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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히브리서 11:2 / 증거와 실상 / 151009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브리서 11:2 / 증거와 실상 / 151009

정인순 2015. 10. 10. 11:09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녹취:공은주

안양20151009a-히11장 2절(증거와 실상)-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11장2절, 1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했는데 11장 1절 다시 한 번 설명하게 되면요, 실상이라 하는 것은 구체적인 대상이 있어야 되는데 믿음이라 하는 것은 개념에 불과하잖아요. 그렇지요? 그런데 실상이라 되어있어요. 실상이라 하는 것은 손에 만져져야 실상이에요. 누가 그리운 것은 실상이 아니지요. 그러나 그 사람이 직접 현장에 나타나면 야! 그 사람 나타났다! 이렇게 할 수 있잖아요. 그 본인이 나타나게 되면 그게 실상이고 본인의 이미지나 그림이나 브로마이드나 그 사람의 음성 들으면 그 음성을 가지고 실상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일부를 보여주기 때문에 실상이 아니지요.

 

그런데 이 성경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해서 우리가 아는 실상과 믿음이 매치가 안 됩니다. 매치가 안 되니까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하는 것은 이 말도 사실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요. 왜냐 하면 증거라 하는 것은 반드시 보이는 것에 대한 증가가 1:1 연결이 되어야 되는데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가 되어버리면 증거를 가졌다는 자체가 연결된 것이 보이는 것일까요?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나는 지금 믿음의 증거를 가졌어요.” 이렇게 한다면 죽~ 선을 연결해 보면 보이는 것이 나오겠어요? 보이지 않는 것이 나오겠어요? 성경대로 하면 보이지 않는 것이 나오지요.

 

자, 한 번 봅시다. 여기에 보이는 것이 증거다 말이죠. 보이지 않는 것을 이렇게 연결하게 되면 이게 성경대로 하면 보이지 않는 것이 된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보이는 증거를 보이는 증거가 증거 되기 위해서 또 뭘 요청하는가 하면 보이는 걸 또 요청하겠지요. 보이는 걸 또 요청하겠지요. 그러면 어느 선에서 보이는데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건너뛸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아, 참 이게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것은 히브리서11장은 믿지 않는 사람은 이해할 생각하지 마라, 단정 짓고 들어가는 말씀이에요. 믿지 않으면서 믿는척하는 사람을 걸러내고 이해 안 되거든 그만 스톱하시지요. 그냥 볼일 보세요. 믿지 않으면서 이 성경 말씀 자꾸 들으려하지 마세요. 집에 가세요. 라는 식으로 계속해서 이성으로 생각이 안 되는 그런 이야기를 해주시는 겁니다.

 

또 한 가지 요 이야기를 쉽게 하기 위해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십계명이 있지요. 십계명을 무엇으로 했습니까? 이걸 가지고 돌 판이라 합니다. 자,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그 당시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요. 실제로 모세가 들고 왔으니까. 모세 보이지요. 모세 양편에 돌판 보이지요. 사람들에게는 뻔히 보인다 말이지요. 자, 그러면 십계명 요걸 그대로 오늘 본문에 해봅시다. 십계명이 보이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십계명 지키면 그만이다 말이죠. 보이는 걸 지키면. 그런데 십계명을 뭐라고 봅니까? 이걸 증거라 하고 증거는 뭐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증거가 되려면 이게 성사되려면 우리는 십계명을 보면서 십계명을 없애버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이 발휘되어야 됩니다. 그게 될까요? 인간은 불가능하지요.

 

또 쉬운 예를 들어봅시다. 하도 어려운 말이기 때문에 안경집이 이렇게 있습니다. 만약에 애기 아빠의 안경집이라면 “얘들아, 나 이거 볼 때마다 죽은 아버지 생각나.” 이러면 어떻습니까? 얼추 비슷한 예가 되었지요. 보이는 안경집을 통해서 뭘 생각한다? 연결시켜보면 보이지 않는 아버지가 생각난다. 요건 이해가 되지요? 그런데 어떤 조건하에 그렇습니까? 그전에 이미 아버지하고 살았던 사람에게 되지 옆집 아줌마는 해당되지 않지요. 같이 살았던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신 뒤에 안경집을 남겼는데 “얘들아, 너희들은 아버지 다 잊었지? 그러나 나는 아버지 못 잊어.” “엄마, 그러지 말고 시집가면 돼.” “아이고, 그럴 수 없어. 이 안경집만 보면 니 아버지가 생각난다. 흑흑..” 한다 말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여기에 적절한 예가 될 수가 없는 이유가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실상은 같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돌 판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이거 누구 아이디어에요?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사람들 아이디어입니까? “야, 우리도 법 하나 있어야 되겠다.” 이렇게 했습니까? 전혀 없지요. 그러면 요 예를 다시 들어봅시다. “야야, 이걸 보니까 내가 어떤 아저씨 생각이 난다.” 그러면 자식들은 “엄마, 그 아저씨 우리가 언제 아는데?” “참, 니 모르지. 이야기 그만 두자.” 이럴 수밖에 없지요.

 

그들이 돌 판 만드는데 관여했겠습니까? 전혀 관여 안했습니다. 관여하지 않은 것을 주님은 뭐부터 했어요? 실상을 보여주고 증거를 준 게 아니고, 인간이 관여하지 않은 일에 증거부터 먼저 제시하니까 인간들이 아무리 십계명을 지켜도 거기에 연결된 실상을 찾아낼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지요. 없습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말해서 믿음이라 하는 것은 전부다 가짜라고 보시면 돼요. 내가 믿는 믿음은 사실은 이게 추억이고 기억의 창고에 있던 것을 끄집어내는 회상하는 식밖에 안됩니다. 옛날에 그 때 좋았다. 전에 우리가 체험한 것 가운데서 그 먼저 체험한 게 있고 체험한 그것이 안경집이라든지 손수건이라든지 뭔가 남겼을 때, 이 손수건과 안경집을 통해서 옛날에 내가 알고 있던 어떤 무엇과 이걸 접합을 시킬 때 그건 회상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면 믿음은 뭐냐, 믿음은 투기요, 어처구니없는 모험이 됩니다. 한 번도 만나본 적도 없고 알 수도 없는데 단지 그 증거만 보고 어떤 분을 짐작한다는 것, 요건 100% 거짓말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면서도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못 믿었잖아요. 나, 저 분 모른다, 했지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베드로는 예수님에 의해서 뭐가 되는가 하면, 증거가 돼요. 베드로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주되심을 증거 하라 했는데 그걸 믿으라 했는데 베드로 자체가 증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베드로 본인은 뭐로 보는가 하면 본인을 믿음의 실상으로 간주한 거예요.

 

내가 믿어서 구원 누가 받겠다? 내가 받겠다는 거예요. 자기 하는 일이 무엇으로 종결됩니까? 자기 선에서 끝나 버린 거예요. 자기만 천국가면 주의 일은 끝나버린 거예요. 내가 하나의 누구, 누구의 증거가 된다는 것은 이건 베드로에게 나올 수 없는 겁니다. 당신은 누굴 증거 합니까? 나를 증거 하지요. 에이, 집사님은 오하마를 증거 하잖아요. 기분 되게 나쁘지요. 나는 황인종인데 그 사람은 흑인이잖아요. 어떻게 흑인을 황인종을 통해 증거 합니까? 지가 뭔데 내가 증거 해. 나는 나로서 종결되고 내 가치로서 마감되는 겁니다. 나는 내 잘되기 위해서 사는 겁니다. 누구를 대신해서 누구를 증거 하기 위해서 산다는 것은 이건 되게 모독이고 자존심상하는 이야기다 말이지요.

 

그런데 사도행전1장 8절에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성령이 임한 공통점이 뭐라 했어요? 어느 누구나 할 것 없이 성령이 임하면 공통점을 보이는데 그 공통점이 뭡니까? 전부다 자기 자신이 마감되는 것을 모두 포기했던 공통점이 있어요. 내가 사는 것이 나의 목적이 아니올시다. 나는 그저 누구, 누구의 증거일 뿐입니다. 그걸 가지고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땅 끝까지 증인이 되리라, 이제 감이 잡히십니까? 우리의 존재 의미가. 나로 마감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나만 잘되면 끝! 이게 아니라니까요. 그러면 베드로의 경우를 봅시다. 예수님 증거 하는데 누가 방해했습니까? 1번 권세자, 2번 우는 닭, 3번 베드로 본인. 누가 주님을 증거 하는데 방해했습니까? 베드로 본인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믿음이라는 것은 뭐다? 방해될 수밖에 없는 이 덩어리를 뭐로 헷가닥 바꾸는가 하면 주님만 증거 하는 쪽으로 바꾸어서 그리스도의 하는 일에 하나의 조각이 되는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하시는 일에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뭐 떡이 없니, 우랄라라 방언이니, 그런 것으로 성령의 보편성을 찾지 마세요. “나는 내가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으로서 성령이 임함을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걸 로서. 인생이 나는 나를 위해서 사는 존재가 아니었군요. 이런 고백을 통해서. 주님한테 얻어먹고 나만 잘되면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었군요. 이게 포함되는 거예요. 이게 끝나면 안돼요.

 

그렇다면 여기서 그 다음 문제에 들어가면 히브리서에 나오는 11절 여러분이 다 아시지요.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 만들었고 그전에 아벨은 제물 바쳐서 믿음의 증거 됐잖아요. 그 다음에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는 자체, 죽지 않고 사는 것도 자기 구원받으라고 주는 게 아니고 예수님 증거 하라고 그렇게 한 거예요. 이제 슬슬 풀리지요. 신앙의 세계가. 그 다음에 나오는 게 노아는 방주, 그 뒤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나그네, 그 다음에 이삭은 아버지로부터 죽임을 당했는데 어린양 때문에 살아난 그 사실, 야곱 같은 경우에는 침상에서 지팡이 의지해서 어긋맞게 축도하는 그 자체가 야곱의 존재의 의미, 그 뒤에 나오는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걸 아낌없이 그 지위를 포기하고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원했다는 그 자체가 본인의 구원 문제가 아니고 그 자체가 누구, 누구를 증거 하는 증거물로서 기능이고 그 다음에 나온 게 뭐냐 하면 기드온, 기생 라합, 기생 라합은 정탐꾼 영접하는 것, 그 다음에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쭉 나오지요. 여기에 보면 이런 말 하는 것은 자체가 내 입만 아프다 그런 뜻이거든요. 왜냐,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까.

 

그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 중에 니가 풍덩 같이 포함이 됐느냐, 안 됐느냐를 지금 히브리서 11장 가지고 우리에게 들이대는 거예요. 우리한테. 쉽게 말해서 너는 너의 인생이 너로서 마감됐느냐, 아니면 누구를 증거 하는, 너로서 마감이 되지 않는 증거자인가를 우리에게 묻는 겁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되어 있잖아요. 그러면 요 질문을 주님께서는 “니는 니가 실상이 아니지?” 요렇게 같은 질문이에요. “제가 뭐 실상이겠습니까? 그냥 증거일 뿐이지요.” “그래, 그래야지.” 그 다음날 되면 또 물어요. “니가 니 눈에 보이는 니가 전부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증거인데, 보이지 않는 것을 내가 보지요. 보이는 나는 내가 거울을 봤지만, 거울보고 나는 잊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오늘도 거울을 보는 행위를 제게 행위를 유발시켰습니다.”그리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거울 뒤의 누군가를 만나라는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거울 뒤의 누군가를 만나라. 이게 뭐냐, 거울 뒤편에 가지 말고 거울 안에 나만 비취면 안 된다는 거예요. 보통 거울은 자기만 비취잖아요.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거울을 보게 되면 나 말고 다 함께 있는 분이 같이 나올 때 그 거울에 있는 나는 작아 보이고 왠지 내 옆에 계시는 그 분은 크게 보일 때 비록 거울 속에는 두 분 계시지만, 거울 밖에서 보게 되면 나는 한 사람이지만, 지금 주님과 함께 계신 겁니다. 함께 있었기에 양장피도 먹을 수 있었고, 탕수육도 먹을 수 있었고, 짬뽕도 먹을 수 있었고 그리 되는 겁니다.

 

참, 이론은 쉽지요. 말은 굉장히 쉬운데 평소에 생활에 소소히 살면서 이것을 여러분이 실감하고 계십니까? 실감 문제에 대해서 지금 언급하겠습니다. 실감하고 계십니까? 했으니까 실감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되잖아요. 그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십계명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십계명을 인간이 지킨다. 십계명은 지키라고 준 것이다. 자, 무엇이 잘못됐지요? 강단에서 어느 목사가 말합니다. 십계명은 지키라고 준 겁니다. 지키세요. 자, 뭐가 문제됐지요? 쉽게 합시다. 뭐가 빠졌지요? 중보자 빠졌지요. 중보자가 빠진 거예요. 그러면 십계명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만들었습니까? 우리가 안 만들었지요. 그러면 십계명을 만드신 분이 누가 있지요? 그 분이 따로 계시지요. 이 중보자가 구약의 출애굽기에서는 이걸 가지고 ‘주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주의 이름 같은 말로 ‘여호와’ 같은 말로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되어있어요. 출애굽 할 때.

 

주의이름, 다른 말로 하면 주가 되고, 주의이름 여호와 다 같은 말이에요. 이 주가 신약에 오면 누가 되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분명히 여러분이 출애굽을 약간의 진작에 봤다면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만으로 구성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예요. 그 안에 누가 동행해 주세요. 최 성수 아닙니다. 누가 동행해주세요. 누가 동행해 줍니까? 하나님이라 하면 안돼요. 분명히 구체적으로 했어요. 주의 이름, 여호와 이렇게 했어요. 왜 하나님은 안 되는가 하면, 이 여호와, 주의 이름이 공통점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언약대로 해요. 여러분이 들으면 아 그 이야기구나! 하고 아실 거예요. 하지만 또 그 이야기 안하면 생각이 안나요. 그저 하나님, 나 그것밖에 모르잖아요. 그러면 뭘 자꾸 빠뜨리는가 하면 중보자가 자꾸 빠져요. 중보자가.

 

어떤 목사가 십계명은 지키라고 준 겁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아까 질문 다시 해봅시다. 십계명 지키라고 준 것이니까 지키세요. 뭐가 문제입니까? 뭘 빠뜨렸지요? 자꾸 복습하세요. 중보자가 빠졌지요. 그러면 중보자는 뭐하는 분이십니까? 십계명을 창안하신 분이고 본인이 주신 분이지요. 그러면 본인이 주시면 십계명에 담긴 심정과 의미는 누구만 알아요? 중보자만 알지 우리는 모르잖아요. 우리는 뭘 알아야 지키지. 원리가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만들었으면 내가 설명이 되는데 십계명은 내가 만들지를 않았잖아요. 내가 안 만들었으니까. 편지도 편지 쓴 사람이 있는데 편지 쓴 사람이 어디 화장실에 갔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편지를 읽으면서 엉뚱한 사람이 “야, 니가 쓴 거 같으니 편지 내용이 뭐야?” 하면 “나는 몰라.” 이러면 되는데 화장실에 갔다고 눈에 안 보인다고, 그게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인데, 안 보인다고 “그래, 내가 설명해 줄게.” 이렇게 자기가 편지를 설명해 주면 뒤통수치는 거예요. “이게 어딜 건방을 떨어. 십계명 니가 만들었어? 니가 왜 지켜? 니가.” 물어보세요. 목사한테. 당신이 만들었어요? 하고 물어보세요. 하나님이 만들었지. 당신이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지 물어보세요. 몰라요.

 

인간이 어떤 십계명이란 법이 있으면 아까 헌법이라 이야기했잖아요. 성경들이 대니까 저쪽에서 헌법 들이대지요. 아버님께서. 이쪽에서 성경이야기 하는데 저쪽에서는 헌법 이야기하는 거예요. 장로가 헌법 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헌법은 누가 만들었어요? 사람이 만들었잖아요. 그러니까 헌법 들이대는 거예요. 법을 지킬 때는 어떤 마음이 되는가 하면 양심으로 들이댑니다. 양심이라는 게 뭐냐 하면 이런 거예요.

 

양심이란 응축된 기억다발을 양심이라 합니다. 이 응축된 기억은 어디서 만드는가 하면 이게 공동체에서 만들지요. 가정에서 만들지요. 왜 이게 응축이 되느냐 하면, 가인이 벌 받을 때, 어떻게 벌 받았지요? 사형 당했다. 하나님한테 얻어맞았다. 병으로 아프다. 하나님한테 받은 벌이 뭡니까? 사형 당했다. 얻어맞았다. 아프다. 아니지요. 가인의 있는 곳에서 뭐했습니까? 추방당했지요. 인간은 자기가 소속되어있는 곳에서 추방당하는 것이 너무나 살 수 없어요. 그래서 추방당하지 않으려면, 그 공동체 유지되려면 거기서 쏘아대는 법령들이 있어요. 법이 있어요. 규칙들이 있고 원칙들이 있어요. “니가 우리 집안사람이 되려면 내 말을 들어.” 이래요. 그런데 자식이 말을 안 듣는다. 그러면 아버지가 술 먹고 와서 하는 말이 “저런 인간은 내 쫓아버려라.” 그러면 누가 말립니까? “자식한테 그런 심한 말을 하면 돼요?” “애야, 아버지 오늘 술 먹고 온 거 알지? 니가 이해해라.” 아버지가 니같은 것은 나가 죽어. 공동체에서 추방하는 그것, 그럴 때 아버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하면서 내면화시키는 다져지는 외부의 법령이 내부로 법으로 응축이 돼요. 그 응축을 풀어보면 그 어떤 법을 지키지 않았을 때 벌칙이라든지 또 어떤 법을 지켰을 때에 예상 못한 과분한 상과 칭찬과 어떤 선물을 받았던 기억들이 누적이 돼요. 그게 하나, 하나 쌓여서 뭐가 되느냐 하면 양심이 돼요. 아, 내가 추석 때는 어른들을 찾아뵈어야 되는구나! 이것은 그 집안의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응축된 기억이에요. 그 기억이 다른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가정교육 잘 받았다. 그래 요새 너 같은 젊은 애들 없지. 가정교육 잘 받았구나! 참 교양 있는 집안이구나!

 

회사가게 되면 상사 말을 잘 듣고 딱 보면 커피부터 끓여야 돼. 그런데 젊은 애들 회사가가지고 지 회사인 줄 알고 까부니까, 바로 위의 대리가 와가지고 야, 커피부터 해. 복사부터 해. 어디 니가 기안을 올리고 이게 건방지게. 이게 어디서 초자가. 아무것도 모르는 게. 그게 뭐가 되겠어요? 응축된 기억으로 남지요. 남아가지고 아~ 졸병은 복사하고 커피 나르는 거구나! 이렇게 해가지고 회사생활3년하고 난 뒤에 후임자오지요. 후임자도 똑같아. 회사는 이래야 삽니다. 기안 올리면 기안이고 뭐고 이것부터 해. 라고 했던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응축된 그것이 내면화되게 되면 그게 양심이 되는 겁니다.

 

그 양심은 어떻습니까? 양심은 공동체가 바뀌면 양심도 어떻게 돼요? 옛날에 써먹던 공동체의 양심도 업그레이드 업데이트를 시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양심이 들어갔을 때 십계명에 양심이 들어가 버리면 뭐가 탈락됩니까? 아까 강의에서 했는데 여러분들이 얼마나 아는가 봅시다. 십계명에 양심을 들이대면 뭐가 탈락된다고 했던가요? 중보자입니다. 중보자가 탈락돼요. 중보자가. 마치 자기가 십계명에 대해서 뭔가 아는 양 우쭐대면서 내처럼 해봐라 요렇게! 했던 자들이 바리새인이었어요. 정통적으로 십계명을 지킬 때는 요렇게 지켜야 십계명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을 대대로 그 공동체, 교회라는 공동체 유대교라는 공동체에서 계속 대대로 어릴 때부터 주입시키면 그 공동체에 있는 사람들은 그 양심들이 공통점을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복종해야 된다. 우리나라는 하나님에게 복종해야 복을 받지 메시야를 기다려야 복을 받지 안 그러면 복을 못 받는다. 그거 선지자의 계시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선지자의 하는 일은 뭡니까? 반전이지요. 반전인데 그걸 길게 이야기하면 납득하지 못한 말. 아~ 이제 선지자가 고난 받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기존에 공동체에서 수백 년 내려왔던, 우리 한국에 기독교가 내려온지 150년이 누려왔던 그 많은 법령들, 교회법이라는 것, 전통, 관행, 관습 그것은 교회라는 공동체 내부에만 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있던 고안된 하나의 응축된 기억들로 그것을 가지고 교회들로 출석하는 거예요. 바리새인이 그랬으니까. 그거 아니면 안 되는 줄 알고 큰 일 나는 줄 알고 벌 받는 걸로 그게 실효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대기 위해서 주의 종 건드렸다가는 벌 받은 그런 사례들이 하나의 응축된 기억 속에 있는 거예요. 이게 벌이에요. 그런데 주의 종을 잘해주면 복 받는 그것은 또 하나의 응축된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양심은 선과 악을 기준을 따로 자기 할 수 있는 것을 따로 만드는 거예요.

 

군대하고 성경에 나오는 교회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군대는 명령이 있고 요구하는 게 있어요. 이거, 이거 해! 요구하는 게 있습니다. 그런데 기존 교회 말고 성경에 나오는 교회는 일체 요구를 하지를 않아요. 왜냐 하면 몽땅 다 우리가 살아가는 죄마저도 주의 은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은혜인 줄 아느냐만 확인 작업만 되풀이될 뿐이에요. 매일같이. “주여, 내가 오늘까지 살아온 건 은혜입니다.” 요거 일회용입니다. 자, 오늘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아휴~ 상쾌해. 또는 아휴 찌푸등해. 일어났습니다. 어제했던 고백 다 잊어버립니다. 오늘 슬슬 또 나의 힘찬 기상을 해서 힘찬 생활을 해야지. 주여, 오늘도 기쁘게 해드리겠습니다, 내 쪽에서 또 제시해요. 제시하면 안돼요. 이미 제시돼 있어요. 우리 자체가 이미 주님의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물이라니까요.

 

성령 받은 사람이 오늘날 선지자라 합니다. 베드로전서에 나와요. 성령 받으면 심지어 왕 같은 제사장이라 했거든요. 베드로전서2장9절에. 이 선지자는 어떤 길이라고 했습니까. 반전에 의해서 고난 받는 길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그 반전이 뭡니까? 저쪽에서는 뭐다? 전통이고 이쪽은 뭡니까? 날마다 이미 은혜를 주셨습니다. 주신 은혜 받았지? 니 받았재? 라고 날마다 묻는 거예요. 내가 뭘 받아요? 아침에 일어나서 지금 눈을 비비는데 뭘 받아요? 니 몸을 받았잖아. 이 아침을 받았잖아. 최고 기온 15.6도를 받았잖아. 니 옆에 꽃이 피는 걸 받았잖아. 그리고 코고는 니 남편을 받았고. 아직까지 자고 있는 니 자식들을 받았잖아. 어제 받았잖아요. 어제 받은 게 아니고 오늘 받았잖아. 니 어제 증거 댈래? 어제 증거대면 기억의 응축이 되는데? 내가 실상이 아니에요. 나로부터 시작이 아니라니까요. 시작은 따로 있고 나는 시작한 것에 대한 “지금 실상이 계십니다.” 라고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여기 존재하는 거예요.

 

나는 나의 존재함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존재케 하신 분이 따로 계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오늘 하루를 주신 겁니다. 이 뷰티풀데이를. 이 아름다운 일요일을 월요일을 화요일을. 개 어디 갔습니까? 주무십니까? 응축된 기억, 양심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화장실 문을 닫아놔서 오줌을 쌈) 참, 개하고 똑같아요. 결국은. 훈련대로 그런데 그 훈련 누가 시켰습니까?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마귀가 사탄이 훈련시킨 거예요. 니가 스스로 서라. 무쏘의 뿔로 가라. 니가 하지 않으면 너의 역사 이루어지지 않는다. 니가 이만큼 살아온 것도 다 니 덕이다. 니가 이 어려운 가정 이런 남편 만나서 이만큼 사는 것도 니가 얼마나 고생해서 그렇다. 이게 응축된 기억 속에 있어요.

 

그러나 사실은 성경은 그리 되면 나는 실상이고 그 나라는 실상을 증거하는 증거로 또 살아가게 돼요. 그러니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뭐가 탈락된다? 중보자가 빠지지요. 중보자 빠진 채 교회 갑니다. “주여, 오늘도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 드릴까요?” 하여튼 건방을 떨어. “무슨 솜씨를 발휘해 드릴까요?” “무슨 재롱잔치를 벌여드릴까요?” 여기에 나오는 선지자들은 믿음의 조상들은 우리와 같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을 거예요. 똑같은 인간이니까. 얼마나 얻어맞았으면 지 행한 건 다 삭제되고 증거 될 것만 딱 딱 나오잖아요. 대표적인 것.

 

자, 그렇다면 미리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구약인데 신약시대에 성도들의 증거는 뭡니까? 딱 하나밖에 없어요. 그게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주를 믿고 죽었더라. 주를 믿고 죽도록 믿었느니라. 충성했느니라. 이게 유일한 증거입니다. 예배당세우고 전도하고 이건 전부다 교회에서 사기 치는 거고요.

 

증거는 뭐냐 하면 죽을 때에도 예수를 믿었더라. 이게 증거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십자가에 달린 강도, 세리, 창기, 삭개오가 4배나 갚아서 구원된 게 아니거든요. 이미 구원은 되었어요. 구원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주님의 돈 받고 쓰는 거야 구원에 대한 확정된 상태에서 일어난 거죠.

 

자, 세상과 교회와의 차이점은 세상은 뭘 요구를 하지만, 진짜 교회는 주님은 우리한테 일체 요구를 하지를 않습니다. 요구를 하지 않는데 우리가 이거, 이거해 드렸습니다. 하고 제시해 보면 그것은 결국은 나 자신을 증거 하는 그런 것 밖에 안 되거든요.

 

그러면 요 십계명하고 마무리해봅시다. 십계명이 있다. 우리가 있다. 우리는 살아온 과거의 습관대로 양심대로 지키려고 한다. 그러면 뭐가 빠졌습니까? 중보자가 빠졌지요. 그래서 십계명은 너희들이 그런 행세를 한다는 자체가 마귀적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진 것은 죄를 더욱 더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들이 만들어내지 않는 다른 십계명을 가지고 주신 겁니다. 오해하게 하기 위해서. 신약대로 하면 걸림돌 되기 위해서. 분명히 시험치고 나올 때는 100점인데, 나중에 점수 받아보면 80점 나오고 70점 나올 때, 그런 경우 다들 있지요. 공부들 열심히 했으니까. 분명히 교무실 찾아가지고 몇 개 틀렸습니까? 물어본 적 있다가도 혼난 적 있지요. 니 선생님 못 믿나, 해서 혼난 적 있지요. 분명히 시험 칠 때는 100점인데. 제 책 살 때 오자볼 때, 오자 같은 거 분명히 하나도 없어요. 책 내놓으면 벌써 21페이지에 오자 하나 있습니다, 하고 나오면 가슴이 덜컹 내려앉지요. 보통 서너 개는 있어요. 그래서 아예 마음을 잡아요. 한 열 개만 나와도 괜찮다. 마음을 그리 잡아요.

 

그러면 주님께서 십계명을 어떻게 지키는가, 주님께 십계명을 주신 분만이 지켜요. 왜 십계명의 마음을 아시는 분은 주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러면 주님께서 십계명을 주시면서 그 마음도 같이 주면 되지 왜 십계명보고 일부러 테스트하듯이 우리보고 지키라고 왜 했느냐, 해야 우리가 미처 모르는 우리안의 괴물을 이렇게 발취할 수가 있어요. 인간은 인간 자신에 대해서 몰라요. 자기 안에 뭐가 있는 줄을 몰라요.

 

자기는 지금 건전하다. 괜찮다. 이렇게 보잖아요. 어제 가락교회에서 하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결백하다. 하잖아요. 나는 결백하다. 왜 결백하냐, 내가 이런 짓을 하게 된 것은 환경 탓이고 부모 잘못 만난 탓이지 내가 원래 원천은 나쁜 놈은 아닙니다. 나도 양심으로 사는 사람인데 하도 굶다보니까 어떤 아줌마는 마트에 가가지고 기저귀를 훔쳤어요. 왜 훔쳤느냐 하니까 기저귀를 살 돈이 없었다는 거예요. 이건 장발장도 아니고. 그럼 사회에서는 어떻게 합니까? 이건 큰돈도 아니고 아이고 얼마나 어려웠으면 하겠어요. 그러니까 그 여자는 훔칠 때 나는 결백하다, 나는 결백하다를 얼마나 수십 번 자기한테 스스로 자기 정당화하겠어요. 그런데 모든 인간이 다 그렇다는 거예요. 제 이야기는. 뭔가 해놓고는 다 이유가 있어요. 인간이 한 평생이 뭐냐, 변명과 변명의 연결고리입니다.

 

창세기3장에 예를 들었습니다. 아담아 부르니까 왜 따먹었느냐고 하니까 하나님이 주신 여자가 나를 따먹게 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책임은 나한테 없습니다. 나는 결백합니다. 책임이 있다면 누구한테 있는가, 나에게 여자를 붙여준 바로 당신입니다. 그게 바로 메시아를 죽이게 만든 그 속성이잖아요. 변명이에요. 변명. 그것이 그대로 우리에게 살아있습니다. 그런 인간을 주를 증거 하게 하는 인간으로 바꾼다는 것은 이건 기적 중에 기적이지요. 어떻게 자기밖에 모르는데 나는 아니에요. 나는 나를 증거하는 것이 나의 존재이유가 아니에요. 저는 다른 분을 비추는 그 분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스스럼없이 나온다는 것은 이건 진짜 귀신 씌운 거지, 진짜 성령 받지 않으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고백이에요.

 

그런데 아까 시작 전에 언급했습니다만 왜 믿음의 증인들이 왜 다 달라요? 어떤 사람은 죽는 것이 되고, 어떤 사람은 방주 만든 것이 되고, 어떤 사람은 예물 바친 것이 되고, 어떤 사람은 나그네 되는 것이 되고, 또 어떤 사람은 안수 기도하는 게 되고, 왜 같은 믿음이면서도 믿음의 증거가 다 다릅니까? 아, 이거 어려운 문제지요. 왜 다 다른가요? 성경에 분명히 다르게 되어있거든요. 다르게 되어있기 때문에 믿음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믿음의 모델은 있으면 돼요? 안돼요? 없어야 돼요. 나 저 사람처럼 될래, 하면 절대로 안돼요. 절대로 안 됩니다. 나는 주 기철처럼 되면 안돼요. 나는 손 양옥처럼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마세요. 우리 목사님처럼 그렇게 되어버리면 안돼요.

 

주님께서는 필요해서 너를 너같이 만들어놨는데 이게 욕심을 내어가지고 내 자체가 믿음의 증거인 것을 본인이 싫어하는 거예요. 상당히 부끄럽게 여기는 거예요. 뭔가 멋있게 보이고 훌륭하게 보이고 전도 200명 한 그런 크게 되기를 기대한다면 이것은 자신의 응축된 기억이 내포된 거예요. 뭐가 본 게 있어요. 기존의 교회에서 뭔가 유명세를 떨던 간증집회를 너무 다녔어. 오죽 믿음이 없으면 주여, 저를 암에 걸려가지고 이틀 만에 낫는 그런 기적을 베풀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암에 걸려서 이틀 만에 나으면 남들이 나보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기도 발 세운다고 얼마나 부러워하겠습니까? 그게 내가 남들보다 사랑받는 조건이 된다면 그게 또 하나의 욕망의 내용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히브리서11장 일단 정리합시다. 믿음의 증거는 동일하지 않다. 그 다음 문제는 왜 동일하지 않게 하셨느냐 하는 겁니다. 왜 믿음의 증거가 하나같이 다 다르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각자가 중보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분명히 신앙인은 맞아요. 그러나 통합할 수 있는 자격자는 아닙니다. 다윗이 훌륭하지요. 그러면 다윗이 메시아입니까? 예레미야가 훌륭하지요. 예레미야가 메시아입니까? 마태복음16장에서 예수님이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어떤 이들은 선지자중의 사람이고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라 하더이다. 많이 봐준 거지요. 많이. 예레미야가 얼마나 훌륭합니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뭐 그만하면 됐다. 아이고 그 정도 하면 기쁘네.” 이리 했습니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는.

 

그림으로 보겠습니다. 예레미야, 이사야, 다윗 이것들 속에 너희가 포함이 돼있지요. 너희들은. 자기들끼리 보기에는 다양하지요. 다양성. 니 다르고 나 다르고 다양하지요. 다양한 가운데서 뛰어난 영웅적인 모습, 영웅적인 것을 사람들은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보다 더 능력을 행하는 것, 우리하고 다르지만 뛰어난 것 이러잖아요.

 

그러면 메시야는 뭐냐 하면 뛰어난 분이 아니에요. 그냥 다른 분이에요. 그냥 다른 분인데, 예수님은 다른 분이라고 믿으면 이건 다른 분이 그 다른 분이 아니에요. 그냥 그 다른 분이 그 다른 분이 아니에요. 왜냐 하면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로 끼어들었잖아요. 그럼 남들 보기에는 예수님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에이! 우리하고 똑같네.”라고 하기 때문에 다른 분이에요. 너무나 차이나지 않기 때문에 다른 분이에요.

 

그런데 다른 영웅들은 차이나는 게 있기 때문에 다른 분처럼 보여요. 다윗, 예레미야, 이사야 훌륭해 보여요.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평범하기 때문에 다른 분인 것을 다른 사람은 몰라요. 그냥 목수의 아들이에요. 왜 다른 분임을 몰랐는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공부한 가운데서 얼추 어려운 측에 속하는데요, 같은 것과 같은 그 자체가 이게 다릅니다. 같은 것, 같은 그 자체하고 달라요. 예를 들면 컵이 있으면 “이 컵은 니가 본 컵이나 내가 본 컵이나 같다.” 할 때는 컵은 같은 사물, 같은 것이 돼요. 이건 이해하겠지요. 내가 보나 니가 보나 맨 같은 것이 돼요. 그런데 “이 컵은 같네.” 라고 할 때 내가 느끼는 같음에 그 뉘앙스하고 다른 사람이 같네, 하는 뉘앙스가 달라요.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성장과정이 다르고 학력과 지식과 성격이 다 다르고 양심이 다 달라요.

 

주님께서는 모든 증거를 달리함으로서 노아는 방주, 달리함으로서 다른 것을 통해서 같은 것을 뽑아낼 수 있는 그러한 통합적인 인물은 그 신앙인 가운데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 신앙인도 실상은 되지 못합니다. 신앙의 실상은 되지 못하고 신앙의 증거일 뿐입니다. 쉽게 말해서 나를 믿지 마시고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런 뜻이에요. 나를 믿지 마세요. 예수 믿으세요. 다른 말로 하면 너 자신과 관련된 주님을 믿으세요. 나와 관련된 주님을 믿지 마시고 현재 너를 너 있게 한 주님을 본인이 믿으세요. 본인이 그 분에 증거인 것을 믿으세요. 이겁니다.

 

그렇게 되면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어요. 어떤 경우인가 하면 “그럼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용감하게 질문하고 싶어 하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서 교회가 한 형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라는 그 바구니에 담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질문이 나올 만하지요. 그것은 평소에 우리의 오해에서 비롯된 오해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리는 남하고 내 형제로 먹고 우리라고 먹을 때는 어떤 점이 있었는가 하면 내가 원하는 요소가 그 쪽에 있다고 내가 생각할 때, 친구야! 이리되고 형제야! 이리 되잖아요.

 

그러니 이 중심이 누구 중심이냐 하면, 내가 좋아하고 내가 기뻐하고 내가 원하는 것이 니한테 있다는 조건하에 일방적으로 그는 내 친구라고 일방적으로 단정 짓고만 거예요. 그래서 사기를 많이 당합니다. 지 혼자 좋아. 상대방은 좋아하지 않는데. 남녀 사이에서 제일 크게 오해되는 게 뭐냐 하면, “자기 나 사랑해?” “그래, 사랑해.” 둘 다 지금 핀트가 안 맞는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고요. 둘 다 지금 다른 뉘앙스의 단어를 쏟아내고 있어요. “나는 너를 위해서 아낌없이 드리겠어.” “나도 그래.” 미투 이런 거. 백날해도 나중에 만나보면 성격차로 헤어지고. 분명히 사랑했다면서.

 

그래서 이 말은 뭐냐 하면 믿음은 내가 만들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겁니다. 내가 만들어보면 내 좋아하는 가짜 예수가 진짜 예수인 줄 알고 착각을 일으켜가지고 평생토록 교회 다니면서 봉사하면서 가짜 예수만 신봉하는 겁니다.

 

아까 그 문제 다시 해봅시다. 어떻게 다른데 한 형제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자, 이론상 이렇습니다. 식구가 네 식구 있으면 애 둘과 아내하고 네 식구 있다면 네 식구 다 성령 받아서 예수 믿으면 전부다 한 형제입니다. 형제가 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아내가 남편 사랑하기를 주께 하듯 하게 되어있어요. 에베소서5장에.

 

그리고 그럴 경우에 다 교회가 될 경우에는 남편이 아내 사랑하기를 주님이 교회를 위해서 몸을 바친 것처럼 아내를 바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아내를 바치게 되면 이 말씀은 디모데후서2장4절 말씀과 이게 충돌되는 것처럼 느껴져요.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같이 되어있거든요.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자, 군에 간 기혼자, 결혼해놓고 남편이 군에 갔을 때, 군에 간 그 남편은 자기 집구석 생각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이 본문에 의하면 하지 말아야 되지요. 그런데 뭐라고 되어있어요? 에베소서 5장에 보면 남편이 아내 사랑하기를 주께서 교회를 위해서 자기 몸을 바친 것처럼 사랑해야 되지요. 그 두 가지 공식을 하나로 만들어봅시다.

 

만들어보게 되면 어떻습니까? 남편이 자기 집을 버리고 자기 집의 가사도우미로 전락하던지 아내를 위해서 하든지 아니면 아내와 이혼하든지 그 둘 중에 하나가 되어야 두 개의 문장을 다 만족하는 상황이 되겠지요. 여러분의 좋은 아이디어를 기다립니다. 여러분, 어떻게 할까요? 두 가지 말씀을 다 만족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성도로서 가정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과 여자 입장에서는 남편에게 성경을 봐라.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 하는데 당신은 당신 좋아하는 일만 하고 아내는 내 몰라라하고 이래가지고 당신이 성령 받은 남편 맞아? 이렇게 할 때, 여러분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됩니까?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뭐냐 하면 주님에 대한 내가 가해자, 죄인의 입장에 선다는 거예요. 자, 아까 주님을 증언한다 했지요. 마지막 증거가 뭐냐 하면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이 증거 하는 십자가잖아요. 그러면 모든 앞에 있는 노아나 아벨은 전부다 해석할 때, 반드시 거기서 뭘 끄집어내요? 십자가의 의미를 끄집어내야 실상과 증거가 매치가 된다 말이지요.

 

그러면 어떠한 결혼한 여인이 십자가를 알아버렸어요. 그러면 남편이 한 달에 한번을 전화하던 두 달에 한번하든 어떤 뭘 주장을 못하는가 하면 당신은 남편 값을 하는 권리를 내세울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안 내세우는 거예요. 내세우지 않는 거예요. 왜, 남편은 지 맘대로 못한다는 것. 전화하고 싶어도 주님께서 못하게 하게 되면 못한다는 거지요. 남편이 얼마나 나를 사랑해서 전화하고 싶겠어. 하지만 주님께서 못하게 하시면 그러면 못하는 거야. 하고 착한 아내가 이해를 하는 거예요. 남편은 좋겠다고 이용은 하겠지만. 아내는 그런 식으로 이해를 해버리는 거예요.

 

임께서 가신~ 이런 노래 부르면서 당신은 당신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하지만 이 자식은 내가 키울게. 당신은 그저 조국을 하늘나라에서 마음껏 싸워. 아프카니스탄에서 그리고 아프리카 가가지고 선교해. 내 걱정하지 마. 내가 시장에서 콩나물 팔더라도 내 자식은 남 보기에 주님 보시기에 훌륭하게 키울 테니까 당신은 그저 주의 일에 매진해. 라고 아내가 이렇게 이야기하겠지요. 그러면 그 소리 듣고 남편은 잘됐다, 하고 현지 처 두고 이러든 말든 간에 아내는 남편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걸 주의 일로 받아들이는 정도로 아내가 마음을 낮춰버리면 아무 문제없는 거죠. 사실은 이야기가 요걸로 끝나면 참, 듣는 여자 지루하겠는데 그것은 10분 쉬고 이야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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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20151009b-히11장 2절(증거와 실상)-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11장,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서 증거를 얻었느니라, 해서 피동적이지요. 모든 믿음의 선배들은 주께 받은 게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말은 뭐냐, “너희들도 받았지? 그치?”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뭘 받았습니까? 물으면 주님은 이래요. “인생 자체를 받았지.” 내 몸인데 하나님께 따로 뭘 받는 게 아니고 내 몸이라고 여겼던 그것이 내 몸이 아니고 주께서 믿음의 실상이라고 주신 증거 덩어리로 통째로 우리가 받은 겁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신체는 우리가 갖고 있을 수 있겠지만, 인생이라 하는 것은 흘러가는 것이지 소유하는 게 아니잖아요. 주님께서는 그걸 소유로 보는 겁니다. 전체를 주께서 다 주신 걸로 봐요. 짜여 진 각본대로 움직인다. 이리보시면 아주 이해하기 쉽습니다.

 

자, 그러면 첫 번째 예가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3절 요 말씀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중보자라는 것은 어제 가락교회에서 강의한 것처럼 두 개의 무늬가 있지요. 어제 가락교회에서 언급했지요. 도배지에서 주님의 무늬인데, 이 인간세상의 과학시대는 하늘에 있는 별과 달을 전부다 누구를 위한 걸로 봤습니까? 나를 위한 달과 별로 봤기 때문에 이것은 인간의 무늬라고 했지요. 인간의 무늬, 또는 내 인생에 있어서 나의 무늬라 말이지요.

 

그래서 중보자는 양쪽의 무늬를 다 가지고 있어요. 양쪽의 요소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무늬라고 여겼던 이것이 철폐되고 나라는 것이 주님의 무늬를 갖고 있는 주님의 무늬에 속한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중보자의 중간이 개입해서야 이게 가능한 거예요. 그런데 3절에 뭐가 있느냐 하면,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은 게 되지요. 그러니까 주의 말씀으로 지은 겁니다. 그런데 뭐라고 되어있는가 하면,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고 했지요. 그러면 주님의 무늬가 인간의 무늬를 덮쳐버리면 인간들은 모든 걸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겠지요. 무엇 무엇은 아니다, 라고 함으로서 인간이 익히 아는 것으로 주님한테 나아가는 것은 글렀다. 그런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믿음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끌어주시는 것이지 내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헤엄쳐서 이렇게 물살을 가르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다, 라고 여기는 것은 뭐냐 하면 이것은 바로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이건 믿음이 아니고 철학에 속하는 겁니다. 요즘 말로 하면 같은 말로 과학이에요. 화성에 소금물이 있다. 그래서 어쩌라는 말이에요. 인간들이 이주해서 살면 되겠다, 하잖아요. 그러면 화성이라는 존재는 누구 때문에 있는 겁니까? 우리가 이주해서 살기 위해서 존재하는 그것으로 학생들에게 가르치겠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렇게 생각했습니까? “아브라함님, 화성이 왜 있습니까?” 물으면 “화성은 화성 나름대로의 주님의 증거가 된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우리는 그걸 몰라요. 왜, 그건 화성과 주님과의 문제지 우리가 개입해서는 안돼요. 각자 주어진 증거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 공통점을 뽑아내는 것은 주님의 것이지 우리가 그걸 뽑아낼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아까 이야기한 게 이해가 안됐는가 싶어 다시 이야기합니다.

 

우리 둘이 형제다. 우리는 신앙 가운데 하나의 자매고 형제입니다. 할 때에 그렇게 단정 짓는 그것이 뭔가 뭉개지고 난 뒤에 그런 생각이 와야 돼요. 나를 사기 쳤는데 저 사람이 형제니까 사랑해줘야지. 이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게 가능해져요. 아까 말씀에서 영적 안에서 그게 가능해 지는 것은 주님이 중보자가 개입해서 그런 거예요. 중보자가. 나는 저 사람이 너무 이뻐. 나는 저 사람하고 같이 형제하고 싶어. 우리 형제라 합시다. 말은 노골적으로 안하지만, 은근히 그런 마음이 들지요. 왠지 정이 가는 사람이 있잖아요. 왠지 오늘은 정이 가고 싶어라~ 있잖아요. 그런데 그건 항상 그게 가짜일 가능성이 많아요.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아브라함이 자식 바칠 때 사랑하는 자식 바쳤지 미워하는 자식 바쳤습니까? 나가 죽어라. 내 자식 아니야! 이런 자식도 아까운 법인데 아이고! 아이고! 내 새끼! 요런 자식을 아버지 손에서 죽인다. 인간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불가능 속에서 우리의 가능과 주님의 불가능이 마주쳐서 누가 이기느냐, 주님의 불가능이 우리의 가능을 분쇄하고 극복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생각한 믿음은 꺾어지고 주님이 주신 믿음이 새롭게 발견되는 그런 계기를 우리는 믿음의 선조와 같이 당하게 되는 겁니다.

 

자, 이제 말로 했고 실제 내용이 나오니까 4절부터 봅시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이 본문에서 제일 어려운 것을 찾으세요, 한다면 제일 어려운 것은 뭐냐 하면 의로운 자, 하나님의 의로운 자가 되는 겁니다. 의인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주님만이 언약대로 언약을 알고 언약대로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의인이 왜 안 되는가 하면 우리는 의인이 안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뭘 모르느냐 하면 언약을 몰라요.

 

십계명은 들었지만, 십계명에 담긴 의미를 우리는 알 수가 없어요. 무엇을 가지고 살인하지 말라는 것인지 무엇을 가지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인지를 우리는 일방적으로 정하지 보편적인 니, 나 할 것 없이 동일한 정답을 우리는 캐낼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왜, 우리는 위에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같은 수평에 있기 때문에.

 

그래서 성경해석은 이렇게 보시면 간단해요. 수평이 수직이 되는 겁니다. 수평적 의미가 수직적 의미로 바꿀 때 성경해석이 가능합니다. 너, 나, 너, 나 보다가 주님이여, 주님이여, 수직적으로 볼 때 성경해석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보통사람들은 어떻게 삽니까? 수직으로 삽니까? 수평으로 삽니까? 수평으로 살아요. 왜? 우리 눈에는 사람이 보이기 때문에. 아침에 KBS뉴스 틀어보세요. 뭐 나옵니까? 사람 나오지요. 박 근혜 대통령이 방미했다. 박 근혜 사람이잖아요. 미국, 같은 인간들이 모여 있지요. 항상 인간은 인간의 이야기만 듣고 귀신 이야기 듣는 걸 취미로 하는 사람 말고는 별로 없지요. 9시 뉴스에 오늘은 함흥에 있는 귀신은...., 이런 이야기는 안 나오잖아요.

 

귀신 이야기는 실존하지 않으니까 빼고 누구 이야기만 해요? 인간들 이야기만 하지요. 인간들이 아는 세계라는 것은 인간들끼리만 세계관이에요. 그래서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수평적이라고 보는 거예요. 수평적이에요. 수평적만 아는 그 집구석에 남편이 퇴근해가지고 주여! 라고 부르면 미쳤나, 이리 되지요. 왜냐 하면, 밥했나? 이건 수평적이잖아요. 니 오늘 저녁 해놨어? 수평적으로 묻고 있는데, 그걸 듣고 아내가 주여! 이러면 아내는 뭡니까? 수직이 되잖아요. 미쳤나? 그러잖아요.

 

그러면 제가 질문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신앙의 선조들이 수평적으로 살았습니까? 수평적으로 살았습니까? 수평적으로 살았어요. 수직은 자기 담당이 아닙니다. 수평적으로 산 것을 이걸 그대로 세워버려요. 세울 때, 수직이 되는 겁니다. 수평인데 수직이 돼요. 그 원리가 왜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모든 삶은 수평적이에요. 가난한 자, 어려운 자, 눈먼 자, 병든 자, 그런데 그걸 그대로 세워버리면 그게 십자가가 되어버리잖아요. 십자가 찾는다고 수직이 아니고 주여! 찾는다고 수직이 아니에요.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그냥 살아요. 그냥 막대고 살아요. 사는데 그걸 수직되게 해주시는 겁니다. 어떻게? 수평이 뭐가 되는가 하면 죄가 돼요. 그런데 수직은 뭐가 되는가 하면 의가 되거든요.

 

아까 본문에서 아벨은 믿음으로 뭐가 됐다? 의인이 되었지요. 지금 아벨이 주여! 주여! 하고 있었습니까? 지금 아벨이 하는 그 제사는 주여! 주여! 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양을 쳤잖아요. 양을 치면서 돼지 잡는 법 없었고, 양을 치면서 제물로 바친다고 보리나 콩으로 바꿔서 제물할 일이 없을 거고, 양치는 자에게 뭘 들였습니까? 양을 바쳤고, 형은 농사짓는 자이기에 곡물을 바쳤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느 쪽을 받는가 하면 양이 들어있는 그 예물을 하나님이 받으신 거예요. 수평적인 것을 수직되게 하는 결정권은 아벨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한테 있는 겁니다.

 

그게 왜 그러는가 하면 바로 의라는 그 문제는 위에서 수직적으로 내려와야 되지 지상에서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여러 번 하지만 다시 해 봅시다. 인간은 왜 의를 대처할 수 없는가, 인간은 의롭기 싫어서가 아니라 언약을 몰라서 그렇고 하나님의 언약이 되어야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언약을 모르는가, 인간은 마지막 날 만들어졌어요. 마지막 날 6일째 만들어진다는 말은 1,2,3,4,5,6에 대해서 인간이 관여한 적이 없어요. 하나님, 달은 이렇게 만들어요. 별은 이렇게 해요. 인간을 먼저 만들어서 인간이 관여하지 않았어요. 인간이 소외됐어요. 인간이 배제된 상태에서 우리, 어제 이야기했지만, 하나님 단독이 아니고 하나님과 같은 또 하나님끼리 의논해서 인간을 결과적으로 만들어 내놨기 때문에 인간은 그 쪽 일방적 조치에 따라서 계획에 따라서 수동적으로 나타나야 될 존재지, 적극적으로 그걸 관여해 가지고 이건 이리 되어야 됩니다. 저리 되어야 됩니다. 이리 할 수가 없어요.

 

인간에게 마지막 주어진 사명은 죽지 말라! 했습니다. 죽지 말라! 다른 말로 하면 선악과 따먹지 말라! 다른 말로 하면 죽지 말라! 어째서 그런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러니까 죽지 말아야 됩니다. “인간아, 죽지 말아야 돼!” 라는 조건하에 인간을 만든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따먹으면 인간이 죽는 게 아니에요. 인간이 흙이 되지요. 왜냐 하면 인간에게는 죽음이 없습니다. 죽음은 누구만 죽을 수 있는가 하면, 오직 예수님만 죽을 수 있어요. 왜, 언약대로 죽어야 되니까. 자살은 안 되지만, 늙어죽는 건 돼요. 자살은 안돼요. 내가 죽음을 안다고 자살하기 때문에 그건 엉터리 죽음이고, 진짜 죽음은 스케줄 따라 죽어야 돼요. 자살을 포기하고 철로에서 내려오다가 기차에 박쳐 죽어야 되지 철로에 바쳐 지가 알아서 철로에 가서 기차에 박쳐 죽으면 안돼요. 죽으려고 하다가 안 돼! 나를 키워준 부모들이 있어서 이러면 안 돼! 나를 보람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안 돼! 나를 두 번 죽이는 거야. 그래 나는 이제 살고 싶어. 하다가 뒤에서 오는 기차를 못 봐가지고 바쳐 죽어야 돼요. 나 다시 돌아갈래! <박하사탕> 마지막 장면 있잖아요.

 

나, 다시 돌아갈래! 이러다가 죽잖아요. 설 경구. 죽고 난 뒤에 또 태어났네. 영화들 안보셨지요? 마지막 장면이. 고문 수사관이거든요. 광주 출소 좀 하려고하다 양심에 가책이 되어가지고 마지막에는 나 이렇게 사니 옛날처럼 돌아갈래! 하다가 철로에서 정면으로 오는 기차에 박아 죽는데, 이게 왜 요한계시록과 관련되어 있는가 하면 귀신들이 인간의 죽음을 초월 화 시켰어요. “너는 죽어도 너의 가치는 남아있어.” 라고 하면서 이 귀신들이 인간을 그렇게 조작하고 있습니다. 인류는 죽어도 인류의 정신은 남아있다. 이런 식으로. 그게 뭐냐 음녀가 돼요.

 

귀신은 악마는 언약을 제일 싫어해요. 언약을 싫어하다보니까 언약의 완성도 싫어하잖아요. 그럼 언약의 완성되는 증거가 뭐다 하는 것도 귀신이 알아요. 요한계시록12장에서. 여자가 아들을 낳으면 언약이 완성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 창세기3장에 보면 여자의 후손이 되어있거든요. 여자의 후손을 없애면 뭐만 남아요? 뱀의 후손만 남겠지요. 그런데 뱀의 후손이라는 것은 무엇을 짝을 지을 때만 뱀의 후손이 되느냐 하면 여자의 후손과 짝을 지을 때만 뱀의 후손이 되거든요. 그런데 여자의 후손이 없어버리면 자기는 뭐가 됩니까? 건전한 존재가 되지 악마의 존재라는 티가 안 나겠지요. 죄라는 것은 십자가 앞에서 죄지, 아닐 때는 변명의 여지들이 많아요. 십자가 앞에서만이 변명의 여지가 없지, 십자가 걷어치우면 환경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부모를 잘못 만났다, 얼마든지 우리는 자기의 의를 내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 때, 십자가를 증거 해야 될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십자가 증거 안하면 최선을 다하게 되면 우리가 의인되어버려요. 바르게 살고 예수 믿자, 그건 뭐 절이지요.

 

“그런데 목사님, 자살도 주님께서 그 마음을 주신 게 아닌가요?” 질문 중에서.

자살이라는 것은 다른 차이점이 외부에서는 몰라요. 외부에서는 알 길이 없어요. 자살인지 몰라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뭘 감찰하시느냐 하면 본인의 심령을 감찰하잖아요. 이건 개인 문제라니까요. 다른 사람이 이러쿵, 저러쿵 할 문제가 아니에요. 개인 문제에요. 개인이 자살이면 자살이에요. 거울에다가 욕하나 해놓고 스스로 알아서 목매어 자살해서 죽는 것. 본인이 알아요. 다른 사람은 심장마비라고 뭐라고 해도 상관없는데 본인은 안다고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 가룟유다가 그랬거든요. 가룟유다가 왜 죽었는지 알아요? 아까 나왔는데, 응축된 기억 때문에. 내가 메시아를 죽이다니, 아니에요. 내가 스승을 팔아먹다니, 공동체 내에서 스승을 팔아먹는 것은 이건 추방되어야 될 범죄자가 되는 거예요. 이 공동체에서 아무도 자기를 사랑하지 않을 때, 있으나 마나한 존재 같으면 차라리 그런 수모를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자존심을 그대로 유지하는 방법은 스스로 이 고귀한 가치를 품에 안고 그대로 사라지는 방법밖에 없어요.

 

오늘 아벨 이 이야기는 아벨이 훌륭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아벨은 양치는 자여서 그냥 양을 잡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게 하신 것. 양치기 하셔서, 양 잡게 하셔서 그리고 먼저 것과 형과는 다른 제사를 드리게 하는 것과 거기에 대한 의미를 두고 가치를 두고 하는 셋트 화된 모든 것은 주님의 예수 그리스도와 중보자가 관여해서 그렇습니다.

 

아벨이 중보자를 믿은 게 아니고 아벨 속에 중보자가 관여한 겁니다. 중보자 예수님의 부분이 아벨이라 이리 보시면 됩니다. 일부다. 왜? 증거하고 실상은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증거하고 실상은 분리되지 않거든요. 한 통속이거든요. 예수님의 옷자락을 아벨로 보면 돼요. 그걸 가지고 뭐냐, 믿음으로. 믿음으로 아벨은. 다른 말로 번역하면 쉽게 말하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님의 중보자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

 

자, 그렇다면 아벨이 형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겠어요? 없었겠어요? 그건 당연히 없지요. 아마 아벨이 형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려면 양을 팔아서 형한테 곡식을 받아가지고 형이 드린 곡식보다 곱빼기로 더 바칠 거예요. 그러면 같은 동질이 돼요. 같은 질이 된다고요. 같은 질에는 양으로 결정해요. 양으로. 과부의 2렙돈과 부자의 헌금이 어느 것이 많이 드린 게 돼요? 과부의 2렙돈. 주님께서 같은 동질이지만, 너희들은 동질로 보이지만, 수평적 동질로 보이지만, 주님보시기에는 수직으로 세워버리면 이건 질이 다른 돈으로 본 거예요. 그걸 총합적으로 말하면 뭐냐 하면 결국 무엇과 관련되어있다? 전부다 심령과 관련되어있어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런데 심령이 가난하게 되면 심령을 얼마나 축소해야 됩니까? 그런 양적 문제가 아니에요.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마음 씀씀이에 관한 문제거든요. 그러면 이것은 상급이 크다, 작다 이 모든 것은 니 마음이 양적인 마음이냐, 아니면 질과 관련된 마음이냐를 보는 겁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 하늘에 쌓아두는 두 방법은? 일단은 헬륨가스를 사요. 풍선에다가 500백원짜리를 해가지고 공중으로 붕 띄웁니다.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하면 그렇게 띄워놓게 되면 그 출발점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땅에서부터 출발했어요. 땅에서부터 출발하게 되면 땅의 마음가지고 계속 연속이 되어버리거든요.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 백성들, 왜 광야에서 딱 두 사람 빼놓고 다 죽었습니까? 사실은 다 죽은 거예요. 두 사람 빼놓고 다 죽은 거예요. 왜 다 죽었습니까? 애굽의 늘어진 심령이기 때문에. 애굽의 늘어진 심령 다 죽이고 약속의 땅에서의 증거로서 새로 태어난 애들만 요단강을 건너가게 되어있습니다. 이게 질적인 문제이지 양적인 문제가 아니에요. 뭐 집이 몇 평이나, 월급이 얼마나, 양적인 문제를 축복으로 보지를 않습니다. 야곱의 축복이라 하는 것은 야곱이 사기쳐가지고 했지요. 그리고 야곱이 복을 얻어낼 때도 어떻게 얻어냈습니까? 아버지에게 거짓말했어요. 제가 주일학교에서 그 소리를 해가지고 약간의 문제성이 있었어요. 애가 주일학교에서 듣고 난 뒤에 아버지에게 목사님이 거짓말해야 구원받는다고 해서 하지도 않은 말을 지 맘대로 각색해서 말했어요. 우리는 야곱이 거짓말할 정도로 해서 천국 갔다고 이리 생각하지 마시고 거짓말 안한 편의 말을 들어봅시다. 에서는 거짓말 안했어요. 그냥 소박하게 바른 생활했고 교회오빠입니다. 지옥 갔어요. 지옥 간 이유가 뭡니까? 1번 거짓말 안 해서 그렇다. 2번 거짓말했으면 천국 갈 뻔했다. 둘 다 정답 아니에요.

 

그냥 가야될 인간이기 때문에 간 거예요.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했다. 이미 로마서9장에 나왔던 것처럼 그냥 가야돼요. 왜 가야 되느냐고 교무실에 뛰어들지 마세요. 왜냐 하면 6일째 태어난 것은 첫째 날 창조한 하나님만이 의논한 자리에 인간이 끼어든 법은 아닙니다. 그건 초대받은 천상회의에 선지자만 가고 예수님만 가지 다른 사람은 끼어들면 안돼요. 모세만 그 리스트에 자기 명단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모세만 그 명단을 봤어요. 어린양의 생명책 리스트를 본 거예요. 보고 난 뒤에 느낌이 뭐였습니까? 아, 지정된 사람만 가는구나! 이 말은 지정된 사람이라면 천국 안 갈래야 안 갈수가 없겠구나! 주의 능력이 너무 강해서 반드시 갈자는 무슨 수를 해서라도 가고야마는구나! 그리고 지옥 갈 인간은 아무리 가고 싶어도 결국 탈락하게 하시는구나!

 

바로 왕이 열 가지 재앙을 내릴 때마다 바로왕의 마음은 본인이 예상한 마음과 자꾸 달라졌어요. 본인은 이번 일만 잘되면 파리를 내쫓아주게 되면 아낌없이 히브리인들을 광야로 제사하기 위해서 보내겠다고 자기는 진심으로 이야기했는데 그 진심을 주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때 그 때마다 이걸 경계시켜가지고 강퍅해하셨다. 피동적으로 강퍅하게 하신 거예요. “니가 내 말 들으면 내가 다음 주에 교회 가줄게.” 그거 그 때뿐이에요. 해줘도 그 다음부터는 주께서는 핑계하게 되사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안가겠다 하는 것은 성경대로 하면 아직 때가 되지 않았으매, 아직 타이밍이 안 돼서. 심령에 관한 문제입니다. 심령을 언급하시면서 아벨의 심령은 훌륭하다는 말이 아니고 주님이 심령을 메시아적 심령을 개입했다 이리 봐요. 개입하고 나니까 아벨의 그 많은 일들이 있지만 제사 드린 것 가지고 증거 얻은 거예요.

 

그런데 그 증거를 얻는데 그 예물을 가지고 증거 했는데, 4절에 보면 그 예물에 대해서 증거 했다, 했어요. 그 예물에 대해서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아벨이 제사드릴 때 가인과 차이나는 게 있습니다. 그래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 질적으로 다른 제사를 드렸다고 본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제사란 드리는 자가 있고 받는 분이 있다. 이걸로 제사가 완료되는 게 아니고 제사의 예물자체가 누구의 증거가 되어야 하면 장차 오실 메시아의 기능과 매치가 되는 제사가 참된 제사지요. 많이 드린다고 받는 것이 아니고 또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예배드리는 게 아닙니다. 드리는 자의 예물이 하나님도 작용하고 드리는 자의 심령도 작용해서 이 예물의 구체화가 증거로서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벨의 제사가 특징이 뭐냐 하면 양을 드리는 것에 있는 게 아니고 기름과 본체를 분리시켜 놉니다. 분리시킨 거예요. 우리가 지금 히브리서하고 있잖아요. 히브리서1장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하였고” 여기서 기름과 뭐가 관련되었는가 하면 하나님의 의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상당히 히브리서가 복음적이에요. 로마서1장을 다시 보는 것 같습니다. 로마서1장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누구를 이야기하는 겁니까? 예수님을 말하지요. 예수님은 무슨 자이냐 하면, 예수님은 기름 부은 자이지요. 가만히 보니 제 취지를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의라는 게 있잖아요. 의.

 

의라는 것이 하나님의 원하는 의가 아니면 천국 못갑니다. 그러면 그 의는 하늘에서 제공되어야 돼요. 제공되는데 달라고 주는 게 아니에요. 누가 품고 내려왔어요? 기름 부은 자하고 관련되어있어요. 그런데 기름 부은 자하고 의가 관련되어있어요. 그래서 아까 의는 누구밖에 없다고 했어요? 메시아밖에 없어요. 메시아 뜻이 뭐예요? 메시아는 기름 부은 자에요. 기름 부은 자만이 의가 되는 거예요. 바른 제사를 드린 게 아니고 지금 오늘 히브리서11장에서 아벨이 의인된다니까요. 의. 지금 구약이 아니고 신약이거든요. 신약 같으면 결과만 따오는 거예요.

 

신약은 복음이 나타났으니, 복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거예요. 그게 복음이거든요. 그 의와 그 예수님과 연결시켜 줘버립니다. 그러면 그런 식으로 구약을 새롭게 해석했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뭘 해서 의인될까, 이리 보면 돼요. 뭘 해서 의인될까, 그 말은 우리는 그냥 있으면 뭐된다? 죄인 되지요. 왜 죄인이냐, 나쁜 짓해서. 아니에요. 우리는 메시아가 아니기 때문에 죄인인 거예요. 편하게 생각해요. 이게 복음이에요. 기쁜 소식이에요. 편하게 생각해요. 내가 왜 죄를 짓고 의를 구하느냐, 나는 누가 아니기 때문에? 메시아가 아니기 때문에. 이게 얼마나 겸비한 마음자세인 줄 몰라요.

 

“집사님은 헌금해서 영광돌리세요.”라고 한다면 “저는 메시아 아니에요.” 간단하게 대꾸하세요. “요번 달 구역마다 할당된 전도인수를 채우세요.” 하면 “저 메시아 아니에요.” 이렇게 하세요. “그래도 교회가 해야 영광되잖아요.” “하나님의 의와 영광 되는 돼요.” “행해야 의가 아닙니까?” “행해서 의롭게 되는 게 아닙니다.” 왜? 인간이 행해서 의롭게 되는 게 없고 주님의 행하심만이 의롭게 되는 겁니다. 주님의 행하심만이 의가 돼요. 그러면 목사가 “그걸 알면 행해야지요.” “아니지요. 주께서 지금 행한 것 말고 따로 행하게 하는 게 아니고 지금 행하는 그 자체, 내가 지금 무심코 일상을 편하게 살아가는 그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아벨로 보시고 그 전체를 통째로 의되도록 하는 거예요. 왜? 그 전체가 통째로 죄이기 때문에 그래요.

 

죄이기 때문에 메시아의 그 특이성, 메시아의 효과를 추가해서 통째로 수평적인 것을 수직적으로 세워버리면 이게 뭐가 된다? 이게 의가 되는 그것이 바로 주님의 성령의 개입이고 믿음의 개입이 되는 겁니다. 아무것도 할 게 없다니까요. 그냥 사세요. 더 심한 말은 시체놀이하세요. 혼자 하는 시체놀이. 죽었다 치고. 수의 옷 입었습니까? 그러면 누워보세요. 그럼 수평이 되지요. 수평이 수직이고 수직이 수평이에요. 성도한테는. 어제 이야기했잖아요. 천국은 우리가 들어가는 곳이 아니고 천국은 지금 우리를 가지고 만들고 있어요. 죄인을 가지고 천국을 만들고 있어요. 들어가는 곳이 아니고. 맨션아파트에 들어가는 곳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성도로 만들고 있어요.

 

자, 일단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물에 대해서 했고, 그 예물은 의가 되는 아벨이 의인되게 한 것은 드린 제물이 아벨을 의인되게 한 겁니다. 4절 끝에 보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 그 다음이 뭡니까? 말하였느니라. 아~ 이 말이 얼마나 어려운지. 죽은 자는 원래 말이 없잖아요. 그런데 죽었기 때문에 비로소 다른 말을 할 수 있어요. 자살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은 죽기 직전의 말밖에 없지만, 주께서 죽이시는 사람은 죽음 이후에 죽이시는 주님의 말이 죽은 그 사람을 통해서 계속 이야기하게 하시는 거지요.

 

다윗을 이야기하고, 솔로몬을 이야기하고, 예레미야를 이야기하고, 예수님을 이야기하고, 사도바울을 이야기하고 그러니까 병들고 힘들더라도 자살까지 하지 마시고 알아서 죽이시겠지요. 그렇다고 호스 꼽고 그런 짓하지 마시고 내가 호스 다 뽑으면 돼요. 아들 돈 날릴 일 있어요? 그냥 자연사하도록 하세요. 딱 보면 알잖아요. 억지로 인공적인 의료의 장치로 버티는지 본인은 알잖아요. 그러면 그런 마음까지 없으면 치매 걸리면 할 수 없고 그런 일이 생기면 애들한테 당부를 하세요. 제발 살려줘. 이거 안 꼽는 게 살려주는 거다. 니가 꼽아볼래? 얼마나 아픈지. 니는 니 몸이 아니라고 그렇게 함부로 하는데 효도한답시고. 효도 싫다. 그냥 가게 나둬. 자살 아닙니다. 왜? 이미 몸이 주께서 억누르고 있는 걸아니까. 그런데 생생한데 지가 알아서 뛰어내리고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되지요. 가룟유다처럼. 다시 한 번 아벨은 예물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했습니다. 예물을 통해서 의인됐다 이 말이죠.

 

그 다음에 5절 봅시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아~ 참, 여기서 에녹은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에녹은 참 좋겠다. 그런데 여러분, 마리아가 처녀가 임신할 때 참 좋겠다는 생각을 본인이 했겠어요? 아, 나 너무 편리해. 미치겠어. 남자도 모르고 애를 낳고. 아~ 왜 이리 편리한 줄 모르겠어. 이랬습니까? 우사스러워서 얼굴도 못 들었을 거예요. 우사스러워서.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친구는 그것도 종용히 헤어지자고 했어요. 종용히. 종용히 갈라서자고 했습니다. 왜? 우사스러워서. 처녀가 애를 낳고 할 말이 없다. 이럴 수는 없다. 그걸 뭐라고 했습니까? 응축된 기억이지요. 공동체가 강요했던 응축된 기억이 본인의 양심이 되었고 그 양심에 의해서 도저히 니가 천사가 와서 임신했다는 그런 되지도 않는 소리는 하지 마라. 나는 그거 안 믿는다. 그게 수평적이에요.

 

수평적인데, 그 수평을 수직으로 벌떡 일으켜 세운 게 누굽니까? 요셉에게 누가 찾아왔습니까? 엔젤이 찾아왔지요. 천사가 찾아왔지요. 천사가 찾아와서 무엇에 대해서 이야기합니까? 지금 이루어진 언약과 상대해요. 항상 모든 하나님의 일은 언약 안에서만 일하지 언약 밖에서는 일 안합니다. 언약에 관한 이야기만해요. 니 아내에게 언약이 벌어지고 있는데 니는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이게 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그 여인과 성격차이라는 이유 때문에 헤어지지마라. 그래서 기어코 요셉이 마리아하고 동생을 낳았지요. 그러면 같은 가문에서 두 개의 차이가 나지요.

 

하나는 육에서 난 자식이 있을 거고, 하나는 영에서 난 자식이 있을 거고, 이삭과 이스마엘과 같은 거의 재현된 거죠. 약속에 의한 자식과 혈육에 속한 자식이 분리가 되잖아요. 그게 언약입니다.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한사람이 잠을 자도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고. 잠자는 게 나쁜 짓입니까? 그런데 잠잤던 것하고 구원 받는 것하고 연관성 없지요. 일방적으로 수평을 수직으로 세울 때, 언약 적으로 세우는 겁니다.

 

언약은 저주의 요소와 축복의 요소가 다 있기 때문에 세울 때, 누가 저주받고 누가 축복받는가가 그 내용물이 드러나는 그 사건을 마리아에게 일으키듯이 에녹에게 일으킵니다. 에녹이 죽지 않았다. 본인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뭔가 특이한 것은 그 공동체 내에서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죽지 않고 산다는 것은 별로 안 좋아요. 그래서 우리는 이리 생각합니다. 에녹이 하나님 앞에 갔을 때, 그걸 죽는 순간으로 보자는 겁니다.

 

왜냐 하면 기존에는 이 땅에는 죽음이라는 개념이 있거든요. 죽음 개념이 있는데 이 개념은 같이 공동체에 있다가 사라지는 것. 이걸 죽음으로 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에녹이 말하는 죽음은 뭡니까? 장차 올 십자가와 관련된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주어진 죽음. 인간들은 내 눈에 안 보이면 죽은 존재이지요. 사실은 그렇게 보면 에녹은 우리 인간들이 보기에는 수평적으로 죽은 사람이에요. 그냥 360년동안 살다가 그냥 죽어서 하나님께로 갔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특별히 죽음을 보지 않고, 라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줬다면 그것은 장차올 예수님은 너희들보기에 죽음처럼 보이지만 그 죽음을 너희들이 아는 죽음으로서는 도저히 해석되지 않는 특별한 죽음인 줄 알아라.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예수님을 죽일 때, 너희들이 아는 식으로 죽인 거예요. 저 인간은 양쪽 손에 못을 박고 찔리면 피 흘리면 몇 시간되면 의학적으로 사망한다. 기껏 너희들이 아는 것은 육적인 죽음이지만, 뭐는 빠뜨렸어요? 중보자로서의 저주받는다는 시편22편 나의 하나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그 언약을 완성하는 언약의 최종적인 완성 모습이 놀랍게도 이 땅에서는 죽음이라는 그냥 보편적인 현상으로만 드러났을 때, 인간들은 그 예수님의 죽음과 이쪽 우리 어르신네 죽음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니까 인간은 언약 바깥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지요. 에녹은 그 일을 미리 당겨서 한 겁니다.

 

창세기대목을 보겠습니다. 창세기5장21절에,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데려 가시므로’를 우리는 뭐로 봅니까? 에녹의 죽음으로 보잖아요. 히브리서에서는 에녹이 죽었어요? 안 죽었습니까? 죽음을 보지 않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 구약을 아무리 연구해도 히브리서가 안 나온다니까요. 인간의 능력으로는. 히브리서는 십자가를 봐서 예수님을 경유해야 히브리서가 이해가 돼요. 구약을 만 독해도 이해 안돼요. 그런데 에녹의 의미가 뭐냐 하면 5장에 보면, 아담은 이러하니라,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삼십세를 향수하고 그 다음에 뭡니까? 그 다음에 죽었더라지요. 그 다음에 나오는 셋도 뭐~뭐~하다가 죽었더라. 그 다음도 뭐뭐하고 죽었더라.

 

그런데 이 에녹에 와서는 죽었더라는 말이 없고 그 대신 뭐로 채워져 있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심으로 데려가시니라, 되어있지요. 그러면 장차 오실 예수님은 우리를 죽이시는 분입니까? 데려가시는 분이에요? 데려가시는 분이지요. 회당장 야로의 딸이 죽었을 때 뭐라고 합니까? 그만 일어나! 잔다 했지요. 나사로가 죽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나사로는 지금 잔다, 우리가 깨우러가자, 이렇게 하지요. 깨우러가자는 도마가 이야기했지만, 아이고, 우리가 언제 이 개념이 바뀌겠어요? 정말.

 

죽는다고 해서 우리가 울 건덕지가 없다니까요. 주님이 왜 우셨는지 알아요? 마리아 집에서. 운다고 울었어요. 울 일도 아닌데 울었다는 겁니다. 그래놓고 믿음 있다고 우기니까 그게 애통해서 우신 거예요. 그리스도 안에서는 죽음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죽는 거예요. 가짜 죽음을 반복함으로서 죽음이 없다는 것을 예수님 안에서 죽음이 없다는 것을 증거 하는 용도로 우리는 날마다 죽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부정적 사고방식이라고 하는데, 이건 부정적 사고방식이 아니에요. 아까 십계명 이야기할 때, 십계명을 바로 못 지켰다 했지요. 십계명을 뭘 빠뜨렸다 했지요? 중보자,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주의 이름, 주의 이름은 뭐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으로서만 일하시는 주의 이름이 함께 있으면 내가 생각하는 내가 아니라니까요. 자기를 너무 시시하게 보지 마세요.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가 진정 우리가 아니에요.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를 안다는 것이 보통 기적 안 받으면 십자가를 모르게 되어있어요. 고급아파트에서 쓰레기 줍다가 1억9천 그건 횡재 측에도 안 들어가요. 우리는 우연히 복음을 주은 겁니다. 이건 주인 안 돌려줘도 괜찮아요. 쓰레기통에서 1억 주워서 주인 찾아줬는데 할머니가. 뉴스에서 그런 걸 볼 때 다 연관시켜보면 재미나요. 뉴스에서 그런 걸 볼 때. 주께서 왜 저런 걸 일으켰을까, 이렇게 보는 거예요. 왜? 주께서 저런 일을 일으켰을까? 아! 부러워하지 말라는 뜻이구나! 그럼 지금 나는 뭘 부러워해야 돼? 못 먹어도 고. 그러니까 지금 이미 구원받은 거예요.

 

제가 지난날 설교에서 삼성라이온즈 예를 들었잖아요. 남자들 야구 좋아하기 때문에 그 예가 무슨 뜻인 줄 알아요. 뭐냐 하면 이미 한 게임 남겼는데도 벌써 1등이 확정됐어요. 전국1위 확정됐습니다. 삼성 선수들은 느긋한 거예요. 100:0으로 져도 우승인데요. 그러니 우리는 이미 합격이에요. 못 먹어도 Go라니까요. 간다니까요. 못 먹고 못 살아도 가요. 개가 오줌 싸도 천당 간다니까요. 내 체면 우기고 내 자존심 좀 상해도 그것과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오. 어떤 권력자가 흔들리요. 사망이나 권세나 어떤 것이라도 그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너를 대신하는 보디가드가 있는데.

 

사고 날 때 막아주는 게 아니고 이미 사고 난 걸아시고 미리 다 막았으면 우리로 거기다가 추가해서 행함을 첨부하지 마세요. 주께서 다 빼버려요. 더러워서 우리 행한 것, 전도고 선교고 헌금이고 다 빼버려요. 나는 니가 준 거 안 받는다. 했지? 정신 차려! 다 빼버려요. 니 충성이고 뭐고 다 빼버려.

 

에녹은 막 살았고 그냥 구원받았어요. 이게 에녹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막 살았고 그냥 구원받았어요. 십자가 지시고 구원받았어요. 그게 성도에요. 특별히 한 게 없어요. 살다 그냥 데려갔다고요. “에녹씨, 뭐했어요?” “그냥 살았어요.” “어떻게 살았어요?” “막국수처럼 막 살았어요.” “뭐했는데?” “몰라요. 그냥 데려가시데요.” “누가요?” “동행하시는 분이.” 그래서 에녹이나 아벨이나 공통점이 있다면 인간은 납득되지 않는다.

 

제가 어제 이야기했듯이 구원 그 이후를 주장하는 그 쪽에서의 문제점이 자기가 이해되는 식으로 구원하는 게 그게 바로 이단적이라는 거예요. 내가 구원되는 식으로 구원이 되지를 않아요. 내가 납득되지 않는 채로 구원되지요. 내 이해마저도 삭제시키는 방법으로 해야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찬양하게 됩니다. 주여,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될 수가? 세상에 이천까지 내려 가가지고 다시 올 줄이야 생각도 못했어요. 새벽2시에 도착할 뻔 했어요. 그게 바로 막사는 겁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되어있지요. 자, 여기서 기존교회에서 오해하고 있는 것이 그 상이라 하는 것은 우리 쪽에서 기대하는 상은 아닙니다. 우리 쪽에서 기대하는 상은 잘못된 상은 뭐냐 하면 전에 이야기했는데 다시 합시다.

 

욕망에서 결핍된 부분을 우리는 상으로 마저 채우려고 합니다. 나 같으면 이 정도 아파트에 살았는데 지금 평수가 15평입니다. 따라서 집사주세요. 하나님. 몇 평짜리? 35평짜리. 그럼 20평이 빠지지요. 그러면 교회봉사 열심히 해서 상 받게 되면 15평짜리에서 35평짜리로 옮겨가겠지요. 이걸 우리가 기대하는 상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저 15평 없어도 괜찮아요. 그냥 지금 나가 죽어도 괜찮습니다. 했는데 35평을 줘버리면 이 전체가 뭐냐 하면 이 상을 준 거예요. 어떤 상? 너는 너의 희망과 기대를 접었구나! 에 대한 상. 지금 35평짜리를 받았다면 이것은 누구의 이름입니까? 내 이름이 아니고 누구의 이름이다? 주의 이름이니까 중보자를 탈락시키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중보자를 늘 동행함을 인정해주는 것에 대한 주어지는 상이에요.

 

중보자를 탈락시키지 마세요. 그러면 35평 받아놓고 감사하겠지요. 그런데 슬슬 욕망이 가만히 있습니까? 적어도 이제는 내 나이가 50중반인데 이 35평은 이것은 30대나 40대 직장생활 할 때고 이제는 친구도 만나면 니 몇 평 사노? 50몇 평으로 이사 갔다. 부끄러워서 주여, 50평 주시옵소서. 그러면 이제 15평이 모자라지요. 그걸 위해서 또 교회에 열심히 봉사한다. 이리 되면 이것은 또 자기가 원하는 상이지요.

그러니 이건 항상 뭐냐 하면 우리 자체가 상인데 주님의 작품인데 따로 주님의 작품을 내 욕망에서 자꾸 뽑아내서는 안 된다는 이 말입니다. 6절 요 말씀은 다음에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중보자가 늘 활동하고 있는데 내 인생을 나의 인생으로 오해했습니다. 주께서 차지하시고 구원으로 이끄시고 천국을 만들어내는 현장으로서의 우리가 관여한 것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