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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2010 겨울 수련회 / 요한복음 (어디서 왔느냐) 4강 본문

십자가마을 수련회/10겨울(요한복음)

2010 겨울 수련회 / 요한복음 (어디서 왔느냐) 4강

정인순 2014. 1. 1.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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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강의: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제 4강

요한복음 1장 6절부터 보면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그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 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라는 이 말은 기존의 모든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은 누가 독점하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세례요한한테 일단 거쳐라, 그 말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사람들 다 나에게 와서 점검 받아. 제대로 예수님인지 아닌지는 나한테 와서 점검 받아라.’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왜? 자기는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그래요. 결국 하나님은 짝을 보냈지요. 빛과 빛의 증거자, 이런 짝을 지어서 우리에게 나타나게 했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세례요한이 증거 한 것은 놀랍게도 ‘아니다’를 증거 한 거예요. “너 메시아냐?” “나 메시아 아니다.” “너 빛이냐?” “나 빛 아니다.” ‘아니다’를 통해서 빛을 설명한 거예요.

그야말로 부정신학이죠. 부정신학이 없이는 안 되는 이유가 이미 우리 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나는 빛이 아니고 메시아도 아니다.” “그러면 너는 뭐냐?” “그냥 소리다.” 소리는 자기 외침이 아니라 그 소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 중간역할이죠. 빛에서 와서 빛으로 내려가면서 중간에 걸쳐서 올 때 여기가 소리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그 소리를 따라가면 어디에 도착됩니까? 빛에 닿죠. 세례요한의 존재이유, 자기는 무엇 때문에 존재한다? 자기 때문에 자기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빛 때문에 일부러 하나님께서 나를 만들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는 대충 이끌어주고 빠져버리는 거죠. 견인역할, 앞장서서 이끌어주고 이끌었다 싶으면 역할이 끝나버리고 그 다음에 빛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하는 겁니다.

그럴 때 이끌어주는 이것을 가지고 세례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의 세례개념은 아주 새로운 개념이에요. 요한복음의 세례개념은 오실분의 노선에 당신이 포함되었습니다, 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의식이 세례가 되는 겁니다. 당신이 존재하는 그 위치가 빛으로부터 와서 빛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그 노선, 그 길, 그 하이웨이 위에 당신이 놓여 있습니다, 하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 세례가 되는 겁니다.

물세례가 세례요한이고 그 다음에 반드시 성령세례입니다. 물세례+성령세례, 이것이 세례요한이 보여주고자 하는 세례가 되지요. 물세례는 누가 해주고요? 요한이 하고 성령세례는 누가 하는 겁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앞에서 이끄는 대로 세례요한이 한대로 세례를 주게 됩니다. 이 노선에 포함된 사람에게 성령세례를 주게 되어 있어요.

그런 식으로 두 분 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입었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물세례 혹은 성령세례 속에 있을 경우에만 예수님에 대해서 알수가 있게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모든 요한복음의 내용은 간단하지요. 세례의 의미를 보여주기 위한 표적으로 이렇게 보여줄 수가 있습니다.

제일 첫 번째 표적으로 요한복음 2장에 보면 뭐가 나오지요? 가나혼인잔치가 나오지요. 우리 이 미아 씨 결혼식 할 때 여기에 대해서 설명을 했습니다. 그 때 설교내용이 뭔지 이 미아 씨 하고 송 재원 씨 다 잊어버렸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의 어머니를 이렇게 봤어요. 물의 양과 포도주의 양을 따졌습니다. 포도주가 모자란다, 해서 양적으로 따지는 거예요.

 교재 4페이지, “포도주의 존재의의는 ‘모자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변함’에 있다.” 잔치 손님이 즐거워해야 하는데 포도주가 부족하다. ‘적은 포도주’에서 ‘많은 포도주’로 해 달라고 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부탁을 한 거예요. 그런데 정작 예수님이 보여준 것은 ‘많은 포도주’가 아니라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거예요. 양적인 변화가 아니라 질자체가 질적으로 달라져야 된다는 거죠.

질적으로 달라지는 이것은 누구 소관이냐 하면 하나님의 창조가 개입해야 돼요. 혼인잔치에 무엇이 개입되는가? 하나님의 창조가 개입되어버리면 어떤 특징이 있는가? 그 혼인잔치 자체의 의미는 이제 없는 거예요. 사람이 누구와 누가 결혼식을 했다는 그 자체는 의미가 없고 그 결혼식은 누구를 위한 결혼식이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신부가 될 수 있는 변화가 일어나는 결혼식으로, 하나의 모델로 등장해 버리죠.

하나님은 손해 안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뭘 도와달라고 하면 우리는 그냥 도와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 예를 들어 여기 귤이 하나 있습니다. 슬슬 언어의 한계가 오면 모션으로 가야 됩니다. “귤 좀 까주세요.” 하면 귤을 까서 알맹이는 자기 입에 넣어달라는 이야기죠. 하나님께 “귤 좀 까주세요. 하나님!” 하면 하나님께서 귤껍질을 까서 홀라당 자기가 먹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주체를 너 쪽에서 제안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일에 하나님이 개입해버리면 주체가 너의 요구와 상관없이 주님의 자신의 일로 전환됩니다. 그래서 복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복을 달라고 하지만 복을 줘놓고 복 받은 그 인간마저 자신이 일방적으로 사용해 버려요. 그걸 복이라고 하는 겁니다. 복 함부로 달라고 하다가 큰일 납니다. 몽땅 거덜 나는 수가 있어요. 다 빼앗겨 버립니다. 그것이 표적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표적이라는 말 자체가 어렵지요.

세례라는 의미가 변화, 변화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변화되는지? 그것은 몰라요. 왜냐하면 그 변화되는 것을 자꾸 뒤로 지연시킵니다. 이 말도 어려워요. ‘지연 시킨다’ 지연시킨다는 말은 인간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하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니까요. 나중에 알게 된다는 그 어떻게 된다는 그 해답을 앞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표적이라고 해요.

표적을 통해서 자꾸 어디로 잡아당기느냐 하면 결국은 이렇게 달라질 것을, 이라고 하는 그것을 향하여 점차 조금씩 조금씩 표적을 통해서 당기는 역할을 하지요. 이 전체는 바로 세례, 변화되는 것, 사람이 완전히 다른 사람 되는 것, 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마지막에 변화되는 것이 뭐냐 하면 죽음에서 삶으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에서 삶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뒤로 하고 삶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죽음 자체를 삶으로 바꾸는 겁니다. 이 죽음의 시점에서는 ‘나는 죽음이 싫어. 나는 영생을 얻고 싶어.’라고 죽음과 영생이 분리되어 있잖아요. ‘나는 죽는 것은 너무 싫어. 예수님, 내가 어떻게 하면 영원히 살 수 있습니까?’ 이렇게 죽음 따로 영생 따로 따로 되지만 이런 인간이 변화가 되고 난 뒤에는 누구와 함께 죽는다는 그 자체가 영생인 것을 알아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사나 죽으나 영생인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이런 변화를 거치려면 주께서 그 앞에 많은 표적들을 남기게 되지요. 그렇다면 죽음과 생명이 분리되어 있고 ‘나는 죽음이 싫어. 생명이 좋아.’라고 한 것은 인간의 책임이 아니고 그 인간을 낳게 한 어두움이라는 구조, 환경이 문제라면,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있는 그것이 죽으나 사나 영생인 것을 알려준다면 이런 것을 알려줄 때는 새로운 환경, 새로운 구조가 마련되어야 되겠지요.

이것을 가지고 요한복음 끝에 가면 처소라고 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그 처소에 가게 되면 사나 죽으나 너는 살아 있다.’는 희한한 혜택을 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처소가 아직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처소를 마련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놓아두고 예수님께서 혼자 어디로 갑니까?

단독으로 아버지께로 도로 돌아가요.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거기서 처소가 마련되고 나면 그 처소, 그 캡슐을 몽땅 끌고 와서 자기 백성을 이 새로운 환경에 집어넣는데 이걸 사랑이라 하고 이게 성령 안인데 이 성령 안에 집어넣으면 살아 있어도 산 것이 되고 죽어도 산 것이 돼요. 이것은 요한복음 11장에 나오지요. ‘누구든지 날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날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다.’라는 그 구조 자체를 만드는 겁니다.

여기서 이렇게 이야기하면 문제가 뭐냐? 그러면 첫 번째 말씀이 육신이 되었을 때 그 환경이 왜 안 되느냐 하는 겁니다. 첫 번째 왔을 때 가나 혼인잔치 할 때 아예 이걸 다 만들어주지 왜 그게 안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왜 그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서만 가능 하냐, 그 문제가 남겠지요.

예수님이 오자마자 “여기 처소가 있다. 오라, 와!” 이렇게 하지 않고 “오지 마. 아직 처소가 마련되지 않았어.”라는 말씀을 구태여 해야 될 이유가 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이 처소를 마련하는데 누가 도와줘야 돼요. 누가 도와줘야 되는가? 고마우신 마귀가 도와줘야 돼요. 악마가 가룟유다 속에 들어가서 악마가 갖고 있는 이 환경이 바꿔치기 되어야 하기 때문에 기존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을 계기로 해서 바꿔치기 들어가야 되는 겁니다.

기존의 환경이 뭔지도 모르고 ‘대전에 있는 이 유스호스텔 참 좋다.’ 이래 가지고는 이 처소가 바뀌어 질수가 없어요. 이 세상이 얼마나 예수님을 미워하는 환경에 있고 우리는 그 환경의 자식인가를 알고 있을 때 바꿔치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무르익어야 돼요. 성숙해야 됩니다. 멜론이 과일상품으로 가치가 있으려면 비닐하우스 안에서 무르익어 줘야 가락동 시장에 가서 팔수가 있지 그냥은 안 되잖아요.

  성숙해야 돼요. 성숙하는데 그냥 성숙하지 않고 약을 올려야 돼요. 약을 올리는 방법이 표적입니다. 제가 말을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면 어머니가 그런 고민을 하기 전에 “어머니, 지금쯤 포도주가 떨어질 때가 되었는데 떨어졌지요? 얘들아, 물 가져와라. 자, 포도주 되었지요? 장차 이렇게 할 겁니다.”

먼저 알아서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 어머니를 사랑한다는 그 예수님께서 어머니가 답답해서 안절부절 하다가 어쩔 수 없이 ‘내 아들이 목사인데 목사 아들한테 꼭 이런 것을 시켜야 되겠는가, 싶으면서 포도주가 떨어졌다.’ 할 때 예수님에게서 상당히 퉁명스런 말이 나왔지요. “여자여, 그 포도주 떨어진 것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렇게 이야기 한 거예요. 이것은 한 판 붙자는 말입니까? “내가 이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상관이 없다면, 삐졌으면 포도주를 만들지 말든지. 그래놓고는 돌아서서 “얘들아, 물 준비해라.” 이게 뭐냐 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눈에 보이는 육적인 상황에 일단 예수님이 개입만 하시면 그것은 전부 다 무슨 배경이 되느냐 하면 새로운 환경으로 전환하는 표적용으로 차압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살기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주께서 찾아오시면 우리는 우리 생각하지 마시고 이렇게 힘든 인생도 주님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적으로서 이 세상에 활용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자기 사도를 남겨둠으로 말미암아 악한 자들로 하여금 자극을 유발하도록 해서 악으로 하여금 더욱 악하게 만들어줘야 우리로 하여금 이 땅이 진절머리 나도록 만들어야 돼요.

자식사랑 하다가 자식한테 한 번 데어봐야 ‘휴, 자식이 원수구나.’라는 것을 그제야 아는 거예요. ‘자슥아, 자슥아! 그것 모르겠나?’ 자식 위해 보증 한 번 잘못 서서 재산 10억 날려 봐야 자식이 도둑놈이라는 것을 그제야 안다 이 말입니다. 심하게 한 번 경상도 말로 데댕껴 봐야, 접촉되어 봐야 아는 거예요.

그래서 그 다음에 나오는 모든 표적들도 아슬아슬하게 만들어요. 사람의 애간장을 다 녹입니다. 초조하게 만들고 벌벌 떨게 만들고. 그래서 오늘날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기도를 들어줄 때도, 우리는 자기 딴에 주님께서 기도를 들어줄 만한 내용들을 다 수집해요. 이래도 기도 안 들어주면 진짜 하나님 나쁘다, 하는 식으로 온갖 좋은 것, ‘주여, 빛과 소금이 되겠습니다. 주의 영광을 위해서 희생하겠습니다.’ 해도 주님께서는 아무 응답이 없어요.

‘네가 한 번 대댕껴 봐야 그런 소리 하는 것도 다 너의 위선인 것을 알아봐야…’ 진짜 혼나봐야 혼날 때 기도하고 혼나기 전에 미리 예방조로 기도하는 것 하고 다릅니다. 영화하고 실제하고 달라요. 괜히 흉내 내지 마세요. 연기에 속아 넘어가는 주님이 아니십니다. 아픈 척 해봐야…, 아픈 척 하는 것과 아픈 것과 달라요.

아픈 척 할 때는 고상한 기도 나오고 진짜 아프면 욕 나오고, 그래요. 그러니까 욕 나올 때까지 주께서 기다리는 거예요. ‘진작 욕하지, 진작’ 베드로가 “제가 잘 해보겠습니다. 다른 사람은 주를 버릴지라도 저는 버리지 않겠습니다.” 해도 “너는 아직 몰라. 너는 세상 아무것도 몰라. 네가 내 면전에서 세 번씩 부인해 봐야 ‘야, 예수님은 정말 쓸모 짝이 없구나.’ 하고 통감해 봐야 그 다음에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그 사랑의 의미를 안다.”는 거예요.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하다니.’ 그리 된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 여러분, 니 맘대로 사시면 돼요. 주의 일에 협조라는 것이 인간에게는 성립이 안 됩니다. 협조가 안돼요. 왜냐하면 우리는 창조할 수 있는 권한이 없고 창조는 주께서 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 교재 4페이지, “(2) 표적의 의미에 관한 해설 : 성전을 사흘 만에 짓는다는 예언(2:13-15)” 여기서 성전을 ‘기도하는 집’이라고 합니다.

구약에 보면 집을 성전이라 했어요. ‘다윗의 집에 복을 내리겠다.’ 할 때 다윗의 집이 성전입니다. 구약에서 성전의 의미는 발등상이에요. 얼마 전에 설교했지요. 구두닦이의 예화에서 구두 닦을 때 구두신은 발을 올려놓는 발등상. 트랜스포머에 나오는 거대한 로봇이 인간이 사는 지역, 남아프리카, 북아프리카 이런 지역을 밟고 다니는 것처럼 주께서 발을 놓는 자리가 성막이죠.

그 성막이 성전이 되는 겁니다. 성전이 되는데 이것은 무슨 의미냐? 이것이 중앙지, 또는 중심지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어렵기 때문에 그림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원래 처음에는 시내산입니다. 시내산 위에 하나님이 계시고 밑에 백성들이 있지요. 옆에서 보면 시내산 위와 아래의 높낮이가 분명하게 차이가 나는데 이 시내산이 뭉개져 버린 것 같으면 위에서 보는 시선으로 보면 시내산이 여기 있고 그들 중앙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 되지요.

이게 언제 내려왔는가? 언약이 내려올 때, 십계명이 내려올 때 모세가 내려온 것이 아니고 모세 따라 누가 왔는가? 모세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같이 따라 온 거예요. 이제 시내산은 별 볼일 없어요. 올라가 봐야 등산로 밖에 없어요. 지금 거기 가 봐야 모세도 엘리야도 거기 안 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약이동이에요.

언약이 있는 곳이 장막, 집, 새로운 집이 되는데 그 언약의 집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하면 바로 저와 여러분 몸이에요. 여기에 언약이 있다고요. 여러분, 죽잖아요. 죽는 것이 언약 때문에 죽어요. 언약 때문에 죽어줘야 되는 겁니다. 죽어야 다시 살잖아요. 특정 공간을 성전이라 하는데 이것은 성전이 아니고 신전, 신당입니다.

중심지, 옴팔로스, 배꼽이라 하는데 세상의 중심지는 바로 언약이 있는 이곳이 되지요. 하나님께서 내려오게 되면 그 언약이 내려온 상자를 가지고 언약상자, 언약궤라고 합니다. 언약상자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후시딘연고 이런 것, 비상 구급약 들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상자에는 십계명이라는 돌 판이 들어 있어요.

돌판 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돌 판과 더불어서 인간이 하나님께 대들었다는 증거물, 싹 난 지팡이하고 만나하고 같이 들어 있어요.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뭘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작용한다, 하나님이 이렇게 일 하셨다, 라는 것을 언약 화 시켜버리면 ‘내가 지난날 너희들이 원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했다.’는 그 식으로 앞으로 언약 적으로 일하실 거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언약궤를 모시고 다닌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현재 우리한테 과거에 일 하신 것처럼 지금도 일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신약에 적용하면, 십자가, 십자가에 예수님 죽었던 장소가 어디입니까, 예루살렘, 그 예루살렘을 이동용으로 바꾸는 거예요. 누가? 성령께서. 성령께서 예루살렘, 십자가를 통째로 푹 떠서, 그게 새 언약이니까 그 새 언약을 푹 떠서 이동할 수 있는 용도로 전환시켜서 각 사람 맘속에 십자가를 심어놓아 버려요.

그러면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십자가에 함께 죽었나니’ 중요한 것은 ‘내 안에’ 그러니까 예수님이 죽었던 그 자리가 ‘내 안’인데 거기서 지금 예수님이 살아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 것이고 나는 그 안에서 늘 죽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를 건드리지 마라 나는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참,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그 당시 고린도교회한테 이단소리 들을 만하지요. 그 당시는 예배당 개념이 없었으니까 그냥 집회 모임인데 그런 가운데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사람들이 사도바울을 이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거기에 맞대응해서 ‘너희들이 가짜 예수,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한다. 그것은 왜냐? 마귀가 그렇게 심어놓았다.’ 하는 거예요.

‘어떻게 해서 마귀가 심어놓은 것 하고 진짜 사도가 전하는 것과 영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느냐?’ 그 기준은 뭐 밖에 없느냐 하면 십자가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속에 있는 십자가를 모르고 각자 자기를 이끌 사람을 외부에서 찾는 거예요. 외부에서 찾다 보니까 거기에 누가 개입합니까? 사탄의 종들이 목사라는 이름으로 계속 ‘내가 이끌어줄게 내가, 내가 너를 구원해 주리라.’ 하고 자꾸 이끌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아볼로가 뭐며 게바가 뭐며 나 바울은 뭐냐.’ 이 말이죠. ‘여러분 속에 계신 분이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그 말이죠. 없다고요? 그러면 애초부터 이야기를 하지 말든지. 그런 분이 속에 없으면 외부에서 찾아도 소용없어요. 그래서 ‘네 몸은 네 몸이 아니니까 네 몸은 하나님의 살아계신 성전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전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너희 속에 성령이 있고 없고, 십자가가 있고 없고의 차이에서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목사님들은 설교할 때 “여러분들은 자동적으로 교인입니다.” 할 것이 아니라 매번 만날 때 마다 확인 작업에 나가지요.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을 전해서 ‘고마해라, 마이 묵으따!’ 이래 나오면 그냥 지식으로 아는 사람이고 ‘또 내안에 잠자고 있던 십자가를 일깨워주시는군요.’라고 나온다면 그 사람은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 확인되지요.

그래서 설교자는 항상 복음을 이야기해야 됩니다. 복음 이야기한다고 해가지고 설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십자가, 십자가 하면서 십자가가 무슨 논리로 십자가가 되는지는 안하고 해버리면 그것은 십자가가 하나의 개념이 되고 말았지요. 그리되면 곤란하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목사님 본인이 십자가 삶을 살면 십자가이야기 안 꺼내도 본인이 십자가 삶을 사는 본인의 삶을 끄집어내면 다 성령 안에서 공감이 되지요.

자기는 십자가 삶을 안 살면서 십자가이야기로 도배를 해 놓아요. 저쪽 남쪽에 그런 분도 있어요. 아무리 십자가를 이야기해도 본인은 십자가 이용해서 자기교회 세우려고 하는데 귀신을 속여야지 선수들끼리는 다 알잖아요. 뻔히 다 아는데 십자가 집어넣었다고 해서 나도 복음 알고 복음 전했는데 왜 자꾸 시비를 거느냐, 이래 나오거든요. 노림수가 따로 있는 건데.

여기에 기도하는 집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전개념을 바꾼 거예요. 성전개념을 예수님의 몸으로 바꾼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몸으로 바꾸기 전에 제자들이 먼저 46년 동안 짓고 있던 그 건물을 지목했지요. 지목할 때 예수님이 말을 해도 꼭 이상하게 해요. 그냥 건물은 성전이 아니다, 하면 될 것인데 “저 건물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 이렇게 했거든요.

그러니까 제자들은 천사 한 2천명 노가다 꾼으로 보내고 하늘나라 목수들과 자재들을 동원시켜서, 동화 속의 요정들 같이 손을 무지 빨리 놀려서 드디어 이틀, 이틀 반, 드디어 사흘째 짠,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아까 한 것 같이 세례라는 것은 인식의 변화인데 기존에 알고 있던 것을 조금 더 빠르게 하는 그것을 하나님의 일인 줄 알고 있어요.

그런 질은 천국에 못갑니다. 질 자체가 달라져야 할 텐데 인식가지고 그것을 계속 확장시켜서 천당 보내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자들은 그 말을 못 알아듣는데 나중에 예수님 부활하고 보니까 아, 그리스도의 몸을 가지고 성전이라 하는 것을 모르고 제자들도 의아해 했다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표적의 의미가 뭐냐 하면 역시 변화에요. 달라져야 하는 것, 창조가 되어서 달라져야 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달라져야 된다는 말은 환경이 달라지지요. 전에 인간에게 있던 환경의 구조가 여기라면 이것이 파란환경으로 바뀌어 지면, 이 빨강에서 눌려 앉던 모든 공포 두려움 걱정근심, 이것이 환경자체가 달라지면 이 파란환경에서는 용서, 사랑, 자비 이게 주어지니까 여기서 오는 공포를 여기서는 느낄 필요가 없지요.

그렇다면 이 파란 것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면 성도는, 사랑 안에서는 뭐가 없나니? 두려움이 없나니, 옛날 그 구조에 있어도 뭘 얻느냐? 자유를 얻는 거예요. 바깥에 있는 진리가 안에 있는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옛날 구조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그것 가지고 기죽을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예 원천적으로 구조 자체를 바꾸려고 해요. 처소를 바꾸려고 해요.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떤 하나님의 심판도 없나니, 하나님께서 이제는 더 이상 너의 어떤 행실에 대해서 잘잘못을 따지지 않겠다는 거예요. 따질 것 같으면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지도 않았어요.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죄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그 죄를 네 힘으로 해결 안 되니까 예수님을 보내서 화목제물로 해결 하겠다고 보냈기 때문에 십자가가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행세에 대해서 더 이상 잘잘못을 따지지 않는 겁니다. 이 사랑구조를 새 계명이라고 한 겁니다. 새 계명의 특징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계명이 우리를 계명답게 지키게 요리하겠다는 뜻 이예요.

상당히 중요한 말이지요. 새 계명을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기어이 새 계명, 사랑답게 이끌고야 말겠다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이것이 구조적이니까 이게 환경적이니까, 우리 삶의 정황이고 상황이니까,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놓여 있으니까, 다른 말로 하면 갇혀 있으니까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이 사랑에서 못 빠져나와요.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천국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천국 빠져나와서 지옥 구경하겠다고 철조망 뚫어봐야 소용없습니다. 다시 끌려 들어옵니다. 어제 이야기 했잖아요. 지옥 갈 사람은 백날 나와도 “교회 오지 마라 했제? 좀 가 도!” 밀어내요. “오지 말라고 했잖아. 너는 아니라니까, 너는.” “가고 싶습니다. 목을 따서라고 가겠습니다. 김일성이 목을 따겠습니다. 보내주소서, 평양으로.” “가지 마. 실미도 영화 끝났어. 가지마. 이미 모든 것이 끝났어. 너는 안 돼. 안된다니까.” 자꾸 밀어 내는 거예요. “나는 네가 그냥 미워.”

그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사는 우리를 자꾸 끄집어내서 “내가 너를 사랑한 댔잖아. 걱정하지 말랬잖아. 다 이루었다고 했잖아. 네가 왜 옛날 구조의 습성에 빠져서 벌벌 떨고 있느냐. 내가 너를 닦달 안내는데 왜 네가 너 스스로를 심판하고 왜 난리야. 내가 심판을 안 하겠다는데.” 그런 모습의 변화를 알려주면서 표적들이 시작됩니다.

두 번째 표적이 왕의 신하의 아들을 낫게 하신 표적인데 4장 46절에서 54절입니다. 요한복음 2장 4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여기 무슨 때가 아직 이르지 못했다는 말입니까?

‘내 때’ 그러니까 그 구조, 정어리 떼를 그물망 안으로 집어넣는 이야기 했지요, 일어나는 모든 것을 말씀의 동질성 안으로 잡아당기는데 그 때를 정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정하는 것이기에 우리들은 그 때를 위한 하나의 시효, 또는 소재, 재료, 물질, 그런 식으로 활용되는 겁니다.

그 중의 하나가 왕의 신하의 아들이 아파서 낫게 해 달라고 할 때의 이야기가 어떤 표적이냐 하면 ‘때에 관한 표적’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요한복음이 참 어려워요. 시간은 흘러갑니까, 안 흘러갑니까? 시간이 흘러가지요. 2009년 다음에는 2010년 되지요. 그런데 묵시적 시간 속에서는 이것이 정지가 돼요. 정지되는 순간에 이것이 표적이 되어버려요.     

돌출되면서 표적이 되고 그것이 끝나면 다시 흘러가는 시간이 되고 다시 표적이 되면 정지가 되어 버려요. 정지가 되면서 이 시간대에서 벗어나서 이 묵시시간대로 올라가요. 4장 47절에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할 때 이것은 아래 있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하지요.

‘예수님 병 낫게 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그 시점과 예수님께서 내려와서 손을 얹으면 낫는 시점이 벌어져서 그만큼 간격이 있지요. 간격이 있는데 이것이 표적으로 사용할 때는 위로 올라갑니다. 위로 올라가면 시간이 정지가 되고 시간이 정지가 되면 이것은 예수님의 몸의 주체가 돼요. 예수님 몸의 주체가 돼 버리면 예수님 몸은 묵시적 몸이기 때문에 그 안에 시간이 없어요.

인간의 몸은 역사적 몸이기에 시간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잠시 시간이 정지된 상태에서 말씀을 내리니 집에 와서 보니 자기 아들 병이 나았어요. 언제 병이 나았나 보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한 그 시점에 병이 나은 거예요. 이것이 바로 표적이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했지요.

몇 일의 텀이 있습니까? 3일의 텀이 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그것을 3일의 텀으로 보지 않고 주께서 아버지께로 간다고 보는 거예요. 사흘 뒤에 가는 것이 아니고 그냥 역사에서 묵시로 이동하는 식으로. 이동할 때 그냥 이동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백성을 위해서 어린양의 짐을 지는 과업의 완수를 가지고 묵시로 가버리면 그 묵시에서 처소가 마련되는 겁니다.

백성의 죄를 사했다는 충족된 상태가 역사단계가 아니고 묵시단계로 올라가 버리면, 자기 백성의 죄를 역사단계에서 완성했다는 것이 십자가를 통해서 역사에서 위로 올라가 버리면 그 때부터 묵시에서 내려오는 몸은 문이 닫혀도 오게 되어 있고 그야말로 유비쿼터스,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고 싶을 때 등장하는 거예요.

어디든지 계시면서 아무데나 오실 수 있으면서 사람 손에 결코 포착되지 않는 분입니다. 분명히 계신데 사람 눈에는 안 보이는 분, 분명히 있기는 있어서 나에게 뭔가 쑤시고 도망치듯이 가버리는데 나에게는 사랑의 흔적만 남는 것, 내가 너를 용서했다, 그것은 남고 어디론가 떠나가 버리는. “주여, 어디 계십니까?” “찾지 마라” “왜요” “나는 유비쿼터스다. 내가 필요할 때만 찾아올게.”

그냥 찾아오는 거예요.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면 여기 있습니까?” “묻지 말라니까. 역사에 붙잡히는 묵시는 없다.” 역사의 손에 잡히는 묵시는 없어요. 묵시가 역사를 자기 원대로 배치하고 배속하고 조종하고 배열하지 역사가 묵시를 쥐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천년이 흘러가도 묵시에서는 하루밖에 안돼요. 하루 되지도 않아요. ‘천년이 하루 같이 천년이 하루같이….’ 

그러면 천년이 하루입니까? 천년이 하루같이, 그게 말도 안 되잖아요. 이것은 시간 자체를 묻지 말라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 재림은 시간이 흘러야 오는 것이 아니고 그냥 커튼만 열면 짠짜잔~ 하고 조명발 비추면서 여기 있었지~롱, 너와 함께 있었지~롱, 하면서 자기 정체를 드러내는 거예요.

함께 있었고 함께 있으면서 커튼 뒤에서 계속 작용을 한 거예요. 그 작용이 미리 당겨서 온 것이 표적이라는 겁니다. 그 표적을 통해서 역사, 시간을 기다린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 없다? 없어요. 시간을 기다리지 말고 예수님과 함께 살면 돼요. 예수를 믿으면 되지 ‘언제 예수님 옵니까?’ 하고 역사적인 시간을 기다리는 그것은 이단들이 요한계시록 풀 때 그렇게 하는 것이고 시간을 기다리지 말고 주께서 나타나시게 되는 거예요.

상황만 된다면 어떤 시나리오가 다 완료된다면 오시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그 사랑을 계속 받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질적으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서 달라진 모습으로 살아가는 거죠. 3장은 니고데모 이야기인데 3장에서는 27절이 중요합니다.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되지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3장의 의미는 아직도 누가 살아 있다? 아직도 세례요한이 있을 때에요. 세례요한이 있으면 세례요한의 기능이 끝날 시점이에요. 끝날 시점이라면 이 세례요한이 해야 될 역할을 누가 한다? 성령이 하게 되는 거예요. 이제는 두 번 다시 사람 찾지 마세요. 제자들이요? 전부 다 배신할 놈들이에요. 괜히 믿다가는 같이 넘어지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세례요한을 보냈듯이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게 됩니다. 성령을 보내게 되면 세례요한은 빠지고 성령이 예수님과 짝을 이루어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성령을 가지고 ‘다른 보혜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성령 외에 다른 짝을 두신 적이 없다. 그러면 사도는? 사도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 불과하고 본격적으로 일하는 것은 예수님과 성령이 짝을 이루어서 일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일하시고 성령은 증거하고, 그러니까 성령이 일하는 것은 어느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꼭 예수님 하신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성령이 앞서서 행동하는 법은 없어요. 반드시 예수님이 하신 것만큼만 성령님은 전하세요.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으면 십자가지신 것 가지고서만 성령이 일하지 십자가외에 달리 일하시는 성령은 악령입니다.

요한복음 19장에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했거든요. 성령이 옆에 있다가 “주님, 다 이룬 것 아니잖아요. 왜 나를 무시합니까? 당신은 당신 일 다 이루었지만 나는 내일 남았습니다.” 이런 성령은 없다 이 말입니다. “다 이루셨습니까? 그저 제가 배달하겠습니다.” 이래 나오시는 성령이지 ‘예수님은 예수님일 하고 내 일은 따로 있다.’ 이런 따로국밥식의 성령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놀랍게도 성령이 성령을 증거 하지 않아요. 성령은 증거 하는 일인데 성령을 증거 하는 일을 성령이 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예수님만 증거 하기 위해서 있지 성령 본인을 증거 하는 것은 세례요한의 기능이 아니에요. 성령을 전수받은 세례요한이 그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은 오직 옛날 세례요한이 했던 것처럼, 빛에 대해서 증거 한 것처럼 그 역할을 성령이 받아서 오직 예수님만 증거 하는 그것이 요한복음 3장에 깔려 있는 이유지요.

그래서 이제는 성령께서 세례요한뿐만 아니고 자기가 원하는 사람에게만 성령을 주게 되어 있어요. 요한복음 3장에 세례요한이 ‘나는 쇠해야 되고 그는 흥해야 된다.’ 그 이야기 하고 31절부터 보면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 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그 증거가 뭐냐? 34절에 보면 무엇을 받는 사람이 증거 합니까? 성령을 받게 되면 예수님을 증거 하게 된다고 하지요. 그리고 35절에 보면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래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이야기하는 것은 심판을 의식하지요. 그 심판은 율법에서 나왔습니다. 율법 + 은혜 + 은혜(은혜 위에 은혜),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것이 창조의 원리니까 예수님께서 일하실 때 이것을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이 참 이스라엘이니까, 전에는 율법으로만 심판했다가 지금은 뭐로 심판하느냐 하면 율법 + 은혜 + 은혜(은혜 위에 은혜), 이것을 가지고 심판을 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실제로 이런 은혜 + 은혜(은혜 위에 은혜)로 구원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하나님은 심판을 해야 되고 그 심판의 결과가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되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는 거지요. 요한복음 3장 17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무슨 뜻입니까? 반드시 심판하겠다는 뜻이에요. 그런 뜻입니다. 안보입니까, 여러분! 저는 그래 보이는데요.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필히 심판하겠다는 거예요. 다만 그 심판가운데서 빼낼 규정은 마련하고 심판하겠다는 겁니다.

그 뒤에 나오지요.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유보된 심판은 행사하겠다는 거예요. 이거 완전히 약 올리는 거지요. 심판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 아! 내가 참는다.’ 그런 뜻이에요.

하지만 내가 준 조건을 안 받아들이면 그러니까 율법으로 심판할 수도 있는데 은혜 + 은혜(은혜위에 은혜)이기 때문에 심판이 유보되면서 은혜 + 은혜(은혜위에 은혜)를 받은 자에게만 심판이 면제되고 나머지는 그냥 자동적으로 심판 되어버린다 이 말이지요. 그래서 그 예로 놋 뱀 예를 들지요. 놋 뱀을 쳐다본다는 말은 ‘우리는 심판받아 마땅합니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불 뱀이 오는 것은 그냥 불 뱀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내신 불 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불 뱀에게 죄지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죄지었기 때문에 우리는 불 뱀의 저주를 받아도 마땅합니다, 라는 뜻에서 놋으로 뱀의 형상을 해서 높이 든 거예요. 이 뱀이 위에서 왔다는 거예요. 위를 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위로 올라가지요.

위로 올라가는 것은 놋 뱀 지팡이를 세울 때 방향이 윗방향인 것처럼 나도 이 방향 따라서 그냥 죽었다가 올라감으로 말미암아 심판에 대한 잠시적인 유보로서 왔다가 이 유보에 대해서 만일 안 믿으면 유보된 심판을 그대로 행사하겠다는 강력한 의지표명에 나서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3장에서 니고데모가 왔잖아요. 그 니고데모가 왔을 때 주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사람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니고데모보고 거듭나라는 이야기입니까? 그런 뜻이 아니에요. 니고데모가 왔을 때 니고데모가 온 것을 핑계로 예수님 자기 이야기를 자기한테 그냥 해버리는 거예요. “니고데모야, 살려면 거듭나야 돼. 부탁한다. 아, 네 인생이 아깝구나.” 그런 것과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냥 니고데모가 철없이 물은 것에 대해서 “이참에 잘되었다, 내가 이야기할게. 잘 들어 봐. 사람은 거듭나지 않으면 죽는 거야.”

니고데모에 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니고데모가 어떻게 되든 그것은 관계없어요. 주께서 자기가 앞으로 해야 될 계획을 니고데모를 핑계 삼아 죽 펼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니고데모처럼 생각해서 ‘어떻게 하면 거듭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 자체는 전혀 예수님이 하신 이야기하고 전혀 상관없는 거예요. “네가 사는 것과 나와 무슨 상관있는데? 상관없는데 왜 너는 자꾸 너한테 관심을 두느냐?”

“내가 어떻게 하면 거듭날 수 있습니까?” “네가 되도 않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 네가 안 되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 이 말입니다. 니고데모의 한계는 본인이 할 수 없는데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될 수 있습니까?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됩니까?” “천 번 나왔다가 들어가 봐라, 되는가.”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하는 이야기는 사람들의 관심사가 주님한테는 관심이 없고 어쨌든 간에 거듭나서 하늘나라 가보려고 하는 그런 인간, ‘네가 이스라엘 선생이면서도 주제파악을 전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니고데모, 네 꼬라지를 알라, 그 말입니다. 네가 구원받고 안 받고는 예수님과 아무 상관도 없는 거예요.

그저 예수님은 자기 일을 할 뿐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택함 받은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네 구원은 네가 걱정할 자격도 너한테는 없다’는 거예요. “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걱정되는 것은 네 사정인데 하여튼 네가 걱정한다고 해서 구원될 문제는 아니고 나한테 찾아온다고 해서 구원될 문제도 아니다.’라는 겁니다.

다만 그걸 계기로 해서 나는 너와 상관없이 내 일만 한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놋 뱀을 드는 이것은 ‘심판밖에 없는데 거기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는데 그것이 은혜기 때문에 만약 그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이 유보된 심판이 그대로 진행된다.’ 단 세례요한이 은퇴하고 난 뒤에 예수님과 누가 짝이 되어서? 성령이 짝이 되어서 사람에게 일체 도움을 받지 아니하고 모든 일을 마무리하는 그쪽으로 쭉쭉 뻗어 나가는 겁니다.

2010-01-17 11:08:28  녹취 : 오용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