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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에스겔 48:1 / 12지파의 땅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에스겔

에스겔 48:1 / 12지파의 땅

정인순 2015. 7. 15. 23:47

 

 

이근호

 

음성              동영상

 

12지파의 땅

2015년 7월 15일                         

 

본문 말씀: 에스겔 48:1

(48:1) 모든 지파의 이름대로 이 같을지니라 극북에서부터 헤들론 길로 말미암아 하맛 어귀를 지나서 다메섹 지계에 있는 하살에논까지 곧 북으로 하맛 지계에 미치는 땅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단의 분깃이요

창세기 3장에서부터 사람들은 땅 없이는 살 수 없는 형편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토지를 개간하면서 농사 짓기에 악조건들을 견뎌내면서 고된 인생살이가 해야만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좋은 날이 오는 것도 아닙니다. 평생을 걸쳐 고단한 생활을 강요하는 것이 토지 위에서의 생활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토지 위에 껌딱지처럼 붙어있는 존재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땅 없는 도저히 살 수 없다는 말은 땅의 조건에 인간은 종속되어 말입니다. 땅 없는 자는 곧 죽음입니다. 땅 있는 자는 목숨이 약간 더 연장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최종적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이유는 땅의 조건에서 비롯된 겁니다.

땅은 인간에게 저주의 화살을 계속 쏘아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온전한 자기 백성들에게 땅을 분배해주십니다. 그런데 이 땅은 저주를 품고 있는 땅이 아닙니다. 생명이 넘쳐나는 땅을 주십니다. 땅 없이는 못사는 인간의 현 실정을 감안해서 사람을 살게 하시는 땅을 주시는 겁니다.

하지만 토지와 인간의 만남은 실은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는 형식입니다. 인간들의 실 생활을 가지고 묘사해내는 형식입니다. 즉 인간 나라 전체가 모형입니다. 2차 대전 영화를 보면, 독일군 장군들이 작전회의를 하면서, 전쟁터에 대해서 모형판을 만들어놓고서 그 위에 모형으로 된 군함과 잠수함과 대포와 탱크와 부대 깃발들을 꽂아놓고서는 작대기로 밀면서 작전을 설명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보시기에 이스라엘은 천국을 설명하기 위한 지상의 모형판입니다. 그리고 인간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설명하는 모형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을 모형으로 보려고 하지 않고 자꾸만 실체로 간주하게 됩니다. 실체가 되면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와 타인, 자기와 하나님을 비교하게 됩니다.

곧 자신을 위하여 타인이나 하나님을 적절하게 이용하고 사용하려는 의도를 보이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은 마치 구원의 요령이나 방법을 알려주는 책처럼 오해하게 됩니다. 즉 “나는 성경에서 결말을 미리 알아가지고 대비하므로서 나를 구원하는 일을 성사시키고 말리라”가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구원은 ‘나’ 곧 ‘나 이름’, ‘나 존재’의 구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구원입니다. 이는 ‘나 이름’으로 살아서는 구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도중에 ‘나 이름’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바뀌어지는 삶이어야 합니다. 즉 무엇을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주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벌어져야 하기에 살게 되는 그런 인생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능력이나 힘을 가져오는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구원이 아닙니다. 바로 이러한 내용이 12지파 땅 분배에 따르는 정신입니다. 12지파가 땅을 분배받는 이유는, ‘약속에 의한 땅’ 이외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입니다.

약속을 위해서 인간은 모형이 되어야 하고 인형처럼 하나님에 의해서 다루어져야 합니다. 이스라엘 초반에 히브리인들이 홍해를 건너왔을 때는 그들의 의해 전쟁을 치르면서 땅을 얻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 이스라엘 지파들은 내장되어 있는 불신앙들이 나타내서 온전히 이방민족들은 약속의 땅에서 진멸하지를 못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 가나안 사람들을 이용했습니다.(수 16:10) 그리고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람들에게 속아 언약을 맺고 맙니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당부하기를 가나안 땅 원주민들하고는 언약을 맺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따라서 정복했다는 가나안 땅에 불순물들이 섞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정복의 미완성으로 인하여 이방민족이 믿는 우상을 믿게 되는 일들이 초래한 여지가 생겼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땅 분배는 ‘완벽하고 온전한 땅분배’입니다. 최종적인 땅 배분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땅마저 모형입니다. 천국의 실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천국의 실체는 신약에서 ‘예수 안’입니다. 구약에서의 언약 환경이란 인간들의 삶의 형식으로 표현되는 질서와 구조로서 천국의 원리를 묘사하고 있는 겁니다. 모형판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실체라고 간주하는 그 이면에는 ‘약속 우선’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함’을 실체로 간주하는 의식 때문에 일어나는 겁니다.

따라서 문자적 해석이 아니라 영적 해석이 요구됩니다. 고린도후서 3:3에 보면,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영적 해석은 인간 우선이 아니라 약속 우선입니다. 즉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예수님께서 약속 자체임’을 말씀하기 위해서 미리 깔아놓은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이루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루심’이 먼저이고 이 ‘이루심’을 내용을 위해 사전에 말씀들이 뿌려지고 주어진 것입니다.

땅 분배의 온전함은 모두 중앙에 있는 성소의 기능이 완전히 종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소의 제사기능의 종결이란 곧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이루다보니 죽으신 것이 아니라 말씀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겨냥해서 미리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란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천국은 이 ‘죽으심’의 효과로 생겨난 결실입니다. 마치 여호수아 13장에서 12지파들이 배당받는 땅들은 모세가 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아니라 죽은 모세입니다. 이는 땅 분배에 작용한 ‘모세 언약’ 안에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죽은 그 죽음‘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언약에 의해서 죽지 아니하는 자는 약속의 땅에서 살지 못한다’는 원칙이 사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찍어바르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이 들어오기에 자신이 마땅히 죽어야 함을 인정하는 자가 바로 구원되는 자입니다. 즉 천국은 죽은 자의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구원보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선인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녹취:오용익

147강-에스겔 48장 1절(열두 지파의 땅)150715-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48장 1절입니다. 구약성경 1228페이지입니다.

에스겔 48:1

“모든 지파의 이름대로 이 같을찌니라 극북에서부터 헤들론 길로 말미암아 하맛 어귀를 지나서 다메섹 지계에 있는 하살에논까지 곧 북으로 하맛 지계에 미치는 땅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단의 분깃이요.”

 

방금 1절만 읽었지만 여기 나오는 ‘단’이란 열 두 지파속의 한 지파입니다. 단 지파 다음에는 아셀지파의 분깃이요, 아셀지파 다음에는 납달리 분깃이요, 납달리 분깃 다음에는 므나셋 분깃이요, 므나셋 지경 다음에는 에브라임 분깃이요, 에브라임지경 다음에는 르우벤 분깃이요, 르우벤 분깃 다음에는 유다의 분깃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땅 분배에 나서는 겁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백성들을 이끌고 나올 때는 땅을 정복해야 될 필요가 있었어요. 그 땅은 이미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으니까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땅들은 정복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비어있는 땅을 분배해주면 끝나는 거예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에 땅을 정복하다 보니까 그들이 믿음이 없어서 제대로 정복하지 못하고 군데군데 이방민족들이 섞여 사는 경우가 있었고, 에브라임지파의 경우에는 원주민들과 언약을 맺지 말라고 했는데 자기 맘대로 언약 맺어서 같이 살기도 했고, 또 기브온 사람들은 가까운데서 와놓고는 멀리서 왔다고 속여서 섞여 살고, 뭔가 상당히 불순한 요소들이 섞여 있는 온전치 못한 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땅 분배는 온전하게 비어있는 땅을 온전하게 주고요, 그리고 그 범위도 요단강에서 지중해까지, 성경에는 대해라고 되어 있는데 지중해지요, 바다 끝까지 꽉 차서 전 지역이 전부 다 이스라엘 땅으로 배당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걸 온전한 정복이라, 제대로 된 정복의 마감이라, 그렇게 언급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땅을 정복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48장 8절에 보면, “성소가 그 중앙에 있”다고 했어요. 인간의 손에 의해서 땅을 정복하던 그 시절에는 이방민족들, 불순분자들이 많이 섞여 있었던 거지요.

 

쉽게 말하면, 천국인데 어설픈 천국이 되어서 지옥 갈 사람도 천국에 같이 섞여 있는 그런 판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에스겔 이 마지막 대목에서는 온전하게 천국 갈 백성들만 약속의 땅에서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런 형국입니다. 이런 온전한 정복이 성사되는 이유는 그 땅 중앙에 성소가 있었고 그 성소 자체가 완벽한 성소이기에 더 이상은 시간이 필요 없어요. 그걸로 모든 일은 손 털고 마감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정복의 끝! 이것을 에스겔 47장이 마지막으로 보여주지요.

 

그러고 난 뒤에 에스겔 48장의 제일 마지막 절에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여호와삼마’라고 벌써 도시 이름가지 지었습니다. 뉴욕, 보스톤,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서울, 이렇게 도시 이름이 있는 것처럼 그 이름이 뭐냐? ‘여호와삼마,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어디에 계시는가? 성소 중앙에 자리 잡고 그 성소 중앙에서 나오는 위력이라는 것은 더 이상 불순분자들, 지옥 갈 사람이 약속의 땅에 살지 못하도록 주께서 이미 모든 조치를 다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에스겔 48장을 보게 되면 사람들은 문자로 해석하고 싶어 해요. 그게 그들의 한계이기 때문에. 영으로 해석 못하고 문자로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경우에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부동산을 사놓든지 해야 됩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그래요. 유대인들은 문자로 보기 때문에 마지막에 메시아가 구름타고 오게 되면 실제로 현재의 레바논 일대 아람나라 다 정복하고, 요르단 다 밀어내고, 오직 이스라엘만 거기에서 영원하고 이상적인 다윗의 나라로 서게 된다고 생각해서 전쟁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유대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고 소위 복음적이라고 하면서 성경해석 하는 사람들도 해석을 그렇게 해요. 그런데 그 분들이 뭘 모르냐 하면, 이게 모형이라는 사실을 몰라요. 2차 대전을 다룬 전쟁영화 보게 되면, 제복 입은 장군들이 작전회의 할 때 모형으로 만든 지형 판을 가지고 해요. 모형잠수함, 모형탱크, 아군인지 적군인지 주둔지를 표시하는 깃발도 꽂아놓았지요. 작대기를 가지고 모형탱크를 밉니다. 그러면서 “이 탱크사단이 이쪽으로 진격하면 어떻겠소?” 하지요. 그것은 모형이지요. 축소 모형.

 

성경 에스겔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나라를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인간생존의 형식으로 축소모형으로 만든 거예요. 지금은 이스라엘 부동산 사놓아도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축소모형이에요.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는 사람들의 문제점이 뭐냐? 그들이 약속을 모르는데 그들이 생각하는 약속은 뭐냐? 사람 나고 약속 났다는 겁니다. 우리가 먼저고 그 다음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약속이 주어졌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약속이 먼저고 그 약속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형으로 인간들이 있어요. 인간들이 모형이에요. 우리 자신이 모형이라니까요, 우리 자신이. 앗수르군대 18만이 한꺼번에 죽는 것, 우리 보기에는 같은 인간이 죽는다 싶지만 그것은 하나의 장난감이 죽는 거예요. 하룻밤에 18만 5천명이 죽었다. 그것은 장난감이 우르르 쏟아진 거예요. 천사가, 독일군장군이 모형탱크 밀듯이 장난감블록을 민 겁니다. “어이, 김 천사! 하룻밤에 다 죽이지?” “죽이지 뭐.” 가볍게 이야기해요, 가볍게.

 

사람 위주로 보는 게 아닙니다. 약속이 먼저 있고 약속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형으로 인간을 만들었어요. 성경해석 이렇게 하면 정말 간단하고 간편합니다.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성경을 문자로 보지 말고 영으로 해석해야 된다.’라고 했어요. 영으로 해석해야 된다는 말이 고린도후서 3장 끝부분에 나와요. 영으로 해석해야 된다는 말은 성령으로 해석해야 된다는 말인데 그것은 누구나 다 이야기하는 거고요. 성령으로 해석한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에 대해서는 고리도 후서 3장 마지막에 있듯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해석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모형이 아닌 사람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거예요. 성경은 “예수님을 위해서 우리는 모형 되어도 좋습니다.” 하는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게 되면 그것이 영적해석이에요.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해 본적이 있습니까? 본문 설교의 제목이 “열 두 지파의 땅”인데요. ‘우리가 열두 지파 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과연 이 땅에서 살아도 괜찮은 것인가?’ 이 세상 65억 인구가운데 이런 질문 하는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내가 지금 이 땅에서 살아도 괜찮아? 살면 안 되잖아. 과연 이 땅에서 살아도 괜찮은 거야?’ 이런 질문을 사람들은 안합니다. 왜? 자기 위주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악착같이 살아야지.’ 이것만 생각하지 ‘내가 이 땅에서 안 살아도 되는데 왜 살지?’ 이렇게 생각 안하거든요. 사람들은 자기 위주기 때문에 그냥 “땅만 주옵소서. 그저 땅만 주옵소서.”

 

애굽에서 나왔던 그 사람들이 바로 약속의 땅으로 가지 않고 하나님께서 광야를 통과하게 한 이유를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몰랐어요. 광야를 왜 통과하게 했느냐? 하나님의 약속의 땅은 들어가서 살만한 땅이 아닙니다. 살 수 없는데 살게 하는 땅이지요. 살아서는 안 되는데 살게 하는 땅. 도저히 못가는 땅인데 들어가게 하신다는 말이 뭐냐? 광야에서 그들은 “광야에서는 도저히 못살겠습니다.” “못살겠지?” “못살겠습니다.” 약속의 땅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광야는 물이 있어요, 양식이 있어요? 못살잖아요. 약속의 땅도 마찬가지에요.

 

광야에서 그들은 만나배급 없었으면 다 굶어죽었습니다. 약속에 땅에 들어가서 보니 젖과 꿀이 흐르니까 좋다고 했지요. 그거 오해입니다. 젖과 꿀이 그냥 흘러나오는지 알아요? 말씀의 완성도가 없이는 그 젖과 꿀도 허락되지 않는데요? 그래서 자꾸 이방나라들이 이스라엘을 침범하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홍해 갈라졌지요. 그것도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거잖아요. 요단강이 넘치게 흐를 그 때 요단강 건너갔지요. 이것도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거잖아요. 여리고성 무너진 것, 이것도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잖아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그런 코스를 밟았으면 그 땅에 거주할 때 “아이고, 이제부터는 내 능력으로 산다.” 그런 생각은 하지를 말아야지요. 어떤 분이 저에게 질문해요.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신앙생활이란 뭡니까?” 신앙생활은 딴 게 아니에요. ‘못사는데 내가 왜 살지?’ 이걸 묻는 게 신앙생활입니다.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살까, 이것이 신앙생활이 아니고 ‘안 살아도 되는데 왜 자꾸 살려주시지?’ 그 이유를 캐묻는 게 신앙생활이에요.

 

그것은 뭐냐 하면, 내 사는 위주의 여호와, 예수, 삼위일체가 아니에요. 약속을 약속으로 보이기 위해서 우리는 거기에 걸 맞는 모형으로 존재할 때만 약속의 땅에 주님과 함께 거주할 수가 있습니다. 독일군의 축소모형, 작전지시하는 그 모형 판에서 우리는 하나의 모형잠수함, 모형탱크, 모형군인, 군대의 깃발, 이런 식으로 들어간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실제로 광야에 보면 아말렉전쟁할 때 ‘여호와닛시’라고 했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그 지명 이름이 ‘여호와이레’잖아요. ‘여호와이레’ 빵집 같은 가게 이름만 그렇게 하지 말고 내용이나 의미를 알아야지요.

 

여호와 이레잖아요. 그것은 그냥 깃발 꽂는 거예요. 이 땅 하나하나가 주님의 약속을 보여주는 모형으로서 작동하는 모형 판으로서의 땅이에요. 그래서 48장의 분배되는 땅을 다 합치면 이게 이스라엘 땅이에요. 문자적으로 보면 터키도 있고 유럽도 있고 다른 나라 땅도 있는데 왜 이스라엘 땅만 전부라고 하는가? 모형에서 약속이 빠진 것은 땅이 아니올시다. 그것은 땅이 아닙니다. 약속이 있는 곳만 땅이에요.

 

먹는 예를 들어서 좀 그렇습니다만 할 수 없습니다. 제일 쉬운 예니까. 만두피를 만들 때 밀가루를 반죽하잖아요. 해본 사람은 알아요. 만두피 만들 때 홍두깨로 민다고요. 쫙쫙 밀면 면적을 작게 차지했던 그 둥근 밀가루반죽이 얇아지면서 넓게 퍼지잖아요. 넓게 퍼지면 종지기로 찍어서 만두피를 만드는데 그 넓게 퍼진 그 판 그것이 중앙 성소에서 약속으로 쫙쫙 밀어댄 거기까지예요. 밀가루 옆에 있는 탁자나 바닥은 만두하고 아무 관련성이 없어요. 만두라는 약속과 관련성이 없다니까요.

 

약속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땅으로 충분하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열 두 지파로 충분하다는 겁니다. 어차피 천국은 열 두 지파에게만 할당되고 나머지는 배제되기 때문에. 들어갈 사람만 약속을 이해하면 손 털고 끝내는 거예요. 한 사람 더 넣겠다고 애 닳을 필요가 없습니다. 약속이 뻗어간 그 마지막 지점에 약속된 마지막 백성이 거기에 기다리고 있거든요. 약속이 뻗어간 그 끝 지점에 구원될 자기 백성이 있기 때문에 약속은 문어발처럼 거기까지 미친 겁니다.

 

거기까지 미쳐서 어떻게 하는가? 중앙으로 쑥 잡아당기지요. 신앙생활도 그렇고 구원이라는 것이 내가 소지하는 것이 아니에요. 지난주일 오후에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만, “주여, 나의 죄가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으로 사하소서.”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죄를 용서해줄 때 주의 이름으로 용서해 줘버리면 정말 용서받은 사람은 자기 이름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에요. 이제부터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주께 영광돌리라는 말이 아니고, 주께 영광 돌리면서 감사하라는 말이 아니고 뭘 해도 주의 이름으로 이미 실시가 된 그 결과물을 수용하는 식으로 인생을 꾸려나간다는 그 말입니다.

 

‘이거 해놓고 주의 이름에 영광 돌려야지.’ 그게 아닙니다. 뭘 해놓고 하게 되면 주의 이름이 하나의 대상이 되거든요. 대상이 아니라 이미 내가 뭘 할까, 그 마저도 주님에 의해서 지배당한 위치와 장소를 공급받는 거예요. 그게 열두지파 땅 분배받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열 두 지파의 땅은 약속에 의해서 온전한 정복이 이루어진 땅, 온전한 정복은 모든 땅 속속들이 약속의 효과가 적용이 되고 할당이 돼요.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약속이 주의 이름이잖아요.

 

그 열두 지파의 땅을 그만 돌돌 맙시다. 이번에는 만두가 아니라 칼국수를 해볼게요. 돌돌 말아서 칼로 썰면 칼국수 되지요. 돌돌 만 그것이 신약에서 ‘예수 안’이에요. 돌돌 말아서 하나로 만들면 이것이 ‘예수 안’이 되고 펼치면 에스겔 48장의 열두 지파의 땅이 되고요. 어차피 모형이니까요. 그러면 모형과 실체의 차이는 뭡니까? 모형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인간생활의 형식을 동원하는 것이 모형이라면 실체는 예수님만이 알아먹을 수 있는 실체기 때문에 인간들이 알고 있는 것으로는 도저히 아무리 해도 해석이 안 되는 식이 바로 모형의 실체입니다.

 

신약은 예수님 중심이거든요. ‘예수 안’은 예수님 중심이라는 말이지요. “예수 안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 안이 몇 번지입니까?” 이렇게 물으면 안돼요. “몇 번지입니까?” 하는 이것은 구약 때지요. 모형으로 있을 때는 주소가 나와요. 몇 번지, 235번지, 이게 모형일 때는 가능한 데 모형이 아니고 실체가 되어버리면 그냥 ‘예수 안’이에요.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바로 너희 안에 있다는 말이지요.

 

“이렇게 좁은데 하늘나라가 어떻게 들어옵니까?” 그건 네 생각이고, 네가……. 모형을 펴놓고 “김 장군! 적들이 해안으로 올 것이니 군대를 여기에 배치하세.” 이렇게 하면서 모형탱크도 밀고 모형대포도 밀고. 그러면 그 모형을 보고 철없는 애가 와서 “아저씨, 이 대포 좀 쏴 보세요.” 한다면 모형인데 무슨 포탄이 나옵니까? 정말 철없는 소리지요. 예수 믿는 믿음을 측정하려 하니까 산이 뽑혀서 바다에 빠지도록 던져 보세요. 이러면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내가 준 기적은 요나의 기적인데? 너 죽어라. 십자가에 죽으면 나와 함께 살리라.” 이거에요.

 

또 요나의 기적이라 하니까 “그러면 저를 물고기 뱃속에 집어넣어 보세요. 사흘 만에 사는지?” 문자적으로 모든 것을, 이스라엘 부동산 구입하기, 모든 성경구절을 그런 식으로 보는 거예요. 사도행전 28장이나 마가복음 16장을 보고,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하는데 상주에 독 마신 할머니들 한 분 사망하고 네 분 중태에요. 지방교회 교인들은 자기들끼리 완벽한 신자들의 모임이라는 거예요. 그 사람들에게 농약 좀 나눠주면 좋겠어요. 성만찬 할 때 포도주 먹지 말고 농약 죽 마시면서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한 번 해 보지요. 그건 왜 안 해요? 주님의 기적을 우리가 행할 수 있다고요? 잘 됐네요. 8월 휴가 가서 바닷물에 뛰어 들어가 보지요. 물 위를 걷는지.

 

손을 얹은 즉 병이 낫는다고? 메르스 이렇게 난리칠 것도 없어요. 삼성 병원 가서 툭툭 치기만 하면 다 낫는데? 휴~! 모형은 내 중심이에요. 내가 납득이 되고 내가 이해되는 기적, 나자체가 모형인 것을 모르고 내가 마치 주인공인양, 내가 실체인양 그렇게 오해하는 겁니다. 우리가 모형으로 전환되려면 ‘실체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존재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나는 주의 이름을 위해서 내가 여기 있는 모형이지 내 이름을 위해서, 내 구원을 위해서 내가 모형된 것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고린도후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해석 못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에서 비유를 이야기할 때, 씨 뿌리는 비유, 가라지 비유, 알곡 비유, 많이 나옵니다. 그 비유들의 내용, 어떤 농부가 밭을 갈다가 횡재를 했지요. 덜그럭 소리가 나서 보니 보물이 나왔다. 그 밭을 땅 주인한테 사서 보물 캐서 다 가졌다는 거지요. 나중에 땅 주인한테 소송 안 당했는지 몰라. 좋은 고기, 나쁜 고기, 이것은 다 뭐냐? 인간들이 일상적으로 흔히들 자기 딴에 이해가 된다는 단어나 용어들을 사용하신 거예요.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과도기적이기 때문에,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가는 과도기기 때문에 그들의 평소에 삶의 형식, 저는 이것을 삶의 형식이라 하는데, ‘그래, 고기 있어야 돼. 농사도 지어야 되지.” 이렇게 자기들의 시간과 정성을 들이고 땀을 흘리면서 살아보려고 애쓰는 그 삶의 형식을 가지고 주님께서는 그 전체가 모형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그 전체가 가짜라는 이야기지요. 허구고 망상이고 허상이라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어떻게 알겠어요?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가 하늘나라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어요. 그래서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늘나라 볼 수 있습니까?” 이렇게 할 때 예수님께서 “다시 태어나면 될 걸?” 다시 태어난다는 그것이 니고데모에게는 엄마 뱃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니고데모가 감당할 수 있고, 기억 속에 있고, 삶의 형식 속에서 뽑아낼 수 있는 것은 그것 밖에 없어요. 그래서 “내가 엄마 태중으로 다시 갔다가 어떻게 태어납니까?”라고 하니 주님께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잖아. 나는 지금 영으로 이야기 해. 너는 왜 육의 범위에 머물러 있느냐?” 그 이야기를 하는 거지요.

 

“영이 뭡니까?” 하고 물으니까 그것은 우발적인 사건이지요. 바람처럼. 바람을 누가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소유가 안 되지요. 오늘 본문의 핵심은 이겁니다. 위치와 질서로 영적 구조를,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흔한 생존의 형식, 삶의 형식가지고 영의 구조를 묘사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묘사를 하는데 그러면 열 두 지파의 땅을 분배한다는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는 거지요. 처음에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나와서 옆구리를 치고 들어왔지요. 동쪽으로부터 치고 들어 왔는데 그게 요단강 지경입니다.

 

요단강을 건너서 옆구리를 치고 그 다음에 산지 쪽으로 올라갑니다. 올라가는데 저나 여러분이 아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모세는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갔습니다. 맞지요? 모세는 느보 산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보기만 하고 죽었어요. 못 들어갔습니다. 모세가 죽고 난 뒤에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 건너갔지요. 맞지요? 그렇다면 여호수아라는 이 성경내용은 여호수아가 주인공이 된 글이어야 하는데, 그게 우리의 상식인데 여호수아13장에 보면, 거기에 땅 분배받는 이야기들이 죽 나오는데 그 때 여호수아는 빠지고 누가 관여하는가 하면, 모세가 주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여호수아 13장 15절에 보면, “모세가 르우벤 자손의 지파에게 그 가족을 따라서 주었으니.” 24절에도 “모세가 갓 지파 곧 갓 자손에게도 그 가족을 따라서 주었으니.” 성경 앞부분을 모르는 사람들은 모세가 아직도 살아 있는 줄로 착각 할 거예요. 33절에,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모세는 분명히 죽은 사람인데 왜 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가? 여호수아는 들러리인가?’ 이렇게 생각이 들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핵심이 있어요. 모세는 죽었습니다만 모세언약은 살아 있어요. 모세언약이 살아 있다는 말은, 모세언약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모세마저 못 들어온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약속의 땅을 제공할 때는 내 땅이 될 경우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땅을 분배받아도 제대로 분배받은 게 아니에요. 곧 놓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모세가 줬다? 모세는 죽었는데? 정확하게 모세언약에 의해서 여호수아는 시키는 대로 할 뿐이거든요.

 

그렇다면 이왕 그렇게 할 것이면 모세를 살려서 모세언약대로 하면 좋겠는데 모세를 죽이고 모세언약이 여호수아를 다스리는 식으로 왜 땅을 분배해야 되는가? 그것은 모세가 왜 이 땅에 들어오지 못하고 죽었는지, 왜 모세는 이 땅에 들어오는데 실패했는지, 그 내용이 땅 분배하는 취지 안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천국에 생명수가 나오는 중심이 있습니다. 그 중심에 두개의 보좌가 있어요. 하나님 보좌와 어린양의 보좌가 있습니다. 특히 천사들이 그 어린양의 보좌에 옹기종기 모여 있거든요. 그러면 그 어린양의 보좌가 중심이 되는 셈인데 그 보좌는 이름이 ‘어린양’의 보좌에요.

 

어린양이라 하는 것은 그 앞에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 이에요. 쉽게 말해서 죽음이 우리에게 제시한 땅이 천국입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라는 겁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지옥 가라는 그 말입니다. “가세요. 지옥으로.” 그런 뜻이에요. “죽어 마땅함을 아는 사람은 들어오세요.”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천국가기 쉽네. 예수 안 믿어도 되겠네.’ 왜? 죽어 마땅합니다, 이 일곱 글자만 외우면 되니까. “죽어 마땅합니다, 들어가지요? 죽어 마땅합니다, 들어가지요? 하나님, 제가 죽어 마땅합니다. 자, 외웠습니다. 들여보내주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가 왜 죽어 마땅한데? 네가 왜 죽어 마땅하냐고?”

 

이렇게 해야 천국 들어간다고 가르쳐주니까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은 네가 지금 살아 있다는 증거에요. “내가 죽어 마땅한 이유가 뭔데?” “몰라요.” “저리 가!” 죽어 마땅한 이유는 흔히 하듯이 죄를 지어서 죽어 마땅한 것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중문제고요, 죽어 마땅하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보다 먼저 죽었어요. 구약에서 유대인 쪽에서 봐서 미래에서 예수님이 죽지만 사실은 벌써부터 죽는 것이 작정이 되어 있고 그 모형으로 이스라엘을 이 땅에 만든 거예요. 가나안땅을 모형 판으로 만들어서 거기서 이스라엘을 죽게 만든 겁니다.

 

죽으면서 그 죽는 이유를 언약에 근거해서 알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새 언약에서 “내 피다, 내 살이다. 이 피 마셔라. 이 살을 먹으라.”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새 언약이다.” 새 언약이라는 것은 무엇을 염두에 두느냐 하면, 옛 언약, 구약성경을 염두에 두고, “구약성경은 문자로 되어 있지? 그러나 지금 내가 하는 것은 내 살과 내 피다. 따라서 너희들은 뭘 알아야 되느냐? 어떻게 문자가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되느냐? 그 과정을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대로 죽으셨구나.” 이렇게 하지 마시고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먼저 말씀을 깔아놓았구나.” 이렇게 보는 이것이 합당한 거예요. 우리 죽음은 아닙니다. 예수님 죽음이에요. 예수님의 단독죽음이 천국에 보편적인 죽음으로 퍼지는 겁니다. 어려운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개별적인 우리의 죽음은요, 죽음의 일반화가 돼요. 일반화라 하는 것은 경험들을 모아놓으면 일반화가 되고 보편화라 하는 것은 특수한 자의 속성이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전체에 덮치는 것을 보편화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 십자가 보편화가 천국이에요. 그 천국에 간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그리스도의 피와 살의 보편화에 적용을 받아서 영생을 누립니다. 죽지 않고서는 영생이 구체화되지를 않아요. 그래서 에덴동산에 두개의 나무가 있습니다. 하나는 죽음을 가리키는 나무, 선악과, 또 하나는 생명나무. 인간은 실패했지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치워버려라.” 하고 생명나무를 가로막아 버렸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선악과마저 완성시켜서 생명나무를 우리에게 주셨잖아요.

 

이것을 약속위주로 생각해야지 나부터 먼저 챙기고 그 다음에 날 구원하기 위해서 약속이 있다는 식으로는 백날 성경 이야기하고 아무리 어려운 이야기를 해도 그것은 다 사기고 거짓이에요. 실컷 은혜 받았다. 그 은혜 받은 결과가 뭡니까? “나 구원 받는데.” 그게 아니지요. 천국은 “나 대신 누가 돌아가셨대.” 그게 천국이지요. 그게 천국이잖아요.

 

십자가마을에 올려놓은 정 석훈 목사님의 글 보세요.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라고 제가 제목을 다시 붙여서 올렸어요. ‘부고’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글을 제가 보고 너무 좋아서 옮겨 놓았어요. 글이 좋다는 말은, ‘잘 썼다, 못 썼다.’는 것을 떠나서 자기 아버지를 두고 공개적으로 복음으로 언급한 자식이 누가 있겠어요? 그래서 그 글을 보고 누가 댓글을 못 달아요. 남의 슬픔에 초치는 느낌이 들어서. 자기관리 해야지요. 예의상.

 

그러나 정 목사님은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건강할 때는 복음을 극구 거부하고 아플 때는 아프다고 안 듣고. 이게 뭐냐?”는 말이지요. 구원받으라고 복음 전하는 게 아니고, 지금 아버지가 몇 살 살다가 가시는가,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모형이고, 장난감이고, 토이스토리에요. 장난감들이니까, 예수님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지금 하는 거예요. 정 목사님 글은, 예수님이 죽었다는 이야기에요. 예수님 죽음 찍어 바르면 당신이 산다는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니까요. “아버지, 그 피 찍어 바르고 구원 받으세요. 그게 행운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행운인지 아닌지 그것은 나는 모르겠고 예수님이 죽었다는 말이지요. 그 예수님이 죽은 그것을 보편화시켜 버리면 그것이 천국이라는 겁니다. 그게 진짜 현실이라는 거예요. 그걸 증거 하는 거예요, 지금.

 

주님 십자가 앞에서 아프니, 절망이니, 망했니, 그것은 의미 없는 거예요. ‘이러다가 내가 암 걸려서 죽겠지.’ 이왕 죽은 거 죽지요, 뭐. 암 걸려서 죽든, 엎어져서 죽든, 그게 뭔데? (작전모형 판에서) 작대기 가지고 죽 밀면서 ‘탱크부대로 밀어볼까? 대포 쏴?’ 주님께서 모형 맘대로 가지고 노는 건데 모형이 그렇게 길길이 반항합니까? <토이스토리>라는 영화가 있어요. 인형이 살아서 개인적인 자존심 챙긴다는 내용의 영화가 있어요. 인형이 왜 자기 자존심 챙깁니까? 우리가 그 꼴이에요. 우리가 인형조각에 불과한데도 우리가 내 자존심 챙기고, 이웃 간에 경쟁하고, 비교하고, “쟤는 잘사는데 나는 못산다. 쟤는 건강한데 나는 아프다.”

 

모두 다 모형 판 위에서 우리는 똑같은 자기위주의 잘못된 일반화에 빠져 있습니다. 성령으로 이걸 보게 되면, ‘아, 중심이 하나님이 계시는 여호와삼마, 여호와께서 자기가 살려고 자기 집을 짓는데 열 두 지파 백성들이 여기에 부름을 받았구나.’ 부름 받은 자가 바로 성도입니다. 초청받은 자가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 좋으라고 있는 천국이 아니고 주님의 자신의 공로와 업적과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천국 있음을 저희들이 새삼스럽게 정립하게 해 주옵소서. 이 땅에 살아가면서 늘 주께서 주시는 그 은혜가 십자가의 피 희생에서 온, 죽은 자를 살려주는 그 영생의 힘인 것을 오늘도 만끽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