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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2010 겨울 수련회 / 요한복음 (어디서 왔느냐) 3강 본문

십자가마을 수련회/10겨울(요한복음)

2010 겨울 수련회 / 요한복음 (어디서 왔느냐) 3강

정인순 2014. 1. 1.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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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c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어제 한 것. 하나님 있고 여기에 대해서는 하나님과 말씀의 관계 이 전체는 인간이 조작한 거예요. 여기에 인간 바깥에 하나님과 말씀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이 정어리를 훌치듯이 그물을 던져서 전체를 다 말씀 쪽으로 끌고 오는 거예요. 말씀이 해야 될 일이 뭐냐 하면, 여기는 뭐가 누락된다 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빠져있는데 여기서는 빠져있는 형상 대신 빛이 있고 생명 또는 생명이 있고 빛이 있어요.

말씀하고 빛하고 생명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말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말씀이지만 이게 인간과의 관련지을 때는 빛이고 생명이라고 관련짓는 겁니다. 사람들과 관련돼있는 빛이고, 사람들과 무관한 것이 아니고 관련돼있는 생명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빛은 사람들의 빛,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이야기한 겁니다.

그러면 빛과 생명이 여기 있는 사람들하고 어떤 관계가 되느냐? 그걸 설명을 해야 되는데 이번 시간에. 여기는 하나님의 형상이 누락돼있으니까 형상이란 자리에 말씀의 입장에서 빛과 생명이 들어온다 이 말이죠. 그런데 왜 형상이라 하지 않고 빛과 생명이라 했는가? 빛을 이야기함으로써 이 전체가 어둠이 되고, 생명을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이 전체는 사실은 생명이 없다, 죽어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겁니다.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이 빛으로 나타나서 전체를 어둠으로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끌고 가면 정어리 떼처럼 전체를 끌고 가면 결국 어둠이 빛으로 가고, 생명으로 가서 그 다음에 말씀에 합류가 되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될 때 어떤 식으로 관계되느냐? 이게 하나님의 창조하심인데 요한복음에서는 만물이 그가 없이는 만들어진 게 없다 해서 창조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창조가 뭐냐 할 때 어둠이 먼저겠어요, 빛이 먼저겠습니까? 교재에 보면 이렇게 돼있어요. 교재 2페이지에 보면, 본론부분에 보면, [빛보다 어두움이 우선이다.] 돼있죠. 그게 어디에 나와 있느냐 하면, 창세기 1장 2절에 보면, 흑암이 있고 그 다음에 어두움이 있는 겁니다.

흑암이 있고 어두움이 있다는 것을 상당히 설명하기 어려우니까 제가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먼저 물어볼게요. 우리가 지금 이렇게 요한복음을 생각하고 있는데 요한복음에 앉아있는 여러분들이 꿈입니까, 안 그러면 실제입니까? 그걸 어떻게 알죠? 이게 꿈일 수 있잖아요. 꿈인지 실제인지 뭘 가지고 판정할 수 있습니까? 장자란 사람은 꿈에 자기가 나비가 될 때 내가 나비가 된 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그게 꿈인지 그걸 판정할 수 없다 했거든요. 장자란 사람이 있어요. 노자, 장자 그쪽 계열이거든요.

사람이 그걸 동질성이라 하는데 내가 현재 의식하는 것이 꿈이 아니고 실제로 의식하는 것이다. 아니다. 이건 꿈에 불과하다는 걸 알려면 중간에 우리가 잠을 자봐야 돼요. 잠을 자고 난 뒤에 다시 어제 것이 기억나고 잠자고 난 뒤에 오늘 어제 잠 잔 것이 기억나거든 그것은 바로 중간에 끼어있는 것이 꿈이었고, 깨어있는 지금 상태는 현실로 깨어있는 걸로 드러나는 거예요.

동질성에서 동질성 잃어버리면 어두움, 잠을 자게 되면 잠에서 깨어났을 때 다시 동질성을 회복하면 그때 잠잔 것이 잠 맞구나. 지금 보는 순간 확인할 수 있다 이 말이죠. 밑에 어두움이 어두움이 되려면 여기에 뭔가 질서가 빛이 주어지면 빛은 어두움을 절단시키고 단절시킨다. 절단시키면 자체가 빛-어두움-빛 이렇게 되는 거예요. 제가 만든 게 아니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니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한 날이다. 그러니까 획을 긋고 끊어짐을 통해서 어두움의 세계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세계가 그런 식으로 구분해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것은 반드시 뭘 내포해야 됩니까? 어두움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어두움을 아래층에다 담은 채 어두움이 기억나게 되는 한에서 창조라는 말을 할 수 있어요. 저녁이 되어야 day, 낮이라는 게 의미가 있다니까. 저녁이 돼야 그 다음날과 저쪽 날과의 창조의 의미가 피어나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고 끄덕이는지.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라 하면, 사람들은 자꾸 창조라 하면 어두움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미리 이야기합니다. 사랑이라 하는 것은 어두움을 함유하고 있어야 그게 사랑이에요. 나의 아픔, 어두운 기억을 갖고 있어야 그 사람은 사랑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령 받았기 때문에 죄 안 진다고 하는데 성령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창조에 해당되거든요. 창조에 해당되면 반드시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나 십자가에 죽어야 마땅한 죄인입니다.’를 늘 포함시키고 있어야 그걸 감싸고 있어줘야 그게 진정한 사랑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서는, ‘네가 그런 사랑을 알면 이제는 네가 친구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너는 죽어도 상관없지?’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젯밤에 몇 호실에서 그 이야기한다고 옆에 여자호실 다 깨워놨는데 그걸 몰랐지요. 제가 그렇게 고함을 치는 줄 몰랐습니다. 아내가 와서 눈 마주칠 그때 제 방으로 갔어요. 큰 일 날 뻔 했어요. 안 왔으면 계속 신나게 강의할 뻔했어요. 배필자라는 게 그때 필요한 거예요.

어두움을 제거하는, 자기 딴에 질서라고 우기는 어두움을 단절시켜서 오바한다, 과도하게 논다 이렇게 끊어줄 때 항상 우리 안에 어두움이 포함돼있어요. ‘나는 죄인입니다’가 포함될 때 그게 사랑받은 사람의 특징이에요.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나는 뭘 해도 죄가 된다는 걸 알 때 그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그렇지 않고 난 성령 받았기 때문에 이젠 더 이상 죄 짓지 않는다. 뭘 해도 나는 완벽하다. 이거는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 아니고 이것은 꿈을 꾸고 있는 거예요. 왜? 중간에 절단된 부분이 없기 때문에 꿈을 꾸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두움을 가미해서 동질성을 회복하는데 이것이 생명 되시는 분이 말씀이 창조의 주인공이 되니까 창조의 주인공이 빛과 생명을 이런 법칙에 의해서 새로운 빛을 제공해버리면 어두움은 밑으로 빠지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걸 함유하면서 새로운 동질성으로 유지하며 나가는 겁니다.

이걸 어떻게 하느냐 하면, 기존의 육신에다 빛으로 와버리면 빛이 들어온 육신과 기존의 육신과 충돌이 일어나죠. 기존의 육신은 빛의 육신으로 말미암아 이게 참 인간인데, 새로운 참다운 인간이 오게 되면 기존의 인간이라고 여겼던 육신에서 어두움이 빠져나와버려요. 말씀이 육신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잘났다고 여기는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근사한 창조물이라 여기는 우리 속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두움으로 형성된 육신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그게 빛 되신 분이 홀연히, 어제 이야기했죠. 어제 제일 중요한 개념은 ‘홀연히’에요. 어디서 왔느냐? 위에서, 남에서 어디서 왔느냐? 올 수 없는데서 나타났을 때 이거는 기겁을 하죠. ‘너, 어디서 왔어? 분명히 너의 출처를 대라. 출신이 어디야?’ 우리 예수님 말씀은 그거잖아요. 이게 창조다.

창조는, 빛과 생명 창조에 관한 것은 인간의 손을 경유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존의 신학은 반드시 천국을 가던, 기도를 하던 자기로부터 출발해서 자기를 경유해서 심지어 하나님의 형상까지 본 받는 것까지 자기가 해석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니까 이것은 창조가 아니고 그냥 어두움의 반복에 불과해요. 죄의 되풀이에 불과한 겁니다. 창조는 누구의 소관입니까? 하나님의 소관, 말씀의 소관인데 이미 말씀이 없는 속에 어두움이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말씀인 척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유대교고 모든 인간이 되는 겁니다.

어제 이야기했잖아요. ‘여기 있다 내가.’ 내가를 괄호 쳐버리면 괄호 치는 걸 환원이라 하는데. 여기 있다. 누가? 그때 물으면, 내가 있다. 이런 건 묻기 전에는 그냥 내가 여기 있는 거예요. 그래서 무엇이 진리냐? 인간들의 생각은 내가 여기 있음 자체가 진리가 돼요. 내가 여기 있는 것을 누구든지 방해할 것 같으면 나의 적이 되고 사악한 악마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악마란 것도 본인이 결정하고 내가 여기 있는 것을 훼방하고 방해하면 모조리 악마에요.

교회 목사들이 부교역자라든지 복음을 아는 어떤 집사나 평신도가 복음을 이야기하고 진리를 이야기하면 무조건 사탄이에요. 왜? 내가 여기 있는데 나를 경유하지 않고 왜 건방을 떠느냐. 나를 경유해야 될 텐데. 요한복음 전체가 예수님 보고 죄인이라고 이야기한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유대교 종교 지도자를 경유해서 하나님 일을 해도 하는데 ‘넌 어디서 날아온 뼈다귀냐’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를 들어서 일반교인이 복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런 분도 여기 계시지만 목사가 하는 말이, ‘나를 통하지 않고 어떻게 네가 건방지게 진리를 아느냐?’ 이렇게 돼는 거예요. 목사님을 왜 통해야 됩니까? 내가 여기 당회장으로 있거든. 있으면 있는 거지 그게 무슨 의미인데? 내가 있다는 것은 요한계시록 2장에 보면 각 교회마다 주의 사자를 보냈는데 주의 사자가 이 교회에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니고 내가 주의 사자다 이 말이죠.

주의 사자가 없으면 하나님의 세운 교회는 반드시 뭘 통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의 사자를 통해서 일해야 되는데 건방지게 주의 사자도 아닌 게 주의 고양이도 아닌 게 왜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네가 하느냐 이래 나오는 거예요. 성경을 조금만 아는 평신도 같으면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바로 악마가 주의 사자를 다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악마가 세워진 주의 사자들이 각 교회마다 다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고을마다 산마다 전부다 산당을 만들어서 차지하고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의 특징은 내가 여기 있음 자체로서 자기가 진리라고 한다면 바로 이러한 어두움의 육신에 진짜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계신 것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됨으로 말미암아 이거는 홀연히 나타난 예수님이라는 인간과 기존에 인간이라고 우기는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우기는 그 인간과의 여기서 어느 것이 빛이고, 어느 것이 어두움이냐가 드디어 갈라지게 되는 거예요. 사실은 이 사람들이 빛이 오기 전까지 어두움이 어두움인 줄 모르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새로 오신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에 의해서 창조가 일어납니다. 그때부터 우리에게 주체란 게 없어요. 요한복음 1장 11절에 보세요. “자기 땅에 오매” 그 다음에 뭐라 돼있죠? 그냥 백성이 아니고 앞에 뭐가 붙죠? ‘자기 백성’이죠. 그러니까 하나님 백성의 주체는 누가 갖고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갖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백성이에요. 나는 나의 백성이 아니고 예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백성이 되려면 예수님이 갖고 있던 빛과 생명이 우리 육신 속에 파고 들어왔으면 그 사람은 자기 본인의 사람이 되는 게 아니고 나에게 찾아오신 말씀의 사람, 말씀의 백성, 말씀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들어올 때 그건 우리 힘이 아니기 때문에 이 창조의 힘, 말씀의 것이기 때문에 이걸 권세라고 해요.

권세가 바로 12절에 나오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런데 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만’ 권세를 줬다 하니까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러면 권세를 받으려면 우선 나부터 액션, 행동을 취해서 그런 행동이 없으면 권세도 안 올 것이 아니냐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 말은 13절에서 틀렸어요. 13절에 보면,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서로서 난 자”라 해서 이건 뭐로 표현하느냐 하면, 부모가 자식을 낳고 그 이름을 누가 짓습니까? 부모가 일방적으로 짓는 것처럼 이거는 태어남의 의미에서는 영접하는 자, 믿는 자라는 것은 태어나고 난 뒤에 결과로 그렇게 표현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주신 권세를 받게 되면 나는 믿게 되었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될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태어나야만 했구나. 하지만 이 힘은 나에게 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의 권세가 임해야 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새로운 창조인데 그 창조는 하나님의 원초적인 창조, 혼돈 어두움이 있었고,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고, 아침과 저녁이 되는 것처럼 한 날을 하는 그 창조가 드디어는 인간을 관련해서, 인간을 상대로 해서, 육신을 상대로 해서 그 창조가 이루어졌다가 되는 겁니다.

그 일을 그 생명과 빛의 일을 그전에 율법을 주는 그 시대에 이미 실시해버렸습니다. 그것이 창조의 말씀이 빛과 생명을 주었는데 이 빛과 생명은 두 가지 있어요. 안다 치고 지웁시다. 다시 그리면 되니까.

하나님께서 빛과 생명을 통해서 주어질 때 전에는 율법을 통해서 했는데 율법+은혜, 그 다음에 은혜 위에 은혜라 했으니 은혜 하나 더 들어갑시다. 율법에 은혜가 주어지게 되면 빛과 생명은 율법과 은혜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라 하는 것은 그전까지 율법으로 왔던 자기 이스라엘이 이제는 추가해서 마지막 때에 은혜 위에 은혜를 추가해서 새로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형성되는 거죠.

그러면 요한복음 1장 47절 봅시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율법으로 알던 것이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은혜까지 왔다 이 말이죠. 은혜가 온 것이 자기 백성이니까 하나의 어두움을 담는 빛의 용기(容器), 그릇으로서 활동하게 되면 여기에 예수님의 빛과 생명이 들어오게 된다. 그릇이 율법이었는데 이제 율법+은혜가 그릇에 담기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참 이스라엘이라 해서 예수님의 주체가 되는 자기 백성이 되는 겁니다. 이 자체가 창조입니다. 이 창조는 뭐가 있어야 창조답다? 반드시 혼돈, 어두움이 있을 때 창조가 되는 거죠. 어두움이 있어야 빛이 있는 것처럼. 그러니까 천국이란 것은 뭘 유발합니까? 반드시 지옥이 있어야 천국이 천국다워요.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창조한 흔적이 없어요.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가 꿈이 아니고 지어낸 신화가 아닌 이유는 뭐냐 하면, 예수님이 실제로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단절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나는 천국 갔다 주장할 때 천국 갔다, 천국을 봤다 했을 적에 그 사람한테 당신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는가 물어보세요. 꿈에서는 죽었다가 살아난 건 저는 꿈속에서 여러 번 경험했어요. 절벽에서 떨어졌다가 다시 깨어난 그런 게 있었어요.

그것 말고 정말 단절, 동질성이 끊어졌고 다시 하나님의 개입이 아니면 회복할 수 없는 동질성을 회복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그 외에 모든 인간이 생각했던 천국, 극락 개념은 전부다 꿈에 불과한 거예요.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이 닿아있지 않은 자기가 스스로 구원받고 싶어서 환장해서 지어낸 이야기들, 의욕들, 욕망들 그런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정말 저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냐 볼 때는 십자가와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돼요. 그걸 반기면, ‘내 이야기네. 난 저것 때문에 살았어.’ 이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지만 ‘그것 나 다 아는데.’ 전에 있었던 자기의 욕망과 욕심이 그대로 이어져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어두움이라는 무질서, 혼돈을 카바할 수 있는 창조가 없다는 거예요.

새로운 창조를 어두움을 어두움이라고 분명히 자기한테 자백하게 만듭니다. ‘나 죄인 맞아요. 도저히 내 힘으로 구원될 수 없는 것 인정합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공로, 능력은 우리 주님께 있습니다.’ 이렇데 나와 줘야 어느 교회든 그 사람이 성도고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나 그것 옛날에 알고 있었는데 그것 다 잊었어.’ 이렇게 나오면 도대체 그 사람이 뭘 담고 있다는 말입니까? 자기가 스스로 트릭을 쓰는 거예요. 간지. 꾸미는 것, 꼼수 쓰는 것 이걸 간지라 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인간이 신에게 희생함으로써 드디어 신은 인간의 손에 장악되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인간이 하나님에 희생함으로 말미암아 뿅 가서 정신이 나갔다 이 말이죠. 너무 기뻐서. 그 틈을 이용해서 인간은 신을 꽁꽁 묶어서 자기가 부리고 싶은 대로 부린다 거예요. 왜? ‘당신 십일조 받아먹었잖아. 내 시키는 대로 해. 당신 내 헌신과 봉사를 받아먹었으니까 이제 내 종이야.’ 자기가 부리고 싶은 대로 부리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우상이라 하는 것은 신도 감격하지 않을 수 없는 신도 깜짝 놀랄만한 희생을 듬뿍 줘서 그래서 뿅 가서 뭘 도와줄까 할 때 그때 납치해서 자기 종으로 삼는 그것이 우상의 규칙이 되는 겁니다. 모든 우상은 조상한테 좌청룡, 우백호 제사 드려놓고, ‘제사 받아먹었으면 충성을 하란 말이야.’ 이렇게 하는 거예요. 천주교도 마찬가지고.

도대체 이 자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본성인데 그건 어쩔 수 없는 나올 수밖에 없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죽게 만드는 결정적인 죄라는 걸 인정하는 게 있어야 돼요. 만약에 그걸 인정하고 기존 교회 다닌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여 받으소서’ 하면서도 ‘이 집도 참 나쁜 짓을 하네.’ 본인이 그걸 알 것 아니냐 말이죠. 모른다고요? 복음 전하는 사람이 ‘여러분 헌금 한 것도 죄입니다.’ 할 때는 ‘아멘’ 이렇게 나와야 된다 이 말이죠.

실제로 그걸 시험해봤다 이 말이죠. 헌금한 것도 죄고, 전도하는 것도 죄라고 하니까 사람이 가면서 차비 주지 말라고 나오고, 도대체 어느 장로가 불렀느냐고 나오니까. 도대체    이방종교하고 똑같은 거예요. 사람이 갖고 있는 자기만의 주체는 어떤 경우에도 포기를 못합니다. 주위에 괜찮은 신이 있다 하면 다 끌어 모아서 내 주체를 더욱더 공고히 하고 확장시키는 그런 짓밖에 하지 않아요. 그래서 큰 교회가 구원되기에 쉬운 줄 알지만 그건 넓은 길로 가면 점점 더 낭패에 끝납니다.

물론 큰 교회가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큰 교회가, 교회가 아니란 이야기에요. 그거는 교회도 아니다 이 말입니다. 나쁘다, 좋다 할 가치조차 없는. 교회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구원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가 구원하지 교회가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하시고 다니시면 돼요.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아마 힘들걸요. 은근히 엄포를 놓지요.

기존의 신학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된 걸 어떻게 해석하느냐? 목사님들은 다 공부를 했기 때문에 다 아시죠. 기존의 신학에서는 인간과 하나님, 이 틀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 틀을 고집합니다. 이게 어둡다는 생각은 상상도 못해요. 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든지 이게 왜 어두우냐? 이게 뭐가 어두우냐? 당연한데. 특히 천주교나 캘빈주의에서는 이걸 강력하게 주장하죠.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건 어두운데 문제는 제대로 못 섬겨서 문제다. 성령을 못 받아서 제대로 못 섬긴다는 겁니다. 성령만 주시면 제대로 섬길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대로 섬기려면 죄 없는 상태에서 섬겨야 되는데 인간은 죄 문제를 해결 못하기 때문에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육신으로 왔다는 거예요. 여기서 문제가 돼버려요. 죄 문제 해결하면 육신으로 올 필요 없이 ‘네 죄 끝났어.’ 이러면 될 텐데 왜 육신으로 와야 되는 그런 문제가 생겨버립니다. ‘이리와. 안수 해줄게. 죄 없어. 됐어. 이제 마음껏 하나님 섬겨.’ 이게 더 간편하지 않습니까? 죽이고 또 부활시키고 복잡하게 나올 필요가 뭐가 있느냐 말이죠.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뭘 하느냐 하면, 육신 속에 뭐가 있다는 거예요. 육신 속이 어떤 구조로 돼 있느냐 하면, ‘영혼+육체’로 돼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도 영혼+육체로 돼있으니까 더러운 영혼+육신과 깨끗한 영혼+육신이 결합이 되면 바꿔치기가 일어나요. 이쪽 영혼이 이쪽 영혼에 개입하고, 이쪽 육신은 이쪽 육신에 개입한다는 거예요. 변환기 역할을 하죠. 우리 영혼이 예수님의 영혼으로 바뀌고 우리 육체는 못 바뀌죠. 그래서 이 육체는 바뀌진 않는데 다만 영혼이 육체를 지배할 수 있기 때문에 육체를 관리 잘 하게 되면 전에는 죄의 관리 하에 있던 육체인데 이제는 깨끗한 영혼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이제는 깨끗한 영혼입니다.

그러니까 복잡한 문제가 뭐냐 하면, 성령은 역시 외곽에 있어요. 성령이 관리해버리면 이거는 성령의 성화니까 말이 안 되니까 성령께서 그냥 약간 도와주기만 하고 자문기관으로 도와주기만 하면, ‘내가 알아서 할게요.’ 깨끗한 영혼이 더러운 육체를 관리해서 더러운 육체를 깨끗한 영혼이 절제시켜 가면 육체가 깨끗한 착한 짓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에게는 무엇이 날아가 버렸어요?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예수님만 못 박히고 나는 거기서 관람했죠. 혼자 죽으시고 우리는 박수 친 거예요. ‘저러면 맞는구나. 조심할게요.’ 구경하고 온 거예요. 그래서 죽은 적이 없어요. 실제로 들은 이야기라니까. 옛날의 십자가마을에서. 인간은 죽은 적이 없다는 거예요. 단 한 번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나니.” 그거는 괜히 해본 소리라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우리는 늘 죽어있어요. 아래층에 늘 죽어있다고. 영혼이 육체를 관리해서 깨끗하게 되는데 그러면 이 육체는 더 이상 죄 짓지 못하는 육체가 된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에게 말씀을 이야기하게 되면 나는 말씀을 이미 알기 때문에 이제는 말씀하고 상관없이 스스로 내가 하는 것이 곧 말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 어느 걸 봐도 다 지킨 게 돼요. 사실은 지킨 척을 하고 있죠. ‘주님보다 천하 자식을 더 사랑하지 않습니까?’ ‘나는 주님을 더 사랑하지 처자식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대단하십니다.’ ‘대단하죠. 옛날에는 처자식인데 지금은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 ‘그러면 형제를 위해서 죽을 수 있습니까?’ ‘죽을 수 있지요.’ ‘죽어봤습니까?’ ‘아직 기회가 되지 않아서 못 죽었습니다.’ 왜 기회가 없어요. 기회가 많은데 돌아보면 다 기회인데.

성령의 충만을 받을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자기 육체가 자기 영혼으로 힘들다 싶을 때는 뭘 하느냐 하면, 그때 성령의 도움 받아 성령의 충만을 입으면 영혼이 다시 작동해서 육체를 관리한다는 겁니다. 이걸 이그나시오라는 천육백 년경에 예수회 창시자인데 이 사람에서 시작된 것이 영성수련이라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영성훈련.

영성훈련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두 가지의 노선이 있는데 하나는 긍정적인 신학과 부정적인 신학이 있다는 겁니다. 부정적인 신학은 플로티노스부터 시작된 것인데 부정적인 신학이라는 건 하나님은 우리가 접근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들이 이야기하기를, 자기를 낮춤으로 말미암아 그 폭만큼 넓어지면 넓어진 만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논리입니다. 자기를 낮추면 낮출수록 하나님은 상대적으로 높아질 거니까. ‘신은 위대하다.’ 알카에다. 신은 위대하다고 외치면 외칠수록 자기는 점점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거예요.

자기를 낮추는 방법으로 신에 영광을 돌리는 방법이 부정적 신학이라면 긍정적인 뭐냐 하면,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이 있는데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 속에 참여했기 때문에 우리의 인성을 하나님이 긍정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긍정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사용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자체적으로 영성을 개발시키면 그 개발한 방법에 의해서 수준에 따라서 점점 더 신의 형상을 본 받을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계단이죠. 이그나시오는 5단계에요. 지금은 50단계까지 벌어졌지만. 5단계로 해서 점점 키워 올라가는 거예요. 여기서 문제가 뭐냐 하면, 내가 이만큼 성숙했다는 것의 판정관이 누구냐? 본인이 되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모순이 되느냐 하면, 내가 판정을 이거는 아니라고 판정하는 것도 본인이겠죠.

그러면 판정하는 자기라는 카메라는 어느 위치에 있습니까? 수영을 하고 있는데 카메라가 어떻게 해야 돼요? 같이 수영해서 카메라로 찍어간다면 그 수영선수는 항상 카메라에 들어오게 되겠죠. 왜? 수영하고 있고 한쪽은 거기에 같이 찍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어떤 경우라도 자기가 잘하고 있다는 것만 보이고 자기가 뒤쳐있다는 것이 보이지 않게 돼요. 왜? 자기가 지쳐 있으면 그걸 보는 자기 판정관도 카메라도 뒤쳐있기 때문에 항상 나란히 가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타락했다든지, 방탕했다는 면이 절대로 그 눈에 안 보이게 됩니다. 이런 소리를 영성훈련하는 사람에게 하면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들어요.

그러면 그 사람이 많이 향상됐다는 것은 뭐냐 하면, 과거 옛날 기억에 나쁜 짓 했고, 술 담배 했던 기억이 아직도 계속 갖고 있죠. 그러면 어떤 모순이 생기느냐 하면, 그런 기억을 버려야 될 것 아닙니까. 그 사람은 그런 기억을 못 버려요. 왜? 그걸 버리면 지금 향상 됐다는 증거물이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참 노는 수가 얕아요. 바둑으로 하면 9급 정도.

자꾸 옛날 나쁜 것을 기억해줘야 남들 앞에 나는 그만큼 인간이 나아졌다는 것을 과시할 수 있는 근거를 늘 갖고 있는 거예요. 옛날 부흥사들이 자기 깡패 생활했던 것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런데 이 영성훈련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모델이 누구에요? 향상된 모델이 누굽니까? 카메라에 누가 들어가요? 자기 자신의 발전성만 들어오죠. 그러면 진짜 모델은 누굽니까? 예수님은 빠져버렸어요. 예수님은 왜 빠졌느냐? 예수님은 과거의 인물이에요. 과거에 잠시 왔다가 나의 죄를 치료해주고 그냥 가버렸어요.

이제는 뭐냐 하면, 예수님과 같이 붙어있으면 그러니까 너무 뛰어난 사람하고 같이 붙어있으면 자기가 늘 처지잖아요. 그럼 자기가 너무 부정적이니까 안 돼. ‘가세요. 성령께서 내가 필요할 때만 부를 테니까 좀 가세요. 내 영혼도 괜찮은 영혼 되었고 그 괜찮은 영혼이 지배해서 괜찮은 행동을 할 테니까 잘난 모습 내가 알아서 수정할 테니까 가세요.’라고 떠미는 거예요.

결국은 기존의 모든 신학은 신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교회에 찾아왔던 고객들 그러니까 교회 교인들 그들의 입맛에 맞추어서 교회 세를 불리고 교회 세가 불려지면 힘이 있고 그 세력화 시켜서 교회가 정치적인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신학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것이 교회를 만들어서 교회 와야만 구원된다는데 이러한 시도가 유대교, 바리새인, 예수님과 만나면 그들과 그대로 되풀이한 거예요. 바리새인하고 똑같이 되는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하니까 여러분 갑자기 엄숙해졌는데, ‘난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런 식으로 나오는데, 제가 이야기했죠. 주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에 대해서는 보지도 않아요. 왜냐하면 어떤 행실이든 그 자체가 선악구조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선악과 따먹은 이상은 잘했든, 못했든 그거는 말할 것도 안 돼요. 다 쓰레기니까, 어두움이니까.

따먹지 말라는 독약 따먹어놓고 ‘전 독약 적게 먹었어요.’ 이런 소리 하면 안 된다 말이에요. 그걸 적게 먹으나 많이 먹으나 독약 먹고 난 뒤에도 건강체질이라서 효과가 남보다 좀 낫습니다. 이래도 소용이 없어요. ‘왜 따먹었느냐’ 이 말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지금 와서 이미 따먹은 걸 어쩌란 말입니까? 스카치테이프로 붙여놓을까요?

생명나무를 치워버림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은 생명과 아무 상관없는, ‘선악과 따먹고 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봐라. 최선을 다하고 지옥 가거라.’ 하고 생명나무를 치워버리면 생명나무 치워버렸다는 자체가 이미 지옥이다. 저주에요. 뭐가 성화 됐니, 이그나시오 영성훈련 백날 해도 지옥이에요.

예수님의 것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졸지에 우리 안에 새로운 인식에서 어두움을 품게 됩니다. 어두움을 품게 되면 이 어두움을 주님의 창조 덕분으로 바로 새로운 피조물 됐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참 이스라엘이죠.

그렇다면 1장의 나다나엘 같은 경우에는 그 사람이 참 이스라엘이란 소리를 들었던 이유가 뭐 때문이냐 하면, 바로 야곱의 언약에 의해서 야곱의 인자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야곱의 약속된 메시아를 기다렸다는 사실로 인하여 이 사람은 참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무화과나무 밑에서 기도했다고 참 이스라엘 되는 것 아니에요. 전부다 무화과나무 밑에서 기도하게요. 몰래 기도했다고 참 이스라엘 아니에요.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의 발전성을 기대한 것이 아니고 누군가 이 율법대로 은혜를 가지고 오실 분이 오실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것으로 자기 어두움을 감싸고 있었던, 그 약속을 감싸고 있었던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은 참 이스라엘이란 소리를 듣습니다. 왜냐 하면 그 사람의 주체는 비워있어요. 그 사람의 주체는 누굽니까? 약속이 주체가 되고 자기가 주체가 안 되고 있어요. 그게 바로 자기 백성이에요.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분류를 시작하는데 분류란 질서인데 혼돈 속에 창조가 일어나면 분류가 되죠. 첫째 날, 둘째 날 모든 식물은 식물대로, 동물은 동물대로, 해는 해, 달 전부다 분류되듯이 거기서 창조가 주어지면 인간은 두 종류가 분류되죠. 하나는 바로 어둠에 속한 육신과 빛에 속한 육신,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로 분류시키는 작업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 작업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창조에 개입했다는 것이고, 그 창조는 바로 말씀이 육신으로 들어와서 기존의 모든 육신은 어두움의 육신으로 빠져나오도록 한 거예요. 자기 자신도 몰랐던 어두움이 예수를 만나고 난 뒤에 반발한다든지, 대든다든지, 고발한다든지, 저항한다든지 하면 이거는 나 자신도 모르게 내 속에 어두움이 있다는 것을 발각당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게 요한복음 3장에 나오죠.

첫째 시간 되면 주무실 줄 알았어요.

요한복음 3장 19절.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빛이 오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자기가 어두움을 사랑한 사람인 줄도 본인은 몰랐을 겁니다. 자기가 분류작업에 해당되는 대상인 것을 자기가 몰랐을 거예요. 자기가 하나님 잘 섬기고 있으니까 그게 정당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빛이 오니까 이미 분류작업이 일어나고, 분류작업을 창조라 하고, 창조는 질서입니다. 질서는 분류가 되는 걸 말합니다. 빛과 어두움, 어두움과 빛이 분류되죠.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20절) 악을 행하는 자는 그 다음에 명사가 아니고 동사로 나오죠. 나는 악을 행하는 자는 악을 행하고 가만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악은 반드시 방향성을 갖고 있어요. 무엇을 향하여 공격하게 돼있다? 빛을 향하여 항상 움직이게 돼있어요. 빛에 대해서 도전하게 대들게 돼있어요. 가만있으면서 악을 행하는 그런 법은 없어요. 악은 반드시 공격대상이 있고, 그 공격대상은 반드시 빛이에요. 그럴 때 어두움의 본색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그 다음에 그 뒤에 보면,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21절) 빛으로 오는 사람은 결코 그 사람이 훌륭해서 오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하나님이 계셔서 하나님이 그냥 계시는 게 아니고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는 빛을 보여주는 액션, 행위를 보여주게 돼있어요. 그래서 요한복음 전체는 예수님이 존재한다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행동하신다는 거예요. 내 행한 것을 봐서 아버지가 일하고 있다는 것을 봐라. 항상 일하고 있어요.

복음을 아는 우리들도 이런 시험에 많이 빠집니다. 교회가 조용하니까 주께서도 조용한 줄 알고 있습니다. 분명 아버지도 일하시니 나도 일하신다 했는데 그 말을 우리가 안 믿고 자기 놀면 아버지도 따라 노시는 줄 알고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육신이 오셔서 하신 일은 율법+은혜입니다. 율법+은혜라는 것은 율법을 밑에 넣어버리면 위에 은혜가 주어집니다. 율법이 없으면, 이스라엘이 없으면 구원이 없기 때문에 율법이 주어지면 그 율법과 대비해서 은혜가 따로 주어져야 되죠. 왜냐하면 율법으로선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을 가지고 어디까지라 했습니까? 세례요한까지(눅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졌을 때(요1:17) 율법 안에 빛과 생명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가진 이스라엘과 율법이 없던 이방나라와 분류가 일어나면서 이것이 옛날에 있었던 하나님이 하신 창조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율법으로 창조행위를 하는 게 아니고 은혜 위에 은혜가 더함으로 말미암아 이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사람을 구분하는 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시대가 아니고 은혜 시대에서는 ‘이것이 은혜다, 이것이 용서고 자비다.’라고 이런 식으로 은혜를 받으라가 아니라 은혜를 행사하시는 분을 보라.

그래서 세례요한은 말합니다. 1장 29절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어린양은 바로 율법에 속하는 거죠. 율법인데 세상 죄를 해결하는 어린양이기 때문에 합쳐지면 뭐가 되겠어요? 하나님의 은혜 위에 은혜가 되는 거죠.

은혜 위에 은혜가 되려면 우리는 무엇으로 가담해야 되느냐 하면, 세상 죄가 지고 가는 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몫이고, 우리는 철저하게 죄인으로써 예수님 하는 일에 부름을 받게 되는 겁니다. 죄인으로. 세상 죄에 해당되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게 돼요. 이것도 못합니다. 평소에 하는 행세인데. 하루 온 종일하는 게 죄 짓는 건데 이걸 못해요. 참 구원받기 쉽죠. 얼마나 쉬워요. 평소 살아가는 게 죈데 그게 뭐가 어려워요. 너무 쉽잖아요.

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 보지도 않아요. 하여튼. 보라. 보게 되면 안 보지만 우리 속에 하나님이 일하시면 어디로 보게 돼있다? 행하는 것이 아니고 어린양을 바라보는 것,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 우리 속에 행하시고 주께서 행하시고. 주께서 행하시는 것은 말씀이 행하시고 우리 안에 하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시고 결국 하나님의 행동과 말씀의 행동이 만날 때 우리는 증인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세례요한이에요. 그는 빛이 아니고 빛이 오신 것을 증거하려 함이라. ‘나는 쇠해야 되고 주님은 흥해야 된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등장은 세례요한을 통해서 기존에 있던 모든 사람들과의 또 비교되는 창조행위 중에 하나가 주님 앞서서 세례요한을 보낸 겁니다. 보냄으로 말미암아 기존에 있던 모든 것을 죄라고 규정하기 위해서 보내는 거예요. 홀연히 난데없이 어떤 분이 등장했다.

그렇다면 이것 이야기하고 첫째 시간 마치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33절에 세례요한이 세상 죄를 지고 어린양이 간다 했는데 자기가 어떻게 그걸 아느냐 하면, 여기 교재도 나와 있습니다만 예수님의 모습을 봤으니까 그분이 어린양인 줄 알았습니까? 아닙니다. 분명히 보라고 했지만 예수님의 모습을 저 양반 같으면 메시아 맞는다고 판정할 수 있는 그런 권한이 우리 인간에게 없습니다.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찾는 것은 인간은 자기 자신이 모델이 되기 때문에 ‘나같이 생겨야 메시아답다.’라는 것이 인간 속에 들어있어요. 적어도 나같이 이렇게 인자스러워야 그 사람도 성부라는 그러한 오류가 항상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할 때는 인간의 저지른 해석의 오류 속에서 주님은 일해야 됩니다. 인간이 저지른 인간의 오류 속에서 예수님은 우리한테 밉상 받아서 십자가에 죽게 되는 겁니다.

인간의 오류가 뭐냐 하면 그 모습 보고 하는데 여기에 세례요한은 성령을 기다려요. 성령이 임하는 걸 봐서 그분이 바로 세상의 어린양이라고 나오죠. 요한복음 1장 33절에. 그렇다면 세례요한부터 이미 낌새가 뭡니까? 누구든지 하늘에서 주시지 아니하면 아무도 받을 수 없다는 낌새가 등장하죠.

요한복음 3장 27절.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이 말은 사람은 혼자 있으면 모든 판단은 오류일 수밖에 없다. 성령이 임해야 우리가 말씀의 구조에 동참이 돼요. 다시 말해서 성령이 임해야 나는 죄인이며, 성령이 임해야 니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어린양을 지셨다고 딱 지목해서 예수님이 어린양이라고 지목할 수 있는 겁니다.

지금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레비나스나 이런 소위 기독교 냄새를 피우는 현재 신학교에서 레비나스 같은 경우에는 진짜 거의 기독교신자보다 기독교신자답다고 칭찬이 자자한데, 이 사람들이 아무리 철학을 연구해도 예수라는 그분이 나의 구세주라는 말을 안 해요. 고난 받자. 메시아의 고난을 본 받자. 이런 소리를 해도 딱 예수님만이 구원하다는 소리를 못한다니까.

산에 올라가는 길이 여러 가지다. 진리의 길은 하나인데 이리 올라가도 저리 올라가도 된다. 이런 소리나 하지 딱 ‘예수님만’ 하는 소리를 하지 못합니다. 왜? 성령을 안 받았으니까. 성령을 받아 버리면 성령이 임한 그분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입니다. 성령이 임하신 그분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분이에요. 그리고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자기 죄인인 줄 모르고 예수님만이 구원한 것도 몰라요.

그런데 불교 같은 경우에는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만날 도 닦잖아요. 도 닦아도 도 닦는 자기가 그렇데 예뻐 보여. 그렇게 착해 보여. 개척교회 하면서 고생 많이 하면 고생하면 고생할수록 스데반 집사를 닮아간다고 신이 났어. 그거는 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아주 자기 칭찬이 늘어났어.

성령이 임하게 되면 교인이 세 명이든, 열 명이든, 천 명이든 상관없이 무조건 죄인이에요. ‘앞으로 잘 할게요’ 해도 소용없고, ‘앞으로 못 할게요’ 해도 소용없고. 이래도 죄인, 저래도 죄인 오직 구세주는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게 성령이 임할 때 가능한 겁니다.

이게 요한복음 1장 33절에 의해서 그렇습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나사렛 예수, 저분이다 이 말이죠. 더 이상 이야기 끝났습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끝나버렸어요. 예수 알면 이미 영생 받은 거예요. 그 정도로 더 이상 우리가 우리 것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내세울 것은 일체 없음을 아시고 10분 쉽시다. 

2010-01-15 21:20:33   녹취 : 한윤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