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잠언'속의 그리스도 32 / 관리 / 150518 본문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32 - 관리 15,05,18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06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이번에는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 나온 지혜를 생각해봅시다. 잠언서에 가난한 사람에 왜 등장하느냐 하면, 사람들의 본성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사회적이고 자연적인 여건에 의해서 이 세상에는 가난한 자들이 발생한다. 이로서 이 세상은 창조의 아름다움을 여유롭게 찬양하기에 부적절한 문제투성이의 세상임이 드러난다."
◈ 이 세상에 '가난한 자'가 있다는 것은? 가난한 자가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세상이 완전한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주는데, 그렇게 완전한 세상이 아니라고 평가를 하려고 하면, 그것은 바로 따로 완전한 세상이 있음을 하나님께서는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말이다. 물론 부자의 입장에서는 이 세상이 살만 하지만, 그러나 가난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 세상을 떠나고 싶다는 것이다. 물론 죽으면 되는데, 그렇게 죽기까지는 80이라는 세월이 너무 길고 말이다. 그러니 그동안 매일같이 힘들게 산다는 것이 고역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너무 고생이 심하면 당연히 고생이 없는 세계를 그리워하게 되어있는데, 하지만 그런 고생이 없는 환경은 자기 힘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거지 나사로인데, 그렇게 되면 누구만을 의지하겠는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데, 그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 욥의 경우에 !! 먼저 하나는 자기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데, 구약에 나오는 욥의 경우가 그러한데 말이다. 아들이 무려 10명이나 되고 재산이 많으니, 그때부터는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 어떻게 되는가? 있는 재산을 잘 지키려고,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부자는 있는 재산을 잘 지키고, 그러면 가난한 사람은 어떠한가? 옛날에 잘 나갈 때를 회복하게 해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욥이 하나님의 공격을 받고 난 뒤에는 기도내용이 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원천으로, 즉 근원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누구인가? 내가 왜 태어나야 하는가?" 라는 것으로 기도내용이 바뀌고 말았다는 것이다. "있는 재산을 잘 관리하게 해주세요. 있는 행복을 계속해서 유지하게 해주세요" 라고 하는 게 아니고 말이다. 그런 기도에서 이제는 "이렇게 하실 것 같으면 왜 저를 태어나게 했습니까?" 라고, 즉 하나님만이 품고 있고 알고 있는 계획을 건드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도시락과 계란 프라이 !! 우리의 일상에도 이런 것들이 있는데, 집안이 빵빵하게 잘 살면 철없는 아이들은 돈을 쓰는 재미로 사는데 말이다. 우리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그때는 국민학교라고 했는데, 제법 잘 사는 아이들은 도시락에 반찬으로 소시지가 들어있고, 그 다음으로 잘 사는 아이들의 도시락에는 계란 프라이가 들어있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가난한 집의 아이들은 어떠한가? 계란 프라이는 고사하고 반찬으로 김치를, 그것도 쉰 김치를 병에 담아서 오다가, 그만 병이 깨지는 바람에 도시락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엉망이 되고 말이다. 그래서 학교에서 주는 강냉이 급식을 먹곤 했다는 것이다(ㅋㅋ).
◈ 하나님만의 고유한 비밀을 건드리면서 !! 그렇게 잘 살면 친구들이 많을 것이고, 그런 것을 즐기는 재미로 살아가다가 하루아침에 부도가 나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버지는 도망을 다니고 엄마는 서문시장에서 노점상을 한다면, 그러면 "나는 처음부터 부자가 아니었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그러면서 "그러면 지금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만드는가?" 라고 하면서, 하나님만이 간직해야하는 고유의 비밀을 건드리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창조 자체에 대해서 시비를 건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창조를 제대로 못했다는 것인데, 이런 식으로 창조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뭔가 불공평하다는 것인데, 그렇게 이 세상 전반에 대해서 불공평함을 이야기하면서 불만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다.
◈ 내 몸이 주님의 것인데, 그런데 왜 힘드는가? 하지만 그렇게 됨으로서 욥은 어떻게 되었는가? 사나 죽으나 그만 하나님과는 단짝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욥은 자기 것이 상실됨으로 말미암아서 자기 것이 없는 동시에, 그렇다면 여기에서 무슨 문제가 생기는고 하니,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 주의 것인데, 그런데 왜 이렇게 힘드는가?" 라는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자기 몸이 주의 것이라고 하면, 우리가 아는 바로는 주님은 여유가 있고 넉넉하고 풍요로우신 분인데, 그러면 자기가 그런 주님의 것이 되었다면, 자기도 자동적으로 여유가 있고 넉넉하게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어야 자기가 상상한 주님과 부합이 되는데, 그런데 지금 그게 아니고 오히려 고생을 직사게 한다고 하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고생을 하시다가 돌아가신 하나님 !! 우리가 생각하는 주님에 대한 개념자체가 바뀌어져야 한다는 것인데, 죽도록 고생하고 힘들게 살아야 주님이 주님답다고 하는 사실, 그 숨겨진 비밀스러운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과도 같은데, 즉 고생을 하시다가 돌아가신 하나님인데, 이것은 전혀 새로운 인상의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 가난은 현실문제 !! 지금까지 제가 가난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이 가난은 현실문제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현실문제에 있어서 신이 개입할 것인가? 말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신의 내부문제까지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즉 신의 속성에 대해서까지 말이다. 그래서 욥기가 중요한데, 이 욥기도 지혜문서에 포함이 되는데, 잠언서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 현실 따로, 하늘나라 따로 !! 그러니 '현실 따로, 하늘나라 따로',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해인데, "현실은 나의 문제로서 따로이고, 하늘나라는 하나님의 문제로서 따로이다" 라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하늘나라는 하나님의 전문분야라고 여기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생각한 자들이 욥의 친구들인데, 욥은 하나님을 모르는데, 그렇게 모르니 욥의 친구들이 헛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십자가를 모르는 바리새인들이 주님 앞에서 헛소리를 하고, 십자가를 모르는 제자들이 결국은 주님으로부터 돌아설 수밖에 없는, 그런 갈라짐의 현상들이 지금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유롭다. 풍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나라에 가게 되면 행복하다" 라고 여기는데, 그러면서 "이 땅에서는 힘들다" 라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바로 욥의 친구들이 했던 것이고, 그게 하나님에 대한 오해라는 것이다. 조금 더 쉽게 말하면, "성경공부는 여유가 있는 사람들만 하는 것이고, 현실과는 관계가 없다. 성경은 현실의 문제가 아니고,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과 관련이 되어있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현실에 대한 몰상식적인 이해라는 것이다. 하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닌데, 현실을 바로 아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무리 '힘들자' 라고 해도, 이것이 이번 가야산에서 하는 여름수련회에서 할 내용인데, 사사기에 대해서 할 것인데 말이다. 이미 글을 다 써놓았다는 것이다. 시간이 촉박해서 하게 되면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미리 좀 해놓았는데 말이다(ㅋㅋ).
◈ 사사기의 그들은 왜? 사사기 교재에도 그런 내용이 나오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게 된 계기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들이 사는 것이 힘들어서 찾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도와주시는데,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생활로 곧장 돌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을 이용할 생각만 했지, 제대로 하나님의 내부 깊숙이 개입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그런 증거가 되는데, 그러다가 또 다시 어려우면 하나님을 찾고, 그러다가 살만하면 다시 이방신을 찾고 하면서 이방민족처럼 산다는 말이다.
◈ 아하, 육신이 문제로구나 !! 그러면 왜 이렇게 되풀이가 되는가? 그것은 바로 "현실은 내 것이고, 하늘나라는 주님 것이다" 라고 하는 문제에 있어서, 그들은 무엇을 미처 몰랐는고 하니, 이것은 육신에 관한 문제라는 것이다. 로마서 7장에 보면 육신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가 나오는데, 그러니 사도바울에 의해서 신약에 와서 육신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최종적인 해답이 나왔다는 것이다. (롬 7: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그런데 그 이전의 구약에서는 이것을 육신의 문제로 보지 않고, 자기들이 농사를 짓고 살기가 편하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정작 자기 육신에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살기가 힘들면 하나님을 찾고, 좀 살기가 괜찮다 싶으면 이방신을 찾고 말이다.
◈ 원인을 환경에서 찾는 인간들 !! 그 당시 사람들은 그 원인을 어디서 찾았는고 하니, 환경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환경이 우리가 살기에 힘들기에 그렇다. 그러니 환경만 좋으면 얼마든지 우리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이룰 수 있다" 라고 여겼다는 말이다. 그러니 해답을 찾을 수가 없는데, 해답은 무엇인가? 즉 하늘과 지상으로 연결된 유일한 연결매체를 찾을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들이 생각한 영결매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자연적 여건' 이었는데, 오늘 교재 106페이지에도 나오지만 말이다. 즉 정기적으로 비가 잘 내리고 주변의 적들이 쳐들어오지 않으면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러니 자연적 여건에 따라서, 그렇게 하나님이 잘해주시면 자기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가난한 사람들은 "갑자기 행운이 찾아와서 돈만 많이 생기면 얼마든지 양심대로 살 수 있다" 라고 자신감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러니 힘이 들어서 못산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이렇게 평생을 치열한 생존경쟁 가운데서 살아가야 하는지, 그 원인을 모른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면서까지 밥을 먹고 살아야 하는지를 말이다. 권사님이나 장로님도 지금까지 치열하게 살아오셨는데 말이다.
◈ 생존에 관해서 정직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 다음과 같은 말이 있는데, "생존에 관해서 정직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라고 말이다. 밥을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 자기가 바르게 살았다고, 그러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전혀 없는데, 즉 모든 인간은 비겁하게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 비겁함의 대가가 생존이고 연금인데, 거기에 대해서 정직하다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는 것은, 그것은 바로 자기로 인해서 피해를 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자기 자신이 스스로 인정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자기가 그렇게 힘들게 산 모든 책임이 어디에 있는고 하니, 그게 외부환경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도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다고 하면, 그렇게 치열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을 구제도 해가면서 살 수 있었다고, 그런 양심이 창작되어있다고 자부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말이다.
◈ 내 인간성 하나는 괜찮다 !! 다시 말해서, "내 인간성 하나는 괜찮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런 괜찮은 인간성이 어떻게 치열하게 살다보니 어떻게 되었는가? 그야말로 폐기처분을 할 정도로 그만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는데, 그러니 그것은 하나님의 책임이지 자기 책임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답은 무엇인고 하니, 하늘과 땅의 연결이 자연적인 여건, 즉 환경이 아니라, 우리가 자기 몸이라고 여겼던 육신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환경이 아닌 육신에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문제투성이를 놓지 않고 있다는 것인데, 그냥 놓아주면 되는데 말이다. 이게 바로 육신에 대한 주도권 쟁탈전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이 몸이 주님의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 주님의 생각이고, 반면에 "가족을 비롯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 이 몸이 나에게 속해있다" 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지금 그런 주도권 싸움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만약에 이 몸을 하나님에게 맡겨놓았다가 더욱 더 힘들게 되면, 그러면 하나님이 과연 책임을 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즉 "하나님, 믿습니다" 라고 하면서 교회를 제때에 다니면서 십일조도 하고 헌금도 잘하면, 그러면 모든 것이 잘 풀리느냐는 말이다.
◈ 십일조 개근상 !! 저희 처갓집 쪽에 보면, 지금 40년 째 십일조를 빠지지 않고 드리는, 만약에 십일조 개근상이 있다면 받을 수 있는 분이 계시는데, 마치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적금을 붓듯이 말이다. 그런데 하는 일마다 얼마나 말아 드시는지 모르는데, 또 남편은 일찍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아무튼 하는 것마다 되지 않는데, 물론 교회는 좋다는 것이다. 십일조가 다말이 꼬박꼬박 들어오니 말이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정작 자기는 하는 것마다 풀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포교회의 박영선 목사가 유명한 말을 했는데, "여러분, 십일조를 한 만큼 손해입니다" 라고 말이다(ㅋㅋ). 십일조를 하든 헌금을 하든 지금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지금 왜 니 육신의 주도권을 니가 쥐고 있는가?" 라는 것이다. 그러니 십일조를 하는 것도 수상하고, 교회에 충성봉사는 것도 모두 다 더러운 사고방식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자기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님에게 뇌물을 바치는 것밖에 되지 않는데, 하지만 주님이 무슨 양아치인가? 우리가 돈을 몇 푼 바치면 우리의 소원대로 주님이 해주신다는 말인가? 그러면 그야말로 조폭도 아니고 동네 양아치 수준인데, 거리의 가판대를 돌아다니면서 자릿세나 뜯는 말이다.
◈ 목사는 양아치 !! 바로 그런 식으로 교회가 왜 돈을 뜯어 가는데, 하지만 주님은 분명 양아치가 아닌데, 하지만 교회는 양아치라는 것이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목사가 양아치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야말로 사사기와도 똑같은데, 즉 이방민족들이 와서 "너희들 그렇게 하면 벌을 받는다" 라고 하면서 돈을 빼앗아 가는 것과도 같다는 말이다. 그러니 주도권만 바뀌면 되는데, 하지만 그 주도권이 바뀌려고 하면 전적으로 주님이 신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주님에게 자기 인생을 맡겼다가 그만 왕창 조져놓으면, 그러면 도대체 그 책임을 누가 질 수 있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일단 십일조를 해보고 그것을 가지고 측정한다는 것이다. 즉 "일단 십일조를 해보고 일이 잘 되면 계속해서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잘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만 일이 안 되도록 하시는데, 그러니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다.
◈ 빛나는 모세 !!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 왜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가 40일 동안 시내산 위에서 생활한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모세는 양식은 고사하고 물도 마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시내산에 내려올 때 모습이 어떠했는가? 바짝 마른 것이 아니라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데, 얼마나 그 모습이 영광스러웠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출 34:28)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를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 언약은, 우리의 육신을 겨냥하기에 !! 어디 모세가 최고급 등산복을 입고 산에 올라갔는가? 그냥 평소에 입든 옷을 입고 올라갔는데, 거기서 40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심지어 잠도 자지 않았는데, 그런데 내려올 때는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데, 즉 육신이 좋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언약이 어디를 겨냥하는고 하니, 우리의 육신을 겨냥한다는 것이다. 다시 해보겠는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세상일은 우리에게 맡겨주고, 하나님께서는 하늘에게 해와 달을 비추시고, 그리고 비를 주신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즉 구약의 사람들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이 지상의 일을 꽉 잡고 있으니, 그러니 자연적인 여건만 형성해주시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구약 사람들의 이야기인가?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환경을 주시면, 그래서 우리가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도록 해주시면,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에게 좋은 감정으로, 그렇게 경건하고 거룩하게 말씀대로 살아드리겠습니다" 라고, 그렇게 조건부를 내세운다는 것이다.
◈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을 !! 하지만 그렇게 해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하고 말았는데, 그래서 사사기를 보면 그들이 어떻게 하는가?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찾고, 좀 배가 부르다 싶으면 이방신을 찾는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그것이 반복이 되는데, 그러니 이것은 뭔가 근본적인 원인이 제거되지 않았음을, 즉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들은 뭐라고 생각했는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율법을 주셨으니까, 그 율법을 지키면 자기들의 소원대로 다 될 줄 알았는데, 그런데 정작 율법의 내용도 모르면서 무슨 율법을 지키느냐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코 지킬 수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우리의 육신에 관한 것인데, 그 육신이 바로 그 당시의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매개체가 된다는 것이다.
◈ 중보자가 누구입니까? 이게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즉 "중보자가 누구입니까?" 물어보면, "예, 예수님입니다" 라고 대답하는데, 그것은 누구나 아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보자를 만나본 적이 있습니까?" 라고 물으면, "아니오. 없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문제가 또 이상하게 흐르고 만다는 것이다. 만나보지도 않고 예수님을 중보자라고 하면, 그러면 그 예수님의 인상착의 어떠하냐고 물어보면, 그 사람은 당연히 모른다고 한다는 것이다. 만나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중보자가 예수님이라고 한다는 것은, 그런 예수님이 대한 인상이 그 사람의 머리 속에 그려져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클리턴 대통령을 압니까?" 라고 하면 "예, 압니다. 뉴스에 많이 나와서 봤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상이 어떠하든가요?" 라고 하면, "예, 사람이 제법 잘 생겼습니다. 그래서 바람을 피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라고 하면, 그런 나름대로의 인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인상이 있을 때 그것을 '실존' 이라고 하는데, 그런 실존적 모습을 갖추어놓고, 비록 만나보지는 않았어도, "나는 그 사람을 압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예수님을 압니까? 안다면 인상은 어떤가요?" 라고 하면 할 말이 없는데, 예수님이 뉴스에 나온 적이 없으니 말이다.
◈ 조립된 예수님의 인상 !! 이번에 바티칸에서 예수님의 도포를 가지고 전시를 한다고 하는데,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옷을 본다고 해서 어떻게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를 보고, 예수님을 서구적인 인상을 가진 사람으로 여기는데, 그러니 그것은 이상하다는 말이다. 옛날 중세시대에 나왔던 예수님의 그림이 조립되어서, 그런 것이 무의식 속에 남아있어서, 그런 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만약에 그런 그림을 보았다고 하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하셨지 싶다는 것이다. 화가가 그런 그림을 그릴 때는, 그 당시 민중들의 의식 속에 남아있는 예수님에 대한 인상을, 그렇게 서로 공통점을 모아서, 그리고 자기가 모델을 찾아서 그런 그림을 그린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대부분이 미남인데, 그리고 키도 140이 아니고 180정도가 되는데, 왜냐하면 허우대가 커야 믿을만한 요소가 나온다고 여기니 말이다. 그게 아니고 키도 자그마한 분이 이렇게 이렇게 하면, 누가 그분을 메시야라고 믿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중세의 선배들이 대중들에게 먹혀드는 그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교들이나 신부들이 그림을 요청할 때, 그 그림의 인상을 보고 자기 교인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으면 당연히 다시 그릴 것을 요구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영화배우같이 잘 생긴 사람으로 그려놓으면 거기서 촛불을 켜놓고 빌고 한다는 것이다.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을 중보자라고 믿는다고 하면, 그러면 그분의 인상이 어떠한지, 그것을 묻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을 만나본 적이 없기에 그런 인상을 이야기하고 말고 하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만져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매일같이 아침에 일어나서는 세수를 하고 얼굴에 찍어 바르고, 그렇게 난리가 나는데, 그런데 바로 그러한 우리 육신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다. 몰랐다는 표정들인데 말이다(ㅋㅋ).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 육신을 겨냥한다는 것은, 그 언약이 우리 육신을 이미 그리스도의 몸으로 간주하고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언약이 우리 몸을 그렇게 활용하시는데, 그렇다면 우리의 몸에서는 말씀이 구체화가 되고 현실화가 되는데, 우리의 몸의 본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말이다. ◈ 우주+언약 = 예수님의 주되심 !! 여기서 다시 정리해보면, 하나님의 속에 담겨있는 내용을 언약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속에 있는 것을 바깥으로 던져놓고, 그것을 지상에 말이다. 물론 이 지상도 하나님이 창조한 것인데, 거기에다가 무엇을 더하는고 하니, 이 창조하신 것이 바로 우주인데, 그러면 '우주+언약'을 하게 되면, 여기서 예수님의 주되심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공식인데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이 창조하신 피조물 속에 오셔야 하는데, 심지어 피조물 속에서도 어떤 피조물인고 하니, 말씀이 육신이 되었는데, 지금 우리가 육신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 오실 때 그냥 맹탕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있다는 것이다.
◈ 언약과 육신의 만남 !! 그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창세 전에 있던 계약을 두고 '언약'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언약이 어려우면 약속이라고 해도 되고 말이다. 그 약속이 무엇을 만났는고 하니, 육신을 만났다는 것이다. 결국은 그렇게 해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심으로 주가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이 주가 되심으로서 비로소 체제가 바뀌는데, 이 이전에는 성령께서 아버지의 영으로서 예수님에게 지시하는 입장에 있었는데, 이제부터는 성령은 주가 되시는 예수님의 지시를 따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체제가 바뀌었는데,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님을 주라고 하지 못한다고 한다는 말이다.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그런데 사람들은 성령을 받지 않아도 예수님을 주라고 잘도 이야기를 하는데, 아예 그게 유행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을 주라고 해놓고는, 그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 내용을 보라는 것이다. 그게 과연 주님이 맞는지 말이다. 자기 육신을 자기 관리아래에 두면서 예수님을 주라고 하니, 그야말로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것이다.
◈ 예수님도 죽고, 성도도 죽고 !! 하나님의 언약이 창조세계인 우리 육신에 다가와서 하나님의 속에 들어있는 내용, 즉 예수님의 주되심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게 오늘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부부인데, 그런데 그 언약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언약대로 활동을 하시면서, 달리 말하면 성령에 충만하셔서 활동을 하시면서 절차를 보여주셨는데, 그게 바로 예수님의 죽음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도 죽어야 하는데, 즉 우리의 육신이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죽는다고 하면 도망치기에 바쁜데, 이렇게 멀쩡한 자기가 왜 죽느냐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죽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데, 오랜만에 바른 소리를 한 것 같은데 말이다(ㅋㅋ). 교인이 하나 죽어가고 있으면 목사가 심방을 가서 뭐라고 하는가? 살려달라고 기도를 하지, 죽여달라고 기도하는 목사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 교인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교회 교인이 하나 줄어드는 것이 아쉬워서 그렇게 하는데 말이다. 특히 시골교회에서 노인이 한 사람 줄게 되면 무엇이 줄어드는가? 그 노인에게 자식들이 도시에서 보내주는 용돈이 같이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목사 딸의 피아노 레슨비가 그만 날아가고 만다는 것이다. 목사의 관심사는 오직 그것뿐이라는 말이다(ㅋㅋ).
◈ 목사님, 설교내용은 참 좋습니다만 !! 시골교회에서 어느 정도 교인숫자를 유지해줘야 도시에서 청빙을 하든지 하는데, 시골에서 서너 명을 데리고 목회를 하면 도시의 어느 교회에서 오라고 하겠느냐는 말이다. "어느 교회에서 오셨습니까? - 의성 안계교회에 왔습니다. - 교인수는 어떻게 됩니까? - 50명에서 12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라고 하면, 그러면 누가 좋아하겠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두 말할 것도 없이 청빙은 그만 거절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자기 교회의 교인들이 500명인데, 그게 200명으로 줄어들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장로들은 당연히 그런 걱정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겉으로는 다른 엉뚱한 이야기를 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만약 시골에서 50명에서 200명으로 늘였다고 하면 당연히 스카웃을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200명의 교인이 1,000명으로 늘어날 수가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 장로들은 기분이 좋은데, 굳이 자기들 호주머니에서 돈이 나가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돈 문제인데, 뒤에 온 젊은 사람들이 돈을 내면 자기들은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이 그것밖에 없다는 말이다. 아무튼 예수님이 육신이기 때문에 피, 즉 죽어야 하는데, 거지 나사로도 죽고, 또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인 나사로도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를 육신으로 보는 관심사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를 어떻게 살리느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말씀대로, 즉 계명이 계명대로 이루어지는데 있다는 말이다.
◈ 사울 왕, 신접한 여인, 사무엘 !! 여기에서 구약성경 사무엘상 28장을 보면, 어제 오후시간에 잠시 언급을 했는데 말이다. 거기에 무슨 내용이 나오는고 하니, 사울 왕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서 사무엘을 살려내는 장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신접한 여인이 사무엘을 불러내는데, 그 사무엘이 사울을 보고 뭐라고 잔소리를 하는가? 엄청 야단을 친다는 말이다. 그래서 18절에 보면,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치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라고 하는데, 지금 이 이야기를 누가 한다는 것인가? 이미 죽었던 사무엘이 다시 살아나서, 그렇게 자기를 잠시 살려낸 사울 왕에 질책을 하는 대목이라는 것이다. (삼상 28:16)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 여보, 잠깐이라도 보고 싶어요 !! 그렇다면 여기서 제가 하나 물어보겠는데, 지금 사무엘의 육신은 누가 관리하고 있는가? 신접한 여인과 하나님 중에서 누가 사무엘의 육신을 관리를 하겠느냐는 말이다. 당연히 하나님인데, 그것이 바로 이 대목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만약에 우리가 이러한 장면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신접한 무당이 죽은 사람도 불러내었구나. 그러면 나도 죽은 남편이 보고 싶은데, 그러니 기도를 빡세게 해서 죽은 남편을 잠시라도 만나보았으면 참 좋겠다. 무당도 그렇게 불러내었는데 예수님도 당연히 그렇게 해주실 수 있을 거야. 꿈에서라도 잠시 면회라도 해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우리가 그렇게 이 성경구절을 활용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 지금 제가 강의하는 핵심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 몸은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육신의 주도권 싸움에서 결코 놓지 않기 때문에, "살아있을 때는 내 몸이 맞지만, 죽어서는 육신을 떠난다" 라는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히 로마서 14장에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는데, 그런데 우리는 자기의 몸을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내려고 하는데, 그렇게 육신에 대한 자기 주도권을 하나님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 강력한 심보와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이다. (롬 14: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지금 사울 왕이 사무엘을 불러내는 마음가짐도 역시나 마찬가지인데, 사울 자신은 살아있는데, 그런 자기 육신을 자기가 관리하다가보니, 그렇게 살아있는 왕이 백성들에게 멋있게 보이고 싶은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응답을 해주지 않으니, 살아있을 때 자기에게 잔소리를 해주던 사무엘에게라도 그러한 소리가 듣고 싶어서, 그래서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서 다시 사무엘을 살려내어서는, 자기가 실패하지 않고 성공할 수 있는 어떤 아이디어를 듣고 싶어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죽은 사무엘을 불러내었는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사울' 이라는 육신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가 알아서 관리하고 싶다는 것인데, 바로 그런 욕망이 근원적인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죽어도 좋습니다" 라고, 항상 하나님의 언약이 우선이 되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자기 육신이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이든 계명이든 간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런 모든 것을 자기 육신이 잘 되는 방향으로, 그렇게 자기가 행복한 쪽으로 끄집어내다가 보니, 그 본성이 어디까지 이어지는고 하니, 하나님의 계명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쪽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울 왕의 모습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한데, 그래서 우리도 역시나 우리 자신이 살아보려고 몸부림을 치니,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대치되는 쪽에 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육신의 한계이고 말이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니, 죽은 것도 주의 뜻이다" 라고 하면 되는데, "참새도 다 떨어지는 때가 있는데, 그러니 나도 죽는다고 죽는 것이 아니고 산다고 사는 것이 아니구나" 라고 하면서 감사히 여기면 되는데 말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때가 있는데, 우리가 죽을 타이밍이 되면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이 결코 자기가 죽고 싶어서 죽은 것이 아닌데, 술에 취한 놈이 난데없이 차선을 바꾸어서 정면으로 와서 박으면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 사람이 곧 저승사자인데, 물론 술에 취한 저승사자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보낸 사람이니,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귀신(?) 사무엘이 한 이야기가 결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닌데, 평소에 살아있을 때 했던 이야기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사무엘은 무엇인고 하니, "'니가 살았나? 내가 죽었나?' 라고 하지 말고, 지금 중요한 것은 말씀은 여전히 살아있다" 라는 것이다. 즉 "우리는 사나 죽으나 말씀의 범위 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라는 것이다.
◈ 주(主) - '말씀으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새롭게 창조하신 능력자' !!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5장에서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때' 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주가 되는 때인데, 그러면 '주' 라는 것이 무엇인가? 말씀으로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새롭게 창조하신 능력자, 그것이 바로 '주' 라는 말이다. 즉 "주 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는데, 심지어 우리가 굶어죽는다고 해도 주 안에서 굶어죽는다는 말이다. (요 5: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어제 낮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하나님의 계명의 특징 중의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천국에 가지도 못할 자들이 들어 붙는 것을 떼 내는 작업도 있다고 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전도인데, 그러니 전도가 무엇인고 하니, 적극적으로 천국에 오지 말라고 하는 것이 전도라는 것이다. "이게 어디를 들어온다는 말인가?" 라고 하면서 면상을 발길로 차는데, 그렇게 주님의 군화발에 차인다는 것이다. "제발 좀 교회에 와다오" 라고 하는 것이 전도가 아니라, "제발 좀 교회에 오지마. 너는 결코 아니야. 그러니 절에 가라" 라고 하는 것이 전도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걷어차도 기어이 들어온다고 하면, 그러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데, "정말로 신자가 맞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돈을 줄게 교회에 나와도. 한 번 교회에 오면 등산을 같이 가줄게" 라고 하면서 강제로 끌어당긴다고 하면, 그러면 자기만 힘이 든다는 것이다. 천국의 가치를 너무 낮게 여기면 안 되는데, 즉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면 안 된다는 말이다.
◈ 불신자들은 좀 나가주세요 !! 그런데 요즘 교회가 어떠한가? 진주를 아무에게나 마구 던지는데, 심지어 돈을 봉투에 넣어서 같이 던진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말고 "제발 좀 나가주세요. 예배당이 좁아서 안 됩니다. 신자도 자리가 없는데, 그러니 불신자들은 좀 나가주세요" 라고 해야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물론 꿈같은 소리겠지만 말이다(ㅋㅋ). 그렇게 강제로 떼어낸다고 하는 작업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행여나 자기는 믿지도 않으면서 뭔가 이용가치가 있다고 하는 이유 때문에 주님을 억지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자기 자신을 자기에게서부터 떼어내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육체를 가지고 가셨는데,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육체를 놓지 않고 이 육체를 천국에 강제로 밀어 넣으려고 하고 있지나 아니하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주여, 말씀으로서 내가 스스로 구원하려고 하는 그 나를 제발 떼어내어 주옵소서" 라고 하는 생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과 거래나 흥정을 하면 안 되는데, "이것을 드릴 테니 구원해주세요" 라고 말이다. 그래도 하고 싶으면 지옥에 가서 하든지 말이다.
◈ 아브라함의 경우에 !! 그런 점에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예레미야나 이사야나 거지 나사로를 말이다. 그들을 보게 되면 눈이 열리는데, "아하 이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즉 아브라함이 구원을 받고 싶어서 환장한 것이 아니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이미 아브라함을, 장차 예수님의 주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육신을 사용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예수님 보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만약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면 다음과 같이 나왔지 싶은데, 즉 "하나님의 뜻대로 제 아들을 바쳤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당연히 저를 구원해주세요"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아들을 바치는 그 대단한 일도 결국 자기에게로 돌아오고 마는데, 그러니 그것이 아니고 주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삽입시킨 계시라는 것이다. 그것을 자기 행위로 전환시키는 것은 말도 안 되는데, 그래서 로마서 4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아브라함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그냥 은혜로 구원시켰다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 아들까지 바쳤지만, 아브라함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고 한다는 말이다. (롬 4: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이것은 과장법이 아니고 정말로 한 것이 없다는 말인데, 여기에 대해서 아브라함에게 물어보면, 아브라함은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것이다. 자기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고 말이다. 남들은 이삭을 바치는 대단한 믿음을 보였다고 할지 몰라도,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때 주님을 오해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일이 있고 난 다음에 아브라함은 정신이 버쩍 들었는데, 자기 육신이 자기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아내가 임신을 하지 못하는 것도 주님의 육신이고, 자기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도 역시 주님의 육신이고, 그렇게 배정되어있는 모든 것들이, 그 모든 육신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된다는 사실을, 그게 정립이 된다는 말이다.
◈ 다시 정리해보면 !!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정리해보면, 하늘과 땅은 연결되어있다는 것인데, 그러면 무엇과 연결이 되어있다는 말인가? 우리의 육신과 연결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육신이 바르게 살면 제대로 연결이 되는가? 그것이 아니라, 언약이 투입되어야 하는데,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주도권 싸움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내 몸은 내 것입니다. 내 몸은 내가 살려야 합니다. 이렇게는 억울해서 도저히 죽지 못합니다" 라고 하는 자기 자신의 주도권과, 주님의 주도권, 즉 "너의 몸은 나 예수의 공생애를 보여주기 위한, 그리고 그 공생애의 연속적인 활동의 결실물이다" 라고 하는, 그런 주도권의 싸움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언약적인 결실물이 말이다.
◈ 제자들과 사도바울의 생애 반복 !! 다시 말해서, "너는 이렇게 생겨먹어야 하고, 이런 인생을 겪어야 하고, 이런 코스를 가야할 이유가,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만났던 제자들의 생애의 반복이다" 라는 것이다. 구약의 성도들의 반복이고 말이다. 모세, 엘리야, 그리고 사도바울과 베드로가 갔던 길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런 반복이기 때문에 사도바울의 편지, 즉 그 계시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로마서를 보면서 "이것은 사도바울 당신의 이야기이다" 라고 말할 수 없는데, 그렇게 내치게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주님은 지금 그 원리대로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키는데, 그래서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뭐라고 했는가? 창세 이전부터 예수님을 만날 수밖에 없는 코스를 지적해 놓았다고 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자기가 사도가 되려고 학원에 다닌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는 사도가 될 수밖에 없는 절차 중의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서 살아야만 했던 절차를 겪어야 했다는 말이다. 디모데전후서에서 주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것을 남의 이야기로 들으면 안 되고,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말이다.
◈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 특히 히브리서 1장과 2장의 경우에는, 이것을 해석하려면 시간이 엄청 걸리는데, 여기서 잠시 정리를 해보자는 것이다. 그 내용을 여러분이 일단 안다고 치고 말이다. 히브리서 1장에서는 종말의 안목에서 시공간이 어떻게 재배치가 되는지, 그 문제가 나온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1장 2절에 보면 종말이 나오는데, 즉 '이 모든 날 마지막에' 라고 하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그 이전에는 선지자들로 이야기한 것을, 그런데 이제 마지막 날에는 누가 말씀을 하신다는 말인가? 아들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선지자가 아닌 아들로 말이다. (히 1: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그런데 이것을 대구의 칠성시장에 가서 이야기해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는가?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이 마지막 날이 아닌데, 창조와 마지막 날 사이에 칠성시장에서 그들은 장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창조와 마지막의 사이에 끼어있는 날이지, 지금은 마지막 날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아직 마지막 때가 남아있다는 안목에서 시공간을 보는데,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선지자들 시대의 시공간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은 무엇인가?
◈ 마지막은, 마지막 원리가 적용되는 시대 !! 다시 이야기를 하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선지자들이 예언을 했는데, 그런데 마지막 때에는 누가 이야기를 한다는 말인가? 아들이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말을 바꾸어보면, 아들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지금 이 시대가 어떤 시대라는 말인가? 마지막 때라는 것인데, 마지막 남아있는 시대가 아니고 말이다. 지금이 마지막이 적용되는 시대라는 것이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아직도 예수님의 재림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틀렸습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예수님의 재림이 남아있다고 하는 시공간의 개념 자체가 예수님이 품고 있는 안목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앞으로 얼마나 남아있는가?" 라는 것으로 마지막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이 되어야 발생되는 원리원칙이 이미 적용을 받고 있으면, 그게 마지막이라는 것이다.
◈ 종말론적 공동체인 교회의 등장으로 !! 마지막이 되기 이전까지는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데, 율법의 시대이니 말이다. 그런데 마지막이 되면 일체 행함을 묻지 않는데, 이제부터는 오직 믿음으로 의인이 되는 원리가 들어온다는 것이다. 바로 그 마지막 때에 등장하는 것이 교회, 즉 종말론적 공동체인데, 그게 사도행전에 나오는데 말이다. 그러니 오늘날 한국교회는 교회라고 하기에 정말이지 곤란하다는 것이다. ◈ 무시를 당하는 인간의 시공간 개념 !! 이렇게 마지막이 되면 무엇이 무시를 당하는고 하니까, 인간들이 가지고 있던 시공간이 그만 무시를 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들이 가지고 있던 시공간은 무엇인가? 인간들은 자기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한 조건으로서 그것을 수용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농사를 짓는 사람이라면 뭐라고 하겠는가? "비가 오지 않아서 참 걱정이다" 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가? 비가 오지 않아서 힘들게 되면 자기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자신이 잘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때를 맞추어서 비를 잘 내려주셔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자기 중심의 안목이 된다는 것이다.
◈ 가뭄이 있는 곳에 선지자가 !! 그렇게 "비가 오지 않는다" 라는 것을 복음적으로 어렵게 표현을 하면, 그것을 마지막 날의 징조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특히 요한계시록에서는 말이다. 물론 구약도 그러한데, 알다시피 구약의 엘리야 시대에 비가 오지 않았는데, 그것은 바로 지금의 이스라엘 땅이 마지막 때가 되면 얼마나 황폐해지겠느냐는 것을 미리 앞당겨서 약간씩 보여주는 것이란 말이다. 그렇게 보여주는데 있어서 그 중심에는 '엘리야' 라는 선지지가 있었는데, 즉 선지자가 있는 곳에는 의미가 있는 가뭄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합 왕이 엘리야를 보고 뭐라고 했는가? 가뭄으로 인해서 고생을 하니까, "당신이 이스라엘을 괴롭게 했는가?" 라고 했는데, 그 말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엘리야 때문에 자기들 생존체계가 그만 파토가 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구멍이 뚫렸다고 할까,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왕상 18:16)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고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려 하여 가다가 마치 자기 몸에 암세포가 자리를 잡고 있어서 자기 몸을 지기가 다 지배할 수 없는, 그렇게 다스리는데 불가능한 요소가 있다는 말이다. 나이가 들면 온 몸에 신경통이 생기고 얼굴에는 버짐이 피는데, 그런 것은 자기가 어떻게 고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그런 것들은 자기가 도저히 관리할 수 없는 요소들이라는 말이다.
◈ 신앙생활은, 죽음의 흔적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 !! 그래서 교인들이 저에게 수 천 번을 묻는 것이, "목사님,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라고 하는 것인데, 신앙생활은 죽음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 것인데, 즉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한 것이 순간순간 터져 나올 때,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라는 것이다. 그게 터져 나와야만 자기가 주님 앞에 굴복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을 자기가 관리하면, 자기가 주도권을 쥐고 있기에 자기가 오야붕이 되는데, 그러니 뭔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요소가 내일이 되면 또 터진다는 것이다. 돈을 아끼려고 식당주인이 직접 수도공사를 하면 이것을 막으면 저것이 터지듯이 말이다. 그러니 신앙생활을 교회생활과 관련을 시키면 안 되는데, 평소의 일상생활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평소에 자기는 시어머니에게 잘해드렸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TV에 어떤 여자가 나와서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는 시어머니에게 요일마다 반찬을 바꾸어서 해드렸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 소리를 듣지 않았으면 몰라도 듣는 순간 어떻게 되는가? 효도도 일종의 욕망인데, 그러한 욕망은 결핍을 낳고 보다 더 완벽한 효도를 시도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그래, 당신에게는 졌다 !! 그래도 자기도 그렇게 하려고 하는데, 그런데 시간이 없어서 도저히 그렇게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은 '졌다' 라는 의미인데, 즉 "나는 효도게임에서 그 여자에게는 졌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시어머니가 그 TV를 보고 "며눌아, 너는 그동안 무엇을 했노? 요일마다 반찬도 바꾸어주지 않고?" 라고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인데, 바로 그 불가능이 신앙생활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주님께서 시어머니로 하여금 TV를 보게 하셔서, "나도 괜찮은 인간이야. 이 정도라면 그래도 열심히 효도를 했어" 라고 하는 것을 찢어놓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뭔가 자기가 했다는 것에 대해서 붕괴시키는 일들, "이 정도면 되었겠지" 라고 하는 것을 무너지게 하는 요소들이 있다고 하면, 그렇다면 지금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말이다.
◈ 신앙생활은 내 소관이 아니다 !! 쉽게 말해서, "신앙생활은 내 소관이 아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 즉 자기가 가능한 것만 하기 때문에, 그것은 우상숭배의 생활이지 신앙생활은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제가 "막 사세요" 라고 했는데, 그 앞에는 이런 긴긴 스토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이가 이미 90살이 넘은 시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보내지도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모시면서 효도를 다한다고 하면, 그것은 뭔가가 수상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일단 자기는 그렇다고 쳐도, 효도를 받는 상대방이 더욱 힘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의로움만 생각해서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 신앙생활은, 불가능한 요소로 인해서 !! 그런 불가능한 요소로 인하여 괜찮은 자기를 억지로 천국까지 밀어 넣으려고 하는, 즉 여전히 자기 몸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주도권 싸움에서, 주님께서는 이것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내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고마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하, 나를 떼어내기 위해서 나보다 더 효도하는 며느리를 보게 하셨구나" 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것으로 여기고 사용하는 자기 육신을 가지고 천국까지 가서, 그 천국에서도 여전히 자기 몸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즉 "나는 이런 이런 일을 해서 천국에 도착했습니다" 라고 자랑질을 하는 요소를 주님께서는 강제로 떼어내어 주시는 그 고마움, 그 친절하심, 그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붙어있다고 하면, 우리는 지옥에 가도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다시 잠언서로 돌아와서 !! 그렇다면 이제 다시 잠언서로 돌아와서, 도대체 '가난하다' 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여기 교재에도 보면 나오듯이,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그 사회에서 암적인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았지 싶은데, 암적인 요소가 되어서 퍼진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 세상에 가난한 자가 있게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부자로 하여금 히히닥거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가난한 자가 존재함으로 말미암아서 부자가 생각하는 사회가 결코 완료된 사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최종적으로 도착해야하는 지점은 아님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만 잘 살면 되지" 라는 것은 가난한 자를 있게 하신 하나님의 계시를 의도적으로 삭제하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 다시 정리하면 !! 그러니 잠언서는 무엇인가? 물론 아까 한 것을 다 잊어버렸지 싶은데, 하나님께서는 창조된 것 속에 무엇을 집어넣는고 하니, 언약을 집어넣는데,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주님이 되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창조된 것이 있는데, 이렇게 창조된 것이 마치 얼굴의 버짐처럼 번지게 되는데,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번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세계에서는 납득이 되지 않는, 즉 이해 불가능성이 번지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 시커먼 것만 따로 모아서 하나의 층을 만드는데, 그것을 예수 안의 세계, 성령 안의 세계, 혹은 영적 세계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사도바울이 보았던 삼층천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데, 예수님이 재림할 때 비로소 드러난다는 것이다. 재림을 하게 되면 이 세상은 불바다가 되고 이것만 남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중층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영적 세계에 속하면서도 기존의 육신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므로 우리의 정신과 신체 속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삽입되어서 이런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두고 아까 '신앙생활' 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이제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지 싶은데, 주님이 재림하면 이것이 떨어져 나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난하다' 라는 것은 무엇인가? 기존의 세계에 이런 버짐이나 암과 같은 존재가 퍼졌다는 것인데, 그러면 가난한 자는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고, 그리고 부자는 가난한 자가 자기 이웃에서 사라지게 해달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난한 자와는 한 동네에서 같이 살기 싫다는 것인데, 그래서 가난한 자와 함께 있으면 집 값이 떨어진다고 해서 데모하고 말이다. 실제로 자기 주위에 가난한 자가 있으면 짜증이 나는데, 왜 친척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자꾸 도와달라고 해서 서로 피한다는 것이다. 조카들 공납금을 대달라고 할까 싶어서 말이다. 아무리 자기가 돈이 많아도 그런 식으로 나가는 것은 아깝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도 맞벌이를 하면서 힘들게 벌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자기도 자식을 유학을 보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게 과연 살만한 세상이냐는 것이다.
◈ 헤겔 - '누가 주인인가?' 여기에 대해서 '헤겔' 이라는 철학자가 한 이야기가 있는데, 즉 주인이 노예에게 힘든 일을 시키는데, 그러면 만약 노예가 없으면 주인이 힘이 들어서 살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두고 헤겔이 "과연 주인이 노예인가? 노예가 주인인가?" 라고 질문을 던진다는 말이다. 그러니 철학자든 아니든 간에 우리가 이 세상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무엇인고 하니, 모든 것을 다 자기를 위한 현실로, 그렇게 상식적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의미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가짜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면 자기를 엄청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어도 남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을 같이 가지고 있는데, 다같이 아담의 자손이니 말이다. 그러니 인생이 다들 고만고만한데, 남들이 좋아하는 것은 자기도 좋아하고, 또 남들이 맛있는 것은 자기도 당연히 맛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 난데없이 옆구리를 찌르는 현상이 !! 그런데 난데없이 누군가가 자기 옆구리를 찌르는 현상이 일어나는데, 자기 인생을 개입하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에게 허락도 받지를 않고 쳐들어와서는 자기 인생을 불편하게 하는데, 그렇게 되면 자기가 다루기 힘든 요소들이 인생에서 발생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남들에게 이야기할 수도 없고 말이다. * 친구 : 근호야, 이번 일요일에 등산을 가자.
◈ 내 인생, 내가 관리할 수 없기에 !! 그렇게 당하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데, 그것을 어떻게 남에게 설명을 해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성도의 신앙생활인데, 그러니 성도의 운명은 참으로 기구하다는 말이다. 어떻게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들이 바로 예레미야이고 이사야이고, 또한 사도바울이고 사도 베드로라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들이 원하지 않는 곳으로 띠 띠고 가야만 하는데, 그래서 예레미야의 경우에는 정말이지 하기 싫어했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무슨 말만 하면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욕을 해대니 말이다. 그러면서도 돌아서서는 어쩔 수 없이 또 다시 전하게 되고 말이다. 또한 에스겔의 경우에는, 아내가 죽고 난 다음에 울지 말라고 하니, 무슨 '돈 크라이 포미 아르젠티나'도 아니고 말이다. 마누라가 죽고 난 뒤에 울지도 못할 것 같으면 결혼은 왜 하라고 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결혼은 시켜놓고는, 아내를 위해서 울지 말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장례식에 가서는 줄기차게 사이다만 마시는 되는가? 그러니 인생자체가 어떠한가? 예수님은 아버지가 죽어도 가지 말라고 하시는데,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를 지내게 하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가 남의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즉 우리가 다루고 관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마 8: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 천사에게는 삽입된 요소가 없어 !! 물론 자기는 관리하고 싶은데, 우리는 관리를 해야한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서 1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마지막 때는 마지막 요소가, 즉 니가 다룰 수 없는 요소가 너에게 삽입되어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천사는 이렇게 삽입된 요소가 없다는 말이다. 성도는 '육신+성령' 인데, 그런데 천사는 말 그대로 아예 처음부터 깨끗하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보기에는 천사가 더 좋아 보이는데, 하지만 그것이 아니고 육신과 영이 함께 있어야만, 그 와중에서 메시야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즉 천사를 위해서 메시야가 죽은 것이 아니고, 육신 때문에 죽었다는 말이다. 바로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 사랑이고 긍휼하심인데, 즉 하나님의 속성이 거기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왜 '펜잘' 이라는 광고에 보면, 그 약이 캡슐로 되어있는데, 그 중간을 부러뜨리면 약이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지금 우리 안에 메시야의 속성이 들어있는데, 주님은 그것을 부러뜨리려고 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둘 다 관리하려고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것을 깨기 위해서 우리 안에 불가능성을, 즉 우리가 관리할 수 없는 속성을 우리 안에 집어넣으셨다는 것이다. 즉 "너는 캡슐이야" 라고 하면서 그만 깨어버리고 마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사실 때,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도 사람이 되셨는데, 즉 육신을 입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육신이 있으면서 영을, 즉 성령을 입었는데, 그러니 우리의 인생이 예수님이 살아가시는 코스가 맞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이익을 보았든지, 아니면 피해를 보았든지, 그게 좀 혼란스러운데 말이다.
◈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의 경우에 !! 여기서 대해서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는데, 그게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마리아의 약혼자인 요셉이, 자기 여자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만히 끊고자 했는데, 이것은 상당히 상대방을 배려하는 모습인데 말이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는데, 즉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했다는 것이다. 자기의 이익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를 보고, "당신이 그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하지만 지난 것은 묻지 않겠습니다. 그만 여기서 조용히 갈라섭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보통은 그렇게 말하면서 좋은 친구로 남자고 하는데, 그런데 여기에 난데없이 누가 개입하는가? 천사가 나서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 여자를 데려오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성령에 의해서 임신을 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마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요셉은 자기 인생이 있어서 이익을 보았는가? 아니면 손해를 보았는가? 뭔가 자기 관리범위를 벗어나는 일이 발생했는데, 그러면 요셉은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 자기가 한 인생설계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여자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겠다" 라고 하는, 그 모든 것을 말이다. 물론 그렇게 포기하면 그만큼 손해처럼 보이지만, 하지만 마리아로 인해서 성령의 지시를 받음으로서 하늘나라의 패밀리에 합류가 되어서 구원을 받게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보통 행운이 아닌데, 로또복권의 일등당첨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누라를 얻어도 그런 마누라를 얻어야 하는데, 성령으로 임신하는 마누라를 말이다(ㅋㅋ).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결혼한다는 것은 보통 축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요셉은 자기 아내를 데리고 와서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는데, 누구의 자식인지 의문이 생기지 않도록 말이다. 그것은 곧 태어날 자식이 보통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그 아들은 하나님의 자식이라는 것을 요셉 자신이 인정한다는, 그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요셉의 인생 속에 캡슐처럼 주님의 속성이 들어있는데, 그게 바로 긍휼과 사랑이라는 말이다.
◈ 긍휼과 사랑은 언제 드러나는가?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겠는데, 이 긍휼과 사랑은 무엇이 있어야 바깥으로 나오겠는가? 그것은 바로 죄에 대한 육신이 있어야지 비로소, 즉 죄된 육신을 경유해서 긍휼과 사랑이 나온다는 말이다. 하나님이라고 해서 사랑을 마구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하나님 사랑의 절정은 무엇인고 하니, 기존의 이방나라와 관계가 없을 때는 햇빛과 공기로 사랑을 주시지만, 그러나 영원한 천국을 확정짓는 마지막 때에는 어떻게 하신다는 말인가? 히브리서 1장에 나오는 말씀대로, 그 마지막 때에 모든 것을 아들로 이야기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곧 최종적 사랑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죄된 육신이란 사실을 들추어내는 작업을 반드시 동반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제법 어려운데, 무슨 말인고 하니, "니가 괜찮은 사람이라서 구원했다" 라는 것이 아니라, "너는 천하의 죄인이다" 라는 것을 공개하면서 사랑이 짝을 이루어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럴 때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을 포기하게 되고 말이다.
◈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 그래서 요한일서에는 사랑을 더 어렵게 표현하고 있는데, "사랑은 바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주를 믿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 자기의 행함을 사랑하지 않는 것, 그렇게 자기의 행함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랑이 오게 되니, 이 세상에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왜냐하면, 이 두려움이라는 것은 반드시 '나' 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만 하는데, 즉 사람은 자기에게 손해가 될까 싶어서 벌벌 떤다는 것이다. 그게 두려움인데, 그러니 자기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두려움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엄마와 아이가 길을 가는데 그만 트럭이 아이를 덮쳤다는 것이다. 그러자 엄마가 놀라운 괴력을 발휘해서 그 1톤 트럭을 들어서 치우고 아이를 구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놀라서 사진을 찍고 했는데 말이다. 자기를 생각하지 않으니 그런 힘이 나왔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 이것이 바로 사랑의 능력이고 주님의 능력인데, 그래서 베드로전서 4장에 보면 무엇이라고 하는가? 무슨 일을 할 때는 무엇으로 하라고 하는가? 자기 힘이 아닌 주의 능력으로 하라고, 즉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라고 한다는 것이다. (벧전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일년에 두 번 정도를 우리교회에 오시는 집사님이 계시는데, 때마침 교회의 전기에 문제가 있을 때 와서는 소리소문도 없이 다 고쳐놓고 가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능력인데, 물론 자주 오면 그렇게 고쳐주지는 않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그러니 누가 이렇게 고쳤느냐고 물으면 안 되는데, 물으면 아마 일년에 한 번도 오기 힘들지 싶다는 것이다. 그러니 헌금을 아무리 많이 해도, 그것을 누가 했냐고 물으면 안 되는데, 그런 것을 물으면 이 교회에 오지 않는다고 나온다는 말이다. 믿음이 그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고 헌금을 좀 했다고 생색내는 꼬라지를 보면 기가 찬데, 주께서 그런 사람은 강제로 발길로 차버린다는 것이다.
◈ 이제 천사는 잊어주세요 !! 다시 히브리서 1장을 보면, 여기 마지막 때는 무엇과 비교하는고 하니, 천사와 비교를 하는데 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천사는 완벽하고 거룩하고 깨끗하다고 여기는데, 그런데 그런 천사보다 못한 우리가 천사를 지배하는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히브리서 1장 2절의 내용인데, 그게 마지막 때에 나타나는 독특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히 1: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천사를 위함이 아니라 너희들을 위함이다" 라는 것인데, 따라서 천사들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천사를 부러워한다는 것 자체가 수상한데, 자기 죄를 알면 다 되었지, "나도 어떻게 하면 저 천사처럼 되지?" 라고, 그렇게 천사를 모델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도 김 천사, 혹은 이 천사가 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한 천사는 우리교회에는 없지 싶은데, 우리는 그런 천사는 이제 잊기로 하자는 말이다. 지금까지 히브리서 1장 2절을 간단하게 설명해드렸는데, 어떻게 이해가 제대로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런 내용이라는 것이다.
◈ 가난한 자의 불가능성 !! 여기 교재 106페이지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가난한 자가 발생하는 것은, 그 가난한 자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고, 심지어 부자라고 해도 그렇다는 말이다. 가난한 자가 되고 싶어서 된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그러니 가난하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성인데, 즉 자기 자신이 그 가난을 어떻게 할 수 없는 덮쳐진 환경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환경을 통해서 가난한 자가 "나도 부자가 되어야지" 라고 하는 생각 자체가 죄로 드러나도록, 즉 가난한 것도 억울한데 부자가 되려는 희망마저도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면, 가난한 자는 아무런 소리도 하지 말고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자가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인데, 예수님께서는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봐" 라고 자기가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자들 앞에서 큰 소리를 치시는데, "너희들이 가난의 맛을 알아? 그것도 가난이야? 내가 바로 가난이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모든 것이 다 가난하다는 말이다.
◈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 "인자는 머리를 둘 곳도 없다" 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가난한 자들은 "우리도 머리를 둘 곳이 없어요" 라고 나오지 싶은데,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하시겠는가? "지금 니가 머리를 둘 곳이 없어서 머리를 두려고 애를 쓰는데, 그런데 나는 그것조차도 없어"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마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이 자기가 가난하다고 여기는 것은 부자가 되려고 시동을 거는 것과도 같은데, 하지만 아무리 "저는 가난합니다" 라고 해도, 주님은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이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역할을 맡기셨는데, 가난한 자의 역할을 말이다. 남들에게 싫어버린 바가 되고 외면한 역할, 그런 역할을 감당하라고 우리가 가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친구야, 보고 싶다 !! 물론 돈도 많고 나름 잘 나갈 때는 친구도 많이 있지만,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어떠한가? 사람이 누군가를 만난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내놓을 것이 있을 때만, 그런 조건 아래에서 만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뭔가를 내놓을 것이 없으면 만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친구야, 요즘은 왜 전화도 영 없노?" 라고 하면, "니가 뭐가 있다고 만나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 빼먹을 것이 없으면 만나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요즘 좀 바쁘다" 라고 하면서 그만 전화를 끊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친구야, 한 번 만나자. 내가 한 턱 쏠게" 라고 하면, 그러면 만난다는 말이다.
◈ 사랑인가? 우정인가? 어제 설교를 하면서 후다닥 지나간 게 있는데, 옛날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그리스에서는 우정이 사랑보다 위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설명이 좀 필요한데, 왜 우정이 사랑보다 더 세었는고 하니, 그래서 사내결혼과 같은 것은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내결혼을 하게 되면 회사의 분위기가 그만 개인주의로 흘러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자에 대해서 주도권 싸움이 일어나고 말이다. 즉 "내가 그 여자를 찍었는데, 김 과장이 뭔데 그 여자에게 접근을 한단 말인가? 나이도 많으면서, 그러니 나 같은 젊은 대리가 차지해야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내결혼은 조용히 이루어져야 하는데, 연애도 몰래하고 말이다. 그러므로 회사 안에서는 사랑이 아니라 우정이 중요한데, 그렇게 우정을 통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하나라도 더 끄집어내어야 신상품이 나오고, 회사가 경쟁력이 생긴다는 말이다. 그런데 서로 사랑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회사의 단결력이 깨어지고, 결코 회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세상에서 말하는 지혜인데, 그러면 교회에서는 어떻게 해야하겠는가? 교회도 역시 사랑보다는 우정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교회라는 공동체가 힘을 모아서 나름대로 사업도 벌릴 수가 있기에 말이다. 그러니 교회도 역시 우정이라는 것이다.
◈ 주님의 사랑은, '내가 사랑하지 않음'을 분명해 하기에 !! 그러면 하늘나라는 어떠한가? 하늘나라에서는 우정과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늘나라에서는 사랑이 우정보다도 더 우위가 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 사랑 안에는 '사랑을 하고 있지 않음'이 분명해지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다 엉터리라는 것을 인정할 때만, 그게 사랑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 사랑을, 부모사이부터, 부부사이부터, 교회사이부터, 바로 이 사랑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의 은사, 즉 주님이 주신 선물로부터 말이다. 부부의 경우에도, "내가 당신을 만난 것은 행운이다" 라고 하는 마음이 늘 유지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전혀 우정이 아닌데, 우정은 "니가 해주면 나도 해준다" 라는 것이고 말이다.
◈ 여보, 당신은 하나님의 속성이야 !! 그런데 사랑이란 것은 무엇인가? "당신이 나를 사랑해도,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어. 더욱이 나는 당신을 사랑한 적도 없어. 나는 이렇게 못난 놈이야" 라고, 그것을 항상 아내에게 이야기하고 고백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맨 정신에 그런 소리를 하는 남편이 과연 있는지 모르겠는데, 물론 뭔가 캥기는 게 있을 때는 그런 소리를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ㅋㅋ). 즉 "내가 당신을 만난 것은 행운이야. 당신은 나의 관리대상이 아니라, 당신은 하나님이 삽입시켜준 하나님의 속성이야" 라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 제가 너무 오바하고 있다고 여기시는 분도 분명히 있지 싶은데, "이번에 목사님이 도대체 무슨 사고를 쳤지? 사모님에게 몰래 물어볼까?" 라고 하면서 말이다(ㅋㅋ). 물론 남편이 그런 소리를 한다고 해서 아내는 우쭐거리면 안 되고, 반찬이나 신경을 써서 다양하게 만들어주면 된다는 것이다.
◈ 사랑은 우리의 관리대상이 아니기에, '탱큐' !! 그러니 사랑은 자기를 구기고 찢어놓는데, 왜냐하면 그게 바로 자기의 본래의 모습이고 육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의 육신이기에 우리는 그렇게 찢어놓아도 고맙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찢어놓아야 그 사이에서 중보자의 사랑이 나온다는 것이다. 마치 캡슐을 부러뜨리면 약이 쏟아지듯이 말이다. 그렇게 찢어지고 부러뜨려지고 깨어지면서 비로소 등장한 주님의 사랑, 그것은 전혀 우리의 관리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우리 속에 주님의 사랑이 작용하고 있는데, 우리는 가난하다는 것 때문에, 몸이 약하다는 것 때문에, 그렇게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주님을 원망한 줄 압니다. 그러니 이런 못난 육신을 이런 식으로라도 이끌어주신 것이 주님이 살아있다는 증거임을 오히려 자랑하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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