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에스겔 48:13-14 / 레위지파의 위상 본문
이근호
레위지파의 위상
본문 말씀: 에스겔 48:13-14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녹취:오용익
149강-에스겔 48장 13-14절(레위지파의 위상)150729-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48장 13-14절입니다. 구약성경 1229페이지입니다. 에스겔 48:13-14 “제사장의 지계를 따라 레위 사람의 분깃을 주되 장이 이만 오천척이요 광이 일만척으로 할찌니 이 구역의 장이 이만 오천척이요 광이 각기 일만척이라 그들이 그 땅을 팔지도 못하며 바꾸지도 못하며 그 땅의 처음 익은 열매를 남에게 주지도 못하리니 이는 나 여호와에게 거룩히 구별한 것임이니라.”
레위 인에게 땅이 주어지는 것은 레위인의 자격이 아니라 제사장이 그들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제사장은 다른 사람과 달리 하나님과 직접 상대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제사장이 하나님과 직접 상대했고 그 제사장과 하나님 관계가 정상적일 경우에만 그 나머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혜택을 입게 됩니다. 이 구조가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생각할 때는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관계인가, 직접 나서지 마시고 특히 나대지 마세요. 내가 나서서 천국을 운운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나를 대신 하신 분의 결정과 그분의 성취에 의해서 우리는 혜택을 입게 될 것입니다. 정말 천국에 간 사람은 “나는 못했는데 나대신 어떤 분이 하나님 앞에 천국을 이루는데 더 이상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모든 조건을 충족시켰다.”라고 고백하게 되어 있어요. 나는 아닌데, 내가 열심히 했다든지 혹은 내가 착해서가 아닌데 나를 대신하는 분이 그렇게 했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러한 고백에 대해서 사도행전 1장 8절에서는 ‘이것은 사람의 능력에 속한 고백일 수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개나 소나 예수증인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이 임해야 돼요. 성령의 능력이 임하게 되면 대표자, 자기는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앞에 거룩한 제사장으로서의 자신의 업무를 완수했고 그 덕으로 천국이 완성되었으며 우리는 그 그리스도 하신 공로를 인정하는 자만 그 나라에서 영원히 삽니다, 라고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나쁜 짓 하면 지옥 간다고 이야기하는데 사실은 그것은 정확한 말이 아니고요, 나쁜 짓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음으로 저주를 받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이유는 딱 한가지에요. 딴 게 아니에요. 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이 나 외에는 없기 때문에 지옥 가는 겁니다. 따라서 내가 나를 지극히 사랑한다면 천국은 다 갔습니다. 천국 못갑니다. 내가 나를 미워해야 되고 내가 나를 포기를 해야 되는데 그것은 중들처럼 도 닦는다고 될 일이 아니고 나대신 나설 분이 우리 앞에 성령을 통해서 등장할 때 자연스럽게 내 사랑에서 주님 사랑으로 바꾸어지게 되어 있어요.
바꾸어지느냐, 아닌가를 어떻게 확인하는가? 이 확인 작업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마귀들을, 귀신들을 풀어놓았어요. 귀신들을 풀어놓아서 귀신들이 성도든 누구든 간에 테스트를 해 봐요. “너 잘났지?” 아님 “너 못났지?” 이런 테스트를 해서 “그래, 나는 못났지만 우리 주님은 잘났어.” 이러면 그 사람은 천국 가는 사람이고 “내가 뭐가 못났는데?” 이렇게 나오면 자기 본색을 드러낸 거지요. 주님, 주님, 하지만 여전히 자기 자신만 사랑하고 있다는 본색이지요. 마귀의 활동이 그만큼 중요해요. 푹 쑤시면 그만 참지 못하고 자기 본색이 탁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대표적으로 목사한테 그런 경우가 많이 생깁니다. 복음 전한다, 뭐 한다, 우리 교회가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버리면 “그래,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주님이 최고야.” 이런 말이 나올 수 있는 목사가 있다면 아, 참 찾기 힘든, 보기 드문 역사입니다. 그런 목사 찾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힘든 게 아니고 아예 기대를 안 하는 것이 좋을 거예요. 그 정도로 성령 받은 사람은 정말 일반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아주 특이한 종족입니다. 어떤 분은 그걸 제 삼의 종족이라 하는데 그야말로 제 삼의 종족처럼 나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대신하기 때문에 예수님이라는 이름의 공동체도 주님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성도, 천국 가는 사람에게는 예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도 주님 이름보다 더 중요하지 않아요. 그래서 이런 사람을 ‘공동체 없는 공동체’라고 하지요. 기존의 공동체에서 쫓겨난 공동체. 어디가도 그 사람을 수용하거나 그 사람을 담아낼 수 있는 공동체는 성립되지 않는데 그들이 결국은 주님 앞에 공동체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실제적인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실제적인 공동체의 반대말이 ‘사실적인 공동체’라고 해서 눈에 보이는 제도적인 공동체, 이런 것을 말합니다. 제도적인 것, 집단, 그것에 소속되지 않지만 실제로는 주님 보시기에 이미 교회라는 거기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 이미 주님이 생각하는 교회에 소속되어 있기에 기존의 교회의 소속요구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사람, 기존의 교회 조직에 대해서 자유로운 사람, 그런 사람 역시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누구한테 갑 질 당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어떤 누구에게도 갑 질 당하지 않고, 자신이 누구에게 갑 질을 하지도 않을 뿐더러 갑 질 당하지도 않아요.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보편적인 특징이 하나 있어요. 성경 전체에서 나오는 그 느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성공한 예가 성경에는 하나도 나오지를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 열 가지 재앙을 받습니다. 애굽 사람들도 받고, 히브리 인들도 받는데 네 번째 재앙부터는 히브리인들에게는 오지를 않는데 어쨌든 이 재앙이 임했을 때에 히브리인들이 성공한 게 뭐가 있느냐는 겁니다. 주께서 재앙으로 폭격을 했는데 히브리인들이 결국 “그래, 성공이야!” 라고 할 수 있는 그 일, 그것을 사전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찾아오기 전에 예상했던 성공이 있었느냐 하는 겁니다.
그에 대한 정답은 ‘없습니다.’ 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조용히 애굽인으로 사는 그것이 성공인데 괜히 하나님이 끼어들어서 분란만 일으켰지요. 모세와 아론 보내서 가만히 살고 있는 사람들 들쑤셔 놓았지요. 히브리인들이 하나님 만나고 아무것도 사적으로 성공한 사례가 없어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이걸 왜 제가 이야기하는가? 오늘날 우리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그냥 조용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주의 성령 찾아와서 분산 떨고 분란만 떨었는데 정작 내가 은근히 노렸던 손에 쥘 수 있는 성공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뒤에 이스라엘이 억지를 내서 ‘그래, 애굽 사람하고 다르게 이런 점이 좋았어.’라고 내놓는다면 기껏 뭐냐? 전에는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출애굽 후에 동행했다는 겁니다. 그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그것이 하나님 찾아오기 전에 미리 자기가 고대하고 기대했던 그 성공사례였습니까? 아니지요? 아니지요. 말기 암 걸려서 교회 와서 금요철야기도 하는데 기도 하면서, “하나님, 주와 함께 동행만 한다면 암에 걸려 죽어도 좋습니다.” 이런 식으로 기도하겠어요? 은근히 뭘 노리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맞습니까? 진짜 하나님이 살아 있다면, 살아계신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저의 암을 낫게 하셔서 온 천하에 하나님 살아 계심을 증인으로, 주의 종으로 살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할 거라는 말이지요.
그것은 자기가 노렸던 성공이지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서서 된 우리가 원했던 성공사례,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실패라는 것, 우리가 생각했던 실패도 없어요. 그러면 뭐냐? 하나님이 히브리인에게 찾아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전혀 우리들이 원했던 일이 아니고 엉뚱한, 정말 난데없이 엉뚱한 짓을 주님께서는 우리를 가지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식으로 “너는 내 백성이다.” 하고 납치해버린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아브라함이잖아요. 아브라함이 평소에 우상 만들면서 거기서 살던 데로 살면 되는데 갑자기 하나님이 찾아와서 “너는 너의 본토 아비 집을 떠나라.” 하니 이런 난데없는 횡포가 어디 있습니까? 이건 난입, 또는 침입, 무뢰한, 무례하기 짝이 없는 무뢰한입니다. 예의 없는데 기존의 법칙에는 전혀 통하지 않는 무뢰한, 일방적인 횡포처럼 우리 인생을 끌고 가는 겁니다. 그것은 주님 앞에서는 “쉿!” 성공과 실패를 논하지 말라는 거예요. 성공 실패를 논하지 말라. 성공 실패라 하는 것은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정하지 네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 믿고 성공했다느니, 또는 하나님 믿고서 실패했다느니, 그런 옛적 사고방식은 우리는 발휘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천국이라 하는 것은 결국은, 제가 처음에 설교한대로 ‘어떤 분이 우리를 대신한다. 대신해서 천국을 이루었다.’라고 순하게 이야기했지만 지금 이 시점에 와서 천국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무례한 횡포를 일방적으로 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어요.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허락도 없이 그냥 우리 인생을 난입해서 강탈해버린 폭력적인 언행과 행사를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퍼부었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우리보고 “쉿, 내 앞에서 너는 성공이나 실패를 말하지 마.” 아예 성공이나 실패를 끄집어내지도 못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될 때 온전히 나대신 성사되는 낯선 세계가 되는 겁니다. 처음에 ‘나 대신 누가 이루었다.’ 할 때는 굉장히 기분 좋았지요. 현재 기존의 나의 세계는 그것대로 인정하고 내가 안 되는데 주께서 나 대신 해주셔서 내가 은근히 ‘이것은 이정도 해야 성공이지.’라고 기대했던 것을 주께서 응답해준다고 생각했는데 이야기가 진척되면서 기존의 내 세계를 몽땅 다 폐기처분, 내동댕이쳐버리고 우리가 예상도 못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게 되는 겁니다.
그 건설된 세계의 특징은 중앙을 바라보는 겁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과 관련되어 있어요. 에스겔 48장 8절을 보게 되면, “유다 지계 다음으로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너희가 예물로 드릴 땅이라 광이 이만 오천척이요 장은 다른 분깃의 동편에서 서편까지와 같고 성소는 그 중앙에 있을찌니.” 여기 보면 “성소는 그 중앙에 있을찌니.”라고 되어 있어요. 성소는 중앙에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지난 수요일에 말씀 드린 것인데 중앙에 턱 하니 자리 잡은 그 중앙의 기능으로 새로운 천국이 운영이 되고 모든 혜택을 입으면서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 중앙자리에 성소가 있는데 그 성소 주변에 뭐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성소 주변에 제사장이 있고 그 제사장 주변에 뭐가 있느냐? 레위지파가 포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뭐고 레위지파는 뭐냐? 보통 사람 같으면 궁금해 하지도 않을 문제지요. 그런데 뭔가를 궁금해 하는 사람한테는 이 질문이 있어야 돼요. 그게 뭐냐? “목사님, 날 대신했다는데 그 대신한 장치, 그 기계장치의 내부가 어떻게 되어있기에 ‘대신’이 가능합니까?”라는 것을 궁금해 할 때, 궁금해 한다고 치고 제가 지금 답변을 드립니다. 궁금하지도 않을 거지만 궁금해 한다고 치고, 대체 어떤 장치가 가동되었기에 ‘내 대신이 성사가 되는가?’라는 그것에 대해서 궁금해 하지도 않는데 답변을 제가 억지로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그렇게 하시기에 그렇습니다.
원래 제사장이 먼저가 아니고 레위지파가 먼저에요. 레위지파는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세 번째 아들입니다. 그 레위라는 아들의 후손을 레위지파라고 해요. 그런데 그 레위지파의 자손이 세 명이 있습니다. 게르손, 고핫, 므라리. 이렇게 세 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없네요? 제사장은 일단은 없습니다. 없는데 두 번째 아들인 고핫의 계보에서 아론이라는 자손이 나옵니다. 그 아론의 자손이 바로 제사장이에요. 게르손, 고핫, 므라리는 제사장 안 됩니다. 제사장은 고핫의 자손 가운데 아론의 계통만 제사장이 되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되면 안돼요. 제사장으로 인정을 받지를 못합니다. 레위지파라고 해서 다 급수가 같은 게 아니에요.
그렇게 되었다는 말은 고핫의 계통인 아론의 자손이 제사장이니까 레위 안에 제사장이 있다는 그 말과 같은 이야기로 보이는데 거기에 뭐 별 다른 게 있는가? 여기에 별 다른 것이 있어요. 왜 그런가? 여호수아에 보게 되면 땅을 분배하는데 분명히 게르손, 고핫, 므라리, 이 세 아들에게 줘야 하는데 아들이 하나 더 생겨버렸어요. 그래서 세 등분 되어야 할 것을 네 등분되도록 땅이 분배가 되는 겁니다. 손자를 마치 아들처럼 대우해서 네 등분해서 주는 거예요. 그래서 여호수아 21장에 보게 되면 총 42성+6성(도피성), 합해서 48개의 성읍을 열 두 지파 전역에 뿌려놓는 식으로 기거합니다. 마치 점점이 박히는 것처럼.
빵에 건포도를 군데군데 던지지요? 시루떡 위에 밭을 골고루 뿌리듯이. 음식을 다 해놓고 세프가 마지막에 뭐합니까? 마지막에 후추 뿌리는데 그냥 뿌리지 않고 후추병을 요란하게 흔들고 돌리고 춤추듯이 하면서 뿌리지요? 열 두 지파 있어봤자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정을 안 해준다는 겁니다. 열두 지파를 대신하는, 하나님과 이들을 대표해서 만나는 어떤 다른 지파가 없이는 다 죽는 거예요. 대신하는 지파가 있어야 됩니다. 후추같은 역할, 하나님과 만나서 맛을 내는, 하나님 보시기에 맛있게 드실 수 있는 음식이 되도록 맛을 내는 그 역할, 매개체로서 있는 것이 모세언약에 나오는 제사장언약, 또는 레위언약이라고 합니다. 레위언약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제사장이 있기 때문에 그렇지요.
제가 아까 드린 질문이 뭐냐 하면, 우리를 대신한다는데 “그냥 대신하는 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고 “대체 어떤 곳에서, 어떤 절차를 밟아서 나만 사랑하는 나를 대신해서 다른 분이 천국갈 수 있도록, 어떤 변화를 주었기에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 천국갈 수 있습니까? 대신했다는 그 과정에 어떤 요소와 어떤 조건과 어떤 내용들이 들어있습니까?” 전혀 궁금해 하지도 않지만 궁금해 한다고 치고 제가 답변을 해 드리는 거예요.
그리고 이것은 단지 궁금하다는 그 차원을 떠나서 우리가 흔히 ‘예수 믿는다.’ 할 때에 그 예수님이 우리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는가? 십자가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이 제사장과 어떤 연관성으로 완성했는가? 그것하고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절차, 그 내용이 아주 간단하면서도 핵심이 들어 있는 본문이 여호수아 6장 26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그 대목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둘째 아들)를 잃으리라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을 점령하시고 하나님이 친히 거기에 법칙을 만들었어요. “앞으로 누구든지 하나님이 무너뜨린 여리고 터에 택지개발해서 ‘터 좋다. 여기에 집지어야 되겠다.’ 하고 집 짓는 자는 그 집의 아들이 죽을 것이고 그대로 고집 부려가면서 문을 세울 때는 둘째 아들마저 죽을 것이다.”라는 맹세를 한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동행한다고 했잖아요. 동행할 때 동행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동행한다고 오해들을 하면서 동행해왔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을 준다고 하니 그들은 이렇게 오해했어요. ‘광야에 있으면서 살 곳이 없어서 허덕였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지금 살아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구나. 참 좋으신 하나님이다.’라는 식으로 오해해 왔던 겁니다. 그게 오해에요. 그게 오해라는 말이지요. 여리고성을 잘 지었잖아요. 그러면 거기 살던 거주민들을 다 죽이든지 쫓아내든지 하고 이미 잘 지어져 있던 그 멋진 성을 그대로 접수하면 될 텐데 그걸 무너뜨려 버려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인간들 본인이 ‘내가 살아 있는데, 살기 위해서는 집이 필요해. 양식도 필요해.’ 라고 하고 있는데,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은 집 지어야 되고 양식도 있어야 되고 이런 방법으로 나는 나를 사랑하고 있어.’ 라고 했는데 ‘마침 하나님께서 내 뜻을 아시고 우리에게 입을 것과 먹을 것과 거할 집을 주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 인간은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오해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하십니다.
죽은 자에게는 양식도 필요 없고, 집도 필요 없고, 그 어떤 것도, 물도 필요 없어요. 그래서 광야에 물도 없고 양식도 없는 겁니다. 죽은 자에요. 하나님 앞에서 동행한다는 말은 우리는 죽은 자로서 동행하는 겁니다. 살아 있는 나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고 죽은 나를 대신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거예요, 수년, 수십 년 동안 교회를 잘못 알았다면 오늘 바꾸세요. 오늘 바꾸시기 바랍니다. 이거 안 바꾸면 천국인줄 알고 문 열었는데 지옥불이 확, 들이닥칠 겁니다.
하나님은 내가 나를 사랑하는 사랑을 일체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범죄로 간주합니다. 죄로 간주해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죄를 더 짓게 하기 위해서 법을 주신 거예요. 법을 지키는 방법은 딱 한가지입니다. 죄를 짓는 거예요. 법에게 복종하는 것이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죄를 짓는 것이 법에게 복종하는 거예요.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보면 볼수록 없던 죄가 자꾸만 생겨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게 즐거움이어야 돼요.
어디까지 즐거움인가? ‘나는 진즉에 죽어 마땅하구나.’ 그것을 아는 즐거움까지 혜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을 만날 때 야곱은 오해했지요. 나를 살려줄 것이라고. 그런데 그 하나님이 나를 죽이러 왔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습니다. 야곱은 죽고 다시 이스라엘로 태어나게 해주시는 겁니다. 야곱은 잊어야 돼요. 야곱은 죽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내가 나를 사랑하는 자는 들어갈 수 없는 거예요. 천국은 동행하시는 분의 나라이지 동행되고 있는 내 나라 아니거든요.
우리가 그 나라에 가려면 내 나라, 내가 살고 있는 곳, 내가 행복한 곳, 그 행복이라는 그것을 누가 찢어줘야 하고 그 찢어주는 그분이 나를 대신하시는 분입니다. 내가 찢지 못하는 내 행복, 내가 스스로 죽지 못하는 나의 죽음을 말씀으로 죽여주시고 찢어주시니까 그 찢어주시고 죽여주시는 덕분에 우리는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나의 성공에 목말라 했던 그것이 없어지면서 그 없어진 그 현장에 내 대신 나를 구원하신 분이 제시되는 그분의 천국, 그분의 나라가 우리 앞에 등장합니다. 그래서 구원되는 거예요.
여리고성을 함락해놓고 거기에 다시 짓는 자는 죽는다는 말은 여리고성 짓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여리고성을 밟고 가나안 땅으로 더 진격해야 될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다 같이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이 세상, 이 가나안땅이 내가 살 땅이라고 생각한다면 다 죽는다는 말입니다. 그 인간은 이 땅에 못살아요. “젖과 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것은 애굽에서나 찾아라. 너희들이 기대하는 젖과 꿀은 여기 없다.”
혹시 거리에 제과점 이름이 ‘가나안제과점’이라는 간판이 보이거든 독약 판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젖과 꿀이 흐르는 제과점이 아니고 독약 팔고 있는 거예요. 농약 있잖아요. 상주의 할머니들 먹고 죽은 그 농약, 농약을 죽 진열해 놓았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죽을 수만 있다면 그게 사는 길입니다. 어떻게 죽을 수만 있다면……. 그런데 여리고성을 누가 죽였는가? 누가 망하게 했는가? 여리고성이 자살한 게 아니거든요.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여리고성을 뭉개버렸습니다.
따라서 동행하시는 분에 의해서 뭉개지게 되면 그 사람은 동행하시는 분의 천국에 함께 살 수 있는 대상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약속의 땅이 천국 되는 방법은 뭐냐? “네가 살고 싶으냐? 내가 대신 살려줄게.”가 아니라 “네가 스스로 못 죽잖아. 내가 너 대신 너를 죽여주는 분을 내가 뽑아 놓았다.” 그들이 바로 레위인이고 제사장들이에요. 그 제사장들은 뭘 하느냐? 인간을 죽이는 작업을 그 중앙부분에서, 성소부분에서 흠 없는 양을 가지고 계속 아침저녁으로 반복해서 양 죽이는 모습으로 사람 죽이는 작업을 한 겁니다.
연기가 피어오르지요? 불꽃이 피어오르고. 특히 7월 되면 나팔을 붑니다. 7월 1일 나팔절, 빰파라밤빠빰~! 나팔을 불어요. “하나님의 대신하는 제사가 온전해서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 앞에 죽은 자로 간주되었음을 축하드립니다. 이제부터 이 가을 결실기에 약속의 땅에서 많은 결실물, 무화과열매와 포도열매가 나올 텐데 이것은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양식, 하나님이 배급 주는 하나님의 음식, 하나님이 영생 얻기 위해서 먹던 그 음식을 이제는 화목제물로 나눠줌으로써 하나님이 영생 얻는 것처럼 너희도 이 양식 먹고 영생 얻어라.” 해서 하는 절기가 대 속죄일이고 하나님의 나팔 절이고 주의 절기입니다.
그들은 그걸 먹을 때마다 ‘우리가 이것 먹고 영생 얻었구나. 우리가 주님 먹는 이 음식에 참여되었다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우리가 드린 것이 아니고 우리가 드렸다 할지라도 우리가 드린 것은 죽고 똑같은 양식이지만 그것이 죽고 그 죽은 것을 하나님의 음식으로 받아들인 표시를 갖고 다시 우리에게 찾아온 그 음식, 그 음식을 제사장이 먼저 먹고 그 다음에 백성들도 함께 먹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중앙부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중앙이 현재 우리 삶의 상태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의 중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 얻는 말이 바로 그거예요. 제사가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사가 일어나는 우리의 몸을 가지고 성소라고 합니다. 성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중앙부분의 제사를 이렇게 하실 때 레위인과 제사장들을 48곳으로 퍼지도록 열 두 지파 속에 다 뿌렸다고 했지요? 요리하는 셰프가 후추 통을 들어 흔들어대면서 후추를 막 뿌리듯이 그렇게 한다고 했지요?
맛을 내기 위해서 죽음의 맛을 뿌리는 거예요. 죽음의 맛을 뿌리는 그것이 이 세상 사회 속에 속속들이 스며들기 위해서 주께서 또 내놓은 장치가 있어요. 그게 뭐냐? 도피성이라는 겁니다. 도피성의 내용은 두개가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는 고의로 사람을 죽인 것과 고의가 아니 상태에서 사람 죽인 것을 날카롭게 대조를 시켜놓고 있습니다. 고의로 사람을 죽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 살인자에게 분노가 있다고 표시를 해요. 어떻게 하는가? 어떤 사람이 전혀 살인의 고의가 없어요. 그저 휘파람을 불면서 도끼질을 하고 있었는데 도끼자루가 빠지면서 도끼가 날아가더니 길 건너 밭에서 김매던 할머니, 그것도 내일 돌아가실 수도 있는 93세 되신 할머니 이마를 정통으로 때려서 숨지게 했다는 말이지요. 전혀 고의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고의라 하는 것은 ‘내 손에 죽어봐라.’ 그거잖아요. 고의가 아닌 것은 아무 원한 없이 죽인 거예요. 문제는 그렇게 죽어버린 그 할머니의 가족들이 분노를 가지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사적인 분노가 발생되었다는 그것은 바로 계속해서 제사장의 대신 죽음이 없이는 이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의 생명을 맛 볼 수 없는 땅임을 보여주는 겁니다. 따라서 어떤 인간도 하나님이 함께 있는 이 땅에서 분노하거나 화내거나 복수의 자격과 권리는 일체 없습니다.
얻어먹고 사는 주제에 화를 낼 것이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죄를 모르지요. “은혜로 삽니다.” 해놓고 누가 던진 신발에 얻어맞으면 화나지요. 그 분노, 그 분노마저 제거할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그 책임자 대 제사장이 책임지고 해야 돼요. 이스라엘 나라 그 시대의 대제사장이. 도피성으로 도망을 해야 돼요. 여섯 곳에 있는 도피성에 가게 되면 죽었던 할머니 가족들이 복수의 칼을 쓰지는 못한 채로 그저 으르렁 거리면서 “나오기만 해봐라. 죽기고 말테다.” 이런 식으로 분노하는 거예요. “으르렁! 으르렁!” 엑소라는 가수의 노래도 있지요.
그런데 그 제사장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일체 복수할 수 있는 권한이 없어요. 제사장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그것은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이 땅에서 손해를 당했는데, 누가 사기를 쳤는데, 화가 나는데 하나님이 동행했다는 의미가 뭐냐는 말이지요. 내가 그 사람에게 분노할 권리나 자격이 있느냐는 겁니다.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님이 계시다면 대제사장 예수님의 존재를 다시 한 번 의식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 사기를 당한 거지요. 예를 들어 애가 세월 호 사건으로 빠져죽었다든지 그런 것.
그걸 부각시키는 겁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죽고 난 뒤에는 부지중에 할머니를 죽게 한 그 사람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냥 도피성 밖으로 나와요. “5년 전에 네가 우리 어머니 죽였잖아.” 하면 “그것은 제사장에게 물어라.”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하나님한테 물어.”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너희들로 하여금 내 어머니를 죽인자라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복수하거나 화낼 자격과 권리가 없다.” 하는 사실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대제사장의 존재감을 느끼면서 우리가 어떤 땅에 살고 있느냐, 우리는 지금 어느 곳에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사기당하고, 손해보고, 실패를 하고, 내 뜻대로 안 되는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겁니다.
제사장의 존재가 내 실패보다 더 월등하고 소중하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레위지파, 제사장입니다. 오늘 에스겔에서는 48곳이 아니고 아예 중앙에 터 잡았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제는 영원하게 확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터도 여호수아 때의 그 2천척보다 더 커요. 12.5배나 면적이 넓습니다. 완전히 중앙에 터 잡고 있어요. 그것이 뭘 의미하는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하고 우리를 주안에서 영생을 주는 일을 이미 확정했다는 사실을 에스겔이라는 이 복음을 통해서 미리 그 당시 사람들에게 알려준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레위지파, 제사장, 이런 장치들이 왜 꼭 있어야 되는지를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그냥 예수 이름만 주문처럼 외우면 되는지 알았는데 그리스도 안에 주님만의 레위지파, 제사장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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