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강의 : 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제 6강
요한복음 5장 28절에 보면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무덤 속에 기어들어갔다고 해서 주님으로부터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지요. 무덤 속에 들어갔기에 그 진드기 같은 예수가 여기까지 따라오겠나, 하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인데 무덤 속에 갇힌 채로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면 무덤, 죽음의 세계마저도 누가 장악했다?
예수님이 이미 장악한 상태에서 거기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은 선한 부활로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악한 부활로 간다 이 말이죠.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시간자체가 ‘장래에 되어 봐야 알지, 그 때까지 가 봐야 알지,’라는 식으로 우리가 미래를 미루어도 그것은 헛수고입니다. 선취라고 하는데 우리에게 미래를 앞당겨서 지금의 상황으로 항상 고정을 시켜 놔야 돼요.
미래를 생각지 말라, 가 아니라 미래를 앞당겨서, 여기 있는 이 미래와 과거 이 모든 것(육)을 내 몸 안에서 제거를 해야 하는데 그 방법은 뭐냐? 지금 내가 주의 음성을 들으면 돼요. 지금 성경 말씀을 들으면 돼요. 그 때 무덤에 가서 주의 말씀을 들을 생각을 하지 말고 지금 주의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이 그 말씀이에요. 그 음성이 그 음성이고 그 주님이 그 주님이고. 그래서 항상 요한복음은 미래의 시간을 역사에 깔아놓고 거기에 자꾸 정지된 묵시의 시간을 겹쳐서 이야기해 주는 겁니다.
요한복음 6장을 봅시다. 여러분이 내용을 다 아시기에 내용은 생략하고 핵심적인 것만 이야기해 드릴게요.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의 몸, 이 묵시적 몸에서 역사적 육에 대하여 무엇이 흘러 들어와서 이 역사적 육이 영이 될 수 있느냐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묵시적 몸에서 뭐가 튀어나와서, 이 뭐는 피와 살이지요, 이것이 우리의 역사적인 몸을 영의 몸으로 바꾸느냐, 그것을 이야기하는데 여기 예수님의 피와 살이 나와야 우리가 영의 몸이 된다는 겁니다.
왜 그래야 되는가, 하는 겁니다. 이걸 모르니까 그 사람들이 다 떠나고 말았는데, 왜 예수님께서는 그냥 이 몸 가지고 이 몸에게 그냥 혜택을 줄 수 없느냐? 참 중요한 문제지요. “그냥 말씀하시면 안 됩니까?” “안 된다.” “그냥 잔소리 하시면 안 됩니까?” “그것도 안 된다.” “그럼 훌륭한 교훈으로 하시면?” “그것도 안 된다.”
왜 예수님의 피와 살을 우리 몸을 위해서 먹으라고 주셔야 되느냐, 하는 겁니다. 만약 우리가 먹으라고 해도 안 먹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 자, 여기서 예수님의 명령이 우리에게 향한 명령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자기에게 하는 명령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내린 명령은 아버지가 내린 명령인데 아버지가 내린 명령은 예수님을 통해서 다시 예수님에게로 되돌아오는 명령으로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애초부터 이것은 절단되어 있어요. 우리는 육이기 때문에 주의 명령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의 명령을 지킬 수 없는 몸으로 계속 남아 있어야 돼요. 계속 남아 있어 줘야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허락한 이 명령을 예수님께서 이루는 그 날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우리에게 생명이 되게 되어 있어요.
이 과정을 설명한 것이 요한복음 6장입니다. 어떻게 설명되어 있는지 한 번 봅시다. 우선 광야를 봅시다. 광야에 눈이 오듯이 뭐가 내려왔지요. 뭐가 내려왔느냐 하면 만나가 왔습니다. 만나 내려달라고 누가 요청했습니까? 모세가 요청했습니까? 누가 요청했습니까? ‘딱 만나여야 됩니다, 만나.’ 라고 누가 요청한적 있습니까? 없어요.
그 말은 광야에서 사람들이 원망하더라도 그 원망한 전부를 누가 자기일로 맡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의 이름께서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을 남의 일로 보지 않고 예수님 자기일로 다 건사를 한 거예요. 다 끌어당긴 거예요. 그런데 끌어당겨진 그 당사자는 그것도 모르고 원망하고 있는 거예요.
“애굽으로 돌아가자. 애굽이 좋았었다. 그 때 부추가 맛있었고 수박도 ….” “야, 이야기 꺼내지마. 먹고 싶잖아. 너, 너무 미워. 왜 그 이야기를 끄집어 내.” 그런 식으로 굉장히 괴로워하면서 광야 길을 간 거예요. 살기 힘들기 때문에. 그러면 지금 광야에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육이 몸이기에 육의 양식이 필요한 거지요.
그런데 육의 양식을 먹어버리면 이 사람은 애굽사람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이건 죽어요. 그러니까 이들을 살리려고 한다면 이들이 구하는 육의 양식을 다 끌어 당겨서 육의 몸을 영의 몸으로 바꿔야 되거든요. 육의 몸을 가지고 영의 몸이 되라고 닦달을 내봐야 소용없는 것이고 이 육의 몸이 영의 몸의 책임 하에 포섭이 되어야 합니다.
포섭이 되려면 육에게 영이 내려와야 되지요. 육에게 영의 양식을 줘서 영의 양식을 먹는 자만이 영의 몸으로 달라질 수가 있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에게 하는 첫 번째 시발점이 뭐냐 하면 육의 몸을 그대로 육의 몸으로 하시고 그 다음에 자기 몸을 가지고 영을 줘서 그 양식을 먹는 자마다 육이 아니고 영으로 전환되게 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하는 겁니다.
이걸 어떻게 하느냐 하면 만나를 주지요. 만나를 줄 때 사람들은 만나를 먹었습니다.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죽었지요. 그 사람들은 육이니까 만나만 먹었지 만나 뒤편에 있는 영의 몸이 될 수 있는 비밀스러운 몸이 있다는 것은 모르고 그냥 먹은 거예요. 영의 몸을 줘도 사람들은 뭘 로 아느냐 하면 이것이 기존에 먹던 것과 같은 음식인줄 알고 그냥 막 처먹은 겁니다.
만나 뒤편에 뭐가 들어 있었는가? 말씀이 들어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만나가 카스테라인줄 알고 그것만 먹었지 그 뒤편의 말씀은 빼놓고 먹은 거예요. 그래서 만나가 내려올 때 말씀도 같이 내려주면 되는데 그리되면 말씀이 어떤 작용, 역할을 해야 되는가? 이 사람들은 말씀 줘봐야 안 믿을 것이고 죽을 것이니까, 이 말씀이 죽어도 살 수 있는 능력을 뒤에다 첨부를 해서 그들에게 주면 되겠지요.
그러면 이 사람들은 이걸 먹고 어떻게 됩니까? 이걸 먹고 죽겠지요. 왜냐? 죽었다가 살아나는 아이디어는 인간에게는 없기 때문에.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니까 먹고 죽자.’ 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요한복음 6장에서 ‘사람들이 나를 찾는 까닭은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합니다. 먹고 배부른데 필요한 예수가 되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죽어도 다시 사는 그 원칙 속에 자기가 거기에 몸을 실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 49절 50절에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먹고 죽지 않는 떡을 내가 줄 것이다.’ 할 때 그들은 뭐라고 합니까?
그들은 “그걸 주세요.” 라고 한 거예요. “줄게.” “말만 하지 말고 주세요.” “줄게.” “지금 당장 내놓으세요.” “그래 줄게.” “뭐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미쳤나?” 여기에 제 볼펜이 바닥에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제 볼펜이니까 가서 주워 오겠지요. 마찬가지로 주님의 살과 피는 남의 것이 아니고 누구의 살과 피 입니까?
예수님 자신의 살과 자기의 피 이기 때문에 던져놓고 그걸 주워 회수하다 보면 누가 딸려옵니까? 그 살과 피를 먹은 사람이 같이 딸려 와서 구원받는 거예요. 간단한 겁니다. 또 쉽지요. “너희들은 만나 먹었는데도 죽었잖아.” “죽었지요. 안 죽게 해 달란 말예요.” “글쎄 안 죽게 해 줄게.” “그럼 뭘 주시렵니까?”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그러니까 사람들이 미쳤다고 했어요. 이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죽는다(살과 피)는 말은 하나의 미끼를 던져서 걸린 놈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한 미끼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방법은 뭐냐? 육에서는 항상 해석을 육적으로 하기 때문에 자기를 살리는 방향으로 나가겠지요.
그래서 육적으로 사는 방법은 없고 주님께서 살과 피를 증거 하는데 이 육이 하나의 증인으로서 동참되면 되지요. 예수님이 가신 그 코스에서 주님이 자신 던진 그 살과 피를 회수하면서 영생을 건지고 올라갈 때 여기에 주님의 살과 피를 증거 하는데 동원되어 같이 휩쓸리면 같이 가겠지요. 이것이 바로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여기 걸려든 거예요.
그래서 아프기만 하고 아직 안 죽었을 때 찾아가지 않고 어떻게 합니까? 죽여 놓고 나흘 만에 되살아나게 하지요. 그럴 때 사람들은 “야, 나사로가 죽었는데 살아났단다.” 하고 기뻐하지요. 그러니까 전에 제가 이야기했듯이 나사로가 죽었다 살아난 그 나사로 사는 것을 보지 말고 나사로가 어디에 함유되었는가를 봐라 했습니다.
‘내가 곧 부활이고 내가 곧 생명이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어도 이 코스고 죽어도 이 코스다. 영원히 네가 죽지 않는다. 누구 덕분에? 내 살과 내 피에 함유된 자는 산다.’ 그리 되는 겁니다. 이걸 통해서 만나는 말씀이 되고 말씀은 곧 회수된다. 말씀은 그 원천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이 땅에 펼쳐진 말씀은 그 말씀의 원천지로 다시 되돌아 오게 되어 있어요.
그 되돌아가는 청룡열차에 올라타면 된다 이 말이죠. 올라타면 되는데 그것은 아무나 타나? 오직 성령이 임해야 거기 올라타서 말씀이 나를 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 38절, 39절을 다 같이 봅시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이걸 요한복음에서 말하기를 ‘이것을 네가 믿나? 이 말씀을 네가 믿나?’라고 한 거예요. ‘믿나’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여기에 네가 동참되어 있고 동원되어 있다는 것을 네가 인정하겠느뇨?’라고 하는 거예요. “인정 못하겠습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 노선에 참여 안 된 사람이고 “글쎄 인정합니다.” 하니까 “그러면 너는 걱정할 것이 없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말씀이 너에게 들이닥쳐서 말씀이 너를 포크레인처럼 꽉 잡아서 말씀이 너를 하루하루 인도한다면 네가 걱정할 것은 없다.’ 이 말입니다. 다만 그 속에 말씀이 퍼져서 아, 이런 모든 구석구석 법적인 조치에도 다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구나, 그걸 확인해 나가면 되는 거예요.
자, 그렇게 해놓고 요한복음 6장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여러분이 오병이어의 해답을 알고 지금 여러분에게 떡을 나눠드렸다고 칩시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이것은 원가로 얼마 치지도 않아요. 물고기 두 마리 해 봐야 한 이천 원 합니까? 그걸 죽 나눠줬다고 합시다.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뭘 먹었습니까?
‘떡하고 고기 먹었습니다.’ 한다면 또 여러분들은 육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뭘 먹었습니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말씀을 먹었습니다. 만나 뒤에 붙어 있는 말씀을 먹었습니다.’ 이러면 고기 먹고도 떡 먹고도 사는 사람이 돼요. 그러니 그 떡과 고기종류를 몇 시간 전에 식당에서 먹었어요. 일용할 양식을 먹은 겁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예수님의 살과 피 때문에 공급된 그러한 양식과 그러한 생명으로 혜택을 입고 있어요. 그래서 꼭 성찬식 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이 주와 함께 하는 파뤼(party), 만찬, 우리는 매일 매일 주께서 주시는 일용할 양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주기도문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 다른 말로 하면 ‘우리에게 날마다 생명의 떡을 주시옵시고 ….’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그 떡을 먹게 되면, 예수님의 말씀을 먹게 되면 그 때부터 우리가 뭘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신분이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신분으로 확인되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 우리는 남을 용서할 수도 있고, 나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할 수도 있고, 용서 받을 수도 있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내 힘으로 산다는 것은 이미 우리 손에서는 벗어난 거예요. 그래서 제가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여러분들이 고기와 떡을 먹어도 상관없다는 거예요. 그 고기와 떡 뒤편에 예수님의 살과 피가 공급된 물고기와 보리떡 다섯 개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살과 피를 매일같이 먹고 마시고 있는 사람입니다. 제 말이 맞는 이유가 요한복음 6장 마지막에 뭐라고 합니까?
제자들을 보고 “너희들도 갈래?” 할 때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제가 누구에게 가리이까?” 이 때 주님께서 “네가 철이 나서 그런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나에게 보내주니까 그렇게 너는 내 일에 동참이 되었다. 하지만 너희중의 하나는 마귀니라.” 마귀도 동참해야 돼요. 마귀도 동참해서 예수를 팔아먹는 부정적인 역할을 해야 된다고요. 그게 6장입니다. 7장에 넘어가 봅시다.
7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바리새인과 예수님과의 극단적인 사태가 벌어집니다. 1장부터 5장까지는 예수님께서 배후에 작용하신 사람, 어떤 특정인이 주변의 바리새인에 의해서 핍박을 받는 양상이라면 7장부터는 예수님이 집단적으로 충돌을 일으킵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 전체 집단이 이쪽 전체 바리새인 집단으로부터 이단소리를 듣는, 그래서 분위기가 점점 더 험악하게 되지요.
그렇게 유도했지요. 초막절에 예수님께서 일부러 그들의 심기를 자극시켰습니다. 초막절에 예수님께서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들에 율법으로 시비를 걸었지요. “너희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들이 하는 말이 “율법으로 봐서 네가 이단이다.” 바리새인들이 분명히 예수님보고 “너희들은 이단의 족속이다. 예수뿐만이 아니고 너희들 자체가 이단의 족속이다. 너희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가서 “내가 아니고 모세가 너희들을 직접 고소할 것이다.”라고 험악한 이야기를 하지요. 왜 그런 험악한 이야기를 했는가? 에스겔 47장에 성전에서 물 나오는 대목이 나와요. 그 물 나오는 대목을 이벤트를 해요. 물을 떠다가 성전에서 부으면서 장차 메시아가 오시면 성전에서 물이 나올 때, 그 물이 나와야 성전이 되는 겁니다.
서울의 사랑의 교회, 수천억 들여서 교회 짓는데 거기서 물 안 나옵니다. 수돗물이나 좀 나올지 몰라요. 지하수야 나오지요. 유대인들은 진짜 말씀대로 살았던 사람들이에요. 에스겔에 나오니까 실제로 물이 흘러 나와야 돼요. 처음에는 물이 흘러서 무릎, 어깨, 머리까지 전체로 넘쳐흘러서 성전 근처가 다 물러 넘쳐서 생명이 살 때 그 때에야 비로소 말씀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은 겁니다.
그렇게 해석을 한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성전은 그 성전이 아니고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나오지 말래도, 이게 중요해요, 나오지 말래도, ‘그만, 그만, 그만!’ 아무리 해도 걷잡을 수 없도록 성령이 계속 나와서 우리 몸 자체가 영의 몸, 우리 몸 자체가 성전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에스겔에서 말하는 그 성전은 예수님이 자기 백성으로 만들어 내는 성전이 그 성전이라는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만든 작품입니다. 성령이 계속 나오지요. 제가 아까 여러분 이야기했지만 성령이 나온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다? 육으로 법을 지켜서는 구원이 된다, 안 된다? 육으로 법을 지켜서는 구원이 안 되는 몸을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다는 것을 명심하는 사람, 어떤 법이라도 법이 나를 구원하지는 않는다, 라는 것을 아는 사람, 도리어 그런 시도가 곧 죄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만약에 성령이 잘 나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곧장 뭐로 전환되겠습니까? ‘역시 법은 지켜야 맛이야.’ 이렇게 나오겠지요. 성령이 오게 되면 주체가 나에 대한 관심이 없고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신 주님께 관심을 가질 때 성령이 충만하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제 요한복음 8장을 봅시다. 8장에서 바리새인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처음부터 너희 아비는 악마다.’ 하는 것이 8장 44절부터 나오지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대결을 하게 된 것은 중간에 누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간음하다 잡힌 여인, 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누구 손에 잡혔습니까? 율법을 행하는 사람에게 잡혔지요.
그러면 율법을 지키는 사람 바리새인이 간음하는 여인을 잡았습니다. 그러면 간음한 여인이나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나 둘 다 어디에 예속되어 있습니까? 율법에 예속되어 있지요. 그런데 이 바리새인들은 말하기를 육의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서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수 있고 율법을 지킴으로서 자기 의가 생기고 그 의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하니까 지금 예수님이 뭘 겨냥하느냐 하면 간음하다 잡힌 이 여인은 어차피 죄인이고 할 말이 없으니까 가만히 있고 그들은 간음을 안했으니까 율법에서 뭐가 나온다? 의가 나온다는 거예요. ‘이 점을 분명히 규명해 보자. 과연 의가 나오는지’ 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땅에다가 글씨를 썼어요.
글씨를 죽 쓰니까 무슨 글씨를 썼는지 볼게 아닙니까? 저 양반이 무슨 글씨를 저렇게 썼나, 하고 보니까 돌을 잡았던 그 사람들이 그 글씨가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그 글씨를 보는 순간 돌을 놓아버렸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뭐라고 했느냐? 돌을 쥐고 있으니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했어요.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너희들 죄 없지?” 그 뜻이에요.
“김 판석, 2월26일 날 다방에 앉아가지고 김 판석, 죄 없지 그지?” (돌을 버리면서) ‘죄 있는데요.’ “그 다음 그 다음, 빨리 와라. 바빠. 김 혜자, …… 죄 없지요?” 돌 놓고 가버리고 “그 다음 빨리 와. 사람 많은데 …….” 글씨를 쓰니까 돌 놓고 다 가버렸어요. 그러니까 이 율법을 쥐고 있는 이 전체 마당이 무슨 마당이 되었습니까?
의로 충만한 것이 아니고 뭐로 충만하다? 죄로 충만한 곳이에요. 이제부터 이 죄로 충만한 곳에서는 뭐밖에 없다? 저주밖에 없는 거예요. 여기서 율법은 율법 + 은혜 + 은혜(은혜 위에 은혜) 그러니까 율법이 기본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은혜위에 은혜가 되지요. 이 혜택은 말씀이 육신이 된 분에게만 주어진 사죄권이지요.
그래서 묻습니다. “여인아, 너를 고소하는 자가 어디 있느냐?” “없습니다.” 이 말이 중요한데요. 너를 고소하는 자가 없어요. 믿습니까? 지금 저와 여러분을 고소하는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 김 대식, 올해 집사 되었습니다, 김 대식 집사님이 최 일규 집사님을 고소할 수 있습니까? 짱돌 쥘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없는데 여러분들은 왜 목사를 의식하고 왜 사람을 의식합니까?
요한복음 8장에 분명히 나오는데. 간음한 여인보다 더 못해요. 아무도 고소할 사람이 없어요. 제가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여기 앉아서 여러분에게 묻는 거예요. 한 사람 한 사람 다 묻습니다. “고소하는 사람 있겠어요, 없겠어요?” 묻는 거예요. 이 간음한 여자가 뻔뻔스럽지, 간음해놓고 하는 말이 “없나이다.” 좋~단다, 하여튼! 좋대요. 이게 복음 아닙니까? 저는 이게 복음으로 알고 있는데요.
우리를 고소하는 자가 없다는 겁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누가 너를 정죄하리오.’ 그것을 여러분은 믿습니까? 그런데 왜 사람을 의식합니까? 왜 사람을 의식해요. “없나?” “없습니다.” 이 말뜻은 “예수 내가 고소하는 놈 알아서 다 보냈다.” 하는 거예요. “따라서 고소하는 놈 다 보내는 그 일의 연결로서 나도 너를 고소하지 않겠다.”
그게 바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 겁니다. 이걸 우리가 믿습니다. 따라서 사람, 목사고 장로고 사람을 의식하지 마세요.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네 마음대로 사세요. 어차피 고소할 사람 없어요. 고소할 사람은 없고 잔소리 할 사람은 많지만. 고소할 사람은 없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잔소리 하고 교도소 보낼 사람은 많아요. 하지만 세상 교도소는 가도 하늘나라 지옥은 안 간다 그 말입니다. 뭐하면? 예수 믿으면 하늘나라 지옥은 안가요.
<밀양>에서 애 유괴해서 사람 때려 죽여 놓고 교도소에서 회개하는 사람 있었어요. 그래서 전도연이가 화를 냈어요. 세상에 남의 애는 죽여 놓고 저는 회개하고 이런 하나님 같으면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그게 거짓말이 아니에요 진짜에요. 이 세상에서 왜 그 여자를 고소하지 못하느냐 하면 그 여자는 말씀 속에 동참해서 그 여자의 모든 것은 주님의 살과 피가 그 여자의 고소하지 않겠다, 그 속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하고 거래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익히 우리가 어두움인줄 아시고 아버지하고 주님하고 단독 거래를 했기 때문에 그 거래내역에 의하면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우리는 그 거래내역을 변경시킬 수 없는 위치에 있어요. 우리는 그냥 혜택을 입을 위치에 있지 우리가 거기서 새삼스럽게 ‘내가 너무 죄를 많이 지어서 변경합시다.’ 라든지 ‘너무 나빠서 이것은 취소해야 되겠어.’ 그런 법은 없어요.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거래가 되었으면 이미 그걸로 종결된 겁니다. 그 혜택만 우리에게 주어질 뿐이에요. 그래서 더 나아가서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용서함으로 말미암아 누가 칭찬받느냐 하면 우리가 칭찬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아버지한테 칭찬받아요. 제가 너무 심하게 이야기했는지 모르지만 맞습니다.
“잘했다 내 아들아.” 이렇게 합니다. “충성된 종아.”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 말이 맞는 게 이 간음하다 잡힌 이 여인을 용서함으로 말미암아 이 용서받은 여인을 하나의 케이스로 삼아서 그 때부터 이 여인처럼 용서받지 못하고 율법의 의를 그대로 주장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뭐라고 하느냐? 이 여인이 용서를 받았으니까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죄 없고 죄 없으면 뭐가 되지요? 의가 되지요.
이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진리 때문에 의가 되었다면 이 여인 빼놓고 나머지는 다 뭐가 됩니까? 죄가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아브라함 자손인 너희들이 바로 죄 속에 있다.” 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에 속한 사람들은 발끈하고 나오지요. “우리는 죄지을 수 없는데 우리는 아브라함자손인데 어째서 우리가 죄인이냐?” 라고 했을 때 예수님이 화를 내는 것은 “방금 보고도 모르느냐?” 그 말이지요.
율법에 의해서 죄냐 의냐를 규정하는 것, 그런 율법시대는 이제 끝나고 지금은 은혜위에 은혜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용서하면 그게 의가 되고 예수님이 용서 안 해주면 그것이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더욱더 발끈하고 나오면서 “네가 뭔데 하나님만이 할수 있는 죄를 용서할 수 있나?” 하니까 “그래 그 하나님이 바로 나라니까.” 라고 나온 거예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네가 완전히 미쳤구나.” 하는 거지요.
바리새인들은 답답해 죽어요.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들이 복음 듣고 답답해 죽어요. 예수님 십자가 피로 구원받았다고 하는데 그들이 화를 내는 거예요. “네가 뭔데 당회장 말도 안 듣고 용서받나?” 이럽니다. “왜 예수가 너에게는 찾아가고 나에게는 안 찾아오나.” 그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라 합니까? “모르지, 그건. 주님 맘 대로인데.”
“당신이 복음 모르는 것을 왜 내 책임으로 돌리느냐.” 그 말이지요. 본인이 복음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되지 그걸 왜 내 책임으로 돌리냐 그 말이거든요. 아이고, 답답하지요. 정말 답답해요. 무슨 소리냐 하면 “이 양반아! 네가 믿어지는 복음이 왜 나는 안 믿어지는데?” 우리가 하는 말이 “그게 왜 내 탓이냐. 본인이 안 믿어지는 것을 왜 내 탓이냐.”
그쪽에서 하는 말이 “내가 안 믿어지면 너도 쫄따구니까 안 믿어져야 된다.” 하는 거예요. 망해도 같이 망하자는 거예요. 미쳤나? 같이 망하게. 아무리 친구가 좋다고 하지만 세상에, 지옥까지 따라가는 친구가 그게 우정입니까? 그런 것은 <사랑과 전쟁>에 나오는 드라마지. 그게 무슨 우정입니까? ‘자기의’지요.
그리고 ‘나는 친구를 위해서 예수 안 믿겠습니다.’ 하는 사람은 애초부터 예수 안 믿는 사람이에요. 무슨 믿음이 자기 맘대로 취소하는 믿음이 어디 있습니까? 한 번 주면 그대로 남아있게 되어 있지 취소될 수 있는 믿음은 믿음도 아닙니다. 주신 선물인데 선물은 갖다 버릴 수가 없어요. 주신 분이 회수하면 몰라도 주신분이 회수 할리도 없고. 주신 선물 같으면 웬 떡이냐, 하고 그냥 받아 챙기세요.
챙기고 “너를 정죄하는 사람이 있더냐?” “없어요.” 바깥에 나가서 품바한테 물어보세요. “당신이 나를 고소할래?” “아니.” 없잖아요, 보세요. 요한복음 8장에서 특히 심한 율법이라 할 수 있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 하나를 일부러 간음하게 만들어서 일부러 또 찾아가서 일부러 오게 만들어서 일부러 용서를 해 줌으로 말미암아 기존에 있던 율법에 속한 자들이 저주받는다는 것을 알리는데 그 여인을 충분하게 활용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활용하고 있어요.
무슨 죄로 활용할지 모르지만 하여튼 이거 하나 아세요. 우리는 우리를 고소할 자가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난 뒤에 8장 47절에 보면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꼭 요한 일서를 다시 보는 것 같아요.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우리 오후 3시에 공부하기 전에 우리 양 장로님하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 논리,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게 한 것은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가 아닌가 하는 그 논쟁에 대한 그것과 같이 어려운 것인데 제가 한 번 적어 보겠습니다.
이 말이 얼마나 어려운지 세상에 이만큼 어려운 말도 또 없을 것인데 이것은 철학자들도 못 풀어요. 제가 적어볼게요. ‘하나님께 속한 자 -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믿나니)’,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안 믿는 것 - 하나님께서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얼른 들어보면 이것이 말이 되는 것 같지요. 그런데 만약 여기에 자율권이나 자유의지를 주장한다면 이것은 말이 안 됩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믿을 수 있다면 이 논리는 깨져버려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 속한자기 때문에 필히 믿게 되어 있다.’ 그 말이에요. 그리고 ‘안 믿는 것은 네가 행동이 나빠서거나 인간성이 더러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네가 안 믿는 것이니까 잘 가거라, 아듀, 친구여!’ 이렇게 되는 거예요.
세상에, 이게 안 믿는 사람에게 통할 말입니까? 성경이 주로 이런 식이에요. 성경이 주로 이런 식인데 어떻게 이것을 설득시켜요. ‘안 믿어지나? 음,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구먼.’ 그러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말하기를 “목사님, 하나님께 속하기 위해서 애를 쓰기 위해서 지금 묻는 것이 아닙니까? 말을 그렇게 하면 섭섭하지요. 지금 안 믿는데 어쨌든 믿어보려고 지금 애를 쓰잖아요. 그런데 믿을 수 있도록 저를 좀 납득을 시켜 보세요.” 라고 답답해서 하는 소리인데 “안 믿어집니까?” “지금은 안 믿어집니다.” “그냥 안 믿어지는 대로 사세요.” “왜요?” “천국 못갈 모양입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 이야기밖에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그쪽에서 화가 나서 “너는 뭔데 믿느냐?” 할 때 똑같은 법칙이에요. “내가 잘나서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믿어지는 겁니다.” “누가 그럽니까?” “말씀이 그런데요.” “너는 어떻게 그게 믿어지는데?” “이상하게 그게 믿어지네요.” “나는 안 믿어지는데.” “그건 안 믿어지면 네 마음대로 하세요.”
이 세상의 모든 정어리 떼는 어망을 누가 던진다? 말씀이 던져서 어디로 가져옵니까? 말씀 세계로 가져오는 거예요. 이게 로고스의 동질성이에요. 모든 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말씀대로 되기 마련이에요. 이런 이야기하니까 유대인들이 이점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에요. 모든 것이 예정대로 된다는 것을 다만 예수가 아니고 자기가 믿던 하나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 맞는데 문제는 그게 하나님이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가 하기 때문에 예수 너는 이단이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했다는 것이 이단이고 예수님이 그렇게 한다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 사이에는 충돌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예수 이야기 안하잖아요. 하나님 이야기만 하잖아요. 예수는 너무 자기밖에 몰라서, 그런 식이죠. 방금 그 이야기가 뒤에 죽 나오는 겁니다. “네가 하나님이냐?” “그렇다.” “건방지구나. 죽어라. 너는 너 자신이나 믿어라. 우리는 아브라함자손이니 아브라함이나 믿겠다.” 하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브라함? 아브라함도 날 믿었는데.” 이렇게 나와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 예수님이 얼마나 늙어보였으면 그랬겠습니까? “나이 오십도 못된 게….”
마치 어떤 분이 “목사님, 나이 칠십도 안 되었는데 굉장히 젊습니다.” 이러면? 그 소리하고 똑같은 거예요. “나이 오십도 못된 것이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 하니까 58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이러면 아주 사람 돌아버립니다. 이러면 이미 소통이라는 것이 깨졌어요.
예수님은 시간이 정지되거든요. 예수님이 2층에 있다면 아브라함이나 모세는 다 1층, 아래층에서 일어나는 역사의 펼침이에요. 그냥 말씀의 구조 속에 배치된 배치물이라는 말이지요. 그걸 솔직하게 이야기해 준다고 또 문제라. 그 다음에 봅시다. 8장에서는 유대인들이 먼저 대들었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잡아와서 ‘예수여, 이 여인을 어떻게 할꼬.’라고 먼저 시비를 걸었는데 9장에서는 예수님이 공격적으로 나와요.
“너희들은 소경이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하는 말이 “우리가 왜 소경인데? 우리는 소경이 아니야.”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소경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보니까 소경이야.” 그러면 어쩌라고. 그러면 말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소경이야.” 할 때 “맞습니다. 소경 입니다.” 하면 “소경 맞잖아.” 할 것이고 “소경이 아니다.” 하니까 “소경이 아니라고 하는 것 보니까 소경이다.” 하는 거예요.
이것은 이 법칙이에요. 외부의 시선이 창이 되어 우리의 눈을 찔러야 돼요. 눈에 찔림을 받지 아니하면 우리의 눈은 계속 캄캄한 암흑에 있습니다.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될 때에는 우리의 눈과 귀와 모든 것을 팍팍 찔러버리는 창을 가지고 온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한테 찔린 사람은 비로소 눈을 뜬 사람이에요.
나의 시선을 유지하다가 예수님의 시선의 창에 찔려서 내 시선의 안구가 파열되어 버리면 기존의 내 안목은 사라지고 그 찔린 흔적 속에서 거기에 예수님의 시선이 남아 있게 됩니다. 그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예수님의 말이 이해가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저 눈알 찔렸습니다. 주께서 저를 찔렀습니다. 찔려보니까 비로소 눈이 봉사된 것이 아니고 뜨였습니다.’ 해서 눈이 뜨인 거예요.
요한복음 9장에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9장에서 논리를 하나 정리해야 될 것은 소경과 죄의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을 거론하신 것은 신체의 장애문제, 눈뜨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죄가 뭔지에 대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죄 안 짓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죄인인 그것을 눈을 뜨는 거지요. 우리는 죄인 되기만 되면 성공한 거예요. 죄 안 짓는 것이 성공한 것이 아니고 ‘맞구나. 내가 날 때부터 소경이구나. 날 때부터 죄인이구나.’ 하는 것을 알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힘으로는 모르고 타인이 와서 우리를 찔러줘야 됩니다. 어떻게? 제자들이 찔러주지요. “예수님, 날 때부터 소경된 저 소경이 자기 죄 때문에 그렇습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소경이 살살 약을 올리지요. 그렇잖아도 소경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 더러운 팔자가 아버지 팔자인지 내 팔자인지 모르겠다.’ 하고. 왜? 같이 율법에 속했으니까.
‘사람이 장애가 있다는 것은 저주다. 그 저주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뭐냐? 죄가 있기 때문에 이런 저주를 받았다. 그렇다면 소경이 안 된 사람은 나보다 의로운 사람이고 소경이 된 나는 저 사람보다 악하기 때문에 소경이 되었다. 비록 나는 안했다 할지라도 혹시 부모 대에서 남보다 더 악한 짓을 했기에 그 징벌로 소경된 것이 맞다.’라고 생각한 겁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제자들이 먼저 시비 걸고 나왔지요. 그렇게 할 때 예수님 하신 말씀이 “그 사람의 소경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위해서소경이 된 것이다.”라고 이야기해요. 무슨 말인지 모르지요. 진흙을 발라서 실로암에 가서 소경을 낫게 하니까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사적으로 눈을 뜬 거죠. 그때부터 일이 시작됩니다. 그때부터 이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데 24절에 보면 “이에 저희가 소경되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어디에 돌려라?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바리새인들이 영광을 어디에 돌리라고 합니까? “네가 마땅히 눈을 떴으면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지 어떻게 이단이라고 소문난 저 예수에게 돌리느냐?” 하는 겁니다. 왜 바리새인들이 이런 소리를 하느냐 하면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예수 나를 믿을래? 아니면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을 믿을래?”의 갈등을 유발시키기 위해서 지나가는 소경 붙들어서 일부러 그들에게 만나게 해 주는 겁니다.
지금 주님께서 우리 에게 똑같은 일을 벌이지요.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믿을 거냐, 아니면 나를 죄인으로 간주하시는 예수를 믿을 거냐? 그것은 우리 내부에서 똑같은 상황이 벌어져야 마땅한 겁니다. 여러분, 예수 믿을래요? 아니면 하나님 믿을래요? 둘 다 믿으면 안됩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그게 아버지께 영광이 돼요.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끼워 팔기 하는 것처럼 부록으로 집어넣으면 안돼요. 하나님을 집어넣어버리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잘 믿던 의인이 되지만 예수 십자가를 믿게 되면 나는 무엇을 해도 예수 십자가 앞에서 뭐가 된다? 죄인이 된다. 어느 쪽이 구원의 길입니까? 바로 예수님 쪽이 구원의 길이잖아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이 없다.’는 말은 예수님을 말하지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님이 되었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되고 난 뒤에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이름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 이름이기 때문에 다른 이름은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와도 아직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호와가 이름인줄 알고, 여호와가 맞습니까, 야훼가 맞습니까, 야웨가 맞습니까, 신학자들이 이거 싸움을 한다고요.
그것보다 더 원천적으로 나가면 ‘하’ 이래요. 옛날 고대근동에서 하나님을 부를 때는 숭고한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에 너무 기가 막혀서, 너무 황홀해서 그냥 언어가 아니고 ‘하(허걱)!’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걸 동질화시키고 상투화 시키다 보니까 그게 ‘어허, 하하’ 그러다가 ‘야훼, 야웨’ 이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올브라이트가 그런 이론을 내세워서 그게 맞다고 다들 하고 있어요.
저도 몰라요. 그냥 해본 소리에요. 하나님의 이름은 야웨도 야훼도 허허도 하하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예수님이 하나님의 이름이에요. 왜냐하면 그 예수님을 바라볼 때만 우리가 죄인 되기 때문에 그래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이냐시오같이 그런 영성훈련을 할 때는 예수님은 빠집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본받자, 하는 것으로 끝나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 때문에…, 이런 것은 다 빠져버려요.
죄 개념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전적으로 죄 되지 일부는 죄인데 일부는 의고 이런 것이 없어요. 다 죄면 죄고 다 의면 의고 완전히 GO, 아니면 STOP이고,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고 그런 거예요. 몽땅 죄면 죄고 일부 죄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율법에서 어느 한 귀절을 거부하는 것은 사실은 전체를 거부하는 거예요.
‘나는 이 말씀 주시는 하나님은 좋지만 저 말씀 주시는 하나님은 싫다.’ 이게 말이 됩니까? 다 똑같은 하나님인데. 이 말씀이 좋은데 저 말씀이 싫다는 그것은 다 싫은 거예요. ‘하나를 어기면 모든 율법을 다 어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서 자기 인격이 나오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의 팔다리는 좋은데 목 부분은 싫다.’ 이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전체가 한 덩어리니까.
그래서 요한복음 9장에서는 점점 더 심화되는 겁니다. 34절에 보면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쫒아내어 보내니라.” 그러고 난 되에 39절에 보면 간음한 여인을 가지고 그 사람들을 죄인으로 간주한 것처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니라.” 해서 심판하러 왔다고 하지요.
그래서 심판할 때 우리 같은 못난 인간들 붙잡아 놓고 심판을 규정하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십분 쉽시다.
2010-01-17 11:13:26 녹취 : 오용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