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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이한례
안양20150814a-히10장28절(중간 부분) - 이 근호 목사
오늘은 약간 어렵습니다. 제가 어렵게 하는 게 아니고 성경 자체가 어렵게 나와 있어요. 여기에 보면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이렇게 돼 있죠. 복잡한 내용들이 한꺼번에 문장에 급작스럽게 연결돼 있죠.
‘은혜의 성령’이란 단어도 그렇고 그리고 여기 ‘언약의 피’란 이 언약의 피는 최고로 너무 어렵고요. ‘모세의 법에 두 세 증인’이란 이것도 어렵고 이렇게 어렵고 어려운 것이 한 연결 문장으로 죽죽 다 연결돼 있으니까 하나, 하나 모르면 전체를 모르게 돼 있어요. 그래서 제가 처음부터 요 순서대로 하겠습니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 두 세 증인” 요거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요거는 신명기 17장에 나오는 이야긴데 이건 뭐냐 하면 모세의 법이라고 나올 때는 항상 요것만 생각하시면 요게 쉽습니다. 모세의 법은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된다.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돼요. 이방 나라한테는 해당이 안 됩니다. 모세의 법은 이미 그 바운더리가 따로 정해져 있어요. 두 세 사람 없이는 못 죽인다는 것은 다른 나라한테 적용시키는 게 아닙니다. 자기들끼리 모세의 법에 보면 이스라엘 내부에만 적용시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왜 두 세 증인 없이 죽이면 안 됩니까? 라는 말을 할 때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집단을 위해서 에요. 그래서 현대인들이 성경을 볼 때에 성경이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은 현대인은 개인주의입니다. ‘저 어떻게 나 혼자 천국가요? 나는 어떡하면 천국 가죠?’개인한테 물어요.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 받습니까? 하는데 여러분 주기도문 알죠? “하늘에 계신” 어떤 아버지? 우리 아버지잖아요. 집단 이예요. 집단! 집단이기 때문에 개인 모이면 집단 가는 게 아닙니다. 초반부터 어려운데, 개인 개인이 플러스, 플러스, 집단 되는 게 아니고, 집단에서 명주실 뽑듯이 누에 뽑듯이 집단에서 하나 뽑혀 나온 그게 개인 되는 거예요. 집단에서 뽑히면 개인 되는 거예요. 그래서 개인의 요 자리, 사람이 이렇게 있다면 개인의 자리가 이게 개인 자리 아닙니다. 우리의 자리, 집단의 자리에 공동으로 개인이 서 있는 거예요. 아! 요 인식 바뀌어야 되거든요.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가 아니죠?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는 누구만 할 수 있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만 할 수 있어요. 이걸 제가 뉴저지에서 적용할 때 언급을 했어요. 그 사람들이 아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왜 나의 아버지가 안 되느냐 하면 우리 아버지는 전부 다 우상이거든요. “우리 하나님” 전부 다 우상 이예요. 진짜 아버지는 누구만 아시느냐 하면 개인적으로 예수님만 알고 나머지는 몰라요. 혼자 알고 나머지는 모르기 때문에 여기서 십자가 충돌이 일어난 겁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그들은 여호와만 연구한 사람들 이예요. 그런데 여호와만 연구했는데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우리가 돼 버렸어요. 유대인끼리의 우리. 그 우리는 주님 우리한테 근처도 안 갔어요.
주님이 아시는 아버지는 주님만 알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요. 그래서 메시아의 기능은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데 예수님이 거기 화합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만 알고 있는 기능이 옆에서 퍼지는 겁니다. 물탱크에 구멍 나면 처음에 조금, 조금 퍼지다가 나중에 많이 퍼지죠. 물탱크가 예수님이라면 예수님에서 조금씩, 조금씩 아버지의 양상이, 아버지의 모습이 나오게 되면 다른 쪽은 낯설게 느껴집니다. ‘저건 우리가 알고 있는 여호와가 아닌데.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아닌데.’ 예수님이 그러죠. ‘그래, 아니기 때문에 내가 온 거야. 너희 애비는 마귀거든.’ 너희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마귀를 닮아요. 그럼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진짜 아버지고. 우리 한번 대조해보자. 만나보자. 만남에서 이게 구원이 이루어져요. 어떻게 만나야? 서로 ‘아네.’가 아니라 달라도 너무 다르네.
그것을 저는 이렇게 한 자로 ‘틈’ 이 틈은 하나님과 인간의 틈.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인간은 죄인이잖아요. 틈이 있죠. 건너갈 수 없는 것. 그 대표적인 틈이 천국과 지옥입니다. 천국과 지옥 사이는 건너갈 수 없어요. 무슨 계곡이 있답니다. 이거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부자하고 나사로하고 서로 건너갈 수 없어요. 산 넘어 물 찾아서 길 따라서 배낭여행한다고 가는 게 아닙니다. 도저히 건너갈 수 없어요.
지금 혹시 지옥 가 있으면 잘 봐 놓으세요. 나중에 죽으면 두 번 다시 상봉이 어렵습니다. 끝났어요. 심지어 가족끼리라도. 미리 사진 찍어놓으시고, ‘김치’하고 사진 찍어놓으세요. 죽으면 영원히 헤어집니다. 참 안타깝죠.
하나님과 인간의 틈이 있는데 그 틈이 인간의 틈이 아니고 사실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 사이의 틈 이예요.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인간의 틈이 있는 것을 하나님과 예수님이 와서 메꾸었다고 이야기하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고, 하나님과 인간의 틈이 있잖아요? 인간은 죄인이고 하나님은 의인인 틈이 애초부터 하나님과 아들 사이에 틈이 있었습니다. 이 틈이 바깥으로 퍼져버리면 이게 하나님과 인간의 틈이 되는 거예요.
이 발상도 상당히 중요한 발상인데 우리는 이걸 잊어버려요. ‘내가 구원받으려 하는데 내 힘으로 안 됩니다. 하나님 어떤 수가 없겠습니까? 예수님 보내주세요. 메시야 보내주세요.’이렇게 일을 자기 문제가 자기부터 출발해서 ‘그래? 아이쿠, 못 오겠나? ’‘아유, 못 오겠습니다.’‘왜?’‘죄가 많아서’ ‘그래, 걱정하지 마. 죄 씻어주기 위해서 내가 메시야 보내줄게.’우리 구원문제 해결하려고 주님 오셨나, 이렇게 이해하잖아요. 순서가. 내가 천국 못 가서 답답한데 주께서 사랑의 하나님이라서 가만있지 못하고 불쌍히 여겨서 우리에게 예수님 주셔서 믿었다. 이건 대학생들 선교단체 교재마다 다 나오는 이야깁니다. 이거 완전히 반대에요. 이거 엉터리에요. 그 선교단체가 커서 교회 되고 그 출신들이 목사 됐으니까 또 마찬가지 이야기에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구원 못 받죠? 걱정하지 마세요. 능력의 하나님 보내주시니까 그분이 누구냐?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다리입니다. bridge입니다. 예수님 믿으시고 건너오시면 천국 옵니다. 여러분 감사합시다. 할렐루야 노래 불러요.’
그러면 애초부터 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악과를 왜 심어놨느냐 말이죠. 처음부터 선악과를 왜 심어놨어요? 아니 에덴동산을 만들어 놨으면 뭐든지 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그게 오히려 더 사랑이 넘치고 넘쳐나는 게 아닙니까? ‘마음대로 먹어, 마음대로 먹어. 마음대로 다 먹어. 너희들이 맘대로 먹는데 애로사항 있어?’ ‘저 선악과 좀’ ‘어, 걱정하지 마. 내가 빼줄게.’ 하고 삽으로 선악과를 빼주면 ‘자, 됐나?’ ‘저거 먹으면 혹시 죽지 않습니까?’ ‘오, 걱정하지 마. 내가 안 죽게 만들게.’ ‘선악과야 미안하다.’뽑아서 메가지 틀어서 먹고 ‘자, 또 ..’‘마귀가 자꾸’ ‘마귀? ’ 마귀를 모가지 비틀어서 보내버리고, ‘자, 또 뭐뭐’‘이제는 괜찮습니다.’ ‘그래’ ‘심심한데.’ ‘그럼 여자 줄게.’이렇게 일이 되면 그게 사랑의 하나님 아닙니까? 애초부터 죽음이란 언급을 누구 쪽에서 먼저 했어요? 인간 쪽에서 죽음을 거론했어요? 안 했어요? 안 했죠. 죽으리라 하는 말은 우리 인간에서 한 적이 없습니다.
셰프, 요리사가 식당에서 요리를 하면서 ‘자, 요리입니다.’ ‘무슨 요리죠?‘ 제가 복어 요리 맛있게 했습니다. 잘 잡숴야 됩니다. 죽습니다.‘ 이런 요리를 내놓을 수 있습니까? 그러면 독을 빼고 주셔야지. 이게 우리 쪽, 먹는 소비자 쪽의 입장이고 생각입니다. ’독을 빼고 주셔야죠.‘
에덴동산이 뭡니까? 극락의 좋은 동산이잖아요? 그러면 독을 빼고 좋은 동산 돼야죠. 그게 있으면 위험한 동산 이예요. dangerous, 굉장히 위험한 동산이지 좋은 동산 아닙니다. 자기 1살 먹은 애를 ‘애야 마음 놓고 놀아라.’ 해놓고 여기는 가시나무 심어놓고 여기는 뱀 열 댓 마리 풀어놓고 여기는 쥐 한 스물 댓 마리 있고 여기 바퀴벌레 한 오백 마리 풀어놓고 ‘마음껏 놀아라. 마음껏’ 한 두 시간 되면 애가 물려서 얼굴 퍼렇게 돼서, ‘엄마, 이렇게 물렸어.’엄마 하는 말이 ‘조심하라 했잖아. 죽여.’ 이게 무슨 사랑의 하나님 이예요? 내가 지어낸 이야깁니까?
그게 어제 수원강의 했죠. 이미 범죄한 그것을 정당화하는 마귀가 계속해서 그걸 정당한 거예요. ‘선악과 따먹어라. 괜찮아 질 거야.’ 가 죄질 때만 아니고 죄 짓고 난 뒤에도 마귀가 떠나지 않아요. 계속 입을 나불나불 거려요.‘괜찮아, 사랑의 하나님이야. 널 위해서 십자가 준비했어.’ 그러나 그 십자가는 진짜 십자가 진 하나님이 아니고 인간들을 못 도와줘서 환장하신 분. 여호와 증인 말 같으면 아예 지옥을 없애버리는 하나님. 여호와 증인도 바보라. 지옥을 없앨 게 아니고 처음부터 선악과 없으면 훨씬 일이 간편해져요. 선악과 심어놓고 죽어라 해놓고 나중에 지옥 없애 버리면 이건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잖아요. 지옥 없애지 말고 선악과부터 ‘아이쿠, 내가 실수했다. 네가 먹으라 한 게 아닌데 아이고, 미안하다. 내가 왜 거기 심어놨지?’이런 식으로.
그래서 이 전체 구조가 전체적으로 잘못되었어요. 이건 근원적으로 성경 보는 눈 자체가 잘못되었어요. 잘못 됐으니까 잘못된 것을 알면 이걸 어떻게 해요? 고쳐야 되겠죠.
고치는 방법은 뭐냐, 하나님과 우리가 벌어져서 우리가 죄인이고 우리는 천국에 못 가는 이것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틈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 관계가 이렇게 확대경으로 확대시켜서 이 땅, 지평에 펼쳐진 게 오늘날 우리들 인생의 역사입니다. 그게 창세기 3장에 나와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그때 예수님께서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 이야기할 때 그때 인원수가 몇 명이었습니까? 일단 하나님 계시고 그 다음에 아담 있고 그 다음에 여자 있고 뱀 있고, 거기 이야기 대상자, 총 등장인물이 몇 명입니까? 달랑 4명이죠. 달랑 4명밖에 없죠. 그 네 명이 바로 뒤에 나오는 모든 역사를 다 주관해 버리는 겁니다. 이해되십니까? 네 명이.
그럼 내가 누구냐를 지금 이 자리에서 찾으면 안 돼요. 어디 가야 돼요? 고 네 명이 의논한 곳에, 의논한 건 아니지만, 하여튼 네 명이 있는 곳으로 근원을 찾아가셔야 돼요.
그래서 오늘 강의 제목을 네 자로 정했습니다. ‘중간부분’ 옛날에 우리 집에서 제사를 많이 드렸거든요. 교회를 안 다녔으니까. 제사를 많이 드릴 때 우리 어머니가 제사 음식을 담당하는데 또 할 짓 없는 내가 옆에서 지켜본다고, 어릴 때 일곱 살 여덟 살 때, 엄마가 하는 걸 지켜보았는데, 학원도 있는 것도 아니고 놀이동산 있는 것도 아니고 맨 날 엄마 하는 그것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돔배기를 가져와요. 고기를 잡을 때 머리 부분 끊어내고 꼬리 부분 끊어내고 중간을 굽잖아요. 갈치도 마찬가지고. 그럼 그걸 끊어내 버리면 여기 네모져 버리지, 전체 고기 모양이 사라지잖아요.
인생이 뭐냐 하면 태어나서 죽었다. 우리 입장에서는 그게 전체로 보이지만 이것은 중간에 잘린 거예요. 창조 모르고 끝 모르고, 중간에 돔배기(상어고기)처럼 자체가 잘린 거예요. 그래서 욥이 하나님 앞에 대드니까 하나님께서 뭘 해줍니까? 잘린 부분을 말씀하셨잖아요? 네가 삼성 별 만들 때 너 어디 있었느냐? 뭐 있을 리가 있어요? 욥이 나이가 얼마 안 됐는데.
그러니까 처음에 바람이 처음 부는 장소를 아느냐? 왜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를 자꾸 질문해요. 무슨 퀴즈 게임이 그런 게임이 있어요? 태어나기 전에 있는 게임을 어떻게 알아요? 욥아, 너한테 준 고난은 중간부분에 있는 사람은 못 알아봐요. 중간부분에서 내가 몇 살, 몇 년, 이건 모르고 근원과 마지막을 아는 사람만 풀 수 있는 수수께끼로 너에게 고난을 준 거다 말이죠. 네가 지금 고난이 있다고 나를 원망하는데 그건 뭐가 오류냐 하면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있는 인생 경험으로서 이 고난의 의미를 모르겠습니다.‘하는 거예요.
그거야 모르는 게 당연하죠. 몇 살 먹었다고? 돔배기인데. 끊긴 중간 부분이 어떻게 안다고요? 그런데 사람이 욥이 뭘 보여주느냐 하면 욥이 나중에는 자기 잘못을 알지만 욥은 태어나서 죽을 때 이르니까 자기가 태어나서 살았잖아요. 살았으니까 살았다 + 행복, 이렇게 되겠죠. 이왕 살 거 멋있게 살고 부자로 살고 애들 열 명 낳고 갑부로 살면 이걸 뭐로 보느냐 이걸 복이라 본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 복을 연장하자는 거예요. ‘네가 태어나서 내가 아프지도 않고 건강하고 아내와 열 명의 자식과 부유하게 산 것은 이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기 때문에 복 받았다. ‘라는 요 규정, 요 의미 규정을 주님께서는 강제로 잡아당길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의미가 그렇게 돔배기처럼 중간부분을 잘라버리면 이거는 누구의 시험을 받느냐 하면 시작과 끝을 마귀로부터 이게 시험 들어요. 마귀가 주님한테 시험했을 때 ’배고프지? 배고프지?' 그 다음에 ‘니가 메시아 역할 인기 많으면서 하고 싶지? 기적을 막 베풀며 하고 싶지? 니가 세상의 모든 걸 다 갖고 싶지? ’ 사실은 그 마귀가 하는 말이 뱀이 하는 거예요. 뱀이 마귀니까.
뱀이 처음부터 이미 아담한테 선악과 따먹어라 할 때부터 이미 노림수가 거기 있었어요. ‘니는 살아야 되겠고 살면서 이왕 사는 거 행복하게 살아야 되겠다. 필요한 거 내가 대줄게.’그야말로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것처럼 메스도펠레스라는 그 마귀하고 거래를 하는 것처럼 지금도 우리는 날마다 마귀하고 거래하는 중입니다.
‘이번 일만 성사가 잘 되게 해주신다면 감사헌금 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도대체 잘 된 게 뭔데? 그 자기 성사한 그것이 주께서 다 이루었다 하고 무슨 관계있는데? 주님이 준 게 다 이루었는데, 우리는 펄펄 살아서 행복한 게 다 이룬 겁니까? 사람이 살아 있어 행복해 져버리면 그 다음부터 뭣에 편중하냐 하면 이 살아있는 걸 관리해야 될 부담을 느껴요. ’죽으면 안 돼. 죽으면 안 돼.‘이게 뭐냐 하면 본인이 살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죽으면 안 돼‘가 되는 거예요. ’죽으면 안 돼‘가 돼야 되니까 뭔가 죽음이 오는 사태가 오니까 우리는 어떻게? 숨어 들어가는데 제가 주일날에 그걸 토굴이라 했는데, 토굴 속에 파고 들어가는 거예요. 두꺼운 이불 마구 덮고 마지막 때 3차전을 대비해서 후 삼천 년 후 삼천 반 올까 싶어서 탱크, 지하 벙크를 만들어서 거기 생수 사놓고 거기 피하는 것처럼 자기 하나 살기 위해서 온갖 것을 하는 거예요.
히브리서 2장에 뭐라 돼 있던가요? “죽기를 무서워서” 그 다음의 말이 뭡니까? 종노릇하죠. 한 번 봅시다. 선악과 따 먹는 날에는 그 다음에 뭐가 나오죠? 그 뒤의 말이 “죽으리라” “죽기를 무서워서” 그 뒤에 나오는 말은 그냥 종노릇이 아니고 누구의 종? 마귀에게 종노릇한다. 귀신이 들락날락한다 이 말이죠. 죽기를 무서워한다면 마귀에게 종노릇한다. 건강할 때는 뭐 주님 믿고 편안히 죽으면 되지, 하지만 조금이라고 이빨 아프고 시리고 엉덩이 아프고 하면 ‘주여 왜 이러십니까?’ 이거 뭐 욥의 반복이라. ‘차라리 이럴 거 같으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것을’ 욥기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어요. 이거야 말로 그야말로 중간부분이라. 돔배기라. ‘왜 이러십니까? 나중에 죽으면 주님한테 따질 거야. 내가 무슨 잘못 했다고 이렇게 수모를 주십니까? 따질 거야.’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문제가 뭐냐 하면 이 중간부분을 그냥 놔두면 안 되죠. 중간부분을 그냥 놔두면 마귀의 종 돼요. 마귀한테 시험 들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해야 됩니까? 시작과 끝부분으로 이걸 잡아당겨야 되죠. 뭐 좀 지저분한 방법이지만 사람의 팔 다리가 네 개니까 여기다 말 네 마리 묶어서 ‘이럇’해서 잡아당기면 좀 늘어나겠어요? 성장 판이 늘어나겠습니까? 늘어나는 정도가 아니고 사지가 찢어지죠. 옛날에 역적들 죄 질 때 그렇게 찢잖아요. 중국도 있고 외국에도 그런 게 있어요. 아주 잔인하게 찢는데 지가 통닭도 아니고 왜 그렇게 찢습니까?
자, 그러면 그게 안 된다면 어떻게 돼요? 돔배기밖에, 중간부분밖에 안 되는데 뭘 어떻게 늘려서 시작과 끝을 잡아당겨야 됩니까? 모르겠죠? 방법이 없잖아요. 이게 개인으로는 안 와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단체, 우리, 내가 아니라 우리, 단체에다 집어넣어버립니다. 그러면 이 단체는 개인에 속할 때는 돔배기, 중간부분이 되지만 이 단체는 단체에 뭐가 주입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주입돼요. 약속이 주입되면 창세기 3장의 그 약속과 요한계시록 약속이 이 단체에 전부 다 이게 적용이 되는 겁니다.
그게 아브라함의 언약, 이삭의 언약, 야곱의 언약 이예요. 아브라함의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이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누굴 봤는지 알아요? 예수님 보고 기뻐했어요. 보세요. 자기의 돔배기를 능가하잖아요. 아브라함이 죽기 전에 예수님을 봤다는 겁니다. 죽고 난 뒤에 봤는지, 하여튼 아브라함은 본인의 돔배기 넘어서는 것까지 본 거예요. 예수님이 언제 적 예수님인데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봤습니까? 유대인들은 막 달려들었다고요. 왜, 유대인들은 전부 다 돔배기니까, 개인이니까 자기가 태어나서 바르게 산 것 가지고 착하면 천국 간다. 그들이 놀랜 거예요. 착하면 천국 간다. 누가? 내가.
그러나 성경은 내가 구원받는 그런 이야기는 없어요. 우리가 구원받지, 내가 구원받는 게 아니거든요. 아! 참 이런 인식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내 신앙 가지고 내가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신앙으로 우리가 구원받아요. 주님 신앙으로 내가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이렇게 인도함을 받는 것은 내 기도가 아니고 주님의 기도죠. 그런데 주님의 기도로 인하여 내가 인도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기도로 우리가 구원받아요. 그런데 우리 속의 내가 돔배기로 포함이 돼 있어요. 그래서 이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니고 우리의 자리에요. “하늘에 계신 우리”우리의 자리라고요. 예수님이 만든 것은 우리를 만들었지 나를 만든 게 아닙니다.
그래서 마지막 계명이 사랑인데 사랑은 누가 있어야 돼요? 사랑은 일단 첫 번째는 대상이 있어야 돼요. 사랑할 대상이 있어야 되고 두 번째는 사랑은 그 대상이 둥글게, 둥글게, 이미 우리라는 걸로 한정돼 있어야 돼요. 마귀를 사랑하면 안 되잖아요. 지옥 갈 사람을 사랑하면 안 되죠. 사랑하란 말은 우리를 위해서 니가 있다. 이 말 이예요. 쉽게 말하면. 너를 위해서 저 사람들이 있는 게 아니고 저 사람을 위해서 우리가 있는데 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고 저 사람이라고 저렇게 만든 우리라고 만든 분을 위해서 우리가 있는 겁니다. 뭐든지 다 바꾸려고 하니까 참 강의가 어려워져요. 다 바꿔야 돼요. 다 바꿔야 돼요.
착해서 구원받는다. 주여 이 정도 착하면 천국 가겠죠. 율법은 그걸 완전히, 언더 스킨이란 영화도 있지만, 피부를 뜯어내 버려요. 피부를 뜯어내게 되면 괴물이 다 나오죠. 무화과나무 떼버리고 가죽 옷으로 그걸 덮어버려요. 왜, 우리의 피부는 죄가 밀어내서 표면으로 밀어낸 죄기 때문에 우리의 외면도 내면과 동일하게 죄 모양새입니다. 죄의 구체화에요. 이걸 뜯어내고 죄가 나오는 거기다 주님께서는 가죽 옷을 탑재를 시켜버려요. 탑재를 시키면 죄가 이기겠느냐, 주의 의가 이기겠느냐. 이 문제가 남아있거든요.
그런데 죄가 더한 곳에 뭐가 더 있습니까? 로마서 5장에. 은혜가 넘치죠. 그 구절 기억나죠.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죠. 너는 지켜봐라, 내 은혜가 센지, 니 죄가 센지, 니는 지켜봐라 말이죠. 보면 은혜가 이겨요. 은혜가 이기면 신자고 은혜가 질 때가 있어요. 은혜가 안 찾아오니까 자기의 윤리 도덕으로 자기의 의로움으로 자기가 열심히 교회 충성한 걸로 지킨다면 그건 백전백패입니다. 못 이깁니다.
율법을 더한 것이 죄를 더하게 한 겁니다. 왜, 율법 1차적으로 보내고 율법 따라서 율법을 이루듯 십자가 은혜를 하게 되면 율법으로 완전히 박살내 놓고 모든 의를 다 빠개죠. 망치 가지고 마늘 쪼개듯이 다 빠게 놓고 이제는 죄밖에 없죠. 거기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버립니다. 그러면 바짝 마른 뼈가 하나님의 군대로 일방적으로 살아나요.
이번 수련회할 때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뼈 속에 숨어서 마른 뼈도 아니면서 뼈 인척 하면서 숨어서 엘리야하고 이야기하는 거 다 들어서 ‘이 뼈들이 어떻겠느냐’지는 ‘뭐라 하시노?’뭐라 하는지 다 듣고 있다가 “자, 이 뼈들이 살리라”한다면 천사가 와서 뼈들을 살리는데 ‘오! 뭐 이런 가짜가 있나’
우리는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이미 물에서 건짐을 받았기 때문에 전에 우리가 어디 빠졌나를 제대로 알죠. 물에서 축축하게 빠져나왔기 때문에 우리가 전에 물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요. 그렇지 않으면 몰라요. 제일 나쁜 인간이 바르게 살아서 행여 주어지는 저주를 인생 내 망가짐을 커버하려는 이 사고방식은 가장 극단적으로 복음과 정 대치가 되는 그냥 가장 지옥 적인 모습 이예요. 행동 똑바로 하게 되면 설마 벌은 안 받겠지, 가장 악마적인 모습 이예요. 악마의 극단, 죄의 극단이 그겁니다. ‘그래 좀 절제해야지, 절제해야 돼, 그래야 내가 다시는 그런 일 안 생기지.’무심코 내뱉는 이 이야긴데 너무나 복음적이 아니에요.
그럼 복음적인 발언은 뭐냐,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내 행함이 무슨 의미가 있어.’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내 행함이. 내가 어떤 행동을 하던 간에 그 행위 자체가 악한 짓해도 의미 없고 좀 착한 일해도, 뭐 길거리에서 고정적으로 도와줘도 의미 없어요. 바캉스 가도 의미 없고 안 가도 의미 없어요. 어차피 봄 지나면 가을되는데. 시가집 간다고 해서 의미 없고 안 가도 의미 없고 모든 게 의미가 없어요.
왜 없느냐, 의미 있는 게 따로 탑재돼 있기 때문에 그 의미 있는 것에 내 의미 있는 행위가 섞이면 안 돼요. 절대로 섞일 수 없어요. 100% 은혜가 돼야 되는데 왜 내 것이 씨잘데 없이 내 행함이 왜 거기 끼어듭니까? 그거는 분명히 마귀가 그렇게 우리를 만들어요. 나쁜 짓하면 ‘얼레리 꼴레리 이번 주에 너 죽었다. 죽었다고 너 오늘 각오해라. 이런 나쁜 짓을 해놓고 아마 화요일 쯤 돼서 벌 받을 거야. 아니면 수요일 쯤 벌 받을 거야. 목요일 날 속도 걸려서 한 5만 원 나올 것이고, 금요일 날 남편이 회사에서 잘못해서 한 2천만 원 물어 줄 거고, 이 말이 이겁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보고 부탁하는 것은 본인이 본인에게 벌주지 말라는 거예요. 벌주지 말고 제발 본인이 본인보고 협박하지 마세요. 이게 되게 겸손한 거 아닙니다. 겸손을 빙자한 마귀, 귀신 열댓 마리의 수작 이예요. 본인을 협박하지 마세요.
어젯밤에 잠 잘 잤잖아요. 주의 은혜입니다. 또 햇빛 주시죠. 주의 은혜거든요. 은혜를 공짜로 받고 마치 공짜가 아니고 내가 착해서 은혜 받는 것처럼 왜 그 원천, 그 바탕 자체를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그걸 뒤바꿉니까? 주님의 희생으로 온 은혜를 왜 내 착함으로 그 희생을 가로막습니까? 이게 마귀 짓이지, 이런 짓 외에는 마귀 짓 또 있겠어요? 마귀는 무조건 주님의 희생을 막는 거예요. 착한 일 하지만 착한 일 했다고 여기지만 몇 시간 지나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요. 착한 일은 없습니다. 다 의미 없는 일을 하는 거예요.
자, 지금 어디까지 이야기했느냐 하면 모세 법 이야기합니다. 모세 법 한번 설명할게요. 모세의 법은 뭐냐, 모세의 법이 두 세 사람의 증인 없이는 못 죽인다. 왜 네 사람 안 되고 두 사람인데요? 왜 일곱 명은 안 되고 두 세 사람인데요? 왜 한명이 없이는 안 되고 왜 두 사람이 있어야 되는데요? 따지지 마. 이게 출발점이 이스라엘이라는 원천과 마지막을 아는 이스라엘이라는 자체가 출발이기 때문에 니가 그렇게 따지고 묻는 것은 질문의 출발이 어디입니까? 다 우리 이스라엘이 아니고 나에서 출발해요. 나에서 출발하니까 ‘왜 두 세 사람인데요? 왜 네 사람은 왜 안 되는데요?’
애 들이 이런 비슷한 질문을 해요. ‘얘야 7일 만에 천지를 창조했다.’ 하니까 손 들고 ‘왜 9일은 안 되는데요? 왜 13일 반은 안 되는데요? 왜 26일 두 시간 반은 왜 안 되는데요?’ ‘니가 지금 따지는 출발점이 어디냐?’ ‘제가 궁금한데요.’그게 잘못이야. 니가.‘ 너라는 자리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그게 죄에요.
요번 수련회할 때 어려운 이야기했죠? 죄가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 안에 관장돼 있는 나를 빠져나와서 그 모습으로 내가 바깥에서 주님 안에 있는 나를 다시 관찰할 때 그게 죄라고 했죠. 그게 악이라 했잖아요. 하나님은 나를 다루되 그게 잘 다루느냐 안 다루는지 심사는 내가 따로 나가서 하겠습니다. 그럼 주님 , 나 따로 있고 바깥에 관람하는 나 따로 있고 그렇게 분리하겠다는 말은 이게 마귀한테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지 간에 나는 거기에 동의 안 합니다. 자기가 ‘난 독자적으로 놀 거예요.’ 독자적인 노선, 이게 죄 짓고 난 뒤에 모든 인간의 공통점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같이 모여서 어떤 건전한 사업을 한다? 일 안 됩니다. 결국은 마지막에는 자기가 얼마나 희생하고 얼마나 공로, 자기 공적 내세우면서 갈라지게 돼 있습니다. 부부사이도 좋다가도 나중에 이혼할 때는 문제가 돈 문제로 끝나잖아요. 니가 얼마 벌었다고. 위자료 내라 하면 니가 살림하는 여자가 무슨 돈을, 무슨 위자료가 있느냐, 천만 원 먹고 떨어져라. 돈은 내가 벌었는데 니가 무슨 돈을. 재판 걸면 주부도 일단은 반은 챙기고 반에서 혹시 아르바이트 한 거 있으면 또 챙겨주고, 간통죄는 없지만 살림은 거덜 나요.
모세의 법 할 때 ‘나 그 법에 저촉 안 돼. 나 그 법 인정 안 합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어떻게 됩니까? 소멸하는 맹렬한 불에 죽게 돼 있어요. ‘니가 모세의 법을 폐했지, 나 두 세 사람 필요 없습니다. 나 그 따위 법 안 합니다.’ 이러면 소멸하는 맹렬한 불에 벌 받게 돼 있어요. 왜 그러냐고 묻지 마세요. 돔배기가 어디 감히, 고기도 아닌 것이 중간에 네모진 것만 달랑한 게 어디 머리 부분, 꼬리부분 뭐 안다고, 지가 뭐 안다고, 중간만 알아서 뭐 안다고, ‘난 안 합니다. 난 이런 법은 못 지키겠습니다.’“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시작과 끝을 갖고 계시는 분이 두 세 증인 같으면 두 세 증인 해야 돼요. 뭐 네 명 다섯 명, 한명 필요 없어요. 두 세 증인이어야 돼요. 이게 모세 법이예요. 이제 이해되시겠습니까?
어떤 법이 주어질 때 그 취지가 뭐냐, 너 자리에서 나오는 것은 다 엉터리고, 말씀의 자리로부터 다시 가서 거기서부터 다시 새 출발하라. 이게 바로 법을 주신 이유입니다. ‘한번 따져서 믿어볼까?’이러지 마세요. 우리는 따질 권한이 없어요. 우리는 따져봤자 사적인 욕구와 욕망에서 따지기 때문에 그렇게 따져서 예수 믿겠다는 그 예수는 완벽한 가짜입니다.
흔히 저한테도 옛날에 그런 사람이 있는데 ‘나를 ale게 해봐라. 믿으면 구원받겠는데 그러니까 당신 목사니까 나를 믿게 해봐라.’ 니가 뭔데 내가 믿게 해, 니가 뭔데.‘ 그 사람이 모르는 게 뭐냐 내가 무슨 자격으로 구원이 될 자격이 있다는 것을 니가 스스로 물어봐라. 니가 뭔데 구원될 자격이 있죠?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내가 가치 있다는 것을 내가 증명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증명 못해요. 내가 가치 있는 걸 증명 못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증명도 안 되는 짓을 왜 ’난 가치 있다. 난 살아야 돼.‘ 왜 자꾸 그런 말이 나오죠? 분명히 마귀가 그렇게 부추긴 거예요. 모든 시작은 너로부터, 왜, 너는 소중하니까.
그러면 그렇게 말한 당신은 소중하지 않습니까? 저한테 물으면 내가 소중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소중하다. 그 우리가 누군데요? 안 가르쳐줘.ㅎ 우리가 소중하죠. 그럼 우리는 1인칭 복수니까 영어로 WE, 우리를 대표하는 분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이란 한분이 다양성을 생산했어요. 머리는 하나요, 몸은 여럿이고, 그래서 수련회 때 제가 모가지를 자르라 했죠. 모가지를 잘라 버리고 모가지를 왜 위로부터 왜 자르라 했습니까? 여기에 되도 않은 나만을 위한 눈, 나만을 위한 코, 나만을 위한 귀가 있기 때문에 이 얼굴을 잘라버리고 여기다 뭘 해야 되느냐 하면 십자가 가지고 여기 꽂아야 돼요. 얼굴에 십자가를 꽂으면 원피스 입으면 흉측한 모양 되겠죠.
요걸 머리 되시는 주님, 우리는 몸 지체, 합해서 교회, 다른 말로 쉽게 하면 우리, 요한복음에 의하면 주님께서 하신 너희, 이제는 나의 아버지가 너희 아버지가 된다. 그때 처음 이예요. 예수님 죽고 난 뒤에 부활하고 난 뒤에 처음 이예요. 그전까지는 전부 다 이건 나로부터 출발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끼리 모이는 내가 머리가 되는 중심의 집단을 말하죠.
주님 부활하고 난 뒤에 주님의 집단이 생겼어요. 그러면 다른 사람은 부활했습니까? 부활 안 했습니까? 부활 안 했죠. 닭 쫓던 개 돼 버렸죠. 주님이 지금 뭐라는데? 뭐라는 거야? 우리 여기 있잖아요? 너 아니고 내가 만든 우리 따로 있어. 저희, 여기 12제자 있잖아요. 아니라니까. 너희는 아니야, 너희는 너희들끼리 우리 말고, 내 중심으로 된 우리, 내가 부활되게 되면 따로 만들어 놓는다니까. 그때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그때는 우리 단체에 합당한 계명이 한 계명밖에 없어요. 이제 마지막 계명이니 서로 사랑하라. 어디 안에서? 네가 상대를 사랑하되 어느 범위 안에서? 정해 놓은 숫자의 우리 범위 안에서. 이제 이해되시겠습니까?
그걸 부활되지도 못한 우리가 지키려 하니까 이건 나에서부터 우리가 나왔으니까 이거는 그야말로 사랑이 아니고 그걸 무슨 관계냐 하면 이게 사랑이 아니고 애증의 관계라 하는 거예요. 사랑 + 증오가 같이 있어요. 동전 보면 같이 있어요. 여기 숫자 500 있잖아요. 여러분 500주니까 500 받은 줄 알아요? 숫자 뒤에다 미움을 써야 돼요. 주니까 자기는 사랑보고 받았는데 뒤에 보니까 뭐가 있어요? 만약에 내 사랑에 제대로 대우 못하면 니는 나의 최고의 미움의 대상이 될 거야.
압살롬이 자기 누이동생을 그렇게 미칠 듯이 사랑해 놓고 그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한번 범해놓고는 미칠 듯이 죽여 버리는 거예요. ‘가, 가란 말이야.’ 낙엽 막 던지면서 ‘니가 내 인생에 꼬이고 되는 일이 없어. 가, 가란 말이야.’ 낙엽 들고, 우리는 돈 들고 막 던지면 좋겠는데, 돈은 없으니까 낙엽 들고 ‘가, 가, 가란 말이야. 미워 주겠어.’ 남자는 다 그래.
아유, 결혼을 하기 전에는 뭐 당신은 손에 물 안 묻혀줄게, 해서 고무장갑만 사주는 줄 알았지, 그리고는 결혼해놓고는 여자는 결혼하고 나면 거머리처럼 달라 붙잡아요. 세퍼트가 달리 세퍼트입니까? 한번 물으면 놓지 않으니까 세퍼트죠. 달라붙으니까 이게 귀찮은 것이라. 남자는 충동이고 여자는 거머리고. 괴물과 거머리의 만남, 같이 산다는 게 신기해요. 개 보기에 미안해요. 개보다 더 못해. 그래서 여자가 달라붙다가 애 낳기만 해봐. 애 딱 낳고 난 뒤에는 이제는 가벌 관계가 역전돼 버렸어요. ‘돈 벌어와. 돈 벌어와, 니 새끼 책임져.’지는 지 새끼하고 맨날 같이 먹고 자서 너무 먹어서, 애 먹을 때 같이 먹고 애 잘 때 같이 자다 보니까 퍼져 있고, 남편 보고 ‘돈 벌어와. 지 자식 책임져. 돈 벌어와.’ 남자는 그나마 자식에 대한 책임감이 있어서 완전히 점점 더 아내 앞에서는 작아져요. CF에 그런 거 있잖아요. 더워서 에어컨 좀 틀려고 하니까 ‘꺼라.’
참 우리가 먼저에요. 시작과 끝을 아시는 분이 먼저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개인에게 주는 겁니다. 그러면 개인은 원천을 모르고 돔배기처럼 자기밖에 모르니까 여기서 강한 반발이 일어나죠. 반발에 대한 벌칙 조항이 율법에 있어요. 만약에 이 모세 법을 폐하는 자는 죽여버린다. 그것도 어떤 벌로? 맹렬한 불로써. 요 법을 누구한테 준다 했습니까? 처음에 강의할 때, 이스라엘에게 줬죠. 안 잊어버리셨네요. 감사합니다. 요걸 이스라엘에게만 줬죠. 이스라엘에게만 줬다가 이스라엘을 누가 잡아먹죠? 바벨론 제국이 마지막에 잡아먹으면서 이스라엘 바운더리가 깨지고 이스라엘은 완전히 전 세계 디아스파라 흩어져버리죠. 유랑민이 돼 버렸잖아요.
그렇게 되면서 다니엘은 거기 포로 잡혀 가서 예언을 하죠. 한번 바벨론은 영원한 바벨론이다. 그게 메대, 바사가 되던 헬라 마케도니아가 되던 로마가 되던 그건 전부 다 한 신상 안에 있는 부속 이예요. 머리가 바벨론이면 발도 바벨론 이예요. 그게 모양이 바뀌었다 뿐이지 이게 로마가 되던 필리핀이 되던 이게 나이지리아가 되던 관계없어요. 이게 러시아가 되던 북한이 되던 중국이 되던 관계없어요. 전부 다 바벨론 이예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전부 다 큰 성 바벨론, 하나의 음녀, 끝났어요. 그게 왜냐 하면 어느 관점이냐, 우리 관점이 아니고 니 나라 내 나라 있는 게 아닙니다. 홀로 아리랑이 아니에요. 하나의 관점 이예요.
하나밖에 없는 그 이스라엘 관점, 이스라엘 관점에서 이스라엘이 망해버리면 참, 중요한 대목입니다. 어렵더라도 좀 참으세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이스라엘에게 주고 이방 나라에는 안 줬죠. 그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 계시를 받은 한 나라를 주께서 포기 안 해요. 끝까지 가요. 이 한 나라를 바벨론이 잡아먹죠. 잡아먹으면 바벨론 나라에 이스라엘이 분산돼서 흩어지잖아요. 그러면 이스라엘만 이스라엘 나라에요. 다른 나라는 나라 아니에요.
그러면 속에 있는 분산된 이스라엘 나라에게 약속을 줘버리면 그 이스라엘에 준 약속이 안에서 자생적으로 진짜 한 나라 이스라엘을 만들어버려요. 그러면 바깥에 있는 나라가 한 나라를 둘러쌌기 때문에, 제 논리가 한 나라가 이스라엘을 둘러싸잖아요. 우리는 220국 나라라 하잖아요. 유엔에 가입된 나라가. 월드컵에 가입된 나라가 220나라라도 하나님 관점은 하나의 이스라엘을 포장한 하나의 단일체가 되는 거예요. 요거 이해되십니까?
다니엘에 보면 바벨론이 신상이 몇 개에요? 달랑 하나에요. 나라가 바뀌었다 해서 모양새가 바뀐 거지 맨 그 발바닥에 있는 인자의 나라 올 때까지 그 발바닥은 누구 발바닥 이예요? 그 금신상의 발바닥 이예요. 같은 한 통속이라니까요. 그게 이스라엘이 하나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둘러싼 그 나라도 두 개가 돼서는 안 되고 오직 한 나라가 돼야 되거든요. 한 나라가 되고 난 뒤에 이 한 나라에 뭐가 있느냐? 하나님의 약속은 누구만 줬다? 이스라엘에게 준 거예요. 이스라엘 나라가 약속을 잃어 버리면 진짜 이스라엘을 만들어 버리면 바깥에 있는 가짜부터 해서 모든 바벨론 나라가 이게 퍼져 버리면 이쪽에서 뭐가 생깁니까? 균열을 일으켜요.
새로운 손톱 나오면 바깥의 손톱은 어떻게 됩니까? 이게 아주 흉측하게 떨어져 버리죠. 새살이 나오면 바깥의 살은 그냥 떨어진 게 아니고 균열을 일으켜서 아주 흉측하게 떨어지잖아요. 그 흉측한 나라에 지금 봉사하고 있습니다. 홀로 아리랑. 그 흉측한 나라가 지금 독립한지 70년 됐다는 거예요. 그 흉측한 나라에. 갈라질 나라에. 찢어질 나라에. 부서질 나라에 전체가 하나의 계시 준 이쪽을 공격합니다. 그래서 짐승의 나라에요. 음녀에요. 왜, 진짜 그리스도 신부는 새 언약에 의한 그리스도 교회만 신부이기 때문에, 이 신부 아닌 것이 가짜 신부, 음녀에요.
바벨론 음녀라는 개념 잡아내는데 그렇게 복잡해요. 이게 굉장히 어려워요. 이 무슨 간음죄 했나? 간음죄라는 그 간음죄는 다른 나라한테 주지 않았습니다. 어려워서 다시 하겠습니다. 십계명의 간음죄는 다른 나라 주지 않았다. 누구한테 줬다? 이스라엘에 줬다. 따라서 간음죄냐 아니냐는 누가 결정한다? 이스라엘이 결정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바알 신을 섬겼다? 그러면 간음죄가 성립됩니까? 안 됩니까? 간음죄가 성립되죠. 에스겔, 예레미야, 이사야에 나오죠.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하고 할 때는 간음죄가 되는 거예요.
그러나 다른 민족이 이스라엘 하는 것은 간음죄가 성립이 안 돼요. 왜, 그 나라는 애초부터 뭐가 없다? 율법이 없어요. 모세 율법이 없다니까. 지금 히브리서 10장 28절합니다. 지금 모세 율법이 없어요. 간음죄가 성립이 안 돼요. 율법이 없는 데는 뭐가 성립이 안 된다? 죄가 성립이 안 돼요. 로마서 나오는 이야깁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 법이 없는 곳에는 죄가 없는 거예요. 달리 이야기합시다. 법이 있는 곳에는 죄가 있죠. 이걸 사람들이 오해해서 법 지키면 되지 않겠느냐, 이건 지금 법 준 취지를 완전히 오해, 법을 줬잖아요. 그러면 무조건 죄가 있어야 돼요. 잘할게요. 하나님께 ‘잘할게요.’ 라는 말을 하라는 게 아니라니까요.
법은 죄를 만들기 위해서 준 거예요. 아휴, 이런 인식 발상을 언제 바꿀지 모르겠어요. ‘하나님 저 잘못됐습니다.’잘못됐다는 그 말이 건방져요. 언제는 잘못 안 했어요? 밤에 잠자는 건 잘못된 거 아닙니까? 왜 새삼스럽게 잘못됐어요? 아휴, 내가 새삼스럽게 잘못해서 요번 주에 벌 받을 거 싶다. 그 사고방식이 잘못된 거예요.
가방 있죠? 2분 남았는데 숨 쉬는 것은 잘못된 거 아닙니까? 숨 쉬는 것도 잘못된 거예요. 알레르기 비염 잘못된 거 아니에요? 다 잘못된 거예요. 참 우리가 히브리서 10장 보면서 목사님 설명해 주세요. 하는데 이렇게 밖에 설명할 수밖에 없어요. 이거 알레르기 비염 약입니다. 이거 아침, 저녁으로 한번 뿌려버리면 한 달 전부터 뿌리면 그 다음 한 달 후부터 비염이 없어져요. 5년 전부터 사용해서 설교하는데 지장 없어요. 요거 의사의 처방 있어야 돼요. 지금 이건 딴 이야기고.
하여튼 간에 이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밖에 없어요. 왜냐, 그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거밖에 없는데 중간에 많은 220개국 있더라도 한 나라에요. 음녀가 돼요. 법이 이쪽에서 음녀라 하면 음녀인 줄 알아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이방인들이 교회 만들고 ‘한번 법 지켜서 착하게 살아 천당 가볼까?’우리는 천국은 관계없는 데에요. 우리가 가려면 이렇게 가면 안 되고 이스라엘 들어와서야 돼요. 이스라엘에 들어오게 되면 여기 ‘다 이루었다’ 언약 십자가 있잖아요. 여기 들어오면 우리가 새 이스라엘 되게 되면 그 다음에 뭘 아느냐, 이방인들이 사고방식이, 이방인들이 죄를 용서받는 게 아니고 이방인들의 사고방식을 용서받아요. 사고방식을!
이방인들이 사고방식은 하나입니까? 사적 이예요? 사적이죠. 왜냐 하면 마귀가 그렇게 만들어놨거든요. ‘니가 잘해서 구원받으면 니만 홀로 구원받는다.’너만 받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뭐라 했습니까? 우리거든요. 우리! 우리로부터 출발해야 된 건데 모든 인간들은 누구부터 출발하느냐 하면 나로부터 출발하잖아요. 그 사고방식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천상천하유아독존, 이거 이방인 사고방식, 불교잖아요.
요러한 율법의 정신을 예수님 십자가 이후에 이게 전체로 확산이 되고 말았어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망했으니까. 확산되고 난 뒤에 하는 말이 뭐냐 하면 28절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자는 그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크겠느냐” 하죠. 이 말은 신약 시대에요. 다시 말해서 구약의 이스라엘이라는 하나의 국가에 줬던 그 법이 이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망하게 함으로써 이 법이 이제는 보편적인 전체 지구인에게 다 퍼졌다. 그때는 모세가 기준이었는데 지금은 누가 기준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기준이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범위의 확대!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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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20150814b-히10장28절(중간 부분) - 이 근호 목사
자, 다시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밟았다 했잖아요. 밟으면 뭐가 나오느냐, 하나님의 언약의 피를 부정하는 걸로 봤잖아요. 그 언약의 피라 하는 것은 피라는 말은 무슨 뜻이다? 이미 누가 돌아가셨다. 돌아가셨으면 이미 깨끗하게 게임 오버 끝났는데 그걸 욕되게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언약의 피, 죽음 앞에 뭐가 붙느냐 하면 언약이 붙죠. 약속된 죽음, 약속된 피입니까? 약속된 죽음은 약속이 계속 살아있는 한 죽음도 약속과 결부되면서 죽음 자체가 다시 살아나버려요.
그러면 이것이 뭐냐 하면 이것이 소생이 아니고 이게 부활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 앞서서 산 사람은 소생이고, 부활의 첫 열매는 예수님 이예요. 이거는 죽었다 살아난 게 아니고 죽음 자체가 살아난 사람만 모이는 곳이 부활의 세계, 그걸 가지고 두 자로 천국이라고 합니다. 죽었다 살아난 사람은 천국 가는 게 아닙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이 죽음 자체가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안 죽어요. 모든 인간은 안 죽습니다. 죽어도 다시 불러내요. 요한복음 5장에서“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그래서 전에 설교시간에 그런 자살은 소용없다고. 자살해서 죽을 거 같으면 나도 죽겠다. 자살해도 안 죽어요. 뭐냐 자살했다는 행위가 살아있어요. ‘니 자살한 인간이지?’ 하고 자살한 것까지 포함해서 살아나버려요. 죽으려고 죽었는데 안 죽는 거예요.
그럼 자살한 사람은 왜 죽습니까?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죽었는데 있는 고통에다 자살한 고통까지 추가됐어요. 왜 잘못됐습니까? 인간은 죽든지 태어나든지 살든지 자기소관이 아니에요.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살든 죽든 간에 이거는 본인 소관이 아닙니다. 언제 죽을 것이냐, 언제 태어날 것이냐, 언제 오랫동안 살 것이냐, 그거는 참새도 주의 뜻이 없으면 참새도 안 죽습니다. 참새가 오래 산다는 말이 아니고 죽기는 죽는데 주의 허락을 맡고 죽어요. 참새가 시장에 팔리는 것도 주의 허락을 맡듯이 하물며 너희 일까보냐. 하물며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관할 안 하겠습니까? 다 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뜻 이예요. 너희들이 살았다고 이야기하지, 하지만 사실은 너희들이 스스로 어떻게 너희 운명을 조정할 수 없는 이미 죽은 자야,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어떻게 하느냐, 두 자로 언약, 너희들이 언약을 알아? 너희들이 게 맛을 알아? 똑같은 거예요. 너희들이 언약을 알아? 언약을 알게 되면 산다. 죽는다. 태어났다. 이 모든 것은 이미 우리 손을 떠나버렸어요. 자살해도 안 죽으니까 이거 어떻게? 백 상어 입 벌리고 있는데 모가지 집어넣어서 산산조각 나도 안 죽어요. 잠시 살점들이 이별할 뿐이지. 다시 상봉한다니까요. 다시 모아져요. 이게 인간의 팔자고 인간의 운명입니다.
뭐 팔자 봐준다고? 뭐 사주 팔자본다고요? 니가 니 사주를 알아? 죽어도 안 죽는 그게 사주에요. 인간이 왜 사주팔자를 보느냐, 그건 돔배기이기 때문에, 앞부분 다 떼 내고 뒷부분 떼 내고 지가 태어나서 요것만 달랑 하다 보니까 사주팔자 보고 궁합 봐서 저 남자 만나서 잘 사시겠습니까? 잘 사는구나, 부채도사 해서 하는데 심지어 교회 권사님 집사님, 전부 다 거기 가서 날짜 잡고 사주보고 결혼 궁합 보고 안 보는 척 하면서 보고 교회도 나오고 주여, 하고 장난삼아 하는데 인생이 장난입니까? 인생이 장난 이예요?
어느 한 순간도 내 소관에 있는 내 인생, 한 순간도 우리한테는 하나님이 허락한 적 없습니다. 모든 허락은 주님의 허락 권할 하에 있어요. 어머님 돌아가시고 다 뜻이 있어서 돌아가신 거예요. 어머님 돌아가셨다고 애달아하지 마세요. 돌아가신 어머니나 살아있는 우리나 똑같은 입장입니다. 다 같이 죽어있는 입장 이예요.
그럼 어떻게 됩니까? 죽음은 자체를 교체를 해야 돼요. 어떻게? 내 죽음은 내 죽음을 죽여야 돼요. 내 죽음을 죽이고 뭐로 바꾼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바뀌면 그거는 부활의 세계에 이릅니다. 오랜만에 기쁜 소식 전했죠. 우리는 안 죽는데 그건 죽어야 돼요. 내가 죽는다는 죽음은 죽어야 돼요. 이거 안 죽으면 마귀의 종 됩니다. 죽기를 무서워 종노릇 하거든요. ‘살아야 될텐데’ 하니까 자꾸 마귀 종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내가 생각한 죽음, 또는 나 같이 비슷하게 생긴 인간들이 장례식장 만들어 놓고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그 언어 속에 언어와 맞춰 있는 죽음 있잖아요. 그걸 지우개로 지워버려야 돼요. 로또 할 때 동전 가지고 앞에 덮쳐 있는 걸 긁어버리면 꽝이 나오든지 100원 나오든지 나오죠. 앞에 덮쳐 있는 걸 긁어야 돼요. 왜곡된 죽음을 긁어내야 돼요. 뭐로? 언약으로 긁어내요. 언약으로!
이거 뭐 여러분 잘 아는 이야기해 볼까요? 마르다 마리아가 오빠 아플 때 분명히 통보를 했는데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지체했죠. ‘저 두 여자 인간 만들어야 되겠다. 이 참에 인간 만들어야 되겠다.’ 오빠 일부러 하나님께서 죽이고 사람 만들기 위해서 안 갔어요. 뒤늦게 가자마자 난리 났죠. 진작 오지 죽고 난 뒤에 와서 약도 소용없는데 이제 와서 뭐 조문하러 오셨습니까? 주께서 그걸 전부 다 받아 적어요. 왜, 그게 바로 우리의 죽음을 삭제하지 않는 효과기 때문에. 마귀한테 벌벌 떠는 이유들이 그 안에 들어있어요. ‘진작 왔으면 우리 오빠 살았을 텐데. 늦게 와서 우리 오빠 죽었습니다. 물어내세요. 책임지세요. 전에 먹은 거 잡채 게워내세요. 우리 집에 와서 잔 거 계산 다 하시고 샤워 할 때 뜨거운 물 쓴 보일러 값 내시고.’ 이런 식으로 막 따지고 든다 말이죠.
그러니까 주님 하시는 말씀이 일부러 죽였다는 거예요. 일부러! 일부러 왜 죽이느냐, 일부러 죽여줄 때 마리아 마르다가 성도기 때문에 오빠 죽으면 성도 아닌 사람은 ‘팔자거니’ 하고 그만 둘 건데 성도기 때문에 누구 멱살 잡고 흔드느냐 하면 예수님 멱살 잡고 흔들잖아요. 옳은 건 아니지만 무조건 예수님 당신과 연루된 사건이란 거예요. ‘일찍 왔으면 안 죽을걸.’ 왜 대접 잘 받아놓고 우리 오빠는 죽이고 대접 소홀히 하고 관심도 없는 남의 집 애는 그렇게 잘 살리고, 야이로 회당장, 언제 야이로 회당장 언제 알아봤다고 그 딸을 살립니까? “소녀야 잔다.”하고.
다른 사람은 또 죽어서 살린 정도가 아니고 이건 그 정도가 아니죠. 안수하매 병이 나았더라. 어떤 사람은 진흙 가지고 바르니까 “ 어떻게 보이느냐” “희미하게 보입니다.”한번 더 발라서 왔다 갔다 하니까 시력이 좋아졌어요. 자동적으로 시력 조정하는 안경을 뭐라 합니까? 다 초점 만들은 거예요. 처음에는 희미하게 보이다가 마을 밖에 나가 나중에 다시 해보니까 이제는 안수하니까 오, 이제는 저절로 보인 거예요. 그렇게 해주면서 여태 대접받아 놓고 아플 때는 오지 않고...
가서 주께서 뭐라 하느냐 하면 새삼스럽게 다시 이야기해요. “나를 믿는 자는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라는 이야기를 하시고 오빠를 다시 불러내죠. 그 오빠를 불러낸다면 오빠가 가 있는 그 세계는 어떤 세계였습니까? 믿음의 세계죠. 어떤 세계? 믿으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세계, 살아서도 살고 죽어서도 사는 세계, 살아서는 영원히 죽지 않고 죽어서는 다시 사는 그 세계를 오빠가 그걸 증거 하는 겁니다.
그러면 한번 봅시다. 오빠가 산 것이, 여러분 제가 한번 물어보면 답변해 보세요. 오빠가 산 것이 좋습니까? 예수님이 누구신가 알게 된 게 좋습니까? 예수님이 누구신가 안 게 좋죠. 그러니까 여러분 가정에 남편들 죽기 기다려서 예수 믿지 마시고 죽기 전에 알아서 기세요. 이 좋은 예수님 있는데 왜 자꾸 다른 루트 거치도록 하면 안 됩니다.
살아있는 게 은혠 줄 아시고 그냥 주님만 쳐다봐야 되는데 남편 쳐다보다가 남편 안 되면 그때 주님한테 따지듯이 쳐다보면 안 돼요. 그게 사사기거든요. 사사기 할 때는 그냥 혼자 하다가 또 어려울 때는 부르짖고 또 구원자 보내주고, 또 좋다고 하다가, 사실은 죄가 숙성한 기간이라 했는데, 표현을, 꼭 오늘날 우리 모습과 똑같잖아요. 그게 아까 첫 시간에 출발을 어디서부터 했습니까? 우리로부터 출발을 해야 될 걸 어디서부터? 나! 나로부터 출발한 이게 화근이라. 나로부터 출발한 게 화근 이예요.
제가 참 오지랖도 넓죠. 공원에 운동하면서 개 풀고 다니는 걸 다 지적하거든요. 개 목줄 해야 됩니다. 벌금 50만원 냅니다. 목줄 하세요. 한번 했으면 들어야 되는데 다음에 또 그 시간에 안 오잖아요. 개 발랑 듭니다. 들으면 ‘오, 개 누워있어. 개 누워 있어. 그 다음에 가면 목줄 다 하고 다녀요. 어떻게, 집어던져요. 그러니까 몇 번만 하니까 그 다음부터 전부 다 개 목줄하고 다니고. 자전거 다니는 길 아닌데 자전거 타고 다니는 나이 70, 80된 사람들 스톱 시킵니다. 지 나이 많다고 ‘알았어. 알았어.’ 하거든요. 스톱시켜요. ‘못 갑니다. 할아버지.’ 지가 나보다 힘이 약한데 ‘딴 길로 가세요.’‘니가 나이 많은 사람한테’나이가 왜 나옵니까? 여기는 법으로 못 가게 돼 있어요. 가세요. 가는 길이 좁을 때는 자전거는 타고 못 가는데 사람들이 내리기 귀찮으니까 오던 길로 오는 거예요. 나이 70, 80된 사람들이. 단호하게 막죠. 한두 번만 해보세요. 전부 다 다른 길로 가요.
뭐 WMCA 따로 없어요. 이게 WMCA라.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꼭 내가 그렇게 하면 뒤늦게 뒤에 60된 아주머니들이 ‘개 때문에 나오기 싫어. 그 할아버지 얼마나 애먹이든지.’ 나오니까 그제서 궁시렁, 궁시렁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나무라니까 뒤에 몰래 들어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 주님 얼마나 외로웠겠어요? 주님 혼자 한다고. 뒤늦게 예수 믿고 난 뒤에 우리가 “그래 주님 중심이야. 우리가 비겁한 사람이야.”이미 주님께서 죄 처리 해놓고, 다시 말해서 죽음과 부활 이야기하는 것은 뭔 뜻입니까? 불로 싸질러버린다는 뜻 이예요. 아까 처음 시간 이야기해봅시다. 모든 법은 누구한테 줬다? 이스라엘에 줬다. 그런데 이스라엘 누구한테 삼켰다. 바벨론에 삼켰다. 그 바벨론이 지구 역사를 끝내면서 바벨론 말고 다른 바벨론 없어요. 오직 그 바벨론이 그게 확장되어서 220국 현재 나라가 됐다 했죠.
그렇다면 그게 커지면서 그 안에 있는 그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줬잖아요. 그 언약 완성 자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잖아요. 그 예수님이 완성하고 난 뒤에 예수 믿는 자들이 모든 나라에 오는 시대마다 다 퍼져있으니까 결국은 전에는 모세 율법에 두 세 증인으로서 사람 잡지 아니하면 맹렬한 불로서 소멸한다는 그 법이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경계를 벗어나서 온 지구상에 모든 나라에 구애받지 않고 어린양의 언약의 피를 부정하게 되면 뭐 받는다? 맹렬한 불보다 더 센 벌을 받는다.
그걸 한번 봅시다.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이제 언약이 퍼진 거예요.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 자, 여기서 묻습니다. 요렇게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주장은 어디서부터 출발해 나왔습니까? 나에서 나왔습니까? 우리에서 나왔어요? 우리에서 나온 거예요. 그런데 그 우리가 어디서 나왔다? 십자가 지고 난 뒤에 나의 아버지가 이제는 너희 하나님이 되죠. 그러니까 그 우리가 한데 모아지면 어디로? 예수님의 나라로 모아져요. 그 나는 누구와 대조가 된다? 현재 있는 나하고 대조가 돼요.
우리는 나로부터 출발해서 나의 행복과 나의 잘됨을 위해서 말씀을 지키는 그것이 완전이 주님 중심의 것과 극히 대립을 이뤄왔다 이 말 이예요. 나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해석이 전부 다 거짓말이고 사기고 엉터리고 거기에 말려든 거예요. 교회 가서 목사 하는 말에. 나 잘 되기 위해서 왔다가 목사가 당신 잘 된다 하니까 그게 은혜 받은 줄 알고 생각한 거예요. 우리는 날라 가 버리고. 그 출발점이 주님 나에서 나온 우리가 돼야 돼요.
사랑? 우리는 사랑 없어요. 왜, 안 되느냐? 나로부터 나온 사랑은 그 동전 뒤에 뭐가 있다? 증오 있죠. 사랑은 증오와 함께 있어요. 나 하는 대로 안 해주면 이제는 강력한 복수가 있을 거예요. 그러니 이게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교회 꽃꽂이 한다? 우리는 사랑인 줄 알았죠. ‘주여 성령에 의해서 꽃꽂이하니까 얼마나 감사한지’ 그 개가 올 때까지는 미처 몰랐죠. 개가 그 꽃을 뜯어먹을 때까지는 자기가 순수하게 한 줄 알았죠. 그런데 그 교회에서 나를 그렇게 싫어하는 집사가 보니까 어느 날 내가 꽃꽂이하는 걸 봤어. 봤는데 목사님 집에서 키우는 개가 와서 꽃꽂이한 걸 뜯어먹으니까 그 집사님이 ‘으쌰’ 얼마나 신났겠어요? 남 못 되면 그렇게 신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꽃꽂이하고 남 좋은 일 생겼네. 브닌나, 원수에게 좋은 일 생겼어요. 한나를 괴롭힌 원수 브닌나는 좋아하고 한나는 애 없어서 울고 있고.
모든 출발점은 바로 나로부터 출발한 게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나로부터 출발한 이유가 뭐라 했습니까? 내가 살아있다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 십자가는 뭐냐? 니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니가 지금 죽어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걸 동전으로 주께서 일생 살면서 내 삶, 내 죽음을 긁어내야 돼요. 긁어내면 나라는 자체가 애초부터 나로부터 출발한 게 잘못이었고, 우리에서 나온 하나의 실 가닥이 나가 되는 거예요. 그럼 나는 그냥 나면 되지, 하지 말고 우리를 경유해서 나가 돼야 돼요.
내가 왜 삽니까? 물어보지 말고 우리는 왜 살아야 됩니까? 물어봐야 돼요. 그런데 우리 속에는 누구만 나에요?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니까 예수님 위해서 우리가 있고, 그러면 나는 누구를 위해서 있다? 예수님을 위해서 지금 사라지고 있는 거예요. 내가 사는 게 아니고 ‘살아야지‘가 아니라 살려냄을 당하고 있는 거예요. 누구? 나로부터. 그러면 나만 그렇습니까? 다른 교인들도 그렇죠. 그러면 그 사람들끼리 하나의 형제가 되는 겁니다. 그때 어떻게 하느냐, 서로 사랑하라. 이게 마지막 계명이다. 요한복음 한 가지 계명, 마지막 계명 “서로 사랑하라”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나를 사랑해요? 이거는 어림도 없는 어림 반 푼 없는 소리, 우리는 절대로 남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느냐, 예수님을 경유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경유해서 보면 주님의 형제기 때문에 이게 사랑하도록 주께서 그렇게 조치하는 겁니다. 건드리면 누가 화냅니까? 주님이 화내니까. 주님을 경유하거든요.
여기 참외가 있는데 내가 직접 ‘드세요’가 아니라 이 참외를 누가 깎았느냐 하면 우리 집사님이 깎았거든요. 집사님을 경유해서 깎을 때 집사님이 먹으면서 ‘ 내가 깎았는데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깎은 내가 보람을 느낀다.’ 하잖아요. 물론 집사님이 이걸 아주 두껍게 깎았어요. 거의 반 나갔어요. 내가 봐도 두껍다 싶었는데.
어쨌든 모든 교회는 누가 관리자냐 하면 주님이 관리자니까 내가 관리한 사람을 니가 사랑해야지, 누가 더 못해요? 주님이… 그래서 마지막에 주의 이름으로 사랑한다 이 말이죠.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주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그게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주의 사랑으로서 소망하고 주의 사랑으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니 믿음 없고 내 믿음 없어요. 우리의 믿음 이예요. 니 소망 없고 내 소망 없고 우리의 소망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만? 십자가를 아는 사람. 그래서 십자가에요. 마지막은 결국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만 자랑해야 돼요. 십자가에서 나는 죽고 날마다 누가 산다? 주만 사는 사람만이 형제입니다. 남편이 형제라면 남편한데 잘해주세요. 그러나 남편이 형제 아니라면 잘할 필요 없습니다. 주 안에서 형제지, 뭐 주 밖에 있는 게 형제겠습니까? 그냥 돈 벌어주고 지 자식 지키려는 그런 육신적 관계지. 이 복음 때문에 갈라서라 하면 갈라서야 됩니다.
요번에 중국에서 수련회 참석하신 분 있죠. ‘니 이상한데 빠졌지? 가지 마라.’ 하니까 ‘가야겠다.’ 하니까 남편이 ‘그러면 나하고 이혼해야 된다.’ 하니까 아내가 뭐라 했습니까? ‘나 이혼하더라도 난 간다.’ 했거든요. 남편이 ‘도대체 어던 단체에 빠졌는지 내가 검정하러 가겠다.’고 중국에서 따라왔는데 수련회 내내 검사하러 왔어요. 마지막에 가서 ‘또 오겠습니다.’이상한데 빠졌나 싶어서. ‘같이 또 오겠어요.’ 이랬어요. 얼마나 감사할 일 이예요?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을 밟으면 네가 당연히 받을 형벌이 당연히 크다. 하는 것은 누가 정했어요? 우리란 쪽에서 정한 거예요. 따라서 이 성경 말씀은 나부터 출발하는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하겠어요? ‘이거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있는데?’성경 덮어버려요. 아무 상관없다. 난 착해서 구원받을 거야. 성령으로 받은 언약의 피, 그리고 성령의 은혜, 은혜의 성령, 아, 나 그거 몰라도 돼, 그렇게 되거든요. 불신자들은. 문제는 불신자들만 그런 게 아니고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개인의 행복과 개인의 영달과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마귀가 주는 떡 고물 얻어먹기 위해 온 사람에게 우리를 집어넣어버리면 이런 부정적인 단어 구절 말고요. 좀 긍정적인 구절로 설교해 주세요. 이렇게 나와요. 잘 된다든지, 소망대로 될 것이라는 이런 거요. 할 수 있거든 무슨 말이냐, 능치 못한 게 없다, 그런 것 좀 해 달라.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그런 거. 그런 쪽으로 해달라는 거예요.
그러나 여기 피 보세요. 아들을 밟고, 언약의 피, 얼마나 이게 흉측합니까? 부정적 이예요. 귀신 나올까 무섭다. 이렇게 나오고, 모세의 법을 어긴 사람도 맹렬한 불로, 이런 설교 들으면 설교 듣고 난 뒤에 아멘, 할렐루야가 나오는 게 아니고 찝찝해서‘ 전번에 모세의 법을 벌 받는다 했는데 세상에 십일조를 해야 되는데, 이십분의 일조를 했더니만 아이고, 맹렬한 불로 다 날라 가겠네.’ 이런 걱정을 하게 되면 그 교회 가겠어요? 저런 부정적인 교회를 못 가죠. 교회 이름을 지을 때는 부정적 교회 지어보세요. 누가 옵니까? 죽어가는 교회, 내가 거기에 대해서 망하는 교회, 죽어가는 교회, 부정적 교회, 죽자 교회, 이런 거.
죽으면 사는 게 아니고 죽으면 제대로 죽어요. 죽고 난 뒤에 사는 게 아니고, 죽으면 이렇거든요. 이렇게 쉽게 하면 제일 쉬워요. 죽음이 두 개가 있어요. 죽음 1은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가짜죽음 이예요. 요게 동전 가지고 복권할 때 하면 얼마짜리인가 덮잖아요. 껍데기 종이에요. 덮어 있는 껍데기 종이에요. 죽음 2가 이게 진짜인데 이거는 우리와 연결 안 돼요. 우리와 연결 안 돼 있고 그 위에 예수님 하고 연결돼 있어요.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돼 있어요.
죽음 자체가 살아나는 것이 부활의 세계입니다. 그게 언약이 살아나니까. 그래서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요걸 긁어 없애는 거예요. 성도한테는. 성령을 통해서. 이걸 긁어 없애니까 자랑은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죠. 십자가 말고 부활 자랑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를 자랑한다고요. 십자가 말고 부활을 자랑하는 사람이 바로 신학교 교수들 이예요. 이 사람들은 믿음이 없어서 개척교회 안 하고 유학 간 사람들이거든요. 유학 갔다가 박사 학위 받은 사람이라서 남들 앞에 어떻게 속아 넘어갈 수 있느냐, 박사까지 되었으니까 얼마나 믿음이 좋겠습니까? 라는 식으로 속여 먹기 참 좋은 사람들 이예요. 그 사람들은 신학교 측에서 밥벌이 할 사람들입니다. 혹시 신학 교수로 있다가 보다 수입이 나은 쪽으로, 큰 교회 당회장으로 직접 스카웃되기를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들 이예요. 신학교 교수들 모임에서 내가 한 논문에다 뒤에다 그걸 삽입시켜 놨어요. 그 사람들 눈치 챘을 거예요. 복음은 십자가는 생각 안 하고 자기 자리, 좋은 자리만 쳐다보고 있다고요. 논문 끝에다 달아놨어요. 70이레 라는 논문에 보면 나옵니다.
왜 자꾸 십자가냐, 왜, 십자가는 이제 잊었고 부활의 새 생명 이야기하자. 성령의 열매, 서로 협동하고 서로 화목하고, 이걸 해야지, 왜 자꾸 언제까지 십자가, 제자리 뛰기 하겠느냐. 이 말은 뭐냐 하면 십자가에 관심 없다는 말 이예요. 어디에 관심 있습니까? 나 살고 싶어요. 여기에 관심 있는 거예요. 어디서 출발했다? 나로부터 출발했다. 나 살기 위해서 잠시 예수님 십자가 이용하고 끝에는 결국 나 행복과 나 잘 되는 쪽으로 그냥 그걸 노리고 온 겁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라는 소문이 있기 때문에.
전에 수련회 할 때 했죠. 그 룻이란 사람이 나오미를 따라온 이유가 뭘까요? 룻이 나오미를 따라온 것은 나오미 가정이 망했기 때문에 알았습니다. 그야말로 오늘 본문 같으면 소멸하는 불이 이게 장난이 아니고 실제상황이라는 거. 다른 신은 믿어도 안 믿어도 그만이지만 선택 사항이지만, 진짜 살아계신 분은 나오미, 우리시어머니를 그 지경으로 폭싹 망하게 하신 하나님 같으면 빙고! 이건 진짜 하나님인 거예요. 그래서 나오미는 그것도 모르고 ‘니가 젊으니까 그냥 고생해도 나 혼자 고생한다.’고 나가라고 미니까 그것을 룻은 뭐로 보느냐 하면 이걸 배제, 내지는 추방으로 본 겁니다. 내가 이런 시어머니 하나님에게 추방당해버리면 안 되잖아요. 어쨌든 이거는 죽어도 같이 주겠다고 다리 잡고 온 거예요. 이제는 결혼 문제가 아닙니다. 그 하나님을 본 거예요. 그 하나님을! 그래서 저는 그 룻의 교회를 망하는 교회, 망한 자의 교회, 이렇게 표현해도 괜찮죠.
자, 그리고 29절을 보게 되면 그렇다면 여기 언약의 피라고 했죠. 언약의 피! 그럼 이 사람이 지옥 가게 된 것이 기준이 뭐죠? 기준이 뭡니까? 사람이 누굴 평가할 때 ‘난 당신을 이렇게 봅니다.’인터넷 보면 있잖아요. 이 근호 이단이다. 글 많이 올려있죠? 이 근호 왜 쫓겨났는가? 글 많죠. 그럼 저는 그 사람이 직접 나타나면 이렇게 할 거예요. ‘그렇게 보는 기준을 제시하세요.’ 그럼 그가 기준을 이야기해요. ‘당신은 개혁주의 신학이 아니기 때문에 이단입니다.‘ 그럼 개혁주의 신학이 기준입니까? 성경 어느 대목에 개혁주의 신학이 어느 글자에 나오죠? 예fp미아에 나옵니까? 이사야에 나옵니까? 어디 나오죠? 안 나오죠. 그 사람은 성경을 버린 거예요.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은 신자가 아닌 겁니다.
나 같은 우리끼리 모인 곳이 기준이 되었어요. 나 같이 우리끼리 모여 있는 걸 보니가 저희끼리 개혁주의 신학을 만든 거예요. 그거로부터 이단이냐, 아니냐를 결정내리는 겁니다. 저는 거기에 걸려들었고, 걸려들어서 목사 면직 당했고, 그 노회에서 면직 당했고, 그렇게 된 거죠.
그렇다면 그거는 이 근호 이야기고 여기와는 관계없고, 성경 이야기로 돌아와 봅시다. 성경에서 마지막 기준이 뭡니까? 1번 부활, 2번 십자가, 몇 번입니까? 부활이 아니에요. 1번 부활, 2번 십자가, 3번 성령의 공동체, 4번 성령의 열매, 몇 번입니까? 십자가에요. 십자가! 성령의 열매를 자랑하는 게 아니에요. 공동체 교회를 자랑하는 게 아니에요. 부활 자랑하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라니까요. 십자가! 다른 1번,3번, 4번은 전부 다 예수님을 지금 나처럼 살아있는 분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2번은 뭐냐, 나는 살아있는데 주님은 죽었어요. 그러니까 이것이 기준이 되는 거예요. 살아있는 나를 죽은 예수님이 ‘너도 나의 죽음 속에서는 이미 죽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기준은 오직 2번, 예수님 십자가밖에 없어요. 그러나 다른 기준들은 ’잘 살아라.‘ 이렇게 돼요. ’살고 있어요?‘ ’주님 덕분에 잘 살아요.‘ ’앞으로 더 잘 살아야지.‘ ’예‘ ’기도 많이 하면 더 살려줄게.‘ 이렇게 된다니까요. 이거는 마귀가 좋아하는 거죠.
여러분들이 제가 가룟유다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정말 가룟유다 이야기를 꼭 들으셔야 돼요. 가룟유다가 자살한 이유가 뭡니까? 스승을 팔아먹었죠. 스승 팔아먹으면 다 자살해야 됩니까? 가룟유다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뭐냐 하면 우리의 깊은 본성 속에 가룟유다 같은 속성이 들어있다는 걸 보여준 거예요. 왜, 마귀와 결탁됐으니까. 우리가 이미 태어날 때부터 마귀의 뭡니까? 에베소서 2장 1절, 불순종의 영들에게 지배받았으니까 다 있는 거예요.
가룟유다가 자살한 것은 자신의 양심이 어느 정도로 그 양심의 고통을 커버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에 자살한 거예요. ‘나 같은 인간이 스승을 팔아먹다니, 이런 인간은 내가 용서하지 안 해.’라고 자기가 자기를 처벌 내린 거예요. 그게 마귀적입니다.
첫째 시간에 뭐라 했던가요? 절대로 여러분들을 벌 내리지 마라 했죠. 주님이 허락해서 사는데 마치 내가 양심 고아서 내 힘으로 나한테 엔진 가동시켜서 이만큼 살았다고 하면서 내가 나한테 시어머니 노릇한다니까요. ‘니가 그렇게 은혜 받고도 또 나쁜 짓을 해?‘ 내가 나한테 시어머니 돼서 막 한다고요.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 우리가 우리자신을 나무랄 자격이 됩니까? 그 순간이 마귀 짓 이예요. 아, 그게 마귀 짓입니다.
애를 멀리 유학 보냈다. 그런데 엄마가 화를 막 냈다. 그래도 속으로 계산, 컴퓨터가 막 돌아가요. 내가 이렇게 남편에게
화내고 나쁜 짓 하게 되면 유학 간 애가 억울하고 고통스럽겠노.‘ 갑자기 주님이 스위스 보냈는데 내가 스위스 보낸 것처럼 착각을 해버리면 나는 뭐가 돼요? 누굴 방해해요? 주님이 하시는 기준을 되도 않은 내가 짠, 졸라 맨 개처럼 내가 팬티 입고 앞에 등장한 거 밖에 더 됩니까? 주님께서 밉니다. 좀 나와라. 지금 안 보이거든.
우리 공부하는 중에 이야기하는 거 보면 기쁜 이야기가 있어요. 뭐냐 하면 ‘제가 말씀을 잘못 드렸죠? 오버했죠? 내가 주제파악도 못해서 간섭했죠.’라고 하면 상대방 이야기는 뭐냐 하면 지금 목사님 덕분에 사는 게 아니고 주님 덕분에 살아요.이거요. 나 곧 죽어도 괜찮아요. 이런 소리 들으면 곧 죽어도 괜찮아요. 이겁니다. 이거에 도달돼야 돼요. 나 목사 당신 보고 사는 게 아니고 주님 덕분에 살아요. 주님을 보고 살아야 돼요. 주님을! 주님이 허락해서 이만큼 사는 겁니다.
그런데 왜 주님이 살려주시는가? 나는 내 힘으로 못살거든요. 왜, 주님의 죽음에 의하면 나는 죽어 마땅한 인간입니다. 지금 살아있으니까 어쨌든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데 사실은 그 짓이 다 의미 없어요. 취직했어요? 의미 없습니다. 나가도 의미 없고 아무 의미도 없어요. 몇 년간 남편하고 ? 의미 없습니다. 아무 의미 없어요. 의미 있는 것은 그리스도만 의미 있기 위해서 의미 없게 한 거예요.
의미 왜 없게 하느냐? 나만 의미 있다는 것을 증거 하라고 순간순간 의미 없게 한 거예요. 그게 바로 맹렬한 저주와 연계돼 있는 언약의 피입니다. 부활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 아닙니다. 공동체 아닙니다. 성령의 공동체 아니에요. 십자가에요. 그걸 본문이 이야기합니다. 넘어갑시다.
30절에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무섭다는 말은 어떤 경우에 하느냐 하면 가룟유다처럼 자기 양심 찾고 자기 주장, 내 의로움 챙길 때는 무서운 분 이예요. 그런데 의미 없습니다. 이러면 괜찮아요. 왜냐 하면 이미 나는 내가 찾는 내가 없기 때문에. 주님 안에 내가 있으면 그걸로 끝났지, 바깥에 따로 나를 세울 이유가 없어요. 예수 안에 있으면 그걸로 족해야 되지, 그걸 구경하려고 산 높이 올라가서 저 앞에 있는 나란 인간이 예수한테 잘 놓여 살고 있는 그걸 사물로 관찰할 일은 없다 이 말이죠.
그림 그려볼까요? 산, 뒤에 무슨 산입니까? 석수도서관이죠. 옛날 도서관인 줄 알고 가보니까 완전히 크게 돼 있다 이 말이죠. 산이 있는데 우리 공부하고 있잖아요. 산에다 나를 상상해서 이미지를 올려 보내는 거예요. 여기서 쌍안경 들고 관찰하는 거예요. ‘졸지 말고 똑바로 공부해. 공부 똑바로 해야지.’이거 왜 필요하죠? 필요 없잖아요. 주께서 보내시고 여기 주와 함께 있으면 이걸로 끝난단 말이죠. 이걸 보기 위해서 바깥에 나가서 또 제 3의 관찰지역을 우리가 찾을 필요는 없다 이 말입니다. 엄마가 ‘야야, 너 외국에 공부하기 힘들지?’하니까 ‘주님 덕분에 잘 있어요.’‘아유, 내가 그 소리 들으니까 기분이 좋구나.’ ‘엄마는 돈만 보내주면 돼. 내 걱정 안 해도 돼.’
원수 갚는다는 말은 아까 이야기한 제대로 된 기준만이 심판할 권한이 있습니다. 그 기준이 뭐냐, 언약의 피입니다. 이렇게 설명해 줬는데도 우리는 괜찮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저보고 욕을 하는 거예요. 어떻게 성경을 보면서 십자가만 보이느냐, 딴 거 그렇게 많은데 왜 십자가만 이야기하느냐? 왜 성령의 열매도 그렇게 온유 화평 그렇게 있는데 왜 십자가만 있느냐는 거죠.
십자가는 명령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기준 이예요. 이거는 하고 안 하고는 의미 없어요. 십자가만 의미 있어서 의미 있는 곳으로 쪼이냐, 안 쪼이냐, 그게 문제지, 십자가를 믿어버리면 그건 가짜 십자가지, 십자가는 믿음의 대상이 안 됩니다. 돔배기가 아니고 끝까지 다 있는데, 보세요. 어떻게 부분이 전체를 커버합니까? 이런 반칙이 어디 있어요? 건방짐, 교만 이죠.
전체가 십자가를 이야기할 때는 이게 기준이 되고 기준에 중심이 있어요. 죽 나무가 있고 소나무 있다가 갑자기 삐쭉 큰 게 있으면 전봇대, 작은 채송화 있다가 불뚝 솟아오르면 이게 십자가잖아요. 그러면 다른 사건, 노아 홍수사건, 계 돈 탄 사건, 애 공부 잘한 사건, 있더라도 십자가 우뚝 보면 이게 심판 기준이다 이 말이죠. 이걸 지금 보라는 거예요. 히브리서에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왜 이걸 안 보고 이런 거 보느냐 이 말이죠. 이건 동전 가지고 긁어내야 돼요.
자, 32절 봅시다. 갑자기 진도 빨리 나가죠. 중요한 게 지나갔으니까 빨리 지나가는 거예요.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 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자, 이 말씀 나올 때 이런 형편이 나올 때 요 말씀 이해하려면 딱 하나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언제 그랬습니까? 언제 우리가 주님 때문에 고난 받았고 언제 우리가 주님의 큰 싸움 했습니까? 저는 모르는 이야깁니다. 이러면 정답 이예요. 아, 그때 신천지와 싸운다고 애먹었다. 이러면 잘못 이예요.
말씀은 주님이 왔다 가버려요. 히브리서 10장 읽었잖아요. 요 말씀이 이미 지나갔어요. 그러니까 지나가고 또 지나가는지 지금 실시하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가 한 건 참외 먹고 직장 나가고 설거지 했을 뿐인데 그거 했을 뿐 이예요. 그런데 그게 신앙의 싸움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매치가 안 되죠. 우리는 설거지 하는 것이 마귀와 싸운 것이다? 나는 남아 있는 세제하고 싸운다고 그렇게 싸웠는데 주님은 마귀와 싸웠는데 그게 어떻게 그게 논리적으로 연결이 돼요? 안 돼요? 안 되잖아요. 그런데 이미 주께서는 이미.
주님의 기준이 뭐냐 하면 십자가 기준으로 봐서 이미 그거는 썩었다고 본 거예요. ‘그때 니 설거지 하면서 설거지만 생각했지? 니 설거지한다고 다른 생각 안 했지? 그게 내가 마귀와 싸운 효과야.’설거지할 때 그릇 깨질까봐 ‘아이 미끄러워’ ‘ 그거만 생각했지? 거봐. 다른 사람 같으면 설거지 하면서 설거지 하고 내가 어떤 지 다른 생각할 텐데. 요거만 생각했잖아. 너 자신을 잊었잖아.’ 그게 바로 승리한 거예요.
‘마귀야 나오너라’ 이러면 마귀한테 지게 돼 있어요. 마귀? 누구하고 싸우려고 왔지? 싸울 대상이 없네. 이러면 마귀가 ‘아이구, 졌다.’ 이러고 가버려요. 지가 나서겠다고 돈키호테도 아닌 게 지가 기사도 아닌데 삐쩍 말라가지고 풍차 보고 말인 줄 알고 ‘이 풍차야 덤벼라.’ 풍차가 아니고 나쁜 놈아 덤벼라. 마치 미친 인간처럼. 세르반테스가 그거 쓸 때 그 당시의 허위적인 기사 계급을 노리면서 의도적으로 썼어요. 세르반테스의 먼 후 제자가 누구냐, 니체입니다. 모든 게 위선이고 거짓의 세계, 그 사상이 그대로 흘러 내려와요. 문학적으로 보게 되면.
그런데 우리가 사는 게 전부 다 뭐냐 하면 나 잘되기 위해서 하는 설거지라면 이거는 패배한 거죠. 주께서 맡긴 설거지, 요거만 집중하세요. 그러면 주께서는 마귀를 이긴 걸로 쳐주시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야, 이건 진짜 어려운데, 마치 ~~ 아닌 것처럼. 사도바울의 모든 해석입니다. 마치 ~~ 아닌 것처럼. 마치 내가 내가 아닌 것처럼. 마치 나의 일이 아닌 것처럼. 이게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옵니다. “아내 있는 자는 없는 것처럼”“ 남편 있는 자는 남편이 없는 것처럼“ "강아지 있는 자는 없는 것처럼”강아지가 지금 자고 있잖아요. 보세요. 아무 소리도 안 나잖아요. 없으니까. 우리가 잠시 투명인간이 되게 되면 마귀하고 누가 싸웁니까? 주님하고 싸우기 때문에 승리만 생길 뿐 이예요.
그런데 가룟유다는 누가 나섰다? 자기 양심을 들고 나왔잖아요. 돈키호테 같이. 자살했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내가 나보고 벌주지 마세요. 안 그래도 지금 산다는 자체가 더운 날 벌 받고 있어요. 그렇지 않아도 주께서 적절하게 조치를 하니까 니가 니 인생 걱정하지 마라. 내가 알아서 더운 날 오게 모이고 적절하게 할 테니까 합력하여 선을 이룰 테니까 니가 마귀도 모르면서 내가 아는데 니가 나대지 마라 이 말이죠. 오늘의 교훈은 나대지 마라.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이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요 내용은 또 굉장히 쉬워요. 요거는 드라마나 영화 보면 많이 나오는 대목인데요. 쉬운 예를 들면 롯데 그룹에 지금 경영권 싸움이 벌어졌는데 롯데 마트에 캐시, 제일 말단 캐시 하는 만약에 서른 중반 쯤 되는 막 결혼하든지 애를 낳은 엄마가 캐시를 하고 난 뒤에 한 달 만에 월급 50만 원을 탔어요. 두 시간 정도 하니까 50만 원 되겠죠. 타고 난 뒤에 롯데 사장님을 향하여 ‘사장님 고맙습니다. 사장님 아니면 큰 일 뻔 했어요.’ 이렇게 한 것이 방금 요 본문의 성취입니다. 윗동네는 집 사고 난리 났죠. 지금 일본 말만 하고 한국말도 못하는데 기자하고 싸우잖아요. 그런데 그 사장을 전혀 몰라도 롯데 마트 제일 말단 직원은 사장님에게 너무나 고마워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거는 누가 승리자에요? 롯데 사장이 승리자에요? 말단 직원이 승리자입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말단 직원이 승리자가 되죠. 그러면 옆에 운동권이 설칩니다. ‘캐시, 다음에 우리 집회 할 때 데모할 때 꼭 참석해야 됩니다. 하게 되면 일당 5600원에서 5700원으로 오른다고 해야 됩니다. 이러면 지금 그 노동운동 하는 사람은 어디와 관계있어요? 노동운동하는 사람은 뭔 뜻입니까?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이게 아니고 ’절대로 우리의 산업은 빼앗기면 안 됩니다.’가 되죠. 왜, 누구하고 싸워서? 이 더러운 세상과 싸워서 이겨야 되니까.
그러면 싸우는 건 좋은데 그 처음에 했던 말단 직원의 행복은 누가 줍니까? 그 노동운동 반장이 줘요? 누가 줘요? 아무도 안 줘요. 왜 안 줍니까? 마음을 낮췄잖아요. 아이 마음 낮춘 것도 못 느꼈어. 그냥 살아. 착하게 사는데 다른 사람 보기에는 되게 마음 낮춘 것 같은데 본인은 자연스럽게 월급 줘서 감사한데 얼마나 고맙습니까? 이것 때문에 애 용돈 주고 참 좋았어요. 하면 노동 반장이 ‘그게 20만원 뜯겼어. 20만 원 뜯긴 거야. 당신이 착취당한 거야. 원래 당신 월급이 80만원이었어. 지금 50만 원이니까 30만 원 뜯겼어. 이참에 데모하자.’
괜히 쑤셔가지고 히브리서 10장이 못 이루게 될 판이라. 그냥 사세요. 주께서 감사하면 모든 게 다 일거에 다 이뤄졌습니다. 데모하지 마시고 그냥 감사하며 사세요. 팔자려니 하고. 아는 게 화근이라. 괜히 알았어. 노동현장 괜히 알았어. 모르고 살면 살찔 걸 괜히 해서 얻어맞고 나중에는 쫓겨나서 자기 부인까지 데모하다 같이 분신자살하고. 쌍용 그게 뭔데, 내 인생을 망칩니까? 가만히 보면 누가 바보에요? 쌍용 자동차가 바보 아니고, 그 데모했던 쫓겨났던 노동자 가족들이 바보에요. 어떻게 자기 인생을 쌍용에다 맡기냐 말이죠. 아휴, 자기 인생을 자동차 회사 거기에 겁니까? 아휴, 바보 같은 인생. 주님한테 걸어야지 거기에 걸어요? 복음을 몰라서 그래요. 사실은 다들 그래요. 복음을 안 게 기적이지. 그게 정상이죠. 바보 되면 바보인 줄 알고, 바보 되는 게 똑똑한 거예요. "어리석은 자를 택하사 똑똑한 자를 부끄럽게 만드는 그 작업을 모르고" 억울하다는 말은 지가 마음을 안 낮춰서 그래요. 푹~~ 낮추세요. 발로 밟으세요. 그러면 그냥 있는 거 먹는 걸로 족한 줄 알면 됩니다. 이러다 보면 여기서 북한 되겠다마는. 아바이 은혜입니다. 이렇게 나오면 곤란하고. 이제 본문 쉽죠?
자기를 관찰하지 마세요. 주께서 주시는데 왜 내가 관찰합니까? 관심 더 받을 건데. 지가 관찰하니까 되도 않은 욕심 있고 거기에 마귀가 틈타고. 데모하라고. 괜히 욕심만 더 키워서 있는 행복 다 뺏어가 버리고.
35절에 봅시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방금 나오네요. "큰 상을 얻느니라" 어디서 준다? 하늘나라에서. 보세요. 우리가 기준이 확실한 언약의 피가 기준 같으면 이미 우리는 죽은 자고, 죽은 자가 죽는다 해서 그게 뭐 섭섭해요? 그게 나사로에 의하면 죽은 자가 산 자인데, 예수 안에서 산 자잖아요. 예수님이 죽잖아요. 죽기 전부터 이미 죽으러 오신 분이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 안에 있으면 우리의 허상이 동전으로 긁혀 나가면 진짜 죽음 안이 그게 부활의 세계에요. 죽어도 잠자는 게 되니까. "소녀야 잔다" 할 때는 분명히 죽었지만 주님 안에서는 이게 산 자가 되는 겁니다. 자고 있어요. 그래서 소녀가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주님 말대로 '아우~ 잘 잤다.' 이렇게 깨어나는 거예요. 울던 사람들 눈물이 확 말라버렸어요. 뭐 자는 애가 사흘 동안 자는 게 아니고 '아우, 잘 잤다. 좋은 아침' 이러고 일어난 거예요. '누가 깨웠어?' 이러고 일어난 거예요. 인간 자체가 다르죠. 완전히 인간 종류가 달라요.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은 완전히 인간이 딴 인간 이예요. 팔자 운명을 이미 주님이 다 가져갔어요. 우리가 걱정할 문제는 아닙니다. 이걸 담대함! 이걸 큰 상! 라고 하죠. 상에는 차등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 한 분의 상을 여러 명 나눠주기 때문에. 하나가 다양이 되기 때문에. 동일한 상을 받습니다. 그래서 큰 상 작은 상 없습니다. 다만 이 세상을 보기에 큰 상이 되는 거예요. 세상의 부귀영화보다도 큰 상이니까 큰 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그 다음에 그 뒤에 말이 딱 나옵니다. 37절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자,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그 놈의 잠시가 몇 년 이예요? 아휴, 답답하죠. 지금 히브리서 쓴 게 언젠데 그 놈의 인내하라 하는데 그 인내를 언제까지 하느냐? 자, 요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돔배기, 앞 끊기고 뒤 꼬리 끊기고 뭐라 하느냐 하면 우리는 시간 계산이 내가 태어난 것부터 1년 2년 합니다. 매년마다 생일 축하합니~?. 하죠. 겨울에 태어난 사람은 겨울에 태어나~? 매년마다 이렇게. 아름다운 당신을~ 매년 이러고 있어요. 그래서 이 시간은 뭐냐 하면 1년 단위로 1년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합쳐버리면 이 시간은 죽은 시간 이예요. 한번 산 것은 시간이 필요 없어요. 영원히 사는 거예요.
그러면 인내는 뭐냐, 기다리는 게 아니고 그때가 되게 되면 우리는 되돌아와서 인내한 게 돼요. 1년을 기다렸든, 3년을 기다렸든. 태어나자마자 5개월 만에 주님 오셨든 간에 큰 인내를 한 거예요. 인내를 하고 뭐라 하느냐 하면 '금방 오셨네.' 이래요. 금방 오셨네! 그런 경우가 어떤 경우냐 하면 예를 들어서 남편이 미국에 출장을 갔습니다. 출장을 갔는데 기약이 없어요. 온다는 소식이 없고 '곧 갈게' 해놓고 계속 소식이 없어요. 그래서 아내가 지쳐서 남편 돈 가지고 애들하고 골프를 쳐서 마지막 골프 치는데 그 골프장에 10년 만에 남편이 나타났어요. 지금 남편 온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지금 왜냐 하면 이게 언더파가 되느냐 그 문제가 남았어요. 이번 골이 좋은데 기다려봐라. 기다리고 이거 마저 넣고 내가 환영해 줄게. 땡그르 들어가니까 아오, 여보 잘 있었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항상 우리의 지속 속에 있는 우리의 의식의 사이에는 우순이 시간을 장악해요. 제일 중요한 문제가 시간을 먼저 장악해요. 그러면 나머지는 뭐냐, 전부 다 잠깐이 됩니다. 주께서는 우리의 사건을 하되 우리가 기다리는 사건을 허무하게 만들어버려요. 다 허무하게 만들어버려요. 그 허무한 시간 속에서 갑자기 주께서 들이닥치니까 '진짜 주께서는 이렇게 갑작스럽게 오셨네.' 라고 돼 버려요. 그래서 이 말씀대로 되는 겁니다.
우리가 이 죽어있는 인간이 꽉 있거든요. 동전으로 긁어내면 우리는 안타까워하잖아요. '주님 이번 이거 적금 부느라 얼마나 애썼는데' 하다가 갑자기 주님 등장하면 어떻게 됩니까? '언제 오셨어요?' 이렇게 되죠.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 이 말씀은 우리가 지킬 생각하지 마세요. 잠깐이면 잠깐이란 걸 느끼도록 해주실 겁니다. 쓸데없이 이걸 또 지킨다고 뭐 '주여, 2천년 지나왔지만 잠깐 믿겠습니다.' 안 믿어져요. 본인 하는 일을 하세요. 주께서 깜짝 쇼를 벌리실 겁니다. 그러면 '잠깐이네' 이렇게 하실 거예요. 오늘 37절까지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삶과 죽음의 틈 사이에서 생명이 나왔기에 그 틈을 우리가 볼 수 있도록 돼 주시옵소서. 그 틈에서 절대적 기준, 언약의 피가 이 세상과 오는 세상 전부를 지배하고 있었음을 이제와 원천과 끝을 이제는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