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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잠언'속의 그리스도 30 -말씀의 실제성 / 150420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잠언

'잠언'속의 그리스도 30 -말씀의 실제성 / 150420

정인순 2015. 4. 20. 21:15

음성            동영상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30 - 말씀의 실질성
                                                                                
                                                         

15,04,20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01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이게 잠언서에 나옵니다. 네가 하는 일을 누구에게 맡기라는 겁니까? 여호와께 맡기면, 그 일을 성사시키는 것은 여호와께서 하신다는 겁니다.

(잠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우리 일을 여호와께 맡기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를 일을 성사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일을 가지고 우리의 일은 끊어지는데, 즉 우리의 희망과 소망은 박살이 나고, 그것을 가지고 주의 일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주님의 희망과 목적대로 말이다.

 

◈ 주여, 성전을 닦는 걸레라도 좋습니다 !!

매우 간단한 이야기인데, 그런데 우리도 고집이 있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주님이 해주시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즉 "주님, 제가 이것을 드릴 테니, 제가 원하는 대로 해주세요" 라고 하는데, 즉 우리가 주인이라는 것이다. 마치 자기 옷을 세탁소에 맡기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자기 옷이니 제대로 세탁을 잘해서 입기에 좋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맡기 세탁물을 그만 걸레로 만들어버렸는데, 그러면 우리의 고백은 "주여, 성전을 닦는 걸레라도 좋습니다"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나는 주님의 손에 의해서 변형이 되어서, 주님이 쓰신다면 참 고맙겠습니다" 라고 하는, 그것이 성도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시편에 나오는데 말이다.

(시 84:10)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그러면 어떻게 변하는지, 그것은 구약에는 나오지 않고 신약에 보면 나와있는데, 그 변형되는 모델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처럼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제 낮 예배시간에도 그런 설교를 했는데, 먼저 주의 것으로 만들어놓고 아버지께 영광이 되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주의 것이 되지 않으면 아버지께 영광이 되지 않는데, 자기가 착한 일을 한다고 해서 영광이 되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모델이 되고, 주님의 것이 되고, 주님은 그렇게 주님의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 값을 주고 샀다는 말이다. 그렇게 바뀌어져서 영광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바로 그 주님의 몸이 성령과 육의 최초의 만남인데, 그게 곧 성령의 전, 혹은 성전의 완성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 인간의 몸은 무엇인가? 시다바리인가? 사실 그렇게 되면 고마운 일인데, 그런 종의 신분은 천사도 부러워할 위상이라는 것이다. 시골에서 자식을 키워서 청와대에 시다바리로 들어가도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인데, 대통령이 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의 비서만 되어도 말이다. 그런 비서가 되었다고 해서 슬퍼하고 통곡하는 부모가 있는가? 그런 경우는 없는데, 아주 고급 공무원이니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모시는 분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엄청난 분이라는 것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이 땅에서 슬퍼하고 걱정하는 기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성령의 전이고 모델인데, 그 예수님이 값 주고 산 사람들이 성경에 보니 '신앙인' 이라는 이름으로 나열되어있다는 말이다.

그 예를 하나 들어보면, 누가복음 2장 25절과 26절을 보자.

(눅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눅 2: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

이 구절을 하나만 설명하려고 해도 몇 시간이 걸리지 싶은데, 먼저 예루살렘을 설명해야 하고, 또한 이스라엘을 설명해야 하고, 그리고 이스라엘의 위를 기다린다는 것이 기존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다렸던 그 위로와 같은 위로인지, 그것을 따져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이스라엘은 국가 이스라엘이지만, 참된 이스라엘의 위로는 메시야의 나라인데, 그러니 차이가 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시므온' 이라는 사람에게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참 신기하다는 것인데, 어제는 시간 관계상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즉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냐는 것이다. 신자라고 자칭하는 우리부터 먼저 분명히 해야하는데,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냐는 말이다.

 

◈ 성령이 없으면 인간이 아냐 !!

결론부터 말하면, 성령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대한민국 헌법에는 없다는 말이다. 물론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의 훈시시간에도 없고 말이다. 만약에 그런 훈시를 하게 되면 난리가 나지 싶은데,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성령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는 것이다.

에스겔서에도 나와있지만, 마지막 때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나님의 새언약이 담기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데 말이다. 예를 들어서, 아이들에게 좋은 장난감을 사주었는데, 그 안에 건전지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아무리 '태권V' 라고 해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다.

(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다시 말해서, 인간이라고 생겨먹어도 그 안에 성령이라는 건전지가 없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고, 그러면 저주의 대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성령이라는 말을, 세상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당연하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싫어하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말이다.

물론 만들어내는 교단도 있는데, 빡시게 기도하면 된다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완전히 구라인데, 성령을 부르짖는다고 오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와달라고 해도 결코 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성령은 인간의 지시를 받는 게 아니라, 성령은 성자 예수님의 지시를 받는데, 물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는 하나님 아버지의 지시를 받았는데 말이다.

 

◈ 성령은 삐치는 분이 아니라 !!

성령께서 지시를 받는 위치가 어디인고 하니, 하나님의 오른 편인데, 그 오른 편에 누가 앉느냐에 따라서, 그 앉은 분의 지시에 따른다는 것이다. 즉 성령 자체가 수동적이고 피동적인데, 그래서 구약에서는 성령을 하나님의 영이라고 하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영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거기에 대해서 성령께서 아쉬워한다든지 삐치는 일이 없는데, 그게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혜사' 라고 하시는데, 즉 "나를 도와주는 하나님이다" 라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도와주는 영, 하나님을 도와주는 신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성령인데, 물론 창조에도 관여하시고,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에도 관여하시고 말이다. 십자가에 죽기 싫어하시는 주님을, 성령에 충만해서 결국은 죽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성령 본인의 의사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의사에 따라서 하신 것인데,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을 주로 만드시는 작업에 깊숙이 주권적으로 개입하셨다는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성령에 따랐기 때문에 비로소 십자가에 죽으실 수가 있었고, 언약을 완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작업은 하나님 내에서 모두 완벽하게 처리가 되는데, 우리 인간이 누리는 것은 하나님 자체 내에서 이룬 것을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선물로 그냥 공짜로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여받은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소유하라고 받은 것이 아니라, 그런 주님을 증거하라고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 시므온은 평범한 사람, 그러나 !!

시므온의 경우에, 그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인데, 자기가 아는 것도 한계가 있는 말이다. 그러니 성도에게 다루어지는 모든 힘은,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을 넘어선 것에서 나오는 힘인데, 그래서 성도에게는 자기가 알아서 감당하는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다 감당하신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도에게는 언제나 감당하지 못할 일들이 일어나는데, 당연히 그것은 낯선 일이고 말이다. 주님은 그렇게 하면서 성도로 하여금 "아하,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날마다 깨닫게 하면서 살아가게 하신다는 것이다.

시므온도 역시 그러한데, 그런데 그런 시므온에게 성령이 임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성령이 임함으로서, 그 다음에 주어지는 내용이 무엇인가? 26절에서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성령의 관심사가 무엇인고 하니,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꽂혀있다는 것이다.

 

◈ 힌두교 - '신은 언제나 신이다' !!

인도의 힌두교에는 신이 무려 수 천 개가 넘는데, 그 중의 하나가 '비숫누' 라는 신이 있다는 것이다. 힌두교의 신을 보려면 캄보디아에 가면 되는데, 거기에 유명한 고대 힌두교의 신전이 있는데, MBC를 보면 거기에 놀러가라고 선전도 하는데 말이다. 원래는 인도의 종교지만, 캄보디아나 라오스 등지로 퍼졌다는 것이다.

그런 곳에 보면 신들의 축제를 하고 하는데, 신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저는 가보지는 않았는데, 그런 것이 신에 대한 인간들이 끄집어낸 아이디어의 총집합이라고 보면 된다는 말이다. 인간이 신을 믿는다고 하면 과연 어떤 신들이 필요한지, 그것은 인도에 가면 된다는 것이다.

힌두교의 신은 지역마다 가서 골라잡으면 되는데, 그 중에서도 '비숫누' 라는 신은 무엇인고 하니까, 이 세상이 자비롭게 만들어졌다고 하는 신이란 것이다. 그러니 이런 것을 공부한 사람은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기독교나 힌두교나 같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하지만 힌두교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신은 언제나 신이다" 라는 것이다. 신이 인간이 되어서 살해를 당한다는 것은 힌두교에는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수 천 개의 신이 있어도 말이다. 왜냐하면, 신이 인간이 되어서 이 세상에서 만나게 되면, 이 세상은 신의 세계가 되고,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신은 위에 있고 인간은 밑에 있기 때문에, 신은 인간이 주는 뇌물이나 받고, 이 땅에서 인간들이 잘 살아가도록 조치를 취해주시면 된다는 것이다. 신이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위기인데, 왜냐하면 신이 인간이 되면, 인간은 본래 자기 가치를 상실한다고 보기에 말이다.

 

◈ 신과 시어머니는 적당한 간격을 유지해야 !!

그래서 제가 언젠가 강의를 하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신과 인간은 적당한 간격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너무 가까이 오게 되면 인간은 숨이 막혀서 죽는다는 것이다. 시어머니를 가까이 살면서 모시는 것은 괜찮은데, 그런데 한 집에 살면 숨이 막힌다는 말이다. 요즘은 시어머니도 같이 막힌다고 하는데 말이다(ㅋㅋ).

그러니 조금은 거리가 있어야만 하는데, 그래야 효도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거리가 없이 같이 있으면 효도는 고사하고 짜증만 나는데, 그래서 가까이 있는 효자는 없는데, 멀리 있어야 뭔가 망상과 같은 것이 개입해서 효자로 만든다는 것이다. 효자라서 효자가 아니라, 자식을 생각하는 그 자체가 효자로 만든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식을 자랑하는데, 물론 요즘은 자식과 보이스 피싱이 차이가 없는데(ㅋㅋ),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식이 비밀번호를 알아서내서 다 빼내간다는 것이다.

아무튼 힌두교에서 신은 무엇인고 하니, 항상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 인간이 주는 모이와 같은 헌금을 받아줘야 좋은 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도 십일조를 하고 주일성수를 하는 것은, 신이 멀찍이 있다고 하는, 그런 힌두교와 같은 바탕 위에 기독교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요즘 교회가 그러한데, 즉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고, 헌금을 받으시고" 라고 하는데, 그것은 우리 인간 쪽에서 원하는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신이 바로 코앞에 있어서 그만 와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간격이 줄어들게 되면, 우리는 자기 자신의 가치가 그야말로 천하에 죄인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헌금을 한 자기 가치를 회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가치를 잃는다는 점에서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도사나 부교역자가 새로 와서, "하나님은 저 하늘에 계시고,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고, 전도를 받으시고" 라고 설교를 하면 당회장에게 인정을 받겠지만,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라고 하면 당회장이 싫어한다는 것이다. 

 

◈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

그런데 여기 26절에 보니,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라고 하는데, 즉 성령의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즉 시므온이 본다는 말인데, 그렇게 볼 수 있도록 온다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그런 발상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눅 2: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 하늘에 계신 그 주님이, 해와 달과 별과 그 모든 것을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주님이, 그분이 우리 앞에 사람의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그게 과연 상상이나 되느냐는 말이다. 저 하늘에서 할아버지로 바둑이나 두고 계시면 몰라도 말이다.

 

◈ 짜장면을 배달하시는 하나님 !!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이 땅에서 오셔서 짜장면을 배달하고, 서비스로 군만두를 내놓은 분이 하나님이라고 하면, 그게 과연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목수 일을 하셨는데, 그러니 문짝이나 식탁을 물건을 만들어서 각 사람의 집에 달아주었다는 것이다. 집도 지어주시고 말이다. 과연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인간들이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겨우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을 두고 어떻게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상상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무슨 하나님이 저래? 하나님 꼬라지가 왜 저래?" 라고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도대체 그런 초라한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뺨을 맞고, 옷을 벗기고, 그래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하나님, 그것은 전혀 우리가 생각한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힌두교의 하나님인데, 힌두교가 그런 모든 우상을 대변하고 있는 종교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들은 우상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것은 기독교에서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이고, 자기들은 그게 진짜 신이라는 것인데, 그래서 대자연을 설명해보라고 한다는 말이다.

 

◈ 그런데 개인에게 성령이 오게 되면 !!

바로 그러한 진실을, 성령을 보내신 주님도 신기하지만, 그런데 여기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어떤 개인에게 그 성령이 왔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하다는 것이다. '시므온' 이라는 분이 성령을 받음으로 말미암아서, 성령을 받지 않는 다른 사람들은 사람으로 취급도 받지 못하는데, 그런 아주 중요한 대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므온을 보고 사람들이 "니가 뭔데 니만 받는가?" 라고 하면서 공격할 수도 있는데, 그러니 시므온은 졸지에 그만 죄인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알아서 주시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는 말이다. 자기가 와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인간이 요구한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일방적으로 주어져버리면, 그러면 무슨 판이 다 깨어지는고 하니까, 그동안 하나님에게 와달라고 했던 그 모든 종교적인 행위들이, 예배나 기도가 말이다. 그런 것이 모두 헛짓이 되고 마는데, 그러면 거기서 영업을 해먹든 인간들이 그만 졸지에 사기꾼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목사나 장로들이 말이다.

그것을 두려워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자기들은 졸지에 점쟁이나 무당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기독교가 그만 샤머니즘이 되고 마는데, 기독교 2,000년이 샤머니즘의 역사가 되고 만다는 말이다. 시므온에게 성령이 오신, 그 한 가지 사건으로 말미암아서 말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는데, 성령을 보내주셨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같은 인간들 가운데 성령을 받은 자가 있다는 것이, 하루에 3끼를 먹고 똑같은 옷을 입는데, 그런데 그런 어떤 인간에게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이라는 것이다. 

 

◈ 너는 이미 수능 만점이야 !!

수능시험을 11월에 치는데, 지금이 4월이라도 고3들은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학생이 "나는 수능시험에 만점을 받았다고 통지가 왔다" 라고 하면서 선언을 하게 되면, 그동안 수능을 준비하던 모든 학생들은 그만 바보가 되고 마는데, 즉 수능을 준비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당장에 교육부에 항의가 들어가고 난리가 난다는 말이다. "벌써 수능시험을 치고 만점을 받았다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게 무슨 일이야?"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고, 그러면 우리는 그 말씀을 잘 지키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마지막 심판을 받을 때 수능시험을 잘 쳐서 구원을 받으면 된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란 것이다. 그리고 그 합격의 범주 내에 있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이고, 이방인들은 개와 같아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이 마치 밤에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그렇게 갑자기 성령이 떨어지니, 지금까지 인간들이 짜놓은 구원의 스케줄이 그만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죽였다는 말이다.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은 그들은 구원을 받고자 시도했다는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제시한 구원의 방식이 그들이 생각한 방식과는 일치되지 않았기에, 그래서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 그 당시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날 한국교회의 이야기인데, 즉 교회 안과 교회 바깥의 이야기라는 말이다.

누가복음 22장을 계속해서 보겠는데, 27절에서 29절을 보자.

(눅 2: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눅 2: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눅 2: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

여기에 보면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만나고 난 뒤에 뭐라고 하는가?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라고 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는 것이다. 아기 예수가 동방박사들이 준 금덩이라도 쥐고 있다가 시므온에게 주었는가?

여기서 평안하다는 것이 전혀 재산이나 재물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마음에 관한 것이고 영혼에 관한 문제라는 것이다. 즉 기도해서 재물을 챙기겠다는 것이 이미 의미가 없어지고 말았는데, 그러면 무엇인가? 성령을 받은 시므온을 통해서 알게 된 바가 무엇인가?

하늘나라는 성령 안에서 희락과 기쁨과 평안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부흥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 자기 자식들이 공부를 잘하고 건강한 것과는,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성령이 임하면 이제 평안히 놓아주는, 그러한 상태라는 말이다.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 하나님께 드리면서, 그 의미도 함께 드려야 !!

이것을 잠언서에 대비해보면 무엇인고 하니, 자기 것을 하나님에게 드렸을 때, 그 드린 것과 동시에 자기의 드린 의미도 거기에 같이 타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드린 것과 같이 말이다. 그런데 드리면서 거기에 자기의 소망을 담게 되면, 그것은 주님에 대한 모독이고 성령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이다.

시므온이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이제 강의의 핵심부위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실질성' 이라는 것이다. 즉 복음의 실질성인데, 혹은 실제성, 현실성, 구체성, 그렇게 해도 되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들이 인간들 사이에서 잘못 사용되어지기 때문에, '실질성' 이라고 조금은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구원의 실질성, 복음의 실질성, 조금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심판의 실질성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교인들이나 다같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이 살아있다고 하면 이 세상에서 악한 놈들을 아주 조져주세요" 라는 것인데, 그런 식으로 심판의 실질성을, 즉 주님이 살아있다고 하는 실질적인 증거를 넣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 주여, 저 절간이 무너지게 하소서 !!

예를 들어서, 여기에 교회가 있고 앞에 절이 있다고 하면,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그냥 애매한 사람에게 벼락을 치는 것이 아니라, 물론 광야에도 벼락이 필요하지만, 여기 앞에 있는 이 절간에 좀 내려주세요" 라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주님의 살아있음을 좀 보여주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녹취 구 - 제가 과거에 하동에 있을 때, 제가 있던 예배당 건물이 바람을 맞아서 벽이 무너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마을의 다른 곳에는 별로 피해가 없었는데, 유독 예배당 벽만 무너졌어요. 벽돌로 지었는데 말이죠. 커다란 태풍이 분 것이 아니었는데 말이죠. 물론 부실공사여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 그래서 업자에게 알아보니 교회당에 종탑을 높게 벽돌로 쌓은 곳들은 거의 그게 폭탄수준으로 위험하다고 하더군요. 아무튼 그때 기억이 나네요(ㅋㅋ).)   

그리고 아파트의 경우에도, 위층에서 쿵쿵거리고 하면 얼마나 짜증이 나는데 모르는데, 심지어 망해서 이사를 좀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것이 다 "하나님은 정의의 편이야. 하나님은 살아있어서 일하시는구나"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실질성이고 실제성이고 구체성이고 현실성인데 말이다.

 

◈ 실질성, 실제성, 구체성, 현실성 !!

그런데 여기서 시므온이 마음을 편안하게 놓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은 이제 더 이상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믿음이 있는지를 보는, 그런 실질성이고 실제성이고 구체성이고 현실성인 것들을 구태여 얻을 필요가 없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미 얻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편안하게, 그야말로 먹는 것마다 소화도 잘되고 숙면을 취하게 되었지 싶은데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시므온에게 성령을 주셨는데, 그 증거가 바로 아기 예수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누가복음 2장 30절에서 32절을 보자.

(눅 2: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눅 2: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눅 2: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시므이가 아기 예수를 안고 계속해서 찬양하는 대목인데, 이게 구약을 요약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말이다. 여기 31절에 보면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께서 언약을 먼저 던져주시고, 언약을 완성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신다" 라는 것이다. 그것을 "예비하신 것이요" 라고 하는 짧은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약을 주셔서 언약대로 하셨다는 것은, '비숫누' 라는 신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자비로운 신이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자비롭다는 것을 표현할 때는, 'ㅂ'과 'ㅅ'과 같은 언어를 사용해서, 더 큰 범위로는 기호라고 할 수도 있고 말이다. 기호 중에서는 숫자도 포함이 되는데, 그래서 나이가 들면 스스로 어떻게 위로하는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사랑하기에 딱 좋은 나이라고 한다는 말이다(ㅋㅋ).

 

◈ 기호와 숫자는 속임수 !!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숫자는 그야말로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데, 숫자는 우리는 속이지만 말이다. 나이 70을 먹은 노인네를 보고 "40대와 같습니다" 라고 하면, 물론 기분은 좋을지 모르지만, 하지만 몸이 40대가 아닌데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눈이 침침해서 운전도 제대로 못하는데 말이다.

기호라는 것은 속임수인데, 그게 왜 속임수인고 하니, "나는 그래도 젊어" 라고 하면서 동원된 것이 바로 기호라는 말이다. 즉 자기를 꾸미기 위해서 작당한 것이 언어이고 기호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생각하는 '나' 라는 것은, 세월은 흘러가도 자기에게만은 그런 시간이 흘러가지를 않는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 알박이 인생 !!

그러니 완전히 반칙인데, 이것을 '고정성'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나' 라는 것은 항상 과거의 잘 나가던 그 시절에 박혀있다는 것이다. 마치 알박이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주변에서 아무리 공사를 해도 "이것은 내 집이다" 라고 하면서 끝내 건드리지를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죽을 때가 되도 마찬가지인데, 그래서 영정사진을 좋아하는 노인들은 없는데, 왜냐하면 아직은 그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미지를 상상하게 되어있는데, 자기가 아파도 아프지 않는 것이 자기의 모습이라고, 그게 알박이처럼 자기 마음속에 박혀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숫자와 기호는 실질성과는 다르다는 말이다.

 

◈ 성경은 언어인가? 말씀인가?

지금 강의가 좀 어렵게 진행이 되어도 이해를 해주었으면 하는데 말이다. 우리가 이렇게 성경말씀을 보면서, 만약에 그 성경이 언어가 되면 우리가 주체로서 가담이 된다고 하는,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어라, 이게 글자로 되어있네" 라고 하는 순간, 글자라는 속임수에 우리가 스스로 말려들게 된다는 말이다.

글자로 되어있으니, 그 글자를 푸는 순간 자기가 원하는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러니 숫자와 언어라는 껍질을 벗겨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말씀이라는 것은 해석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석이 불가하다" 라고 있는 것이 말씀이라는 말이다. 말씀은 알아서 스스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유명한 성경구절인데, 히브리서 4장 12절과 13절을 보자.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 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

여기 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것이 우리에게 말이 되는가? 우리 인간세계에서는 살아있다는 것은 동물이나 식물이 살아있는 것이지, 말씀은 기호와 상징으로 되어있기에, 우리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창작물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살았다고 하지 않는데, 가게 간판의 글자가 살아있다고 누가 이야기를 하느냐는 것이다. 글자가 낮에는 가만히 있다가 밤이 되면 살아서 춤을 추는가? 그런데 가게 간판의 글자는 춤을 추지 않아도 성경말씀은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허락이 없이는 들어올 수 없는 우리 자신의 깊은 마음속까지 비밀번호도 필요가 없이 그냥 쳐들어온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 춤을 추고 있는데, 그것을 두고 "말씀은 살았고" 라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 바깥은 물론이고 우리의 안에서까지 말이다.

그래서 여기 23절에 보면, 그야말로 말씀 앞에서 모든 것이 벌거벗게 되는데, 그러면 그렇게 말씀이 춤을 추게 하시는 분이 누구인고 하니, 말씀 안에 계셔서 말씀을 움직이고 평가하시는 분이 말이다. 그것은 바로 말씀대로 사시는 예수님이 말씀 안에서 살아서 우리로 하여금 그 말씀 앞에서 벌거벗게 만든다는 것이다.

교회에 가면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40년이 되고 50년이 된 분들이 말이다. 그런 사람들 입에서 말씀이 나오는 저는 그것을 믿는데, 하지만 교회 이야기가 나오면 절대로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 간증이 나와도 그렇고 말이다. 그것은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목사도 예외가 아닌데, 말씀이 아닌 다른 이야기를 하면 말이다. 주로 목사가 하는 것은 교회 이야기인데, 하지만 교회는 결국 친목단체라는 것이다. 힌두교 집단과도 다를 바가 없는데, 하나님은 저기 위로 보내버리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위에 계시고, 자기들끼리 서로 위로해주면 그게 좋은 교회라고 여긴다는 말이다. 친목단체이니 말이다.

 

◈ 단지, 성령이 왔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

하지만 시므온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시므온은 교회 때문에, 유대교 때문에 마음을 편안히 놓임을 받은 사람이 아닌데, 이 사람도 역시 유대교 신자로서 하나님을 믿고 율법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단 하나의 차이점, 그게 바로 그 사람에게는 성령이 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성령이 오게 되니 어떻게 되는가? 기존의 편안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이 편안해진다는 것이다. 그게 시므온에게 주어진 평안함인데 말이다. 이게 어려운 것인데, 지금부터 이것을 한 번 설명해보자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 인간이 해석할 수 없다고 했는데, 하지만 인간은 그런 말을 듣고도 해석을 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일을 하실 것이다" 라고 미리 예상하면서 해석을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예수님과 마찰이 일어나는데, 자기들의 예상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말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공격할 때는, 예수님이 모세율법을 위반했다는 것인데, 즉 "다른 사람들은 다 율법을 존중하는데, 당신이 무엇인데 율법을 무시하는가?" 라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내가 율법의 완성이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 율법의 완성은, 곧 '미래의 현재화' !!

이 율법의 완성을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 간단한데, 쉬운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미래의 현재화' 라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간단하다는 말이다. 그들에 의하면 예수님은 미래에 오실 메시야인데, 유대인들에 의하면 메시야가 오게 되면 시간이 끝나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이 세상의 시간이 끝날 때까지 그들은 말씀을 통해서 그 스케줄을 미리 알아차려서 메시야를 기다리면, 그런 가운데 이 세상의 끝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택함을 받은 자기들만 구원을 받고, 그 나머지인 이방인들은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이 생각하는 끝 너머에 계시는 분이 미리 앞당겨서 와버리니, 그 미래가 그만 현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미래의 현재화가 되면서, 현재의 미래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말이 좀 어려운데, 미래의 현재화가 시작이었고, 그 결과로서 현재가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일부로서 현재를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래를 넘어 계시는 분이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를 살아도 미래의 삶을 미리 앞당겨서 산다는 것이다.

 

◈ 오래된 미래 !!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되면 구약의 해석이 새롭게 바뀌어지는데, 예를 들어서, "에녹이 죽지 않고 하늘나라에 갔다" 라고 하면, 이미 그 에녹 속에는 미래가 도달되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베드로전서 1장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이미 노아나 에녹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포함이 되었다고 한다는 말이다.

(벧전 1: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그것을 '오래된 미래' 라고 하는데, 즉 상당히 오래 전에 미래가 현재 속에 침투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당시 구원을 받은 계열만 해석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서 배제된 자들, 즉 가인의 후손들의 경우에도, 그들도 본의 아니게 이미 미래를 접촉한 셈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녹취 구 - 목사님, '미래의 현재화', '현재의 현재화', 또한 '오래된 미래'와 같은 용어들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목사님이 만든 것 같지도 않고, 현대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용어입니까? 그런 것 같지도 않은데, 더욱이 성경에 있는 용어도 아니고 말이죠. 아무튼 그 용도가 기가 막합니다.)

그게 바로 심판인데, 즉 물 심판과 불 심판이라는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주민들의 경우에, 그들은 세상 끝을 모르는데, 내일 일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역사의 끝을 알겠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모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알던 모르던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졌다는 말이다.

거기에 살고 있던 롯의 경우에, 물론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서 더 살았다는 것이다. 두 딸과 동침해서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되었는데, 하지만 롯 본인은 그 짧은 인생을 통해서 미래가 현재화가 됨으로서, 현재에 살면서도 미래에 속한 인물로서, 그 당시에 이미 복음을 전파한 존재로서 잠깐 살다가 늙어죽었다는 것이다.  

 

◈ 우리의 미래를 보여주신 !!

이것이 어디 남의 이야기이겠는가? 오늘날 우리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인데,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를 보고 뭐라고 하겠는가? "우리가 가야 될 하늘나라를, 우리의 미래를 미리 보여주시면서 살다가 가신 어머니와 아버지여, 살아있을 때는 미처 몰랐는데, 그때는 우리의 보이스 피싱의 대상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효도라는 것은 부모님이 믿은 그 주님을 믿는 것이 것이군요"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이전은 그냥 육신적인 가족이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족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게 진정한 가족이고 패밀리라는 말이다. 그게 성스러운 가족인데, 실제로 '성스러운 패밀리' 라는 이름의 성당도 스페인에 가면 있다고 하는데, 유명한 건축가가 지었다고 하는현대적 건축물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 성경말씀도 기호로 사용하는 인간들 !!

다시 이야기를 하겠는데, 기호는 하나의 속임수라는 것이다. 뭔가 멋드러지게 자기 자신을 곱게 포장하고 화장하는 기능으로서 말이다. 그래서 건전하고 괜찮아 보이는 것은 전부 자기에게 모으고 모아서 포장을 하는데, 물론 속은 썩어 들어가고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런 멋진 포장지 가운데 하나가 놀랍게도 성경말씀이라는 것이다. 여호와 증인도 아니면서 성경을 달달 다 외우는데, 그런데 그런 것이 다 자기 좋아라고, 자기를 포장하기 위한 것으로서, 그런 것은 성경말씀이 아니라 기호이고 상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지금 시므온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고 있는데, 도대체 성령을 받은 시므온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나는 이제 성경공부를 해야지" 라고 하는 것이 시므온의 평안함이 아닌데, 현재에 살면서 이미 미래를 넘어선 상황인데, 그러니 이미 끝이 났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므온이 물 위를 걷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한 것이 아닌데, 갑자기 부자가 되어서 최고급 벤츠를 타고 다닌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의 아내가 갑자기 음식을 끝내주게 하면서 남편을 매일같이 극진하게 대접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ㅋㅋ).

여기서 사무엘하 6장을 보겠는데, 20절에서 23절을 보자.

(삼하 6:20)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삼하 6:21)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삼하 6:22)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삼하 6:23)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

 

◈ 법궤에 딸려서 가는 것 !!

이게 어제 주일오후에 설교한 본문인데, 준비한 것도 시간이 없어서 다 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이것은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오는 대목인데 말이다. 어제 했던 설교를 다시 해보면, 하나님의 성전의 시작은 하나님의 돌판을 이동하는 가마역할을 한다고 했는데 말이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 보여주는 게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법궤만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법궤를 따라붙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게 바로 약속의 땅인데,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약속의 땅이 요단강을 건너서 눈에 보인다고 여기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거기에 가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약속의 최종적인 완성은 언약의 완성이지, 어떤 지리적인 지역 안에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곳에서 아무리 살아봐야 늙으면 결국에는 죽는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목적인 교회의 부흥이 아니고, 천국을 보여주면 그게 이미 목적을 달성한 것이란 말이다. 교인수가 얼마나 되어야 목적이 달성되겠는가?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이다. 교인이 없다가 생기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는데, 하지만 오천명에서 이천명이 되면 그야말로 죽고 싶다는 것이다. "주여, 제가 무엇을 잘못해서 이런 일이 생깁니까?"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 호들갑인가? 죄인가?

그러니 사실은 호들갑이지 죄가 아닌데, 아직까지 건방을 떨기에 걱정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욥처럼 말끔하게 모든 것이 없어지면, 그야말로 재를 뒤집어쓰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재산은 다 날리고, 자식들은 다 죽고, 마누라는 도망가고 말이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을 원망했는데, 그것 자체가 교만이라는 것이다. 욥이 나중에 하나님을 만나고 뭐라고 하는가? 그야말로 유구무언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걱정근심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아직 뭔가 남아있다는 것인데, 즉 아직까지 살만하고 배가 부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부가 싸울 때는 아직도 정이 남아있다는 것인데, 그 정마저 없어지면 어떻게 하는가? 아예 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 라고 오승근이 명언을 남겼는데 말이다(ㅋㅋ) 

 

◈ 다윗, 그리고 미갈 !!

아무튼 법궤를 이동하는데 있어서 주인공이 법궤이지, 그 주위에 있는 가마꾼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법궤에 딸려서 가는 것인데, 그러니 그런 횡재가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다. 법궤가 가는 곳에 감히 끼어 든다는 것이, 그게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이 너무 좋아서 춤을 추는데, 그게 바로 성령 안에서 희락과 기쁨인데 말이다. 

그런데 여기 20절에 보면, 다윗의 아내이자 사울의 땅인 미갈이 뭐라고 하는가?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 미갈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는데, 미갈은 지금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그런 하나님의 법궤나 그 법궤가 있게 될 성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다만 남편인 다윗은 자기 몸을 마누라에게만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런데 계집종 앞에서 저렇게 벌거벗은 몸을 드러내고 춤을 추느냐는 말이다. 자기가 그렇게 알뜰살뜰 보살펴서 만들어놓은 권위를 망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의 체면은 어떻게 되고 말이다. 그래서 삐쳤다는 것이다.

그 유명한 '사랑과 전쟁' 이라는 드라마에 보면 그런 내용이 많은데,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자기보다 예쁜 여자와 피우면 그래도 용납이 되는데, 그런데 자기보다도 성질도 더럽고 못생긴 여자와 피우게 되면, 그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하는데 말이다. 제가 여자가 아니라서, 그것이 일종의 핑계인지, 정말로 그러한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ㅋㅋ).

지금 사울의 딸 미갈이 그러한데, 자기가 하찮게 보는 저 계집종 앞에서 자기 남편이 체통도 지키지 못하고 도대체 그게 무슨 짓이냐는 것이다. 그러자 22절에 보니, 다윗이 뭐라고 하는가?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 일로 인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23절에 보면, "그러므로 그만 사울의 딸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 여자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단순하게 자식이 없어서 외롭다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 없다는 것은 신의 저주를 품고 있는 존재로 간주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그만 여자 취급을, 즉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요즘 생각해봐도 참으로 무서운 이야기인데, 그러니 여자는 결혼을 해도 전혀 긴장을 늦추면 안 된다는 말이다. 딸은 아무리 낳아도 소용이 없고, 아들을 낳을 때까지 긴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고대시대에 그렇다는 말이다. 요즘은 아들을 낳지 못한다고 구박을 받고 하는데 말이다.

아무튼 여기서 다윗은 미갈에 뭐라고 하는가? "내가 옷을 벗고 낮아진 것이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니가 노는 영역과 내가 노는 영역이 다르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것을 달리 말하면, "염려할 수 있는 염려 거리가 전혀 되지 않는데, 그런데 왜 너는 염려를 하고 있는가?" 라고 한다는 말이다.

 

◈ 미갈은 심판의 실질성을 믿지 않아 !!

그리고 여기서 더 놀라운 사건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실질성인데, 즉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복음 중심으로 돌아간다" 라는 것이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미갈은 자식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단순히 다윗부부간의 문제가 아니라, 그게 온 우주로 퍼진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것을 미갈은 미처 몰랐다는 것이다.

미갈은 그냥 다윗이 단순히 자기 남편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러니 다윗이 보여주는 것이 온 우주를 존재하게 하는 숨겨진 하나님의 원리이고 원칙인 줄을 몰랐다는 말이다. 다윗에게 일어나는 것들이 다윗언약에 속한 것임을 미갈은 몰랐다는 것인데, 그러니 미갈은 언약에서 어떻게 되었는가? 배제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면 미갈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가? 그게 아닌데, 하지만 새로운 사건이 터지게 되면 될수록 점점 더 언약에 배제된 사람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분류가 되는데, 그게 바로 '실질성' 이라는 말이다. 심판의 실질성,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 왜 자꾸만 새로운 사건들이 생기는가?

"하나님이여, 왜 자꾸만 새로운 사건들이 생깁니까?" 라고 하면서 짜증을 내는 분들이 있는데, 하지만 그렇게 일이 벌어져야 그 사람이 믿는지 믿지 않는지, 그리고 자기 자신이 과연 믿는지 믿지 않는지, 그것이 날마다 확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계속해서 사건이 주어진다는 말이다.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구분되는지를, 자기밖에 모르는 기본적인 육신의 본성과, 그것 말고 낯선 생각이 자기 마음속에 같이 공유되고 있는지를, 그런 것을 확인하게 위해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새로운 사건과 사태들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 성도 안에는 두 명이 있어야 !!

오늘 강의를 하다가 보니까 중요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는데, 물론 다시 들어보면 되는데 말이다. 어제 오후시간에 설교를 하면서 무엇이라고 했는가? 사람이 처음에는 아담 한 명이었다가 그 다음에 두 명이 되는데, 그게 바로 성도에게도 적용이 된다는 것이다.

성도 한 명에 한 사람이 더 있어야 하는데, 즉 성도 안에 두 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성도가 된다는 말이다. '가시나무 새' 라는 노래가 있는데, 그 기사에 보면 "내 안에 내가 너무나 많아 ♬" 라고 하는데, 물론 너무 많으면 다중인격이 되어서 곤란하고 말이다(ㅋㅋ).

 

◈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아버지 안에 내가 있다" 라고 하셨는데, 그리고 8장 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율법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해석을 하시는고 하니, 이것이 율법에 대한 올바른 해석인데 말이다.

(요 8:17)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요 8:18)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여기에 보면 예수님 안에 두 분이 계시는데, 그러니 율법은 반드시 예수님을 경유해서 해석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경유하지 않으면 율법해석은 다 엉터리라는 것이다. 십일도, 안식일, 간음죄, 살인죄 등등, 그 모든 것이 다 반드시 예수님을 경유해야 한다는 말이다.

 

◈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간음죄 !!

그러니 무엇이 간음죄인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간음죄인데, 그러니 반드시 예수님을 경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창기는 간음죄로 인해서 천국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데, 그런데 창기가 천국에 간다고 하면,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주님을 경유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이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해서 창기에게 준 그 사랑 안에서, 그들은 무죄가 아닌 의로운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의가 어디서 나왔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아버지 앞에서 그들을 대신해서 모든 것을 다 처리하셨기에, 그렇게 해서 이미 처리가 끝났다고 하는 것을 통보해주시는 것인데, 그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곧 의가 되고, 그런 하나님의 의가 창기에게 오게 되면, 창기는 그러한 하나님의 의를 운반하는 가마꾼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돌판에 새겨진 모세언약이 완성되면, 그 완성한 것을 모시고 다니는 몸이 될 때, 그것이 바로 오늘 성도라는 이름의 '성전' 이라는 것이다. 성령은 바로 그것을 실질적으로 만들었는데, 그러니 복음의 실질성, 즉 말씀의 실질성인데, 그것은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들이 발생하게 될 때, 그것이 바로 주님이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 주님이 함께 있어서 자기가 죄인임을 알 때 !!

소자에게 한 것이 곧 주님에게 한 것인데, 그 소자가 바로 주님이 함께 있어서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라는 것이다. 목회하는 죄, 설교하는 죄, 강의를 하는 죄, 강의를 듣는 죄, 또한 자식을 잘 키운 죄,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자식을 번듯하게 잘 키운 것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그리고 유학을 보낸 것도 죄이고 말이다.

그러니 남들은 이런 기호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말이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이니 말이다. 치매에 걸린 노모를 15년 동안이나 뒷바라지를 한 것도 죄이고, 암에 걸린 남편을 위해서 밑반찬을 무려 천 가지나 만든 것도 죄이고, 한 평생 동안 바람을 피우지 않는 것도 역시 죄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가면, 이혼을 7번이나 한 죄, 남자를 5번이나 사귀다가 그만 실증이 나서 6번째 사귀는 죄, 그러게 하면서도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의,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구원을 받은 것은 죄가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니 말이다.

그러니 사마리아 여인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그 여인이 타이밍을 잘 맞추어서 우물가에 물을 뜨기 위해서 왔기 때문인가?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구원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여인이 구원을 받을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 율법은, 위반함을 통해서 !!

그래서 어제 오후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사람이 법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 그런 위반을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을 생산해내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말씀은 위반하라고 주셨다는 말이다. 즉 "간음하지 말라" 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위반을 통해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기 위해서 그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말이다.

우리 속에는 선악적인 요소가 있어서, "나는 간음을 했지롱. 하지 않았지롱" 라고, 혹은 "간음을 해도 4번밖에는 안 했지롱"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10번이나 했는데, 자기는 얼마나 괜찮은 인간이기에 4번밖에 하지 않았느냐는 말이다. 그러면 10번을 한 사람은 백 번을 한 사람을 쳐다보겠지만 말이다. 그러면 백 번을 한 사람이 뭐라고 하겠는가? "능력이 없고 인기가 없어서 못했으면서, 어디서 입만 살아서 까불어"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 저는 후회합니다 !!

인간 자체가 그러한데, 자기가 죄를 지었다고 여긴다는 것은, 그것은 자기가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자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결국은 자기 자랑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후회합니다" 라고 했을 때, 어떻게 보면 겸손해 보이기도 한데, 그런데 그렇게 여겨지지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사람이 후회를 하기는 하는데, 그렇게 후회를 하면서 주체가 발각된다는 것이다. 즉 "나는 결코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 라고 하는 고집스러운 자기 의, 주님의 의가 아닌 말이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의를 감추고 있는데, 마치 사탄처럼 말이다. 그러한 자기의 본래 모습이 '후회' 라는 단어와 함께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담석증에 걸린 환자와도 같은데, 몸 속에 돌이 들어있어서, 그게 살아가면 갈수록 계속해서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나' 라고 하는 딱딱한 돌멩이, 이것은 병원에서는 어떻게 도저히 깰 수가 없고,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게 우리의 온 몸에 있어서 아픔을 주는데,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아프다는 것이다. 마음이 아프고, 영혼이 아프고 말이다. 그러니 말씀에 의해서 우리는 날마다 깨어져야 하는데, 물론 깨지면 또 생기고, 깨지면 또 생기겠지만 말이다. 그게 육신의 본성이기에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석가모니의 헤어는 어느 미장원에서?

어제 코미디 프로는 보는데 아주 멋진 대사가 나왔다는 말이다. "석가모니의 그 곱슬곱슬한 파마는 도대체 어느 미장원에서 했는가?" 라는 것인데, 그러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중들은 그런 곱슬머리의 부처를 믿으면서, 어떻게 자기들은 파마를 하는 게 아니라 머리를 오히려 깎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ㅋㅋ). 물론 불교교리에서는, 부처가 되면 자동적으로 곱슬머리로 말린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 코미디 프로의 설정이 무엇인고 하니, 둘이 동창생인데 하나는 목사가 되고 하나는 중이 되어서 서로 이야기하는데 말이다. 학생 때 중이 된 동창생에게 목사가 많이 당했던 모양인데 말이다. 그래서 만나면 "지옥에나 가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저도 그런 의문점이 드는데, 왜 머리를 깎는지 말이다. 불교에서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그런데 머리는 왜 미느냐는 것이다.

여기에 반대해서 원불교에서는 머리를 밀지 않는데, 그러면 그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고 하니,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그 커미션을 받아 챙긴다는 것이다. 원불교의 교리자체가 그러한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자기들이 대신해서 해줄 테니, 바쁜데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말고 자기들에게 돈을 맡기라는 것이다.

(녹취 구 - 그러면 구세군, 적십자, 유니세프와 같은 단체도 비슷하다는 말씀이군요. 그들도 기부를 받아서 일부는 활동비로 쓰고 도와준다고 하던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많이 챙긴다고 하네요. 돈이 되어서 그런지 몰라도, 특히 구호단체들은 요즘 TV에서 광고를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몰라요.)

 

◈ 오죽했으면 '상징계' 라고 했겠는가?

종교가 그런 것인데, 그야말로 담석증 환자라는 것이다. 자기 의를 도저히 버릴 수가 없다는 말이다. 석가모니의 가르침도 그러한데, "절대로 주체를 버리지 말라" 라는 것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이라는 것인데, 그러니 솔직하게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어도, 그 너머에 있는 마지막 스크린에 '나' 라는 것이 비춰지는데, 그것을 어떻게 넘어설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손오공이 아무리 도망을 쳐도, 자기 자기용 비행기를 타고 한참을 도망을 가다가보니 기둥이 5개나 나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 자기가 다나갔다는 표시를 해두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부처님의 손가락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손오공은 부처님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인데, 그렇게 인간은 자기가 만든 이미지와 현실과 그 환상의 바깥을 전혀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것을 '상징계' 라고 하는데, 오죽했으면 상징계라고 했겠느냐는 말이다. 모든 것은 상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실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 야구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런데 자기 혼자밖에 없으면 어떻게 하는가? 벽에 공을 던지고, 그 공이 벽을 맞고 되돌아오면 다시 받아서 던지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고 하니, 타인을 벽으로 생각해서 던져놓고 다시 받아오는 그 의미, 그것이 바로 자기 의미라는 것이다.

 

◈ 던지고 받고, 던지고 받고 !!

자기는 부잣집에 시집을 가고 싶다고 하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 부잣집에 있는 모든 비싸고 화려한 벽에 자기를 던져서 다시 회수하는, 즉 "나는 역시 부잣집에 살만한 가치가 있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던지고 다시 회수한다는 말이다. 즉 주체로서 회수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 번 회수를 하게 되면, 그것을 '쥬이상스' 라고 하는데, 즉 하나의 향락이고 쾌락이고 즐거움이라는 것이다. 그런 쾌락이 자기를 주체로 해서 고정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다음에 사업이 망해서 가난하게 되어도 과거의 잘 살았던 티를 내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에이, 나는 이런 것을 먹지 않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냐" 라고 하면서, 그것이 알박이처럼 고정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착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착한 일까지 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게 자기의 의로움으로 고정이 되면, 나중에 나이가 60이 되고 70이 되면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너무나 잘났으니 말이다.

 

◈ 김일성과 영락교회 !!

서울에서 잘 나가는 강남에 있는 교회에 가보면 어떠한가? 옛날 박정희 시대에 중동의 개발붐이 일어났을 때, 삼성이나 현대종합상사의 직원들이 어떻게 했는가? 사우디의 모래바람을 뚫고, 대한민국의 수출역군이 되겠다고 하면서 힘들게 비즈니스를 했는데, 달랑 가방만 하나 들고 말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지금은 은퇴를 해서 나름 잘 살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가는 교회가 바로 강남에 있는 대형교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과연 신앙생활이 제대로 되겠는가? 왜 신앙생활이 안 되는고 하니, 자기의 그 잘났던 것이 그대로 계속해서 잘난 것으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영락교회의 경우에, 대부분이 북한출신들인데, 북한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왔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북한에서 그래도 잘 사던 사람들인데, 김일성도 초창기에는 기독교였고 말이다. 그의 집안이 기독교 집안이라는 것이다. 그의 삼촌이 목사이고, 그를 돌봐주었다는 것이다.

김일성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라는 것인데, 그게 어디에 있는 내용인가? 데살로니가후서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했다는 말이다. 김일성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 그래도 제법 잘 산다고 하는 유지들과 함께 했는데, 소련도 옆에 끼고 말이다. 그래야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비용이 나온다는 것이다. 

(살후 3: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그런데 김일성이 나중에 그만 태도를 달리하니, 그들은 할 수 없이 남한으로 내려오게 되었는데, 그래서 한국의 근대화에도 기여하게 되었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영락교회에 가서 "당신들은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난리가 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주님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 !!

하지만 시므온처럼 성령을 받게 되면, 그 관심사가 바뀌는데, 즉 이 세상을 다시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게 현재에서 미래를 내다보는 방식이 아닌, 미래에 있는 분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미래의 입장에서 현재를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짜 하나님의 기적은 무엇인고 하니, 성령이 온 것 자체가 기적이고, 그래서 자기가 주님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자기가 가고자 한 천국은 전혀 천국이 아니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미지이고, 자기의 존재 의미를 되받아오는 것이고, 오직 실제는 예수님의 세계인데, 그 예수님의 나라가 진정한 천국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상상한 나라가 천국이 아니고 말이다. 

 

◈ 끝내주는 동물원 !!

여기서 이야기를 좀 더 해보겠는데, "목사님, 그렇다고 하면 이사야서에 보면, 아이가 사자굴에서 뛰논다고 하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가? 그런 것은 실제가 아니라는 말인가요?" 라고 물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사야서의 그 말씀을 보고 상상을 많이 했을 것이니 말이다.

그야말로 끝내주는 동물원인데, 얼마나 밥을 많이 먹여놓았으면 사자가 양을 보고도 그냥 가만히 있겠느냐는 것이다(ㅋㅋ). 생물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사자는 배가 고플 때나 먹이를 잡아먹는 것이지, 배가 부르면 아무리 먹잇감이 있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하는데 말이다.

(사 11: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사 11: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사 11:8)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그리고 창조론자들에 의하면, 사람을 비롯한 모든 동물들은 처음에는 다 초식이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나중에 먹을 것이 없으니, 육식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는 것이다. 창세기 9장에 의하면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잠재된 것이 발현된 것이지 진화된 것이 아니라고 그들이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과학적 이론이고 주장인데 말이다.

(창 9: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 9:2)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창 9:3)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런 과학적 주장이 일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성경말씀을 인용한 그들의 과학적 주장에는 큰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에서 중보자를 빼버리는데, 즉 "이 세상은 예수님 중심으로 창조되었다" 라는 것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외하고 자기들의 과학적 능력을 가지고 창조된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창조신은 힌두교의 신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 창조론자들은 중보자에게는 관심이 없어 !!

창조론자의 위험성이 여기에 있는데, 아무리 화석을 살펴봐도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실질성은 어디에 있는가? 성령을 받아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즉 "소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성도의 나타남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데, 그런데 성령의 나타남이 성도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처럼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 당시에도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나타남이 예수님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 보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대단한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 예수가 아닌 바라바를 !!

그것은 제자들의 눈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자기들의 의미를, 즉 자기들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분으로서 예수님을 대단하게 본 것이지, 하지만 예수님은 그 당시의 권력자들보다 전혀 못하게 보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일반 민중들에게는 '바라바' 라는 죄수보다도 가치가 없게 보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영을,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그와 똑같은 대우를 사람들로부터 받고 있는데, 그러니 너무 슬퍼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는 것이다. 주님이 당했던 것을 우리가 그대로 당하고 있다는 말이다. 멸망을 당하는 죄악 된 세상에서는 언약의 완성이 시큰둥하게 여김을 받기 마련이란 것이다. 가족들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이것과 관련해서 로마서 8장을 살펴보겠는데, 먼저 오늘 강의주제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은 분명히 살아있고 또한 지금도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과 심판이 있는데, 그러면 그 실질적인 증거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실질적인 증거가 말이다.

그러면 로마서 8장 15절에서 18절을 살펴보자.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롬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

여기 16절에 보면,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았기에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이 되어서, 예수님만이 부를 수 있는 아버지를, 이제는 감히 예수님과 동일한 안목으로, 동일한 입장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양자의 영' 이라고 하는데, 왜 양자의 영인고 하니, 우리는 맏아들이 아니고, 맏아들은 따로 있다는 말이다. '양자' 라는 것은, 아들도 아닌데 아들도 쳐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양자가 된 자들의 마음속에는 항상 "나는 아들이 아니었는데, 아들이 되었다" 라고 하는 것이 유지가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탕자가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가 잘해준다고 해서 큰아들의 노릇을 한다고 하면서 설치면 안 되고, "저는 아버지의 재산을 말아먹은 인간입니다" 라는 것을 늘 유지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아버지의 은혜가 언제나 피어난다는 말이다.

 

◈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

여기 16절에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라고 하는데, 이것도 참 어려운 말씀인데 나중에 설명을 하기를 하고, 그 다음에 17절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영광이 어디서 나오는 영광이냐는 것이다. 이게 새 하늘과 새 땅의 영광인데 말이다. 그러면 처음에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철없는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님이 다 만들어놓은 세계에 예수님이 나중에 막차를 탄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이 아니라 처음에 창조하실 때부터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새롭게 일을 완성하실 때마다, 거기에 따라서 창조도 그 완성된 영광의 격에 맞도록 변화가 되는데, 그렇게 놀랍고 영광스러운 창조물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높여야 될 임무가 있기에 말이다.

 

◈ 피조물의 존재 이유가 바로 여기에 !!

그것이 바로 피조물의 존재 이유인데, 그러니 주님을 주님이라고 인정함으로서 비로소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리는데, 성령을 받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으로 취급해주지 않는데, 즉 인간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 안에 언약의 완성이 없는데, 그러니 어떻게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구약 때는 십계명이 우리 몸 앞에서 멈추었는데, 율법이니 말이다. 그게 우리 마음 바깥에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성령이 오게 난 다음에는 바깥에 있던 그 율법의 완성이 그만 안으로 들어오고 말았다는 것이다. 바깥에서 안으로 말이다.

 

◈ 성령을 받으면 싸움이 !!

그래서 이제 우리 안에서 싸움이 일어나는데, 그게 로마서 7장에 나온다는 말이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마치 쌍둥이를 임신한 여인처럼, 자기 안에서 뭔가가 둘이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합쳐서 3명인가요? 아무튼 자기 말고 다른 무엇인가가 또 있다는 것이다.

(롬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 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승리가 아니라, 주님 자신이 홀로 이루신 승리가 되게 하기 위해서, 즉 주님만이 승리자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패배자로 만드시는 작업을, 그것을 지금도 쉬지 않고 성실하게 해내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죄에게 졌다는 것이 감사할 일이라는 말이다.

 

◈ 성도에게, 죄는 예민하고 세밀해져 !!

그래서 성도에게만 죄라는 것은 굉장히 세밀한데, 다른 사람들은 사람을 칼로 죽이든지 해야만 죄가 되는데, 그런데 성도에게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여, 2시 40분에는 감사가 되었는데, 그런데 45분에는 감사가 왜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주여, 지금 강원도 산골의 어느 할머니가 신장이 좋지 않아서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런데 지금 저는 대구에 있다는 핑계로 거기에 가서 신장을 떼 주지도 않고 이렇게 버티고 있습니다. 이런 나쁜 놈이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하면서 회개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주여, 이번에 둘째 아이가 또 서울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미치겠습니다. 이 아이로 말미암아서 다른 집의 아이가 분명히 굉장히 낙담하고 있을 텐데, 그것을 생각하면 밤에 잠이 오지를 않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굉장히 디테일하고 예민하게 된다는 말이다. 어떻게 방금 예로 든 것이 조금은 이상한가요? (ㅋㅋ)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 마을을 보고 뭐라고 하는가? 매일같이 자기를 죄인이라고 한다고 하면서 비아냥거리는데,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무엇인가? 죄를 짓는 것도 있고 짓지 않는 것도 있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게 바로 마귀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고 말이다. 그래서 마귀가 선악과를 따먹도록 유혹을 했다는 것이다.

 

◈ 우당탕탕, 우당탕탕 !!

그런 사람들은 뭔가 짊어지고 있는 것이 없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이다. 십자가가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지를 않았는데, 매일 십자가를 닮아가려고 애를 쓸 뿐이지, 그 십자가가 안에 들어와서 '우당탕탕' 하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오늘 강의제목을 '우당탕탕'으로 했으면 좋겠는데, 그러니 이게 얼마나 실질적이냐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 영광이 그리스도의 격에 맞도록, 주님이 주님으로 등극을 했으면, 이제는 옛 하늘과 옛 땅은 그만 사라져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악한 마귀도 꺼져야하고 말이다. 이제는 그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즉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나라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나라, 즉 천국이인데, 그러니 천국은 철저하게 예수님 중심이지 우리 중심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영광을 위해서 반드시 누가 죽어주어야 하는데, 그게 누구인고 하니, 지옥에 갈 사람들이 처참해져야 한다는 말이다. 점점 더 말이다.

 

◈ 예수님과 변 사또 !!

왜 춘향전을 보면, 춘향에게 벌을 내리는 날이 언제인고 하니, 변 사또의 생일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변 사또의 권위가 높아지는 날인데, 바로 그 날에 전임 사또와 썸이 있었던 기생의 딸을 처단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서 자기의 권위와 명예가 더욱 더 높아지니 말이다. 

그러니 주님은 이몽룡이 아니고 변 사또인데(ㅋㅋ), 똑같다는 것이다. 주님 자신의 영광이 높아지는 그날에 거짓 선지자, 사탄, 짐승, 이것을 목사들이 악마의 삼위일체라고 부르는데, 바로 이것들을 처단함으로서, 심판주의 권위가 높아지는 그것이 성도에게는 최후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는 순간이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미래에 일어날 일인데, 그런데 이것을 미래로 보지 말고 현재로, 지금 현재에 일어날 일로서, 즉 현재화의 증거물로서 우리를 남겨놓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복음을 전하게 되면 사람들이 기겁을 하는데, 그것이 바로 처참하고 참혹하게 불러대는 하나의 슬픈 현상이란 말이다. 그래서 복음을 아는 사람은 뭐라고 하는가? "저 사람이 옛날에는 미웠는데, 이제는 참으로 불쌍하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 옛 하늘과 옛 땅을 붙들고 있느냐는 말이다.

 

◈ 옛 하늘과 옛 땅은 잠시 동안만 !!

힌두교 교인들은 어떻게 믿는고 하니, "비숫누는 우리를 살리기 위한 전능하고 자비로운 신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혀 아닌데, 중간에 무엇인가가 빠져있다는 말이다. 옛 하늘과 옛 땅은 하나님의 자비가 아닌, 인간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아담 때부터 마지막 때까지 잠시 동안만 사용했던 곳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옛 하늘과 옛 땅은, 이게 새 하늘과 새 땅의 입장에서 그렇게 부를 수 있는데, 기존의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들은 불에 태워지기 위해서, 불심판을 받기 위해서 대기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면서 말이다. 즉 인자의 때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자의 때를 안다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을 현재화를 시킨 성도에게만 허용되는 하나님의 주시는 성령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

그래서 로마서 8장 24절에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제가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구절인데,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 라고 하는데, 그것은 당연히 성령이 주신 소망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

또한 계속해서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라고 하면서, 25절에서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참는 것도 기쁨으로 참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롬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롬 8: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그러니 주님이 분류작업을 하시는 것을 보면서, 화들짝 놀라면서 참으라는 것이다. 온 우주가 예수님 중심인데, 그렇게 날마다 모든 것이 예수님 중심인 것을 확인하는 즐거움을 말이다. 그러니 오늘 성경공부시간에 늦게 오신 분도 주님의 뜻이라는 것이다(ㅋㅋ).

아무튼 이런 모든 것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함인데, 복음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 중심이 아니라 복음 중심으로 말씀이 알아서 스스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된다는 것만 증거하면 된다는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실질적으로 살아있다는 증거가 우리 몸 자체이란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다만 성령을 받은 시므온처럼 되게 하여주옵소서. 종을 편안하게 놓아주는 그 기쁨이, 성령 안에서 주님의 현재적 삶이 시작된 것임을, 항상 새롭게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