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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이한례
가락-요한복음6장15(기적과 표적)
150305a-이 근호 목사
6장 15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억지로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중보자라 하는데, 또는 매개라 하는데 매개란 말은 잘 안 쓰고 중보자를 많이 쓰는데, 그 중보자라 하면 예수님만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인간 세계에 던져주는 것은 전부 다 사실은 중보자가 아니고 매개라 하는 게 좋아요. 매개. 접착제 같은 거. 딱 들러붙게 하는 것, 자기 사람을 이렇게 딱 붙어서 잡아당길 수 있는 그런 걸 매개라 하는 거예요. 중간 과정인데 그 매개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기 14절에 보면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그 다음에 뭐라고 돼 있죠? 표적이죠. 이게 바로 매개입니다. 표적인데.
표적이라는 것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표적은 명료합니다. 표적은 굉장히 명료해요. 또렷합니다. 또렷한데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수수께끼에요. 명료한데 이게 수수께끼가 되는 겁니다. 삼손이 사자를 치고 잡고 그 속에 있는 꿀을 끄집어냈잖아요. 얼마나 이게 구체적입니까? 명료하고 분명하죠. 그런데 그걸 수수께끼 낼 때 알아먹을 사람 아무도 없어요. 또렷하기 때문에 못 알아먹는 겁니다. 또렷하기 때문에!
여기 성경에 글자가 있는데 성경 글자를 어느 정도 떼면 글자가 보이잖아요. 이걸 만약에 코앞에 두게 되면 이건 글자가 아니고 종이에 잉크 번진 거예요. 그런데 약간 떼면 이미지가 등장하잖아요.
인간 세계가 자기가 익히 파악이 되고 확인이 되는 그 수준 내에서 자기 세계가 구성되는데 거기에다 주님의 매개, 매개란 말 아시겠죠? 주님의 접착제, 접착제가 더 낫네. 딱 붙여서 잡아당기는 접착제, 인간과 하나님을 엮는 접착제를 그들에게 주게 되면 인간들은 그것을 수수께끼로 여기지 않고 늘 평소에 자기 세계에 통용되는 그런 일부 인 줄 알고 그걸 잡아당겨요.
예수님이 떡을 주니까 임금 삼으려 해요. 임금이란 어디 있느냐 하면 원래 인간 세계에서 누구나 명료하게 아는 거예요. 임금? 백성에 대해서 모든 생활에 대해서 책임지는 지도자, 딱 나오잖아요. 책임져 주는. 그래서 만약에 백성에 대해서 백성의 생명과 재산과 그걸 보호하지 못하고 외국으로부터 영토를 지키지 못하면 그 임금은 교체대상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임금이 모든 걸 잘해 줄 때는 백성한테 인기가 높은 존경받는 임금이 되겠죠.
그렇게 되게 되면 뭐가 날라 갑니까? 표적이 날라 가버리죠. 수수께끼가 날라 가버리죠. 그러면 익히 내가 아는 임금님을 우리가 붙잡았다. 이렇게 돼 버리면 매개가 날라 가버리면 뭐가 날라 가겠어요? 숨어있는 하나님의 관계가 날라 가버리죠. 자기만 손해, 인간들만 손해입니다. 납득한다는 게 이만큼 위험한 겁니다.
매개가 돼야 되는데 인간들 세계에서 생각하는 그 하나님, 그 천국, 그 메시야, 이런 것을 익히 알고 있으니까 아는 것에다 ‘딱 때맞춰서 오셨네.‘ 이렇게 돼 버리면 매개가 날라 가버리고 익히 자기들이 아는 세계에 그냥 강제로 메시야를 자기 사람으로 강제 편입시킨 게 돼요. 그러면 매개가 아니고 완전히 뚝 떨어지겠죠.
이것을 이렇게 표현 됩니다. 호박 같은 걸 생각해요. 호박이라든지, 아니면 찐빵, 이것을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계속해서 어려운 말을 써서 죄송합니다마는 설명하다 보면 별로 어렵지 않은데, 구형, 원형체, 봉합선 없는 원형체라 하는데, 봉합선이 뭐냐 하면 재봉할 때 박음질하잖아요. 박음질을 왜 하느냐 하면 요 천하고 요 천하고 이렇게 이어줘야 바지가 되고 옷이 되고 셔츠가 된다 이 말이죠. 그게 봉합선이다 말이죠. 바지 같은 걸 수선할 때는 봉합선 따라서 실을 떼서 다시 미싱 가지고 박으면 또 옷이 되겠죠.
봉합선이 없는 호박이라고 봅시다. 또 찐빵이라고 보면 그걸 원형체, 구형 체, 구, 공 같은 구라고 본다면 한번 인간 세계에서 함몰이 돼 버리면 인간 세계에서는 봉합선이 없기 때문에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죠. 이걸 터치고 뛰어나갈 그게 없다니까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어떤 표적을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그걸 기적으로 이해해버려요. 표적은 매개라 했습니다. 제가 강의할 때 계속 강조합니다. 처음 할 때는 왜 그런 말 쓰느냐 하지만 자꾸 하다보면 아! 이 말 써야 될 이유가 나올 거예요. 매개인데 인간들이 이걸 뭐로 본다? 기적으로 보는 거예요. 기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이 세계, 인간이 사는 세계를 보다 잘 살게 만드는 그것이 역할이라고 보는 거예요.
오병이어는 뭐냐 하면 배고프다 이 말이죠. 우리가 노동하지 않더라도 먹을 걸 계속 제공해준다면 우리가 평소에 원했던 하나님이다 말이죠. 이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광야에서 만나를 계속 제공했잖아요. 이게 바로 이미 그 당시 사람들, 만나를 먹었던 그 당시 사람과 후대 사람들의 인식의 차이가 이제 드러나는데 그 당시 사람들 만나는 그걸 원했겠습니까? 아니면 만나 없는 애굽 생활을 원했겠습니까? 어느 것이 더 몸에 맞아요? 자꾸 틈만 나면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거예요. 무려 열 번이나 하죠. ‘애굽으로 돌아가자. 애굽으로 돌아가자. 거기는 부추도 있고 수박도 있었고 정력에 좋은 게 다 있었는데 우리는 만나면 먹어서 맨날, 맨날 만나만 먹어서 정력도 쇠해서 이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말이죠. 이런 고생 하려고 불러냈나. 모세야.‘ 하고 달려들었잖아요.
그런데 그 당시의 사람들은 그게 못 견디는 악한 상황이지만 후대 사람들이 보기에는 하늘에서 만나 온다는 걸 뭐로 보이느냐 하면 하늘에서 음식 내려오는 걸로 봐서 할렐루야 해요. 이걸 기적으로 본 거예요. 왜 우리에게는 그런 기적을 베풀지 않느냐 이렇게 보는 겁니다.
만나가 어디서 어디까지 오느냐 하면 광야 들어서서 시작해서 언제 그치느냐 하면 약속의 땅에 갈 때 만나가 그쳐버려요.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 그게 매개기 때문에, 중개, 중간 매체기 때문에. 어떤 중간 매체냐 하면 애굽에 있을 때는 먹던 부추와 이런 빵이라든지 꿀이라는 것은 자기 육신을 살리기 위해서 먹는 떡이라면 약속의 땅에서 농사져서 먹는 떡이나 빵이나 꿀이라 하는 것은 이건 약속 덩어리입니다. 애굽은 먹어도 죽었지만 약속의 땅에서 나오는 양식은 먹으면 영생을 얻게 돼 있어요.
그 차이를 이어주는 매개가 뭐냐 하면 만나라는 겁니다. 만나! 그래서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를 하신 것은 너희들 세계, 봉합선 없는 구형 체 안에서는 그 안은 폐쇄 공간이죠. 인간은 그냥 인간들 하는 대로 살아야 돼요. 아침 먹고 점심 먹고 이게 사는 거야. 뭐 별 다른 인생 없어. 그게 폐쇄된 봉합선 없는 갇혀 있는 세계거든요. 그 세계에서 주님께서 오병이어를 주니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줬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원하는 걸 줬기 때문에 ‘당신은 임금으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다.’ 하고 그들이 합격, 하고 합격을 한 거예요. 심사를 누가 하느냐 하면 인간들이 심사하고 예수님은 임금 중에 후보가 돼 버린 거죠. 어디 K 팝 노래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제 점수는요? 이래서. 우리 임금 되려면 백성들의 선호도를 봐야 된다는 거죠.
그런데 정말 예수님께서 줬던 그 떡은 뭐를 경유했느냐 하면 중보자 되신 예수님을 경유해서 주신 떡이잖아요. 이것은 장차 뭐냐 하면 예수의 살과 피를 의미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의 살과 피를 먹게 되면 이 사람들은 식인종이 돼 버려요. 그것도 소고기를 생고기로 주는 예수님을 육회로 하는 게 아니잖아요. 육회나 사슴 피 빨대로 따라다니면서 사슴 피 먹는 게 아니잖아요. 피 빨고 육회 주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왜 주님께서는 아예 처음부터 살을 찢어서 육회를 주던지 피를 좀 뽑아서 5000명 먹이지 않고 왜 떡을 주느냐?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이 가장 명료하게 줘요. 생명의 양식을 주는데 양식이라는 표현방법은 그들이 쓰던 봉합선 없는 폐쇄공간에서 인간세계서 하던 평소에 밥 먹잖아요. 그 떡을 주되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표적이 돼야 되는 거예요.
기적은 인간들이 원했고 기대한 겁니다. 이걸 가지고 인간들은 뭘 느끼느냐 하면 결핍을 느끼게 돼 있어요. 이 땅에서. 인간은 항상 결핍을 갖게 돼 있는데 그 결핍은 인간의 욕망에서 나옵니다. 인간의 욕망을 마저 채우는 욕망은 결핍을 찾아다녀요. 그래서 ‘아이구, 이만하면 욕망 채웠잖아.’ 욕망은 채우라고 있는 게 아니고 결핍을 생산하라고 욕망이 있는 거예요. 배부르면 그 다음에 골프 치고 싶고 골프 치면 그 다음에 요트 타고 싶고 요트 타고 나면 넓은 큰 아파트 사고 싶고, ‘나’라는 욕망은요, 정신 분석학에서 주체라 하는 것은 욕망이 만들어내지, 내가 만드는 게 아니거든요. 욕망이 타인을 경유하게 되면 그게 나의 주체가 돼요. ‘저거 내가 가져야 돼. 이렇게 돼요. 주체라 하는 것은 타인의 욕망을 거치지 아니하면 내가 규정되지 않아요. 항상 뭔가 자기가 되고 싶은 거, 욕망이 밑천이 돼서, 재료가 돼서, 욕망이 레시피가 돼서 만들어 낸 게 뭐냐 하면 주체가 되는 겁니다.
그 내 안에는 뜯어보면 이거는 어릴 때 내 옆 짝이 원했던 욕망인 내 주체고, 이거는 12살 때 내가 원했던 것이고, 이거는 36살 때 우리 아버지가 이렇게 하면 좋겠다고 했던 것이고, 이런 것들의 복합체가 인간입니다. 뜯어보면 다 찢어져요. 봉합선이 너무 많아요. 다 찢어져요. 결핍을 가지고 이 결핍이 모자라니까 결핍 부분을 누가 채우느냐 하면 자기가 믿는 하나님이 요 결핍을 마저 채워주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기초는 누가 닦고? 그처럼 본인의 요구가 있고 그 윗부분에 비어있는 그 결핍부분은 모자라는 부분을 하나님이 채워주니까 요걸 가지고 성경 구약에서는 우상 숭배라고 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신을 그냥 얹는 거예요. 자기를 위하여. 오늘 내 생일인데 하나님 뭐 해줄 거예요? 이런 거. 오늘 내 생일이 밑에 깔려 있고 생일날 갑자기 좋은 일이 벌어지면 주께서 생일 축하해주시는구나. 좋은 일 따로 있어요? 하늘에서 눈이 오는 그런 거. ‘야, 생일이니까 눈이 오네.’ 세상을 왜 그렇게 봐야 되는 이유가 그렇게 볼 때 그게 주체가 또 다시 확인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이 나와 무관하다면 우리는 살 수가 없어요. 의미를 놓치니까. 주체는 의미를 먹고 사는데 내가 여기 있는데 아무도 관심 없다 한다면 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이 안 돼요.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그런데 뭔가 내가 움직이니까 뭔가 생기니까 ‘아! 세상은 내 편이구나.’ 비로소 주체가 의미가 있을 때 사람은 그 세상 속에서 자기 주체를 계속 살리려는 욕구가 작용합니다.
그러니 모든 인간이 결핍을 통해서 그 미진한 부분에 하나님의 기적을 채워주게 되면 그때부터 뭐냐 하면 하나님과 본인이 서로 아는 사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 잘 통해. 우리 소통 잘해. 서로 잘 알고 있는 사이에요.’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께서 지금 뭡니까? 떠나려고 한다 이 말이죠. 와! 우리는 내가 이만큼 잘해주면 하나님도 이만큼 내가 잘해준다는데 하나님도 감격해서 ‘남들은 나를 안 알아주는데 너는 이렇게 알아주는구나. 아이구, 나는 너를 볼 때마다 고마움이 절로 일어난다. 그래 뭘 도와줄꼬? 뭘 도와줄꼬? 15년 간 더 생명을 연장해주지.’ 뭐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주께서는 지금 떠나고자 한다 이 말이죠. 떠나고자 하거든요. 이게 무슨 기능이냐 하면 바로 만나 기능 이예요. 만나, 옛날에 끝났다고 생각하죠? 주님은 이 세상을 광야로 봐버려요. 왜, 예수님이 오게 되면 구약 성경을 새로 다시 시작하게 돼요. 창세기부터 레위기 출애굽기 예수님부터 새로 시작해요.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애는 신구약이 응축된 거예요.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신구약을 해석하려면 반드시 예수님의 공생애를 경유해야 됩니다.
예를 들면 이삭이 복줄 때 야곱이 별미를 갖다 바쳤잖아요. 별미를 갖다 바친다 할 때는, 그래서 오늘날 우리도 목사님께 별미 바치면 복 받는다 이렇게 나오면 안 되고 반드시 예수님에게 경유를 해야 돼요. 예수님을 경유를 해버리면 예수님 자체가 별미에요. 예수님 자체가 복이 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우리가 신에게 바쳐서 되돌리는 방법은 성경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뭘 받고 복 주는 그런 법칙은 하늘나라에 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그들이 애굽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거지꼴로 들어갔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조금도 자기 게 아니에요. 그래서 십일조가 자기 게 아니에요. 나머지 9/10가 자기 게 아닙니다. 이거는 ‘내 게 아닌 걸 도로 드립니다.‘ 할 때 그렇다면 ’너는 이 땅에 살 자격이 있다.‘ 해서 복을 주시는 겁니다. 복을 주시는 거예요. ’1/10은 드리고 9/10는 내겁니다.‘ 이런 거래는 없어요. 그거는 시장에나 거래하라고 하세요. 이런 거래는 없어요. 교회나 그런 거래는 없어요.
만나라 할 때 지금 만나가 끊어진 상태입니다. 만나는 과거에 있었어요. 그런데 현재 사람들은 만나는 없고 이거 봉합선 없는 구형 체, 이 폐쇄공간에서는 자기가 양식, 양식에서나 육에서 나온 거예요. 육에는 배고픔, 결핍을 느끼고 결핍해서 양식을 줬으면 좋겠다. 하고 양식 없으니까 결핍을 느끼잖아요. 결핍을 느끼는 부분을 신이라든지, 하나님, 예수님으로 채워주게 되면 그들은 그걸로 다시 자기 폐쇄공간에 자족하죠. 만족하죠. ‘역시 이 세상은 살만한 세상이야.’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현실 따로 없어요. 이게 현실 이예요. ‘이게 주께서 원하는 현실이야.’ 그렇게 돼 버리면 주님은 현실 바깥에서 왔는데? 문제가 크잖아요.
아브라함이 복을 받아서 양이 늘어났다. 소가 늘어났다. 그런데 하박국에 보면 어떻게 되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점점 더 이게 지금 신약 골로새서 보면 “너는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 이미 죽었으니까 하늘의 것을 생각하라” 빌립보서에 보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뭐 미국 대사가 당해도 신경 쓰지 마세요. 다 땅의 일이니까. 주님만 칼에 안 찔리면 돼요. 왜 사람을 죽입니까? 궁극적 문제는 땅이 현실의 전부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게 테러가 일어나고 그런 겁니다. 모든 범죄는 땅의 것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골로새서 3장에서는 그걸 우상, 탐심은 우상숭배라 했습니다. 욕심내는 게 탐심이라 하는 건 우리의 상식이고, 땅의 것을 생각하는 걸 탐심이라 하는 것은, 우상숭배라 하는 것은 이건 성경 이야기에요.
죽은 자가 왜 떠나야 될 자리에 왜 그렇게 연연하느냐 말이죠. 미련 두고 애착을 느끼느냐 말이죠. 그렇게 애착 느끼면 ‘십자가는 그냥 폼으로 죽었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십자가에 왜 죽었는데?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세계에 대해서 왜 그렇게 미련을 갖고 있느냐, 너도 그럼 한패냐? 이렇게 돼요. 주님은 떠밀렸잖아요? 떠밀린 분과 함께 동승해야지, 동행해야지. 떠미는 쪽 거기다 아부를 하고 고개를 숙이고 왜 그렇게 사느냐 말이죠. “이미 너희는 죽었고 너희 생명은 하늘에 있으니까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
이러한 변화는 이 사람들이 예수님 당시는 몰라요. 모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것을 예수님의 공생애 안에 이 변화를 담아버립니다. 주님께서 단어개념을 일방적으로 이끄십니다. 떡 줬는데 그게 만나가 되고 만나가 뭐가 되냐, 요한복음 6장 끝에 보면 예수의 살과 피가 되는 겁니다. 처음에는 오병이어, 어린애 도시락에다 중간에 보면 만나가 나오죠. 31절부터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가 나와요. 생명의 떡은 하늘에서 온다. 만나가 나오고, 그 다음에 52절, 53절에 보면 “내 살과 내 피를 먹지 아니하면 너에게 생명이 없다”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순서가.
개념이 떡에서 만나, 예수님 살과 피, 이렇게 이것이 매개, 중보자를 통해서 이렇게 연결돼야 되는데 사람들은 떡이라는 것은 자기가 명료하게 아니까 떡은 알겠는데, 만나라 하는 것은 이게 모호한 거예요. 왜냐 하면 만나라 하는 것은 옛날에 자기 조상들에게 내렸지, 현재는 만나가 안 내리니까 이게 모호한데, 더 나아가서 살과 피를 먹으라 하니까 이건 더 어려운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주의 말씀을 표적으로, 매개체로 들어가야 되는데 제자리에 앉아서 예수님 말씀을 자기들이 아는 상식으로 억지로 이렇게 같은 의미로 쓰려고 하니까 이건 점점 더 수수께끼가 늘어나네요. 눈에 보인다고 해서 보는 것은 믿는 것이고 만지는 것은 진리란 말이 있어요. 보기만 하면 인간은 믿게 돼 있고 만지면 이거는 군말 없이 이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그만큼 감각에 의해서 진리를 구상한다는 그런 철학적 명제가 있어요. 보고 만지고 그보다 더 확실한 게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본인들로 하여금 더 장님 되게 만들어버렸다니까요. 보이니까. 차라리 주님이 안 보이고 요단강에 예수님이 오시지도 않고 구유에 태어나지도 않는 상태에서는 그들의 메시야는 너무나 정교하게 말씀덩어리고 메시야가 오실 때 장소부터 그 분위기 상황 이런 게 전부 다 다 같이 공유했습니다. 그때는 교육으로 되니까.
오시게 되면 감람산에 두 발이 서실 것이고, 스가랴의 말씀대로, 성전을 만들 것인데 그 성전은 제 3성전을 만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마곡과 곡이란 데서 침범을 하게 될 것이고 그리고 다니엘에 보면 1260일과 1290일 동안 버티고, 이것이 그들의 스케줄에 쫙 짜여있는 거예요. 이 스케줄에 모든 것이 동의한 이유는 직접 안 만졌고 직접 안 보니까 계속 자기는 유효한 거예요. 게다가 그걸 말씀을 조합해서 하거든요. 말씀을 조합해서 짜깁기 할 때 문제는 봉합선이 생겼다는 거예요. 주님은 말씀 자체로 왔는데 말씀덩어리인데 인간은 말씀을 할 때 짜깁기해야 되니까 나중에 두두둑 터져서 ‘말씀은 안 맞다. 다시 짜라. 1998년 10월 18일 날 주님 오신다. 아이 안 맞다. 안 맞다. 다시 계산이 빠졌어. 그때 유대인들이 365일을 해서 했는가. 360일로 했는가. 70일을 계산할 때 360 했는가. 365일로 했는가. 로마에서 어떻게 했지? 계산 잘못했어.’ 계산 자꾸 고치는 이유가 시간만 자꾸 늘리는 거예요. ‘아, 계산 잘못해서 변수 하나 놓쳐서 2015년도에 옵니다. 2015년 하는 게 시간이잖아요? 이 시간은 인간의 폐쇄된 공간에서만 통하는 시간 이예요.
주님께서는 그런 시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런 인간들 시간을 크로로스라 하고 주님이 사용하는 시간을 카이로스라 하는데 카이로스는 번역하면 ‘때‘고 인간들은 그냥 시간이라고 하는 겁니다. 또 하나 아이온 하는 건 성경에선 세대, 이 세대. 듬직한 이 세대, 이 세대와 오는 세대, 아이온이라는 세대와 크로로스라는 보통 인간들 끼리 폐쇄된 공간에서 사용하는 시간, 시간의 특징은 과거 현재 미래를 사용한다는 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과거는 이미 왔고 현재는 지금이 현재라는 그 시간이 크로로스고, 카이로스는 그걸 째고 순간으로 들어온 걸 그걸 때가 되매, 말씀에 응하기까지. 다 이렇게 해요. 때가 되매, 말씀이 응할 때까지. 요게 카이로스에요.
그 구분은 제가 뉴저지에서 목요일 날 로마서 강의하면서 그걸 구분을 했었었습니다. 그거 구분할 때 참조하시면 되고요. 하여튼 그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떡을 준 게 아니고 떡의 나라를 만들러 왔죠. 저는 이걸 ’렛잇고’라 합니다. 렛잇고~♬, 렛잇고~♬, 렛잇고의 노래는 겨울왕국의 테마곡 아닙니까? 공주 하나가 멀쩡한 나라를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뭐로 만들었습니까? 겨울왕국으로 만들었잖아요. 주님은 멀쩡한 인간세계를 떡의 왕국으로 만드는 거예요. 만나의 왕국으로 만드는 거예요. 말씀의 왕국으로 만드는 거예요. 살과 피가 기준이 적용되는 왕국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렛잇고라 보는 거예요.
그들은 본인이 살기 위해서 떡을 먹는데 그게 아니고 떡이 너희를 새롭게 만들어내고 창조해야 돼요. 그럼 떡은 인간이 양식을 먹을 때는 자기 육신이 기반이라면, 예수님이 주시는 떡의 기반은 뭐냐, 예수님의 살과 피가 기반이기 때문에 인간들 바닷가에서 어부들이 그물 쳐놓고 그물을 잡아당기죠. 저인망, 아침 새벽에 나가서 저인망 잡아당기잖아요. 잡아당기듯이 자기 백성을 자기 것으로 잡아당기는 거예요. 네가 떡 먹는 그건 질이 다른 생명이기 때문에 이건 죽음이고, 저주고, 나를 경유해서 나에게 온 내가 제공된 떡을 먹을 때 이것이 바로 네가 상상도 못한 생명이라는 겁니다.
아까 동영상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마는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생명이라 할 때, 영생이라 할 때 항상 자꾸 실수하는 게 오래 사는 것이 영생인 줄 아는 모양이라. 오래 살 것 같으면 주님께서 에덴동산 쫓겨내지도 않고 그냥 생명나무 따먹으라고 했을 거예요. “따 먹어라. 오래 살게.”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못 따먹게 하고 그냥 죽으면 죽게 그냥 내버려두었어요. 왜냐 하면 이게 생명이 질이 달라요. 오래 사는 게 영생이 아니고 예수님과 동일한 생명이 될 때만 영생이지, 이런 허접스러운 내 생명이라고 오래 살면 이거는 저주가 따로 없습니다. 침해 걸려서 한 20년 버텨보세요. 저주가 따로 없어요. 그게 사는 게 아니고 귀신이고 좀비지 그게. 그래도 살고 싶어 하더라고요. 왜, 질이 나쁜 목숨이기 때문에 무조건 자기만 살면 좋은 세상이라고 생각해서 끈질긴 게 내 목숨이라서 계속 자기가 끈질기게 자기 목숨을 계속 유지하려고 지금도 빌고 있다 이 말이죠. 그저 오래 사는 거. 진작 오래 살 것 같으면 주님께서 생명나무 따먹게 하셨죠.
그래서 성경에는 회복이란 게 없습니다. 쟁기를 들고 생명나무 뒤돌아보면 안 돼요. 생명나무 보면 안 돼요. 회복이란 말은 정말 복음적이 아니고 종교적입니다. 모든 종교는 회복이 있습니다. ‘여러분, 고생되죠? 주께서 회복시켜 줍니다.’ 하지만 사람이 고생할 때는 반드시 결핍을 보충한 걸 가지고 자꾸 연상을 하다 보니까 인간의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로 가잖아요. 그러니까 결핍을 언제 느끼느냐 하면 과거처럼 되지 못한 데서 어떤 미흡함, 이걸 가지고 미래의 그 미흡함이 보충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새벽기도 안 나오다 갑자기 새벽기도 나와 보세요. 목사님들이 걱정돼요. ‘무슨 탈났구나. 곗돈 떼먹고 누가 도망간 모양이다. 아니면 보이스 피싱 당했나?’ 이 말은 뭐냐 하면 그들이 왜 새벽기도에 와서 우느냐 하면 원상복귀라고 해달라는 거예요. 원상복귀. 애가 갑자기 전교에서 10등하다가 지금 연애하는지, 저희 반에서 뒤에서 10등 하는데 빨리 더도 말고 욕심 안 낼 테니까 기복신앙 아니니까 원상복귀만 해달라는 거예요. 이게 크로로스거든요. 모든 인간은 자기 시간을 만든다 말이죠. 열 명이면 열 명이 다 자기 시간을 다 만들어요.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충돌인데 충돌이 뭐냐 하면 놀이공원에 보면 벙커 차 애들 놀이 있죠? 일부러 받는 벙커 차. 이 세상은 내가 만든 시간과 네가 만든 시간 간에 충돌해서 세상의 현실이 형성됩니다. ‘네가 세나, 내가 세나 한번 붙어보자.’ 퉁, 퉁, 충돌하죠. 그럼 네가 세나, 내가 세나 하는 너, 내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이게 들어있거든요. 기억이 들어 있어요. 기억이 바로 인간의 자아입니다. 인간이란 곧 기억을 의미해요. 기억이란 뭐냐 하면 시간으로 아코디언처럼 접혀져 있어요. 무수하게 접혀져 있고 편집돼 있어요. 과거에 있던 괜찮은 것만 골라서 편집돼 있어서 이 봉합선이 많아요. 이게 누더기에요. 좋은 것만 골라서 잘된 것만 골라서 상장 받은 것만 골라서 이런 것만 짜깁기해서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그거 가지고 시장에 나와서 누가 더 센지 배치기 하고 있죠. 배치기 해서 도대체 내가 어느 정도 되는 인물인지 어느 레벨이고 내 갖고 있는 소유의 힘이 어느 정도 갖게 됐는지 어느 정도 내가 힘주고 상대방의 것을 뺏을 수 있는지 아니면 누가 왔을 때 나는 물러서야 되는지 그걸 간파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만약에 오늘 본문 말씀처럼 예수님이 되셔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도 떡 주고 고기 주고 해보세요. 예수님 만난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고 얼마나 자랑 질 하겠습니까? ‘대단한 분 우리 주님 모셨다고, 너는 떡, 자장면 못 먹어봤지? 주께서 주신 자장면 못 먹어봤지? 우리가 원하는 걸 다해줘.’ 절대로 주님은 우리가 원하는 걸 해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했던 것은 선악과 따먹은 상태에서 생명나무 똑 따먹는 이게 우리가 원했던 거예요. 마귀는 줄 거예요. 마귀는 계속 거짓말하기 때문에 줄 거예요. ‘오래 살라’고, 차라리 그건 지옥 가서 불구덩이에서 오래 사는데 같이 죽이 잘 맞았네. 같이 마귀와 같이 둘이 오래 살면 되겠네.
주께서는 우리가 예상 못한 상상도 못한 봉합선 없는 이 폐쇄된 공간 이 바깥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도 없고 들어올 구멍도 없다고 여겨지는 그 바깥에서 있는 그 생명을 우리 안에 있는, 이 인간 세계 안에 있는 생명으로 넣어주시는 거예요. 넣어주는데 그 뚫고 들어오는 그 지점이 뭐냐, 사도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다른 복음이 없다. 십자가에요. 십자가! 그 뚫고 들어오면서 예수님의 공생애가 압축되면서 뚫고 들어오기 때문에 그의 피가 있고 거기서 부활이 있는 겁니다.
목사님이 구라 치는 게 아닌가? 구라가 아니고 실제로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습니다. 사람들은 이걸 그냥 기적이라 생각하지만 사도행전을 보세요. 사도행전에 사도바울이 설교한 게 나와요. 도대체 사도바울은 뭘 중점으로 설교했는가? 어떤 설교에도 딱 그게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죽었고 부활했다. 딱 이거에요. 교회 키우는 거 없어요. 죽었다가 부활한 이겁니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거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었고 부활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성령을 그분이 당사자가 죽었다가 부활하신 당사자가 아니면 우리에게는 이걸 알려줄 수 있는 성령을 제공해준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이 올 때는 성령을 받으라고 준 게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라고 성령이 오는 것이지, 성령이 왔다고 온 성령은 다 가짜 성령입니다. 가짜 참기름 이예요. 중국 산 이예요. 향은 비슷한데, 주님이 진짜 준 것은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이미 죽었다는 걸 증거 하는 그것은 진짜 성령이고, 성령 받아 오래 살면서 착하게 한번 살아볼까. 이건 전부 다 가짜 성령 이예요. 이거는 뭐냐, 옛날에 자기가 좀 술, 담배 먹고 못 살았거든요. 그러니까 크로로스에 의해서 ‘내가 좀 착해지면 안 되겠느냐. 옳지, 성령 받으면 착해진다. 술도 끊고 성령이 임하면 경건하게 산다니까 사랑도 한다니까. 그래 그걸 받아야 되겠네.’ 이거는 자기 과거가 여전히 살아있는 상태에서 하여튼 종교적인 위선의 옷을 입히는 거예요.
이건 표적이 아니고 그들이 기대하는 기적을 원합니다. 기적은 어떻게 얻느냐? 빡세게 기도하면 얻어요. 왜냐 하면 기적이란 평가를 누가 내리느냐 하면 본인이 스스로 내리기 때문에 ‘주여, 이쯤해서 저는 기적으로 뽑겠습니다. 기적 요까지 기적, 아, 오늘도 기적 받았네.’ 자기가 자기 기분에 도취해서 가는 겁니다.
그런데 진짜 성령을 받아버리면 ‘주께서 기도하게 하십니다.‘ 이래서 자기가 피동형으로 바뀌어버립니다. 살아가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인생이지 내 인생이 아닌 걸로 바뀌어버려요. 그것도 소급해서. 어릴 때 7살 때, 9살 때까지 전부 다 주께서 의도적으로 만들은 인생으로 바뀌어버립니다.
그럼 어떻게 되느냐, 과거 현재 미래가 아니고 미래가 저~ 내가 태어날 때부터 똥 싸고 오줌 쌀 때부터 미래가 거기 침투해버린 거예요. 미래의 계시에요. 내 시간의 계시가 아니고 주의 손길이 계시게 된 겁니다. 그게 바로 예레미야 1장에 나오죠. “네가 태중에서부터 이미 택정함을 입었느니라” 그게 선택입니다.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선택은 거짓말 이예요. 이건 칼빈이 몰라서 그래요. 칼빈의 선택론은 그건 복음적이 아닙니다. 칼빈의 선택론은 중간에 치고 들어가서 선택 받아내는 선택론이기 때문에 이거는 유대교의 선택론이고 종교적 선택론이지 복음적 선택론이 아닙니다. 선택론은 우리가 그 결과로만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추후 적으로 고백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죠. ‘주님이 선택한 거 맞죠? 에이, 씨, 이제야 알게 됐네. 나 선택한 거 맞죠?’ 이런 식으로. ‘내 허락도 없이 선택했죠? 창세전에’ 한편으로는 좋고 한편으로는 우리의 권한에 우리의 선택에 맡기지 않은 선택이라서 삐졌고 이런 거. 기쁨의 삐짐이죠. 행복한 삐짐. 여유로움의 삐짐. 너무 고마워서 삐짐. 감사해서 삐짐. ‘나한테 내 선택권을 인정해줘야지, 나한테 물어보고 창세전에 선택하면, 그럼 저 가치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하하하~’ 이런 거. 기분 좋아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선택의 특징이 있어요. 이거 이야기하면 기분 좋았다가 기분 다 날라 가버려요. 뭐냐 하면 주님의 선택의 특징은 반드시 무슨 기능이 있느냐 하면 삭제 기능이 있습니다. 창세전에 선택 받았다고 열 명 남았는데 나중에 두 명밖에 안 남았어요. 열 명 다 날라 갔어요. 왜냐 하면 주님이 창세전에 했기 때문에 가짜로 창세전에 선택받은 사람을 골라내는 식으로 주께서 일을 해버립니다.
아까 쉬는 시간에 집사님이 이야기했잖아요. 아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했죠. 안다는 것은 사람이 뭔가 느끼고 보기만 하면 다 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까 했죠? 보면 믿어지고 만지면 진리라고 결정을 한다는 게 우리의 감각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믿음은 보이지 않고 믿는 게 복이 있다 했거든요. 그럼 그건 뭐를 포기하란 말입니까? 내가 만지고 봤고 하는 것을 스스로 ‘이것이 나의 진짜 믿음을 가려버리는 스크린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라고 인정하라는 겁니다. 내가 체험한 그것이 오히려 나의 구원을 훼방하는 시험거리로 작동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시험거리로 작동해 걸려든 사람이 여러 사람이 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욥 이예요.
제가 주일 날 설교했잖아요. 현실을 가지고 현실을 뜯어낸다고요. 욥을 분명히 현실 속에서 자식 열 명 있고 재산 많았어요. 그리고 분명히 욥은 이야기했어요. 이것이 내 공로가 아니고 주님의 은혜라고 분명히 압니다. 주님의 은혜로 주셨기 때문에 처음에 뭐라 했습니까?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거두신 자도 하나님이다”라고 했으면 뒤 군말이 없어야 되는데 그게 욥의 초장에 나와요. 그 욥의 뒤 42장 이야기는 무슨 이야깁니까? 궁시렁, 궁시렁, 궁시렁, 궁시렁, 불평하는 대목이 나오거든요.
욥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현실은 맞아요. 그런데 현실을 가지고 욥이 자기 세계를 자기 연출을 해온 겁니다. 자기 드라마, 자기 시간을 만들은 거예요. 그리고 여기 하나 있는 것은 전부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본인이 고백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본인을 주께서 본인을 공격한 거예요. 본인을 공격했을 때 “주의 은혜입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이 모든 것도 전부 다 현실, 뭐가 되느냐 하면 삭제가 되는 거예요. 최후로 주께서 뭐를 삭제하느냐 하면 욥 자체를 삭제 해야만 되는 겁니다. 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나니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누가? 그리스도가 살기 위해서는 내가 늘 삭제 당해야 돼요.
그런데 목사님 그럼 삭제 한번만 당하면 됩니까? 아니에요. 죽을 때까지 계속 삭제 당해야 돼요. 죽을 때까지. 왜, 삭제 당하면 주의 은혜라 해서 또 내가 정립이 돼요. 또 만들어져요. ‘어제 은혜 받았다.’ 이게 또 튀어나오거든요. 그 삭제해주시는 방법이 뭐냐, 그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방법이 바로 이적이 아니고, 기적이 아니고, 기적이 표적으로 바뀌는 겁니다. 표적으로.
만약 내가 아니고 중보자, 세상에 이것처럼 간단한 설명이 없어요. 내가 아니고 중보자 덕분에! 중보자! 나는 작고 나는 중보자 밑에 묻어 있는 하나의 모래알 같은 것이고 나의 전부를 차지하는 것은 주님이, 여기의 모든 옷, 시계, 전부 다 주님께서 지금 마련해서 주께서 실행해 옮기고 행동에 옮기게 하시는 거예요. 어떤 사람을 만났다. 주께서 보낸 사람 만난 거예요. 애가 말썽부린다. 주께서 애를 말썽부리게 한 거예요. 성질나서 때렸다. 주의 손으로 애를 때린 거예요. 어떤 의미를 줘도 그 의미는 중보자 안에 머물러 있어야 돼요. 그래야 우리 자신이 선교사가 됩니다. 우리 자신이.
제가 수요일 날 했잖아요. 선교하지 말라고. 선교사는 선교하지 말고 그냥 살기만 하면 된다고. 그냥 살기만 하면 되는데 선교하며 살려고 하니까 이게 선교를 방해하는 거예요. 그냥 살면 되는데. ‘선교합니다.’ 이렇게 나오니까 선교가 벌써 훼방됐어요. ‘에이 씨 , 에이, 선교도 아닌가.’ 참, 제일 쉬운 말이 그냥 살기만 하면 돼요. 더 쉬운 말이 막 살면 되는 거예요. 마음대로 살면 돼요. 제일 쉬운 말이에요. 그게.
왜 그렇게 맘대로 살아도 되느냐? 어차피 나의 의미는 인정받지 못하고 삭제대상이기 때문에 내 인생 내 시간을 따로 만들 이유가 없거든요. 그냥 주신대로 살면 돼요. 그래서 욥의 마지막은 뭐냐, 말을 안 하죠. 말을 안 합니다. 왜, 그 자기의 말할 자리에 말씀이, 표적이, 매개체가 활동하기 때문에. 내가 말했다는 덕분에 요만큼 얻어낸 게 아니고 내가 말하기 전에 주께서 말씀하신 게 아니고 말씀 따라서 선물 보따리를 주신 거예요. 참석만 했을 뿐인데 만두하고 빵하고 떡하고 주셨잖아요. 저쪽에서 마련한 거예요.
하늘나라 만들기는 주님 소관이지 내 소관 아니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자꾸 독자적인 거기서 자기 아지트를 만들려고 하면 안 돼요. 그걸 자기 부스라 하는데 부스 알죠? 전시회 때나 자기 코너 만들지, 자기 부스를 만들면 안 돼요. 자기 부스가 천국에는 없습니다. 자기 아지트가 없어요. 자기 부스, 아지트 있으면 옆집하고 싸운다고요. 네 몇 평이고? 또 싸우고 ‘아이구, 어지간히 착한 일해서 상급 많이 받았구나. 나는 부끄러운 상급 받아서 …’ 이러면서 또 싸워요. 세상에 그런 천국, 자기 독자적인 세계라 하는 것은 천국 가도 없고 지옥 가도 없습니다. 왜, 독자적인 세계는 이 살 동안에는 다 끝났어요. 그때는 결혼도 아니 하고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요. 그때는 천사와 같이 돼버려요. 결혼 하더라도 아직까지 죽기 전에 해놓으세요. 천국에는 결혼도 못하니까. 혼자 사시는 분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세요.
사마리아 여인은 지금 다섯 번째 했고 사마리아 여인이 지금 여섯 번째 또 시도하고 있다가 예수님 만났지만 그 뒤에 그만 했다는 법 없어요. 일곱 번 했는지 여덟 번 했는지 그건 또 몰라요. 아무 의미 없어요. 그게 여덟 번인지 아홉 번인지 주님 보시기에 그게 하나의 빈 그릇이기 때문에. 이 그릇에 주님께서 채움을 사마리아 여인은 그걸 흔쾌히 자기 몸을 그릇으로 내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가 남자 다섯 명 사귀고 여섯 번째 사귄다는 것이 그렇게 하게 하신 것이 주님께서 친히 자기 그릇을 만들었는데 그 결과가 뭐냐, 지금까지 내 시간은 내가 만든 걸로 여겼는데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자기가 물 길러 와서 만든 시간이 아니고 주께서 만드시는 그 주님의 시간으로 소급해서 그걸 인정해버린 겁니다.
이게 바로 말씀이 만든 세계, 떡이 만든 세계, 만나가 만든 세계, 예수의 살과 피가 만든 세계, 이것이 영생의 세계입니다. 영생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누리는 거예요. 헤엄치는 거예요. 개인 소유라는 게 없습니다. 이미 주의 이름으로 이미 등록이 돼 있기 때문에 이중등기하면 안 돼요. 이중등기 허용 안 됩니다. 그래서 기도해도 누구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누구 이름으로 구원받아요? 내 이름으로 구원받으면 안 돼요.
천사가 와서 “어디서 왔느뇨?” 어디서 왔는데 신앙생활 어떻게 했느뇨? ‘제가 이렇게 하고 …’ 그러면 추방당합니다. ‘그저 흰 옷인데 예수의 피로 적셨습니다.’ ‘그래? 그러면 통과다.’ 이게 요한계시록에 나오잖아요. “어디서 왔느뇨?” “어린양의 피 속에서 왔습니다.” 그럴 때는 통과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 있는 말씀처럼.
사람들이 교회 오는 것은 결핍 때문에 와요. 결핍을 신께서 마저 채워주시리라 생각하고, 그걸 마저 채워주게 되면 자기 정당성이 확보가 돼요. ‘그래, 과거 내가 잘 살았구나. 잘 살았으니까 복을 줬지. 그리고 아이구, 고맙습니다. 다시 내가 원했던 나의 괜찮음으로 회복시켜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죠. 뭐에요? 이게. 이게 뭡니까? 마귀가 좋아하는 거예요. 회복이란 없습니다. 주께서 사용하시는 것뿐이죠.
그래서 임금 삼으려 한 그 임금에서 주께서 떨칩니다. 네가 만약에 붙든다면 너희들은 영생의 나라를 놓친 게 돼요. 예수님이 그들에게 떡이나 주고 잘 놀고 잘 먹으면 그러다가 그 목숨이 아담의 목숨의 질밖에 안 되는데 예수님의 목숨의 질이 안 되거든요. 질이 벌써 더러워요. 나빠요. 마귀와 한패가 되는 거예요. 주께서는 그들을 떼시고 그들에게 떡을 준 그 떡이 이제는 나를 모독하고 나에 대해서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떡으로의 모습으로 만나로 이전해 버리면 그 만나는 핍박 받고 설움 받는 만나로 바뀌고 그 만나가 예수의 살과 피가 돼 버리면 예수의 몸이 돼 버리면 사람들에게 이리 찢기고 난도질당하는 살과 피로서 만나가 공중에서 뿌려지게 될 겁니다. 그 뿌려진 그것이 누구만 주워 먹느냐? 아버지께서 보낸 자만 내게 오게 돼 있다. 그것이 바로 주의 대한 계획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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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요한복음6장15(기적과 표적)
150305b-이 근호 목사
여기 12절에 보면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 그 다음에 뭐라고 돼 있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이 말은 너희 소비하라고 준 너희 양식이 아니다 말이죠. 나의 몸인데 너희들은 그것을 자기만 배만 부르면 ‘아이구, 뭐 감사합니다. 이제는 버려도 되죠?’ 자기 소비용으로 사용하는, 자기들이 원했던 걸 주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들이 원한 걸 주는 게 아니고 주님이 앞으로 해야 될 일을 가지고 그들을 함몰시키고, 그들을 덮쳐버린 거예요. 그들은 말려든 겁니다.
너희들은 표적을 모르고 그저 기적만 원하는 인간들이다. 따라서 나는 너희들한테 버림받게 될 것이다. 너희들은 신과 메시야, 중보자, 성경 해석,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게 아무것도 없다. 그게 왜 그러느냐, 너희들은 영이 아니고 육이기 때문에.
요한복음 6장 63절 한번 읽어보세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육과 영이라는 아주 독특한 개념이 나와 버렸어요. 이 육은 물론 인간의 신체를 포함합니다. 인간의 신체를 포함하는데 신체만 포함하는 것이 아니고 신체란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는 상황을 가지고 육이라고 이야기해요. 중보자와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 또는 말씀, 언약과 끊어진 상태를 육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에서 뭐라고 돼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 이걸 제가 봉합선 없는 구형 체라 한 거예요. 그냥 육으로 난 건 육이다. 돼 버리면 이렇게 하나의 평지가 되잖아요. 그런데 저는 구형 체, 이걸 둘둘 말은 거예요.
주일 낮 설교에 둥근 반죽이라 했는데 창조할 때 둥그런 반죽을 만들었어요. 둥그런 반죽을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불의가 저기 있느냐 할 때는 어떤 평지 같으면 우리가 여기 있으면 ‘이쪽에 문제 있구나. 이것이 여기가 오물이 있네. 여기 얼룩이 있네.’ 지우면 되지만 이 반죽이 돼 버리면 누룩이 커져 버리면 이건 내가 당사자가 되니까 누룩의 영향력의 결과물이 바로 나니까 누룩을 빼내려면 누굴 빼내요? 나를 빼내야 돼요. 나를 빼내야 돼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할 때 그걸 평지로 보세요. ‘쟤는요 나빠‘ 이러지 말고 이걸 누룩 차원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보자 이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누룩 차원으로 보는 게 아니고 어떤 평평해서 ‘나는 괜찮은데 저쪽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 있어. 근처도 안 가야지.’라고 어떤 거리감을 형성을 해요. 그러면 그것은 세상을 창조할 때 이렇게 누룩으로 본 게 아니고 어떤 주체 앞에 대상 가지고 네가 어떻게 조정만 잘하면 죄에 물들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오해가 돼버리는 겁니다.
사실은 기독교 역사 해석을 다 그렇게 했죠. ‘정신 바짝 차려라. 그러면 너는 깨끗하게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정신을 바짝 차려요? 우리가 누구 자식인데 정신을 바짝 차려요? 누구 자식인데. 아담의 자식이 정신 바짝 차리면 차릴수록 점점 더 아담 되지, 괴물 되지 뭐 있어요? 차라리 어리숙하고 바보 같은 게 낫지, 정신 바짝 차리면 점점 더 아담을 닮아 가는데.
왜 성경을 그냥 어떤 교훈적으로 보고, 명심보감 같이 그렇게 보기 때문에 들여다보고 지키고 이러면 되는 줄 알았어요. 이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옛날 이스라엘이 말씀을 그렇게 봤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고 이 전체가 누룩을 발췌하기 위해서 어린양이 개입한 그 세상입니다. 누룩이라는 것은 어린양이 개입하지 않으면 누룩이 밝혀지지 않아요. 누룩은 뭐냐,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밀치는 어떤 반항심, 이런 게 누룩 속에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내 자존심을 건드리시면 저는 더 이상 주님과 함께 사귈 생각 없습니다. 이런 게 누룩이 되는 거예요. ‘주여 일처리를 이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내가 이만큼 기도할 때는 이만한 혜택은 주셔야죠’ 이게 누룩입니다. 그게 육이 되는 겁니다. 육.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육은 스스로 살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돼요? 영으로 살리거든요. 그럼 우리 생각에는 예수님이 살린다 하면 되는데 왜 영으로 살린다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살린다 해봐야 명료하게 예수님이 눈앞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나 같은 육이 나 같은 신체를 가진 분이 당신이다. 이렇게 돼 버리면 예수님과 자기 합해서 전체가 하나의 전체가 돼 버려요. 전체가 돼 버리면 예수님도 전체 일부가 되고 우리도 일부가 되기 때문에 둘 다 폐쇄된 공간에 함께 놓여있는 셈이 돼 버려요.
따라서 예수님을 영으로서 폐쇄된 공간을 벗어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똑바로 쳐다봐도 예수님을 모르게 돼 있어야 그게 육의 제대로 된 육다운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주께서는 그렇게 해서 육 됨을 들추어내죠. 그래서 주님께서 가니까 사람들이 쫓아옵니다. 쫓아오니까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여기 25절 봅시다.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여기서 떡을 먹고 배부르다는 것은 두 자로 하면 기적이고 주님께서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기적을 베풀기 때문에 우리 임금 삼으려고 여기까지 따라왔잖아요. 하니까 너희들은 지금 기적을 원하지만 내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기적이 아니고 표적이라는 겁니다. 표적과 기적의 차이점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만 그 중에 차이점이 뭐냐 하면 기적이라는 것은 과거에서 익히 알던 것이 만족스럽게 달성될 때 기적이 되고, 표적이라는 것은 장차 때가 될 때 소급해서 ‘하하, 그랬었었어. 그런 경우였나. 그런 이야기구나. 물이 포도주 되는 그게 포도주 만들어주는 게 아니고 예수의 피를 포도주라고 하는구나, 아하, 46년 지어진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은 사흘 만에 짓겠다는 것은 예수의 몸을 두고 이야기한 거네.’ 하고 주님의 때가 표적이 되어서 소급해서 그 해석이 다시 덮쳐질 때 그게 표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전체가 기적이 아니고 표적입니다. 살은 거 감사하자 말고 구원 받은 거 감사해야 돼요. 구원 받은 거 감사하면 표적이고, ‘아이구, 오늘도 밥 먹여줘서 감사합니다.’ 하면 이건 기적이고, 그래서 교회 가면 간증하다 보면 전부 다 기적 이야기하지 표적 이야기하는 사람 없어요. 제가 암 걸렸는데 기도하니까 나았습니다. 이건 원상회복 시켜줬다는 기적에 속한 것이고, 이걸 표적으로 간증하면 이렇게 됩니다. ‘여러분, 저처럼 제발 암 걸려서 사람이 사는 게 아무것도 아니고 예수님만 중요합니다. 그거 아세요.’ 이러면 표적이 되는 것이고, 표적은 돈 안 되고 기적은 돈이 되고 그렇겠죠.
허 운석 선교사님이 기적 이야기하다가 표적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이 별 이익이 없었던 거예요. 아마존 선교하다 돌아가신 분인데. 은사주의로 나갔기 때문에 ‘기도하면 이런 결과가 주어집니다. 믿어주세요.‘ 하시다가 예수님 십자가만 구원받습니다. 십자가 능력만 구원받습니다. 로 마지막에 바뀌었잖아요. 그래서 기적의 사람에서 표적의 사람. 다시 말해서 자기 사람, 자기 잘 되는 사람에서 주님 안에 섞여 들어간, 주님 안에 그만 섞여서 본인이 사라져버린 사람 이예요. 그렇게 되는 거죠. 주께서 그렇게 하셨겠죠.
27절 봅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렇게 돼 있죠. 그러면 썩는 양식 왜 주셨는데? 이 오병이어를 안 주고 이런 이야기하면 이해가 되는데 본인이 줬잖아요. 설에 만두하고 떡하고 잡수라고 본인이 줬잖아요. 줘놓고 먹지 마라. 그 썩는 거 왜 먹습니까? 줘놓고 왜 먹지 말라하니. 그러면 주지 마시든지. ‘네가 이 땅에 출세하지 말고 네 시민권을 하늘에 있는지라. 하늘을 생각하라.‘ 그러면 이 땅에 태어나지 말게 하시든지. 그래야 앞뒤가 맞다는 거예요. 우리는 그렇게 따지죠. 그거 따질 때 뭐를 놓쳤느냐 하면 ’내가 어떻게 되느냐, 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거예요.
모든 일은 예수님부터 출발해야 되는데 우리는 하나님과 내 사이에 중보자가 예수님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이게 잘못 이예요. 중보자는 뭐냐 하면 중보자는 중보자가 드러나고 그 다음에 중보자가 필요한 사람은 중보자가 따로 생산해요.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만들어내는 것과 기존의 인물과 이게 틀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어디를 가느냐 하면 66절에 봅시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그 다음에 뭡니까?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드디어 주께서 성공하신 거예요. 주께서 구원에 성공하신 겁니다. 왜냐 하면 주님의 자신의 구원됨에 성공하신 거예요. 주님의 구원됨에 성공을 해야 없던 새로운 성도가 생산됩니다. 우리는 안 받아주거든요. 안 되는 것을 구원해 달라 하지 마시고 주께서 모든 일이 마무리되게 되면 말씀에 응하기 위해서 택한 백성이 거기서 주님이 성공했기 때문에 성령을 받아야 될 사람, 새로운 피조물 될 사람들이 예수님의 능력에 의해서 나타나게 돼 있어요.
따라서 구원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받지,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예수의 피 믿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능력으로 받는 거예요. 예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는데 그 안의 내용이 뭐냐 하면 피도 들어있고 언약도 들어있고 십자가도 들어있고 이런 겁니다. 예수님에 대한 자랑도 들어있고. 믿음 소망 사랑이 다 들어있어요. 믿음 소망 사랑이 우리의 노력에서 얻어지는 게 아니고 이게 선물입니다. 은사에요.
아까 햄버거 봤죠? 소망, 샌드위치 봤죠. 이거 믿음, 이거 물 있죠. 이건 사랑, 전부 다 제공된 거예요. 그걸 요번에 민수기 수련회 하면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어떤 대청마루가 있는데 경복궁인가 경회루인가 대청마루가 있는데 여기에 격자무늬에 햇빛 비추니까 그 대청마루에 얼룩덜룩 무늬가 있는데 격자무늬가 비취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대청마루고, 그 예수 그리스도 격자무늬는 이건 십자가에서 우리 몸을 얼룩덜룩하게 십자가로 완전히 디자인을 해버린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주의 영광을 위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 디자인이 그렇게 디자인 됐기 때문에 그런 무늬가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에게 제일 힘든 명령이 뭐냐 하면 ‘문신아 떠나거라.’ 이런 명령이 제일 힘들어요. ‘타투야 떠나거라.’ 타투가 문신이거든요. 문신이 어떻게 떠납니까? 내 몸에 새겨진 건데. ‘나 예수 안 믿는다.’ 이게 어떻게 돼요? 내가 믿을 거 같으면 안 믿으면 되는데 그래서 예수 믿으라고 하는 것은 의미가 있어요. ‘열심히 믿습니다.’ 하면 그런 인간 다 떠나게 하기 위해서.
미국 뉴저지에서 강의했지만 첫 번째 강의가 뭐냐 하면 “내가 저주 받는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와 끊어진다 할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로다.” 그 대목 가지고 1시간 동안 강의를 했어요. “내 동족을 위해서 주님의 사랑에서 끊어진다 할지라도 제가 원합니다.“ 할 때 어떤 사람은 그 이야기 나오기도 전에 성경을 보고 아멘, 한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했어요. 진짜 아멘 하실 거예요? 동족을 위해서 나 지옥 가도 좋다. 그런 뜻입니까? 사도바울이 구원받고 안 받고가 내 결심으로 얼마나 빡세게, 얼마나 침해 안 걸리고 반드시 진짜 죽을 때까지 쥐느냐, 이걸로 구원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면 주께서 끝까지 하신다는 것이 나의 의지가 아니고 이 믿음조차도 주께서 선물로 그냥 주신 거예요. 그게 자기 안에 내장돼 있으니까.
아니 주님도 버림받았는데 본인도 버림받으면 어때요? 주님도 뭐라 했습니까?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했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영원히 저주받아서 지옥 갔습니까? 사흘 만에 되살아났잖아요. ”아버지의 뜻이라면 맘껏 사용하시옵소서. 다 이 무대를 드리겠습니다. 이 무대에 뭘 장치하든지 뭘 배치하시든지 그건 주께서 알아서 하시기 바랍니다.“ 이게 이번 주일 날 설교했던 거. ”가라 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제가 그 설교하면서 거기서 하나의 포인트를 준 것은 뭐냐 하면 사울이란 사람은 주께서 찾아왔고 아담도 “아담아 어디 있느냐” 하고 찾아왔지만, 백부장은 뭡니까? 찾아온 사람도 없는데 본인이 이렇게 보지도 않고 믿어버렸어요. 그게 바로 말씀의 영향 때문에. 이 세상의 말씀의 그물망, 아주 촘촘한 말씀의 그물망에 의해서 구원될 자는 이방이라도 구원되는데, 말씀의 초점은 뭐냐, 예수님이 주인이라는 그걸로 초점이 모이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을 이렇게 초반부를 시작하지만 전체를 우선 제가 훑어드릴 필요가 있어요. 왜냐 하면 자칫하면 하나를 보게 되면 전체를 놓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 여기 육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을 그림으로 표시하면 이렇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이렇게 원 안에 원을 그려요. 어떤 정해진 구역을 그리려고 할 때 예수님은 이쪽이고 우리는 이쪽이다. 이렇게 평평하게 그려버리면 둘로 나누인 구역이 되지만 예수님은 전체를 살리고 전체 속에 또 낯선 전체가 들어와 버린다 말이죠. 요 들어온 이 전체를 가지고 어려운 말로 이걸 비-전체라 하는 겁니다. 아마 이게 인간 용어 중에 제일 어려운 용어에요. 비- 전체가.
그래서 이 비-전체를 약간 언급은 했죠. 민수기 할 때. 하면 무슨 소용 있어요? 해도 들어도 모르겠는데.ㅎ 비-전체를 설명할 때 손쉬운 방법 중에 하나가 이겁니다. 남자와 여자를 설명할 때 여자를 비-전체에 속하고 남자를 전체에 속해 버리면 이것이 얼추 비슷하게 돼요. 남자는 전체를 항상 자기가 다 점령하고 다 가져야 돼요. 그래서 여자라 하는 것은 내가 구상한 이 세계에 여자는 돕는 자가 되어야 된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돕는 자. 그래서 남자는 최종 기표가 되고 제일 대표적인 표시가 되고, 여자는 보조적인 표현으로 이렇게 있어야 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자는 어떠냐 하면 남자가 이 전체를 만들어 놓고 여자를 한 부분으로 하게 되면 여자는 뭐냐 하면 그 남자의 전체를 깡그리 무시해 버립니다. ‘혼자 놀고 있네.’ 아무리 남자가 여자를 다 잡아먹고 점령해도 뭔가 남아있는 아우라 같은 게 있어요. 신비로운 게 있어요. 아무리 차지하고 고분고분해도 여전히 빠져나간 부분, 그게 여자에요. 그래서 비-전체에요.
보통 전체의 반대말이 뭡니까? 부분이잖아요. 남자는 여자에게 내 부분이 되기를 원하는데 여자는 남자에 대해서 비-전체가 돼요. ‘나 네 말 안 들어.’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네가 구상한 그 질서에 대해서 나는 상관없어.’ 그러면 남자는 ‘그 너 나름대로의 질서를 내봐’ 이러잖아요. 여자는 나름대로 질서가 없어요. 여자의 질서는 뭐냐, 남자가 만들어 낸 질서에 다 손에 잡히지 않는 게 질서에요. 그래서 여자는 남자 없이는 안 돼요. 여자는 남자 없이는 안 되는데 남자한테 다 삼키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누가 애를 다느냐 하면 남자가 애를 달아요. 아무리 꼬시고 때려도 안 되고 뭘 해도 내 것이 안 돼요. 꼭 미꾸라지 빠져나가듯이 다 빠져나가지 않아요. 다 잡았는데 제일 중요한 게 내 손에 안 잡히네. 여자는 갈망의 대상 이예요. 남자의 갈망의 대상. 이것이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분명히 남자가 가장 이예요. 그러나 구원은 여자를 통해서 구원합니다. 여자의 후손이 구원하죠. 남자는 여자를 무시하는데 무시당한 여자가 남자가 꿈도 못 꾼 구원의 통로가 돼 버립니다. 여자가! 그러면 여자는 대우받나? 천만에 대우 안 받아요. 계속해서 무시당해요. 대우 받는 여자가 있다면 그건 여자가 아니고 남성의 부분으로서 남성이 원했던 여인상으로서의 대우 받죠. 그게 남성들이 원했던 거예요. 존중해줄 테니까 내 말 잘 들어. 이렇게 돼요. 주고받는 거래 때문에. 이야기가 남자, 여자 이상하게 됐네. 정신 차려.
바로 이것이 여자의 후손 예수님이거든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그렇게 우리하고 관계됐습니다. ‘목사님, 주님하고 동행하면 되잖아요?’ 동행하면 되는데 동행할 때는 되는데 그 다음에 소유는 안 돼요. 우리가 주님을 소유할 수 없어요. 빠져나가 버려요.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과 같이 이야기는 했는데 나중에 예수님을 아는 순간 예수님은 빠져나가고 없어요.
기도하면 들어준다고요? 들어주죠.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거. 우리가 원하지 않은 걸 주시죠. 뭘 그럼 채워주십니까? 그건 주기도문에 나와요. 주기도문의 핵심은 뭐냐,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용서에 관한 겁니다. 우리가 용서 받지 않고서는, 의인 되지 않고서는 천국에 못 가요. 돈이 있고 뭐 건강하고 소용없습니다. 용서 받으면 다른 걸 다 잃어도 괜찮아요. 주기도문의 내용이 그거거든요. 용서해 주는 게. 주님께서 죽으신 것도, 주님께서 피 흘린 것도 바로 우리 죄와 관련돼 있다는 거죠.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살지 말고“ 이렇게 하신 이유는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할 때 썩은 양식의 요 역할을 누가 해야 되느냐? 나중에 다 떠나버릴 남자만 5천명들이 무슨 역할을 하도록? 썩은 양식이란 요 역할 하도록 위해서 이 영화의 엑스트라로, 보조 출연한 거예요. 이 사람들이. 와서 먹고 떠나라. 그리고 썩은 양식 잘 가라. 너희들이 있어줘야 썩은 양식 아닌 다른 양식이 있음을 너희를 통해서 반대급부로 다른데 주께서 소개할 수 있고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썩은 양식을 원한다. 요걸로 정립되는 겁니다. 이제는 큰 과제가 남았습니다. 어떤 과제? 썩은 양식만 얻는 인간에게 무슨 수로 영생할 양식을 심어주느냐? 이 중차대한 이 작업이 남았어요.
인간들은 예수님을 이용할 생각만 하고 자기가 원했던 과거에 미흡한 것을 미래에 채우기 위해서 그것 때문에 메시야를 줄기차게, 악착같이 따라오거든요. 계속 추궁한다 이 말이죠. 그게 썩은 양식이거든요. 본인이 썩었기 때문에 썩은 양식, 썩은 양식 원하는 자에게 무슨 수로 그에게 영생을 줍니까? 이건 타협도 안 되고 협상도 안 되죠. ‘떡 내놔라’ 하는데 주께서 살과 피 내놔버리면 이게 무슨 대화가 돼요? 이게 안 되잖아요. ‘이 딴 거 왜 주십니까? 이 딴 거 말고 내가 원하는 거 달라니까’ 이렇게 나올 때 ‘그거 없다. 이거 먹어라.’ 하면 우리 대화 이걸로 끝. 하고 헤어질 건데 그러면 천국에 단 한 명도 못 갑니다. 갈사람 없어요. 몽땅 다 썩은 양식만 원하니까.
이 불가능한 과제를 주님께서 떠맡았어요. 주님께서는 썩는 양식을 말고 영생하는 양식을 이제 주님이 그런 사람들을 만들어내야 될 그 과정이 드디어 시작이 되는 겁니다. 그 과정이 이제 개시가 되죠. 그 과정을 담당할 전임자가 바로 예수님 본인이 그걸 합니다. 그들은 믿음이 없잖아요. 믿음이 없으니까 어떻게 됩니까? 믿음마저도 선물로 줘야 돼요. 믿음 없는 인간 믿음 심어줘. 꼭 임플란트 같아. 임플란트 할 때 이빨에 바로 얹지 않죠? 뭔가 밑에 먼저 꽂는 거 꽂아 놓고 위에 몇 개를 얹고 하잖아요.
기초부터, 믿음부터 이렇게 다지고 난 뒤에 거기 믿음에 대한 ..를 얹듯이 썩어있는, 일종의 부산 같은 경우에 해변 가기 때문에 모래사장이잖아요. 그러면 아파트 질 때 어떻게 합니까? 온 데서 흙을 덤프트럭에 싣고 와서 다지고, 다지고 해줘야 80층, 90층짜리 아파트가 안 무너질 거 아닙니까?
그처럼 썩은 데에다 썩은 줄 알면서도 뭘 집어넣어요? 안 썩는 기초를 여기다 꽂아야 되는 겁니다. 그 작업을 주께서 이제 해나가십니다. 오라 하는 데는 없지만 갈 일은 많다고 주께서는 바빠요. 여기 한번 봅시다.
여기 28절 봅시다.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이 일을 하오리이까” 하나님의 일을 전담 받은 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거 하기 전에 아까 12절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그러면 양식을 먹는 것은 인간들 보기에는 자기 식사 시간이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벌써 아버지 일이 시작된 거죠. 아버지 일이기 때문에 아버지 일은 그냥 버리면 안 돼요. 여기 반드시 성취가 마무리 져야 돼요. 다 남기고 이걸 거둬야 돼요. 거둔 것이 몇 광주리 남았어요? 열 두 광주리죠. 열 두 광주리는 이스라엘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새롭게 만드는 식으로 영생 줄 자를 만들어내시는 방식을 씁니다. 쉽게 말해서 주님께서 영생 줄 자를 어떻게 만드는가? 구약부터 새로 다시! 구약부터 새로 합니다. 구약이 여기서 개입합니다. 처음부터 요한복음은 구약부터 시작하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구약의 그 말씀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 공생애 안에 신, 구약 다 들어있다 했죠? 구약 말씀이 응축이 돼서 딱딱하게 응축이 됩니다. 콩을 갈아서 뭉쳐 놓으면 뭐가 되죠? 비지가 되죠. 비지 아시죠? 주님은 콩비지, 말씀이 뭉쳐진 거예요.
따라서 어떤 말씀, 마태복음 어떤 말씀이라도 하나 어기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 십자가 공로 아니면 구원 못 받죠. 왜냐 하면 예수님 자체가 콩비지이기 때문에. 콩비지를 짭니다. 짜면 뭐가 나와요? ‘다 이루었다’의 피가 나오죠. 그 피가 참기름 이예요. 이야기가 이상한데, 오늘 식품 회사 왔으니까. 콩비지 짜서 피가 나오면 그 피가 말미암아 피 안에 뭐가 들어있어요? 모든 하나님의 의가 다 들어있어요. 말씀을 완성했으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졌다는 말은 죽고 난 뒤에 새삼스럽게 율법을 거론한다는 것은 이건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예수의 죽으심을 아예 차라리 모독하려면 그런 짓 하라 말이죠.
갈라디아서 2장에 나오잖아요. 이제 와서 율법을 거론하다니. 그러면 이 십자가 피 흘린 게 무슨 의미냐 이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안식일 지키고 뭐 십일조, 절기를 지켜? 너희들은 그거 지키다가 복음에서 떠날까 내가 염려함이라. 이렇게 돼 있어요. 갈라디아 4장에 보면. 그걸 왜 지킵니까? 그거 왜 지키느냐? 갈라디아서 보니까 왜 지키느냐 하면 자기 행함, 자기 사적인 잘남을 드러내거든요. 그렇게 잘났으면 네가 알아서 구원하지, 왜 십자가를 믿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십자가 믿어주는 것도 자기가 잘났어. 십자가 믿어줘서 구원받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 믿는 게 결국 뭐가 됐어요? 율법이 되고 만 거예요. 율법이 신약에서 늘어나 버린 겁니다. 세상에! 이런 악의적인 해석이 어디 있어요? 어떤 목사는 구약에는 십분의 일만 했는데 신약이기 때문에 더 많이 해야 된다고 십 분의 이 해야 된다는 거예요. 도대체 예배당을 얼마나 크게 지려고 그 짓하고 있어요.
십일조 있어요. 안식일 있습니다. 그런데 콩비지 속에 들어가서 그걸 짜보니까 피가 됐다니까요. 피 안에 뭐가? 예수님이 십일조고 예수님이 안식일 이예요. 그 피 안에 다 들어있어요. 피만 믿으면 그게 하나님의 의가 돼요. 피 나타난 걸 가지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게 돼요. 마지막 저주 받는 이 심판 받는 마지막 진노의 날에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의밖에 없습니다. 그건 율법 말고, 율법 외에 한 의입니다. 그건 화목제물, 예수님의 화목제물로 다한 의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신앙생활 어떻게 하면 됩니까? 신앙생활에서 신앙을 빼세요. 그럼 뭐 남아요? 그냥 살면 돼요. 누구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피동적으로 살려주는데? 주님이 주님 이미지를 디자인을 가지고 이거 창덕궁에다 격자처럼 얼룩덜룩한 주님의 은혜가 얼룩덜룩하게 묻히면서 드러나는 거예요. 그 작업을 할 때 말씀 가지고 우리에게 그렇게 하죠. ‘아! 이 말씀이 지금 이 형편이구나.’ 생활비가 없었는데 “먹는 거 입는 걸로 족한 줄 알라“ ‘아, 이제야 생각나네요. 아, 성경 말씀 내가 놓쳤는데 생활비가 떨어지니까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줄 알아라. 집에 아직 먹는 거 있으니까 설 선물로 온 만두가 아직 남아있으니까 이걸로 족하다. 왜 주기도문에 뭐라고 돼 있어요? 무슨 양식? 일용할 양식, 일용할 양식만 주면 되니까. 감질나죠. 일용할 양식만 주니까. 만나 안 끝났어요. 지금이 광야라는 겁니다. 주님이 동행하지 않으면 너는 양속의 땅이고 천국이고 어림도 없다는 거예요.
문제는 너희들 자체가 바뀌어야 되는데 너희는 세상 보고 바뀌라고 자꾸 우기고 칼로 대사 찔러 죽이고 하는데 죽지는 않았는데, 네가 바뀌어야지. 네가. 사람 사는 게 억지, 모든 게 너무 억지니까 스트레스 받잖아요. 스트레스 받으니까 암 걸리고 하는데 왜 억지냐, 자기 시간을 자기가 만든 연출한 시간을 포기를 못하기 때문에, 거기 자존심이 다 담겨 있고 체면과 위신과 가문의 영광이 다 들어있기 때문에 그것이 자기만 갖고 있는 게 아니고 식구들에게 이걸 강요를 하게 돼요.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 줄 아느냐.’ 이렇게 강요를 하다 보니까 서로가 서로를 교육하고 서로가 제한시키고, ‘우리 집안은 기독교 집안이니까 교회 나가라.’ 이것도 하나의 뭐에요? 주님 영광도 아니고 자기 영광이죠. 체면 유지죠.
따라서 요한복음에서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만나가 되시고 살과 피가 되기 위해서는 마귀가 필요하고 육밖에 모르는 우리가 고맙게도 꼭 필요합니다. 정말 필요해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재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의 막 사는 것이 주의 일에 꼭 필요해요. 우리는 어떤 고백을 하면 되느냐 하면 이 고백을 하면 됩니다. 뭐냐 하면 ‘우리가 하던 모든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입니다.’라고 동의하면 돼요. ‘제가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것은 목사 짓하고 하는 모든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입니다.‘라고 죄인의 괴수로서 본인을 재료로서 사용하게 되면 그걸 가지고 주께서는 하나님의 일은 내 담당이다 해서 주의 일을 해버려요. 재료는 우리가 제공하고 일은 안 되는 일을 믿음도 없는 것을 믿음 되게 함으로써 모든 공로와 은혜를 오직 주님께만 돌리게 하는 방식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 이예요. 죄인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필요 안 해도 뻔히 살아가면 죄인 되지만.
이거 하면서 중간에 놓치기 쉬운 게 있어요. 뭐냐 하면 27절에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그 다음에 놓치는 게 있어요.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뭘? 도장, 도장이죠. 인 쳤다. 도장 찍은 분이다. 고 이야기합니다. 지금 사람들은 이 당시 오병이어 사람들은 ‘메시야입니까?’라는 것을 본인이 알고 있는 기적을 행할 때만 메시야라고 자기 폐쇄된 공간에서 자기규정을 일방적으로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뭐냐 하면 너희들이 너희 규정을 가지고 나에 대해서 오해하는 그것이 예수님의 인 치심을 드러내는 조건이 되고 상황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우리 같으면 막 때리고 ‘똑바로 하란 말이야, 그렇게 밥을 많이 주고 떡을 많이 줘도 먹어도 진짜 모르지? 이래서 구원받겠어?’ 하고 폭력을 행사하고 ‘꿇어 앉아.’ 이렇게 할 건데 너희들이 나를 오해한 그것으로 인하여 비로소 나의 인치심이 제대로 윤곽이 드러나게 된다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의 의라 하는 것은 죄 속에서 의가 나오게 돼 있어요. 죄가 없는 곳에는 의가 안 나오게 돼 있습니다. 죄를 지어보세요. 의 나오지. 아무나 나오는 건 아니고. 성도에게만! 성령 받은 사람에게만 죄 속에서 의가 나옵니다. 따라서 그 방법을 하나님이 사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욱 더 죄인 되게 해요. 어떤 방법으로? 말씀으로 해요. 말씀을 주게 되면 전에는 이게 옳다고 했다는 것도 말씀에 깊이 들어가 보니까 아니 그것마저 죄라면, 도대체 내가 그러면 의로운 게 뭐가 있다는 말입니까? 가끔 짜증날 정도로 아주 바닥을 긁어. 그런데 그 바닥을 긁어봐야 소용없어요. 또 누룽지 또 생겨요. 꼭 발바닥 뒤 굳은 살 같아요. 굳은 살 생기면 긁어내면 또 생기듯이 자꾸만 어디서 나오는지, 무저갱에서 올라오는지 자꾸만 이게 올라와요. 그런데 죄가 있어줘야 거기서 하나님의 의가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실 때에 즉결 재판을 하잖아요. 간이 재판. 그 자리에서 재판을 해버렸어요. 올 재판을. 너는 죄인이고 너는 의인이야‘라고 재판했습니다. 누가 죄인이냐 하면 바로 이레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 하고 구제하고 이런 바리새인은 지옥 가버리고, 누가 구원받았습니까? 세리죠. 그걸 수시 모집이라 해요. 저 뒤에서 고개도 못 들고 ’제가 죄인입니다.‘ 할 때 ’네가 바로 의인이다.‘ 라고 받아주잖아요.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나고 난 뒤에 성전에 죄인이라고 몰려드는 사람 많이 나올 거예요. 다 탈락입니다. 듀상이란 사람은 세계 최초로 욕조나 이런 거 파는 가게 있죠? 인테리어 파는데 가서 남자 소변기 하나 들고 와서 전시장 한복판에 거꾸로 해놓고 ‘샘’이라는 이름을 했습니다. 장소만 옮겨놓으니까 그게 세계 유명한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장소가 가게 있느냐, 전시장에 있느냐, 달라져요. 전혀 달라진 게 없어요. 꼭 우리 성도 같아요. 우리가 우리 손에 다루어지면 이건 자기 자랑만 나오고, 내 자랑만 나오는 요것이 주님이, 그것을 사도바울은 예수 안이라 하는데, 주님 손에 잡히니까 이것이 세상에 의가 나오네. 주님이 뽑아낼 것 다 뽑아내요.
말씀으로 죄인 되고 의로 건지시고 말씀으로 주시고 의로 건지시고. ‘주님 덕분에 제가 부자 되었어요. 너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면 ‘네가 반석이 중요한 거야.’ 하시면서 다시 마태복음 7장을 다시 깨닫게 하는 거예요. ‘너는 껍데기만 좋아하지 말고 네 반석을 봐. 네가 모래 위에 집이 지었어.’ 이걸 새삼스럽게 새롭게 깨닫게 하시는 거예요. ‘그저 이렇게 핍박을 받아서 억울해요.’ 하면 “먹는 거, 입는 걸로 족한 줄 알아라.“ 이런 거예요.
항상 말씀으로 뭔가 됐다 생각하면 말씀이 들어와서, 이 말은 뭐냐 하면 ‘네가 너를 다루어서 너를 작품 만들어서 네 힘으로 천국에 납품하는 게 아니고, 천국에서 이미 납품으로 삼았기 때문에 주께서 인간 바꾸는 작업을 주께서 해줘야 결국은 ’모든 공로는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라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많이 용서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겁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그 말씀처럼 요새는 교회가 거꾸로 돼 가고 있습니다. 방향이.
인 쳤다는 말이 어려운데 인 쳤다는 말은 구약 용어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인 쳤다는 말은 도장 받았다 이건데 도장이란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이게 계시할 때 이게 감추어진, 이거는 전체 속에 포함되지 않은 비-전체란 뜻입니다. 이제 비-전체 이해하시겠죠? 인 쳤다는 말은 우리 보기에는 똑같이 보이지만 특별난 사람이다. 특별난 사람인데 전혀 특별난 구석을 찾아봐도 너는 찾지 못할 정도로 특별난 사람, 왜, 너무나 평범하기 때문에. 너무나 평범하기 때문에! 평범하기 때문에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한 거예요. 그러면서 주께서 특별나다고 했을 때 우리는 졸지에 인 치심을 포위하고 있는 그런 입장과 예수님과 차이나는 사람이 돼 버려요.
일은 누가 한다? 인 치심 되신 메시야가 하고, 혜택은 누가 본다? 인 치심에 의해서 혜택 보는 사람은 그 주변에 모여들게 돼 있고 그래서 구원의 방법은 뭐냐, 예수님만 머리가 되고 우리는 지체가 되는 그 방식을 이 지상에서부터 이미 개시를 했다는 것이 ‘나는 인 쳤다. 너는 아니다.‘라고부터 시작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자, 일 시작, 자, 일 해야지. 일 해야지, 이제.’ 이런 뜻 이예요. 어떻게 하느냐, 예수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했죠. 예수님이 인 쳤다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못 알아들어요. “저희가 묻되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라고 돼 있어요.
자, 원을 봅시다. 여기 원을 치고 또 동그라미를 쳐봅시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바깥의 원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할 때 우리 큰 원에서 작은 원을 이해합니까? 이해 못 합니까? 이해 못하죠. 왜 육이니까. 영은 육을 살리고 육은 육일뿐이고, 육에서 영을 뚫을 수 없어요. 결국 이 사람들 다 떠나니까. 떠나도 이만큼 혜택주고 빵 주고 떡 주고 거기다 이만큼 이야기해주고 백날 해도 예수 안 믿죠. 손해라는 느낌이 드는데. 뚫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됩니까? 할 때 이게 비-전체거든요. 비-전체가 이 전체라고요. 전체에 포함돼 있는 흉터 같은 비-전체, 흉터, 안 좋은 거죠. 우리로서는 흉터는 안 좋잖아요. 빨리 봉합하든지 해야 되는데, 흉터, 흉터니까 찢어진 거죠. 이 비-전체에 의해서 이 전체가 다 하나님 일에 포용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행합니까? 했을 때 어떻게 행합니까? 할 때 주님의 답변이 뭡니까? 이렇게 행하라고 하지 않고 뭐라 합니까? 믿으라고 이야기했죠. 믿으라 하는 것은 이쪽에는 비-전체가 흘러넘치는 거예요. 그릇이 넘쳐서 얼마 전에 칠레인가 페루에 화산이 터졌잖아요. 화산에 화산재가 넘치듯이 주님의 행함이 곧 믿음이 되게 그렇게 조치하겠다는 겁니다. 네가 믿지 말고 주님의 행함으로 믿어지는 믿음과 네가 행해서 네가 믿고자 하는 믿음과 비교해보라는 겁니다. 그 차이를 보라는 거예요.
내가 믿는 것과 나로 출발해서 ‘내가 믿씁니다. 믿씁니다.’ 나로 출발해서 믿어지는 그 내용과 주께서 믿어지게 하는 내용과 그게 차이가 육과 영의 차이가 되는 겁니다. 그 차이를 느낄 때 이미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포섭된 사람이고, 포함된 사람이 돼 버려요. 그 예가 6장, 7장, 계속 나오는데 그 중에 한 예가 미리 이야기하면 9장에 소경 나오죠. 그 소경이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를 불러 세우잖아요. ‘저 사람이 소경 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할 때 “자기 죄도 아니고 조상의 죄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 거다“ 했는데 본인은 영광이 뭔지 몰라요. 그냥 본인은 신앙생활 않고 그냥 살아요. 소경 된 채 그냥 살았는데 주께서 이걸 다루었죠. 다루니까 결국은 그 사람들이 예수님까지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전체가 예수님의 행함으로 완전히 덮어씌워진 거예요. 석고로 2층에서 부은 것처럼 물 확 부은 것처럼 온 전체가 주님의 행함으로 넘칠 때 그걸 믿음이라고 이야기한다 말이죠. 주의 믿음.
그러면 그 속에서 꼼지락거리면서 또 자기 믿음을 내놓겠죠. 자기 행한 거. 그러면 그 차이를 보자 말이죠.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유명한 간음하다 잡힌 여인, 제가 여러분 질문하겠습니다. 그 간음하던 여인이 용서받을 때까지 간음한 여인이 한 게 뭐가 있죠? 그냥 간음했죠. 그냥 용서가 덮쳤죠. 용서가 덮친 순간 그 사람은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 자기가 뭘 할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그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한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네가 자유롭게 살란 말이 아니고 네가 뭘 해도 그게 자유의 영향력 안에서 이미 죄에서 빠져나왔다는 증거물로 다루어지고 살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뭘 해도 용서받았다는 방향으로 가게 돼 있어요. 모든 게 용서받았다는 티를 내게 돼 있어요.
예를 들어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가 아버지한테 돌아왔잖아요. 그럼 탕자가 거기서 10년 살고 20년 살고 그 산 모든 삶이 뭐가 되었어요? 용서받은 삶이 되겠죠. 그와 똑같은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인 치셨기 때문에 인 쳤다는 말은 하나님의 계시 중심이라 했죠. 계시를 독점하고 있으니까 그 계시를 주께서 달걀이 있으면 달걀을 깨뜨려버리면 내용물이 퍼져 나오는 거예요. 퍼져 나오면 인 치심의 영향을 입게 되면 그 사람도 성령의 인 치심을 받게 되고, 가만히 있어도 성령이 와서 전부 다 인치시고 주의 일에 합류시켜서 구원 마무리까지 구원 마지막에 영생 얻는 것까지 주께서 다 하게 하셨으니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린도전서 15장의 말씀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죠.
그런데 아까 꼼지락이란 말 했죠? 이걸 놓치면 안 돼요. 꼼지락! 그런데 그 일이 지금 같으면 믿어지는데 또 돌아서게 되면 집에 가서 잘 때 보면 또 남편 술 먹고 오면 한바탕 하다 보면 이 꼼지락이 나와요.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왜 아직까지 술 못 끊고 있느냐?’ 하고 또 자기 행함을 내세우고 ‘주여 이렇게 내가 남편을 위해서 했습니다. 남편도 개과천선해서 깨우침이 있어야죠.’ 하는 어떤 내 믿음이란 결과를 얻고자 하는 거예요. 그게 놓쳤던 육이 다시 육이 나온 겁니다.
그래서 육은 늘 있어줘야 돼요. 늘 생겨나야 돼요. 이게 장단이 맞아서 퉁퉁, 탕탕, 농악의 국거리에 장단이 있거든요. 길게 하면 길게 하고 끊을 때는 퉁탕, 장단이 맞아야 좋지, 우리는 죄 짓는 것을 치면 주께서 의로 맞받아치고 이게 있어줘야 동행이 된다니까요. 최 성수의 동행. 누가 나와 함께 가리요. 이렇게 돼야 돼요. 일이 그렇게 되는 거예요.
베드로에게 마지막에 뭐라 했습니까?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간다.” 했잖아요. 이게 뭡니까? 네가 지금 믿는 건 맞는데 그렇다고 해서 네가 원하는 길로 내가 가만두지 않는다. 절대로 그렇게 두지 않는다는 거예요.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갈 것이다. 심지어 베드로도 그렇게 됐는데 우리는 가만 둡니까? 안 두죠.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의 싸움은 나의 구원의 싸움이 아니고 마귀와의 영적 싸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적 싸움! 우리 대장 주님이 주님 대장만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는 졸개로서 대장의 요소를 품고서 우리를 공격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를 공격하는 겁니다.
뭐 반찬 뭐 했다고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딴 건 다 좋은데 그 십자가 복음은 믿지 마라.’ 이런 식으로 공격이 오죠. ‘네 앞가림도 못하면서 돈도 못 벌면서 무슨 복음만 찾노.’ 이런 식으로 비아냥거리기도 하고 그렇게 하는데, 돈을 얼마나 벌어줘야 우리가 복음에 합당한 돈을 법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고요. 도대체 얼마나 잘나야 복음에 합당한 축복이 되겠어요? 그걸 비교하지 마세요. 우리는 그야말로 병든 자, 저는 자, 이런 자를 구원하는 것처럼, 현재 우리가 멀쩡해도 언제 우리가 병들지 모르고 언제 절름발이 될지 모르고 귀머거리 될지 몰라요. 하지만 주님의 디자인이라면 우리가 범사에 감사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일이 이미 개시했답니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따로 주의 일을 한다고 나섰지만 이제는 합류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일이 곧 주의 일인 것을 이제는 행하지 말고 인정케 하여 주시옵소서.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