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브리서 11:6 / 대타 / 15111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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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충성모 안양20151113a-히11장 6절(대타)-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 11장 6절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고 했습니다. 상당히 유명한 말씀이지요.
유명한 말씀일수록 오류가 굉장히 클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할 때에 그냥 믿음만 있으면 되는데 주께서 왜 상을 주셔야 하는 겁니다.
우리는 ‘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면 그 반대급부로 우리에게 상을 주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되면은 해석에 오류가 발생되고요 ‘안 줘도 되는데 왜 주십니까?’ 이렇게 시작해야 돼요.
하나님께서 구태여 상을 주시려는 의도가 뭐냐? 그것은 “기쁘신 것”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보통 기쁘시게 하면 상을 준다고 하잖아요. 그것을 순서를 바꿔서 상이 상으로 알아질 때 그것만이 기쁘시게 하는 겁니다.
‘기쁘시게 해놓고, 나 상 받아야지.’라고 꼼수를 쓰게 되면 그것은 온전히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하나님을 등쳐먹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용하겠다는 겁니다. 이거는 상거래지요.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아내겠다는..
그러면 내 자신이 변하지 않고 기존에 있던 세상 살아가는 그 사고방식이 그대로 지속되기 때문에 “믿음”이 아니지요. “믿음”이 오면 바뀌어야 됩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은 인간은 처음부터 믿음이 없이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이거는 굉장히 쉬운 이야기에요. “네가 인간이냐? 그럼 구원해줄게.” 그러면 믿음이 필요가 없어요. ‘믿어야 구원 받는다’는 말은 ‘처음부터 믿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믿게 될 자는 나타날 것이다’ 이렇게 봐야 돼요.
그 믿게 된다는 것이 처음에 믿음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해볼 때, 없는 믿음이 생겼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항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리고 ‘저는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왜 주십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주셨지요?’라고 할 때 이것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게 돼요.
우리의 상식은 ‘기쁘시게 하면 상을 받는다’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이게 상이군요.’라고 고백하는 자를 통해 하나님이 기쁘게 돼요.
흔히 저한테 사람들이 질문을 많이 하고 복음이나 교회에 다니면서 늘 해결되지 않는 질문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 믿고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입니다. 이것은 수백 번 이야기해도 돌아서면 또 몰라요. 돌아서는 것 자체가 문제인지 모르겠지만은..
“예수 믿고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이게 “예수 믿고 난 뒤에 어떻게 행해야 됩니까?” 이런 뜻이거든요. 이게 말이 안 되거든요. 예수 믿고 난 뒤에는 믿음 자체가 노선이 두 갈래길이 있는데 “행함의 길”이 있고, “믿음의 길”이 있단 말이에요. 이 “믿음의 길”은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속 가는 거에요.
등산을 갔는데 산사태가 일어났다고 하면 자기가 내려가는 겁니까 아니면 누가 떠밀어서 내려가는 겁니까 흙이 떠밀기 때문에 자기는 그냥 파묻히지요. “믿음에서 믿음으로” 아닙니까?
믿음에 산사태가 일어나면 마지막 도착하는 것이 “주여, 믿습니다!”가 되어 버린다 말이죠. 그런데 이 노선은 길이 달라요. 국도와 고속도로의 차이점은 국도는 빠질 길이 있지만 고속도로는 한 번 들어가버리면 빠져나오기 힘들거든요.
고속도로가 두 개에요. 믿음의 고속도로가 있고 이쪽에 행함의 고속도로가 있는데 행함은 반드시 행함에서 행함으로 나와요. 이 원칙은 원인도 행함이고 결과도 행함입니다. 이런 행함을 하게 되면 이런 결과가 나옵니다. 지금 이것인 모든 인간의 태생이에요.
‘내가 무엇을 행하면 어떤 결과를 내가 손에 쥘 수 있습니까?’ 행함부터 밀어붙이는 그 노선이 그 고속도로에요. 한 번 들어갔다가는 못 빠져나와요. 아무리 고속도로에 휴게소를 멋지게 해도 톨게이트 외에는 도로 밖으로는 못 나와요.
문제는 그 톨게이트가 안 나온다는 게 문제지요. 그 톨게이트가 이미 막다른 지옥이라는 게 문제가 되는데.. 제가 이렇게 두 개의 노선으로 나누는 것이 제 뜻이 아니고 마태복음 7장에 나옵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 ‘반석(돌) 위에 지은 집’이 그것입니다.
위에 아무리 모델링을 비슷하게 해도 그것이 비슷한지 모양을 한 번 봐요. “네가 어디서 이런 결과가 나왔냐?” “내가 열심히 행했기 때문에 이렇게 신앙생활을 잘 합니다.” 그것은 ‘땡’이에요. 그것은 무너져요.
“주님이 이렇게 만들었잖아요.” 이것은 “O.K.”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고속도로가 완전히 막혀있어요. 건너갈 수가 없어요. 믿음에서 믿음으로 붙이는 거에요. 믿음에서 믿음으로 붙이게 되면 이런 믿음이 온 것에 대한 원인을 자기 쪽에서 찾지를 않아요.
믿음이라는 것은 (이게 어려운 말인데) ‘단독자’ 생활이 끝난 거에요. 그런데 행함은 믿을 자가 자기밖에 없어요. 집에 식구들이 왔는데 나는 주부다. 그러면 내가 밥을 안 하면 밥을 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그 사람은 밥을 해야 되겠지요?
이처럼 ‘내가 밥을 하지 않으면 이 가정은 누가 살려?’ 하는 것처럼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나의 인생을 누가 살리고 누가 이끌어 갈 것인가?’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믿을 놈이 없다.”입니다.
믿을 자가 없으니까 믿고 싶어도 자기 행함 외에는 믿을 것이 없으니까 줄곧 행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행함의 가장 큰 단점이 있는데 그것은 해놓고 그냥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측정을 자기가 해야 된다는 거에요.
‘나는 인생을 어떻게 살았을까?’ 일기장 쓰듯이 늘 본인이 채점을 해요. 어떨 때는 “참 잘 했어요.” 도장 찍을 수도 있고 어떨 때는 잊고 싶은 그런 하루가 있고.. 그러니까 그것이 굉장히 스트레스 받는 거에요.
그래서 사람이 잘 못 살아도 되는데 문제는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잘 못 살게 되면 반드시 그 댓가가 저주로, 징벌로, 또는 내 하는 일이 꼬이는 것으로 앞길이 막힐 것이라는 공포심이 찾아와요.
수능을 쳤는데 “잘 쳤나?” 물어보니까 “못 쳤어요.” 그럴 때 애 본인이 못 치게 행했는데 엄마는 그걸 보고 ‘내가 그 애 키우면서 나쁜 짓을 많이 했더니 하나님이 벌을 내려서 아들을 못 키운 내 행함에 대한 징벌을 두고두고 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심이 찾아와요.
행함은 스트레스가 제일 큰 문제에요. 행함을 의지한다고 했는데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선택’입니다. 매일같이 나의 하는 일을 나의 선택에 의해서 내가 결정해야 되는 거에요. 이것이 힘든 거에요.
그런데 이 행함에서 제일 풀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는가?’ 하는 거에요. 평소에 생활하는 것이 원인과 결과를 따지다가 보니까 “하나님 믿어라.”라고 하면 믿고 싶지 않아요. “하나님을 누가 만들었는지 해답을 알려주면 믿을게.”
선택에 선택은 없다는 사실을 몰라요. 내가 선택하게 된 것은 누구의 선택이냐 할 때는 선택의 선택은 이쪽(믿음에서 믿음으로)에 있는 거에요. ‘내가 이걸 선택하게 된 것은 주께서 선택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 믿고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라고 할 때에 ‘믿음에서 믿음’의 노선에서는 이것밖에 없습니다. ‘고백’이에요. ‘신자가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갑니까?’ 고백하면서 살아가는 거에요.
그런데 기존교회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아요. “네가 보기에 옳은 일을 만들면서 살아라. 그게 하나님의 의다.” 이렇게 가르쳐요. 그러면 이것은 ‘고백’이 아니고 ‘자기 업무 추진’하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왜 고백이 안 되느냐? 고백할 사람이 없어요. 가짜를 믿기 때문에 단독자로 살아가는 그 버릇이 계속 남아있어가지고 ‘주께서 이렇게 하셨지요?’라고 할 내가 믿는 대상은 없고 믿는 것도 자기가 매일같이 만들어내야 돼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믿음이 ‘호출’이거든요. 애가 골목에서 숨바꼭질하고 해지는 줄도 모르고 친구들하고 재미나게 놉니다. 그럴 때 걔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엄마가 앞치마 입고 저 골목 끝에다가 외치는 거에요. “저녁 먹자.” 하면 다 와요.
그런데 “저녁 먹자.”의 업무는 엄마 소관이잖아요. 엄마는 숨바꼭질 같이 안 하잖아요. 믿음은 호출인데 자기가 숨바꼭질 할 때 술래하면서 마지막 한 명까지 모든 것을 그 자리에 다 놓아버려요.
여자애 같으면 소꿉놀이하면서 흙을 비벼서 손이 흙댕이 되어가지고 있을 때 (요새 애들은 그걸 안 해서 아토피가 많답니다. 옛날에는 흙 만지고 하니까 아토피가 없었는데 요새 애들은 학원만 다녀가지고 아토피가 얼굴에 범벅이에요.)
그렇게 소꿉놀이하다가 “밥먹자.” 하는 소리를 듣고는 있는 것 그대로 놔두고 가버리잖아요. 이게 바로 믿음이라는 고속도로입니다. ‘지금 내 나이가 이 정도고 앞으로 5년 후면 이러저러한 성과를 이루는데..’ 하다가도 하나님께서 “야, 낙원에 가자.” 하면 손놓고 다 가야 돼요.
지금 애가 결혼을 했든 딸이 시집을 가든 안 가든 관계없고 일주일 후에 지방에 새로운 아파트 계약을 하든말든 손놓고 다 가야 돼요. “천국가자” 하면 다 가야 돼요. 그리고 그 사람이 했던 소꿉놀이에 일체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앞치마 입은 우리 주님의 업무거든요. “밥먹자.” 이 땅에서 강도가 되었든 창녀가 되었든 세리가 되었든 그것은 자기 업무니가 다 놔야 돼요. 창녀가 구원 받으면 창녀짓은 다 했어요. 강도가 구원 받으면 강도짓은 다 했어요.
손놓고 가야 돼요. 교도소라도 상관없고 속초 앞바다의 별장이라도 괜찮아요. 그냥 부르면 다 가야 돼요. 주님 업무에 합류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원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따로 생각하는 결과는 없어요.
주님이 원인이라면 결과는 뭡니까? 주님이 원인으로 수렴(모아지는 것)되는 거에요. 우리는 주님에게로 끌려가는 결과물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여기 믿음의 노선에서는 전부다 우리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에요. 이것은 행함이고 예수님이 원인이 되어서 생긴 그 믿음이 산사태처럼 우리의 배후에서 믿음으로 밀어줍니다. 밀어주면 우리의 원인이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에 보면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라고 되어 있지요. 우리보다 먼저 앞섰던 증인들이(앞에 11장에 나온 증인들입니다. 구약의 증인들)
허다한 증인들이 있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줬다는 겁니다. 5절을 한 번 봅시다. 5절에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라고 되어 있지요. (이렇게 강의를 했습니다만 돌아서면 또 다 잊어버리고 또 한 달 지나가면 다 잊어버리지요.)
에녹이 죽어야 돼요.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데 죽지 않은 분이 원인이 되어서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죽지 않음이 원인이 되어서 에녹도 죽지 않게 된 거에요. 그런데 에녹의 원인이 되시는 예수님이 죽었어요 안 죽었어요? 죽었지요.
그런데 그 죽음은 다른 사람의 일반적인 죽음하고 달라요. 일반적인 죽음은 자기 죄 때문에 죽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대신 죽음입니다. 대신, 대체, 대리. 그러니까 에녹은 대리죽음에 합류한 거에요. 합류 또는 합성.
전기 합선 되면 ‘피지직’하잖아요. 그래서 진짜 믿는 사람은 ‘피지직’ 하는 그런 경험이 있어야 돼요. 내 인생인데 내 인생이 아니라는 교차점이 있어야 돼요. 누구를 만나도 “내 인생은 내가 노력해서 얻은 내 인생이다.”라고 당연히 여겼는데 뭔가 합선되어 가지고 불타버렸어요. ‘찌지직’ 거려요. 다른 인생으로 바뀐 겁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예수님의 죽음은 특수한 죽음입니다. 내 죽음은 죽음값도 아니에요. 그냥 목숨이 끊어진 거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어도 죽음을 몰라요. 그래서 자살은 헛짓 한 거에요.
자살한다고 죽음을 아는 게 아닙니다. 자살해도 모르긴 마찬가지에요. 이 땅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모르면 자살해도 맨 마찬가지로 죽음을 몰라요. 부자가 지옥 가서 헛소리 하는 것을 보세요. “물을 손가락에 찍어달라” 아직까지 몰라요. 지옥에 와도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몰라요.
그래서 인간이 안 되는 것은 인간이 안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사나 죽으나 상관 없어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에 상관이 없습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았다”에서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네가 어떤 상을 받을 때 네가 상을 기대하는 것이 원인이 아니고 상을 주기로 작정한 그분이 원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면 받은 상을 돌려줄 때 그걸 보고 주님이 제일 기뻐하셔요. ‘네가 나를 이제 제대로 아는구나.’ 부모한테 용돈을 주면서 “엄마 내가 힘들게 번 돈 줄게.”라고 주는 것보다도 “엄마가 이렇게 잘 키워서 돈 벌었잖아. 이거 엄마 몫이야.”라고 하면서 주는 것은 같은 말이라도 엄마의 기분이 확 달라져요.
내가 열심히 해서 엄마를 돌보면 엄마를 자식이 사육하는 것밖에 안 돼요. “엄마는 나 없이는 못 살아.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이것은 갑과 을의 관계지만, 바치면서도 “역시 엄마가 갑이야. 엄마 없이는 내가 어떻게 살았어? 내가 공부할 때 공납금을 누가 대줬는데?” 그러면 엄마가 앵벌이 하는 식이 되겠습니다만 “엄마 덕분에 이렇게 공부도 했어요.”라고 빈말(빈말이 아니고 진짜지만)이라도 그렇게 해주면 “얘 이건 내가 말만 듣고 봉투는 안 받아도 돼.”라고 하면서도 받기는 얼른 받지요. 자식이 아니면 누가 도와주겠습니까? 받더라도 그 신뢰성이 있잖아요.
“‘엄마가 선택해서 결과가 나’라고 생각하듯이 주님이 저를 선택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지?’라는 나의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존재로 만드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그게 바로 고백이에요.
고백은 “내가 바로 결과물입니다.” 라고 원인자를 늘 반복해서 소개하는 것, 그게 바로 최고의 고백이지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이 고백이.
“예수 믿고 난 뒤에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목사님” “고백하세요.” “이번 계약이 성사된 것, 성사되었는데 파토난 것, 전부다 주님의 선택에 그냥 저는 따를 뿐입니다.” 하는 고백, 이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에요.
“하나님이 상을 주신다”고 하실 때 그 “상”을 우리가 소유하는 게 아니고 “상”이 우리를 소유하게 돼요. 그러면 “상”은 산사태처럼 우리보다 더 큽니다. 그러게 되면 “상”은 소유물이 되면서 소유주는 주님이 되고 우리는 소유물 속에 포함이 되어 버려요.
제가 산사태라고 한 말이 적당한 예가 된다고 생각하는데 산사태가 일어나면 흙이 나한테 묻는 것이 아니고 흙 속에 내가 파묻히게 되지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볼 때 ‘흙이 굴러오네?’ 이렇게 되지, “내가 굴러오나?” 이렇게 보질 않지요.
‘보니까 흙 속에 내가 아는 사람이 있다.’ 하면 그제서야 119 소방대가 와서 파게 되면 내가 보이겠지요. 그걸 가지고 성경에서 “예수 안”이라고 합니다. “예수 안”을 소개하는데 너무 심각하게, 거창하게 예를 들었는데 거창해도 이것이 적당해요.
산사태 속에 안 보였는데 파보니까 내가 들어있더라. “예수 안”에서 세상은 죽었는데 내가 있는 “예수 밖”에 있기에 세상은 죽은 겁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내가 죽었고 내가 보기에는 그들이 죽었습니다.
죽음이라는 용어가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을 기준으로 하므로 너무 어려운 말이기 때문에 제가 주일날 쉬운 사자성어로 얘기했습니다. “정신병자”라고. 저들이 보기에는 내가 정신병자이고 내가 보기에는 저들이 정신병자고..
그리고 정신병자가 된 이유도 설명했지요. 모든 의미를 자기에게서 뽑아내는 것이 정신병자의 특징입니다. “나는 나폴레옹이다.” “증거를 대라.” “내가 나폴레옹이라고 선언하면 나폴레옹이야.” 이게 정신병자에요.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람을 정신병자라고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매일매일 살아가는 일상이 ‘나는 오늘 돈 벌게 되어 있어.’라고 아침에 눈 뜨면 그런 소리 하잖아요. 외제차 딜러가 ‘오늘 또 두 건수 할거야.’라고 나오잖아요. 이게 정신병자라니까요. 누가 해주지도 않고 발품 팔아야 되죠.
행함 자체가 정신병자입니다. 물론 성경적으로 “모든 인간이 죄인이다”부터 시작하지만 행함 자체가 죄인이에요. 다시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상을 주신다”고 할 때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돼요. “내가 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상 주심을 알아야 됩니까?”
다른 말로 하면 “그렇게 말하는 하나님을 누가 만들어서 당신은 믿었어요?” 이렇게 질문하던 우리가 믿음을 받고난 뒤에는 ‘아, 원인을 그대로 소개해주시는구나. 나한테는 상을 받는다는 조차도 내가 뭘 해서 받는 것이 아니고 상 준다는 것 자체가 원인이었군요. 우리는 상 자체의 결과였고 상은 주님이 주시고 우리는 상을 주니까 내가 주님이 주셨지요? 라는 이런 고백이 나오는 거군요.’
성경을 우리가 본다는 것은요 우리가 몰랐던 것을 더 추가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매일같이 우리의 사고방식을 반대로 뒤집는 거에요. 빨래할 때에 주부들이 식구들을 보고 하는 말이 있잖아요. “양말을 거꾸로 해서 내놓아라.” 왜? 빨래할 때는 뒤집어서 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주님도 우리를 보고 이야기합니다. “제발 자꾸 원인과 결과를 뒤집어라. ‘전에 애써서 주를 믿었습니다.’라고 하지 말고..” 주께서 나를 이렇게 만들어서 바지 주머니 빼듯이(빨래할 때 주머니도 깨끗해지고 좋대요) 뭔가 속을 바깥으로 바깥을 속으로 집어넣는 식으로 사시면 예수 믿는 성도의 삶입니다.
근사하고 멋있고 고상하고 착하기 짝이 없는 나는 안으로 집어넣고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거든요.) 음란과 탐욕과 시기와 질투와 불평과 불만을 바깥으로 내놓으면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어떤 멀리 외국에 계신 분이 저한테 전화로 “목사님 예수 믿고 어떻게 삽니까?”라고 해서 한 마디 했어요. “죄 지으면 되지. 매일같이 죄 더 지으면 되잖아요. 그게 성도의 삶이에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 “우리 목사님은 거룩하게 살고 경건하게 살라고 하는데요?”
그게 바로 지옥으로 질주하도록 뻗어있는 고속도로에요. 못 빠져나와요. 6절 말씀에 담겨 있는 깊은 의미는 “인간은 구원에 실패해야 된다.”는 거에요. 구원에 성공하면 안 돼요. 그 이유가 1절에 나옵니다.
인간은 산사태가 나서 산사태가 덮쳤다. 그런데 내가 구사일생으로 흙에 묻혔는데 약간의 빈공간이 있어서 숨 쉬고 있다고 하면 나는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어서 이 흙을 떨쳐내고 탈출해야지.’
“주님 안”에 있으면서 막상 나는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는가?’를 생각하기 때문에 성경 전체로서는 그것(내 생각, 내가 하는 구원의 방식)이 실패로 끝나야 돼요. 절대로 성공하면 안 돼요.
그래서 이것을 아주 빠르게 응축해버리면 목사가 “구원에 실패하세요.”라고 설교해야 돼요. “여러분 천국 가는 데에 실패하시길 바랍니다. 믿습니까?” “믿습니다.”라고 하면 구원 받은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교인들이 올 때에 오늘 죽어도 천당가는 데에 성공하려고 오잖아요. 그게 지금 주님의 구원을 방해하고 있는 거에요. 의도적으로 가짜 구원을 자꾸 요청하는 셈이 되는 겁니다.
이 다단계가 그러한 경향이 많아요. 우리 교회에 어떤 집사님이 조희팔에 빠졌다가 빠져나왔는데 조희팔이 부산에 강의할 때 부부가 참석을 했어요. 200만원 투자해서 150만원 건지고 50만원은 못 찾아서 다행스럽게 많은 돈은 아니고 50만원밖에 안 잃었습니다.
그 조희팔이 강의하는 것을 들어보면은 아낌없이 희생하는 자에게는 그야말로 100배, 60배, 30배의 열매가 주어지는 거에요. 그러면 그 희생이 희생이겠습니까 노림수가 있겠습니까 결국은 희생을 미끼로 큰 목돈을 쥐겠다는 거지요.
그러면 그 사람의 마음씨는 온전한 희생이 아니지요. ‘내 쪽에서 어떤 원인, 어떤 선택을 제공하게 되면 내가 기대하는 결과가 내게 주어지겠습니까?’ 이거잖아요. 그러니까 조희팔 같은 경우에는 그들이 그 꿈을 중도에 포기하지 못하도록 하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200만원 내서 한 달에 이자가 50만원이라면 만약에 당신이 2000만원을 내보세요. 이자가 500만원이라구요. 그게 보이는데 왜 200만원에서 스톱하려고 합니까, 당신 바보에요? 지금 계속 가는데 당신 꿈이 기껏 200만원밖에 안 됩니까?” 이렇게 되는 겁니다.
믿음대로 되거든요. 그래서 많이 심는 사람은 많이 거둘 거잖아요. 그런데 왜 바보같이 많이 심지 않고 조금만 심느냐 이 말이죠. 그래가지고 조희팔한테 그만큼 당한 거에요. 지금 조희팔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성경 이야기한 겁니다.
똑같은 방법을 오늘날 교회가 사용하는 겁니다. 돈 놓고 돈 먹기에요. 돈을 많이 내는 사람이 많이 얻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원인이 주님이고 우리는 뭘 해도 결과물이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주님께서 도대체 뭘 어떻게 했기에 이렇게 구원에 실패해도 이게 왜 성공이 되느냐? 그걸 알아차려야 돼요. 내가 생각하기에 진짜 나는 맨날 죄만 짓고 믿음에 실패하는데도 불구하고 이게 정상적인 믿음에 포함이 될 수밖에 없는가를 찾는 거에요.
전에 여러번 이야기했지만 어떤 치킨 CF 있잖아요. 도대체 닭다리에 무슨 짓을 했기에 이런 맛이 나오느냐 말이죠. ‘주여, 제가 이렇게 살아가면서 시기와 질투가 끊이지 않고 앞으로 계속 더 나올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저를 영생 얻는 사람이 되게 했습니까? 도대체 무슨 작업을 했기에 이렇습니까?’를 우리가 성경에서 찾아보는 겁니다.
그것이 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고 되어 있는데 “내”가 “실상”이요 “내가 이러한 결과물로 나오는 것”에 대한 원인은 “바라는 것”에 있는 겁니다. 그렇기에 원인과 결과를 늘 반대로 해야 돼요.
내가 뭘 행하면 어떤 기대한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는 결과 그 자체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 결과로서 살아가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업적이나 실적이 필요가 없어요.
그것은 다단계에서 하는 이야기이고 실적과 업적 같은 것을 우리가 해서는 안 돼요. 우리가 그것을 궁금해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결과를 모르는 것이 아니고 그 원인을 모르지요.
그러니까 원인은 모르지만 놀라운 결과들이 나오는 거에요. 그 결과를 “상”이라고 합니다. 나 자체를 “하나님의 상”이라고 보는 겁니다. “상”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상” 속에 파묻히는 거지요.
아까 집사님이 빼빼로데이라고 초코렛을 주셨어요. 동그랗게 생겼는데 바깥에는 땅콩하고 과자가 있고 깨보니까 안에는 액체 초코렛이 들어있었어요. 그러면 우리는 바깥의 “상”이라는 과자 속에 하나의 “액체 초코렛”처럼 들어있는 겁니다. 그것을 “액체 주체”라고 합니다.
액체의 특징은 그릇에 따라서 모양새가 바뀌는 것입니다. 시츄에이션(상황) 따라서 우리의 면면이 바뀌어요. 한결같이 성질이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상황이 좋으니까 성질이 좋고 상황이 나쁘면 성질(본색)이 다 나오지요. “액체 주체”입니다.
아까 5절에서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보지 않기 때문에 바깥에 둘러 쌓인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죽음을 보지 않은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에녹은 좋겠다. 안 죽고 그냥 갔으니까.. 그런데 우리는 왜 죽습니까?’라고 하는데 나중에 죽어보세요. 그것이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요.
에녹과 우리와 마찬가지에요.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간 것처럼 우리가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보지 않음에 해당되는 식으로 우리의 목숨이 끊어집니다. 화장터에 가봐요. 남들이 보기에는 죽어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원인을 모르는 사람들의 죽음은 숨이 끊어지는 것이지만 죽음을 아는 사람들의 죽음은 죽음과 부활을 같이 보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이 죽음이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은 죽음이 아닙니다.
그냥 쉬는 것이고 그것을 잠자는 것이라고 하지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누워있으니까 잠자는 것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잠자는 것에 해당돼요.
제가 이렇게 쉽게쉽게 이야기하니까 여러분들이 이해는 되지요 그런데 우리의 몸은 괴리되지요. 누가 죽인다고 하면 겁이 나지요. 머리는 이해가 되는데 우리의 몸은 괴리가 되잖아요. 그게 아직도 우리가 인생을 더 살아야 된다는 거에요.
인생을 더 살면 전에는 움찔했던 것이 이제는 움찔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 조금씩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해요. 20대에 만약에 교회생활 하다가 어떤 일이 안 되었을 때 놀래가지고 하나님 앞에 화를 내던 사람이 40대나 50대에 벌어졌을 때는 ‘살다보면 뭐 그럴 수 있지.’ 하고 초연할 수 있고 거기에 개의치 않게 되는 경우가 수시로 생기게 됩니다.
30대 새댁이 철지난 시금치를 사면 남편은 월급이 얼마 안 되고 ‘내가 시금치를 또 사야 되나?’ 싶어서 속이 상하지요. 그런데 나이가 70이 넘어서 그런 일이 있으면 ‘이런 일이 한두 번 있었나..’ 그게 별로 심정이 상할 일은 아니지요.
그리고 40쯤만 되어도 “이거 물어주세요.”라고 한 용기를 내서 따질 수 있는데 30대는 그런 용기가 없어요. 재수 없다고 하고 가는데 겁이 나서 못 해요. 40대가 되면 아줌마가 되잖아요. 그러면 세세한 것 다 따지는 거에요. 마트가서 갑질하고 다 따지지요.
그것은 생에 대한 용기가 아니고 어떤 의미에서 생에 대한 포기, 자기 가치에 대한 포기, 여성으로서의 고상함에 대한 과감한 탈피, 또는 남성호르몬의 증가 이런 식으로 표현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성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 참여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고난을 우리가 말로 한다면 도저히 자신이 없어요. 그래서 성경을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자꾸 고개를 젓는 이유가 ‘누가 이렇게 살 수 있어요? 스데반 집사처럼 돌에 맞아도 “주여,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도대체 내가 어느 세월에 믿음이 좋아서 그런 고백이 나옵니까? 나는 못합니다. 이럴 것 같으면 나는 아예 천국 안 가.’
왜? 천국 가는 길이 너무 어려워요. 수능 시험 쳐서 갈 것 같으면 가겠는데.. 돌에 맞는데 용서해달라고 하든지, 오리를 가자고 하는데 십리를 가준다든지, 특히 산상수훈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일 지키기 힘든 구절이 나와요. “돈을 꾸고자 하는 자에게 그냥 주어라” 하는 대목, 이것은 어느 재벌도 못 해요.
신세계도 한 300억 기부하고 3000억 짜리 독점면세점 따는 것 보세요. 세상에 무슨 공짜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그냥 주어라”를 턱 보고 난 후에는 ‘내가 천국을 안 가면 안 갔지 도저히 못 하겠다.’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이 안 되는 구절이 되게 하십니다. 언제? 안 되는 것을 “상”으로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일을 주님께서 하셨지요?’라고 하는데 이게 주님이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거에요. 믿는 거에요.
그리고 오늘 본문대로 “그의 살아계심과 상 주심을 믿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거에요.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얼토당토 않고 우리가 못하는 불가능한 일을 우리에게 맡겨버린 겁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비유가 대표적인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길을 가다가 ‘여기 혹시 강도 만난 사람 없는가?’ 찾았습니까? 예상 못한 난데 없는 사태가 벌어졌잖아요. 그럴 때 이것은 본인이 기대한 것이 아니지요?
이 사람을 고쳐주면 하늘나라에서 상을 받는다는 것이 없지요. 그냥 주어진 사태의 원인은 자기가 아니고 외부에서 덮쳐온 거에요. 산사태처럼 덮쳐왔지요. 그러면 그 사람을 도와주라는 징후로 보는 것은 내가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도와줌 자체가 강도를 만나게 해준 사람이 주는 동일한 결과인 거에요.
저 사람은 강도 만난 역할을 하고 나는 그 사람을 고쳐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지요. 그런데 거기에 비해서 그곳을 지나가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본인이 본인의 행함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단독자에요.
자기의 선택이 강렬해요. ‘내가 저 사람을 도와줄까 말까?’ 본인이 그것을 결정내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믿는 자가 아니지요. 믿는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평소에 모든 살아온 것이 본인의 인생은 본인이 결정내린 거에요.
주님께서는 그 허점을 캐내기 위해서 예상밖의 강도 만난 사람을 딱 붙여줬을 때 그 제사장과 레위인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것은 내 잘못이 아닙니다. 강도가 이 짓을 했지 내가 이 사람을 강도 만나게 한 것은 아닙니다.”라고 분명히 이야기할 거에요. 내 책임이 아니라고 미루겠지요.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오신 이유인 거에요. 왜? 너한테 일어나는 모든 것은 너보고 하라는 것이 아니고 너조차도 내가 십자가 지고 와야될 취지를 보여주기 위한 징표로서, 징후로서, 결과물로, 하나의 배치물로 깔아놓은 거에요.
열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날 때 자기가 원인이라고 생각했던 거에요.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것을 수정해주었지요. “니가 원인이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것은 니 혈육(쪽)이 아니고 내쪽이다.”
아까 고속도로가 두 개 있다고 했지요? 하나는 행함의 고속도로, 하나는 믿음에서 믿음으로 라고 했지요. 이것은 내 아버지가 너에게 한 것이다. 따라서 베드로에게 믿음이 있으려면 반드시 내 아버지니까, 바로 아버지에게 갈 수가 없고 예수님을 경유해서 가야 돼요.
그러니까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베드로가 하나님을 믿었잖아요?”라고 하는데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따라오라고 예수님이 결과물을 먼저 제시한 거에요.
‘이상해. 베드로가 예수를 믿었는데 왜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했지?’ 이것은 성경을 백 번, 만 번 읽어도 안 풀려요. 그렇잖아요. 마태복음 16장에서 분명히 예수님을 고백하고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구나”라고 했으면 믿음을 배신하는 일이 없어야 되는데 그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니까 도대체 믿음이 있는 베드로 쪽에 서야 될지 배신한 이후에 서야 될지 혼동이 되잖아요.
그것이 오늘 풀렸지요? 어떻게 풀렸는지 모르시는 것 아닙니까? 베드로 구원 받으라고 믿음을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본인을 증거하라고 예수님하고 아버지하고 창세 전에 이야기가 되어서 그렇게 베드로에게 믿음을 준 거에요.
그 믿음을 소유하는 것이 내 믿음이 아니고 거꾸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에게서 결과물로 나온 믿음이기 때문에 베드로는 그 자리에 그냥 있으면 안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를 해줘야 돼요.
그러면서 ‘이것이 내 믿음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대신 믿음”이구나.’를 나중에 깨닫게 될 거에요. 그 가운데 베드로는 자기 믿음에 실패해야 되죠. 열두 제자도 마찬가지에요. 다 실패해야 되지요.
구원에 실패한 자가 구원을 받은 겁니다. 그래서 길거리를 가다가 구원파가 와서 “언제 구원 받았습니까?” 하고 묻거든 “나는 구원 못 받았습니다.”라고 하세요. 깔끔하게 두 번 다시 말 안 걸 겁니다. “나는 구원에 실패했어요.” “제가 성공시켜 드릴까요?” “아니 필요 없습니다. 저 성공하면 큰일 납니다. 지옥 갑니다.”
무슨 말인지 몰라요. 저쪽에서는.. 구원에 성공하면 큰일 나지요. 왜냐? 그 구원을 자기가 소유하려고 해버려요. 인간이 구원을 소유하게 되면 그것을 관리한다고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에요. 개 한 마리 키우는 것도 그렇게 힘든데 아기 예수(자기 믿음) 하나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데요.
예수님을 왜 키웁니까? 예수님이 애완견이에요? 앵무새에요? 집집마다 예수 키운다고 바빠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주객이 거꾸로 되었어요. 왜 자기가 예수를 키워요? 예수님이 갭니까? 교회 갈 때는 예수 끌고가서는 니 개하고 내 개하고 어느 것이 이쁜지 자랑질 하고.. 목사 예수는 제일 좋은 개인 줄로 착각하고 있고..
미국에 개한테 세례주는 교회도 있더라구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 같으면 사람의 종이잖아요. 고객이 왕인데 고객을 만족시키려면 뭐라도 해야지 돈이 생기지요. 교회가 마트고 목사는 업주인데요. 노회는 동종 업소의 업주들이라니까요.
실패하는 기쁨이 있어야 돼요. 실패할 때에 고백이 나옵니다. ‘나의 나 된 것, 내 신앙은 내가 원인을 제공해서 나온 결과가 아니라 주께서 원인이 되셔서 이러한 결과를 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제 것은 몽땅 주의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겁니다. ‘네가 바로 상이다. 네 자체가 상이다.’
그 “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특히 마태복음에 많이 나오거든요. 마태복음부터 히브리서까지 “상” 개념이 어떻게 발전되고, 어떻게 이것이 인간들의 오해를 벗겨내고 우리 자신이 “상”이 되는가까지 이어지는데 그것은 두 번째 시간에 제가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 한 것을 다시 한 번 요약하게 되면 이렇습니다. 보통 요약을 잘 안 하는데 오늘 늦게 오신 분이 있어가지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이 우리한테는 이상한 일이라고 했지요.
‘왜 상을 주십니까?’라고 해야 되는데 ‘뭘 주실래요?’라고 나온다면 그 사람은 애초부터 믿음이 아니지요. ‘뭘 하면 주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물음은 성경에 없습니다. ‘안 줘도 되는데 왜 상이 옵니까?’라고 할 수 있어야 돼요. 그 사람이 오히려 이상해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안 나타나도 되는데 왜 나타나십니까?’라고 해야지,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보여주시면 믿겠습니다.’ 이 사람은 정상이 아닙니다. 잘못된 거에요. 왜? 구약에서의 하나님은 숨어계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점심 시간에 교실에서 애들이 점심을 먹을 때 선생님은 같이 먹습니까 안 먹습니까? 안 먹지요. 특별한 경우 아니면 교무실에서 먹거나 밖에서 먹지요. 그러면 선생님은 그 시간에 숨어계시는 거에요. 애들밖에 없어요.
제가 수요일날 창세기 강의할 때 했지요?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있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이 말이죠. 이사야 45장에 하나님은 숨어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타나는 경우는 인간이 죄를 지을 경우에 나타나요.
그러니까 점심시간에 선생님이 나타나면 몽둥이 들고 나타난 거에요. 그냥 창조했으면 자기들끼리 살면 돼요. 하나님 찾지 마세요. 하나님은 따로 계시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오셨을 때에는 뭔가가 파토 났어요.
난로에 불이 났든지 무슨 문제가 있었어요. 선악과를 따먹었어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해석의 발상을 완전히 거꾸로 해야 돼요.
하나님은 같이 있지 않는 것이 정상인데 인간에게 찾아왔다는 것 자체가 “너는 죽었다.”가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안양20151113b-히11장 6절(대타)-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합시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사람들이 특별한 사람들이에요. 보통 인간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하늘을 난다든지 바다에 헤엄친다든지 그런 능력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고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있기 때문에 특별한 사람들이 되는 겁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부분, 부분들이 살아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전체 모양을 한 사람이 독점해서 갖고 있지는 않고요. 나누어서 갖고 있는 거에요. 이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 성도에게 그대로 전달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에 많은 성도들은 부분, 부분들을 갖고 있었는데 그들이 모이게 되면 하나의 몸이 되잖아요. 그런데 신약에 십자가 이후에는 “반복”이 되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조각들이 모여서 하나의 그림을 보이지만 신약에서의 “반복”은 완성된 것들의 되풀이가 돼요.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바쳤고 그때에 하나님한테 믿음이 있다고 표징을 얻었지요.
그러면 오늘날은 왜 자기 아들을 안 바칩니까? 기도원에 가서 칼 들고 애를 잡아야지, 그런 것으로 안 잡고 공부로 잡고 시집 안 간다고 잡습니까? 아버지가 칼 들고 애를 왜 안 잡지요?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잖아요. 같은 믿음의 노선이라면 따라해야지요. 그래야 같은 노선이라고 확인될 것인데 우리는 왜 안 잡느냐 말이에요. 방금 제가 해답부터 먼저 이야기했지요?
아들을 잡는 것은 아브라함의 몫이에요. 이삭은 아들을 안 잡았지요? 아들을 안 잡았지만 요셉을 하나님 쪽에서 잡아죽였잖아요. 구덩이에 집어넣어가지고 종으로 팔려갔는데 아버지는 그 사실을 모르고 아버지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자식, 그래서 제일 귀한 옷을 입은 그 자식은 영원히 사라졌고 나머지 11명의 아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자기한테는 전혀 위로가 되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다른 아들이 우는 아버지를 말려도 위로가 안 돼요. 그것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는 고통이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야곱에게 그대로 전달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야곱은 예수님의 부분 가운데 또 담당해야 할 부분이 있어요.
그것은 축복과 저주를 반대로 내리는 거에요. 히브리서에 나오는데 11장 21절 봅시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천국에 입성해서 신이 났을 때에, 그들이 정식으로 합격했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되어 있지요.
야곱이 장차 올 예수 그리스도의 일부로서 보여줄 것은 지팡이에 의지하여 축복할 때 어긋맞게 했어요.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자리를 바꿔서 축복을 해도 되는데 자리를 바꾸지 않고 어긋맞게 해서 한 거에요.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정상적으로 보인다고 생각한 나를 하나님은 거꾸로 만들었다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자기 체험이 그대로 하나님의 계시(예언)로서 메시야까지 믿음의 노선에 이어지게 되어 있어요.
이 믿는 자의 특징은 항상 내가 생각한 인생의 반대로 가게 하시는 그러한 능력이 후대에 믿는 자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다는 겁니다.
넓은 길은 찾는 사람이 많지요? 그런데 영생의 길은 많은 사람이 가는 곳으로 가면 안 되고 좁은 길이지요. 찾는 이가 적지요? 그러면 물어보겠습니다. 찾는 이가 적은 길로 가면 영생을 얻습니까 못 얻습니까 못 얻지요. 왜? 내가 선택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결과물인 것을 우리가 스스로 알고 고백을 해야 기뻐하시는 거에요.
결과물이라는 것은 내가 선택해서 내 인생을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거에요. 주님이 선택하고 우리는 결과물인 겁니다. 그런데 주님의 선택은 안 보이지요. 존재는 있지만 보이지 않잖아요.
그러면 나타나는 것은 내가 현재 이렇게 나타나고 내 인생은 이렇게 산다는 겁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고 나는 직장에 다니고 똑같지는 않아요. 그러나 거기에서 공통요소를 뽑아내면 똑같아요.
너나 나나 본인이 자기 인생의 원인자가 아니고 결과물이라는 거지요. 그리고 주님의 선택에 의해서 되었다는 것이구요. 또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내 뜻과 거꾸로 어긋맞게 산다는 것이 공통점이지요.
그러면 한 번 어긋맞게 되면 그 다음에는 인생이 정상으로 갑니까 아니면 계속해서 어긋맞게 갑니까 계속해서 어긋맞게 가는 거에요. 이것이 “반복”입니다. 한 번 죄를 지으면 개과천선해서 두 번 다시는 그런 죄를 짓는다 안 짓는다 어느 쪽입니까?
계속 짓게 되어 있어요. 시기, 질투 계속 하는 겁니다. 시기, 질투를 어지간해서 안 하면 계속하게 만들어요. 어느 시점에 인간이 되었다, 우리가 아는 인간됨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십자가는 대신 죽음이고 우리의 몸을 죽일 때까지 우리가 바뀌지 않아야 그 의미가 우리를 통해서 구축(성사)이 되는 겁니다.
끝까지 우리는 죄를 지어야 돼요. 중간에 ‘나는 옳게 결심했어!’ 이러면 안 됩니다. 그 결심이 소용이 없어요. 그러면 계속 그렇게 살다가 마지막에 하나님 품에 안기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아까 그림으로 설명했잖아요. 고속도로가 두 개 있는데 행함에서 행함으로 가는 고속도로와 로마서 1장에 나오는 것처럼 믿음에서 믿음으로의 고속도로였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나란히 가잖아요.
이것을 옆으로 보면 아래쪽에 행함에서 행함으로, 위쪽에는 믿음에서 믿음으로의 고속도로가 나란히 가가지고 나중에 교차가 되어 버리지요.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새로운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을 때까지.
옛사람은 흙에 속한 것인데 인간의 몸이 흙에 속했기 때문에 반드시 욕구가 있게 되어 있어요. 그 욕구는 몇 m인지, 그 깊이는 죽을 때까지 다함이 없어요. 아무리 비싼 다이아몬드를 사줘도 다른 욕구는 또 나오게 되어 있어요.
욕망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욕망이라는 것은 끝까지 가요. 무저갱 같아요. 아무리 해도 ‘이만하면 됐습니다.’라는 것은 없습니다. 골프 좋아 하다가 나중에 골프를 좀 치면 시들거려요. 나중에는 재미가 없어요.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이야기는 딱 부러지는 어떤 일은 없다는 겁니다. 모든 게 허무로 끝이 나요. ‘재미있겠다. 멋있겠다.’ 해도 대책이 없습니다. 온갖 상상을 다 해보거든요 ‘이럴 경우에 얼마나 행복할까?’
막상 그것을 해보세요. 얼마 안 가면 별로에요. 고등학교 때 좋아했던 첫사랑을 만나보세요. 별로에요. ‘두 번 다시 내 눈에 띄면 알아서 해라. 우리 집 근처에 이사 오지 마라. 나는 젊을 때 너를 기다렸지, 지금의 너를 기다린 게 아니야.’ 이렇게 돼요. 보이는 것은 전부가 아니거든요.
지난 수요일날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보고 있기 때문에 못 본다고 이야기했지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에요. 그런데 보고 있기 때문에 그게 전부라고 착각을 하게 만들지요.
성경책을 좀 떼어놓고 보면 보이지만 바로 코 앞에서 보면 인쇄된 잉크자국 난 점들만 보이잖아요. 어느 정도 거리를 떼어야 의미가 발생되는 것처럼 인간은 가까이 있다고 해서 아는 게 아닙니다.
멀어지게 되면 그리울 때가 있어요. 부부가 너무 붙어있으면 재미가 없는데 가끔 한 사람이 출장 갔다오게 되면 갑자기 “자기 잘 있었어? 목욕해.”라고 하지요. 만나면 또 마찬가지지만 말이에요. 떨어져 있을 때는 없는 그리움이 생기고 그러잖아요.
믿음이 특수하다고 했잖아요. 그 이유가 “대타”이기 때문에 그래요. 오늘 강의 제목을 “대타”라고 합시다. 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나를 대신한 분을 보여주는 삶을 사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이 사람이 특수한 사람이고 믿는 자에요.
그러니까 “너희들은 나를 보지 말고 내가 믿는 자를 봐라.”라고 하면서 살아가야 돼요. “그래, 너희들이 지적하는 것을 나도 인정하는데 너는 나를 구원하지는 못 하잖아. 마귀야 너는 지적질은 잘 하는데 너는 나의 구세주가 될 수 없잖아.”
마귀가 지적하는 것은 정확해요. 왜? 마귀는 선악과를 알고 있거든요. 내가 뭐가 잘못이고 나의 한계가 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지적만 할 뿐이지 구원이 안 되는데 주님은 지적하는 게 구원이에요.
이미 구원이 된 자이기 때문에 지적하는 겁니다. 아까도 산상수훈에서 “돈을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저 주어라”는 말씀은 절대로 우리가 지킬 수 없는 거에요. 이것은 우리가 선택하라든지 결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니가 이런 일을 하게 되면은 나는 너를 보고 선하고 착하다고 박수 칠 준비가 되어있다.’라는 뜻이 아니에요. ‘이것은 너에게 불가능한, 너에게 금지된 사항이다. 금지된 사항을 너는 할 수 없다.’라는 거에요.
이 말씀을 우리가 못 지키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주께서 산상수훈으로 내뱉어주는 겁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뒤에 아무리 천국이 너희 것이라고 해도 인간은 심령이 가난할 수가 없어요.
왜? 인간의 몸에는 욕구가 있고 갈수록 더 높아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난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과 정반대방향에 있어요. “가훈이 뭐야?” “가난하기” 이런 것은 없잖아요.
언젠가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제 딸 초등학교 선생님이 “각자 집에 가서 가훈을 써오세요.”라고 했는데 제가 “죽자.”라고 했거든요. 그것을 딸이 그대로 가져간 거에요. 그런데 그런 가훈은 처음 들어본 거에요.
죽어도 상관이 없는 가정, 북한 말로 죽어도 일없는 가정, 진리로 자유케 된 가정이라는 함축된 뜻이 있는데 선생님이 그것을 알겠어요? “성실하게 살자, 바르게 살자. 소금과 빛이 되자.”라고 해야 되는데 말이에요.
주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은 말씀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아무리 말씀을 줘도 우리 자체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 의미를 성사시킬 수 없는 거에요.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대타”이어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특수한 존재에요.
주께서 하실 일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이루었던 일, 십자가의 일을 대신하는 거에요. 십자가를 믿고 있는 그 순간이 “돈을 빌러 오면 거저 주는” 순간이에요. 이것이 어떻게 논리가 성립이 되는가 봅시다.
산상수훈(마태 5장)에 ‘꾸고자 하는 자는 거저 주어라“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가 도저히 이렇게 할 수가 없어요. 우리의 몸이 있어서 살고자 하는 본성(욕구) 때문에 이럴 수가 없거든요.
한 명이 왔으면 할 수 있겠지만 두 명, 세 명이 오면 못 하지요. 어느 집에 가니까 돈을 공짜로 준다는 소문 듣고 한 2500명이 왔다면 할 수가 없잖아요. 한두 명에게 해줬다고 지킨 것이 아니에요. 계속해서 해야 돼요. 그러니까 우리는 못 지켜요. 우리한테 문제가 있는 거에요.
“대타”이신 주께서는 우리의 문제를 우선 끄집어 내요. 그래가지고 그 문제 있는 것을 주님이 가지고 갑니다. 이것을 “우리 대신 죄짐을 지신 분”이라고 하는 거에요. 찬송가에 그렇게 많이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불러요.
우리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 죄짐을 대신 가져가요. 그리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해요.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다 이루었다” 안에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저 주어라”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은 다 이룬 것이 되어요.
그러면 주님께서 이 말씀을 십자가 이후에 우리에게 줍니다. 그 다음에는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저 주어라”에 해당되는 그런 일들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게 됩니다. 이 말씀을 내가 읽고 있는데 딩동 하더니 누가 집에 들어왔어요.
“목사님 돈 10만원 있습니까?” 하필 타이밍이 큐티 타이밍이에요. 그럴 때 돈 10만원을 빌려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동행하라고 했으니까 최소한 20만원은 줘야 돼요. 쩨쩨하게 10만 5000원 주면 안 돼요.
그런데 20만원을 주면 절대로 안 돼요. “형제여 예수님이 다 이루심을 믿습니까?” 하고 복음을 전파해야 돼요. 오늘 갑자기 기쁜 소식을 들으니까 기분이 좋지요? 돈을 주면 안 되고 복음을 전파해야 돼요.
“저는 돈이 필요한데요?”라고 하면 “돈 있어서 뭘 하려고? 이 지옥 같은 세상 더 살려고? 주께서 굶어죽으라고 돈 없게 하는데 빨리 죽어야지. 그래도 복음을 알면 돈 없이 지금 굶어죽어도 천국 갑니다.” 하고 복음을 전하는 거에요.
그러면 이 사람은 돈을 빌리러 왔다가 돈은 하나도 못 받고 복음만 듣고 그냥 돌아가게 돼요. 여기서 내가 만약에 그 사람에게 10만원을 줬다면 이 사람은 쫌상이 돼요. 비겁하게 나의 의를 위하여 예수 믿는 티를 낸다고 주의 말씀을 도용한 인간이 돼요. 내가 불쾌해요.
그런데 20만원을 줬으면 ‘야, 내가 성령 받은 것이 맞기는 맞구나. 내가 옛날 같으면 이럴 수 없는데 성령의 은혜로 10만원을 덤으로 주면서, “형제여 이것은 안 갚아도 돼요.”라는 놀라운 말이 나한테 나오다니..’ 이렇게 할 때 이것이 되돌아와서 ‘자기 대견함, 자기 의로움’이 10만원 할 때보다 곱빼기나 더 많아져요. 10만원 할 때는 쫌상인데 20만원 하니까 여유로워요. 완전히 맹자, 공자, 부처가 다 되었어요.
그런데 방금 그냥 복음을 전했다고 하니까 무슨 생각이 듭니까? ‘참 내가 돈을 어지간히 사랑하는구나.’라는 것이 느껴지겠어요 안 느껴지겠어요 돈을 주기 싫어서(이 돈이 어떤 돈인데) 복음으로 때웠잖아요.
결국 주님은 “다 이루었다”를 증명하기 위해서 두 사람을 박치기 시킨 거에요. 이쪽도 마찬가지에요. 돈 빌리러 온 이유가 이 지옥 같은 세상을 더 살려고 나한테 온 건데, 주님은 돈 없이 해서 천국에 보내려고 하시는 거였으니까요.
나는 돈을 주는 것이 아까워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땜질하려고 때웠던 돈 사랑하는 나도 주님 앞에서 둘 다 죄인으로 드러났으니까 주님께서는 성공한 것이 되지요. 성공한 케이스에요.
이때 우리는,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저 주어라”는 말씀이 믿기 전이나 후나 동일하게 우리의 죄를 유발시키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는 것을 드디어 발견하게 되지요. 만약에 20만원을 줘보세요. 줘서 보내면 이 말씀에 대해서 그 사람은 성경책을 지워버려야 됩니다.
왜? 자기가 행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그 사람이 “저 집에 가면 10만원 더 얹어서 준다더라.”고 소문을 내서 자기 친구들 한 200명 몰고 오면 돈이 없어서 못 준 것이 되지요. 그러면 안 돼요. 빌려서라도 줘야 돼요.
그러면 이 사람은 ‘내가 행하지 못해서 죄인인 것을 아는 것’과 ‘나는 그냥 있어도 원초적으로 죄인인 것’의 다름, 행하지 못해서 죄인인 사람은 지옥 가고, 원초적으로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은 천국 가는 노선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표정들이 안 믿는 표정들인데 이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은 이렇게 설명하는 사람들을 주의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성경 말씀을 못 지키지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져서 성령님이 오시면 여러분의 힘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는 이 말씀대로 지킬 수 있습니다.”라고 하는 사람들 100%가 가짜입니다.
“전에는 돈을 헌금할 때 아까워하면서 냈는데 지금 은혜를 받고 난 뒤에 이제는 자발적으로 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100% 가짜입니다. 절대 그 사기꾼, 조희팔에 넘어가지 마세요. 그거 다단계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넘어갈 거에요. 돈은 우리가 남한테 넘겨줄 수가 없어요. 저 사람한테 돈이 넘어가는 일, 주님께 그런 일은 아예 없어요. 나에에 찾아온 사람이나 만난 사람이 둘 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만났느냐, 그것만 봐요.
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우리가 원인이 아니고 우리가 결과일 때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히브리서 11장 6절에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은 일하신다는 뜻이거든요. 일하시는 분이 우리에게 “상”을 주신다는 겁니다.
이 “상”은 우리가 아니고, 미래의 것을 미리 당겨서 받은 것이기 때문에 이런 행위 자체가 내가 원인자가 아니고 원인자가 따로 있음을 증거할 때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겁니다.
이제 7절 노아로 넘어가 봅시다. 노아라고 하니까 남의 이야기 같지가 않고 갑자기 친근해지네요. 날 때부터 4.2kg.. 노아는 ‘안식’이라는 뜻이거든요. 이름에 ‘안식’이라는 말을 붙였다는 것은 결국 ‘안식’이 있을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안식’은 꿈도 꾸지 말라는 뜻이고 네가 하는 짓을 알아라. 안식할 만한지.. 하는 짓은 개판이면서 무슨 안식을 누려..?’ 이런 뜻이거든요.
그런데 여기에 노아가 등장했는데 이것은 노아가 그 시대의 평화, 그 시대를 천국으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그 시대를 뭉개버리고 다른 세계, 그 시대를 밀어붙이고 그 밀어붙인 세상에 등장할 다른 세계를 앞당겨서 일찍이 보여주는 특수한 임무를 지닌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아를 믿으라는 말은 이 세상을 포기하라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돈 없다고 교인에게 10만원 빌려 오지 말고 돈 없이 살게 된 것을 고맙게 여기고 굶어죽을 준비를 하라. 그것이 너한테 할당된 너의 임무다. 마음 편하게 먹고 하나님께 오라.’
참새를 주께서 키우잖아요. 그러면 언제까지 키웁니까? 굶어죽을 때까지 키우죠. 그러니까 아무리 키워도 결국 굶어죽여서 그만 키우시는 거에요. 바깥에 들풀은 잘라서 아궁이에 들어갈 때까지 키우잖아요. 아궁이에 들어갈 때 이미 들풀의 임무는 끝난 거에요. 임무 제대한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께서 마냥 우리에게 밥을 먹이지 않습니다. 마냥 키우지 않습니다. 주께서 필요한 만큼만 키워요. 따라서 더 살려고 욕심 낼 필요가 없어요. 이 전도서에 나오는 내용을 보세요. 너무나 낯선 내용들이 나와요.
“세상? 세상 뭐 있어, 한 방이야. 그저 살아있을 때 아내와 맛있는 것, 좋은 것(포도주가 언급되어 있거든요.) 마셔가면서 제발 재미나게 살아라.” 우리가 재미있게 안 살겠다는 말은 더 살고싶어하는 욕심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거에요.
왜? ‘헛되다고 분명히 했는데 헛되다고 하면서 왜 꿈지럭대면서 거기에 기거하려고 시도하느냐? 내 말은 말같지도 않느냐?’ 이렇게 나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에요. ‘헛되다고 했으면 떠날 생각을 해야지 헛되다고 해놓고 ‘무슨 좋은 일이 있는가?’ 하는가 하는데 좋은 일은 없어.’
“공부하면..” “공부한 인간이나 공부하지 않은 인간이나 똑같애.” 전도서 이야기입니다. “착한 사람..” “착한 사람이나 안 착한 사람이나 결과는 누구나 가름할 수 없어. 착한 사람도 망할 수 있고 못된 사람도 잘될 수 있고..” 그게 이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전도서에 나와요.
어려우면 「전도서 속의 그리스도」라는 책이 나와 있기 때문에 그것 보시면 돼요. 하루하루 재미나게 살고 감사하게 살면 된다는 뜻이에요. 성경은 허무주의 같은데 이상하게 낙관주의지요. 비관적인 것 같은데 속에는 세상에 이런 긍정적인 삶이 또 있겠어요? 전도서.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를 다른 말로 하면 “기쁘고 기쁘고 기쁘고 기쁘도다, 모든 것이 즐겁도다”에요. 빚잔치 하겠다는데 즐겁지요. 인생을 말아먹겠다는데 즐겁지요. 희망을 갖지 말라는 거에요. 왜? 희망은 다른 데에 있기 때문에.. 희망은 위에서 주는 것이고 네가 생각하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라는 겁니다.
노아도 마찬가지에요. 노아의 이름이 안식입니다. 그러니까 집사님의 손자의 이름이 노아라고 했는데 아마 그 애는 구름 위로 살아야 될 거에요. 이 땅을 딛지 않고 구름 위를 살듯이 그렇게 살면 적당해요.
이 노아가 다른 세계에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다른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를 보고 싶어 하지요. 이것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어디 안에? 다른 세계를 지금 지상에 있는 식으로 묘사하는 데에 있어서 지상에 있는 물건들(사물들)로 응축시킨 것이 방주입니다. ..어려워요.
초등학교 때 공작시간에 보통 종이로 장난감집을 만들었다고 칩시다. 이걸 짜부러뜨려서 뭉개버립니다. 그러면 형체는 날아가고 납작하게 되어 있지요. 이게 홀로그램의 원리에요. 홀로그램이라고 하는 것은 얼핏 보면 얼룩덜룩인데 3D 안경으로 보면 입체로 보이지요.
이 얼룩덜룩한 무늬 안에 레이저 광선의 정보가 함축되어 있는 거에요.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 빛을 그냥 보내고 하나는 레이저 광선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봤을 때 이걸 모아(합류해)보면 두 가지 정보가 있고 그걸 사람이 두 개이기 때문에 사람의 눈으로 보게 되면 원래에 있던 정보가 입체적으로 보인다는 원리가 있어요. 이게 홀로그램의 원리에요.
노아가 짜부려져 있으니까 사람들은 노아를 보고 잠수함이야, 이게 무슨 세월호야, 이게 뭐야, 배야, 이것밖에 안 보이지요? 이걸 배로 보는 거에요. 이걸 낯선 세계로 안 보는 거에요.
이걸 왜 낯선 세계로 안 보는가 하면 기존 세계가 너무나 명백하게 자기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속해 있는 환경에 자식이 있고 그 자식이 “나”거든요. 우리는 나 혼자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타인의 입장(욕망)에 맞추어서 내가 있는 거에요. 남들이 요구하는 욕구에 맞추어 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신 보기에 내가 어때?” 항상 우리는 남에게 말하지 않아도 시선 자체가 남을 경유해서 내 행동을 결정짓습니다.
‘아, 이런 행동 하지 말라는 말이지! 알았어. 그 행동 안 할게.’ 그 행동을 안 함이 나의 양심이 되고 그게 굳어져서 나의 습관이 되고 내 성질이 되고 내 성격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편 죽고 자식 떠나고 다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자기를 지켜보는 사람이 없을 때는 행동이 개차반이 되지요. 그 다음부터는 아침이슬 먹고 ‘아이고, 당신 나 놔두고 벌써 가버리면 나는 어떻게 되냐?’ 맨날 술로 달래고 ‘심심해서 못 참겠다. 어디 남자 없나?’ 해가지고 캬바레에 가서 바닥 비비고 안 꼬시려고 하면서 자꾸 꼬시기를 기대하고.. ‘나 이런 여자 아니요.’ 하면서 자꾸 본인이 기대고..
주위에서 더 이상 내가 이런 인간이어야 되는 필요성이 날아가 버렸어요. 왜? 주시하고 관찰하는 시선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대표적인 것이 거리에 속도측정기가 없으면 차가 어떻게 달립니까? 날아가죠. 새로난 도로에는 그냥 시속 140km입니다. 서서히 경찰이라도 하나, 둘 다니기 시작하지요? 시속 100km로 갑니다.
시험이 없다고 하면 학생들이 공부를 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안 하지요. ‘나는 내 실력 얼른 측정하고 싶어.’ 이런 학생 없습니다. 반에서 어느 정도 석차인지 아버지가 궁금해하셔요. 그것 때문에 시험을 봐요.
본인한테 물어보면 자기는 공부를 잘 한대요. 자기는 맨날 책 펴놓고 공부한대요. 그런데 시험 보면 꼴찌에요. 성적이 안 나와요. 꿈속에서는 자기가 천재에요. 그런데 시험 보면 운전면허증도 못 따요.
노아 때 상태를 이렇게 봅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6가지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관심사가 없어요.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이 6개의 관심사에 이미 함몰되어 있습니다. 빠져있습니다.
이런 인간이 어디에 가요? 교회에 가요. 그리고 교회에 가서 기도한다고 내놓는 것을 보세요. 내놓는 모든 내용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에 관련된 것입니다. 자본주의에서는 그걸 한 마디로 “돈 벌자.”로 축약할 수 있습니다.
‘주여, 돈 주시옵소서. 주여, 집 사주세요.' 쌍둥이 애들 통성기도하는 것 봤지요? 그걸 보고 누가 애들을 작은 무당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요. 아무 말도 못하는 애들이 그걸 하는 거에요. 유튜부에 나와요. 나중에 보세요. 나옵니다.
그 기도하는 내용이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에요. 그러니까 이 말은 나는 그런 게 필요없는데 남들이 나한테 ‘너는 그렇게 살아야 돼.’라고 이미 타인의 시선 속에 포위되어 있는 거에요.
‘가정주부가 저래도 돼?’라든지, ‘적어도 남자가 20살 되었는데 그래야 돼?’ 꼭 남들의 시선에 의해서 맞추어주는 인생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구약에서는 두 자로 이야기합니다. “애굽”.
「출애굽기 속의 그리스도」라는 책 본 적 있습니까? 거기 첫 문장에 나와요. 인간은 출애굽 할 이유가 없다. 살기 좋은 세상.. 그리고 살기 좋은 세상이 아니라도 나 자체가 세상이 그렇게 되는 데에 기여를 했어요.
남 탓하지 마세요. 내 욕망이 이 세상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하는 데에 나도 그걸 요구했어요. “나” 자체가 “애굽”인데 “애굽에서 탈출한다”는 말은 “지금의 나가 아닌 나”로 가위표를 친다는 말인데 “내가 아닌 나”가 되어 버리면 나는 뭐죠?
그걸 상상도 못 하죠. 그래서 “출애굽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있을 수 없다.”라고 책 첫 페이지에 나와요. 책 덮어버리면 다 잊어버리지요.
노아가 그 시대에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 이유를 이제 아시겠지요? ‘너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냐?’ 흔히 하는 말로 “네가 그런 소리 해봐야 계란으로 바위치기다.”에요. 이 말을 얼마나 들었겠어요?
그런데 노아는 할 말이 있어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다.” 이것이 중요한 거에요. 내가 전도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단독자가 아니어서 그런 거에요. 노아는 단독자가 아니에요. 노아는 결과물입니다.
보이지 않는 숨어계신 주님, 장차 오실 십자가가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물을 미리 앞당겨서 예수 그리스도로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본인이 불평을 얼마나 했겠어요? 노아가 불평했다는 것은 성경에 안 나오지만 노아와 같은 노선에 있는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보세요.
예레미야가 걸핏하면 불평을 하지요. 주의 복음을 전하니까 남들이 “너는 입만 벌리면 욕을 한다.”고 하지요. “주여 내가 욕한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안 하려고 했는데 주께서 불같이 말씀을 주니 안 할 수가 없었나이다.”
백날 성경을 써도 여호야김 왕이 옆에 있다가 쓰면 찢어버리고 쓰면 찢어버리고 보란듯이 성경책을 쪽쪽 찢는 거에요. “네가 백날 해야 나한테는 헛소리야.” 이런 식으로 모멸감과 모욕감을 줄 때 얼마나 외로움을 느끼겠어요?
그런데 혼자서 예레미야는 천상회의에 참석했어요. 롯데 호텔 37층, 신격호 가족들 있는 그 동네에서 재벌 임원들 참석하는 것처럼 참석한 뒤에 “너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리고 주께서 “예레미야야, 네가 네 모든 계시를 함축화해서 울어라.”라고 부탁하셨고 그 부탁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 「예레미야 애가」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세상을 보고 탄식하여 우는 사람을 보고 예레미야를 닮았다고 하죠. 우리가 남의 이야기를 하지 말고 우리 속에서 매일같이 반복하는 거에요. 그러면 그 다음에 이야기해봅시다.
이것이 홀로그램처럼, 3D 입체 사진처럼 방주 안에 함축이 되어 있지요. 그러면 우리가 방주의 구조를 핀셋으로 하나하나 펼친 그림 펼치기하는 것처럼 펼쳐보자 이 말입니다. 그러면 ‘오는 세상이 도대체 어떤 세상이기에 요따위 식으로 이렇게 하느냐?’라고 되어 있을 거에요.
그걸 펼쳐보면 딱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정결한 짐승 7쌍과 부정한 짐승 2쌍이 들어가거든요. 노아는 정결한 짐승 쪽에 서면 안 되고 부정한 짐승 쪽에 서야 돼요. 노아가 최후에 남은 인간이잖아요. 노아밖에 인간이 없는데 모든 인간은 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유일하게 오늘 강의 제목(대타)처럼 정결한 짐승과 부정결한 짐승의 두 노선이 있다면 노아는 부정결한 짐승의 노선에 서야 돼요. 노아가 벌거벗었을 때에 자식이 얼레리꼴레리 했지요.
그런데 그 자식이 누구의 자식입니까? 노아의 자식이죠. 그러면 저주 받은 자식은 본인의 몸에서 나왔지요. 그러면 노아의 안에는 저주의 요소가 있어요 없어요? 있지요. 그리고 처음부터 노아가 술을 안 먹었으면 괜찮아요. 그리고 술을 먹어도 바지를 입고 먹으면 괜찮아요.
누구의 말대로 만취해서 무슨 죄인지 모르겠다고 하면 안 되고.. 만취해가지고 필름이 끊길 정도로 했어요. 바지를 벗었는지도 몰랐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은혜라는 것은 다른 노선에서 와요. 노아는 결과물이에요. 원인은 숨어있어요.
그런데 정결한 짐승으로 숨어있는데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정결한 짐승을 죽여 버립니다. (부정한 짐승을 제거하는 것이 아님) 정결한 것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결국 특수한 죽음의 정보가 담긴 것이 “방주 안”임을 보여줍니다. 이것을 세 자로 말하면 “십자가” 사건입니다.
특수한 죽음이기 때문에 이 죽음을 죽음답게 하려면 우리(인간)는 날 때부터 악해야 됩니다. 창세기 8장을 한 번 봅시다. 8장 2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이런 것을 설명하려면 복잡하니까 빨리 가겠습니다.
항상 하나님이 제사를 받음으로써 우리한테 주님만 아시는 어떤 정보를 제공하시는데 그 내용이 주님의 본질에서 나와요. 그 본질이 구체화되면 예수 그리스도고요.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죄를 지어서 악해지는 것이 아니고, 죄를 지을 때만 악해지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악하기 때문에 악한 티를 내는 것이 인간의 한 평생이에요. 심지어 요양병원으로 갈 때까지 계속 해서 악해요. 마지막 죽을 때도 죽고 난 뒤의 걱정까지 다 하고.. 죽고 난 뒤의 걱정을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 “형제들끼리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재산 나눠라.”고 백날 얘기해도 소용 없어요.
태어나면서부터 악한데 악하면 저주에요. 그런데 악한데도 불구하고 저주를 안 받아요? 그러면 저주를 안 받는다는 말은, 악함은 따로 있고 저주를 안 받는 요소를 따로 겹쳐야 되겠지요.
그 겹치는 것이 “노아의 언약”이라는 겁니다. 여기 분명히 노아 당시에 노아의 언약은 “방주”였어요. 그 “방주”가 반복이 되면 “무지개”로 바뀝니다. 그 전까지는 “무지개”가 없어요. 노아의 방주 이후에 무지개가 처음 생기면서 무지개가 계속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무지개가 생겨날 때마다 뭘 생각하라는 겁니까? 우리는 지금 물이 꽉 차 있는 어항 속에서 살고 있다고 여기고 살라는 것입니다. 진작에 물에 빠져야 될 인간들인데 보세요, 귤에다가 떡에다가 케이크도 있잖아요. 심지어 숨도 쉬잖아요.
우리는 숨쉬는 것이 하나님의 기적임을 언제 생각합니까? 모르잖아요. 그런데 호흡기가 안 좋아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거나 높은 산에 가서 등산하다가 고산병에 걸릴 때 이 산소라는 것이 돈을 주고도 못 살 귀한 것이라는 것을 그때에 압니다.
제가 언젠가 예를 들었습니다만 가장 약오르는 것이, 병원에 입원해서 환자복 입고 창문을 열어서 밖을 보는데 나보다 더 나쁜 짓 한 놈이 멀쩡하게 거리를 활보하면서 웃고 지나가고 있고 나는 별로 나쁘지도 않은데 여기에 병들어 가지고 링거 맞고 있을 때입니다.
‘도대체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저주를 주십니까?’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시기와 질투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평소에 숨쉬고 건강하고 밥 잘 먹는 것이 그냥 네가 인간다워서 주는 줄로 알았어? 보너스야. 보너스 없이는 하나도 없어.’
모든 것이 그냥 보너스로 주는 거에요. 일 하지도 않은 자에게 의롭다 하심의 증거로서 우리를 지금 살게 하시는 겁니다. 미장원에 가서 머리 잘 나온 것이 여러분이 줄 만해서 그런 것이 아니에요. 주님의 은혜입니다.
노아의 그 외로움을 지금 우리한테도 반복시키는데 우리는 늘 돈에만 관심이 있고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거기에다만 관심을 두다가 보니까 정작 은혜에는 관심이 없이 살아요.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합니까?
노아의 방식을 순간순간 사태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우리가 특수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가 되새기게 만들지요. 그래봐야 한 3초밖에 안 가지만요. 오죽했으면 이사야에 너는 개만도, 소만도 못 하다고 합니까?
소와 개는 자기 주인을 아는데 너는 평소에 네가 주님이 주신 은혜로 살면서 내가 열심히 밤에 야근까지 하면서 이만큼 살았다고 하면고 네 행함으로 돌리고 새벽기도 해서 은혜 받았고 십일조 해서 복 받았다는 소리를 하느냐 말이에요.
그러면 노아의 기능을 우리가 방해하는 거잖아요. 11장 7절에 보세요. 거기에 보면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라고 나오는데 노아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부정적입니까?
왜 노아에게 이런 부정적 사고방식이 있느냐 하면 이미 긍정적 세계(영역)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맘껏 세상을 부정적으로 봐도 노아는 느긋한 겁니다. 방주가 이렇게 큰데 몇 명 오지도 않는다는 것을 신경쓸 필요도 없어요. ‘오면 오고 말면 말아라. 아무도 안 오면 끝까지 우리 식구끼리 가지 뭐.’
이 사명, 전도 안 하는 사명이 전도의 사명입니다. 오늘 또 희한한 말을 합니다. 특히 똥배짱 내밀고 전도 안 하는 그 고집, 함경도 고집인지 충청도 고집인지 모르겠지만 기어히 전도 하지 않는 고집을 통해서 전도되게 하십니다.
사람이 전도하려고 애쓰는 것을 상대방이 알아요. 그러면 상대방이 이용합니다. “교회 가줄게. 너는 같이 등산 가줘라. 정수기 하나 놔줄래?.”라고 꼭 이용해 먹게 되어 있습니다. “아줌마 교회 갈 테니까 좀 싸게 해줘요.” 교회 가는 것과 싸게 해주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오지 마. 오기 싫거든.” 이런 배짱이 있어야 됩니다. 왜 그런 배짱이 있습니까? “나도 내가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고 질질 끌려왔거든.” 강제입대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한 마디로 정신대라고 하면 돼요. 강제로 끌려왔어요. 우리는 아베 총리를 찬양해야 돼요.
‘주께서 끌어주지 않으면 제가 어떻게 천국까지 오겠습니까? 나는 이 세상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루 24시간 온종일 거기에만 승부를 건 인생인데.. 그거 못하면 실패했다고 여기고 그거 해야만 성공했다고 여기는 그런 사고방식에 우리는 물들었고 내가 그런 물을 입혔고 내가 성공하느라고 남에게 피해를 입혔고 그런 배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자인데 주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라고 우리를 특수한 존재로 이렇게 끌어왔습니다.’
그러면서 거리가 생깁니다. 그리고 이제는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리면서 내 자신이 방주가 되어 버려요. 왜냐하면 내 안에 대신(대타로) 죽으신, 정결한 짐승 되시는 주님이 계시고 나는 그 앞에서 더러운 짐승으로서 동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유명한 최성수의 ‘동행’이에요. ‘누가 나와 함께 할 수 있느냐?’ 집에서 강아지만 키우지 마시고 내가 주님의 강아지가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노아 자신이 새로운 세계에 소속된 것처럼, 저희들도 남들이 보기에는 이상해 보이지만 하늘나라에 이미 소속되어 있음을 남한테 자랑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마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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