 신경쓰지 않고 그냥 나만 신경쓰는 거에요. 이번에 울산에서 공부를 하기 전에 피자를 같이 먹으면서 식사를 했어요. 그런데 제가 이번에 대전에서 요한계시록을 강의할 때 첫째 시간에 연대기를 했잖아요. 그것을 보면서 ‘목사님 자기가 연대기 외운 것 자랑하는 건가? 왜 기존의 성경책에도 안 나오는 연대기를 외우느냐?’라고 생각을 했다는 겁니다. 약간 짜증이 났다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셨어요. 그런데 그런 분이 한두 분입니까? 다들 그렇게 느끼셨을 건데요.
제가 요한계시록을 하면서 큰 연대기와 작은 연대기를 나누었잖아요. 이 작은 연대기가 우리의 사적 역사입니다. 제가 왜 첫째 시간에 세계의 역사에 대해서 이 연대기를 이야기했느냐 하면은 우리가 너무나 나한테 가장 밀착이 되고 가까운 것만 자꾸 기억 속에 담아요. 거기에 몰두한다고요. 이렇게 자기의 일에 몰두해버리면 우리같이 자기의 사적인 가정사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 큰 것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잡아먹히게 되어 있어요.
큰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정치가들입니다. 정치가라는 말의 어감이 약간 나쁘면 조금 더 고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독립투사들 어떻습니까? 안중근, 윤봉길 같은 사람들이지요. 그 사람들은 개인의 일에 몰두하지 않습니다. 계백 장군도 전쟁에 나갈 때 자기의 마누라를 치고 말을 치고 했다는데요. 독립투사 안중근 의사가 아버지한테 “아버지, 내가 돈을 많이 벌어와서 편하게 살게 해드릴 게요.”라는 소리를 한 것은 아니거든요. 이 독립투사들, 민족을 생각하는 이 사람들이 뭐를 생각하겠어요? 작은 연대기를 생각하겠습니까, 큰 연대기를 생각하겠습니까? 큰 연대기를 생각하겠지요.
큰 연대기를 생각한다는 말은 결국 사적인 이 사람들을 우러러 보고 존경해마지 않아요. 그런데 ‘나폴레옹은 나를 위해서 전쟁을 벌이고 영웅이 되었구나. 우리 징기스칸은 저렇게 고생하면서 대영토를 키웠구나.’라고 생각하는 사적인 역사를 갖고 있는 사람은 이 사람들의 밥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큰 연대기부터 외우는 것은 악마의 목을 치는 거에요. 이렇게 위대한 영웅들을 다 치는 겁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끝부분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당나라가 618년 세워졌거든요. 그리고 618년에 세워진 당나라와 우리는 아무 상관도 없는 거에요. 그런데 618년 당나라의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여러분들이 만약 당나라 사람이라면 그때 당나라 임금 태종한테 굴복하겠어요, 굴복하지 않겠어요? 굴복할 수밖에 없지요. 그게 자기들의 운명이에요. 지금 마치 북한 주민들이 김정은이 무슨 짓을 해도 충성한다고 설치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 남쪽에 있는 사람들은 참 같잖지요, 참 불쌍하지요. 김정은은 돈 다 빼먹고 지금 돈을 날리고 있는데 자기는 배급도 못 받으면서 그저 이 나라는 행복한 나라라고 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만약 우리가 북한에 살면 마찬가지다 이 말이지요. 정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큰 연대기를 이야기한 겁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월급 100, 200만원 받았다고 하지만 만약에 한 달 수입이 1000만원이 넘는 대기업의 사장이라고 한다면 당신들은 분명히 국회의원이나 지방의원에 나가려고 생각할 겁니다. 작은 연대기에서 ‘내가 나가는 것은 이 주민들을 살리기 위해서야.’라고 큰 연대기를 들이댈 거란 말이지요. 그러면 ‘성경에서 뭐라고 해도 역시 이 세상은 훌륭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최고야. 나는 그런 데에 관심이 있지 성경에는 관심이 없어.’라고 나올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제가 연대기를 크게 이야기한 겁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지, 이 세상에서 훌륭한 교인이 되는 것, 훌륭한 국민이 되고 훌륭한 시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렇게 연대기를 한 거에요. 일할 때는 정신도 없었고 자기의 밥벌이를 하느라고 바빠가지고 그런 생각이 없지만, 조금 여유가 있으면요 국가가 어떠니 민족이 어떠니라고 하잖아요. 사람은 나이 60이 되어서 퇴직을 하고 70 가까이 되면 맨날 탑골 공원에 모여서 하는 소리가 (죽었지만) 김대중이 어떻고 박근혜가 어떻고 남자라고 큰 정치 연대기만 이야기해요. 그런데 할머니들은 그런 이야기하는 것을 못 봤어요. 꼭 할어버지가 국가 정세를 다 이야기해요. 들어보면 전부 케이블 방송 설전에 다 나오는 이야기들을 외워가지고 하는 거에요. 그리고 집에 가면 늦게 왔다고 할머니한테 꾸중듣지만요. 그러나 밖에 나오면 민족을 살리는 독립투사가 다 되고요.
결합이 중요합니다. 결합이라는 것은, 아까 이야기했지만, “살아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이미 나는 죽은 사람이다. 나는 좀비와 같다.”라고 보면 돼요. 살아있는 좀비에요. 예수님과 결합이 되지 않으면 진짜 사람으로 인정이 되지 못합니다. 열왕기상이나 여기 열왕기하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가물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가물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우상숭배의 죄가 있다는 말이고 죄에 대한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가물게 하셨습니다. 이제부터 두 번째 시간 본격적으로 해보겠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저는 자연의 횡포라고 생각하는데요, 한 번 물어봅시다. 여기는 지금 4층이 없어서 마음 놓고 떠들어도 되는데 만약에 3층에 신혼부부가 사는데 4층에서 애들이 떠들어서 시끄럽게 한다면 층간 소음이 나지요. 그러면 층간 소음은 윗층의 횡포가 되는 겁니다. 그런 경우에 애들을 조용히 시켜달라든지 바닥에 뭘 깔아서 소음을 완화시킨다든지 해가지고 (시끄럽게 하면 말썽이 생기니까) 좋게 일을 무마할 수가 있지요. 그런데 만약에 태풍이 불어서 유리창이 깨졌다면 이것은 누구한테 보상을 받아야 되지요? 보상을 받을 수가 없지요. 그리고 맨날 팩을 발라도 짜글짜글 주름이 낄 때 이것은 누구한테 보상을 받아야 됩니까? 이게 자연의 횡포에요.
사람은 인간들의 횡포에 대해서는 이렇게 참지를 못하면서 자연의 횡포에 대해서는 운명이려니 하면서 그냥 참아요. 왜 제가 이걸 거론하느냐 하면은 사실 자연의 횡포라는 것은 없어요. 누구의 횡포냐 하면은 하나님의 횡포입니다. 하나님께서 쉬지도 않고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횡포를 부리면서요. 절대로 우리의 뜻대로 안 해주고 우리가 뜻하지 않는 대로 계속 횡포를 부리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 탓을 누구의 탓으로 하느냐 하면은 악마의 탓으로 돌립니다. “이 마귀가, 이 귀신이 나를 해롭게 한다. 어이 귀신아 물렀거라.” 하면서 칼을 들고 막 뛰고 하지요. 가만히 보니까 마귀만 억울해요. 인도네시아에서 21만 명이 쓰나미로 죽었잖아요. 그때 분명히 예수를 믿든 안 믿든 관계없이 힌두교고 뭐고 다 쓸었어요. 거기에 신혼 여행 와가지고 같이 행복하게 살자라고 하는 사람들과 애들 데리고 가족끼리 단란하게 휴양을 왔던 사람들이 몽창 다 죽었습니다. 몽창 다 죽은 것보다 더 심한 것이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아 있는 거에요. 그게 더 외로운 거에요. 죽으려면 다 죽든지 하지 살아있으니까.. 보세요. 세월호 침몰해서 아이들이 죽었다고 2년째 버티면서 데모하고 있잖아요. 하나님께 대들어야 되는데 마귀가 그렇게 했고 박근혜 대통령이 잘못해서 세월호가 침몰했고 아이들이 그렇게 빠져죽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교육이 문제고 학교(단원고)의 문제인 것이고 국가가 내 것을 책임져야 된다는 겁니다.
정리해봅시다. 아까 이야기한 열왕기하나 열왕기상의 엘리야와 엘리사의 경우처럼 사적인 것에 대해서 뭔가 불만이 왔을 때 사르밧 과부와 수넴 여인의 가정의 공통점은 둘 다 애가 죽었다는 사실이에요. 그런데 수넴 여인 같은 경우에 애가 없었는데 태어나게 해놓고 애를 또 죽여버렸어요. 그러니까 화가 더 나지요. 그전까지는 나의 무대였던 이 가정을, 선지자가 들이닥치고 난 뒤에는 이 무대에 내 멋있음을 연출해야 되는데 내 인생의 연출은 어디로 가고 없고 선지자가 와서 자기 마음대로 없는 애를 있게 해주어서 좋게 해놓고 (천사지요, 찬양이지요.) 있는 애를 없어버리니까 이게 저주가 되어 버려요. 찬양과 저주.
그럴 때 인간의 본성은 잘 되면 하나님 탓이고 못 되면 마귀의 탓이고 선지자의 탓이 되는 겁니다. 자기 아들을 죽였을 때 그 선지자를 좋아하겠어요, ‘혹시 저게 이단이고 마귀 아니야?’라고 생각하겠어요? 이런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지요. 그러면 한 번 정리해봅시다. 하나님의 종이냐, 악마냐? 하는 것은 이미 그 개념 자체가 우리 마음속에 어느 정도 형성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형성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나한테 이익이 되면 무조건 이것은 천사가 한 일이고 내게 손해가 나게 되면 무조건 악마가 한 일이 되는 거에요.
그런데 천사와 악마는 따로 있잖아요. 천사가 사는 동네와 악마가 사는 동네가 따로 있기 때문에 분리가 되는데 수넴 여인 같은 경우에는 구분이 곤란한 것이 없던 아이를 새로 만들게 한 사람은 엘리사였거든요. 그런데 엘리사에 의해서 주어진 아들이 (엘리사는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니까 하나님을 통해서 애를 받았는데) 그 하나님에 의해서 멀쩡한 애가 죽어버린 거에요. 그러면 악마하고 천사가 구분이 되는 게 아니고 한 집에 같이 있는 바가 되어 버려요. 그렇겠지요.
“악마는 저리 가. 천사는 우리가 모시겠습니다.”라고 했고 그게 천사인 줄 알았는데 그 천사에 의해 혜택을 입은 이 아들이 “엄마, 머리 아파.” 하고는 오전까지 있더니만 오후에 죽어버렸다면 그 아들은 누가 죽였습니까? 엘리사가 죽인 셈이 되지요. 그래서 엘리사에게 찾아오는 거에요. 살려내라고요. 엘리사가 그 집에 자기의 종을 데리고 가면서 누구한테도 인사하지 말고 아무 소리도 하지 마라라고 했는데 이것은 사람이 납득이 될 차원이 아니에요. “아이고 엘리사님 어디에 가십니까?” “누구 애가 죽었다기에 살리러 갑니다.” “아유, 그렇습니까? 좋은 일 하십니다. 다음에 만납시다.”라고 할 수 없어요.
이것은 사람이 이해가 될 사항이 아닙니다. 이해되지 못할 일이 내 사적인 공간에 벌어졌어요. 그러면 나라는 인생의 무대는 나를 연출하기 위한 스테이지가 아니고 관여하신 주님이 죽었다가 살아남을 보여주는, 주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 연출된 무대인 것을 동의하게 되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증인, 성도입니다. 성도가 아닌 사람은 그 연출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교회에 수십 년을 다녀도 그 연출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자기가 자기 잘되기 위해서 자기가 무당이 되어가지고 자기가 칼춤을 춘다고 설치는 겁니다. 예배라는 쏘를 하는 것밖에 안 돼요. 그러니까 교회의 예배가, 따지고 보면 정말 얼마나 위험한 쑈모임인지 모릅니다.
진짜 예배란 복음과 마주쳐야 돼요. 복음 속에는 우리의 정체를 밝혀주는 내막이 들어있습니다. 네가 현재 수박을 먹든, 떡을 먹든, 개를 쳐다보면서 무엇을 먹든 간에 이 연출된 이 마당은 나를, 내 잘남을 보여주는 놀이마당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이런 모진 횡포를 친히 당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무대에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나님이 주신 그 횡포를 주님이 어떻게 해결하는 것을 양쪽 다 같이 보자 이 말입니다.
처음에 수박을 먹을 때는 맛이 있어요. 그런데 입이 터지라고 먹으니까 이제는 그 맛이 안 나고 별 맛도 없어 보이지요. 누구의 횡포입니까? 하나님의 횡포입니다. 세상이 뭔가 불편한 쪽으로 움직일 때 뭘 알아야 되는가 하면은 주님도 이보다 더 심한 불쾌와 불편을 당했다는 것을 네가 수용할 수 있느냐를 우리에게 묻는 거에요. 이게 바로 히브리서 11장이에요. 엘리야와 엘리사, 이 사람들은 그냥 살면 되는 사람들이에요. 수넴 여인 같은 경우에도 그냥 남편하고 살면 돼요. 괜히 엘리사가 들이 닥친 겁니다. 집구석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어요. 좋다고 했다가 실망으로 바뀌었다가 나중에 살려주니까 이 타이밍이 좋아할 타이밍인지, 안 그러면 ..
그러니까 선지자가 와서 살려줬을 때 마음이 편안하겠어요, 또 죽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입니까? 또 죽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에요. 엘리사는 그 안에서 손을 떼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우리의 인생에서 손을 떼라는 이야기입니다. 너는 좀비이고 네 인생이 아니고 내가 연출해 나가는 인생이 바로 현재 너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이 안 될 수가 없지요. 나의 증인을 늘 자폭하듯이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항상 내 예상대로 잘못되어 갑니다. 그 이유는 내 예상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잘못된 예상을 주께서 심어줘서 그래요.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에 충훈부 교회가 있고 옆에 집사님의 집이 있는데 광명역에서 차를 타고 옵니다. 골목이 많아요. 그런데 더 지나가서 돌아서 와야 할지, 아니면 막바로 와서 들어가야 될지, 미리 와서 일방통행길로 거꾸로 들어간다는 생각을 본인이 했지만 그것이 본인의 생각이 아니고 주께서 집어넣어준 생각이에요. 운전사가 그렇게 했는데 뒤에 있는 사람은 “그러면 안 됩니다. 바로 가세요.”라고 했어요. 이것도 주께서 집어넣은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내 생각을 끊는 게 아니고 주님이 집어넣은 생각을 주님이 꺾어버려요. 왜? 주님은 죄인도 되셨고 의인도 되셨기 때문에 죄인에서 의인이 되는 그 중간 과정이 중요하거든요. 그 중간 과정을 우리한테 심어주기 위해서 내 생각이라는 것도 사실은 주님이 집어넣은 생각이고 그게 깨어지면서 주입되는 그것도 주님의 생각이고 중요한 것은 내 뜻대로 뭐든지 안 된다는 그 과정 속에서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주님의 연출 마당, 주께서 혼자 노시는 그러한 공간이 되는 겁니다. 제가 수요 예배 때 창세기 6장에 나오는 내용을 설교하면서 설교 제목을 ‘자작극’이라고 했지요. 뻔히 인간을 어떻게 만드시는지를 아시면서도 내가 한탄함이라 또는 후회했다. 라고 했는데 이 말의 뜻은 장차 올 세계는 이 자작극을 이해할 사람들만 운집해 있는 나라이고 이게 천국이라는 것이지요.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감을 이해하는 사람들의 집합, 이게 천국입니다. 나의 의도가 끼어들어서는 안 되지요.
그런데 거기에서 사람들의 반발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말에 사람들이 반발을 해줘야 복음이 살아요. 그때 “아, 내가 잘 전했구나. 내가 제대로 전했구나. 주여 감사합니다.” 하고 찬양이 되시기 바랍니다. 반발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하는 이야기인데 설교를 들을 때 그냥 듣는 것이 아니고 어떠한 방법으로 하면 원상회복이 되고 내 인생이 만회가 될 거라는 말을 기대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나올 때는 교회에 못 나오고 모임에 참석을 못 하지요. 자기가 원하는 것이라는 말은 내 증인을 하고 싶어서 환장을 했다는 말이거든요. 내 잘남을 증인하고 싶은 거리가 있는데 지금은 그게 안 되기 때문에 기도를 빡세게 해가지고 하나님께 어떻게 도움을 받아서 어떤 수법을 해서 하고 싶은데 그게 만회가 안 될 것 같으면 자기한테는 소용이 없는 모임이 되고 집회가 되지요. 그러면 그건 자기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히브리서 11장 35절부터 봅시다. “(아까 봤지요.)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라고 되어 있지요. 사람들은 히브리서 11장 1절부터 35절까지는 좋아해요. 그런데 갑자기 36절에서 안색이 바뀝니다. 35절까지 오면서는 자기가 믿는 사람 같아요. ‘내 믿음하고 똑같네.’ 이러고 있다고요.
그래서 내가 옛날에 박사교회에 있을 때는 36절을 가지고 대심방을 합니다. 세례 줄 때 이 36절, 37절을 가지고 시험을 쳤어요. 성경 구절을 뽑아가지고 프린트해서 세례를 받을 사람에게 나눠줬어요. “다음에서 동의가 되거든 ○표, 동의가 안 되거든 ×표 하세요.”라고 해놓고 문제는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에 대해서 동의하십니까? 동의하면 믿는 자요, 동의하지 않으면 안 믿는 자라고 간주할 테니까 하세요. 그러면 동의하지요. 일단 세례는 받아야 되니까요. 그래서 그 받은 동의서가 캐비넷에 이만큼 쌓여있어요. 지금도 박사교회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동의를 받아놓으니까 꼭 사채업자 같아요. 신체 포기각서.. 오늘 강의 제목을 신체 포기각서라고 할까요. 이 각서를 쓰나 안 쓰나 모든 인간은 이미 각서를 쓴 상태입니다. 따라서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한 사람이 그래도 넉근하게 믿음으로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까 엘리사가 만났던 수넴 같이 이미 나는 이 땅에 없는 존재가 주님을 주님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이 땅에 나타난 거지요. 엘리사가 죽은 아이를 살릴 때 죽은 애와 결합하잖아요. 주와 결합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은 악마의 횡포라는 이름을 빌었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횡포에요.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거에요. 우리는 악마한테 욕질을 하지만 사실 그 욕질을 하려면 하나님한테 해야 돼요. 하나님이 악마한테 그 일을 하게 하셨으니까요.
왜 악마는 그 일을 해야 됩니까? 예수님은 악마로부터 횡포를 당했다는 것이 이미 공생애 속에 포함이 되어 있지요. 그 공생애가 우리에게 중첩되어 우리에게 닥치는 거에요. 닥치게 되면 내가 당하는 아픔은 예수님도 이미 당한 겁니다. 우리는 죄를 지어서 당했지만 주님은 죄도 없으신 분이 억울하게 당하고 있었던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어떤 어려움을 당하면 이것은 이미 주께서 아시고 일부러 나에게 “이런 것도 맛봐라.”라고 하면서 그것도 맛보게 하신 거에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왜 저는 예수를 믿는데 톱으로 켜는 것이 안 옵니까?”라고 자꾸 요청을 하게 되면 “너는 너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너의 믿음이 좋은 것을 자랑질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니까 현재 너한테 닥친 것이나 잘해.” 톱도 그냥 톱 같으면 조금 덜 하지요, 전기톱 같은 것은 더 공포심을 주지요.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 이런 것은 내가 “이런 것 주세요.”라고 요청할 그러한 권리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냥 막 살아야 돼요. 막 살다 보면 때로는 톱으로 켜는 것도 오고 어떨 때는 시험 받는 것이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고 때로는 로또에 얻어맞는 수도 있고 “엄마, 박사학위 받았어.” 이런 박사학위로 얻어맞는 수도 있는 거에요. 그랬다고 찬양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이 마당 자리, 이 무대는 내가 어떻게 연출할 무대가 아니고 주께서 주신 주님의 횡포가 자기 마음대로 그냥 설치듯 설쳐대는 주님의 자유로운 공간이에요. 그야 말로 대학로 연극 무대에요. 예수님 자신이 나는 너희를 위해 죽는 게 아니고 스스로 죽는다는 말을 하시고 너희가 기껏 나를 밀쳐봐야 나를 죽이는 것밖에 더 하겠느냐 그리고는 너희가 따라오지 못하는 죽음에 가셔요.
우리가 톱으로 죽는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 게 아닙니다. 이미 주님의 죽음에 결합이 되어 있기 때문에 (엘리사와 엘리야가 아이와 같이 결합하듯이) 결합된 자에게는 앞으로 톱으로 켜는 것과 무슨 시험이 오더라도 “주께서 그렇게 하셨지요, 그렇지요?”라고 웃으면서 당하면 돼요. 웃음이 나올지 안 나올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주께서 그렇게 했지요, 그죠?” 안다고 말하는 거에요. 전에는 마귀가 그렇게 했다고 하는데 주께서 그렇게 하셨지요. 마귀는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니까요. 사도 바울도 그런 고백을 했지요. 몸에 가시가 있어서 아픈 거에요. 그래서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아, 사탄으로 하여금 나에게 병을 준 것은 나한테 합당한 은혜입니다. 그것마저 은혜가 됨을 이제는 알았습니다. 이 은혜가 내게 족합니다.’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마태복음 11장을 한 번 봅시다. 11장 5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방금 보셨으니까 제가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아예 소경이 안 되고 싶습니까, 소경이 되었다가 보고 싶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소경이 아예 안 되고 싶지요. 앉은뱅이로 있다가 걷는 것보다 아예 앉은뱅이가 안 되는 것이 낫지요. 그 다음에 문둥이가 되었다가 깨끗한 것보다 아예 문둥병에 안 걸리는 것이 낫겠지요. 실은 우리가 이미 문둥병자이고 앉은뱅이이고 소경입니다. 이미 죽은 자에요. 그걸 이야기하는 거에요. 이 이야기는 예수님 안에만 품고 있다가 이걸 바깥으로 펼치게 되게 되면 우리가 이미 앉은뱅이이기 때문에 앉은뱅이가 앉은뱅이가 되었다고 서러워할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잘 살다가 교통사고가 나가지고 앉은뱅이가 되었다고 해서 “이것은 저한테 너무 가혹한 처사입니다.”라고 하지 말라 이 말이지요. 앉은뱅이가 되기 전부터 너는 얼마든지 앉은뱅이가 되어도 마땅한 그러한 자로서 태어났음을 네가 몰랐는데 앉은뱅이가 되게 함으로써 내 인생이 내가 노는 마당이 아니고 주님이 노는 마당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하실 때, 이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뒤에 나오는 말이 6절에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입니다. 실족하지 않는다는 말은 실족하게끔 하는 사건이 벌어지더라도 실족하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실족하는 사건이 뭡니까? 앉은뱅이가 되고 소경이 되고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평소에 내 인생은 내 것, 나의 증인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결국 그런 인간들은 주님을 외면하고 주님한테 얼굴을 돌리면서 숨어 도망갈 뿐이에요. 그것은 끝까지 자기 증인으로 버티겠다는 고집에 불과한 겁니다. 다시 히브리서로 돌아왔어요. 그 다음 37절에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라고 했는데 요새 가죽 제품이 굉장히 비싸지요. 그런데 양과 염소의 생가죽을 입었으니까 좀 멋있어 보이겠지만 그러나 사람이 양의 가죽을 입는다는 것은 거의 죽음의 상태라고 보면 돼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의 영화가 있었지요. 디카프리오가 처음으로 아카데미로 주연상을 받은 ‘레버넌트’라는 영화가 있지요. 거기에 보면 그 사람이 말을 가르고 말 속에 들어가서 체온을 유지하면서 살아나지요. 미주리 강에 있었던 실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거에요. 요새 이야기가 아니고 옛날 개척 시대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성도의 입장에서 이런 경우를 당하더라도 그것은 주님이 자기를 증거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몰아세운 겁니다. 빌립 집사는 이티오피아 내시를 만날 때에 (우리 같으면) 이 근처 까페 베네에서 만날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어디에서 만납니까? 황사 바람이 부는 사막에서 만난다고요. 조금 멋있어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귀찮은 일이지요. 자기가 오든지.. 사막에 가가지고 이야기를 몇 시간 했을 거에요. 그리고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이게 뭐에요? 둘이 영원히 헤어지잖아요. 이 다음에 천국에 가서 같이 만나겠지만요.
그 다음에 38절을 봅시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결국 이 한 마디를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를 주께서 이용하신 거에요. “이 사람은 이렇게 당해도, 봐.” 견딘다는 말이 성경, 특히 히브리서에 보면 많이 나와요. “환난 가운데 견뎌라.” 또는 로마서에 보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이라는 말이 있거든요. 인내한다는 말이 많이 있는데요. 견딘다는 말은 자칫하면 오기를 가지고 버틴다는 그런 뜻으로 쓰일 수가 있는데 성경에서는 그런 뜻이 아니고 나의 견딤이 아닌, 예수님의 고집스러움이 나를 통해서 발산되는 것을 말합니다. 가시를 빼달라고 그렇게 기도해도 안 빼주는 그 고집 있잖아요. 이걸 우리가 동의하는 게 성도의 인내입니다.
주께서 주체가 되어서 주관적으로 벌이는 일에 우리는 “네, 동의합니다. 동의합니다.”를 내뱉는 것의 연속, 이게 인내하는 것, 버티는 거에요. 이런 사람은 무엇이 감당치 못합니까?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는 것은 세상이 가두지 못한다는 말이고 이걸 자유라고 합니다. 자유라는 말은 빠져나왔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자유라고 하는 것은 해방을 의미합니다. 행동을 마음대로 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고 전에는 어떤 영역에 있었는데 그 속에서 빠져나왔다는 거에요. 그런데 빠져나온 사람이 그냥 빠져나오고 맙니까? 물끄러미 빠져나온 세계가 어떤 세계인가 하고 그곳을 바라보겠지요. 이미 우리의 영혼은 빠져나왔지만 우리의 육은 있으니까 내가 속한 육의 정체에 대해서 영적으로 드론을 탄, 하늘나라의 인공위성의 입장에서 육에 속한 내 인생을 이렇게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구출되지 못한 사람은 그저 이 세상 속에서 불안, 불안하지요. 지금은 돈이 좀 있다마는 언제 또 부도가 날지, 지금은 애가 공부를 잘하지만 성적이 언제 내려갈지, 결혼은 했다마는 또 애를 키울 때 내가 뒷바라지를 해줘야 될지, 사업한다고 직장 때려치우고 사업을 벌였는데 내가 돈을 보태줘야 되는 건 아닌가 이건 뭐 사서 고생하는 게 아니고 끝도 한도 없이 늘 그 안에서 예상되는 모든 불안과 두려움, 불안정 속에 평생을 시달리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게 아니고 자기가 감당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자기가 감당을 못해서 헉헉거립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이게 안 되기 때문에 맨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직장 동료들하고 술 한 잔하고 들어가고 퇴직한 사람은 퇴직했기 때문에 술자리가 없으니까 동창회, 무슨 무슨 핑계를 대면서 다니지만 사실은 술맛이 당기는 데에서 먹고 싶어하는 그런 구실로 온갖 핑계를 대면서 자꾸 만나지요. 심지어 요새는 여자들도 그런 사람이 많아요. 여자들의 모델은 남자라고 했잖아요. 남편이 술을 먹고 오면 ‘저건 무슨 맛으로 먹나?’라고 하면서 자기가 먹다가 알콜 중독에 걸렸어요. 그래서 집에서 술을 담가 놓고 먹는데 혼자 먹으니까 맛은 있지만 이상하게 흥미가 안 당기잖아요. 그러면 친구들끼리 모여가지고 낮술 먹고 하지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세상을 그냥 뒤집어쓰고 하다가 안 되니까 그 분풀이로 고함을 지르고 술을 먹고 폭행을 하고 그것도 안 되니까 정치탓을 하고 “세상이 더러워서 그렇다.”라고 하면서 하루 종일 케이블 리모콘만 돌리면서 분풀이를 하는 식으로 또 합니다.
그냥 “주께서 참 잘 노십니다.”라고 하면 되는 것을 가지고 마귀가 그렇게 했다느니 누가 나한테 연대보증서달라고 하더니 날렸다고 그놈 만나면 죽인다느니 이런 식으로 하지요. 38절에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것을 하나님(자연)의 횡포라고 했어요. 허리케인. 누가 이깁니까? 아무도 이기지 못합니다. 감당치 못해요.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횡포 속에 있으면서도 마귀의 탓이고 남의 탓이고 자기는 잘 믿는데 남들이 문제고 가족이 문제라고 하면서 다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39절에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믿음으로 산 게 아니에요. 믿음으로 증거를 받았지요. 이 말은 증거를 받아서 산 게 아니고 본인 자신이 증거물이라는 뜻이에요. 안경 끼신 게 증거물입니다. 우리가 안경을 낀 게 증거물이고 한 평생 살아온 것이 몽땅 증거물이에요. 예수님의 증거물이 되는 겁니다. 이걸 우리는 동의하는 거에요. 증거물이라는 말은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내가 결과가 아니고 결과는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수요일날 설교할 때 사람들은 결과가 따로 있는데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내 결과만 자꾸 붙들고 그것만 자꾸 체크하는 거에요. 가계부를 쓰듯이 ‘얼마 해서 얼마 벌고 펀드해서 얼마 이익이 났고 얼마가 마이너스 되었고..’라고 생각하듯이 자기가 하는 일에 자기의 조그마한 연대표를 쥐고 계속해서 이것만 생각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나 그것은 자기 증거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자기의 고민만 더 늘어날 뿐입니다. 어떤 고민이든 육이 있으니까 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것마저 주의 증거물이 되는 겁니다. 39절에 “이 사람들이..증거는 받았으나 약속은 받지 못하였으니”라고 했거든요. 약속의 실체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것만 보여드리겠습니다. 천국이라는 것은 있어요. 있는데 천국에서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여기에 능력, 성령의 힘이 온다고요. 성령의 힘이 어떤 거냐고 저한테 물으시면 (방언하는 거냐고 묻는데 이런 것은 아니고요) 우겨싸임을 당해도 싸이지 아니하고 거꾸러짐을 당해도 우리는 거기에서 웃을 수 있으며 우리가 죽은 자 같으나 사실은 살아있는 이런 것이 바로 능력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최재우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동학혁명을 한 사람으로 경주 형국 사람입니다. 경주 시내가 있으면 서쪽 골짜기에 형국이 있고 거기에 최재우의 기념비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양반이지만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서 의병을 일으키지요. 의병을 일으켜가지고 동학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처음에 의병을 일으킬 때 전라도에서 탐관오리가 너무 많이 해먹어가지고 농민들이 합세해서 일어나서 동학혁명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1894년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요. 이 사람의 힘은 무슨 힘입니까? 이렇게 동학혁명을 일으키고 하는 힘이 어디에서 나왔어요? 이게 천국의 힘입니까, 아니면 기존의 세상의 힘입니까? 세상의 힘이지요. 그러면 이 사람의 약속은 누가 지어낸 거에요? 본인들이 기대한 것이 본인들이 예상하는 약속이 된다 이 말이지요. 그들은 무참하게 일본과 정부군에 의해서 다 함몰되었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동학혁명을 일으킨 최재우라면, 다시 말해 성령의 능력을 받았으면 히브리서 11장에 나왔듯이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 우리는 이 땅에 나그네라는 거에요. 그러면 나그네라고 느끼는 게 능력이에요. 능력을 받았으면 이미 약속은 따낸 거에요. “약속을 보면 믿을게요.”가 아니라 이미 능력을 받는 사람은 약속과 연결이 되어 있는 겁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에 “땅에서는 나그네”라고 했고 40절에 “더 좋은 것(본향)”이라고 나오잖아요. 하나님께로서부터 우리가 능력(증거)을 받았으면 이 사람은 약속이 된 거에요.
자꾸 약속을 보여달라고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제가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약속을 내놓아서 마지막까지 다 보면 하겠습니다.” “아니! 증거를 대.” “증거 해도 안 되고 약속을 보고 증거를 믿겠습니다.”라고 하지 말라 이 말이지요. 이미 우리가 생각했던 나 중심, 내가 잘났음이 자꾸 어긋나고 이것이 자꾸 무산되고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상이 일어나서 그것이 예수님의 공생애와 관련이 있는 것이고 내 인생에 주께서 손을 대고 있는 중이고 내 인생이 나의 무대가 아니고 주님의 무대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증거인으로서 만족합시다. “천국은 이러 이렇게 생겼다고 설명하려면 그것까지 봐야겠습니다.”라고 욕심내지 마시고 내 뜻대로 안 된다는 그 지점에 있을 때, 고맙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는 이 증거와 약속이 연관이 되어 있음을 대인적으로 복음으로 외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증인이 아니고 주님의 증인이 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약속을 다 주지 않은 이유는 내 증인이 되지 않게 하려는 조치인 줄을 압니다.
마지막으로 40절에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이라고 했지요. 더 좋은 것이 예비된 거에요.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우리가 받은 증거가 숨어있는 세계와 연결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도 우연이 아니고 이렇게 말씀을 알게 된 것도, 모이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고 주님의 계획된 연차적인 작업인 것을 늘 찬양하면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