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에스겔 48:15 / 속된 땅 본문
이근호
속된 땅
본문 말씀: 에스겔 48:15 녹취:주향 이근호
속된 땅 2015년 8월 5일
본문 말씀: 에스겔 48:15 (48:15) 이 이만 오천 척 다음으로 광 오천 척은 속 된 땅으로 하여 성읍을 세우며 거 하는 곳과 들을 삼되 성이 그 중앙에 있게 할지니
구약성경 1229P입니다. 제가 읽습니다. 이 이만 오천 척 다음으로 광 오천 척은 속 된 땅으로 하여 성읍을 세우며 거하는 곳과 들을 삼되 성이 그 중앙에 있게 할지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에스겔서 마지막을 통해서 성전도 만드시고 성전을 중앙에 두고 그 중앙에 있는 땅은 왕의 땅. 거룩한 제사장이 되게 하신 그 다음에 그 옆에서 점차 약간 곁에 있으면서 약간 멀어져 있는 곳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속된 땅이라고 이렇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속된 땅은 무엇을 바라보느냐 하면은 중앙에 있는 하나님의 성, 하나님의 성소 그것을 바라보면서 속된 곳이라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속된 곳이라 하는것은 무엇을 드러내기 위함이냐 하면 속된 곳이 있다는 말은 대조적으로 거룩한 곳이 있다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 거룩한. 곳에 중앙에 있는 중앙 부분의 혜택으로 우리의 속된 것도 하나님께서 새로 창조한 땅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고백을 이러한 모습을 정렬 또는 배정을 받는 거에요. 이것은 바로 에덴동산에서 흐르는 강이 중앙에 있는 두 나무에서 나와서 에덴동산의 네 갈래의 강을 적시면서 에덴동산에서 즐겁게 인간들이 살도록 하는 조치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에스겔의 이야기가 목사님! 실제적으로 이런 지역이 구체적인 지정된 자리가 실제적으로 있는 겁니까? 이렇게 물으신다면 저는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동트는 지역이라 이렇게 저는 표현하고 싶습니다.
동트는 지역이라 하는 것은 여긴 분명히 어두움이고 밤인데 동트는 지역의 특징은 밤에 잠겨 있으면서도 여명이 희미하게나마 햇빛이 비치는 여명이 보이는 그 지역. 그게 동트는 지역이 되겠지요.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에스겔 에서는 나오는 이러한 지역과 정해진 성전의 모든 구조는 설게 도면의 치수는 어두운 지역에서 사람들이 통용 하던 그러한 기호요 언어요 개념들입니다.
어두움에 속한 단어들로 이렇게 배정을 해 놓았는데 이제 동이 트게 된다는 말은 어두움에 빛이 비추인다는 겁니다. 빛이 비춰버리면 어두움에서 사용하는 그 단어와 개념은 자신들이 역할을 다한 겁니다. 동트는 지역에서 다시 말해서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는 그것도 구약의 마지막 이스라엘 멸망되고 난뒤에 과도기. 신약으로 넘어오는 어두움과 빛의 중간 경계지역에 있는 이러한 단어들과 말씀 속에서 우리는 장차올 천국의 구조와 원리와 법칙과 원칙을 뽑아내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의 용어들은 이게 어두움에 속한 인간들의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두움에 속했거든요. 요한복음 1장의 말씀처럼 빛이 비취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제 인간들끼리 아무리 뭘 해도 어두움이예요. 빛이라 하는 것은 외부에서 동이 트듯이 외부에서 나타나야 되요. 여러분 이 장면에선 뭘 생각 하시면 되냐 하면 시베리아 벌판에 동트는 것을 생각 하시면 되고 미국의 켄터키주에 안 가봤지만 켄터키 주의 허허 벌판에 해 뜨는 것을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에스겔은 구약에 속하고 예수님은 신약에 속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 라고 알려면 그냥 예수님을 우리가 만나서는 몰라요. 구약을 통해서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구약은 어두움에 속하고 신약은 빛에 속해요(요:1)장에 보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으니까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 오기 전에 모든 인간 세계는 어두움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에스겔 48장의 성전의 구조나 땅의 구조 위치 이것을 어두운 세계에서 통용되는 단어들이 여기에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에잇! 어두움이네! 볼 것 없어! 옛날이야기네~” 그렇게 하지 말고 여기서 그들의 배열과 구조를 통해서 장차 빛으로 오실 그분의 말씀에 있는 천국의 구조와 원칙과 규칙을 여기서 뽑아내게 되면 그건 해석이 되는 겁니다. 신약과 연관된 해석. 이것을 저는 이렇게 다섯 자로 ‘동트는 지역’이라 이렇게 여명의 지역 막 해가 떠오르는 지역. 새벽이 되려는 그런 지역 그렇다면 동트는 지역에서 원칙을 끄집어내려면 우리가 사전에 어떤 힌트라던지 암시가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런데 여기에 보면 암시가 15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만 오천 척 다음으로 오천 척은 속된 땅으로. 속된 땅이 나와요. 하나님께서 에스겔에 해당되는 이 땅은 그냥 이 세상의 지구상에 어두움에 속한 보통 땅이 아니고 어떤 땅이냐 하면 가나안땅, 약속의 땅을 두고 이야기 합니다. 제가 약속의 땅이라고 이야기 했는데 그냥 네 자로 사실은 약속과 땅이 결합된 땅의 차이를 알아야 됩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약속의 땅의 특징이 뭐냐 거룩과 속됨을 확연하게 보여 주는 땅이 약속의 땅 입니다. 그러면 그냥 땅은 내가 사는 땅이고 내 가족이 사는 땅이고 대대로 우리 집안이 살던 땅이고 그냥 땅이죠 뭐. 그냥 흙으로 되어있는 땅. 그게 전부예요. 부동산 중계소에서 땅 내놨잖아요. 그 땅, 그 땅이예요.
처음에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쫒겨 나온 뒤의 땅, 펄벅은 ‘대지’ 라고 했는데 중국의 넓은 땅 그 대지를 말하는 겁니다. 그것 없이는 못사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저주가 피어나는 것. 일제시대 때에 조선인들이 상당히 고통 받았던 것은 바로 조선 시대의 삶은 땅 중심이없거든요. 농경시대 잖아요. 그러니까 그 땅을 일제에 빼앗긴다는 것은 자신의 뿌리를 빼앗기는 거예요. 그때 나온 소설이 ‘토지’예요. 토지라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것은 하동 땅에 가보았어요!.
하동 땅에 가면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따라 화개장터엔, 장터가 있어요. 바로 그 지역에 최 참판댁을 배경으로 하는 토지, 인간은 토지위에서 가문이 형성된 애가 태어나고 늙어 죽고 또 애가 태어나고 늙어죽고 애 태어나고 그게 인생의 전부라는 겁니다. 박경리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 박경리 속에는 뭐가 들어 있지 않냐하면 약속이라는 게 없어요. 약속의 땅의 개념이 없어요. 자기가 사는 것이 진리요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한 거지요.
제가 이렇게 강조하는 것이 좀 이상해 보이지 않습니까?. 땅에서 자식들 낳고 하면 그것이 전부지 그런 것들 말고 또 뭐가 있는데? 이렇게 나올 수 밖에 없지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게 뭐냐 그냥 땅이 되버리면 거룩과 속됨의 그런 의미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저 그 땅에서 살 때까지 살지! 그러면 내가 태어났다. 이렇게 살았다. 내가 죽었다. 끝! 자기 스토리, 자기 드라마 밖에 없어요.
여름 수련회 때 얘기한 것처럼 하나님의 자기 증명거리가 없다는 말이죠. 자기존재의 증명 꺼리만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스라엘로 약속의 땅에다가 하나님의 뜻의 원칙과 규칙을 담는 특수한 땅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의 10족속 원주민들을 나가라고 해요. 그것을 내보내고 거기에 어린양을 앞장세우고 하나님의 이름과 동행하는 약속된 민족을 거기에 집어넣으면서 드디어 그 땅은 약속의 땅으로 변모 됩니다.
약속의 땅이 뭐냐. 축복이 무엇이며 저주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땅. 그래서 이번 수련회 때 사사기를 하면서 사사기를 대하는 우리의 입장에 대해 여러 번 이야기 했어요. 사사기를 볼 때 이방인은 끼어들지 말고 K1레슬링 하는 사람들이 경기할 때. 동물같이 울타리 만들어 놓고 둘이 치고 박고 난리 날 때 그저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고. 왜? 반장이 대표로 선생님한테 혼나며 얻어맞는 장면을 보자 이말이죠. 우리를 대표해서 반장이 선생님한테 얻어맞는 모습을 보자 이말이죠.
언약이 있기 때문에 얻어맞는 거예요. 이방인들은 개 같은 인간들이라 해서 언약도 없어요. 언약이 없으니까 그건 내놓은 자식이다 저주받은 자식이다. 구원하고 상관없어요.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이스라엘 속에는 하나님의 거룩의 무늬와 저주의 무늬가 함께 섞여 있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 말과 내 명령을 지키면 복을 받고 안 지키면 저주가 있을 것이다. 이것을 다른 민족에게 준 게 아니예요.
그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된 사람, 민족에게만 준 겁니다. 그렇게 주시고 난 뒤에 뜸을 들이시면 좋겠는데 주고 난 뒤에 곧장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너희들은 내 말을 이렇게 저주와 축복을 안 지키면 저주받고 지키면 축복받는다고 해도 결국 너희들은 저주받게 되어 있어. 이것을 뜸도 들이지 않고 곧장 나와요. 곧장 밥을 지을때도 뜸들일 시간이 필요한데. 하나님은 뜸 들일 여유도 없이 그냥 율법 줘 놓고 바로 저주로 끝내 버립니다.
법이라 하는 것은 죄를 증명하는 절차라고 이야기 했지요! 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죄책감이 더 들어나게 되어 있어요. 정말 법을 지키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오히려 내가 법을 못 지킨다는 죄책감을. 죄가 늘어나는 죄책감을 알게 될 것 입니다. 오늘 제가 시내에 책 사러 가면서 또 죄를 범했어요. 오늘 설교시간에 동영상 안된다 교인들에게 원망하던 그 악행 말고 또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서점에 들어가는데 문 입구에 미시오! 라고 써 있는 데 밀지않고 당겼어요. 세상에 이런 악행이 어디 있겠어요.
모든 매사가 법이 있기에 법을 의식하는 순간 하나님께 그 법을 나에게 적용시킬 때 나로 하여금 그 법이 금지된 것을 행하게 해서 행하는 순간 법의 권위가 바로 법에 대한 위반을 통해서 그 권위를 노출시키는 방법을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율법을 준것은 죄를 더욱 더 짓게 함이라 그런 뜻이예요. 법의 가치와 권위는 법의 금지한 것을 위반함으로 인해 비로소 그 현장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우리가 손해잖아요. 손해 볼 것 하나도 없어요. 왜? 이미 에덴 동상에서 저주받은 입장인데 확인 사살하는 그런 뜻이예요. 죽인 놈을 또 총 쏴서 죽이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이미 죽은 자가 총 다시 쐇다고 “윽! 윽! 왜죽이십니까! 아직 안 죽었나? 나는 죽은 줄 알았는데” 감독이 엑스트라에게 화살이나 총 맞고 그냥 한방 맞으면 쓰러지세요! 라고 지시를 했으면 엑스트라 주제에 한방 맞으면 윽! 하고 죽으면 되는데 꼭! 튀어볼라고
그냥 죽는 게 아니라 “대한 독립 만세”라고 외치고 그런 애드립을 할 필요가 없거든요 그냥 죽으면 되는데 그런 말은 주인공이나 해야 되는데 벌떡 일어나서 “대한 독립 만세” 아버지는 이렇게 죽노라 윽! 이럴 필요 없다고요 그냥 소리 없이 죽으라고요! 이 세상에 주인공이 누가 주인공이 될 자격이 있습니까? 주인공은 이미 정해져 있어요.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도 아닌데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베트맨도 아니고 짜잔하고 나타나서 “내가 주의 종이다”라고 등장하니까 주께서 기가 찰것 아닙니까?
“뭐야! 비켜라! 비켜라! 이게 어디 앞에서 얼쩡거리나! 너는 죽은 자야! 죽은 자!” 이스라엘은 그걸 해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살게 하는 것은 법을 위함인데 그들은 그것을 바꾸어서 우리를 위함이라고 바꾼겁니다. 요새말로 말씀을 위하여 이스라엘이 있는 것인데 그들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이스라엘이 있다고 생각한겁니다. 안티 이스라엘이,
우리는 말씀을 위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 분을 위하여 우리가 존재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고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주께서 나를 어떤 식으로 다루어도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제가 입이 열개 아니 백개가 되더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되는 것. 그런 양상이에요.
그런데 약속의 땅을 그렇게 성질 나쁜 이스라엘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약속을 어떻게 이루시는가? 그것은 이스라엘백성도 육신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가 있을거잖아요! 아담의 죄를 물려받았지요! 그 아담의 죄를 끄집어내면서 진정한 약속도 구체적으로 인격으로 드러나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그것의 하나가 레위기에 나옵니다. 레위기 이야기를 하자면 약간 걱정이 되요. 왜냐하면 이 (레위기 27:13-16)까지의 이야기가 일단은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만은 무슨 내용인지는 얼른 감이 오지는 않으실겁니다. (레27:13) 만일 그가 그것을 무르려면 네가 정한 값에 그 오분의 일을 더할지니라
(레27:14)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집을 성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하면 제사장이 그 우 열간에 값을 정할지니 그 값은 제사장이 정한 대로 될 것이며
(레27:15) 만일 그 사람이 자기 집을 무르려면 네가 값을 정한 돈에 그 오분의 일을 더 할지니 그리하면 자기 소유가 되리라
(레27:16)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기업된 밭 얼마를 성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하면 마 지기 수대로 네가 값을 정하되 보리 한 호멜지기에는 은 오십 세겔로 계산할지며
(레27:18) 만일 그 밭을 희년 후에 성별하여 드렸으면 제사장이 다음 희년까지 남은 연 수를 따라 그 값을 계산하고 정한 값에서 그 값에 상당하게 감할 것이며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약속의 땅에 주인이 따로 있습니다. 사람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의 이름, 주님이 약속의 땅의 주인입니다. 왜냐하면 그냥 보통의 땅이 아니고 약속의 땅이거든요! 약속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인 힘으로 그곳의 원주민들을 다 추방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땅은 약속에 부합되는 백성들만 있는 땅으로 이미 그 취지를, 정책을 이동시켜 놓았어요.
그러면 그 땅이 지금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잖아요? 하나님이 어떻게 구름으로 손가락 쿡쿡 찌르면서 “내가 여기 있잖아~!” 그렇게 나타나는 건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이잖아요! 안 보이는데 하나님이 주인이며 우리는 어떻게 세금을 내냐는 말입니다. 임대차 계약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땅을 임대해서 농사를 짓고 임대료인 십일조를 내는 그런 말이죠.
천국의 빛의 세계에 동트는 지역을 넘어서서 빛의 세계로 오게 되면 그런 구조로 되어 있는데 하나님이 주인이다라는 말은 뭐냐하면 시간으로 계산 하는거에요. 50年 희년이 되면 모든 땅은 하나님이 주었던 원래 주인에게 도로 돌려보내기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50年 기간 동안에 그 가정의 남편이 병으로 죽던지 전쟁으로 죽는다든지 이웃하고 싸우다 죽는다든지 어쨌든 그 집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왔을 때 처음 엔 땅을 팔수 밖에 없게 되고
그래도 빚이 남았으면 자기 몸을 팔고 딸을 팔고 아들을 팔고 그렇게 노예로 팔려야 되요. 우리가 이런 오해를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데 어떻게 우리 집안이 거덜날수 있느냐! 자꾸 그렇게 생각 하시면 안되요. 우리는 이미 죽은자입니다. “내가 왜 죽었는데요?”라고 하신다면 뒤 따라 법이 와요. 법대로 안하면 저주 받는 거에요. 십계명대로 못 살면 저주 받는 자입니다.
아무리 들여다보세요! 십계명대로 살 수 있습니까? 탐내지 마라 했을 때 우리는 탐내는 재미로 살아가는데 탐내지 마라!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이게 안된다는 거에요. 그러면 “하나님이시여! 법이 너무 가혹하니 법을 바꿔 주세요.” 이런 요구도 안된다니까요. 하나님이 이렇게 하지요. “싫으면 네가 저주 받으면 될게 아니야!”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법은 하나님을 위한 법이지! 우리에게 편리하고 행복을 위한 법이 아닙니다. 교회도 우리의 행복을 위한 교회 아니에요. 예수님이 우리의 행복을 위한 분이 아닙니다. 복음하고 휼륭한 가장되기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아직도 모르곘습니다만 행복한 가정과 교회하고 복음하고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런 장사의 아이템은 내지 마세요. 교회가..
하나님께서 율법이란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 어느 집은 멀쩡하고 어느 집은 갑자기 병이 들고 전쟁나서 포로로 잡혀 죽고 어떤 사람은 망치질 하다가 가장이 죽어서 농사를 지을 수 없어서 온 가족이 전부 남의 집의 머슴으로 종으로 팔리고 그런 일들이 나게 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어차피 약속의 땅에 약속된 백성은 하나님이 가지고 노는 장기 알 같거든요.
차를 댕기든지 마를 댕기든지 포를 댕기든지 기사를 바꾸던지 그건 노시는 주인님 마음대로에요. 다만 우리가 파악하는 것은 그런 규칙만 보면 되요. 그리고 너무 서러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은 우리가 가난하게 되고 고생해도 이 어두움의 세계에서 벗어나면 끝이에요. 거지 나사로가 거지로 살았던 것도 살아있을 때만 거지이지 죽고 난 뒤에 “한 푼 주세요!”하며 천국에서도 돌아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수련회 때도 이야기 했잖아요. 천국에 가면 주님의 은혜에 긍휼의 속성을 받기 때문에 신랑 되시는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멋진 드레스 입은 주님의 신부로서의 모든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 지상의 언어로 최고 좋은 보석들 12개로 표현 된것이 요한계시록21장이잖아요. 문들이 전부 보석으로 되어 있는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아름다운 화려한 다이아몬드 보다 더 값진 영광.
그것이 천국은 말로다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기껏 지상에 있는 것으로 표현 할 수 있는 좋은 것을 다 동원해서 천국의 아름다움을 그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영광, 이건 엄청나요. 요한계시록21장에 예수님의 영광 보면 나오지요. 평소에 예수님하고 잘 알던 사도 요한도 막상 영광된 주님 앞에선 엎드려서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입에서는 칼날이 아오고 목소리는 해수욕장의 물소리 같고 너무 엄청나서 감당이 안되니까 죽은 자 같이 되었어요. “요한아! 고개를 들라! 내가 너에게 계시를 내리리라” 옛날에 보았던 그 예수님이 아니였어요.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그 하늘의 영광을 입는다는 거예요. 부활의 영광을 그리고 영광을 입기 위해서 부활의 영을 미리 앞당겨서 보증금으로 이미 우리가 받았어요. 아파트 보증금 미리 주듯이 이미 우리 보증으로 우리 속에 하나님의 인, 성령으로 이미 받았어요. 따라서 인생 망가지고 인생 어떻게 되었다 그러한 엄살은 피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감옥 같은 지옥에서 살면서 지옥자체가 감옥이니까 거기서 살면서 죄수복 입고 설쳐야지 어떻게 합니까!
주여! 기도 하오니 제발 32°되게 해 주옵소서! 제발 그런 기도 하지 마세요. 다 알아서 맞도록 적합하게 36°되게 하시고 이라크는 50°되게 하시고 이란도 체감온도 70.2°되게하시고 다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희년이라는 것을 통해서 균등하게 되는 적이 없어요. 사람이 똑같이 살면 그것처럼 불행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이 망하는 재미로 살아야 하는데 똑같이 잘 먹고 잘살면 재미없어서 못살아요. 나만 잘 되야 재미있어요.
최고로 재미있는 것은 나만 잘되는 거예요. 같은 죄수복을 입었어도 자기만 옷의 무늬가 예쁠 때 감옥 생활할 마음이 듭니다. 군대에서 건빵도 자기가 제일 많을 것 타 먹을 때 그 안에 별사탕이 하나가 더 많은 것 가질 때 군대 생활에서 갑자기 보람이 생겨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타인과의 경쟁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구축하기 때문에 그런 소꿉놀이라 하지요. 일본말로 방께이라고 하는데 소꿉놀이 하는 식이에요.
희년 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모든 인간이 지키는 게 아니예요. 사람들이 땅을 사놓고 땅을 무른다. 취소시킨다 하면 땅을 샀다가 안산다고 했을 경우에 땅을 희년되면 어차피 주님께 돌려줄꺼니까 남아있는 횟수대로 20% 즉,1.2를 곱하라 이말이죠. 그런데 은50세겔. 그러니까 222L가 한 호멜인데 보리 222L를 뿌릴만한 경작지에 대해서는 은 오십세겔을 내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정해진 것이 아니고 희년에 이것을 땅 샀던 것을 취소하려면 희년부터 계산해서 남아있는 숫자만큼 1.2배를 곱해서 갚아주라는 겁니다. 어차피 희년이 되면 돌려줘야 하고 희년에 가까울수록 그만큼 취소한 액수가 많아지겠지요. 곧 물어야 하니까 돌려줘야 하니까 이말은 뭐예요. 지금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살고 있다라는 겁니다. 약속의 땅에서는 뭐냐하면 거룩과 속됨은 확연하게 구분해 줘야 되요.
쉬운 말로 드라마를 하려면 선한역도 있어야하고 악한 역할도 있어야 되요. 한국의 아줌마들이 아침드라마를 많이 보는데 거기에 저도 포함 시키진 마세요. 가끔씩 보니까! 보게 되면 아침드라마에 나왔던 배우가 지난번엔 악한 역으로 나왔는데 이번엔 착한 역으로 나와요. 그래서 저희 집 사람은 그럴 때 안 봐요. “에잇! 저번엔 악한 역으로 나왔는데 이번엔 착한 역으로 나오네!기분 나빠서 안본다!”.
왜냐하면 전에 악한 역할의 인상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웃으면서 착한 역으로 순박하게 나오니까 이중성이 꼴보기 싫어서... 어째든 거룩과 속됨은 다른 민족, 다른 땅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약속의 땅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어차피 약속에 땅에 거룩이 있던 축복이 있던 저주가 있던간에 그건 옛날 이야기고 옛날에 지역적인 땅의 지정적인 문제 였잖아요. 지금은 선약시대이니까 이건 에스겔은 옛날 이야기 아닙니까?” 라고 한다면 저도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인간의 믿음은 그 사람의 평소에 행동에 대한 규칙으로써 그것이 표현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구약에서는 어떤 정해진 땅을 가지고 돈내고 안내고 그렇게 되어 있지요. 신약에서는 이 땅이 인간의 영혼과 정신으로 전체를 다 퍼졌어요 니가 믿느냐 믿으면 너의 행동 가운데 믿음의 규칙이 나와야지! 패턴이 나와야되! 일관된 형태가 나와야 되요! 행동은 다양해도 그 다양성에서 일관되어 있는 믿음의 원칙. 천국의 원칙이 나와줘야 되요!
그러면 그것은 사람의 행동하는 모든 것이 구약적 동트기전에 있는 구약적 약속에 땅에 해당됩니다. 땅이 영혼이 된거지요 신약에서는 구약의 지역적 땅이 신약이 되면 그 사람의 성전이 되고 영혼이 되고 마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육체의 할례는 소용없고 마음의 할례를 해야 되는 것이 확장의 영역이 우리의 마음까지 된 겁니다. 마음까지 확장이 되면서 어느 땅에 있느냐. 어느땅에 있느냐는 관계 없어요. 그러면 그것을 믿음의 원칙과 아니냐는 어떻게 구분합니까? 이제 마지막 남은 건데요.
그러면 내가 믿음의 원칙이다. 아니다를 어떻게 구분 합니까. 거기에 대한 것은 이렇습니다. 여러분! 낫 놓고 ㄱ자 아는 것은 불가능해요. 낫 놓고 아무리 봐도 ㄱ을 알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낫은 그저 낫으로만 보이기 때문에 그러면 낫 놓고 ㄱ자를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하면 이미 ㄱ자를 알고 있는 사람은 낫과 비교해서 낫놓고 ㄱ자를 아는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ㄱ을 아는데 낫이 왜 필요 하지요!
신약 시대에 와서 동이 튼 시대, 빛이 온 시대에서 빛과 어두움. ‘나’라는 어두움과 빛이라는 예수님을 양쪽을 알고 있을 때, 양쪽을 의식할 때가 그것이 바른 약속의 땅에 해당되는 사람의 영혼이고 마음입니다. ㄱ과 낫 양쪽을 다 알고 있는 거예요. 신약성경보고 구원 받을 생각하지 마세요! 이미 성경을 받은 사람으로써 성경을 봐야 성경이 보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쁜 말은 아니예요.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다 해서 믿어지는 게 아니고 이미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믿는다는 후발적인 고백이 나왔을 뿐이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마라! 하는 거예요. 왜 예수님을 믿는 순간 예수님을 믿는다는 발언 자체가 의미가 없다니까요. 이미 ㄱ자를 이라는 것이 안 이상은 낫을 옆에 놓는 건 의미 없는 것이에요. ㄱ을 안 이상 낫을 놓던지 아니면 톱을 놓던지 아니면 계란을 놓던지 무엇을 옆에 두어도 계란은 ㄱ자와 안 닮았어! 라고 하는 자체가 이미 ㄱ자를 안다는 뜻이 잖아요.
아! 그거는 믿음의 행동이 아니야. 이 말은 이미 믿음을 안다는 뜻이예요. 아 그거는 복음이 아니야! 그건 예수님인데 다른 예수님이야! 안다는 것은 이미 예수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행전에 보면 이방인들도 성령의 세례를 알게 되어 있어요. 성령의 세례를 받으면 이미 주님을 알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으면 동시에 주님을 알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의 세례를 받으면 되는데 왜 또 세상에 나와서 뭘 해야 되느냐! 바로 증거 하라고 주님과 주님의 복음이 아닌 것을 증거 하는 그것. 그것을 안다는 것은 이 성도속에 무엇이 속된것이며 무엇이 축복된 것을 동시에 다 일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바로 에스겔48장15절에 해당되는 사람이에요. 속된 것은 거룩한 것을 바라보면서 그 근처에 속된 것이 있는데 2.5Km 광 오천 척이니까 2.5Km있다.
그 당시에 어두움에 속한 지리적 단어를 사용한다면, 개념을 사용한다면 2.5Km의 장방형의 땅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것이 동이 터서 신약시대에 우리 마음에 와 버리면 십자가 복음을 가리고 십자가 복음을 가리는 행함을 , 여기서 말을 잘 이해해야 되요. 또 십자가 복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행한다는 그런 소리한다 하기 때문에 십자가 복음에다가 행함으로 십자가 복음을 가리는 그 모을 것이 그게 저주받을 것인것을 그 사실을 증거하는 사람이 될 수 있어요.
그것을 어떻게 증거 합니까?. 성도 본인이 매일같이 그렇게 살기 때문에 어떻게 성도의 생활이 자기인생 끝날 때까지 십자가 가리는 죄만 짓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내가 뭔지를 아는데 자기하고 똑같이 해동하는 그걸 모를까요? 예? “목사님! 헌금을 할 때 성령에 충만해서 감사함으로 헌금 하게 되면 그것도 죄입니까? 그것도 죄입니다! 그게 왜 죄입니까? 내가 해봤는데 그것조차 나중에 보니까 그것도 죄였습니다.”
왜? 헌금하는 순간 나의 시선은 내가 내 돈 낸다는 거기에 가 있는 것이 그게 십자가의 죄인됨을 가려버리니까 아! 내가 헌금할 정도로 착한사람, 언제 이렇게 착한 사람이 되었지? 갑자기 착한 내가 십자가로 통하는 진실된 나의 죄됨을 가리는 행위로 이게 드러난 겁니다. 본인이 그것을 느끼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이야 똑같은 인간이니까 뻔해요 딱보면 알지요!
시편 27장 13편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내가 산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것을 믿었도다. 이게 복음입니다! 산자의 땅의 특징이 뭐냐 은혜만 바라보는 사람. 시편27:13 오직 은혜 입니다. 왜 행함으로서는 죄인이기 때문에, 어떤 행함도 죄이기 때문에 은혜로만 구원받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행하지 못하게 가만 묶어두시지 왜 행하게 하느냐?
우리의 모든 행위는 그러 해야만 주님의 은혜를 드러내기에 필요했던 절차로서 우리에게 그런 행동은 우리의 모든 행위는 그래야만 주님의 은혜를 드러내기에 필요했던 절차로써 우리에게 그런 행동 일어나야 하는 겁니다. 강도가 강도짓을 해줘야, 오늘 밤에 낙원에 가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 거예요. 그동안 그 사람은 강도짓 하다가 안 잡히면 안되고 꼭잡혀서 훈방해서 돌려보내면 안되고 꼭. 십자가 옆에 달릴 때 그때 타이밍도 주님과 함께 같이 달리는 타이밍은 하나님의 자기에게 예정에 의해서 그렇게 일이 일어나는 사건들이었다는 말이죠!
그것은 강도가 내가 나 된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강도가 있는 그곳. 주님이 있는 그곳이 바로 산자의 땅이 되는 겁니다.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거기서 강도는 은혜만 바라봅니다. 강도는 산자입니다. 왜 산자를 바라보기 때문에 산자가 되지요. 산자에게서 온 은혜, 그 은혜로만 내가 산자와 합류 할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산자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거침없이 죄 지으세요.
그리고 그 죄가 주께서 우리가 구원받기 위한 예정되어 죄짓는 게 아니라 주님이 자기자신의 전재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를 도구로 사용해서 유발시킨 죄인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알아서 “아하! 이런 게 바로 속된 것이고 이게 바로 저주될 것이구나! ” 아주 기분 좋게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한번 은혜를 바라보는 기회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주가 무엇이며 구원 무엇인가를 성령이 오니까 알았습니다. 우리가 움직이는 약속의 땅인 것을 우리는 몰랐습니다. 우리가 곧 성전이고 약속의 땅인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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