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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에스겔 47:13-14 / 땅 분배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에스겔

에스겔 47:13-14 / 땅 분배

정인순 2015. 7. 8. 23:21

 

 

이근호

음성 동영상 유튜브

 

땅 분배

2015년 7월 8일                           

 

본문 말씀: 에스겔 47:13-14

(47:1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이 지계대로 이스라엘 십이 지파에게 이 땅을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되 요셉에게는 두 분깃이니라

(47:14) 내가 옛적에 맹세하여 이 땅으로 너희 열조에게 주마 하였었나니 너희는 피차 없이 나누어 기업을 삼으라 이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되리라

인간은 땅과 더불어 살게 되어 있습니다. 땅없으면 살기 힘듭니다. 땅의 유무가 곧 생명과 죽음의 묘사하는 방식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활동과 그 결과를 표현하는데 있어, 땅에 예속되는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현 형편을 활용하십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한계있는 인간의 실정도 아울러 말해주는 것이 됩니다. 

인간의 한계는 땅과 무관하게 생명을 갖고 계신 분의 등장으로 드러납니다. 모든 인간은 땅 없이는 못살지만 특별히 인간 속에 섞여 들어오게 되시는 중보자는 도리어 땅을 버림으로서 생명을 표현하는 방식을 보여주십니다. 이로 본건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땅 분배’는 인간의 한계성 안에서 생명을 묘사하는 방식의 일환입니다.

즉 땅 위의, 그리고 땅과 더불어 존재하는 인간에게 있어 과연 영생이 가당치나 한 것일까요? 구약은 조건 안에서 생명이 나타나게 됨을 말해줍니다. 그 조건이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언약에 준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과 거주하시게 되는데 이 백성들이 바로 ‘이스라엘’이고 그 거주지가 바로 ‘성전’입니다.

하지만 성전은 이미 불타버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바벨론 나라에 붙잡혀 가면서 하나님의 땅은 황무지가 됩니다. 죽은 땅이 됩니다. 여기에 사람의 손에 세워지지 않는 성전이 등장하면서 거기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고, 죽었던 땅이 생명을 되찾고, 하나님의 은혜로 포로된 데서 돌아온 백성에게 이제는 땅이 배급됩니다.

이로서 땅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거주하신다는 조건 하에 거주할 땅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겨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땅 배급 순서에 있어 민수기 34장에 나오는 땅 배급과 다릅니다. 거기에는 동→남→서→북 순서로 제시됩니다. 하지만 에스겔 47장에서는 북→동→남→서입니다.

이는 처음 출애굽 때는 애굽에서 해방된 집단으로서 약속의 땅에 입성하지만, 마지막 출애굽은 북쪽 제국인 바벨론 쪽에서부터 해방된 집단으로 약속의 땅에 입성하기 때문입니다. 원래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내려준 축복의 선물로서 제공되는 겁니다. 잃어버린 적이 있는 자만이 약속된 은혜에 들어가야 될 자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12아들은 모두 균등한 처지에서 땅을 분배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땅을 배당받는 입장에서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공로나 성과에 입각해서 더 달라고, 다른 아들과는 차이나게 달라고 요구할 입장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땅은 모두 ‘은혜 받은 처지’에서 균질성을 갖추게 됩니다.

이는, 약속의 땅 위에서의 생존이 결코 ‘땅 소유’만으로 다 해결이 가능하는 것이 아니라는 요소를 유지해야 합니다. 즉 아무리 사람들이 노력을 해도 그 해 농산물을 내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율법 준수와 관련있기 때문입니다. 레위지파의 제사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약속의 땅은 언제든지 재해나 가뭄이나 전쟁으로 인하여 약속된 생명이 보장받지 못하게 됩니다.

바로 이점을 인하여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땅의 의미는 단지 소유성으로 확정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정적으로 다른 요소가 개입됩니다. 그것은 바로 천국의 원리성입니다. 즉 천국의 원리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땅에서 저주가 덮힙니다. 이처럼 한계 있는 인간의 몸을 가지고 표현되는 생명의 모습은 생존의 힘겨운 과정을 가지고 나타냅니다.

이 천국의 원리는 야곱 언약에 실려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성전에서 이 천국의 원리가 외부로 표출이 되면 그 표출된 결과물로 인하여 성전의 주변의 땅 배분에도 그 결과가 드러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는 ‘요셉 지파에게 제공되는 두 분깃’입니다.

2지파가 똑같은 권한으로 땅을 분배받는 것이 아니라 이 균질성이 깨어지고 독보적으로 요셉지파의 땅이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진정 생명이 유입된 근거로서 그 지파가 작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38장에서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다른 아들과 같은 대우를 해주겠다고 선언합니다.

바로 여기에 ‘천국의 원리’가 들어있습니다. 곧 ‘대신 죽은 자만이 생명을 얻는 원리’입니다. 참으로 억울한 죽음을 경험한 자에게 천국의 원리가 실려있다는 말입니다.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 언약의 실현 방식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언약 실현은 하나님 몫이었습니다. 야곱은 단지 정말로 평생 사랑했던 라헬이 낳은 맏아들입니다. 따라서 유난히도 다른 자식보다 요셉을 더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사랑하는 자를 잃어버리고 죽을 때, 비로소 야곱의 언약을 성취의 노선에 접어들게 됩니다. 잃어버린 아들 당사자인 요셉은, 왜 자신이 억울한 인생 여정을 보내야 하는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갈수록 억울한 일이 자꾸 생깁니다. 형들에게 당했던 그 억울함과 자신이 충성한 보디발의 집안으로부터 억울함과 자신의 도와준 신하로부터도 배신당하는 억울함이 그런 것들입니다. 하지만 요셉 덕분으로 주변은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됩니다. 결국 요셉은 본의 아니게 세상을 살리기 위한 희생자의 운명을 보여주게 됩니다.

총리가 되어 형들 앞에서 설 때에도 요셉은 오직 하나만 생각합니다. ‘죄인을 위해 억울하게 죽은 죽음 앞에서 한 마음이 될 수 있는가’를 형들의 행동 속에서 타진합니다. 요셉은 자기 동생, 베냐민을 다른 형들이 어떤 식으로 대하는지를 주목합니다. 그리고 그 베냐민마저 일부로 인질 삼을 때, 형들의 반응을 살핍니다. 과연 형들이 전에 요셉 자신을 죽이도록 내친 그 죄에 대해 일치된 아품을 갖고 있음을 발견할 때, 비로소 요셉은 형들 앞에 자신의 정체를 밝힙니다.

후에 야곱에 합류하면서, 야곱은 요셉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사랑하는 독자를 죄인을 위해서 내어주신’ 하나님의 심정을 담은 언약이 곧 야곱 언약임을 알게 됩니다. 언약의 실현은 하나님 자신의 몫이었던 것입니다. 이점을 이스라엘 대대로 심어놓기 위해 요셉의 두 아들을 마치 자신의 두 아들로 여기고 약속의 땅에 요셉 지파에는 두 몫의 지분을 할당하기를  축복합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의 원리입니다. 천국은 인간의 몸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 중심으로 형성되기에 참된 영생의 영광된 광경은 사람의 언어로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 12:4)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매일같이 십자가의 대신 희생의 피 덕분에 살고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녹취:오용익

146강-에스겔 47장 13-14절(땅 분배)150708-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47장 13절-14절입니다. 구약성경 1228페이지입니다.

에스겔 47:13-14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이 지계대로 이스라엘 십 이 지파에게 이 땅을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되 요셉에게는 두 분깃이니라 내가 옛적에 맹세하여 이 땅으로 너희 열조에게 주마 하였었나니 너희는 피차없이 나누어 기업을 삼으라 이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되리라.”

 

새 성전이 마련된다는 것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흔들릴 필요도 없고 하나님에 의해서 완전한 백성이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자체가 문제가 되었던 것이 우상숭배 때문이었습니다. 우상숭배로 인하여 그들과 함께 있었던 하나님의 거주지, 성전은 불타버렸습니다. 성전이 불타버리면 더 이상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지요.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집단에 불과하고 사람들의 집단이라 하는 것은 천국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항상 천국이라는 것은 두세 사람이라도 주의 이름이 함께 있어야 돼요. 수천, 수만, 수십만 명이 모여도 거기에 주님이 함께 있지 아니하면 그것은 그냥 사람 모임입니다. 지옥 가보세요. 인간들끼리만 있지요. 거기서 자기자랑만 하는 거지요. 그러나 만약 주님이 함께 있다면 사람들은 주님만 쳐다보게 될 것입니다. 바로 교회라는 곳이 사람들만 있는 곳이 아니고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주님을 이야기하고,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에 의해서 모이게 된 그 모임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가 사교단체라든지, 친목모임이라든지 그런 식으로 전락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전이 완성이 되었다는 이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초청했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성전만 달랑 두고 “너희들이 알아서 성전으로 찾아오너라.” 이렇게 일 하시는 것이 아니고, 성전에서 뭐가 자꾸 나와요. 물이 나와요. 그런데 그 물은 죽은 자도, 죽은 사해바다도 살릴 수 있는, 생명을 주는 물이 나오는 성전입니다. 이전의 성전은 뭐냐? 만들어놓고는 인간들이 그 성전을 관리해야 되는데, 이번에 완성된 성전은 뭐냐? 사람이 관리할 필요가 없고 성전이 죽은 자를 살려냅니다.

 

그래서 성전근처, 성전과 함께 있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 새로운 피조물만 옹기종기 거기에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오늘 본문을 보면, 땅 분배가 제시되는 겁니다. 이 본문에 의하면 땅이 주어지니까, “목사님, 우리가 천국가면 땅을 분배받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는데요. 구약에 나오는 땅을 비롯한 모든 표현들은 지상의 인간들의 몸이 살고 있는, 몸이 처해있는 이 배경, 환경을 한계로 잡아서 그 속에서 구원의 완성을 표현하는 방식들이 이 방식입니다.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그 땅이 있잖아요. 땅이 있음으로서 인간은 생존하는데 하나님께서 같이 거주하시면 그 인간의 생존을 뭘 로 보느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지상적인 한계, 지상적인 제한된 범위 내에서 생명을 생존 식으로 표현을 해 주는 겁니다. 인간은 몸이기 때문에 창세기 3장에 의하면 땅 없이는 못살거든요. “땅 있어야 살지?” “예, 땅 있어야 삽니다.” “땅 주면 너희는 뭘 느끼는가?” “땅 주면 우리는 생존을 느끼고 생명을 느낍니다.” “그렇지? 그 땅 내가 줄게.” 그렇게 되는 거예요.

 

“야,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는 물이 나오고 그 물은 생명수가 되고 그래서 우리는 생명을 얻는다.”라는 이런 모든 표현들이 무엇에 집중하는가? 인간의 죽은 몸이 어떻게 살아나는가? 죽을 몸이 어떻게 생존이 되고 생명을 얻는가? 그것을 표현하는데 몸을 중심으로 한 한계 있는 표현이 되는 거예요. 만약에 이 몸이 예수님의 몸으로 바뀌어버린다면 더 이상 지상에 있는 땅이라든지, 지상의 흙에 속한 몸이라든지, 그런 식으로 표현을 하지 않습니다. 그 때는 뭐냐? 이 땅에서 벗어나서 예수님 몸의 영광에 부합되는, 천사들이 함께 살 수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의 표현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완성, 생명을 설명하게 되는 겁니다.

 

본문은 지금 구약이니까, 아직도 예수님 몸이 도착하지 않았으니까, 인간의 몸이 있으니까 인간의 몸으로 표현될 수 있는 생명은 뭐냐? 물이 있어야 되고, 땅이 있어야 되고, 그런 식으로 해서 ‘아하,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실시되고 완성될 때 우리에게 제공되는구나. 땅도 분배받는구나.’라고 표현방식이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옛 몸에 합당한 옛 하늘이고 옛 땅에 해당되는 겁니다.

 

이제 인간의 몸은 흙이 되어 사라지고 예수님의 몸이 인간의 몸이 된다면, 인간의 몸으로 다시 바꾸어진다면 그 때는 생명의 표현이 지상의 땅 분배라든지, 물이라든지, 이런 식으로는 표현하지 않지요.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는 겁니다. 땅 분배하다니까 이스라엘에 비행기 타고 가서 부동산 등기해놓아야 되겠네요?

 

방금 한 말을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고 난 뒤에는 이 자연세계의 중심은 인간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기 때문에 모든 만물이 인간의 손에 지배되고 다스려집니다. 인간의 몸이 범죄 했기 때문에 저주가 피어나는 이 땅과 함께 부대끼면서 살아야 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이 스스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무엇이 삭제 당하느냐 하면, 중보자의 의미가 누락이 돼요. “어쨌거나 밥 먹고 살아야지.”라고 무심코 내뱉는 말 속에서 중보자가 살려준다는 내용은 날라 가버린 거예요.

 

중보자라는 것은 신약 때에 와서야 예수 그리스도로 구체화되잖아요. 그런데 구약에는 중보자가 어떤 식으로 오느냐 하는 겁니다. 노아 때는 중보자가 방주의 모습, 정확하게는 방주 안에 있는 정결한 짐승의 모습으로 왔지요. 모세언약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죽는 희생양의 모습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약속의 땅에서 그들이 봄, 여름, 가을, 겨울, 소산물을 내는 것은 중앙의 제사제도가 원활하게 이루어질 경우에만 국한되는 것이지, 자기들이 자기 몸 가지고 아무리 땀 흘리고 열심히 해도 가뭄 들고 전쟁 나버리면, 병마가 덮쳐버리면, 그들이 원한 생존, 생명을 얻는데 필요한 양식을 얻지 못합니다.

 

구약에서 양식이라 하는 것은 모세에게 내려준 모세율법, 그 율법이 원활하게 가동이 될 때 율법과 더불어 그들은 곡식과 양식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구약의 중보자적인 기능이에요. 지금은요? 지금은 그 노아언약, 모세언약의 완성이 뭐냐?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의 십자가, 그 피와 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약을 맺은 것이 새 언약인데 그 새 언약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단비를 주시고 이 땅에서 생존을 주시는 겁니다. 새 언약 때문에.

 

이 땅에서 하루하루 살고 밥 먹고 사는 것도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덕분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성령을 통해서 알 수 있고요, 성령을 받은 성도는 하루하루 사는 것이 주의 은혜 없이 살 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성령을 받기 전에도 겨울에는 눈이 왔고, 여름에는 비가 왔고, 평소에 햇빛이 비취고, 공기가 신선하고, 이 모든 것이 십자가 믿기 이전부터도 이미 십자가의 은혜와 자비요 그 은총을 받고 있었던 겁니다.

 

그 사실을 알고 영원토록 그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성도 아닌 사람, 다시 말해서 지옥 가는 사람은 은혜는 받아 놓고 자기가 잘나서, 자기가 그런 것을 받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막 우기는 거예요. 아까 제 메일에 어떤 분이 이 질문을 했어요. “십자가 지기 위해서는 가룟유다가 필요한데 가룟유다를 하나님께서 만들어서 예수님을 팔아먹으라고 했으니까 가룟유다 입장에서는 지옥 가는 것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자기가 일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데 일한 자기는 지옥에나 가면 손해되는 것이 아닙니까?”라는 질문을 해요. 할 수 있는 질문이에요. 제가 답변했지요. 이 세상에 억울한 사람은 주님밖에 없다고요.

 

억울하다는 경우는 나에게 살 권리가 있고 내게 천국 갈 권리가 있을 경우에만 억울하다는 말을 써야 하는데 이미 창세기 3장 28절에서 하나님께서 추방시킨 입장에서는, 흙이 될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억울하다 하는 것은 자기 주제파악을 못해서 그래요. 인간은 살 권리라는 게 없습니다. 이 땅은 왜 있느냐 하면, 죽으라고 있는 땅이에요. 죽으라고 있는 땅에서 “목사님, 죽어라고 일하는데 왜 이렇게 힘듭니까?” 그게 그 땅의 속성이라니까요. 죽으라고 있는 땅인데 살면 되겠어요?

 

이스라엘은 왜 살았습니까? 중보자 때문에 살았지요. “중보자가 그들에게 곡식을 주셔서 잘 되게 했으면 우리에게 곡식을 주셔야지요.” 구약 때는 인간의 몸을 가지고 영생을 표현하기 때문에 생존을 인간의 생명과 결부시켰지만 이제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는 “죽어라! 나와 함께 죽으면 낙원에 간다.”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구약 때의 표현과 달라요. 구약시대는 특정 지역에 성전이 있었고 특정지역의 땅이 분배되는 표현방식을 사용했지만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1) 했습니다.

 

하늘에 땅이 있을 것이 아닌가, 라고 따지신다면 하늘에는 땅이 있는 것이 아니고 원리가 있지요. 이 지상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천국의 원리를 끄집어내서 그 천국의 원리를 성경으로 표현할 때는 모든 언어를 이 지상의 몸이 사용하는 언어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단어는, 인간의 몸이 있기 때문에, 몸과 몸이 주고받으면서 사용하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그 표현자체가 마치 지상에 실제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는 그 원리만 뽑아내면 그만이에요.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천국은 그런 것이다.” 그 원리만 뽑아내면 되는 거예요. “포도원에 나중에 들어온 사람이 천국에 갔습니까?” 그런 것은 묻는 것이 아니에요. “보물을 찾은 그 농부는 천국을 얻었습니까?” 그렇게 묻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농부라든지, 땅, 보물, 밀알, 가라지, 이 모든 것은 원리를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한 거예요. “좋은 고기 나쁜 고기를 분리시킨다.” 그러면 우리가 이제부터 고기가 되어야 합니까?

 

율법 자체가 그래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 이런 모든 말씀이 우리가 몸을 가졌을 그 당시에 “이 복이라는 것이 중보자를 통해서 주어진다. 다시 말해서 그 당시에 언약, 율법이라는 언약, 제사 언약을 통해서, 레위언약을 통해서 주어지게 되어 있지 네가 네 스스로 노력한다고 해서 복이 오는 것이 아니다.” 그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십일조나 안식일을 설명한 거예요.

 

그것이 신약에 오면 모든 것이 예수님이 흘린 피와 찢긴 살로 말미암아, 그 살과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땅에서 밥 먹고 산다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영생을 얻는 거예요. 죽어도 살아 있고 살아도 살아 있고 그런 영생입니다. 이제는 밥, 보리 섞은 건강식 먹고 살고, 그래서 건강이 좋아지는 식의 목숨이 아닙니다. 이 목숨 없어도 얻어진 목숨, 영생, 그것은 아담에 속한 목숨이 아니고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생명이 되는 그런 방식인 겁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그 원리를 뽑아내는 거예요.

 

우리는 왜 좋은지 압니까? 그 원리가 뽑히기 위해서 존재하는 거예요. 설탕 부어서 뱅뱅 돌려서 나오는 솜사탕 있지요. 그 솜사탕이 천국이라면 우리는 거기에 투입되는 설탕쪼가리에요. 에스겔에 나오는 이 모든 표현들은 그 당시에 이스라엘을 배경으로 해서 인간의 몸이 땅 없이는 못사니까 새로운 땅을 줘서 “이제 숨 좀 쉬어야지. 이 땅이 다 새 성전에서 나온 거야.”라고 이야기한다면 그 새 성전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고 그 물은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성령의 물, 또는 성도를 통해서 나오는 성령의 물을 이야기하고 거기서 분배된 땅은 바로 하나님의 기업, 천국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의미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천국의 원리를 뽑아낸다는데 땅 분배하면서 어떻게 그 원리를 뽑아냅니까?” 그것이 13절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십 이 지파에게 이 땅을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되 요셉에게는 두 분깃이니라.” 열두 지파에게 땅을 나누는데 요셉에게는 두 분깃, 곱 배기를 주는 이것, 이것이 천국의 원리입니다. 곱 배기로 땅을 준다고 했는데 열 두 아들에게 골고루 축복이 돌아가야 되겠지요. 열두 명에게 골고루 돌아간다면 이것은 균질한 땅이지요. 균질성, 균등한 성질을 갖고 있는 땅이 되는 겁니다.

 

균질한 땅에서 어떤 인간이 곱 배기, 두 배나 받아버리면 그 균질성이 깨지면서 다른 지파는 이 두 배를 받는 지파에 예속이 되고 종속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 땅의 분배가 48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을 분배하는 그 방향을 보게 되면 민수기 34장에서 장차 여호수아를 통해서 땅을 분배하는 그 순서하고는 달라요. 에스겔 47, 48장에서는 북쪽, 동쪽, 남쪽, 서쪽으로 분배가 되어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처음에 민수기에서 땅 분배할 때는 밑에서, 애굽에서 올라왔지만 이번에는 바벨론에서부터 내려오는 방향이에요. 전에는 애굽에 포로 되었다가 해방되었지만 에스겔은 바벨론에 포로 잡혔다가 해방이 돼요. 그래서 북쪽에서부터 내려오면서 땅 분배가 되는 겁니다.

 

애굽에서의 출애굽의 그 내용을 통해서 어린양의 피로 용서받는 것에서도 중보자의 원리를 뽑아낼 수 있지만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요셉의 지파가 곱 배기를 받는 그것도 출애굽의 원리로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여호수아에서 보면 진짜 요셉지파가 곱 배기를 요구해요. “두 배 줘.” “약속대로 주마.” 그렇게 됩니다.

 

이것은 뭘 의미하는가? 아까 말 한대로 이 세상 모든 것이 균등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균등하지 않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똑같은 인간들이냐?” “예, 똑같습니다. 하늘나라도 다 똑같습니다.” “그러면 다 죽여라.” “왜요?” “나는 똑같은 인간들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 가운데 독특한, 하나님의 언약대로 산 인간을 찾고 있다.”

 

예수님이야 처음부터, 오실 때부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다른 인간들과는 완전히 다르지요. 그래서 이름도 ‘인자’가 돼요.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이에요. 그 뉘앙스가 뭐냐 하면, 사람인 듯, 사람 아닌, 사람 같은 사람? 사람 아니면서도 사람이어야만 했던 이유, 따라서 그 인자가 인간들 속에 섞여버리면 인자만이 인간이 되고, 동시에 모든 인간이라고 우기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고 흙이 될 수밖에 없는, 죽어야 마땅한 죄인으로 들추어내는 하나님의 마지막 언약작업을 위해서 동원되어야 하고 사용되어지는 겁니다.

 

인간 하나하나가 하나의 의미, 단어라고 보면 돼요. 하나님이 쓰시는 소설의 하나의 점, 따옴표, 단어, 문장, 이런 것으로 보면 됩니다. 그 모든 부호와 단어들, 바로 인간들은 전부 다 독특한 인자,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피조물로 만들어진 거예요. 그러니 인간에게 무슨 권리가 있습니까? 권리라는 게 없지요. 신약에서는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아까 그 질문했다는 분이 또 이렇게 물었어요. “그러면 어떻게 행해야 됩니까?” 인간이 행한다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행해버리면 반드시 중보자의 의미가 여기서 빠져버려요. 그래서 제가 답변을 이렇게 했습니다. “인간은 행하는 것이 아니고 질질 끌려가는데 방향성이 문제입니다.” 가만있어도 행함이 되기에 이렇게 해야 돼요. “이 행함은 누굴 위한 행함이냐? 그 방향이 누굴 위해서, 누굴 바라보라고 일어난 행함인가? 내가 이렇게 행동하게끔 하신 분은 무엇 때문에 행동하게 하셨는가?”를 묻자 이 말이지요.

 

그럴 때 내 삶에서 계속해서 중보자적인 손길이 투입이 되는 거예요. 어떤 일을 행해도 우리 자신은 중보자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내가 주인공 되는 그 의미는 자꾸 삭제당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여기서 땅 분배라는 말 자체가 뭡니까? 땅 분배한다는 말은 “너는 가만히 있거라. 내가 땅을 배급해 준다.”는 의미거든요. 나눠주는 거예요. 화투쳐 봤어요? 화투장 나눠주잖아요. 까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9땡도 나오고 8땡도 나오고, 뿌린 대로 나오는 거예요. 그 화투장 나눠주는 오야를 가지고 주님이라고 합니다. 일본말로 오야지요. 주님 맘 대로에요, 주님 맘대로.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땅 분배라는 모습으로 구체화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왜 요셉지파는 곱 배기입니까? 왜 요셉지파에게만 두 배를 줍니까? 그 요셉지파를 전부 다 주목해야 돼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야곱의 열 두 아들을 균등화, 균질 화시켰으면 거기는 천국의 원리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똑같으니까. 똑같아야 되는데 똑같지 않게 만드는 거예요. 그게 뭐냐? 요셉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꿈을 주셔서 그 꿈에 의해서 요셉이 죽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가 살아 있는 한, 천국은 어림도 없습니다. 못갑니다.

 

그러면 자살할까요? 자살하면 안돼요. 자살은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행위이기 때문에 안돼요. 왜 자살이 나쁘냐 하면, 지금 하나님이 죽이고 있는데, 가만있어도 늙어 죽어가고 있는데 하나님이 손대고 있는 죽음을 도외시하고, 자기가 따로 죽음이라는 것을 따로 구축하고, 따로 생각해서 자기가 스스로 죽어버리면 그것은 죽음의 질이 이중이 되니까 둘 중에 하나는 가짜가 되는 거예요. 한쪽 죽음은 뭔가 굉장히 수상한 거예요. 자연스럽게 죽어야지 자기가 왜 죽습니까? 그것은 억지를 부리는 거잖아요. 결국은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한다는 거지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하게 되면 중보자의 기능이 빠져버려요.

 

중보자의 기능이 빠져버리면, 중보자의 요소가 없어버리면 천국에 못갑니다. 맛있는 것 사먹고 죽으세요.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죽으시고, 재미있는 영화도 보고, 놀러도 가고, 그래서 죽으세요. 왜 그렇게 유난스럽게 죽어야 돼요? 오늘 아침에 미국에서 어떤 분이 전화를 해서 그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고린도전서 5장에서 아버지의 처와 바람 피워놓고도 나중에 구원 받는다는 것이 참 이해가 안 되었다는 거예요. 분명히 간음죄를 저질렀는데 몸은 죽이고 영혼은 살게 되면 뭔가는 그 사람이 되게 이익 봤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즐길 것 다 즐기고 남 가지도 못한 천국에 가고.

 

이해가 잘 안되었는데 이제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 말이 어떻게 이해되었느냐 하면, 내가 그동안 정신 바짝 차려서 간음 안한 게 아니었다는 겁니다. 정신 바짝 차려서 내가 스스로 자제했기 때문에 간음죄를 안 저지른 것이 아니고 이 몸이라는 것은 내 소관을 떠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간음이든 뭐든 택한 백성은 다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 분은 너무너무 하나님 앞에 찬양했다는 겁니다. 자기 몸에서 간음죄가 나오면서 덩달아 뭐가 나왔느냐 하면, 바로 구원받은 속죄의 기쁨이 나와서 찬양 안할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아, 이 몸은 내가 그려가는 그림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그리면서 천국으로 데려간다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요셉은 꿈을 꿀 때 착각을 했어요. 자기가 꿈을 꾸었으니까 그 꿈을 자기가 관리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하지만 그 꿈은 요셉으로 하여금 요셉을 살해하는 쪽으로 몰아세웁니다. 요셉의 뜻대로 되지도 않아요. 나중에 국무총리가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애굽의 국무총리 되었는데 형들이 애굽까지 양식 사러 내려왔잖아요. 그 때에 요셉이 형들에게 자꾸 압박을 가합니다. “동생이 있느냐?” “그런데 왜 너희들만 오고 동생은 안 데려 왔는고?” “동생은 집에 잘 있습니다.” “집에 있는 동생을 데리고 와야지 안 데리고 온 것을 보니 당신들 스파이네!” “(아, 참 이 총리님 진짜 말 안통하시네) 우리가 스파이가 아니고 우리 동생은 아버지 야곱과 함께 있다니까요?” “그 말 못 믿겠다. 그 말을 증명해봐라. 너희 중에 시므온을 인질로 잡아놓을 테니 어서 가서 동생 데려와 봐.”

 

졸지에 아버지 야곱입장에서는 아들 요셉은 진즉에 죽었지요. 베냐민 하나 남기고 나머지 열 형제가 곡식 구한다고 갔는데 한 명 또 거기에 떨구고 아홉 명만 돌아오니 기가 찰 일이지요. 와서는 한다는 말이 “아버지, 베냐민 데려가야 되겠습니다.” 아버지가 “안 된다. 요셉도 죽은 판에 얘까지 데려가면 안 된다.” “아닙니다. 애굽나라 총리가 베냐민 반드시 데려오라 합니다.” 자꾸 요셉이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강요하는 이유는 뭐냐? 그 형들에게 요셉 본인을 잃어버리게 한, “꿈꾸는 자가 저기 있다. 죽여 버리자. 저 놈 요셉 때문에 우리가 기죽어서 못살겠으니 죽이자.”한 그 마음가짐이 이제 와서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다는, 그 죄에 대한 가책으로서 열 형제가 묶어지기를 바랐던 거예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자꾸 베냐민 이야기를 한 거예요. 급기야 베냐민을 데려 왔어요. 베냐민 데려왔다 다시 집에 가는데 또 요셉이 장난을 치네요. 미리 은잔을 베냐민의 짐 속에 몰래 넣어놓았다가 도둑으로 몰아서 “너희가 도둑놈들이지? 베냐민은 여기서 내 종이 될 것이니 두고 가거라. 나머지는 다 돌아가도 좋다.” 이렇게 하니까 나머지 열 형제들이, 특히 유다가 나섭니다. 그래서 유독 유다와 요셉의 두 지파가 부각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유다가 하는 말이 “차라리 내 자식이 죽으면 모를까 베냐민을 여기 두고 간다면 우리가 돌아가서 아버지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베냐민마저 잃어버리면 죽기로 작심한 분이니까 차라리 저를 인질로 삼으시고 베냐민은 놔주세요.” 이렇게 대리희생, 대신 희생하는 것을 보이지요.

 

요셉이 보기에 이 형들은 이제 뭘 아느냐 하면, 전에 자기들이 동생 요셉을 죽인 그 죄책으로 말미암아 지금 큰 벌을 받고 있고 그 벌 받는 가운데서, 그 죄책 가운데서 베냐민……, 베냐민과 요셉은 둘이 같은 엄마인 라헬의 소생이거든요. 이 자식, 내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이 자식만큼은 아버지에게 귀한 자식이기 때문에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그것으로 똘똘 하나로 뭉쳐 있을 때, 바로 그 때 요셉은 자기 정체를 밝힙니다. “내가 바로 당신들이 이전에 버린 그 요셉입니다.” 하고 형제가 모여서 같이 울지요.

 

울면서 이야기합니다. “형들이여, 날 버린 것으로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내가 당신에게 복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살리기 위해서 나를 일찍 이리로 보냈습니다.” 그 살린다는 게 뭐냐 하면, 천국의 원리에요. 양식 더 보태주는 것이 사는 게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내 자존심과 내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나의 가치와 나의 의미를 고수하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지금 오늘 이시간도 요셉처럼 희생당한 분이 계시다는 겁니다. 그 희생당한 분의 은혜로 우리가 지금 오늘도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성도입니다. 무슨 자기 권리가 있고 무슨 억울한 게 있습니까?

 

행함을 어떻게 하고……, 뭘 행함을 어떻게 해요? 누구 덕분에 사는데 내 행함을 왜 강조합니까? 왜 주장합니까? 요셉과 형제들 이야기는 야곱 개인의 가정사입니다. 가정사지만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언약이기 때문에 야곱 안에 어느 가정에도 없는 천국의 원리를 그 속에서 피어나게 만든 거예요. 요셉 같은 경우에는 본인이 알아서 희생하려고 생각한 것이 아니고 ‘내가 이렇게 억울하게 당할 입장이 아닌데……, 라는 경우를 당하게 됩니다.

 

심지어 요셉은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열심히 일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한 경우를 당하지요. 보디발의 아내가 보는 눈은 있어서 예쁘장한 젊은이다, 싶어 꾀어서 동침하려고 했는데 “마님! 안됩니다.” 하고 뿌리쳤지요. 그 뿌리치면서 거절한 것 때문에 이 여자가 자존심이 상해서 ‘네가 한 번 당해봐라.’ 해서 오히려 요셉을 모함해 버렸어요. 요셉은 억울하기 짝이 없게 되었지요. 충성을 다 했는데 도리어 억울하게 옥에 갇혀서 죄수가 되었잖아요.

 

그런데 그게 뭐냐 하면, 요셉이 받았던 꿈의 실현절차와 과정이 그런 거예요. 십자가 믿습니까? 여러분, 이제 죽었어요. 십자가 믿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십자가를 내 자존심과 내 가치를 높여주는 십자가로 오해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이제는 완전히 주저앉고 망가지게 만들어요. 망가지는데 어디까지 망가지느냐 하면, 처참하고 처절하게 망가져도 용서받았으면 다 받은 겁니다. 은혜 다 받은 거예요.

 

하나님께 속죄함을 받았으면 이것은 땡 잡은 겁니다. 주위를 한 번 보세요. 주님이 속죄함, 십자가 능력 몰라가지고 그걸 알려고 얼마나 애쓰는지 그런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아마 수십억도 넘을 걸요? 십자가를 몰라가지고. 넘어오지를 못한 거예요. 자기의 가치를 버리고 자기의 자존심을 버릴 줄을 몰라가지고 그걸 움켜쥐고 있는 거예요. 성령을 못 받아가지고, 십자가 영을 못 받아가지고. 용서를 못 받아가지고.

 

오늘도 용서 받겠다고 철야하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온갖 짓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꼭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처럼 “신이시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고 가슴을 치면서 밤새도록 외치고 칼 가지고 자기 몸을 찌르듯이, ‘이래도 은혜 안 줄까, 저래도 은혜 안 줄까?’ 방언해서 은혜 받으려고 하고, 십일조 해서 은혜 받으려고 하고, 온갖 짓거리를 다 해도 은혜가 안 오는데 어떻게 합니까? 환장합니다, 환장해. 어떤 사람은 요한계시록 만 독을 하고 은혜를 못 받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환장할 지경이에요.

 

뭘 해도, 진짜 간음을 해도 용서받는 사람쯤 되어버리면 이것은 주께서 어떻게 나를 사용하더라도 감사, 감사만 나와야 돼요. 무슨 불평이 나오고 주둥이가 나오고……, 우리가 무슨 권리가 있다고요? 우리는 어떤 권리도 없어요. 인간의 욕심이라는 것은 사실은 욕심이 아니고 그 배후에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데서 욕심이 나오는 겁니다. 자기권리. 쫓겨난 주제에 무슨 자기권리가 있습니까? 그야말로 죄인 중에 괴수인 주제에 무슨 권리를 이야기합니까? 죽으면 죽으리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야지. 그런 이야기도 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가만히 죽으면 돼요.

 

요셉이 그렇게 될 때 야곱은 요셉 만나자마자 ‘아, 이것은 요셉의 잘남도 아니고, 다른 형제들의 나쁨도 아니고 나에게, 너희들 말고 나, 이 야곱이라는 아버지에게 준 하나님의 언약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데 내가, 야곱 본인이 이 언약을 이룰 거라 생각했는데, 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요셉, 자기가 가장 사랑했기 때문에 남들과 달리 특별하게 귀한 옷을 해 입힌 그 요셉, 그 사랑하는 아들을 내가 사랑했다는 이유 때문에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하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사랑하는 독생자를 죄인을 위해서 주시는 그 천국의 원리, 그 원리를 야곱의 가정사에 준 겁니다. 따라서 야곱으로서는 균질 화 시킬 수가 없어요. 동등과 평등이란 없습니다. 독특하게 해야 돼요. 야곱부터 야곱의 열 아들이 하나같이 아무것도 안하고 있을 때 오직 하나님만이 홀로 하셔서 내놓은 업적이 뭐냐? 요셉에서 두 아들을 만들었어요. 므낫세와 에브라임입니다. 따라서 요셉지파에서는 그 두 아들을 전부 다 야곱 자기아들로 삼았어요. “요셉, 네 아들이 아니야. 내 아들이야.” 단순히 내 아들이 아니고 나에게 준 하나님의 언약의 아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아들이고 예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천국의 원리지요.

 

죽은 자의 희생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되 그 죽은 자라 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쓸데없다고 내다버린, 우리가 쓸모없다고 밀쳐버린 그 분이 사실은 하나님이 사랑했던 분이고 밀친 우리는 주께서 사랑 안했던 자인데 주께서는 밀친 그 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원수 된 우리를 그분의 장자로, 천국의 백성으로 삼으신 겁니다. 이게 천국의 원리에요. 이게 만화입니까? 소설이에요? 동화입니까? 비현실입니까?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이걸 동화라 해? 누가 이걸 교리라고 해? 누가 이걸 소설이라고 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무덤에서 시체가 날라 가버렸는데?” 이것은 현실 중의 현실이에요.

 

세상의 모든 움직임은, 모든 인간들의 움직임은 빈 무덤, 십자가를 겨냥해서 일어나는 움직임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전이요, 그분이 바로 성전이었고, 그분의 은혜로 배분한 땅이 바로 천국입니다. 이 천국의 땅을 구약 때는 인간의 몸 중심으로 표현하는 환경의 제한 때문에 요셉에게 곱 배기의 땅을 배분한다는 식으로 천국의 원리를 소개했습니다. 지금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그 천국의 모습은 그 천국의 원리를 말해주는 겁니다. 지상의 어떤 것과도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고린도후서 12장의 사도의 표현처럼 그 천국을 어떻게 지상의 언어로 표현하겠습니까? 기껏 표현해 봐야 성경의 단어들뿐인데 나중에 천국가면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 영광, 천사의 영광도 대단한데 천사의 영광보다 더 큰 영광은 바로 우리 성도들의 몫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죽은 자 속에서, 잃어버린 자 속에서 살리는 생명이 나온다는 이 천국의 원리를, 그리고 그 원리에 의해서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이 은혜 성을 우리는 자주 놓쳐버립니다. 대신 우리가 열심히 행하고, 일하고, 노력하고, 땀 흘려서 사는 것처럼 곡해했습니다. 더 이상 우리의 가치와 의미를 찾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