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에스겔 48:21-29 / 본향 본문
이근호
본향
본문 말씀: 에스겔 48:21-29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녹취:오용익 151강-에스겔 48장 21-29절(본향)150812-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48장 21-29절입니다. 구약성경 1229페이지입니다.
에스겔 48:21-29
“거룩히 구별할 땅과 성읍의 기지 좌우편에 남은 땅은 왕에게 돌릴찌니 곧 거룩히 구별할 땅의 동향한 그 지계 앞 이만 오천척과 서향한 그 지계 앞 이만 오천척이라 다른 분깃들과 연접한 땅이니 이것을 왕에게 돌릴 것이며 거룩히 구별할 땅과 전의 성소가 그 중간에 있으리라 그런즉 왕에게 돌려 그에게 속할 땅은 레위 사람의 기업 좌우편과 성읍의 기지 좌우편이며 유다 지경과 베냐민 지경 사이에 있을찌니라 그 나머지 모든 지파는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베냐민의 분깃이요 베냐민 지계 다음으로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시므온의 분깃이요 시므온 지계 다음으로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잇사갈의 분깃이요 잇사갈 지계 다음으로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스불론의 분깃이요 스불론 지계 다음으로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갓의 분깃이며 갓 지계 다음으로 남편 지계는 다말에서부터 므리바가데스 물에 이르고 애굽 시내를 따라 대해에 이르나니 이것은 너희가 제비 뽑아 이스라엘 지파에게 나누어 주어 기업이 되게 할 땅이요 또 이것들은 그들의 분깃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성경을 보게 되면 요즘 시대와도 상관없고, 우리나라하고도 상관없고, 남의 나라의 지도를 보는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이 남의 나라가 아니고 우리의 본향, 우리의 고향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남의 나라처럼 여기는 것은 우리가 본향을 모르기에 내가 태어나고, 우리 부모가 태어난 땅이 자신이 영원히 살 땅인 것처럼 그렇게 오랫동안 양육 받아왔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가 봐도 아브라함의 본토, 고향은 ‘갈대아우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히브리서 11장 15절에 보면,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이렇게 되어 있어요. 본토 아비 집을 떠났는데 본토 아비 집이 그 본토 아비집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이 아브람으로 떠날 때는 본토 아비집이 갈대아우르라는 현재의 터어키와 이라크의 접경지역으로 있었습니다만,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어버려요.
사람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다 바뀐다는 겁니다. 과거에서 미래로 가면서 바뀌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정확히 말해서 그들이 가야 될 그 미래를 위해서 미래 쪽으로, 과거라는 엉터리에서 점점 더 옳은 미래로 이름이 바뀐 겁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뀐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잠시 아브람이라는 다른 인간으로 먼저 살았던 것입니다.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처럼 편하게 생각했던 것을 전부 다 뒤집기를 해줘야 돼요. 우리가 편하다? 상식이다? 그렇다면 가짜다, 그겁니다.
그러면 진짜는? 진짜는 너희도 몰라. 너희도 모르고 다만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작업과 그 계획서가 있는데 그 계획서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도 모르는 우리의 본질, 우리의 진짜 모습으로 전환시키고 바꾸어주시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두 자로 ‘약속’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이 뭐냐? “너희는 의인이 되어서 하늘나라에서 의로운 하나님과 함께 살 것이다.” 그렇게 약속을 한 겁니다. “하늘나라의 의인되기 위해서는 네가 지상에서는 죄인으로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죄인으로 사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천국 갈까?’가 아니라 의인으로 살 인간이 잠시 죄인행세 한 것이 성도의 이 짧은 인생입니다. 죄를 알아야 의를 알기에 그렇습니다. 의를 알기 위해서 의를 아는 것이 아니고 죄부터 알게 하고, 죄 짓게 만들고, 그 다음에 그 내가 지은 죄에서 내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줘야 돼요.
이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지은 죄를 내가 어떤 노력을 해도 이것이 삭제되거나 지워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못 고쳐요. 고칠 수가 없어요. 한 20분전에 생중계하는 컴퓨터가 고장 났어요. 아무리 봐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컴동산이라는 동네 가게로 전화를 했습니다. 기사가 와서 예배시작 전에 고치고 갔는데 아무리 봐도 내 힘으로 못 고치겠어요. 기사가 다 고치고 난 뒤에 “나사가 풀렸네요.” 나사 풀린 것 내가 조인다고 해서 고장 난 것이 고쳐질 것은 아니거든요. 전문가가 따로 있는 거예요. 저는 믿었습니다. 고친다는 그 약속을.
오늘 본문 내용을 다시 봅시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고, 남의 나라 지리공부고, 남의 나라 옛날의 과거역사네.”라고 하실 거예요.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들어가야 될 본향의 모습입니다. 본향의 모습인데 마치 옛날 지나간 어떤 나라 이스라엘의 역사, 지리이야기처럼 꾸며놓았어요. 그게 무늬에요, 무늬. 이미지라고도 할 수 있는 무늬인데 그 얼룩덜룩한 무늬를 정돈하게 되면 천국의 모양새, 배치물이 부각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문자로 되어 있어요. 문자로 되어있는데 그 성경을 성령으로 풀게 되면 이게 물결치고 움직여요. 움직이면서 성경이 성경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확, 하고 우리의 현실배경으로 장식이 되는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마태복음 2장에 동방박사가 평소에 별을 보아 왔어요. 별은 저기 있고 나는 여기 있고. 어떤 영화의 대사 같기도 하죠. “너 거기 있고 나 여기 있고.” 별은 거기 박혀 있고 나는 여기 있고. 그래서 평소부터 별을 봐 왔어요. 그런데 그 박혀 있던 별이 움직입니다. 박혀 있던 별이 움직여요. 그러니까 동방박사는 그 움직이는 별을 따라 왔습니다.
별 따라 오니까 이 세상에 있는 별, 달, 해, 인간, 이 모든 것이 종합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해서 미리 깔아놓은, 보물찾기 하는듯한 하나의 징후들, 흔적들이었고, 퍼즐의 한 조각이고 부분이었던 겁니다. 그것을 맞춰나가니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는 거예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을 맞춰나가야 하는데 아주 복잡한 작업이 남아 있어요. 에스겔에 나오는 이 땅 분배문제, 이것이 우리가 들어가야 할 고향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제가 얼룩덜룩하다고 표현했는데 그 얼룩무늬를 찾아야 돼요. 군복의 문양이 그렇지요.
그 얼룩무늬에서 어떤 질서와 원칙을 우리는 뽑아내면 되는 겁니다. 어떻게 뽑아내는가? 에스겔 선지자가 레위족속출신입니다. 레위족속 출신이라는 것,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지만 제가 죽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에스겔이 다 끝나가는 마당이기에 정리를 해 드려야 돼요. 레위지파에 속한 에스겔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어요. 레위지파라는 그 얼룩무늬가 우리가 들어가야 될 천국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느냐, 그것이 중요하지요.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면, 제사지내는 전문지파가 레위지파입니다. 그러면 제사는 왜 드려야 되는가 하면,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이 땅에 어떤 식으로도 우리의 죄가 우리 힘으로는 없어지지 않아요. 아브라함의 예를 들었습니다만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의인 될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 땅에 살면서 그 내막을 전혀 모르고 출생부터가 이 땅의 사람, 갈대아우르의 사람으로 아버지 따라서 어릴 때부터 그냥 우상 만드는 일에 종사하고 살았습니다. 그것이 자기 현실의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니까 땅에서 떠나서 어디로 가느냐? 이제는 하늘로 가야 될 그런 종족에 속했던 겁니다. 원래부터 하늘에 살 사람인데 잠시 땅의 사람으로 살았던 거지요. 히브리서 11장 13-16절까지 보면, “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여기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해서 맨날 그 사람들이 하늘 쳐다보고 살았다는 말이 아니고 그 하늘가는 길, 곧 자기 자신의 인생 자체가 하늘가는 그 길의 정보가 함유되어 있어요. 아주 단출하게 이야기해서 내 인생이 곧 하늘나라 가는 길이 된다 그 말입니다. 내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고 주님이 그렇게 만든 거예요. “네가 가는 그 길이 네가 지금 하늘나라 가는 절차가 되도록 내가 너에게 개입하고 관여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겸손하게 말하지요. “저에게 뭐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해서요? 제가 지식이 특출합니까, 제가 똑똑하기를 합니까? 저한테 무슨 특별한 것이 있다고 제가 천국 가는 길이 됩니까?”라고 물으면 주님의 답변은 간단해요.
“네가 죄짓고 있잖아.” “그렇지요.” “그 죄가 의로 바뀌는 변화가 너를 통해서 지금 일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죄에서 의로 바뀌는 변화.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또 이야기하지요. “그 말이 맞다면 우리는 날마다 착해져야 하는데 착한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갈수록 착하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않는데 어떻게 우리가 점점 더 의로움에 가까이 갔다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우리가 물으면……, 이것은 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각색은 해서 이야기는 합니다만. 주께서 이야기합니다. “너는 갈수록 너 자신의 착함이나 악함이나 행위에 신경 안 쓰고 오직 하나님의 의로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심이 있다면 그게 바로 네 속에 잠재되어 있는, 네 속의 것을 통해서 보여줄 수 있는 하늘나라 가는 길이 된다.”는 겁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젊을 때는 자기의 행함과 자기의 지식에 어떤 희망을 걸어요. ‘내가 이정도 되니 앞으로 사람들이 이 정도는 인정해 줄 거야.’ 그런데 점점 나이가 들어 많아지면, 물론 성도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고 불신자는 해당되지 않지만, ‘내가 뭘 해도 이것은 나에게 다시 허무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압니다. 솔로몬의 마지막 책이 전도서인데요. 전도서 1장 처음 나오는 대목이 뭐냐?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렇게 해놓고 자신의 헛된 경험들을 전도서에 쫙 깔아놓았어요.
“내가 맛있는 것도 먹어보고, 남들이 하는 골프도 쳐보고, 요트도 타보고, 남들이 한다는 유명한 철학박사도 되어 보고, 과학지식도 많이 알고 요새 말로 책도 많이 읽고, 책도 많이 짓고, 다른 사람에게 지혜도 많이 가르쳤지만, 착한 일도 많이 하고 구제도 많이 했지만, 착하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나쁘다고 지옥 가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렇게 결론 내렸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그런 헛된 인생을 살면서 당신이 아는 여호와 하나님은 뭐냐?”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이 던진 말씀을 자신이 회수하는 가운데서 건질 자만 골라서 건지더라.” 그 말입니다. 그것을 아주 고상한 말로 ‘다윗언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약속대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언약 속에 무엇이 장착되어 있는가? 다윗언약 속에 레위지파의 레위제사가 다윗언약 속에 장착되어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모세언약, 모세언약을 레위언약이라고 하는데 모세언약 다음번에 나올 언약이 다윗언약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세한테 율법을 주고 레위한테 율법을 줬지만 그들이 인간인지라 그 율법을 감당을 못했습니다. ‘그래, 내가 이 법 지키면 내가 의인되어서 구원 받으리라.’ 생각은 굴뚝같고 뻔히 보이지만 막상 그 법을 행하는 가운데서 여분의 죄들이 자꾸만 더 나오는 거예요. 제가 수련회에서 이야기했습니다만, 잡았다 싶으면 법이 “그것은 내 뜻에 일치되지 않지. 날 잡아봐라.” 하는 거예요.
또 잡았다 싶으면 마치 내 앞서서 가는 사람의 그림자를 밟는 것처럼, 달그림자를 쫓아가는 것처럼, 다가가면 간 그만큼 멀어져요. 임 그림자처럼. 저만치 자꾸 가요. 잡았다 싶으면 저만큼 떨어져 있어요. 오히려 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는 그 폭이 우리로 하여금 깊은 죄책감을 더 갖게 합니다. 아, 법을 지켰기 때문에 비로소 발생되는 죄책감. 안 지키면 모르는 죄책감. 지켰다고 자부했기 때문에 남들이 모르는, 나만이 아는, 진짜 말씀과 나의 선행과의 그 엄청난 계속, 질곡, 건너설 수 없는 딜레마 같은 것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법은 지켜봐야 알아요. 지켜봐야 아는 것을 가지고 지키지도 않고 결론부터 알아가지고 “못 지킨단다. 지키지 말자.”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하고요. 십일조를 해 봐야 십일조로 구원 안 받는다는 것을 알지 십일조는 돈이 아까워서 하지도 않고서는 “이 근호 목사님이 십일조 해도 소용없답니다. 십일조 해도 구원 못 받는답니다.” 참, 핑계가 좋지요. 마음껏 이용하세요. 이용하는 것은 좋은데………. 이것은 사도바울의 권면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때 자기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 이걸 어떻게 우리가 성취합니까? 자기 사랑안하면 사는 재미가 없는데. “마지막 때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 그런 말씀들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다윗언약에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미 다윗언약에 오게 되면 레위언약에 의해서는 제사해도 구원 안 된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그 제사의 담당자가 아담에 속한 인간이었다는 것, 아담에 속한 인간이 제사를 담당했다는 그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인간이 제사를 담당한 거요. 인간이 양 잡고, 인간이 제사장이 되고, 인간이 어떤 복장을 하고 성전에 들락거리면서 제사를 한 것, 그것이 문제가 된 겁니다. 그래서 에스겔에서는, 인간은 그만! 이제는 하나님이 왕이 되셔서 친히 제사 드리는 방식의 언약, 약속이 투입되는데 그게 뭐냐? 그게 다윗언약입니다. 다윗언약.
다윗은 레위 인하고는 달라요. 레위인은 제사장이지만 다윗은 왕입니다. 왕과 제사장의 차이가 뭐냐? 왕은 모든 것을 총괄하는 책임자에요. 왕은 백성을 대표합니다. 그 왕의 이름을 ‘주’라고 합니다. 주라는 것은 사적인 관계가 아니고 어떤 집단을 대표하는 관계에요. 그래서 나의 주는 없고 ‘우리의 주’만 있어요. ‘우리의 주’만. 세쌍둥이가 있다고 합시다. 예를 들어 대한, 민국, 만세. 대한이가 하는 말이 “아빠는 내 아빠야.” 하면 민국이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면 나는 아빠가 없네?” 이러면서 막 웁니까? 만세는, “형들이 아빠 다 가져가 버리고 나는 아빠도 없네.” 그렇게 합니까? 아니지요.
대한, 민국, 만세, 세쌍둥이의 아빠는 둘이 아니고 송 일국이라는 딱 한 사람이라니까요? 딱 한 사람이 아빠에요. 공통아빠에요. 그게 아버지와 아들관계입니다. 다윗은 그리고 다윗의 가문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버지가 친히 만드셨기에 사람이 개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만든 아들, 다윗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다윗 믿으면 구원 받습니까?” 하는데 그 다윗이 두 종류에요. 아담에서 내려온 다윗이 있고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내려온 다윗이 있습니다. 아담에서 내려온 다윗은 하늘에서 내려온 다윗을 가렸어요. 앞에 있는 골리앗 죽인 다윗이 늙어 죽어버리니까 비로소 그 뒤에 진짜 다윗이 등장하면서 그 분이 오늘 본문 에스겔 48장에 나오는 그 천국의 중심지를 차지하는, 천국의 중앙지를 차지하는 임금님, 우리의 왕이 되시는 겁니다.
벌써 얼룩무늬가 대충 정리가 되지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 22절에, “유다 지경과 베냐민 지경 사이에 있을찌니라.” 그 뒷부분은 읽기도 짜증날 정도에요. “ 그 나머지 모든 지파는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베냐민의 분깃이요 베냐민 지계 다음으로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시므온의 분깃이요 시므온 지계 다음으로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잇사갈의 분깃이요 잇사갈 지계 다음으로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스불론의 분깃이요 스불론 지계 다음으로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갓의 분깃이며.” 읽는 것도 짜증난다니까요.
이게 뭐 길래 같은 말을 반복해서 지루하게 만드는가? 이게 뭐냐 하는 거예요. 이것은 열 두 지파가 왕 하나가 제대로 된 왕 노릇을 해서 다른 지파가 공짜로 천국에 입성하는 얼룩무늬를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모형이거든요. 구약은 하나의 모형이라는 말이지요. 구약이 하나의 모형이라고 할 때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군사작전 할 때의 그 모형 판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십분의 일이나 이십분의 일로 축소를 해서 모형을 만든 거예요. 설계사 사무실에 가면 자기가 설계한 아파트의 축소모형을 책상 위에 만들어 놓았지요. “제가 이 아파트를 설계한 사람입니다.” 하고 자랑스럽게 모형을 만들어놓잖아요.
이렇게 우리에게 모형을 만들어주신 겁니다. 모형은 크기가 얼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모형의 중심부와 변방부가 어떻게 연결되느냐의 그 고리에 초점을 맞춰야 돼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뭐냐? 왕이 있고 왕 주변에 열 두 지파가 각자 자기 땅을 분배받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나님의 천국은 열 두 지파 외에는 없다는 겁니다. 열 두 지파 외에는 돌아갈 땅, 천국은 없습니다. 좌석이 이미 매진되었어요. 표 없습니다. 아,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어떻게 들으면 서러운 이야기고 누가 들으면 ‘야호!’ 하고 파이팅을 외칠 이야기입니다. 좌석표는 어떻게 할당되느냐하면, 열 두 지파에게 할당이 됩니다. 그리고 열 두 지파는 본인의 노력과는 전혀 상관없이 열 두 지파의 대표자에 의해서 공짜로 그 땅을 분배받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열 두 지파의 대표가 누구냐 하면, 레위지파였고 그 레위지파는 모세언약에서의 레위지파지만 그 이후에 다윗 언약의 레위지파에서는 제사제도, 그 레위지파가 왕의 예속 하에, 왕이 통치하는 그 아래에 레위지파가 포함이 되게 되어 있어요.
제가 일방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러분에게 어떤 그림이 그려집니까? 친절을 최대한으로 베풀겠습니다. 야곱에게 아들에게 열두 명이 있어요. 야곱의 열두 명의 자식이 있다는 말은, 너희들만 천국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이름이 바뀌어요. 야곱의 이름이 처음에는 야곱이었는데 나중에는 그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이스라엘로 바뀌는데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에요. 터키의 하나님이 아니고, 필리핀의 하나님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에요.
이 말은 이미 천국 갈 사람은 확정되어 있고 확정되어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이 땅에 천국 갈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미리 깔아놓은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 열 두 지파가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는데 그들은 모형이라니까요, 모형. 모형은 실체가 오게 되면 쓰레기통에 집어넣어버려야 돼요. 그 모형은 여기서 수천 킬로 떨어진 거기에, 여전히 지중해 연안에 있어요. 지금도 이스라엘 나라가 있잖아요. 그들은 본인들이 모형인지를 몰라요. 그들은 자신들이 실체라고 여깁니다. 진짜 자기들이 이스라엘이라고 아직도 착각하고 있어요. 원자폭탄 만들어서 지킨다고 그러고 있어요.
모형에서 진짜로 바뀌려면 아브라함의 혈통 말고 온 혈통을 대표하는 메시아, 그런 구세주가 이 땅에 나타나면 돼요.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물론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나타났지만 그 원 혈통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 모습이라고 하면 또 삼위일체를 연상해서 모습이라고 하지 말고, 이 땅에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것을 두고 요한복음 1장에서는 “말씀이,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가 육신이 되셨으니 독생자의 영광이라.”한 겁니다. “너희들 보기에 초라하게 보이지만 하나님이다.” 그런 뜻이에요.
독생자의 영광, 하늘의 영광이 땅에 내려와서는 굉장히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왜? 이 땅에서는 어디까지나 모형 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모형 적이거든요. 이 땅에서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버리면 전부 다 장님 돼버려요.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영광된 주님이 나타나자 사도요한이, 평소에 잘 알고 지냈고 ‘주여’ 하면서 기대어 밥도 먹었던 그 요한이 진짜 예수님 영광이 나타나니 그 앞에서 엎드러져서 죽은 자 같이 되었어요. 그 입에서는 날 선 검이 나온다, 하고 그 목소리는 해운대 파도치는 소리 같은 그런 소리가 나오고. 이것은 인간의 언어로는 형용되지 않는 다른 세계에 속한 분인 것이 맞아요.
그 분이 이 땅에 올 때는 그냥 목수의 아들로 평범한 모습으로 오신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에게 개무시를 당했지요. 많은 철학자와 문학가들로부터 예수님은 개무시를 당한 겁니다. 예수가 어쩌고저쩌고. 예수가 자기 동창생입니까? 자기를 창조하신 분인 줄 모르고 예수의 성격이 어떻고, 가룟유다가 없었다면 예수의 일은 실패했을 거라는 등, 이런 저런 핑계를 다 대고 있어요. 모형에서 실체로 바뀌면서 드디어 모형 적으로 설명한 것은 끝났습니다. ‘에스겔의 모형이 완성을 보았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얼룩무늬가 이제는 완성을 본 거지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내용은 뭐냐? 왕이 중앙에 있고 북쪽에 여섯 지파, 다시 확인해 봐야겠네요. 에스겔 48장 2절부터 보면, 단, 아셀, 납달리, 므낫세, 에브라임, 르우벤, 여섯지파죠. 그 다음이 유다, 베냐민, 그 밑으로 24절에 보면, 시므온, 잇사갈, 스블론, 갓,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왜냐하면, 레위지파는 그 안 중간에 들어 있으니까요. 지금 여기에 나오는 다윗 왕, 장차 이 무늬가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 그 하나님 중심으로 야곱의 자손이라는 이유 때문에 공짜로 천국의 땅을 할당받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까 제가 남겨둔 그 말, 왕과 그 나머지 공짜로 땅, 천국에 가는 그 사람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이 관계에 대해서 여러분이 납득이 되고 동의가 된다면 여러분은 열두 지파에 속한 천국 가는 백성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 관계에 대해서 거부하고 “나는 내가 알아서 천국 가겠습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본인이 구세주가 돼요. 본인이 왕이 되고, 본인이 본인의 교주가 되고 본인이 그 교주의 충실한 교인이 되고. 천상천하유아독존, 자기밖에 모르게 돼요.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는 사람을 주신 겁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특징은 뭐냐? 본인의 인생이라는 것이 자꾸 외부로부터 간섭을 받아서 자기 뜻대로 되지를 않아요.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목사님, 기도를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할 때 설명을 많이 했는데도 불구하고 잘 정리가 안 되시는 모양이에요. 이 참에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기도는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게 기도에요.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런데 ‘아버지의 원대로 하게 되면 내가 기도할 필요도 없네. 하나님이 자기 맘대로 알아서 다 하는데 내 기도가 무슨 상관이 있어?’ 이렇게 돼버리면 이 관계가 끊어져버려요.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라도 내 소원, 내 뜻을 내가 스스로 포기할 수 있는 능력자가 못됩니다.”라는 것을 누구 앞에 털어놓아야 되느냐 하면, 우리의 구세주 되시는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서, 왕 앞에서, 진짜 다윗 왕 앞에서 털어놓는 관계가 그 관계입니다. 이게 구원받는 관계에요. “너는 죄인이고 나는 너를 용서하는 의인이다.” 이런 관계로 엮어져야 돼요.
그렇지 않고 불신자는 뭐냐? “네가 신이야? 네가 메시아야? 그렇다면 내가 지금 십자가에 달린 강도니까 네가 알아서 이 박힌 못을 빼고 나를 건져내 봐라. 그러면 내가 당신을 믿어줄게.” 이것은 대표적으로 지옥 갔던, 예수님 한 편에서 십자가에 달렸던 그 강도의 주님에 대한 소감입니다. “나는 십자가 위에서 주님을 만난 적이 있는데 거기서 나는 예수님을 이런 식으로 평가했다.” 그 평가한 그대로 그 사람은 지옥 가는 거예요. 그런데 하필 주님이 십자가 질 때 두 강도 사이에 있었어요. 옆에 있는 다른 강도는 말하기를, “주님, 주님 하늘나라 임할 때 저를 생각해 주세요.” 이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뭐냐 하면, “제가 여기 강도로 십자가에 달린 것과 주님이 천국을 이루는 그것과…….” 오늘 본문과 연관 지어서 쉽게 풀이하게 되면, “주님, 저 같은 자에게 천국을 할당하기 위해서 저를 일부러 강도 만드신 것 맞지요? 그렇지요? 그렇다면 주의 나라 임할 때 저를 잊지 말아주세요.”라고 이야기하니까 주님이 하신 말이 “네가 오늘 밤 나와 함께 낙원에 가리라.”라고 했다는 말이지요. 그 이야기를 지옥 가는 강도가 들었으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목숨이 간당간당 하니 저 둘이 다 미쳤구나.’ 이렇게 생각할 거라는 말이지요. ‘나와 같이 십자가 처형 받는 주제인 저 예수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무슨 재주가 있다고? 오늘 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잘들 논다. 아이고, 위로 받을 데가 없어서 그런 멘트 날리면서 서로 위로 받나!’라고 불신자들은 마구 놀릴 거예요.
놀라운 사실은 불신자만 놀리는 것이 아니고 목사 된지 40년, 50년 된 늙수그레한 목사들, 신학자들, 신학교수들이나 장로들이 속으로 그런 생각으로 교회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50년 믿었는데 예수는 구경도 못했다. 예수 말씀은 관심도 없어. 나는 그냥 한평생 교회에서 대우받고 잘 놀았다. 끝!” 그겁니다. 목사 같으면 “나는 교회 이용해서 생계유지 잘 했다. 끝!” 그거에요. 왜냐? 사나죽으나 이 땅의 사람이니까. 어제도 나고 오늘도 나고 이 나를 버릴 수가 없어요. 그러나 히브리서 11장의 아브라함은 이 땅에서 나그네입니다. 본향은 자기 집안이 아니에요. 본향은 따로 있어요. 야곱이 자기 집안이고, 예레미야가 자기 집안이고, 이사야가 자기 집안이고, 모세와 엘리야가 자기 집안이에요.
기존의 식구들, 자기 집안 아닙니다. 자기가 그렇게 되고 싶어 했던 게 아니에요. 점점 더 진짜 자기로 달라져가고 있습니다. 진짜 자기, 자기도 그렇게 될 줄 몰랐지요. 주위 사람들은 전부 다 한평생 자기 잘난 맛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성도는 주님 잘난 맛이 자신의 전부에요. 자기는 못난 맛에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순재가 한 유명한 말이 있어요. “못난 놈!” 그게 얼마나 복음적이에요? “못난 놈!” 목욕탕 사업 하면서 그런 소리 했거든요. 그 얼마나 복음적인지 몰라요. “주여, 생활비가 떨어졌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못난 놈!” “애가 성적이 안 올라요.” “못난 놈! 그것도 기도라고 했나?” “집 사 주세요, 집사주세요!” “못난 놈! 너는 네 본토 아비 집을 평생을 두고 떠나야 해. 평생을 두고.”
한번 떠나서는 안돼요. 우리는 본토 아비 집을 평생 떠나면서 전에 있던 본토 아비집이 본토 아비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갑니다. 출발점이 그 쪽이 아니고 원래 하늘에서 출발했기에 원래의 하늘로 귀환하는 겁니다. 어떤 분은 10일 동안 미국 다녀왔어요. “좋던가요?” 물어보니 “집이 최고”라는 거예요. 바로 그게 복음입니다. 휴가를 백날 가고 어디를 가도 본향보다 더 좋은 곳이 없어요. 아무리 호강을 하고 아무리 워터파크에서 물놀이해도 대한민국의 내 집, 물새는 화장실의 그 집, 그래도, 그래도, 그 좋다는 미국보다 훨씬 좋아요. 물론 미국 가면 또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는 문제지만.
어차피 떠도는 인생, 떠돌이,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에스겔 보게 되면, 이미 우리는 할당 받았어요. 우리가 예뻐서가 아니라 왕을 한 가운데 두고 남북으로 여섯 지파씩이 배치되어 있다는 겁니다. 전부 다 왕이 용서, 긍휼이라는 이름으로 꽉 붙잡고 있어요. “너는 죄인이고 나는 의인이고. 나의 의인됨이 네 눈에 보이나?” “보입니다.” “네가 죄인인 것이 보이나?” “보입니다. 제가 ‘못난 놈!’ 입니다.” 보이는 거예요. 헌금했다고 자랑하고, 전도했다고 상 받고 좋아하고, 그런 쓸데없는 짓, 돌고 도는 그런 짓, 이제는 그만 돌았으면 좋겠어요. 진짜 자칫하면 돌아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본문을 통해서 거기 배치되어 열 두 지파에 속한 그것이 원래 레위지파가 책임져야 했는데 그 레위지파가 인간인 이상은 그 일에 실패해요. 제사에도 실패했어요. 하지만 그 실패를 왕이 담당합니다. “목사님, 다윗은 성공했습니까?” 다윗도 실패했어요. 다윗도 실패했지만 다윗의 위상이 뭐냐? 실패했지만, 다 실패했지만, 혼자 왕이기 때문에, 왕이라는 이유 때문에, 진짜 책임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진짜 다윗 같은 왕이 이 땅에 등장하지요.
로마서 1장 3절의 참, 복음이야기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다.” 안 믿는 사람, 소설가나 철학자 같으면 “무슨 엉뚱한 자기 조상 이야기를 늘어놓느냐?” 할 건데 이 분이 일반 사람들의 조상이 아니에요. 택한 자의 조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요. 심지어 자기 백성들한테 밉상 받은 분이에요. 자기 백성들한테 차인 분입니다. 메시아 기다리는 이스라엘한테도 배격당하고 그들도 못 알아보는 사람, 그런데 성결의 영, 부활의 영이 우리에게 찾아옴으로 말미암아 ‘내가 한국사람 된 것은 임시적이었다.’는 사실, 하나의 모형으로서 한국 사람으로 살라고 한 것입니다.
강도가 강도질 하면서 평생 산 것은 임시적이었어요. 천국 가도 강도하겠습니까? 천국에서 칼 들고 다니겠어요? 이 땅에서만 강도질 하다가 천국 간 겁니다. 그 강도는 이 땅에서 강도질 하는 것으로 죄를 지었지만 우리는 또 다른 모습으로 죄를 지으면서 이제나 저제나 의인되시는 주님의 의로 말미암아 그분이 우리의 중심이 되고 우리는 그분의 그림자가 되어서 그분과 연관되어 있는, 그분의 변방에 있는 그 분의 줄기가 되어서 이 땅에서 얼룩무늬로 천국에 들어갔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보여주면서 우리의 고향을 찾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세상 뉴스에 신경 썼고 세상 부귀영화에 마음 빼앗겼습니까? 이제는 말씀에 마음 빼앗기게 해주시고 살아계셔서 우리를 날마다 천국백성 만들어내시는 주님의 솜씨에 마음 빼앗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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