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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히브리서 11:31 / 불신 / 160408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브리서 11:31 / 불신 / 160408

정인순 2016. 4. 9. 20:31

 

 

음성1                    음성2

 

녹취:충성모

안양20160408a1131(불신)-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 1131절입니다. 교회에 조금 다닌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래 인간의 선택이라는 것은 공정해야 돼요. 기회가 공정하게 제공되고 나서 , 순종할 거야, 말 거야.”라고 했을 때, “나 안 할 거야.”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책임을 지고 지옥에 가는 것이고, “순종할 거야, 말 거야.”라고 물었을 때, “순종할 거야.”라고 한다면 순종함으로 천국에 간다고 할 때, 공평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탐군은 , 이스라엘 사람인데 숨겨주시오.”라고 할 수 없어요. 정탐군은 스파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기생 라합이 정탐군을 만난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기 때문에 여기에 나오는 것처럼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라는 말이 난해한 말이 되는 거에요. 순종치 아니함으로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순종하면 멸망을 당하지 않을 수가 있잖아요.

 

그런데 기생 라합을 빼놓고 여리고 성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순종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다니까요. 아까 이야기했는데 상황이 불공평한 상황이라고 봐야지요. 기생 라합과 스파이가 만났다는 것은 은밀한 만남이에요. 대외적이나 공개적으로 나발을 불 이야기는 아니잖아요. 하나님께서 은밀하게 스파이를 만나게 했고 기생 라합도 은밀하게 이들을 만나야 될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스파이를 목숨을 걸고 숨겨줬잖아요. 여기에서는 라합이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했다고 나와 있는데 실제는 평안히 영접한 게 아니고 조마조마하게 영접했겠지요. 들키면 죽으니까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멸망할 것이냐, 멸망하지 않을 것이냐 하는 것을 목적이나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 지옥 안 가고 천국 갈 거야.”라는 것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은 기회가 이미 왔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이에요. 비밀리에 와서 자기가 택한 백성만 건져낸다는 것이 하나님의 작전인데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작전을 모르고 공개하면 내가 순종할게.”라고 떠벌이는 식으로 구원이 되는 줄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확한 정답을 제가 말씀드릴게요. 여리고 성은 이미 멸망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게 정답이에요. 제가 다시 말할게요. 목적과 목표를 기대하지 말라고 했지요. 내가 여기에 있는데 멸망이 있다니까 나는 멸망당하지 않겠어.’라는 그러한 목적과 기대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지 마시라 이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방식이 아니에요. “, 천국에 갈래, 지옥에 갈래, 어느 쪽이야?”라고 하면 다 천국에 가고 싶다고 말하잖아요. 그렇게 기회가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기회가 주어지고 거기에 순종하지 않으면 멸망하는 방법이 아니고 이미 기회가 왔음이 곧 순종이고 순종이 나에게 너는 멸망에서 제외된 사람이라는 통보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미래가 현재를 새로 구성한다고 보면 돼요. 현재가 있고 그 다음에 미래가 있는 것이 아니고 미래가 미래에 적합한 현재로 몰고 가는데 그 현재는 내가 생각한 현재와 미래하고 비틀어져요. 내가 예상한 기대와 목적은 주께서 내가 시작했기 때문에 허용을 하지 않습니다. 내 뜻대로 구원을 안 해주는 것이 구원입니다.

 

교회에 교인들이 많이 오거든 왔다고 부러워하지 마세요. 전부 자기 뜻대로 구원 받으려고 온 사람들이에요. 그 중에서 내 뜻이 아니야.’라고 고백하는 사람을 찾으려면 찾기가 굉장히 힘들 거에요. 그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교회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까 이야기하기를 교회에 올 때에 자기의 기대, 목적, 또는 목표를 가지고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나 이것을 가지고 와요.

 

그런데 어느 날 빛이 비췄다(성령이 임했다)고 합시다. 그러다 보니까 이것은 내가 기대하고 목적한 것이 없이 주님이 오히려 나를 기대하고 주님이 나의 목적이 되시고 다시 말해서 내가 주님의 목적이 되고 내가 주님의 목표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령이 올 때에만요. 그러면 내가 미래를 찾아가는 식이 아니고 미래가 나를 덮치는 식이 되지요.

 

그런데 내가 가졌던 기대와 목표가 다 미래에 해당되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미래는 다 날아가 버리고 그 주님이 생각하는 숨겨진 미래는 지금은 나의 현재로 돌변해있는 거에요. 그러면 주님이 쳐들어온 이 현재와 미래 사이에 내가 끼어들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첫 번 째 나온 질문이에요. 끼어들 수가 없어요. 끼어들 수가 없으니까 남은 것은 범사에 감사할 일밖에 없는 거에요.

 

내가 뭔가를 은근히 노려서 얻을 것 같으면 여전히 내가 처음에 기대했던 그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 노선을 붙들고 있는 셈인데 성령이 오셔서 미래가 현재가 되어 버리면 내게 이미 찾아온 그 현재라는 이름의 미래 속에는 내 기대와 내 목적과 내 목표를 치워버리고 그 자리에 주님의 목표와 목적으로 이것을 바꿔치기를 해놓는 겁니다.

 

그런 것 중에 하나가 이것입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라는 것을 추리고 줄여버리면 너는 멸망해서는 안 되는 존재야. 너는 멸망해서는 안 되는 대상이었어.”라는 뜻이고 이것이 앞당겨져서 미리 현재가 되어 버린 겁니다.

 

그래서 기생 라합에게 정탐군이 온 것이 아니고 장차 오실 메시야가 미리 온 거에요. 그것도 비밀리에요. 오늘 제목을 비밀리에라고 할까.. 몰래, 은밀하게 이미 현재가 와 버렸습니다. 그럴 때 기생 라합이 남들에게 이야기할 것이 있는데 이런 게 아니겠지요. “나는 이렇게 했더니만 구원 받았습니다.”라는 말을 입을 뗄 수가 없어요. “내가 순종함으로 멸망되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을 입을 뗄 수가 없어요.

 

분명히 성경에는 순종함으로 멸망치 아니하였도다라고 되어 있지만 그 기생 라합의 입장에서는 멸망당하지 않기 위해서 주께서 순종이라는 현재를 만들었습니다.” “내가 순종해서 얻고자 하는 기대와 관련된 순종은 치워버리고 주님의 미래와 연결이 가능한, 거기에 합치가 되는 데에 필요한 순종을 나에게다가 집어넣었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에요. 그러면 기생 라합은 구원을 받기 전에 이미 구원을 받은 자가 되어 버리는 거에요.

 

기생 라합에 대해서 분명히 자기는 몰래, 비밀리에 했지만 기생 라합이 생각했던 그것은 여타의 여리고 성의 사람들하고는 차이가 나도 너무 차이가 나겠지요. 그 차이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타의 사람들은 멸망당했다고 하니까 자꾸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하시는데 (물론 나쁜 짓을 했으니까 하나님께 멸망 받겠지요.) 그 나쁜 짓이라는 것은 본인이 생각하는 나쁜 짓은 본인이 몰라요.

 

개가 오줌을 싸도 자기는 나쁜 짓이라고 생각을 안 한다니까요. 뭔지를 몰라요. 그 사람이 보기에 개가 오줌을 쌌으니까 냄새가 나서 나쁜 짓이지만 개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라니까요. 나오는 대로 그냥 쌌을 뿐이지요. 우리가 사는 게 그런 거에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나쁜 짓을 했으니까 회개해서 구원을 받겠다는 것은 자기가 혼자 노는 소꿉놀이에 불과한 거에요. 일본말로 빵깨싼다고 하는데요. 빵깨가 일본 말인지 전라도 말인지 경상도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소꿉놀이에 지나지 않는다고요. 혼자 노는 거에요.

 

순종치 아니했다고 했는데 여리고 성에 기생 라합을 빼놓고는 다 순종치 아니했거든요. 그 순종치 아니했다는 말을 굉장히 나쁘게 보지 말고 이 세상 식으로 표현한다면 서로 납득이 되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살아왔다 이 말입니다. 벚꽃축제 한다고 음식 판다고 텐트를 치는 것 같이요. 자기들끼리 치고 싶어서 그러잖아요. 오다가 보니 그래요. 지금 경찰하고 대치하고 있는 모양인데요.

 

순종치 않는다는 말은 그냥 남들이 보기에 나는 어때?라는 남의 시선과 남의 평가에 맞추기 위해서 아주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보편적인 삶이 순종치 아니함이에요. 기생 라합의 입장에서 말이에요. 그런 사람은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은 나는 바르게 살아야 돼. 바르게 살아야 돼.’ 이거거든요. 기생 라합이나 순종치 않는 사람이나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같아요.

 

그런데 기생 라합은 본인이 바르게 살아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본인은 자기 말고 어떤 외부인을 만났지요. 그러니까 자기가 속해 있는 세상의 바깥에 있는 세상, 여호와와 함께 있는 어떤 인물을 만난 것을 가지고 순종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이것이 의이고 이것이 거룩이고 이것이 경건인 거에요. 혼자서 나는 부족하다.’고 하는 것은 도를 닦는 것이고(그건 절에서 많이 하라고 하세요.)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현재 존재하는 원인이 나에게 있지 않고 외부에 있는 그 원인자가 찾아온 때부터 늘 지배를 받고 있고 통제를 받고 있고 지시를 받고 있다는 겁니다.

 

두 번째 질문을 해봅시다. 하늘나라에서 지적 받을 것이 없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손에 움직이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입니까? 후자지요. 하늘나라에서 지적 받을 게 없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못 갑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목표가 뭡니까? 오늘날 교회가 성화와 거룩을 목표로 잡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생각해서가 아니가 그 집단과 조직 사회에서 남한테 밑지지 않는 자기 가치를 마음껏 과시하는 것을 목적과 목표로 기대삼아서 교회에 나오기 때문에 그렇게 남들이 하는 평가에 관심이 있는 거에요.

 

목사와 집사나 장로가 무슨 소리를 하면 삐져가지고 교회도 안 나오잖아요. 타인을 생각하기를 나의 가치를 대변해줘야 되고 그것을 증거해줘야 되는 존재로 은근히 그렇게 생각을 한 거에요. 특히 가정에서 부모한테 효도한답시고 부모를 섬기는데 그 섬기는 패턴이 드라마에서 많이 나와요. 그러니까 부모가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을 원하는 게 아니고 자기가 효자(효녀)임을 돋보이는 상황을 자기가 일부러 조작해내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차가 있고 집이 있는데 그냥 어머니가 걸어갈 수 있는 문제인데 어머니, 업히세요.” 하고 업고가다가 정강이를 다쳐서 병원에 두 달 동안 고생고생하다가 나은 사람이 있어요. 그건 무슨 오바입니까? 효도하겠다는 것은 기대와 목표와 목적이에요. 그것은 지금 내가 이렇게 행동을 하면 남들이 보기에 얼마나 내가 효자나 효녀라고 추앙을 하겠느냐 하는 것을 은근히 기대를 하고 목표를 하는 거에요.

 

그것을 아주 분질러 버려야 돼요. 부숴버려야 돼요. 어떤 목표나 목적에 관심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내가 만드는 미래를 못 놓겠다는 거에요. 그걸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내 가치를 빛내는 일에만 힘을 내고 억지로라도 살아보겠다는 겁니다. 평소에 모든 생각들이 그래요. 그래서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거나 누구를 만날 때 주저하는 이유가 저 사람을 만나면 저 사람이 이런 소리를 할 것이고 나는 그러면 짜증이 날 텐데 어떡하지..’ 미리 걱정을 당겨서 하기 때문에 벌벌 떨고 있는 겁니다.

 

어떤 분이 저한테 참 귀한 질문을 했어요. (본인은 그걸 못 느끼지만 나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굉장히 귀한 질문이에요.) 목회자 되시는 분인데 이렇게 질문을 한 거에요. “‘목회자 되시는 분은 교인들이 하는 말을 왜 잘 안 듣고 설교자 자기의 고집대로 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했는데 어떡하면 좋습니까?”라고 이야기를 한 거에요.

 

그래서 제가 답변을 해드렸어요. 모임이 있어서 그 모임에 갈 때 내가 어떤 말을 해야 그들이 기뻐하고 내 말이 복음적이라는 것을 받아줄까를 기대하고 목적으로 했지요. 그런데 거기에 뭐가 빠졌어요. 그것은 그 현장을 주님이 만든다는 거에요. 이것을 쏙 빼버렸어요. 내가 어떻게 저 사람들을 교육하고 주의 종으로 제대로 세운다는 거였어요.

 

그러니까 그 현장에 주님은 없고 본인이 주인공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다시 연락이 왔는데 , 죄가 빠졌네요.”라는 거였어요. 그 현장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에요. 주께서 만나게 하셔서 터질 것은 터지고 째질 것은 째지고 다툴 것은 다퉈봐야 거기에 미처 모르는 내 죄가 나오는 겁니다. 인간이 죄를 덜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죄를 지적 받지 않으려고 하는 그 자체가 죄인 거에요. 지적 받지 않는 존재가 되고 싶은 것이 죄라는 거지요.

 

그래서 교회를 가더라도 내 죄를 지적할 수 있는 교회를 가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남들로부터 칭찬을 받아요. 그런데 칭찬을 받을수록 점점 더 개가 되면서도 인간인 줄로 착각하게 돼요.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교회의 장로들이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목사의 설교만 비판할 줄 알지 본인에 대한 지적은 누가 할 사람이 없어요.

 

라합 앞에 반드시 붙는 것이 있어요. 직업이 기생이에요. 기생 라합은 이 세상적으로 봤을 때 세상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 사람으로부터 싫어버린 바 된 저 주변에 있는 인물이에요. 밀려나와서 사람취급도 못 받는 거에요. 몸을 팔고 술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짐승인지 사람인지 구분이 안 가는 그 경계선에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 기생 라합이 세상적인 윤리와 도덕으로 봤을 때는 순종은커녕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밥벌이하는 사람에 해당이 되지요. 그 사회에 이 기생 때문에 가정이 파탄난 사람이 한둘이 아닐 거구요. 멱살을 쥐고 흔들 수 있는 대상이 되는 사람이 기생 라합이에요.

 

 

야고보서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야고보서는 히브리서 바로 뒤에 있거든요. 그러니까 한 번 봅시다. 야고보서 224절에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라고 했지요. 그러면 우리는 야고보서 224절에서 무엇과 무엇을 구분해야 됩니까? 행함과 믿음을 구분지을 수 있어야 되는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인데 저것은 아니거든. 그리고 이것은 행함이고 이것으로 되거든.” 이렇게 언급을 하는 거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무엇이 궁금하겠습니까?

 

그러면 어느 쪽을 행함이라고 할 수 있고 어느 쪽을 천국도 못 가는 믿음이 아닌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겠지요. 그 예가 25절에 나옵니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여기에 나오는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할 때의 행함을 우리가 봤던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뭐라고 봤습니까? 이것을 믿음으로 본 거에요. 야고보서에서는 이걸 행함으로 봤지요.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는 이걸 믿음으로 봤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 두 개가 일치된 내용이 되려면 아까 이야기한 그것이 요점입니다. 기생 라합은 내가 어떻게 하면 내가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느냐가 아니라 (그게 바로 엉터리 믿음이에요.) 주도권이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영접해야 될 저쪽에 넘긴 거에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알아서 하세요.”라면서 영접한 거에요. “이제는 내 미래를 몽땅 다 털어서 가져가세요. 그대 앞에서 내 미래라는 것을 두 번 다시 요구하거나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주님이여 주님 앞에서 나의 운명과 팔자와 마지막과 미래에 대해서 입을 닫겠습니다.” 이것이 욥의 마지막 대목이잖아요.

 

 

욥이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했다는 말은 그래도 딸 셋은 예쁘게 낳게 해주세요.’라는 말은 없다는 거에요. 욥기 마지막에 딸 셋이 예쁘다고 했는데 그것은 주님의 작품이지 욥이 은근히 노렸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욥을 보는 사람들마다 은근히 처음부터 노려요. ‘나도 고난 받으면 복을 받겠지..’ 중간에 경유해야 될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고 빙 돌아와서는 결과만 냅다 챙기려고 하니까 그런 거에요. 이런 식으로 교회에 온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이야기해보세요. 다 나가버리지요.

 

 

교회에 오셨습니까? 참 훌륭한 일을 했으니 욥이 받은 복을 누릴 것입니다.” “아멘.” 지금 이렇게 가고 있다 이 말이지요. “여러분 교회에 오셨습니까? 욥처럼 다 털리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면 안 오는 거에요. 강의를 다시 하겠습니다. 기생 라합이 한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기생의 믿음을 본받으라가 아니라 기생 라합의 존재가 본인 혼자의 존재가 아니고 주변에 순종치 아니함을 겸하여 같이 보여주는 거에요.

 

 

그리고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기생 라합의 믿음이 아니고 그냥 평탄하게 아무 일도 없이 정상적으로 잘 돌아가서 벚꽃 구경을 잘하고 있는 이 세상에 믿음이 쳐들어 온 거에요. 그러면서 우리가 보고 있던 세상이 잘못된 세계관 속에서 돌아가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저주 받을, 멸망 받을 그런 순종치 아니함이라고 평가 받은 세상 속에 그 동안 살았었구나.’ 하면서 미래를 앞당겨서 체험하는 거에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그냥 봄이 되면 봄을 즐기고 여름이 되면 여름을 즐기고 그냥 사는 것이 주님이 보시기에는 순종치 아니함의 반복이 되는 겁니다. 그 순종치 않고 편안한 인생관(세계관)을 저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기대하고 나름대로 목표하고 목적을 갖는 삶이라고 제가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누구나 다 목표가 있고 기대가 있고 자기 행위에 대해서 은근히 결과를 얻고자 하는 그것이 순종치 아니한 것인데 그 이유는 기생 라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기생 라합은 이미 자기의 목표와 기대, 자기를 떠나서 그것을 자기에게 찾아온 분에게 다 맡겨버렸어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다 맡겼어요. 그래서 주께서 주신 현재와 미래 사이에 우리가 끼어들 수 없다고 말했잖아요. 그걸 수정해달라든지 라고 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수정당해야지 주님을 왜 수정해요.

 

여러 번 이야기합니다만 또 한 가지는 뭐냐하면 이 세상은 이미 멸망당해야 할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너무 자주 잊어버린다는 거에요. 내일 또 결혼식 주례가 있지만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할 때에 갑자기 홍수가 났잖아요. 결혼식이 화려하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멸망이 지연되고 이런 것은 없습니다. 시커먼 바탕 위에서 새싹이 하나 올라오는 게 사실은 정상이 아니고 기적이에요. 기적은 시커먼 데에서 일어나야 돼요.

 

밤중에 모든 소는 다 검다는 말이 있어요. 그렇지요? 젖소 있고 흰 소가 있는 게 아니고 밤에는 모든 소가 다 검어요. 일괄적으로 동일하게 검은 색입니다. 그 모든 것을 일괄적으로 검게 만드는 밤에 활동하는 분이 누구냐 하면 야곱에게 찾아왔던 하나님의 천사(밤의 천사)입니다. 그리고 출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끄집어낸 천사가 바로 밤의 천사입니다. 그걸 여호와의 밤이라고 합니다. 내가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참 아름다운 밤이에요. 물론 아름다운 밤이지요. 그 밤은 여호와와 함께 있는 밤이지요. 그 여호와가 함께 동행하는 사람은 세상을 볼 때에 아무리 화려한 벚꽃축제를 해도 그것이 시커먼,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이지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너무 허무합니다. 세상 살기 싫습니다.”라고 하는데 허무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기뻐하세요. 오히려 이렇게 느긋하게 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내가 허무한 것 때문에 미래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이미 보장이 되었기에 이제는 남들이 보는 식이 아닌 다른 식으로 주님이 세상을 보는 그 안목을 갖게 되었으니까요. 이런 횡재가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이 세상을 어떻게 봤느냐? 기생 라합이 세상을 보는 방식으로 보신 거에요. 기생 라합은 예수님보다 일찍 세상에 왔고 예수님은 기생 라합이 갖고 있던 그 본래의 마음을 보편화시킨 거에요. 그 보편화시킨 중에 말려들면 우리가 바로 기생 라합과 예수님과 동일한 안목이 되어서 그 사람은 곧 기생 라합과 같은 안목으로 그 여리고 성의 시대상을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서도 동일한 관점으로 보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믿음이고 그 믿음은 행함으로 증명되지 않을 수밖에 없어요. 늘 이게 행함으로 나와요.

 

그리고 야고보서에 나온 것처럼 기생 라합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을 해봐야 돼요. 제가 우리교회 권사님한테 들었던 일곱 살짜리 애가 하는 이야기를 벌써 몇 번째 하는가 모르겠다마는 이걸 어른들이 듣고 좀 부끄러워하라고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야곱은 거짓말을 했는데 복을 받고 왜 형 에서는 거짓말을 안 했는데 저주를 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을 일곱 살 먹은 애가 한 거에요. 그래서 답변을 했는데 이렇게 했습니다. 그것은 에서는 본래의 자리를 모른다입니다. 쌍둥이거든요. 본래의 자리는 야곱이 감을 잡고 있었던 겁니다. 야곱이 둘째가 될 게 아니고 첫째가 될 위인인데 멸망 받아야 될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태어난 세상에서는 순서가 거꾸로 태어난 거에요. 먼저 된 자가 나중된다고요. 거꾸로 만드는 거에요.

 

그 거꾸로의 안목을 야곱이 알기 때문에 에서의 입장에서는 거짓말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야곱은 지금 바른 말을 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나 상식적이고 윤리, 도덕적 입장에서는 명백한 거짓말이에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은 상식적으로 봤을 때에 살인죄입니다. 자기 자식이니까요.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원래 이삭과 아브라함이 제물의 죽음이라는 관계로 이어져야 마땅하고 이로 인해 아브라함은 새사람으로 변하는 겁니다. 희생적인 죽음이 없이는 사람이 천국에 못 가요. 누가 나의 이 목숨을 바꿔치기 해줘야 됩니다. 그것도 죽음을 통해서요.

 

완력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의 힘으로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너는 죽었어. 이미 태어나기 전에 너는 죽은 자야. 근호야 너는 죽은 자야.”라고 이야기해줄 수 있는 분을 만나야 돼요. 그게 빛을 만난 거에요. 그런데 죽은 자가 살아있다는 것은 횡재요 기적과 기적의 연발이지요. 가락에서 했지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안에 우리의 본모습이 들어있어요. 예수님을 둘로 쪼개는 거에요.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하잖아요. 십자가에 달린 그 모습이 아무리 해도 몰랐던 우리의 진짜 모습인 거에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버림 받아야 될 자가 바로 인간인 것을 성도는 눈치 채고 다른 사람은 전혀 모르고요.

 

눈치 챈 사람과 눈치 채지 못한 사람이 같이 안양 땅에 살고 있는데 이야기해봐야 못 알아들어요. 그런다고 해서 이야기를 안 할 수도 없어요. 또 상황에 따라서 우발적으로 이야기가 나오게 하시면 해야지요. 성령께서 그렇게 사용하실 때에는 말이에요. 전도하고 싶어서 환장한 게 아니고 전도가 되게끔 조치를 하시면 또 할 수밖에 없어요. 기생 라합은 몇 명 전도했습니까? 한 명도 전도하지 않았어요. 아마 기껏 전도했다고 하면 자기 식구들 생가 모으는 것 정도만 했을 거에요. 기생 라합 자기 혼자만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 자기 집도 구원 받아야 되니까요. 가족들을 설득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지만 외부인은 전혀 구원하지 않았습니다.

 

노아도 마찬가지로 남들은 한 명도 구원하지 못했어요. 그냥 방주만 만들었지요. 자기 자가용 만든 것 같아요. 자기만 타려고 만든 방주에요. 희한하지요. 그래도 그 노아는 히브리서 11장초반에 믿는 자로 나옵니다. 선교와 전도는 누구의 소관인간 하면은 목회자의 소관도 아니고 주님의 소관입니다. 그러니까 선교가 안 되니, 전도가 안 되니 불평을 한다는 것은 누구의 능력을 참 개무시하는 거냐 하면은 주님의 능력을 개무시하는 것밖에 안 돼요. 예수님을 보고 따지는 거에요.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 사람 몇 명을 전도해가지고 내 앞에 딱 대령해!” 자기가 지금 예수님한테 지시와 명령을 내린 겁니다. “예배당을 크게 지어놓았으니까 여기에 빈 의자를 다 채워놔! 그러면 당신을 믿어줄게.” 그게 아까 이야기한 나로부터 출발한 기대이고 목적이고 목표가 되는 거에요. 교회는 일절 기대나 목적, 목표 같은 게 없어야 돼요. 예배당 기둥에다가 뭘 적어놓으면 안 됩니다. “빈자리를 채우자.” 그런 걸 적어놓으면 안 돼요. 일절 없어야 돼요. 저는 예배당을 볼 때 자꾸 삼손이 무너뜨린 다곤 신상으로 보여요. 삼손이 기둥 두 개 사이에서 잡아당기니까 다 무너져서 죽잖아요. 죽을 때 삼손도 같이 깔려 죽지요. 나 죽고 너 죽자.라는 식이에요.

 

어쩌면 성도가 이 땅에 사는 것은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삼손처럼 그들과 같이 죽기 위해 살라고 성령을 주신 것으로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잘난 체 하는 인간들 붙들고 같이 죽자고 무너뜨려 버려지요. 교회가 일을 너무 많이 벌여놓아서 그걸 수습할 길이 없어보입니다. 그것은 목사가 나 안 노니까 월급 제때 좀 주세요.”라는 뜻이고 나중에 일이 잘 되거든 월급을 인상해달라는 이야기에요. 일을 벌인다는 것은 그만큼 지옥(마귀의 나라)을 확장시키는 데에 온 신념을 다 바치고 자기의 모든 걸 다 바쳤다고 보면 돼요. 교회의 지옥이나 저쪽(세상)이나 사고방식이 다 똑같거든요. 이쪽에 칸막이 하나 했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 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그걸 천국이라고 하는 사기는 질이 더 나쁘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건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고 오히려 중세 시대에는 더했나봐요. 아침에 잠깐 tv를 보니까 비잔티움 성전인지 성당인지 황금으로 칠을 하고 천장에 예수님 부활이런 것으로 조각을 했는데 과연 예수님이 보시고 저건 뭐라고 하실지 궁금해요. 말씀이 없는 곳에는 시각적으로 신의 거룩을 모방할 필요가 있었어요. 말씀에 다 무식하니까요. 또 무식해야 농노시대에 계속해서 노동을 부릴 수가 있었거든요. 질서가 잡힐 수 있고요. 성 중간에 예배당을 세우고 그걸 화려하게 지음으로써 권력을 집대성하는 데에 이런 성경과 교회들을 이용한 거에요. 삼위일체도 마찬가지고요. 그건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권력에 순종하는 건데 이 눈에 보이는 권력과 보이지 않는 권력을 저는 지극히 작은 권력이라고 해요. 이게 수련회 교재 제목이 될 겁니다. 이번 마태복음 수련회 주제를 지금 미리 말씀드린 거에요.

 

인간은 왜 권력을 탐하느냐에 대한 내용이 마태복음 1장부터 시작해서 쭉 나올 겁니다. 그것을 탐하는 이유가 육이 갖고 있는 속성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31절에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라고 할 때 같은 여리고 성 민족을 육의 눈으로 보지 않고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면서 (기생 라합은 이방인이거든요.)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여리고 사람을 보는 그 안목을 가졌는데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서는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이 본문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중세 교회가 이슈화되고 그것에 문제가 있다는 발상, 그 사고방식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상당히 특이하다고 보시면 돼요. 그래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온다는 게 성령이 하시는 게 아니면은 그런 느낌이 안 오지요. 32절을 봅시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라고 했는데 시간이 넉넉한데 왜 이렇게 빨리 이야기를 했는가 하면 기생 라합이 갖고 있는 믿음이 기생 라합으로 멈추는 게 아니고 내재적으로 동일한 믿음이 흐르고 있다는 겁니다.

 

교회가 무엇인가 하면은 동일한 사고방식들의 교류거든요. 그런데 인간이 살아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사고방식이 절대로 동일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살아온 환경을 끄집어내어서 동일하자는 것은 말이 안 돼요. 사람이 환경이라든지 살아온 환경, 가정사, 직업이 다 다릅니다. 동일한 것은 로마서에 나오는 복음처럼 말씀 앞에서 누구나 죄인이라는 것, 그런 점에서 동일해야 되지요. 죄인이라는 사실 말이에요.

 

그런데 정도에 따라서 덜 죄인, 더 죄인이 있는 게 아니고 복음 앞에서는 순간적으로 모든 인간이 동일한 죄인이 되어 버립니다. 차츰 죄인이 되고 차츰 더 선해지는 게 아니고 이미 한꺼번에 일괄적으로 영원히 죄인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죄인이 될 때 여기에서 사랑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일괄적으로 죄가 없을 때는 뭐가 안 나온다는 말이에요? 사랑도 없다는 거에요.

 

사람이 사랑을 언급할 때는 100% 전부 거짓말입니다. 나를 사랑해달라고 하는 것은 전부 거짓말이에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해주세요.라고 요구할 수 없는 입장이 되어야 비로소 사랑이 여기에 있었네가 되는 거에요. 더 나가면 내가 죄인되게 하시는 그 자체가 이미 사랑으로 덮어졌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합당한 고백이 되는 겁니다. 내가 너무 과도한 욕심을 냈어요. 내가 욕심을 내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당신을 힘들게 하고 내가 약품을 도둑질하고 당신에게 다 뒤집어씌고 이제 와서 다시 딸하고 남편을 되찾으려는 것은 나의 욕심이었습니다. 드라마에 보면 나와요. 내일은 승리라는 드라마 114회에 나와요.

 

실컷 나쁜 짓을 해놓고 끝에 가서 그 동안 내가 했던 것은 참 염치 없는 과도한 욕심이었습니다. 이제 다시 나는 당신 곁을 떠날 겁니다.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네요. 라고 해요. 그런데 떠난다는 것은 사라짐이지요. 그 동안 우리가 자꾸 거짓 사랑을 사랑인 줄로 알고 자꾸 사랑을 하는 이유는 사랑을 원해서가 아니라 내가 여기에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고 또 나는 버텨야 된다는 그 고집이 이미 사랑을 주시고 계셨고 은혜를 주신 그 주님을 힘들게 했고 계속해서 모독한 거에요.

 

내가 잘 되는 쪽으로 사랑을 주셔야지요. 라는 말은 사랑인지 미움인지 내가 알아서 점검하겠다는 거에요. 그 축복과 저주를 내가 점검하겠다는 겁니다. 실제로 마태복음 25장에서 동영상 찍을 때 이야기했습니다마는 임금님이 양과 염소를 오른쪽과 왼쪽에 나누어서 심판할 때에 정작 천국에 가는 사람은 뭐라고 이야기해요? 본인이 사라졌어요. 제가 언제 했습니까? 제가 언제 주를 위해서 그렇게 한 적이 있습니까? 그 말의 뜻은 본인이 사라졌다는 거에요. 결국 주께서는 그 사람이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게 하시면서 그 사람이 사라지는 사태도 같이 동반해서 일으킨 거에요. 내가 했다는 소리를 못하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일하신 거에요.

 

결국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일을 하도록 하신 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주의 일을 하면서 주의 일을 했다는 생각을 본인이 못하도록 나를 그때마다 사라지게 하는 겁니다. 어떻게 사라지느냐 하면은 주여 저는 죄만 지었습니다.라고 하면서 사라지지요. 죄만 지었습니다라고 했는데 눈 떠보니까 천국인 거에요. 완전 수면 내시경 같아요. 잠자고 일어나 보니까 회복실에 가 있는 것처럼 이미 천국에 가있어요. 어 왜 내가 여기에 있지? 나는 죄만 지었는데.. 후딱 면류관을 벗어서 던지지요. 주님 앞에 죄만 지었다는 그 믿음은 주께서 주신 사랑이 입혀져야 그런 고백이 나오는 겁니다.

 

다시 해봅시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의 공통점은 뭘까요? 이건 객관식이 아니라 주관식입니다. 힌트를 드리면 여기에다가 엘리야와 모세를 보태세요. 그들의 공통점이 뭐지요?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모세가 뭐라고 했어요? 내 죄를 위해서 주께서 언제 돌아가십니까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자기는 죄인이다가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기에 나오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의 공통점은 살아오면서 자기가 죄인인 것을 드러내는 삶을 산 거지요. 삼손도 마찬가지고요 바락 같은 사람은 대표적인 사람이지요.

 

바락은 기드온 이전의 사람이지요. 바락은 그때 여선지자 드보라 라고 하는 사람과 같이 나오지요. 드보라 라고 하면 나는 자꾸 양품점 이름이 생각나요. 드보라라고 하는 양품점이 왜 그리 많은지 몰라요. 여기 드보라가 승리하는데 바락이 그랬다는 거에요. 드보라라는 이름은 나오지도 않아요. 그렇지요? 하지만 기생 라합은 이름이 그냥 나오잖아요. 마태복음 1장의 족보를 할 때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라합에게서.. 룻에게서.. 남성들이 이렇게 등장하는 이유가 남성들은 그 시대의 영웅으로 치하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그 영웅들이 과연 인간들이 생각하는 영웅들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영웅들이냐를 따지자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다른 관점에서 영웅들이겠지요.

 

그것은 순종함에서 오는 영웅들이지요. 순종함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은 장래에 올 미래를 자기 자신의 현재로써 마음껏 발휘했지요. 그러면서 본인이 은근히 기대하던 자기의 미래는 전부 다 삭제가 되고 거부당하게 됩니다. 특히 여기에 다윗 같은 경우에 해당되는데요. 다윗 이야기를 잠깐 하고 첫째 시간을 마치겠습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이 아니에요. 죽은 다윗의 아들이라는 것이 맞아요. 원래 밧세바와 다윗 사이의 아이는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쳐서 죽었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개입한(손댄) 자리에 다윗을 죄인으로 분명히 드러낸 죄가 있는 곳에만 의가 나오거든요. 구원이 나오고 사랑이 나오고요. 그래서 입다, 기드온, 바락, 삼손은 죄가 뭔가를 보여준 사람이라는 입장에서 그들은 믿는 자가 된 겁니다. 이것이 교회에 공통적으로 내재해서 흐르는 원리가 돼요. 내가 죄인이기에 내가 뭘 해도 죄인이기에 그 사람이 뭘 해도 의인이 되도록 주께서 그렇게 조치를 하시는 거에요.

 

남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때 나는 뭘 해도 죄인이라는 말로 출발을 하되 죄를 짓는 나를 보지 말고 나를 의인 되게 하시는 주님이 따로 계시다.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라고 하라는 거에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100이면 100, 내가 트릭을 쓴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내가 죄인이라고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의인이 되는 줄 알고 그 정도는 나도 하겠다라고 하거든요. 율법을 지키다가 안 되니까 십자가를 믿자는 식의 구원은 없어요. 죄인이면 그냥 계속 죄인이어야 되지 어디서 꼼수를 써요. 죄인인 척합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한 평생 살아가면서 나의 가치, 나의 기대와 목적을 우리가 죽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몇 번 굴러서 깁스를 해도 인간의 목표는 사라지지 않아요. 살아야겠다는 거요. 말로는 내가 오래 살아서 나 때문에 고생 되지? 내가 오래 살아서 탈이다.라고 위로 삼아서 그렇게 하는데 막상 반찬이 없어보세요. 난 뭘 먹고 살라고!라고 해요.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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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20160408b히11장 31절(불신)-이 근호 목사

두 번째 하겠습니다. 두 번째 하겠다고 하면 약간 겁이 나요. 왜? 첫 번째 시간에 한 것을 다 잊어버렸을까봐요. 그런 의미에서 첫 번째 시간에 한 것을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순종이라는 것이 기생 라합이 끄집어 낸 아이디어가 아니고 그냥 은밀하게 쳐들어 왔고 그러면서 여리고 성이 멸망하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이것은 누구의 입장에서 알게 된 사실입니까? 쳐들어온 이스라엘의 입장이지요. 쳐들어 온 이스라엘의 안목에서 볼 때에 여리고 성은 거기에 아무리 효자가 많고 참신한 부인들이 많아도 다 멸망합니다. 아마 여리고 성에도 신사임당이 살았을 걸요. 멸망합니다. 왜냐?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해서 순종치 아니함으로 멸망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말도 안 되는 평가지요. 보고 기회를 주고 그렇게 해야 되는데 기회도 없어요. 그냥 이미 종쳤어요. 끝 이전에 이미 끝이 나버렸어요. 게임이 끝나요. 그것을 기생 라합은 보여주는 겁니다. 직업과 상관 없이 나는 미래에 대해서 영접했고 그 미래에 속한 사람을 내가 숨겨줌으로써 여리고 성을 보는 관점에서 정탐군과 일치되고 너희들(여리고 성 사람들)과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첫째 시간을 하면서 여러분들도 일반 세상 사람들이 보는 그런 상식선이 아니고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눈을 아마 성령께서 늘 허용해주실 것입니다. 그 다음에 33절을 봅시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라고 되어 있지요. 세 가지만 끄집어 내보겠습니다. 1. 나라를 이겼다. (나라를 지킨 거지요.) 2. 의를 행했다. 3. 약속을 행했다. 사실을 전부 다 같은 말입니다. 이 나라라는 것이 이스라엘 나라거든요. 이스라엘 나라는 그냥 나라가 아니고 의의 나라이고 약속의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나라가 유지가 된다는 말은 의가 여전히 유지가 된다는 말이고 하나님의 약속이 유지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나라와 의와 약속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나라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요. 그렇죠? 나라가 있잖아요. 이스라엘 나라가 눈에 보이잖아요. 의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 세계 (마음속)에 있겠지요. 그런데 약속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마음에도 없고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약속은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서 의가 주어지고 나라가 주어졌다는 이 관계를 믿는 사람이 바로 믿는 자라고 하는 거에요.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고 믿음으로 의를 행하고 믿음으로 약속을 받았다고 했는데 이 믿음은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약속에 의해서 그 결과로 나라가 유지되고 의가 생겨났다고 믿을 때 그 믿음이 기생 라합의 것과 동일한 경우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와야 나라가 생기고 유지되고 의가 주어진다고 하는데 이것을 자세히 이야기하면 어떻게 됩니까?라고 물으신다면 (물을 사람이 있는가 모르겠습니다만) 약속이 없으면 이스라엘 나라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이때는 전쟁에서 패배하겠지요. 성경에 나라를 이긴다는 표현을 했으니까 약속이 없으면 패배하겠지요.

그리고 약속이 없으면 의가 아니라 죄가 되어 벌을 받겠지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죽는다는 말이에요. 전쟁에 패배하면 죽을 것이고 따라서 이것을 죽음이라고 봅시다. 그런데 이때 “나라가 패배하면 어떻게 내가 죽으면 어떤데?”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만이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거죠.

믿음으로 나라가 유지되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 약속을 받게 되었다는 말의 뜻은 ‘이것은 내 소관이 아니고 주께서 나를 사용해서 하는 일이야. 나는 나 단독적으로 나라를 이길 리가 없고 패배해도 무관한 존재이며 나는 내 죄로 지옥에 가도 상관이 없는 당연한 존재입니다.’라는 것을 약속이 들어옴으로써 약속이 발현되어 이러한 고백을 한다는 것입니다.

32절에 입다, 다윗, 사무엘, 기드온, 바락, 삼손이 나오는데 이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 ‘나는 실패하지 않고 뭐든지 성공해야 되고 나는 살아야 되고 죽으면 안 돼.’라고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개입으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이것이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의 일을 통해서 마음껏 보여줬지요.

그러니까 이 말은 하나님에게는 우리가 알 수 있고 보이는 것의 더 이상이 있음을 우리의 존재를 통해서 보이고 싶어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겁니다. 보이는 것의 더 이상이라는 것은 보이는 성공, 실패, 안 죽고 살아야 되는 것들 말고 더 이상의 것이 있다는 말이에요. 그렇다면 제 이야기는 간단해요. 더 이상의 것이 있다면 남들이 보기에 우리가 실패해도 상관이 없고 우리가 죽어도 상관이 없다 이 말입니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은 36~37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것이 오늘 본문 33절에 나오는 대로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에 해당되느냐를 지금 묻고 싶은 거에요.

옥에 갇히고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이러한 일이 흔히 말하는 하나님에 의한 성공이냐 이 말입니다. 뭐 이런 성공이 다 있어요. 돌로 맞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이 성공입니까? ‘007 살인번호’라는 영화를 어릴 때 봤는데요 영화가 너무너무 아슬아슬했어요. 007은 잡혀있지요, 목재소 같은 데서 쓰는 전기톱이 띠이이 하고 묶여 있는 다리 가랑이 사이로 오는 거에요. 조금만 있으면 이제 두 토막이 나는 겁니다. 톱으로 켜는 것이 성공입니까? 물론 영화니까 그 전기를 스톱시켜서 도로 나왔지만요.

왜 나라를 이기고 의를 받고 불의 세력을 멸하고 칼날도 피하고 연약한 가운데 강하게 되는 것과(33,34절)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칼로 죽는 것을(37절) 같이 섞어놓았냐 이 말입니다. 이쪽은 성공이고 저쪽은 실패라고 봐야지 왜 같은 성공이라고 묘사를 해놓았느냐 이 말입니다. 그걸 지금 우리는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이 말이지요.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이겼는데 어떤 사람은 칼에 맞아 죽었어요. 그런데 왜 동일한 믿음이냐 이 말이지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손녀를 키우는 딸을 보면서 느끼는 점이 있는데요. 왜 같은 아이인데 어떤 때는 방긋방긋 웃으면서 “엄마, 엄마.”라고 하면서 이쁜 짓을 하다가 잠이 안 올 때는 몸을 비틀고 투정을 하느냐 이 말입니다. 같은 인간(아이)인데요. 왜 같은 인간인데 하나는 톱으로 켜서 죽고 하나는 이기느냐 이 말입니다. 이것은 보이는 것 그 이상은 보이는 것을 보는 우리의 판단과 우리의 규정에 성경은 우리를 불신자로 만드는 요소가 담겨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이걸 믿어야지..’ 하는 것이 불신이 되는 겁니다. ‘나도 하나님 믿고 믿음으로 이겨야지..’ 하는 것이 불신이 되고요. 예를 들어서 ‘나도 주님 믿고 고난 받아야지.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을 받는 것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해야지..’라고 하면 흔히 말하는 부자가 되고 일이 잘 됩니다. ‘나는 주님의 십자가 이외에는 아무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면 교수가 되어 있구요. 그런데 ‘교수가 되어야지.’라고 하면 뚝 떨어져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우리는 영원한 불신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믿음이라고 하는 것도 불신에서 나온 믿음이에요. 잘못된, 신앙도 아닌 데에서 나온,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데에서 나온 믿음이에요. 그러나 보이는 세계 그 이상에서는 내가 불신을 하든 신앙을 가졌든 아예 그것은 묻지도 않고 그냥 일방적으로 믿음의 실체이신 예수님이 갖고 있던 믿음을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서 다양성 있게 그걸 퍼뜨려 버리는 거에요.

사탕을 살 때 보면 보통 같은 종류의 사탕을 한 봉지에 담아서 팔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떤 때에 보면 해태 종합 선물을 사면, 별의 별 온갖 종류의 다양한 사탕을 한 봉지에 담아놓고 그걸 팔지요. 그 봉지가 믿음이에요. 그 믿음 속에는 어떤 것을 따로 믿음이라고 할 권리가 우리한테는 없어요. 믿음을 받게 되면 울 수도 있고 웃을 수도 있고 사랑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어요. 이게 전도서 3장에 나오잖아요. “만날 때가 있으면 헤어질 때가 있고” 그런데 그렇게 하신 것이 내 잘못이나 실수나 나의 과오가 아니에요. 그것이 왜 아니냐 하면 우리는 처음부터 신자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주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주어진 우리의 모든 일상은 주님만이 믿음의 대상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너는 결코 하나님이 보시기에 신자가 아니고 오직 이 일을 이렇게 하신 주님밖에 신자가 없음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우리의 심장이 늘 뛰게 만들고 당황하게 만들고 덜컹덜컹 내려앉게 만들고 깜짝깜짝 놀라게 만드시는 거에요. 하도 인생을 살다가 놀라다가 보면은요 나중에 조용할 때가 올 텐데 조용할 때가 더 불안할 것 같아요. 그러면 ‘오늘 저녁에 일이 터져야 돼. 요새 내가 너무 한가해. 너무 일거리가 없어서 문제가 있어. 톱으로 켜는 것이 한 번 나타나야 되는가?’ 이런 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     

주(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인간을 상대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그냥 사람을 장기알을 부리듯이 좌로 이동, 우로 이동 주께서 알아서 장기알을 이동시키는 겁니다. 판 전체의 내막(승패)을 아는 것은 주님밖에 없어요. 믿음으로 나라를 이겼다고 해서 믿음으로 나갔다가 아주 대패한 사람이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에요. 법궤를 가지고 승리했으니까 법궤만 믿습니다. 하고 나가다가 패배하지요.

그들이 패배한 원인은 무엇입니까? 믿었기 때문에 패배한 거에요. 다시 말해서 언약궤를 믿는 그 믿음을 자기가 스스로 부정해야 되는데 자기의 믿음을 부정하지 못한 것이 패인이었습니다. ‘내가 언약궤를 믿으면 될 것이라는 이 심보는 분명히 불신이다.’라고 하지 못한 거에요. 여기 대표적인 사람으로 기드온이 나오지요. 기드온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 가기는 가겠는데 내 식대로 이루어주시기 바랍니다. 새벽에 솜뭉치를 놔두면 솜만 촉촉이 적시고 바깥은 바짝 마르면 그때 나가겠습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그렇게 해주셨지요. 어차피 불신이니까요.

그런데 이번에는 또 (불신을 바꾼다고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들어주기가 더 어려운 것을 요청했어요. 원래 솜은 습기를 빨아들이는 습성이 있어서 축축할 수 있었으니까 이번에는 반대로 했어요. “솜은 바짝 마르고 바깥은 촉촉하게 적셔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니까 하나님이 또 그렇게 해줬어요. 그러니까 나갔어요. 그런데 그것이 불신의 모습이었습니다. 3만 2천 명이 왔는데 다 보내고 달랑 300명이 남았어요. 300명이 바로 기드온의 불신의 표시로 전쟁에 나간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300명 가지고 안 됩니다. 나가는 사람이 더 아까운 거지요.

교회에 목회를 하다 보면은 현재 20명이 남아 있으면 그 20명이 귀한 줄을 모르고 나간 사람으 600명을 더 그리워하는 것은 모든 목사나 가게 주인들이 다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점심 때 바짝바짝 손님이 와서 점심 때만 해도 100명이 왔었는데 고가도로가 나서 정거장이 지나가는 바람에 돈을 벌어서 주차장을 해놓았어요. 그런데 차가 한 대도 없을 때 그 안 오는 100명의 손님을 얼마나 그리워하겠습니까?

그래도 한두 명 와주면 이 사람들은 맛을 보고 와주는 단골이거든요. 그 사람이 귀한 줄을 알아야지요. 300명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기드온의 과거를 묘사(표현)하는 거에요. 네가 나를 이렇게 불신했기에 이번 전쟁은 너에 속한 전쟁이 아니고 불신을 극복하고 하는 전쟁이 될 것이다. 이미 전쟁은 미디안과 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스라엘 기드온과의 전쟁에서 이미 기드온이 하나님 앞에 패배했습니다.

“300명 가지고 전쟁에 나갈 수 있느냐?”라고 하실 때에 이미 진 사람의 입장에서 못 갈 게 없어요. 이미 져버렸는데요. “예. 가겠습니다.”라고 하고 나가니 “나팔을 불고 횃불을 가지고 들어가라.”라고 해요. 그래서 나팔을 불고 횃불하고 항아리 들고 가서 전쟁을 했어요. 그런데 그게 무슨 무기가 되겠어요. 횃불을 들고 나팔을 분 것은 전쟁을 하기 전에 이미 전쟁이 끝난 파장 파티 분위기를 그렇게 낸 겁니다.

특히 횃불을 들고 항아리에 숨겼지요. 밤입니다. 밤이라서 빛이 나는 전쟁, 여호와의 전쟁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까불고 잘났다고 하더라도 밤이 되면 기가 죽게 마련이에요. 그래서 딸래미보고는 밤에는 나가지 말라고 하잖아요. 밤에는 이쁜 것과 안 이쁜 것이 구분이 안 돼요. 낮에는 이쁘면 용서가 되지만 밤에는 화장발도 안 통해요. 모든 소가 밤에는 검다는 식으로 밤에 모든 여자는 약탈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어째서 결과가 좋아보이는 것과 결과가 비참한 것이 같은 믿음이냐고 하는 겁니다. “왜 그들은 큰 믿음을 가지고 이렇게 승리했는데 나중 사람은 큰 믿음이 없이 믿음이 식어져서 결국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탈에 죽는 것을 당하느냐?”라고 하면 우리는 납득이 되는 거에요. ‘그래, 키우자. 키우자.’ 그런데 그렇게 되어 버리면 그 믿음은 나의 행함에 따라서 늘어지고 줄어드는 믿음이 되어 버려요.

하지만 진짜 믿음은 내가 아는 믿음 그 이상의 믿음이에요. 그러면 왜 믿음 그 이상의 믿음을 이야기하느냐? 우리 속에 믿음이라는 것은 불신이 되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말씀을 보고 성경을 보는 것은 내가 불신자가 되게 하시는 그것이 주님이 만드는 믿음의 내용인 것을 우리가 확인하기 위해서 보는 겁니다. 내가 생각했던 믿음이라는 것의 교정(수정)이 일어나면서 ‘아, 내가 아무리 오래 믿어도 뭐든지 내가 잘 되면 믿음이 좋은 줄로 알고 내가 못 되면 내 믿음이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 자체가 지금 예수님과의 만남이 아니고 내 믿음을 내가 도를 닦듯이 알아서 괜찮은 믿음으로 유지하겠다는 그러한 불신자와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들추어내기(파악하기) 위해서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겁니다.

아까도 제가 이야기했는데요 하나님한테 지적 받는 게 좋습니까, 혼자 지적 당할 것이 없는 게 좋습니까? 아무런 지적 당할 게 없는 것보다도 주님과 관계가 있고 주님과 교류하고 주님으로부터 이끌림 받고 지시 받고 관리의 대상이 되는 것, 이게 바로 믿음이에요. 그게 믿음이라고요. 개를 혼자 놔둬보세요. 오줌 싸고 하잖아요. 그래서 끝까지 해야 돼요. (너를 보고 이야기하는 거야.)

우리는 개만도 못하지만 개만큼이라도 한다면은 끝까지 주님의 통제와 지시를 받아야 돼요. 저는 그것을 숙제를 받는다고 하는데요. 어떤 일이 일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주님이 주신 숙제입니다. 무슨 숙제요? ‘아, 내가 이렇게 불신자구나.’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감사하는 숙제요.. 사람이 자꾸 좋은 것만 기대하게 되면 자기의 죄의식이 날아가 버려요. ‘이렇게 잘 된 것을 보니까 나는 의로운 인간이 분명해. 내가 착하니까 복을 받았지.’ 이렇게 되어버리면 나는 전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내가 뭘 해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놓치게 되는 겁니다.

거기에다가 제가 “막 사세요.”라고 하니까 자기의 본색이 분명해지는 거에요. “막 살면 벌을 받는데요?”라고 해요. 그러면 제가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어요. “벌 받으면 어때?” “죽잖아.” “죽으면 어때?” “그러면 나는 인생 패배자잖아.” “패배자가 되면 어때?” 막 살아서 패배자가 되고 죽으면 어떻습니까? 믿음도 없으면서 있는 척하는 사람들은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다 도망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막 사는 것을 왜 싫어하는지 아세요? 주님이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내 관리를 잘해서 내가 얻고자 하는 얻고자 하는 결과물이 주어질 때 남한테 내가 믿는다고 자랑질하고 싶어서 조심조심해서 살고 싶어하는 겁니다. 그 조심하는 것을 현미경을 가지고 들여다 보세요. 얼마나 많은 병균들을 죽였습니까? 내가 조심한다고요. 나 하나 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 때문에 희생을 당하는지 세상을 살다보면 그것을 알 날이 올 거에요.

주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네가 행한 대로 갚으리라” 행한 대로 갚는다.. 은밀한 것을 행할 때가 올 것이다. 로마서 2장을 한 번 봅시다. 2장 16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이 말씀의 간단한 뜻은 이렇습니다. 이 세상은 이미 은밀하게 심판의 대상이다. 그리고 심판의 대상이면서도 사람들이 ‘그래도 살아야지.’라고 하는데 이것은 은밀한 것은 감추어놓고 나오는 고백들이에요. ‘그래도 세상에 벚꽃은 피는데..’ 벚꽃은 주님의 피 위에서 피는 겁니다. 주님의 희생 때문에 피는 거에요. 벚꽃을 보면서 부끄러워 할 줄을 알아야 돼요. ‘벚꽃은 예쁜데 나는 왜 이렇지..’라고 해야 되는 거에요.

해와 달과 벚꽃을 보면서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느끼고 우리 자신의 못남을 느끼라고 세상이 있는 겁니다. 은밀한 것을 우리는 다 빼돌려 놓았어요. ‘은밀한 것을 하게 되면 교통사고가 열 번, 천 번은 더 일어나야 되는데 나한테 교통사고가 안 일어나는 것을 봐서 나는 그렇게 나쁜 인간은 아니야.’라고 하면서 사실은 교통사고가 나도 할 말이 없는 은밀한 죄는 뒤로 다 빼돌려 놓았어요. 지하 52층이나 되는 깊은 창고에다가 다 해놓았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갑자기 애가 교통사고가 나서 멀쩡한 애가 죽어버리면 ‘주여, 어찌하여 나에게 이런 일이.. 저는 어떻게 살라고.. 저에게 무슨 업보가 있어가지고 (불교용어가 막 나와요.)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가지고.. 다른 집은 멀쩡한데 하필 우리 집만 이렇게 망합니까?’라고 하는 거에요. ‘왜 우박이 떨어져도 남의 밭은 가만히 있는데 우리 밭만 자갈만한 우박이 떨어져서 한 해 농사를 다 버리게 하십니까?’ ‘그리고 하필이면 왜 다른 사람도 똑같이 속도 위반하고 신호위반했는데 다른 사람은 다 가게 만들고 내 차만 딱 잡아가지고 안전띠 안 매서 벌금 3만원 물게 합니까?’

항상 우리는 마음에 불평할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 있어요. 위와 같은 은밀한 고백이 나오거든 그것이 진짜 내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다시 말해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반항과 반발에 의해서 우리가 지금도 조정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운행하시는 해와 달, 모든 일에 대해서 항상 궁시렁궁시렁 ‘오늘 달은 왜 그리 서글픈 달이냐..’ 사람이 아무리 벚꽃이 피어도 자기 몸 하나 감기에 걸려서 아프면요 다 귀찮아요. ‘내 꽃도 아닌데 많이 피어라.’ 하면서 세상을 다 자기 중심으로 돌려놓기를 바래요.

발끈하고 반항하고 심술내는 그 세력이 악마입니다. 악마에 의해서 조종 받고 있으면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을 모르니까 이걸 악마가 한 줄을 모르고 악마가 나를 보고 “대들어, 대들어, 따먹어, 따먹어.”라고 하니까 하지 말라고 한 것도 무조건 해야 돼요. 이런 식으로 해놓고 우리는 악마를 인정을 하지 않으니까 “왜 하필이면 저를.. 영어로 why me?(내가 아는 유일한 영어에요. 크리스 크리스토 퍼슨이 불렀던 유명한 노래에요.) 어메이징 그레이스(놀라운 은혜)라는 노래가 있지요. 옛날 찬송가 405장 말고 영어 가사가 따로 있어요. 그 영어 가사에 보게 되면 이 얼마나 달콤한 음성이냐 옛날에는 내가 장님이었는데 지금은 발견했네. 옛날에는 나는 잃어버렸지만 이제는 구원 받았네. 과거와 지금(현재)을 나란히 병행해서 가사를 써놓았어요. 가사 내용이 정말 좋아요. 참 좋아요. 은혜가 나에게 공포를 주었지만 은혜로 공포를 거두어가기도 하시네. 내용이 너무너무 좋아요. 인터넷에 찾아보게 되면 그 가사가 다 나와 있습니다.

그 노래의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그 순간을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좋았던 순간을 잊어버리고 다시 그것을 옛날 일로 치부하잖아요. 그게 아니고 그 순간 안에서 계속 반복되어야 한다는 거죠. 우리가 그 순간을 놓치는 순간 우리는 다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이.. why me?'가 자꾸 반복해서 나와요. 그래서 이걸 결합하면 이렇습니다. 평생토록 우리가 마귀의 조종을 받은 자인 것을 들추어내면서 우리를 놀라운 은총으로 인도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은총이 내 소유가 되면 안 되고 계속 놀라워야 돼요. 계속해서 놀라게 되면 마귀에 의해서 조종되는 마귀의 그 반항이 계속 내 속에서 나와야 되는 거에요. 개를 만지지 말라고 그렇게 이야기해도 계속 반발이 나와요. 그때 희롱과 채찍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을 당해야 돼요.

다양성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다양성이라는 말을 좀 설명해야 돼요. 다양성이라는 상당히 철학적으로 어려운 말인데 이 다양성은 하나를 부정하는 거에요. 절대적 하나, 이 절대적 하나를 세 자로 줄이면 뭐가 되느냐 하면 이걸 유일자라고 합니다. 인간은 자꾸 다양성 속에서 유일자를 끄집어내려고 시도를 하는데 이게 잘못이에요. 이게 뭐냐하면 현실이 어려우면 거기에서 도피해서 상상의 세계로 피해버리는 거에요. 이것은 믿음이 아니고 도피에요. 허무고 도피가 된다고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양성 그 자체 속에서 나의 하나됨을 포기를 해야 돼요. 하나됨을 포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필연적 존재가 아니고 우연적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우연적 존재에 마음껏 자기를 맡길 수 있는 그 여유가 기생 라합과 같은 믿음이 되는 거에요. 논리가 굉장히 길어요. 자칫 ‘어떤 힘든 경우라도 나는 주를 믿습니다.’라고 되어 버리면 모든 다양성은 쓸데 없는 짓이 되고 주만 믿으면 되는 것처럼 되는데 그러면 예수를 믿고 난 뒤에 주께서 모든 것을 했다고 하면 이 다양성은 안 나와야 되는데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다양성은 나옵니다.

(굴러서 깁스하는 그런 것은 기대를 하지 않는데도) 그러한 예상 못할 일들이 계속 벌어지게 되면 그때 또 다시 ‘(우리가 믿었던) 하나님의 뜻은 이거야. 나는 알았어.’ 그런데 알면 뭐 합니까? 백날 알아도 ‘이럴 수가..’ 그럼 지금까지 안 것은 뭐에요? 부도 난 거지요. 그러면 하나님을 알았다고 한 것이 헛수고를 한 거지요. 되지도 않을 욕심을 너무 성급하게 부린 거에요. 아직 다가오지도 않았는데 너무 성급하게 샴페인을 터뜨린 거에요.

차라리 다양성을 기다리면 돼요. ‘또 무슨 재미있는 것을 주시겠지..’ 이런 식으로 편안하게 살면 된다니까요. 그래서 제가 막 살라고 하는 거에요. 막 살면 예전에 했던 경험들과 다른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똑같은 일을 해도 예를 들어 텃밭을 가꾸고 거기에다가 배나무를 한 그루 심어도 전에 심었던 배나무하고 올해 심은 배나무하고 느끼는 감정이 다를 수가 있고 또 거기에서 새로운 은혜를 맛볼 수가 있어요.

늘 하나님은 새로운 은혜를 주신다는 그러한 다양성을 받아들이자 이 말이에요, 제 말은.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결론을 내리지 마시고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편한 대로 마음껏 데리고 다니시고 어떤 일도 시키시되 그 소관은 주님이 할 소관이지 우리의 소관이 아님을 우리가 그냥 보따리를 진 채로 보따리를 펼치고 내용은 주님이 채우도록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셔야 된다 이 말입니다. 보따리가 나오니까 제목을 잊어버렸어요. 아까 불신이라고 했지요. 보따리라고 할 건데..

그러면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에 드는 것에 대해서 이제는 걱정하지 마세요. ‘아휴, 예수 믿다가 나도 톱으로 켜가지고 007처럼 누워있으면 어떡하지?’ 이렇게 걱정하지 마세요. 그것도 다양성이니까요. 그 다음에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라고 되어 있고요. 38절이 재미있지요.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흔한 말로 갈구지도 못하는 사람이라는 거에요.

35절을 한 번 봅시다. “(어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이것은 엘리사의 시대에, 사렙다 과부 같은 경우에 죽었던 아들이 살아나고 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런 경우는 ‘사람이 죽은 게 다가 아니고 살아나는구나.’라고 하는 느낌이 있어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다양성 안에서 그것만 믿음의 증거가 아니라, 톱으로 켜는 것과 칼로 죽는 것, 선지자들이 고난을 받는 것도 똑같은 믿음의 주께서 그 사람들에게 허락한 거에요.

그러니까 잠시 승리했다고 믿음이 좋은 게 아니에요. 자칫하면 그게 위험할 수가 있어요. ‘역시 나는 믿음이 좋으니까 오늘도 편안한 삶을 사는구나. 내가 행동을 조심해야 돼. 빡세게 조심했더니만 이런 복을 주는구나.’라고 생각해버리면 그 사람은 마귀한테 조종을 받아가지고 복을 안 주면 언제든지 반발할 자격이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할 수 있어요. ‘정말 이것을 뺏아가면 주님을 나는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임재범이 불렀던 고해라는 것이 임재범이 자기의 신앙고백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불렀거든요. “어떡합니까? 어찌하라고. 나는 저 여자가 없으면 못 사는데 어찌하라고..” 그것은 하나를 더 넣어서 37절에는 없지만, “여자가 도망치는 것과”가 포함이 되는 거지요.

(그런 내용이) 없더라도 그걸 발견해야 돼요. 개가 오줌을 싸는 것도 포함이 되고요. 결국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해서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이것이 기생 라합의 마음이거든요. 쳐들어오신 그쪽에서 나를 가져가야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알아서 예쁘게 꾸미든지 못나게 하시든지 그것은 주님의 소관이고 주님께서 마음대로 하실 거에요. 한 마디로 말해서 내가 나에게 신경쓸 일은 나한테는 없는 거에요. 미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에요. 그날 염려는 그날로 족해야지 그 다음날 것까지 미리 당겨서 염려할 필요는 없다 이 말이지요.

제가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아이 다섯이라는 드라마에 보면 주인공 여자가 유치장에 있으면서도 잠을 얼마나 편하게 잘 자는지 몰라요. 밥도 더 달라고 하고요. 성격이 참 좋대요. 유치장에 가서도 잠을 푹 자고 또 그 다음날 울기는 또 우는데 낮에 울고 밤에는 또 잘자요. 다 잊어버리고요. 안재욱이 안 반할 수가 없어요. 그런 드라마가 있는 반면에 기괴한 드라마는 무슨 사건이 터질까봐 사람을 부들부들 떨게 만들어요.

그리고 옥다정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드라마가 있어요. 그 드라마 촬영을 화요일날 서울역에서 했어요. 이요원이 주인공이에요. 이요원이 있고 뒤에 갖가지 엑스트라가 죽 있는데 손을 들면 죽 긋고 오고 또 손을 들면 한 번 긋고 촬영을 하고 있는데 나는 이요원이 나오게 사진을 찍어가지고 아내한테 자랑질을 좀 하려고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을 찍다가 걸렸어요. “여기서 찍으시면 안 됩니다.”라고 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아요. 영화 촬영하는데 불빛이 들어가면 안 되거든요. 그래서 “그걸 몰랐다. 미안하다.”라고 했어요.

그 드라마는 굉장히 유쾌한 드라마거든요. 같은 시간대에 하는 기억은 굉장히 서글픈 드라마, 아스라한 드라마에요. 다양성입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도 그래요. 주께서 어떻게 만드는지는 그 사람의 몫입니다. 요한복음 마지막에 이렇게 적혀있지요. 베드로가 “너는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라고 할 때에 베드로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러면, 쟤는요?” 사도요한을 보고 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한 거에요. 그때 주님이 하신 말씀이 뭐에요? “한 2500살 먹든지 20000년을 먹든지 내가 올 때까지 있든지 너는 너 할 것만 신경 써.”

어차피 다양성 있게 다룬다는 것은 개인이 믿음이 좋고 못하고에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투입되어서 장기알을 부리는 것과 같은 거거든요. 그러니까 내 인생을 내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 말이지요. 요한은 요한대로, 베드로는 베드로대로 살아요. (물론 요한이 제일 오래 살아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요한이 나오니까요.) 그렇더라도 개인적인 가치는 이미 끝났어요. 오래 살았으니까 착하고 일찍 죽었으니까 나쁘다는 개인적인 그 가치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에 나중에 합류하게 될 거에요. 초등학교 때에 소풍을 가서는 “해산! 각자 점심 먹으세요.”라고 하면 점심을 먹잖아요. 나중에 오후 3시 갈 때가 되어서 장기자랑 할 때가 되면 어떻게 합니까? 어디서 다양성 있게 살든지 간에 다 모여야 되잖아요.

이 모이는 것을 사도바울은 “예수 안”이라고 한 거에요. 예수 안을 두 자로 교회라고 하는 거에요. 어디에 가더라도 교회에요. 왜? 어디를 가더라도 주님의 통치 아래에 있기 때문이에요. 교회 앞에 무슨 무형교회, 유형교회라고 붙이면 안 돼요. 교회는 그냥 교회일 뿐이에요. 고린도에 있는 교회지, 고린도교회가 아닙니다.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요. 그래서 교회 이름은 우리교회가 최고입니다. 그냥 우리에요. 우리.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아니에요. 그들이 나가든 들어오든, 몇 명이 오든 간에 우리는 계속 유지되잖아요.

그 다음에 38절에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라고 했는데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자기의 몸은 더 이상 자기의 것이 아니니까 감당할 이유가 없지요. 자기가 스스로 감당할 이유가 없어요. 그러니까 궁핍하면 궁핍하면 되고 환난을 받으라면 환난을 받고 학대를 하면 학대를 받으면 돼요. 학대를 받아도 잠 잘 주무시면 됩니다. 나중에 교도소에 가더라도 잠 잘 주무시면 됩니다. 이런 사람은 교도소(세상)가 감당치 못해요.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런 모습을 보면 걱정되는 게 또 있어요. 흔히 교회에서 목회에 문제가 좀 있으니까 ‘그래, 세상은 다 더러워.’라고 하고는 자기 혼자 지리산 같은 산중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자기 고향도 아닌데 산중에 들어가서 약초를 캐겠다고 하고요. 또 들어갔으면 좀 말끔하게 살지 들어간 사람을 치고 수염 안 기른 사람이 없고요. 그리고 개량한복도 입고요. 분명히 녹색당에 편지를 해요. 그게 자연환경인가요?

산중과 암혈과 토굴이라는 것은 어디를 가더라도 주님이 안 계신 곳이 없음을 다양성 있게 그 사람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아, 토굴에 가더라도 계시더라.’라는 것을 알려주는 거에요. 그래서 꼭 토굴에 있을 필요가 없어요. 안양에 살아도 돼요. 안양 여기 충훈부에 살아도 주님이 계셔요. 꼭 거기에 갈 필요가 없어요. 교회에 문제가 있으면 교회를 나와서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려도 주님이 두세 사람과 함께 있습니다. 꼭 환경과 분위기에 매이지 않아도 됩니다.  
       
어릴 때 우리 집에서 제사를 드렸는데 늘 보고 싶었던 풍경이 있어요. 나중에 크면 꼭 가고 싶었던 데가 있어요. 제사 드릴 때 병풍을 치는데 그 10쪽 병풍에 이런 그림이 있어요. 깊은 산중이에요. 그곳에 얼굴은 안 보이는데 삿갓을 쓰고 낚시대만 드리웠어요. 깊은 물인데 아무리 봐도 근처에 이 낚시하는 곳으로 연결되어 있는 도로가 안 보여요. 이게 동양화의 특징이거든요. 여백을 많이 남겨서 여백을 통해서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 동양화의 특징입니다. 서양화는 여백을 다 채우지만 동양화는 그냥 여백을 남겨둬요. 여백을 일부러 메우기 귀찮아서 그렇게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교회에 동양화 하시는 분이 그러시는데 여백이 중요하답니다. 순간적인 의미에 포인트를 주기 때문에 그렇다는데요.

아까 이야기한 병풍은 5월달 것인데요. 또 3월달 병풍을 보게 되면 꼭 여기에 복사꽃을 유일하게 분홍빛으로 해놓았어요. 진정 이곳에 가고 싶어요. 저는. 또 내가 7살부터 열 몇 살까지 학교 앞에 이발소에 갔는데 이발소에 있는 그림이 이렇게 생겼어요. 머리를 깎으면서 그것만 쳐다보고 있으니까 기억이 생생해요. 깊은 계곡인데 배도 없어요. 그냥 깊은 물만 흐르고 산만 보여요. 그래서 이곳에 가고 싶다고 했는데 이곳을 얼마 전에 봤어요. 노르웨이에 가니까 전부 다 이렇게 생겼어요. 큰 피오르드 협곡에 사람도 없고 맑은 물만 있어요.

그런데 제가 어릴 때 이걸(병풍) 보면서 ‘가기는 갔는데 길이 안 보여서 어떻게 집에 오지?’라고 걱정을 했어요. 이게 사람들이 꿈꾸는 유토피아와 천국과 관련이 되어 있어요. 이 세상이 너무나 복잡하고 힘드니까 유토피아(환상의 세계)를 동양화가나 서양화가들이 이런 식으로 묘사를 하는데 여기 가봤자 먹을 게 없으면 라면이 생각나요. 여기에 가서 진라면 먹는 거나 집에서 먹는 거나 똑같아요.

그래서 내 육신이 있는 한 천국이 아니고 지옥입니다. 내가 가가지고 좋은 데를 다 버려놓습니다. 벚꽃 구경 가서 텐트 쳐놓아서 분위기를 다 버리듯이 하여튼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문제가 있어요. 입장료 받고 싸우고 또 그것도 아침에는 괜찮아요. 저녁때에는 벌써 한 잔 걸쳤어요. 그리고는 오면서 길가에 매쾌한 담배 연기 다 퍼지게 만들지요. 어느 자리에 가든지 간에 그 자리는 주님께서 “너는 다양성 있게 거기에서 살아.”라고 집어넣어준 자리입니다. 복음 증거하라고, 믿음을 나타내라고요. “여보, 못 살겠다. 이사가자.”라고 할 때 “여보, 우리 처지에 욕심 내지 말고 마음을 낮추자.”라고 하세요.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만 낮추면 행복해져요. 어느 정도까지 낮추라는 말입니까? “진작에 죽어야 되는데 계속 사네?”라고 할 정도로 낮춰지게 되면 없던 감사가 나오고요, 모든 주변의 것들 중에 고맙지 않은 게 없이 다 고마워요. 만약 애인 떠난다면 떠나게 하셨다고 봐버리면 마음이 편해요. 그렇게 되어야지, 집착이라는 건 전부 다 욕심이 많아서 그런 거에요. 그래서 이런 문장이 중요합니다. “주님, 이것마저 정녕 욕심이란 말입니까?” why me?하고 비슷한 개념이지요. “이것마저 내 욕심입니까?” 딸을 시집보낼 때 딸이 엄마 마음에 안 드는 남자를 데려 왔을 때 “내가 평소에 네가 좋은 남자한데 보낸다고 했지만 그 남자는 정말 아니다.” 하고 돌아서서 기도하기를 “주여, 지금 저를 깨지게 하시니 이것마저 나의 욕심이란 말입니까? 아무리 봐도 너무 아닌데 우리 딸 수준이 저것밖에 안 될 줄은 내가 미처 몰랐습니다. 나는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너무 아닙니다.”

특히 젊은 아가씨가 노털하고 재혼한다고 해보세요. 기가 찰 것이고요.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멀쩡한 아들이 애 딸린 이혼한 여자하고 해보세요. 반대할 수밖에 없어요. “너 죽고 나 죽자.”라고 하는 거지요. 그리고 또 하는 소리가 있어요. 나는 이게 드라마에만 나오는 줄 알았더니 실제래요. 무슨 드라마가 따로 있고 실제가 따로 있어요. 드라마가 실제를 모방해야 되는데요.

따지고 보면 모든 게 주님의 드라마에요. 드라마가 아닌 게 없어요. 주님이 만든 드라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일 일을 몰라요. 작가가 우리가 아니기 때문에요. 작가는 따로 있어요. 우리는 그냥 놀아나는 거에요. 심지어 우리에게 찾아왔던 마귀도 마찬가지에요. 악역을 하는 배우 허장강, 이예춘에 불과해요. 그냥 악역이에요. 여로에 보면 “달중이, 달중이”라고 그렇게 욕을 많이 얻어 먹어요. 그런데 주께서 그렇게 달중이, 일제 앞잡이 나까무라 같은 그런 사기꾼들을 주변에 배치해놓으셨어요.

사람이 사기를 치는 이유가 사기를 당했기 때문에 자기도 사기를 치거든요. 결국 내 안에 여러 달중이가 있고 여러 나까무라가 있고 여러 이예춘, 허장강이 있고 내가 미처 나이가 안 되어서 그렇지 그 다음 절차는 나까무라인데 그게 아직 등장을 안 하니까 자기가 착한 줄로 알지요. 나중에 자기가 사기를 치면 “뭐, 그럴 수 있지, 살다보면 그럴 수 있지, 아이구 재수가 하나도 없네. 다른 사람은 들키지도 않는데 하필 나만 들켰지, why me?”라고 한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 모든 다양성의 의미는 “더 이상 너에 대해서 미련을 두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바로 믿음이에요. 믿음을 주셔서 주께서 그냥 우리를 장기알처럼 부리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방주 만들기, 어떤 사람은 아브라함처럼 자기 아들 바치기에요. 그렇다고 아들 바치고 하지 마세요. 그것은 그쪽이 할 역할이에요. “그러면 목사님 우리의 역할은 뭡니까?”

그냥 사세요. 매일 살면 매일의 역할이 또 다를 거에요. 그냥 다르면 늘 다르게 되고 주름살 찝으면 그냥 찝고 뭐가 또 달라요. 뭐가 하고 싶을 때가 있을 거고 하다가 마음에 안 들게 주저앉으면 주저앉고 그렇지요. 그게 우리의 맡은 역할입니다. 결국 주님은 우리하고 상대하지 않고 이미 누구와 상대해서 그분의 현재가 나로 하여금 주님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 것을 보여주지요. 그 차이난 만큼 사랑하고 감사하는 주의 증인이 되라고 우리에게 이런 일을 주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멀쩡한 세상이 멸망 받을 세상인 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알았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어떻게 살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어떤 일을 당하든지 그곳이 천국인 것을 우리가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