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2010 겨울 수련회 / 요한복음 (어디서 왔느냐) 2강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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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한윤범 2010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b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들어오세요. 아까 한 구조를 다시 그려보겠습니다.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의 자기 형상, 카피인데, 유사물이 없는 걸 ‘시뮬라크르’ 이렇게 이야기해요. 어려운 말로. 의사, 가상 그런 뜻이에요. 그래서 인간이 일방적으로 만들었죠. 거칠 때는 반드시 형상을 거쳐서 하나님께 나아가게 돼있는데 이것을 누락, 빠뜨리고 그냥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허구적이에요. 신은 신인데 허상 신이 되는 거예요. 우상이 되죠. 명칭을 이름을 뭐로 집어넣어도 이거는 별 변동 없어요. 위치가 나에서 나온 신이기 때문에 예수나 성령이라든지, 여호와, 야훼 어떤 이름 넣어도 우상이에요. 삼위일체 다 집어넣어도 우상이 돼요. 사람들은 삼위일체 믿기 때문에 자기는 진짜 정통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짝퉁, 명품은 똑같아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 쪽으로 가면서 인간이 죄인으로 바뀐다는 이 사실을 더불어서 이런 현상을 남기면서 이적 층에서 표적 층으로 가게 돼있는데, 인간이 죄인인 것을 모르는 채 당당하게 신에게 나아가버리면 이 신은 결국 인간을 죄인으로 못 만드는 신이 되기 때문에 삼위일체가 됐던, 예수가 됐던, 뭐가 됐던 또 하나의 인간이 만든 사유의 생각의 생산물이 되죠. 흔히 말해서 이걸 종교라 하죠. 종교의 특징은 바로 인간의 정당성, 존재의 정당성 다른 말로 의로움, 인간의 의가 그대로 살아있다는 거죠. 그 의가 살아 있어줘야 반대급부를 요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기도한 대가를 내달라, 헌금한 대가 내달라, 충성한 대가를 달라, 상급을 보너스를 더 달라.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여전히 남아있는 거예요. 이쪽에 보면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에 대해서 그냥 감사와, 아까 이야기한 동사죠. 그냥 펄럭이며 찬양하고 기뻐하고 고마워하는 것 이게 남아 있다. 여기선 뭐냐? 나의 자리가 있고, 나의 자리가 죽지 않았고, 나의 자리를 남의 것 말고, 남 축복 말고 그러면 또 시시해지니까. 나만의 특별한 보너스를 주셔서 나의 자리가 안 죽고 천국 가서 살아있게 해달라는 그런 요구를 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창세기라면 본격적으로 요한복음 지금부터 시작하는데 요한복음의 구조는 뭐냐 하면, 인간이 없어요. 인간 자체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하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말씀과 하나님께선 상대해버립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 어디가 버렸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요한복음엔 없어요. 형상을 본 받으란 말이 요한복음에는 나오질 않습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이 이렇게 되니까 요한복음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과 말씀의 관계에서 보니까 여기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심지어 하나님의 형상이 있더라도 이 자체에서 하나님께서 여기에 불쑥, 홀연히 같은 말이죠. 여기에 출몰하죠. 그러니까 어떤 캡슐에 갇혀있는 빈 공간인데 갑자기 여기 사람이 등장했다면 일 번, 위쪽에서 왔다. 이 번, 동쪽에서 왔다. 서쪽에서 왔다. 남쪽에서 왔다. 어느 쪽에서 왔습니까? 넷 중에서는 하나다. 이 틈새로 오던지 하여튼 왔을 것 아닙니까. 어디서부터 와야 이게 등장하잖아요. 그렇지요? 그런데 요한복음은 아무데서도 온 적도 없는데 온 거예요. 그래서 제목이 [어디서 왔느냐?] 나타날 수 없는데 나타났다는 겁니다. 인간의 세계에. 마태, 마가, 누가에서는 예수님께서 출몰할 지점이 나타나 있습니다. 어디서 왔습니까? 요셉의 가문을 통해서,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을 입어서 왔잖아요. 오는 출처가 요셉 계통, 역사적 계통이 있잖아요. 요한복음엔 그게 없어요. 그냥 홀연히 나타난 거예요. 따라서 마태복음에서 요셉의 가문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가문을 통해서 왔다고 했을 때는 이거는 필히 인간들이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다윗과 아브라함의 계열에서 온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고, 다만 그것을 통해서 나타났다면 그것은 나타날 수 없는 분이 나타난 거라고 그렇게 해석을 해줘야 한다 이 말입니다. 그래야 맞는 거예요. 나타날 수 없는 분이 나타난 거예요. 이거는 기존에 사람들이 사람을 낳는 식의 그런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 요한복음입니다. 사람인데 사람을 통해서 안 나타난 사람. 뭐 그런 인간이 다 있느냐? 그런 인간이 있어요. 그러면 어디서 왔느냐고 묻지요. 그것을 요한복음에서는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고 말씀에서 왔다는 거예요. 말씀을 ‘로고스’라고 번역을 하는데 이 로고스의 뜻의 뭐냐? 쉽게 말해서 로고스란 동질성이 드러나는 것. 모든 세상을 누락된 것 하나 없이 온 세상에 있는 모든 미래나 현재나 과거 모든 변화와 그리고 어떤 숨어있는 동굴 깊은 곳에 하늘 끝에 별, 하늘 모든 숨어있는 것을 전부다 총괄한 그 지평, 총괄하게 다 포함해서 있는 그 전체를 로고스라. 그런데 그것이 숨어있는 것을 로고스라 하고, 그 숨어있는 배후의 총괄 자체가 드러났다면 그거는 말씀이 우리에게 나타난 바가 된 겁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눈에 보이는 것, 가시적인 전부 장악, 통제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총괄 어떤 힘, 총괄적인 세력, 그게 바로 로고스에요. 그래서 로고스가 요한복음 1장에서 하나님이라 하거든요. 그러면 사람 입장에서 볼 때 사람들이 어떤 인간도 자기 아버지가 있기 때문에 자기가 있었다. 그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있기 때문에 있다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에게 아버지도 없이, 할아버지도 없이 어떤 인간적인 관계도 없이 불쑥 등장했는데 그게 신이 아니고 뭐였다? 그게 바로 육신 우리 같은 사람이 되었다 말이죠. 그러면 조건은 뭐냐? 사람으로 왔다는 반드시 그 전에 먼저 뭐가 있어야 돼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 된 거다. 우리가 아는 상식이 그거다. 세상에서. 먼저 그 사람을 있게 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있지, 사람이 없는데서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너는 어디서 왔느냐고 물을 수 있는데 그런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것이 주님께서 이 세상에 출몰한 것이 이 땅에 살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이 덩어리 전체, 인간 세계 덩어리 전체를 어디다 묶으려고? 숨어있는 총괄 지평에 로고스에다 말씀에다 이걸 끌어당기기 위해서 오신 분이에요. 우리 같이, 위아더월드, 춤추러 오신 게 아니고. 정어리 떼가 있다면 큰 어망을 펼쳐서 몽땅 잡는 이유가 뭡니까? 한 두 마리 잡으려고 그렇게 합니까? 그 지역에 있는 정어리 떼를 몽땅 다 포획하기 위해서 끌어오기 위해서 하지요. 그물 던지지 않습니까? 그 그물 구조가 말씀이고, 이 말씀이 하나의 인격으로 꽂혀서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면, 예수님이 하는 임무가 뭡니까? 이 전체를 뭐로 묶는다? 오직 말씀에 자기를 위하여, 자기로 말미암아, 자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 때문에 있었다는 것, 창세기 1장으로 한다면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모든 피조물이 생겼다는 것, 그걸 요한복음 식으로 하면 말씀 때문에 끌고 오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과 말씀 사이의 관계는 뭐냐 하면, 하나님은 모든 창조를 하나님 스스로 하는 게 아니고 누구한테 맡겼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에게 일임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모든 심판을 어디에 맡긴다? 모든 심판을 이미 예수님께 다 일임했다 말이죠. 이렇게 된다면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 개념은 인간이 있음으로 창안할 수 있는 생각할 수 있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이 하나님하고 불쑥 나타난 예수님과 드디어 충돌이 일어나겠지요. 그럼 누가 가짜에요? 이 하나님은 가짜고, 진짜 하나님은 여기서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자기가 진짜 하나님이라 한 자체를 지워버리면 결국 하나님은 없지요. 결국 예수님이 등장한 것은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지워버리고 위해서, 가짜란 것을 들통 내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하나님 믿지 마라 지옥 간다 이 말이에요. 나를 믿어라. 그럼 하나님은 어디 있는데? 너희들은 몰라. 애들은 모른다고. 어려서 모른다고. 난 알아. 왜? 내 아버지가 진짜 하나님이다. 내 안에 들어와야 비로소 너희들이 못 보는 하나님이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너희들은 어차피 하나님은 못 봐요. 다만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과 예수님이 하신 일, 제자, 사도들에게 보여주신 것은 예수님의 창자국과 못 자국 이것이 하나님이 남겨주신 흔적입니다. 그 창자국, 못 자국 외에서 딴 것을 통해서 하나님 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기존의 신학은 인간과 하나님 만들어놓고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뭔가 하나님께 못 가니까 하나님의 언약대로 약속대로 누가 오셔야 되는데 ‘어이구. 예수님 오셨구나. 감사합니다.’ 드디어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예수님이 나타나서 우리가 못 한 걸 이뤄서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 쪽으로 우리가 나아간다는 식으로 신학이 전개되었습니다. 이것 가짜입니다. 이것 엉터리에요. 이거는 전부다 사기입니다. 이렇게 돼버리면 이 전체가 예수님한테 끌려가는 것이 아니고 이 전체가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나에게로 끌려오니까 누가 말씀이에요? 내가 말씀이에요. 인간이 말씀이 되는 거예요. 대구의 이현래. 그런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들이 말씀입니다.’ 이런 소리 하고 있어요. 또 자기를 말씀의 아버지라고 하는 사람 있어요. 노량진 앞에 대성교회. 모르죠. 감리교 쪽은 몰라요. 자기가 말씀의 아버지라 합니다. 돈은 다 가져가면서 말씀의 아버지래. 예수님이 오신 것은 여러분들이 유대인하고 상대했다고 하는데 유대인이 바보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이 바보가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가 신학이 뛰어나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신학을 뛰어넘을 수 없어요. 예수님은 인정했습니다.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인데 그들이 생각했던 바로 인간과 하나님 구조 자체가 결국 말씀으로 이끌어야 될 세계를 자기 구조가 간단하다는 이유 때문에 극렬하게 저항합니다. 여기서 발생된 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이죠.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죽으심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죽으심과 달라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의 죽으심이란 것은 사람들에게 오해 받아서 창에 찔려서 살해당하는 식의 죽으심이라면 요한복음의 죽으심은 사라져주는 거예요. 내가 알아서 사라져주는 겁니다. 누가 나를 죽이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스스로 잠시 사라져줄게. ‘사라진다’는 말은 어떤 인간도 죽음에 인간이 적극적으로 주체적으로 가담할 수 없다는 거예요. 내가 죽는 것도 너희들이 힘깨나 쓴다고 죽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죽어줄 경우에만 너희들에 의해서 내가 죽는다 이 말입니다. 꼭 사울 왕 죽을 때와 마찬가지에요. 내가 죽어줄 때 그냥 ‘갔습니다.’라고 해주는 역할은 인간이 할 수 있지만 너희들에 의해서 내가 죽지는 않는다. 왜? 모든 나를 죽이는 그 행세까지 어느 어망에 잠겨있다? 말씀이라는 어망에 때가 되매 있어야 될 일일뿐이기 때문에. 모든 구조가. 그래서 이 세상에 일어나는 조그마한 변화까지 모든 변화까지 말씀 바깥으로 벗어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해야 될 말씀의 일에서 이탈되거나 ‘그 생각은 미처 못 했네’ 이런 일은 전혀 없어요.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사람들이 구원받고자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주신 자는 반드시 마지막 때에 기어이 살려내리라. 누락되는 법이 없어요. ‘아이고, 바쁘다. 내 양인데 빼앗겼구나.’ 이런 법은 없는 거예요. 목자가 불면 양은 목자의 말을 알아듣고 오게 돼있고, 그걸 목자의 힘에서 뺏을 어떤 권세를 준 적이 없는데 왜냐하면 모든 권세는 어디서 나온 권세입니까? 말씀에서 나온 권세기 때문에 세상에 주인공이 왔는데 그 주인공 말고 달리 주인공이 모르는 일이라 할 그런 일은 어떤 경우에도 벌어지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 예수님 기도에 있죠. 아버지께서 내게 모든 권세를 주는 것은 나로 인하여 아버지가 택한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기 위해서 세상에 있는 모든 권세를 주께서 나한테 일임했다는 구절이 나와요. 볼까요? 2절.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을 누구한테 주고 안 주고는 누구 소관입니까? 이것은 바로 아버지 소관이며 아버지의 일은 누가 일합니까? 아들에게 말씀 되시는 분이, 총판이에요. 총판하기로 아버지하고 계약이 돼있어요. 아버지께서 영생 주는 자에게만 예수님께서 영생을 주도록 하기 때문에 영생은 우리가 행위를 어떻게 착한 일한다고, 예수 믿는다고 영생 얻는 게 아니에요. 이미 영생 줄 자에게 그 다음에 믿음이 오게 돼있지요. ‘영생 받은 자 맞습니다.’라는 믿음이 생기도록 조치를 하게 돼있지, 우리가 예수 열심히 믿는다고 영생 받는 게 아닙니다. 한 이십년 믿다가 치매 걸리면 어떻게 할래요? 누구세요? 교통사고 일어나서 장로님이 차에 치여서 기억이 안 난다. 자기 부인도 ‘아주머니 누구세요?’ 어떻게 해요? 기억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요? 안 돌아오고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니까 인간과 하나님이 만들어낸 이런 구조에서는 여기서 통용되는 모든 개념들, 믿음이라든지, 율법이라든지, 천국개념, 지옥개념 등 모든 개념들은 말씀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전부다 폐기처분해야 돼요. 이거는 바리새인들이 다 만들어낸 거예요. 율법 지키기, 의롭기, 영생하기, 겸손하기, 회개하기 여기서 벌어지는 모든 신학적 개념들은 예수님 한 분 등장해서 전부다 폐기처분해야 돼요. 그 하나님도 엉터리였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채 계속 뭔가 믿는다는 행위를 벌였기 때문에 이 구조 자체가 다 폐기처분해야 돼. 그러면 구원은 누가 해줍니까? 그거는 우리가 알아서 할 문제가 아니죠. 이렇게 인간이 있고 인간이 신을 만들어놨고 이런 현상까지라도 다 어디에 예속됩니까? 이런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고 있어요? 이미 말씀이란 구조 속에 이런 일이 벌어질지 다 아시는 거예요. 다만 알아야 될 것은 이 말씀을 가지고 요한복음에서 이걸 빛이라 했단 말이죠. 이걸 빛이라 했으니까 자동적으로 모든 것은 다 어두워. 워워워~ 어두워. 주님께서 어두움이라고 말씀 되시는 그러니까 말씀과 빛의 특징, 공통점이 뭐냐 하면, 인간의 손을 경유하지 않은 특징이 있습니다. 두 개념 다. 말씀이나 빛이나 인간의 손때가 안 탔어요. 말씀은 하나님과 관련돼있지만 빛과 생명은 현재 설치돼있는 인간과 관련돼서 빛이 되는 거예요. 어렵지요. 아시겠지요? 빛은 그냥 빛으로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두움을 향하여 나는 빛이고 너는 어두움이라고 알려주기 위해서 빛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따라서 빛만 있으면 안 되죠. 빛이 나타났다는 말은 맞은편에 어두움이 이미 있는데 그것은 빛이 등장해서만 어두움이 어두움으로 발각이 되는 겁니다. 빛이 예수님이 등장하지 않으면 그들은 하나님 있고, 자기 있고 열심히 섬긴다고 바빠요. 이들이 말하는 어두움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 다 어두움이고 이단이에요.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 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단의 괴수라 하잖아요. 요한복음 9장 24절 봅시다. 전에 대구공부에서 이걸 중요하게 다루었지요. 9장 24절 다같이 읽어 봅시다. 시작. “이에 저희가 소경되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이다’는 바리새인들이 이야기하는 것 아닙니까. 바리새인들 보기에 예수님은 뭐다? 죄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론이 예수는 그저 그렇고 그런 죄인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뭘 믿는다? 세상이 말하는 그 죄인을 우리가 우리의 구세주로 믿는다는 말은 결국 우리는 뭐냐? 우리가 예수님이 당했던 그 죄인이라는 수모를 우리도 기꺼이 당하게 된 것을 영광인 줄 압니다. 이 뜻이에요. 세상이 맛이 없다는 음식을 우리가 기꺼이 맛있다고 먹는 이유가 그 음식 자체가 우리를 따로 뽑아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죠. 그래서 우리는 요한복음을 보면서 항상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의 구원하는 작용이 없었다면 ‘우리가 바로 어두움 그 자체입니다’라는 것을 우리는 자백할 수밖에 없어요. 그걸 모태 어두움. 날 때부터 엄마 뱃속부터 어두움이에요. 엄마도 어두워, 우리도 어두워, 형도 어두워, 동생도 어두워, everybody 어두워. darkness family. 어둡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 보고 그렇고 그런 죄인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죄인으로 보지 않고 의인으로 봤다면 필히 가짜죠. 이 구조에 집어넣은 거예요. 예수는 훌륭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어두움 속에서는 예수는 뭡니까? 아주 착하고 훌륭해요. 그러나 진짜 예수님 보면 우리 자체가 어둡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어두움을 커버하기 위해서 빛 되신 예수님을 조작해낼 수 있다 이 말이죠. 이렇게 돼버리면 나는 비록 어두움이지만 빛 되신 예수를 믿어주는 나는 다른 어두움 하고 약간 차이 나는 회색? 약간 어두움, 괜찮은 어두움이 돼버려요.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이 말이죠. 성경에 문자적으로 요한복음에 나오는 대로 ‘나는 어두움 맞습니다. 예수님은 빛입니다.’라고 고백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짜 주께서 구원하신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이 말입니다. 그냥 예수를 믿던 안 믿던 어두워. 그것뿐이에요. 이게 기적 층에서 보면 기적 층에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얻기 위해서 내 쪽에서 어떤 행위를 해야 됩니까? 그 행위 하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식으로 자꾸 신에게 다가가요. 하나님이여, 하나님이 원하는 것도 내가 원하는 것 다른 인간되기 위해서 내가 어떤 행동에 나서면 됩니까? 그 행동만 이야기만 해주면 그대로 반드시 순종해서 반드시 그 대가를 얻겠다고 나서는데 그렇다면 기적 층에서 아래층에서 구원문제를 집어넣었어요. ‘하나님,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받겠습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구원만 해주세요.’ 그러나 표적 층에 올라가면 이런 인간은 바로 그 딴 식으로 이야기하면 죄인이 되죠. 그러면 구원은 이미 ‘내가 어떤 행동을 하면 구원받습니까?’는 떠나버리고 맞은편에 있는 하나님 형상 소관이죠. 이것은 요한복음에서는 말씀 소관이죠. 그런데 구약 여호와가 누구냐? 은혜 줄 자에게 은혜 주고 긍휼이 여길 자를 긍휼이 주시잖아요. 그러면 구원문제, 죄 사함 문제는 누구한테 넘어왔느냐 하면, 그분께서 ‘너는 말씀에 의하면 아버지께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야.’라고 하면 그걸로 인하여 이미 우리는 창세전부터 구원받은 사람이 되고 말아요. 어떻게 달리 행동할 게 없어요. 그냥 통보해주는 거예요. 마치 아들이 ‘아빠. 어째서 나는 딸이 아니고 아들이야.’라고 한다면 그건 네가 그렇게 질문할 입장이 못 된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지요. 자기 뱃속에 성별이 정해지기 전에 ‘수정란아, 수정란아. 너 아들 만들어줄게’ 이렇게 주고받고 대화할 수 없지 않습니까? 만들어진 것 하고 대화할 상대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구원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사랑할 자에게 사랑을 해주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만 자꾸 아는데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자꾸 놓쳐버려요. 그래서 미워하는 사람이 교회 오면 주께서 ‘내가 너 나가라고 벌써 몇 번 하드노. 자꾸 교회 기어들어올래? 나가!’ 그 사람이 ‘천국 보내주이소.’ ‘내 나가라 했지?’ ‘왜 천국 못 가게 해요.’ ‘나 너 미워.’ ‘왜 밉습니까?’ ‘이유 없이 미워.’ 이게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전혀 안 믿는 눈치인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해야 되느냐 하면, 자꾸 세상 쪽으로 가는 것을 잡아당기는 거예요. 주님이 왜 그렇게 합니까? ‘난 네가 좋거든.’ ‘나는 주님 전혀 안 좋거든요.’ ‘나는 네가 제일 좋아.’ 헐. ‘나는 주님 취미 없거든요. 나는 술 퍼먹고 노는 게 취미 있거든요.’ 아무리 그렇게 해도 또 잡아당기고 말씀으로 왜 그렇게 합니까? ‘왜 날 구원합니까?’ ‘이유 없어. 내가 널 좋아하니까.’ 그게 바로 표적 층에서의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는 거예요. 그냥 주고 싶어서. 그럼 저 분은 그냥 보기에 미워. 왜 밉습니까? 이유가 없어요. 그냥 미운 거예요. 걔가 태어나서 나쁜 짓 했을 때 같으면 이런 나쁜 짓했기 때문에가 있는데 로마서 9장에 보면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 미운 놈 하나 만듭시다.’ ‘그래 만들자.’ 하나님께서 미워할 놈 낳아줘야 사랑의 가치가 떠요. 사랑의 가치가 빛이 난다고. 이유 없이 사랑 받는구나. 사랑 받을 짓을 해서 사랑 받는 것이 아니고 아무 이유 없이 사랑 받아요. 그래서 보통 교회에서 뭐라고 합니까? 여러분 말라기에 보면 하나님 복을 주나, 안 주나 십일조 해 보라고 시험하라고 하죠. 저도 같이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십일조 안 해보세요. 저주 주나, 안 주나 시험해보세요. 왜 시험해보라고 합니까? 복이라 하는 것은 십일조하고 우리 행위 자체하고 아무 상관없이 우리는 그저 복 받을 자격이 못된 존재입니다. 실컷 십일조 하면서 의와 신과 인은 다 빼먹잖아요. 왜? 십일조 하는 행위가 기억이 되니까. 십일조 내가 했습니다. 번지수 잘못 해서 저리고 가면 안 됩니다. 나한테 오시기 바랍니다. 이게 항상 기억나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자기 부인이 되질 않아요. 십일조를 해봐야 아는 데 하지도 않는데 알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어떤 목사가 했잖아요. 십일조 한 만큼 손해라고. 요새도 그 목사 그 소리 하는지 모르겠어요. 로고스라 하는 것은 바로 동질성이에요. 어떤 동질성이냐 하면, 모든 세상을 다 집어도 다 똑같다는 동질성이 아니고 어떤 경우라도 말씀과 연관된다는 점에서는 이거는 누락이 없다. 빠짐이 없다. 모든 경우에. 지옥 가는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관련돼있고, 천국 가는 사람도 예수님 때문에 가게 돼있고. 그래서 예수님이 나타났다, 출몰했다는 말은, 아까 지우고 하라 해서 지우고 하겠습니다. 지우다 보면 또 할 이야기도 다 잊어버리니까.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모든 그 동안 인간이 끄집어낼 수 있는 인간이 있다는 것, 인간의 존재한다는 이유 때문에 신은 반드시 존재해야 돼요. 왜? 신은 타인이기 때문에. 아까 타인이 없으면 남이 없으면 내가 누구인줄을 몰라요. 그래서 내가 근사한 내가 되려면 근사한 타인에게 질문을 해줘야 돼요. 만약에 타인이 허접스럽고 나보다 질이 떨어지면 그 타인에서 말 걸기는 끝났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소통, 소통하는데 사람이 소통해도 골라잡아 소통해요. 아무나 소통하는 게 아닙니다. 꼭 내가 되고 싶은 사람, 내가 갖고 싶은데 나는 없고 현재 그쪽이 갖고 있을 때는 얼마든지 소통합니다. 그것 빼먹으려고. 그래서 인간들이 소통되는 하나님은 뭐냐 하면, 나보다 쳐지는 못난 벌거벗은 그런 하나님을 찾는 게 아니고 항상 내가 없는데 다 갖고 있는 하나님을 소통의 대상으로 찾게 됩니다. 그게 유명한 것이 ‘전능하신’ 하나님.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극대화시켜서 나는 뭐냐?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못났습니다. 나는 죄인의 괴수입니다. 성경에 있는 괜찮은 용어는 다 뽑아내서 그걸 자기를 낮추어서 극대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높여서 내가 낮추었다는 것을 빌미로 내가 원하는 것은 채워서 나의 자아를 부풀리게 하는 이런 작전을 벌이는 거예요. 어디 가서? 교회 가서. 그래서? 그렇게 키운 자아가 어디 쓸데 있습니까? 아무 쓸데없어요. 이렇게 해서 이 사람이 가만있으면 괜찮은데 옆 사람을 또 상담을 해주네. 아직도 응답 못 받았습니까? 나무뿌리 뽑아서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 아직도 방언이 안 터져요? 그래서 성령 받겠습니까? 저 사람은 두 시간 만에 벌써 성령 받고 내려갔는데 이틀 동안 아직도 성령 못 받았어요? 한 수 가르치려고 하는 거예요. 마음을 낮추어야 됩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됩니다. 뭐 어떻게 해야 됩니다. 그거는 행함이 아니에요? 이것도 행함이에요. 그렇게 자기를 낮추면 낮출수록 전능하심은 점점 더 멋있어 보이죠. 결국은 나는 부족하지만 내 친구 하나는 멋있다는 그걸 빌미로 해서 덩달아 자기가 멋있는 존재로 전환돼요. 그 방법도 괜찮은 방법이죠. 사실은 다 해왔던 건데 제가 괜히 새삼스럽게 떠벌입니다. 사실 음성적으로 다 하고 있어요. be동사+ing에요. 자학이죠. 자기를 때리면서 꼭 엘리야하고 바알과 아세라 한바탕 붙는 battle, 신앙배틀, 신앙 시합하고 있는 거예요. 하루 종일 쳐요.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제가 하나님 같으면 더 부족해라. 뭘 노리느냐 하면, 지금은 저는 내가 원하는 만족스러운 복된 상태가 아닙니다. ‘신이시여 내가 원하는 복된 상태를 내 행위를 보시고 남한테 가지 말고(이게 중요해요), 절대로 남한테 가지 말고 꼭 나한테도 방향을 틀어서 나에게만 돌출하게 주체가 부합되게 나에게만 주시옵소서.’ 이렇게 나오죠. 그래서 기도 배틀. 저게 오늘 두 시간 버티는구나. 나는 세 시간. 완전히 경매하듯이. 이천오백, 이천오백오십. 경매하듯이. 성전 건축할 때 경매 안 합니까? 이천 내겠다. 이천오백? 삼천? 완전히 영덕대게 수산공판장에 왔어요. 거기에 꼭 하나 붙는 게 있어요. ‘우리 담임 목사님은 없는 살림에도 이천 냈는데 뭐 하노?’ 그리고 성전 질 때 꼭 하는 소리가 있어요. ‘여러분, 여러분 자식을 위해서 성전 지어야 됩니다. 여러분 한 평생 자식을 위해서 한 게 뭐가 있습니까?’ 또 여자들 자식하면 껌뻑 엎어지죠. 성전은 여러분이 성전이에요. 여러분 성전 지을 때 돈 얼마 썼습니까? 그러려면 여러분이나 치장하세요. 교회 꽃 하지 말고 여러분 집에다 화초를. 예수님이 성전이냐, 아니냐는 것은 예수님 계신 곳이냐, 안 계신 곳이냐 결정하는 것이지 얼마나 거기에다 인간들의 힘이 집결돼 있느냐? 힘하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면 주께서 더 죄인이에요. 어떤 죄인도 죄인을 위해서 죽기까지 죽으신 죄인은 없어요. 십자가 죽으심은 주님의 독자적인 자기 자리입니다. 이거는 아무도 범접할 수 없어요. 베드로가 자기 목숨 바쳐도 십자가 죽는 것까지는 침범하지 못합니다. 그거는 아버지께서 말씀에 의하면 세상 죄를 지는 어린양은 몇 분입니까? 두 분, 세 분, 네 분 몇 분입니까? 오직 한 분뿐이에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테레사 수녀가 어떠니 아무리 어떤 사람이 겸손하고 자기를 때린다 할지라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그 계약은 하나님하고 말씀 되시는 예수님만 했지 다른 사람은 여기 인간은 끼어들면 안 돼요. 끼어들 수 없어요. 애들은 가라. 어른들 노는데 애들이 왜 낍니다. 우리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거예요. 이런 복음 전해도.... 구원받는 것은 주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지 우리의 행위 때문에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사람이 아무리 낮아져도 그 진짜 하나님의 낮아짐은 우리가 바란 겸손이 아닙니다. 모든 자기 백성의 저주를 받는 그 자리는 이미 지정된 자리에요. 예수님만 갈 수 있는 자리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그 자리를 가면서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라. 그래서 마지막 따라간 사람이 베드로였잖아요. 막상 따라가 보니까 자기는 가까이 하리라고 생각했죠. 세상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전혀 이 울타리, 인간이 만든 생각은 하나님 이런 것 하고 다른 동네가 예수님 가신 길 안에 들어있어요. 이 말씀의 세계가 육신이 되신 예수님 안에 들어있었다는 걸 알아요. 거기에 결국 인간은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갔다는 이유 때문에 가장 인간이 할 수 있는 죄를 그대로 노출시켰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저주하고 모른다고 했어요. 진작 그러지. 베드로가 진작 그러지. 그러나 베드로는 진작 그럴 수 없어요. 왜? 때가 되어야 배신할 수 있기 때문에. 배신도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닙니다. 상황 만들어줘야 전을 펴야 배신도 해요. 실컷 배신하고 세 번씩 저주하고 구원은 혼자 다 받고. 베드로 아닙니까. 베드로도 구원받는데 왜 우리가 구원 못 받습니까? 희망 있죠. 주께서 요한복음에서 끝까지 너를 사랑하면 돼요. 그러면 가룟 유다는 왜 버림 받는가? 싫어요. 단지 가룟 유다가 예수님 팔아먹었기 때문에 구원 못 받는 게 아니고 끝까지 사랑 안 하셨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미 구원받고 저주는 우리 소관을 떠나고 말았어요. 그러면 우리는 지옥 가면 안 되잖아요. 이렇게 되면 어두움은 원래 어두운 자기 길을 가야 돼요. 어두움이 구원을 생각한다는 자체가 어두움에서 나올 수 있는 또 하나의 죄를 추가시키는 겁니다. 마치 남자가 여자 되려고 애쓰는 게 부질없는 노력이듯이 태생이 남자라면 그냥 남자로 사세요. 우리는 모태 어두움이기 때문에 그냥 어두움 길로 가면 되는 겁니다. 누가 나를 체포해서 도중에 데려가면 고마운 줄 아시면 돼요. 그것뿐이에요. 누가 나를 공중에서 낚아채면 그냥 ‘나는 영생 얻었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되지 그냥 어두운 건 어두울 뿐이에요. 소경이 눈을 떴으니까 날 때부터 소경도 눈 뜰 수 있구나 라는 걸 차후적으로 결과적으로 알게 됐지 처음부터 ‘이쯤 되면 주님이 날 부를 때가 됐는데.’ 이런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은 못 합니다. 왜? 말씀만이 어느 때에 어느 장소에 어느 길을 소경이 가야 돼요. 사진 찍을 줄 몰랐거든요. 모든 구조의 배치가 어떤 소경이 지나가도록 하는 모든 배치가 이미 말씀 되시는 예수님의 조정에 의해서 움직이는 막상 소경 당사자는 내가 주님에 의해서 조정되었다는 걸 언제 압니까? 차후에 알아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됐다. 차후에 알지 그 전부터 내가 ‘이쯤 되면 부를 때가 됐는데 왜 안 부르지?’ 이런 일은 없단 말이죠.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한 여인이 간음하면서 ‘이쯤 되면 바리새인이 날 잡아갈 때가 됐는데?’ 이런 일은 없다 이 말이죠. 간음한 여인이 신나서 잡혀가면서도 ‘잡아가도 소용없데이. 조금 있으면 예수님께서 와서 글씨 쓴데이.’ 이런 생각은 그 여인에게 없는 거예요. 그냥 그 여자는 자기 할 일 했을 뿐이고, 바리새인은 자기 할 일 했을 뿐이고 모든 조정을 말씀이라는 구조 안에서 주께서는 미리 아실뿐이고 그런 거예요.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한테 잘 해주던 나사로가 죽게 됐다는 그런 언질이 왔어요. 예수님은 일부러 안 가십니다. 왜? 죽기를 기다려요. 죽기를 기다리실 때 ‘자, 가자’한 거예요. 왜 그렇게 하시느냐 하면, 그 사실을 나중에 알지만 그 전까지도 나사로의 두 누이동생, 마리아, 마르다나 주변에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렇게 할 이유를 몰랐습니다. 이 모든 일은 ‘나사로가 산다’ 이것 아니에요. 나사로가 산다는 것은 기적 층이고, 예수님은 자기 원하는 사람은 살려내실 수 있다는 표적 층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사로는 죽었다가 살아나는 그런 수모를 당해야 돼요. 그러니까 표적 층은 아래층에 있는 기적 층을 항상 조정해요. 우리는 표적 층을 모르기 때문에 만날 하나님께 원망하죠. 마르다, 마리아가 하는 말이, ‘예수님이 진작 오셨으면 우리 오빠가 죽지 않았을 건데.’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야기했죠. ‘마르다야. 내가 부활이다.’ 그런데 마르다, 마리아는 내 오빠. 두 내가 충돌하죠. 관심사가 뭡니까? 내 오빠 왜 죽었습니까? 보진 않았습니다만 예수님 멱살 잡고 내 오빠 살려내라고 서울광장부터 해서 한 바퀴 노제를 지내. 40억 내라고. 내 오빠 살려내라. 내가 누굽니까? 마르다 본인 오빠. 나의 오빠 살려내시오. 이 구조가 무슨 구조입니까? 바로 이 구조 아닙니까. 내가 여기 있고, 나는 하나님 자리에 예수님을 집어넣었는데 예수님께서 왜 나를 힘들게 하느냐? 이 구조 남아 있잖아요. 이런 기적 층 남아 있잖아요. 그럴 때 뭐라 합니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문제는 죽은 오빠가 문제가 아니고 네가 문제다. 죽은 오빠만 생각하지 내가 누군지는 손톱만큼도 생각 안 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꾸 이용물로 생각해요. 예수님 자체가 우리의 모든 생사고락을 그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아직도 주체,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 것이라는 그 주체가 계속 남아 있는 거예요. 내 교회, 내 가족. 남의 교회 부흥되면 안 되고 내 교회 부흥되고. 전부다 나와 관련돼있어요. 그래서 이 사이에서 마르다가 나를 주장하니까 여기서 예수님께서 우셨습니다. 예수님이 우신다 이 말이죠. 예수님이 우셨다는 이 말은 바로 이 세계 자체가 이미 희망 없는 죄 덩어리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울음의 대상, 슬픔의 대상이죠. 이걸 한 마디로 말해서 ‘무너짐’이에요. 지금 한국의, 세계 모든 신학의 문제점이 무너질 것은 무너져야 될 텐데 자꾸 무너지려고 하는 것을 신학자들이 떠받치려고 안달이 났어. 한국교회가 썩었습니다. 썩어야죠. 무너져야죠. 조각가가 조각을 했으면 동상을 공개하기 전까지는 천으로 가리죠. 그런데 그런 사람은 없겠지만 무식한 사람은 그 천 자체가 조각인 줄 알고, 이제부터 작품을 소개한다고 하는데 손대지 말라고. 그거 무너지면 안 된다고. 여러분 진짜 무너져야 알맹이가 나옵니다. 하드 먹을 때 아이스크림 먹을 때 포장지를 알맹이를 먹어야 되듯이 진짜는 말씀의 세계는 껍데기, 역사의 세계가 무너지는 동시에 묵시의 세계가 새록새록 우리 앞에 등장합니다. 그 역사가 무너지는 걸 안타까워하는 게 뭐냐? 같은 역사와 한 패가 된 우리 자체가 마르다, 마리아가 지금 주님이 하시는 준공식을 방해하고 있어요. ‘주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내 오빠 죽으면 안 됩니다.’ 무너져야 돼. 무너져야 된다고. 네 오빠 죽어줘야 가렸던 내가 묵시 세계, 예수님이 등장하는 거야. 비로소 오빠가 죽어줘야 저 분이 누구지? 비로소 관심사가 나에서 오빠의 죽음으로 바뀌는 겁니다. 예수님이 부활이고 생명이구나. 이걸 알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로 하여금 무너지게 하는 거예요. 무너질 때 시원하게 무너져봅시다. 무너지게 사용한다는 것도 축복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사람을 사용할 때는 반드시 등장했다가 그 사람의 죄를 지적하는 식으로 무너뜨리죠. 그게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가 자기 본색을 드러냈다가 어떻게 됩니까? ‘여자여 그것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주저앉아버렸죠.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나는 쇠해야 되고 예수님은 흥해야 됩니다.’ 요한복음 4장에 여자는 물 길러 왔다가 물동이 버려두죠. 요한복음 5장에서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은 욕은 혼자 얻어먹고. 안식일을 범하라 한 놈이 누구야? 나 아니라예.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 했던 그 사람들. 요한복음 7장에서 바로 예수님의 동생들 그리고 바리새인들. 요한복음 전부다 마찬가지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는데 ‘무너져도 괜찮다 야들아.’ 하는 식으로. 요한복음 8장에서는 간음한 여인. 요한복음 9장에서는 소경. 요한복음 10장에서는 바로 목자 이야기. 11장에서는 아까 이야기한 마르다 오빠 나사로. 이 모든 것을 사용하실 때 이미 그렇게 사용 당한다는 것은 우리 보고 너무 자기에 대해서 이제는 걱정하지 말라는 거예요. 주께서 말씀 안에서 우리를 사용한다는 자체가 이미 말씀 안에서 우리를 구원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지금도 우리를 사용하시는 겁니다. 어떻게 사용하시느냐? 그건 내일 아침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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