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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5장 41절 / 순간 / 150101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5장 41절 / 순간 / 150101

정인순 2015. 1. 1. 19:26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녹취:이한례

가락-요한복음5장23(순간)150101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23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면서 아버지를 거론했죠? 그 다음에 아들을 거론했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을 유대 사회에서 쓰게 되면 사형입니다. 왜냐 하면 아들은 누구한테만 쓰느냐 하면 메시야에게만 쓸 수 있는 게 아들 이예요.

그럼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아들로 그렇게 간주하는 건 성경 어디 나오는 이야기냐 하면 다윗한테 준 약속에 그게 들어있어요. 다윗의 자손이 오는데 다윗의 자손은 하나님이 따로 생각해 놓은 아들 이예요.

그러면 기존의 이스라엘은 뭐냐 기존의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죠.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아버지가 어떻게 돼요? 아들이 어떻게 돼요? 두 종류가 돼 버리죠. 집단적 아들이 있고 개인적 아들이 있죠. 그리고 개인적 아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눈에 보이지 않고, 다만 집단적 아들이라고 하는 집단만 형성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집단적으로 아들이란 명칭을 하려면 추가적으로 뒤에 보태져야 되겠죠. 진짜 아들이 와서 “얘들아, 나 기다렸지? 그렇지? 아이고, 너희들 나 기다린다고 고생했다.‘ 이렇게 합류가 될 때, 합치가 될 때 비로소 ’아, 우리 이스라엘이 진짜 아들 맞네.‘라고 확정이 되겠죠. 그래서 그들은 메시야가 오기만을 학수고대한 겁니다. 진짜 우리가 이스라엘이 정말 택하신 백성이라고 확정지어줄 그걸 증명해 줄 오실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던 거죠.

그러면 그들이 고대할 때 그냥 떡국이나 먹으면서 맹탕으로 기다렸을까요? 뭔가 사전에 준비를 했을까요? 철저한 준비를 하였죠. 아까 집사님이 완벽 하는데, 세상에 최고의 완벽은 바로 유대인입니다. 특히 그들은 어디에 사활을 걸었느냐 주의 말씀 실천에 사활을 걸었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이것은 말씀을 장난삼아 준 게 아니거든요. 반드시 실천하게 되느냐 여부에 따라서 네 운명이 확정되니까 지키면 복 받고 못 지키면 저주 받으니까, 물론 여기서 완벽이라 하는 것은 말씀대로 할 때마다 완벽이란 뜻은 아니고 무슨 여지를 남겨 두느냐 하면 그 말씀에 대해서 ‘아유, 제가 많이 모자라죠. 제가 많이 부족하죠. 앞으로는 내가 잘할게요. 이 말씀 보니까 내가 정신 차렸습니다.’라고 회개하고 반성할 수 있는 그러한 여지까지 하나님이 인정했다고 포함시켜주는 겁니다.

얼마 안 됐기 때문에 반복을 해드려야 돼요. 서비스니까. 요한복음 5장 23절 할 이야긴데 거기 아들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선 제가 한번 써볼게요. 우리 이 세상에서는 생전 지각을 모르는 완벽주의자가 오늘 지각을 해버렸는데...자, 먼저 여러분한테 한번 물어볼게요. 여러분, 아버지가 먼저입니까? 아들이 먼저입니까? 아버지가 먼저 있어야 그 다음에 아들을 낳든지 생기잖아요. 그래서 아버지만 알면 아들은 저절로 알게 돼 있죠. 아버지가 나타나서 ‘여러분 얘가 제 아들입니다.’라고 소개하게 되면 같이 아버지 때문에 아들이 아들로서 확정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이 굉장히 어려워요. 왜냐 하면 이 세상에서는 아버지가 먼저 있고 아들이 나중인데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아들이 먼저고 아버지가 나중이 돼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그렇게 해줘야 자칭 아들, 아들이란 집단, 아들 집단이 뭐라 했습니까? 일찍 온 사람들, 아들 집단을 제가 뭐라 했어요? 들었잖아요. 돌아서면 잊어버린다니까. 아들 집단을 이스라엘이라고 한 거예요. 요거는 출애굽기 4장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너는 내 장자라” 분명히 언급을 했거든요. 아들이라, 장자라 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말씀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 된 이유는 아버지는 몰라요. 아버지는 안 보이시니까 몰라요. 어제 수요일 날 그런 설교 했잖아요. 아버지의 영광을 만나면 다 죽으니까, 모세도 아버지 얼굴을 못 봤죠? 만나면 죽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우리들 가운데서 각 한 집에 우리의 아들들이 있어요. 그 우리 아들들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아버지 아들로 바꾸는 겁니다. 출애굽기 13장에 나오죠. 출애굽기 13장에 어린양 피 발라버리면 그 집안에 다 죽는 게 아니잖아요? 애굽 집안도 다 죽은 게 아니고 바로의 누구만 죽죠? 바로의 장자만 죽죠? 바로의 큰 아들, 둘째 아들 죽었습니까? 큰 아들 죽었죠. 그리고 바로의 왕궁에 감옥이 있었는데 감옥에 있는 죄수의 큰 아들만 죽어요. 큰 딸을 괜찮아요. 여자라서 좋아요. 큰 딸은 안 죽어요. 맏아들만 죽어요.

그런데 바로 이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차출한다. 맏이만 차출하죠. 요 문제가 상당히 복잡한 게 있어서 제가 먼저 물어봅니다만 메시야, 중보자라 하는 것은 우리 힘으로 못가고 우리를 천국 보내주기 위해서 다른 제 3자가 와야 된다는 게 중보자잖아요. 그 중보자를 그냥 보내면 되잖아요? 중보자 앞에 명찰 붙여서 ‘중보자’ 써서 오면 누구나 글자 아는 사람들, 또 글자 모르는 애들은 ‘엄마, 저 사람 누구야?’ ‘중자자야.’ ‘그래요?’ 다 믿을 수 있는 문제잖아요. 그러면 일이 굉장히 간단하게 끝날 문제를, 왜 하나님께서는 각자 집안의 아들을 차출시키죠? 왜 일을 복잡하게 만들죠?

그것은 바로 뭐냐 하면 이게 성경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그게 뭐냐 하면 그들로 하여금 (카메라에 안 나오죠?) 오해케 하기 위해서. 오해! 오해하는 거예요. 어떤 오해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서 다시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자격자가 있다는 그 오해가 결국 오해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나는 이 땅에서는 고생했지만 죽어서는 좋은 나라 가야만 하는 자격이 있어.‘라는 스스로 그렇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본인이 그렇게 그런 염원을 갖고 있다는 그 자체가 본인의 분수를 모른다는 거예요. 본인의 주제파악이 안 된다는 겁니다.

신을 믿는데 목적이 있고 이유가 있죠. 신을 믿는 이유가 뭡니까? 사람이 뭔가 믿는다는 것도 일종의 노동인데 뭔가 노동할 때는 이유가 있어요. 누구한테 이익이 됩니까? 믿는다는 노동이 나한테 구원이란 효과, 결과가 주어질 때 나한테 이익이 되겠죠. 그래서 이미 나한테 이익이 생기는 쪽으로 나는 일하겠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하나님이 보시는 우리의 본래 모습과는 이게 안 맞는 겁니다.

로마서 9장에 그런 게 나와 있죠. 너희들이 달음박질해도 구원해 주지 않아. 너희들이 부르짖어도 구원하지 않는다. 오직 구원받은 자는 오직 긍휼히 여긴 자만 구원한다는 겁니다. 긍휼히 여긴 자. 그러면 여러분 물어봅시다. 긍휼히 여김을 받기 위해서 노력하면 구원받습니까? 안 되죠. 이미 하나님의 조건이 누구든지 구원된 사람은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긍휼히 여겨서 구원했다는 그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로마서 9장에서, 11장에서 제시했거든요. 제시하니까 그 조건을 들은 우리가 그 조건에 맞추기 위해서, 왜 맞추려고 하죠? 맞춰야 본인이 구원받으니까. 맞추려고 해서 긍휼히 여길 짓을 하게 되면 그 짓은 긍휼에 포함될까요? 포함이 안 될까요? 포함 안 됩니다.

어떤 짓을 해도 주님의 일방적인 긍휼에 우리의 노력이 삽입되지를 안 해요. 거기에 첨가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가지고 먼저 우리 주제파악을 평정하시는 작업부터 먼저 해요. 구원이라 하니까 ‘야, 진짜 우리가 고대했던 그것이 그거야. 주여 덥석 물겠습니다. 덥석 가지겠습니다.’ 하는데 그걸 덥석 가지게 되면 우리 손에 덥석 쥐면 손에 화상 입습니다. 타버려요. 우리는 죽어버립니다. ‘어딜 만져? 네가 만질 것 만져야지. 어딜 만져.’

그 하나님의 구원하겠다는 구원의 소식이 다 우리를 비껴가요. 비껴가서 어디를 겨냥하느냐 하면 우리 속에 안 계신 분을 향하여 구원이 주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어려운 말로 철학적 용어를 써서 죄송합니다만 용어를 쓸 수밖에 없는데 그걸 ‘부재자’ 존재하지 않는 사람 이예요. 부재자. 없는 사람을 향하여 한 겁니다.

예를 들어서 ‘어린양의 피를 발라라.‘ 그것은 어린양의 피를 바른 사람을 구원하는 게 아니고 그들 가운데 없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어린양의 피를 바른 거예요. 그런데 거기 있는 인간은 오해하고 곡해하기를 우리가 피 발랐으니까 우리 가정이 구원받았다고 여기는 겁니다. 심지어 출애굽을 오늘날 우리가 출애굽을 보면서도 ’옛날 사람은 참 좋겠다. 어린양 피 발라서.‘ 얼마나 편리해요? 페인트 통에다 어린양을 잡고 피를 바르는 거예요. 그럼 아침에 페인트 칠 하는 솔, 그 솔 가지고 아침에 바르면 안 되고 아침에 바르면 큰 일 나죠. 저녁에 양 잡고 고기 바비큐 해서 먹든지 먹고 아버지는 가장해서 천사들이 잘 보이도록 문지방하고 문설주 거기다 바르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그 본문 보면서 의문점이 하나 있었어요. 만약에 문지방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잖아요? 집이 너무 허름해서. 그때는 두 집, 세 집이서 문지방 있는 집을 같이 합류해야 돼요. 셋방살이해야 돼요. 만약에 우리가 빌라 살면 어린양의 피를 어디 발라야 됩니까? 대표적인 현관에 발라야 돼요. 방마다 바르면 안 돼요. 들어올 때 수위 지키는 거기 한번 바르면 돼요. 그걸 경우도 있고 또 이런 거 생각해 보세요. 양을 잡아야 되는데 돈이 없어서 양을 못 잡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이거는 양 잡을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합류해야 됩니다.

합류하면서 여기서 나타나는 게 뭐냐 대표성이죠. 어린양이라는 그 대표성에 개인의 숫자는 무시당하는 겁니다. 우리교회 몇 명이라는 게 무시당해요. 너희 교회 입구에 뭐 바르는가, 중요하고 그 안에서 뭐가 외쳐지느냐가 중요하지, 우리 속에 숫자가 몇 명이냐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전세버스 10대가 다 같이 대구에서 서울로 간다면 그 몇 명 타느냐에 관계없이 방향이 중요하잖아요. 두 명 타도 서울 행하면 가는 것이고, 10명 탔는데 대전 가고 청주 가면 그건 서울 못 오는 거죠.

어린양의 피를 발랐다는 말은 그 방향성이 어린양의 구원이 일체되고 합치되는 분이 우리 가운데는 부재하지만 어느 장소에는 계신 겁니다. 그 계신 장소에는 우리 힘으로는 가지 못하고 어린양의 피를 바르는 작업에 참여하게 되면 그 어린양의 피 바르는 작업의 반복이 되는데 그 반복이 바로 모세가 매일같이 했던 상번제, 제사제도에요. 제사제도에 이끌려서 가다 보면 거기에 앞당겨서 제사제도를 미리 앞당겨서 제공한 그분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그게 아까 두 번째 동영상 녹화했던 히브리서 11장 이야기죠.

참 어려운 이야긴데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그냥 예수님께서 여기 명찰을 붙이고 ‘나 중보자’ 이렇게 오시면 간단한 문제를 가지고 일찌감치 어린양의 피 바르란 복잡한 문제를 왜 했느냐? 물으면 모르겠죠. 기억도 안 나죠. 왜 했느냐 하면 인간은 뭐가 안 된다? 주제파악이 안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는 모든 구원은 ‘자, 구원 간다. 받아라.’ 이게 아니고 네가 받을 쨉이 못 된다는 겁니다.

그런 경우가 세례요한도 마찬가지에요.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니까 사람들은 축구 하듯이 ‘어이, 공 간다’ 하니까 공 받으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농구할 때 패스 할 때 ‘어이, 공 간다.’ 하면 ‘알았어. 받을게’ 세례요한은 말하기를 “천국이 간다.”는 말은 다시 말해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은 뭐냐 하면 아무도 천국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너희들은 천국을, 그 하나님의 나라를 오해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천국이 간다는 것은 너희를 구원하는 천국이 가는 게 아니고 너희들 작살내는 도끼가 거는 거죠. 그래서 세례요한이 도끼 이야기를 집어넣습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그리고 바리새인이 오니까 “니들이 왔어? 아이고, 니들이? 니들이 어디를 가? 어이구, 웃기고 있네. 니들이 천국 가면 돌멩이가 천국 가겠다. 이 독사의 새끼들 니들이 왜 오는데?”

하여튼 세례요한이 욕쟁이 할머니 같아. “독사의 새끼들 니들이 왜 왔는데?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거기 들어와? 니들이 거기 왜 왔는데? 다른 사람들 봐, 지금 뭐하고 있어?” 다른 사람들은 전부 다 완전히 삼천 궁녀처럼 지금 어디에 빠지고 있습니까? 요단강에 물세례하려고 빠지고 있죠. 전적으로 부재, 부재를 강조하는 이유가 내가 여기 있고 나를 구원하는 요소를 내 쪽에서 찾는다는 자체가 이것은 우리 가운데 부재자에 대한 배려가 아니고 모독이 되는 겁니다. ‘나 여기 있습니다. 한번 건져보시지? 신이시여, 나 같은 인간 한번 건져보셔서 신의 자비로움의 솜씨를 한번 발휘해 보시죠?’ 이 건방 떨고 교회 안 나오는 믿는 가정에 안 나오는 남편들이 하는 소리 아닙니까? ’너 그렇게 교회 충성하는 것 같으면 나도 너 뒤따라 붙들고 나중에 죽으면 천당 가겠다.‘ 하는 그런 의심, ’신이 있다면 나, 이 술 고래, 나를 개과천선해서 바꿔보시지, 그럼 내가 당신 믿어줄게,’

이 이야기는 어디 나오느냐 하면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가 예수님한테 하는 이야기죠. 예수님이 뭐라 거기에 대해서 뭐라 했습니까? ‘니가 하나님을 시험할 입장이 된다고 생각하나?’ 마귀는 피조물이잖아요. 피조물이 창조주 보고 ‘니 창조주다운 면모를 보이면 내가 믿어줄게.’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자격이 됩니까? 안 되잖아요.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여 당신이 메시야란 헛소문이 있는데 내 앞에서 당신이 메시야다운 기적을 보여주면 내가 당신을 메시야로 인정해 줄게.’라고 요청할 수 있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까? 그들이? 아니죠.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 재판하면서 예수님한테 묻죠. “진리가 뭐지?” 자기가 그걸 물을 쨉이 됩니까? 진리를 앞에 두고. 진리를 앞에 두고 진리가 뭔지 묻는다는 것은 봐도 모르겠단 뜻이거든요.

침해 걸린 노인네가 자기 아들을 앞에 두고 ‘아저씨, 좀 전에 우리 아들 여기 있었는데 어디 갔죠?’ 묻는다는 것은 정신병자란 뜻이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은 전부 다 정신병자란 말 이예요. 정신병자가 천국 간다는 건 다 헛소리에 해당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 다시 봅시다. 요한복음 5장 23절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아버지를 공경을 못하죠. 그렇죠? 아들을 공경치 아니한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못한다는 말을 왜 아버지 여호와를 찾고 있는 그 당시 유대사회에 왜 이야기를 하느냐 이 말이죠. “너희 아비는 마귀”란 뜻 이예요. 너희는 마귀가 포장해 놓은 가짜 자아를 가지고 지금 누굴 기다린다? 메시야를 기다리는 거예요. 왜, 자기들은 집단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아들이니까 우리만이 아들 오면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그런 모든 자료가, 정보가 우리한테 완전히 독점적으로 갖고 있다는 겁니다. 사실은 그 정보가 씨잘데기 없는 정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유대 속에다 메시야를 보내버리죠. 얼마나 그 차이가 나는지를. 어디까지 차이가 났습니까? 결국 한 쪽은 죽이고 한 쪽은 죽임을 당할 정도로 차이가 난 겁니다. 그 죽임 사건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 속에 집어넣어줄 때 ‘주여 제가 바로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는 말을 비로소 할 수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이 바로 성령 받은 사람이고 성도입니다. ‘예수님 공경합니다.’가 공경이 아니에요. ‘제가 어디 감히 주님을 알아볼 입장이 되겠습니까? 저는 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을 못 알아볼 수밖에 없는 인간입니다.’라는 그 고백, 그 고백이 바로 주님 앞에 주님을 공경하는 고백입니다. 주께서 안 되는 걸 되게 하신 거예요.

안 된다는 것을 언제 아느냐? 구원받고 난 뒤에 내 힘으로 안 됐다는 사실을 사후적으로 깨닫게 되는 겁니다. 이게 복음 이예요. 복음은 거래가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제시할 때 알아먹어라, 가 거래가 아니고 네가 어떤 일을 하던 간에 이미 내가 앞당겨서 너에게 그런 조치를 내린 당사자가 바로 네가 아니고 나란 말이죠. 너에게 구원이 적합하도록 일어난 모든 시츄에이션, 상황은 네가 유발한 게 아니고, 네가 만들어 낸 게 아니고, 내가 의도적으로 너를 그렇게 유발한 거예요. 아시겠죠?

그 점을 알고 다시 한 번 출애굽 유월절 봅시다. 어린양 잡아서 문설주에다 피를 발랐다 이 말이죠. 바를 때 그들은 오해한 거예요. 이걸 바르면 누가 산다? 내 아들 산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걸 안 바르면 누가 죽는다? 옆집 애굽의 가정에서는 뭘 안 발랐기 때문에? 피를 안 바르면 그들은 그날 밤에 죽는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게 잘못된 해석 이예요. 왜냐 하면 유월절 끝나고 난 뒤에 이쪽, 저쪽, 그러니까 애굽이나 피 발랐던 집이나 아들은 다 사라졌어요. 다 사라졌습니다. 그 장남이 그 다음날 아침에 식사를 해도 그 장남은 그전의 유월절 그전의 장남이 아니에요. 누구 소유가 되느냐 하면 바로 여호와의 소유가 되는 겁니다.

그게 출애굽기 한번 봅시다. 오늘 본문 예수님 이야기하면서 구약과 겸해서 할 수밖에 없어요. 출애굽기 13장 1절에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내게 돌려버리면 빈자리가 생기죠? ‘원래 너는 내 장자야.’ 맏이잖아요. ‘너는 어떤 경우라도 너에게 이 대복상사를 물려줄 내 아들이다.‘ 복 수호한테 그런 이야기했어요. 드라마에 그런 거 있어요. 그 아들이 회사를 포기하고 떠나버리면 그 엄마의 자리에 뭐가 빠져있어요? 아들 자리가 빠져있죠. 누락돼 있죠. 허전하죠. 아들은 엄마로서는 그렇게 나쁜 짓을 해도 하는 이유가 아들에게 그 회사를 물려주기 위해서 온갖 나쁜 짓을 한 거예요. 그런데 원래 그 자리는 자기는 아들이 있다고 생각한 자린데 만약에 성령이 찾아와 버렸다. 그 자리가 있어요? 없어요? 그 자리는 부재의 자리에요. 없는 자리라는 사실을 뒤늦게 성령이 임하면 깨닫게 되죠. ’아니 내가 한평생 이것 때문에 산다는 그 ‘이것 때문에’ 하는 그 이것의 자리가 내가 일방적으로 만든 자리지, 하나님이 허용한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 한평생 나는 헛수고 하면서 살아온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하잖아요. 네가 무슨 일을 할 때 이런 일한다 하지 마라. ‘주께서 살게 해주시면 일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된다는 거예요. ’나는 요거해서 영광 돌린다.‘ 라는 제발 그런 헛소리 좀 하지 마라. ’내가 선교사해서 ...‘ 그런 헛소리 하지 말라 말이죠. 그 선교사는 돈 빼먹기 위해서 한 소리고요, 절대로 그런 소리에 넘어가면 안 돼요. 이 세상에 선교사는 없어요. 선교사는 여전히 예수님만이 선교사지 어느 누구도 선교사가 아닙니다.

그럼 선교사는 뭐냐? 죄인 이예요. 선교하면서 비로소 죄를 알아야 될 죄인, 선교 안 하면 자기 죄를 모르는 죄인, 선교사가 그 정도만 해도 복 받은 선교사에요. 선교해도 자기 죄 모르는 선교사가 한둘이 아니거든요. 선교해 보세요. 선교의 목적이 결국은 돈이었습니다. 아무리 명분으로 주의 영광, 어려운 사람, 캄보디아가 어떠니 뭐 아프리카 병, 국경 없는 의사 뭐라 해도 결국은 뭐로 돌아가는가? 돈으로 가요. 그 사람들은 자기가 죄를 지으면 죄가 생겨나는 게 아닙니다. 죄가 아니기 때문에 죄를 짓게 돼 있어요. 죄라는 그러한 캡슐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죄를 짓게 돼 있지 죄는 본인이 못 지어요. 죄가 죄 짓게 하는 거예요. 아! 이 사실 좀 알았으면 좋겠어요.

목사가 교회 하면서 죄 짓는 것은 자기가 목사하면서 죄 짓고 싶어서 짓는 게 아니고 교회 자체가 목사를 죄 짓게 만들어요. 죄 짓게 만든다니까요. 야고보서에 나오는 말이 헛말이 아니라니까요. 너희들이 부자가 오면 대접하고 가난한 사람은 배척한다. 이것이 난 안 그래야지. 가 아니라 원래 그래야 돼요. 교회는 그래야 되고 그렇게 해서 교회는 망해야 교회가 되는 겁니다.

자기 딸이나 아들 시집보내고 장가보내면서 ‘난 믿음 좋은 사람하고...’ 일단 믿음 좋은 사람이 없고요. 두 번째 믿음 좋다는 것은 앞에 있는 조건이 전제 될 때 그 다음에 믿음이 있다는 거예요. 성격 좋고 돈 많고 인물 잘 생기고 이런 게 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조미료 하듯이 믿음이 좋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우리 자신이 죄 안에 있어요.

요번에 11일 날 수련회 할 때 제가 강의 초반에 그 이야기를 할 예정인데 할 예정입니다. 주께서 허락 안 하면 안 되지만 멘델의 법칙 할 거예요. 멘델의 법칙, 우성과 열성을 따지는. 왜 멘델의 법칙을 해야 되느냐 하면 생물의 생식 법칙에 표현력이 있고 뒤에 감춰져 있는 열성의 요소가 있어요. 항상 인간은 나타나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뒤에 어두운 그림자가 있어요. 생물학에서도 이걸 이야길 한다고요. 사실은 그 어두운 그림자가 더 커요. 나타난 것은 가장하기 위해서 꾸미는 가장에 불과하거든요.

그런데 가면을 썼는데 인간의 문제점이 가면을 벗겨버리면 맨 얼굴이 없어요. 가면 자체가 자기 얼굴이 돼 있었기 때문에. 본인이 가면을 써도 벗을 수 있는 능력은 없어요. 그 유명한 미국의 코미디 영화 있잖아요. 마스크란 영화 있죠? 마스크가 본 얼굴 이예요. 마스크 안에 본 얼굴이 있는 게 아니고 마스크 자체가 본 얼굴 이예요. 흉측하게 혀 튀어나오고 입 튀어나온 마스크 자체가.

옆으로 기는 집게 게, 손 하나가 커다란 게 있잖아요. 그 게한테 물어보세요. ‘게 너는 언제부터 손이 퉁퉁 부었어?’ 이건 묻는 게 아니에요. 태어날 때부터 퉁퉁 부어 나왔어요. 그래서 다윗은 말하기를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가면 쓰고 죄인 된 채 나온 거예요. 너무나 간단한 문제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메시야, 하나님 아들 모든 개념이 다 틀어진 거예요. 이게, 성경을
성경에서 아들을 공경하란 말은 그 말은 뭔 뜻이냐, 아무도 너희는 아들을 공백독, 만 독 해도 소용없어요. 신천지는 천 독 봐라 하는데, 백날 봐도 소용없어요. 백날 봐도 소용없다니까요.
경할 그런 입장이, 그런 능력이 없다 하는 것을 선언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본인은 모르니까 공경하려고 덤벼들죠. 그러니까 공경하려고 덤벼드는 그 자체가 드디어 숨겨놓은 죄를 표출한 거예요.

제가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예수 믿고 구원 못 받는다고요. 예수 믿고자 하는 우리의 본성이지 그건 구원과 관계없어요. 우리는 괜찮은 사람 다 믿으려고 해요. 예수가 이야기하면 예수 믿고, 부처가 이야기하면 부처 믿고, 하여튼 나한테 유리하고 나한테 장차 내 팔자가 핀다면 내가 무슨 짓이라고 다 할 용의가 있는 사람들 이예요. 우리가. 그걸 종교죠. 종교.

그런데 거기에 뭐가 있다? 부재. 내가 다룰 수 있는 대상이 아닌, 내가 뭔가 협상 테이블에 와서 ‘우리 같이 의논 좀 합시다. 좋은 게 좋잖아요?’ 이야기하려니까 그 자리가 없으니까 누구 보고 이야기해요? 아무도 없는데 없는데서 뭐가 나오느냐, 계속해서 뭐가 나와요.

이것을 지난 두 주째인가 이걸 지평이라고 하는데, 참 말이 어려우니까 사실 지평이란 말을 제가 쉽게 수정하고 싶어요. 지평이니까 글자를 뒤로 바꿔보세요. 평지, 평지가 수월하잖아요. 평지, 그거보다 더 수월한 단어가 뭐냐, 들판, 우리가 사는 들판이 있는데 우리는 맘 놓고 뛰놀아요. 김 우중이가 그런 이야기했죠?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이게 뭐냐, 들판 이예요. 그 김우중이 빌딩이 서울역에 있고 거기서 미생 영화 촬영했잖아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은 거예요. 지금도 종합 상사에서는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미생 드라마에 나오듯이.

대전에 어떤 집사님이 미생 드라마 보면서 어떤 점을 유심히 봤느냐 하면 거기 여자 사원 하나 나와요. 이름이 안 영희죠. 그 집사님은 뭘 보느냐 하면 걔가 연봉이 얼마 되느냐를 찾아봤어요. 보니까 나와요. 주의 깊게 보면 나오는데 연봉이 5천 이예요. 5천이니까 이건 러시아어로 통화가 되죠. 스펙을 그 정도로 쌓으니까. 그러니까 그 동네는 무슨 들판이냐 하면 연봉 최소 5천 되는 자들이 뛰노는 들판 이예요. 하청 업체는 그렇지 않아요. 연봉 2천 되는 들판에 뛰놀아요. 그쪽에서는 또.

그러니까 인간은 뭐냐, 각자, 각자의 평지, 지평을 만든다는 이야기를 철학자들이 그래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지평이 요구하는 대로 뭐가 생기느냐 하면 전에 했는데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니까 비로소 주체, 그걸 쉬운 말로 자아가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지평에서 뭘 하느냐, 지평에서 주체를 볼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호명을 해요. 호명을! ‘너는 계약직이야. 너는 계약직으로 불렀어. 너는 정직 직원으로 불렀어.’ 이렇게 호명 자에 따라서 ‘아, 나는 장 그래구나. 나는 계약직이구나. 나는 2년 하면 물러가야해. 나는 실수해도 계속 대리, 과장까지 달 수 있어, 누가 나에게 어떤 호명을 해주는 그것이 곧 내 자리가 되는 겁니다.

남자들이 평생 최초인 동시에 최후의 모습, 케이크에 반지 넣어서 꿇어앉아서 ‘나와 함께 결혼해주시겠습니까?’라고 그 여자를 호명할 때. 프로포즈할 때 그 여자는 비로소 자기 자리는 날라 가 버리고 어떤 남자의 아내가 되면서 동시에 그 집에 가자마자 예상치 않은 형수가 생기고 시동생이 등장하고, 그건 새로운 그 동네 들판이 되는 겁니다. 그 동네의 구조, 그물망 속의 하나의 지점으로 깜빡깜빡하고 이제는 점등되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 불러주지 않으면 우리는 자살하죠. 불러주지 않는 걸 가지고 쉬운 말로 백수라 합니다. 서른 넘은 노처녀 아무도 안 불러줘요. 선 봤다 하면 퇴짜 맞아요. 결혼해 놓고 여유부리면서 남편한테 불만 하는 것은 가진 자의 여유에요. 결혼 못한 사람한테는. ‘아유, 배가 불렀구만. 배가 불렀어.’

연봉 5천짜리 지평에서 좀 성추행적인 발언을 받는다. 그래서 삐졌다. 그런데 다른 연봉 2천에서는 뭐라 합니까? ‘이게 계집애가 배가 불렀어. 까짓거 5천 주는데 그 소리 못 들어? 앞으로 출세할 게 남아있는데. 딴 것도 다 자진해서 허락하겠다. 5천만 준다면 내가 뭘 못해.’ 이렇게 되죠. 보세요. 인간이 마귀가 만든 그 지평, ‘신이시여, 신은 나한테 뭘 해줄 겁니까? 그렇다면 내가 아낌없이 신에게 드리겠습니다.’라는 자기 지평을 유지하고 지키기 위해서 마귀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만든 영역에 신이 와서 후원해 달라는 겁니다. 십일조 아끼지 않고 드릴 테니까 이 돈 받고 내가 원하는 그런 행운이 찾아와야 된다는 거예요. 이런 오해가 계속해서 이스라엘 내부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것은 이스라엘 망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아들이 있잖아요. 집단적 아들이 집단적으로 망해버렸어요. 지난, 지난 설교에 성전 이야기할 때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성전 어디서 세워진다 했습니까? 성전은 불탄 데서 세워지죠. 이미 성전이 파괴된 자리에서. 교회가 어디 있느냐? 교회가 교회 아닌 걸로 들통 난 그 자리에서 비로소 교회가 시작되는 거예요. 왜 부재자, 어떤 부재, 우리가 거래할 수 없는 우리가 협상 테이블에 없는 그분이 일방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발췌하는 식으로 우리를 그동안 다루어져 왔다는 것을 소급해서, 사후 되돌아서서 우리는 그걸 느끼죠. ‘주여 제가 바로 죄인 중에 괴수였습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누가복음에 즉결재판한 장소가 나오죠. 재판, 마지막 심판이 있는데 그걸 앞당겨서 심판하는 자리가 있죠. 성전에서. ‘너는 끝났어. 이레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너는 지옥 가.’ ‘주여 죄인입니다.’ “네가 바로 의인이야.“ 재판을 아주 간편한 즉결재판이 시작돼요. 주님께서 했거든요. 심판주로서.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모든 것이 뒤틀렸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여러분이 안다는 느낌이 드니까 어렵게 해봅시다. 부재하다. 부재란 말은 쉬운 말로 없다죠. 없으신 분이 모든 것을 있는 것을 있도록 운영해 가는 겁니다. 왜 하나님은 안 보입니까? 자꾸 저한테 묻는 사람이 있는데 원래 창조할 때 그렇게 만들었어요. 창조할 때 창조주는 안 보이게 만들은 거예요. 대답이 됐죠? 원래 창조자는 보이는 식으로 안 만들었기 때문에 창조된 자는 창조자를 못 보는 식으로 만들었어요. 그러니 못 보는 식으로 만들어졌는데 인간이 죄 짓고 난 뒤에는 어떤 지점이 생겨요. 보이지 않는 분이 어떤 흔적을 남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아벨의 억울한 피가 쏟아내는 자리가 생겨요.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찾아오는 시점이 어느 시점이냐 하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직전까지는 오시지 않아요. 제사도 안 받았으니까.

그런데 언제 가인에게 찾아왔느냐 하면 가인의 손으로 피를 생산할 때, 예수님이 아벨과 스가랴의 피가 내 노선이라 했죠? 피를 만들 때 그 피 흘림이 창조주가 사실은 너희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암시를 주는 대목 이예요. 그때부터 그 사람들은 뭐냐 여호와 이름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4장 26절 한번 봅시다.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뭘 불렀더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죽음 사건, 죽은 아벨을 대신해 다른 신을 줄 때 죽이고 새로운 신을 주고. 라고 하면서 동시에 누구 계열은 떨어져 나갑니까? 가인의 계열을 떨어져 나가죠.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떨어져 나가죠.

그러면 여기서부터 노선이 어떤 노선입니까? 두 가지 노선이 되면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점점 윤곽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리고 그 여자의 후손이 구체화 된 것이 역사 속에서 없던 민족이 새로 태어났는데 그게 뭐냐, 유월절 통해서 없던 나라, 이스라엘이 새로 발생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을 타고, 마치 말 타듯이 그 이스라엘 속에 계시죠.

그래서 외부에서 만만하게 보고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되면 이스라엘은 자체적으로 힘이 없는데 그 속에 부재자의 모습으로 계시는 하나님의 이름, 주의 이름의 약속에 의해서 다른 나라가 늑살하게 깨집니다. 심지어 해가 멈추기까지 직사하게 패고 심지어 여리고성 돌기만 해도 여리고성 무너지고 애굽 군사를 죽이기 위해서 홍해 가로 유인해서 같은 인간인데 한 쪽은 물을 건넜는데 한 쪽은 ‘너 건너는데 우리도 건너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다가 그들은 바닷물이 합쳐져서 다 죽었습니다. 죽어가면서 그들은 뭐라고 원망했어요? ‘오, 신이시여 왜 바닷물이 합체합니까?’ 이렇게 원망했을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은 뭐라 하겠습니까? “원래 바닷물은 사람 가는 곳이 아니에요. 바다에는 물고기만 사는 거지, 원래 사람 사 가는 곳이 아니에요.” 그러면 그들이 뭐라 하겠어요? ‘쟤는요? 저들은 왜 건너갔습니까?’ ‘특혜거든요.’ 그걸 긍휼을 입었다. 특혜거든요. 왜 저들에게만 특혜를 줍니까? 특혜란 말이 그거거든요. 특별 혜택. 특별 혜택을 안다는 것은 특별 혜택을 요구할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특별 혜택의 의미가 반복해서 살아나게 돼 있습니다.

아침에 화장발 잘 맞는 것도 특혜에요. 특혜를 받은 사람은 모~든 게 특혜에요. 모든 게 범사에 감사하게 돼요. 성령의 열매는 그래서 열려지게 되는 거예요. 애쓰는 것은 성령을 몰라서 하는 소리에요. 그냥 막 살아요. 그게 성령의 열매라니까요. 또 이런 소리 들으면 사람들은 또 욕하고 오해할 거예요. 사람들은 막 살면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는 게 아니고 막 살아도 사후적으로 이미 열매를 맺게 됐기 때문에 막 사는 것이 열매를 훼손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어떻게 살아도 성령의 열매가 나로 인하여 침식되거나 손상되지 않는 그런 자신감, 자유 함이 있어야 돼요. 그거 없으면 우리는 맨날 마귀한테 놀림 받게 돼 있습니다. 마귀는 지금도 우리한테 요구합니다. ‘네가 신자야?’ ‘신자야.’ ‘신자 된 증거 대봐.’ 우리가 24시간 시달리는 게 시달리는 거예요. ‘네 신자 아닌 것 같아. 신자라면 이런 능력을 발휘해야지, 중보기도 하면 효과 봐야지, 효과 봤어? 못 봤어? 신자 아니잖아. 봐.’ 맨날 증거 대달라는데 피조물을 그런 증거를 요구할 입장이 못 됩니다.

피조물은 피조물 자체가 결과물로 살아가야지, 내가 자기가 원인 제공자로 돌아가면 안 돼요. 그 결과가 뭐냐, 주님 아니었으면 어떻게 이런 혜택을 받았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한 아들에 대한 공경이죠. 지금까지 결론 내리면 아들 공경이란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공경할 줄 모르는 죄인을 주께서는 계속해서 이용해 왔다. 사용해 왔다. 요렇게 내리시면 요한복음 5장 23절 해석 된 겁니다. 이 해석을 이렇게 복잡하게 가는 이유가 주께서 그렇게 복잡하게 구약부터 다뤄져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그러면 그래도 아직까지 우리가 미흡한 게 뭐냐 하면 부재자란 없다는 것인데 없다는 것이 실제 역사 속에서 없다로 나타나지 않고 희생과 아픔, 또는 핍박, 고난, 고통으로 나타나죠. 어제 수요일 날 설교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한 이사야가 봤던 그 놀라운 영광이 예수님한테는 어떤 영광이라 했습니까? 일그러진 고통의 얼굴로 나타났죠. 일그러진 고통, 십자가에서 아버지께 버림받은 일그러진 고통의 영광이 바로 요한복음 1장 18절에 의하면 품속에 있는 독생자의 영광이라 했습니다. 이 독생자의 영광은 사람들이 예상한 그러한 눈부신 영광이 아니고 너무나 그것과 정 극대, 정 반대잖아요. 눈부심은 너무 눈부셔서 못 보지만 일그러진 그 고통의 얼굴은 너무 참혹해서 꼴보기 싫어서 안 보잖아요.

제 아내가 tv보면서 ‘딴 데 해라’ 이러거든요. 언제 ‘딴 데 하라’ 하느냐 하면 아주 나쁜 사람이 자꾸 속임수 또 쓸 때 짜증나서 딴 데 하라는 거예요. 그걸 보고 제가 많이 느낍니다. ‘아하, 인간은 악을 싫어하고 선을 좋아하는구나.’ 그런데 그 악을 싫어하고 선을 좋아하는 자체가 그 자체를 주께서 싫어한다는 사실을 과연 우리가 알까? 우리가 악을 싫어하고 선을 좋아하는 걸 주께서 싫어한다면 우리는 기껏 뭐냐 하면 악을 좋아하고 선을 싫어하는 쪽으로 해서 그걸 바꾸는 식으로 하는데 바꿔도 싫어해요. 그러니까 우리는 빼도 박도 못해요.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돼요. 그냥 싫어요. 왜냐 하면 알지 않아야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베이컨이란 영국의 중세 학자는 아는 것이 힘이라 했는데 우리는 이래요. 아는 것이 화근이라. 아는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차라리 몰랐으면, 차라리 몰랐으면 암에도 안 걸렸을 걸 알아서 신경 쓰여서 스트레스 받아서 암도 걸리는데, 몰랐으면. 그래서 제가 맨해튼 마지막 예배 때 한 주제가 뭐냐 하면 젊은 30대 젊은 사람이거든요. 손을 놔라 했어요. 항상 그들은 경쟁해야 되는데 손 놓으면 경쟁이 안 되잖아요. 장 그래가 되느냐 안 되느냐 문제인데 손을 놔라 했습니다. 놓아 버리면 네가 분주한 것이 아니라 누가 분주하냐 하면 주께서 자기 세계를 하기 위해서 분주한 숙제와 일거리를 계속해서 주시는 거예요.

이게 같은 일을 하면서 내 일이라고 하니까 스트레스를 더 받는 거예요. 주님이 주신 은혜, 선물이라고 여기면 일을 해도 수월한데 이게 일을 해서 남한테 안 지고자 하니까 일을 해도 이게 껄끄러우니까 일이 안 풀리게 돼 있습니다. 억지가 되고 그걸 남들이 눈치 채게 되고 ‘네가 하는 게 자연스럽지 못해. 네가 화내면서 일을 하지?’ 설거지를 해도 남편이 웃으면서 도와주는 남편하고, 후다다닥 깨지는 소리 내면서 하면 ‘뭐 지금 설거지를 하는 거야? 깨는 거야? 아, 치워라 치워, 시키는 내가 잘못이지.’ 해줘도 억지로 하는 티가 나잖아요. 인생 억지로 살지 맙시다. 못 살면 죽으면 되고,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그런 마음으로 느긋하게 살아가셔야 돼요.

주님이 공경하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공경하라는 말이 아니고 주께서 우리를 만들어간다는 것을 믿으면 그게 공경 이예요. 내가 나를 만드는 게 아니고 주께서 만드시니까 공경 안하려고 해도 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주님이 우리에게 부재자가 되지만 주님 만나면 누가 부재자냐? 우리가 부재자가 돼요. 우리가 없는 존재가 되고 있는 존재는 있음은 주님에게만 적용되고 주님 있음에 주님 안에서 내가 여기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입니다. 나는 이제 죽고 내 안에 누가 있다? 주님만 있지 나는 없습니다. 그걸 묶어주는 사건이, 당신은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느냐, 바로 십자가 사건이 그렇습니다. 그럼 다른 사람이 ‘나는 백날 십자가 들여다봐도 목걸이 달고 다녀도 그걸 못 느끼는데 너는 왜 십자가를 그렇게 보느냐?’ 십자가는 우리가 파악하는 대상이 아니라 쳐들어오는 거예요. 성령이 앞장세워서 우리에게 덮쳐 씌우는 겁니다.

그래서 아들을 공경이라 하는 것은 이제 결론 내리겠습니다. 아들을 공경하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 아니고 우리의 지킬 일이 아니고, 주님의 자기 숙제에요. 주님의 자기 과업이고, 자기에게 속한 자기 일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일에 결과물이고, 방학숙제물이죠.

우리가 천국 갈 때 주께서 우리를 멱살 쥐고 아버지 앞에 나왔습니다. ‘이 놈도 건졌고요. 이 창녀도 건졌고요. 이 세리고 건져왔습니다. 아버지 잘 했죠?’ 우리를 멱살 쥐고 질질 끌고 주 앞에 내세웁니다. 이 인간 받을 면류관을 보세요. 나한테 던질 거예요. ‘던져라. 던져라 던져.’ 모든 면류관을 주님 앞에 던질 거예요. 아무것도 할 게 없어요. 지킬 것도 없어요. 유대인들은 말씀을 준 것은 지키기 위해 줬기 때문에 이걸 지키면 우리가 복 받고 못 지키면 저주 받는다. 따라서 본인은 절대로 저주 안 받아야 된다는 선입관, 잘못된 자기 주제파악 못한 태도죠. 저주 안 받기 위해서 말씀 지키려고 나가니까 그 말씀 지키는 것이 얼마나 이기주의적이에요? 개인주의적이고. 그리고 지켰다. 안 지켰다를 본인이 걱정되니까 안 지켜도 지킨 걸로 간주해 버렸어요.

마태복음 6장에서 이혼 증서 써주면 간음 죄 아닌 걸로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자기는 저주 안 받으려고 한 걸로 본 거예요. 구제하는 게 구제라고, 기도하는 게 기도하는 거라고 이렇게 흉하게 굶으면 이게 금식이라고 바리새인들이 먼저 앞서서 모델케이스로 자기를 기도 이렇게 하라고 한 거예요.

주님께서는 나와서 초를 치죠. “그 기도 아니야. 그거 구제도 아니야.” 구제하려면 어떻게 하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라고 이야기해버리죠. 왼손, 오른손이 사실은 그 정보가 두뇌에서 같은 장소에 있어요. 왼손이 하는 걸 오른손이 모르게 하려면 수술해야 됩니다. 왼손, 오른손 뇌관이 있어서 두뇌 왼쪽 오른쪽을 연결하는 다리가 있어요. 그걸 이렇게 강제로 묶어서 한쪽을 연결을 해야 되는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요. 주의 말씀 지키려 하니까.

그 말은 뭔 뜻입니까? 네가 죽었다 깨나도 내 산상설교를 못 지킨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못 지킨다는 말에 기뻐한 것이 아니고, 혹시 그거 못 지키면 내 코너 끝나는 거 아닙니까? 혹시 이거 못 지키면 저주가 형성돼. 절대로 자기는 저주 받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니가 뭔데?’ 모르죠. 모르는데 하여튼 뒤에서 마귀가 시키니까. ‘너는 어떤 경우라도 망하면 안 돼.’ 이렇게 교육을 해놓으니까. ‘주여. 저 망해도 주의 영광을 위해서’ 이렇게 되지 않고 ‘나 망하면 주님한테 항의할 거야.‘ 이런 마귀의 본성을 항상 터뜨릴 준비가 돼 있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나도 나를 안 건드리는데 하나님이라도 날 건드리면 난 가만 두지 않습니다.‘라는 항의 조. 반항. 그런 것들이 우리한테 있습니다. 공경요? 물 건너갔어요. 자기가 자기를 공경한다고 지금 바쁜데, 자기 외에 어디 끼어들 자가 어디 있습니까? 인간은 자기 공경에 모든 걸 걸었는데.

그 다음에 24절 보세요. 더 놀라운 사실 이예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요거 간단하게 말씀드리고 쉽시다. 여기서 “영생을 얻을 것이고”가 아니고 뭡니까? “얻었고” 죠. 그러면 주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 성립되느냐 하면 “이마 영생을 얻었고” 차원이 쳐들어 올 때나 믿음이 생기는 겁니다. 믿고 영생을 얻는 게 아니고 영생 얻은 자만이 믿음이 발생된다.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거예요.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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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요한복음5장23(순간)150101b-이 근호 목사

시간이 먼저 있었을까요? 순간이 먼저 있었을까요? 시간은 나중 이예요. 순간이 먼저 있었어요. 처음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7일 만에 천지를 창조했습니다. 7일이라 하는 그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고 기간, 고 기간은 어디에 맞춰졌냐 하면 장차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셔서 생활한 생활의 리듬에 맞춰서 천지창조가 만들어졌어요.

제가 어제 수요일 날 할 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예수님의 소리에 대해서 했죠? 많은 물소리라 했죠. 모든 총합, 창세기에 나왔던 모든 소리의 총합이 주의 입에서부터 나오기 시작한다는 말은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된다는 것은 창조주의 본래 모습을 회복했다. 또는 갖추었다.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창조의 회복을 할 때 그 때의 시간도 있을 건데, 그 시간은 순간에서 시간이 나오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순간이란 말을 하는 이유가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할 때 얻는 시간이 몇 분이십니까? 몇 분 만에 됩니까? 라든지 몇 시간에 됩니까? 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정리해 봅시다. 순간은 뭐의 부정이냐? 시간의 부정입니다. 시간을 거부하는 거예요. 이게 순간입니다. 순간이 몇 초입니까? 묻는 것은 불교에서 물어요. 불교에서 찰나, 불교에서 ‘찰나’ 라는 용어를 하잖아요. 그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보면 바보 같아. ‘찰나’의 간격이 얼마냐고 묻는 자체가 그 사람들은 순간의 의미를 몰라서 그래요.

시간을 없애버리는 게 순간인데, 시간이 없다는 게 순간이거든요. 어떻게 됐지? 순간에 되었어. 이거는 시간 차원은 묻지 마라 그런 뜻이다 말이죠. 그러면 순간이란 말은 시간으로 묻지 못하기 때문에 뭐로 대답해야 되느냐, 순간 전과 순간 후, 이전과 이후로서 대비되어서 설명하는 거죠. 경계선입니다. 순간은 시간이 아니고 그냥 서로 이질적인 게 두 개 마주할 때 나타나는 주름, 마주침, 그 찌그러진 면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보통 찌그러지게 되면 한 쪽이 한 쪽을 흡수해버리면 한 쪽이 사라지고 날라 가야 되는데 이제부터 두 번째 시간이 어려운 게 그거에요. 서로 반대되는 것이 하게 되면 흡수 통합되는 게 아니에요. 물고구마 알죠? 밤고구마 말고, 물고구마 이렇게 해버리면 이게 두 개가 아니고 하나가 돼요. 어릴 때 집안에 식구들이 많으니까, 열 세 식구가 살았으니까 그 할머니나 부모님들이 애들이나 삼촌들을 키우기 힘드니까 어디서 물고구마를 사서 여름방학 때 쪄주니까 이게 완전히 진짜 물이 90%라 물고구마라. 그래서 내 기억에 삼촌들이 먹기 싫다고 벽에다 물고구마를 막 던지는 거예요. 짜증난다고 밤고구마도 아니고 물고구마라고. 가만히 보니까 두 개 던졌는데 보니 하나가 돼 있어요. 그러면 형체가 둘이 아니고 하나가 되죠.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게 아니에요. 전과 후가 살아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물고구마처럼 생각해서 ‘너 십자가 믿나? 그러면 잊어라’ 그러거든요. 교회에서. ‘이제는 부활의 새 생명이기 때문에 십자가 잊어야 돼.‘ 이러는데 그거는 성경을 오해해도 보통 오해한 게 아니에요.

기차 지나갈 때 대전역에 가기 전에 신탄진역 있죠. 신탄진 그 다음에 대전역이잖아요. 그러면 신탄진역을 지나면 대전이 나오니까 신탄진역은 잊어도 상관없겠죠. 그렇죠? 초등학교 4학년 되면 3학년은 잊어도 괜찮죠? 3학년 때 봤던 어떤 교복이나 교과서 줘도 괜찮잖아요? 이제 4학년이니까. 포함이 돼 있으니까. 그 안에 내포돼 있으니까.

그런데 성경은 뭐냐 하면 오히려 부활이 십자가를 포함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이미 부활이 포함돼 있는 거예요. 부활되고 난 뒤에 도로 어디로 가느냐? 십자가로 가버려요. 대전역에 와서 도리어 신탄진역을 바라보고 있는다 말이죠.

그러니까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순간이 지상에서 진행되게 되면 이게 무슨 현상? 시간의 역전 현상이 일어나게 돼 있습니다. 순간이 시간을 없애는 건 맞는데 순간 안에는 없어요. 하지만 지상에서는 시간이 있어요.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남아있는데 그 시간을 ‘아,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으로 흘러가는구나.’ 이렇게 해석하면 안 되고 거꾸로 해석해야 돼요.

십자가를 향하여 창세기가 있고 요한계시록도 그 전의 사건 십자가를 향하여 이것이 십자가를 말하고 계속 전개돼야 될 남아있는 시간이구나. 이렇게 해야 됩니다. 이만희씨는 이걸 몰라요. 딴 것도 알 리가 없지만. 이걸 몰라요.

사람이 구원에 집착하게 되고 구원을 꼬여서 사람이 어떤 교주를 만들어버리면 ‘이렇게 하시면 구원받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모든 사건을 주의해서 그게 마귀가 하는 짓에 미혹에 들지 않아야 여러분들은 환란 때 여러분 살아남게 되고 살아남으면 전 천년 환란 때 여러분 휴거 당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유대인 여러분 고생 되게 합니다. 여러분 고생하기 싫죠? 그러니까 빨리 일찌감치 수시 모집에 합격하시고 정시 되면 힘듭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구원에 환장한 사람들, 구원받겠다는데 자기들에게 이익이 온다는데, 시키는 대로 다 하죠. 돈 바치라면 돈 바치고 몸 바치라면 몸 바치고 시간 바치라면 다 바치고 다 바쳐서 ‘몸 바쳐서’ 그게 논개에요. 논개. 모든 걸 바쳐서 결국 구원 따내려 하는데 그것은 바로 마귀가 준 미끼입니다. 그런데 그 신천지는 어디서 나왔는가? 한국교회서 나왔거든요. 개혁주의 신학에서 나온 거예요. 모태가 그래요. 신천지의 모태신앙은 한국교회입니다. 한국교회가 구원론을 미끼 상품으로 내세워야 교회가 돈이 들어오게 돼 있어요.

그래서 맨날 길에서 ‘도를 아십니까?’ 하는 식으로 ‘혹시 구원받았습니까?’ 이거 가지고 구원 파들이 자꾸 시비 거는 거예요. 구원 파는 ‘마지막에 멸망당하니까 구원받으세요.’

성경 오늘 분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영생을 얻었고” 에요. “얻었고” 하니까 또 구원 파에서는 이야기합니다. ‘몇 월 몇 일 날 얻었는데?’ 몇 월 몇 일은 그 긴 시간 중에 포함된, 또 시간 차원 이예요. 순간에서 얻은 거예요. 순간에서 얻은 것을 시간으로 환원하게 되면 ‘주께서 시간과 상관없이 구원을 해주셨구나.‘를 아는 그 순간을 우리 내부에서 반복을 시키게 하는 겁니다.

어렵게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주여 이런 실수를 해도 이미 구원받은 거 맞죠?’라고 믿어지게 돼 있어요. ‘환란을 당해도 이것이 주의 사랑 맞죠? 핍박을 당하고 기근이 돼도 이것도 주의 사랑의 다양면의 어떤 일부죠?’라고 믿게 되는 거예요.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내가 봐도, 내가 비판해도 남이 비판해도 욕 얻어먹을 짓을 해버려요. 그러면 남이 비판한 정도가 아니고 당사자 내가 미워, ‘내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내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이 바보야, 바보.’ 이러면 주님이 뭐라 합니까? ‘때리지 마, 때리지 마. 십년 후에도 때리지 마. 애 때리지 마. 너는 너 때릴 자격이 없어. 꽃으로도 너를 때리지 마.’ 김 혜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꽃으로도 때리지 마. 너는 네가 때릴 자격이 없어. 때려도 내가 때려. 네가 때리면 너는 착한 사람 돼 버려.’ 왜, 스스로 반성하는 착한 사람 돼. ‘때리지 마.’ 그리고 ‘네가 나쁜 짓하면 때려? 그러면 그 외 너는 나쁜 짓 안하는 줄 알아? 네가 생각하는 나쁜 짓이 아니고 그 외도 나쁜 짓인데 너는 유독 그걸 나쁜 짓으로 지정하는 이유가 이런 실수만 안 했으면 내 인생은 괜찮은 인생인데’라고 네 인생을 네가 일방적으로 조립하고 있다 이 말이죠. 지금 네가 네 인생을 만들어 가고 있죠.

전에도 했지만 총각 뗀다고 군에 가기 전에 ‘그때 그 실수 없었으면’ 하면 그때 제가 뭐라 했던가요? ‘지금 네가 하는 짓이 총각 때 하는 짓보다 더 나쁘다는 걸 너는 모르지?’

정죄함이 없다. 너를 위해서 죽었다는 말은 이미 너의 평생에 지은 죄를 다 해소했다는 뜻이거든요. 네가 자살한다고 네 죄가 사라질 것 같으면 우리는 자살해서라도 구원받아야 돼요. 왜 자살해서는 안 되는가? 자살해도 일이 해결 안 되니까 자살해서는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자살하라고 누가 시키던가요? 주님이 시키던가요? 주님께서 ‘너 자살하면 구원 받을 거야.’ 그렇게 시키던가요? 주께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놓고 그걸 왜 자신에게 미화되는 것처럼 그렇게 느끼느냐. 그거는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예수 믿는 자신을 믿는다는 증거 밖에 안 돼요.

‘보라, 나는 이렇게 자살해도 나는 신자야.‘ 그걸 티내기 위해서 목사가 자살해 버리면 결국 누굴 증거 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증거 하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 있던 사람들은 뭐가 같은 느낌으로 공유되겠어요? ’저래도, 소위 막 살아도 구원받는구나.‘ 그게 오히려 기쁜 소식이 되지 않을까요? 그건 기쁜 소식이 아니고 막 살아도 구원받는다. 이건 기쁜 소식이 아니거든요. ’주께서 날 만들었습니다.’가 기쁜 소식이 돼야지, 내 쪽에서 내가 어떻게 산다고 하는 그게 기쁜 소식이 아니다 이 말이죠.

‘주께서 날 만들었다.’ 언제? 만들었어요? 순간에 만들은 거예요. 순간에 만들었는데 우리는 어디에 시달리는가, 시간에 시달린다고요. 보다 더 나은 삶, 지금보다 보다 더 착하게, 성화 되게 . 산이 있는데 지금은 내가 이 정도 가는데 더 착한 일 많이 해서 저 높은 경지까지, 도 닦는 경지까지, 테레사 수녀 정도, 울지 마 톰즈처럼, 그렇게 순수한 자기를 헌신하고 모든 걸 하는 그 착함에 절정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자기 자신은 할 일이 남았다. 이렇게 나온다면 이 사람은 “영생을 얻었고”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죄송하지만. 해당되지 않아요.

영생을 얻었다고 순간을 하는 것은 우리 몸에는 순간이 없어요. 우리는 시간이 있어요. 순간은 누구한테 있는가? 예수님 몸에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는 생명을 얻었고” 그에 대한 혜택이 이제는 너희 혜택으로 가도록 내가 조치를 해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 몸 안의 지체가 돼 버리면 우리는 아직도 살 길이 남아있어요. 그런데 그 살 길이 몇 년이 남아있어도 괜찮아요. 왜, 이미 순간적으로 구원을 받은 몸으로 몇 년 아직도 살 길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러면 남아있는 살 길은 뭐냐, 왜 시간이 아니고 순간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 살아가야 되는 겁니다. 악착같이, 돈을 밝혀서라고 살아가야 돼요. 왜, 돈 밝히는 그것이 돈 사랑하지 말라는 주의 말씀을 증명해 주기 때문에. 갑자기 이게 기쁜 소식이 돼 버렸어요. 악착같이 내 새끼만 돌보고 내 식구만 돌봐야 돼요. 왜, 디모데전서에 나오는 “마지막 때에 자기만 사랑하고“ 그걸 증명해 줘야 되니까. ‘제가 바로 이런 인간입니다. 시간만 나면 그 시간은 나의 영광과 나의 자존심을 위해서 소모하는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그게 바로 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나를 도저히 내 힘으로 행하는 나를 이 ”영생을 얻었고”가 덮쳐 버리니까 내 몸은 사실은 주의 몸이죠.’라고 우리가 물을 수가 있는 겁니다.

지난 낮 설교 때 굉장히 어려운 대목을 했어요. 뭐냐 하면 십자가 지는 장소가 부활 장소와 다르다고 이야기했죠. 분명히 이야기했는데. 그게 무슨 의미냐 하면 그 세 명의 여인이 왔어요. 살로메하고 야고보 어머니하고 막달라 마리아, 세 명의 마리아가 무덤에 왔는데 그 무덤이 빈 무덤 됐잖아요. 그 빈 무덤 할 때 제가 설교시간에 물었잖아요. 그들이 실망했습니까? 기뻐했습니까? 물었잖아요. 실망했죠. 왜 실망하죠? 주께서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을 때 우리 같으면 우리 생각 같으면 어떻게 합니까? 딱 빈 무덤 보고 난 뒤에 ‘할렐루야’ 하고 우리는 감사해야 될 일인데, 그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울었어요. 실망 정도가 아니고 울었습니다. 그야말로 사랑하는 여인을 잃어버린 것처럼 ‘아이고, 우리 주님 어디 갔노. 나쁜 도둑놈아 우리 주님 돌려다오.’ 이런 식으로 울었겠죠. ‘시체를 누가 훔쳐 갔노. 주님 팔자도 참 더러운 팔자지, 시체 하나도 간수 못하는 팔자, 이런 팔자가, 어디서 독수리한테 물려 뜯기나.‘ 걱정 했을 때 옆에 떡하니 누가 걸쳐 앉아 있는 거예요. 걸터 앉아있는 것이 재밌는 것은 그 걸터앉아 있는 그분의 얼굴이 평소에 만났던 예수님 얼굴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뭐라 했어요? 예수님 얼굴이 아니라는 것은 뭔 뜻이냐? 어렵게 이야기해서 온 천지가 빈 무덤이 돼요. 온 천지가 빈 무덤 이예요. ‘목사님 어디 가서 은혜 받습니까?’ 묻지 마세요. 온 천지가, 화장실 가도 은혜 받아요. 온 천지가 빈 무덤 이예요. 실망할래? 기뻐할래? 묻습니다. 실망할래? 기뻐할래? 또 온 천지가 빈 무덤이라 해서 수련회도 참석 안 하는 거 아닌가..^^ 수련회 이 코너 끝나는 거 아닙니까? 이 소리 듣고 교회 안 나오는 거 아닌지...

온 천지가 빈 무덤이란 말은 주께서는 오늘 날 빈 무덤을 소개하는 게 아니고 그 전에 있어야 되던 분이 사라졌다는 그것이 이 우주를 운행하는 원리, 부재자가 원리에요. 피조물들은 그냥 눈에 보이는 게 전부에요. 하지만 피조물의 운명은 보이는 같은 피조물이 결정하는 게 아니고 보이지 않는 분, 창조자가 결정하는데 그 창조자가 어디 있느냐고 묻지 마, 빈 무덤이 바로 창조자가 왔다 다녀갔음을 증명하는 하나의 흔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죽으신 분이 살아났다고 이야기하죠.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바울이 도대체 사도바울은 전도하면서 무슨 소리 했는가 한번 찾아보세요. 보게 되면 핵심이 있어요. 죄 사함을 위해서 주께서 택하신 자가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이야깁니다.

자,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하여튼 사도바울은 못 됐어. 말을 너무 어렵게 해. 내가 한번 연결시켜 볼게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죄 사함) 일단 괄호 치고요. 그 다음에 죽으심, 그냥 죽으신 게 아니고 사도행전 17장에 택하신 자, 택하신 자 죽으심, 세 번째 뭐냐 하면 사흘 만에 부활하심, 요거 세 항이 있습니다. 수능 문제 냅니다. 이 세 문장 연결하시오. 자, 이게 연결이 가능하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바깥에서는 연결이 안 돼요. 죄 사함 속에 먼저 들어가야 이게 연결 되거든요. 죄 사함 속에 들어가려면 뭐해야 됩니까? 내 죄는 내가 아무리 뒤에 착한 일해도 해소가 안 되는 그런 존재인 것을 이미 인정하는 사람만이 ‘죄 사함은 제 힘으로는 안 되거든요.‘ 라고 죄 사함과 관련되어서 어떤 메시야를 고대하는 사람, 그 사람만이 이 문제를 풀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여인이 수로보니게 여인입니까? 주님이 오니까 ‘어디 개.. 여인이 오느냐?’ 그렇게 하니까 다른 사람은 자기보고 개라고 하면 자기의 전부 내가 평소에 나의 전부를 가치 있게 보기 때문에 그렇게 욕하면 삐질 건데 그 여인은 뭐냐 하면 자기가 본인이 개라고 인정을 한 상태기 때문에 개가 주님 앞에 어슬렁거리고 꼬리 흔들고 찾아온 것은 혹시 사람들이 먹다 남은 부스러기 혹시 있는가 싶어서 그거 주워 먹으러 왔던 거예요. 그러니까 노숙 개에요. 노숙 견. 노숙자도 안 돼. 노숙 견.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이만한 믿음은 나는 유대인 중에 본 적이 없다. 최고의 믿음이다.” 왜, 미래의 어떤 자기가 잘 될 것이라는 희망을 다 삭제해 버리고 자기의 시간을 주 앞에 양도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 시간을. 내 시간을 양도해 버리면 주어지는 것은 순간이 주어지죠. 너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그 순간을 우리는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시간 버리고 순간 받고. 장사 남는 장사에요. 괜찮은 장사 아닙니까? 죄 드리고 영생 얻고, 뭐 이런 장사가 다 있어요? 못난 인간 드리고 잘난 사람 데려가는 천국에 가고, 그래서 주께서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를 간다 하잖아요.

주님께서의 모든 것은 일관성이 있어요. 다 일관성이 있어요. 하여튼 잘난 척하는 인간들은 상종을 안 합니다. 잘난 척하는 인간. ‘십일조 했습니다. 구제 했습니다. 뭐 봉사 했습니다.’ 이런 자는 상종을 안 해요. 그것은 뭐냐 고 안에는 자기 시간이 들어있기 때문에 시간은 천국에 못 옵니다. 시간에서 순간으로 응축이 돼야 돼요. 바뀌어져야 돼요. 바꾸는 방법은 없어요. 왜냐 하면 인간이 생각하는, 요 대목이 어려운데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못난 자아가 예수를 믿고 난 뒤에 잘난 자아가 되죠. 하지만 여기 연속성이 있어 문제입니다. 뭐냐, 이 자아와 이 자아가 연속성이 있어서 이게 땡 탈락 이예요. 이러면 안 돼요.

구원 파 하는 말이 ‘실례하지만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몇 일 날 구원받았습니까?’ 이거는 뭐냐 그때 자아와 당신 자아가 연속적인 자아인데 당신은 언제 개과천선했습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거는 바로 인간들이 구원 파 위주기 때문에 이거는 성립이 안 됩니다.

뭐라고 되느냐 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이러거든요. 요거는 사망은 뭐냐, 요 쪽 바구니에서 요 쪽 바구니로 옮긴 거예요. 바구니를 옮긴 거예요. 예수님이 말씀한 부대, 부대를 옮긴 거예요.

그 백설 공주에서 마녀가 백설 공주가 숲속에 있을 때 같이 따라왔잖아요. 찐드기, 거기까지 따라와서 사과를 먹이잖아요. 늙은 노파로 변해서 모자 하나 뒤집어쓰고 ‘사과 먹어봐라.’ 하잖아요. 그때 사과를 어디 담아옵니까? 바구니에 담죠. 마귀가 사망을 담고 온 거예요. 그걸 먹고 백설 공주가 독을 먹고 쓰러지죠. 그 백설 공주 독일의 영주는 전부 다 각자 나라들 이예요. 그래서 왕자가 그렇게 많아요. 왕도 많고. 조금한 나라니까. 그래서 그 가운데서 동화들이 있는데 그런데 이 백설 공주가 어떤 프로포필을 맞고 나은 것도 아니고 링거를 맞고 나은 것도 아니고 뭡니까? 사랑으로 낫죠. 이미 백설 공주는 죽어있고 다른 어떤 백설 공주를 책임질 어떤 백마 탄 이웃 집 왕자가 와서 뽀뽀하니까 낫잖아요. 무슨 독이 뽀뽀한다고, 뽀뽀가 강하게 독을 빨아들이는 뽀뽀인가? 사랑으로 낫죠.

그러니 이게 뭐냐 하면 나는 없고 나를 포함시키는 어떤 영역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망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옮겼느니라. 너는 그냥 그 안에서 덤이었어. 네가 구원받는 게 아니고 너와 같은 사람이 구원받는 그 실체가 너를 덮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너 혼자 구원받는 게 아니고 너하고 여러 명 돼. 너만 구원받은 게 아니야. 여러 명 구원받았어요. 집단 구원받은 거죠.

그러면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순간이라 하는 것은 어떤 지점이 아니고 이렇게 두 개의 대비되는 두 영역을 같이 모아오면 그 경계선이라. 경계선이라 하는 것은 같은 것을 경계선이 생기지 않잖아요. 서로 다를 때 생기네요. 엉덩이도 언덕이 두 개라 경계선이 생기잖아요. 다른 덩어리 두 개가 있을 때 경계선이 생기듯이 그 경계선을 만들기 위해서 전과 후의 두 개의 차이라는 환경을 하나님께서는 의도하신 거예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여러분 이거 가지고 대충 이해했다고 하는데 저는 이해했다고 생각이 안 들고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서 확실하게 해봅시다. 자, 물어봅시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쳤죠. 그러면 아버지가 이삭을 바쳤으니까 아들은 어떻게 된 거예요. 살아난 거예요? 죽은 거예요? 죽을 뻔했죠. 죽을 뻔했는데 스톱해서 옆의 숲속에 있는 수양 데려다가 했다 이 말이죠. 아들은 ‘아따, 참 혼났네. 아이쿠, 진짜 스톱 할 때 속도가 15센티 놔두고 더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이러겠죠.

제가 주일 낮인가 서산 감리교 이야기해드렸죠? 제사 제도한다고 염소 잡는 거. 그래서 내가 빈정댔잖아요. 왜 헐은 염소 잡지 말고 자기 아들 잡지, 아브라함처럼 자기 아들 죽이면 확실할 건데. 자기 아들이 비쌌던 모양이죠.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저 숲속에 양 있어. 양을 부탁해.’ 해서 양을 잡아서 잡으면 같은 믿음이니까 ‘네가 양 잡았어? 아이쿠, 믿음 좋아라.’ 이러면 될 텐데 왜 아들 잡으라 했죠? 인간들의 해석에 의하면 염소는 헐하고 아들은 하나밖에 없는 귀한 것이기 때문에 귀한 것을 잡을 정도 같으면 보통 의지가 강해야 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시험하기 위해서 네 의가 얼마나 놀라운지 시험하기 위해서 아들 잡으라 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아들 나중에 아브라함이 믿음 없었을 때 그 아들 또 잡아야 돼요. ‘네가 이제는 전에 아들 잡았다고 좀 해이해졌구나. 또 잡아라.’ 해서 아들까지 손자까지 잡아야 돼요. 그 뜻은 그런 뜻이 아니고 들판, 평지가 달라요. 완전히 구조가 달라졌어요. 어떤 구조냐? 그때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주체가 되는 구조라면, 이제는 부재자, 죽은 자가 아브라함에게 구원해주는 구조로 바뀌어요. 산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하는 구조, 천국은 없어요. 내 대신 죽은 자가 살았다고 우기는 나를 되살리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살아있는 겁니까? 죽어있는 겁니까? 나는 죽어있는 것이고, 내가 살았다고 우기는 것 때문에 나한테 핍박받는 그분이 진정 하나님 앞에 산 자가 되는 겁니다.

인간은 비인간이거든요. 그런데 비인간들이 인간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예수님은 비인간 취급 받아서 ‘에이, 너 같은 인간은 죽어도 괜찮아.’ 해서 ‘바라바 살려줄까? 예수 살려줄까?’ ‘바라바 살려주세요.’ 해서 모두 집단적으로 비인간 취급받아서 ‘너 같은 인간은 없어도 돼’ 해서 죽었잖아요. 그게 십자가 사건. 그 사건이 우리한테 성령을 통해서 왔다는 말은 ‘너 지금 인간이야? 비인간이야?’ 그걸 묻는 거예요. 인간이라 하면 안 되고 ‘제가 바로 비인간, 인간도 아닙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그게 구원에 합류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저 북한의 김 정은이가 북한 매체에서 시도 때도 없이 주로 하는 게 뭐냐 하면 존엄성을 훼손하지 말라 소리 하죠. 맨날 그 이야기가 얼마나 어렵게 들리는지 몰라요. 북한에서 무슨 소리 한다고요? 뭘 훼손하지 말라? 존엄성. 손이 ..만들 때 우리 김일성 계열의 백두 계열의 존엄성을 훼손하지 말라 하잖아요. 존엄성. 북한은 존엄성이 신이거든요. 그렇잖아요. 김일성이 신 아닙니까? 존엄성. 존엄성을 훼손하지 말라고 했을 때 북한 주민들이 이 존엄성에 대해서 신경을 쓴다는 말은 자기도 이 존엄성만 챙기면 자기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들겠죠.

그런데 이 존엄성 때문에 죽은 분이 계십니다.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그럼 이 말은 우리에게 존엄성이 있어요? 없어요? 존엄성이 없죠. 그런데 왜 교회가 인권을 부르짖습니까? 자유 신학의 인권. 감리교, 통합 측, 기장 측 이런데서 왜 인권을 주장해요? 천주교 정의 실현, 왜 인권을 주장합니까?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불교에서 교리가 뭐냐, 모든 걸 비워라 했죠. 모든 걸 비워야 된다. 욕심이다.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한 그 성철 스님인가 법정 스님인가. 이름도 왜 두 자인지 몰라. 머리를 왜 깎죠? 머리 왜 깎습니까? 그게 바로 자기 나름대로 경계선을 형성하는 거예요. 경계선. 너희와 내가 부딪힐 때. 머리 깎은 자와 깎지 않은 자의 차이를 두고 깎지 않은 자는 속세에 속하고 깎은 자는 거룩에 속하죠. 그게 비운 겁니까? 그게 마음 비운 거예요? 신부들은 유니폼 왜 입어요? 목사들은 이상한 넥타이 왜 맸습니까? 그게 자기를 비운 거예요?

예수님 옷은 뭐였습니까? 예수님 옷은 특정 옷을 입었어요? 가운 걸쳤습니까? 수염은 길렀어요? 그거는 후대에 예수님을 교회가 조작해서 그린 그림이고 실제 예수님은 그냥 평범해요. 그냥 노숙자라니까요.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 없어져도 그만인 그런 존재에요. 예수님은 철저하게 인간이 존엄성을 찾는 사회에서 자진해서 비인간이 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란 말은 비인간임을 믿어라. 비인간임을 믿어라.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 딴아 크게 마음을 낮췄어요. 부자 청년인데 예수님께 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 얻습니까? 할 때 모든 걸 다 버려두고 날 따르라 할 때 근심해서 돌아가잖아요. 왜냐 하면 돈이 있어야 된다는 이유가 뭡니까? 돈이 있어야 자신의 선했다는 것이 자기가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지켰기 때문에 그 대가로 챙긴 게 뭐다? 부자 된 거예요. 그러니까 돈이 아까운 게 아니고 이거 날라 가 버리면 나는 애초부터 선하지 않은 게 들통 나는 이것이 싫은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뭐냐 하면 자기 존엄성에서 못 벗어난 거예요. 나는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비해서 선한 사마리아인 보세요. 어느 강도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있는데 다른 사람은 다 지나갔어요. ‘너만 강도 만났고 나는 강도 안 만났어.‘ 다 바빠서 가는 거예요.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뭡니까? 강도 만난 사람과 자신을 일체화 시켰죠. 그 일체화 시킨 것을 예수님이 이웃이라 했어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할 때 네가 이웃을 사랑하란 말이 아니고 너는 누구의 이웃이냐, 고 그 묻는 질문이 우리 안에 있어야 돼요. ’주여 저는 누구 이웃인데요?‘ 이거부터 물을 수 있는 사람만이 이웃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어요. ’자, 내가 존엄성을 키우기 위해서 내가 주의 사람인 것을 인정하기 위해서 한번 이웃 사랑을 슬슬 해볼까? 가난한 사람한테 동량 한번 해봐.‘ 이것은 전혀 이웃 사랑 아닙니다. 자기 존엄성의 극대화에요.

아까 우리 동욱이 군에 간다 하니까 군대 생각이 나는데 군대에 여군이 생겨났습니다. 다 짐작했죠. 조폭 세계에, 군대는 조폭이거든요. 까라면 까는 세계에요. 조폭이 뭐냐, 하면 된다죠. 하면 된다보다 해야 된다죠. 거기에 연약한 도살할 양 같은 여자가 거기 들어갔다. 여자들이 군대 가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고 공기업이기 때문에 가는 거예요. 그걸 무슨 수로 보호해 줍니까? 도살할 양인데. 늑대 판인데. 이거는 나이 어린놈이고 된 놈이고 관계없어요. 지위고하도 관계없어요. 다 달려드는데. 이걸 무슨 수로 지켜냅니까?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그래도 군에 가서 출세한 여군 있잖아요? 그들이 출세하기 위해서 어떤 것까지 감수해야 되는지 생각 안 해봤어요? 그러면 여군이 그동안 없다는 것이 군대가 자긍심을 가졌던 이유가 됐죠. 없다는 것 때문에. 그러니까 여군 잘 만들은 거예요. 왜, 군대란 것이 자랑스러운 동네가 아닌 것을 여군이 들어와야 비로소 알듯이 하나님께서 지금도 마귀를 역사하시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마귀 퇴치해 버리면 우리는 잘난 사람 돼 버려요. 날마다 주께서는 마귀로 하여금 시달리게 만듭니다. 욥처럼 시달리게 만들어서 자기 인생에 대해서 본인이 분개하고 분노하고 울분을 야기 시키는 사태가 일어나게 해서 우리의 본래의 자리를 찾아가게 하는 작업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거예요.

그 부자 청년 이야기나 선한 사마리아 이야기나 모든 예수님의 이야기가 요한복음에서는 간단하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는 것이 그들은 안 믿어지죠. 왜냐 하면 그들은 시간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주께서는 순간을 집어넣습니다. 어떻게 시간이 순간을 이해합니까? 나중에 시간을 살았던 그것들이 죄로 발각될 때 ‘아!’ 주께서는 내 시간 거부하고 자기가 집어넣은 순간만 고집한다는 것을 알죠.

그 순간을 성경에서는 한 자로 뭐라 하느냐, 때, 때인데 앞에 뭐가 붙어요. 내 때! 내 때에요. 내 때가 되매. 내 때인데 앞에 붙는 게 있어요. 말씀에 응한다. 그래서 요걸 합쳐 버리면 성도란 말씀대로 구원돼야 될 존재로 이미 창세전에 정해놓았기 때문에 주께서는 자기 때를 성취하기 위해서 찾아올 때 찾아오셔서 그리고 선언합니다. “이미 네 인생은 끝,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게 너란 말이 아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오게 하신 분이 나란 말 이예요. 결국은 우리한테 안 와요. ‘너는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내가 너를 구원시켰다.”

성경 전체의 내용은 우리가 구원받은 게 아니고 “내가 너를 구원시켰다.”가 초점이지, ‘그래서 나 구원받았다.’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또 구원받았다는 시간 계산 또 나가요. 또 시간 체크 합니다. 구원 받은 지 6개월 됐다. 또. 그렇게 돼 버리면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나중에 침해 걸리면 구원받은 게 취소가 돼 버려요. 침해 걸려서 예수가 누군지 모르고 아파서 헛소리 하게 되면 ‘에이 구원받은 줄 알았는데 구원 안 받았네.’ 이렇게 하죠.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우리가 자꾸 계속해서 침해 안 걸리고 구원받았다 소리 하고 싶어서 그런 식으로 구원받고 싶은 이유가 어디 있느냐, 그것은 뭐냐 하면 바로 타인의 시선 때문 이예요. 타인의 시선 때문에. ‘너 구원받았어? 안 받았어?’ 교회 가면 자꾸 묻는 거 같아요. ‘요새 집사님 기도 잘 안 되죠?’ 이런 말 하는데 들리기는 ‘요새는 집사님 믿음 없죠?’ 이런 식으로 지금 들리는 것 같아요. ‘집사님 보니까 봉투에 돈이 천 원짜리밖에 안 들었는데 헌금 적게 하시는 모양이죠?’ 이 말은 처음보다 믿음이 떨어진 것 같은 느낌으로 이렇게 느끼는 것 같아. 주님은 다 이뤘다고 했는데 사람이 가만두지 않네요. 사람이 마귀입니다.

저는 이걸 한번 상상해 봐요. 예수님이 겟세마네 기도할 때 예수님께서는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했잖아요. 그런데 그 세 명 제자들이 왜 잠잤을까? 하는 거예요. 왜 잠을 잤을까? 언젠가 제가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자기 일이 아니거든요. 자기 관심사가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사망에서 옮겼다는 것이 우리 관심사가 아니에요. 예수님 본인의 관심사에요.

그래서 잤던 베드로가 나중에 성령 받고 난 뒤에 시도 때도 없이 잠잤습니까? 그렇지 않죠. 그들은 깨어있죠. 왜냐 하면 자기 관심사가 사라졌어요. 본인이 사라져버린 거예요. 이제는 누구의 관심사가 자기를 쳐들어왔다? 주님의 관심사가 전에는 주님만 주님의 관심사인 줄 알았는데 성령이 옴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관심사가 나의 관심사로 바뀐 그런 바구니, 그런 상황 속에 놓이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진짜 성도는 이렇게 해야 돼요. ‘주님이여, 왜 내 인생이 내 맘대로 안 됩니까? 왜 내 뜻대로 내 기도대로 인생이 왜 이렇게 뒤틀려지는 겁니까?’ 그럼 주님께서 ‘네가 갈 바를 알지 못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우리는 시간대가 있기 때문에 시간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꾸 예상을 하고 싶어 해요. 신년이 되면 회사도 올해 목표가 있을 거예요. 자꾸 예상하는 거예요. 시험 치는 것도 시험이 없으면 애들이 공부를 안 하잖아요. 목표가 없으면 일을 안 합니다.

그런데 자연산 개, 훈련한 개가 아니고, 자연산 개는 어떻습니까? 목표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오죽하면 오뉴월에 개 팔자라 합니까? 그 오뉴월의 개 팔자를 성경대로 이야기하면 주께서 친히 기르시나니, 가 되죠. 그런데 친히 길러줘야 되는 우리가 마귀가 시키는 대로 목표를 정하는 순간 그 다음에는 누가 누굴 길러야 돼요? 내가 나를 길러야 돼요.

그러니까 이제는 관심사가 뭐냐 하면 주님 철야해도 철야 안 해. 왜, 우리는 철야할 때 따로 있어요. 내 일이 뒤틀어질 때 그때 철야해요. 그게 주님 방식 이예요. 하도 관심을 안 두니까 내 뜻대로 안 되게 만들어서 관심 두게 ‘주여’ 그제사 ‘주여’라고 외치게 만들어요. 사사기가 남의 일이 아닙니다. 좀 편하면 뛰어놀다가 또 갑자기 주변에 있던 경계선 바깥에 있던 적들이 쳐들어오게 되면 그제사 ‘주여’ 처음에는 다 퍼줘요. 인간적으로 해보고 다 퍼주고 다 떨어지면 그제사 ‘주여 살려주옵소서.’ 할 때 그걸 사사기는 출애굽의 반복이라 합니다. 그 반복이 오늘날 우리 인생의 반복 이예요.

내 힘으로 느긋하고 잘 될 것 같으면 뭐가 문제냐, 주님한테 관심이 없어요. “사망에서 옮겼느니라.“ 뭐 성경에 그런 게 있대. 끝나요. 관심 없어요. 이게 실감 나려면 내 하는 일이 뒤틀어질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이미 바구니에 담겨서 사망이란 바구니에서 생명이란 바구니에 옮겼느니라. 옮겼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구원받으려고 생각한다면 사망은 하지 말아야 되는데 십자가를 잊어라. 부활만 생각해라. 이래야 되는데 구원이 문제가 아니고 주님이 구원했다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항상 전에 있던 것과 지금의 변화를 그 경계선을 우리가 항상 우리 인생에 새겨야 된다.

십자가 믿고 부활됐기 때문에 십자가 잊어버려. 언제까지 십자가 찾을래? 이제는 부활해 새 생명 가운데서 교회 봉사해야지. 십자가. 십자가. 맨날 바닥만 닦을래? 이런 식으로 목사가 막 나무래요. 교인들에게. 그 사람은 부활의 새 생명이 뭐가 새 생명이냐, 십자가만 생각하는 게 새 생명이란 걸 몰라요. 십자가만 생각한다는 말은 나한테 관심이 끝났다는 거거든요. 나한테 관심이 없다면 ‘이러다 내 코너 끝나는 게 아닙니까? 그것조차도 걱정도 할 필요가 없다는 뜻 이예요.

여러분 지금 사시는 것이 주님의 뜻에 의해서 사시는 거예요. 이미 하나의 경계선입니다. 여러분 사시는 것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는데 누가 이렇게 옮겼지? 거기에 대한 관심 두라고 오늘도 이렇게 살게 하신 거예요. 서울에 눈 온다고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가다가 길에 미끄러져서 못 오면 ‘이 코너 끝나는 게 아닌가.’ 걱정하는데 마침 또 이렇게 눈이 별로 안 왔네요.

25절 봅시다. 요거 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 동욱이 지금 인내하고 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또 때가 나오죠.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듣는 자가 살아난다는 말은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이 말은 살아나는 것이 우리 구원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강의 두 시간 가까이 강의해도 또 돌아서면 ‘내가 그럼 구원받았나?’ 또 자기 구원문제에 집착할 경우가 있어요. 다시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생명은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가 여기에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제일 편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든 사람마다 다 다른데 다른 이유가 내가 이렇게 살아도 ‘나 구원받았다.’ 이거 자랑하라는 게 아니라 주께서 벌이신 일인데 생명은 주님이 생명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인간은 진실로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기 때문에, 그러면 인간의 목숨이 깁니까? 주의 음성이 깁니까? 주님의 사운드가 길죠. 음파가 길죠. 창조 만들어진 것보다 창조주의 음성이 더 깁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손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 주님의 음성이 들어올 때 어떻게 들어오느냐? 말씀으로 들어와요. 끝으로 요거 어려우니까 요거만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말씀으로 들어온다 할 때 한 가지 예를 듭시다. 십계명에 보면 “거짓증거하지 말라” 있잖아요. “거짓증거하지 마라” 가 말씀입니까? 예수님이 말씀 이예요? 제가 묻는 의도를 알면 정답은 뻔 하죠. 거짓 증거가 말씀이 아니고 예수님이 말씀이죠.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까.

그런데 거짓 증거 하는 말 하게 되면 우리는 평소에 우리 인간들 세계에서 말이라 하는 것은 문단으로 끊어져 있어요. “거짓 증거 하지 말라” 여덟 자로 끝났죠? 그러면 우리는 거짓말 안 하면 되잖아요. 그렇죠? 그러면 이 거짓말 안 하겠다는 것이 주의 말씀이 아니고 뭐냐 하면 내가 평소에 알고 있던 그 나한테 포함된 인간들의 말과 합치가 돼 버리죠. 그러면 거짓 증거 하지 말라. 가 내 속에 들어오면 이는 더 이상 주의 말씀의 기능을 사라져 버리고 내가 해석한 일방적인 해석이 돼 버려요. “살인하지 말라”가 오면 ‘나 사람 안 죽였어.’ 이렇게 나오고 “간음하지 말라”하면 ‘나는 바람피운 적 없어.’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주님은 뭐라 합니까? “마음속으로 간음해도 간음죄다. 미워해도 살인죄다.” 이렇게 조치를 하게 되면 그것은 누가 이야기했어요? 말씀 되시는 분이 그렇게 해석해 버리면 이 말씀은 예수님께 속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말씀을 지킬 수가 없고 먼저 주님한테 가야 돼요. 우리가. 말씀을 바로 땅겨서 지키면 안 되고 주님한테 가야 돼요.

그러면 목사님 주님한테 가면 지킬 수 있습니까? 주님한테 가게 되면 먼저 우리가 사라져요. 사라지고 주께서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말을 주님이 말씀이니까 말씀대로 우리에게 지키도록 만들은 결과물이 우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냐, 나는 맨날 입에 거짓말을 달고 사는데 ‘주의 뜻에 의하면 그것이 거짓 증거가 아니래.‘라는 식의 해석이 돼요. 아주 위험한 해석이 돼 버립니다. 위험한 해석.

거짓말 해놓고 주님을 경외하는 게 뭐가 된다고요? 거짓말 안 한 게 되고 거짓말 지킨 게 돼 버리죠. 아, 이거 잘도 써먹을 수 있겠죠. 어떤 짓을 해놓고도 뇌물 받아놓고도 주님만 경외해버리면 ‘이건 뇌물이 아니고 돈을 사랑 안 한 게 돼.‘라는 해석이 나올 뻔 하죠. 그게 주님을 경유한 것이 아니고 주님을 비껴가서 경유한 척하면서 도로 받아내서 그래요. ’나는 이제 거짓말해도 구원받고 싶어.‘ 이런 자기 구원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경유하는 척하고 ’안녕하세요?‘ 인사만 하고 그냥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그냥 거쳐서 하는 거예요.

기생 라합 보세요. 기생 라합은 자기가 거짓말 하는데 목숨 걸어놨습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정탐꾼 왔냐? 안 왔냐?’ 할 때 이거는 자기의 착함, 의로움, 전혀 고려대상이 안 돼요. 이거는 사느냐, 죽느냐,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은 움직이는 말씀, 움직이는 그 말씀에 나도 합류되고자 하는 그 마음을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에 기생 라합도 하나님의 성신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그런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그 마음이 아니고 드디어 남이 아니고 같은 편이예요. 같은 편에서는 거짓말이, 거짓말이 아니고 진짜가 되는 겁니다. 우리끼리는. ‘집사님, 오늘 화장발 너무 잘 받았다.’ 우리끼리는 거짓말이 아니에요. 남들 보기에는 ‘저 아부하고 있다.’ 우리는 아부가 아니에요. 그랬으면 좋겠다마는 이거는 하나 예니까.

‘아이구, 자매님 사랑합니다. 성도님 사랑합니다.’ 이 사랑은 기존의 사랑이고 경유한 사랑은 뭐냐, ‘아이쿠, 집사님 너무 사랑합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집사님 죄인입니다.’ 뭘 해도 죄인이란 뜻 이예요.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나도 Me too. 나도 같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인력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말씀이 말씀대로 해서 다들 하나의 결과물이잖아요.‘라는 고백, 주님께서는 떡을 나눠주는 게 아니고 하나를 만들어요. 떡 하나를 해놓고, 한 개의 김밥 가지고 ’잡수세요‘ 나누어줘서 도로 자기 쪽으로 회수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희들은 열 두 명이라도 너희들은 열둘이 아니고 나에서 나온 하나라. 물론 가룟 유다는 예외가 되겠습니다만 예외가 되고 거기에 맛디아가 열 두 자리에 찾아갑니다. 열둘이라는 것은 12라고 보지 말고 1로 봐라. 144.000을 144.000으로 보지 말고 하나로 회수하기 위한 하나로 모이기 위한 다양성으로 보시면 돼요. 그래서 교회는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순간이 저들을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시간성은 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지만 돌아서면 다시 순간은 무관심해지고 나의 잘난 미래상은 떠오르게 되는 우리의 본성, 이 본성이 오히려 주님의 조치인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