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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잠언'속의 그리스도 31 / 반항하는 인간 / 150504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잠언

'잠언'속의 그리스도 31 / 반항하는 인간 / 150504

정인순 2015. 5. 4. 23:07

음성

 

동영상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31 - 반항하는 인간
                                                                                
                                                         

15,05,04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03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이번에는 부(富)에 대해서 잠언을 살펴봅시다. 부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살아계시는 증거로서 사용하십니다. 그러니 부자가 된다는 것은 중간과정이고, 여호와께서 주시는 최종적인 결과가 무엇인지를 보자는 겁니다.   

(잠 10:22)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 약속과 결부된 약속 !!

여기에 부자에 관한 내용이 있는데, 잠언서에서 '부자'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인데, 이 약속은 무엇과 결부가 되어있는고 하니까, 약속과 결부된 약속이란 말이다. '약속과 결부된 약속' 이라는 것은, 앞에 있는 약속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약속이라는 것이다. 혹은 아브라함에게 주시는 약속인데, 그게 하나님만이 아시는 약속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약속인고 하니, 우리에게 주기로 약속된 어떤 분인데, 즉 '여호와' 라는 말이다. 그러니 여호와라고 하면 그냥 하나님을 생각하지 말고, 약속된 하나님이고 여기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이런 약속이 빠져있는데, 그러니 약속이 없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이다.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니듯이 말이다(ㅋㅋ).

여기서 약속이 없는 하나님을 우상이라고 하고,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지어낸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 왜 약속도 없는 하나님을 만들고 또한 믿는고 하니까, 인간들이 만든 하나님 속에는, 인간 자신들이 스스로 기대하고 생각했던 것을 가득 담아서 제조를 했는데, 즉 하나님 자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 하나님이 달라요 !!

그러면 인간들은 왜 그러한 하나님을 만들었는가? "내가 왜 있는가? 그리고 이 세상이 왜 있는가?" 라는 것들이 합리적으로 설명이 된다고 여겨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만든 하나님에게는 무엇이 들어있지 않는가? 당연히 약속이 빠져있고, 그래서 자기 자신이 그만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주인공은 전혀 인간이 아닌데,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주인공인가? 예수님이 주인공인데, 그러니 주인공이 다르다는 말이다. 이쪽은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고, 반면에 여기 이쪽은 예수님이 주인공인데, 그러니 하나님이 서로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 교회도, 두 종류가 있어 !!

교회도 역시 두 종류가 있는데,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교회와, 예수님이 주인공이 되는 교회가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주인공이 되신 교회를 두고, 그런 교회의 머리가 예수님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성경에 있는 교회는 그런 교회를 의미하고 말이다.

(골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그러면 그런 교회에 다니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그냥 교회에 다니면 되는가? 그것이 아니라, 먼저 무엇을 부수어야 하는데, 바로 자기가 주인공이 된 교회를 부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교회를 부정하는 조건 아래에서 주님의 교회에 들어설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의 집합, 그것이 바로 교회라는 말이다.

 

◈ 예수님의 죽음에 합류하는 순간 !!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합류하는데, 그러면 합류를 하려면 교회당에 가면 되는고 하니, 그게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교회와 인간의 교회의 접촉점을 이미 마련하셨는데, 그게 바로 십자가인데, 즉 예수님의 죽으심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에 합류하는 순간이 곧 주님의 교회에 입성하는 순간인데, 반면에 예수님의 죽음을 외면하는 순간은 주님의 교회에서 빠져 나오는 순간이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주님의 교회에서 빠져 나오면 자기만의 교회가 되는데, 합쳐서 우리들만의 교회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줄이면 '우리교회' 라는 말이다(ㅋㅋ).

 

◈ 인간들끼리 즐거운 우리교회 !!

인간들끼리 즐거운 교회인데, 그러니 전혀 약속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친목단체라고 하는데, 그야말로 오락단체이고 심심풀이 땅콩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교회는 즐기는 오락이기 때문에 해도 되도 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래서 교회에 문제가 있으면 빨리 자기 가정으로 숨어버리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가정이 1순위이고, 그 다음에 심심해서 다닌 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당연히 2순위라는 말이다. 하지만 주님의 약속된 교회는 이미 자기 가정을 접수해 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교회에 가서 교회가 아니라 집에 와서도 여전히 교회라는 말이다. 그게 곧 주님의 약속된 교회라는 것이다. 그러니 아이들이 아니라 교인들인데, 교인들이 모여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가 나를 낳으신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낳으셨다" 라는 것이고, "내가 당신을 좋아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붙여주셨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예수님을 본드와 같이 연결매체로 사용해서, 평소에 가정의 모든 행동이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

그런 가정의 좋은 점이 무엇인고 하니, 다른 가정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게 로마서 8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성령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도 없고, 비교를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자기 집안에 검사가 몇 명이고 의사가 몇 명이고, 그런 것과 비교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예 그런 것과 비교자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롬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이번에 대구의 경신고등학교에 수능 만점자가 3명이나 나오고, 그 이름이 똑같고 어쩌고 해서 화제가 되었는데, 그런 것과 감히 비교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 수성구 아파트 값이 높은고 하니, 그것이 경신고등학교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조건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공부를 잘하는 중학교나 고등학교나 있으면, 그게 최고라는 말이다(ㅋㅋ).

 

◈ 성령 안에서 이 세상을 평가해야 !!

그러면 이 세상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기가 막히게 평가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성령 안에서 평가하면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성령 안에서 주신 지혜를, 즉 잠언서를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르는데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즉 "남방여인이 나에게 지혜를 배우려고 왔다. 그런데 본 자손들은 지혜를 보고서도 알아보지 못하는가?" 라고 말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인데, 멀리 있는 남방여인도 예수님의 지혜를 배우려고 왔는데, 그런데 어떻게 가까이에 있는 자들은 예수님을 빤히 쳐다보면서도 알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마 12: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 어이쿠, 내 새끼 !!

그러면 왜 그랬느냐는 것인데, 그것은 곧 기존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나라가, 그 인간의 나라가 주님의 약속된 나라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즉 "너는 누가 뭐라고 해도 내 몸에서 태어난 내 새끼다" 라는 것, 그것이 그만 주님이 주신 가정을 훼손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눈이 뜬다는 것이고, 그렇게 눈을 뜨게 되면, 지금 이렇게 봄기운이 온 산천에 쏟아지는데, 그 모든 것에 '예수 그리스도 위하여' 라는 것을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를 위해서' 라는 것은 빠지고, '예수님을 위해서' 라는 것인데, 그러면 '나' 라는 존재도 역시나 예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

잠언서 10장 22절에서 "여호와께서 복을 주신다. 그게 부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라는 것은 약속인데,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기대한 약속이 아니라 예수님을 경유한 약속인데, 왜냐하면 여호와는 약속의 하나님이니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주인공이 되는 경유한 약속이 된다고 하면, 여기에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않는다" 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사람 자체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잠 10:22)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그것은 무엇을 소유했다는 것이 아닌데, 즉 "나는 부자가 되었어요"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김정은이 국민은행 광고에 나와서 "부자 되세요" 라고 많이 외쳤는데, 저기 북한의 김정은 말고, 여자 탤런트 김정은이 그랬다는 말이다(ㅋㅋ).

하지만 아무리 부자가 되어도 그것을 자기가 소유하게 되면, 그러면 근심이 같이 따라온다는 것이다. 즉 돈이 있는 곳에 근심이 있는데, 물론 돈이 없는 곳에도 근심이 함께 있고 것이다. "돈에 웃고 돈에 울고" 라는 것인데, 과거에는 "사랑에 웃고 사랑에 울고" 라고 했는데 말이다. 합쳐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라고 하면 되지 싶은데, 사랑인 줄 알았는데 돈만 빼앗기고 차이고 마는 시대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모든 시대의 근심은 바로 '나를 위해서' 라는 것이 먼저 되는데, 그러한 문제점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썩었는데, 자기에게 방부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썩은 것을 아무리 키워서 천국에 가도 어떻게 되는가? 오히려 천국만 더 썩고 만다는 말이다.

 

◈ 근심이 없는 사람으로 !!

따라서 주님께서는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않는다" 라고 해서, 근심 자체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근심이 없는 사람으로 바뀌어지는 것인데, 그렇게 그분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주인공이 될 때, 잠언서 10장 22절은 완성이 된다는 말이다. 잠언서는 구약에 있고 예수님은 신약에 있는데, 즉 구약에서 약속을 던져놓고 신약에서는 완성을, 즉 해답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면 구약에서 근심이 없는 부자가 되게 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거기에 혹하게 되는데, 즉 "부자가 되는 것도 좋은데, 거기에 근심조차도 없다고 하면, 그야말로 땡 잡은 것이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신약에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나를 쫓아내시고 그 안에 주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서, 근심이 없는 부자가 완료가 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교회에 나오세요. 그러면 OK !!

들어보면 굉장히 간단하고 쉬운 문제인데, 그런데 왜 어려운고 하니, 그것은 바로 자기가 주인공으로 버티면서 주님께서 가지고 있는 전지전능하심을 빼먹는 식으로, 그렇게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교회를 키워왔다는 것이다. "교회에 나오세요. 모든 문제를 해결해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원인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말이다.

바로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데, 그런 자신은 전혀 바뀌지도 않고 돈만 챙기고 근심만 없다고 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증거를 확보한 것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지금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다. "병이 들었습니까? 가난합니까? 우리 교회에 오시면 됩니다" 라고 하는데, 무슨 조폭이나 해결사도 아니고, 그게 무슨 짓이냐는 말이다. 

완전히 점쟁이가 광고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데, 사람 자체가 바뀌지 않으면 교회를 백년을 다녀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게 해주려면,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 "내 마음을 닮아라" 라는 것인데, 그러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없어진다는 말이다. 예수님을 닮으라는 것인데, 즉 예수님이 사시는 것처럼 살면 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103페이지를 보자.

** 그러나 힘으로 애써서 부자가 되려고 해서 부자가 된다면, 근심이 없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화를 불러요. '이게 내가 어떻게 해서 번 돈인데' 라고 하면서 말이죠. 

(눅 12: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눅 12: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눅 12: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눅 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눅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 반항하는 인간 !!

그러니 이런 사람은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근심도 증거하게 되는데, 그래서 저는 이런 인간을 그냥 인간이라고 부르지 않고 '반항하는 인간' 이라고 하고 싶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젖을 주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다 해봐야 고마운 줄을 모르는데, 그런데 조금만 엄마가 늦게 온다든지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때를 쓰면서 반항을 하는데, 그 모습이 어른이 되었다고 어디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마찬가지인데, 오히려 반발하는 내용이 더 커져서 문제라는 말이다.

어릴 때는 동물처럼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고 해서 짜증을 내다가, 어른이 되어서는 검찰에서 조사한다고 짜증을 낸다는 것이다. 자기 회사를 세무조사를 한다고 해서 왕짜증을 내면서 자살을 해버리고 말이다. 평소에는 오래 살려고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하려고 올라갔던 산인데, 거기에서 그만 목을 매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산이 무슨 죄가 있는가? 그것은 바로 자기가 죄가 많아서 그러한데, 왜 남을 탓하느냐는 것이다. 자기의 문제점을 모르고 말이다. 물론 그 심정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닌데, 그런데 왜 먼저 자기를 살펴보지 못하고 남만을 탓하느냐는 것이다. 

 

◈ 세월호 사건의 경우에 !!

제가 보기에는 세월호 사건은 교통사고인데, 물론 여기에 대해서 동의하지 못하는 분들도 많이 있겠지만 말이다. 물론 정부의 대응책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이렇게 시간을 끌고 갈 문제는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다. 아무리 자기 자식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여겨져도, 그래서 가슴은 미어지겠지만 말이다.

정말로 모두 귀신에 홀린 것 같은데, 이것이 바로 반항하는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게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자기 안에서 점점 더 확장이 된다는 것이다. 사거라드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만약 제가 그런 부모의 입장이라면, 저는 얼른 그런 모임에서 빠져 나오지 싶다는 것이다. 물론 보상금은 받겠지만, 그렇게 계속해서 집단적으로 모여서 항의하고 데모할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게 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사건인데, 그러니 지금 자기가 이렇게 살아온 것도 기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진작에 죽어야 하는데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까지 자식을 살려준 것도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모든 주어진 일에 감사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그 부모들이 다 성령을 받고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니기는 하지만 말이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 무엇인가? 반항하고 데모를 하라고 준 것이 아니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을 받아서 감사한다는 것은, 자기가 어디까지 부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십자가에 죽기까지 부인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될 때 성령께서 만족해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게 "인간이 얼마나 행복한가?" 라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주님께 영광이 되는가?" 라는 것인데, 성도가 있고 인간이 있다는 것은, 주님께 영광이 되라고 있는 것이고, 그 영광은 오직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라는 것을 알 때,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영광을 받는 쪽으로만 일을 하시지, 그렇지 않다면 결코 관심도 없고 도와주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짓은 하나님의 원수인 마귀들이 하는 짓인데, 즉 감사를 삭제하고 감사를 지워버리는 짓은 마귀가 한다는 말이다.

 

◈ 내가 어떻게 해서 번 돈인데 !!

여기 교재에 보면, "이게 내가 어떻게 해서 번 돈인데" 라고 되었는데, 이것을 잠언서 10장 22절 말씀과 결부시켜보자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부자로 만들게 하시고 근심을 주지 않는다" 라고 하는 말씀과 말이다.

(잠 10:22)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그렇게 되면, 이 말씀 자체를 자기가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는 당연히 부자가 되어야 하고 근심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설령 그렇게 해서 부자가 되고 근심이 없어졌다고 해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부자가 되지 않게 하고 근심도 있어지게 하신다고 하면, 그 다음에는 분명하게 "이게 내가 어떻게 해서 번 돈인데" 라고, 즉 "내가 주의 말씀을 지켜서 번 돈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즉 "부자가 된 이것을, 이것을 왜 당신이 가지고 가는가?" 라는 것이다.

그러니 앞뒤가 맞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주시니까 고맙다고 해놓고,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시 가지고 가니까 뭐라고 하는가? "내가 고맙다고 하면서 번 돈인데, 그런데 하나님이 뭐라고 왜 내가 번 것을 다시 가지고 가는가?"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 내 속에 괴물이 있어 !!

앞뒤가 맞게 정리해보면, 하나님을 이용했다는 것인데,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인간에게 이용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렇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이용을 당하지 않았다고 발을 굴리면서 난리를 치는 것이 인간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괴물이 들어있다는 것인데, 마귀가 말이다. 그러니 간단한 논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귀신에 들려있는데, 예수님께서 귀신을 추방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 사람만 귀신에 들렸다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도 다 들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것을 표본으로 뽑아서 보여주셨다는 말이다. 모두가 다 귀신에 들렸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그 사람만 귀신에 들렸고 자기는 멀쩡하다는 것이다. 사실은 자기들의 아비가 마귀인데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하나님의 지혜의 관심사는 우리의 영혼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으로 말미암아서 근심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 내부에 있다는 것이다. 반항하는 인간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누구에게 반항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반항을 한다는 것이다. 반항을 하는데 있어서 그 대상이 모호하다는 말이다. 왜 반항을 하고 싶은지 물으면, 자기도 모르게 '그냥' 하고 싶다는 것이다.

 

◈ 당신들은 왜 불교를 믿습니까?

이런 반항하는 인간을 아주 긍정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불교인데,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것이다. 지금 네팔에서 큰 지진이 나서, 그 주변의 티벳이나 부탄과 같은 난리가 났는데, 그들이 불교국가인데 말이다. 분명 하나님이 아닌 부처를 믿어서 벌을 받았다고 하는, 그런 목사들도 있지 싶은데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당신들은 기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왜 불교를 믿습니까?" 라고 한다면, 이것은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할 던질 수도 있는데, 즉 "당신들은 아무런 종교도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왜 불교를 믿습니까?" 라고 말이다. 여기서 이 2번째 질문이 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물어보면, "우리도 몰라요" 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불교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부처를 믿고 섬기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모르는 해답을, 그것을 유사해답이라도 가지고서 일단 걸쳐놓으면, 그러면 인간은 정신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 십자가도,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 !!

인간은 그렇게 거짓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그만 정신병에 걸리고 마는데, 그러니 왜 거짓말을 한다는 말인가? 최종적인 해답을 모르니까, 임시적으로 뭔가를 당겨와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런 것이라도 끄집고 와야하는데, 그래야 일단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도 마찬가지인데, 삼위일체나 십자가 등을 해답이라고 쥐고 있는데, 사실은 그런 것을 쥐고 있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완벽하지 않은 진리관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넣기 위해서 임시적으로 땜질을 하기 위해서 가져온 것이니 말이다. 

정말로 자기를 부인하는, 실제로 살아있는 모습으로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것은 성령을 받아야만 가능한데,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다고 해서, 그게 논리적으로 어떻게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 속에는 반항하는 인간이 들어있으니 말이다. 왜 반항을 하는가? 그 대상이 미워서 그러한가? 그게 아닌데, 자기가 반항하고 분노하는 대상은 그때그때 다르다는 것이다.
 
만약 북한의 김정은이 교통사고가 나서 죽는다고 하면 우리의 미움의 대상은 또 다시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얼마나 귀찮은지 모른다는 것이다. 김정은이 좋은 놈인지 나쁜 놈인지를 우리가 잘 알아서가 아니라, 무조건 그런 적이 표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분풀이의 대상으로서 말이다. 그래야 자신의 스트레스가 풀리는데, 누군가를 씹지 않으면 자기의 화를 어떻게 절제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요즘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하나님의 적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공격을 함으로서,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 척을 하는, 그런 교회의 분위기가 바로 오늘날 한국교회의 분위기인데, 그러니 문제가 상당히 심각하다는 말이다.

 

◈ 공정하지 못했던 왕들 !!

이것은 이번 수요일에 설교할 내용인데, 왕들의 공정하지 못했던 사례들을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말이다. 왕들이 어떠했는지 말이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왕들이 다윗 왕과는 달라서 자기 부인이 안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나는 왕이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내가 왕이라면 왕 행세를 해야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허리보다 내 손가락이 두껍고 어쩌고" 라고 하는데, 그게 바로 르호보암 왕이 이야기한 것인데, 그러니 왕이라는 것이 백성들에게 군림해서 조폭두목의 역할을 하는 것인 줄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왕상 12:8) 왕이 노인의 교도하는 것을 버리고 그 앞에 모셔 있는 자기와 함께 자라난 소년들과 의논하여
(왕상 12:9) 가로되 너희는 어떻게 교도하여 이 백성에게 대답하게 하겠느뇨 백성이 내게 말하기를 왕의 부친이 우리에게 메운 멍에를 가볍게 하라 하였느니라
(왕상 12:10) 함께 자라난 소년들이 왕께 고하여 가로되 이 백성들이 왕께 고하기를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우리를 위하여 가볍게 하라 하였은즉 왕은 대답하기를 나의 새끼손가락이 내 부친의 허리보다 굵으니
(왕상 12:11) 내 부친이 너희로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하소서

왜 그런 생각을 하는고 하니까, 이미 재벌2세나 3세가 되면 잘 먹고 잘 사는데, 그러니 그런 행세는 계속해서 오랫동안 유지하고 싶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겠는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재물들은 백성들을 쥐어짜야 나온다는 것이다. 한 번 쥐어짜서 모자라면 더욱 더 비틀어서 쥐어짜고 말이다. 그러니 사람이 어떤 위치에 있다고 한다는 것은, 그 위치와 함께 자폭한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는 것이다.

 

◈ 그래도, 내가 이랬던 사람인데 !!

장교가 사고를 쳐서 소령이 대위로 강등되는 것이 상당히 부끄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가능한 것은 아닌데, 북한의 경우에는 장성이 3단계나 강등이 되어서 쫓겨났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목사가 집사가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이것은 강등은 아닌데, 교회에서 그렇게 계급처럼 사용하니 그렇게 보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되면 엄청 힘들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목사를 하던 버릇이 남아서 말이다.

어떤 분은 목사를 하다가 그만 자동차 회사에 취직을 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제가 박수를 쳐드렸다는 것이다. 정말 잘했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분에게 만약에 집사로 불러드리겠다고 하면, 그것은 아마 모르기는 해도 상당히 기분이 별로이지 않을까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그분이 그것까지도 수용한다면 박수가 문제가 아니라 업어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ㅋㅋ). 

마찬가지로 이미 장로가 되었던 양반에게 평신도라고 부른다고 하면, 그 기분이 어떻겠는가? 결코 좋다고는 할 수가 없는데,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나' 라는 것이 몸뚱아리가 있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그동안 그 자리를 자기와 합치시켜서, 그것을 두고 '나' 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즉 "내가 이랬던 사람인데?" 라고 하면서 말이다.

 

◈ 죄인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 !!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는고 하니, 자신이 이 땅에 죄인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되는가? "니가 나를 믿고 싶나? - 예, 믿고 싶습니다. - 믿어서 어디로 가려고 하는데? - 예, 잘 믿어서 천국에 가고 싶습니다. 보내주세요. - 알았다. 그러면 내가 이 땅에서 가졌던 위치에 니가 합세할 수 있는가? - 그게 무엇입니까? - 나는 사람들에게 죄인이 되었다. 함께 합칠 수 있겠나? - 그것은 좀 곤란한데요" 라고, 그렇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는가? 죄인이라는 자리는, 물론 말로는 합체할 수 있는데, 그런데 그 자리는 죄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그것이 되었는데, 그래서 "나는 죄인 중에서 괴수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세리와 창기는 그게 되었는데, 그래서 그들은 감히 얼굴도 들지 못하고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말로서 하는 것은 바리새인들도 곧잘 했는데, 그들도 고난주간을 만들어서 지키면서 무엇이라고 했는가? "나는 부족합니다. 금식을 합니다" 라는 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연기이고, 흉내를 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처음부터 다시 !!

늦게 오신 분이 있어서 처음부터 다시 하겠는데(ㅋㅋ), 교재 103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이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시는데, 그 약속이 어디에 막혀있는고 하니, 자기가 만든 약속에 막혀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약속에 우리 자신이 만든 약속에 가로막혀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자기가 만든 약속은 무엇인가? "내가 나답게 되는 것, 내가 가치 있게 되고,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내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자기가 만든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전제로 해서 부자가 되려고, 그것을 위해서 잠언서 10장 22절을 언급하면서, 거기에다가 근심까지도 없다고 하니 얼마나 좋으냐는 말이다.

그러니 목사의 경우에는, 이 구절을 가지고서 대심방을 하게 되면, 가정마다 흰 봉투가 마구 나오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도 은근히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부자가 되고, 거기에 근심까지 없다고 하니 말이다. 물론 나중에 물어내라고 항의가 들어올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ㅋㅋ).

실제로 목사들이 대심방을 하면 주로 잠언서를 많이 하는데, 나름대로 골라잡을 수 있는 성경구절이 많이 있어서 말이다. 하지만 주님은 약속은 전혀 그것이 아닌데,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것을 아예 없애버리는 약속이라는 것이다. "뭐, 니가 부자가 된다고? 이게 미쳤나? 그런 것은 약속에 없어"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부자가 되는 것은 약속에 없는데, 그리고 우리에게 근심이 없다고 하는데, 그것도 역시 하나님의 약속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잠언서 10장 22절에 그런 말씀이 있는데요?"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주님의 약속이라는 것이다. 그 주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면, 우리 자신의 약속이, 즉 '나'의 약속이 추방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 잠시 터키여행을 !!

요즘 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마 여러분은 별로 가보지 않았지 싶은데, 저도 역시 그러한데 말이죠. 그래서 저는 차비도 절약하는 의미에서 TV를 통해서 여행지를 소개하는 프로를 종종 보는데, 비행기 값이 장난이 아니니 말이다. 그렇게 해서 스페인이나 터키 등지를 차비도 내지 않고 돌아보는데 말이다(ㅋㅋ).

터키가 나오면 단골메뉴가 무엇인고 하니, 새벽녘에 큰 들판에서 헬륨가스를 넣은 비행선을 띄워서 해가 뜨는 광경을 보여주는 코스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동네에 뜨는 해나 그 해나 같은 해라서, 굳이 저기까지 가서 구경할 필요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는데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헬륨가스를 넣어서 비행선을 띄운다는 것이다.

저는 거기서 낯설다고 느낀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비행선인 풍선을 띄울 때 보면 불꽃이 나오는데, 그런데 제3자가 보면 그게 참 위험해 보이는데, 왜냐하면 풍선은 불에 잘 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지상 1500미터까지 올라갔다가 풍선에 불이 붙어버리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실제로 그런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데, 해외토픽에도 종종 나온다는 것이다.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고 하니까, 헬륨가스를 넣어서 불을 지펴서 그렇게 풍선을 띄운다고 하는 것이 서로 모순이 되는데, 즉 불을 지피는 것과 풍선이 서로 어울리지를 않는다는 말이다. 불을 지폈으면 풍선이 타버려야 맞는 것이지, 어떻게 뜨느냐는 말이다.

 

◈ 나와 함께 죽자 !!

잠언서 10장 2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복을 주셔서 부자로 만들게 하시고 근심을 주지 않는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우리를 붕 뜨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십자가' 라는 것이 들어있다는 말이다. 즉 "너는 나와 함께 죽어야 한다" 라는 약속이 포함된 말씀이라는 것이다.

(잠 10:22)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그러니 터키풍선을 생각하면 되는데, 즉 불은 지폈는데 풍선이 뜬다는 것은, "나는 죽었는데 잠언서 10장 22절은 뜬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 봐, 뜨잖아. 부자가 되었잖아. 그러니 부자가 되었다고 시기하고 욕하지마. 그 사람은 근심도 없어. - 왜요? - 자기가 부자가 아니라 주님이 부자이니 말이야. - 에이, 그 사람은 잘 먹고 잘 사는데요? - 그 사람에게 물어봐. 자기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하지"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흉내를 내게 되는데, 즉 "나도 흉내를 내서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입니다' 라고 하면 부자가 되겠지" 라고 하는데, 하지만 속일 것을 속여야지, 자기 것이 아닌 척을 하는 것을 주님이 속아넘어갈 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마지막에 부자가 된 자기 모습을 미리 당겨서 상상을 했다는 것은, 결코 자기가 부정이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 거지 나사로가 얼마나 풍요한지 몰라 !!

그러면 우리의 마지막 모습은 무엇인고 하니, 죽어서 마땅한 죄인의 모습이란 것이다. 그렇게 죄인의 모습이 되었다고 하면, 그것이 바로 잠언서 10장 22절 속에 이미 포함된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거지 나사로인데, 전혀 부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몸이 아프니 근심도 되고 말이다. 하지만 나사로의 본래 자리는 낙원인데, 즉 근심도 없고 걱정거리도 없다는 것이다.

천국은 놀라운 정도로 모든 것이 풍요한데, 그게 거지 나사로가 사는 동네라는 말이다. 그러니 잠언서 10장 22절 말씀이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거지 나사로가 훌륭해서 그런 게 아니라, 예수님이 나사로를 찾아오셔서 주인으로 바뀌어지니 말이다. 잠언서 10장 22절 말씀은 그렇게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여기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 자신의 약속은 파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즉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만나서, 우리 자신의 약속을 파기시켜버리면, 잠언서 10장 22절의 말씀이 주님의 약속의 일부로서 우리에게 적용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임에는 분명하지만, 결코 우리의 약속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의 소원이 아니라 주님의 소원으로, 그렇게 바꿔치기를 하시는 주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진짜 복은 영혼의 문제인데, 소유의 문제가 아니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하나님의 지혜의 관심사는 우리 영혼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으로 말미암아서 근심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야말로 희망사항처럼 들리죠. '세상에, 아무 것도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만으로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라는 항의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는데, 불가능성이라고 말이죠.

 

◈ 불가능(不可能)성 !!

여기에 "세상에, 아무 것도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만으로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런 인간이 바로 반항하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사실은 우리가 항의를 매일같이 하고 있는데, 즉 은연중에 하나님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가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 오늘 날씨도 참 좋은데, 그러니 기분이 좋은 일만 생겨야 합니다" 라고, 그런 식으로 아침예배를 드린다는 것이다. 그게 예배인지 예불인지 구분이 되지 않지만 말이다. "주님, 우리 가족 중에서는 복음을 아는 사람은 저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 자식이 어디를 가든지 사고가 없게 해주시고, 그저 남산 위의 노루새끼처럼 잘 뛰게 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ㅋㅋ). 

거기에 바로 우리의 반항심이 삽입되어있는데,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불가능성' 이라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 교재에도 나오지만, 주님이 우리를 가지고 일을 하실 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즉 우리의 모든 가능성을 다 피해가 버리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상상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 라캉 - '인간은 착오적 존재' !!

'라캉' 이라는 학자는 인간을 어떻게 보는고 하니, '착오적 존재'로 본다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항상 착오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왜 착오를 일으키는고 하니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결핍이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가? 라캉은 그것을 '태반'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태반이 무엇인가? 엄마의 몸 속에서 난자를 둘러싸고 있는, '아기집'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말이다. 바로 그 태반을 상실한 존재가 곧 인간이란 것이다. 그러니 라캉에 의하면, 사람은 엄마를 잃은 것이 아니라 태반을 잃은 것인데, 그것을 '결핍의 모체' 라고 하는데 말이다. 물론 아기는 엄마의 일부이지만, 나름대로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기가 엄마의 배속에서 나올 때에 분리된 것이 아니라, 처음 임신을 할 때부터 아기는 독자적인 존재로 엄마와 분리된 채로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엄마 몸의 일부이면서도 일부가 아닌 채로, 즉 자기만의 세계인 것처럼 해서 거기서 아기가 자라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기가 엄마 바깥으로 나오면서 무엇을 잃어버렸는고 하니, 태반이 그만 찢어지면서, 찢어져야 아기가 바깥으로 나올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해서 아기와 태반이 끊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마치 계란의 노른자가 커가면서 병아리가 되면 그 껍질을 깨고 나오듯이 해서 말이다.

 

◈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아세요?

그것을 '아브락사스' 라고 하지 싶은데, 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이라는 소설에 보면 어떤 신이 나오는데, 그 신은 인간의 완전한 자유를 허용한 신이기 때문에, 기존의 모든 체제와 정치경제를 찢는 것에서 자아는 비로소 새로운 피조물로서 탄생한다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가 불교적 인식을 가지고 있기에 그런 소설을 썼는데 말이다.

그러니 이것이 젊은 아이들에게는 얼마나 자극적인 것이 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기성세대의 모든 것을, 그 원리원칙을 그야말로 혁명적으로 파기를 해버린다는 것이다. 즉 "파기하기 않으면 나는 없고, 파기하는 순간 나는 비로소 제2의 자아로 새롭게 탄생한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엄마와 아빠의 잔소리 속에 있던 '나' 자신이, 이제는 그 답답한 알에서 깨어나게 될 때, 바깥에는 그야말로 태양이 찬란하게 비치는 자유의 공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드려라, 드럼을! 타라, 오토바이를! 빠라바라빠바바!"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ㅋㅋ). 이것이 곧 그들이 말하는 자유인데, 그래서 그때는 술과 담배에 정신없이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존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게 될 때, 그것을 "나 자신이 숨겨지고 응축된 신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유 없는 반항' 이라고 하는데, 아무런 이유도 없고 목적도 목표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목적은 있는데, 무조건 자기가 지향하는 것, 바로 그것이 목적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무조건 내달린다는 것이다. 동쪽으로 가라고 하면 서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가라고 하면 동쪽으로 가고, 그러니 반항하는 자체가 곧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중2병' 이라고 하는데, 중이염이 아니고 말이다(ㅋㅋ). 중이염은 이비인후과에 가면 되겠지만, 이 중2병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전도서가 왜 있는고 하니, 솔로몬이 보기에 이 세상이 그야말로 웃기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전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 너 늙어봤냐 나는 젊어 봤단다 ♪

서유석이 25년만에 '너 늙어봤냐 나는 젊어 봤단다' 라는 노래를 내어놓았는데, 자기는 이제 늙었지만 젊음을 겪어봤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젊다고 하는 놈들은 아직 늙어보지 않아서, 그 늙었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그렇게 모르면서 무엇을 안다고 까부느냐고 하는 내용인데 말이다(ㅋㅋ). 

과거 김수환 추기경이 '인생은 미완성' 이라는 노래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만 편지 ♬" 라고, 그렇게 부르는데 말이다(ㅋㅋ). 거기에 보면 "사슴처럼 기대어 살자" 라고 하는 가사가 나오는데, 이 부분 때문에 추기경이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는데, 하지만 그렇게 인생을 미완성으로 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갈 때까지 한 번 가보자" 라는 식이 되고 마니까 말이다.

 

◈ 나는, 나의 죄에 대해서 모르겠다 !!

그러니 인간이 반항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나는 나의 죄에 대해서 모르겠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벌을 받는다고 하면, 도대체 자기가 무슨 죄 때문에 벌을 받는지를 모르겠다는 말이다. 인생 자체가 바로 그러하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선악과를 따먹어서 죄를 지었다고 하는데, 하지만 자기는 구경도 못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벌을 받아야 하는지, 그게 억울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장차 그리스도의 몸이 될 지체들에게만 주어진 것인데, 왜냐하면 예수님에 관한 책이기에 말이다. 그리스도의 몸에 합류될 사람들에게만 주었기에, 글자로 쓰여졌다고 해서 이해될 책이 아니고, 성령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문자로서는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처음부터 마귀에게 속한 자로서, 저주를 받고 죽어야 한다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유도 없는데, 무조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죄를 지어야 한다는 말이다. 너무나 쉬운 공식인데 말이다.

 

◈ 성경은, 천독 만독을 하는 책이 아니라 !!

그런데 성경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니, 즉 자기 구원을 중심으로 생각하니 어떻게 되는가? 성경을 천독을 하고 만독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만독을 했다는 것은 성경을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는 의미인데, 그러니 갈 때까지 한 번 가보자는 것이다.

신천지의 이만희는 요한계시록을 모두 다 외운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코란이나 불경을 열심히 보고 외우라는 말이다. 불경은 그렇게 외우면서 스스로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효과가 있다고 하니 말이다.

불경은 그렇게 해서 도를 닦아도 되겠지만, 그러나 성경은 그런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그분의 주되심을 이야기하는 책이라는 말이다. 만약에 우리 인간이 도를 닦아서 가능하다면, 예수님이 굳이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에게 그렇게 도를 닦으라고 하면 되는데, 그런 모델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죄인을 부르려고 오셨는데, 도를 닦을 줄도 모르는 죄인을 말이다. 도를 닦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워 먹으려고 왔는데, "너, 너, 너, 나와!" 라고 해서 말이다. 우리가 달음박질을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냥 뽑아서 데리고 가신다는 것이다. 마치 주부가 콩나물 시루에서 콩나물을 뽑듯이 말이다.  그렇게 뽑혀가면서 깨닫게 되는데, 반항한 것이 곧 자기의 죄임을 말이다.

 

◈ 결핍을 메우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인간 !!

라캉은 말하기를,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결핍이기 때문에, 그 결핍을 메워야만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저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자꾸만 인위적으로 당겨버리는데, 그렇게 당겨서 마치 결핍이 사라진 것처럼 착오를 일으키는데, 그 착오를 이미지, 즉 상상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상계인데, 자꾸만 상상을 한다는 것인데, 즉 "나는 신데렐라와 동급이고, 백설공주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2세를 보면, 자기가 그런 사람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상상은 결국 정신병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라캉은 '나' 라는 것을 주체라고 해서, 소문자 에스(s)로 표시하는데, 그런데 이것이 대문자 에스(S)로, 즉 멋있어 보이는 것, 그런 거대한 타인이 가지고 있는 재산, 인품, 신앙 등등, 그런 것들을 탐을 낸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s)'과 '저것(S)'으로 왔다갔다하니 그만 정신분열증에 걸리고 만다는 것이다.

 

◈ 정신착란증과 정신분열증 !!

그런데 이런 정신분열증과는 달리 정신착란증이 있는데, 정신착란증은 무엇인고 하니, 여기에 이렇게 대문자 에스(S)가 자기에게 하나 있는데, 그것이 소소하고 작은 것으로 인해서, 예를 들어서 바깥에서 개미가 자기를 물려고 해서 나가지 못하고 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서 따로 있는데, 이렇게 작은 것들이 달려드는 것은 정신착란증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여기에 반해서 정신분열증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는 작은데 오늘은 나폴레옹이 되고 또한 내일은 전지현이 되고 하는, 그렇게 멋있고 부러워하던 대상이 되는, 그런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혹은 자기 아이가 물에 빠지는 착각을 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게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둘 다 정신병인데, 그러니 고치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그것을 거짓말로, 즉 임시땜방으로 "이 정도가 내 모습이다. 재벌은 무슨?" 라고 하면서 장착이 되면 정신병이 없어지면서 안정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거짓이기 때문에, 사람이 거짓말을 하지 못하면 정신병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 불안해, 불안해 !!

그러니 우리가 지금 정상인이라고 하면, 그것을 거짓말을 잘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ㅋㅋ). 그런데 잠시 그렇게 만족해하다가도 난데없이 새로운 욕망이 떠오르게 되면, 또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오늘 아침에 뉴스에 보니, 어떤 할머니가 시장에 가서 닭을 7마리인가 샀는데, 유모차를 끌고 와서 말이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돈을 잊어버리고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하면서 집이 가까우니 금방 갔다가 오겠다고 하면서 유모차를 두고 닭은 들고 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만 할머니가 오지 않자, 가게 주인이 유모차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썩은 당근만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그 할머니가 5차례인가 그렇게 하다가 결국은 잡혔는데 말이다. 

장사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사기를 당하는 것이 낯선 일인데, 그래서 평소에는 "장사가 내 천직이다" 라고 하다가도, 그런 일을 당하게 되면 "더러워서 장사를 못하겠다. 때려치워야지" 라고 하면서 짜증을 내는 순간, 그 사람은 그만 불안해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장사를 하는 사람들 치고 그런 사기를 당하지 않는 사람은 없는데, 설령 당하지 않았다고 해도 뉴스에 보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 저런 놈이 우리 가게에는 오지 않을까?" 라고 하면서 불안해지면서, 조금까지의 안정감이 그만 사라지면서 흔들리고 만다는 것이다. 

아이가 학교에 잘 다니는데, 그런데 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했다고 하는 것이 뉴스에 나오니 학교에 전화를 해댄다는 것이다. 불안해서 말이다. 그것이 바로 낯선 실재계에서 공격하면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는 이렇게 상징계에 나름 안정감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예상치도 못한 실재계에서 그런 공격을 하게 되면, 그 안정감도 얼마 가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샌프란시스코에 지진이 일어났다고 하면, 그 순간 한국에서는 전화통에서 불이 난다는 것이다. "야야, 너희들은 잘 있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기분이 한 평생을 속고 산다는 것이다. 그저 자기 기분을 따라서 살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데, 물론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 예쁘게 포장된 자식들 !!

남들이 잘한다는 것은 뽑아서 자기가 되고 싶어하는데, 그렇게 남을 흉내내다가 결국은 그 뜨거운 화장터에서 가서 불에 타기를 대기하면서 누워있는데, 식구들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하면서 투덜거리고 말이다(ㅋㅋ). 장례식이 끝나고 나면 뷔페식당에 가서 그동안 먹지 못했던 것을 보충하고 말이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유산을 가지고 형제들끼리 싸우는 것만 남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식들이 그런 짓을 하더라도 지금 예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주체 안에 그것이 예쁘게 포장이 된 채로 들어오기 때문인데, 그러니 자기를 위해서 자식이 좋다는 것이다. 자식을 위해서 자식이 좋은 것이 아니고 말이다. 즉 "나에게 예쁘게 때문에 자식이 좋다" 라는 말이다.

 

◈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

그렇게 평생을 상상하면서, 그런 망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인데,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서는 반항하고 대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불가능성인데,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이렇게 성경공부를 하면서 말이다.

하나님을 섬길 줄도 알고 영광을 돌릴 줄도 알고, 그리고 자기의 행복을 챙길 줄도 알고, 그렇게 우리는 안다고 우기는데, 그런데 주님은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시는가? "너희가 할 수 있는 그것 말고!"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축복이고 기적이라는 말이다.

 

◈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이 로마서 4장에 보면 나오는데, 5절에 보면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라고 하는데, 그렇게 경건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잇다는 말이다.

그러니 성도가 무엇인가? 물론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아는데, 그것을 놓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인간은 살아간 만큼 노하우가 쌓이는데, 그러면서도 그게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잘하는 자기 자신이 못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 그것이란 말이다.

그것이 바로 거룩하지 않은 자기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인데, 우리는 결코 그것은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오히려 우리 자신보다 더 소중하고 귀중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이다.

(롬 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여기서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서 31절을 살펴보자.

(고전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 1: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 주 안에서 자랑하라 !!

사도바울이 26절부터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하다가, 마지막 31절에서 "주 안에서 자랑하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주님이 나를 이렇게 남들 앞에 자랑거리로 내세웠다는 것은, 그것은 주님이 하실 일이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라는 것이다. 

도대체 어느 인간이 스스로 약해지고 스스로 천해지고, 또한 멸시를 받는 것을 좋아할 인간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다. 여기에 나오는 이 말씀들이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인데, 그러면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무엇인가? 항상 귀하고, 강하고, 멋있고, 똑똑하고, 존경을 받고, 질투의 대상이 되고, 그런 것을 우리는 원한다는 말이다.

그와 반대방향으로 자기의 방향을 옮기고 싶어하는 인간은 없는데, 그런데 주님은 "그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셨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나와야 하는데, 중간에서 이용물로 나오면 안 된다는 말이다. 즉 "예수님을 믿을 테니, 나에게 무엇을 해주실 겁니까?" 라고 나오면 곤란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항상 결과로서 "주님께서 홀로 다 하셨습니다" 라고, 그렇게 순간 순간이 주님의 결실물로서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끝 지점에서 주님이 자랑거리로 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시간 뒤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때까지 자기가 살아있다고 하는 것도 장담할 수 없기에 말이다. 

 

◈ 하나님의 약속은 불가능성 !!

이것이 바로 불가능성인데, 이러한 불가능성을 포함한 것이 여호와, 즉 약속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약속은 불가능성인데, 그게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없는 데서 생기는 것이고, 또한 죽은 아들을 살리는 것인데 말이다. 아브라함이 먼저 수풀 속에 수양을 숨겨놓은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은 막장이었다는 것이다. 갈 때까지 그냥 가보는 것인데, 아들도 죽고 다 죽는 형국이라는 말이다.     

수양은 주님이 준비하시는 것인데, 그래서 성도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주께서 준비한 존재가 바로 자기 자신이란 사실을 이 세상에 증거하라고,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다는 말이다. 즉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이다" 라는 것이다.

주님은 그런 '나' 라고 하는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을 준비하셨는데, 즉 주님을 자랑하라는 것이지, 자기 자신을 자랑하라는 것은 결코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 우리 자신은 불가능성에 의해서 항상 관리되고 이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죄가 들추어지는 즐거움이 !!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죄를 짓은 즐거움이 아니라, 죄가 발굴되는 즐거움을, 그렇게 죄가 들추어지는 즐거움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주 신난다는 말이다. 철없는 젊은 아이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즐거움보다도, 주님이 우리를 오토바이로 사용하셔서 타고 다니시는 즐거움이 더 즐겁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수동적인 즐거움이 능동적인 즐거움보다 더 좋다는 말이다. 날마다 주님에 의해서 당하게 되는 즐거움이,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서 살아가는 즐거움보다 더 좋다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런 차원에서 이 잠언서를 보면 되고 말이다.

이제 교재 104페이지를 보자.

**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내가 못하는 것을 해주고 있다는 것 자체가 지혜라는 구조 속에 있는 행복이고 기쁨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할 때, 그때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잠 15:6)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어도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되느니라

(잠 22: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무슨 말인가? 의인이 되면 악인의 고통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면 재물과 영광과 생명의 혜택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인데, 하지만 그 약속을 우리는 우리 힘으로는 어떻게 도저히 받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냥 마중을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약속을 가지고 나가기에 말이다. 우리 자신이 주인공이 된 채로 말이다. 그러니 "내가 가지고 있는 어설픈 희망으로 인해서 그동안 주님의 약속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나를 치워주세요" 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물의 구조에서는 이렇게 되는데, 그런데 불의 구조로 넘어가면 천국의 삶이 어떠한가에 대해서 성경은 한 마디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난 것은 다 잊어버릴 지어다' 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물의 구조와 불의 구조가 나오는데, 이런 두 가지 구조에게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물의 구조는 노아의 물 심판이고, 불의 구조에서는 그 마지막이 불 심판이란 말이다. 물 심판과 불 심판의 공통점이 모두 없애버린다는 것인데, 이렇게 없애지 않으면 우리가 주님의 약속에 대해서 오해를 하는데, 즉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 왜곡된 소리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모두 없애버린다는 것이다.

 

◈ 그래도 시집을 갈래?

여기 교재에 천국의 삶이 나오는데, 이게 어제 낮 설교와도 관련이 되는데 말이다. "이것이 천국이다. 그래도 시집을 갈래?" 라고 말이다. 그것이 어제 설교의 핵심이었는데, 주님께서는 "여기가 천국인데, 이제는 올 때까지 다 왔는데, 그래도 시집을 꼭 가야만 하겠는가?" 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시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천국이 중요한데, 그래도 가겠다고 하면, 주님은 "그래? 그렇다면 내가 시집을 보내줄게"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 "왜 시집을 가는 것보다도 천국이 더 좋은지, 그것을 시집을 가서 한 번 제대로 겪어봐라" 라는 것이다. 그게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나오는데 말이다. 천국이 시집을 가는 것보다 더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막상 결혼을 해보니 깨가 쏟아진다는 것이다. 남편을 어떻게 하면 기쁘게 해줄지, 그런 것이 '확' 당겨오니, 예수님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남편에게 "당신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한다는 것이다(ㅋㅋ). 

(고전 7:32)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고전 7:33)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고전 7:34)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 왕의 여자들 !!

구약의 이스라엘의 왕들을 보면, 거기에 엄마와 아내의 이름이 나오는데, 왜 그런가? 왜 왕이 틀어지는고 하니, 여자들이 우상을 섬긴다는 것이다. 왕의 파트너가 우상을 섬기니까, 그러니 왕이 왕비를 기쁘게 해주는 것이 백성들의 부부생활에 있어서 자기가 모범이 된다고 여겼다는 말이다. 왕인 자신이 이렇게 마누라에게 잘해주면 백성들도 그것을 보고 잘해주고, 그러면 가정도 화목해지고 나라도 잘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매사에 정략적이고 정치적인데, 그런데 왕비가 자꾸 우상을 섬긴다면 왕이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서 왕도 거기에 맞추어 주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솔로몬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많은 여자들을 왕비로 맞아들였는데, 그런데 여자들이 올 때마다 혼자 오는 것이 아니라, 각기 자기 나라에서 섬기던 신들을 가지고 들어온다는 것이다. 

 

◈ 약속은 없는 신은 우상에 지나지 않아 !!

아까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복습하는 의미에서 다시 하면, 우상에는 무엇이 없다고 했는가? 약속이 없다고 했는데, 물론 하나님의 약속이 말이다. 그런데 그 대신에 인간이 원하는 약속들이 가득 들어있는데, 하지만 그 인간의 약속과 하나님의 약속의 사이에는 십자가 복음이 있기 때문에, 인간으로는 어떻게 가능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주님의 약속을 밀어내게 되는데, 그래서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화를 자초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면 인간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거기에 대해서 반발하고 말이다. 그렇게 하면 할 수록 야단은 야단대로 더 맞고 말이다. 

 

◈ 노예가 주인보다 행복하다 !!

우리가 부자를 좋아하는데, 하지만 막상 자기가 재벌이라고 한 번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제가 생각하기는 그렇게 우리가 상상하는 만큼은 행복하지는 않지 싶다는 말이다. 아마 집에서 일하는 정원사나 가사 도우미가 더 행복하지 싶은데, 주인은 그렇게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노예가 주인보다 행복하다" 라는 말이 있는데, 일리가 있다는 것이다. 남한 사람이 행복하겠는가? 북한 사람이 행복하겠는가? 북한 사람이 행복한데, 왜냐하면 노예니까 말이다. 물론 남한에도 엄청나게 노예가 많지만 말이다. 그들은 김일성 가문의 노예인데, 그래서 입이 있어도 말을 하면 안 되고 귀가 있어도 들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개가 행복하겠는가? 인간이 행복하겠는가? 물론 개가 행복한데, 개는 주인이 주는 사료만 먹고 살면 된다는 것이다. 북한에는 이제 그런 사료조차도 없다고 하는데, 국가가 아니라 완전히 종교단체라는 말이다. 김일성 교주를 섬기는데, 가식이 아니라 실제로 행복해서 눈물을 마구 흘린다는 것이다. 김일성이나 김정일이나 김정은이 지나가면 말이다.

그래서 남한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지나가면 쳐다보면서 우는 사람이 없는데, 물론 과거에 육영수 여사가 죽었을 때는 울고 했지만 말이다. 울기는커녕 씹지를 못해서 난리라는 것이다. 오히려 대통령이 나와서 눈물을 흘리고 하는데 말이다(ㅋㅋ).   

북한은 투표를 하면 100퍼센트인데, 그러니 종교라는 말이다. 모두가 같은 교회 교인들인데,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요즘 문제가 되는 'IS' 라는 이슬람의 테러단체도 자기들끼리는 행복한데, 순교를 하면 천국에 가니 말이다. 그러니 죽지를 못해서 환장하는데, 서로 자기 몸에 자폭하는 폭탄을 걸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죽으면 알라신의 나라에 가니 말이다.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

그러니 마귀가 인간은 완전히 버려놓았는데, 여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는가? 로마서 7장에 보면 엄청난 갈등을 느끼고 있는데, 즉 "나는 하나님의 법을 원하는데, 그런데 내 속에는 원하지 않는 놈이 들어있어서 나를 힘들게 한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 언제 행복한고 하니, 사도바울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행복하고, 감사하고, 평안하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롬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 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자기 몸이 욕심을 부린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그래서 그의 소원은 빨리 죽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육신을 얼른 벗고 주님을 만나고 싶어서 말이다. 자기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지, 그것을 증명하는 것에 자기의 행복을 찾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사도바울에게 "천국에 다녀오셨습니까?" 라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이게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나오는데 말이다.

* 질 문 자 : 천국에 다녀오셨습니까?
* 사도바울 : 예, 갔다왔습니다. 
* 질 문 자 : 천국이 어떻든 가요?
* 사도바울 :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어요.
* 질 문 자 : 그렇게 좋던가요?
* 사도바울 : 그야 물론입니다.

(고후 12: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고후 12: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후 12: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후 12: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사실은 이런 사도바울의 경험을 누가 먼저 했는고 하니, 구약에서 모세가 먼저 했다는 것이다. 모세가 40일 동안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왔는데, 거기서 음식을 먹지도 않았고 잠을 자지도 않았는데, 그러니 생수와 라면과 침낭과 같은 것도 전혀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려오는데 그 얼굴이 어떠했는가? 얼굴이 그만 달덩이처럼, 아니 해와 같이 빛났다는 것이다. 모세가 결코 먹을 시간이 없어서 먹지 않은 것이 아닌데, 먹을 필요가 없는 전혀 다른 세계에 갔다가 온 것으로서, 그러니 천국은 다르다는 말이다.

(출 34:28)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를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출 34: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 왜 천국이 그렇게 좋은가?

여기서 질문이 나가는데, "왜 천국이 그렇게 좋은가?" 라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강의의 엑기스라고 할 수 있는데, 왜 천국이 그렇게 좋은 세계이냐는 말이다. 천국은 예수님의 세계이기 때문에, 바로 그 중심이 되는 인물의 격에 맞도록, 즉 예수님에게 부합이 되도록 그 시공간이 새롭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위대하심을, 그런 위대한 값을 한다고 땅도 바뀌고 하늘도 바뀌고 피조물도 바뀐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옷을 새롭게 갈아입는데, 완전히 분위기가 쇄신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들이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격에 맞추어주기 위해서, 즉 예수님이 어느 정도로 어느 정도로 위대한지, 그것을 사도바울은 뭐라고 했는가? "천국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격에 어울리는 천국이 그 정도이니, 예수님은 어느 정도이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자꾸만 자기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말을 듣고 "내가 갈 천국은 그 정도로 좋구나" 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말이다. 자기 생각을 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위신과 체면에 맞는 환경을 달라고 반항하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 이런 꼴로, 도대체 이게 뭡니까? 이렇게 해서 무슨 예수를 믿는 목사 티가 나겠습니까? 그래도 명색이 목사인데, 이런 자동차 회사에서 일을 다 하다니 말이 됩니까? 그것도 12시간 맞교대라서 완전히 파김치가 되고 맙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 마르크스 - '일은 능력 것, 혜택은 필요한 만큼' !!

하지만 돈이 공짜로 주어지는 법은 없는데, 다 맞추어서 주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마르크스가 그것을 알아챘는데, 돈은 노동을 한 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노동을 가격을 보고 맞추어서 준다는 것이다. 그게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인데, 그래서 마르크스가 외치기를, "일은 능력 것하고, 혜택은 필요한 대로 받자" 라고 했다는 말이다.

이게 바로 레닌과 스탈린의 사상으로 퍼지게 되었는데, 얼마나 좋으냐는 것이다. 많이 필요한 사람은 많이 받고, 적게 필요한 사람은 적게 받고 말이다. 그러니 능력이 많아서 일을 많이 했다면, 그 남은 잉여금을 능력이 없어서 일을 많이 하지 못한 사람에게 보충해줌으로서 골고루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인데, 그것을 4글자로 공산주의가 아니라 '공산사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게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데, 각자에게 필요한대로 나누어준다는 것인데, 그야말로 이상적인 공동체라는 말이다. 정수라가 부른 노래에도 나오는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고 ♬" 라고 말이다. 88올림픽 때 부른 노래인데, 놀랍게도 거기에 공산주의 사상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 하지만 공산사회가 곧 지옥 !!

하지만 그런 공산사회는 지옥인데, 왜냐하면 예수님이 계시지 않고 인간들만 있기에 말이다. 인간들이 원하는 것은 있는데, 하지만 문제가 무엇인가? 어제 낮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거지 나사로 앞집에 살았던 부자의 경우에, 물이 무엇인지 알아서, 지옥에 가니 자기가 평소에 경험했던 물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을 달라고 하는데, 그러니 결핍이 계속해서 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지옥은 죽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살려놓고서 애를 먹이는 곳인데, "봐라. 예수님이 없는 곳이 이런 곳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이렇게 된다" 라고 하는 말이다. 이게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나오는데(?),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가 없으면 저주가 그 무리에 있느니라" 라고 말이다. 이게 글자로 간단하게 되어있지만, 사실은 무지무지하게 무서운 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천국은 자기 위주가 아닌데, 따라서 지금 이 순간이 천국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나 때문이 아닌 주님 때문이다" 라고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되면, 지금 여기가 곧 천국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나' 라는 것은 왜 치워져야 하는고 하니, '나' 라는 것은 반항하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마귀가 내부에서 자꾸만 그렇게 충동질을 한다는 말이다. 기도하게 해서 반항하게 하고, 봉사하게 해서 반항하게 하고 말이다. 즉 "내가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는데, 주님은 나에게 복을 주지 않는가?" 라고 하면서 반항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꾸만 부추기는데, 마치 사탄이 욥을 부추기듯이 말이다. 베드로를 부추겨서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 라고 하게 했듯이 말이다. 이 세상은 전쟁터인데, 즉 마귀와 주님 사이의 전쟁터라는 것이다.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고 해도 마귀가 부추겨서 하나님에게 반항하고 싫어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천국과 세상 구조가 완전히 달라요. 그 구조에 따라서 사고방식도 다릅니다. 그 사고방식은 천국에 가기 이전에 지금 지혜를 통해서 심어주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제발 눈에 보이는 세상을 따라가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살만한 사람이 되어라' 라는 겁니다. 

 

◈ 초림과 재림 !!

그래서 천국에 가기 전에 1차로 예수님께서는 초림을 하셨는데, 재림을 하기 이전에 말이다. 재림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라는 것을 티내는 것인데, 그리고 초림은 "인간이 이 정도로 악하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어느 정도로 악한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을 정도로 인간은 마귀에 사로잡혔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이 천국에 가는 것에 보탬이 되는 일을 전혀 한 것이 없는데,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일방적으로 천국에 넣어주시는데, 바로 그것이 재림이라는 말이다.

이제 교재 105페이지를 보자.

** 이처럼 부자라는 것은 자기 부지런함과 절제뿐만이 아니라, 정직, 의로움, 지혜, 겸손 및 여호와 경외 등에서 비롯된다는 것인데, 즉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서 부를 주시는 겁니다.

(잠 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잠 12:24)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
(잠 13:4)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
(잠 23:20) 술을 즐겨하는 자와 고기를 탐하는 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잠 23:21) 술 취하고 탐식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자기를 즐겨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

 

◈ 예수님의 구조론에서, 주체는 사라져야 !!

그렇게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서, 이 세상이 자기 중심이 아니라 주님 중심이고 약속 중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것을 알 때, 그렇게 자기 자신이 부인될 때, 비로소 예수님에게 어울리는 환경 속에 우리가 일방적으로 참여됨으로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의 복을, 즉 부자의 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생의 복은 우리가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것인데, 그것이 교재 105페이지에 나오는데 말이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예수님의 구조론에서 주체는 사라져야 한다" 라고 되어있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자기 주체가 거기에 머무르게 되면, 어떤 일을 해도 자기가 한 것이 되기 때문에 말이다. 그것은 자기 부지런함에 도취하게 되는 것인데, 그것은 자기 욕망에 미친 것이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세상 사람들이 자기 욕망 때문에 술을 마시는 것이나, 교인들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하면서 기도에 미친 것이나, 둘 다 같이 미친 겁니다. 둘 다 자기 주체가 생생하게 살아있어서 존재감에 빠져있는 현상들입니다. 사람이 욕심이 많으면 밤중에 잠잘 시간까지도 다 빼앗겨요.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부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가 아닙니다.

여기에 "부자가 된 것이 하나님의 지혜가 아닙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무엇인가? 하나님의 지혜로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지혜로 부자가 된 사람은 뭐라고 하겠는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라고 고백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제 교재 106페이지를 보자.

** 어떤 사람은 '예수님은 매일 밤을 새워 기도했다' 라고 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특별히 기도하신 것은 제자들을 뽑을 때와,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그 두 가지 경우밖에 없습니다. 나머지는 그냥 주무신 겁니다. 

 

◈ 예수님은 언제 기도를 하셨는가? 그러면 인간은?

그리고 여기에 예수님의 기도가 나오는데, 예수님은 언제 기도를 하셨는가? 아버지의 뜻에 맡길 때 하셨는데, 그러면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이 땅에서 죽이시는 것인데, 그러니 우리도 분명히 이 땅에서 기도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그것은 바로 이 땅에서 자기가 너무 튈 때, 자기가 너무 잘났다고 여겨질 때, 즉 이 땅이 주님을 위한 것인데, 그런데 마치 어느 한 모퉁이라도 자기를 위한 것이라고 여겨질 때, 그때 우리는 감히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는 기도하게 하실 때만 기도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는 일을 부지런히 일으키시고 말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는 불안하면 기도를 하는데, 그러니 그 불안도 누가 일으켰다는 말인가? 주님께서 일으키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왜 불안한가? 불안하다는 것은, 그 순간에 자기 중심으로 돌아섰다는 말인데, 그래서 갑자기 자식 얼굴이 떠오르고 남편이 생각난다는 것이다. 걱정이 되어서 말이다.

그래서 "주님, 우리 가정을 지켜주옵소서" 라고 하면서 모든 것이 자기 중심이 되고, 그렇게 기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도를 한다는 것은 주님이 불안을 조성하신 것인데,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기도 가운데서 그 기도응답의 취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시면, 우리는 "아하, 내가 기도하기 전부터 주님은 이미 다 아시는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태복음 6장의 이야기인데, 즉 "니가 기도하기 전에 이미 다 주었는데, 줘도 못 먹어?" 라는 식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주신 것을 먹으면서도 불안 불안하게 먹었네"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런 깨달음이 바로 기도의 응답이라는 것이다.

(마 6: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마 6: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 모든 기도는 언제나 감사함으로 !!

그래서 기도응답의 특징은 모든 것이 항상 감사로 이어지게 되는데, 즉 "주여, 지금 죽여도 저는 감사하겠습니다" 라고 말이다. 자식이나 남편이나 다 주님이 돌보고 계시는데, 그런데 왜 자기가 걱정하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항상 감사로 이어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주님의 모든 일은 무엇인가? 우리로 하여금 "너희들, 놀라지 마라. 경기 들지 마라. 이 세상에 그렇게 놀랄 일은 없다. 정말로 너희들이 놀라고 울 일은 한 가지 뿐인데, 그것은 내가 팔릴 때이다" 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에 관한 일이 아니라고 하면, 즉 우리의 일 때문에 어떻게 울고불고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이 세상의 일은 우리의 일이 아닌 예수님의 일인데, 그러니 신랑이 잡힐 때는 울어도, 하지만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웃으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잔칫날이니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주무실 때 우리도 같이 자면 되고, 주님이 깨면 우리도 같이 깨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은 언제 주무시는가? 당연히 밤에 주무신다는 말이다(ㅋㅋ).

주님께서는 일부러 밤에 조명시설을 끄는데, 그리고는 조금의 미등만을 켜놓는다는 말이다. 즉 해를 끄고서 대신에 달과 별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제발 좀 설치지 말고, 이제는 밤이니 자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연속극은 아침 저녁으로 본방만 사수하고, 밤새도록 다시보기를 통해서 보지 말라고 말이다(ㅋㅋ).

 

◈ 내일로 미루지 말자 !!

이제 강의를 마치면서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어떤 일이라도 미루지 말라" 라는 것이다. 미루게 되면 반드시 내일 할 일과 겹치게 되니 말이다. 주님은 내일이 되면 내일 과제를 또 주시는데,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나의 시간이 아니라 주님의 시간이고, 나는 주님의 종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때그때 놀지 말고, 또한 미루지 말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일이 되면 또 내일 일이 생기고, 그 다음날의 일은 다음날에 또 생긴다는 것이다. 물론 오늘 생각하면 없을 것 같지만, 그게 아니고 항상 그때그때의 일을 주님이 주신다는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매일 매일 살아가는 것이 부지런함이고, 그러한 부지런함이 부자로 이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부지런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부지런하셔서, 주님이 부자가 되셔서, 우리는 거기에 그냥 참여함으로서 아무런 걱정도 없이, 오직 약속의 백성으로서 누리고 있음을 깨닫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