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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히브리서 10:37 / 의의 소스(드레싱) / 150911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브리서 10:37 / 의의 소스(드레싱) / 150911

정인순 2015. 9. 12. 10:55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녹취:주향

의의 소스(드레싱) (히 10 :37-39)                                                                          

안양 강의 

 
이 근호 목사 2015년 9월11일                                                  

본문말씀: 히브리서 10장 37-39

(히10: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히10: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사람들의 관심은 사느냐 죽느냐 이게 관심사에요. 햄릿의 대사에 보면 사느냐 죽느냐 이게 관심사인데 성경에서의 관심사는 인간이 아니고 내가 다시 온다는 것이 관심사에요. 내가 왔고 다시 온다는 것이 관심사에요. 그렇다면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뭐냐하면 내 관심사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는 게 아니고 내 관심사를 부셔 버린다듣지 내 관심사를 없애고 치워 버리고 주님의 관심사 속에 풍덩 뛰어 들어야 되요.

이것은 육으론 안되고 성령이 와야 되는 겁니다. 아까도 햄릿 이야기 했듯이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세익스피어가 인간의 근원적인 아무리 연구해도 마지막에 남는 것은 뭐냐 하면 죽느냐 사느냐 그것만 달랑 남는 거에요. 제일 밑바닥에 뭐 고상하게 이야기 하고 교회 다니고 해도 주여! 이렇게 착하게 오래 살겠습니까? 항상 그 뒤에 붙는 멘트가 있거든요! 이렇게 열심히 봉사하면 우리 가족이 잘 살겠습니까? 항상 그게 붙어 있어요.

그것을 제가 이야기 했잖아요. 인간은 자기를 위하여 철저하게 이타주의라고 자기를 위하여 철저하게 이타주의이다. 아낌없이 자기를 바치는데 그 바치는 대상이 뭐냐 결국은 지금보다 더 멋있어지는 나의 세계, 나의 현실을 위해서 나는 모든 것을 거기다 쏟아 붓고 투자하게 하는 것이 인간이다. 왜 그러하냐 그러면 나는 영원히 살기 때문에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래서 인간이 스트레스 받고 고민하는 것도 뭐냐하면 내가 소실되고 없어지고 내가 죽는 것. 이것에 대해 자연 적으로 강한 거부감이 유발되겠지요? 그러면 사람이 누구든지 사람이 살아있는 생물체를 보면 여기서 뭐가 나오냐 하면 냄새가 나게 되어 있어요. 꽃에서도 냄새가 나듯이 냄새가 난다고요. 인간이 있으면 냄새를 풀풀 풍기는데 그게 뭐냐하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다른  말로 하면 “더 살고 싶어요.” 이런 냄새가 나는 거에요.

그럼 옆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 사람도 마찬가지로 냄새가 나겠지요? “나만 영원히 살고 싶어요” 그러면 동일한 이 현실에 서로가 더 살겠다는 거에요. 주님은 “비켜라! 비켜라! 이 현실은 너희를 위한 현실이 아니야! 이것은 나(예수)를 위한 현실이다”라고 들이대시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주님 앞에 굴복해야 됩니까? “아~나 아니구나! 저 사람도 아니구나!‘ 이렇게 주님께 복종하면 문제는 깔끔하게 끝나요.

그런데 “우리도 한 고집하잖아요!” 마귀들렸으니까 마귀가 보통 고집이 아니잖아요. 주님의 현실이라고 하니까 주님의 현실에 따로 자기만의 독자적인 현실에 가게를 업소를 또 차리네! 주님의 세계는 인정해주겠는데 주님의 세계에서 나는 얼마나 대단한 존재입니까? 이걸 또 묻기 시작하는 거에요.

그래서 이 현실이 주님의 현실이라 하는 것을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강의 들어가기 시작하는데 이 현실을 제일 먼저 만남 나라, 민족이 있어요. 그 민족이 바로 구약의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 민족은 다른 민족보다 특이해요. 다른 민족은 인간끼리 살고 그 다음에 신을 초빙합니다. 인간이 인간을 결집하고 역사를 만들면서 기존의 자신에 공동체나 국가나 민족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들이 동의하는 신을 만들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달라요. 하나님이 먼저 있고 나라도 없고 이스라엘 민족도 없을 때 하나님이 먼저 나타나시고 그 하나님께서 무엇을 쏘아 대느냐 하면은 바로 언약을 쏘아 대면 특이한 현상으로써 등장한 나라가 이스라엘 나라입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특이해요. 노아 언약을 쏘아 댔는데 지상에 특이하게 등장한 물체가 있었지요? 그게 뭡니까? 방주잖아요! 방주가 보트처럼 놀이용입니까? 아니면 유람용입니까? 아니면 화물용이에요?

방주는 그야말로 우리가 아는 것처럼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이 땅에서 쓸데없는 물건이 바로 방주입니다. 아무 쓸모가 없어요. 예수 믿는거요? 제대로 예수 믿으면 이 세상에서 아무 쓸모없는 거에요. 친구 다 떨어지지요! 말다툼 했다고 다 떠나가지요. 이 세상에서 내가 기대하고 구상하는 모든 것을 산산 조각 내버립니다. 예수 어디에다 써 먹을거에요? 취직하는데 도움 됩니까? 결혼 하는데 도움이 되겠어요? 아무 쓸모 없어요.

왜냐하면 언약이기 때문에 언약이 아니고 언약이 아닌 예수라면 그 땐 쓸모 있어요. 왜냐 우리가 만들어 낸 예수이기 때문에, 날조된 예수이기 때문에 아주 쓸모 있어요. 예수님 이거 하면 이거 해주실거죠? 저거하면 저거 해주실거죠?  다 쓸모 있어요. 그러나 그냥 청량 고추처럼 씹다가 갑자기 먹다가 아~ 맵다던지 쓰다던지 예상 밖으로 당황스럽게 만드는 그런 사태는 주님의 주특기입니다.

전혀 기대하거나 예측한 것 없이 돌발적으로 우리에게 딱! 쏘듯이 줘버리죠! 그렇게 언약이 쏘게 되면 예를 들어서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사전에 설계 안 했지요? 그냥 언약이 오니까 설계 도면까지 같이 왔잖아요!  그러면 노아가 방주를 볼 때 어떤 생각을 했겠어요? 이거는 내가 생각 했던 게 아닌데!~ 이건 내 식으로 구원 받는 게 아닌데!~ 그런 생각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그렇죠? 늘 하겠지요? 이건 내 아이디어가 아니데!~

더 깊이 들어가면 내 인생이, 내가 원하던 인생이 아닌데!~ 그런 생각 들겠지요? 혹시 그런 생각이 들면 행복해 하시기 바랍니다.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뭔가 남들과 달라요. 남들은 예측한 대로 노력하잖아요? 예측에 맞추기 위해서 목표 정하고, 목적 정하고 거기에 내가 맞춰서 행동을 적절하게 노력해서 그 목적에 일치하려고 애쓰잖아요? 이게 언약이에요? 애씀입니까? 노력이고 애씀이죠?

언약은 전혀 예측이 안되는 겁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 난 너무 지루해 왜냐하면 너무 많이 이야기 했어요. 그런데 힌두교나 불교 신자들만 있는 곳에 도 닦고 있는데 한 200명 모여서 도 닦고 있는데 어떤 승려가 와가지고 “ 야! 우리가 머리 깎고 도 닦는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니야! 예수 이름으로 구원 받는 거야!”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굉장히 신선하지요? “정체를 밝혀라! 네가 언제 서양 선교사를 접촉했느냐?” 막 이러고 추궁도 하겠지요?

그런데 우리 한국은 어떻습니까? 예수 이름으로 구원 받는 거야! 그러면 식상해! 고만해! 많이 들었다! 고만 해라! 많이 들었다는 식으로 식상한거에요. 이젠 지루한거에요. 권태로운 거에요. 하나님께서는 그러면 우리에게 권태롭게 하려고 지루하라고 예수 믿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믿게 하신 것은 내가 생각하는 ‘믿는다’를 매일같이 내가 예측한 믿음과 믿음의 결실을 생각한다면 늘 예측 못할 믿음의 증거들을 우리의 인생에다가 수 놓듯이.

여자들이 심심할 때 수 놓잖아요? 십자수 놓듯이 우리를 팽팽하게 해 놓고 예수님의 자기 증인으로써 자기 기능으로 수를 놓아요. 바늘이 들어 올 때마다 아프지요? 아프지만 우리가 예수의 모습으로 예수님의 형상으로 예수님의 증인으로 수 놓아 지는 겁니다. 우리는 그저 수 놓을 천, 원단만 제공했을 뿐이고 아름답게 수 놓은 분은 주님이지요! 그 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어떤 구원받은 사람의 수놓아진 모습은 강도였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어떤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창녀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생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간통했고 살인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믿는다고 예수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삭개오 같이, 막달라 마리아 같이, 라합 같이, 다윗 같이, 사도바울 같이)

그런데 제가 오늘 본문으로 강의를 시작하면서 이제부터는 그들보다 더 엉뚱한 사람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바로 이방인입니다. 그동안 이방인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제 나름대로는 없었다고 생각하거든요.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유대인이나 아니면 유대인과 가까운 곳에서 호응을 보내는 주는 이방인이 있는데  지금 우리는 뭐냐하면 유대나라 하고는 거리가 멀었고 전혀 상관없습니다.
 
혹시 아는 친척 가운데 유대인이 있습니까? 없지요? 유대인하고 사돈의 팔촌 그런 관계 아니지요? 이스라엘 친구도 없지요? 이렇게 이스라엘과 관계없는 이방인이 구원된다는 것은 둘 중 하나에요. 그 중 하나는 구라이던지 하나는 진짜이던지 둘 중 하나에요.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가 아니고 진짜냐 가짜냐 그게 문제입니다. 이방인이 구원을 받으려면 조건이 있어냐 되요. 그게 뭐냐하면 언약과 매치된 이방인이어야 된다는 조건입니다.

그런데 구약은 안돼요. 예를 들어서 모세 율법이라든지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다윗 언약은 안돼요. 쉽게 말해서 “저! 이방인인데 십계명 지키겠습니다. 구원해 주세요!” 안돼요! 그거 안됩니다. “저 이방인인데 방주 만들겠습니다” 안돼요! 구약의 언약의 대상은 이스라엘 입니다. 나훔이라는 선지서가 있어요. 요나, 미가 다음에 나훔이거든요.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훔이라는 책은 니느웨의 멸망하는 책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뭐가 있다고 했지요? 요나, 미가, 나훔이잖아요, 요나에서 누가 회개 하지요? 니느웨 성이 회개 하지요? 그런데 그 다음 다음에 누가 멸망한다고요? 그 니느웨가 멸망한다고요. 이건 뭐냐하면 임시, 비 정규직이에요. 계약직이었어요. 그러면 이방인을 구원한 게 아닙니까? 아니에요. 구약은 이방인을 경유해서 결국 누구 구원으로 마감되냐 하면 이스라엘 구원으로 마감되요.

이방인조차 이스라엘을 위한 이방인이에요. 이방인을 위한 언약은 구약엔 없어요. 그러면 이방인은 언제 구원 받습니까? 이스라엘 본 자손이 “에잇! 난 이딴 거 안 믿어! ”라고 해서 티오가 생겨요. 빈자리가 생기면 그때 충원하는 구조 조정이 일어나서 빠질 건 빠지고 탈락될 건 탈락될 때 그렇게 이스라엘 가운데서 빠져 버리면 그걸 영어로 (remnant)라고 하고 남은 자에요.

다 남은 자가 아니고 유대인 가운데 남은 자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유대인 가운데 남은 자와 남은 자가 아님은 어떻게 구분 할까요? 그건 로마서 9장에 보면 나와요. 남은 자중에 탈락한 사람은 뭐냐? 행함으로 구원 받겠다 하는 사람은 다 탈락이에요. 그런데 은혜로 구원 받는 사람이 있어요. 유대인 가운데 그 사람만 남은 자에요. 그게 엘리야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주님이여! 나만 남았나이다”

그건 뭐냐하면 원래는 이스라엘 전부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남은 자가 되야 되는데  워낙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겨서 사사기 이전은 누구와의 전쟁이냐하면 이방 나라와 이스라엘의 전쟁이었다면 사사기 때는 누구와의 전쟁이냐하면 이스라엘 내부의 자기네끼리 싸워서 12지파중에서 11지파로 1지파가 날아가 버리는 것으로 끝나 버리잖아요. 내부 전쟁이잖아요.

정리하자면 사사기 이전 여호수아에서는 언약이 있는 쪽과 언약이 없는 쪽이 싸우는데 언약이 있는 쪽이 싸움을 잘 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있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중간에 개입하셔서 승리케 하십니다. 여러분들도 다 아는 이야기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면 새롭게 알아져요.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다? 이건 한 두 번 해서 이기겠어요. 두 세판 정도 해야 되는데 이것은 한 번에 끝나는 전쟁이었습니다.

아마 골리앗에게 한번 더 기회를 줬더라면 이마를 단단히 무장하고 나왔을 거에요. 그 땐 다윗이 못 이겼을지도 모르죠! 삼 세판이다고 다시 하자고 했을거에요. 하늘나라에 무슨 삼세판이 있습니까? 패자 부할 전 같은 건 없어요. 한번 승리케 된 것으로 구원 받습니다. 승리한 것으로 자기 인생 끝났어요. 주께서 친히 손대시는 인생. 왜냐하면 내가 주도가 아니고 언약이 주도하기 때문에,


그럼 언약이 주도하면 내겐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언약이 주도하게 되면 하나님께선 나를보고 승리케 하시는 것이 아니고 언약을 보고 승리케 해주세요. 이것이 구약에서 계속해서 보여주는 주님의 기능이었습니다. 강의 다시 해봅시다. 노아 방주가 특이하지요? 노아 방주 이후에 특이한 것이 뭐냐하면 언약 위주로 사람 안보고 언약이 있는 쪽이 승리하는 게 방주 만큼이나 특이 현상이 되는 겁니다.

방앗간 주인인 기드온이 뭘 할 줄 알겠습니까? 언약이 있는 쪽이 승리케 했을 때에 그러면 “목사님 참 쉽네요? 언약이 있습니다! 하면 되잖아요?” 그런 말을 안 믿어요!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믿지 않아요 왜냐하면 언약을 주신 분이 언약이 있고 없고를 먼저 알기 때문에 “언약 믿습니다”라는 말을 해도 그건 빈 말이에요. 내가 예수 믿습니다!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미 믿고 안 믿고를 누가 아시기 때문에? 주께서 다 아시잖아요!

시편에 보면 그런 말씀 나온다고요.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신다고 했거든요 (시 139:2) 나의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잖아요. 개인, 개인에게 일어났던 일이 있잖아요. 심판관이 다 있어요. 권투 할 때 심판과 야구나 축구경기 할 때도 심판관이 다 있다구요. 주께서 다 아세요. 아는 대로, 고백하며 살면 됩니다. 그래서 늘 하는 말이 막 사세요! 막 사시란 말이에요. 누구 의지하고? 심판관 의지하고 보시는 분 의지하고,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시139:7) 바다 끝에 가도 거기 계시고 자살하려고 산 속에 가지 말고 여기서 자살해! 산속에 가서 자살하나 여기서 자살하나 주께서 다 아시고 마포대교에 가서 자살해도 다 알아요. 죽으려고 약국마다 돌아다니며 수면제 구할 때도 주님께서 옆에서 서 계시며 “얼마 입니까?”할 때도 보고 있다니까요

사람은 못 죽어요. 무슨 자살을 해요! 죽어야 자살도 하지! 안 죽는데~ 오늘 강의 핵심이 그것까지 나올꺼에요. 그건 조금 있다가 이야기 할거지만 주님의 안목은 우리가 쓰는 개념 있잖아요? 그 개면하고 달라요! 왜? 언약을 경유하기 때문에 우리는 언약을 경유하지 전에는 이방인이라니까요! 다시 할께요. 이방인은 뭐냐 이방인 보고 이방인이라고 하면 기분 나빠 합니다.

여기서 이방인이라고 할 때는 반드시 이방인 아닌 족속, 민족을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이방인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뭐라고 하냐 하면 “네가 뭔데”이렇게 나오거든요? 이방인 아닌 쪽은 뭐라고 하게 되냐 하면 “우리는 언약 있다!” 우리 집엔 언약 있다. 우리 집에 정수기는 얼음 나온다. 우리는 언약있다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러면 이방인들이 피식 웃고 그러지요. 우리 집엔 칼 있다, 우리 집에 무기 있다, 우리 집에 활 있다, 우리 집에 군사 있다고 해야지 그러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하는 말이 너희 이방인들은 언약이 없으니까 믿는 구석이 뭐냐하면 칼이 몇 정이냐 말이 얼마나 있느냐? 군사가 몇 명이냐? 기껏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 믿어요. 우리 집 재산 많다, 우리 교회는 교인 많다, 우리 교회는 헌금 많이 나온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 정통적인 축복된 교회 맞잖아? 줄 창 이런 것만 쥐고 있다니까요? 나는 청화대에 아는 사람 있어! 그게 삶입니까? 그게 노아 방주 안의 삶입니까? 다른 말로 그게 언약 안의 삶입니까? 

시편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어요! 너는 활과 병거를 의지하지 말고 사람 수에 의지하지 말고 구원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되는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하나님께선 이것만 구하기 때문에 그렀습니다. 빨간 색으로 쓸테니 잊지 마세요! 딱 한자에요. ‘의’입니다. 너가 재산이 얼마나 있느냐를 묻는 게 아니고 "너! 내 앞에서 의인 맞아?" ‘의’만 이야기 하는 거에요. 로마서에 올 때까지 아무도 이것을 언급한 사람이 없었어요.

로마서에 사도 바울에 의해서 처음으로 언급됩니다. 이 의는 인간에게서 나온 것은 아니었구나! 인간에게서 나온 의가 아니라면 인간의 행함과 인간은 노력은 뭐에요?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를 훼손시키는 방해 공작에 해당됩니다. 누가 방해해요? 내가 나의 구원을 매일 같이 방해공작하고 있어요. “하나님이여! 기도 했습니다. 복 주시겠죠? 하나님이여! 이렇게 착한 일 했습니다. 복 안 주기만 해봐라!”

누가 누구를 방해하는 거에요? 내가 내 구원을 방해하는 거에요. 내가 할 수 있는 의를 행했습니다. 이 의로 거기에 합당한 것을 성과급으로 주시기 바랍니다. 이게 바로 그렇게 몰랐던 나의 이방성이에요. 나의 이방 화, 그동안 몰랐던 진실한 내 모습이에요. 끝까지 나의 가치, 나의 의미, 나의 자존심을 포기 할 줄 몰라요.

매슬로우의 욕구설(욕구 5단계)에 보면 첫째가 생존의 욕구, 두 번째가 안전에 대한 욕구, 셋째가 소속감과 애정의 욕구, 넷째가 성취, 존경에 대한 욕구, 다섯째가 자아실현의 욕구에서 네번째인 자존감의 욕구는 자존감이 있다라는 말이 아니고 자존감에 대한 욕구가 있다라는 말이라니까요.

이 자존감은 자존심이 세야 되는 게 아니고 내 자아보다 더 센 욕망이 나로 하여금 “네 자존심을 세워야지! 니 자존심 죽으면 안돼! 그러면 너 답지 않아!”라고 내 속에 있는 다른 목소리, 다른 욕망이 나로 하여금 자존감을 앞장세우며 살도록 부추긴다니까요. 그게 뭐냐 이방인이에요. 이방인이란 말은 혼자서는 이방인이 아니에요. 그럼 이방인이 뭐냐? 우리가 단군의 자손, 배달의 자손인데 문제는 언약을 받은 유일한 민족, 이스라엘 민족과 대비가 되면서 우리는 졸지에 이방인이 되는 거에요.

이방인의 역할이 있어요. 뭐냐하면 언약을 훼방하고 훼손하고 공격하고 저주하는 그런 역할들을 우리는 하게끔 되있어요. 이것이 성경의 신․구약 전체의 언약적 체제에서의 전체내용입니다. 그런데 감히 우리가 이방인 주제에 뭘 요구한다? 구원을 요구하잖아요?  이것은 언약에서 나온 구원을 나에게서 나온 구원이 해코지하고, 공격하고, 핍박하고, 멸시하고, 미워하는 기능으로 나오게 되있어요.

뭘 앞장세워서? 아까 자존감을, 나를 구원 안 해주면 주님 싫어! 날 구원 안하고 날 재끼고 간다면 주님 미워할꺼야! 이런 것, 어느 세월에 해결하고 구원 박겠습니까? 구원된다고 했어요? 안된다고 했어요? 아까, 이방인의 구원은 빈자리가 생겼을 때 유대인에게서 구조 조정이 일어났을 때 그 때 빈자리가 생겼을 때 구원 된다고 분명 했지요? 다시 합시다. 이방인은 자체 구원 없습니다. 이스라엘 자리에서 티오가 생겨야 빈자리 채우는 식으로 된다는 말이죠.

그럼 이스라엘에서 빈자리가 안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안 생겨도 네가 생기라고 할 권한이 없다니까요! 애초부터 내놓은 자식인데 애초부터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 없다는 건 하나님이 원하는 ‘의’가 없다니까요! ‘의’라고 하는 것은 그냥 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을 알아서 주시는 거에요. 노아가 술 끊어서 구원 받았습니까? 노아가 술 끊어서 구원 받았어요? 방주에서 나온 후에 얼마나 술을 먹었든지 자기가 옷 벗은 줄도 모르고 주사도 무슨 하체 벗는 주사가 다 있는지?

얼마나 쳐 먹었는지 자기 옷 벗은 줄도 몰랐어요. 술 끊어서 구원 받은 것 아닙니다. 술 먹으라고 권하는 거 싫어요. 술 먹으면 개 된다고 보는데,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은 언약이에요. 언약, 왜 하나님이 노아를 구원 하느냐? 은혜로 의롭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죄는 싫어해요. ‘의’만 좋아 하는데 ‘의’가 없잖아요. 의가 없으니까 (하나님) 자기 의로움을 위해서 노아 의로움 뿐만 아니고 자기 의로움을 위해서 죄인을 구원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 자기 의가 된다니까요! 

지금 구원을 우리가 신경 쓰면 안된다니까요! 구원은 우리 소관이 아니에요. 주님 소관이라니까요! 고린도후서 5장 21절 한번 봅시다.

(고후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지금 하나님이 누구를 상대해요? 우리하고 상대해요? 예수님하고 상대해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언약이 옛날 노아의 방주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언약과 상대해요. 로마서 3장 25절 한번 봅시다.

(롬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롬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역시 하나님이 누구를 상대해요? 예수님을 상대하지요. 예수님이 성취했습니까? 예수님이 성취 했어요? 안 했어요? 성취 했지요? 일 끝났지요? 그럼 우리 구원도 끝난거에요. 내가 내 구원에 손댈게 더 이상 남아 있질 않아요. (26절) 자기도 의로우시고, 하나님이 지금 자기를 위한 일을 했을 뿐이에요. 우리 구원이라고 안헸어요! 그런데 우리가 왜 자꾸 구원받으려고 합니까? 뭔가 사고방식이 글러먹었어요. 잘못된 거에요.

참 성경 특이하지요?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특이한 게 뭐라고 했습니까? 언약은 뭐라고 했습니까? 특이하잖아요. 여러분! 성경을 알고, 복음을 아고 특이한 것을 느끼잖아요. 어디가 특이하냐? 친하게 지내던 사람도 원수지간이 되고 동창생도 남처럼 되고 전부 가만있어도 소통이 안 되는, 의미 소통이 안 되는 그런 식으로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요.

그게 뭐냐하면 언약이 그냥 언약으로 지식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고 언약을 받게 되면 나를 가지고 능력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내가 예측 못하는 거에요. 나로 인해 관계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요. 두두둑! 친구들 떨어져 나가는 소리, 교인들 떨어지는 소리 두두둑! 전부 다 들려요. 주께서 일하는 중입니다. 중국 영화에서도 이런 영화가 없어요. 황당무개 하다고 해야 할까요?
 
구원 받는 우리는 입을 다물어 버리고 네 구원, 우리 구원 듣지도 않아요. 개 무시 해버리고 주님이 자기 의로움에 작업에 일환으로서 졸지에 우리가 한 것도 없이 의가 되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런 혜택은 이방인에게 주어진 혜택이 아니고 이 혜택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혜택인데 이 이스라엘이 고마운줄도 모르고 이걸 차버린 거에요. 왜? 이스라엘의 구원은 잠정적 구원이기 때문에 그래요. 영원한 구원이 아니고, 어렵다! 어렵다!

구약의 일시적이에요. 왜냐하면 아직까진 언약의 완성단계이기 때문에, 음식이 다 끝난게 아니에요. 요리가 레시피, 양념 아직 다 안 넣었어요. 음식이 마감이 아직 안되었어요. 아이고 머리카락이 있네! 머리카락 빼버리는 거에요. 완성된 레시피를 위해서 중간에 뺄거 빼고 구조조정하고  남은자만 그리스도와 합하도록 한거에요.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 멸망했는데도 불구하고 남은 자만 건지는 그 원칙을 주님이 십자가 지고 그대로 이방인인 우리에게 그대로 덮쳐버린 겁니다.

그래서 쟁반에 누워 있기만 하세요. 소스 뿌려대서 묻히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아까 강의 제목 뭐라한다 했나요. 방해공작이라 하려했는데 바꿔야 겠어요. 소스로 해야 겠어요. 소스가 뭐에요? 가만히 채소 있는데다가 갑자기 소스 뿌리잖아요? 맛있다고 먹고 소스 뿌린 분이 맛있다는데, 주님이 맛있다는데 나의 입 속에 소스  막 들어가고 힘들어도 그건 상관없어요. 주께서 맛있다는데요.

그것이 누가 복음2장에 나옵니다. 목자가 양치고 있을 때 하늘에서 소리 나지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 중에 평화로다. 소스 발려진 인간은 기분 좋다는 말이거든요. 내가 기뻐서 소스 부은 인간은 그렇게 맛있다, 제목을 맛있다고 해버릴까? 하여튼 내용이 그거에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덮어 씌운거에요. 무엇으로? 하나님의 의로, 제목을 이걸로 정합시다. 의의 소스.

뒤집어씌운다니까요. 그런데 그것을 누가 방해공작 합니까? 뒤집어 쓴 내가 평생토록 방해 한다고요. 기도 했으니까 응답해 달라! 되지도 않는 “네가 뭔데? 저 나름대로 의롭잖아요?”이렇게 나와요. 정말 우리가 의롭다면 주의 의만 보여 드립시다. 그리고 뭐는 빠진다? 나의 의는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쏙쏙 뺍시다! 다 뺍시다! 나는 무가치한 존재이고 씨잘대기 없는 존재이고 아무 쓸모없는 존재인 것을 날마다 우리가 발취해 내세요.

그것을 한마디로 줄여서 뭐라해야 하냐하면 씨잘대기 없는은 너무 길어요. 쓸모 없는도 길어요. 간단하게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에게 의의소스 부어서 주님이 티오(빈자리)에 합류케 해주셔서 천국이라는 재벌 회사에 신입사원으로 취직하게 하신 그 어렵다는 취직을, 회장님 앞에 면류관 갖다 바치도록 신입사원으로 취직시켜 주신 내가 시험을 쳤습니까? 회장님이 기분 업! 되서 너! 너! 너해서 뽑아 자기 의롭게 소스 부어버렸는데

원래 재벌들의 빌딩이 높잖아요? 35층에서 창문 열고 소스 갖다 부어 버리니까 길에 가던 나그네가 소스 얻어맞는 그런 식이 된니다는 말이죠! 그 일을 누가 하느냐? 지금도 주님이 친히 하세요. 이미 완성했던 것은 반복이 가능 합니다. 반복이라는 말은 완성을 했기에 가능한거에요. 완성을 안하면 아직도 미완성으로 남아 있어요. 그러나 완성이 되면 이제는 같은 것을 무한 복제하면 되요.

무엇을 무한복제 하느냐? 갈라디아서 3장1절에 십자가만 무한 복제하는 거에요. 갈라디아아서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 하는 것이 주님의 십자가 진 것이 15년에서 25년 사이가 되요. 확실한 날짜나 연대는 모르니까 이미 지나간 십자가 사건을 두고 십자가가 앞에 보이잖아! 이 말이 무슨 뜻인 줄 알아요? 난 십자가 아는데 혹시 나처럼 누가 십자가 아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라는 그런 뜻이란 말이죠?

사도바울은 사람들 꼬시려 온 게 아니에요. 괴수 모집 하려고 온 게 아니고 십자가 모르면 꺼져 주세요. 이런 뜻이잖아요. 사도 바울이 십자가 모르면 꺼져 주세요라고 할 때 사람들이 궁금할께 아닙니까? 십자가 아는 것 하고 모르는 것 하고 어떻게 구분합니까라고 말할거란 말이죠. 사도 바울은 율법에 행위를 아직도 내가 지금보다 나아질수 있다는 향상적인 관점, 내가 내 행위로 나아질 수 있다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 받은 게 아니고 여전히 바리세인입니다. 나가주세요. 좋게 말해서 나가주세요이지 사실은 꺼져 주세요.

나는 내 백성이 아니면 건져 줄 마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예수를 못 믿는 것은 당신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억지로 그렇게 하지 말라고 그렇게 하신 거에요. 억지로 믿지 말라고 하는 말 자체 속에는 뭐가 들어가 있습니까?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개무시, 갑자기 제목 바꾸고 싶지만 이젠 안 바꿀 겁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개무시, 이게 바로 에덴 동산에서 추방했던 하나님의 취지입니다.

개무시 해 버리고 뭐로 바꾸느냐 인간을 인간이라구요? 인간은 없습니다. 물질 밖에 없어요. 죽음은 물질화 합니다. 흙이 되잖아요. 물질로 바꿔요. 물질 됐잖아요? 죽었잖아요? 지금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례 치르고 화장터에 가서 가루가 됐잖아요? 자! 가루를 딱 놓읍시다. 쟁반에 가루를 놓고 필름을 돌려 시간을 거꾸로 해보면 화장터에서 가루되기 이전에 장례식장 모습 나오겠지요?

화면을 해 놓고 필름을 거꾸로 돌려 보면 장례식장 나오고 울고불고 난리하는 모습도 보이고 장례식장 나오기 전에 부주 얼마나 들어왔나 돈 세는 것 보이겠고 이것보다 더 앞으로 돌려보면 큰 아들 집 나오고 작은 아들 나오고 딸은 출가외인이다라고 유언하고 하는 게 나오고 더 돌려보면 80세 때쯤 나오고 더 돌리면 70세 때 나오고 다방에 앉아 다방 레지 손 만지고 있는 것 나오고 60세, 50세에는 구조조정 할 때 안 잘리려고 애쓰는 것 나오겠지요? 20세 때는 취직 어떻게 해 볼라고 하는 것 나오겠지요?

인생을 아무리 80, 70을 살아도 결국 뭐가 된다? 필름 돌려 보면 물질이 된다. 물질이 잠시 환등기 안에서 보면 잠시 잠깐 애인 만나고 튕기다 다른 남자 만나고 결혼하고 이런 것도 전부다 하나의 허기이고 잠시 인간인 줄 알고 착각해서 영원히 인간으로 살 줄 알고 착각해서 그렇게 되는 거에요. 문제는 이 물질을 가지고 인간의 물질을 언약이 동원되면 주님의 인생에 다시 거꾸로 필름 돌려보면 네가 아브라함이고 네가 노아이고 네가 다윗이고 네가 언약에 속한 야곱이다.

이것을 다 합해서 이름 지어 보면 그리스도인, 이름 짓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을 이스라엘 되게 하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잖아요. 그렇지요? 다니엘 속에서 장래의 지혜를 발견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죠? 베드로 전서에 보면 나오니까 노아에게도 예수님이 들어있어요. 왜냐하면 베드로 전서에 보면 선지자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다 들어 있으니 그 그리스도의 영이 바싹 마른 뼈 도는 흙에 와버리면 우리의 과거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그 이스라엘의 역사가 바로 곧 우리의 부분 부분을 보여 주는 거에요.

아하~ 내속에 노아 들어있고 내속에 야곱 들어 있고 내 속에 아벨 들어 있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내가 30대에서 40대 까지는 아벨의 시간이고  50대에서 60대에 사장과 한바탕 하는 것은 엘리야 시대이고 70대에는 다방에 가서 비싼 것 시켜서 쌍화탕 먹고 화장 떡칠한 마담 손 잡았을 때는 누구로 할까? 다윗, 밧세바 범했던 경우이고 이게 이방인은 유대인이 되야 돼요.

언약을 통해서 그렇게 되게 하시고 망했던 이스라엘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망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것은 이방인도 자동적으로 망했다는 거에요. 그 망한 쓰레기장을 이제는  나의 남은 인생으로 껴안는 게 중요합니다. 껴안아야 되요. 그리고 바르세인 욕하지 마세요. 우리가 바로 매일 같이 바리세인 노릇을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만 구원 받은 사람은, 천국가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자신이 바리새인이라는 것을 알면 구원 받아요. “주여! 내가 또 바리새인 짓을 하고 있습니다. 이혼 증서만 내어 주면 나는 이혼해도 되는 인간이다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바리세인의 사고방식을 어찌 그리 닮았는지, 지남 낮 설교에 그런 걸 했잖아요. 이혼 증서만 써주면 이혼이 됩니까? 했을 때 하나님이 짝지어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 하니까 제자들이 그야말로 통곡하듯 울면서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면 장가 안 갈꺼에요“

얼마나 새로 장가가고 싶었으면 “이럴줄 알았으면 장가가지 말고 혼자 살껄” 요새 우리 교회에 혼자 사는 것이 재미 들린 분이 왔어요. 나이 42살인데 “목사님, 혼자 사는 것이 이렇게 재미있네요” 결혼 해본 적이 없어요. 아직도 총각인데 그렇게 편하답니다. 모르겠어요. 좋은 사람을 못 만나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기술도 있어요. 우리 교회 그래픽 올리게 되어 있지요? 그분 이십니다. 아직까지 다윗의 죄를 못지었어요.

언약이라 하는 것은 쉽지요! 언약이라 하는 것은 이방인한테는 해당이 안됩니다. 그런데 구원 받은 이방인은 본격적으로 언약이 적용이 됩니다. 구약에 실패한 것, 사사의 이야기, 다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삼손이 여자 따라 다닌 것도 다 우리 이야기이고 에스더 같은 경우는 뭡니까? 위기일발이었습니다. 만약에 그때 아하수에로 왕이 잠 안자고 창고에서 서류 안 봤으면 다 죽었어요.

그런데 잠이 안와서 서류 들춰 보다가 왕에게 잘한 사람은 어떻게 대우해 주면 되는가? 이렇게 해서 모르드개가 살았잖아요. 그처럼 그런 위기가 성도에게 몇 번이나 올지 몰라요. 완전히 죽었다 싶은데 나를 공격하는 쪽에서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갑자기 헤헤 거리면서 좋게 대할 수도 있고 이번 계획 죽어도 안됩니다라고 하다가도 갑자기 계약해 주세요하고 들어 올수도 있는 문제이고

그것은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시고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것도 전부다 주님의 뜻이다 그런 상투적인 말 하지 말고 언약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되게 하기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자기 의를 위해서 우리는 의로운 인간으로 살아야되는 팔자로 우리에게 언약의 모습들을 보여주는 겁니다.

사람들이 간단하지만 중요한 질문들을 하지요 “목사님 성도는 어떻게 살면 됩니까? 굉장히 간단한 질문인데 본인에겐 심각한 질문이죠. 들을 때는 아는 것 같지만 돌아서면 또 모르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돌아다니는 하나님의 의를 수집하며 사시면 됩니다. 내가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 변하는 모습을 보고 감사하면 되요. 범사에 감사하면 되요.

분명히 행동 개차반이에요. 분명히 내 욕심이고 이익이에요. 내 고집, 자존심, 자존감 이런건 죽을 때까지 포기 안합니다. 분명히 내 자존심과 이익을 위해 했는데 그것을 의로 바꿔 주시는, 바꾸게 해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감사하며 살면 되요. “에이씨! 우산도 없는데 비가 오다니” 그렇게 하다가 “이 가을에 비 맞으면 운치도 있고 낭만적이잖아!” 이렇게 생각하면 또 감사가 되지요.

히브리서 다시 하번 봅시다. 히브리서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냐하면 우리에겐 죽느냐 사느냐가 관심사라고 했지요? 그런데 히브리서 10장 37-39절에 보면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주님의 관심사는 뭐였습니까? 하나님의 관심사는 주님에게만 있지 우리의 사느냐 죽느냐의 관심사엔 관심이 없어요.  

도사가 도포  휘날리면서 휙! 빨리 지나가게 되면 물리학에서의 모든 운동은 에너지운동이에요. 속도가 빨리 지나가면 여기서 굉음이 나게 되고 그 영향력으로 파도가 치면서 넘어지게 되어 있어요. 빠른 기차나 자동차가 지나가면 내 차가, 작은 차가 막 흔들리잖아요. 주님께서 도포입고 휙! 지나가면 우리는 내 생각 하다가 “뭐지 이거? 왜 갑자기 특이한 현상을 느끼지? 어떤 힘을 느끼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이미 주님이 활동하는 영역 속에 내가 놓여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언약맨이에요. 신약에선 말한 신약적인 이스라엘 사람이에요. 그러면 신약적인 이스라엘 사람에게 언약이 적용 되는데 언약이 어떤 체계이기에 오늘날 우리가 이런 일을 하느냐!
그건 10분 쉬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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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이한례

안양20150911b-히10장37절(의의 소스(드레싱)-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두 번째 시간에서 생각할 것은 바로 언약에 있어서 언약의 요소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이 되느냐, 그것을 제가 말씀을 해드리겠습니다. 시편을 잠시 보겠습니다. 132시편에 보게 되면, 왜 갑자기 시편을 보느냐, 이유가 있어요. 그게 다윗 언약이 나와요. 여기 시편 132편 4절에 “내 눈으로 잠들게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아니하기를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 그 다음에 10절에 보면 “주의 종 다윗을 위하여 주의 기름 받은 자의 얼굴을 물리치지 마옵소서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셨으니” 이렇게 돼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집이 분명히 있다는 거예요. 계시는 집이. 처소가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처소가 시온에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시온과 관련된 인물이 누구냐 하면 노아도 아니고 모세도 아니에요. 다윗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처소에 들어간다는 말은 인간의 의미,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 언약은 왜 주어졌는가, 그 의미가 연결이 되고 말았어요.

 

하나님의 처소에서 하나님과 같이 사는 겁니다. 사는데 거기에 중간자로 우리가 못 들어가는 그곳에 들어가게 하는 중간자로 누구냐 하면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 “ 주의 기름 받은 자의 얼굴을 물리치지 마옵소서”라고 돼 있죠?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그걸 메시야라고 해요. 메시야! 그런데 성전에서 기름 부은 자가 누구냐 하면 제사장을 의미하는 겁니다. 특별한 일.

 

자, 이 시편 132편을 갑자기 언급하느냐 하면 이 죽음이란 그것이 이 인간 세상의 죽음은 우리 보통 자살하거나 늙어 죽거나 그런 죽음, 죽으면 흙이 되고 한 줌의 재가 되는 이게 죽음의 의미잖아요.

 

천국의 죽음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처소 바깥에서 살아있는 걸 죽음이라 합니다. 굉장히 특이하죠. 하나님의 처소에 합류하지 못하고 ‘나가 놀아라. 지구를 떠나거라.’ 하는 식으로 처소에 가담하지 못하고 빙빙 도는 거, 그걸 죽음이라고 해요. 사라지는 게 죽음이 아니고 하나님 없이 마귀하고 같이 지내는 거, 그걸 죽음이라고 합니다. 아참 이 개념을 제가 지금 언급을 하면서도 이걸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될 지 정말 왜냐 하면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들이 내 몸이 흙이 되는 이게 전부하고 알고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있으면서도 ‘이게 죽음입니다.’라고 말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이거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맙시다.’ 하는 식이 되는 과격한 표현이 되는데 이게 과격이 아니고 진짜 맞아요.

 

시편에서는 시온이라는 게 없고 주의 처소가 없으면 이 말이 맞아요. 살다죽으면 어디 가는지 모르면 되는데, 언약이 뭡니까? 언약이 장래 완성되고 하나님의 목표로 삼는 그 마지막이 다윗 언약 안에 담겨서 누구한테? 이방인한테는 아니죠. 누구한테? 이스라엘에게 등장한 거예요. 등장을 하니까 다윗이 말하기를 주의 처소로 저한테 맹세했잖아요. 약속, 약속 했잖아요? 하나님의 언약 맨은 어디 간다? 언약 백성은 하나님의 처소에 합류한다고 저한테 약속했잖아요? 하고 나온 거예요. 처소, 하나님의 궁전, 언약을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이 다윗 언약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더 이상 죽음이 아니고 그걸 생명이라 해요. 죽음이 없고 영원한 생명이 있는 거예요. 이 사고방식, 이 생각이 주님의 요한복음에 그대로 주어지는 겁니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 목숨이 길어진다는 말이 아니고 너는 나하고 같이 살아야 돼. 전에는 나의 아버지였는데 이제는 나의 아버지가 너희의 아버지라. 처소가 마련 되게 되면 이제는 나의 아버지가 너희 아버지가 되는 거야." 이거는 목숨 끊어지는 거와 아무 상관없어요. 늙어서? 이런 거 아무관계 없어요.

 

성령이 임하면 성령의 처소가 되어서 사나 죽으나 하나님이 살아도 영생, 죽어도 영생, 나사로 봐라 죽어도 나흘 만에 살아났잖아. 봐, 하나님, 나하고 같이 있잖아. 한패 먹었잖아. 같이 한 동네 사는 거야, 한 동네! 통장은 주님이 통장이고. 한 동네 주민이라니까. 나사로, 아브라함과 엘리야 이런 사람이 주민이라니까요.

 

그걸 우리가 이방인으로서는 믿기가 곤란하고 어디를 가느냐. 우리가 유대인이 돼야 돼요. 다윗한테 찾아가야 돼요. 다윗 언약을 거쳐서 이제야 아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 언약을 이제부터 한번 생각해 봅시다. 다윗 언약에서는 흔히 죽는다. 산다. 이 문제를 다윗에게 언약을 줌으로써 그것이 산다. 죽는다. 그 문제는 이것은 처음부터 우리가 잘못된 생각 이예요. 이것은 마귀가 심어준 잘못된 개념을 그게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갑니다. 벌벌 떨면서 죽기가 무서워서 마귀한테 벌벌 떨면서 살아가거든요.

 

사실은 언약이 오게 되면 그렇게 벌벌 떨 필요가 없어요. 흔히 제사 지낸다고 하면 가면 되죠. 뭐 벌벌 떨 필요 없어요. 주께서 만든 환경이니까. '잘 계셨어요? 오빠.' 이러면 되죠. 아무 의미 없어요. 이 땅 자체가 죽은 자니까. 마지막 위로는 뭐라 합니까? '안녕히 계세요. 잘 계세요. 죽은 자여.' 이런 식으로.

 

이게 다윗 언약에서 그런 이야기했죠.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뭡니까? 내가 어떻게 다윗 언약에 속하느냐? 이제 이 문제가 남아있네. 다윗 언약에 속하면 돼요. 속하면 시온성에 도달돼요. 얼마나 좋았으면 시편 84편에 보면 내가 천국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세상의 천 날보다 더 낫나이다. 하루 만이라도 이 천국의 문지기로 그냥 넣어주신다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그 딴 거, 세상의 노래방이고 뭐 좋은 놀이터 골프장이고 그 천 날보다도 나는 여기가 좋습니다. 하는 거예요.

 

사실 세상에서 좋은 데 구경 간다 하지만 그게 거기 가봤자 예상보다 좋지 않은 것은 내가 거기 끼어들기 때문에 그래요. 지구상 앉아 있는 내가 거기 가면 그곳도 분위기 다 버려요. 사람은 존재함 자체가 남한테 피해를 주게 돼 있거든요. 어디 가도 그냥 좋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고 성질 건드리는 사람 있잖아요. 그러면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간섭하고 싶다 말이죠. 괜히 놀러가서 한바탕 싸우면, 그건 내가 끼어서 그런 거예요.

 

그래서 다윗 언약은 뭐냐, 내가 끼어들더라고 내 성격, 내 성향, 내 고집, 내 자존심, 일체 묻거나 따지지 않는 절차를 걸쳐서 다윗 언약에 속합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너무 좋다.' 이렇게 되지, 여기서 간섭하고 이런 거 없어요. 일단 여기 오게 되면 너무 좋은 거예요. 다윗 언약 절차에 대해서 쉽게 하기 위해서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여러분 잘 아는 사람 이예요. 삭개오. 삭개오가 돈만 아는 세무쟁이죠. 세무서 하청업자. 목표량 정해주면 나머지는 지가 다 갖는 것. 목표량을 저 쪽에 줄 것만 주고 나머지는 지가 갖는 거예요. 따라서 저쪽에서 비율을 높여버리면 나머지는 자기 것이 되는 거예요. 적당히 높여야지 너무 높이면 미움 받으니까 안 되고.

 

요렇게 자기밖에 몰랐던 그가 주님 만나고 난 뒤에 "구원이 네 집에 이르렀다."는 그 소리 듣고 난 뒤에 그 귀히 여기던 자기 안방에 있던 그 막대한 돈을 아낌없이 무려 "4배나 갚겠나이다." 하고 내놓죠. 어디 억지였습니까? 즐거웠습니까? 굉장히 즐거웠죠. 남에게 구제 하는 게 즐거운 게 아니고 이 딴 거 없어도 충분하게 즐거울 게 생긴 거예요. 심지어 내 목숨보다 더 확실한 걸 가진 거예요. 내 목숨보다! 내 목숨 이거보다 더 확실한 거예요. 내가 죽는 것도 확실한데 하지만 죽는 것보다 더 확실한 게 뭐냐 하면 영생이라는 사실, 내가 죽어도 주께서 네 속에 구원이 있다는 그 구원이 내 존재보다 더 확실해요. 난 환상 같아. 난 내 몸 자체가 꿈같아. 하지만 꿈이 아닌 진짜배기는 주님의 그러한 평가와 결정에 있다는 사실을 삭개오가 알았습니다.

 

그러면 그 삭개오들이 모인 그 나라가 무슨 나라? 천국이잖아요. 천국에서는 지루하거나 재미없다거나 남 욕하거나 '저 인간 왜 왔어?'라고 손가락질 할 이유가 전혀 없어요. 뭔가 걸렀어. 뭔가 천국 들어오면서 이게 바뀌어졌어요. 나 중심으로 살다가 이제 그 딴 거, 나 중심으로 산다는 그 자체가 부끄러운 정도가 된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 1장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복음이 얼마나 좋은지 로마서 1장에서는 이렇게 강조했어요. 복음을 아느냐? 복음을 알아? 물으면 이렇게 하나의 방정식을 내었습니다. "부끄러움이 없나니" 이게 하나의 공식 이예요. 이 땅에서 전혀 못 산다. 지하 방에 산다. 어떤 부끄러움이 없이 복음으로 즐겁냐? 이게 복음 아는 사람 이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싸울 일이 없죠. 왜 싸웁니까? 남한테 부끄럽지 않으려고 싸우잖아요. 그런데 부끄러워도 괜찮아요. 이 딴 거 부끄러워도 괜찮아요. 져도 괜찮고 부끄러워도 괜찮고 욕 얻어먹어도 괜찮고. 복음에는 부끄러움이 없나니, 내가 너를 부끄럽지 않다 하는데 남이 부끄럽게 하는 거기에 왜 신경 쓰느냐 이 말입니다. 주님이 '너 어서 오너라.' 반기는데 남들이 얼레리 꼴레리, 하는 거기에 대해서 씨, 뒤돌아보면서 성질 낼 필요가 뭐가 있느냐 말이죠.

 

내 운명을 결정하는 분이 따로 있는데 심판자도 아닌 자가 놀려봤자 그들은 다 무능력한 자들이거든요. 내 팔자에 내 운명에 어떻게 변화를 주지 못하는 능력이 없는 자들이 그렇게 날 욕한다고 해서 거기에 신경 쓰지 말라는 거죠. 강아지 짖는다고 ktx 기관차가 스톱하겠어요? 스톱 세우고 '니 강아지 이리 와.' 따질 필요는 없는 겁니다.

 

사람이 바쁘게 즐겁게 감사하고 기뻐하고 춤출 때는 그 발바닥에 개미 수 백 마리 죽었어요. 개미 죽는 거 신경 안 씁니다. 지 좋으면 되지 발바닥에 개미 죽는 거 신경 안 써요. 마귀에 속한 인간들 밟혀도 괜찮아요. 그거 신경 쓰지 말고 골치 아픈 거 생각하지 마세요. 인간은 아무도 이웃 사랑 못합니다. 사랑하는 순간 내 사람 되기 때문에 이웃 사랑이 안 돼요. 굉장히 수상해져요. '내 니 사랑해줬잖아.'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차라리 그럴 거 같으면 사랑하지도 말아야 되는데 인간은 항상 본전을 생각하게 돼 있어요. 본전 안 보고 장사한다 하는데 거짓말입니다. 우리 인생도 반드시 뭔가 사랑을 베풀고 배려하고 양보를 했으면 반드시 저쪽에서 좋은 반응을 기대하게 돼 있어요.

 

삭개오 같은 경우에 과거가 그렇게 참 욕 얻어먹어도 복음 안에서는 부끄러움이 없나니, 참 이걸 어떻게 보면 참 뻔뻔스럽다 할 정도죠. 뻔뻔스럽죠. 또는 낯짝 두껍다. 이렇게 하는데 복음을 위해서라면 낯짝 두꺼우세요. 한 것도 없이 추석 선물 온 거 보세요. 주스 하나 사주고 추석 선물 받고. 돈이 수만 원어치 넘어요. 우리끼리니까 받죠. 문제는 신자 간에는 이렇게 간단한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렇게 우리를 구원하는 것조차 니 좋아라, 가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 의로움을 위해서, 로마서 3장 봤죠? 우리도 의롭고 하나님도 의롭고. 하나님 자기 좋아라고 우리를 구원하신 거죠. 자꾸 우리 생각하면 안 돼요. 주님 좋아라고 우리를 구원 했다 이 말이죠.

 

만약에 내가 나 좋아라고 구원한 거 같으면 그건 주님 좋아라 한 게 아니기 때문에 그걸 때치, 때치, 해서 손 다 털어요. 애들 골목에 놀다가 흙덩어리 놀다가 저녁 먹으러 오면 엄마가 '자, 손 털고.' 다 털고 손 씻기잖아요. 매일같이 우리 한 평생은 뭐냐, 털려지는 생활이 남은 90까지 사는 인생에 털리세요. 나중에 기억도 다 털려서 ‘아저씨 누구세요?’ 이래요. 다 털려도 괜찮아요. 침해 걸리는 것도 하나님의 의로움입니다. 하나님의 훌륭한 작업 이예요. ‘니는 걸려라’해서 걸린 거예요. 미리 예상하세요. 미리 공증하던지 유언하세요. ‘내가 나중에 침해 걸리더라도 예수님 모르는 거 아니다.’ 이렇게. ‘자식들 잘 들어라. 침해 걸려서가 ‘예수가 누구지? 하더라도 절대로 믿음 없어지는 거 아니다.’

 

신약에서는 이처럼 그리스도로 완성됐는데 이제 아까 이야기한 다윗, 시온 산에 하나님의 궁전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자부심을 가질 만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처소 있다. 너희들은 언약 없지? 못 들어와.’ 이거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언약이 어떻게 거기 가게 하느냐. 다윗 언약에 어떻게 들어가느냐.‘ 그게 남아있어요.

 

실패를 통해서 들어갑니다.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 사람이 줬다 하면 사람은 아주 노리게 돼 있어요. 다윗 언약만 믿으면 나는 하나님의 궁전에 들어간다. 하늘나라에 들어간다. 내가 그 찬스를 놓칠까 보냐. 내가 어떤 수단을 다해서라고 해야지.‘ 요게 실패에요. 이스라엘 자체가 망했던 이유가 거기 있어요. 방법이 내가 아는 방법을 내가 사용한다는 것은 그거는 어려운 말로 나의 동질성이 과정 속에 삽입이 돼 있는 겁니다.

 

자, 이 떡이 있죠.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고 떡을 집어서 ‘떡 드세요.’ 하니까 상대방이 내가 미워하는 걸 알거든요. ‘싫어요.’ 하고 안 받아요. ‘아니 떡 주는데 왜 안 받습니까?’ ‘떡을 집어도 내가 집을 거야.’ 하고 뺏어서 본인이 와서 이걸 집고 본인의 입에 쑥 들어갈 때 이 방법을 사용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뭐냐 하면 나를 좋은 걸로 바꾸네. ‘아, 시온에 가게 되면 우리는 천국에 간다. 천국 들어가야지.’ 하면서 생각한 거기에 나를 천국에 들어 보내는 방법을 어디서 끄집어내는가, 나를 좋은 나로 간주해서 훌륭하고 대견스럽고 하나님 나라 가고 싶어 하는 이런 좋은 사람으로 해석을 그렇게 바꿔서 내 모든 행동을 거기에 맞춰서 절제할 거 절제하고 온유할 거 온유하고 욕설 안하고 거짓말 안하고 뭔가 자기 관리해서 고운 작품 만들어서 집어넣으려 하잖아요. 그게 바로 실패에요. 그게 나의 동질성에 포함돼 있어요. ‘이번에 금식한 것도 내가 알아서 금식했어. 요번에 기도한 것도 내가 알아서 기도 했어. 요번에 구제한 것도 진짜 오른손 모르게 했습니다.‘라는 말을 해가면서도 자기 관리에 나설 때 전부 다 실패에요.

 

그러면 어떻게 돼요? 모든 게 실패라면 남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의 실패를 내 것으로 회수하면 돼요. 참 쉽죠. 일단 실패하고 들어갑시다. 이미 서울대학에 합격하고 난 뒤에 서울대학에 이미 합격이 확정되고 난 뒤에 수능 칩시다. 1번이 5번까지밖에 없는데 6번 막 쓰고, 2번도 5번밖에 없는데 7번 막 쓰고, 그렇게 할 때 어떻게 됩니까? 0점이죠. 0점인데 결과는 뭡니까? 합격. 그러면 시험 문제 보고 틀린 답을 했죠. 그 시험문제가 뭐냐, 바로 다윗 언약에 포함된 모세 율법입니다. 모세 율법이 로마서 7장에도 그대로 적용돼요. 로마서, 갈라디아서에도. 율법이. 사도바울의 권면과 지시에도 그대로 적용돼요.

 

율법에 “탐내지 말라”는 순간에 우리는 탐을 내죠. 그러니까 1번 정답이 3번인데, 1번, 2번, 3번, 4번, 5번 가운데 어느 게 정답입니까? 정답은 3번인데 1번 정답을 우리는 8번 적고, 있지도 않은 걸 적은 거예요. “탐내지 말라” 하면 뭐해야 돼요? 탐 안 내야 되죠. 그런데 우리는 탐 안내는 방법이 9번이라. 우리는 어떤 말씀도, 한 말씀도 못 지켜요. 이미 뭐 되었기 때문에? 이미 구원이 되었기 때문에. 왜, 모세 율법은 다윗에 의해서 이미 지켜졌어요. 그러면 다윗 언약에 계신 분이 지켜졌잖아요. 그러면 다윗 언약에 계신 분이 율법을 가져갔기 때문에 가져간 율법을 우리한테 주어집니다.

 

그러면 다윗 언약이 다가오는 게 아니고 뭐가 다가오겠어요? 모세 율법이 다가와요. 모세 율법이 다가오면서 그걸 죄인, 죄인 끌려가면서 하나님의 시온 산에 참여합니다. 모비딕, 고래 잡는 거. 고래 잡을 때 대포를 쏘듯이 화살을 쏘잖아요. 화살이 표옹~ 날라 갈 때 이게 뭐냐 하면 바로 모세 율법이 날라 와요. 꽂혔잖아요? 꽂혔으면 우리는 아까 우리교회 엄 기덕씨 질문 잘한 질문이잖아요. 답변을 했잖아요. 지키라는 주의 말씀대로 지켜야 됩니까? 할 때 제 답변이 ‘지키세요.’ 했죠. 뭐냐 고래작살에 꽂히세요. 이 말 이예요. 꽂히게 되면 비로소 우리는 ‘나도 지켰습니다.’ 하는 위선과 오만이 나오겠죠. 그게 율법을 모르기 전에는 내가 몰랐던 본성을 몰랐어요. 내가 이렇게 내 자랑하고 싶고 나도 조금은 말씀대로 살고 이렇게 훌륭하게 산다. 라는 것을 자랑 질 할 줄을 말씀이 오기까지는 몰랐어요. 우리는 말씀 안 지키고 난 예수도 안 믿는다. 하다가 갑자기 예수 믿으니까 예수 믿는 천하에 착한 사람이라고 착각을 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그것에 꽂힌 그 작살에 끌려가면서 우리는 이 율법의 완성 자가 다윗 언약을 주신 그분이 율법을 완성했기에 우리는 죄인으로 참여가 되는 겁니다.

 

그 드러난 죄 중에 하나가 “죽기가 무서워서” 아등바등 애를 쓰는 것이 포함이 돼 있어요. 너무나 죽는 게 무서워서 말씀 지키면 행여나 5년 더 연장시켜줄 줄 알고 또 15년 간, 또는 25년 간, 혹시 압니까? 태양 시계가 뒤로, 그림자가 뒤로 물러날지. 히스기야처럼. 15년 더 연장되듯이 압니까? 그 정도로 우리는 그게 부러워 미치는 거예요. 왜 부러워 미칩니까? 왜냐 하면 죽을 때 되면 한번 통성기도 해서 한 15년 받고, 또 그것도 마감 다 써먹었다 싶으면 또 한 번 하고, 삼천갑자 동방사기와 똑같은 거예요. 한번 구르면 3년이죠. 두 번 구르면 6년, 3x2=6 3x3=9 3x4=12 이거는 구구단만 외우면 계속 천 년까지 살죠. 그게 얼마나 죽기를 무서워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미 작살이 왔다는 것은 너는 이미 죽었고 오직 산 분은 다윗 언약에 계신 분이 삶인데 그 사시는 분에 의해서 이런 통보가 왔다는 자체가, 이 연결 고리 작살 자체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여기 흐르고 있는 겁니다. 생명이 꽂힌 거예요. 생명이 꽂히니까 요 바깥의 모습은 율법이고 거기에 대한 적용은 우리가 죄인이 되는 건데, 그러면서도 우리의 속에는 뭐가 작동한다? 하나님의 부활의 영, 영생이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자, 그래 놓고 오늘 본문 한번 봅시다. 본문 하는데 이렇게 오래 걸렸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라고 돼 있죠. 자, 이제 기쁘십니까? 이제 기쁘십니까? 주님이 이 세상을 떠났잖아요. 그 다음 차례는 누구다? 주님이 우리를 불러낼 차례에요. 왜, 자기가 떠났잖아요. 그 다음에 우리를 불러낼 참 이예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인 된 예수님을 부활시켰죠. 그 다음 차례는 우리 차례에요. 첫 열매, 두 번째 열매, 세 번째 열매가 될 거니까. 할 때 주님께서 떠났던 자리가 뭐냐, 십자가 자리입니다. 그게 뭐냐 휴스톤에 있는 로켓 올라가는 우주 기지에요. 그러면 우리는 짐 싸들고 어디로 가야 돼요? 서울 있으면 안 되고 어딜 가야 돼요? 휴스톤 우주 기지에 짐 싸들고 거기 집결돼야 돼요. 고 집결 장소가 새 언약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사도바울이 ‘야, 재림이 눈앞에 보이거늘’ 그 소리 아니죠. 재림이 아니고 재림이고 뭐 온유고 화평이고 그건 전부 다 모이는 장소에 모인 사람에게만 통보하는 이야깁니다. 십자가 알겠느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십자가 앞에 모이게 되면 그게 생명의 작살이거든요. 십자가 앞에 모이면 그것이 누구냐? 누구 죽은 자가 있어요. 누가 죽었어요? 다윗 언약에 의해서 죽은 분, 예수님이 거기 계셔요.

 

그러면 그 예수님과 우리는 함께 십자가에서 함께 죽는 사건이 일어나는 겁니다. 언제요? 라고 묻지 마세요. 십자가 사건은, 완성된 사건은 반복이 되니까 십자가 은혜 알 때마다 그때가 그때에요. “잠시 감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했는데 여기서 질문 하나 해볼게요. 작년에 이 말씀을 봤습니다. 그러면 올해는 일 년 지났으니까 주님께서 좀 더 이 말씀이 가까이 오신 거예요? 아니면 맨 그대로입니까? ➀번, 1년만큼 줄어들었다. ➁번, 그대로다. 몇 번입니까? 그대로에요. 왜냐 하면 말씀은 시간의 저촉을 안 받습니다. 늘 새로워요. 내년 되면 또 이 말씀이 새로워요. 그리고 오시기 직전 5초 전에도 “오실 이가 오시리라” 5초 후에 와도 잠깐이고, 5만 년 후에 와도 잠깐이고, 5만 년 1일 돼도 잠깐이고, 항상 떠날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한테는 이것이 늘 기쁜 소식이 되는 겁니다. 잠깐 후에 오신다. 그 5만 년이 왜 잠깐입니까? 아직도 니 시간에 매였나? 이건 내 시간, 주님의 시간이거든요.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여기 있잖아요. 이 작살이 오죠. 어디서 온다 했습니까? 아까 시온 성, 다윗 언약에서 오죠. 내가 하나님이 하심을 맹세합니다. 맹세란 확정된 거예요. 작살이 꽂힙니다. 피~하고 꽂혔다 말이죠. 꽂히게 되면 여기 뭐가 따라오느냐, 말씀이 따라오잖아요. 꽂히면서 우리 속에 ‘살고 싶어라.’ 다른 말로 하면 노래 말로 ‘울고 싶어라.’ 울고 싶어라~♬ 울고 싶어라. 울고 싶어라. 내 마음은. 울고 싶어라. 쫓긴다고요. 살고 싶어라. 울고 싶어라. 쫓긴다고요. 여기에 뭐가 오느냐 말씀 “잠시 감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가 오죠.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그 딴 거 무슨 소용 있느냐, 이렇게 되겠죠. 지금 내가 살고 싶은데 그 딴 게 무슨 소용 있느냐.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십자가로 같이 오게 되면 이게 교체가 되죠. ‘울고 싶어라. 살고 싶어라.’ 가 이거는 마땅히 죽어 마땅한 바로 살아있으나 사실은 죽음 티를 내는 거예요. 울고 싶어라. 짜증나라. 아이고, 성질나는데 죽이고 싶다. 아이고, 미워라. 아이고, 이렇게 살지 마라. 이게 뭐냐 하면 내가 죽어야 마땅한 티를 팍팍 내고 있는 거예요. 그것도 유행 따라. 가을 되면 바바리 깃 세워서 나일 강 함께 가고 싶어라. 이러고 봄 되면 또 연애 하고 싶어라. 이러고 이게 전부 다 살고 싶어라. 더 살고 싶어라. 웃고 싶어라. 전부 다 내 중심으로 하는 그 모든 것이 바로 왜 우리는 죽은 자로 간주돼야 되느냐, 그 증거물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말씀이 와서 바깥으로 배출시킨 거예요. 말씀이 꽂히니까 ‘에이, 씨 필요 없어.’ 티를 내는 거예요. 그런데 오게 되면 우리로 하여금 ‘그러니까 니는 이미 죽은 자다.’ 요렇게 가면 우리는 정상인이 아니고 그건 성도 아니죠. 그런데 왜 이런 나를 가만 두지 않고 “잠시 잠깐 후에 오실 이가 오시리니” ‘참, 오실 이가 계시지.‘라는 생각이 들게 하게 되면 이 사람은 이미 영생에 속한 사람입니다. 내 입장에서는 내가 죽은 자인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의의 소스를 발라서 이미 죽은 자인데 산 자가 돼요. 그게 예수의 말씀 안에서 우리는 이미 산 자가 됩니다. 우리 입장에서 개인적으로 죽은 자요. 주님 말씀 안에서는 산 자가 돼요.

 

그러면 우리가 살았습니까? 다른 말로 하면 뭐라 하느냐, 말씀이 살았어요. 어떻게? 히브리서 10장 37절 안에서. 그래서 ‘집사님, 요새 어이 삽니까?’ ‘아이고, 잠시 잠깐 후에 또 오신답니다.’ 이렇게 말씀이 톡 튀어나와요. 내 안에 있는 말씀이 살아있어 버려요. ‘집사님, 왜 그리 성도답지 않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의 의입니다.’ 로마서 3장 이야기가 툭 튀어나와요. ‘세상이 부럽지 않습니까?’ ‘세상은 어두움입니다.’ 이건 요한복음 3장 19절 이야기가 툭 튀어나와요. 구절은 몰라도 말씀이 자꾸 나와요. ‘아이고, 기도 많이 했더니’ ‘아이고, 무슨 기도입니까? 나는 기도하는 것은 중언부언기도 합니다.’ 이건 마태복음 6장 이야기가 툭 튀어나와요.

 

어떤 것도 말씀 범위에서 우리가 포위된 채, 말씀의 의의 소스를 바르니까 우리는 모든 게 말씀대로 시행되는 거예요. 계단에 엎어졌다. ‘그동안 발걸음을 세셨구나.’ 이번에도 발걸음을 세셨는데 주께서 잘못 세셨는지 엎어졌구나. 이런 식으로 모든 게 마치 가을에 낙엽을 안 밟을 때 없듯이 우리는 밟는 모든 것이 말씀의 낙엽들을 밟고 인생을 살고 있는 거예요. 그 말씀이 현실이고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이것은 가상이고, 우리의 상상이고, 우리의 욕망이고 우리의 욕망은 생존의 욕구, 먹는 거, 입는 거, 그 다음에 안전의 욕구, 뭔가 죽으면 안 되니까 불안해하는 거, 세 번째 소속의 욕구, 누구한테 나는 고향이라든지 집안의 소속이 잘 되면 안심을 하는, 어떤 단체에 등록 되면, 교회 등록되면 안심이 되고, 네 번째가 뭐냐, 자존심의 욕구, 아까 이야기했죠. 내가 자존심 세우는 게 아니고 욕망이 자존심을 세우라고 자꾸 부추기고, 마지막 욕구가 뭐냐, 자기를 위해서 모든 걸 희생하는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내가 천사가 된다면 나는 내 목숨도 아낌없이 바치리라. 희생하면서 결국은 나를 더욱 초월적인 존재로, 신으로 전환시키는 욕망을 마귀가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혹시 교회 다니는 사람 보이시거든 생각을 그렇게 먹으세요. 저 사람은 성도일 거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시고요. 교주 하나 나타났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자아실현의 교주다. 생각을 그렇게 먹어야 실망을 안 해요. 분명히 자기 종교에 신실한 자기 교인이다. 지가 교주고 지가 신실한 유일한 마지막 남을 교인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편하게 이야기하다가 혹시 그 사람이 성령을 받게 되면 ‘나, 나밖에 몰라요. 그런데 이게 십자가 앞에서 죄인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나오거든 형제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순서를 아세요. ‘나는 평생 가도 나는 나만 챙긴다. 나는 자존심 포기할 생각 없습니다. 나만 최고입니다.’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데 이게 십자가 앞에서 내가 지옥 갈 만한 죄입니다. 라고 고백할 때 성도입니다. 너무 많이는 기대하지 마세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에 나오죠. 찾으려면 없다고 돼 있죠. 찾고자 하나 없느니라. 그러나 주께서는 어떻게 한다? 니가 없다고 여기는 속에서 내가 나를 찾지 않는 이방인 가운데 내가 새로 만들어내겠다. 왜, 자기의 백성을 질투 나게 만들기 위해서.

 

그래서 주님 오실 때까지는 이방인이 멸망하지 않습니다. 다 이방인들, 귀신 믿는 사람들, 불신자들, 하나 버릴 게 없어요. 다 필요하기 때문에 가장 최적의 세계를 하나님께서 만들어내는 겁니다. ‘목사님, 저는 왜 여자로 태어났습니까?’ 최적의 세계, 가장 이 세상의 현실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에 여자로 만든 거예요. ‘왜 나는 쌍꺼풀이 없습니까?’ 그건 최적의 세계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러면 쌍꺼풀 수술하면 안 됩니까? 수술하게 한 그것도 최적이 세계에요. 마음껏 수술하세요. 구원받는데 아무 지장 없습니다.

 

이 대목 하니까 생각나는데 어떤 목사님이 질문해서 저한테 막 따지는 거예요. ‘왜 목사님은 나를 교회에서 옹호해주지 않습니까? ’ 막 따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야기했죠. ‘목사님 주께서 재림하시면 됐잖아요. 왠 자존감입니까? 그래 가지고 목사 하겠어요? 주께서 재림하시면 됐잖아요.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그럼 됐잖아요. 뭘 더 기대했습니까? 뭘 더 기대했어요? 오시면 되지. ’왜 교회가 날 이렇게 하는데 목사님 안 말려주십니까?’ 이렇게 나오거든요. 참 옛날이야긴데.

 

말씀의 낙인이 나와야 되는데 지 자존심 낙인이 튀어나왔어요. 그것도 있을 때, 점잖을 때는 말씀 안 나와요. 그런데 지한테 생명이 위태롭다. 이럴 때는 그만 본색이 튀어나와버리는 거예요. 말씀이 안 나오고 말씀을 훼방하는 게 나와 버렸어요. 그 사람이 ‘그건 성경 말씀에 있는 거고요.’ 이렇게 해요. 그러면 바깥에 있는 성경은 문자입니까? 이게 살아있는 말씀인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이 집어넣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그렇게 배우지 않았어요? 그렇게 외치지 않았습니까? 본인은 그렇게 외쳐놓고 막상 자기 자존심 상할 일이 있을 때는 순간 나보고 따지고 말이죠. 참 멋진 경험을 했습니다. ‘아! 저렇구나.’ 주께서 주신 상황이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구나.‘

 

38절 봅시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어디서 많이 들었죠?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어디 나옵니까? 로마서 1장에 나오는 말씀이고 이거는 하박국에 나오는 말씀 이예요. 하박국 2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하박국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이여 왜 이 우리 이스라엘이 하나님 믿지 않는 이방나라 바벨론한테 이렇게 얻어터지고 멸망해야 됩니까?’ 하나님 뜻은 ‘가짜거든’ 그러면 진짜도 왜 고난을 받아야 됩니까? 참 일리 있는 이야기죠. 마치 아브라함 이야기잖아요. “의인 10명이 있다면 소돔과 고모라 심판 철회하시렵니까?“

 

톨스토이의 유명한 작품 가운데 죄와 벌이 있죠. 죄와 벌에 있는 그 가난한 그 대학생이 옛날에는 대학생이 굉장히 귀했어요. 대학생이 볼 때 사회정의가 너무 개판이라. 도저히 참다 참다 못 참는 거예요. 그래서 고리대금업자 할머니를 딱 보니까 그 할머니가 지독하게 나쁜 여자에요. 그리고 머리가 약간 나쁜 그 누이동생이 있는데 그 여자 동생을 개부리듯이 부리는 거예요. 이 못된 고리대금업자 할머니가. 따라서 정의감이 넘치고, 옛날에 러시아 당시의 정의감은 곧 신앙심입니다. 신앙심이 넘치고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해서 이 땅 지상에 천국을 만들려 하는 그런 제정 기독교 시대에 이런 자를 내가 도끼로 쳐 죽인다. 한들 이것은 하나님이 ‘잘했다. 그런 가라지는 진즉에 잘라버려야 돼. 잘했어. 니는 용기 있는 자야. 니는 의인이야.’ 이렇게 할 줄로 알고 그 노파를 도끼로 쳐 죽인 겁니다. 쳐 죽였는데 세상에 이 주인공이 상상도 못했어요. 왜 쳐 죽이느냐, 그 언니를 쳐 죽여야 누가 구원받습니까? 그 철 모르고 약간 지능 떨어진 누이동생이 언니의 예속에서 그 언니한테 돈 다 뜯기고 진짜 철저하게 이용당했거든요. 해방함으로 말미암아 악한 자 죽이고 눌린 자 해방하는 거,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아닙니까? 내가 온 것은 가난한 자를 옥에서 건지고 가난한 자를 해방시키는…그거죠. 그렇게 할 줄로 알고 했는데 그 도끼로 쳐 죽인 상태에서 누이동생이 목격했어요. 갑자기 우연적으로 들어와서 그 누이동생도 죽이고 말았어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착한 일 하는 내 착함이 노파보다도 오히려 노파도 안 죽인 그 누이동생을 자기가 죽이죠. 이 모습, 정의를 행사하는데 억울하게 피해보는 정의로운 이 모습을 본인은 해결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걸 우리가 시도한다면 우리는 그 믿음을 우리가 믿음 때문에 주님의 믿음을 아주 박살하고 훼방하고 방해하는 게 됩니다. 믿음도 행함이 되니까. 따라서 이렇게 하세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를 소급해서 되돌아보면서 확인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제가 이번 일 한 것은 주의 은혜지, 제 솜씨가 아닙니다.’라고 항상 뒤돌아보면서 확인하면 돼요. 그런 예를 설교하면서 예를 들었잖아요. 기차 타면서 제일 뒤 칸에 타서 지나가는 광경을 보라고. 철로 저 멀리 있잖아요. 다 은혜 아닌 게 하나도 없어요. 후라이팬 가지고 남편 패는 것도 은혜고, 자기 딸 외출하지 말라고 옷 째는 것도 은혜고, 전부 다 은혜 아닌 게 없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는 사회정의였는데, 돌아보니까 나의 다 허점이고 나의 더러운, 내 속에 들어간 게 더러운 게 아니고 나오는 게 더러운, 내 더러운 나를 이렇게 철로 가에 군데군데 더러움을 쏟아내는 그 작업이 하나님의 의로운 작업이고 주님도 의롭고 덕분에 나도 의롭고. 죄가 발각되는 의로움, 수술당하는 의로움, 시체 해부해서 요거는 간, 쓸게, 내장 다 끄집어냄을 당하는 그 시원함, 상쾌함, 라라라라라라라~? 지중해 푸른 바다에 하얀 옷을 입고 그걸 바라보는데 포카리스웨트, 그 청량음료처럼 내 더러운 내장이 바깥으로 줄줄 이렇게 영화로, 필름으로 동영상으로 다 찍혀 나오는, cctv에 다 찍혀 나오는 그 즐거움, 그때 말씀만 나옵니다. 빈껍데기 돼서 ‘주여’ 내장을 손에 쥐고 ‘주여 어서오시옵소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주께서 끄집어냈잖아요.

 

하박국에서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니가 지금 의인이 있는 게 아니고 망해가는 과정 속에서 ‘잘했습니다. 하나님, 잘 망했습니다.‘라고 외칠 그런 사람이 나올 건데 그게 뭐냐 멸망을 자기 멸망으로 수용하는 사람은 의인이다. 이겁니다. 그게 믿음으로 의인 이예요. ’이 멸망은 마땅히 이 멸망 속에 저를 집어넣어준 것은 하나님의 멋진 구원의 전략이십니다.’라고 받아주는 것.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멸망해도 마땅합니다. 그리고 난 뒤에 하박국 3장에 유명한 말 있죠. 가스펠 송 가사에 나오잖아요.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다 할지라도 외양간에 소가 없다 할지라도 오직 나는 구원의 여호와를 만나 기뻐하리로다. 노래는 잘 부른다마는 가스펠 송 기타 치며 노래하죠. 하면 뭐합니까? 그게 구원이 아니고 그게 위안이 되면 안 되잖아요. 그게 구원이어야 되는데. 잠시 잠깐 자기 서글픈 현실을 스스로 위로하는 것 밖에 안 됩니다. 그건 한풀이지 그건 구원이 아니에요. ‘끝까지 잘하셨습니다.‘가 돼야지. 잠시 기쁘고 치우는 게 아니고.

 

이제 오늘 본문 알았죠?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살았던 내가 아니고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가 내 안에 내장을 끄집어내고 그 안에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말씀이 그 안에 탑재돼 있습니다. 그러니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그 환경이 무슨 환경이다? 이스라엘 남쪽 유다 나라가 바벨론에 망하는 거거든요. 그러니 망함에 내 안에 탑재돼 있다. ‘진즉에 오늘 밤에 데려가도 저는 후회 없습니다. 늘 나는 진즉에 망해도 됩니다. 오늘 아침에 죽어도 마땅한데 아직까지 오후 3시까지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늘 망함이 있을 때 의인은 믿음으로 ’망해라 믿음으로 살리라‘가 믿음으로 살리라” 가 나를 살려주니까. 말씀이 나를 살려주니까. 그 말씀의 끝은 다윗 언약이고. 거기에 시온 성, 하나님 성전이 거기 있고. 그래서 작살로 날라 온 거예요.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니가 물러가면 내가 기뻐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들어 있어요. 따라서 우리는 뭘 눈치 채면 됩니까? 안 물러가는 게 아니고 물러가면서 ‘아, 주님이 싫어하는구나.’라는 걸 그것도 말씀에 근거해서 감 잡을 때 말씀이 탑재돼 있는 사람 이예요. 장착돼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오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내 본분은 내가 아니고 주님이 나를 아지트로 삼으셨습니다. 하는 이야깁니다.

 

자, 11장 들어갑시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오늘 제목 뭐라 했어요? 의의 소스, 흠뻑 하나님의 의가 뒤집어쓰는 소스. 향이야 사람마다 다 다르니까. 하여튼 의의 소스니까 남의 것 너무 탐내지만 내 의의 소스 따로 있어요. 바닐라 향 따로 있고 레몬 향 따로 있고 다 달라요. 드레싱이 다 달라요.

 

자, 아까 믿음을 뭐라 했어요? 믿음이 있다 했죠. 그러면 우리는 뭐라 합니까? ‘아 저 믿음 있죠? 믿음 있죠?’ 하고 싶죠. 11장에 보면 믿음은 없다는 겁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분명히 10장 마지막에 믿음 있느냐고 우리보고 확인 작업에 나선 것 같아서 우리는 ‘가만있어.’ 우리가 서랍에 뭐가 있나 믿음 찾는다고 바빠요. 안에 뭐가 있나. 믿음 찾는다고 바빠요.

 

그런데 그거 말고 니가 내놓는 믿음은 이미 그건 행함이고, 그거 말고 내가 믿음을 갖는 게 아니고 믿음이 포크레인처럼 나를 갖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는 시체가 되죠. 시체가 되면 이렇게 공중에 있잖아요. 집게에 집혀서 있다 이 말이죠. 큰 포크레인이 이삿짐 나르는 포크레인이 잡으면 우리는 중력에 의해서 땅만 바라보고 있죠. 그런데 그 덩어리에다 집게를 꽂아서 갖고 다니는 겁니다. 노아요, 아벨이요, 아브라함이요, 이삭이요, 야곱이고, 모세죠. 모세는 뭐라 했습니까? “바로의 공주의 아들 됨을 원치 아니하고 백성들과 고난 받기를 즐거워했으니” 즐거워했어요? 보세요. 안 즐거워했어요. 짜증냈어요. ‘주님이여, 나 하기 싫습니다. 했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거는 니 생각이고 니는 니 생각이 내 말씀이 아니고 내가 만들은 상황이 내 말씀이다. 니는 내 말씀에서 구원받지, 니 믿음 가지고 구원 받는 게 아니야.

 

말씀에 의해서 믿음이라 하면 ‘까라면 깔아.’ 그게 믿음이야. 니가 내세우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고 니가 확인하는 믿음이 아니고 내가 준 믿음이 믿음이야. 그러면 그 믿음이 어떻습니까? 알려주세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이렇게 되는 겁니다. 참 기가 막힙니다. 10장에서 11장 넘어가는 게. 바라는 것에서 출발하면 믿음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에서 출발 하지 않으면 그건 믿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믿음을 보이는 나로부터 출발하면 안 돼요. ‘내가 믿었습니다.’ 하면 믿음이 아니에요. 왜 나는 보이니까. 거울 보면 보이잖아요. 손에 만져지잖아요. 이거는 내 믿음의 출처가 아니다 이 말이죠.

 

믿음은 지금 바라는 것은 주님이 바라는 것 이예요. 왜 잠시 잠깐 후면 오실 분이 오시기 때문에 이 바라는 것은 주님이고, 보이는 것도 주님 이예요. 이 말은 뭐냐, 주님에서 나왔다. 믿음=뭐다? 주님이다. 믿음이 주님 이예요. 주님이 믿음 있다는 말은 그 안에 주님이 그 안에 들어서 니가 원치 않는 주님만을 나타내는 다른 말로 히브리 11장에 보면 바라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너를 활용한 거예요. 그 작업 이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을 소유하란 말이 아니고 믿음이 기능한다. 믿음이 지금 작렬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돼요. 믿음이 작렬하고 기능하고 작렬하는 현상. 이게 바로 히브리서 11장입니다. 지금까지 히브리 11장은 다 잊어주세요. 여러분 믿음을 가지세요. 이건 엉터리 해석입니다. 다 잊어주세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지만 다 잊고 믿음은 예수님의 일하시는 현장을 말합니다.

 

인간이 뭘 하겠다? 그것은 며칠 못 갑니다. 인간의 결심요? 상황 바뀌면 결심을 떨쳐버립니다. 진짜 인간이 믿음으로 한 결심은 뭐냐 하면 거짓말 하도록 유도한 것에 대해서 보조 맞춰주는 것, 기생 라합이 그렇잖아요. 평소에 거짓말 하는 게 주특기였습니까? 아니죠. 거짓말해야 될 상황이 왔죠. 여지없이 네 번째 욕구, 뭐합니까? 자존감의 욕구를 완전히 뭐하고? 벗어버리고 거짓말쟁이로 거듭나는 그 용기, 그게 주님의 작용하신 믿음입니다.

 

방금 여기에 공부 참석해서 들었던 사람은 드디어 이번에 성경공부가 저렇게 끝나는구나. 거짓말 하루로 끝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겠지만 이미 어차피 우리는 껍데기에요. 기생 라합의 믿음은 바로 ‘나는 주께서 쓰시면 쓰시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결혼하기 전에 임신하세요. 그것은 뭐냐 마리아한테 해당되는 거예요. 마리아가 얼마나 그걸 거부했습니까? 처녀가 임신했다. 이거는 사랑하는 남자 친구도 헤어질 판이고 이건 누가 봐도 욕할 일이잖아요. 천사가 와서 달래고 감당하라 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성도로 있는 게 딴 게 아니에요. 내가 예상한 것을 참는 게 인내가 아니고 터무니없는 내 자존감을 건드린 것에 대해서 내가 ‘이것도 주의 일입니까?’ 물어가면서 사는 거. 그게 바로 인내입니다. 터무니없는 것. 갑자기 바람에 날라 왔는데 보니까 복권이라. 보니까 벌써 내일 발표 나는 걸 보니까 거기 1등 56억 탔어요. ‘주여 내가 이걸 감당해야 됩니까? 56억 은행에 가서 내가 찾아야 되겠습니까? 주의 뜻이라면 감당하겠습니다.’ 이걸 감당해야 돼요. 감당하게 되면 주위에서 아는 사람이 뭐라 하겠습니까? ‘에이, 김 집사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 해놓고 지는 갑자기 부자 됐네.’ 얼마나 욕하겠습니까? 욕을 감당하세요. 그것만 감당하게 되면 모든 일이 내 일이 내일이라는 게 하나도 없어요. 애가 공부 잘하고 오는 것도, 공부 못하고 오는 것, 우연히 오다 보니까 마치 가는 버스를 만났는 거, 이 모든 것이 믿음이 주께서 그렇게 우리로 하여금 우리 현장에 친히 침투하사 우리를 꼭두각시처럼 이렇게 친히 그렇게 살도록 요구할 때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주여, 이거 주의 일이죠? 바라는 것이고 이거 보이지 않는 일이죠?’라고 이야기하세요. 믿음의 반열에 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하루하루가 주와 함께 동행 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것은 우리 속에 우리의 양심 있어 그런 게 아니고 우리 속에 말씀이 들어있어 그런 현상이라는 것을 우리가 되새겨서 늘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