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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충성모
안양20151211a히11장 8절(창)-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 11장 8절에 보면 상당히 많이 알려진 대목이 나와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했는데요, 방금 봤지요.
여기에서 믿음이 빠졌다면 어떻게 됩니까? 아브라함이 믿음이 없다면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갈등했겠지요. 그 갈등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인데 갈 바를 알지 못하면 아예 안 가지요. 왜냐하면 미래가 확보되어야 선택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갈 바를 모르고” 갔다는 것이 히브리서 11장 1절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와 부합이 되겠지요. 한 번 정리해 봅시다. 믿는 자는 미래를 미리 당겨서 정보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고 부르심에 순종하다가 보면 최종적으로 주께서 이끄시는 그 현장(장소)에 도달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갈 바를 알지 못”했지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천국은 인간의 힘으로 갈 수 없는 곳”이 되는 겁니다. “미리 알고 가는 곳은 가짜 천국”이라고 정리될 수 있지요. 천국이 좋으니까 제가 나설게요. 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부리는 하나의 객기, 또는 하나의 ‘오기’ 같은 거에요.
‘오기’와 ‘신앙’의 차이점이 뭐냐? 반댓말입니다. 오기는 자기의 의지가 여기에 작동합니다. “I can do!” 조폭 가훈이라고 하지요. “나는 할 수 있다.” 그런데 ‘신앙’은 반대니까, ‘오기’는 “나는 할 수 있다.”가 되고 ‘신앙’은 ‘오기’와 반대니까 “나는 할 수 없다.”가 됩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오기’를 ‘신앙’으로 보니까 ‘오기’를 ‘신앙’으로 볼 수 있는데 지금 제 말이 이해가 안 될 수 있는데 (여러분들은 이해가 되고요.) “나는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도 나는 간파하고 있다.”, 그리고 “저 천국을 얻기 위해서 이것, 이것을 시도할 용의(성의)가 되어 있다.”
‘그런 마음의 성의가 되어 있다. 성의만 잘 하면 하늘도 감동하겠지’ 하는 이것이 ‘오기’입니다. ‘오기’는 교회에서 거의 99.9%, 거의 100%가 전부 ‘오기’라고 보면 돼요. ‘악바리’, 기어이 방언 해보겠다고 설치는 그런 사람들이 ‘오기’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반대보다 더 나아갑시다. ‘내가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나는 천국에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 내가 이만큼 해냈다는 그것이 오히려 나를 엉뚱한 길로 접어들게 만든다는 거에요. 이게 ‘신앙’이에요.
왜냐하면 “갈 바”를 몰라야 되니까요. 열심히 했는데 가보니 아니더라 이렇게 되는 거에요. 열심히 배의 노를 저었는데 뭐가 보여서 가보니까 지옥이더라 말이에요.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 생활 했는데 가보니까 지옥이더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천국은 처음부터 내가 노를 저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어요. 그러면 여기까지는 안다고 치고 여기에서 더 나아갑시다.
왜 사람은 ‘오기’를 부릴까요? 나는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기 때문에 ‘오기’를 부리는 겁니다. 그러다가 보면 이 오기를 부리는 이유는 나한테 있어요. ‘나는 나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오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신앙’은 내가 할 수 없는 거에요. “I'm nothing.” 나는 아무것(nothing, 무)도 아닌 거에요. 그러면 신앙의 길, 좁은길, 영생의 길로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나는 의미가 있다.”의 반대, 가면 갈수록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가 되는 거에요.
쉬운 예를 들면, 오늘 세 사람이 분홍, 노랑, 병아리색을 입었는데요. 이 분홍빛, 노랑빛, 병아리색 말고 연탄처럼 시커먼 옷을 입으면 거기에다가 글씨를 써도 표가 안 나요. 왜? 배경 자체가 시커멓기 때문에 볼펜으로 써도 표시가 안 나지요.
그런데 노란색, 병아리색, 하얀색 같으면 조금만 써도 표가 나잖아요. 그러니까 사람이 오기를 부리는 이유가 티가 나게 되어 있어요. 교인이 하나 더 오면 선교상 받고 발표를 하게 되면 박수소리를 듣고 뭔가 티가 나는 반면에 신앙은 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신앙이 좋은 점은 살이 찐다는 거에요. 배짱이 편해요.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초조하지를 않아요. 내 배 째라에요. I'm nothing이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서 아무것도 안 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나를 알아줘.” 하는 것이 없어요.
그래서 신앙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only(오직)”가 돼요. “오직 나만, 홀로”가 돼요. 그런데 홀로가 될 때 비로소 발견되는 것이 있는데 홀로 있어서 내 주위에 내 맘을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비로소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회생활하다가 친구를 많이 사귀게 되면 홀로 있다는 것이 정상이 아니라고 여기고 친구가 많으면 이것이 주의 축복인 줄 알고 신나게 밤이 새도록 10시간 동안 눈썰매 타고 놀지요.
그렇게 되면 주님과의 동행은 까맣게 잊어 버립니다. 여러분 ‘피노키오’라는 동화를 알지요? 원래 피노키오가 목각인형인데 천사가 와서 목수가 아들이 없다고 아들을 하나 줬는데 말을 안 듣지요.
왜 학교 갔다가 바로 집에 오지 않았는가 하면 놀이공원이 있어 가지고 친구들하고 논다고 집에 오지 않았던 거에요. 거기에다가 거짓말까지 하니까 신기하게도 세상에... (그런 코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코가 있다면 사람들 지금 코가 다 커졌을 거에요.) 심리학에서 사람들은 하루에 보통 여덟 번 거짓말을 한대요. 여덟 번이니까 슥슥 늘어나서 전부 다 코에 걸려서 못 살 거에요.
아빠하고 있었어야 되는데 왜 친구하고 있어가지고 아빠의 명을 어겼느냐고 이야기하지요. 똑같은 거에요. 주님과 함께 있으면 자연적으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게 돼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갈 바를 아는 오기만 충만한 자들이고 신앙인은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모습으로 증언이 되어야 되기 때문에(증인이기 때문에) 이 신앙인을 호응해주고 같이 따라올 친구들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다 떨어져요.
그런데 유집사님은 왜 그렇게 친구가 많은지 모르겠어요. 복음을 알면서도 왜 그리 친구가 많은지 모르겠어요. 물론 예의상, 사회 관계상 만날 수는 있는데 건성으로 만나게 돼요. 왜 그런가 하면 대화를 해보면 들을 것도 없고 배울 것도 없고 그저 갇혀있는 것만 이야기해요.
이 세상은 갇혀 있잖아요. 갇혀있으니까 환기가 안 되고 그러면 냄새가 나요. 문을 열어놔야 돼요. 갇혀 있으면 공기의 순환이 안 돼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 냄새나는 세상에 갇혀서 전부 다 썩은 냄새를 피우면서 살고 있습니다. 환기가 안 됩니다.
외부에 “창”이 없어요. 그래서 오늘 강의 제목을 제가 “창(window, 창문)”이라고 하고 싶어요. (컴퓨터에 보면 나오지요? 제목이 나중에 바뀔 수도 있어요. 내가 지금 정한 것이라서요.)
성경 전체가 직사각형으로 되어 있잖아요. 옛날에는 두루마리라서 둘둘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직사각형으로 한 번 꾹 눌러보세요. 그러면 납작한 것으로 되지요? 납작해버리면 이것은 유리판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유리판이 여기에 있다면 이 성경 자체는 천성과 지상 사이에 있는 납작한 창이 되어 버리지요. 창이 되는 겁니다. “창”의 특징은 시간이 중지된다는 겁니다. 한꺼번에 다 봐야 돼요.
예를 들면 3, 4살 어린애들 가지고 노는 퍼즐이 있잖아요. 다 맞추면 백설공주 그림도 나오고 인어공주도 되고 하는 것 말이에요. 이것 맞추는 것(과정)을 동영상으로 찍어보면 애들이 앉자마자 정신 없이 밥도 안 먹고 그냥 한다 말이지요.
그런데 퍼즐이 처음에는 전부 다 미완성으로 더덕더덕 부분이 되어 가지고 무슨 그림인지 그 그림의 이미지가 잘 나타나지 않다가 나중에 마지막 퍼즐을 딱 끼우면 전체 그림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그 그림은 조각, 조각의 결합체이지만 전체적인 그 그림의 이미지는 가져와 보면 전부다 스톱이 되어 있고 그것은 아침에 봐도 다음날 봐도 인어공주고 한 달 후에 봐도 인어공주고 그대로 있지요?
그래서 우리 인생은 내가 혼자 있을 때는 시간이 흘러요. 왜? 우리는 늙어가니까. 나만 늙어갑니까? 친구도 늙어가고 또 바쁜 일이 생기면 딴 일하느라고 바쁜데 전체 윈도우, 창 안에서 보게 되면은 창 안에서 바쁘게 놀아도 (설쳐대다가 어느 날 죽어버리면 그만이고 또 손자가 태어나고 백 날 해도) 노는 마당이 성경의 범위 내에서만 노는 겁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약속의 범위 내에서 논다고 합니다. 오묘한 것은 하나님께 있고 너희는 오묘한 것에 제한되어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이미 우리가 노는 마당은 창으로 테두리 친 그 안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동서남북’이라고 하는데 스가랴에 보면 동서남북 저 구석까지 줄자를 가지고 재는 분들이 있어요. 이들을 네 천사라고 합니다. 이들이 정해버려요. 그러니까 인간은 천사가 구획해놓은 마당에서 잠시 놀다가 본인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려요.
그런데 같은 마당에서 노는 사람은 어떻게 보는가 하면은 김영삼은 88세에 김대중하고 저희들끼리 정치하는 게임하다가 죽었거든요. 그랬을 때 같은 마당에 있는 옆 사람은 김영삼이 죽으니까 어디로 가는지 모르거든요. 판대기기 때문에, 윈도우거든요. 놀다가 늙어죽었다는 것만 알지 죽어서 그 다음에 어떻게 됐는지는 몰라요.
그래서 드라마는 사람이 죽는 것을 테마로 하지 않고 중간 부분을 테마로 잡아요. 남녀 둘이 연애하다가 결혼하면 드라마는 끝이 납니다. 결혼하고 난 뒤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더라인데 오래 살았지, 영원히 살지는 않았거든요.
머리가 파뿌리가 될 정도로 오래 살다가 ‘님아 요단강을 건너가지 마오’ 해도 한 사람이 가고 난 뒤에 어디로 갔는지 압니까? 이게 오늘 나온 말씀처럼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거에요. 뭐 천국 갔다느니 지옥에 갔다느니 하는데 이 윈도우 판에서 인간들이 지어내지 않으면 천국인지 지옥인지 모르는데 인간들이 이미 각 종교마다 지어낸 거에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이 판대기에서 지어낸 천국, 지옥은 전부 다 가짜라고 보면 돼요. 왜냐하면 진짜 신앙인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간 곳이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천국을 미리 알고 가게 되면 갈 바를 알잖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는 오기가 작동되지 신앙이 작동되는 게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걱정되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잖아요. ‘그래도 미리 천국을 알고 거기에 대비하는 식으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잖아요. 그러면 되잖아요. 마태복음 25장에 기름 준비를 하라고 했으니까 기름을 마음껏 준비하면 어떻습니까?’라고 하는데 오기에서 신앙으로 넘어가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신앙에 예속되어야 되지, 오기에서 한 번 신앙으로 넘어왔다고 신앙에서 또 오기가 나와버리면 오기가 나오는 이 신앙의 넘어섬은 가짜 신앙입니다.
오기에서 신앙으로 넘어왔잖아요? 그러면 신앙에서 신앙으로 나와야 돼요. 그런데 왜 오기에서 내심하다가 ‘이제 주의 은혜로 합니다.’ 하면서 믿는 척했는데 또 오기가 나와요. ‘내가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지 이번에 안 지키면 벌 받고 지키면 복 받을 거야.’
이렇게 오기가 또 나오는 이유는 오기에서 신앙으로 옮길 때에 그냥 이 몸 그대로 옮겨서 문제에요. 여기에서 반드시 죽고 옮겨야 돼요. 나(옛사람)는 반드시 죽고 새사람으로서 나가야 되는데 새사람은 옛사람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새사람의 바탕은 저 앞서 기다리고 있는 주님으로부터 새사람이 부여돼요.
옛사람에서 정신 차려서 새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옛사람은 죽음으로 끝나고 예수님으로부터 부여받는 새로운 몸이 새사람이 되는 겁니다. 로마서 6장을 한 번 봅시다. 아까 집사님이 복음 알고 난 뒤에 성경을 안 본다는 말을 듣고 내가 속으로 걱정을 해가지고 성경을 안 보는 것하고 성경을 모르는 것하고 구분할 줄로 압니다. 성경은 안 봐도 성경을 알지요.
1~2절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사람들이 이 대목 해석을 잘 못해요. 제일 어려운 대목이 뭐냐? “죄에 대해서 죽은 우리가”의 뜻을 몰라요.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죄”는 ‘내가 전에 속해있던 상황, 전에 있던 덩어리 전체’를 죄라고 합니다. 그렇게 이해를 못하고 ‘옛날에 내가 나쁜 짓 했던 데’라고 생각한다면 이 해석은 완전히 엉터리 해석이에요.
전에 살던 동네를 죄의 동네라고 합니다. 전에 살던 동네에서 살아있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해 버렸어요. 이미 예수 안에서 산 자이기 때문에 저쪽에서는 죽은 자로 간주해 주시는 겁니다. 딱지 뗐다고 하지요.
처녀가 결혼하면 처녀 딱지 뗐다고 하잖아요. 처녀 생활은 없어요. 이미 기혼녀가 된 겁니다. 누구하고? 예수님하고 결혼했으니까 기혼녀가 된 거에요. 결혼했으면 기혼녀기 때문에 혼자 있는 게 아니에요. 남편이 있는 여자입니다.
그 남편이 있는 여자가 마치 옛날처럼 됐을 경우에는 이걸 가지고 간음한 여인, 에스겔에서는 이 사람을 음녀라고 하고 요한계시록 17장에서도 음녀라고 해요. 더 나아가 버리면 요한계시록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이것으로 스톱하고 로마서 6장만 이야기하겠습니다.
로마서 6장에 보면 “죄에 대해서 죽은 우리가”에 대한 설명을 안 들었다고 치고 여러분들이 이해한다면 “죄에 대해서 죽은 우리가”가 ‘아 옛날에 참 죄 많이 지었어. 술, 담배했어.’ 이런 뜻이 아니라니까요.
옛날에 내가 살던 동네, green grass of home에 살고 있는데 창 저쪽은 주님의 세계에요. 창은 성경이라고 했고요. 창 저쪽에는 주님이 계시고 창은 유리천장이라고 보면 돼요. 그런데 우리는 창 저 너머를 상상해도 가짜고 몰라요. 왜냐하면 창 너머에 있기 때문에 몰라요.
우리는 창 너머에서 삐져나오는 것들만 알지 창 너머의 세계는 모릅니다. 신문지가 여기 있는데 이것이 윈도우, 창, 성경입니다. 오묘한 것은 감추어져 있고 나타난 것은 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주먹을 쥐고 이렇게 밀어버립니다.
그러면 불룩 튀어나오겠지요? 불룩 튀어나온 쪽에 아브라함이 걸려든 거에요. 그러면 아브라함이 주님에게 접촉할 때 아브라함은 무슨 세계를 접하고 있느냐 하면은 남들이 도저히 내가 설명해도 이해가 안 되는 세계에 이미 신분이 소속이 되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노는 그라운드에서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자리가 바뀐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주변 사람들, 심지어 아내한테 설명을 해줘도 저쪽이 납득이 안 되네. 나는 이해가 되는데 저쪽이 납득이 안 돼요. 설명이 안 돼요.
그러니까 친구가 떨어질 수밖에 없지요. 친구는 대화로 형성되는데 만나가지고 입 딱 다물고 있으면 무슨 친구입니까? 나발나발 “그래 맞다, 얘.” 이렇게 되어야 두 시간, 세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고 커피 한 잔 마시고 인상써가면서 저녁 할 때까지 오래 눌러 앉아 있는데 이게 이해가 안 되지요.
그러면서 아브라함은 옛사람으로도 있어 봤기 때문에 친구들 하는 말이 평가가 되지요. 속으로 ‘그래 니 논리는 저렇게 끝나는 거야.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결국 자식 자랑 나오네.’ 이제는 그들의 수를 알아요. 이야기하는 수를 알고 바둑으로 하면 급수를 알아요.
본의 아니게 상수 정도가 아니고 초월수가 됐어요. 이건 내가 I.Q.가 높아서 (똑똑해서, 좋은 대학 나와서) 그런 것이 아니고 밀어붙이는 것이 있어요. 주먹으로 가위게, 바위게, 보자기게 가위, 바위, 보 하는 식으로 자꾸 밀어붙이는 거에요.
이 초월의 부딪힘과 만남이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지만) 신약에 오면 노골적으로 이게 바로 “상처”입니다. 내 창자국과 내 못자국. 도마가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놀란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내미는 상처난 못자국. “너 같은 인간 때문에 이렇게 피를 흘려야 너 같은 인간도 하나님 나라에 올 수 있다.” 이 상처 없는 구원은 없다.
그러니까 구원 받은 사람은 뭘 자랑하겠습니까?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상처가 삽입되어서 이 상처의 효과(예수의 피)로 친구들아, 내가 너희들이 알지도 못한 다른 세계에 질질 끌려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어떤 때는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요?
욥의 세 친구와 욥의 차이가 바로 그거에요. 이것은 기도하고 전도하고 선교하고 찬양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찬양해서 소속권(티켓)을 얻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주님이 내 허가도 없이 내 인생에, 열심히 나는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 만들고 살고 있었는데 주께서 쳐들어 온 거에요.
내 허락도 없이 내 인생에 막 밀고 들어온 겁니다. 이건 덤프차하고 똑같은 거에요. 식당하고 있는데 덤프차가 “급발진이었습니다.” 하고 밀고 들어온 것처럼 주님의 급발진이 내 인생의 중심부를 완전히 파괴시켜 놓아버렸어요.
그래서 알아요. 우리는 친구가 소중하고 다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특히 식구들이 소중한 것을 압니다. 그런데 그것도 알고 그들이 모르는 것도 또 압니다. 곱빼기로 압니다. 양쪽 다 압니다. 감사한 일이에요.
자장면만 있는 세상에 “너 짬뽕 먹어봤어? 니가 짬뽕 맛을 알아?” 그런데 그들은 “니가 먹는 짬뽕은 우리 동네에 없다. 그래서 너는 미쳤어. 어느 교회에 가도 너 같은 소리는 안 하더라. 그러니까 니가 이상한 데에 빠졌어.” 이렇게 되는 거에요.
아브라함이 이랬는데 말이에요.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했어요. 교회에서 설교할 때에 목사가 “이겁니다.”라고 설교할 수 있어요. 하지만 “여러분 각자 각자가 가는 길에 여러분본인이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은 매일같이 새롭게 느껴져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 상처의 깊이는 점점 더 깊이 내려가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상처가 딱지 정도로 머물면 안 돼요. 인생을 살아가면서 십자가 지는 데까지 성령께서 계속해서 이끌어 가실 거에요. ‘아, 아무것도 아닌 나를 이렇게 극진히 대우해주셨구나. 이게 바로 사마리아 강도 만난 사람에게 했던 그 사랑이고, 탕자에게 옷을 입혔던 아버지의 사랑이 바로 이거구나. 아가서에서 싫다고 하는 여자를 좇아와가지고 기어이 자기 사람, 자기 신부를 만드는 그 솔로몬 왕의 집요함이 바로 이 집요함이구나.’
이것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하나님이 내뿜는 질투의 능력이에요. 얼마나 우리만 사랑했기에 ‘나는 네가 다른 사람과 사귀는 것을 원치 않아.’라고 하겠어요? 이것이 신앙에서는 아까도 말했듯이 모든 일에 감사로 이어지는 거에요.
저기 멀리 타국에 계신 분이 서원기도에 대한 질문을 우리교회에 했지요. 거기에 제가 답변을 해놓았습니다. 그냥 주는 대로 사시면 됩니다. 맹세하지 말고 주는 대로 감지덕지 하면서 살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인생을 요령부리지 말고 꼼수부리지 말고 막 살면 된다고 하는 겁니다. 왜? 주께서 막 살도록 방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 산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 옛사람 쪽에서 막 사는 것은 윤리, 도덕인 반면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나라에 가기 때문에 거기에서 제시하는 막 사는 것과 제대로 사는 기준은 그때에 가서 새로 주어져야 되지 내가 판정을 내리면 안 돼요.
‘나에게 지금 주의 말씀이 내렸다.’라고 판정내리는 것은 오버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오기에서 신앙이 되었으면 신앙이 나와야지, 신앙이 되고 난 뒤에 신앙적 오기가 또 나오면 안 된다는 말이죠.
처음에도 갈 바를 알지 못했고 내일 되어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모레 되어도, 내년이 되어도 계속해서 갈 바를 알지 못해야 돼요. 주께서 매일 주시는 숙제가 무엇이 될지 우리는 알지 못해요.
사람이 미리 예상을 할 것 같으면 주식 부자가 누가 안 될 거에요? 아무도 주식해서 미리 알아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주식은 그냥 던져놓아라 하는 거에요. 주식, 펀드만 던져놓지 마시고 여러분 자신도 주님한테 던져놓아 버리세요.
수지맞는 장사입니다.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이 관리하지 말고 그냥 던져놓으세요. 119 소방대원이 와서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질 때에 힘을 뺄 때 쉽게 건집니다. 본인이 살려고 악을 쓰게 되면 건지는 사람이 더 힘들어 지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해서 감으로써 오기와 신앙의 차이를 보여주었습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신앙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는데 바라는 것들의 실상은 미리 아브라함의 등 뒤에서 차고 들어가서 주먹으로 팍 쑤셔버리면 종이가 불룩 튀어 나오지요.
밀고 들어온 내 영역은 주님이 그만큼 밀고 들어왔기 때문에 내 옛사람이 그 부분만큼은 양보해야되고 포기를 해야 되는 겁니다. 뭔가 밀고 들어온 그 면적만큼 우리는 많은 것을 버릴 수밖에 없어요.
친구 만나는 것도 조금 줄이게 되고 술 먹는 것도 소주 한 병 먹다가 반 병으로 줄이게 되고 화를 내는 것도 화를 조금 덜 내게 되고.. 인생에 대해서 양보, 양보가 계속 이어집니다. 전에는 계속 막 따지고 들었는데 이제는 ‘잘 먹고 잘 살아라. 이 지옥에서.’라고 하며 그냥 양보하게 됩니다.
귀순용사가 탈북해서 한국에 왔다면 그가 한평생 해야 될 일은 북한 비난하는 일이에요. 그렇지요? 정말 옛사람에서 새사람이 되었다면 우리는 내가 지니고 있는 그 성질이 전에 내가 속했던 데에서 다 스며들어 온 거거든요.
귤이 딱딱해보이지만 까보면 안에는 알알이 자기들 편밖에 없잖아요. 전부다 한 통속이에요. 그 한 통속 중에 하나가 나였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들을 비난한다는 것은 그들이 잘났다 내가 못났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내 속에 남아있는 나의 옛사람을 내가 날마다 비난하는 거에요.
이게 새사람의 특징입니다. ‘내가 그런 성질을 갖고 있었습니다.’라고 자백하는 겁니다. 이것이 출-애굽이죠.(저는 일부러 애굽에서 탈출했다는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을 하나 그었습니다.) 이미 탈출한 사람만 애굽에 대해서 언급할 자격이 돼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서 언급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이미 탈출이 된 사람만 해당이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구원 받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은 백날 해봐야 구원이 안 돼요.
구원이라는 것은 이미 탈출이 된 사람이 지난 날을 설명하면서 이미 구원이 되었음을 증명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내용은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회상하는 거에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무섭지요? 그런데 그것을 느긋하게 long long ago, 옛날 옛적에 그런 기분으로 볼 수 있어야 돼요.
앞으로 될 일조차도 회상에 포함이 되어 버립니다. 왜? 주께서 그렇게 해나가실 거니까요. 우리는 누구하고 한 패 먹었어요? 아브라함처럼 주님과 한 패 먹었기 때문에 ‘그래, 내가 속해있던 세상이 저런 세상이었어.’라고 느긋한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귤 까먹어 가면서 요한계시록을 공부합시다.
바짝 쫄아가지고 이건 해서는 안 되고 666이 어떻고 괴물이 나오고 무서워. 하지 마시고 지난 밤 꿈 이야기하듯이 어젯 밤 꿈 속에서 난 누굴 만났어 그렇게 하듯이..
그렇게 해서 내가 무언가 주의해야 되고 내가 뭘 안 함으로써 구원 받겠다는 것, 이것이 오기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뭔가 어드밴티지(마일리지)를 쌓을 수 있다는 이것이 신앙의 세계가 아니고 오기의 세계,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보여줍니다.
지금도 이런 구원 받지 못한 공통적 성질이 우리 속에 찌꺼기처럼 계속 올라오고 있어요. 그냥 성경을 볼 때, 말씀 들을 때는 안 그런 것 같은데 동창회에 나가서 누가 싸운다거나 시장에 가서 콩나물을 살 때는 옛사람이 또 튀어나와 버려요.
분명히 우리는 “주의 것”인데 “주의 것”이 자꾸 “나의 것”으로 전환되어 버려요. 내 자식, 내 남편, 내 가정은 철벽입니다. 하나의 성입니다. 이것 넘어오면 안 돼요. 이것을 사적(사유)공간이라고 합니다. 사유공간이 뭐냐하면 절대적 공간이에요.
마태복음에 보면 이것을 깨버려요.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사랑하지 마라. 가장 깊숙한, 이곳 만큼은 제발... 하는 그곳을 주께서 전기톱을 가지고 두두두둑 해가지고 벌목하듯이 쫙쫙 잘라버립니다.
내가 온 것은 화평을 주려함이 아니고 불화를 낳기 위함이다. 그 불화를 낳는 중심지점이 가정입니다. 어제 수요일날 “여자”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었습니다. 설교들으시는 분은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여자는 판을 생각하는데 남자는 자기를 일단 중심에 놓고 여자를 보조인(부속)으로 봅니다. 남자를 중심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배필자로 보고 여자는 남자의 살 중의 살이고 뼈 중에 뼈이기 때문에 남자가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여자라는 이름으로 심지로 새겨버렸다는 것이 여자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범죄하고 난 뒤에는 여자의 본래 기능은 없어지고 남자 같은 여자로 다 전환되고 말았어요. 남자가 자기가 되어야 될 이상형이 되어 버려서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의 것으로만 여자가 밥 빌어먹고 살라는 것이 보편화 된 세상이 되고 말았어요.
어쨌든 힘이 있는 곳에 붙어야 목숨이 약간은 더 연장된다는 그런 인식들이 있는 거에요. 옛날에 농토가 좁은 집에는 여자가 대주주한테 시집가야 돼요. 그래야 밥이나 먹는다고요. 애조절도 안 되었잖아요.
그래서 애는 생기는 대로 낳아버리고 그 애 중에 여자가 있으면 시집가는 것이 아니고 그냥 팔려가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장 시어머니가 “우리 집안은 이런 집안이다.‘ 해가지고 그집 사람을 다 만들어 버리고 친정과 화장실은 멀리한다고 해가지고 시집 왔으면 못 가게 만들지요.
그래서 노래도 있잖아요. ‘고추, 단추 맵다해도 시어머니같이 매우꺼나’ 그 시집살이 하는 것의 뜻은 이제 다시 친정은 잊어버려라 하는 거에요. 결국은 노동력 확보에요. 왜냐하면 옛날에 농사를 지을 때는 대규모로 했거든요. 모내기할 때도 대규모로 해야 되니까요.
그런데 지금 세대 차이가 나는 이유가 농경 시대의 인식을 가진 사람에게 산업 시대, 수출 물품에 맞춰서 잔업을 해야 되는 시대가 안 맞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윈도우를 다시 보게 되면 이 세상에서는 노는 가락이 시대에 따라서 세대차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대화가 안 되지요. 이 말은 인간이 갖고 있는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시대가 주입시킨 거에요. 그래서 세대차가 나는 거에요. 시어머니는 자기가 잘났다고 하는 거에요. 자기 젊을 때에 맞는 이야기를 이미 늙어버려서 경제 구조가 다른데 똑같이 적용시키려고 하는가 말이지요. 산업시대하고 농경시대하고 구조가 다르거든요.
지금은 어떤 시대인가 하면 남의 여자가 되었으면 자식을 낳아야 되는데 반 이상은 자식을 안 낳겠다는 거에요. 우리교회의 청년한테 물었어요. “누구하고 결혼할 건데?” “저 결혼 안 할 건데요.” 저는 깜짝 놀라지도 않았어요. ‘아직 덜 답답하구나.’ 이렇게 생각했지요.
이런 모든 것을 총괄해서 죄라고 하고 그 죄에 대해서 죽은 자,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합했다는 뜻)를 받은 자는 예수님이 살아있을 때에 같이 산자로서 규정을 받아요. 그래서 죽어가는 게 죽어가는 게 아니고 우리가 죽어가는 것이 사라지는 거에요.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모습이 우리가 늙어가는 모습이에요. only(오직) 성도에게만 그래요.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가 죽어가는 것이 아니고 쉬러 가는 거에요. 아이고 이제 허리 조금 펴볼까? 이게 죽는 거에요. 아이고 짜부둥해. 웬 비가 오려나? 이게 장례식이에요. 안방에 베개하고 누워볼까? 자는 잠에 그냥 간다. 이거는 푹 주무시는 겁니다. 이제는.
깨어날 때는 두 번 다시 이런 썩어가는 몸을 입지 않아요. 예수님이 승천하신 하늘의 영광을 입고 기지개 펴고 ‘아, 참 잘 잤다.’라고 할 날이 곧 옵니다. 베리칩 이런 거 아무 소용이 없어요. 온천지에 문신을 해도 괜찮아요.
그래서 우리가 아는 방식에서 우리가 아는 구원 방식을 뺍시다. 요렇게 대비하고 요런 식으로 피해버리면 구원된다는 이것이 이단들이 하는 짓이라는 것을 이제는 구분할 줄 알아야 돼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구원 받는데?”라고 하면 “내가 설명해도 너는 몰라.” “부탁이다. 복음 이야기해줘.”라고 사정하면 그때는 못 이기는 척하고 한 소리하세요. “주님의 상처가, 주님이 흘리신 그 피가 우리 속에 삽입되어서 그것이 우리의 중심이 되었다.” “왜 그런데?”하면, “그 피 속에 새언약의 완성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다.”
새언약의 완성은 약효과의 완성이라고 보면 됩니다. 언약의 완성이라는 것은 더 이상의 추가될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죄 씻음의 알약의 효력이 우리 중심에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하는 사도바울처럼 상처라는 주님의 모습으로 우리 속에 박혀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그런 큰소리를 칠 이유가 있어요.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큰소리 치는 거에요. 이것이 사도바울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의 문제고 또한 바로 아브라함에게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귀순용사의 특징은 옛날 있었던 자기 세계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발설하는 것이 자기가 새사람이 되었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것은 누구를 지목해서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를 지목하는 거에요.
‘내가 이렇게 못됐습니다.’라고 하는 주님에 대한 고백이 내 죄를 아는 그것이, 날마다 죄인 되는 그것이 새사람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죄를 알 때, 죄를 만들어야 됩니까? 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죄를 만들 필요가 없어요. “갈 바를 알지 못”하잖아요. 안 간다는 말이 아니고 계속 윈도우 상에 돌아다녀요. 그러면 누굴 만나겠습니까? 옛날에 내가 좋다고 했던 시츄에이션(상황들)을 만나겠지요?
그러면서 옛날 버릇이 있어가지고 ‘그래 내가 그걸 좋아했었어.’ 하고 다시 그걸 또 그리워하고 좋아하는 거에요. 예수 믿고 술 끊었다고 해봐야 고급술을 아직 못 만나서 그런 거에요. 아죽 고급술, 먹어도 머리 안 아픈 고급술을 만나면 한 잔만 땡기고요. 하게 되어 있어요.
흔히 대중가수들이 예수 믿고 고 하용조 목사 생전에 만나가지고 온누리교회에 가가지고 예수 믿고 새사람 되었다고 간증해서 수입을 얻고 밤무대해봤자 5년, 10년만 지나면 난 두 번 다시 가스펠송만 부르고 찬송가만 부르고 대중가요 안 부른다고 선언했던 그들이 역시 돈은 대중가요를 불러야돼. 라고 나옵니다. 윤항기 같은 사람들..
대중가요를 불러야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거에요. 그러면 대중가요를 안 부른다고 해놓고 왜 지금은 부릅니까? 하면 변명할 것이 많지요. ‘대중가요도 건전한 것이 많습니다. 건전한 대중가요도 안 되면, 이미 구원 받았기에 자유롭게 안 건전한 대중가요도 부를 수 있습니다.’라고 또 핑계를 대지요.
그러니까 어디에 가봤자 돈 앞에서는 다시 옛날 본색이 유감없이 다 나오게 되어 있어요. 지금 가족이 여유가 있을 때는 괜찮지만 가족 간에 아들이 만약에 빚 냈는데 사업 망했다고 하면 그때는 눈에 뵈는 게 없지요.아들이 결혼했어도 남편 몰래 집 담보해가지고 갖다 주고 ‘차라리 내가 굶어죽는 게 낫지 니가 아픈 것은 내가 못 참겠다.’ 이것이 어미(여자)의 심정 아닙니까?
그처럼 이 세상에 모든 우리의 죄에 대한 그것은 주께서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가는 곳마다 특징이 뭐냐 하면은 ‘내가 이런 죄 속에서 그동안 이게 전부인 줄 알고 살았구나.’ 하는 것을 날이면 날마다 그걸 깨닫게 되는데 그렇게 될 때에 십자가의 은혜가 더욱더 고마워지지요.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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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충성모
안양20151211b히11장 8절(창)-이 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했다”는 말은 본인 입장에서 목표는 없어요. 다만 본인 입장에서 목표라는 것이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본인이 목표를 안 가지고 계속 주님은 목표를 아시고 이 윈도우(창) 같은 세계에서 계속 떠도는 거지요.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나와가지고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까 아니면 한 달 반만에 갈 거리를 40년간 떠돌았습니까? 한 달 반만에 갈 거리를 40년간 떠돌았습니다. 그건 들어갈 만한 인간이 안 되었다는 겁니다. 더 깨져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40년만에 갔는데 그것은 모세가 늙어죽기를 기다린 거지요. 결국 모세는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갔습니다. 왜 모세가 못 들어갔느냐 하면 모세의 자리가 하나님과 백성들 중간에 있는데 이걸 중매자, 중계자, 매개자, 중보자적 역할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불신앙 가진 것을 모세가 담당을 해야 돼요. 그래서 이것으로 모세와 같은 동시대의 사람들은 다 못 들어갔다고 보면 됩니다. 모세가 못 들어감으로써 모세 후대는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에요.
우리가 천국에 간다는 말은 우리 때문에 못 들어갈 사람들이 발생되었다는 이야기에요. 짝을 이루거든요. 양말처럼, 장갑처럼.. 한쪽이 천국 갔다는 말은 연계되어 있는 다른 사람은 지옥에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천국가고 지옥간다를 본인이 선택할 문제가 아니고 주님의 선택이 나타나는 현장에는 구원 받는 사람만 나타나는 게 아니고 주님이 지옥에 보내기로 작정한 사람도 같이 현장에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짝을 이룹니다.
그런데 천국 가는 사람은 핍박을 받게 되어 있어요. 괜히 이유도 없는 핍박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저쪽 사람은 “천국 가면 다야?”라고 하는 식이지만 우리 쪽 입장에서는 “지옥 가면 다야? 지옥 가는 것도 어떤 권리야?” 그런 다툼이 있어야 되지요.
제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 하면은 아브라함을 선택할 때 아브라함만 달랑 구원하려고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봤어요. 복의 근원은 복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복과 반대가 되는 저주가 나오는 근원도 복의 근원과 일치가 돼요.
복의 근원이 곧 저주의 근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복음을 전파하게 해요. 그러면 그 현장에 복음을 반대하는 속성들이 드디어 본색을 못 이기고 나불나불 대는 현장으로 만들어 버려요.
뉴질랜드에 어떤 목사님이 새벽기도에 복음을 전하고 내려오게 되면 당회장이 “왜 복음을 전하느냐?”고 그 목사님을 붙듭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그렇지, 그렇지 않으면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아요.
복의 근원이 곧 저주의 근원입니다. 복음을 안 전했으면 비난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예수님께서 복음을 안 전했으면 존대받았을 거에요. 그런데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결국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살해당했습니다. 제자들은 어떻게 했어요? 도망갔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잡혔고 죽었고 제자들은 도망갔다 그것으로 모든 이야기들이 끝났습니까? 그렇게 되어 버리면 사도행전이 안 나오지요? 그것으로 끝난 줄로 알았더니만 예수님이 받았던 성령을 이번에는 인간들이 받아요. 사도들이 받아버려요.
베드로가 먼저 받고 나중에 사도바울에게 성령이 오니까 요단강에서 예수님께서 성령 받고 했던 그 일을 베드로가 반복하게 되고 사도바울에게 성령이 임해버리니까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을 사도바울이 반복하고 베드로에게 일어난 일도 같이 반복이 되어서 사도바울에게 일어나는 거에요.
그러면 사도바울에게 임했던 그 성령이 오늘날 우리에게 임해버리면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일, 베드로에게 일어났던 그 일, 사도바울에게 일어났던 그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겁니다. 이것은 젊은 아이들이 놀이하는 것 있지요? ‘나처럼 해봐라, 이렇게~~’하고 노는 것 말이에요. 크리스마스 날 밤새도록 화투치면서 치맥(치킨하고 맥주)하면서 놀이하잖아요.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주님이 하는 그 놀이판에 말려든 거에요. 예수님이 했던 것, 베드로가 했던 것, 사도바울이 했던 것, 우리 선배들이 했던 것을 우리가 또 하고 있다고요. 그런데 왜 그런가? 같은 윈도우기 때문에 그래요. 뒤에서 주먹이 날아와서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증인이 되게 하는 그 원리가 그대로 우리에게 반복이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지나간 단회적 사건이 아니고 반복이다. 왜? 이것이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통 이 세상에서 사건은 일어날 때 그때만 사건이고 그 뒤에는 해석이 따라옵니다.
이순신 장군 사건은 1592년 그때 뿐이지요? 서양에서는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사건이라고 할 때는 반복이 안 되는 것을 사건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5·16 사건이 반복 됩니까? 5월 16일이 되면 무슨 일이 또 일어나는 겁니까? 아니지요? 그러니까 사건은 한 번 일어나면 그냥 끝나 버리는 걸로 봅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안 믿는 가정 같으면 기일이 되면 뭘 합니까? 아버지를 살렸다가 또 죽입니까? 어떻게 합니까? 제사를 지내지요.
제사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해석이지 그 사건의 반복은 아닙니다. 해석이잖아요. 그런데 해석을 해버리면 신앙이 되지 않고 이게 추억이 되어 버려요.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을 기억하거나 추억하면서 믿는다고 우기게 되는 겁니다.
그 사건 이후에 나만 살아있을 때는 추억이 되고 기억이 되는데 그 사건 당사자가 나와 더불어 이 시대에 함께 살아있으면 이건 추억이 아니고 그 사건에 잠식이 되고 잠기게 되겠지요.
그러면 성도가 살아가는 모든 일거수 일투족은 십자가를 반복해서 효과있게 들추어내고 그 십자가를 실현시키는 그 중에 우리가 말려든 겁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게 십자가 증거하라고 말려든 거에요.
왜냐하면 성령이 십자가의 영으로 오기 때문에 동일한 성령을 받아서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십자가를 반복하게 됩니다. 갈라디아서에 보게 되면 거기에 사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고난을 반복하는 것, 십자가를 반복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주변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핍박해서 일어난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잖아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마다 주변 유대인들이 이해했어요 못 했어요? 못 하지요. 그러니까 고난을 반복해서 받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 복음을 전할 때 12년 동안 병든 자나 문둥병자, 죄인들이나 중풍병자가 나왔잖아요. 그처럼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게 되면 분명히 안 믿어야 되는데 믿고 나오면서 “나 죄인입니다.”라고 하지요?
문둥병자는 예수님께 나올 때 “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잖아요. 마찬가지로 사도바울이 병을 낫게 하지도 않고 복음만 전했을 뿐인데 “죄인이 여기 있습니다.”라고 나오더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사도바울의 능력이 아니고 예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고 사도바울이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으로 지금 살아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단독으로 살면 안 되겠지요.
주어진 모든 것, 강아지부터 해가지고 전부 다 십자가에서 주신 은혜와 연결된, 뒤에 십자가와 줄이 닿아져 있는 일들이 일어나서 우리가 속해있는 인생 자체가 십자가 사건의 반복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아브라함 시대도 그런가’ 하고 물으면 아브라함 시대도 그래요. 9절에 봅니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라고 했지요.
이삭과 야곱에게 아브라함이 유산을 준 것이 있는데 그 유산이 뭐냐 하면 “동일한 약속”을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준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안에 있는 주님이 이삭에게 그 약속을 준 겁니다.
약속의 내용은 갈 바를 알지 못한 것을 주었지요.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을 줬다는 말은 “오기”를 버리고 “신앙”으로 나아가게 하는 거에요. 그럼 “오기”는 뭐냐? ‘내가 열심히 하게 되면은 약속은 내가 지킬 수 있고 나는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잠을 자는데 꿈에서 천사가 왔지요? 야곱은 천사하고 자기하고 한 패인 줄 알았지 적이라고 생각을 못했습니다. 창세기 32장에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천사하고 한바탕 싸웠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군대, 사다리를 타고 내려온 천사였다는 사실이에요.
결국 천사는 나를 죽이고 내 안에 있는 아브라함(이삭)의 약속을 외부로 끄집어 내는 그 사명을 띠고 하늘에서 내려왔던 겁니다. 야곱은 죽이고 이스라엘로 끄집어 내는 것, 내 속에 주님의 것을 끄집어내는 것이 성령의 역할입니다.
아무개, 아무개의 이름은 죽이고 그리스도의 이름, 새사람으로 살게 하는 것이 천사의 임무입니다. 조금 어렵게 이야기해볼게요. 아담이 이름을 지었지요.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 그 이후에 사람들은 이미 붙여진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되지요.
이름이 있는 이 세계를 ‘상징계’라고 합니다. 이름이 있다는 말은 의미가 이미 확정되어 있지요. 개, 귤, 잔, 떡이 무슨 뜻인지 압니다. 떡을 가지고 오라고 하는데 책을 가지고 가면 이미 치매 말기지요. 이때는 보통 치매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떡과 책은 단어가 다릅니다. 불러주는 이름이 달라요. 상징의 세계는 기존의 의미로 정돈된 세계, 질서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상징적 세계에는 단점이 있어요. 그것은 이 붙여진 의미 안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상징적 세계에 있는 이름은 태어나면서 내 이름을 내가 붙였습니까? 누가 붙였어요? 우리 부모가 내 이름을 지어줬잖아요. 그러면 나보다 내 이름이 우선권을 갖고 있어요. 물론 이런 일은 있어요.
나는 이름을 만들지 않았는데 ‘김무식’이라는 이름을 지어놓았다고 합시다. “아버지, 왜 제 이름을 ‘무식’이라고 지었습니까?” “점쟁이 말이 그래야 오래 산다고 해서 그랬다.” 비굴하게 오래 사는 것이 행복이겠습니까? 그래서 이름을 ‘유식’이라고 바꿨지요.
이렇게 이름을 바꾼 경우는 있지만, 그래 봤자 친구들은 전부 다 내 이름을 ‘무식’으로 알고 있는 이상, 내 혼자 이름 바꾸고 명함 바꾸는 데만 애를 먹는다 이 말이죠. ‘나’라는 것은 내가 따로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갇혀있는 세계의 일부로서 밥을 하나 추가하듯이 튀어나온 거에요.
따라서 내가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야 돼요. 그런데 요구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나에게 의미를 붙입니다. 어떻게 의미를 붙이는가 하면 기존의 사용하고 있는 단어와 개념들을 같이 사용함으로써 그 의미를 수용하게 만들지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여기에 길들여졌으면 이런 의미가 안 통하는 세계에 이런 마음가짐으로는 갈 수가 없다는 이 말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런 의미가 있는 사람에게 가정교사를 보내서 특별한 가정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인생을 실패로 끝나버리게 해요. 내 뜻대로 안 되게 한다 이 말이죠.
내 뜻대로 안 돼버리면 그 언약의 사람(성도)은 하나님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나한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예를 들면 야곱이 요셉을 되게 사랑해서 옷을 해입혔잖아요.
사랑하지 않아서 옷을 안 해입혔으면 형제들이 그렇게 질투하지 않습니다. 유달리 11명을 제치고 요셉만 집중해서 사랑하기 때문에 형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그 애를 죽이려고 했지만 르우벤이 봐줘서 죽인 놈을 살려가지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노예 장사꾼에다가 팔아먹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도 없고 이제는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다는 말은 형한테 돈을 지불했다는 말입니다. 돈을 지불했으면 요셉은 사람이 아니지요? 돈값을 빼내야지요. 돈을 누구한테 주고 데려왔기 때문에 이 사람은 자기 소유의 가구가 되는 겁니다.
요새 말로 하면 야구로 치면 요셉은 FA시장에 나온 거에요. FA시장 압니까? 야구에서 자유시장, 8년 동안 구단에 있다가 구단에서 놔주게 되면 이제는 메이저 리그로 가든지 일본에 가든이 니 마음대로 니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 야구의 자유시장이라고 하는 겁니다.
자유시장이 되게 좋아보이는데 자유 노예시장이라고 보면 됩니다. 강정호, 유현진, 노예시장이죠. 성적이 안 되면 그 다음에는 짤리지요. 그런데 그런 강정호, 유현진, 추신수가 대단해 보이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이게 자본주의를 그대로 반영해주는 겁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래요. 여자가 집에 와서 밥도 안 하고 맨날 돌아다닌다고 하면 언제 자유시장에서 짤릴지 몰라요. “나 너하고 못 살겠다. 이혼하자.” “이혼 안 해?” 이혼 안 하면 강제로 이혼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람 피워버리면 됩니다. “이래도 이혼 안 할거야?” 억지로 헤어지기 위한 징벌성 바람.. 그러면 4주 냉각기간 거쳐가지고 사랑과 전쟁이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도장 찍고 갈라서는 거지요.
이삭과 야곱의 경우는 지금의 우리의 경우와 똑같은데 아브라함에게 관여했던 주님의 관여가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그 인생에 주님께서 침입을 해버려요. 그렇게 되면 기존의 상징세계(질서세계)에서 다른 세계, 상징화 되지 않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 언어로 미쳐 그 의미를 다 담을 수 없는 세계, 말할 수 없는 신비의 세계로 주께서 이끌어 내시는 겁니다.
이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날 우리를 보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성경을 우리가 해석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에요. 어떻게 해석되어지는가 하면 오늘 강의 제목을 이걸로 했으면 좋겠어요. “연동해석”, 같이 연결되어서 움직이는 것을 “연동”이라고 합니다. 함께 움직이는 것.
성경은 내가 있고 성경이 있어서 내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이 있는 세계와 내가 있는 세계가 만남을 통해서 연동해서 같이 날마다 새롭게 새롭게 해석되는 거에요. 똑같은 구절이고 똑같은 찬송가인데 어떤 때 부르면 은혜가 되고 어떤 때 부르면 잠이 오지요.
요즘 제 강의 들으면 잠이 온다는 거에요. 그만큼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뜻이에요. 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했잖아요. 얼마나 느긋하고 여유가 있으면 이제는 더 이상 심각하게 안 봐지잖아요.
처음 바뀔 때는 이러다가 지옥가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제는 구름 위에 뜨는 것처럼 그러지요. 옛날에 1980년대에 칼(Korean Air Line, KAL)기 CF에 나온 노래가 있어요. 「welcome to my world」라고 하는 노래가 있거든요.
칼기가 구름 위를 나를 때 그 음악이 나오거든요. 밑에는 소나기가 내리든지 말든지 구름 위에서 편안한 거에요. 잠이 절로 오거든요. 최고의 수면제거든요. 이 힘든 인생 잠이나 잘 자야지요. 남는 게 잠밖에 없는데요.
편안하니까. 입만 떼면 편안하니까요. 초반부터 다 이루었다고 했으니까 들을 것도 없어요. 이제는. 기도 안 해도 되고 헌금 안 해도 되고 편안하지요. 뭐. 구름 위를 나르는 비행기처럼 고요 그 자체..
연동해석이에요. 같이 움직이는 거에요. 성경해석은 정보를 빼내는 것이 아닙니다. 정보를 빼내봤자 나에게 문제가 있어요. 정보를 빼낼 때 주께서 “스톱, 그 손 놓고.. 성경 지금 왜 보는데?”라고 성경을 보는 이유를 물어요.
“우리 애가 수시는 안 됐고 지금 바짝 원서 낼 때가 됐는데 엄마가 되어 가지고 성경 보는 척이라도 해줘야 행운으로 좋은 대학 갈 것이 아닙니까?” 그때는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돼요. 마침 성경 대목이 처나 자녀나 나보다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는 내용이 나온다면 어떻겠습니까?
‘아하, 성경 해석은 내가 내 기분 따라 해석하는 것이 전부구나. 결국 성경이 아무리 거룩한 말씀이고 내가 아무리 성도라도 내가 해석하고 내가 이해하는 것은 개떡이고 전부 다 추억이구나.’
아까 이야기한 신앙이 아니고 나를 합리화하는 내 기억에 불과하죠. 이것은 성령의 반복이 아니고 우격다짐이죠. 오늘 강의 제목 할 게 많다. 우격다짐, 연동해석, 아까 이야기한 윈도우까지.. 그 중에 윈도우가 제일 낫긴 난데..
그런 식으로 자기 정당화를 하는 겁니다. 나는 신앙인이 맞다는 핑계, 자기 변명거리로 성경을 보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성경을 보고 실상인 밖에 나오면 거기에 말씀이 작용해요 안 해요?
집에 있는 성경은 내가 보는 해석이지만 바깥에는 실제로 주님이 말씀으로 모든 자동차의 움직임, 길가에 담배 피는 아저씨, 이 모든 것이 주의 말씀대로 되거든요. 그래서 길에서 담배 피운다고 한바탕 싸우다 보니까 내 성질이 또 나오고요.
실제로 이 세상을 건설하고 있는데 나만 은밀하게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혼자 은혜 받으면 그게 성경의 전부라고 착각하는 그것은 오락이고 취미생활이지 실제는 성경해석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교회나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서 논쟁을 하는 가운데 처음에는 은혜로 시작했다가 성질내면서 끝나잖아요. 결국은 자기 자존심 간의 문제인 거에요. 성경이 결국 내 자존심이나 사수해주고 보디가드 역할밖에 안 되었던 것인가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합니다.
이 이삭과 야곱의 인생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박수쳐야 돼요. 실패하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우리의 인생도 ‘나는 날마다 실패다.’를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실패하는가? 하나로 합치되려고 하다가 거의 합치가 되었는데 삐걱거리면서 또 틈이 생겨버렸어요. 합치되려다가 갈라져서 틈이 또 벌어져 버렸어요. 이것만 되면 나는 완전한 신앙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또 삐걱하고 주께서 그것을 허용하지 않아요.
왜? 계속 실패해야만 내가 인간다워요. 이 말은 내 식으로 구원에 늘 실패한다는 것이고 우리는 내 식으로는 절대로 구원 받는 사람이 안 되고 지옥 갈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런 인간을 주께서 다루시니까 주께 만나지는 그 연결고리(끈)에서 구원의 능력이 와요.
십자가의 능력이 거기에서 오는 거에요. 십자가는 죄인을 구원하러 왔거든요. 우리는 죄인이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데 기어이 우리를 죄인 되게 만드는 겁니다. 오래 살다보니 개가 사람인 줄 알고 침대에 올라오곤 하는데 진짜 정신이 제대로 된 주인은 항상 개한테 “너는 어디까지나 개일 뿐이야.”라고 주지를 시켜야 되잖아요.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은 주제에 예수 믿고 자꾸 신이 되려고 하는데 “너는 어디까지나 죄인이야.”라고 주지를 시켜주는 그 분이 정말 좋으신 참된 주인님이십니다. 그러니까 결국 야곱과 이삭은 내가 살던 이 세계와 연동해서 하나님은 나를 죄인으로 규정시키는 작업을 하신다를 아는 겁니다.
왜? 십자가는 의인을 부르러 오는 것이 아니고 죄인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기에 외롭고 외로운 자에게는 십자가가 보입니다. 아까 첫시간에 이야기했지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11절에 봅시다. 11절에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라고 했지요? 여기에서 자세히 한 번 분석해 봅시다. “믿음으로”가 없다고 치고 “사라 자신이 나이 늙어 단산했다”는 말은 나이 늙어서 불임 여성이 되었다는 뜻인데 이것은 믿음에 관한 문제입니까 아니면 믿음과 상관 없는 문제입니까?
믿음과 상관이 없지요? 나이가 많아서 아이를 못 낳는 것은 당연한 거잖아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것이 믿음과 관련된 상황(내용) 속에 포함을 시켜요. 강제로 애기를 못 낳는 그 지점까지 밀어붙였다는 겁니다.
이걸 사라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캣치를 한 거에요. 내가 옛날에 나쁜 짓을 했다. 그때 내가 ‘술을 안 먹을 걸’이라고 했는데 돌이켜서 보니까 주께서 술을 먹게 해서 음주운전을 하게 했고 재수가 너무 좋게 음주단속에 걸려서 내가 죄인인 것을 알게 해서 예수를 믿었다는 그 인과관계, 그 연결고리가 예수를 믿고 난 뒤에는 한꺼번에 다 수용이 되는 겁니다.
그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전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의 뜻입니다. 주님의 손길은 발걸음도 세신다고 했으니까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살지도 못하고 죽지도 못해요.
모든 것에 말씀이 작렬하는 그런 현장이 이 세상입니다. 음력으로 오뉴월에 햇빛이 쨍쨍하지요? 그럴 때 사막이나 들판 같은 데에 나무가 하나 없다고 해보세요. 그걸 뭐라고 합니까? 온 천지에 햇빛이 쨍쨍하게 작렬한다고 하지요.
이 세상이 말씀이 늘 쨍쨍하게 작렬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집에서 QT(큐티)하면서 말씀을 한 번 보면서 끝내버리잖아요. 말씀을 알았고.. 아니, 안 것은 끝내고 이제는 밖에 나가서 말씀과 부딪히기 시작하는 겁니다.
왜? 햇빛 쩅쨍 뿐만 아니고 말씀 쨍쨍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거짓말쟁이가 이런 거짓말을 했다고 합니다. 소나기가 오는데 그 오는 소나기 사이 사이를 다 피해서 왔다는 거에요.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거짓말입니까? 거짓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현장에서 주는 말씀을 피할 수 없어요. 물론 게을러서 말씀을 안 보죠. 그러나 한 순간도 말씀과 안 만나는 순간이 없어요. 심지어 믿음이 있는 사람은 꿈속에서도 회개해요. 꿈속에서 온갖 짓을 해놓고 꿈속에서 또 꿇어앉아서 기도해요.
그만큼 믿음이라도 그 믿음이 우리 속에 오게 되면 이게 추억, 나의 스냅사진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 한 번 물어봅니다. 여러분들이 지난 날 가운데 언제 가장 기분이 좋았던가요? 답변은 제가 하겠습니다.
“예상 못할 체험이 될 때”입니다. 이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우연히 길을 가다가 정말 내가 옛날에 좋아했던 중학교 옆짝 친구를 만났다면 그 기억은 오래 가요. 늙었다느니 그것은 나의 평가이고 하여튼 이상하니 기분이 야릇하고 좋았다는 것은 잊혀지지 않지요.
왜냐하면 우연이기 때문이에요. 우연은 우리한테 다 기억으로 들어와 버립니다. 그렇다면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신앙도 항상 예상 밖의 것으로 우리에게 추억과 기억을 남기지요. 그렇다면 기도하는 것이 신앙일까요? 아니에요. 그러면 말씀 증거하는 것? 아닙니다.
그게 왜 신앙의 축이 될 수 없는가 하면 내가 결심해서 기도하고 헌금하거나 뭘 할 때 결심해서 하는데 내가 예상하고 해버리면 이게 ‘삑’이 돼요. 이것은 예상 밖의 기쁨이 아니에요. 정말 예상 밖의 기쁨은 내가 엄청나게 죄인인 것을 발각당하든지 아니면 예상 밖에 내가 엄청나게 좋은 일을 해버리면 이건 ‘내가 한 게 아니요.’가 돼요.
유람선을 탔는데 갑자기 어떤 노인네가 빠졌고 다른 사람은 다 가만히 있는데 내가 혼자 뛰어들어서 그 남자를 건져줬더니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용감하시네요.”라고 해서 “누가 떠밀어서 그랬어요.”라고 하는 그런 유머가 있잖아요.
“내가 간 게 아니고 누가 뒤에서 ‘이 바보야.’ 하고 떠밀어서 바보라서 떠밀려서 그랬다.” 그래가지고 스타가 된 그런 경우가 있잖아요. 일이라고 하는 것은 예상 밖에 일어나는 거에요. 애가 넷, 다섯이 되어도 항상 행동에 예상이 되는 애는 별로 관심이 없는데 예상 밖의 행동을 하는 애는 아무래도 관심이 가지요. “너는 안 낳으려고 하다가 낳았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다 아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뭔가 하면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에 우리한테 깜짝 쇼를 준비해놓고 이끄십니다. 이 말은 우리가 예상한 것은 일체 ‘삑’하고 받지를 않습니다. 철야해 보세요. 안 받으십니다.
우리의 모든 계산한 것을 기도 속에 포함해 놓기 때문에 받지를 않으십니다. 항상 우리를 깜짝깜짝 놀라게 해요. 사라가 애기를 단산한 것이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에요. 그런데 단산한 후에 임신을 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지금까지 애기를 못 낳게 했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랄 때, 그때가 다시 한 번 믿음이 확인되는 순간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깜짝 쇼를 자주 경험하려면 그냥 막 사세요. 막 살면서 내가 막 살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천사를 통해서 가로막고 있구나. ‘그쪽은 아니야, 이쪽이야.’ 하고 친히 안내해주고 인도하시는구나.
그런데 안내가 과격해요. 몸도 많이 아프고 돈도 많이 뺏기고. .하여튼 무조건 안내해줘요. 예상 밖의 것으로. 그러면서 우리는 점점 더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덤으로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11절 다시 봅시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라는 것을 한 줄로 줄인다면 “I'm nothing.”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빈껍데기 같은 여인이다. 만약에 자신이 태어난다면 그 애는 내 자식이 아니다. 주께서 나를 빈껍데기 여인으로 만들어 놓고 네가 낳지 않은 다른 자식을 나를 통해 낳게 하시는 것이지요.
이게 하나님이 사라한테 하시는 방식이라면 마리아한테는 정식으로 결혼해서 동침하기 전에 먼저 성질 급하게 임신부터 하게 만들어 놓았어요. 이것을 예상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이것이 공식입니다.
주께서 믿음 생활을 뽑아내는 공식이 이거에요. 깜짝깜짝 놀라게 하신다니까요. 아무런 준비도 안 되어 있는데 갑자기 결과만 주어지는 거에요. 아기를 낳았을 때 누가 가장 당황했겠습니까? 우선 마리아가 당황했겠구요, 누가 당황했겠어요?
이 마리아한테 남자친구가 있지요. 요셉이 굉장히 당황했어요. 그런데 요셉이 상당히 신사적인 사람이 되어가지고 “다른 사람한테 소문을 안 낼테니까 당신이 임신해놓고 그 남자의 말을 못 하는 것 내가 이해한다. 내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당하고 아파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니까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인데 내가 양보해줄게. 내가 물러가줄게.”
이렇게 점잖고 신사다운 사람이 또 있겠어요? “그게 아니고 성령님께서..” “글세, 성령님께서 좋은 남자 만나게 해주셨다는 것을 내가 알거든?” 자꾸 합리적으로 설명을 하지요. 이 상황을 마리아가 요셉에게 설득을 못 시킵니다.
왜? 언어(질서)체계에서는 상징할 말이 없어요. 누가 찾아옵니까 요셉한테? 천사가 찾아오지요. “그 여인을 너에게 데려오는 것을 두려워 말라” 베리칩 안 박아넣겠다는 것도 두려움에서 나온 거에요.
신앙 자체는 무엇을 박아도 괜찮아요. 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이미 주님과 하나가 된 입장이기 때문에 뭘 해도 괜찮아요. 뭘 조심해야 되고 안 해야 되고 뭘 안 먹어야 되고 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에 생기는 거에요.
나한테 일을 시작하신 분이 계시기 때문에 마무리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니에요. 일을 시작하신 분이 마무리도 시키는 겁니다. 미국 NASA에서 화성 같은 데에 무인우주선을 보내잖아요. 그러면 손바닥 겹쳐진 만한 것을 보내요.
그것이 땅에 꽂히면 이것이 착착착착 변신로봇처럼 펴진다니까요. 변신로봇이 자동차가 되었다가 로보트가 되었다가 ‘트랜스포머’라는 영화를 보면 나오잖아요. 기계가 알아서 착착 펴지잖아요.
그것처럼 우리 안에 심어져 있는 주님의 약속이 우리를 사용해서 척척척 펴진다니까요. 그리스도의 형상까지 펴져버려요.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그런데 한 단계, 한 단계가 상징세계인 이 세상에서 내가 미리 알던 그 내용하고 너무나 이질적이고 너무나 낯선 내용들만 펼치는 거에요.
그러니까 굉장히 우리가 당황스럽지요. 그런데 두려워서가 아니고 감격 가운데서 좋아서 당황스러워요. ‘어째 저한테 그런 일이요.’ 이것이 마리아의 고백이거든요. 결국은 마리아의 하는 말이 ‘주의 여종이니 주의 뜻대로 하시옵소서.’입니다.
그 정도 수준이 되면 참 좋겠습니다. 그것을 바라고 있는 사람한테는 그런 일이 안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라다가 졸음이 와가지고 깜빡 자다가 깨보니까 엉뚱한 일이 벌어져 있는 겁니다.
바라는 것이 원인이 되어서 얻는 것이 아니고 바라는 것을 졸음으로 중지시키지요. 딴 생각을 하게 만드는데 보니까 일은 되더라 이 말이죠. 항상 우리의 예상을 빗나가서 주시는데 그렇게 해야 그것이 나의 오기로 된 것이 아니고 그냥 선물로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받아들이게 되지요.
그래야 모든 것의 원인이 저쪽(신문지 뒤)에 있지요. 그런데 빗나간 것을 주실 때 그것을 받기를 거절할 수도 있는데 그것도 아시고 ‘그래도 나는 너를 놓지 않는다.’라고 하십니다. 거절하는 것도 막 사는 것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막 사세요. 하여튼 주어진 나한테 일어나는 모든 것은 주님의 선물이고 주님의 은혜의 산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런 계산을 하느냐 하면 실수를 안 하고 성공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거든요. 아까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실패자인 것을 확증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12절에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는데 제가 잠시 웃었습니다.
이것은 “죽은 자와 방불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장차 예수님께서 실제로 죽었잖아요. 그러면 사람이 손을 텁니다. ‘아이고 안 됐다. 저 좋은 분이 갔구나. 갔어.’라고 하는데 가기는 뭘 가요? 예수님이 만들어 낸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 무수한 사람들이 종려나무 들고 나오는데요.
그런데 문제는 내가 내 힘으로 그 속에 끼어들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죽은 자가 아니고 산 자가 되어 버려요. 산 자한테는 그런 혜택이 없어요. 아까 제가 첫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오기에서 신앙으로 나오면서 이 마음과 몸이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니고 경계선에서 죽는다고 했잖아요. 그 다음에 로마서 6장 이야기했잖아요. 죄에 대해서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죽은 자가 꼼지락거릴 수가 없어요. 이미 죄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에 그래요.
새로운 피조물인 우리는 이미 죽었다가 살아난 예수님의 몸으로서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날 때에 두 가지 해석을 다 하세요. ‘내가 기도해서 이런 것을 얻었구나.’라고도 해석하세요.
왜? 우리는 옛사람이고 우리가 평소에 잘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역시 기도 좀 했더니만 일이 잘 풀리는구먼.’ 그렇게 해석을 하세요. 왜? 그것은 평생가야 지워지지 않고 계속 나올 거에요. 그리고 그것이 왜 잘못된 해석인가를 아시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역시 내가 기도하기를 잘 했어.’라는 죄를 짓는 가운데서 기도하는 죄는 내가 짓고 주님의 기도 덕분에 나에게 이런 결과는 주어졌다는 것을 앎으로써 그것이 내 자랑이 되지 않고 나의 기도와 상관없이 기도케 하시는 분에 의해서 주어진 주님의 은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다 은혜이고 앞으로도 다 은혜가 될 것이고 오늘밤에 죽으면 낙원에 갈 것이고 그것이 나한테는 또 새롭고 낯설게 느껴지는 겁니다. 한 예를 들면 요새 그런 주부들이 많은데 잠이 안 온다.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제일 먼저 리모콘을 찾겠지요. 그리고는 채널 110개를 다 돌립니다. 그러다보면 잠이 오겠지.. 그런데 물론 그렇게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주님이죠. 잠이 오지 않는 것은 원인이 없습니다.
잠이 온다는 것에 원인이 없어요. 그래서 잠이 잘 오는 것은 내가 잘나서 잠이 잘 오는 것이 아니고 잠들게 해서 잠이 왔다는 사실을 잠이 오지 않음으로써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
내 힘으로 잠들 방법이 없어요. 밤새도록 주말의 영화 세네 편 보고 깨어보면 아침이죠. 그러니까 이 말은 세상에 책을 옮길 때는 내 힘으로 한다고 하지만 잠잘 때 깨우면 다시 잠드는 것이 내 맘대로 되지를 않아요.
잠 들려고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하다가 양 2600마리 세다가 밤새버리고 말이에요. 뭐든지 내 맘대로 안 된다면 평소에 내 힘으로 책을 옮기는 것도 내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소급해서 인정해야 돼요.
온 전체가 몽땅 주님이 자신의 말씀의 현장에서 주님이 살아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를 다루고 있고 우리를 만들고 있고 우리를 조작하고 있는 거에요. 그게 바로 나는 아무것도 아닌 거에요.
성경을 강의하다 보면 “목사님 말씀 듣고 복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내 식대로 살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성경을 자주 안 보게 돼요. 설교도 안 듣게 되고 그러는데 성경을 들고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항상 소급해서 나라는 것, 나의 것이 오히려 나에게 해악을 끼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돼요.
‘이제는 알았습니다. 이제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할게요.’라고 우기는 그 마음가짐이 나를 힘들게 만든다니까요. 걱정하지 않을 것을 걱정하지요, 염려를 당겨서 안 할 염려를 미리 해버리지요, 주의 은혜로 그렇게 된 것을 가지고 내 것이라고 우기고 또 자랑질하고 자랑질할 때 나한테 박수치지 않았다고 상대방을 욕하지요.
모든 것을 내가 관리하기 때문에 일이 되기도 전에 벌써 초조와 불안이 찾아오지요. “어후, 내일 안 되면 어떡해?” “말씀 보면 돼.” “말씀은 내가 알지요. 십자가로 구원 받는 것, 난 죄인인 것을 다 알았으니까 안 볼거에요.” 그러고는 혼자 사소한 일에 목숨 걸고 걱정하고 있지요.
그러다가 우연히 잠이 와서 성경을 보게 되면 ‘아하! 그렇구나. 걱정 안 해도 되는데 괜히 걱정했네. 걱정하게 하신 것도 은혜네.’라고 하면서 걱정한 것을 후회하지 않게 되지요. ‘걱정해야 인간이 되는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처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서 우리가 봤는데요 결론은 주께서 친히 만든다는 것입니다. 미래를 내가 알아서 내가 대비하는 것이 아니고 매일 주께서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어 나가시는데 만드는 모습이 우리의 죄를 더 끄집어내면서 만들어요.
나의 잘난 것, 내 달란트, 나의 멋있는 것, 나의 훌륭한 것을 모아가지고 훌륭한 나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죄를 가지고 죄다 끄집어내서 훌륭한 정도가 아니고 완벽한 의인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위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특징은 서로 남들하고 비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니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그 경쟁 자체, 우열을 논한다는 그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오늘 공부한 내용을 최종적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의미없는 세계, 그 윈도우(창)에서 창 너머에 있는 천상에서 의미를 개입시켜서 이 의미의 개입으로 오늘날 우리를 성도로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미리 와서 한 약속의 작업입니다.
이 세계는 의미가 없는 세계이니까 우리가 불안하거나 두렵거나 떨 필요가 없지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오늘 강의를 잘 들었는지 한 번 물어봅시다. 내가 죽었다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에게는 의미가 없는데 주변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어요.
“아이고, 나 놔두고 가면 당신 없이 나는 못 살아.” 그래도 삼 년 뒤에는 나보다 젊은 아가씨하고 결혼할지 몰라요. “아이고 당신 없이는 못 살아.”라고 하고 있고 외삼촌, 처삼촌은 벌써 뒤에서 부조돈 센다고 열 받아 있고 뭘 좀 안다는 사돈의 팔촌은 “관을 저렇게 쓰면 되나, 이렇게 써야지.”라고 하면서 정방향을 해야 된다고 아는 체하고 있지..
우리 곁에 있던 사람들이 죽을 때 우리도 그렇게 의미 없는 짓을 했어요. 그러나 진짜 의미는 내가 죄인 되게 하셔서, 탕자 되게 하셔서 십자가의 상처로 구원한다는 그것이 우리의 오늘날 사는 의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의미 없는 우리를 모아다가 의미 있는 주님만 이렇게 생각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성경 공부로 끝나지 말고 세상에 나가서 살아계신 주님의 손길과 주님의 호흡과 체온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