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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6장 44절 / 봉인 / 150409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6장 44절 / 봉인 / 150409

정인순 2015. 4. 11.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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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요한복음6장44(봉인)150409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6장 44절 할 차례입니다. 거기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냥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이 아니고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내게 올 수 없다.“ 해서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마저도 하나님 자기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이란 사실이죠.

이게 기존 2000년 신학에서는 언급하지 못한 내용입니다. 2000년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렇게 아들이니까 결국은 마지막은 아버지께로 모든 것이 회귀된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 아버지는 그런 생각 안 해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가 아니에요. 누가 주냐 하면 예수님이 주가 돼야 되거든요. 일반교인들이야 그 차이성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을 안 하게 되는데 사실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주가 되시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주가 되시느냐, 의 차이가 왜 중요하냐 하면 하나님이 주가 돼 버리면 이게 우상이 돼 버려요. 우상이 된다고요. 인간이 상상한 신이 곧 참된 신과 일치가 돼 버리면 이거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우상이 바로 그런 성질의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는데 이것은 틀린 이야기거든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고 중간에 중요한 분이 삽입돼야 돼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됐죠. 하나님이 창조해 버리면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나를 만들었다. 이렇게 돼 버리거든요. 그렇게 되면 안 되고 그거는 일반 종교고, 하나님이 날 만든 이유는 중간에 계시는 예수님을 위하여 나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게 하나님의 본뜻이고,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변화 산 이야기 나오는데 그 변화 산 이야기에서 그 구름 사이에서 하나님 아버지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 음성의 내용이 뭐냐 하면 뭐 ‘맨션 3채 지어 드리겠습니다. 빌라 3채 지어드리겠습니다.‘ 하니까 그런 짓하지 말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보고 하는 이야기가 “너희는 저의 말만 들어라” 해요. 저가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을 언급하는 겁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세상의 모든 만물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위해서 한 거예요. 만약에 예수그리스도가 중간 과정이고, 최종적이 하나님이라면 이것은 일반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거와 똑같이 돼 버려요. 불교 이슬람교와 똑같이 돼요. 산에 올라가는 길은 여러 개지만 가보면 역시 최종 적에서 신에 도달된다. 이거는 모든 인간의 종교성을 대변해 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가 중간 절차밖에 안 돼요. 그런데 이사야 45장에 보면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거든요. 참 그게 얼마나 오묘한지요. 숨어 있다는 말은 인간이 알고 있는 신은 이게 진짜가 아니고 숨은 것을 제대로 찾지 못했기 때문에 대타로 상상한 하나님으로 인하여 오신 선지자들이 소개하는 진짜 하나님과 충돌을 일으켰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태어나면서 모두 우상 숭배자인데 예를 들어서 가인이 뭘 드렸죠? 제사 했죠? 누구한테 했을까요? 가인이 자기가 자기한테 제사를 드릴 리가 없죠. 신에게 했죠. 신인데 그 신이 제사를 그 진짜 신은 오히려 반대로 방향이 가인은 하나님께로 가는데 하나님은 방향을 반대쪽으로, 인간 쪽으로 하게 되면서 ‘니가 생각하는 진짜 신은 니가 찾을 수 없는 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너에게 나타날 것이다.’ 사건이 뭐냐, 예상도 못한 사건 이예요. 자기 손으로 동생을 죽일 줄이야, 예상도 못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인간이 상상한 아주 전능하시고 자비로운 신을 인정해주는 게 아니고 실제로 어떻게 은밀한 사건을 일으켜요. 그런데 그 사건의 참여하는 자가 누구냐 하면 신을 찾는 자로 하여금 거기에 부정적 역할을 하면서 참여케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신을 안다는 그것이 신을 모독하는 셈이 되죠. 신을 믿는 것이 진짜 신을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예수님이 누구한테 죽었습니까? 알라신에게 죽었어요? 안 그러면 불교 신자한테 죽었습니까? 하나님도 그냥 하나님이 아니잖아요. 여호와 하나님 믿는 사람한테 죽었잖아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그리고 그 사람들은 그냥 아니고 여호와께서 줬다는 율법에 철두철미하게 그것대로 해서 영광돌리겠다는 사람들한테 살해당했습니다. 살해당했다는 말은 이게 각자 노는 세계가 다르다는 뜻이거든요. 세계가 달라요. 다른 세계에 속하는 겁니다.

이 44절을 우리가 그냥 아까 읽었는데 그냥 보지 마시고요, 지금 유대인들 속에서 이 말씀 하신다고 전제를 깔고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고 내게 올 수 없다” 이 유대인들이 지금 누굴 믿느냐 하면 여호와를 믿죠. 그러면 저들은 자기들이 자체적으로 신자에요? 신자 아니에요? 신자죠. 백성입니까? 백성 아닙니까? 백성이죠. 자기가 죽으면 어디 간다? 지금 하나님 아버지께로 간다고 철석같이 그렇게 교육받았고 훈련받았고 전통적으로 그걸 인정하고 있는 그 집단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다가 뭐냐 하면 부정적으로 “올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거든요. 이 말은 뭔 뜻입니까?  “너희들 사기 당했다.”는 뜻 이예요. 자, 그러니 이게 보통 도발적인 발언이 아닙니다. 아마 요즘 같으면 이랬을 거에요. “예수 믿지 말고 날 믿어야 구원 받는다.” 이와 똑같은 이야깁니다. 도발적 이예요.

우리가 이 요한복음 6장 44절을 우리가 기독교 신자라고 여기지 말고, 중이라든지 절에 다니는 불자(佛者)라고 생각하고 이 본문을 보세요. 이 본문을 이렇게 보게 되면 ‘흥’ 대번에 그런 이야기하죠. 불교 신자나 그냥 유교를 믿는 사람 같으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인간은 하늘을 섬기게 돼 있고 하늘은 인간과 자연을 만들었고 따라서 인간이 된 이상 하늘을 섬기고 신을 섬기는 것은 마땅한 도리다. 그러면 됐다.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그렇잖아요. 만드신 창조주를 생각해서 양심껏 바르게 산다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할 수 있는 도리의 전부다. 그렇게 생각하겠다 이 말 이예요.

그런데 거기에다가 “올 수 없다”는 부정적인 발언을 한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밉겠습니까? 인간에게는 누구나 양심이 있고 자기야 부모가 만든 걸 알지만 대자연을 누가 만들었느냐 하는 건 미지의 해답이잖아요. 나비와 들풀과 이 꽃은 누가 만들었겠어요? 신이 만들었잖아요. 그러니까 진짜 중들도 애국가 부르면 하나님 생각하듯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 거기에 거부감이 없다 이 말이죠. 하듯이 이 세상을 만든 신을 섬기겠다는데 거부감을 인간은 안 갖고 있어요.

로마서 1장에 보면 “저희들이 하나님을 알되?” 다 하나님을 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 요한복음 6장 44절을 하게 되면 그 불신자들은 대번에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죠. “나에게로 올 수 없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너한테 왜 가야 하는데? 나는 하나님 믿으면 되지.’ 그 당시 유대인들 말이죠. ‘나는 여호와 하나님 믿으면 되지. 유독 꼬집어서 너한테 왜 가야 되는데?’

이미 언어가 틀어졌어요. 말 자체가 틀어졌어요. 언어가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소통되는 언어가 거기서 뭣을 발생시키느냐 하면 ‘의미’ 또는 ‘의미망’이 형성되거든요.

골프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골프 동우회 가서 거기 어울리려면 어떻게 됩니까? 뭐 어울리기가 어렵겠죠. 하여튼 어렵습니다. 왜냐 하면 거기의 모든 단어가 어디에 초점이 모이냐 하면 골프가 얼마나 재미있느냐에 몰리기 때문에, 의미망이 그렇게 되기 때문에 안 되잖아요.

예수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의미망은 뭡니까? “내가 곧 천국이다.” 이거에요. ‘내가“ 천국은 어느 장소가 아니고 내가 있는 곳이 곧 천국이 되거든요. 그 이야기를 예수님이 이야기 한 게 아니고 부처가 이야기 했다면 우리는 ’흥‘ 우리는 부처보고 ’니 까짓 게 뭐 천국이야‘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있어요. 우리가 그렇게 장담하는 근거는 뭐냐 하면 부처와 예수님의 차이가 뭐냐 하면 부처는 죽고 사흘 만에 부활을 못했어요. 그렇습니다.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한 것. 그리고 그것도 약속대로,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에 사도바울의 설교가 쭉 나오잖아요. 사도행전에 사도바울이 설교를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집사님 궁금하지 않아요? 설교를 사도바울이 어떻게 했을까? 핵심은 딱 하나였습니다. “우리 죄로 인하여 죽고 주께서 그 죽으신 분을, 억울한 분을 사흘 살려내셔서 만인을 심판하는 주가 되게 하셨으니 마지막 때 그분을 믿지 않는 자는 멸망당할 것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성령의 힘으로 했던 설교 내용이 그겁니다. 여기 교회 이야기 없어요. 부흥 이야기 없습니다. 부흥하는 건 전혀 자기 소관이 아니에요. 그리고 몇 명이 떨어져 나가도 꿈쩍도 안 했어요. 오히려 자기 말에서 떨어져 나가니까 이렇게 이야기하죠. '그것조차도 말씀대로 되네.' 이랬어요.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한다."  이래서 사도행전 마지막은 그걸로 끝나요.

하마 초조해서 답답해서 이러지는 안 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지난주일 날 그런 설교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구원받을 사람한테는 내 말이 향기가 되지만 구원에서 망해야 될 사람한테는 악취가 되도록 설교 하는 거예요. 모든 사람을 아우르는 설교를 한 적이 없어요. '사람을 좋게 하게 되면 나는 애초에 그리스도 종이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나서거든요. 심지어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그냥 저주 받는 게 아니고 놀라운 이야기했어요. "우리라 할지라도, 우리라 할지라도 저주 받는다." 야~! 이게 자기 부인의 진수를 보여주는 겁니다.

'나는 알거든, 내게 오라.' 이게 아니고 '나라도 이 복음을 믿지 아니하면 전하는 자라는 어드벤티지(advantage)가 없다 이 말이거든요. 내가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라는 것이 내 구원에 더 힘이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뭡니까? 구원은 누구 소관이란 뜻 이예요? 처음부터 모든 게 주님 소관이라는 겁니다. 제가 아까 두 번째 동영상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고난 받아야 구원받는 사람한테는 고난이 온다. 하니까 사람들은 자기가 구원 받았는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 고난을 유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또는 고난을 기대하는 경향이 있는데 자기 구원을 위해서 고난 받는다든지 복음을 위해서 고난 받는 것은 이건 허용되지 않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성경에서 고난은요. 복음을 위해서 고난 받는 거, 자기를 위한 고난은 없고, 복음에 의해서, 영어로 through, 복음에 의해서 고난이 오고, 구원에 의해서 고난이 오게 돼 있어요. 고난 받은 걸 근거로 해서 구원 받는 게 아니에요. 왜냐 하면 구원을 받겠다고 고난 받는 그건 '구원을 위해서'란 사실은 자기 구원을 위해서 했기 때문에 이건 우상숭배의 일환입니다.

그냥 가만히 있는데 "주님의 복음 때문에 욕을 얻어먹고 핍박을 받게 될 때 오히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했다 말이죠. '뭐 이런 횡재가 다 있나.' 이런 뜻이거든요. 그걸 가지고 "복 있는 자는 내 이름으로 욕을 얻어먹고 핍박이 갈 것이다. 그럴 때 너는 횡재인 줄 알아라. 이놈들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왜 옛날 선지자들도 그와 똑같은 복음 속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 지금 제가 언급하는 이것이, 이 의미망이 뭐가 지금 완전히 삭제됐느냐 하면 '목사님 어떻게 하면 우리가 구원받습니까?' 이런 의미는 완전히 여기서 빠지는 거예요. 완전히 날라 가버린 거예요. '내가 뭘 해야? 예수를 믿을까요? 십자가 알면 구원받습니까?' 이런 어떤 수단을 강구하는 것은 이미 애초부터 그거는 '이렇게 하면 됩니다.' 하는 의미망 자체가 하나님이 인정한 적이 없어요.

그냥 "내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올 수 없다"는 거예요. 오늘 요한복음 6장 44절 말씀이. 참 이 말 그대로 이야기해도 우리한테는 자칫하면 슬픈 소식되는 수가 있는데. 슬픈 소식, 기쁜 소식이 중요한 게 아니고 중요한 것은 이 말씀하시는 그 의미가 뭐냐, 이게 제일 중요해요. 정답이 제일 중요해요.

제가 어제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정답을 아는 사람은 남한테 기죽을 필요 없다고요. 정답을 지금 모르기 때문에 기죽는 거예요. 정답은 뭐냐, 예수님의 아버지가 오게 하지 않으면, 그 다음에 뭔데? 나한테, 예수님에게로 못 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말은 뭐를 가위로 잘라내느냐 하면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 받죠?'라는 구원에 대한 여망과 기대를 아예 잘라버리는 겁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 오게 하신 자만 건진다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그 아버지 뜻만 있으면 되지, 그 뜻만 있어야 되는데 '난 어떻게 하면 곁다리 한번 낄 수 있습니까?'라는 개인적인 기대와 여망은 사양을 해요. '그런 기대는 니 혼자 해라, 난 기대에 부응할 생각이 없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구원받지 말라는 게 되네요.'라고 할 때 구원받지 말라는 게 아니고 원래 우리가 구원받게 해달라는 자격이 없다는 뜻 이예요. 왜 자격이 없냐 하면 하나님의 취지가 뭐냐, 에덴동산에서 추방하는 게 취지기 때문에 그 추방시킨 취지를 우리가 공유한다면 이미 추방해서 벌 받고 있는 입장에서 자기 지는 죄는 생각 안 하고 벌 벋는 것만 그게 괴로워서 어떻게 하면 몇 년 동안 벌 지키면 이제는 화 좀 푸시고 저를 천국으로 다시 인도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렇게 부탁하고 당부하는 그러한 입장이 못 된다니까요. 그러면 주님께서 '니가 당한 죄를 모르기 때문에 니가 입술을 통해서 그러한 니 주장을 늘어놓는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 뜻은 이거에요. 사람으로 태어났느냐? 그렇다면 아무도 구원 못 받는다. 이게 취지입니다. 그 사람에 누굴 집어넣느냐 하면 자기 아들도 집어넣었어요. 그걸 로마서 8장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내어버려두사"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버렸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예수님도 그런 이야기 했죠?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지금 예수님께서 트릭 쓰시는 거예요?  지금 연기하는 겁니까? 예수님이 아버지께 우리끼리 있기 때문에 이런 말하게 되면 아이쿠, 잘 했다고 해서 저를 다시 건져내실 거죠? 이렇게 주께서 지금 연기를 벌리고 있는 거예요? 진짜 버림받은 거예요? 진짜 버림받은 거잖아요. 로마서 8장 32절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이렇게 돼 있어요. 구

구원을 하실 때에 "예수님 믿어라" 해서 구원시키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우리가 있는 자리에, 우리 있는 상황에 예수님을 갖다 거기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게 만들어버려요. 그러면 예수님마저 십자가에서 버림받았잖아요. 그러면 아들마저 버림받았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예수님 외에 다른 사람이 구원해달라는 소리를 할 수 있는 입장이 있다? 아니다? 전혀 입장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우리는 '하나님 구원해 달라'는 소리를 하느냐? 이것은 우리가 욕심을 부려서 그런 거예요. 마귀적인 탐욕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탐욕 때문에.

로마서 9장 같은 경우에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했잖아요. '내가 이스라엘을 위해서 그리스도에서 끊어질지라도 나는 원합니다." 나는 원한다는 거예요. 그리스도에서 끊어질지라도 나는 원한다는 겁니다. 자. 이것이 진심일까요? 아니면 그냥 농담 삼아 해보는 걸까요? 어떻습니까? 진심이죠. 그 진심의 내용이 어떤 마음이냐 말이죠. 거기에 대해서 우도리가 아멘하고 동의가 됩니까? '나도 한 표요.' 하고 손들 수 있습니까?

왜 사도바울은 "끊어질지라도 나는 원하는 바로다." 이 이야기를 왜 했느냐 하면 '예수님, 제가 구원받은 것이 예수님 믿고 구원받으려고 애쓰다 보니까 구원받게 되었습니다.'라는 그런 생각은 아예 나한테 없습니다.'라는 뜻 이예요. 왜냐 하면 사도바울이 구원받게 된 것이 사도바울이 어디에 있을 때입니까? 지금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족치기 위해서 지금 다메섹에서 내려가는 길이었죠. 그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이렇게 불러냈잖아요.

그러면 지금 자기 자신의 모든 살아온 형편이 어디에 놓여 있습니까? 물 다 먹은 빈 컵 있습니까? 사도바울이 지금 어느 입지냐 하면 요게 사도바울이라면 사탕이라면 사도바울은 뭐냐 하면 이미 주님께서 자기를 덮어 씌워 버렸죠. 덮어 씌웠기 때문에 "자기가 끊어질지라도" 하는 건 주께서 일을 설친다 할지라도 자기는 어디 안에 있다? 예수 안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예수 안에서 구원받았다는 말은 구원의 어떤 시도할 필요조차 없다는 이야깁니다.

그리고 이것이 시도할 필요조차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여호와라는 신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겠다고 시도를 해온 것이죠. 어떻게 시도했느냐 하면 율법에 흠이 없을 정도로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처럼 살아서 율법을 지켜서 법을 지켜서 구원받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죄인을 주께서 일방적으로 복음으로 덮어씌우니까 이제는 그야말로 로마서 14장의 말씀처럼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마음 놓고 "주여 원합니다."라고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나처럼 이렇게 씌워준 사람만 구원된다는 것이 그 사도바울에게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에 사도행전 설교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영생 주기로 작정한 사람만 다 믿더라" 돼 있어요. 설득한 게 아니에요. "영생 주기로 작정한 사람만 다 믿더라" 돼 있어요.

그것을 어려운 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회고적인, 회고적인 효과' 라고 합니다. 회고라 하는 것은 회고록 하는 거 알죠? 다 끝나고 '대통령의 시간' 이 명박 그분이 썼잖아요. 회고록이잖아요. 다 지나고 돌아보잖아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우리 앞에는 미래지만, 하나님, 주님의 시간에서는 이미 종결된 상황이거든요. 그 종결된 상황을 솔솔 풀어내는 겁니다. 마술사들의 입에서 색종이 하나씩 나오죠? 색종이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고 안에 물고 있는 색종이를 솔솔 풀어내잖아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미 창세전부터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은 다 있어요. 고걸 풀어내는데 그 한 사람 중에 누구냐 하면 바로 사도바울이고, 사도바울이 언급하기를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자만 요게 된다는 거예요. 영생주기로 작정한 자. 또는 생명책에 기록된 자가 풀어 나오는 겁니다. 

요 방법은 제가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회고적 효과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크게 이야기하면 이겁니다. '봉인'이라 해요. 이거 봉인을 모르면요, 요한계시록 하나도 못 풉니다. 요한계시록 5장에 나오죠. 책을 일곱 개 인을 쳤죠. 봉인 됐죠. 봉인이 되었다는 말은 이 말은 뭐냐, 모든 예수님 말씀이 다 봉인이 된 거예요. 여호지와의 말씀도 봉인된 거예요. 봉인 됐는데 바리새인들이 오해가 뭐냐 하면 십계명을 딱 주니까 바리새인들이 '저 십계명 내가 지킬 수 있다.'고 본 거예요.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지금 이대로 본 겁니다.

그런데 십계명이 봉인 됐다는 사도방식은 아무도 몰랐던 거예요. 십계명을 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탐내지 마라." 뻔히 아는 거예요. 유교적인 가정을 교육 받으면 "살인하지 마라." 뻔히 사람 찔러 죽이지 말라 그런 뜻이지 뭐 별 게 있겠어요?

그게 봉인되었기 때문에 누구만 그걸 진짜 그 십계명 의미를 풀어낼 수 있느냐 하면 봉인하신 분만 풀어낼 수가 있어요. 예수 안에서 예수님만 풀어낼 수가 있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사도되기 전에 사울이잖아요. 사울 그 사람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서 말씀에 그냥 도사입니다. 성경 말씀에 율법에 도사에요. 그 도사들이 그냥 한 두 사람이 아니고 그것도 아브라함 때부터 계속해서 누적 돼 온 해석의 정보에 의하면 이게 오늘날 탈무드를 형성하는데, 유대교에, 그 모든 설교와 주석들의 집대성이 어디로 모아졌느냐 하면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모아진 거예요. 물론 거기서 의견 차가 났죠. 사두개인은 성전 중심이다. 성전 이야기 조금 있다가 할게요. 바리새인들은 아니다. 말씀의 생활화다. 말씀의 생활화. 이 얼마나 요새 한국에서 대단한 이슈가 되는 겁니다. 말씀의 생활화. 지식이 아니고 생활화해야 된다는 겁니다.

말씀의 생활화. 전부 다 그 의도가 어디서 나왔는가? 누적된 해석의 정보 양이 그게 진리처럼 그렇게 통용이 된 겁니다. 늦게 오셔서 강의를 또 새로 해야 되는데?, 말씀의 생활화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말씀 주셨잖아요. 이 말씀이 사적으로 구원이 아니라 통일된 이스라엘을 만들어야 되잖아요. 그러면 모든 사람에게 이게 국가적으로 양육, 교육이 된다 말이죠.

그러면 말씀에 정통한 전문가가 그것을 어린애부터 가르치게 됩니다. 가르칠 때 잠언서 같은 것이 유용하겠죠. "자식들아 누구의 말을 들어라" 아비의 말을 들어라. 왜, 그래야 이스라엘의 일원이 되기 때문에. 이스라엘 공동체가 유지가 되잖아요. 그런데 공동체가 유지가 되면서 심지어 거기에 에스라, 느헤미야, 말라기, 이후에 400년 동안 말씀이 끊어졌습니다. 끊어지고 예수님 오신 당시에 400년 텀이 있는데 그 텀을 뭐로 점프했죠? 계시가 없는데? 선지자도 없는데 어떻게 점프합니까? 선지자가 단절되면 역사도 끊어져야 되는데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걸 뭐로 메웠을까요?

에스라 느헤미야 할 때 그걸 했는데 뭐로 그걸 메웠죠? 바로 가시적인 구체화로 메운 겁니다. 국가적 이스라엘, 국가 이스라엘로 메운 겁니다. 국가 있음이 계시가 된 거예요. 그 계시의 구심점이 있었는데 구심점이 뭐냐, 성전입니다.

이제부터 성전 이야기합니다. 오늘 강의의 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봉인도 중요한 대목인데요. 성전, 그 미로라는 거 알아요? 미로라 하게 되면 들어갈  때는 딱 들어가면 길이 있는 것 같은데 자꾸 들어가면 점점 더 꼬여서 도대체 왜 이 길은 밖에서 보니까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안에 들어가 보면 왜 이렇게 갱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느냐, 이렇게 되겠죠. 그게 미로잖아요.

성전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미로가 들어있어요. 미로가 있어서 바깥에 통용되는 이걸 아까 뭐라 했습니까? 무슨 말이라 의미망, 인간들이 만들은 언어에서 난 의미망, 의미망이 하나로서 소통되면 그게 하나의 공동체가 되잖아요. 그게 하나의 새로운 국가가 되는데, 성전을 통해서 들어가면 성전 안에 이건 딴 세상이 있어요. 이건 다른 의미망, 다른 기호 망, 이쪽에는 이쪽 기호, 이쪽 기호는 성전 빼놓고 있는 인간들은 전부 다 국가 이스라엘, 말씀의 생활화, 바리새인이 주장하는 신학입니다. 바리새인 신학은 말씀을 생활화하기 위해서 율법 외에 세칙을 계속해서 꾸준하게 정립해 온 겁니다. 안식일을 어떻게 지키느냐, 그 문제는 그냥 안식일을 지키라 돼 있으니까 거기에 대한 세칙은 전문가들에게 맡겨서 안식일을 더욱 더 잘 지켜서 영광 돌리기 위해서는 세세한 부분까지 세칙들을 줘서 그 세칙을 따라가게 되면 드디어 마지막에는 '안식일 지켰다.'가 이제는 성립이 되도록 그렇게 조치를 한 겁니다. 그런 것들이 꽉 짜여있거든요.

예를 들면 밀밭에 지나가는 것은 괜찮은데 비비면 안 된다는 것, 담요는 자면 되는데 그걸 다른 날은 몰라도 그날은 들고 가서는 안 된다는 것. 성경에 나와 있는 것만 그런데 다른 거 나오는 걸 보면 재밌어요. 굉장히 많아요. 360가지라 하는데 500가지도 되고, 지금 이스라엘에 가면 그보다 더 많아요.

그런데 그들에게 물어요. 왜 그걸 지켜야 되느냐? 아니야,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 중요해. 지금 유대인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무슨 마음가짐입니까? 안식일 주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가 백성으로서의 보답이 순수한 진정성 있는 신앙으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라는 것이 그쪽 주장입니다.

제가 강조한 이유는 오늘날 교회가 유대하고 똑같아요. 다를 바 없어요. 중요한 건 마음이야, 이러거든요. 그런데 오늘 본문 6장 44절은 뭐라 돼 있던가요? 성경 보고도 잘 모르겠죠. 6장 44절 주께서 하신 말씀이 뭡니까? ~ ~ ~ 뒤에 없다.“ 하잖아요. ”내게 올 수 없다.“ 이게 주의 뜻이거든요.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 중심을 보고 마음을 보시는 거라는 이 의도는 무슨 의도를 갖고 있느냐 하면 이렇게 순수한 경건한 마음을 가지면 주께서는 아마 기뻐하실 걸. 그 밑바탕에는 ‘주여 이런 식으로 해도 구원되죠?’라는 구원에 대한 기대 자체는 주께서는 인정하는 기대다.‘ 라고 그걸 먼저 선제로 깔고 가는 거예요.

그러나 요한복음 6장 44절은 뭡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주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에요. 사고방식 자체가 틀리고, 의미망이 다르다니까요. 주께서는 올 수 없다고, 우리는 ‘이렇게 하면 갈 수 있죠?’라고 하는 것이고, 지금 방향성이 달라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먼저 천국 간사람, 엘리야, 모세, 변화 산에 나타난 사람, 모세와 엘리야가 천국 갔다는 것은 변화 산에 나타나니까 우리가 아는 겁니다. 아브라함 이 사람이 천국 간 것은 어떻게 아느냐?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나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다. 하는 그 의미가 중요한데, 하여튼 그런 의미가 있는 걸 아는데 그 사람들 어떻게 들어갔느냐 하는 거예요.

주께서 주의 마음을 풀어내니까 그 사람이 발생된 거예요. 그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생긴 거예요. 처음에는 아브람밖에 없었어요. 아브람이 아브라함 된 것은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의 계획이 온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바로 성전 안에 들어있어요. 성전 안에 있는 내용이 바깥으로 나오면서 이 바깥에 있는 인간세계에서는 도저히 이 세계를 용납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인간이 천국에 못 가서 못 가는 게 아니고 천국을 거부해서 안 가요. 천국을 거부해요. 왜냐 하면 이쪽 세계에서 만든 다른 천국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가 염두에 둔 이미지 한 천국 따로 있는데 전혀 전 반대의 모습을 들이미니까 자기가 원하는 천국보다도 이쪽에 갈 리가 있습니까? 없죠. 그러니 인간의 구원은 누가 방해하느냐 하면 본인이 방해해요. 자기 구원을 구원받고자 하는 본인이 자기 구원을 방해한다니까요. 구원받는 걸 포기하면 되는데 구원받는 걸 포기 안 하기 때문에 구원과 관계없는 쪽으로 계속 밀려가고 있는 겁니다.

베드로가 천국 간다는 걸 기정사실로 여기고 베드로와 12제자가 예수님 있을 때 뭐라 했느냐 하면 ‘우리 가운데 천국가게 되면 누가 높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한 거죠. 자, 그들이 천국 가서 ‘우리 중에 누가 제일 높습니까?’라고 한 것은 그들은 이미 뭐라고 오해했느냐 하면 예수의 말씀에 우리가 구원받는다고 그들이 이해를 한 거예요. 자, 이걸로 구원받는 거 맞고, 이제 남은 문제는 누가 더 높으냐, 의 문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에 막다른 길이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 십자가 앞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공식적으로 말하기를 “나는 저분을 모른다.” 그때 베드로가 그 말하기 전에 베드로가 닭소리를 염두에 뒀을까요? ‘내가 이쯤 이야기하면 닭이 울어야 될 텐데.’ 이 생각 했겠습니까? 아니죠. 딱 그 말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닭소리가 들려왔죠. 자기의 말과 닭소리가 결합이 되면서 어떻게 됩니까? 전에 예수님 하신 말씀, “네가 닭 울기 전에 날 세 번 부인한다.”는 걸 했죠. 그게 뭐냐, 아까 이야기한 회고적 효과라 합니다. 회고적 효과,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회고적 효과로서 이미 창세전에 구원되었음을 우리는 실수 가운데서 나의 구원에 실패 가운데서 느끼게 되는 겁니다. 하여튼 구원에 절대로 평생 노력해도 구원에 성공하지 못해요. 그래서 구원받은 거예요. 그래서 내 힘으로 구원 안 받았기에 성공을 한 거예요.

만약에 내 힘으로 구원했다면 우리는 회고적이 되지 못하고 자기 구원받은 걸 자랑 질 하면서 살아갔을 거예요. 그리고 그러한 행세가 12제자가 이미 우리 앞서서 그런 일을 다 벌려 왔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나와 있는 이 모든 신약이, 사도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를 앞서서 한 거죠.

베드로 같은 경우에 예수님께서 발을 이렇게 씻기니까 ‘이 발 제가 씻겨야 되는데 왜 이렇게 합니까?’ 완전히 유교적 이예요. 예의상. “아니야,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아니하면 너와 나는 상관이 없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그럼 발만 씻기시지 마시고 전신을 다 씻어주세요.’라고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발만 씻겨도 전신을 다 씻을 것이다.” 이것은 뭐를 의미하느냐 하면 베드로 구원에 대한 의미가 아니고 예수님의 모든 행위나 사건들은 항상 징후와 증상 적으로만 나온다는 거예요. 맛보기로 나온다는 거예요.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에 부활한 몸 본 사람이 몇 명입니까? 한 25억 돼요? 한 5천 만 명 됩니까? 그 당시에 예수님 부활해서, 다 돌아다니면서 다 보여주시지, 사람들에게, 자기를 찔러 죽인 로마한테 나타나서 ‘나 안 죽었잖아. 약 오르지.’ 라고 나타나지, 왜 안 나타납니까? 예수님이 하는 것은 모두 징후 적이고 증상 적 이예요. 받은 사람만 알되 그걸 설명할 길을 차단시키기 위해서. 내가 설득해서 설명해서 구원 못 받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하, 남자한테 되게 좋은데. 할 말이 없네.’ 산수유 이야기잖아요. ‘하, 남자한테 참 좋은데,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네.’ 기존에 통용하는 의미망 가지고서는 항상 주님은 이방인 돼야 돼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게 우리와 관계 되는데 ‘이름 없는 존재자’에요. 따라서 예수를 믿는 것은 이건 구원이 안 됩니다.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습니까? 지저스를 믿어야 구원 받습니까? 영어로 할까요? 한글로 할까요? 예수 풀이해봐야 구원자라는 일반 철수하고 영희하고 똑같은 이름, 보통 이름 이예요.

예수 이름을 믿으란 말은 예수 이름 믿는 내가 이름 부른다고 해서 구원되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구원되지 않음을 믿는 거예요. 왜냐 그거 부름과 상관없이 구원되었음을 믿을 때에 그것이 예수 이름은 뭡니까? 왜 이름이 없다는 말은 이름 있는 세계와 대조를 시키는데 이름이 있는 세계의 능력은 이름 있는 본인의 능력으로만 전부 다 회수가 돼요. ‘이거 누가 했는데?’ ‘내가 했어.’ ‘니 이름이 뭐고?’ ‘나’

앞으로 이거 녹취 누가 하실 거예요? 장 춘옥 씨가 할 거예요. 이름 있잖아요. 그럼 누가 녹취를 보면 장 춘옥씨가 했다. 이름도 중국 쪽이잖아요. ‘누가 했어?’ ‘누가 했어’ 가 되잖아요. ‘너 구원 받는데 누가 했어?’ ‘내가 했어’ 라고 하면 안 돼요. 왜, 우리는 이미 이름이 삭제, 이름이 이미 박탈당한 사람 이예요.

그러면 우리보고 ‘누가 했어?’ ‘예수님이 했다.’ 예수가 했다 하면 이것도 문제 돼요. 왜냐 ‘나 누가 구원 했어?’ ‘예수님이 구원했어.’ 그러면 상대방이 ‘나는 왜 예수님이 구원 안 해주는데?’ ‘너한테는 예수님이 있는 존재고 나한테는 예수님이 없는 존재거든’ 오늘 말이 완전히 ? ,? 그런 경우가 돼 버렸는데, 성경 자체가 그래요.

만나 경우 보세요. 요한복음 6장에 만나 이야기했지만 만나의 특징이 뭐냐 하면 만나를 누가 뿌립니까? 만나는 일반 곡식의 특징과 달라요. 일반 곡식은 누가 씨를 심고 누가 가꾸고 김매고 풀 같은 걸 누가 뽑습니까? 인간이 하죠. 만나는 누가 뿌려 놓습니까? 하나님이 뿌려줬죠. 줍기는 누가 주워요? 인간이 줍죠. 바로 그 방식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예수님의 몸이 조각조각 만나가 되어서 뿌려지게 되면 그 주울 때마다 사람들이 만나란 뜻이 뭐냐 하면 ‘이것이 무엇이냐’ 에요. ‘이것이 무어냐?’ 뭐가 없다? 인간의 의미망에서 지은 이름이 없는 거예요. 그것을 특수 용어로 외 밀이라 하는데 외 밀은 뭐와 반대냐 하면 내 밀의 반대말 이예요. 외 밀은 뭐냐 하면 바깥에 있으면서 바깥에 있는 것이 안에 박혀 있을 때를 외 밀이라 해요. 이 용어 처음 듣죠. 바깥에 있으면, 태양이 지구 바깥에 있잖아요. 그건 외 밀이 아니에요. 바깥에 있어요. 그런데 태양이 만약에 여기 마포구에 있든지, 용산역에 있으면 그건 외 밀이 돼요.

천국이 어디 있다? 우리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건 인간들이 상상한 이미지고, 그게 우상 이예요.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아니고 네 안에 있다는 거예요. 주님 어디 계십니까? 좀 보고 싶습니다. 주님 하시는 말씀이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소자들 많잖아. 나 믿는 소자들 많아요. 걔한테 한 것이 곧 나라니까. ‘아니 그거 말고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키 몇 센티 몸무게 얼마, 다이어트는 얼마나 했으며 양복은 뭐 입고, 그런 걸 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나온다는 거예요.

그걸 보게 되면 어떤 잘못이 벌어지느냐 하면 그걸 보게 되면 그게 입력이 되잖아요. 입력이 어디에 됩니까? 내 머리 속에 입력되죠. 그러면 나 자신을 부인하지 못해요. 왜 나 자신이 삭제가 돼야 되는데 삭제되면 내가 받는 것도 같이 삭제가 돼야 되기 때문에 나 없이는 내가 구원 안 되는 셈이 돼 버려요. 나 없이는, 내가 일단 있었기에 내가 구원받는다. 이렇게 되지, 나 없이 나는 구원 못 받는다. 이렇게 돼 버린다 말이죠. 그럼 안 되거든요.

우리가 없을 때부터 이미 계신 분이 계셨고 그 계신 분이 없는 나를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뭐를 하느냐 하면 ‘그거 나 때문에 네가 구원 받았어‘라는 소식이 들려오게 되면 우리는 말씀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겁니다. 이게 마술사가 아까 색종이를 입에서 풀어내는 것과 똑같은 원리라니까요.

지금 성전 이야기를 해야 되겠는데 성전 이야기를 하면 이렇습니다. 성전은 어디 있느냐, 성전은 분명히 예루살렘에 있었어요. 그래서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기 때문에 전부 다 예루살렘 중심으로 모든 것이 겹쳐집니다. 겹쳐진다는 말이 하늘과 땅이 유일하게 겹쳐지는 부분이 예루살렘 이예요. 그래서 시편에서도 예루살렘을 강조하고 있고 예루살렘, 다른 말로 하면 시온 성, 굉장히 강조합니다. 그리고 사독이란 제사장이 있는데 그것도 사독 제사장이 그렇게 예루살렘을 지향했거든요. 다윗성에서 빨리 예루살렘으로 모시는데 일조했기 때문에 다음에 영원한 제사장은 사독 제사장이라는 그런 언급도 에스겔에 나옵니다.

어쨌든 간에 모두 예루살렘 중심 이예요. 거기 성전이 있어요. 성전이 있는데 사람들은 왜 성전을 위했느냐 하면 성전을 우리들이 사는 세계 일부라고 간주했기 때문에 그게 실패였습니다. 성막이 있잖아요. 성막 안에 지성소가 있죠. 지성소가 분명히 땅에 있습니다. 맞습니다. 땅에 있는데 그게 땅에 있는 동시에 그게 시내 산 이예요.

시내 산에 있던 그 하나님이 어디로 내려왔습니까? 언약을 따라서 이스라엘 텐트 진영 속에 합류가 돼 버렸거든요. 따라서 같이 있으면서도 근접할 수 없는 지역을 만들었습니다. 그걸 거룩한 성소라 해요. 거기 지키는 사람이 있었는데 레위 지파가 특수 지파가 되어서 그걸 일반인들이 오지 못하도록 지킵니다. 그리고 그 성소 중앙에 뭐가 있느냐 바로 언약궤가 있어요. 그 언약궤가 요한계시록에 보면 마지막에 천국 안에 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돼요. 천국이 어디 있느냐? 언약궤 있는 곳에 천국 있어요. 언약궤가 어디로 완성해서 어디로 갔느냐?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언약궤 있는 그 모든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로서 완성이 되어서 예수님 가 계신 곳이 있죠.

그러면 예수님 가 계신 곳에 로켓 타고 갈까요? 비행선 타고 갈까요? 어떻게 갈까요? 사도바울이 소개하는 예수님께 가는 길은 뭐냐, 예수님이 갔던 그 코스대로 오라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 가신 코스가 뭐냐, 이 땅에서 수모 받고 죽었죠. 결국 정답은 뭐냐, 죽으면 갈 수 있어요. 가는데 죽는다고 다 가는 게 아니고 자살한다고 다 가는 게 아니거든요. 북한산 자살한다고 다 가는 게 아니에요. 오늘 오후 3시 32분에 경남기업 회장 자살한 거 그때 발견했잖아요.

죽이는데 자기가 죽으면 안 돼요. 왜, 자기가 죽는 것은 저돌적인 충돌에 불과합니다. 탈출할 수 없다는 고백에 지나지 않아요. 자살은 뭐냐 하면‘ 더 이상 탈출구가 없네. 아예 머리로 박치기 하자.‘ 이게 자살이다 말이죠.

성도에게 준 죽음이라는 것은 네가 자살하지 말고 죽게 하는 그러한 능력이 임해요. 그게 십자가에서 참여하라고 오는 그런 통보가 옵니다. 십자가에 오는데 그 죽으라고 오는 능력이 뭐냐 하면 그게 바로 성령이 와요. 성령이 오게 되면 이미 그 사람은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편안해요. 죽은 자가 된다는 말이 이해가 잘 안 되면 이걸 뭐로 보느냐 하면 미래 자로 보면 돼요. 미래에 와서 느긋하게 과거를 회고적으로 보는 거예요. ‘내가 사탕 좋아했었지. 아, 내가 그때 과소비해서 5만 원 했잖아.’ 이걸 자기가 현재 이야기가 아니고 마치 미래에서 과거를 이야기하듯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이. 죽음의 특징은 시간이 정지되는 겁니다. 그 정지 된 시간을 만끽하는 거예요.

어떻게 해서 이 성전을 왜 이해를 못하느냐? 성전에는 다른 시간대가 이렇게 작용합니다. 어때서 그렇게 되는가? 그건 10분 쉬고. 두 번째 시간에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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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요한복음6장44(봉인)150409b-이 근호 목사

성전이라는 것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말씀은 봉인된 것이고, 봉인됐다는 말은 풀어주는 분이 따로 계시다. 봉인하신 분이 풀어줘야 돼요. 풀어줄 때 풀어주는 그 모든 해석 기법이란 이것은 아무도 몰라요.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이런 건 몰랐습니다.’ 하는 고백을 해요. ‘이런 건 정말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럼 ‘생각도 못했습니다.‘라는 말을 하려면 모든 생각한 것을 주께서 다 아시고 그걸 피해가야 되겠죠. 그걸 만약에 안 피해 가면 ’내 그럴 줄 알았어.‘ 이렇게 된다 말이죠.

한 가지 예를 들면 히스기야가 기도하면서 15년 더 살았잖아요. 죽어야 되는데 15년 연장했다 말이죠. 연장할 때 히스기야는 뭐냐 하면 ‘아, 내 이럴 줄 몰랐습니다. 세상에 내가 기도한다고 해서 15년 더 연장 받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때 징표가 해 그림자가 15도 앞으로 나가려 하니까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처럼, 뒤로 빼 달라 해서 뒤로 백으로 돌려서 빼줬거든요. 더욱 더 놀라는 거예요.

그런데 히스기야가 정작 몰랐던 게 뭐냐, 그렇게 오래 살게 해 달라 하는 그것이 자기가 미처 몰랐던 죄라는 사실을 몰랐던 거죠. 그것이 하나님께서는 오래 살게 해 달라는 그것을 유대나라가 멸망하는 징후로 사용할 줄 몰랐죠. 그 뒤에 바벨론 사자가 와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으니까 건드리지 말라.’는 폼 새를 낸 거죠. ‘봐, 나 15년 더 살았지? 여기 있는 모든 보물 좀 봐. 창고에 있는 모든 무기들 다 하나님이 함께 있기 때문에 큰 나라로 여기고 함부로 넘보지 마.’라고 했던 그것이 이미 히스기야가 예상하고 있고 알고 있던 거잖아요. 그걸 드러내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늘 하잖아요. 기도하시고 그것이 몽땅 공수표로, 부도수표로 드러내게 하실 때 비로소 기도는 회고적 효과를 내는 겁니다. 제 말을 이해 못해서 기도하지 마라 하는데 기도하지 말라는 게 아니고 기도를 하시되 응답은 기대하지 마세요. 왜냐 하면 마지막 이름은 뭐로 붙였습니까? 예수 이름으로 했기 때문에 응답은 기대하지 마세요. 예수 이름으로 기도했기 때문에 어떤 응답이 오느냐 하면 ‘내가 기도한 것이 바로 내가 미처 몰았던 내 감추어 놓은 내 죄였군요.‘라고 들추어내는 그 자체가 기도 응답입니다. 주께서 하시는 기도의 응답 이예요. 항상 우리는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지만 아까 집사님이 성경 창세기 1장 다 알았다.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지만 계속 이만하면 됐다는 걸 피해가는 새로운 사태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성도한테는 그게 감사로 이어져요. ‘아! 주께서 저를 버리지 않는구나. 주께서 나와 동업하지 않는구나. 주의 나라에 조금도 우리 힘을 가지고 사용하지 않는구나.’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의 일이면서 나를 내치시느냐, 내치시는 것이 아니고 드러내 놓고 우리 하는 일을 거부하시고 다만 혼자 성사한 일을 은사로, 선물로 우리에게 덤으로 계속 효과를 보게 하시는 거예요. 미안하게도. 황공스럽게도. 한 것도 없이 다 하게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남을 용서 실컷 하게 해놓고 우리 용서 인정하지 않고 주께서 해놓고 우리와 우리가 용서해야 될 사람을 용서해 버리죠. 우리가 한 그 용서는 용서로 간주하지 않고 주께서 하신 것으로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결국 우리가 아는 것은 나는 남을 용서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즐거움을 누리게 하죠. 우리는 남을 용서할 마음도 없고 용서할 그런 자세도 안 돼 있고 절대로 용서해 줄 리도 없고 그것이 바로 나인 것을 깨닫게 하죠. 그래서 주기도문이 완성이 되는 겁니다.

성전에서 성전 안의 내용은 이 안의 내용이 뭐냐, 뭐 길게 말고 딱 한 마디로 이야기해주세요. 하면 이렇게 합니다. 성전 바깥은 뭐를 생산하느냐? 모든 것을 죄로 만들어요. 그 죄를 성전 안으로 가져옵니다. 성전 안으로 가져와서 죄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의로 바꾸어요. 그 중간에 뭐가 있느냐, 바로 희생할 분의 희생이 들어갑니다. 죄, 희생 자, 의, 거기서 죄에서 의로 이게 전이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요걸 위해서 모든 성전에 있는 뜰, 그리고 제구, 기구, 삽, 놋 제단, 모든 그 제사장의 활동들이 죄와 의와 그 중간에 전환시키는 작업과 관련돼 있습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천국은 지옥 없이는 천국이 안 만들어지는 거예요. 천국은 지옥에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지옥에 가서 희생한 그분에서 천국은 새롭게 시작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는 죄가 있어야 죄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의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구원 받은 죄인들은 할 말이 없는 거죠. 생명의 면류관도 그냥 주는 게 아니고 냅다 그냥 던져버려요. ‘어구 씨, 던져버려요. ’바보 같이 내가 이걸 쓰고 있다니, 이런 엉터리가 어디 있어.‘ 하고 집어던져 버려요. ’주님이 쓰려야 되지, 내가 무슨.‘ 던지는 장소가 뭐냐, 성전입니다. 면류관 쓴 죄, 생명의 면류관 쓴 죄까지라도 주께서 이미 했습니다. 하는 거죠.

그래서 이 땅에서 우리가 할 일은 뭐냐 죄를 짓는 일을 해줘야 돼요. 왜, 죄를 질 때 이게 재료가 계속 나오니까. 재료가 있어야 생산품이 나오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죄를 지을 줄을 몰라요. 왜 죄를 지을 줄 모르느냐, 죄가 뭔지 몰라요. 왜 죄가 뭔지 모르느냐 하면 우리는 뭘 따먹기 때문이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우리의 죄는 뭐냐 하면 선과 악 사이에서 악을 죄라고 규정하는 그런 식으로 이미 품성이 그런 식으로 이미 확정돼 있어요.

 대표적인 사람 중에 하나가 바로 부자 청년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한테 처음에 뭐라 했습니까? 그냥 “예수여”가 아니고 “선한 선생이여” 선한 선생이라고 예수님을 선하다고 언급하는 그 선함에도 개념이 있잖아요. 아까 집사님이 말한 개념이요. 그 개념을 어디다 적용시킨 줄 알아요? “선한 선생이여”해놓고 자기 어릴 때를 적용시켰습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킨 선한 청년으로서 왔습니다.’

선하면 돈 법니까? 경남 기업이 선해서 경남 기업 되었겠어요? 부자가 선해서 부자 될 수가 있습니까? 아, 난 도저히 안 믿습니다. “선한 선생이여, 나는 어릴 때부터 십계명 다 지켰습니다. 이제 남아있는 것은 영생인데 또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내 것 만들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네가 선하다는 증거가 뻔히 알거든요. 왜 부자 됐으니까요. 부자라 하는 것은 선에 대한 보상책으로 신이 준 거라 말이죠. 보상책으로.

잠언 서에 보세요. 잠언 서에 보면 “지혜로운 자는 부자 되고 어리석은 자는 가난하게 되고, 결과를 놓고 볼 때 자기는 선한 쪽일 수밖에 없죠. 왜냐, 그만큼 하나님한테 복을 받았으니까. 그것도 놀라운 사실은 그게 하나님이 주셨다는 사실로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얼마나 심령이 순진하고 순수해요? 만약에 그 사람이 평소에 악을 저질렀는데도 돈이 생기면 그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예요. 주께서 제가 방금 이야기한 그 점을 언급합니다. ”네 모든 것을 팔아라. 악한 데서 부자 됐는지 아니면 선한 데서 부자 됐는지 네가 알 거니까 네가 알아서 선택해 봐라.” 부자의 선택은 그거였습니다. 내가 착하기 때문에 부자 되었습니다. 바이, 바이, 잘 가거라. 부자는 근심해서 돌아갔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 듣고 제자들이 저 부자보고 욕한 게 아니에요. 그 이야기를 보고 부자가 동일한 의미망에 그들, 제자들이 걸려든 거예요. 제자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부자가 천국을 못 간다면 도대체 누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주님 떠난 부자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부자 그 사고방식과 똑같은 사고방식이 자신들이 이미 갖고 있다는 것이 주 앞에 들통 난 거예요. “주여 그러면 도대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부자가 천국 가기가 힘들다. 거기 대해서 ‘우리는 부자가 아니니까 구원받았지.’ 이게 아니고 갑자기 걱정들을 하는 거예요. ”누가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정답은 단호합니다. “사람은 할 수 없다.” 저는 기독교 신자 집마다 이거 썼으면 좋겠어요. “사람은 할 수 없다.”를 액자로 만들어서 현관에다 붙여 놨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 그런 건 붙이지 말고, 이것 좀 붙여 놨으면. ”사람은 할 수 없다.“

그 뒤의 말이 뭡니까? “하나님은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뭐가 전제돼야 돼요? "사람은 할 수 없다.“는 작업이 어디에 포함됐느냐 하면 주께서 구원의 일을 벌이는 작업 속에 하나의 과정으로 이미 전제로 깔려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할 수 없습니다.’가 나온다는 말은 그건 본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그런 능력을 줬기 때문에 그런 놀라운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어떤 고백요? ‘나는 구원에 실패했습니다.’라는 고백. 그리고 ‘나는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라는 고백. 왜, 그게 신자에요.

‘내가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 믿는 행함은 절대로 이건 믿음이 아닙니다. 그건 행함의 일종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 믿을 수 없고 내가 예수 믿는 것도 행함의 일종이라면 그 다음부터는 나와 남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로마서 14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형제를 질타할 자격이 우리한테는 없게 돼요.

그러면 성도와 성도 간에는 어떻게 됩니까? 어디를 경유해야 돼요. 처음에 전지를 발견한 사람이 니켈 금속에 했잖아요. 할 때 중간에 전지를 해놓고 선을 금속 용액에다 전지를 이어서 들여왔다 말이죠. 마찬가지에요. 성도와 성도가 각각 소유한 것은 내놓으면 안 돼요. 경유를 해야 돼요. 어디를 경유하느냐,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하면서 내가 가진 믿음 소망 사랑을 전부 다 십자가 앞에서 이미 죽은 자가 돼 버려요.

그러면 멀쩡한 내가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서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가 되면 그 죽은 자 안에서 새롭게 여기서 뭐가 주어지느냐, 주님에 의해서 매일같이 새롭게 생산되고 삶을 부여받게 되고 인정받게 되는 시간을 여생을 공급 받게 되는 사람들이 모였을 때 저 사람이 살아가는 것도 은혜고, 내가 살아가는 것도 은혜고, 그러면 둘이 만났다 하는 것은 뭐로 만난다? 주님의 은혜를 매개로 해서 만나죠. 이게 바로 죄와 의의 중간의 매개체가 돼요. 그러면 그 사람 몸을 성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성전, 존재적 차원이 아니고 기능적 차원 이예요. 주께서 벌이는 기능이 아직도 펄떡이고 있느냐? 네 안에. 나와 너가 아니가 내 안에 계신 주님과 저 사람의 주님의 만남의 지점이 그게 성전 이예요.

그러면 아내가 복음을 알고 예수님한테 구원을 받았고 남편이 예수님한테 구원을 받았으면 그 둘이 있으면 그게 뭐가 됩니까? 성전이고 그 가정이 교회가 되겠죠. 그러면 그 가정에서는 사소한 콩나물 사기, 뭐 애들 피아노 가르치고 레슨하는 그 돈은 전부 다 교회 돈 이예요. 그러면 자기가 자기 쓰는 것이 하나님께 헌금 받아 쓰는 제사장 역할을 하고 있는 겁니다. 내 돈이 아니라니까요. 같이 가족끼리 영화 구경 가는 것도 다 주님 헌금한 돈으로 간다니까요. 여기 세 사람 25000원, 주님 헌금한 돈으로 영화 본다니까요. 매일 같이 TV 시청료 내는 것도 주님 돈으로 내는 거예요. 뭘 헌금을 해요? 헌금 받고 있는 입장인데. 뭘 또 헌금을 해요? 받고 있는데.

그럼 어느 교회에 돈을 만원 헌금 했다. 내 돈입니까? 주께서 나를 통해서 하게 하셨지. 투자한 게 아닙니다. 그 교회 주식 한 구좌 빼낸 게 아니에요. 그걸 가지고 고린도후서 8장에서는 바로 성령에 의해서 하라는 거예요. 네가 성전의 기능으로서 살아라. 이 말입니다. 성전의 기능으로서. 뭔 뜻입니까? 너는 모든 것이 삭제된 기능으로서 움직이라 이 말입니다. 삭제된 기능으로서.

이렇게 보니까 신약 성경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이야기가 하나도 어렵지 않죠? 문제는 영의 사람이 되면 하나도 어렵지 않죠. 그런데 육의 사람이면서 영인 척 하는 사람한테는 이거는 무지무지하게 어려운 거예요. 이거는 법을 지켜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해를 질 때까지 분을 품지 말아야 되고, 술을 먹되 취하기까지 먹지 말아야 되고,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되고,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아야 되고, 지킬 조항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니까요. ‘에이, 씨’ 온유해야 되고 화평해야 되고 자비해야 되고. 거기다 가끔 예수 또 믿어야 되고. 그걸 전부 다 내가 날 구원 받는 법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전은 뭐냐, 성전은 중첩된 겁니다. 무슨 중첩? 세상적인 몸에다가 주의 영적인 몸이 중첩이 되니까 내가 내 맘대로 안 되는 거예요. 내가 내 맘대로 안 될 때 어떤 외부적인 기능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꼭 구약에 나오는 엘리야 같아요. 오늘날 성도가 엘리야 보다 더 뛰어나요. 어린애라도 구약보다 뛰어나요. 그 중첩의 기능이 물론 사도들, 사도바울, 베드로 마찬가지지만, 오늘날 우리도 성령 받은 사람은 마찬가지로 똑같은 입장에 있습니다. 중첩된 입장에 있어서 우리 성도가 사는 기쁨은 뭐냐 하면 예상 못한 낯선 것들이 자꾸 나온다는 겁니다. 이게. 그것도 앞에 뭐가 붙죠? 예상 밖의 것이 자꾸 나오는 거예요. 그 예상 밖의 것이 자꾸 나옴으로 말미암아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고 따로 있다는 것을 늘 의식하게 만드는 작업을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44절 봅시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게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마지막 날에 살리리라“ 돼 있잖아요. 그런데 이 대목을 보는 사람은 내가 알기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주님 마지막 날이 언제입니까?“ 여기에 초점이 있어요. 마지막 날이 언제입니까? 묻는 걸 보는 것은 뭐냐 하면 이 말씀의 핵심을 놓쳐 버리고 내가 언제 쯤 살게 되느냐, 자기 구원에 여전히 매어 있기 때문에 그런 질문인데 제대로 보게 되면 ”마지막 날에 살리리라“ 이 말은 뭐냐 다 제거해 버리고 잘라버리고 ”다시 살리리라“ 그것도 깁니까? ”다시“ 빼버리면 마지막에 뭐가 남아요? 네 자. ”살리리라“ 누가요? 예수님이. 그러면 됐잖아요. 그러면 됐잖아요.

뭐 헌금을 걱정하고 뭐 교회 봉사를 왜 걱정합니까? 애를 뭐 교육을 어떻게 시키고 애 유학 보냅니까? 그 걱정을 왜 하는 거예요? 애가 날 때부터 키가 작아서 어떻게 하면 키 클 수 있는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죠. 사업이 되느니, 안 되느니, 이런 것이요. 뭐 당뇨가 걸리니, 당뇨 걸려도 마지막에 뭡니까? 살린다잖아요. 살린다잖아요.

제가 기업하다가 망했습니다. 국가 돈 330억 횡령해서 나 망했습니다. 뭐 어떻고 검찰에 불려갔습니다. 불려가도 괜찮아요. 왜 살린다잖아요. 그걸 애 못 믿어요? 박치기 하고 나무에 매달리고 왜 그래요? 살린다잖아요. 주께서. 내가 날 살리는 게 아니고 ‘뭘 하면 살려줍니까?’ 가 아니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살린다잖아요. 주님이.

그러면 마지막 날이 언제입니까? 내가 사는 날이 마지막 날 이예요. 그 날이 언제입니까? 그날이 지금이죠. 뭐.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 주의 말씀은 봉인돼 있습니다. 봉인돼 버리면 과거 현재 시간이 없어져요. 없어지면 알파요 오메가가 돼 버립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이 돼요.

그러니까 로마서에 보면 “이미 너를 살리셨고 하늘에 앉히시니” 과거 완료가 자꾸 튀어나오는 거예요. “이미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한 자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미 완료된 상황이 계속 나와 버린 겁니다.

그걸 우리는 풀 수 없어요. 왜냐 하면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 우리의 시간 의식이 따로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미진, 남아있다고 보는 겁니다. 미완료로 보는 거예요. 그 미완료를 보는 것을 주님께서는 우리 예상을 어긋나게 그게 미완료라도 나와 함께 있잖아, 너는 미완료지만 나한테는 완료가 된 상황이거든요. 우리한테는 아직 남아있지만 주께서는 이미 성취가 다 된 일이다 말이죠. 그런데 성취가 안 된 내가 왜 걱정합니까? 내가 못한 걸 내가 걱정 할 게 아니고 같이 계신 분이 성취했다는데 그분한테 맡기면 우리는 빠지면 되는 거예요.

이 빠지는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하면서 자꾸 빠져 버리세요. 차라리 빠져버리면 걱정도 함께 빠져 나가게 돼요. 안 빠지면 어떻게 되는데? 안 빠지면 과거에 내가 했던 것이 기억이 됩니다. ‘내가 25살 때 은혜 받았고 40  때 기도원에 가서 뭘 했고, 이게 자기 하나의 역사가 돼 버리면 드라마가 돼 버리면 이건 점점 더 자기 부인이 안 돼요. 아까워서. 그동안 교회 나와서 헌금 낸 게 아까워서, 그걸 복리로 계산해 보세요. 십일조 복리로 계산해 보세요. 적금도 그런 적금이 없어요. 얼마나 돈이 이자로 받았으면 예배당 종탑까지 요까지 내 것이다. 이런 생각 안 들겠습니까? 피아노 했으면 저 피아노 영원히 자기 거 돼요. 피아노 기증하게 되면.

피아노가 이렇게 없을 때는 가난할 때는 피아노를 기증하세요. 기증하시고 계속 그것이 내 것이라는 죄를 발견하시면 그게 재료가 됩니다. 꽃꽂이 하시고 꽃꽂이 내가 했다고 자꾸 자랑 질 하세요. 그러면 그 죄가 재료가 돼서 주께서 그걸 의로 바꿔주십니다. 바꿔주실 때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얼마나 부끄럽겠어요?

이런 말을 알아듣는 것은 너희들의 능력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줄 때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도록 믿을 수 있도록 능력도 함께 세트로 해서 다 택배로 다 보내줍니다. 다 보내줘요. 보내주게 되면 ‘나는 받았다.’ 하는 게 아니에요. 보내주신 분을 증거 하지 ‘나는 받았다.’를 증거 하는 게 아닙니다. 왜냐 하면 이걸 받게 되면 졸지에 내가 죄인이 돼 버리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나는 의인이었는데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죄인이 돼 버립니다. 왜냐 하면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성령 안에 십자가를 심어 놓고 우리에게 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 안에 뭐가 들어있다 했어요? 아까 첫째 시간에 십자가 안에 뭐가 있다 했습니까?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버리시나이까 하는 것이 예수님을 버렸잖아요. 그럼 예수님 버릴 때 모든 사람, 나도 버렸잖아요. 그러면 성령 받았다는 말은 나는 이미 버린 몸인 것을 기정사실화해서 나는 감사히 받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구원받는 것은 나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나를 버린 자로 하시면서 나를 떠나지 않고 버린 자와 더불어 함께 계신 그분의 이름으로서 내가 구원받아 버려요. 그럼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연고자가 되는 겁니다. 오도 갈 데 없는 노숙자 신세가 돼 버려요. 우리는 이름도 없어요. 이름도 얼마나 없었으면 기도할 때 맨날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겠습니까? 내 이름이 없었으면. 이름도 없어요.

그리고 베드로전서 4장에 보면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네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네 이름으로 하지 말고 주께서 주신 이름으로 하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사는 거 내가 요령 가르쳐 드릴게요. 기차의 제일 뒤 칸에 서서 기관 석에 가지 말고 미래는 주님 쪽으로 이미 가게 돼 있어요. 뒤에 가서 서부 영화 보면 나오잖아요. 뒤 칸에서 지나가는 걸 보는 거예요. 4월 9일 날 성 회장 자살하다. 이런 거 보시고 내일 되면 내일 또 뭐가 나올 지 몰라요. 롯데가 SK한테 5:0으로 지다. 뭐 이런 거. 그게 나올 때 있고, 4월 16일 날 쯤 되면 주식 값 폭락, 망했다. 이런 게 나올 수 있고. 그게 전부 다 주께서 이미 아시는 과거 사례를 우리가 거기 함께 동참하면서 같이 공유화 하라고 주신 말씀이죠.

‘그래, 내가 저런 때 완전히 마음 필이 꽂혀서 저거 미쳤다고 사댔지. 주식 그게 뭐라고 거기에 목 달았지. 아이고, 아이 공부가 뭐라고 거기 했지.’ 그걸 회고하듯이 그렇게 죽 지나가야 되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그 코스가 주께서 다녀가신 길이기 때문에. 다녀가신 길, 주께서 아스팔트를 깔아놨다고요. 그 길을 우리로 하여금 가게 하시는데 그걸 우리는 안 되니까 성령이 임해서 가는 겁니다. 성령이 임해서 죽 가면 되면 우리는 세상에게 미움 받고 미움 받게 한 그것이 주님의 사랑이고, 따라서 미움 받느냐? 그게 사랑이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이건 드라마에 나오는데 대사에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띠 띠고 원치 않았던 그 길이고, 사도요한도 그 길로 갔고 스데반 집사도 마찬가지고 구약의 선지자도 마찬가지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진해서 고생하지 마세요. 자진해서 고생하고 고난 받는 그것도 자기가 예상한 바입니다. 절대로 그러면 자기 자랑이 돼요.

항상 몰랐던 죄가 나오면 그건 성령이 하시는 일이고 그렇지 않고 뭔가 나도 하나님이 기여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성령이 아니고 하나님 일을 빙자한 자기 개인 적인 사적인 종교 욕구가 돼 버립니다. 종교 욕구는 반드시 일을 해놓고는 반드시 반대급부를 요구하게 돼 있어요. 인간은 그렇게 돼 있어요. 왜냐 하면 아까 이야기하다 말았습니다마는 인간은 왜 죄를 지을 수 없느냐 하면 선과 악에서 선과 악을 누가 판단하느냐 하면 본인이 판단해요. 판단할 때 이 판단의 선배들이누구냐 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선배였습니다. 선과 악을 판단할 때 여기에 뭐가 도입됐냐 하면 기준이 들어가요.

이 기준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이 기준이 어디서 나올까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온다고요. 다시 이야기할까요? 모든 말씀은 봉인된 것이고, 그 말씀의 풀이와 해석은 누가 한다? 봉인 시킨 예수님만 해야 됩니다. 모든 말씀은 예수님을 경유해서, 십자가를 경유해서 ‘말씀을 다 이루었다.’를 경유할 때 해석이 나오게 돼 있어요. 그렇게 해석이 돼 버리면 해석 자체가 이미 죄인으로 규정된 채 해석되게 돼 있습니다.

‘나는 틀렸고 주님만 옳았습니다.’라는 해석으로 동일한 해석이 나오게 돼 있습니다. 모든 성경이 다 그래요. 로마서 3장 이야깁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인간은 거짓되나 하나님은 참되시다.” 이게 모든 해석에 다 동일한 해석이 나와야 돼요.

교회 와서 목사가 설교할 때 그 복음으로 설교했다는 마지막 나온 설교는 이거 하나 뿐이어야 됩니다. 그래서 교회 망해도 괜찮다는 이야깁니다. 설교 시간 요소리가 나와요. ‘그래서 이 교회 망해도 상관없죠? 그렇죠? 아멘 하십니까?’ 이렇게 나와야 돼요. ‘뭐 하늘나라 확장합시다.’ 이렇게 나오면 안 된다니까요. 확장을 왜 지가 하는데? 확장한다는 것이 확장을 방해해요.

자, 선악의 기준을 누가 집어넣어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해야 되는데 선악의 기준을 자기가 집어넣습니다. 자기가 집어넣으면 기준을 분석을 해 보자 말이죠. 선과 악의 기준을 분석하면 길어지니까 정답부터 말씀드릴게요. 나의 의가 남아있으면 그게 기준 이예요. 어떤 우리가 잣대를 재고 어떤 판단을 할 때 그 판단하는 내가 옳은 판단이었다는 것이 남아있는 기준을 인간은 반드시 적용하게 돼 있습니다. 반드시 그래요.

그 탈랜트 이영애 있죠? 어떤 사람은 이영애가 이쁘다 할 때 어떤 사람은 ‘이영애가 뭐 이뻐? 나는 이영애가 이쁜 게 아니라 김 혜수가 이쁘다.’ 할 때 왜 다른 의견을 내놓죠? ‘내가 기라면 긴거야.’ 그거거든요. 어떤 사람이 부자가 돼서 돈을 함부로 쓰는데 ‘당신 돈을 왜 함부로 씁니까?’ 하면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내 돈 내가 쓰는데 니가 왜? 내가 내 돈 쓰겠다는데 니가 왜?’ 그거다 이 말이죠.

어떤 경우라도 ‘나는 나의 의를 포기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는 거예요. 성 폭행 범에다 사람 죽이고 사람까지 살인 강도했다. ‘당신은 왜 그런 짓 했습니까?’ 그 사람 하는 말이 '사회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요.’ 그 말은 뭔 뜻 이예요? ‘난 아직도 양심은 살아있다. 내가 이렇게 나쁜 짓해도 지금 내가 거지 보고 천 원짜리 동냥 줍니다.’ 이게 뭔 뜻 이예요? 아직도 나는 어른 요소가 있다는 말이잖아요. 그러니까 그 판단 가지고 모든 판단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범죄는 결국 뭡니까? 너의 의가 삽입된 거예요. 선과 악을 안다는 이것만큼은 내가 포기 못하겠다는 겁니다. 지난 낮에 계시 설교했잖아요. 사람은 주님 앞에 희생을 하면서 희생하는 나를 희생은 안 하고 있어요. 희생하는 나를 내가 손 놓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희생하면 희생할수록 자기가 어떻게 돼요? 점점 위대한 의인이 돼가는 겁니다. 이거는 자기를 망치는 거예요. 완전히 자기를 파멸에 집어넣는 겁니다. 파멸에 집어넣는데 그게 좋은 걸 어떻게? 왜, 타고난 선악과가 그런 몸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게 맞아요.

그래서 좀 더 나아가면 내 의를 포기 못하는 것이 악이고, 그걸 좀 더 확장시키면 뭐냐, 내가 편한 것, 정신적, 육체적으로 내가 안락한 것, 이게 진리에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뭐가 진리냐 하면 내가 행복해 지는 게 진리에요. 행복에서 행 자 빼버리면 뭐가 남습니까? 내가 복 받는 게 진리에요. 이게 한국교회잖아요. 내가 잘 되는 게 복 이예요. 그것이 기준이 되어서 세상을 그런 식으로 재단, 자르는 겁니다.

자를 때 뭐로 자른다? 언어로 잘라요. 언어는 차이를 만들기 위해서 자르는 것이 언어입니다. 언어는 현실을 죽여 버리고 내 뜻에 맞추도록 전부 다 서랍에다 적당하게 배치하는 것이 언어에요. 그러니까 인간이 ‘목사님 어떻게 기도하면 됩니까?’ 하는데 기도문 한 번 써보세요. 이 기도문 어떻습니까? 언어로 돼 있잖아요. 언어로 썼으면 누가 썼어요? 내가 썼잖아요. 그럼 이 기도문 뭐 여기서 옳은 게 나올 게 없죠. 왜 내가 썼으니까. 내가 썼다는 말은 그 안에 뭐가 포함돼 있습니까? ‘잘 썼죠? 이 기도문 잘 썼죠? 기도 잘 했죠?’ 가 이걸 본인이 본인의 것을 뺄 수가 없어요. 이게 인간의 한계요, 딜레마입니다.

누가 뽑아줘야 돼요. 누가 뽑아서 내 것인데 내 것을 뽑아서 누가 가지고 떠나야 돼요. 결국 인간은 자기 죄를 자기가 뽑아낼 수 없거든요. 왜 끝까지 잘난 체 하기 때문에. 그런데 나한테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나한테 허락도 없이 내 죄를 뽑아서 ‘약 오르지?’ 하고 도망치듯이 하늘로 가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누굽니까?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 죄를 잘 뽑으셨습니다.’라고 받아들이는 거예요. ‘아이고, 주님의 십자가 피 아니었으면 나는 그 정도로 피 흘리도록 죄인인 줄 난 몰랐습니다. 그 전까지는 나는 죄인인 걸 알기는 알지만 그저 착한 적도 있기 때문에 같이 상쇄해버리면 그것도 빼기 더하기 해버리면 약간 착한 놈, 약간 나쁜 놈, 이렇게 되는 줄 알았지, 전적으로 내가 모친에서 죄 중에 태어난 그 정도로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미처 몰랐던 아무리 오래 살아도 100살이 돼도 몰랐던 그 모든 걸 한 번에 십자가 사건으로 한 번에 끝내 버렸어요.

그 사실은 바로 성령이 와야, 예수님의 영이 와야 그 사실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을 이렇게 보고 있지만 제자들도 이때는 이 뜻을 몰랐어요. 나중에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요한복음 6장을 다시 쓰면서, 다시 보면서 회고적으로 ‘아! 그때 이 말이었었었어.’라고 알죠.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할 때 그 당시에는 제자들이 몰랐는데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아! 예수님이 성전이구나.’하는 걸 이제야 회고적으로 알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회고적인 것이 한 번 알면 그게 아는 걸까요? 여기서 마지막이라는 의미가 중요해요. 언제 살린다 했습니까? 마지막이죠. 마지막 날 살리죠. 그럼 마지막 날에 뭘 해야 됩니까? 예를 들어서 2015년 4월 9일 날 내가 은혜 받았다고 칩시다. 내일 만약 살아있으면 2015년 4월 9일은 마지막 날이 아니에요. 내일 살아있으면 내일 4월 10일이 마지막 날이잖아요. 그러면 마지막 올 때까지 4월 9일 날 하는 것이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자기 의로 돌변해 버립니다. ‘나 어제 은혜 받았어, 니 안 받았지? 나 은혜 받았어.’ 그러면 주께서는 아직 살리면 안 돼요.

마지막 날 살리는 그 날에 소급해서 ‘4월 8일 날 4일 치는 전부 다 죄였어.‘가 돼요. 그러니까 마지막 그때가 십자가에 대해서 오직 십자가 뿐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 때인데, 제대로 안다는 게 뭐냐 하면 제대로 살 동안은 제대로란 말을 쓰면 안 돼요. 죽을 때 제대로라고 이야기해요. 마지막 죽을 때 그동안 살게 한 것이 살고 싶어서 살아온 게 아니고 살도록 억지로, 억지로 질질 끌고 온 거예요. 십자가만으로 가게하고 보기 위해서.

강도가 강도 짓하게 된 것이 주의 뜻입니다. 강도 안 했으면 안 되잖아요. 강도 짓 하게 해서 결국은 그날 밤에 주와 함께 마지막 때를 보냈습니다. 이 마지막 때는 사람마다 다 달라요. 강도는 십자가 달릴 때고 우리는 아직 안 되었고 하지만 도착 지점은 똑같아요. 주와 함께 낙원에 가는 도착 지점은 동일합니다.

그래서 이걸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의 시간 의식은 창세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렇게 일직선이지만 주님은 장충 체육관 같아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지붕이 이렇게 있고 이렇게 돼 있습니다. 어디를 가도 이쪽으로 어디를 가도 이쪽으로, 2000년 전에 죽은 사람도 이쪽으로, 엘리야도 이쪽으로, 모세도 이쪽에, 모세가 1400년, 엘리야가 800년과 750년 사이, 그러면 나이 차가 몇 년 차이 납니까? 600년 차이 나죠.

그런데 변화 산에서 뭡니까? 맞먹잖아요. 변화 산에서 모세하고 엘리야하고 맞먹죠. 이거 뭐 선배도 없고 후배도 없고 맞먹는다니까요. 아마 아브라함도 맞먹을 거예요. 왜냐 하면 그때는 천국 가면 뭐가 되느냐 하면 천사가 된다 하잖아요. 천사가 된다는 말은 뭐냐 하면 모든 시간 요소가 없어지거든요. 사람이 흙에 속한 형상을 입었기 때문에 늙음이 성립이 되는 거예요. 늙음이라는 것은 뭐냐 원형을 찾아가는 겁니다. 흙이 돼 가는 과정 이예요.

그런데 새롭게 주어진 몸은 흙에 속한 몸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몸이거든요. 하늘에 속한 몸을 누가 먼저 시범적으로 보여줬느냐 하면 예수님의 부활의 몸 이예요. 예수님의 부활의 몸이 놀랍게도 어떤 자는 만지지 말라 했다가 어떤 때는 보이지도 않다가 어떤 때는 문이 닫혔는데도 불구하고 이건 뭐 쑥 들어와 버렸다가 그러면서 육체는 또 그 몸인데 창 자국 못 자국은 그대로 있고, 그러니까 이 예수님의 몸에서는 언어가 천국에서 소통되는 의미망이기 때문에 우리의 물체 적, 물질적 그런 이미지 갖고서는 이거는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그 설명이 안 되는 걸 가지고 자꾸 저한테 와서 ‘목사님 죽으면 우리가 어떻게 됩니까? 먼저 죽으면 어디 가 있습니까?’ 물으시는데 그거 아시면 골라잡아 가실까요?

천국은 우리가 골라 잡아가는 곳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구원하면서 나를 질질 자기 앞으로 당기고 있음을 낯선 사건, 날마다 새로운 사건들을 통해서 그걸 느끼는 사람이 가는 거예요. 그리고 그 낯선 사건이라 하는 것은 날마다 ‘아이고, 내가 더 안 살아도 되지, 아, 진즉에 죽어도 나는 손해 본 거 없어.’ 이런 마음이 들 정도로 ‘아이구, 살아봐야 죄만 짓지.’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런데 주님 덕분에 구원받았으니까 점점 더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아멘, 주여 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자꾸 당겨져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 느끼려면 자기 자신에게 순간, 순간어떤 절만을 느껴야 됩니다. 자기 자신한테 실패와 절망과 날 보고 ‘어이쿠, 인간아.’ 한숨이 나와야 되고, ‘저 머리 빠지는 것 좀 봐. 뿌려도 안 돼. 나지도 않고. 이제는 온 몸이 안 아픈 데가 없어.’ 일 벌렸다 하면 실패하고 좀 된다 싶으면 외국에 사건 터져서 일이 이상하게 꼬여서 단가 떨어지고 뭐 되는 일이 없어요. 요번에는 한화가 잘한다 싶었더니 엘지한테 져버리고. 하여튼 내가 응원하는 요번에는 한국 축구 했는데 ? 내가 밀고 응원했고 기도했고 내 자식이 어떻게 되고 모든 것이 전부 다 틀어지네. 다 틀어져요. 도대체 뭔가 디딜 바닥을 허용을 안 해요. 이거 하면 푹 꺼져버리고 저거 하면 푹 꺼져버리고.

유럽에 이런 동화 있잖아요. 어떤 사람이 금을 좋아하니까 ‘아! 금을 가지면 좋겠다.’ 그런데 진짜 소원대로 금이 되게 했거든요. 문제는 큰일 났습니다. 배고파서 음식을 먹는데 먹는 순간 씹어보니까 금이라. 이게 자기가 원했던 세계가 자기를 파멸에 넘기는 세대라는 것을 성도는 살아가면서 이걸 온몸으로 느끼게 주님께서 그렇게 조치를 해주십니다. ‘왜 내가 이 땅에서 빠져나온 줄 아느냐? 왜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고 너희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그 말을 왜 했는지 알아? 기도하면서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그 말이 왜 그렇게 귀하게 들리는지 알아? 네가 한 번 겪어봐. 이 세상이 얼마나 지옥인지, 겪어봐. 교회? 지옥이야. 겪어봐. 그냥 교회 안 다니고 오지 말고 교회 다니고 와. 다니고 경험하고 와.’ 교회가 구원하지 않는다는 곳이야. 그리고 나의 믿음이 날 구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나의 선교가 하나님 나라 확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러면 뭐냐, 내가 살아온 것은 주의 은혜죠. 안 살아도 되는 것을 매일같이 살려준 거예요. 매일같이 살려준 거예요. 나의 의가 만들어지고 이게 깨어지고 돌아서서 나의 의가 또 만들어지고 또 깨어지고, 나는 이제 성경 안다 하다가 또 무식한 자로 또 만들고, 계속해서 나 중심으로 이뤄졌던 그 애굽을 깨어지고 출애굽 시키는 거예요. ‘나의 세계 나의 기준은 옳다. 나의 기준 세계에 나의 의가 있다. 나의 선악 판단은 항상 옳은 거야.‘라는 그 애굽 사고방식에서 탈출시키기 위해서 주께서는 나에게 뭐가 되느냐, 나의 원수로서 오셔서 구원자가 되신 겁니다.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제자들 다 튀었어요. 단 한 명도 같이 있지 않았습니다. 뭐 막달아 마리아하고 야고보 마리아하고 예수의 어머니 있었다고요? 효자라고 어머니 있었다고요?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 시체나 수습하려고 있었지, 부활을 믿은 적이 없어요.

인간의 머릿속에는 부활이라는 것이 들어올 틈이 없어요. 그래서 부활이라는 것은 부활 인정한다는 것이 부활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지금 죽어도 괜찮습니다.’ 이게 부활을 아는 사람 이예요. 부활이라는 것은 지금 죽었다가 살아난 것, 그건 소생인데? 부활이라는 건 인간에겐 없어요. 부활은 인간에겐 이미지가 떠올릴 수 없습니다. 에녹은 안 죽은 거죠. 부활이란 개념은 사람이 죽었다는 그거와 관계없어요. 부활은 새로운 거예요. 새로운 거. 부활은 왜 새로운 거냐 하면 부활을 이루는 그 힘이 십자가에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거예요. 십자가 없는 이상은 부활도 없습니다. 십자가 있기 전에는 부활의 세계도 없거든요. 하늘나라는 있지만 부활의 세계는 없어요.

이게 참 어려운 이야긴데 십자가 때문에 부활이 생겼다 말이죠. 그래서 먼저 죽었던 엘리야나 모세는 죽은 나라에 가고 싶어 하는 게 아니고 부활의 세계에 가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한테 ‘주님 언제 별세하십니까?’ 물은 거예요. 변화 산에서. “가만 있어봐. 내가 죽어야 니가 들어가는 거야, 내가 죽어야 돼.‘ 그래서 주께서는 별세에 대해서 언급한 겁니다. 내가 사는 것이 희망이 아니고 죄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러면 죄 없게 하는 사건 중심으로 우리가 거기서부터 능력을 매일같이 공급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 일을 위해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어떻게 하느냐, 이 땅을 죄 속에서 우리가 미처 모르는 아까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죄를 알아야 죄를 짓는데 죄도 모르면서 죄라고 하니까 그건 잘못된 죄죠. 회개하라 하니까 회개 할 것도 없는데 무슨 자꾸 회개하라 하는지, 말도 안 되잖아요. 회개는 누가 하느냐, 주께서 살게 함으로써 회개시키지 우리가 알아서 회개하는 것은 선악 체제에서 나온 거예요. 요거는 착하니까 여기서 빼고 요거는 나쁘니까 요거만 회개하고. 이거는 반성이지 회개가 아닙니다.

전부 다 회개하기 위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 인생 가게 하시는 겁니다. 가게 하시는데 주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이질적인 것을 더욱 더 심화시킵니다. 심화. 이질적인 것을 심화시키면 처음에는 여기 6장 66절 봅시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그 다음에 뭐라 돼 있죠? “다시는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라고 했죠. 다시는.

그렇다면 처음에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 할 때는 사람들이 갔습니까? 안 갔습니까? 안 갔죠. 떡 주고 빵 주는데 누가 갑니까? 안 갔죠. 그런데 여기 66절에 다 갔죠. 그런데 이 사람들이 뭡니까? 제자라 했죠. “제자들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니라” 다 갔죠. 요거는 뭐냐 하면 12제자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묻는 거예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묻는 물음이 뭐냐 하면 “그래 너희는 알았지?” 가 아니라 “너는 왜 안 가는데?” 이렇게 해요. 베드로가 하는 말이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뉘게로 가겠습니까?” 하는 거잖아요. 고 결심 있잖아요. 고 결심마저 실패로 끝날 순간이 바로 예수님이 떠날 순간입니다.

이 말은 제가 한 말은 뭐냐 하면 더욱 더 심화시킨다는, 이질적인 것을 심화시켜서 예수님 주변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제가 도와드렸잖아요? 제가 뭐 했잖아요?’ 아무도 남기지 않아요. 아무도 남기지 않습니다. 심화시키죠.

그러면 주님의 말이 우리 보기에 점점 더 과격해지는 겁니다. 처음에는 좀 ‘아! 저게 주님의 사랑인가, 하나님 사랑인가.’ 하다가 점차는 ‘해도 너무 심합니다. 주여.’ 너무 심하다는 것을 누가 이야기했느냐 하면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가 이야기했죠. “주여, 제가 있는 한 주님께서 고난 받는 일은 없습니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할 때 예수님께서 과격한 표현을 했습니다.

베드로에게 뭐라 했습니까? 자기 제자보고 “악마야” 사단이 말이 사단이지 다른 말로 악마에요. “악마야, 물러가라. 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그 뒷말이 더 중요하죠. “니가 사람들 납득하는 말을 하는구나.‘ 이 말은 뭐냐 ”내가 하는 모든 말은 납득하라고 준 말이 아니고 이해하지 못하도록 해서 모든 인간이 내 죽는데 ’나는 예수님 죽을 줄 알았습니다.‘라는 말을 할 사람이 아무도 없게 만들어버려요. 그렇게 해줘야 예수님의 죽으심은 모든 인간이 이미 죽어있음을 선포하는 사건이 돼요.

그것을 로마서 5장에서 사도바울이 표어로 만들었죠. 한 사람이 죽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다. 이것이 아까 우리가 자살해서는 안 되고 주께서 죽여주시는 죽음으로 인하여 그 안에서 우리는 생명을 누리는 겁니다. 바깥에서 봐서는 죽은 자지만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부여받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죽지 않습니다.

그럼 뭐냐 꼴까닥은 뭐냐, 안식, 자는 거예요. 자러 갈 때 그렇게 우는 사람 봤습니까? 그래서 나사로, 오빠가 죽을 때 “울지 말라” 했잖아요. “예수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안 믿어지지?  내가 해낼게. 니는 안 믿어지는데 안 믿어져도 내가 해낼게.” 내가 해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이런 말을 해야 돼요. “주여, 내가 예수를 믿고 있는데 왜 내가 예수를 믿습니까?” 내가 처음에 예수 믿는다는 말은 내가 믿는 믿음을 말하고,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이 가짜가 있는데, ‘왜 진짜 나를 믿게 하십니까? 예수를 믿게 만드십니까? 내가 예수 믿는 거, 이거 있는데 이걸 왜 제쳐버리고 왜 저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하십니까? 저도 믿을 수 있는데 왜 저 믿는 건 제쳐버리고 주께서 절 믿게 하십니까?‘ 주께서 하는 말이 “그건 내 일이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에 우리는 이해해서 그 이해한 지식을 내 것 만들어서 그것 간직해서 소유해서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 내밀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우상숭배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탐욕의 일종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주께서 우리를 죽였던 취지에 어긋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러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구원하신 것이 주의 솜씨인 것을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