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6/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히브리서 11:21 / 선先-미래 / 160212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브리서 11:21 / 선先-미래 / 160212

정인순 2016. 2. 13. 11:46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녹취:충성모

안양20160212a히11장 21절(선先-미래)-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 11장을 보고 있습니다. 11장 20절에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라고 되어 있지요. 이 대목은 창세기에 한 쪽은 축복하고 한 쪽은 저주하는 그 대목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참 이상하지요. 같은 자식이면 둘 다 축복해주면 될 텐데 한 쪽은 축복을 하고 한 쪽은 저주를 해버려요. 다 같은 자신인데 말이에요. 어디에 기준 해서 축복을 하고 어디에 기준을 해서 저주를 하느냐는 그 기준이 오늘날 우리한테는 제일 궁금한 거지요.

 

왜냐하면 이것은 옛날 이삭의 가정 문제가 아니고 나 자신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에 그래요. 복을 받았다면 무엇에 기준 해서 복을 받았으며 저주를 받았으면 무엇이 그렇게 틀어져서 무엇이 문제가 되어서 저주를 받았는지 그 기준의 확보가 가장 관건입니다.

그 기준을 모른다든지 기준을 우리가 제대로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한테 저주 받을 수가 있고 이 한 번 받은 저주는 취소가 되지를 않아요. 영원히 미래가 결정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을 선先미래라고 이야기합니다.

 

선수금이라는 말은 있지만 선미래라는 말은 낯설지요. 미래보다 앞선 것을 말하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면 미래보다 앞선 것은 현재지 않느냐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미래보다 앞설 경우에 이걸 현재라고 하지 않고 미래에 종속되었다, 미래에 포함되었다라고 합니다. 만약에 미래보다 앞선 것을 현재라고 한다면 미래는 불확정해요. “가봐야 알지”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선미래라는 말의 뜻은 확정된 미래를 위해서 미리 현재가 존재한다 이런 의미라는 말이지요. 미래가 주가 되고 그 미래를 위해서 현재가 미리 준비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의 시각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생각이죠.

미래가 확정되고 그 확정된 미래를 예고편으로 보여주듯이 현재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현재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미래가 이미 결정되어 있고 현재는 그 미래에 종속되고 따라가는 거지요. 이게 주님의 시간 개념이에요.

 

이런 시간 개념에 있어서 현재 내가 뭘 하느냐는 내 미래와는 무관합니다. 이게 아주 충격입니다. 지금 내가 하기 나름에 따라서 지옥에 가거나 천국에 간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는 성립이 되지를 않습니다.

교회에서 “여러분 하기 나름입니다.”라고 하는 것은 거짓말하는 겁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처음 나온 용어에요. 선미래. 현재가 아니고 미래보다 앞선 것. 영어로는 pre-future, 미래에 앞선 것.

 

그렇다면 이 선미래에 일어나는 일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앞당겨서 그 안에 소박하게 담겨있게 돼요. 꽃과 꽃봉오리의 차이점이라고 보시면 되지요. 꽃봉오리는 꽃의 선미래가 되는 겁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꽃봉오리 속에 활짝 핀 꽃의 정경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시면 더 이해가 될 거에요.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의 꽃봉오리로 보는 겁니다. 인물이 뭐 별로라도 그냥 꽃봉오리로 보시고 이걸 활짝 펼치는 겁니다.

 

어디에서요? 활짝 펼치는 데는 어느 시츄에이션(상황)이 마련돼야 돼요. 새하늘과 새땅이 마련됩니다. 그러니까 이 새하늘과 새땅에서 활짝 필 꽃봉오리가 헌하늘, 헌땅에서는 이렇게 구박을 받네요.

이렇게 서러움을 받고 제가 제 값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신다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길이 그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선미래로 이 땅에 오셨거든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는데 그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는데 앞선 이 땅의 모습은 아주 초라하고 비참하지요. 처참하지요. 이것을 이사야 53장에서는 “누가 그를 믿었으리요 누가 그에게 주목하겠는가 한 번 보고 우리는 그것을 귀하게 여기지 아니했다”

다른 말로 하면 무시지요. 앞에 한 자를 더 붙이면 개무시지요. 정말 귀하게 여기지 아니했다. 참, 교회에서 설교해야 되지만 그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아무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여기에 있는 우리가 주님을 귀하게 본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달라지지 아니하면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어야 돼요.

“남들이 귀하게 보지 않는 예수를 우리가 귀하게 보는 식으로 달라졌습니까? 아니면 너도 나도 귀하다고 포장된 가짜 예수를 귀하게 보십니까?” 온갖 후광을 다 달아놓고 금방이라도 천사가 와서 할 정도로 멋있는 인간들의 이상형, 인간들이 좋아하는 기대치, 진선미를 거기에다가 다 퍼부어놓은 예수를 귀하게 볼 경우에는 그것은 가짜일 확률이 굉장히 높습니다.

 

막 기적을 베풀어주고 금방이라도 행운을 가져다주고 로또 사놓고 기도하면 1등이 될 것같이 그렇게 능력을 발휘하시는 분으로 이해된다면 그렇게 귀한 분이 어디 있어요? 내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그런 예수라면 100% 가짜입니다.

‘내가 저런 분을 꼭 믿을 필요가 있어?’ 이렇게 돼야 돼요. 그러면 주님이 뭐라고 합니까? ‘그래 날 믿지 마.’ 오고 가는 대화가 이렇게 돼야 돼요. ‘나는 이런 주님이시라면 믿을 의사가 없습니다.’ 주님은 ‘그래, 믿지 마. 안 믿어도 괜찮아. 안 믿는다고 너를 탓하지 않을게.’

 

‘그런데 주님은 나의 주시니까 믿어야지요.’ ‘그래 바로 그거야.’ 이야기가 바로 이렇게 돼야 돼요. 내가 골라잡는 게 아니에요. 주님이 나를 아셔야 돼요. 주님이 나를 아셔서 주님 쪽에서 나를 버리지 않아야 구원이 되는 겁니다.

왜? 주님은 미래에 계시는 분으로서 우리를 선미래로 보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왔을 때 아버지가 미래가 되고 예수님은 선미래가 되지요. 이제는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가셨지요?

 

그러면 하나님 우편이 우리의 미래상이고 이 땅에서 아직 거기에 못 가고 있는 우리는 선미래가 되는 겁니다. 선미래와 미래 사이에는 우리가 행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미래(예수님)을 위하여 우리가 미리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 노선, 그 배열이 히브리서 10, 11장에 나와 있는 그 계열입니다.

히브리서 11장부터 쭉 나오잖아요. “믿음은..., 믿음은..., 믿는 자는...” 그 계열이 제가 보기에는 꼭 열차 같아요. 그러면 한 번 물어봅시다. 열차에 어떻게 뛰어올라갑니까? 이것이 관건이네요.

 

히브리서 11장에 제일 먼저 나오는 사람이 아벨이지요. 아벨, 그 다음에 에녹, 노아, ... 쭉 나오잖아요. 그것을 하나의 열차로 비유한다면 그 열차가 길에 다니는 보통 기차는 아닙니다. 흔히 만날 수 있는 열차는 아니다 이 말이지요.

따로 존재하지요. 열차에는 객차가 있잖아요. 아벨, 에녹, 노아처럼 그 열차의 객차와 객차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에 부합되는 객차일 경우에만 또 하나의 객차로 우리가 뒤꽁무니에 연결이 되는 겁니다.

 

그 연결되는 원리와 원칙이 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을 만약에 모르게 되면 그 열차에 올라탈 수가 없고 그 열차에 올라탈 수 없으면 우리는 그냥 천국 가는 열차를 뻔히 쳐다보기만 하는 거지요.

꼭 강아지처럼 기차가 지나가는데 멍멍 짖기만 하고 그리고 기차가 쑥 지나가 버리면 아무것도 남지도 않고 자기는 그 현장에 있고요. 열차가 왔으면 올라타야 되는데 올라탈 방법이 없네요. 자, 여러분의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한 번 이야기해 보세요. 열차에 올라타는 방법에 대해서요.

 

“열차가 멈췄을 때 올라갑니다.” “열차는 멈추지 않습니다. 그냥 달리지요.” “예수님이 태워주셔야지요.” “예,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안 태워주면 어떡합니까? 그냥 열차가 지나간 뒤에 공허만 남지요. 알려드리겠습니다.”

사실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렵지만 제일 중요한 대목인데요 히브리서 11장 전체를 열차로 보자는 그 생각을 지우지 마세요. 한 열차, 그 열차를 은하철도 999로 보면 됩니다. 거기에 철이도 있고 모자를 푹 눌러쓴 열차의 기관장도 있고 있는데요.

 

그 열차가 현재 우리 가운데에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올라타는 것이 문제가 되거든요. 우선 제가 이 문장을 쓸테니까 한 번 이야기해 보세요. “5를 짝수라 여겨라.” 이것이 상당히 말이 안 되지요.

2, 4, 6, 8이 짝수고 5는 홀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5를 짝수로 간주하라면 우리 세상에서는 이것은 용납이 안 돼요. 5는 홀수인 채 버티고 있어요. 누가 뭐래도 5, 7, 9는 홀수에요. 그 버틴다는 것의 뜻은 이 세상에 이미 기준이 있다는 말이에요.

 

2, 4, 6, 8, 10은 짝수고 1, 3, 5, 7, 9는 홀수입니다. 이미 이것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5를 짝수라고 하면 이건 반칙이라고 우리가 핍박을 받아요. “이게 어디서 굴러와서 되지도 않는 원칙을 가지고 고집을 부리느냐?” 이렇게 돼요.

그런데 왜 우리가 우리의 원칙을 고수하느냐 하면 여기에서 우리가 우리의 주체를 정립했기 때문에 그래요. “2, 4, 6, 8, 10이 짝수다.”라고 우리가 동의하고 학교에서 그렇게 배우므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으로부터 우리가 인간(사람) 대우를 받아요.

 

우리가 아는 모든 지식은 그냥 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남들이 보기에 “우리가 같이 살고 같이 놀아줄게.”라고 초대받을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초대를 받게 되면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가 있어요.

에디슨이 어릴 때부터 그렇게 구박을 받았다고 하잖아요. “1+1=2다.”라고 선생님이 이야기하면 다른 애들은 “1+1=2”라고 받아 적어놓고 선생님이 “1+1=얼마에요?”라고 물어보면 “2”라고 대답해서 “참 잘했어요.”라고 선생님한테 칭찬 받을 때 그 학생 하나하나는 그 학교의 구성원으로 주체가 형성이 됩니다.

 

이제는 학교에 부담이 없어요. 왜? 선생님의 말씀대로 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그 어린 에디슨이 하는 말이 “1+1이 어떻게 2가 됩니까? 선생님이 그것을 설명해주세요.”라고 한 거에요. 그것에 대한 증명은 화이트 헤드와 러셀이라는 몇몇의 수학자들이 두꺼운 책 한 권을 냈는데 (너무 어려워서 본 사람이 거의 없답니다.) 그 책의 마지막 결론이 “1+1=2”로 되어 있어요.

“1+1”이 “2”가 되는 것을 세계 최고의 수학자가 증명해도 두꺼운 책 한 권이 된다고요. 에디슨은 그것이 궁금한 거에요. ‘어떻게 ‘1+1’이 ‘2’가 되느냐?’ 그래서 선생님께서 에디슨한테 물으셨겠지요.

 

“여기에 빨간 펜이 하나 있지, 빨간 펜이 또 하나 있지. 이 두 개를 합하면 이게 2다.” 한 개와 한 개를 합한 것이 2라고 설명을 했겠지요. 그런데 에디슨이 이것을 몰라서 질문을 한 것이 아니에요. 이렇게 나오면 반박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거에요.

“똑같은 성질이 여기에 들어간다면 이것은 2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입니다. 선생님!” 이렇게 반박이 된다니까요. 오렌지가 3개 모이면 오렌지의 개수에 관계없이 그 질은 하나니까 하나의 오렌지가 되어 버려요.

 

그럴 경우에 그것은 1이 아니라는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2인지 3인지 모르겠지만 1이 아니라는 이유가 되지를 않는다는 거에요. 물론 에디슨이 그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길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서 우리 인간의 머리카락이 한 10~15만 개쯤 된다고 합시다. 60이 넘으면 또 빠지겠지만 그 정도 된다고 치고, 누가 옆에서 돌 같은 것을 던졌다면 “내 2646번째 머리카락에 맞았다.”라고 합니까?

 

“내 머리, 내 하나밖에 없는 머리 왜 때려?”라고 하겠지요. 보세요. 하나잖아요. 하나라는 말이지요. 머리카락이 15만 개가 되려면 머리라는 보편적 명사에서 머리카락이라는 개별적 명사로 따로 떨어져 나가야 될 이유가 여기에 추가가 되어야 돼요.

이발사라든지 진짜 머리카락을 심는 의사가 무슨 필요에 따라서 추가가 되어 버리면 이것은 필요에 따라서 숫자가 나온 것이 되기 때문에 결국 진리는 아니에요. 활용하는 것이지요. "1+1=2"는 활용하기 위한 숫자이지 진리는 아닌 거에요.

 

그래서 때에 따라서 2가 되고 때에 따라서 3이 된다고 선생님이 이야기해줘야 그것이 맞다는 것이 에디슨의 이야기에요. 그 말이 맞잖아요. 펜 하나 하나가 때로는 5가 되고 때로는 6이 되어야 된다는 거에요.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반박을 해버리지요. 펜이 하나 있고 또 하나가 있으면 2라고 해야지 그것이 5가 되고 6이 되면 인간과 인간 간의 모든 질서가 소통이 되지를 않는다는 거에요. 제 아내가 독일에 가서 말이 안 통하니까 “fish, 500g 주세요.”라고 했어요.

 

무심코 나왔지요. 그런데 500이 독일말로 뭔지를 모르겠는 거에요. 또 하루는 “일(1) Euro가 얼마지요?"라고 했대요. one Euro가 아니라 일(1) Euro라고 한 거에요. 제 아내는 그냥 내뱉어 버려요. 수습은 나중에 하더라도요,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인간은 자기 주체가 정립되고 난 뒤에 모든 사는 것은 주체가 사는 데에 편하도록 진리 체제를 다시 요청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5가 짝수라고 하면 통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은하철도 999는 이것을 뚫어버립니다. 찢어버립니다. 깨버립니다. 누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했다는 말이 성경에 나오는데 이 말의 뜻은 귀하게 여기는 것은 이러이러해야 귀하다는 것을 지상에 있는 인간들이 이미 주체적으로 정립이 된 상태에 있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인간들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이 누구겠습니까? ‘이렇고 저렇고’라고 이야기하는 본인이 제일 귀해요. 자기보다 더 귀한 존재는 없습니다.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열차 은하철도 999에 자기를 귀히 여기는 자는 탈 수 없는 거에요. 그래서 믿어도 구원을 못 받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 주체에서 나오는 믿음은 결국 믿음의 대상이 누구든 관계없이 ‘내가 최고로 중요합니다.’라는 마을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부처를 믿든, 예수를 믿든, 하나님을 믿든, 삼위일체를 믿든 결국 ‘믿는 나 괜찮지요?’라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당신을 믿어줄 테니까 이 믿어주는 내가 얼마나 착한지를 당신 쪽에서 알아주게 되면 더욱 더 잘 믿어줄게.’라는 식이 되어 버린다고요. 믿음, 소망, 사랑, 뭘 해도 절대로 본인에게서 한 발자국도 떨어질 생각을 못해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수제비 반죽을 해놓고 반죽을 뚝뚝 떼어가지고 냄비에다가 집어넣듯이 이미 내가 귀한 것은 장착되어 있고 귀한 것 가운데서 뚝 떼어가지고 믿음, 뚝 떼어가지고 소망, 뚝 떼어가지고 사랑, 헌금, 전도, 교회 예배 참석, 찬양, ... 이런 식으로 하는 거에요.

진짜 덩어리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말이에요. 못 들어갑니다. 그래서 이 은하철도 999,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그 열차의 특징은 난데가 없어요. 신앙인 전부 다가 난처해져 버려요. ‘이럴 수는 없습니다. 왜 저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이런 일을 일으킵니까?’ 사태와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어이가 없네.’에요. 베테랑 영화에서 유아인이 했던 말이에요. 어이라는 것은 맷돌 돌릴 때 쓰는 손잡이라고 하는 그런 설이 있어요. 손잡이 없이 맷돌을 어떻게 돌려요, 콩은 집어넣고 돌멩이 두 개를 가지고 뭐 어떻게 갈아요?

손잡이를 가지고 위엣 것을 갈아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손잡이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내 구원에 대해서 내가 나서야 구원 되는 것이 이 땅에서의 원리이고 법칙이거든요. 왜? “남”의 구원이 아니고 “내” 구원이기 때문에 “내가” 믿든지, 회개하든지, 순종하든지 해야 될 것 아닙니까?

 

성경에 “회개하라”고 하면 “제가 회개할게요.”, “순종하라”고 하면 “제가 순종할게요.”라고 손들고 나설 수 있는 그런 어이가 있어야 되는데 히브리서 11장에는 어이가 없네? 그것을 누가 이야기했다고요? 유아인은 뭐라고요? 너와 내가 다 인간이다라는 뜻이라고 제가 지어낸 이야기에요.

신앙은 어이가 없어요. ‘주여,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런 뜻이에요.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주여, 누구십니까?” 그때 주님 말씀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였습니다. 은하철도 999를 타는 티켓이 드디어 등장했습니다.

 

탈 수 있는 열차표가 드디어 등장했습니다. 핍박입니다. 우리는 핍박자요, 주님은 핍박 받는 분이 되시는 것이 이 열차를 타는 티켓입니다. 타기 전에 핍박했고 타고 난 후에도 핍박하고 나이 80이 되어서도 핍박합니다.

안 가져갔는데 돈 가져갔다고 핍박하지요. 치매 걸려서 돈 안 가져갔는데 가져갔다고 한다는 것은 평소에 치매 걸리기 전, 한 살, 두 살, 세 살, 네 살 때부터 얼마나 남을 의심하면서 살아왔느냐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좋은 어머니를 뒀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렇게 나오면 어이가 없어요. 교회에 가서 목사님 말을 들어서 천당간다고 시키는 대로 헌금하고 전도하고 새벽기도까지 다 나오는데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게 의가 아닌데요. 그런 식으로는 구원을 못 받는데요.

핍박을 했다는 말은 그 동안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예수님을 모른 것이 아니라 결국 본인 자신을 몰랐다는 거에요. 매일 거울을 보면서 자신을 봤지만 본인 자신을 몰랐던 거에요.

 

왜 모르는가? 인간의 주체라고 하는 게 본인이 거울을 봤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그 분위기에 소속되어 있어요. 그 분위기에 맞추다 보니까 그 쪽이 원하는 대로 맞춰서 살아온 거에요. 여자가 시집을 가면 그 시집의 분위기에 맞추어서 주체가 새롭게 달라집니다.

처녀 때, ‘나는 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불교 집안에 시집가지만 교회는 꼬박꼬박 다니겠습니다.’라고 하다가 시집 간 지 3년도 안 되어 가지고 점 보러 다닌다고 합니다. 왜? 그래야 그 집안의 사람으로 자기가 살아남으니까요.

 

“어머니, 제사 때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하고 적극 나서서 해주지요. 왜? 자기 아들을 시어머니가 키우니까요. 다 주고 받고 하는 이해득실 관계가 있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어요. 종교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자기와 자기 자식이 중요하지요.

내가 중요하거든요. 이 중요한 자기 자신에게 흠집을 내지 않기 위해서는 뭐든지 다 해줄 용의가 되어있다는 사실이 우리 자신에게 함축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오늘 강의 제목을 함축이라고 할까 봐요. 아까 처음에 강의할 때 선미래라고 했지요. 이걸로 해야겠어요.

 

그러니까 주님을 핍박하는 그 요소를 이미 우리가 핍박하기 전부터 우리 속에 심어놓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핍박하게끔 만든 사람만 자기의 세계로 돌아오게 하는 겁니다. 미래가 있고 미래에 앞서서 선미래가 있잖아요.

선미래에서 미래로 가는데 그 열차 티켓이 핍박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우리 인간들의 이성에 의하면 우리가 핍박해서 예수님이 죽었다고 하잖아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아요. 미래와 선미래 관계에서는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도록 예정되어 있어요. 이것은 아버지하고 예수님하고 이미 이야기가 끝난 상태에요.

 

지금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예수를 믿으라는 거에요. 나라는 존재가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과 함께 산다고 이야기하거든요. 이것은 복음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어떤 존재를 믿는다고 할 때, 내가 이 존재를 믿기 위해서 나라는 존재를 스스로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라는 존재를 부정하고서는 믿음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끝까지 믿는 존재(주인공)가 따로 있어야 되고 그것은 본인이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은 천국에 가서라도 (천국에 못 가지만..) 자기는 계속해서 믿어야 돼요.

 

쉬지도 않고 계속 믿어야 돼요. 그야말로 이거는 천국이 아니고 개판이 되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이 타인이 된다고요. 로마서 6장에서는 예수님을 타인이라고 보지 않았어요. 갈라디어서 2장 20절에서도 타인이 아닙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야지 예수님은 나의 타인이 아니에요. 옛날 이 땅에서 인간이 사고하는 식으로 ‘너는 너고 나는 나다.’라고 여기는 타인은 천국에는 없는 거에요. 타인이 아니고 한 몸인 이유는 예수님이 지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손가락하고 머리하고 남입니까? “우리가 남인가?”는 부산의 정치가가 이야기한 거고요. 손하고 발하고 남입니까? 남이 아니잖아요. 남이 아니라는 용어를 한 몸이라고 해요. 다른 말로 하면 한 몸체라고 하고 한 덩어리라고 하고 이걸 아주 고상하게 이야기해서 “우리는 한 유기체.”라고 하는데 나는 유기체라고 하는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어요. “유기체가 뭔데?” 물어보면 답변을 못해요.

탄소 집합체를 유기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유기체라는 말은 함부로 쓰는 말이 아니에요. 뜻도 모르고 남이 쓰니까 그냥 다 쓰고 있는 거에요. “교회는 유기체다.”라고요. 어쩌라고요? 유기체 뜻도 모르고..

 

그냥 한 몸이라고 보면 돼요. 이것이 간단한 얘기에요. 한 몸이에요. 한 쪽이 아파하면 같이 아파하고 한 쪽이 좋아하면 같이 좋아하는 거에요. 내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좀 겁이 나요. 자꾸 오해를 하기 때문인데요.

“내가 땅을 하나 사뒀는데 그게 이번에 땅값이 올라가지고 참 기분이 좋으네요.” 하고 교회에서 식사시간에 무심코 이야기를 했다고 합시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형제는 좋은 것은 같이 좋아하고 슬픈 것은 같이 슬퍼하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김집사,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옆에서 최집사가 좋아해야 되잖아요. 최집사 그 얘기 듣고는 밥도 안 먹고 나가버립니다. ‘주여, 내가 땅 사놓은 지가 10년이 넘었는데 내 땅값은 반토막이 나고 저 사람은 땅값이 올랐습니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남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파요. 같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 아이 이번에 시집 가요.”라는 말을 들을 것 같으면 노처녀가 있는 집안은 집에 가면 딸을 쥐어 박아 버립니다. “너는 뭐하고 있노?” 성질이 나버립니다.

 

이것이 교회인지 경쟁마당인지 “유기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무기체보다 더 못해요. 그래서 내가 그랬잖아요. 하나님께서 산소 같은 인간을 만들어 놓으셨는데 탄소 같은 인간이 되었다고요. 시커멓게 됐어요.

그러니까 한 몸이라고 할 때는 이런 점에서 한 몸이에요. 너나 나나 주님을 핍박하기는 마찬가지다. 어떻게? 자기가 개인적으로 좋은 것을 자랑질하면서 핍박하고 또 눈물 날 것도 아닌데 혼자 세상 꺼지듯이, 세상 다 산 것처럼 “이렇게는 못 산다. 죽어도 못 산다. 같이 슬퍼해줘. 같이 슬퍼해줘.” 이런 식으로 따지는 거요.

 

뒤에서는 고소해하고 전부 좋아하는데요. 교회에서 누가 이혼해보세요. 남들 다 좋아서 말은 안 해서 그렇지 혼자서 웃고 있는데요. 소통하는 연결고리가 핍박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죄인이에요.

어떤 사람이 자기의 사적으로 좋은 것을 이야기하면 화가 나는 이유는 그 순간 우리는 다시 한 번 나 말고 남이 잘 되는 것은 전부 다 꼴도 보기 싫어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이 등장했고 그 죄가 결국 오늘날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또 다시 핍박하는 양상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한 순간도 나 위주로 살지 않는 순간이 없기 때문에 한 순간도 주님을 핍박하지 않은 순간이 없어요. 우리는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다 되어야 만족을 해요. 버스를 타려고 갔는데 타려는 버스가 쑥 지나가면 화가 나는데 그때 화는 누구를 보고 내는 거에요?

“저 기사 말이야.”라고 하는데 기가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사를 누가 보냈는데요? 하나님이 보냈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차마 주님한테 욕을 못 돌리고 속으로 기도하지요. ‘주님께서 배차시간을 잘못 아셨으니까 금방 버스가 오겠지.’

 

금방 안 오는데요? 뒷차가 가자마자 한 차 점심 먹으러 빠져버려가지고 20분이나 뒤에 오는데요.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계속 일어납니다. 자꾸 우리는 상상을 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미래에 속하지 않고 현재에 있거든요.

현재는 내가 원하는 식의 미래를 자꾸 고집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자꾸 주님 앞에 들이대는 게 있어요. 그게 아주 고상하게 기도의 양상이든지 그 핑계가 금식이고 뭐 어떤 것이든 간에 결국은 하나님 앞에 강요하고 압박하고 협박하는 식으로 우리는 주님을 핍박하고 있습니다. ‘박’자가 많이 나오네요.

 

그런데 우리 중에 아무도 주님을 핍박할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진해서 핍박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핍박하도록 하시는가? 없는 존재(것)를 우리 속에 유발시키시지요.

그게 바로 오늘 본문 히브리서 11장 20절에 나옵니다. “믿음으로” 원래 믿음이 없어요. 왜냐하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미래가 있고 그 다음에 미래에서 우리를 선미래로 잡을 때만 우리에게 믿음이 생겨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는데 이것이 선미래와 미래의 관계를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 제가 용어로 선미래라고 표현했지만요. 그렇다면 여기 20절의 말씀은 이삭이 누구를 자기의 후계자로 밀어줬다는 말입니까? 누구를 복을 받을 사람으로 밀어줬습니까?

이삭에게는 아들이 둘이 있었지요. 큰아들의 이름은 에서이고 하나는 야곱입니다. 에서라는 말을 발음할 때 하도 문제가 있어서 제가 주의합니다. 제 발음이 좋지를 않아서 자꾸 에서를 가지고 예수라고 하는데 에서입니다.

 

아버지는 에서와 야곱 중에 에서를 밀어줘요.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에서는 자기 마음에 딱 맞아요. 하나님께서 그런 자식을 주신 거에요. 맘에 들어도 너무 마음에 들어요. 그래서 완전히 다 몰아줍니다.

하나님께서 같은 자식인데 왜 한 쪽에다가 축복과 저주를 전부 몰아주십니까? 둘이 사이좋게 반반 가르면 될 텐데 말이지요. 그 이유는 시작이 몰빵(몰아주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삭은 전부 자기가 원하는 아들에게 몽땅 다 물려주는 것이 시작이 되어서 그래요.

 

이것이 이미 이삭의 주체입니다. “내 자식을 내 맘대로 하겠다는데 네가 왜?” 이거에요. 이삭은 자기 몸이 자기 것인 줄로 알았어요. 자기 안에 부재(존재하지 않음, 또는 무), 내가 생각하지 못한 진짜 나가 나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사실은 그게 믿음과 관련이 되어 있거든요. 장차 오실 예수님과 관련이 되어 있어요. 쉽게 말해서 예수님이 미리 앞당겨서 이삭 속에 들어갔다고 보시면 돼요. 그게 아주 이해하기 쉬운 겁니다. 히브리서에서 5장만 뒤로 가게 되면 베드로전서가 나옵니다.

 

히브리서, 야고보서, 그 다음에 베드로전서가 나오거든요. 베드로전서 1장 10~11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됐습니다. 자기 속에 계신 무슨 영?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이 이미 구약의 선지자 속에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있었던 거에요.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이기 때문에 구약을 봐서는 이게 안 나타나요. 그런데 마지막에 보면 그 내막이 다 드러납니다. 구약의 해석은 이렇게 돼야 되는 겁니다.

 

신약에 와서야 구약의 해석이 제대로 되는 겁니다. 노아 속에 그리스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무리 노아를 봐도 모르고 아담 안에 그리스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창세 전부터 아버지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골로새서와 요한복음 1장은 이야기해요.

하나님이 말씀을 가지고 창조했다고 나오지만 창세기를 아무리 봐도 그리스도가 안 나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안 믿어요. 못 믿어요. 구약을 아무리 봐도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안 나옵니다. 그래서 문자적 해석이 문제가 되는 거에요.

 

성령을 받아야 문자로 해석하지 않고 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에요. 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집어넣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해석하는 겁니다.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이라고 요한복음 5장 39절에 나오지요.

그런데 목사들이 야곱의 별미에 관해서 설교할 때에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목사한테 별미를 바쳐야 됩니다.“라고 해버리는데 이것은 시작을 인간부터 시작해서 결국 목사 본인한테 돌아와 버리니까 이 해석을 다른 교인들이 보면 그럴싸한 것 같아요.

 

하지만 그 해석은 문자적 해석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해석이 꽝이라고 보면 돼요.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말씀을 전한다고 되어 있는데 그 대목을 가지고 설명하게 되면 “그러니까 교회에 선교 헌금 내세요.”라고 나온다고요.

이런 해석은 어느 해석에도 그런 해석이 있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교회는 하늘나라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교회가 하늘나라를 막는 거에요. 하늘나라는 교회를 깨야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게 로마서 15장에 나옵니다.

 

“하늘나라는 먹고 마시는 게 아니다”라는 이 말은 그 당시 교회가 모일 때마다 성만찬을 했어요. 하지만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하늘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희락과 평안이라”고 했습니다.

줄여보면 하늘나라는 성령 안이 하늘나라지 교회 안이 하늘나라가 아니라는 거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가시적으로 교회가 눈에 보이니까 교회를 하늘나라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걸 또 목사들이 이용을 한 것이고요.

 

돈은 하나님께 드릴 수가 없어요. 돈은 본인이 쓰라고 주께서 주신 겁니다. 본인 쓰라고 준 것을 거기에다가 다시 내놓으면 어떻게 돼요? 본인이 써야지요. 아까 태어난 지 두 달 된 아이가 머리가 엄청 큰 동영상을 봤는데 그게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은 거에요.

아브라함이 왜 이삭을 바쳤는데요? 이삭이 아브라함의 작품이 아니고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에 갖다가 바친 거에요.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하면서 도로 바치는 거에요.

 

우리 자신을 우리가 열심히 사랑하고 우리가 말씀대로 살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사는 이게 헌금이에요. 주신 돈을 가지고 재미나게 살아가면 돼요. 피아노를 들여오고 피오노를 치고 아이를 피아노 학원에 보내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는 거에요.

그것을 교회에다가 왜 갖다 바칩니까? 좋아하는 사람 아무도 없고 목사만 좋아하지요. 이 말을 극동방송에다가 해놓으니 기절하고 난리가 났지요. 그 피디 차출되었어요. 그것도 녹화 같으면 다 짤렸을 텐데 생중계로 했어요.

 

난리가 났지요. 저는 그 순간에 서울에 와있었고 집에 박사촌에는 제 아내가 있었는데 제 아내 앞으로 전화가 200통이 왔답니다. “어느 교회입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는 목사가 있다니요. 반갑습니다.”

이삭은 에서를 자기 작품으로 본 겁니다. 그게 전부니까 몰빵으로 전부 다 에서한테 하나님이 주신 권한으로 주려고 밀어붙인 거에요. 주께서는 “이삭아 네가 네 자신을 모른다.” 하면서 완전히 바꿔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철저하게 모든 장치가 큰아들한테 축복이 가도록 짜여진 것이었는데 이게 틀어져 버렸어요. 야곱이 거짓말을 했지만 그 일이 성사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하여금 자기 엄마와 짜고 거짓말을 하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심지어 축복을 하면서까지 그 축복을 받는 아이가 자기의 큰아들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몰빵 다 해준 거에요. 이삭은 이삭 본인한테 속아넘어간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주체에 속아 넘어가듯이요.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핍박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맨날 기도해도 내 중심으로 ‘나 잘 되게 하옵소서. 기도 열심히 하는데 복을 안 주면 진짜 섭섭합니다. 이러시면 나 앞으로 기도 안 하는 수가 있어요. 하나님.’ 협박 공갈은 기본이고 온갖 것을 내 중심으로 다하는 거에요.

이게 이삭의 재탕입니다. 그것에서 핍박을 발생시켜 가지고 그것으로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 가는 티켓으로 삼아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이게. 그걸 가지고 쉽게 말해서 천국은 예수의 피로 간다는 거에요.

 

예수의 피는 어디에서 생산됩니까? 피를 내게 하는 자가 있어야 피가 나올 게 아닙니까? 그 피를 내게 하는 자로 우리가 손을 들고 나서야 된다는 겁니다. “제가 바로 예수님을 핍박했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 현장에 있었다면 우리도 예수님을 죽이는 데에 가표를 던질 거에요. 왜? 베드로가 “나는 모른다.”라면서 도망 갔다면 우리들이야 뭐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실컷 주의 종이라고 하면서 기적이라는 혜택을 입었지만, 심지어 분명히 너는 내가 책임진다고 당부했건만, 베드로가 세 번씩 모른다고 할 정도라면 그 당시에 얼마나 빠져나올 수 없는 애굽 같은 강력한 세력이 작용해서 베드로라는 주체상(image)을 형성했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상이에요? 시집 가기 전에는 그냥 아가씨로서 이쁘게 공주처럼 살면 되지만 만약에 시집을 가게 되면 꿀떡꿀떡 한 놈이 “아이고, 형수님!”이라고 하는 거에요. ‘나는 그런 남편하고 살면 된다고 생각했지 그런 시동생은 생각도 안 했다.’

웬 사돈에 팔촌까지 다 꼬여가지고 조금만 어려우면 “아제요 도와주이소.” 온 촌에서 바리바리 뭘 사들고 와가지고 보증 좀 서달라고 오고, 시집 가게 되면 예상밖의 사태가 일어나요. 5촌 조카가 음주운전 해서 수리해가지고 보상금 물 줄을 시집 가기 전에 어떻게 알았겠어요?

 

막상 결혼해보니까 남편한테 지병이 있어서 40대에 당뇨에 걸려서 평생 수발 들어야 된다는 사실은 시집 가기 전에 내 머릿속에 없었던 거에요. 60도 되기 전에 뒷머리가 빠질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거는 살야봐야 알고 그때 가봐야 아는 문제인데요.

“혹시 머리 빠진 사람이 있었습니까?” 그것까지 물어보면 결혼 자체가 성립이 안 되잖아요. DNA를 조사한다고 밝혀질 문제도 아니고요. 물을 수도 없고요. 그러니 뭐 이런 세상이 다 있어요? 어떤 사람은 엿같은 세상이라고 하는데 엿인지 조청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세상이 다 있어요? 내가 원하는 세상이 왜 안 되는 겁니까?

 

보험 드는 식으로 교회에 가봤는데 교회에 가서 사기를 더 당하니 말이에요. 그러니까 교회도 지켜주지 못하고 주님도 안 지켜주고 그럼 나는 누가 지켜주는데요? 그래 믿을 놈은 나밖에 없지요. 윤복희라면 여러분이라고 하겠지만요.

믿을 놈이 나밖에 없으니까 결국 나로부터 시작해서 결국 나로 돌아오잖아요. 그야말로 은하철도는 쑥 지나가고 자기는 멍하니 뒤의 허무(먼지)만 바라보고 있는 처지에요. 이런 인간에게 성령이 오셔서, 이미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셔서 “네가 바로 나를 핍박했던 자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알려주시니 세상에 이런 고마울 데가 어디 있습니까?

 

갈 수 없는 곳에 가게 하는 것, 5가 홀수가 아니고 짝수가 되는 세계, 예상 못할 세계, 진짜 어이가 없는 세계에 들어가는 거에요.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부자가 얼마나 가기 힘든지 (우리한테는 해당이 안 되지만)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힘들다고 해놓고도 그 나라에 가는 것은 못하지만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지 못하지만) 못한다고 다 손 놓고 있는 그 상황을 만들어놓고 가게 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이미 선미래 되게 하신 거에요. 못 가게 하게 하는 작전이었던 것입니다. 10분 쉽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안양20160212b히11장 21절(선先-미래)-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20절에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라고 나와있는데 이것을 아까 미래와 선미래라고 했지요. 그 다음에 21절을 봅시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되어 있어요.

이것도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48장에 있습니다. 이 이야기도 그냥 봐서는 안 보여요. 또 설명을 들어주셔야 됩니다. 일단은 은하철도 999의 티켓은 그야말로 어이가 없어요. 우리로서는 탈 수 없는 열차입니다.

아까 이희종 집사님께서 주께서 당겨줄 주셔야 된다는 그 말씀이 맞는 이야기인데요 당길 때 바로 핍박이라는 티켓으로 당겨주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십자가에 죽으셔야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인밖에 없어요.

 

그 죄인에 의해서 의인이 죽을 때 흘리는 그 피가 티켓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피로 구원 받는다는 말은 우리가 가해자라는 뜻이에요. 예수의 피로 구원 받는다고 해서 우리 온 몸에 피를 묻힌다는 게 아니고 제가 평소에 살아가는 것이 의인 되시는 주님을 몰라뵙고 나만 챙기며 살아간다는 것을 늘 고백하는 거에요.

그래서 치매에 걸리든 무슨 일이 있든 간에 인간에게는 의라는 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자기의 이익만 챙기게 되어 있어요. 그것은 우리의 성질이 더러워서 그런 것이 아니고 이 육신 자체가 그렇게 생겨서 그래요.

그러니까 참지 마세요. 자꾸 참으면 자기가 참은 만큼 자기가 착하다고 착각을 하게 되어 있다니까요. 참으면 점점 더 은하철도 999가 안 보이게 돼요. 나를 죄인 되게 만드시는 그 주님이 탑승한 열차가 더 크게 보이려면 그냥 참지 마시고 자기 자신이 얼마나 나 위주인가를 더욱 더 보셔야 돼요.

 

그래서 내가 자주 이야기하지만 교회라고 하는 것은 죄인들의 집합입니다. 의인들의 모임이 아니고 죄인들의 모임이에요. 그렇다면 죄인은 죄를 지어야 되지 않느냐라고 하는데 그 방식이 오늘 이야기했던 그 방식과 달라요.

죄인이 되게 하는 방식을 우리는 기껏 생각하기에 죄를 지으면 되는 방식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이 애굽 같은 세상(우리가 믿기 전에 있는 세상)은 선과 악으로 지배하는 세상이거든요.

그곳은 만약 선하려면 선을 행해야 되고 충분한 선이 없이 악의 비율이 많으면 악인이고 선한 쪽이 세게 되면 선인 또는 의인이 된다고 가르치면서 인간의 주체를 형성시켜 오는 그러한 세계입니다.

 

이걸 양육이라고 하고 교육이라고 하는데 합치면 사실은 이것은 조련입니다. 개를 조련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래서 종족마다 문화마다 윤리와 도덕이 다 달라요. 조련하는 전통이 다르기 때문에 다 다른 거에요.

같은 행동을 해도 어떤 문화에 가면은 그게 에티켓에 맞는 행동이 되지만 어떤 다른 민족에게는 아주 불경스러운 행동으로 취급할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서양 사람들에게는 껴안는 것이 예의라고 하지만 동양에서는 “왜 이러십니까? 지금 작업 거십니까?” 이렇게 되어 가지고 오해를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더러운 손을 가지고 음식을 먹고 서양에서는 음식을 먹을 때 포크를 가지고 덤벼들고 동양에서는 젓가락을 사용하지요. 저는 나이 60이 넘었는데 아직도 젓가락질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문화마다 다 다른 것은 이 조련이 죽 이어져 내려오는 역사와 전통이 되어서 그래요. 그런데 그것이 진리가 아니고 역사와 전통에 따라서 선과 악이 그 지역마다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통점이 있다면 어쨌든 간에 악을 멀리 하고 선을 추구해야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하여튼 건방이 늘어졌어요. 점점 더 갈수록 자기 자신을 몰라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을 전혀 이해를 못해요.

 

그래서 오죽했으면 “복음 알고 성령 받아서 헌금 하는데 그것도 죄입니까?”라는 소리가 나오는데 이것은 복음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죠. 더욱 더 악한 죄입니다. 앞에다가 성령 받아서, 감동 받아서, 자발적으로 하는 헌금이라는 쓸데없는 것을 추가했기 때문에 더 얻어 맞아야 돼요.

“십일조를 하면서 다림질을 해가지고 냈는데 이 정도 성의 같으면 이것도 죄입니까?”라고 묻는데 그 다리미질을 안 했으면 죄가 덜 되는데 다리미질을 했기 때문에 더 죄가 돼요. 이 선악적 사고방식이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자꾸 추가를 하는 거에요.

이것은 병적이에요. 그런데 선과 악 중에서 악을 추가하는 죄를 범했기 때문에 생명나무를 못 따먹는 게 아니고 선과 악에 대해서 안다는 그 이유만으로 그 근처도 오지 말라고 아예 생명나무를 옮겨놓아 버렸어요.

 

이것은 수요 설교 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수요 설교 때 지금 창세기를 하고 있거든요. 그 때 이야기했습니다. 선악을 알았다는 것이 왜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는 이유가 됩니까? 인간은 선악 자체가 품고 있는 그 원천과 그 배경과 그 미래의 역사를 모르고 뱀에게 유혹을 받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남아 있는 계획을 삼킬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노골적으로 마귀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것밖에 되지를 않지요. 오늘 아침 뉴스에 나왔어요. 고등학생한테 “일당 75만원 줄게. 전화 몇 통 걸어라.”라고 하니까 전화를 걸었어요. 보이스 피싱인데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그 아이들 입장에서는 지금 뭐를 하는지를 모르고 다만 눈앞에 자기의 이익만 보이는 거에요. 선악과를 심어놓은 취지에 대해서 뱀은 아는데 아담은 몰라요.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고 생명나무를 따먹으면 되는 줄로 알고 있어요. 인간은 이처럼 마귀한테 속아넘어가는 겁니다.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벌이는데 이 여자의 후손은 이 땅에 없는 후손이라고 해요. 창세기 3장에 남자(아담)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이라고 했는데 여자라는 게 이 땅에 없어요.

왜냐하면 여자가 남자의 일부로 포함이 되기 때문에 여자라는 것이 없습니다. 아담이 죽을 때 여자도 같이 죽어요. 아담이 이마에 땀 흘릴 때 여자는 이마에 땀도 안 흘리고 생생하게 더 젊어지는 게 아닙니다.

 

다 같이 늙고 같이 죽습니다. 하와라는 것은 미래의 모습입니다. 여자의 이름이 생명(하와)이 되는 것은 거기에 합당한 여자의 신랑이 등장하는 그 시점이 미래지요. 그 미래에 대한 선미래로 이름을 하와라고 지은 거에요.

아직 하와가 아닌데 이제는 하와가 되게 하기 위해서 신랑이 오실 거에요. 보이지는 않지만 그분이 바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님이십니다. 생명이 오게 되면 그 예수님의 신부가하와(생명)가 되는 겁니다.

그러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줄도 모르고 인간은 그저 따먹으니까 주께서 멀리 치워놓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까? 죄를 지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는데 인간은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죄가 뭔지를 모르기 때문이에요.

 

본인이 죄를 짓는 것은 선악 사고방식 내에서 나오는 죄이기 때문에 이것은 온전한 죄가 아닙니다. 죄를 지어놓고 반성하면 되지요. 그리고 이 반성하는 것을 가지고 자기는 선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반성하는 것도 죄라는 사실을 인간들은 모르는 거에요.

반성해서 사라질 죄는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모든 죄는 반성한다고, 회개한다고 사라질 죄가 아니에요.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지, 회개해서 구원 받는 게 아니에요. 반성을 하게 되면 반성하는 자기 자신이 더 위대해 보이고 멋있어 보이고 참 대단해 보이고 되게 착해 보여요.

반성하는 것도 마귀가 하고 있다니까요. 부흥사들이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할렐루야.” 밤낮 이 짓을 하고 있다니까요. 목사의 모든 행동은 월급과 관련이 되어 있어요. 이렇게 봉사하는데 교회에서 월급 더 올려달라 그 소리에요.

 

모든 게 돈과 관련 되지 않는 행동은 안 나오는 법이에요. 그게 밑천이에요. 성경도 꼭 옆구리에 붙여서 가슴에 꼭 끌어안듯이 쥐어요. 성경책 끌어안고 가다가 또 이쁜 여자가 지나가면 그것 쳐다보다가 전봇대에 부딪히고요. 그건 코미디에요. 그런 코메디가 없어요.

완전히 쇼지요. 목사는 엔터테이너에요. 쇼하는 사람이에요. 그런 행동을 하면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이 정도 대우를 받아야 마땅합니다.’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런 식으로 조련당하면서 우리가 주체를 형성했거든요.

우리가 그런 식으로 양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네가 그러냐?”라는 식으로 계속 교육을 받은 거에요. 하여튼 우리 집안이 보통 집안이 아니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제가 이 말의 뜻은 인간은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주께서 생명나무의 관점에서 죄를 지어주셔야 돼요. 생명나무의 관점을 아시는 분은 주님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은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어떻게 하시는가? 거기에 대해서 히브리서 11장 본문을 한 번 보고 창세기를 보겠습니다.

진도 빨리 나간다고 좋은 것은 아니잖아요. 하여간 빨리빨리가 문제에요. 다른 사람들은 식사하는데 너무 빨리 먹어가지고 조급증이 나서 말이에요. 여기 히브리서 11장 21절에 보면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라고 했습니다.

 

지금 무엇을 한 것인가 하면 선악과의 관점에서 네가 알던 죄가 아니고 생명나무(하나님)의 관점에서 아는 죄를 주께서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그게 창세기 48장 16절부터 나옵니다.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에서 사자라고 하는 것은 천사를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나에게 찾아왔던 그 천사를 이 아들에게 내려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거에요. 이삭이 에서와 야곱한테 축복할 때는 재물, 재산, 부동산 이런 것들을 축복해줬지요. 그런데 야곱이 자기 손자한테 축복할 때는 뭘 줍니까?

“내가 겪었던 그 길을 가게 하옵소서.”라고 하지요. 야, 이것을 손자가 들었으면 되게 기분이 나빴을 거에요. 부동산을 유산으로 남겨주면 기분이 좋은데 “야야, 내가 너한테 마지막으로 줄 게 있다.” “아버지 뭡니까?” “내가 고생한 대로 고생해라.”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주님께서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준비된 선물이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준비된 선물이 바로 십자가로 가는 길이에요. 성령을 주십니다.

왜냐하면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성령을 받으셨잖아요. 그 성령이 주님을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인도했잖아요. 죄인을 십자가에서 죽을 때까지 이끄신 것이 성령의 일이라면 그 성령을 주께서 자기 백성에게 그대로 축복으로 주시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가 원치 않는 길,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고 주께서 원하는 길로 강제 이송시킵니다. 강제로 끌어당겨요. 그런데 강제로 이 일을 하려면 우리는 정신병자가 되어야 돼요. 정신병자로 취급받고 손목을 잡혀서 병원차를 타고 정신병원에 수감이 되어야 돼요.

 

우리네 인생, 성도의 인생이 이래요. 주께서는 우리를 아예 정신병자로 간주하고 우리를 그냥 놔두시죠. 그러면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육신의 본성인 가시적인 것, 내가 지금까지 양육 받고 조련 받은 그 성격, 그 성질, 나만 잘 되면 된다는 그 쪽(넓은 길)로 자꾸 주체의 본성대로 가고자 하는 겁니다.

사람은 물이 있고 빵이 있고 떡이 있어서 사는 게 아니에요. 인간은 주체 관리 때문에 사는 거에요. 주체 관리에 희망이 없으면 다리 밑에 떨어져서 자살합니다. ‘내가 어떤 인간인데 나 더는 이런 꼴을 보고 못 산다.’ 하고 풍덩 뛰어내려 죽어 버리잖아요.

장로가 관악산에 가서 죽고요. 내가 어떤데? 네가 어떤데? 자기가 자기 자신을 몰라요. 왜? 자기는 주변에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을 주워 모아가지고 그것으로 주체의 자아상을 이루었기 때문에 주님이 보시는 자아상을 본 적이 없어요.

아이, 참 불쌍해요. 내가 지난 낮 설교 때에 뭐라고 했습니까? ‘십자가 옆에 있는 강도가 바로 나에요.’라고 안 하던가요? ‘그 사람이 바로 나에요.’라고 백지영의 노래에도 나오잖아요. 십자가 옆에 있는 강도가 바로 나에요. 이것만 봤으면 자살은 안 합니다.

 

‘주께서 나를 은하철도 999를 태워주시려고 이렇게 했구나. 그리고 옆에 있는 예수님은 나의 핍박 때문에 돌아가시고 나 대신에 나의 죄를 가져가시려고 저렇게 죽으셨구나. 고맙네. 참 이런 고마움을 뭐라고 보답해야 될지..’

그 고마움이 그 상태 그대로 계속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체는 그저 검찰청에 가면 “찍지 마.”라고 포토라인 지나가서 뒷문으로 빠지는데 이것은 평소에 나는 어느 대학 출신이고 유학 갔다 오고 우리 아버지가 대통령이고 나는 딸이고 고소영이고..

이런 식으로 전부 외부에서 9시 뉴스에 나오는 이야기로 자기를 뒤집어 씌우는데 누더기에다가 9시 뉴스를 걸쳐봐야 그것이 자기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시청률이 7%가 되면 김숙하고 윤정수하고 결혼한다고 하는데 그게 시위하는 거에요.

 

“보지 마라.” 왜? 결혼 안 하기 위해서에요. 혹시 7%로 시청률이 오를까 싶어서 피켓 들었어요. 희한한 코미디에요. 죄를 주님한테 다시 조련 받아야 됩니다. 예수님을 모델로 삼아서 다시 조련 받아야 돼요. 의인인데도 불구하고 화목제물이 되기 위해서 죄인이 되어서 죽습니다.

그 화목제물에 예수님은 죄가 없으면서 들어갔고 우리는 죄가 있는 채로 화목제물에 섞여 들어가야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화목제물만 된다면 주님 앞에 영광이 되고 okay가 돼요. 주님이 감독을 했거든요. “okay. 좋아. okay.” 영화 잘 찍은 거에요.

우리가 죄인으로서 의인인 주님과 하나가 되어서 화목제물에 섞여 버리면 okay 싸인이 납니다. 지금 하늘나라에서 상영하고 있습니다. 엘리야하고 모세하고 쫙 촬영된 것이 변화산에서 한 대목 나왔잖아요.

 

“주님 언제 돌아가십니까?” “좀 기다려 봐라.” 대사도 있었습니다. 바로 그 변화산(천국)의 모습이 우리(나)에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죄를 알려주는데 그 죄가 창세기 48장 16절에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것은 환난+건져주심입니다. 그러니까 건져주시는 분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우리의 평소의 살아가는 모든 것이 환난이 되어야 되는 거에요.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우리의 입장에서는 집안에 아무 문제가 없으면 헤헤거리면서 행복을 느끼고 내 뜻대로 안 될 경우에는 이걸 환난으로 간주하는데 이 개념을 지워야 됩니다. 그냥 노래방에서 노래 불렀는데 100점이 나올 때 그것도 환난이에요. 성도가 하는 모든 짓은 환난이 됩니다.

이걸 아셔야 돼요. 바나나 잡술 때 지금 환난을 먹고 있는 겁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고난이 아니고 고생이라고 전에 제가 설교하면서 많이 이야기했어요. 고생은 고난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연결될 때만 고난입니다.

평소에 살아가는 것은 자기의 분통대로 되지를 않아서 지금 자기의 성질을 못 이겨서 마음으로 고생을 하는 거고, 또는 욕심을 내어서 과도한 투자를 하다보니까 자기 집을 말아먹어서, 대출 냈는데 빚을 갚을 길이 없어서 집이 완전히 부도 났을 때 그런 것을 가지고 고생을 하는 거에요.

 

전부 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에 해당하는 세상적, 개인적 고생이에요. 모든 노래나 드라마를 보면 고난에 대해서는 언급한 것이 없고 전부 다 고생에 대해서만 언급한 거에요.

어릴 적 이복동생이 고아원에 가서 서로 바뀌어서 난리를 치고 새동서가 들어왔는데 또 싸우고... . 복잡해서 보지를 못하겠어요. 주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하면 저울을 갖다 놓습니다. 그리고 내가 되고자 하는 것을 저울에 달아보는데 사실은 이것이 가벼운 거에요.

그리고 네가 잘되고자 하는 그것(너) 때문에 고생 말고 고난을 받는 분을 밑에 같이 달아두고는 어느 쪽이 축복이냐 하는 겁니다. 우리는 내가 되고 싶은 것을 축복이라고 하면서 그 동안 줄곧 그곳으로 질주하고 달린 거에요.

 

그리고 그런 철딱서니 없는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주님은 점점 더 우리가 싫어하는 그 장소로 내려 가신 겁니다. 그게 축복과 저주가 뒤바뀐 거에요. 그 뒤바뀐 것을 보고 “야, 뒤바뀌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뒤바뀐 그 모습을 실제로 보여주는 겁니다.

야곱이 “제 두 아들입니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그래? 내가 축복해줄게.” 하고 그 눈이 먼 아버지가 애써서 “어느 애가 큰아들인데?”라고 하면서 위치를 정해놓고 어긋맞게 축복하려고 하니까 “아버지, 그렇게 하면 힘드니까 자리를 바꿔서 제대로 하시는 게 낫잖아요?”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아니야. 자리 바꾸지 마.”라고 했어요. 누가 복을 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어긋맞게 하는 행동이 중요해요. 그게 왜 중요한가 하면 야곱이 자기가 잘 되려고 하다가 허리가 나갔어요. 얍복강에서 얻어맞아서 그때부터 지팡이를 짚고 살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봅시다. 21절,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라고 되어 있지요. 창세기에서는 침상 머리에서 축복하는데 여기에는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축복을 합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안목에서 고생과 고난의 의미를 반대로 바꾸어 주는 의미로 이렇게 한 겁니다. 이 말은 야곱 속에는 예수님의 영이 들어있다는 것과 동시에 은하철도 999를 타려면 이런 바뀌어짐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바뀌어지는가? 뭘 하면 됩니까? 뭘 하지 마세요. 왜? 이미 우리는 죽은 자니까요. 그냥 내가 하는 식으로 하다보면 강제 조치가 일어나요. 그 조치는 뭘 하든지 내 뜻대로 안 되게 해주시는 겁니다.

 

저는 평생 로또를 사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것을 제일 싫어해요. 로또를 저에게 누가 줘 본 사람도 없어요. 아주 싫어해요. 그런데 길을 가다가 바람에 로또가 날아와 가지고 1등이 되는 정말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면 이것도 주께서 바꾸어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원치 않는 쪽으로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기도를 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그 기도의 내용은 누가 원하는 거에요? 기도하는 당사자가 나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을 하게 해놓고 그것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축복을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미리 이야기하니까 아예 기도를 안 하는 사람이 있는데 기도를 하지 않게 되면 주님 앞에 조련을 받을 수가 없어요. 기존의 주체를 그냥 유지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컬컬하고 답답한 일을 발생시켜 버려요.

 

기도를 안 하고는 못 배기게 만들어요. 공부를 하고 나갔는데 차를 누가 박아놓았다면 이것을 보고는 기도를 안 할 수가 없어요. ‘주여, 어찌 합니까? 어떻게 할까요?’라고 고해를 부르면서 기도를 할 수밖에 없지요.

반드시 사람은 이런 삶의 위기에 처했을 때는 부르짖게 되어 있고 이게 육신이 타고난 본성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악한 세상에 마음대로 살면서 형성된 주체가 있기 때문에 그 주체는 하나도 쓸모가 없는 게 아니고 끝까지 치매에 걸려서 어떤 짓을 할 때까지 그 주체가 성공해요.

“내 돈 내놔라.” 그 주체가 다 쓸모 있어요. 우리 어머니도 맨날 “금반지 내놔라. 금반지 내놔라.”라고 하셔서 “어머니, 금반지 없습니다.”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아니, 있어. 금반지 내놔라.”라고 해요. 지금은 그 말을 좀 안 하시는데 작년에는 금반지 내놓는 그 인간 죽으라고 그렇게 저주를 해대십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끝까지 이 주체를 가지고 가고 절대로 우리의 뜻대로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를 할 때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적어서 하는 사람도 있어요. 안 적으면 벌벌 떨기 때문에 보고 하는 거에요.

그 내용이 얼마나 좋은 문장이고 이근호 목사님 기도하는 내용을 베껴서 하기도 하고요 하여튼 누가 봐도 하자가 없는 기도 제목과 내용을 다 적어놔요. 그거 소용 없습니다. 뜻대로 안 해줍니다. 뜻대로 안 된다고 기도하라는 거에요.

자기 딴에는 트릭을 써가지고 백날 해봐야 소용이 없어요. 왜? 어긋맞게 하시니까요. 내가 예상 못할 다른 길로 데려가기 위해서 그런 거에요. 내가 예상하는 것 전부 다 내놓아야 돼요. 그래서 베드로에게 “띠 띠우고 네가 원치 않는 길로 데려가리라”(요한복음 21장 18절)고 하신 거에요.

 

베드로가 성령을 받은 사람이잖아요. 성령을 받았으면 자기가 알아서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성령을 받았다고 자기가 알아서 가는 게 아니에요. 내가 알아서 하는 것대로 안 해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성령을 받은 사람이에요.

이것을 우리가 오해하는 이유는 우리는 자꾸 선미래가 아니고 현재를 고집하기 때문에 그래요. 현재는 가짜 미래를 상상하게 되어 있어요. 미래를 모르니까 자꾸 가짜 미래를 만들어내는데 주께서는 이걸 바꿔치기하십니다.

그러면 바꿔치기 하시면 어떻게 됩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너는 왜 1등을 하라고 해도 너네 반에서 3등밖에 못해?” 하고 나무라던 사람이 나중에 은혜를 받고 난 뒤에 “3등도 하나님의 큰 은혜구나.” 부모 본인이 바뀌어요.

 

몇 초, 몇 분 가지도 않아요.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그래, 3등도 참 잘 했다. 네 밑에 4등, 5등도 있잖아. 1등 못했다고 내가 이렇게 닦달을 했는데 이게 다 엄마의 욕심이다. 내가 미안하다.”고 하지요. 그것도 몇 분 가지 않아요.

왜? 날마다 바뀌어야 되니까요. 바꿔치기 한 번 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게 계속 반복이 돼요. 끝까지 어긋맞게 가는 겁니다. 지팡이는 뭡니까? 쥐어패는 도구지요. 그런 도구인 동시에 내가 이렇게 얻어맞았음을 보여주는 증표가 되는 겁니다.

야곱은 지팡이를 들면서 하나님의 사자에게 얻어맞아가지고 ‘내가 진작에 죽어야 될 인간이 주님 덕분에 살았습니다.’라는 그 사실을 절뚝거릴 때마다 남한테 그것을 증거하고 다니는 거에요. 주님을 만났음을 증거하는 거에요.

 

김대중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마는 그것 안 하고 죽었지만요. 야곱은 김대중보다 낫네요. 그걸 증거하면서 살아갔습니다. “이 후손들아. 하나님이 너희도 나처럼 되게 하시기를 원한다.”라고 축복을 한 겁니다. 누가 낫고 못한 것이 아닙니다.

둘째 아들이 “나는 더 복 받았다.”라고 좋아하라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앞에 말한 내용을 담고 어긋맞게 축복을 하는 거에요. 그래서 야곱과 에서 가운데서는 축복과 저주가 확연히 드러나는데 그 다음부터 야곱이 축복을 할 때는 저주를 해도 그것이 축복이 돼요.

그렇게 바뀌어요. 여러분이 신명기나 창세기를 보면 신명기에는 모세가 축복을 하고 창세기에서는 야곱이 열두 아들에게 축복을 하지요. 그런데 축복하는 내용이 좀 이상하지요? 이것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망하고 어떻고 하는데 그것도 축복입니다.

 

왜냐? 너한테 어떤 점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만큼 더 큰 축복이 없어요. “너는 육신이야. 이런 문제가 있어. 너는 이것밖에 안 돼.”라는 것을 미리 알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도로서 이제는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안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베드로한테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인 것도 큰 축복입니다. 사도바울이 사실은 살인자입니다. 디모데전서에 보면 “포행자요 살인자요”라고 나오지요.

그런데 제가 이런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하는데 어떤 사람은 우려하는 사람도 있고 말리는 사람도 있어요. 살인하는 것이 축복이 되어 버리면 많은 사람들이 성질이 나서 사람을 죽여놓고 “이근호 목사님이 그것도 축복이라고 했다.”라고 하면서 자기 행동을 정당화시키면 어떻게 하느냐 이 말이죠.

 

“간음한 것도 축복입니다.”라고 하니까 이 말을 듣고 간통죄 폐지한 것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도 한두 명이 아닙니다. “죄가 확산되는 것을 방지해야 참된 주의 목자이지, “죄 더 지어라. 더 지어라. 더 지어라.”라고 부추기고 그것을 장려하는 자를 어떻게 참된 주의 목자라고 할 수 있느냐?”라는 식으로 비난이 쏟아질 게 뻔하다 이 말이죠.

저는 거기에 대해서 한 마디 하겠습니다. “어이가 없네.” 원래 이게 논리적으로 설명이 될 수가 없어요. 5는 홀수가 아니고 짝수입니다. 천국이 원래 그래요. 이것이 납득이 될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납득이 안 돼? 죄 지었으면 지옥 가. 그래. 이래도 납득이 안 되고, 저래도 납득이 안 되면 이야기해버려요. 근본적으로 십자가 피의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못 알아 듣습니다. 그런데 뭐 거기에다가 좋은 말을 하겠습니까?

그 다음에 22절을 봅시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 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에서 원래 해골은 자기가 죽고 난 뒤에 생기는 거지요. 그러면 해골에 대해서는 자기가 손을 떼야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해골을 언급하는 것은 선미래로 보는 거지요.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에 비해서 해골이 되는 것도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나의 죽음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이지요. 보통 죽은 게 아니라는 거지요. 그러면 어째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에 대해서 창세기 49장 30~32절을 봅시다.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 소유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아브라함과 그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지요.

구약은 땅에 점점이 흔적을 남기듯이 하나님의 계시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여러분 여름이 되면 방학 때 곤충채집 같은 과제를 받아본 적이 있지요. 매미 같은 것을 잡아가지고 무엇으로 고정시킵니까? 핀이지요. 구약은 이방 민족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그 사건을 핀으로 곤충 채집하듯이 고정을 시켜버립니다.

 

그러면 핀으로 꽂아놓은 곤충들이 비행기가 계류장에 있는 것처럼 나란히 꽂혀져 있으면 그런 사건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계시가 돼요. 그래서 저는 이것을 이번 수련회에서 미장센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하나의 이미 고정된 무대장치에서 정지화면처럼, 연극무대처럼 역할들을 하는 거에요.

역할들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그들 속에 장차 오실 예수님의 영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들을 모으면 그리스도의 그림이 나오지요. 그러니까 애들이 갖고 노는 퍼즐 조각을 맞추면 처음에 각도가 안 맞다가 딱 맞으면 기분이 굉장히 좋지요.

모나리자 그림이라든지 동화에 나오는 마블 대리석 캐슬이 나오면 기분이 좋잖아요. 구약의 이스라엘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선미래를 분할해서 조각조각을 나누어 가진 자들의 집합이라고 보기면 돼요.

 

아까 누가 나한테 물었지요. 말라기가 이해가 안 된다고 했지요. 말라기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제가 방금 이야기한 것을 몰라서 그래요. 그들 하나하나가 연극배우라는 사실을 몰라서 그래요. 구약이라는 것이 배우들이 역할을 하는 무대장치라는 것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들이 하라고 하는 대로 우리가 하면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들이 하라고 하는 것은 지금은 하지 말라는 거에요. 십일조 같은 것은 아무 소용이 없어요. 십일조, 주일성수, 안식일 이런 것이 없어요.

 

우리가 영광을 돌리는 것은 예수님의 피 때문에 영광을 돌리지 우리가 뭘 행해서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해서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노선 이탈을 시키고 우리가 가려는 넓은 길 말고 좁은 길로 이끌어 내신, 주님이 우리한테 행하신 주님의 행하심 그 자체를 보고 주님이 기뻐하는 거에요.

우리를 손대는 거지요. 가만히 두지 않고 자꾸 찝쩍거리는 거에요. 가만히 있는 개한테 자꾸 찝쩍거리듯이 그렇게 하면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가만히 두지 않고 웩하고 달라들겠지요. 그게 영광이 되는 거에요.

 

그럴 때 또 다시 ‘주여 이럴 수가 있습니까? 왜 내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으셨습니까? 저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남들은 인생이 멀쩡한데 나는 왜 이렇게 혼란스럽고 망가지고 이래가지고 어찌 살라고요.’ 주께서 그렇게 퍼즐로 만드시는 거에요.

그런데 자진해서 “나 망하렵니다.”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주께서 우리의 뜻대로 안 되게 하시는 거에요. ‘로또 1등해서 받은 돈을 어떻게 다 처치하라고 이렇게 많은 돈을 주시는 겁니까? 저는 돈이 많아서 못 삽니다.“라고 고함지르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또 ‘차가 3대인데 외제차를 또 주시면 나는 어떻게 굴리라고요?’라든지, ‘나는 애가 그저 평범하기를 원하는데 이번 수능에서 전국 1%가 되어가지고 이 천재를 어떻게 키울까요?’ 이런 거요. 내가 너무 과하게 얘기했지만 평범하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선수가 올림픽 금메달을 목표로 했는데 금메달을 따고 난 뒤에 허리를 다쳤을 때 ‘주여, 제가 금메달을 따는 것을 원했지 허리까지 다치는 것은 엄마의 심정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하십니까?’ 그런 일들이 굉장히 빈번하게 많이 생기지요.

 

옛날 우리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는 시험을 쳐서 들어갔습니다. 그 시험이 어려웠잖아요. 어떤 아들이 시험에 불합격 됐는데 시험보다 어려운 것이 있었어요. 그게 바로 전화에요. 전화로 당첨된 것을 알려주는 거에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함께 생겨버린 거에요.

그처럼 우리 인생은 따지고 보면 항상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같이 와요. 그리고 좋은 소식만 있으면 걱정이 되어서 나쁜 소식을 일부러 찾아봅니다. 개가 어디 똥을 싸지는 않았나 하고 말이에요.

항상 우리는 자기를 정리하고 추수리는 것이 버릇이 되어있어요. 왜? 주체가 그런 식으로 양육 받은 주체이기 때문에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거든요. 개성공단이 날아가든지 말든지 나만 잘 되면 그만이에요.

 

그걸 주께서는 해골로 만들어 버립니다. 요셉은 지금 사는 게 잠깐이라는 거에요. 막벨라 굴에 해골이 집합할 때 막벨라 굴이 몽땅 하늘로 올라갑니다. 실제가 아니지만 실례로 그게 무대장치이기 때문에 연극무대에 올라가는 것이 있잖아요.

막벨라 굴이 그 세트가 되어가지고 거기에 있는 사람은 언약에 의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은 거기에 소복이 다 모여 있어요. 거기에 해골이 집합 된 사람은 그 해골이 그대로 올라가가지고 천국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삽니다.

왜냐하면 그 막벨라 굴에 예수님이 합세를 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걸 가지고 예수 안에서 부활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그걸 예수 안이라고도 하고 구체적으로 말해서 십자가 안이라고 되어 있어요.

 

십자가 안이니까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죽음 안이에요. 죽음 안이니까 그 안에서는 죽은 자들의 집합이 되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마리아와 마르다 오빠의 경우에요. 오빠가 살아있을 때도 산 사람일까요 죽은 사람일까요?

죽으면 아마 살아있을 때만 산 사람이고 죽으면 죽은 사람이겠지라고 여동생들이 오해를 한 거에요. 그런데 오빠가 나을 수 있었는데 죽였어요. 그러니까 행복하게 사는 좋은 소식과 오빠가 갑자기 죽는 나쁜 소식이 함께 있었던 겁니다.

 

행복한 우리 가정에 오빠가 죽는 나쁜 소식이 있었을 때에 그렇게 믿음이 좋다고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 예수님 코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던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가 진짜 예수님을 붙들고 멱살을 쥐고 흔들어 댔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따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우리 오빠 살려내세요. 이것 하려고 주님이 늦게 오셨습니까? 의도적으로요? 내가 분명히 죽을 줄 알고 미리 보냈는데 왜 소식이 없다가 이제 죽고 난 뒤에 꼴 좋다.” 하고 흔들어 댔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이 “나중에 장차 살게 되리라”고 하셨어요.

“예수님이 재림하고 나서 사는 것 말고 그것은 우리도 알고 있고요.” 하고 흔들어 대는 거에요. 마지막 때 사는 것 말고 지금 당장 살려내라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오빠 안 죽었다.” “죽었잖아요.” 안 죽었다는 겁니다.

 

“죽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눈물을 확 쏟으셨지요. 우리 식으로 표현한다면 ‘씨, 안 죽었는데 안 죽은 게 맞는데 왜 자꾸 죽었다고 할까?’라고 했겠지요. 데리고 갔습니다.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습니다.

산 사람을 부르듯이 부릅니다. 풀이하면 “나사로야, 오겐끼데스까?” 이 말입니다. “거기에 잘 있지?” 그러니까 속에서 “와따시와 겐끼데스, 저는 잘 있습니다.”라고 했고 “그래, 나오너라.”고 하니까 칭칭 감고 나왔지요. 말은 못하고. 그러니까 “붕대 풀어줘라.”하셨어요.

그 전에 하신 말씀이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음이 없다.” 왜? 예수 안에 있는 자, 예수님께서 다루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을 나사로가 보여줬습니다. 그래놓고 나사로는 살다가 또 죽었어요.

 

그런데 가시적인 주체, 눈에 보이는 것으로 주체를 형성한 사람은 “에이 그거 봐. 나사로 늙어서 또 죽었잖아.”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 말고 예수님이 주신 주체, 예수 안(십자가 안)에 있는 주체를 봤을 때는 마귀가 죽으라고 밟아도 안 죽어요. 기관총으로 두두두 쏴도 안 죽어요.

왜냐하면 죽을 수가 없어요. 이미 죽었다가 부활한 능력이기 때문이에요. 죽음을 이기고 나온 능력을 부활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한 번 죽어서 죽음 정도는 이미 봤기 때문에 그 죽음이 아무리 달려들어도 이미 죽음을 이긴 능력이 작용하는 곳에는 죽음이 힘을 못 씁니다.

그래서 사람이 마귀한테 복종하는 이유가 죽기를 무서워해서 그렇고 죽기를 무서워하는 것은 다른 말로 두려움이에요. 모든 인간의 행동은 하나하나가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아마 개도 이럴 걸요. 두려움에서 나오지 않은 행동은 어느 하나도 없어요.

 

그저 전화를 거는 것도 두려움이고 걱정하는 것도 두려움에서 나온 것은 물론이고 좋아하는 것도 두려움이고 맞벌이를 해도 두려움이에요. 또 어는 놈이 와가지고 “아제요 돈 좀 빌려줘요.” 해가지고 언제 뜯어갈지 몰라요.

모든 게 두려움이에요. 성경공부에 참석하라고 했는데 참석하고 싶어도 못하고 “예,예.” 하는 그것도 두려움이에요. 그 두려움을 참지 못해서 타인을 항하여 화풀이를 하는 것이고 그 화풀이의 대상자가 되어달라고 사람들은 가정을 이룹니다.

가족은 좋은 점이 내가 화풀이를 해도 그것을 받아준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혼자 살면 화풀이를 할 데가 없어서 외로워요. 그런데 부부끼리 살면 좋은 점은 화풀이를 하면 받아주는 쪽이 있어요.

 

“고만 하래이.” “고만 하긴 더 할긴데. 내가 얼마나 화가 나는데..” “고만 하라고 했재?” “그럼 우얄낀데, 우얄낀데.” 이런 식으로 하면서도 부부가 있는 것이 좋아요. 그래서 누구 하나가 일찍 돌아가신다고 하면 화풀이를 할 데가 없어서 난리가 나요.

어떤 영감(할머니)을 만나서 살든지 해야지 정말 화풀이 할 데가 없어요. 이왕 만나는 영감, 재벌을 만나가지고 하면 자식들이 “돈 보고 했지?”라면서 달라드는 게 드라마 엄마에 보면 나와요.

 

그 모든 이야기가 두려움에서 나오는 거에요. 그것이 주님이 보시기에 “참 어이가 없네.”가 되는 거에요. 이 세상은 진짜 어이없이 우리는 내 주체,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벌벌 떨면서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육신 때문에 할 수가 없어요. 그때마다 주께서는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게 하시면서 “이미 너는 선미래로 구원 되었다. 그러한 죄와 이러한 벌벌 떰을 통해서 십자가에서 이미 다 이루었다. 아무 염려할 필요가 없다. 오늘 죽어도 낙원에 간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시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옛날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살았던 그 가운데서도 주께서 기적적으로 찾아오신 것처럼 기적적으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찾아오셔서 우리가 에서가 되게 하시고 야곱이 되게 하시고 요셉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