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잠언'속의 그리스도 29 / 바꿔치기 / 150406 본문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29 - 바꿔치기 15,04,0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98페이지부터 살펴보겠는데, 성경에 보면 구원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혹은 "너희가 의롭게 되리라" 라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사는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이 어떻게 의롭게 하든 말든, 그러한 하나님의 의보다는 "내가 어떻게 되는가?" 라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이렇게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라고 했을 때, 죽음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큰 두려움이기 때문에, 그래서 어떻게 죽지 않는 방법이 없는지, 거기에 성급하게 달려들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를 살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의를 우리에게 드러내는데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죽을 몸이 산다" 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 몸이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관심사가 바뀌어지는 자에 한에서 죽을 사람이 같이 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관심사가 서로 일치하는 사람들끼리 살아가는 곳이니 말이다. 왜 이 세상에서도 서로 관심사가 다르면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닌데, 그래서 부부도 서로 헤어지고는 한다는 것이다. 쫓아내었는데 다시 들어오면, 그 들어오는 즉시 창문으로 집어던지고 싶다는 것이다. "저게 왜 죽지도 않고 또 들어오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ㅋㅋ). 그렇게 서로 생각하는 것이 맞지 않으면, 즉 관심사가 다르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을 흔히 '성격차' 라고 하는데 말이다. 아예 처음부터 같이 살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 천국은, 하나님의 사고방식과 일치된 자들만 !! 그런데 천국은 하나님의 사고방식과 일치된 자들만이 같이 살 수 있는데, 그러니 천국은 경품에 당첨되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살고 싶은 사람은 나오세요" 라고 해서 말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동일한 사람들만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작업을 하시는고 하니, 배제를 시키고 삭제를 시킨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의 관심사와 다른 사람들을 절대로 넣어주지 않는 철저함을 보이신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성도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천국에서 숫자가 적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이다. 물론 교인수가 적은 것은 걱정할 수도 있지만, 천국에서 숫자가 적은 것은 전혀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교인수가 적은 것도 걱정할 이유가 없겠지만 말이다.
◈ 문제는 '기준' !! 이것이 전부 무슨 문제인고 하니, '기준'에 관한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가 잘 되고 못 되고 하는, 그런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는 것이다. 즉 "저 사람은 성공했다" 라고 했을 때, 그런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말이다. 무슨 법에 의해서, 어떤 원리에 의해서 그런 것을 판단하느냐는 것이다. 즉 그런 판정기준을 어디서 가지고 오느냐는 말이다. 우리가 잠언서를 보게 되면, 잠언서는 곧 지혜인데, 그 지혜는 '천국에 합류할 수 있는 사람들에 해당되는 기준을 정해준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기준을 지혜에 담아서 우리에게 언급해준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런 기준을 정하는데 있어서, 성경을 보면서 대충 정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할지 몰라도, 하지만 성경을 보고 기준을 정해도, 그것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정하는가? 예수님인데,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니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이 그 기준을 정해놓고, 우리에게는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들이대는데, "이것이 기준이야" 라고 하시면서 말이다.
◈ 나를 본 받는 자가 되어라 !! 그것을 성도에게는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어라" 라고 하시는데, 그것은 우리가 살기 싫고 죽고 싶다고 하는 이 세상에서, 사실 우리는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처음인가? 예수님이 처음인데, 예수님 이전에 살던 사람들은 해답도 모르면서 그냥 살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다행인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것이 인생이다" 라고 하는 것을 알고 살기에 여유가 있다는 말이다. (엡 5:1)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 질문과 해답 !! 사람이 어떤 자기 기준을 정하게 되면, 그 기준에서 무엇이 나오는고 하니, 다음의 두 가지가 나온다는 것이다. "왜 이런 기준이 나오는가?" 라고 하는 질문이 나올 것이고, 그리고 그런 기준에 의해서 답도 나온다는 것이다. 즉 질문하고, 그 기준을 경유해서 답이 나온다는 말이다. 그런데 답이 모호하면 자꾸 질문을 하는데, 저의 설교를 듣고 질문을 많이 하는데 말이다. 물론 우리교회 교인들은 질문을 하지 않는데, 답을 알아서 그런 것인지, 그게 아니고 아마 살기 싫어서 그렇지 싶은데 말이다. 살기 싫으니 더 이상 궁금한 것도 없다는 것이다.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자기가 어떻게 좀 잘해보려고 하는 것인데, 그런데 그런 마음조차도 없으니 무슨 질문을 하겠느냐는 말이다. 무엇을 해도 잘할 수 있는 능력이 자기에게 없다고 하는, 그런 도착지점에 왔으니 몰라도 아무튼 질문이 없다는 것이다(ㅋㅋ). 그러니 질문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답이 자기가 생각한 것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인데, 그래서 밀착을 시켜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질문을 통해서 밀착을 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즉 질문을 통해서 수정하고 조정하고 개선하고 바꾸고 말이다. 그러니 질문을 한다는 것은 좋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에 처음 온 사람만 질문을 하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꾸만 질문을 하도록, 그렇게 계속해서 질문을 만들어내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가 깔려있다는 것이다. 물론 답은 있는데,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 라고 말이다.
◈ 예수님처럼 살기는 싫어요 !! 그렇게 예수님처럼 살아가면 되는데, 하지만 문제는 예수님처럼 살기가 싫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기준이 예수님 근처에는 갔는데, 그것을 '투 슬립'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즉 유리판이 두 개가 있어서 어울려버리면 빛의 분산이 일어나면 얼룩이 생긴다는 것이다. 유리판이 하나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데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인생이 주님의 바탕 위에서 일체가 되면 되는데, 그게 아니라 다른 기준에 의해서 자꾸만 이끌리니 얼룩이 생기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판 위에 고정이 되도록, 그렇게 조정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질문인데, 물론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생깁니까?" 라고 하는데, 그게 곧 질문이라는 것이다. 즉 "내가 밀어주고, 내가 신경을 쓰고, 내가 관심을 두고, 내가 투자했던 그 일이, 그것이 왜 나의 뜻대로 되지 않고 삐걱거립니까?" 라고 말이다. 여기서 교재 98페이지를 보자. ** 그런데 잠언은 '너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원래 없어' 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즉 '지혜가 되시는 분이 너 대신 고생하고 계셔서 그분이 제공한 긍휼을 네가 입고 있다' 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 너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원래 없어 !! 이렇게 "너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원래 없다" 라고 하는 것은, "내가 나를 보는 기준이 아닌, 주님이 다른 기준으로서 나를 보고 있다" 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를 바라보는 것은 항상 아름다운데, 언제나 사랑스럽고 예쁘고 참하고 귀한 존재로, 그렇게 자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당신이 당신에게 왜 귀합니까?" 라고 하면, 그것은 답변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상하게 답이 나오지 않는데, 왜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말이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그리스도를 본 받아라" 라고 했는데,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에게 정답이 되려고 하면 그리스도를 경유해서 나와야 하는데, 하지만 우리는 남을 거쳐서 나올 마음이 추호도 없다는 것이다. 그냥 자기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아이들을 키우다가 보면, 분명히 부모는 정당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데 아이들은 하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라고 아이들에게 납득을 시켜야 하는가? 이게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아이e들이 "나는 죽어도 하기 싫어요" 라고 하는 것은, "나는 엄마와 다른 기준이 따로 있어요" 라고 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부모는 아는데, 그래서 성질이 나서 야단을 치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니 혼자 나가서 살아라" 라고, 즉 "너의 기준을 주장하려면 여기 이 집에서 나가서 니 마음대로 해라" 라는 것이다. 물론 그게 안 되는 줄 알면서 그렇게 하는데, 돈이 없어서 나가서 살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부모도 정작 해답을 모르는데, 왜 자기는 자기만 사랑하는지 말이다. 그런 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분명히 성경에서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우리는 왜 사나 죽으나 자기가 우선인지 말이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그렇게 되면 여기 해답에 합류할 수가 없는데, 이런 상태로서는 주님과 관심사가 동일하다고 자기가 우기지 못할 정도라는 것이다. 즉 "주님도 제 마음을 알지요? 제 마음이 주님과 같습니다" 라고 감히 이야기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기준을 바꾸면 되는데, 하지만 죽을 때까지 그게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제시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죽을 니가 사는 그 일이 너의 일이 아니다. 죽을 니가 산다는 것이 정말 신나는 것으로 여겨지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너의 일이 아니고 나의 일이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죄인과 함께 사는 것을 '사랑' 이라고 하고, 그 사랑이 기준에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 사랑이 들어오기 때문에 죽을 우리 몸이 살게 되는데, 우리가 살고 싶다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즉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라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기준으로 들어가서, 도저히 천국에 갈 수 없는 우리를 그 사랑에 의해서 살려주신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사랑의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바꿔치기' 라는 것이다. 이게 굉장히 어려운데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 그들의 장자와 누구를 바꿔치기를 했는가? 어린양과 바꿔치기를 했다는 것이다.
◈ 사위의 질문과 장인의 답변 !! 어제 저녁에 독일에 있는 사위에게 전화가 왔는데, 노아 이야기를 하면서 "왜 아버지가 자식을 저주합니까?" 라고 말이다. 분명히 자기 자식인데, 그런데 왜 노아는 함과 가나안을 저주하느냐는 것이다. 자기가 납득이 되도록 설명을 좀 해달라고 말이다. (창 9:18)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그래서 제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고 하니까, 노아방주에 실린 정결한 짐승은 7쌍이고, 반면에 부정한 짐승이 2쌍이라는 것부터 시작했는데 말이다. 노아방부는 심판을 의미하는데, 그러니 완전히 이 세상을 물로서 청소를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더러운 짐승을 살려둘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런데 노아방주에는 더러운 것이 포함이 되는데, 그리고 정결한 짐승도 같이 들어오고 말이다. (창 7: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 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바꿔치기'를 !! 드디어 홍수가 끝나고 일년동안을 물 위에서 떠돌다가 이제 노아와 그 식구들이 방주에서 내려오게 되는데, 그러면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누구 덕분에 심판에서 면제가 되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을 고백하는 순서인데, 그럴 때 그들이 어떻게 하는가? 더러운 짐승이 아닌 깨끗한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깨끗하고 정결한 짐승이 그 방주를 대표해서, "이번 노아홍수는 정결한 쪽에서 내리는 정결한 심판이다" 라는 것을 선언한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결하지 않다고 하면 심판을 당해도 아무런 토도 달지 말라"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것이다. (창 8:18)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
◈ 과연 사람은 정결한가? 그러면 정결하지 않은 짐승은 어떻게 되는가? 정결한 것을 잡아서 바꿔치기를 하는 것인데, 그래서 정결하지 않는 짐승뿐만이 아니라, 거기에 탄 모든 짐승들을 정결한 것으로 간주해서 구원해주신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과연 사람은 정결한가?" 라는 것인데 말이다. 그때 무슨 사건이 일어나는가? 노아가 술을 처먹고 그만 하체를 드러내놓고 골아 떨어졌다는 것이다. 술에 취하면 다 그러한지 몰라도, 아마 여러분은 알콜을 단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아서 잘 모르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그러니 이것은 아버지의 체신이고 뭐고 없는데, 그때 셈과 야벳은 그것을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질을 하면서 담요로 그 아비의 하체를 덮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런 행동이 보여주는 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아버지나 우리나 그런 것을 까발릴 입장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이다. 즉 "아버지는 술에 취해서 못났고, 반면에 우리는 잘났다" 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조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안에 있는데,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지 않음으로서 자기들은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심판 안에서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것은 주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죽어야 하는데, 지금 죽지 않는 것은 은혜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이 곧 아버지의 수치심을 덮어주는 것이고, 그 정신을 계속해서 마지막 때까지 이어가게 되는데, 그렇게 이어가는 것을 두고 '축복'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 축복과 저주 !! 그러니 축복은 소유가 아니라 그 취지가 계속해서 살아나는 것인데, 반면에 저주는 무엇인고 하니까, 그 축복에서 배제된, 즉 "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어" 라고 단정을 짓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함과 가나안 쪽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자손들은 번식하면서 특정한 땅을 지배하게 되는데, 그것을 두고 '가나안 땅'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혹은 함의 땅이라고 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러면 셈과 야벳의 땅도 있게 되는데, 이들의 땅은 축복을 받은 땅으로, 즉 축복을 받을 자들이 거주하는 지역인데 말이다. 그렇게 축복을 받을 지역과 그렇지 못할 지역이 분류가 되는데, 하지만 축복을 받았다는 지역도 마지막 때에는 저주를 받은 지역으로 색깔이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라고 확정이 되고 난 뒤에, 놀랍게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고 하니, 그 의인 중의 한 분이 바꿔치기를 하기 위해서 어린양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죄 속에서 의를 끄집어내게 되면, 그 어떤 인간이라도 살려달라고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게 된다는 것이다. (롬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고 하는데, 그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이 세상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전혀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세상에, '사랑' 이라는 것이 드디어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어둠에 속한 자들은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인데, 구원을 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구원을 해주는 사랑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다 이야기하는데, "주여, 우리는 어둠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것이 17절, 18절, 19절에 계속해서 나오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니 요한복음 3장 16절을 안다는 것은, 17절, 18절, 19절에 나오듯이, 자기는 죄에 속하고 어둠에 속했기에 심판을 받아서 마땅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을 모른다면 이 16절의 말씀이 전혀 반대로 해석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 배기나 보자. 그래도 하나님이라면 당연히 사랑해야지" 라고 말이다. 인간이 무슨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처럼 오만함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 3장 16절은 굉장히 중요한데, 인간의 오만함을 더욱 더 확대시키는 구절이니 말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엎어지는 사람은 지옥에 갈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게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말이다.
◈ 하나님은 예수님만 사랑해 !!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 라는 것은, "하나님은 예수님만 사랑한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즉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보냈는데, 그것은 그 누구도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 라고 하는, 그런 뜻으로 보면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입니다" 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라고, 즉 아들에게만 심판권이 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심판주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 제가 구원을 받을까요? 지옥에 갈까요?" 라는 것은, 그것은 전적으로 심판주가 결정할 사항이지, 우리가 우리 입으로 조잘거리고 묻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되는가? 주님께서는 "너는 가만히 있어라. 질문도 내가 하고 답변도 내가 하겠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요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그러니 모든 질문은 반드시 예수님을 경유해야 하는데,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구원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홀로 다 하셨다는 것인데, 그것을 두고 요한복음 6장에서는 '하나님의 일' 이라고 했는데, 그러니 하나님의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일을 하고 있음을 믿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 6: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는 하나님의 일의 결실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모든 일은 주님께서 하셨고, 그 결과물이 바로 저 자신입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 우리는, 중장비가 지나간 자국 !! 우리가 길을 가다가보면, 거기에 불도저가 지나가면 길이 파이게 된다는 것이다. 시멘트나 아스팔트의 경우에는 깨지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니 그런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뭔가 엄청 무겁고 힘이 센 것이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냥 사람이 걸어가면 그렇게 길이 파이거나 깨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거기에는 분명히 덩치가 큰 중장비가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트랜스포머들이 한 판 싸웠던지 말이다(ㅋㅋ). 그러니 우리 자신을 그런 중장비가 지나간 자국으로 보자는 것이다. 살고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냥 밟고 지나갔다고 보자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의 온 몸은 다 해체가 되고 찢어져 버리는데, 어디 멀쩡한 곳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몸이 통합이 되지 않는데, 통합을 하려고 하면 반드시 그리스도를 경유해야 한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98페이지를 살펴보자. **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라는 말씀이 다음과 같이 풀려요. "너는 사람도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이렇게 지혜는 우리를 찢어놓는다고 하는데, 통합하지 못하게 말이다. 즉 "너는 사람도 아니다" 라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하나의 통일체가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통일체가 되는 것을 그냥 방치해두지는 않겠다는 말이다. 그러니 해체하고 찢어놓겠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찢어놓는가? 다시 도로공사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중장비를 동원해서 말이다. 즉 바꿔치기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지저분한 아스팔트는 걷어내고 새로운 것을 다시 깐다는 말이다. 그러면 까는 기준이 무엇인고 하니, 매뉴얼이 말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미 이 땅에 오셔서 새 아스팔트를, 즉 새 인간 깔아놓으셨다는 것이다. 거기에 맞추어서 우리는 다루시는데, 그것을 우리에게 물어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흉내를 낼뿐인데, 우리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할뿐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그것을 자기가 한다고 하면, 그것은 위선자가 될 뿐인데, 그런 것은 아예 포크레인으로 찍어서 해체해버린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나를 본 받아라" 라고 해봐야, 우리는 "본 받으면 얼마나 주시겠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 사랑과 질투 !!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랑이라는 말을 하면서도 우리를 찢어놓겠다고 하시는데, 그래서 사랑을 질투로 바꾸어버리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질투와 사랑이란 말이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는고 하니까, 사실상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게 같은 내용이라는 것이다. 신명기 5장에 보면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라고 하시는데 말이다. (신 5:9)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그런데 이 질투를 사랑으로 바꾸어버리면, 그렇게 사랑을 언급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내놓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질투가 되면,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사랑을 거부한다는 뉘앙스가 매우 강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사랑과 질투는 경쟁관계에 있으니 말이다. 남자와 여자가 사귀는데 있어서, 남자들이 제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여자들이 되도 않은 것을 가지고 질투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참 불안한데, 언제 삐칠지 모르니 말이다. 웃으면서 손을 잡고 가는데, 그런데 꽃집을 지나면서 "자기, 꽃이 예뻐? 내가 예뻐?" 라고 하면, 정말로 곤란하다는 것이다(ㅋㅋ). 꽃이 예쁘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삐치는데, 질투를 해서 말이다.
◈ 김성령을 아세요? '김성령' 이라는 40대의 탤런트가 있는데, 그 사람에게 딸이 있는데, 그 아이의 초등학교 같은 반 친구들이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너희 엄마는 못생겼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엄마가 미스코리아 진 출신인데 말이다. 40대 이상의 사람들은 모두 그 여자가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아이들의 눈에 이미 늙었고 못생겼다는 것이다. 분명히 아이들이 말이 맞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강력하게 거부하고 싶은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는 과거에 잘나가는 미스코리아 진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보면 지금도 여전히 미인이지만, 하지만 아이들의 눈은 거기에 말려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 그렇게 우기고 싶은고 하니까,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계속해서 동일성 있게 유지하고 싶은, 그런 충동이 굉장히 강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선택한 것을 부정하기 싫어서 말이다. 즉 자기가 한 번 선택한 것은, 그것은 계속해서 잘한 짓으로 가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못난 인간이 그렇게 사랑을 받았는데, 그런데 졸지에 사랑을 받고 난 다음에는 뭐라고 하는가? 자기는 사랑을 받을 만해서 받았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변호하려고 하는데, 계속해서 못난 사람이 되어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노아와, 가나안과 함 !! 노아 방주의 경우에, 그야말로 못난 인간들이 거기에 탔는데, 그런데 방주에 타고 난 뒤에는 자기가 탈만 해서 탔다고 여기는데, 그것이 바로 함과 가나안이라는 것이다. 대자연도 마땅히 제공이 되어야 하고, 봄여름가을겨울도 당연하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데, 물의 심판이 없었으면 당연할지 몰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런 물 심판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장차 오실 어린양의 희생에 근거해서 햇빛과 물과 공기를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서 악인에게도 제공하신다는 말이다.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그런데 가나안과 함에게는 그런 의식이 없는데, 그들은 "하나님이라면 당연히 그 정도는 해주셔야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질투' 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의 경쟁상대로 확정을 지었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사랑의 경쟁상대로서 말이다. 그러니 "내가 너를 사랑한다" 라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바꾸어서, "너는 너 자신이 좋나? 내가 좋나?" 라고 말이다. 바로 그것인데, 그래서 "저는 제가 좋습니다" 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나는 질투한다" 라고 나오신다는 것이다. 질투가 그런 구조로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말이다.
◈ 주님의 질투심에 참여해야 !! 지금 녹음이 배터리가 없어서 중간에 끊어지고 말았는데, 마음 같으면 처음부터 다시 하고 싶은데 말이다(ㅋㅋ). 처음에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천국에 가려면 하나님과 기준이 같아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이, 즉 성격이 그렇게 서로 같지 않으면 천국에서 서로 힘들어서 살기가 힘들다는 말이다. 그렇게 생각이 같다는 것은, 주님의 질투심을 우리가 공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 나는 김치찌개를 끓이는 것이 좋아요 !! 제가 언젠가 우리교회에서 구약의 '아가서'를 설교하면서, 그 내용은 우리교회 사이트에 올려져 있는데 말이다. 아가서의 주제가 곧 사랑인데, 그 아가서를 다 보고 나서 우리가 느낀 점이 다음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주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을 전혀 기대하지 않고 밀어 부쳐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이 와서 사랑을 내쫓는 것인데, 낯선 사랑이 와서 기존의 자기 사랑을 쫓아버린다는 말이다. 방금 결혼해서 신혼의 단 꿈에 빠져있는 새댁에게는 이런 것이 있는데, 결혼하기 이전에는 월수입이 이천만원도 더 되던 유능한 창업자가, 그리고 세계적인 콩쿠르 대회에 우승을 한 소프라노가 결혼을 하고 나서는, 모든 것을 다 때려치우고, 앞치마를 두르고 김치찌개를 끓이면서 신랑을 기다리는 것이 더 좋다고 하면서, 그렇게 다 포기하고 전업주부로 집안 일에 전념하는 경우들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영미' 라는 소프라노가 그렇게 했다는데, 자기는 요리를 하고 아이를 낳은 것이 더 좋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일이 있는데, 무대에서 벌벌 떨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좋다고 미련을 가지고 계속해서 하는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이 와서 무엇을 추방했는가? "나는 이 정도로 잘 나갔어" 라고 하다가 낯선 사랑이 오는 순간,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던 것은 완전히 뒤로 밀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아마 여러분은 그런 사랑을 하고 있지 싶은데,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라고 할 때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ㅋㅋ).
◈ 기존의 사랑을 밀어내면서, 끝까지 사랑 !! 이런 사랑을 내쫓으면서, 그렇게 바꿔치기를 하면서 성도에게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질문이 마구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나의 희망이 깨어지는데, 왜 주님은 자꾸만 이렇게 몰아가지? 이럴 때는 기도를 해야지. 이럴 때는 물어 봐야해. '하나님이여, 왜 이렇게 제 뜻대로 되지 않습니까?' 라고 말이야" 라고, 그렇게 계속해서 애굽에서의 미련과 집착과 같은 것이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떠밀려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끝에 가서 알게 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십자가 사랑이 전부였다는 것인데, 즉 "주님만 있으면 되었지, 다른 것은 주님의 사랑을 흐릿하게 하는 이물질이었고, 황사현상이었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의 사랑을 희미하게 흐려놓게 하기 위해서, 마귀가 장난친 것에 그만 우리가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사랑하는 양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는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데, 그 어떤 권세도 내가 양을 쥐는 이 손아귀에서 빼낼 권세는 내가 허용한 적이 없다" 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강력하게 바꿔치기를 하신다는 말이다.
◈ 표범의 무늬가 바뀌겠는가? 물론 그렇게 바꿔치기를 당하는 우리는 그야말로 죽을 맛인데, 그런데 그런 바꿔치기가 없이는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한 번 생각해보라는 말이다. 죽을 몸이 어떻게 살아날 수가 있는가? 성경에 그런 말씀이 있으니 우리가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있는데,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주님이 질문을 하시는데,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답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주 어처구니가 없는 질문들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에스겔 선지자를 보고는 "이 뼈들이 살겠는가?" 라고 하는데, 그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에게는 "표범의 무늬가 바뀌겠는가? 흑인이 백인이 되겠는가?"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렘 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그것보다도 더 심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보고 "니 아들을 바쳐라" 라고 하는 것인데, 그런데 그 아들이 죽으면 약속이 이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늘의 별 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 자녀를 주신다고 했는데, 그것은 이스마엘에게 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 부재의 자리 - '아들을 바쳐라' !!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진 아들이 바로 이삭인데, 그런데 그 아들을 없애라고 한다는 것은, 그것은 결국 '부재의 자리', 혹은 '무(無)'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무로 만드는데, 즉 줘놓고 빼앗아 가신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니 아브라함은 '뻥' 하고 마음의 구멍이 뚫릴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뚫린 그 마음에 이삭이 바꿔치기를 당해서 들어오게 되는데 말이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브라함 자신이 아들 덕분에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새롭게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행함의 사람'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그렇게 주님께서는 선언을 해버리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하시는 것은, "이제는 너를 사랑했던 시절은 끝내고 나의 사랑으로 살아가자. 나와 일치된 관심사로 살아가자" 라고 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인데,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하나님이 아니고 말이다. 실제로 누구에게 손을 대신 하나님, 바로 그런 동일한 손댐으로 우리에게 손을 댈 때, 우리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그야말로 찢겨진 인생을 살았는데, 그야말로 자기 인생 위로 불도저가 지나갔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서 22년 동안이나 헛수고를 하면서, 그래도 결국 그 여인과 결혼을 했는데, 그 여인은 그만 아이를 낳다가 죽고 말이다. 그 여인이 바로 라헬인데 말이다. (창 35:16)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신하여 심히 신고하더니
◈ 우리는 '파이프'나 '관'으로서 !! 그러니 세상적인 살아가는 재미나 행복이나 즐거움은 어떻게 전혀 구경도 할 수가 없는데, 그런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꾸만 뭔가 쫓는데, 즉 "빨리 가, 빨리 가" 라고 말이다. 저는 것을 영어로 '파이프' 라고, 우리말로는 '관' 인데 말이다. 그렇게 인간 자체가 뭔가 그냥 통과하는 관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몸이 말이다. 영덕 대게의 다리를 뜯어내어서 앞뒤를 잘라서 '훅' 하고 불면 어떻게 되는가? 속살을 먹고 나서 그 다리 껍데기를 보면 그냥 관처럼 되어있다는 것이다. 뚫려서 말이다. 속살은 주님이 빼먹고, 우리는 마치 대게의 다리 껍데기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인생은 없는데, 뭔가가 지나간 것 같다는 말이다. 그리고는 껍데기만 달랑 남아있다는 것이다. 잠언서의 경우에, "너의 것을 자식에게 양육시키지 말라" 라고 하는데, 그것이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지혜인데 말이다. 솔로몬이 가지고 있는, 물론 솔로몬은 다윗에게 받았고 말이다. 그러니 다윗이 받은 하나님의 약속을 자녀들에게 훈계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의 파이프와 같기에 말이다. 속이 비어있는 말이다. (잠 4:1)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여기서 교재 98페이지를 보자. ** 대구 K대학의 경우에는 교훈이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라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이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몰라요. '우리 대학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일절 가르치지 않는 대학입니다. 오직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합니다' 라고 해야, 그래야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에 합당하다는 겁니다.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계명대학교를 아십니까? 이게 대구에 있는 소위 기독교대학이라고 하는 계명대학교의 경우인데, 대명동 캠퍼스에 가면 실제로 그런 성경구절이 새겨져 있다는 말이다. 미국의 버지니아 쪽의 건축구조로 되어있는데, 여기서 드라마나 영화도 많이 촬영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미국식 캠퍼스라고 해서 말이다. 정말로 그런 취지로 계명대학교가 세워졌다고 하는데, 그러면 계명대학교에는 일절 직업교육에 관한 학과는 하나도 없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모두 폐지되고, '오직 그 나라의 의' 라는 것인데, 즉 하늘나라에 관한 학과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사실은 정반대이지만, 물론 그런 과들을 없앤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라는 것은 무엇과 반대가 된다는 말인가? 하늘나라와는 반대가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지옥에 가는 사람들이 이런 것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학이 아니라 학원입니다. 돈이 되는 기술만 다 가르칩니다. 하기야 이런 산업화 시대에 살아남으려고 하면 돈 버는 기술 이외에 무엇이 더 중요하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라는 성경말씀을 도용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 하나님의 질투 어린 사랑 !! 제가 이런 글을 쓴 취지가 무엇인고 하니,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라는 것이 명령으로 들리는지, 그게 아니면 하나님의 질투 어린 사랑의 말씀으로서 들리느냐는 것이다. 만약에 그것이 "오직 너만 사랑해!" 라고 하는 질투 어린 사랑의 말씀으로 들린다고 하면, 그 사람이 세상에서 돈을 아무리 많이 버는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어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직업에 자기가 목을 매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자기는 단지 주님의 사랑이 통과해야하는 하나의 파이프이고 관이기 때문에, 자기가 돈을 버는 것도 주님의 사랑을 느끼기 위해서 허락하신, 일종의 체험학습이 된다는 것이다. 돈을 벌면서, 주님께서는 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라는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하셨는지, 그것을 글이 아닌 온 몸으로 느끼게 하신다는 것이다. 일단 교재 99페이지를 살펴보자. ** 농업형 경제구조에서는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충분하지 모르겠지만, 산업형 경제구조에서 살아남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고 하니까, 그냥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주체 값을 하면서 살아남는다는 겁니다. 주체라는 것이 굶어죽는 것보다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보면, 농업형 경제구조와 자본주의 경제구조의 차이점에 대해서 간단하게 언급한 부분이 나오는데 말이다. 물론 지금이 경제학을 강의하는 시간이 아니니까, 복음과 관련해서 살짝만 건드리면서 지나가 보자는 것이다.
◈ 자본주의는, 무한한 욕망의 구조 !! 자본주의 사회는 돈만 최고라고 하는 사회라고 여겨지는데, 그런데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 그게 정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어떠한고 하니, 이것은 마르크스가 밝힌 것인데 말이다. 물론 돈은 필요한데, 교환하기 위해서 말이다. 돈 자체를 두고 "이런 나쁜 놈아!" 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돈에 그려져 있는 신사임당이나 세종대왕을 보고 말이다(ㅋㅋ). 자본주의 사회와 그 이전의 경제구조와 차이점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돈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는 무한한 욕망의 구조라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과잉욕망' 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런 과잉욕망이 없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만 도태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왕따가 되고 말이다. 그러니 욕심이 없는 사람은 전혀 끼들 수 없는 것이 곧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대해서 탐욕을 부리지 않는 사람은 여기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욕심이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둥근 뜀틀에서 한 시간에 얼마를 주고 아이들이 뛰노는 놀이기구가 있는데, 우리 동네에도 그런 것이 있는데 말이다. 아이들이 집에만 갇혀 있다가 그런 곳에 데려다놓으면 그야말로 신이 나는데,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꿈꾸는 대로, 무한한 욕망도 허용이 되는 사회라는 말이다. 왜 놀이공원에 가면 놀이기구 가운데서 '범프카' 라는 것이 있는데, 원래 아이들이 타고 노는 것인데 나중에 보면 재미가 있어서 부모들도 같이 타고 논다는 것이다(ㅋㅋ). 거기에는 어떤 법칙이 없는데, 그냥 이리도 박고 저리도 박고,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차를 몰아도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다.
◈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근거로 해서 !! 그러면 여기에 반해서 사회주의는 무엇인고 하니까, 그런 자본주의를 근거로 해서 나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막상 풀어놓고 보니까, 가진 자가 계속해서 더 가지고 간다는 말이다. 그리고 없는 사람은 가진 사람의 정신적 노예가 되고 말이다. 심지어 19세기 초반에는 영국에서도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하루에 16시간씩이나 노동을 했다는 것이다. 특히 영국의 아일랜드 사람들이 고생을 많이 했는데, 자기 나라에는 가뭄이 들어서 영국 본토나 미국으로 건너가서 말이다. 그런 일이 힘들다고 해서 그만 둘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일할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으니 말이다.
◈ 마르크스 - '능력대로 일하고 필요한 만큼 받자' !! 아무튼 그렇게 힘이 들었는데,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것은 사람이 사는 사회가 아니다" 라고 해서, 그것을 아예 국가체제로, 즉 "이제는 국가가 나서서 능력대로 일하고 필요한 만큼 받도록 하자" 라고, 그런 사회를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따져서 만들어보려고 했다는 말이다. 그것이 마르크스에서 시작되어서 레닌으로, 그리고 스탈린에게서 구체화가 되어서 소련의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중국이나 몽골이나 북한도 역시 그러한데, 실제로 그러한 사회주의 국가를 시행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막상 시행을 해보니 어떻게 되었는가? 욕망이 그만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 그런 일이 생기는가? 그냥 주는 대로 먹으면 되니 말이다. 그래서 일을 그만 건성으로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요령만 생기게 되었다는 말이다. 일을 잘하나 못하나 받는 것은 모두가 다 똑같으니, 즉 성과급이 없으니 그냥 대충대충 일을 하고 만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뒤에 나타난 현상이고, 아무튼 처음에 마르크스가 생각한 것이 곧 '공동체' 라는 것인데, 사도행전 2장 말씀에 근거해서 말이다. 일단 44절에서 47절까지 살펴보자. (행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 공동체 운동 !! 그러니 지주의 모든 재산을 빼앗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러면서도 마음을 같이 하기 위해서 김일성 주체사상을 날마다 학습을 시켜서, "우리는 김일성 수령님 덕분에 남한과 같이 지옥의 생활을 하지 않고, 우리 인민이 주인이 되는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그게 바로 마귀의 나라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김일성을 찬미하니 말이다. 물론 북한은 하나의 극단적인 경우겠지만, 실제로 전 세계의 모든 공동체는 이 성경구절에 근거해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공동체 운동이나 자본주의 사회나 그 기본은 무엇인가? 돈이 있어야 하는데, 즉 "있는 사람은 내놔라. 없는 사람은 그냥 가자" 라고 한다는 말이다. 학교에서 교과서 진도를 똑같이 나가는데, 그런데 막상 시험을 치면 어떤 아이는 백점이고 어떤 아이는 빵점이라는 것이다. 돈의 경우에도, 각각 사람에게 돈을 천만원씩 똑같이 나눠줘도, 나중에 일년 뒤에 보면 어떠한가? 한 쪽은 배로 불려서 있고, 다른 쪽은 노름을 하다가 다 날리고 완전히 거지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 우리는 할 수 없다 !! 지금 사도행전 2장의 말씀은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것인데, 천국의 모형으로서 말이다. 그러면 성령께서 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우리는 할 수 없는데, 따라서 여기서 정답을 말하면, "우리는 할 수 없다" 라고 하는, 그러한 자들이 바로 이미 공동체이고 이미 천국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닌데, 우리는 그 어떤 경우라도 "나는 나의 것만 주장하지, 나는 남을 위해서 살 마음이 없다" 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죄인이 된 마음이 '한 마음' 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착하기 때문에 그 착한 마음을 끄집어내면 된다" 라고 하는 것이 한 마음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은 마귀의 마음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반대로 나가면 되는데, 즉 "나는 그 어떤 경우라도 나밖에 모르는 죄인입니다" 라고 말이다. 그게 한 마음인데, 그러면 누가 누구를 부러워하겠는가? 돈이 많은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부러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돈도 많은데 매일같이 싸우고, 그런데 저 집은 반지하의 가난한 집에 사는데도 매일같이 웃음꽃이 피네" 라고 말이다. TV를 봐도, 자기들이 보기에는 별로 우습지도 않는데, 그런데 저쪽은 그것을 가지고 깔깔 웃으면서 넘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돈을 살 수 없는 그 낯선 것, 그것이 저기에 왜 있느냐는 말이다. 돈으로 살 수가 없는 낯선 것이 말이다. 만약에 그런 가정에 부자가 돈을 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돈으로 인해서 다같이 불행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마음을 같이 한다는 것은 성령이 임한 것인데,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니 잘난 척을 해서 한 마음이 되는 법이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만을 사랑하기에 말이다.
◈ 주님의 사랑은, 바꿔치기를 하는 사랑 !! 주님의 사랑은 바꿔치기를 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즉 다들 불도저가 지나가서 온 마음이 다 찢어지고 뒤집어진 상태인데, 그러니 공동체 생활을 해보겠다고 하는 생각 자체도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마음이 뒤집어졌으면, 그렇게 뒤집어진 상태로 보이면 주님이 조성한 공동체인데, 그런데 새삼스럽게 무슨 공동체를 만드느냐는 것이다. 또한 주님의 몸이 있는데 무슨 교회를 만들고 하느냐는 말이다. 미국이나 호주나 중국이나, 그 어디든지 간에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이 있는데, 즉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으면 모두가 공동체라는 것이다. 그것을 에베소서 4장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몸도 하나이고 주도 하나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엡 4: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 방이 좁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 어제 예배를 마치고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데, 어떤 목사님이 개척교회를 하는데 주인이 그만 방을 빼라고 해서 더 이상 모일 곳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옆에 있던 분에 뭐라고 하는고 하니, 자기 집으로 오라고 한다는 말이다. 자기는 방을 빼라고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 방은 너무 좁아서 다 모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어떤 분이 아주 멋진 아이디어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시간대 별로 조를 짜서 모이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10시에 A조, 12시에 B조, 그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면 방이 좁아도 모일 수 있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하면 되는데, 그러면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이 바꿔치기를 하는 과정인데, 항상 그것을 염두고 두고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어디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지, 즉 말씀이지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바꿔치기를 하는 마음이 늘 유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 혼자 오시고, 혼자 가신 예수님 !! 우리 인간은 기본적으로 "더불어 산다" 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서로 이용하기 위해서 잠시동안 마음이 맞는 척을 하면서 같이 살아갈 수는 있겠지만, 하지만 절대로 더불어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혼자 오셨는데, 돌아가실 때도 혼자 가셨고 말이다. 즉 "이것이 너희들의 모습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너희들끼리 서로 사랑하라" 라고 하시는 말씀을 주신 것은, 그것은 그냥 사랑이 아니라 무엇을 경유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요한복음 13장에서 "나의 사랑이 있으면 너희들은 내 제자이다" 라고 하는, 그것이 바로 그 사랑인데 말이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주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랑의 공동체 !! 하지만 그것은 우연히 주어지는 사랑이 아니라 반드시 무엇인가를 경유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경유해서,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라고 하는 마음을 가진다고 하면, 그것이 바로 '사랑의 공동체' 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복음이 마음에 들지 않고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이미 자기 사랑이 독자적으로 있는 것이기에, 더불어 사는 것도 깨지고, 그렇게 더불어 사는 것이 깨지면, 그런 사람에게 "더불어 사세요" 라고 하면 화를 벌컥 낸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이 정도로도 힘이 드는데, 더 이상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 나는 그런 효도는 원하지 않아 ♪ 어제 오후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즉 "부모를 공경하라" 라고 하면 우리는 뭐라고 한다는 것인가? 대번에 "우리가 지금 공경을 잘하고 있는데, 무슨 그런 부담을 주는 말씀을 하십니까?"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사를 가서 옆집에 살 수도 없고 말이다. 물론 그렇게 하면 오히려 부모들이 싫어하는데, 자기 돈이 더 든다고 말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대중가요가 있는데, 즉 "사랑이 흔하다고 하지만 이런 사랑은 원하지 않아요 ♬" 라고 말이다(ㅋㅋ). 부모의 입장에서는 옆에 붙어서 같이 살아가는 효도는 싫은데, 그냥 적당히 떨어져서 있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더불어 사는 것이 귀찮으니 말이다. 그러니 부모의 경우에는 "효도가 흔하다고 하지만, 그런 효도는 원하지 않는다. 효도를 하려고 하면 내가 원하는 효도를 해달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인간은 목숨만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목숨이 붙어있는 값을 하는데, 즉 자기 위주로 말이다. 그러니 그런 목숨은 오래 붙어있으면 안 되는데, 그래서 주님은 바꿔치기를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바꿔치기가 된 목숨으로 새로 살아가야 하는데, 기존의 목숨으로 천국에 가게 되면 천국이 완전히 개판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천국에 넣어주기는 주시는데, 다른 목숨으로 바꿔치기를 해서, 주님은 그 목숨으로 영생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조금은 복잡한 작업이 필요한데, 우리는 그냥 "저만 살려주시면 참 고맙겠습니다" 라고 하지만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99페이지를 살펴보자. ** 역설적으로 혼자서 튀려고 협회에 가입하고 활동을 합니다. 촛불집회를 한다든지 시위를 합니다. 광우병 소를 수입하지 말라고 집단으로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내가 여기 살아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입니다.
◈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 여기에 왜 광우병 이야기를 했는고 하니, 광우병에 걸린 소를 먹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죄를 지으려고 해서 지를 짓는 것이 아니라, 그냥 편하게 살려고 하면 그게 죄가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편하게 산다는 것은 자기 몸에 맞다는 것이고, 그리고 자기 몸은 자동적으로 자기만을 챙기게 된다는 말이다. 즉 광우병에 걸린 소를 수입해서 자기 자식이 죽으면 안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지금은 무엇까지도 걱정하는고 하니, 중국에서 버리 플라스틱 조각이, 그것이 세밀하게 분해가 되어서 플랑크톤이 먹고, 그 플랑크톤을 물고기가 먹고, 그 물고기를 제주도에서 잡아서 우리의 밥상에 올라가게 되면, 그 밥상에는 중국에서 내다버린 플라스틱 조각이 들어있는 것인데, 지금은 그런 것까지도 걱정한다는 것이다. 자기 혼자서 운동해서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요즘은 황사 때문에 바깥에서는 운동하는 것도 힘이 드는데, 그러니 이제는 황사가 문제가 아니라 중국에서 버리는 플라스틱도 걱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의사가 주장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경찰이나 군대가 동원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요즘 종편방송만 틀면 이런 건강에 관한 좌담회가 줄줄이 나오는데, 그것은 곧 "나는 나에게 관심이 있다" 라고 하는 표현인데, 꼭 칼을 들고 사람을 죽이고 해야 죄가 아니고, 그렇게 자기밖에 모르면서 편하게 살아가면, 그게 바로 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란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우리는 다음과 같은 잠언서의 말씀을 다 아는 것이라고 여기는데, 그래서 성경 말씀을 잔소리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잠 23:20) 술을 즐겨하는 자와 고기를 탐하는 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 시한폭탄을 해체하라 !! 성경의 모든 말씀은 암호인데, 어제 낮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창조할 때부터 시한폭탄이 장착되어있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 시한폭탄을 해체해야 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해체하려고 하다가 시한폭탄이 시한폭탄으로 더 드러남으로 말미암아서 있는 생명나무까지도 먹지 못하게 만든 사건이 바로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 시한폭탄을 해체하려고 하면, 오직 설치한 분에 의해서만 그 시한폭탄의 해체가 가능한데 말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지혜의 말씀은 전부가 암호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암호를 풀어야만 비로소 시한폭탄이 제거가 된다는 것이다. 암호를 풀어야 말이다. 주님은 그냥 말씀을 던지시는데, 즉 "나를 믿는 자는 죽음으로부터, 저주로부터, 마귀로부터, 율법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뭔가 풀렸다는 것인데, 장착된 시한폭탄이 말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라고 하니, 우리는 "그러면 예수님을 믿어주면 되잖아" 라고 나오는데, 하지만 그런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가 살려고 하는 의도이기 때문에 해당사항이 없다는 말이다.
◈ '하나님의 의'가 언약을 통해서 내장되면 !! 그러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고 하니까, '하나님의 의'가 언약을 통해서 내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까 노아방주 이야기를 했는데, 거기에 사람만 달랑 타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짐승들이 들어가는데, 그게 두 가지 종류로 구분되어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말이다.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으로 말이다. 그것이 하나의 세트로서 갖추어져서 짝을 이룰 때, 그게 암호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희생이 되는가? 정결한 쪽이 희생이 되게 되면,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절이 생기고, 농사를 지을 만한, 그런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는 말이다. 악인이나 선인이나 관계없이 말이다. 그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희생이라고 하는 암호의 바탕 위에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 암호를 풀지 않으면 우리 자신에게 평생을 얽매이다가 죽고 만다는 것이다.
◈ 너희 몸은 술과 고기를 좋아한다 !! 그래서 여기서 23장에서 "술을 탐하고 고기를 즐겨 먹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 라고 하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너희 자신들의 몸은 그쪽으로 쏠리게 되어있다" 라는 것이다. 즉 우리의 몸과 신체는 자연스럽게 술과 고기를 좋아하는 자들을 싫어하지 않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런 몸을 부모에게서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술을 10년이나 끊었다고 해도 속 터지는 일이 벌어지면 곧장 땡기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담배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자아가 우선이 아니라 몸이 우선이기 때문에, 그것을 감정이라고 하는데, 즉 "감정이 이성보다 앞선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복운전을 하는데, 순간적으로 화가 나니 말이다. 여자의 경우에 참 안타까운 것이 무엇인고 하니, 화가 난다고 해서 남자를 때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힘이 약하니까 말이다. 물론 때리는 여자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극소수이고 말이다. 그런 면에서 남자는 참 편리한데, 화가 나면 참지 않고 때리면 되니 말이다. 나중에 사과하면 그만인데, 그런 사과를 예상하고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이다.
◈ 조종이 불가능한 내 몸뚱아리 !! 갑자기 분위기가 썰렁하게 되었는데(ㅋㅋ),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의 몸은 자기가 자기 몸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런 자아의 사랑이 자기 몸을 인간으로 만들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전혀 자기도 감당하지 못할 마그마가 튀어나오는, 그런 활화산과도 같은 것이 우리의 몸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어떻게 조종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것을 겨냥해서 이런 말씀을 주셨는데, 즉 "술과 고기를 즐겨하지 마라" 라고 하는 말씀을 듣는 순간 사람들은 화를 낸다는 것이다. "그러면 채식주의자가 되라는 말인가?" 라고 하면서 괜히 화가 난다는 것이다. "옳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옳아요" 라고 하는 게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고기를 끊고 채식주의자가 되어서 숯불갈비집 앞으로 지나가 보라는 것이다. 냄새가 얼마나 죽이는지 모르는데, 평소에 잘 먹지도 않던 곱창도 먹고 싶고, 그렇게 괜히 땡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몸은 우리가 감당할 수가 없는데, 주님의 말씀이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너희 몸을 왜 너희가 감당하려고 하는가? 내가 바꿔치기를 하기 위해서 불도저로 밀어버렸다. 그런데 너희는 왜 자꾸만 옛날 생각을 하는가? 꿈에서 깨라. 그러니 이제는 옛날처럼 '나는 코스모스야. 나는 백합이야' 라고 하면 안 된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코스모스는 이영애나 어울리는 것이지, 우리에게는 전혀 맞지가 않는데,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해서 뭐라고 우기는가? 자기가 하늘하늘한 코스모스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이미 늘어진 뱃살과 축 처져버린 엉덩이 살로 다 들통이 났는데도 말이다(ㅋㅋ).
◈ 몸배바지와 미녀 !! '대한뉘우스' 라는 60년대의 기록영화를 보게 되면, 거기에 재미있는 것들이 참 많이 있는데 말이다. 그때 아줌마들이 소위 '몸배' 라고 하는 것을 입었는데, 물론 요즘도 입지 말이다. 그렇게 되니 늘씬한 미인들이 없다는 것이다. 그 당시는 "새벽종이 울렸네" 라고 하면서 새마을 운동을 한다고 난리였던 시절이었는데 말이다. 전부가 다 머리에 수건을 쓰고 밑에는 몸배를 입고 그렇게 일을 했는데, 얼마나 평등한 사회였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밤마다 탤런트나 가수를 불러놓고 양주를 퍼마시는 인간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 몸배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몸매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리고 일을 하기가 참으로 편하다는 것이다. 그게 만약에 우리의 모습이라고 하면, 여자들이 예쁜 것은 무엇인고 하니, 아까 이야기한 '과잉욕망' 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그 어떤 옷을 입어도 괜찮은데, 마음껏 욕망이 허용되는 사회이니 말이다. 그것은 돈 문제가 아니라 자존심의 문제라는 것이다. ◈ 들뢰즈 - '뛰쳐나와서 소수자가 되어라' !!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서 '들뢰즈' 라는 철학자는 뭐라고 했는고 하니, "자본주의 사회는 감당이 되지 않는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욕망을 풀어놓았기 때문에, 이성으로 욕망을 가두어둘 수 없다는 것이다. 욕망은 이성보다 더 세니 말이다. 그러니 이 사회는 갈 때가지 가보는 사회인데, 그러니 강남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들뢰즈가 주장한 것이 바로 '탈주' 라는 것인데,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뛰쳐나와서 소수자가 되어라" 라는 것이다. 즉 "나는 너와 놀지 않을 거야. 나는 나만의 폐쇄적인 세계를 만들 거야"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 세계에 들어가면 그만 욕망에 휘말려서 자기의 정체성과 그 모든 것을 다 날려보내야 하니 말이다. 욕망이 있는 곳에는, 자기 욕망을 버리고 남의 욕망까지 어떻게 해주어야 돈을 버는데, 그러니 차라리 적게 먹고 적게 버는 것이 나은데, 거기에 뛰어들었다가는 같이 망하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해결책이 무엇인고 하니, "너만의 세계를 즐겨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일본에서 시행하고 있는데, 20대와 30대들이 말이다. 그들은 취직을 하지 않는데, 아니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리가 없어서 말이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어서 해외로 배낭여행을 떠난다는 것이다. 그러면 기본적인 생활비는 어떻게 해결하는고 하니, 그냥 부모님 집에 얹혀서 산다는 말이다. 이것이 이미 한국까지 넘어왔는데, 취직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60대와 70대까지 저임금으로 취직을 하려고 하니 20대는 자리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부모들이 돈을 벌면, 거기에 그냥 얹혀서 살려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결혼도 하지 않고 말이다. 아르바이트는 자기 용돈이나 벌려고 하는 것이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들뢰즈가 말하는 '소수자' 라는 것이고, 또한 '탈주' 라는 것인데, 쉽게 말해서 탈출이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존의 세계를 부정하고 자기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소수자들끼리의 모임,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들뢰즈의 철학은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기껏 현대 자본주의를 비판해놓고는, 그 대안으로 내놓는 것이 이런 것인데, 그러니 사실은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상 자본주의 자체는 없는데, 이런 욕망의 유령들만이 마구 떠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둬둘 울타리가 없다는 말이다.
◈ 그냥 갈 때까지 가보자 !! 그러니 요한계시록의 말씀처럼, 그냥 갈 때까지 가보는 것인데, 멸망의 때까지 말이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 나오고 훌륭한 지도자가 나와도 어떻게 이것이 해결이 안 되는데, 우리 인간은 욕망을 한 번 맛본 이상 그것을 회수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계 17:11)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저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 자본주의 위험성 - '먹고사는 것보다 내 자유가 더 좋다' !! 가출한 자식을 찾아서 다시 집으로 데리고 와서 같이 산다는 것은 정말로 힘드는 일인데, 왜냐하면 그 아이는 이미 바깥 세상을 구경하고 보았기에 말이다. 그래서 집에 오면 우울증에 걸리고, 나중에는 미쳐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집구석에서는 도저히 살지 못하겠다" 라고 나올 수밖에는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왜 위험한고 하니,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할 수 있는데, "먹고사는 것보다 내 자유가 더 좋다" 라는 것이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싶은데, 즉 먹고사는 것은 나중의 문제라는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즉 자기 욕망이 저지르고 싶은 것을 마음껏 저지르면, 그러면 먹고사는 것은 아버지가 책임지고 엄마가 책임져주면 된다는 것이다.
◈ 기준이 없는 기준 !! 그렇게 일단 저지르고 보겠다고 하는 젊은이들의 풍조를 도대체 누가 말릴 수 있느냐는 말이다. 아무리 비싸도 일단 자기가 입고 싶은 것을 입고, 또한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기준이 없는 기준' 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과거의 기성세대는 나름대로 기준이 있었는데,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있었고 말이다. 그래도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것이 없는데,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이전부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저 아이는 스마트폰이 있고, 나는 없다" 라는 것인데, 국가와 민족이 아니고 말이다. 송일국이의 세 쌍둥이는 발레학원에 보내서 어릴 때부터 저렇게 예쁘게 키우는데, 그런데 자기 아이는 언제 그런 좋은 발레학원에 보내느냐는 것이다. 바로 그 문제인데, TV에 그런 것들이 자꾸만 나오니까, 요즘 젊은 엄마들이 난리라는 것이다. 즉 아이가 그만 자기 욕망이 화신이 되고 말았는데, 자기 욕망을 아이에게 투사를 해서 던진다는 말이다. 그러면 아이가 잘 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자기 욕망이 달성되는 것이란 말이다. 그래서 "우리 아이도 저 발레학원에 보내서 멋있고 예쁘게 키우고 싶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이 공짜로 되는 것이 아닌데,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 저는 말씀 앞에서 죄인입니다 !! 바로 이것을 두고 잠언서에는 "고기를 탐내고 술을 즐겨하는 자를 멀리하라" 라고, 즉 "육신대로 살면 망한다" 라는 것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암호인데, 그런데 이렇게 우리의 육신을 감당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그래서 지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해서 와야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술을 끊고, 고기를 끊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저는 말씀 앞에서 죄인입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왜 바꿔치기를 하시는지 알았지 싶은데, 그러니 우리는 주님이 그렇게 바꿔치기를 하시는 취지를 살려드리자는 것이다. 즉 "나 같은 인간을 바꿔주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바꿔치기를 하기 전에 자기가 자기를 먼저 손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속내를 말씀에 비추어서 드러내면 되는데, 즉 "술을 좋아하고 고기를 좋아하고, 그것이 바로 나구나" 라고 인정을 해버리면 된다는 말이다. 바로 그렇게 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우리의 그런 자기 사랑이 주님의 질투심을 유발시킨 원인이 된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이런 못난 존재는 내가 사랑한다는 것이 참으로 주님 앞에 욕을 먹이는 것이다" 라고, 그렇게 수긍하면 된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닌데, 그것은 전혀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불도저가 와서 지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저쪽도 그러하네 !! 이제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우리가 잠언서의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어리석은 자는 이런 자이다" 라고 하니, "그렇지. 어리석은 자가 되면 안 되지" 라고 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어리석은 자로 만들어버리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혜로운 자는 오직 예수님밖에 없는데, 그분이 오셔서 우리를 바꿔치기를 하신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더 깊숙이 내려가는데, 우리 자신의 육신에 대해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지독하게 자기밖에 모르는지, 그것을 까발려주시는 경우들을 주님께서는 자꾸만 만들어내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한 마음인데, 즉 "아니,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저쪽도 역시 그러하네" 라고 말이다. 그런 자들끼리는 이미 공동체이고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말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님의 소관이지 우리의 소관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 마음을 합쳐서 한 마음이 되고 또 하나의 교회가 됩시다" 라고 한다는 것은,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경우는 없는데, 주님만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교제 100페이지를 보자. ** 이것은 성경말씀 같지가 않고, 어떻게 보면 병원의사의 충고와도 같은 느낌이 들지요. '너무 드셨군요. 절제하셔야지, 그렇지 않으면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하는 말과도 같다는 겁니다. (잠 25:16) 너는 꿀을 만나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하므로 토할까 두려우니라 여기에 보면 "너는 꿀을 만나거든 족하리만큼 먹어라. 과식하므로 토할까 두려우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일종의 비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쉽게 말해서 "적당히 먹어라" 라는 것인데, 하지만 우리 몸은 절대로 '적당히' 라는 것이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외부의 압력으로 인해서 망가지게 될 때, 우리 몸 위를 그야말로 무지막지하게 불도저가 지나갈 때, 우리는 억지로 적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억지로 적당하게 말이다. 즉 "더 먹고 싶은데, 주님이 먹지 못하게 하시는 구나" 라고 말이다. 자기가 정한 '적당히' 라는 것은 언제나 만족이 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내가 더 먹을 수 있는데, 인간성이 좋아서 참는다" 라고 하면, 그것은 만족함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직 더 먹을 수 있는데" 라는 것이 남아있는 이상, 아까 자본주의는 뭐라고 했는고 하니, '과잉욕망' 이라고 했는데, 그러니 그 과잉욕망은 우리를 또 다시 흔들어댄다는 것이다.
◈ 흔들리는 일상, 그러나 !! 우리의 일상이 흔들리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과잉욕망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 낮은 곳으로 가야하는데, 그만 자꾸만 높은 곳을 향해서 가다보니, 우리는 우리 자리를 그만 떠나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쁨도 없고, 행복도 없고, 그만 흔들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안정된 자리로 가야하는데, 고맙게도 주님의 희생으로 인한 바꿔치기를 하는 과정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것 저런 것 다 바꿔주세요" 라고 하면서 모두 다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고물 냉장고도 바꾸고, 식기세척기도 바꾸고, 목사도 바꾸고, 교회도 바꾸고 말이다. 바로 그러한 주님의 바꿔치기에 감사하는 것이 바로 성도의 예수님을 증거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을 따로 챙기면서도 주님의 사랑을 받으려고, 그렇게 헛된 짓들을 한 줄로 압니다. 하지만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후벼파는 것이고, 침투하는 것이고, 짓눌러서 찢고 해체하는 것이 사랑인 줄 압니다. 그것만이 주님의 질투하시는 사랑임을 언제나 잊지 말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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