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강의: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제 5강
지금 요한복음이 어떤 내용이냐, 우리가 그걸 하고 있지요. 요한복음에서 제가 제목을 ‘어디서 왔느냐.’ 이 이야기를 한 것인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어떤 출처가 있는, 그분이 하나님에게서 왔다, 이런 것 말고 홀연히, 난데없이 등장한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제가 여러 번 이야기합니다만 우리 인간과 하나님의 이 구조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거지요.
‘어디서 왔지요? 아, 하나님은 내가 아는데 하나님에게서 왔구나.’ 이렇게 되어 버리면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하늘에서 오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 힘으로 믿어버릴 수가 있어요. 우리 힘으로 믿어 버릴 예수님 같으면 성령이 개입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어려운 거예요. ‘하나님에게서 오신 분이 맞네. 기다렸습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세례요한이 구태여 따로 올 필요가 없어요.
그런 정도 같으면 유대인들도 이미 알고 있는 겁니다. 그게 아니고 전혀 우리가 오리라고 예상도 못했고 도저히 파악이 되지 않는 난데없이 그 예수님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기존에 알고 있던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무의미하게 다 주저앉아 버리고 붕괴해 버리는 겁니다.
여기서(인간과 하나님의 구조) 우리가 생각하는 것, 파악하는 것, 탐색하는 것, 연구하는 것 그래서 예수님을 다시 조사하는 것 이래서 믿을만한 구석을 찾아내서 ‘아, 이런 점 때문에 당신은 메시야 맞습니다.’ 하는 그 모든 것을 전부 다 묵살시키고 홀연히 난데없이 우리 앞에 등장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인간의 힘으로 믿을 수 있는 예수님은 애초부터 가짜라는 말이지요.
반드시 예수님을 믿으려면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성령이 임해야 비로소 예수님을 예수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심지어 세례요한마저도 그랬어요. 성령이 임하는 것을 봐서 그분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분인 줄 알았지 그 외에는 모른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쳐들어오시게 되면 여기 있는 우리가 인간이 아니고 뭐로 변하느냐 하면 육으로 변합니다.
육으로 변하고 예수님은 육신의 몸으로 오심으로 말미암아, 말씀이 육신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이 생명이 있는 빛의 육신, 생명이 있는 이 육신이 현재 인간의 어두움의 육신과 충돌을 일으키지요. 충돌을 일으키면서 주님은 자기 나름대로의 자기백성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세례요한이 있었지만 세례요한은 주의 백성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예수님을 소개하는 의미에서의 세례요한이 등장했고 이제 세례요한이 요한복음 3장에서 은퇴를 해버리죠.
은퇴를 해버리면 예수님하고 누구하고 일합니까? 오직 성령하고만 일해요. 그렇다면 여기에 요한복음 4장부터 성령이 발사하는 육신의 몸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그게 유명한 사마리아 여인이잖아요. 사마리아 여인은 그냥 우리하고 똑같은 육신입니다. 메시아에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이 사람 몸에서 뭐가 발산된다? 성령이 발산되는 거예요.
성령이 발산된다는 말은 인간이 성령 없이도 자력으로 예수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애초부터 예수님께서 그런 인간을 만들어 내지를 않습니다. ‘내가 알아서 성령 줘서 성령이 발산될 때 그래서 너의 몸은 죽고 너의 몸 안에 그리스도의 몸이 들어가게 되면 이제는 너는 너의 몸으로 행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다루시는 몸으로 행세하게 될 것이다.’ 라는 쪽으로 점점 더 발전하지요.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베데스다 못가에서 병이 나은 그 환자가 그냥 병만 낫고 그냥 집에 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자기 원대로 써먹지요.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네가 담요를 들고 걸어가라.’고 했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의 몸이 같은 몸이라도 묵시적인 몸, 그야말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담겨 있는 묵시적 몸으로 바뀐 채 우리에게 등장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도구로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적을 베풀게 되는 겁니다.
전부 다 사람 위주가 아니라 예수님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서 원하는 사람에게 구원도 주시고 병도 고쳐준 거예요. 주님은 손해 보는 장사를 한 적이 없습니다. 여기 사마리아 여인도 성령이 발산되면서 사마리아여인이 성령이 발산되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이 사마리아 여인처럼 내 몸에서 성령이 나올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요한복음에서 2장부터 3장, 4장까지의 그 구조가 중요한데요. 2장, 3장, 4장을 전개하면서 주님께서는 어떤 발전을 보여주는데 2장에 보면 인간의 육신과 예수님의 육신이 비교가 되면서 인간의 육신은 무엇을 하나님으로 섬기느냐 하면 자기밖에 있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이 구조입니다.
대표적인 것은 2장에서 그들이 성전을 섬겼잖아요. 예수님의 육신이 여기(위) 있는데 인간들의 자기육신도 이렇게(아래) 있지요. 인간의 육신은 가만있는 것이 아니고 동사, 뭔가 움직인다고 했지요. 인간의 자기성전을 사수하겠다는 그 열심이 누굴 죽이게 합니까? 예수님의 육신을 다치게 만들지요. 이 육신이 계통에서 니고데모가 나오는데 몇 장이었습니까?
3장에 나왔습니다. 니고데모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습니까.” 할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 했습니다. 그러면서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이라면서 어떻게 바람 같은 성령을 모르느냐?”라고 했다고요. 그러면 예수님의 육신은 니고데모하고 협상할 생각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은 누구와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성령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니고데모와 협상해서 ‘앞으로 잘해보자, 내 증인되어라.’ 이런 거래를 할 의사가 전혀 없어요. ‘네가 어떻게 성령의 일을 모르느냐.’ 이런 식으로 책망하지요. 예수님의 육신은 성령과 관련되면서 그 육신은 인간의 육신계통을 심판하기 위한 육신인데 요한복음 3장에서 세례요한이 드디어 은퇴하지요. 요한이 세례의 일을 마치고 세례의 일을 누가 합니까? 성령께서 하신다 이말 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육신과 성령계열에서 나와서, 현재 이 밑에 있는 인간들 육신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엉뚱한 사람, 유대인과 관련 없이 엉뚱한 사람에게 이 성령에 관한 이야기가 여기에 덮쳐버리면…. 요한복음 3장에서 사마리아여인이 물 길러 왔다. 그러니까 이것은 같은 물이니까 육에 속하지요. 물 길러 왔다가 물이 뭐로 변해요? 성령으로 변하는데 여기에 주님이 개입하니까 성령이 발산하는, 폭발하는,‘네 배에서 끝없이 생수가 나올 것이다.’라고여기에 덤터기를 씌워버리죠.
이것은 사마리아 여인 좋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장차 새로운 노선의 육신은 거기서 성령이 나올 육신일 경우에만 구원받는 육신이 된다는 것을 표적으로 미리 알려주는 거예요. 여기에 계열이 두 개가 가지요. 이렇게 성령의 발산을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4장 지나서 5장에 가면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된 병자가 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과 함께 일하면서 육신에 있는 사람들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도록 해 주면서 서서히 예수님의 육신은 역사적 육신이 아니고 난데없이 등장한 묵시적 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38년 된 병자를 다루게 되는 거예요. 38년 된 병자는 그냥 병만 나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묵시적 몸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밑에 있는 육신과 대비되는 모습을 보이지요.
이 밑에 있는 것은 바로 율법입니다. 육에서 나온 인간이 율법을 통해서 구원받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위는 뭡니까? 육신은 뭘 통해서 봐야 된다?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에 의해서만 묵시적 몸이 될 수 있는 거예요. 예수님처럼. 3장에서 니고데모가 못한 것이 뭡니까? ‘육신으로 나서 어떻게 영의 사람 되느냐.’ 이게 니고데모는 안 된다 이 말이죠.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기에 안 되는데 여기에 예수님이 개입해버리면 육신으로 난 몸도 뭐가 될 수 있다? 영의 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개입으로 시작되는 거예요. 인간의 육신을 가지고 주님께서 압박을 가하면 여기서 뭐가 삐져나온다고 했습니까? 어두움이 삐져나온다고 했지요. 벌써 다 잊어버렸지요.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버리면 ‘어, 육신이구나.’ 그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고 기존에 있는 육신에서 본인들이 몰랐던 ‘아, 이런 어두운 요소가 있었구나.’ 하는 것이 서서히 삐져나와요. 그림자처럼 나오는데 그 그림자가 왜 어둡냐 하니까 바로 육이 구원받기 위해서 영으로 되는데 거기에 동원된 것이 뭐냐 하면 율법이었다 이 말이지요.
율법을 동원해서, 안식일 지켜서 육이 영 됩니까? 니고데모가 이것을 원했잖아요. ‘어떻게 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있습니까?’ 마찬가지에요, 니고데모도. 이 밑의 계열이니까. 육이 어떻게 영이 될 수 있습니까? 율법? 아니에요. 율법 더하기(+) 뭡니까? 은혜 위에 은혜(은혜 + 은혜)가 돼야 돼요. 그러면 육에서 영 되지도 못한 인간이, 이 어두운 인간이 무엇을 판별하느냐 하면 육신에서 성령으로 영의 몸이 되는 이것을 공격하는 발작을 일으킵니다.
그러면 여기서 숨겨져 있던 악마성, ‘너희 아비는 마귀다.’ 했지요, 죄가 발산되고 여기 묵시적 몸에서는 뭐가 발산됩니까? 성령이 발산되고. 성령으로 된 사람은 영의 사람 되기에 성공하지만 육신에서 나온 사람은 죄만 발산되는 그 육신의 면면을 보여주는 겁니다. 여기서 더 이야기하면 이 충돌에 의해서 예수님께서는 죽으셔야 돼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죽게 되면 이것은 죽음 다음의 삶이 아니라 죽음 안에서 삶이기 때문에 여기는 죽음이 더 이상 삶을 취소시킬 수 없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합니다. 안 죽는다는 것이 아니고 ‘네가 죽어도 잠자는 것이다.’ 이 말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처럼.
“나사로는 자고 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그것도 모르고 “우리도 자러가자.” 아직도 육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용어들을 전부 다 육적으로 곡해를 하게 돼요. 그래서 2장에서 3장, 4장 넘어오면서 하는 것은 점점 이 간격이 벌어진다는 거예요. 이쪽 노선(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노선)과 이쪽노선(육신에서 난 인간노선)이 있는데 점점 더 벌어져요.
요한복음 2장에 나오지요. 예수님께서 채찍으로 비둘기파는 사람들을 쫒아 내지요. 16절부터 보니까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 말씀 참 어렵지요.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각각 해석이 두 가지가 나와요. 해석하는 주체로 봐서 해석을 육적으로 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현재 있는 헤롯 성전을 가지고 주의 성전이라고 일단 보고 어떤 경우라도 이 하나님의 성전을 깨지면 안 된다고 사수하겠다는 그 열심이 넘쳐서 누굴 죽인다? 메시아를 죽여 버린다는 그런 해석이 나오지요.
주님 입장에서 보면 자기 몸이 성전이라서 자기 몸을 순수하게 지키기 위해서 엉터리 같은 부동산, 예배당을 치는 이것이, 바로 진짜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가짜 성전을 부술 것이다, 라고 해석이 될 수 있는 거예요. 제자들은 아마 밑의 노선 해석 같아요. 왜냐하면 뒤에 보면 믿지를 못했으니까요. 똑같은 성경구절을 봐도 이렇게 두 가지 노선 따라서 자기 입장에서 곡해하면서 성경을 죽 해석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신경 쓰지 말아야 될 것은 어떤 해석을 해도 그 해석이 우리가 예수 믿을 수 있는 근거는 되지 못합니다. 반드시 성령이 와야 돼요. 성령이 발산 될 때 그 사람이 영의 사람입니다. 말만 영의 사람이라 하지 말고 성령이 나와야 돼요. 성령이 나올 때 영의 사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이 나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육이 뭐라는 것, 육의 사람은 어떤 것을 근거로 구원받으려고 발악을 하고 있는가를 아는 사람이 영의 사람입니다. 왜? 한때 이랬었으니까. 육이 내 행함으로 성경말씀 지켜서 구원받겠다고 한 때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쪽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사마리아여인입니다. 요한복음 4장을 봅시다. 이 여인은 그냥 물, H₂O, 목말라서 그냥 물 마시러 온 거예요. 이 사람에 있어서 물 마시는 것은 그냥 목말라서 물 길러 온 것뿐이에요. 아무 상관없어요. 그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 공식에 그대로 적용시켜봅시다. 맞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영의 일을 생각한다, 안한다? 안합니다. 왜 이걸 우리가 안 받아줍니까? 육에 생각을 하는 사람이 메시아를 생각 안 한다, 그 말이 아니고 육의 생각을 하는 사람이 메시아를 생각해도 어디까지나 어느 지평에서? 그냥 나같이 육의 지평에서만 생각하는 메시아에요. ‘하나님, 제발 우리 근처에 우물하나 팍 터져서 물 길러 오지 않도록 좀 해주세요. 이왕 물 긷는 것 좀 용한 우물, 야곱의 우물을 독점판매계약 해서, 생수병에 그 물 담아서 야곱의 우물 상표등록해서 팔아먹을 수 있는 조치를 해 달라.’
항상 생각하는 것이 육적으로 생각해서 육적으로 그냥 가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건 삼위일체건 뭐가 와도 그 인간이 육적인 인간이 되면 예수를 믿든 삼위일체를 믿은 하나님을 믿든 그것은 구원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겁니다. 그냥 육에서 나와서 육인 거예요. 언제 그 사람이 영적이 사람이 되었다, 라고 할 수 있느냐 하면 바로 그것이 육이었다, 하고 고백하는 순간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가 관심 두던 그 물동이에 관심 두지 않을 때. 이걸 요한복음 4장에서는 ‘물동이를 버려두고’라고 했지요. 잘 한다. 물 길러 와가지고는. 물 길러 와서 양동이 갖다 버리면 뭐 하러 왔는데? 인생 왜 사는데? 그게 바로 영이 발생될 사람의 조짐입니다. 벌써 이상한 조짐이 벌어졌어요. 물 길러 와서 물 안 긷고 그냥 맨손으로 가 버릴 때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을 그런 쪽으로 반복해서 생산해 내는 겁니다.
그래서 물끄러미 아래쪽을 볼 수 있도록, ‘아하, 내가 바로 옛날에 예수님 만나기 전까지는 저런 인간이었다는 것을, 자기의 전의 모습을 자기그릇 안에 충분히 담아서 늘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은 이렇게 믿게 된 것은 전부다 성령의 덕이고 주님의 덕이라는 것을 그릇으로서 고백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이 바로 안 된다는 육에서 영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그 사람 외에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래요. 필히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육의 몸으로서는 예수님을 못 알아보게 되어 있어요. 연구해서 절대로 안 됩니다. 사마리아여인을 여러분이 잘 아시지요. 물 길러 왔는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시면서 그 화살표를 바꿔버립니다.
물, 물, 물 하다가 주님께서 “내가 물이다. 내가 물주는 자다. 내가 주는 물을 주겠다.” 하지요. 그럴 때 여자가 관심사가 뭡니까? 어느 우물에서 됩니까, 라는 질문을 하다가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은 어디서 왔습니까?” 하지요. 항상 육에서 영으로 바뀔 때는 질문 자체가 ‘내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아니라 ‘누구에요? 내 앞에 불쑥 등장한 당신이.’ 이렇게 되지요.
사람이 ‘누구십니까?’ 하는 그 순간의 2초, 혹은 3초만큼은 뭘 잊어버립니까? ‘내가’라는 것은 사라져요. ‘내가 뭘 하지? 내가 지금 뭘 하면 되지?’라는 것은 ‘내가’를 잊어버려요. ‘내가 잊어버린다.’고 생각하면 ‘내가’가 안 잊어져요. ‘내가 잊어버리고 그 다음에는 뭐하지?’가 생각이 들지요. 그게 아니고 뭔가 난데없이 불쑥 내 앞에 등장했을 때 그 순간 자기자신의 존재성을 망각해버립니다.
그리고 질문을 누가 하느냐 하면 그분의 질문을 받는 입장에서 내가 심사받기를 원하지요. “자, 질문하세요.” “남편 다섯 명이지?” ‘어떻게 알았지?’ 모든 질문의 시작이 주님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질문이 그렇게 시작하면서 나는 피고가 되고 주님은 재판관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피고의 입장이기 때문에 자기의 지나온 행적에 대해서 그대로 다 까발려야 되지요.
“나는 육적으로 그리심 산에 가서 제사 드리면 하나님께 구원받는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잘못된 겁니까?”라고 그 질문에 대한 응답을 하지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리심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고 사마리아인도 아니고 유대인도 아니고 내가 너에게 물 줄게.”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순간 그 여인은 그 다음부터 자기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만난 사람을 증거 할 때 그것을 가지고 추수해야 될 열매이고 그것이 예수님의 양식이라고 요한복음 4장에서 이야기합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와야 될 일을 벌써 시작하게 되었다. 추수할 때가 벌써 이미 개시되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모르고 제자들은 숨을 헉헉 거리면서 “예수님 밥 잡쉈습니까? 카스테라 좀 사왔는데 좀 드시렵니까?” “내 양식은 벌써 먹었다.” “아니, 양식이 어디 있습니까?” “저 여인이 저렇게 구원받는 저것이 바로 나의 양식이다.”
육으로 생각해서 힘내서 어떻게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영의 일은 계속해서 성령이 나오는 도구를 제작하는 것, 뚝딱 뚝딱 성령 나와라, 성령 나와, 내가 잘 만들었으니 성령 계속 나와야 돼, 하고 그런 도구를 만들어내면 난데없이 등장하신 예수님의 하실 일에 그것으로 충분한 겁니다. 그러면서도 그 여자를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의 일을 드러내는 거예요.
그물로 정어리 떼를 완전히 걷어내듯이 말씀으로 모든 것을 잡아당기는 그것이 예수님이 아버지께 받은 사명이기 때문에 그 다음 5장에 등장하는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 그 사람도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초청받아야 되지요. 5장부터 보면 드디어 서서히 어둠이 발작을 일으킵니다. 위쪽노선에서는 성령이 발산하는데 아래쪽 노선에서는 드디어 악이 발산하게 됩니다.
육의 정체가 드러나지요. 그 정체란 육적인 인간이 안식일, 율법이죠, 율법을 지키게 되면 영으로 변한다, 하늘나라인 영적 나라에 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육이라는 것은 뭐가 부족한 육입니까? 하나님의 법인 율법의 의가 부족해서 육인데 율법을 지키게 되면 뭐가 축적되고? 의+의+의+의, 의가 축적되어서 의의 나라에 입성할 수 있다, 이게 육이에요. 그러면 이게 아니라면 여러분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대안을 한번 제시해보세요. 이게 육이고 이게 지옥갈 일이라면 그렇다면 이거 말고 구원받는 괜찮은 아이디어 있거든 누가 손들고 이야기 한 번 해 보세요. 방금 말한 의+의+의+의, 이런 식으로 의 쌓는 것 말고 구원받는 방법은? 이미 영의 몸으로 오신 육신이 육에 속한 사람을 자비를 베풀어서 건져낸다는 것이 요한복음 5장의 이야기입니다.
베데스다 못가에서 그 베데스다라는 뜻이 자비이니 그 못은 자비의 못입니다. 자비의 뜻이 뭡니까? 무상입니다. 아무 대가가 없는 것, 구원받고 이것을 하라는 요구조건이 들어 있지 않은 것. 구원받았으니까 염치없이 입 닦지 말고 헌금해라, 이런 조건이 없어요. ‘세상에, 나쁜 놈 같으니 구원을 받아놓고는 헌금도 안 해. 구원 취소시킨다.’는 이런 협박은 주님께서 하신 적이 없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주님이 주신 자비가 이렇게 구원을 해 준다면 이 자비 안에, 사랑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육은 결코 구원될 수 있다, 없다? 육은 결코 구원될 수 없다, 율법으로 아무리 떡칠 하고 또 해도 절대 구원될 수 없다, 하는 것을 38년 된 병자가 비록 바리새인처럼 의+의 식으로 추구하지 않더라도 같은 육이기 때문에 여기에 이미 포함되어 있지요.
지금 제 뜻을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현재 이 바리새인들처럼 주장하든 안하든 간에 38년 된 병자가 신학박사든 아니든 관계없이 그는 이미 육의 범위를 못 벗어나요. 자기를 고한다고 해서 영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냥 육이잖아요. 그 육에서 38년 된 병자를 끄집어냈다는 것은 이 안에서 이 예수님의 몸과 바리새인 전체 몸과의 한 판 대결구도를 갖고 있어요. 구원받은 38년 된 병자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너희들이 알고 있는 방식 말고 다른 방식이 있다.’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다시 여기에 투입이 됨으로 말미암아 곧 이 사람은 예수님의 자비를 대변해야 될 대표자로서 여기에 다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육의 한계를 드러내는 거지요.
이 일은 사실은 누가 하는 일입니까? 38년 된 병자의 아이디어가 아니고 사실은 누구의 일입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 하는 것을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육에 있는 사람을 건져냄으로서 육으로 난 사람은 육이라고 하는 거예요. ‘에이, 육으로 난 사람도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잖아. 그러니까 육으로 난 사람도 영 될 수 있잖아.’라는 말로 하면 안돼요.
그것은 예수님 때문에 그런 것이고, 예수님이 주체가 되어서 그런 것이고 실제로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육으로 나서 계속 육으로 가도 본인은 할 말이 없어요. 38년이 아니라 39년이 되어서 그냥 구원 안 해주고 그 사람들처럼 되어도 그만이에요. “몇 년 되었지?” “39년 되었습니다.” “볼일 계속 봐라.” 그렇게 가버리면 끝나는 거예요.
다만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줄 때는 무엇의 대변자입니까? 예수님의 대변자로서 써먹기 위해서 병을 고쳐 줬다 이 말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결코 영이 될 수 없고 육에서 영 되는 것은 누구 소관이다? 영되시는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줄 때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병자를 뽑아 낸 거예요.
이 38년 된 병자와 바리새인들이 충돌이 일어났다면 이 충돌은 38년 된 병자와 바리새인들의 충돌이 아니고 누구와 누구의 충돌입니까? 현재 모든 인간과 난데없이 등장한 예수 그리스도의 충돌을 주께서 의도적으로 유발시킨 겁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열심히 성경공부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거 소용없다. 성령이 임해야 구원되는 거야. 성경공부 백날 대전에서 해 봐야 소용없는 거야.” 그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이런 정도는 성경공부도 아니에요. 유대인들은 얼마나 했다고요. 성경을 달달 외웁니다. 그러면 성경공부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받았기에 우리는 이 육적인 세상에서 온갖 수모를 다 겪어 가면서 예수님께서 공짜로 구원했다는 것을 증거 해야 될 사명이죠. “목사님, 그러면 증거안하면 구원 못 받습니까?” 그럴 일은 없어요. “그러면 증거 안하렵니다.” 많이 맞지요. 그것은 자기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본인이 복음증거하기 싫어하잖아요. 그러면 주위에서 몰려들게 되어 있어요. 누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요. 누가? 육이. 복음 아는 목사 있잖아요. 주변에서 누가 달려듭니까? 육이, 이단들이 달려들어요. 꼭 목사들은 구원받을 사람만 온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지’생각이고 꼭 38년 된 병자처럼 전에 내가 하던 행세를 하던 사람들이 다 몰려드는 겁니다.
다 몰려들어서 “너 언제부터 배신 때렸나?” 이래 나와요. “너 이렇게 놀래? 너 전에는 성화론 주장했잖아. 전에 율법적으로 살면 구원받는다고 했잖아. 왜 이제 와셔 딴 소리 하느냐?” 38년 된 병자가 하는 말이 “난 몰라. 나는 모르는데 나 병 낫게 해준 그분이 그렇게 하라 하더라.” 이래 나오지요. 우리도 그렇게 하면 돼요.
“난 몰라. 난 기도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그냥 주님께서 십자가 지셔서 해결 했대. 그래서 무상으로 자비를 받았을 뿐이야. 나도 어지간히 구원받으려고 애썼는데 그거 다 헛수고더라. 그냥 찾아와서 그냥 무상으로 해서 더 이상 율법 신경 쓰지 말고 네 맘대로 살래, 하게 되면 전의 너 같은 육적인 인간들이 와서 너를 비난하게 될 것이다. 그 때 너는 내 이야기만 해라. 예수님이 그렇게 했다고만 이야기해라. 그것도 못하나 이 바보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정말 우리 그것도 못합니까? 항상 이처럼 예수님은 성도 뒤에 숨어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은 안보이니까 누구를 닦달 내고 시비 거느냐 하면 이미 예수 믿어서 성령 받고 구원받은 사람을 심하게 공격해요. ‘너만 통뼈냐? 너만 복음 아냐?’ 이런 소리 참 많이 들었습니다. ‘십자가를 네가 독점했나?’ 이런 식으로.
누가 뭐라 했는데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우리를 구원한다니까 진짜 영의 사람 같으면 나도 동의해, 이러면 될 것인데, ‘너만 아냐?’ 누가 나만 안다고 했어요? 그걸 가지고 삐져서…. ‘나도 다 안다. 나도 복음 안다. 나도 신학교 나왔다. 나도 옛날에 그 복음 외쳤다.’ 누가 뭐랬어요? 그런 육의 사람들이 와글와글 옆에 붙어 있을 때 너무 내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38년 된 병자도 있지만 여기는 사십 몇 년 된 병자도 있어요. 저는 한 오십 몇 년 된 병자고, 다 나이 많고 적고 간에 병자 아닙니까?
그래서 사람을 앞장세우되 요한복음 4장, 5장, 6장으로 가면 갈수록 예수님의 자기정체가 조금씩 조금씩 노출되면서 육과의 대비, 육과의 충돌은 더 심화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죽기 살기로 한 번 붙어보자, 하는 식이지요. 네가 메시아인지, 아니면 율법 지켜서 구원받는지, 한번 해보자, 하고 극렬하게 나옵니다.
6장은 조금 있다가 보고 7장부터 먼저 봅시다. 7장 7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 함이라.” 여기서 세상의 행사를 뭐라고 했다고요? ‘악하다’고 했다. 그리고 7장 19절, 20절에 보면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이 사실을 봐서 예수님은 미리 알아요. 육이 자기를 죽인다는 사실을. 그런데 육이 예수님을 죽여줘야 됩니다. 육이 예수님을 죽여줘야 비로소 거기서 성령을 보낼 수가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몸은 죽어도 괜찮은 몸이 돼요. 아니, 죽어도 괜찮은 몸이 아니라 죽어야만 될 그런 몸입니다. 그걸 멋도 모르고 육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자꾸 달려들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때를 조절합니다.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야. 조금 더, 조금 더.’ 이런 식으로 더욱 그들의 악마성이 드러날 때 그 때 그들의 손에 의해서 죽는 거예요. 결국 예수님의 몸은 율법을 신봉하는 육의 몸에게 죽임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이 육 자체가 어두움이고 이 어두움의 특징은 그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법 감각, 법의식으로서 완전히 무장되어 있다는 것을 발각시키죠. 그것을 완전히 드러내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육은 그 안에 법의식이 들어 있다. 법의식이 왜 들어 있느냐? 법은 반드시 그 안에 그 법에 대한 행위의 주체가 있지요. 행위의 주체자가 뭘 받는다? 이법을 지킴으로서 다른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행위의 주체자 본인이 구원을 받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법 지켜서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내가 법 지켜서 당사자인 내가 법 지켰다는 이유 때문에 내가 구원받는다, 이게 모든 인간의 아담의 족속으로서의 보편적인 조건이라는 겁니다.
내가 기도했는데 저쪽에서 응답을 받으면 우리는 화를 내잖아요. 내가 기도했는데 응답이 나에게 안 오고 저쪽으로 간다면 그 다음부터 우리는 뭘 생각하느냐? 기도할 생각을 아예 안하지요. 할 수가 없지요. 한번쯤은 ‘아, 내 중보기도도 먹혀드는구나.’ 하겠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자꾸 저쪽으로 가면 ‘진짜 하나님, 저 화냅니다. 열 번 했는데 봐주는 것도 한 두 번이지.’ 그래 되는 거예요.
사람이 어떤 육이 행위를 하면 반드시, 이걸 부메랑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어떤 행위를 해도 반드시 자기에게로 귀속되게 되어 있어요. 어떤 행동을 해도 그렇습니다. 다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하나님은 근처도 안가고 결국은 나를 위한 일을 내가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것을 안 하고 구원받는 사람이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어요. 다 이 짓들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 이 짓들을 그냥 하세요. 이것을 안 하겠다는 것이 자기 주제파악을 못하고 있는 거예요. 그냥 이 짓들을 하면 됩니다. 다만 이 짓이 뭐가 된다? 죄가 된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돼요. 참 쉽죠, 잉! 영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 바로 이겁니다. 모든 짓이 나 좋으라고 하는 짓인데 그래서 이 짓 때문에 나는 지옥갈 수밖에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무상으로 자비를 베풀어서 나 같은 인간을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했다, 라는 겁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할 이야기가 굉장히 많은데 8장에서 간음한 여인이 간음을 했습니다. 이거 누구 좋으라고 간음했습니까? 휙, 휙, 휙(부메랑 날아가는 소리) 자기 좋으라고 한 거죠.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 여자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누구 때문에 구원받았어요?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맞지요? 그리고 누구 좋으라고? 예수님 자기 좋으라고 구원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마세요. 너무 미안해하면 안돼요.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구원한 것은 그 여자를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했기 때문에 너무 미안스러워는 하지 마세요. 또 너무 뻔뻔스러워도 곤란하고. 고맙습니다, 하면 되는 거예요. 그게 피조물이에요. 그게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의 특징이에요.
이제부터는 나를 위해서 안 살고 …, 자기를 위해서 한 번 안살아보세요, 일이 되는가. 세상에, 운동회를 하는데 남의 자식은 잘 뛰는데 내 자식이 엎어져 보세요. ‘내 자식인가? 주님의 자식이지.’ 이런 인간은 없습니다. 누구야, 뒤에서 다리 걸은 놈이. 그 애 반 죽어요. 태클 걸은 놈이 누구야! 태클은 운동회 때만 거는 줄 압니까. 입사시험 칠 때 그 애로 인해서 내 자식이 떨어졌다든지, 심지어 군에 가도 치맛바람이 부는데.
어떤 행위든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철저하게 우리를 육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주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되겠지요. 요한복음 5장에 봅시다. 여기 안식일이 있는데 5장 12절에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고 물으니까 그 사람이 하는 말이 ‘그 사람이 누군지는 나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나를 낫게 했다.’ 하니까 바리새인들이 ‘너는 비켜나라.’ 하고는 직접 예수를 찾아가지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예수가 뭐라고 합니까?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했지요. 그러면 여기서 아버지가 두 명 되었어요.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아버지(하나님)가 따로 있고 예수님이 생각하는 아버지 따로 있지요. 육에서 창안한 하나님하고 예수님의 아버지하고 이 땅에서는 서로 섞이거나 협상의 대상이 아니고 완전히 대립이 된다는 것을 이 요한복음 5장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어떻게? 무상으로 자비를 베풂으로서 대립이 돼요. 그냥 좋은 말로 해서는 대립이 안됩니다. ‘바리새인아, 안식일을 버리고….’ 이래서 대립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야말로 그들이 신주단지같이 모시는 이 법, 이 법을 와장창 깰 때 그들이 정신이 번쩍 들면서 “누구야! 이 신주단지 깬 놈이. 나와!” “난데 왜. 나야.” “누구야!” “내가 진짜 하나님이지.” “아닌 것 같은데?” “아니라고 생각하는 네가 가짜 하나님이야.” 그렇게 되는 겁니다.
바로 이 이야기를 기존 한국교회 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 자신보고 이야기하세요. “누구야! 20년 동안 하나님 잘 섬기고 교회 봉사 잘하고 있는데, 누구야! 이 근호 너야?” “저 아닌데요.” 진짜 주님한테 물어보세요. 주님이 여러분의 밥그릇을 깬 겁니다. 제발 생각하지 말라고, 제발 법적으로 따지지 말라고.
이미 십자가는 보였기에 그 십자가와 여러분이 관련이 있으면 여러분은 이미 십자가의 사람이 되어서 여러분의 어떤 행위 같은 것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관계없이 여러분은 이미 구원을 받은 거예요. 구원을 받았으니까 그런 법에 얽매이지 말라고 해도 이 버릇이 더럽게 들어가지고 ‘그래도 뭘 좀(뭐라도 붙들면서) ….’ “놔라 놔!” 그러면 뭘 또 뒤에 쥐고. “뒤에 뭐 있는데?” “아무것도 아닌데요.”
버릇이 더럽게 들어가지고 안하면 찝찝하고 저주받을 것 같고 그래요. 이 버릇 언제 고쳐질는지, 죽어야 고쳐질 것인지. 그래서 주님께서는 때로는 우리로 하여금 죽게 만들어서, 사람이 죽어버리면 행할 것도 없잖아요. 사람이 죽는 마당에, 몸이 아픈데 뭘 행합니까? 치매 걸려서 자기 몸 하나 간수 못하는데 무슨 찬양을 하겠어요.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어서 자신의 밥그릇이 이미 깨진 것을, 내가 그렇게 모시던 나의 의, 의, 의, 의, 나의 의를 이만큼 모았던 나의 저금통이 예수라는 도둑놈이 들어와서 몽땅 다 남김없이 털어가고 펀드는 다 날아가 버리고 내가 자랑할 것은 하나도 없게 만들어 버렸어요.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5장에서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에 그런 현상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이것이, 요한복음 2장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낫게 할 때 무엇이 정지된다고 했습니까, 시간이 정지되지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버리면 시간이 정지가 되어 버려요. 정지가 되어버리면 이것이 전체가 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이 신분이 우리가 60, 70, 80이 되어도 그 원칙 그대로 적용되어서 무덤 속에 가도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은 여전히 생명으로 옮겨진 거예요.
시간이 정지되었다는 말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시간이 없는 말씀이고 우리는 지금 흘러가는 시간 속에 살고 있고 그러니까 우리는 맨 날 잊어버리고 잊어버리고 또 잊어버리게 되지요. 잊어버릴 때마다 정지된 시간에서 또 집어넣어주고 또 집어넣어주고 상기시키고 확인시키고 깨닫게 하시고 성령을 통해서 날마다 말씀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신 분이다.’ 저금통 갖다 버리니까 시장에 가서 저금통 또 사다 놔요. 사다놓고 거기에 또 자기 의를 저축한다고요. ‘하나님, 이만큼 모으면 제 소원하나 들어주시렵니까?’ 또 거기에 모으는 시도를 하는 거예요. 사람이 이렇게 자기의가 있으면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뭘 믿느냐? 자기가 잘했던 것 앞에서 빕니다. ‘주여, 이만큼 자기 행함을 축적했는데 뭐 없습니까? 보상 없습니까?’ 이렇게 빌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교회에 헌금을 하게 되면 헌금한 그 교회가 우상이 됩니다. 떠나지를 못해요. 그래서 목사들이 하는 전략 중에 하나가 목돈을 내게 해서 목돈 낸 그 교회를 못 떠나게 하는 그것이 전략중의 하나에요. 장로들도 오백만원 냈는데 그 교회를 떠나겠습니까? 오백만원 포기하고 떠나야 되는데요. 일종의 포기각서에요.
결국 교회란 뭐냐? 사채업자에요. 그걸 교회 탓 하지 마세요. 본인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그것을 인정을 안 하니까 거기에 여전히 미련을 두고 있는 겁니다. 점점 말이 더 과격해지는데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요한복음 5장과 6장을 넘어가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앞으로 점점 더 과격해질 거예요. 흐름 따라 가야 되니까. 핑계입니다~(^^).
그 다음에 5장을 마지막을 봅시다. 5장 45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가 너희를 고소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것은 사도바울 서신에 보면 나오지요. ‘법에 속한 사람은 저주 아래 있다.’(갈 3:10) 법에 속한 사람은 저주 아래 있지요.
법이 주어지면 숨겨져 있던 자유의지가 드디어 자극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법은 하라, 또는 하지 말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명령을 받게 되면 거기에 대해서 반응을 나타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 법이 주는 반응에서 육을 가진 사람은, 육적인 사람 말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육을 가진 모든 사람은 여기서 반응을 나타내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구원받은 사람은 법이 좋아요. 왜? 우리의 본색을 드러낼 수 있는 그러한 계기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법이 오면 오는 대로 그대로 반응을 나타내게 됩니다. 그 반응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과 반응이 똑같다는 사실을 여러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항상 ‘하라’ 하면 그 다음에는 ‘안하면 어떻게 할 건데?’ 이렇게 나오고 ‘하지 말라’ 하면 ‘하면 어쩔 건데?’ 반드시 이렇게 나와요.
‘하라’에서 그냥 하는 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타자의 명령이 외부에서 내부에 오게 되면 내 욕망은 그것을 검색해요. 내 안에서 일단 허락을 맡아야 돼요. ‘할까 말까?’ ‘해라’ ‘할까?’ ‘하래. 양심이 하래.’ 반드시 검색을 하는 거예요. ‘하는데 내가 이틀째까지만 할게. 내가 사흘까지는 장담 못해.’ 반드시 그게 나와요.
그래서 이런 반응을 나타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잠자고 있던 우리의 자율권이 표면으로 외부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드러나게 될 때 무엇이 달라붙느냐 하면 처벌규정이 달라붙어요. 이 처벌규정이 달라붙을 때 여기서 협상이 이루어져요. 내가 최선을 다 할 테니까 처벌규정을 완화해 달라든지, 이런 협상이 우리 내부에서 실시되는데 이 협상기준은 놀랍게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 환경, 상황, 구조에서 들었던 풍월, 교회에서 들었던 풍월가지고 협상에 나서게 되는 겁니다.
‘이거 안 해서 벌 받은 사람이 저렇게 벌 받았다는데 저는 좀 완화해 주세요.’ 이런 식으로 이미 들었던 기억 속에서 이것이 되는 거죠. 그러면 이 전체가 나의 주체로 ‘나는 이런 인간이라고’ 확립이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나오는 것은 ‘앞으로 잘할게.’가 되거든요. 여기서 미래가 생성되고 등장하지요.
그렇다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것은 미래입니까, 미래 아닙니까? 묵시세계에서는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고 모든 것이 지금 나한테 주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법이 옴으로써 뭐가 발생되었습니까? 미래의 미진한 것, 그 때 가봐서 이야기 합시다, 가 나와요. 그래서 교회 오래 다닌 사람들이 하는 말이 “집사님, 그렇게 안 믿으면 천국 가는데 지장 있습니다.” 하면 “가봐야 알지.” 합니다.
맨 날 미래가 남아 있어요. 그래서 미래의 남아 있는 그것을 절단시키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현재의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여기의 미래성의 주체를 미흡함으로 실패로 만들어요. 이 모든 법적인 조치를 실패로 만들어서 우리는 처벌받아도 할 수 없는 죄인이다, 내가 장담한 것조차 하지 못한 죄인이다, 하고 드러내는데 이렇게 드러낼 때 이렇게 죄인으로 드러내게 했던 그 은혜의 당사자가 주님의 십자가를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어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 법을 처음에 주신 것은 누구입니까? 마귀입니까, 주님이십니까? 주님이죠. 주님이 자꾸 그런 전략을 쓰는 거예요. 법을 줘놓고 우리의 실체를 드러내고 또 십자가 집어넣고 법 집어넣고, 이것이 바로 육을 다루는 성령의 방법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여전히 십자가에요. 다 안다, 내가 믿는다, 이러지 말고 계속해서 십자가가 살아나는 이유가 우리에게 법을 통해서 십자가의 은혜를 주고 또 잊을 만하면 십자가가 들어와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을 깨닫게 하시고 십자가 공로만 높이고, 그런 식으로 계속 가는 거예요. 십분 쉽시다.
2010-01-17 11:10:34 녹취 : 오용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