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녹취:충성모
요한복음 7장 22절(가락-율법의 연속성)
150903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7장 22절부터 볼 차례입니다. 7장 22절을 보면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특수하게 해당되죠.
다른 이방 민족들에게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율법을 주고 지키라는 그런 관계에서 이미 배제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시는 것이 보편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이스라엘, 그 당시 유대인들을 보고 이야기하지요. 그렇다면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예수님께서 율법을 거론했다는 말은 그 율법과 예수님이 관련성이 있다는 말이에요. 관련성이 있다는 말은 이방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는 말이에요.
예수님을 알려면 율법과 관련성을 짓고 율법에 의해서 기다려진 메시야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알아야 되는데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렇게 힘든 인생, 이렇게 고생만 하는 인생, 죽어서 좋은 데 보내주지 않으렵니까.'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것은 나라는 존재를 잘 되게 해주는 그런 예수로 인식 되지요? 그러면 그것은 예수라는 이름의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본인이 율법을 거론했는데 이방인들은 율법을 배제시켜버리고 '무조건 나를 잘해주시면 얼마든지 내가 순종할 용의가 되어있습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것은 인간이 자기가 원하는 그 메시야상을 억지로 예수님과 일치하려는 그러한 무리수를 두게 되는 셈입니다. 됩니까? 안 되지요? 그래서 이 본문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일단은 유대인을 거쳐야 된다는 거에요.
유대인 거치고 이방인에게 가야지 유대인에게 배척 받지 않고 이방인에게 가는 법은 없습니다. 그것이 로마서 11장에 나오잖아요. 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 나오잖아요. 또 그것을 언급하고 난 뒤에 그 남아있는 티오(빈자리)를 이방인이 채우는 것이지 원래 본감람나무 자체의 구조를 포기할 수 없는 거에요. 철저하게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오신 분이에요.
왜 그래야 되는가? 그게 언약의 일관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너희들은 택한 나의 거룩한 백성이다." 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 약속은 예수님에게도 유효하다, 그대로 계속 가는 거에요.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오신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의 소망이나 소원을 일체 들어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람과 사전에 합의하거나 협의하지도 않아요.
그냥 하나님의 율법대로 또는 말씀대로 실행에 옮겨버리면 그 결실물로 하나님의 백성이 만들어지는 것이지, '저를 백성 만들어 달라'고 손들고 '저요, 저요.' 하고 불신자도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기차라고 하는 것은 철로가 없는 데는 3m 떨어져도 못 가잖아요. 철로가 없으면... 그 철로 역할이 율법이 되고 언약이 되고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예수님이 좋아 보이니까 철로가 깔린 것은 생각도 않하고 그냥 오라는 거에요. 그냥, 그것은 머리속에 이미 다른 예수, 마귀가 가짜 예수를 유발시키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오는 거에요.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에게만 율법을 주었느냐? 왜 다른 민족에게 다 주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주었느냐? 상당히 궁금하지 않습니까?
같은 인간인데 왜 이스라엘에게만 주고 다른 민족에게는 안 주는 겁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나라가 애초부터 없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나라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애굽에서 나올 때 낮에 나왔어요? 밤에 나왔어요? 밤에 나왔습니다. 야곱의 언약에 의하면 밤은 누구 소속이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천사의 소속이에요. 얍복 강에서.
낮이 되면 떠나야 돼요. 밤 되니까 대화가 되지 낮이 되면 천사도 야곱과 헤어져야 돼요. 그것은 왜그런가 하면 창세기 1장에 보면 처음에 어둠이거든요. 어둠에서 빛이 생기는 그 창조의 과정을 반복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그것이 담겨있습니다. 어둠이어야 돼요. 따라서 이방인이 구원받으려면 이방인이 무엇으로 되어야 합니까?
이방인이 어두움이었다는 것이 확정나고 난 뒤에 "어두운 곳에 빛이 비취리라"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겁니다. 갈릴리에 주님이 나타났을 때에 어두움에 빛이 비추는 겁니다. 이사야 9장에 나오는 말씀을 마태복음에서 그대로 인용한 대목이거든요. 어두워야 돼요. 요한복음 1장에 나오죠? "빛이 왔으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다." 사람들은 자기가 어둡다는 것을 알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빛과 어두움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영생을 얻는 것에 관심이 있죠. 나라는 것은 무조건 가치있다고 보기 때문에 주님께서 다가오는 철로, 그 철로는 관심이 없고 자기가 천국으로 깔아놓는 자기쪽에서부터 출발해서 도로 포장을 하는 거에요. 어디까지 이르도록? 예. 천국에 이르기 위해서 자기쪽에서 그걸 까는 거에요. 이것은 야곱의 언약과 전혀 다르죠.
야곱의 언약은 야곱이 잠자고 있을 때에 꿈에 하나님의 사다리가 아래에서부터 시작해서 위로 올라가잖아요.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가 눈을 부릅뜨고 낮에 자기 자신을 천국에 데려가라는 겁니다. 인간의 밤은 죽은 자의 것입니다. 밤에는 의식이 없어요. 그냥 시체와 마찬가지라서. 자기의 꿈과 계획도 밤에는 그냥 취소가 되어서 그냥 꿈만 꿀 뿐이지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철저하게 인간은 낮 중심이에요. 하나님은 밤 중심이에요. 이스라엘은 바로 밤에 나왔습니다. 어린양의 유월절 그 밤에 없는 곳에서 밤이 밀어내어서. 밤이 밀어내서 이스라엘이 되었다면 밤의 원칙, 밤의 공식이 작용하는 유일한 국가가 됩니다. 이스라엘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율법이 담겨있습니다. 그 율법을 가지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어린양의 피를 유발했거든요.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바로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바치게 함으로써 언약이 그 다음 언약까지 계속해서 유지되는 공식은 대신해서 흠없는 제물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지정된 제물이 하나님 앞에 제공되는 조건하에 하나님께서 그 구원의 약속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죠. 5년 전에 예수님 믿었다. 3년 전에 십자가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는 더 이상 십자가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이렇게 되면 곤란해요. 왜냐하면 내가 믿은 게 아니고 믿게 하셨다면 믿게 하신 그 속에 십자가가 평생동안 반복되는 공식이 함께 들어있어요. 안마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안마기 사기 전에 그 가게에서 한번 앉아보니까 두두두두 해가지고 좋다 말이죠.
그런데 집에 와서는 안 되면 어떡할거에요? 반품해야 돼죠? 십자가가 들어오면은 '십자가 믿었다. 이제는 십자가 잊어버리고 부활의 새 생명 가졌다.' 이렇게 되는 게 아니고 두두두두 계속해서 십자가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 십자가만을 증거하기 위해서 투입되는 재료가 뭐냐 하면은 바로 사도바울의 권면과 사도바울의 교훈들이 투입됩니다. "주께서 너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
그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그 말씀에 의해서 우리는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죄인임을 다시 안마기에 앉아서 두두두두 하고 느끼게 되죠. 그런데 여기에서 모세의 율법을 언급하면서 상당히 중요한 정리해야 될 문제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처음에 창조했잖아요. 창조한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면 이것을 자연 또는 대자연이라고 합니다.
이 자연은 연속성이에요. 자연은 전부다 연결되어 있잖아요. 자연은 연결되어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죄 짓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는 가인의 후손들이 자연과 맞싸워서 쟁기를 들고 도시를 만들고 자연과 싸움에 들어가요. 그러니까 힘들죠. 산다는 게. 왜? 자연은 그때 그 풍족한 자연이 아니고 엉겅퀴와 가시덤불이 있는 사람을 못살게 만드는 자연이고 거기에서 인간은 살아야 되겠다는 그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상충되는 성질을 갖고 있는데 인간은 자연에서 벗어나서 자기 위주로 살면서 그 자연을 견뎌야 되니까.
세상에 있는 지진이나 폭풍은 자기 맘대로 안 되잖아요? 그래서 거기에서 생겨난 게 뭔가 하면 종교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화해하는 것입니다. 좋은 제스추어를 취하는 겁니다. 내가 신을 이렇게 좋아합니다. 최초로 그렇게 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가인입니다. 가인이 신에게 뇌물을 바치죠. 제물을 바치는 겁니다. '아 하나님이 주신 거니까 이렇게 알아모시겠습니다.' 하고 바칩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화해하는 제스추어에요.
그런데 화해가 되려면 신이 받아주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창세기 4장에 보면 하나님은 뮙니까? 안 받죠? 그것은 뭐냐 하면 화해할 조건은 네가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화해하는 조건마저도 누가 제시한다? 하나님 쪽에서 따로 준비된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걸 동생 아벨을 통해서 나타나게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이 율법과 관련 되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자연은 어쨋든 연속성인데 인간이 자연을 연속성을 다스리기 위해서 불연속적인 것을 집어넣습니다. 이게 뭐냐면 '언어'입니다. 그 언어라는 것이 들어가 버리면 하나의 틀을 잡기 때문에 연결되지 않습니다. 여기에 컵이 있잖아요. 또 전등이 있습니다. 그러면 컵과 전등 사이에 어떻게 됩니까? 이어지지 않지요.
끊어졌으니까 이것을 뭘로 하냐하면 사물이라고 하고 물건이라고 하는데 물건에는 이름을 붙여요. 컵은 컵이고 전등은 전등으로 딱 끝나버려요. 그런데 대자연은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대자연을 가위가지고 짤라보세요. 공기 중에 공기를 옆의 공기와 짜르면 짤려집니까? 모두 연결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을 자기 위주로 편리하기 위해서 언어를 집어넣고 이름을 붙여서 그것을 필요한 사물로 해놓고 배열을 정해버려요. 그러면 여기서 질서가 생기죠. 이 질서가 뭐냐 종교의 주문 같은 겁니다. 주문을 외우는 이유는 인간의 불연속적인 언어를 가지고 대자연을 다스리고 지배하려는 겁니다.
예를 들면 기도를 실컷하고 기도 뒤에다가 뭘 붙이냐 하면 "예수 이름으로" 요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몇 자 집어넣으면 '대자연이 내 말의 효과를 따라서 뭔가 나한테 유리하도록 자체적으로 모든 움직임을 재편성할 수 있는 힘이 우리 언어에 있었으면 좋겠네.' 가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 수련회 할 때에 윤도현 밴드의 '사랑했나봐' 이야기 했잖아요.
가사에 보면 뭡니까? '떠난 사람이 그쪽도 아마 나를 사랑했다고 나는 일방적으로 믿을래' 하지요. 이게 뭐냐 하면은 불연속적인 모든 것을 연속적인 것으로 바구니에 담으려고 하는 거에요. 오병이어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배고프잖아요? 배고플 때 떡과 물고기를 주니까 배부르잖아요. 그러면 끝난 문제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시냐면은 네가 비록 배고프다고 요청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제공한 것은 이 요청에 부합해서 배 부를 만큼 준 게 아니고 열두 광주리의 잉여, 여분의 것이 남아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인간이 질서와 언어를 쑤셔넣어도 숭숭숭 손가락 사이로 빠지는 것이 있어요. 인간은 자연을 다스릴 수 없는 겁니다.
자기 필요한 것만 골라담아서 어떤 언어체계를 만들기는 하지만 자연이 거기에 다 담기지를 않아요. 여분(잉여)의 것이 빠져나온다니까요. 빠져나온 것이 결국은 뭘로 바뀌었는가 빠져나온다는 것은 결국 감당을 다 못했으니까 그게 바로 폭풍이고 지진이고 재앙이고 가뭄이고 갑자기 가족의 몸이 아프다든지 하는 것들이잖아요.
'진작 가뭄을 위해서 기도할 껄' 해도 소용이 없어요. 이미 가물어버리면. 장마올 때 장마만 올 줄 알았더니만 이렇게 태풍이 지나갈 줄 몰랐다. 진작 알았으면 한 250mm만 내리시고 그 다음 260mm부터는 북한에 내리옵소서. 이렇게 흥정을 해야 될텐데, 우리는 그런 내 말과 내 질서체계로 자연의 움직임을 조정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할 수 없어요.
그러면서 인간은 자연을 대할 때 그런 식으로 언어와 질서를 동원해가지고 그나마도 버티려고 할 수밖에 없어요. 그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아요. 지난 수요일에 했는데 창세기에 첫째 날이죠. 첫째 날 빛이 있으라 둘째 날 하늘을 만드시고 셋째 날 땅에 풀과 씨 맺는 채소를 내라 이렇게 되는데 날이 계속 이어지면 여덟째, 아홉째, 열째 이렇게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어디서 스톱이 됩니까? 일곱째 날에서 스톱이 되지요?
그런데 우리는 왜 일곱째 날에서 스톱이 되는지 몰라요. 왜 일곱, 1.2.3.4.5... 가 되는지. 이 말은 뭐냐면 대자연에 대해서는 인간이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기 계획에 의해서 자연을 일방적으로 유지시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자연 속에 누가 포함되는가 하면 우리 인간이 포함이 되어있어요. 그러면 인간은 보통 큰 실수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에덴 동산에 있을 때는 일부분으로서 그냥 포함 되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뭘 따먹었어요?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을 따먹는 순간 인간은 그 부분이면서도 부분이 아닌 것처럼, 마치 관찰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처럼 자기가 따로 나와 버렸어요. 그러면 뭐냐하면 인간이 뭘 만든다? 인간이 바로 현실을 만들어요. 세상은 ( )가 만든다. ( ) 안에 뭐가 들어갑니까? 인간이 들어갑니다. 인간이 그때부터 자기를 위한 세상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각자 각자 제 각기 니 세상 내 세상은 다 달라요. 니가 보는 세상과 내가 보는 세상은 다 달라요. 공산주의 북한이 보는 세상과 남쪽에서 보는 것이 달라요. 남쪽에서는 "유감" 이라고 하는 것을 사과라고 보지 않고 그냥 "안 되었다"는 식으로 해석해요. 보는 것이 다 달라요. 세상은 자기가 다 만든다는 뜻이죠.
자기가 만들면서 자기가 만드는 방법으로서 언어라는 것, 법이라는 것을 동원시켜가지고 '신이시여, 나름대로 법 지키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요정도 복은 기본으로 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거기다가 내가 또 정신차려가지고 더 착한 일을 하게 되면 마일리지와 보너스(성과금)은 또 주셔야 됩니데이.' 이런 식으로 인간은 자기 세계를 구축합니다. 이게 선악과를 따먹은 후유증이에요.
선, 악은 누구를 위한 선, 악입니까? 자기를 위한 선, 악이죠. 그러나 원래 선악과는 누구를 위한 선악과입니까? 하나님을 위한 선악과인데 남의 나무 과실을 지가 따먹고 이제는 자기를 위한 선악체계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선악체계에 율법이 들어오니까 하나의 법이 들어오니까 '옳다쿠나 드디어 이제 땡잡았다.' 그 율법이 들어오면 그 율법의 벌칙도 같이 들어오겠죠. 이걸 지키면 복을 받고, 못 지키면 벌을 받는다는 게 오니까 이제는 완전히 신이 났어요.
왜? 평소에 자기가 세워놓은 법에 대해서 자기가 지키기 때문에. 그런데 그 법이 인간들이 다루는 법이 아니고 누가 다룬다? 예수님이 자기가 주어 되기 위해서 다루는 법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 법을 지키고 인간이 만든 그 법에 대들면 손가락 사이에 그 율법의 모든 진수는 다 빠져버리고 없어요. 국수 건질 때 망 가지고 건져보세요. 국수만 남고 물은 빠지잖아요. 그처럼 다 빠져요. 쑥쑥 다 빠지고 자기한테 유리한 거만,
자기 의롭게 될 것만 남아있고 나머지는 다 빠져버린다고요. 그래서 오늘 요한복음 6장에서 율법을 언급하는 거에요. 너희들이 율법을 국수건지 듯이 다 빠졌으니까 율법에 의하면 너희들는 나를 죽이도록 되어 있다. 너희들이 신주단지 모시 듯이 하는 율법에 의하면 필히 유대인들은 누구를 죽이게 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게 되어 있다 하니까 유대인들이 하는 말이 "우리도 율법 아는데 니가 귀신 들렸구나. 율법에 니 죽인다는 대목이 어디 나오는데?" 이렇게 나온 거에요. 누구 말이 맞아요?
그림을 하나 그려 봅시다. 율법은 문자, 언어로 되어 있지요? 언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언어로 제 10계명밖에 없지만 예를 들어서 제 11계명, 장차 예수라고 자칭하는 인간이 올 텐데 그때는 유대인들이 그 예수를 죽이게 될 것이다. 라고 문자로 나와 있으면 어떻겠습니까? 예수님 말에 동의하겠죠? 왜? 11계명이기 때문에. 그러나 10계명은 탐내지 말라로 끝나 버려요. 그 뒤에 예수에 관련된 조항은 없어요. 11계명 자체가 없어요. 없잖아요? 11계명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유대인들 말이 맞는 거에요. 왜? '조항에 없는 이야기를 니가 왜 덧붙이냐?'는 겁니다.
손가락 사이로 슝슝 다 빠지고 주님은 뭡니까? 본래 율법은 인간이 지킬 수 있으라고 준 것이 아니고 율법을 만드신 분(예수님)이 율법을 지키라고 준 자기 율법인데... 목욕탕에 옷 벗어 놓았는데 자기 옷을 입어야지 나보다 덩치 큰 옷을 입으면 안 되잖아요? 율법은 자기가 입기 위해서 있는 옷인데 유대인들은 자기 옷도 아닌데 남의 옷을 가지고 그것도 그냥 "안 맞다." 하면 되는데 그것을 가위로 오려 재단을 해가지고 자기 몸에 딱 맞는 율법을 만들어놓았어요.
그러면 그 율법을 자르고 남는 모퉁이를 모아놓게 되면 반드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율법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로마서 2장에 나오는 것인데 "할례를 행하라." 했지요? 할례를 행하라 했을 때 유대인들 생각은 뭐냐면 남성의 생식기 끝을 잘라버리면 그것이 할례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뭘 놓쳤지요? 신명기와 예레미야에 보면 뭡니까? "할례를 행하되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고 했죠? 마음의 할례를 무슨 수로 행합니까? 마음의 끝을 어떻게 잘라요? 자르는 가위가 있습니까? 아까 강의 다시 해봅시다. 대자연은 연속되어 있지요? 인간 자체는 단독적으로는 불연속적입니다.
불연속적이므로 연속적인 것을 감당을 다 못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자기 임의대로 구분지어요. 요거는 코스모스고, 요거는 채송화고.. 이렇게 구분지어요. 채송화와 코스모스를 연결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다 빠져요. 채송화와 코스모스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보이지 않는 소리, 그런 것은 다 빠져요. 그냥 내가 보기에 코스모스와 채송화로 딱 구분돼요. 그리고 사물에다 뭘 붙입니까? 이름을 붙이는 거죠.
그 이름을 붙일 때 그 사물에 이름을 붙이기 전에 먼저 본인한테 이름을 붙이죠(부모가 붙이고 또 자기 자식에게 붙이죠). 그 이름을 붙이는 쪽이 뭘 만든다? 세상을 만들죠. 그 만든 세상이 이름의 세상, 언어의 세계가 되는 거에요. 그 세계는 불연속되고 연속되지 않아요. 왜 코스모스가 있느냐? 몰라요. 간단한 질문 아닙니까? "저것을 코스모스라고 한다." "선생님 질문 있습니다. 왜 코스모스는 왜 있습니까?" "야, 그런 건 묻는 게 아니야!" "코스모스는 키 작은 것으로부터 진화되었어." "진화될 때 흐름은 어떻게 됩니까?" "흐름은 다 끊어졌어." "흐름이 다 끊어졌으면 도약이 되는데 도약이 되면 그것은 과학이 아니잖아요?" "인간은 그것밖에 몰라. 입 다물고 있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연속되지 않은 존재에게 "이 우주는 누가 만들었지?" 라고 하면 "주님께서 율법으로 만들었어요." 이 우주 전체를 말씀으로 만드셨다고요. 그게 시편 119편에 보면 잘 나와 있어요. 그래서 창세기 1장부터 성경 전체가 뭐냐 하면 "인간들아! 말씀대로 살아라." 이거에요. "말씀에 합해서 살아라." 이 말을 "말씀을 지켜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의 흐름대로 말씀의 사람이 발생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참된 인간입니다. 그래서 말씀에 관심이 없다는 말은 그 사람은 인간이라고 우겨도 인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불연속적인 존재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말씀에 관계 없으면 나같이 닮은 인간만 인간이고 지 마음에 안 들면 짐승이 되어요. '저 짐승같은 놈!' 이 말은 '너는 왜 나 안 같애?' 이런 뜻이에요. "저, 이단!" 이거 무슨 뜻입니까? "나는 정통이다." 연예인들 중에 괜히 미운 사람있지요. 나한테 해준 것도 없는데 괜히 미운 사람.. 그건 얼굴 모습이 자기 취향이 아니라서 그런 거에요. 그런데 자기 취향이 아니니까 미워해도 됩니까? 아니죠.
이게 전부다 "나"라는 카테고리(범주)에 갇혀 있는 거에요. 세상은 누가 만든다? 내가 만들어요. 우리는 24시간 내 세상 만드는 것밖에 못 해요. 바깥에 있는 것도 가져올 때 내 것이 되고.. 내 것 아닌 것은 쓰레기 버리듯이 갖다 비우면 돼요. 그래서 자기 부모도 자기 말 안 들으면 "문딩이, 나가 죽어라" 이렇게 하잖아요. "이 쓰레기야 나가 죽어라" 내 맘에 안 든다 이 말이거든요. 마음에 들면 "내 새끼야" 하지요. 갑자기 자기 소유가 되어 버려요.
그런 인간에게 율법을 줬다. 율법을 주니까 이 율법 가지고 자기 세계 만드는 데 보탬이 되는 법인 줄 알고, 하나님이 내 세계 만드는 데 협조하는 줄 알고 모아 놓은 거에요. 모아 놓고 뭐 하느냐? 언어니까 언어대로 하는 거에요. 그런데 언어 속에 예수님만 있지 나는 없거든요. 그러니까 "니가 귀신 들렸다 율법에 어디 그런 내용이 있느냐?" 하는 거에요. 유대인들은 원래 예수님한테 반박을 해요. "니가 죽는다는 내용이 율법에 있느냐?"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22절에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라고 되어 있죠? 자, (오늘 제일 어려운 대목에 왔는데) 지금 율법에 대해서 누가 누구한테 줬다고 얘기해요. 예수님께서. 누가 누구한테 줬느냐? 모세가 너희 조상에게 주었다. 그렇게 되어 있죠 . 괄호 열고는 모세 이전에 아브라함까지 언급되지만 일단은 모세가 그들의 조상에게 율법을 주었잖아요. 그러면 이건 뭡니까? 이미 율법 자체에 뭐가 덮혀 있다는 말입니까? "역사의 이끼"가 덮혀 있지요? 그러니까 주님은 "역사"를 뭐로 보시는가 하면 "벽지"로 보는 거에요.
그 시간의 벽지를 뜯어 내는 겁니다. 모세가 주었다는 말은 결국 뭡니까? 모세는 또 누가 낳았느냐를 언급해야지요. 모세는 누가 주었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 때문에 율법을 주었기 때문에 모세가 왔겠지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 중간에 공통점이 들어 있는데 그것이 뭐냐면 아들의 죽음입니다. 아브라함은 직접 아들을 바쳤고 이삭은 자기가 원하는 아들이 저주 받았죠? 단순히 복 받은 정도가 아니고 적극적으로 저주를 받았잖아요. 그리고 자기가 원치 않는 아들에게 뭐가 돌아갔습니까? 축복이 돌아갔잖아요.
에서를 밀어줬는데 야곱이 거짓말해서 복을 받았다. 그러면 이삭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됩니까? 거짓말, 나쁜 짓 했으니까 어떻게 돼요? 하나님께서 나쁜 짓 하는 자를 벌하시고 속아넘어가는 피해자 편에 서서 세상이 모든 것이 정리가 되어야 되는데 정리가 어떻게 됩니까? 세상이 거짓말 하는 쪽으로 마감이 되었죠. 참 정의로운 하나님입니까? 피해입은 자가 있는데 피해 입은 자는 뭘 받았다? 피해 입은 자는 저주를 받고 거짓말 한 쪽은 복을 받는 세계. 완전히 뒤집어진 세상 아닙니까?
그리고 그 야곱이 자기가 거짓말 한 이 모든 것의 그 의미를 안 것은 바로 자기도 아들 형제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고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독자, 요셉을 죽여버리죠. 아무리 관객들은 살아있다고 하지만 야곱 본인, 아버지에게 요셉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왜? 알리바이가 성립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가 제일 좋아해서 유독 특별하게 입혀놓은 그 요셉의 옷에 피가 묻어 있으니까요. 요새 같으면 유전자 검사하겠는데 그떄는 그것도 안 되었죠? 짐승의 피면 짐승의 피인 줄 압니까? 모르잖아요? 그냥 피가 묻었으니까 그리고 증인이 한두 증인이 아닙니다.
증인이 열 명이라. 하여튼 그떄는 단결을 잘해. 입 다물고 있었어요. 아버지한테 그 짐승을 이야기한 형제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거에요. 얼마나 보세요. 인간이 권력에 약합니까? "봤지? 형 말 안 들으면 동생도 죽는 거 알지?" 살아있는 것은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약속이 살아있고 말씀이 살아있는 거에요. 약속이 살아있고 말씀이 살아있으면 인간은 다 죽은 거에요. 왜냐하면 말씀에 대해서 "좀 지켜보고요.."가 필요 없어요.
못 지킨 것으로 판명나면 이미 그 사람은 산 자가 아니고 끝까지 가봐야 그 사람은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가 시험 문제 받아봐야 0점입니다. 이름 써도 0점이에요. 0점 맞으라고 율법을 준 거에요. 선생님 중에 성질이 고약한 사람 같으면 해봐야 이름만 쓰고 먼저 나가는 아이 같으면요 시험지를 그냥 안 줘요. 다른 아이 같으면 "시험 잘 쳐라." 하고 고이 나눠주는데 이 아이한테는 시험지를 구겨서 팍 던지면서 "잘 쳐라! 이 놈아." 하고 던져줘요. "니 같은 게 어디 우리 반에 들어와가지고.. 잘 쳐! 임마." 하고 시험 자체가 그 인간을 모독하고 부정해버리죠. 그게 바로 율법이에요.
율법을 돌돌 말아가지고 정수리를 때리는데 유대인들은 얼마나 무지몽매한지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고 시험지 들고 시험치고 있다니까요. "십계명을 지킬게요. 사도의 권면과 명령을 지켜서 우리는 바르게 삽시다." 이러고 지금 시험치고 있다니까요. 시간의 벽지를 뜯어내는 겁니다. "인간이 그동안 옛날에는 율법을 이렇게 지키고 이렇게 지켰다" 그 모든 율법을 지켰던 것을 다 '두두두두' 하고 전부다 인테리어를 새로 해요. 일군들 와가지고 흑판 다 끄집어내고 벽지 다 뜯어내버리면 역사라는 것이 뜯어져 나가죠.
그러면 역사 전체가 뭐에요? 인간이 율법을 지켜보려고 애썼던 그런 성과나 시도, 그 노력, 거기에 뭐가 투입되겠습니까? 율법 이렇게 하면 일주일만에 뗀다. 율법 abc. 율법정석. 정철 율법완성. 그런 율법 참고서를 유대인들은 율법 지키겠다고 온 국민에게다가 다 퍼뜨린 겁니다. 자기가 학원 강사(돛대)니까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이 제일 윗계급에 고상하게 놀고 있고, 무식해서 못 하는 사람들은 7단계, 제일 밑바닦에 율법도 못 지키는 자들이고 그들이 강도고 세리고 창기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누구든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 이 서열과 계급이 발생되었다는 말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이 대자연을 인간이 자기의 의로움, 자기의 가치, 자기의 자존심을 어떻게든 챙겨보려고 시도했던 흔적들입니다.
흔히 요새 식으로 이야기하면 그것이 바로 교리이고, 그게 바로 신학입니다. 교리, 신학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습니까? 언어로 되어 있죠?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삼위일체'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를 볼 때 여기 다섯 명의 사람이 있다고 봅시다. 이들이 삼위일체를 이해할 때 서로 덤벼들겠지요? 왜? 언어니까. 인간 내부에 의식이 언어로 짜여져 있거든요. 언어로 되어 있는데 언어의 기표(표기)가 자기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는 겁니다. "나는 의사다." "나는 누구다." 이렇게 자기 의사를 표현하잖아요.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나는 의사다."라는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보기에 세상에서 의사라는 의미에 나는 합당하다.'라는 말이거든요.
그러면 언어 중에서 돌아다니는 "의사"라는 표현, 이 얼굴을 "기표"라고 합니다. 여기에 담긴 의미를 "기의"라고 합니다. "기표"와 "기의" 이것을 합해서 언어라고 합니다. 표기하는 방법 "나는 의사다."라고 차용함으로써 이것이 일시적으로 나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런데 국민연금제 잘못해가지고 걸려들면 "나는 조금 나빴습니다." "조금"이라는 형용사를 붙이죠. "조금"이라는 단어가 어디서 나옵니까? 날아다니는, 우리가 쓰는 언어 중에 하나죠.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 표현을 못 해요.
그래서 기껏 비스므레 한 언어를 동원해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자기를 표현하고 자기를 구축할 때 그것이 한시적으로 자기 자신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율법을 주니까 나는 누구인줄 모르죠. 하지만 율법만 지키면 졸지에 자기는 뭐가 되지요? 율법을 지키면 신명기에 보면 뭘 받는다? 복을 받지요. 그래서 자기는 복 받는 사람, 안 죽고 오래 살고 윤택하게 사는 사람이고 싶어하는 그 욕망에 기어이 율법을 지키려고 합니다. 아까 다섯 명이라고 했죠? 다섯 명이 지킨 것이 다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 다르지요. 왜? 세상은 누가 만들기 때문에? 내가 만들기 때문에. 세상은 내가 만들어요. 내 세상 내가 만들지 남이 만들어 줍니까? 자기 범주 내에서 내 세상 내가 만듭니다. 이왕 만드는 것 어떻게 만든다? 주님 앞에 복 받으면서 계속해서 도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세상을 만드는 거에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너는 율법 몇 개 지켰어?" "다섯 개", "나는 여섯 개" 이게 바로 예수님 찾아왔던 부자청년이잖아요.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지켰나이다." 부자 청년의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제자들도 거기에 동조를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놀랬지요?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겠습니까?" 이것은 부자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바로 옆에서 듣다 보니까 자기 이야기라. 그러니까 "누가 구원 받겠습니까?" 주님의 뜻은 "아무도 구원 못 받는다. 나는 너희를 구원하러 온 게 아니야." 주님은 우리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 세상은 우리가 가 만든 세상 안에 내가 들어있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 세상을 버린다는 말은 그 안에 들어있는 나도 버리는 겁니다. 건질 만헤야 건지지 건져봐야 가치도 없는데 뭘 건져요. 주님께서 건지는 것은 오직 자기 세상(세계)만 건져요. 어떻게? 자기 세상의 일부를 가지고 우리한테 "칩"처럼 박아넣어요. 그것을 "임플란트"라고 합니다. 기초를 박아넣고 기초 위에다 전부다 예수님이 지킨 율법완성을 거기에다가 다 박아요. 그 다음에 그것을 가져가십니다. 그것을 박아넣을 때 교체가 되거든요.
그 교체가 뭐냐? 죽여버려요. 죽이고 대신 박아넣기 때문에 마치 이삭 옆에다가 수풀에 어린 양을 준비해놓고 양을 집어넣고 죽어야 될 이삭을 살려낼 때, 그 양이 있던 그것을 '여호와 이레'라고 합니다. '여호와 이레(장소 이름)' 다른 말로 하면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라는 말이거든요. 이 말은 여호와께서 하실 기능 중에 하나가 발휘되었다는 말이거든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자기 생명을 갖고 들어오는 기능을 하세요. 이 생명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붕 떠버려요. 만약에 이만기나 강호동처럼 덩치 큰 사람이 내가 앉아 있는데 여기서 밑에 팍 떨어지면 나는 붕 뜨지요? 밑에 기초 들어오고 우리는 내 자리 놓쳐버리고(잃어버리고) 붕 뜨고 공중에 떴다가 다시 내려오면서 이 자리에 앉아 있던 강호동이 턱 받아주게 되면 우리는 강호동 품속에서 의인이 됩니다.
차고 들어오고 우리는 자리 박탈당하고 붕 떴고 내려오면서 졸지에 이제는 나의 소뉴, 나의 세계는 날아가버리고 주님의 세계의 일부로서 부분으로서 우리가 들어오는 겁니다. 그 작업 중에 하나가 바로 율법을 거론하는 겁니다. 너희들은 율법을 감당할 수 없다. 너희들이 아는 언어체계, 세상체계에서는 율법의 정신을 전부다 수용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22절) 자 이 말씀을 언급해봅시다. 이것을 누가 얘기했죠? 예수님께서 이야기했죠.
지금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것은 뭐냐면 바로 19절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요 대목을 계속 이어가는 겁니다.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고 했지요? 만약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한 사람 있으면 누가 안 죽는다? 예수님이 안 죽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죽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율법을 거론한다는 것은 내가 율법대로 죽는 스케줄은 이미 확정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따라서 그냥 죽으면 안 되지요. 율법을 준 사람에게 '아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자가 정말 없구나. 그때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는 주님의 말이 정말 맞는 말이구나. 그것을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율법을 우리가 못 지켰다는 말은 율법을 지키려고 덤벼드는 우리 세계 자체가 문제가 있다.?문제가 없다? 문제가 있는 거죠? 문제가 있는 것을 다 모아놓으면 누구를 살해하게 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미워하고 살해하게 되어 있는 그런 세력이 우리 안에 있다는 거죠. 그걸 가지고 우리는 우리 안에 그런 귀신이 들어온 것도 모르고 그냥 성경만 지키면 복 받는 줄 알고 문자대로 되는 줄 알고 그렇게 해보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할례 언급했죠. 그 다음에 안식일 언급했잖아요.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행하는 것은 그 당시에 누가 했습니까? 지금 유대인이 지금 하고 있죠? 너희들이 하는 할례와 그 안식일이 왜 결국은 나를 살해할 수밖에 없는 동기, 원인이 되는지를 주께서는 말씀을 하시고자 하는 겁니다. 무슨 뜻인지 이제 아시겠죠? 그것이 23절에 나옵니다. 한 번 봅시다.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자 유대인들은 뭐냐 하면 어떤 사람을 온전케 할 때에 무엇이 투입됩니까? 자신이 율법 지킨 것을 투입시킵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이렇게 율법을 지켰으니까 분명히 선한 마일리지가 쌓일 것이고 그 마일리지 쌓인 것은 나한테는 필요 없고 저 사람에게 돌려주시면 저 사람은 분명히 죄가 많아 병 들고 아팠는데 내 남아도는 의로써 저 사람의 죄를 없애주시고 하나님의 그 자비를 받아서 낫게 해주세요.' 순서가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안식일 날 그들이 열심히 해 봤는데 과연 사람이 온전하게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이여 우리가 안식일을 제대로 지켰습니다.'라고 하려면 반드시 우리들이 하는 모든 말발이 실제로 병든 자도 병이 낫는 그런 성과가 있어야 비로소 우리는 제대로 안식일을 지켰다고 장담할 수가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분명히 예수님은 유대인 보기에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위반자지요. 위반자인데 이상하게 안식일날 멀쩡하게 손마른 사람이 낫고, 38년 된 병자도 낫고 하니까 병이 낫는 루트, 하나님으로부터 병이 나아오는 그 통로가 어느 한 쪽은 가짜지요. 어느 쪽이 가짭니까? 유대인이 가짜고 진짜는 누굽니까? 예수님이 진짜지요.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이 진짜라고 고백하면 되는데 그걸 진짜라고 고백을 못 하는 이유가 "예수님이 하신 것이 진짭니다."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율법 지키는 것하고 자기가 율법 지키는 것에 공통점이 없을 경우에는 누가 율법의 위반자가 됩니까? 논리상 본인이 위반자가 되지요. 위반자가 되어 버리면 그 다음에 더 큰 문제가 뭐냐? 사람이 율법을 위반했으면 어떤 대목에서 위반했는지 본인이 알아야 되는데 자신은 지금 최선을 다 하고 있는 거에요.
꼭 오늘의 한국교회 같애. 다 기도하고 열심히 "주여, 주여 집 사주세요." 그저 애기까지 동원시켜가지고 통성기도 다 시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집은 안 사주고.. 무슨 성과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없으니까 어떻게 합니까? 있다고 우기는 거에요. 자기 세계니까. 그러면 이 안식일과 율법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이 되는지는 그건 우리가 봐야 되겠지요.
자. 아까 배운 것을 복습해봅시다. 여기에 컵과 전등은 따로 구분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말이 다르기 때문에. 이것은 컵이고 이것은 전등이기 때문에. 컵 달라고 하는데 전등 달라고 하면 안 되요. 그 사람한테는 예의가 어긋나는 것이죠. 분명히 구분되어 있는데 그러면 안식일은 십계명 제 4 계명이죠? 천주교에서는 3계명이라고 하던데. 그러면 할례는 십계명에 포함되지 않는 다른 계명이죠? 그러면 구분되지요? 구분 되면 뭡니까? 안식일은 안식일대로 행하고 할례는 행하면 되지요. 만약 할례만 행했는데 안식일은 자동적으로 지키는 그런 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할례를 행해라. 안식일 그 십계명 무시해도 된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야기한 적이 없거든요. 십계명 지킬 것 지키고, 십계명도 그냥 십계명입니까? 일계명 지켜야 되고, 이계명, 삼계명,... 열계명 다 지켜야 되는데.. 그러면 아홉 개 지키고 한 개 안 지키면 어떻게 됩니까? 십계명을 못 지킨 것이 되지요? 거기다가 추가해서 또 할례를 행해야 되고. 이게 하나로 통합이 안 되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가 만약에 열심히 말씀대로 살았는데 집안에 우환이 생기고 일이 꼬였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가만 있어봐라 지난 번에 헌금을 했지? 11시 예배인데 10시 반까지는 갔잖아? 아! 세상에 성가대 하고 내 가운을 안 치웠네. 아 참, 다음에 다른 사람 것도 치워줄께요. 하나님. 이번에 내린 벌은 철회해 주세요. 아 그걸 빠뜨렸네.'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 지키는 조항들이 있어요. 하루에 석 장 성경보고 30분 기도하기. 이렇게 하는데 바빠서 성경 3장 보다가 전화가 와가지고 껌뻑 앚고 두 장밖에 못 봤을 때 그 다음에는 넉 장을 봐야돼요. 그래야 벌을 안 받아요. 그렇게 하든지. '아하 지하철에 사람이 엎어 있는데 지갑에 보니까 천 원짜리인 줄 알았는데 만 원짜리밖에 없는데, 그걸 아셨구나.' 내 생각까지 다 알아가지고 '내가 다음에는 손이 짚히는 대로 하겠습니다. 재수 없어서 5만 원 걸려도 할 수 없고.'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이래가지고 혼란스러워요.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것은 십 분 쉬고 합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요한복음 7장 22절(가락-율법의 연속성)
150903b-이 근호 목사
안식일과 할례 언약이 어떻게 합치가 되느냐? 안식일과 할례 모두 인간보고 하라고 한 것이 아니고, 인간의 죄를 씻어주는 어떤 분의 기능으로 하나(합치)가 돼요. 인간에게는 안식일이 있고 할례법이 따로 있잖아요. 그러나 이것을 이렇게 보면 돼요. 하나의 동그라미 속에 전체가 안식일이고 전체가 할례가 되는 겁니다. 할례를 행하면 하나님의 의가 나오고 안식일을 지키면 하나님의 의가 나옵니다. 그때 문자로 된 것이 점선을 향해서 누구를 경유하게 되면 의가 막 나와요.
할례 쪽에서도, 안식일 쪽에서도 통합해서 나옵니다. 그때 반드시 뭐를 경유해서 나오느냐 하면 어린 양의 피를 유발하게 돼요. 그래서 하나님의 희생, 예수님의 언약의 피(죽음),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것이 나오게 되면 안식일을 지킨 것이 되고, 할례 지킨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할례와 안식일을 우리는 어떻게 지킵니까? 성도가 할례와 안식일을 지키는 방법은 죄인으로서 기계에 재료가 되명 돼요. "저는 (마음의 )할례와 안식일을 못 지킵니다." 하고 죄인으로 들어가면 돼요. 그런데 그것은 십자가 이후의 이야기이고,
십자가 이전에는 어떻게 하느냐? 원인도 알 수 없는데 이유도 없이 38년 동안 병든 자거든요. 왜 내가 38년 동안 병 들어야 되는지 몰라요. 죄를 지었다고 한다면 나는 이만큼 죄를 지었으니까 38년, 너는 저만큼 해서 37년, 니는 이만큼 했으니까 5년, 니는 나보다 죄를 더 졌으니까 70년 이렇게 되는데 전혀 그런 것이 아니고, 혼자 38년 된 병자에요. 베데스다 못가에 얼쩡거리기만 했지 누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미 하나님의 의 만드는 작업에 이 사람은 참여된 사람이에요.
이 돌아가는 방앗간 기계에 이미 재료로서 참여되었어요. 38년 아니라 39년, 40년이 되어도 마땅한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 38년 된 저주받은 흔적이 누구 한 마디에 끝났습니까? 어떻게 베데스다 못가에 들어갔습니까? 물에 들어갔습니까? 들어갈 필요가 없지요. 인간이 하는 방식이 아니라니까요. 이게 바로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집사님!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 "이야기해도 당신은 모를거야." "왜?" "당신이 모르는 방식, 당신이 해낼 수 없는 방식이니까..
" 만약에 "이렇게 했다." 하면 그대로 흉내(모방)낼 거에요. 그런데 모방하거나 흉내낸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행함없이 구원받은 거에요. 그리고 그 방법에 대해서 나도 몰라. 어떤 분이 와서 대신 죽으심으로써 그냥 죄를 가져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져가실 때 내가 쓰레기 분리수거해서 내놓았습니까? 그래서 새벽에 가져가는 그런 방식이에요? 그냥 살았어요. 그냥 살았는데 그냥 죄가 없어졌어요. 38년 된 병자가 자기 딴에 조금 더 낫겠다고 미리 담요 준비하고 했습니까? 그런 거 없었어요. 그렇게 남들이 하는 방식대로 베데스다 못에 어슬렁거렸지요.
그래서 저는 주님이 암표 장사같아요. "입장권 있습니까?" "없습니다. 다 팔렸답니다." "두 장 있는데.. 다 보이니까 따라 와, 따라 와." 그리고는 경기장 바깥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 데에 가가지고 "용서해줄게." 이렇게 해가지고 천국 가는거에요. 예수님하고 자기들끼리만.. 그러니까 그 방식은 내가 아는 방식이 아닌 방식이죠. 따라서 우리는 내가 아는 방식, 내가 할 수 있는 방식 같으면 "내가 이렇게 준비했습니다."가 되는데 내가 일체 아는 방식이 없이 했기 때문에 우리는 온전히 주님의 행하심만 증거할 뿐이에요. "주께서 하셨습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38년 된 병자에게 "누가 너더러 안식일날 담요 들고 걸어가라 하더냐?" "나를 낫게 하신, 일방적으로 낫게 하신 분이 나보고 티내고 이렇게 걸어가라고 합디다." "그 사람이 누군데?" "나는 모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소경도 마찬가지죠. "누가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나는 모르겠습니다. 나한테 묻지 마세요. 왜? 나는 눈뜬 것, 피동적으로 당한 것밖에 없기 때문에.." 내가 능동적으로 뭘 했으면 "이렇게 했더니만 구원이 되더라"가 되는데 그냥 당한 입장이기 때문에 저보고 그런 걸 물으면 안 돼죠. 강간 당한 여자보고 책임 물으면 안 됩니다. "옷차림이 그러니까..." 그런 것을 물으면 안 돼요. 그냥 당한 거죠. 지금 우리는 주님한테 폭행당한 거에요. 정신적으로.
정리합시다. "안식일과 할례를 어떻게 지킵니까?"라고 물으면 "못 지킨 것을 통해서 죄인 되면 됩니다." 그러면 안식일을 지키려고 애쓰는 것도 죕니다. 안식일을 못 지켰다고 내가 후회하는 그것도 죕니다. 그래서 우리(성도)가 인생을 살면서 후회한다는 것은 십자가에 대한 모독이죠. 후회한다는 말은 '조금만 잘했으면 될 건데..' 이러잖아요. 아직도 자기가 개과천선할 만한 믿음이 있다는 말이거든요. 그런 믿음은 갖지 마세요. 우리는 그냥 당하는 것뿐입니다. '옷차림만 좋았으면 성폭행 안 당하는 건데..' 그러지 마세요. 그냥 당하면 당하는 거에요. 의의로 성경해석 쉽지요? 자, 그런데 오늘 여기 23절 봅시다. 안식일에 사람의 무엇을 건전케 한다고 했습니까? 전신이죠.
이 비슷한 이야기가 요한복음 14장에도 나오죠.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어주니까 베드로가 "발만 씻지 마시고" 하니까 "발만 씻어도 된다." 다 씻은 것이 되죠. 전신이죠. 전신이란 말은 구원받고 난 뒤에 우리가 행할 것이 아직 남아있다? 안 남아있다? 전혀 남아있지 않다. 구원시켜 주는 십자가가 그냥 트랙터에 엔진(발동기) 시동 거는 그 정도가 아니에요. 이미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 인생에 대해서 손댈 게 없어요. 이런 얼굴 가지고 성형외과 의사에게 한 번 찾아가 보세요. 손댈 게 없어요. "우리 병원 오지 마세요. 손댈 게 없는데 뭐. 완전한데 뭘 고쳐요. 견적 안 나옵니다. 손댈 거 없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손대지 않을 때 가장 하나님께 영광을 끼쳐요.
그러면 내가 내 맘에 안 들어서 손대고 싶을 때 그 사람은 주님의 영광을 까먹고 있는 중입니다. 두 귀신쯤 들어갔어요. "손대라." "예수 믿는데 이런 짓 해도 되겠어?" "그거 고치면 더 영광 돌릴텐데.." 이것 큰 유혹거립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아요. '이번 만 잘 된다면..' 하는 그 자체가 이미 마귀의 유혹이 들어온 겁니다. 이 말은 이미 우리는 망가졌기 때문에 망가진 인간에게 거기다가 이쁘게, 바짝 마른 뼈에게 호랑이 문신 새겨봐야 아무도 겁 안 먹습니다. 뼈긴 뼌데 호랑이 문신 새기고 이런 거 새겨봤자 조폭 뼈 되는 거 아닝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인간의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우리 속에 살아있습니다. 왜 살아있는가? 바로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되었다, 그 죄를 알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마귀한테 시험받는 것을 넉넉하게 허락했습니다. 하루에도 수백차례 마귀한테 공격을 받고 마귀의 정찰기가 넘어와서 정찰을 다 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남자들한테는 프로야구, 여자들한테는 드라마에요. 프르야구 이기고 지고, 강정호가 홈런치고 하는 것에 따라서 남자들의 직장생활이 달라져요. LG하고 삼성하고 야구를 했는데 9대 일로 삼성이 지고 있었어요. 그 게임에서 삼성이 15대 9로 이겼습니다. LG팬들은 일이 손에 안 잡힙니다. 드라마에 꼭 못된 게 점점 잘 되고 착한 것들은 점점 궁지에 몰릴 때 하루종일 집 안에 별로 기분이 안 좋습니다. 그런데 벌써 70회가 넘어가고 드디어 역전되어가지고 못된 게 잘 안 되고 잘된 게 복수가 되게 되면 웬지 기분이 좋게 돼요. 왜? '내가 응원했던건데..
' 이것이 뭐냐면 이 세상과 우리는 한 덩어리로 돌아가고 있어요.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시는 "죄"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죄라는 것이 뭔 줄 몰라요. 짓고 난 뒤에 죄를 알지 우리는 죄를 몰라요. 그냥 세상을 닮아가요. 세상에 한 통속이 되고 세상을 모방하고 세상하고 통해도 너무 잘 통해. 이게 저줏거리에요. 그래서 세상과 우리는 너무 잘 통하기 때문에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싫어해요. 왜? 거기에는 일거에 폭격을 해서 다 조져버리고 다 불바다 만들어 놓으니까. 그래서 그런 책이 싫은 거에요. 비록 성경책이지만,
성경책이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우리의 구미에 영 땡기지를 않아요. 별로 마음에 안 들어요. 왜? 너무 과격해서. 너무 과격해서. 소박한 나만의 세계, 아름다운 소년의 꿈과 소녀의 꿈, 그런 꿈이라도 어느 정도 허락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것 만큼은 손은 안 댔으면 좋겠어요. 마지막 남은 나의 자존심, 나의 의미가 되는 그런 것 임재범이 불렀던 하나님 모든 것을 다 바칠 테니까 저 여자 만큼은 허락해 달라는 고백, 고해, 그것처럼 뭔가 "제발 이것만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목을 내놓아도 내놓겠습니다. 하지만 자식(주로) 만큼은 하나님 허락해 주신다면 자식을 위해서 대신 교도소에 갈 테니까 자식 만큼은 지켜주옵소서." 이런 거요.
그것이 우리에게 죄가 나타나는 바로 "기도"라는 것입니다. 기도와 헌금과 봉사와 수고, 종교활동 왜? 우리의 욕망은 어느 정도인지 우리의 욕망의 탱크는 어느 정도인지 그 깊이를 감을 못 잡아요. 이것은 아무리 해도 부족해요. 끝도 없어요. 바닦이 없어요. "이 정도면 됐습니다." 하는 그 자리에 서게 되면 새로운 욕망이 벌써 또 생성되어져요. 어떤 사람은 골프에 미치고 어떤 사람은 당구에 미치고 어떤 사람은 주부도박단, 산속에 비닐하우스에 들어가서 화투치고 어떤 사람은 프로야구에 미치고 어떤 사람은 마라톤에 미치고 또 조깅에 미친 사람이 있고 전부다 거기에다가 올인하는 거에요. 그렇게 미치고 해도 예수님한테 미친 사람은 없어요. 우리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한테 미쳤습니까? 그러면 죄에요. 그것도 다 욕망이에요. 분명히 노림수가 이상해요. 뭔가가 있어요. 사도바울은 내가 미쳐도 주께 미쳤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러면 사도바울이 그런가? 성령이 그렇게 하시죠. 성령이. 우리도 마찬가지고. 사도바울이 죄인 중에 괴수지만 성령께서 미치게 만드는 일을 하셔요. 그러니까 본인이 예수에 미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요. 성령이 와서 하시지 본인이 미치지 않아요. 왜? 인간은 반드시 날 때부터 나라는 것의 의미를 두게 마련이에요.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나는 ( )라는 구조를 포기한 적이 없어요. 반드시 나는 ( )다. 나는 순교자다. 성도다. 나는 달인이다. 뭐가 반드시 ( ) 안에 있어요. 이 틀 자체를 포기한 적이 없어요. 그러나 주님은 이 틀 자체가 죄라는 겁니다. 이것을 포기하라고 해도 우리는 포기할 수 없어요. 예수 신앙이고 성령을 수십년 받아도 이 틀은 절대로 죽을 때까지 포기 안 해요. 아니 할 수가 없어요. 끝까지 주님은 우리를 죄인으로 몰아세우십니다. 다만 이 자리가 아무리 우리가 바르게 그 자리에 사는 것 같지만 이 자리의 내용이 그때그때마다 바뀌어질 뿐이에요. '나는 전에는 술,담배 고래였다. 하지만 지금은 성경공부해서 성경의 달인이다.' 그런데 성경공부하면 의인입니까? 그 성경공부를 함으로 자기 존재의 정체성, "나는 이 정도야." 하는 것을 과시하는 마지막 카드를 본인의 욕망이 만들어 낸다니까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잖아요. 우리 안 죽습니까? 죽어가는 거에요. 죽어갈 때는 이유가 있어요. 왜? 죄를 지었으니까 죽지요. 죄는 어디서 나오는가? 욕심. 욕심은 뭐냐? 욕심은 바로 내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런 것이 있다니까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율법이라는 것은요 우리는 평생 걸려도 못 지키고 바리새인이라고 욕할 것 없어요. 율법에서 우리는 평생동안 바리새인처럼 몇몇 율법을 가지고 나의 건전함과 나의 고상함을 스스로 지키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께서 온전한 자아와 내가 그나마도 고마고만 유지하는 자아, 이 두 자아가 평생동안 우리 내부에서 싸우게 되는 겁니다. 이게 로마서 7장에 나오죠.
"내 속은 하나님의 말씀을 원하지만 또 다른 내가 있어 나를 사로잡아오는구나." 주께서는 우리를 죄인으로 몰아세워서 이 모든 구조가 우리 구원을 위함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바로 이런 작업에 유일한 주인공으로서 우리를 재료로 활용해서 주님만 주님답게 드러내는 작업에 우리를 집어넣는 거에요. 쉽게 말해서 이용당한 겁니다. 예수님 주 되심에 우리가 이용당한 거에요. 즐겨 이용당합시다. 그 다음에 봅시다. 25~26절에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혹이 말하되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이 말은 뭔가 하면은 곧 27절을 말하기 위해서 미리 깔아놓은 거에요.
27절에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아까 제가 시간의 벽지라고 했지요? 시간의 벽지라는 것을 무슨 뜻으로 사용했습니까? 율법에 대해서 걸쳐있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해석들을 주께서는 다 뜯어낸다는 뜻입니다. 벽지를 뜯어내야 알맹이가 있잖아요. 율법은 바로 주님이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것이지 인간이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해석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이것이 시간에 관한 거라면 27절에 공간에 관한 거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의 자아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외부에 있는 개체를 분석할 때 시간과 공간으로 분석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이 자아가 자아를 구축할 때 나는 몇 살이며 어느 집 출신이고 고향은 어디라 하는 것으로 "나는 ( )다." 를 성립시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향 어디야?" "지금 몇 살이야?" 시간과 공간으로서 우리 자아를 구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 예를 들어 봅시다. 아브람의 고향은 어딥니까? 갈대아 우르 지방이죠.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고향은 어디 있습니까? 이 땅에는 없다고 히브리서 11장에 되어 있지요. 아브라함의 고향은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지고 거기에다가 뭘 중첩시켰느냐 하면은 이 땅에 고향이 없는 하늘의 예루살렘에 본향이 있는 자를 아브라함에다가 중첩을 시키는 거에요. 야곱의 고향은 어딥니까? 가나안 땅이죠. 그러나 이스라엘 고향은 어디에요? 없지요? 야곱에다가 뭘 중첩시켰어요? 이스라엘을 중첩을 시킨 거에요. 그러니까 야곱은 날로 쇠퇴해야 되고 이스라엘은 날로 흥해야 되는 거에요. 그래야 어디에 갑니까? 지남철이 땅에서 어디로 올라가요? 지남철이 위에 있기 때문에 흙(땅)에 있는 것들을 위로 잡아당겨야 될 것 아닙니까? 왜? 고향이 하늘이니까.. 이 고향이라는 것이 지상에 없음이죠. 없음이 있음을 체포해서 없음의 세계로 데려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있음 자체가 무슨 문제가 있는데 왜 문제가 있는가 하면 인생이 있다는 말은 자기 부모가 있고 모든 것이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없음에서 나왔다면 그것 자체를 도저히 알지 못하게 막아버려요. 왜냐하면 내가 이미 있으니까. 예를 들어서 "너 누구야?" 하면 "나 없는 데서 생겼다." 이렇게 이야기를 안 하잖아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한 날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오늘 염려는 오늘 하고 내일 염려는 내일하라 오늘 염려는 오늘로 족하다고 되어 있지요? 그러면 저녁이 되면 우리는 잠을 자게 되고 잠자게 되면 의식이 없고 우리는 있느냐 없느냐도 이미 우리 소관이 아니지요.
의식이 없이 잠 잤으니까. 자다가 일어나서 "나 있다." 이러지 않잖아요? 없다 이 말이죠. 그래서 제가 지난 주일날 얘기했잖아요. 광야의 특징은 뭐냐하면 모든 것을 하루하루로 잘라버린다고 했죠? 다른 말로 하면 일용할 양식인데 언제만 이틀치 주느냐 하면 하나님의 안식을 보여줄 때는 이틀치를 줘요. 그 다음 지나면 또 하루치만 줘요. 그리고 욕심내서 많이 긁어모으면 이게 또 썩어버려요. 벌레가 일고 또 썩어버리고.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인간 자체를 지금도 하나님께서 썩는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고. 왜 썩느냐? 썩은 내가 나니까 성도지. 썩은 걸 아니까. 내가 지금 늙어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아니까 우리가 성도 맞잖아요.
인간은 중용을 못 이긴다고 했잖아요. "너 어디서 왔어?" 누가 묻습니까? "니는 어디서 왔는데?" "그들은 어디서 왔습니까?" 그들은 이렇게 합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왔어요." 이렇게 하겠죠. "예루살렘은 어디서 왔는데?" 예루살렘은 어디서 왔습니까? 애굽에서 왔겠지요. "애굽은 어디서 왔는데요?" 할 말 없어요. 왜냐면 애굽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되는 데 있어서 이스라엘이 없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되려면 누가 개입이 되야 돼요. 위에 계신 분이 개입을 해줘야 애굽나라에서 없었던 나라, 이스라엘이 생긴 거에요. 이스라엘 나라가 애굽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애굽에는 이스라엘 나라가 없어요. 히브리인들밖에 없어요. 히브리인들이니까 이스라엘 사람 아닙니까? 아닙니다. 히브리인들은 애굽 사람이이에요. 조상이 아브라함이잖아요? 하지만 그것은 혈육적인 조상이고..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 모을 때 "애들아, 여기 아브라함이 조상이 사람 나와보세요. 여기 들어오세요. 나갑시다." 그래서 나갔어요? 그래서 나와 보니까 전세 버스 한 2500대 대기해놓았다가 갔습니까? 그들은 뭘 건넜습니까? 홍해바다 있죠? 어린 양 있죠? 홍해 바다와 어린 양 둘의 특징이 뭐에요? 무엇을 보여주는 겁니까? 어린 양은 "죽음"이고 홍해는 "죽음"이잖아요. 같은 인간인데 히브리인들은 살고 애굽인들은 죽었습니다. 누가 정상이에요? 애굽인이 정상이죠. 바다에 들어가긴 왜 기어들어갑니까?
히브리인들은 비정상이에요. 누가 동행했어요? 하나님이 동행했기 때문에 살아난 거에요. 하나님이 동행했기 때문에 죽은 데서 살아난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 이스라엘은요 히브리인들의 나라가 아니고 동행하시는 분의 나라에요. 어린 양의 나라에요. 그게 천국이에요. 어린 양의 나라지 사람들이 모여서 나라 만들자고 해서 만든 나라가 아니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특징은 뭐냐? 색출해서 탈락시키는 거에요. 가나안 땅은 제거하는 작용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답지 않은 자를 계속해서 죽여나가요. 나중에는 다 죽여버려요. 다 죽여버리고 진짜 이스라엘은 바벨론 나라로 피신시켰습니다. 다니엘 같은 사람, 에스겔, 이런 사람들은 따로 피신시켰는데 그 사람들 속에는 뭐가 있느냐? 하나님의 언약이 장착되어 있어요. 그것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남은자(레멘트)고 이야기합니다.
"너 남은 자야?" 하고 묻는다면 무슷 뜻입니까? "너 힘으로 니가 구원될 수 없는 자 맞아?" 이런 뜻이에요. 은혜로 말미암아 남은자. "만약에 은혜가 안 왔더라면 너는 천국 못 갈 사람 맞지?"라고 할 때 "네, 그렇습니다."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밖에 없어요? 앞으로도 그렇고 그전에도 자기 행함에 의미를 전혀 두지 않는 사람. 행함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조금도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 오직 오신 은혜가 나를 조작하고 나를 주관하고 나를 은혜대로 지 맘대로 부리는 것을 흔쾌히 기쁘게 용납이 되고 허락이 되고 인정이 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남은자가 되는 겁니다. 내가 말을 하면서도 참 있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그리스도 올 때는 어디서 오는지 알아요? 몰라요? 모르죠. 그것을 유대인들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예수님은 무조건 아니에요. 왜냐면 어디서 왔는지 알아요. 어디서 왔습니까? 갈리리에서 왔지요. 41-43절에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리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쟁론 자체가 예수님이 "나 갈릴리 가기 전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이야기하면 그들이 믿겠어요? 안 믿겠어요?
그러면 그들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인간이 한둘이냐?" 이렇게 말했을 거에요. 무조건 너는 아니야. 왜? 내가 아니니까. 내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면 무조건 아닌 거에요. 지금 이 이야기가 그리스도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인 줄 알아요?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김집사, 어떻게 구원받았어요?" "몰라요." "누가 구원해줬어요?" "그런 사람 없어요." "그럼 어떻게 구원 받았는 줄 압니까?" "그냥 알아져요." "실례지만 어디서 왔습니까?" "저 바다 건너서 왔습니다." "나는 어디서 왔는 줄도 몰라요.나를 구원해주신 분이 그쪽에서 와서 구웠했겠지요." 그러니까 결국은 예수님만 그 당시에 대화가 안 되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 성도도 성도 아닌 사람들과 대화가 안 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작전을 그렇게 꾸며가는 거에요. 왜? 그래야 너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는 요한복음 17장 말씀이 맞기 때문에 그래요.
만약에 우리가 다른 사람하고 이야기가 통하게 되면 주님이 전도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말발로 전도하는 셈이 되요. 그렇게 되면 그것은 주님의 전도를 가로막는 마귀의 술책에 말려든 게 돼요. 마귀의 종이에요. 로마서 10장에 보면 있지요. 실컷 말씀을 전하라고 해놓고 "보내지 않는 자를 누가 전하리요?" 이 말이 참 어려워요. "나는 주의 복음을 전했습니다."라고 하는데 주께서는 "나는 니를 안 보냈다." 하면 끝나는 문제잖아요.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이 말씀이 무서워요) "주여 주여 우리가 주를 위하여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이적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라고 하니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는 어디서 왔지?" "어느 용역사에서 보내가지고 노가다 일했지?" "우리 회사에서는 일하라고 당신을 보낸 적이 없는데.." 기가 찰 것 아닙니까? 그것을 "가봐야 알지." 하지 말고 미리 아는 수가 있단 말이에요. 진짜 주님이 보낸 사람인지 안 보낸 사람인지를 미리 아는 수가 있다니까요. 어떻게요? 내가 아무 행함이 없이 구원받았다는 거에요.
앞으로도 행함 없이 구원 받을 거고. 나는 아무것도 안 했고 적극적으로 극렬하게 아무것도 안 했고 앞으로도 안 할 거야. 그래도 구원은 돼. 왜? 구원은 내가 하는 게 아니니까. 이 이야기를 강단에 서서 설교해 보세요. 교인 1000명 있으면 다음 날 두 명 오면 많이 남은 겁니다. 다 가진 않겠고 부동산(건물)이 있으니까 오히려 나가라고 하죠. 회의 해가지고 종용히 불러 가지고 내쫓아 버려요. 그래가지고 교회 커지겠느냐 말이에요. 그러니까 요한복음 7장 자체에 몇 가지 원칙이 있어요. 절대로 남을 전도하지 마라. 절대로 믿게 하지 마라. 절대로 꼬시지 마라.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절대로 나는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다. 이런 대원칙이 있어요. 나는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다. 왜? 구원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총괄해서 말한다면 "하나님은 주님만 구원하신다." 입니다. 심지어 이 구원시키지 않는 것이 주님의 십자가까지 계속 갑니다. 주님 십자가 지실 때 전부 다 떠나버리죠. 주님 곁에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주님께서 구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이제는 나의 아버지가 이제는 너희의 아버지가 되도록 성령을 보내주게 되면 성령 받고 난 뒤에 알던 주님과 성령 받기 전에 친하게 지내던 그 주님과 완전히 반대가 되죠. 그 잘못이 주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자기 잘못을 자기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주여 제가 바로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시험하죠.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걸 왜 저한테 물으십니까?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미 주인공이 나의 모든 나 됨의 주역을, 내 주체의 자리를 주님한테 도로 보내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바울처럼 주님한테 보낸다고요. 주님께서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내 존재는 주님의 살아계심의 증거입니다. 증거가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열심히 사세요. 자살하지 말고 열심히 사세요. 자살해도 물 새거든 그냥 집에 오세요. 온도차 손가락으로 재보는 고생 할 것 없이 그냥 집에 오세요. 왜? 힘들어도 주의 작품이니까. 힘들어도. 외로워요? 아무도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그 사람이 주님의 멋진 작품이에요. 그 사람 미술 시간에 A 받습니다. 최고. 주께서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 강도와 세리와 창기 아닙니까? 그리고 돈만 아는 삭개오. 삭개오 예수 믿고 키 얼마나 컸습니까? 키 별로 안 컸을 거에요. 여전히 키 작았을 거에요. 그것 때문에 고민했습니까? 그것 때문에 젊을 때 우유 안 먹은 것을 후회했습니까? 성도라고 하는 사람한테는 후회라는 말 자체가 건방진 말이에요.
하나님은 후회할 만한 요소를 우리에게 남겨둔 적이 없어요. 이 요한복음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사도바울의 말씀과 연관해서 생각해봅시다. '야, 그때 내가 예수 믿고 그런 짓 안 할 건데 예수 믿고 난 뒤에도 그런 짓 해가지고 나는 이제 지옥간다. 개가 토했던 것을 도로 먹는 것처럼 내가 또 나쁜 짓을 했구나. 히브리서 6장에 보니까 한 번 비췸을 얻고 타락한 사람은 망한다는데 내가 그럤구나.' 바로 그러한 말씀을 대할 때 여전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 미련을 갖고 있는 사람은 흔들릴 수밖에 없는 거에요. 그런데 요한복음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이미 온전케 되심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그런 말씀이 흔들리는지 안 흔들리는지를 테스트하는 테스트용이라는 사실을 알게 돼요. "주여 한 번 흔들려볼까요?" 이런 식으로. 예수 믿고 난 뒤에 깽판쳐가지고 교도소에 가가지고 "에이 씨 괜히 했어." 하고 후회 한 번 해 볼까요? 후회 안 합니다. 주여. 이 수갑 찬 모습을 수갑 차고 찍고. 이게 멋진 작품이라니까요.
공작 시간에 방학 숙제로 내야 돼요. 주님의 숙제. 사람의 범죄하는 것이 지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께 허락이 나야 돼요. 같은 모습으로 수갑차고 지옥간 사람이 있고 같은 모습으로 수갑차고 천국간 사람이 있고 그렇습니다. 같은 강도라도 강도가 보기에는 똑같지만 질이 달라요. 따라서 "오늘밤에 주여 저를 생각해달라"고 이야기할 때 이 강도는 일본말로 하면 사람이 아니므니다. 진짜 성도이므니이다.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이 사람은 본인이 그렇게 예상한 것도 아니에요. 이 사람은 주님의 작품이라고밖에 할 수가 없어요. 주님의 작품이 강도의 모습으로 드러난 거에요. 막달라 마리아도 그렇고 기생 라합도 그렇고.. 그런 사람이 보통 사람들이 아니고 주님이 손댄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을 가지고 "일찌기 하나님의 신(그리스도의 영)이 임했다."고 베드로전서에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성도의 특징은 뭐냐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어느 정도로? 내가 내 인생을 손떼야 될 정도로. 주님이 친히 손대기 때문에 내 인생에 손댈 필요 없어요. 보통 사람들이 아니에요. 뭐 열병식 부러워하지 마세요. 중국에 맛있는 쌈 얼마나 맛있겠노? 그거 집에서 라면 끓여먹으면 돼요. 오른쪽으로 비비고 왼쪽으로 비비고 그게 훨씬 맛있어요. 세상에 부러워할 게 없다니까요. 그런데 부러워할 게 없는 게 언제 생기느냐? 실컷 부러워하다가 성령께서 내 뜻대로 안 될 때 '참 부러워할 게 없어야되는데 그걸 왜 내가 부러워했지?' 이런 식으로 주께서는 손을 대주시는 거에요. 특히 지금도 일곱 귀신, 이천 귀신이 오도록 주께서는 허락을 하시는 겁니다. 실컷 시달리되 죽을 때까지 시달릴 거에요.
우리는 우리의 욕심을 거부할 생각도 없고 우리는 욕심을 포기할 생각도 없습니다. 마음껏 죄짓고 마음껏 마귀하고 한 통속이 되어서 까불다가 성령께서 그런 식으로 선하게 인도하게 되면 "아 이미 온전케 되었지..'라는 사실을 소급해서 아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공간과 시간 개념은 없어져요. 왜냐면 공간과 시간 개념에 이제는 더 이상 저촉을 받지 않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28절 봅시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가라사대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여기서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한다"라고 했는데 그러면 알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들이 평소에 하나님에 대해서 알았다고 우겼죠?
그런데 예수님이 중간에 나서서 알지 못한다고 했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방식은 뭡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 예수, 성령 삼위일체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로 가로막는 그 작업, 구원의 작업이 이미 개시가 되었습니다. 몰라도 돼요. 우리가 알 것은 하나면 돼요. 내가 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그 정도로 주께서는 저를 구원했습니다. 제가 기껏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밖에 못 하겠어요. 쉽게 예를 들면 친구 사이에 "야, 너 엄마를 알아? 엄마 키를 알아? 몸무게를 알아?" "몰라." "엄마의 어떤 곳이 좋아?" "그것도 몰라. 다 몰라." "그럼 너 엄마에 대해서 아는 것이 뭐야?" "나 엄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다만 엄마라는 것밖에 몰라. 그것만 알고 그 외에는 몰라."
우리가 복음에 대해서 자꾸 무식에서 유식으로 나가게 되면 신앙생활이 더 좋아진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천국간 강도가 얼마나 알았겠어요? 강도가 강도질하느라고 바쁜 데 성경 몇 장 읽었겠어요? 성경 읽고 도 닦기에 바빴겠어요? 안들 알았겠습니까? 자신의 언어적인 오해로 알죠. 누구도 천국가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에 가요. 사도바울도 그러하고 스데반 집사도 마찬가지고. 어느 누구도 자기가 안다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가요. 다만 구원해주시는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만 알고 가요. 그 말이 어디 나옵니까? 갈라디아서 3장에 나와요. "십자가가 눈 앞에 보인다."는 말은 은근히 책임을 누구한테 돌립니까? 지금 활동하시는 십자가한테 넘겨버리고 "나는 몰라." 하고 돌아앉는 거에요. 사도바울이 내뱉은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 보면 뭐냐하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나같이 십자가를 안 사람만이 우리끼리는 아는 이야기에요.
논리를 따지지 마세요. 그냥 알아요. "죄씻음?" 딱 들으면 알아요. 왜? 죄씻음 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행함이 아니고 그냥 믿음으로 의!" 그러면 아는데 꼭 이걸 따지는 인간들은 행함을 가지고 포기를 못하면서 어떻게 내 행함을 포기하고 의를 받아들일까 그 방법을 찾는데 그 방법 자체가 추가적인 행함이 돼요. 복음은 그냥 외침이고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맞아요. 그냥 소리에요. 그냥 외침이지 납득이 아니라니까요. 열두 제자를 보냈잖아요. 열두 명이 사람들에게 뭘 가르쳤습니까? 주님의 메시야 됨을 가르쳤잖아요. 그런데 설득시킨 거에요? 아니지요. "모이게 하신 것은 주께서 모이게 하셨습니다."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고 모였다가 다 흩어졌지만 하여튼 모이게 하신 것은 주님이에요.
한 가지 예를 들면 분명해질 거에요. 두 가지 예를 듭시다. 하나는 둘 다 이방인인데요, 벡부장을 봅시다. 백부장이 예수님보고 뭐라고 합니까?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나이다." 할 때 자기가 사전에 '요런 멘트를 날리면 주께서 나를 기뻐하실거다.'라는 생각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지금 그 백부장은 평소에 하는 일이 뭐냐면은 "앞으로 갓. 뒤로 돌아갓." 그것 하고 있다고요. 중대장이니까. 평소 하는 대로 부하들과 내가 이런 관계라면 주님도 이런 관계일 것이다. 하고 그냥 평소 하던 대로 단어를 구사해서 기껏 표현한 것이 "가라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나이다." 라고 했는데 주께서는 그 말 자체가 훌륭해서 칭찬하는 게 아니고 그 믿음 자체, 그런 고백이 나오는 원천 자체에 대해서 이미 주님께서는 알고 계신 거에요. 그 다음에 12년 동안 병든 여인이 뒤에서 옷가를 잡았죠? 뭐 지나 내나 예수님 옷 다 잡고 난리 났어요.
전부 "주여!" 하고 붙들고 환영인파가 난리에요. 그런데 몰래 쥐었거든요. 몰래 잡으면 구원받습니까? 앞으로는 본격적으로 주무르지 말고 몰래 옷가를 만지면 되겠네요. 어떤 방법, 행함이 없다니까요. 주께서는 일체 그런 것을 보지를 않아요. 쿧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왜 기도할 때 두 손 안 모았어?" "왜 안 꿇어앉았어?" "왜 이렇게 퍼져가지고 기도하는 거야?" 그런 걸 묻지도 않는다니까요.. 이미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중심을 보시고 특이한 것, 아담의 계통에서 나올 수 없는 특이한 계통, 그야말로 은혜의 계통에서 나온 것을 주께서 먼저 아셔요.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을 알아보기 전에 주께서 먼저 우리를 알아보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할 일은 없어요. 주께서 지금 중심을 다 보고 있는데 우리가 새삼스럽게 겸손한 척하고, 회개하는 척하고, 반성하는 척해보게 되면 오히려 주님보시기에는 가증하고 토하고 싶으실 거에요. "욱!" 제발 좀 그러지 말라는 거에요.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니까 "주여 어디가서 죽을까요? 아프가니스타에 가서 죽을까요? 이디오피아에 가서 죽을까요?" "그러지마, 그냥 니 집에서 TV 드라마 보다가 죽어." 뭘 그렇게 자꾸 어떻게 인공적으로 꾸미냐 말이죠.. 꾸미면 불연속이 되어버려요. 주님과 우리 사이는 연속이거든요. 그냥 밀려온 거에요. 주님의 성령이 끊어지지 않고 밀려왔는데 우리가 다다갈 때는 꼭 '오늘 기도는 여기까지. 오늘 성경 본문은 여기까지. 끝.' 접어가지고 성경본문은 내일 또 보고.
꼭 우리는 단절시켜요. 예배는 11시부터 12까지. 그 다음부터는 예식장에 참석. 우리는 단절시킨다고요. 예식장에 가면 주님이 거기에 안 계십니까? "언제 주님 예배 받으시고 언제 예식장까지 오셨습니까?" 이럴까요? 자꾸 시간과 공간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단절시키는데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원천을 주님처럼 묵시의 존재로 출발하기 때문에 현재 육신이 있으니까 자연적으로 우리는 욕망이 들끓어요. 여기에다가 뭘 겹치느냐? 주께서 포대기처럼 하늘에서 겹쳐버려요. 우리는 내 육신이 바쁘다가 성령께서 자극을 줘버리면 갑자기 육신의 것이 날아가 버리면 우리 빈자리에는 누가 보입니까? '아 이미 구원됐잖아? 미쳤어 왜 내가 고민했지? 행동 똑바로 할 걸. 그런 짓을 왜 했지. 후회된다.' 이런 말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또 발견 해야돼요.
그런데 그게 얼마 가지는 않지만. 다시 먹구름이 와가지고 돌아보면 또 돌아보면 '아이구 예수 믿습니다. ' 하고 예수 믿는다고 자기 자랑 하기 바빠가지고 이게 덮쳐지고.. 그래서 늘 주(성령)께서는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우리의 죄를 지적케 하십니다. 뭘로? 말씀(사도바울의 명령과 권면, 신구약 전체)을 가지고 우리를 늘 권면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이 땅에서 내가 예상 못한 특이한 존재로, 나도 감당이 안 되는 특수한 존재로 내가 벌써 달라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남한테 자랑해봐야 욕만 얻어 먹잖아요. 자랑하지 마세요. "니가 미쳤구나." 이렇게 됩니다. 그것을 글로 쓸쓴다든지 말로 할 때는 나오는 것이 "우리는 다 죄인이고 또 주님(십자가)만 보이거든" 하고 사도바울처럼 십자가 책임으로 넘겨버리세요. 십자가(+) 기호 믿으라는 것이 아니고.. 죽으신 분이 지금도 십자가 앞장세워서 활동하고 있다 이 말이죠. 나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숨쉬고 있고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주님 책임으로 넘기세요. 얼마나 전도하기 쉽습니까? "아이고, 집사님 제가 어떻게 구원받겠습니까?" "주께서 알아서 하실거에요." 이렇게 자꾸 주님한테 넘격버리세요. 좀 무책임해지세요. 오늘 참 좋은 말 나온다. 제발 우리 인생에 대해서 책임지지 마세요. 자기 인생에 책임지지 마세요. '내가 그때 딴 남자를 만났으면 가정생활이 행복했을 텐데..'라고 하지만 이런 남자 만나게 되어 있어요. 다른 남자 왔다가도 이 남자가 그 남자 죽여버리고 나한테 오게 되어 있다나까요.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의 선택이 아니에요. 주님의 선택이었습니다. 띠띠고 원치 않는 길로 앞으로도 갈 것이고 뒤에서 온 것도 마찬가지에요. 통째로, 회고적으로 종합해서 보게 되면 모든 것이 통째로 주님의 작품이지 내 작품은 요만큼도 섞이지 않았어요. 과속해서 5만원 뜯겼는데 딴 사람은 안 걸렸는데 하필 그때 순경이 용무 보다가 뒤돌아서가지고 내가 걸려가지고.. 모든 것이 경찰이 왜 있는가? 주께서 그 사람을 거기에다 박아놓으신 거에요. 돈 사랑하지 말라고 보이스피싱에 걸려가지고.. 그것도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에요.
오늘 본문 내용이 이겁니다. "너희는 나를 아느나?" 이 말이죠.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그래요? "우리는 우리를 안다." "니가 나를 모르니까 너를 안다는 소리가 나온다."는 말이에요. 우리가 자꾸 나를 알고 아는 나처럼 '저 사람을 한 번 분석해 볼까?' 이러니까 그 사람들이 예수를 못 믿는 거에요. 우리는 남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어요? 왜? 주께서는 그때그때마다 인간 자체를 자꾸 바꾸니까요. '내가 이런 짓을 했어? 내 입에서 요런 욕이? 나도 내 뜻이 아닌 것 같아.' 나도 몰라요. 몰라도 돼요. 주님 꺼니까. 주님이 자기 것을 마음대로.. 발만 씻겨준다고 베드로가 아는 척 했잖아요. "발만 씻기면 됩니까? 전신을 다 씻겨주셔야죠."
이것을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말씀과 연관시켜면 뭡니까? "오른손이 범죄하거든 찍어버려라. 오른눈이 범죄하면 빼버려라." 그런데 발만 씻겨버리면 더 이상 빼고 자시고 할 것이 없어요. 전체가 다 온전한데 왜 빼요? 여기서 온전하다는 말은 완벽하게 착하다는 말이 아니고 죄 짓는 데 앞으로 활용도가 있다는 말이에요. 니 오른눈 빼버리면 20년 후에 앞으로 죄 지을 거 죄를 못 짓잖아.. 그러니까 눈알은 박혀있어야 돼요. 박혀있어야 이 눈 가지고 나이 80 넘어서 죄 짓지.. 그러니까 주님이 하시는 일, 죄 짓는 일에 하나도 버릴 것이 없어요. 끝까지 죽을 때까지 치매 걸리면서도 지 자랑하고 끝까지 죄 짓는 거에요. 그런데 남들이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 있어요. 뭐냐? 그래도 십자가로 구원 받았다는 이 느낌. 이 느낌은 뭐지? 정말 이상합니다.
주께서 친히 우리의 역사를 매일같이 시간의 벽지를 지금도 뜯어내고 있습니다. "잊어라. 맡겨라. 이미 너는 내 것이다." 기도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참, 세상살이 하기 힘든 것이 자기 인생에 무책임한 것이 가장 힘든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 알았습니다.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세상한테 잘난 척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양념치고 요리한 우리 자신을 주께서 그것마저 알고 계시니 감사합니다. 십자가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