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녹취:이한례
가락-요한복음 5장29(예수 스캔들)
141218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5장 28절, 29절 할 차례에요. 거기 제가 한번 읽어드릴게요.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라고 돼 있죠. 예수님께서 이 말씀 하실 때 사람들 보기에 예수님이 사람으로 보이죠? 예수님이 사람으로 보이고 듣는 사람도 사람이고, 그럼 사람들끼리 이야기할 때는 소통이, 거기 누가 범위 내에서 하느냐 하면 다 같이 죽기 전에 살아있다는 전제 하에 통하는 이야기만 해줘야 그게 예의입니다. 그렇잖아요. ‘당신 살아 있죠?’ ‘역시 나도 살아있습니다.’ 우리 산 사람끼리 제대로 한번 살려면 어떻게 하느냐? 거기 관해서만 이야기해 주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배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 “기이히 여기지 말라” 예수님도 아셔요. 내가 이 하는 말에 대해서 충격이다. 충격이라고 돼 있는데 어떤 분들은 이런 표현을 하신 분이 있어서 제가 맘에 들어요. 방금 제가 충격이란 말 했잖아요. 기이히 여긴다. 다 충격적인 내용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도 괜찮아요. 섬뜩함. 섬뜩하다. 충격을 넘어서서 예상 못할 어떤 가시처럼 찌르는 말씀, 섬뜩한 말씀.
목사님하고 같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목사님이 저보고 하는 말이 ‘제 말을 앞으로 이야기할 텐데 너무 놀라지 마세요. 죽고 난 뒤에 제 음성을 들을 때가 옵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 그게 얼마나 섬뜩하겠어요? 충격적이겠죠. 충격, 섬뜩함. 카메라 때문에 맞춰 쓰겠습니다. 섬뜩한 이 순간 뭣이 다 날라 가느냐 하면 애들 밥걱정, 시험 걱정, 수능 문제, 장래 문제, 이 섬뜩함이 이 모든 것을 덮쳐 버립니다. 일거에 이건 문젯거리가 안 되는 걸로 전부 다 날려 보냅니다. 색깔로 이야기하면 창백한 블루 색, 하~얗게 창백해지는 그 색만 해도 너무 생각하면 밤에 마귀나올 것 같은 창백한 그 푸른 색. 전율이 나는 그런 말을 예수님께서 지금 여기서 제자들에게 한 거예요. “너희들이 죽고 나면 내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
그러면 지금은 같이 이야기하니까 맞먹죠. 같은 인간이니까. 그런데 말 하는 것 보니까 너와 내가 다른 정도가 아니고 단순히 너와 내가 다른 것이 아니고 네 동네와 내 동네가 다른 거예요. 완전히 지역이 달라요. 지역이 다른데 같이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이것도 신기한 거죠. 인터스텔라 같아. 차원이 다른데 같이 뭉쳐져 있는 거죠.
이것을 하나의 도식으로 표현한다면 이렇습니다. 하늘은 보통 위에 있고 밑에는 뭐가 있겠어요? 땅이 있죠. 그러면 사람들은 하늘 볼 때 어떻게 봅니까? 쳐다보죠. 쳐다보는 게 우리 상식이잖아요. 하늘과 땅이. 쳐다보지 않고 하늘이 이렇게 옆에 붙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쳐다보는 게 아니고 이렇게 대화하겠죠. 대화하면서 들리는 소리는 하늘의 소리를 듣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왔다는 것은 바로 그런 식입니다. 옆에서 하늘의 소리를 듣는 거예요. 그러면 그 순간 뭐가 거짓이 되느냐 하면 위를 쳐다보는 이 모든 것이 다 인간이 지어낸 하나의 만화 같은, 인간의 발상의 연장, 인간의 허망의 연속에 불과한 거예요. 인간이 생각한 하늘나라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온 순간 없는 겁니다. 없어요. 그게 더 충격이죠. ‘가서 내가 죽으면 하나님 계신 곳에 간다.’라는 계획이 그전에 있었는데 그게 하나의 망상이었던 걸로 완전히 들통이 난 겁니다. ‘어디를 쳐다봐? 뭐? 뭐? 네가 뭘 상상하고 무슨 이미지를 거기다 그려놨어?’ 그건 다 하나의 소용없는 거예요.
지금 네 눈앞에 하나님이 와 계신데 어디서 하나님을 찾아요? 인간이 만든 하나님 자체가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그걸 증거로 해서 내내 그것이 하나님이 우상이었다는 거죠. 대표적인 사람이 사울이었던 사람인데 사울은 예수님 믿는 사람을 핍박할 때 누구 이름으로 핍박한 줄 알아요? 여호와 이름으로 핍박했어요. 그 여호와는 이스라엘 역사의 2000년 역사를 대변해주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열심으로 누굴 공격했어요?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니까 누가 등장했습니까? 자기 앞에. 진짜 예수님이 등장했죠. 진짜 여호와 등장했죠.
여호와라는 이름의 가짜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걸 진짜인 줄 착각하면서 거기에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뒤지지 않고 열심을 내면서 하나님께 충성하는 길이 이 길 뿐이라 해서 열심히 했는데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게 사적인 열심이겠습니까? 이미 그 동네에서 인정하는 열심이겠습니까? 이미 유대 사회에서 인정받는 거예요. 아까 했잖아요. 동네가 다르다고. 동네가 다르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은 개인 의견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없어요. 날 때부터 1살, 2살, 날 때부터 부모로부터 계속 주입식으로 교육을 시켜온 그 이미지가, 그 사상이 계속 그게 누적돼 있는 거예요.
라캉이란 사람은 그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상징계라고 이야기해요. 상징 계. 이 상징계란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이건 실제계가 아닙니다. 라는 뜻 이예요. 현실은 아닌데 인간이 기껏 현실 아는 방법은 없고 기껏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은 아마 이게 현실이야, 하고 현실의 대타로서 늘상 그 당시 만들어 낸 게 상징계입니다.
조선시대 때 일본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그때 선조 임금의 상징 계는 1592년이고, 박 근혜 대통령은 2014년도고, 전부 다 각자 사는 그 현실에 따라서 상징계가 달라요. 그걸 페스탈로치부터 나왔던 근대 교육학은 이렇게 돼 있습니다. 교육은 진화한다 했습니다. 윤리, 교육은 진화하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이 세상 핵심을 찌르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이라 하는 것은 옛날 사람이나 지금이나 도덕이란 이 양심은 이거는 때 묻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잖아요. 양심이란 것은 누가 주물덕, 주물덕 조정한다는 생각을 우리가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우리는 양심만큼은 신의 음성이기 때문에 누구도 거기에 근접하지 못하고 손 못 댄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나 그 양심이 그 시대에 따라서 적합한 양심으로 이게 사용되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부산에서 그런 강의 했는데 존로크는 말하기를 도덕이란 뭐냐, 공감이다 했습니다. understand, 그 시대가 동의하는 것이 그 시대의 도덕 이예요. 지금 상놈 양반 찾아서 ‘이리 오너라.’ 하면 ‘이거 웃기네.’ 이야기합니다. KBS 아침 7시 50분부터 하는 인간 극장에 보면 그게 있어요. 뭐 하느냐 하면 시묘(侍墓)라 합니까? 아버지 돌아가시고 3년 내에 옆에 움막 짓고 거기서 묘지 지키는 거 있죠? 그게 만약에 조선시대 같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최고의 도덕가요, 최고의 양심 가입니다. 그런데 그 인간 시대에 나오는 할아버지도 아닌데 62살 먹은 할아버지 부인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일 안하면 돈 안 번다는 극히 현실주의자에요. 남편 보고 ‘당신은 아침 새벽에 나가서 묘지 지키는 거나하지, 왜 낮에는 노래방에서 노느냐, 왜 취미활동을 하느냐, 나는 죽도록 일이나 하고.’ 이러니 사고가 안 맞죠. 한쪽은 자본주의고, 누구 양심이 맞습니까? 누구 양심이 옳다는 질문 자체가 안 돼요. ‘어느 양심이 이 시대에 도덕입니까?’ 이렇게 물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이 세상은 자본주의 사회기 때문에 돈 없으면 인간 대우를 못 받습니다. 그 남편이 그렇게 선비를 찾는 것은 밑에 아내의 수세미 따서 20시간 동안 일하는 그 희생 덕분에 자기는 유유자적 선비 노릇하고 있는 거예요. 얼마나 이 사람이 참 비도덕적인 사람입니까? 자기는 시묘(侍墓)만 섬기는데.
사울요? 그 시대의 사람 이예요. 그 시대 아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그 시대가 조작해서 심어놓은 거예요. 진짜 하나님은 신학도 필요 없고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다만 섬뜩함! 이거 뿐 이예요. 충격 이예요. 우리 인간이 신을 이렇게 제조할 수 있기 때문에 그건 아마 악령이 그렇게 하는데 인간이 자기 신을 제조하면서 그 제조된 내가 믿는 신은요, 일단 나를 좋게 봐주는 긍정적으로 봐주는 신을 만들어 내요.
그러니 내가 믿는 신이라 하는 것은 나한테 유리하기 때문에 믿는 신이지, 절대 불리할 것 같으면 미쳤다고 그 신을 믿습니까? 미쳤다고. 그 요한복음 6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라왔잖아요? 따라왔을 때 예수님께서 먼저 자극을 줬죠. 사실은 오병이어 해서 떡 주고 이렇게 하니까 ‘야, 우리 임금 삼자.’ 하고 따라왔잖아요. 따라왔는데 요한복음 6장 끝나기도 전에 그들은 다 가버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중간에 무슨 말을 했는데 그 말 때문에 다 가버렸어요.
그 말이 뭐냐 하면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느니라.”라고 했어요. 그들이 추구하는 그 추구가 어디에 부딪혔느냐 하면 그들이 ‘야, 저분이 하나님, 저런 하나님을 우리가 찾던 임금님’ 해서 갔는데 딱 마주쳤는데 뭐냐 예수의 살과 피와 마주친 거예요. 십자가는 걸림돌이었습니다. 걸림돌! 걸림돌을 영어로 스캔들이라 해요. 청담동 스캔들 말고. 그냥 스캔들 이예요. 그 스캔들 내용이 뭐냐 하면 “너는 들어나 봤나?” 누가복음 24장에 나와요. ‘얼마 전에 예루살렘에서 어떤 분이 자기가 메시야라고 자청했는데 경찰이 와서 단호히 잡아서 체포하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는 제자들도 다 흩어졌어.’란 그런 스캔들 들어봤나?
그러니까 청담동 스캔들 있잖아요? 스캔들이라 하는 것은 이거는 하나의 소문이죠. 이례적 소문, 일종의 역사적 에피소드에 불과한 거예요. 이거는 풍문으로 들었소. 그냥 풍문 이예요. 신경 써도 되고 안 써도 되는 거예요. 스캔들! 대표적인 요새 스캔들이 뭐냐 하면 바로 조현아, 스캔들이잖아요. 조현아 스캔들 있더라도 아침에 콩나물 반찬 무치면 되는 거예요. 그거 아무 상관없어요. 예수 스캔들이 뭡니까? ‘그런 일이 있었대. 자칭 하나님의 아들인데 아이구, 사람 그렇게 끝장났대. 까불기는 왜 그리 까불었어, 그래, 적당히 하지, 너무 심했잖아. 그런데 스캔들 끝이 이상하대, 시체가 없어졌대. 뭐, 누가 가져갔겠지.’ 그게 스캔들 이예요. 스캔들(scandal)! 왜냐 하면 그게 스캔들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런 스캔들 주인공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초월적 관념, 신은 초월적 관념 이예요. 초월적 관념을 믿으면 되지, 그런 스캔들 관계없거든요.
그런데 그 스캔들 갖고 두 사람이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있었는데 가는 도중에 한 사람이 거기에 끼어들어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스캔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저녁 쯤 돼서 눈을 뜨게 해주니까 그분이 시체가 없어졌다는 그분이 바로 부활하신 분이예요. 섬뜩함입니다. 이게 스캔들 이야깁니다. 이건 세상 자체가 바뀌어져야 돼요. ‘내가 소속돼 있는 영역 자체가 이게 바로 문제 있는 영역이구나.’ 우리는 빠져나올 수 없죠. 빠져나올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 이야기는 하나의 일화,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데 제자들은 직접 주님이 찾아오니까 그 제자들은 그 다음부터는 ‘주님이십니다.’하는 순간 예수님은 어떻게 됐을까요? 뿅!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말았어요.
그 제자들 두 사람은 어쩌라고? 좀 더 같이 있었으면 사진도 찍고 셀카 봉해서 웃으면서 찍었으면 ‘봐라, 이런 분 만났다’고 자랑 질이나 하겠는데 왜 뽕! 하고 날라 가 버렸어요. 그러면 제자들 둘은 어쩌란 말입니까? 둘은 앞으로 그 이야기를 하기만 하면 두 사람은 누구의 길을 갈 수밖에 없어요? 주님의 가신 그 길을 반복해서 그 길을 갈 수밖에 없어요. 쉽게 말해서 쪼다 되고 그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스캔들의 하나의 내용이 돼 버려요. 바보가 돼요. 그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바보가 돼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0장에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마지막 때에 너희들을 임금에게 끌려갈 텐데 그때 너희가 어떻게 하면 빠져나올까, 네가 생각하지 마라. 그때는 네 속에서 이야기하시는 분이 네가 아니고 네 속의 성령이니라”라는 아주 똑똑히 이야기를 해요. “성령이니라.“ 그러면 그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좋아야 할지, 기분이 오히려 이상해야 될지, 내가 이야기한 것이 내가 아니고 성령이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오히려 우리 본인이 당황스러운 게 있어요. 왜냐 하면 우리가 아는 성령은 뭔가 획기적인 기적 같은 걸 동반해줘야 돼요. 내가 말할 때 갑자기 태풍이 분다든지 ‘나무야 뽑혀라’하면 나무가 뽑히든지, 이런 것들이 있어줘야 깜짝 깜짝 놀라는 깜짝 쇼들이 벌려줘야 내 말도 같이 먹혀 들어가는데 그게 아니고 수갑 채워서 붙잡힌 입장에서 (어서 오세요. 다시 하려하니 너무 많아서) ..이 제자들에게 있어서 옛날에는 예수에 관한 것은 하나의 에피소드고 스캔들이고 하나의 가쉽 거리에요. 씹으면 돼요. 나는 있고 대상이니까.
그런데 주님이 찾아와 버리면 내가 가쉽의 중심에 서버리고 남들이 나를 씹는다 말이죠. 그러니 사도바울은 이걸 가지고 뭐라 했느냐 하면 안, 영어로 in이죠. 안이라고 하고 앞에다 뭘 붙이냐 하면 그걸 ‘예수 안’이라고 했어요. 예수 안! 이 예수 안은 우리가 못 만들어냅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예수를 생각할 때 나 여기 있고 항상 대상으로만 볼 뿐이지,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서 함께 계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하는 것은 성령을 받아야 가능해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 다음에 뭡니까?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누가 산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보세요. 안이잖아요. 안에 같이 사는 거예요.
저는 최성수의 동행은 그 가사는 옳지 않다고 봐요. 동행이라 하는 것은 세상에서 보면 나란히 가잖아요. 누가 한쪽이 한쪽을 안에다 집어넣지는 않잖아요. ‘누가 나와 함께 할까~♬’ 하는 최성수의 동행 아시죠? 한국의 마담들이 제일 좋아하는 거, 그러니까 누가 나와 함께 동행 할까 하는데 동행은 같이 가봐야 동업이 돼서 나중에 삐지면 둘이 갈라서게 돼 있어요.
그러나 주님은 내가 원치 않는 주님이 먼저 찾아왔기 때문에 이건 어떤 경우라도 갈라설 수가 없어요. 내가 이 죄에서 못 벗어나듯이 주님 안에 있을 경우에는 주님 안에서 못 벗어납니다. 이 상태를 가지고 두 자로 성경 요한복음 8장에서 뭐라 하느냐 하면 아주 역설적으로 이걸 ‘자유’라 합니다. 자유! 더 이상 너에 대해서 네가 손 떼라. 너는 너의 매니저 노릇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인생 관리를 네가 하지 말라는 거죠. 이걸 다른 말로 하게 되면 내가 착하고 거룩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를 네가 거기서 손 떼라. 바르게 사는 거 없고 착한 거 없습니다. 이제 예수 안에서는. 왜냐 하면 율법 자체가 우리가 지킬 해당 사항에서 날라 갔기 때문에. 율법은 주님께서 지키는 거예요.
그게 오늘 요한복음 5장 38절에 나옵니다. 그거 먼저 말씀드리고 요한복음 5장 28절, 29절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28절, 29절 이게 참 어려워서 5장 38절부터 말씀드릴게요.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그러면 그 말씀이 거하지 아니한 상태에서 예수 믿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내가 예수 만나서 내가 알아서 판단해서 ‘한번 믿어봐? 말아? 나중에 나이 늙어서 할 일 없을 때 믿어봐? 지금이라도 교회 등록 해봐?’ 요런 식이죠.
그런데 말씀이 임해버리면 이건 뭐가 깨지느냐 하면 내가 저 사람을 믿을까, 말까. 하는 본인 판단 자체가 이게 안 믿는 시절에 했던 믿음에 해당되는 겁니다. 내가 못 믿던 시절에 했던 믿음이 뭐냐 하면 나의 양심적인 결단 중에 하나가 바르게살기도 있지만 그 옆에 예수 믿기도 포함돼 있어요. 그리고 그 옆에 예수 영접하기도 포함돼 있어요. 그 예수 영접하기, 예수 믿기, 바르게살기, 말씀대로 살기, 이 모든 것은 믿지 않을 때 믿는 척하기 위해서 동원된 용어들입니다. 하지 마세요. 이런 거 하지 마세요.
이걸 하게 되면 이게 마약처럼 돼 버려요. 어려울 때 괴로울 때 ‘주여 믿습니다.’라고 기도하게 돼요. 그러면 그건 전~혀 자기가 자기를 연출하는 거예요. 자기가 감독이고 큐, 사인내리면 본인이 감독하고 본인이 배우 하는 거예요. 본인이 막 찍고. 셀카 봉 찍어보세요. 완전히 자기 기도하는 모습 한번 찍어보세요. 얼마나 고상한지 옆에 찍는 사람 있을 거예요. 자기 기도하면서 ‘너 한번 찍어봐.’ 얼마나 이쁘게 기도하는지. 그것은 우리가 찍지는 않지만 상상은 할 수 있습니다. 지금 꿇어앉는 폼이 공손한 폼인지, 내가 건방 떨면서 다리 꼬면서 지금 기도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점검하고 판단하는 거, 그건 누가 주특기냐 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주특기에요.
그 사람들 기도할 때 시장에 나갑니다. 그 사람들 만인의 스승이기 때문에 기도할 때는 ‘나처럼 해 봐.’라고 폼을 보이는 거예요. 그걸 그들은 영적 카리스마라고 간주했습니다. 왜냐 하면 그 당시에 자기가 신앙의 모델이 돼야 되니까. 모델이 될 때 다른 사람은 나의 모델을 본받아서 나를 모방하게 되면 나처럼 될 수 있다는 그들의 기대에 내가 부응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뭐 바리새인들 할 것도 없이 목사들 그렇잖아요. ‘여러분 나처럼 믿으면 당신들도 나처럼 훌륭한 성화된 거룩한 생활 할 수 있습니다.’라는 스스로 자기를 시범조교로 나서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 했어요? 아예 초를 쳤죠. “절대로 저런 기도 본받아서는 안 된다. 절대로 그런 기도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누구 시선을 의식했다? 타인이 시선을 의식해서 하는 기도라는 겁니다. 심지어 기도뿐만 아니죠. 딸랑, 딸랑, 하는 크리스마스 되면 하는 구세군, 구제, 또 있죠. 또 하나는 뭡니까? 금식할 때, 금식의 티를 내는 거예요. 홀쭉해진, 다이어트 했는지는 모르지만, 홀쭉해진 그 모습을 보면서 고난 받는 자의 그 시련, 자기 절제를 자기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게 하기 위해서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그런 모습을 보일 때, 그런 모습 같은 걸 본받지 마라.
차라리 금식할 때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라 하는데, 요즘 말로 하면 금식 끝나고 난 뒤에 꼭 미용하는데 가서 30만 원 주고 10번 팩 발라서 전혀 ‘뭐 했나?’ ‘어, 한적 없어.’ 전혀 남한테 들키지 않도록 해라. 절대 들키지 않도록 해라. 요새 말로 번역하면 그래요. 이 방언은 번역해야 돼.
무엇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이건 네 주제파악을 안 돼서 무엇을 기도하는 거예요. 너한테 있어야 될 것, 뭐가 필요할 것, 이것은 너 자신보다 더, 더 자신이 누구냐? 주님이거든요. 너한테 필요한 것을 너는 몰라, 내가 알아. 만약에 너한테 필요한 걸 내가 줘버리면 너는 망해버려. 망한다고요. 기도할 때는 ‘이미 주셨습니다.‘라고 기도하란 말이죠.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이렇게 주실 필요도 없는데 주시다니.’ 이렇게 기도하란 말이죠.
24일 날 저녁에 굴뚝에 산타 할아버지 오시잖아요. 그런데 24일 날 저녁에 하지 말고 25일 날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란 말이죠. 그러면 ‘세상에 이렇게 몰래 오셔서 몰래 다 주셨습니까?’ 요런 25일 날 아침에 하는 기도를 늘 평소에 하시면 돼요. 맨날 24일 날 저녁 7시에 눈 부릅뜨고 성냥개비 꽂아서 ‘오기만 오라. 울지 않는 아이에게 선물을 주신다.’라고 기다리지 말고 아침에, 모닝콜,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는 기분으로 하세요. ‘오늘도 이렇게 저를 살려주셨습니까? 어젯밤에 그냥 보내셔도 되는데 또 살려주셨습니까? 어이쿠, 내 자식도 저렇게 살려주셨어요? 내 남편도 저렇게 살려주셨어요? 아이, 난 한 것도 없는데 어제 배고프다 해서 라면 끓여준 것밖에 없는데 아침에 이렇게 얼굴도 붓지도 않고 다시 살려줬어요? 강아지도? 어이쿠, 고양이도?’ 모든 주신 것은 우리가 달라고 주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이 알아서 필요해서, 주님의 일, 본인 일 때문에 필요해서 주신 거예요.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감사하다는 말도 약간 건방진 말 이예요. ‘감사해?’ ‘감사한지 네가 우는지 두고 보자.’ 이런 식으로 나올 수도 있어요. 지금 주신 것, 예를 들어서 만약에 어떤 재벌이 딸을 낳는데 키가 큰 딸을 낳았어요. ‘아이구, 이 키 큰 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얼마나 감사했겠어요? 그런데 그 키 큰 딸이 사무장을 몰고 3미터나 밀어서 ‘내려가, 내려가.’ 할 정도로 건장한 키라면, 그 키 큰 게 문제가 되죠. 키가 작았으면 못 밀었을 텐데. 조현아 이야기에요. 얼마나 키가 큰지 남자보다 키가 더 커요. 그 키 큰 거, 그 대범함, 그 콧등에 눈물 맺힐 줄이야. 상상도 못했죠. 콧등에 눈물 한 방울 맺힐 줄이야. 주어진 것이 나 좋아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자, 그러면 28절 한번 봅시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하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이 대목을 보면서 ‘야, 예수 믿으면 그때 되면 주님께서 다시 만나 음성 듣는구나. 아이쿠, 좋아라.’ 이런 생각하실 거예요. 그게 아니고 지금까지 서론 적으로 이야기를 쭉 들었잖아요. 그게 아니고 네가 살고 죽는 이 땅 세상에 태어난 것이 네 뜻이 아니었고 내 뜻이었다는 겁니다. 그 내용을 듣는 거예요. 아! 죽고 살고 내가 지옥 가고 천국 가는 이 모든 것이 이게 내 뜻대로 천국 가고 내 뜻대로 지옥 가는 일이 아니라는 거죠.
진짜 여러분들이 예수님이 찾아와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 같으면 지옥 갈만큼 내가 아무리 악한 짓을 해도 지옥에 못 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돼요. 지옥에 갈 수가 없다는 사실. 팔자가 그래요. 목사님 그러면 어떤 사람이 ‘지옥이 보고 싶습니다.’ 할 때는 지옥 구경 시켜드리면 지금 이 세상이 지옥입니다. 이때 실컷 보면 돼요.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드느냐 하면 여기 38절 봅시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면” 그 말씀을 듣는 거예요.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 새로운 말씀을 듣는 게 아니고 평소에 말씀 속에 있던, 살아있으면서 예수님이 우리한테 했던 그 말씀, 내가 나 된 것은 내 뜻이라는 것. 그 말씀을 죽고 난 뒤에 듣는 거예요. 그래서 새삼스러울 게 없어요. ‘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이 말씀만 하면 돼요.
그런데 불신자들은 어떻습니까? ‘아이쿠, 전에 주님 말씀이 맞기는 맞구나.’ 이제 와서 하는데 얼마나 그게 후회가 되었으면 성경에 보니까 지옥 가면서 그냥 안 가고 가슴을 치고 이가 다 빠졌어요. 인사돌 씹어도 소용이 없이 이가 다 빠져버리고 지글지글 이를 갈면서 통곡하면서 후회하면서 지옥으로 간다는 겁니다. 지옥에서 또 살게 되고. 왜 평소에 요한복음 5장 말씀을 왜 안 봐. 보기는 봤겠죠. 미션 스쿨에 가면 봤겠죠. 그런데 시답지 않게 여긴 거예요. 뭐로? 스캔들로. 하나의 에피소드로.
그럼 ‘아! 예수라는 4대 성인이 있는데 소크라테스, 공자, 부처 예수, 4대 성인은 훌륭한 분이 옛날에 계시는데 그중에 4인방 중에 한분이 바로 예수다.’ 이렇게 알았죠. 이렇게 알았죠. 그럼 4인방 중에 하나는 누가 정했습니까? 우리가 살던 그 시대가 교육 환경이 그렇게 정했죠. 그리고 누가 받았습니까? 우리가 거기에 어릴 때부터 세대가 받아들인 거죠. 그래서 우리는 그 시대 우리의 양심과 우리의 도덕은 예수 안 믿는 것에 대해서 전혀 양심적인 가책을 느껴지지 않는다 말이죠. 왜 이 시대 자체가 예수님을 내놓은 자식이기 때문에 시대 자체가 아픔으로 다가오지 않아요.
제가 지난 낮 설교 이야기 했죠. 이순신 죽었다고 천지개벽이 일어납니까? 아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면 요한계시록에 보면 완전히 세상이 뒤집어지죠. 그러면 우리는 뭘 알아야 돼요? 이순신 장군의 죽음과 예수님 죽음은 같다? 다르다? 질이 다르죠. 그 말은 뭐냐 하면 이순신 죽은 거하고 주님하고 다르다면 그러면 그 다음에 묻습니다. 나의 죽음과 예수님 죽음, 어느 것이 중요한 겁니까? 이론상 누가 중요해요? 예수님이 중요하죠. 아이구, 예수님까지 가기 너무 멀다. 중간에 하나 걸칩시다. 아브라함이 자식을 바쳤잖아요. 바쳤으니까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판정을 받았죠.
그러면 댁에 혹시 아드님 계시면 한번 바쳐 보시죠? 이 추운 날 기도원에 가서 차에 태워서 안전벨트 매서 ‘엄마, 헌금은 왜 안 가져와.’ ‘헌금 필요 없어. 오늘 헌금 가져왔어.’ ‘어디 있는데?’ ‘이따 이야기해줄게.’ 해서 사시미 칼 들고 와서 해보시죠? 안 그러면 그게 번거로우면 집에서 잘 때 약을 먹이든지, 안 되죠. 왜 안 됩니까? 이게 남의 자식이 아니고 내 자식이기 때문에. 내 자식 되면 안 되는 겁니다. 안 되죠.
안 되는데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그것도 의인도 아닌 마귀에 속한 죄인을 위하여 아낌없이 하나님은 자기 독생자를 내놓았다는 이야기가 예수님 스캔들 이예요. 청담동 스캔들이 아니고 예수님 스캔들입니다. 스캔들 이예요. 다시 그건 섬뜩함 이예요. 이거는 주님의 나라는 우리가 이 세상 인간들이 통하는 의식과 발상으로서는 도저히 파고 들어갈 수 없는 다른 영역에 속한 이야기를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쏟아냈던 겁니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 너무 충격이라서, 너무 충격이라서, 우리는 그냥 KFC 치킨 집 할아버지처럼 인자하신 할아버지가 하늘에 계신 줄 알았죠. 수염을 기르고 금복주 할아버지 같은 그런 분이 계셔서 햇빛과 자비로 은혜 주신다 생각했죠. 그렇게 섬뜩함인 줄. 그분 아들 있는 곳에 아버지 있다. 그분이 숨겨진 아버지인줄, 우리는 하나님인 줄 상상도 못한 겁니다. 누가 믿었으리요. 이사야 53장, 누가 믿었으리요. 아~무도 믿을 사람 없었어요.
그래서 주님의 말씀은 그렇게 요란스럽지 않고 주님의 말씀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습니다. 굉~장히 간단해요. 이거는 기독교 2000년 역사가 다 놓친 게 있는데 그게 간단해요. 뭡니까? “내가 바로 하나님이다.” 바로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그 말 한 마디가 세리와 강도와 평생에 예수 믿다가 그날 듣고 죽으면 오늘 밤 낙원에 갑니다. 내가 바로 하나님 이예요. 뭘 요구하질 않아요. 나를 알면 곧 생명을 아는 것이다. 이거 어디 나와요?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데 한번 볼게요.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17장 3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 주님의 말씀이 이거거든요. 간단한 거예요. 알아야 될 텐데 알 수 있는 선지식, 그러니까 선 이는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없는데 없는 우리보고 알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알기는커녕 밀치죠. 왜냐 하면 우리가 우리의 몸에 와 닿지 않아요. 너무 섬뜩하기 때문에. 죽은 자가 뭐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 그러면 지금 내 전도 안 받고 도망친 내 친구가 만약에 내 복음 안 듣고 전도 듣다가 듣기 싫다고 문밖에 뛰어나가다가 마침 다가오는 오토바이에 치어서 죽었다. 그러면 죽으면 누구 음성을 듣습니까? 바로 예수님 음성 듣는 거예요.
방금 친구 이야기했잖아요. 그 친구가 만약에 우리라면, 우리는 얼마나 뛰쳐나갔으며 얼마나 뛰쳐나갔습니까? 뛰쳐나갔는데 오토바이가 와야 되는데 오토바이가 안 오고 갑자기 어떤 색시 감이 온다든지 이래서 아직도 견디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미 끝이 고정돼 있으니까 시작은 우리의 태어남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끝에서부터 거꾸로 우리한테 촉수가 와 닿는 거예요. 문어발 같은 촉수가.
그림을 그릴 때 이걸 지난 수요일 날 이야기했는데 우리가 아기로 태어나서 살아가면서 나중에 죽으면 주님 만난다 이렇게 되잖아요. 지금 우리 생각이 이거다 말이죠. 그래서 요한복음 5장 28절 본 사람이 ‘그래 죽고 나면 인자의 음성 들을 때가 오나니“ 이 방향이, 이 방향이 아니다 말이죠. 이거는 이 방향을 이렇게 본다는 것은 역시 우리가 그동안 알았던 우리 양심과 도덕성이 형성된 우리 이 세상에서 형성된 시간 의식에서 이렇게 된 거예요.
주님은 그게 아니고 끝에 계신 분이 미리 땅겨서 위, 아래가 아니라, 옆에 와서 이야기한다니까요. 그러니까 여기서 매듭이 여기서 묶어졌고 여기서 가래가 두 가닥이 나와서 한쪽은 지옥 갈사람, 한쪽은 천국 갈 사람이 와서 이것이 넘실넘실 촉수가 돼서 외계인 다리처럼 와서 여기서 철석, 문어나 산 낙지처럼 달라붙어서 떼어지지도 않아. 철석 붙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미래에서 온 코난, 미래에서 시작한 일이 현재 도달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미래 힘에 의해서 끌려가는 거예요. 이게 십자가 능력이라니까요.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어제도 다 이루었다. 오늘도 다 이루었다. 내일 되면 다 이룰 거예요. 왜냐 하면 다 이루었다. 이게 산 낙지가 돼서 철석 붙어서 떨어지지 않네. 뭘 성화를 해요? 뭘 착해요? 뭘. 주님 앞에 착한 사람 누가 있습니까? 이미 다 이루었는데 도대체 뭘 다 이루었답니까? 따지니까 그때 성경 말씀 사도의 권면 쭉 보면서 ‘봐, 어느 하나 네가 지킬 수 있는 게 있는가 봐.’ 지킬 수가 없어요.
야고보서 4장 이런 말씀 나오죠. “네가 어느 도시에 가서 일 년을 거기서 거주하면서 이렇게, 이렇게 장사해서 이익을 보겠다.”라는 것이 무슨 일이냐 하면 이게 악한 짓이 된다는 겁니다. 이게 악한 짓이 돼요. 그러면 악한 짓이 안 되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일 년을 도시에 가서 유할 때 그렇게 유하지 말고, ‘주여 오늘 죽이려면 죽이세요.’ 요렇게 해야 악한 짓이 아니라는 거예요. 살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은 내 손에 달린 것이 아니고 철석 붙은 요 산 낙지 촉수, 얼굴에 붙은 산 낙지 촉수가 결정할 문제지, 내가 내 운명을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님을 이것이 예수 안에서 된 사람에게만, 이것이 말씀이 속에 있는 사람에게만, 이것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자기 백성 자기가 데려가는 거예요.
동네에 보면 인형 뽑기 있죠? 인형 뽑을 때 인형이 자기가 알아서 기어 나옵니까? 그러면 그건 인형이 아니죠. 그러면 산 낙지죠. 그건 벌레죠. 바퀴벌레. 인형 뽑기는 저는 한 번도 안 해봤어요. 절대로, 로또도 사본 적 없습니다. 그런 게 제일 싫어요. 도박 같은 거. 보니까 돈만 날린 사람이 많아요. 이래서 기중기 비슷한 게 딱 집어서 하잖아요. 집을 때 뭐가 묘미냐 하면 떨어질까, 안 떨어질까, 안착할 때까지 그거 걱정돼요. 어떤 사람은 떨구는 사람이 있는데, 잡아당기잖아요.
주님은 한번 쥐면 이게 완전히 꽉 쥐기 때문에 이게 요한복음 10장에 나와요. 아무도 목자가 쥐면 절대로 양은 목자의 품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게 우리가 이뻐서가 아니라 요거 장악하는, 움키는 힘이 마귀로부터 이기는 힘으로 하기 때문에 마귀가 와서 데려가지 말라고 백날 해도 주께서는 그걸 감당하면서 끄집어내요. 그런데 붙잡힌 사람은 누가 있느냐 하면 베드로가 있어요.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님 죽으실 때 저도 목숨 바쳐 가겠습니다.” 아주 까불락 대고 이렇게 이야기해요. “네가 그런 결심 가지고 네가 구원받는 게 아니야, 마귀는 지금 너를 데려가려고 하는데 내 기도 아니면 너로 하여금 마귀는 못 데려가고 너는 내 편에 갈 수밖에 없도록 그렇게 내가 조치를 했기 때문에 너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하지만 기어이 너는 천국에 가서 그야말로 반석이 될 것이다.” 약속했습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 속에 있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니까요.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이유가 뭐냐,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거예요. 어느 교회든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교회가 돼야 되죠.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가 아니라 아예 더 나아가서 뭡니까? 막 살아라 했죠. 어제 주일날에는 버전이 업 됐죠? 뭐라 했습니까? 주일 낮에. 막 살아라 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했잖아요? 조심하지 마세요. 조심하지 마세요. 왜냐 하면 조심하게 되면 뭘 의식하느냐 하면 ‘내가 혹시나 실수할까봐, 혹시 내가 실패하면 어떠나,’ 하는데 보세요, 인간은 애초부터 날 때부터 이미 실패자에요. 실패자면서 실패를 거론한다는 것은 이건 아직도 그 사람이 아직도 가능성이 있다는 늬앙스가 있기 때문에 그런 주님은 없어요.
제가 수요일 날 그런 예 들었죠? 수학 0점 맞는 애한테 와서 ‘너 오늘 몇 개 틀렸나?’ 그게 말이 되느냐 말이죠. 다 틀렸는데 몇 개 틀려? 우리는 이미 날 때부터 죄인인데 ‘너 또 인생이 실수했지? 그런 사창가 가지 말라 했잖아. 그런 야동 보지 말라 했잖아. 그러니까 술 먹지 말라 했잖아. 또 실수했어. 매매 해야 돼, 요번 주 벌 받을 각오해.’ ‘아이쿠, 요번 주 저주 받겠구나. 내가 안 받으면 우리 가정에 저주 받겠구나. 출애굽기 20장 5절에 보니까 네가 법을 어기면 3, 4대 동안, 3, 4대가 몇 년 입니까? 3대가 30년 같으면 내 증 손자까지 벌 받네, 아이쿠, 내가 빨리 회개해서 헌금 바치든지 해서 빨리 수정해서 조치를 취해야지.’ 이렇게 나오죠. 그게 바로 마귀가 중보자를 오해케 하는 마귀의 전략입니다. 저주 없습니다. 저주 없어요. 왜 저주가 없는가? 우리한테 실수가, 실패가 없어요.
그러면 왜 그런 짓을 했는가?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만! 강도는 왜 강도된 줄 알아요? 내가 답변 안 하렵니다. 강도가 왜 강도돼야 되겠어요? 강도 되어야만 해요. 영어로 must be. 반드시 그렇게 돼야만 해요. 그것을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뭐냐 하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는 아니오, 가 없고 모든 것이 오케이, 오케이, 아이구, 잘 빠졌다. 뭘 해도 그게 오케이가 되는 겁니다. 오케이.
그렇다면 그러면 주님, 요한복음 이 주님의 말씀은 이 무슨 뜻입니까? 하면, 이건 뭐냐 하면 이걸 서술형이라 하는데 이것은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확정짓는 거예요. 확정 짓는 거. 요한복음 전체가 다 그래요. 네가 어떻게 하든, 어떻게 이해하든, 그것에 상관없이 이미 스케줄은 그대로 진척되는 겁니다. 그대로 돼요.
29절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그러면 악한 일을 하는 자가 선한 일을 바꿀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바꿀 수가 없어요. 바꿔버리고 만약에 다 바꿔버리면 예수님께서 악한 자를 심판할 지옥이 텅텅 비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에이, 씨, 지옥 만들어놨더니만 올 사람 하나도 없고, 에이, 괜히 만들었다.’ 주님이 일을 그렇게 하십니까? 주님께서는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고 이미 확정된 채 나오거든요. 확정된 채 나온다고요.
그러면 여기서 선한 일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여러분 좀 번거롭겠지만 성경 한 군데 찾아봅시다. 번거로우니까 상당히 제가 죄송합니다만 요한계시록 20장 13절에 마지막 심판에 관한 이야기거든요. 그래서 제 생각에는 요한계시록 이 성경 뒤에 있지 말고요, 창세기보다 앞서서 요한계시록부터 먼저 읽고 그 다음에 창세기를 했으면 좋겠어요. 요한계시록부터 먼저 읽고 그 다음에 창세기 1장 읽어보세요. 해답부터 먼저 알고 어째서 이런 해답이 나왔는지를 쭉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요한계시록 20장 13절에 보면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 ”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죠.
자, 그럼 묻습니다. 하나님이 왜 창조를 했습니까? 왜 바다를 창조했죠? 왜 창세기 1장에 바다를 왜 창조하십니까? 그냥 바다 출렁이는 게 재밌나, 해수욕장 있으니 재밌지, 이거 하라고 바다 만든 게 아니죠? 무슨 하나님께 무슨 사명을 받았죠? 죽은 자들을 내어주기 위해서 했겠죠. 그러니까 바다를 처음 만들 때 모르죠. 그 다음에 창세기 만들어 놓고 창세기 다음에 무슨 기? 출애굽기, 그 다음에 레위기 나오죠. 그럼 창세기도 마찬가지지만 출애굽기부터 이미 바다에 죽은 자들이 있겠죠. 홍해 바다 빠진 사람들.
그러니까 바다는 죽은 자들을 내어줘야 될 그 본연의 임무를 하기 위해서 창세기 다음에 그 다음에 연이어, 연이어 하나님의 손길이 이 창조 세계에 연이어 제공되는 겁니다. 그리고 내어줘서 ‘내어줬나?’ 하니까 결국 바다는 하나의 무대라 보면 되죠. 심판의 무대죠. 그 무대에서 무대의 하이라이트는 뭡니까? 바로 행함을 한 사람들은 책이 두 권 있죠. 하나는 행함 책이고 또 하나는 생명책인데, 생명책이 무슨 책이냐 하면 예수 어린양의 생명책 이예요.
아, 요거 설명해야 돼요. 생명책이 어린양의 생명책입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이니까 그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은 본인의 운명에 대해서 본인이 책임지는 자들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반대로 이야기해서 행함 책에 있는 사람은 누가 누구의 책임지는 자에요? 본인의 행함으로써 본인이 구원받을까 싶어서 애썼던 사람들이예요. 본인 운명을 본인이 책임진 사람은 행함 책이고, 생명책은 어린양의 생명책은 주님이 책임지는 사람 이예요.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너를 위해서 죽으신 분이 누굽니까? 주님이니까.
로마서 8장에 나오죠.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너를 위해서 죽으신 분이 계신데 누가 너를 죄 있다 하리요” 우리 행함에 대해서 우리가 그냥 우리 행한 대로 저주 받을 거 같으면 주님이 중보자 되신 그 용서가 끼어들지를 않은 사람한테는 맞아요. 끼어들은 사람 같으면 끼어든 것과 우리 행함으로 책임지겠든가, 이게 충돌을 일으키잖아요. 어느 쪽이 양보가 돼야 됩니까? 주님이 이렇게 양보해야 됩니까? ‘아유, 용서하려하니까 너무 착해서 내 용서 필요 없네.’ 그냥 주님 쪽에서 물러가시는 거예요? 누가 물러가야 돼요? ‘아! 이것도 착한 일인 줄 알았더니만 이것도 십자가 죽을 수밖에 없는 거구나. 이 죄악 된 이 착한 일도 죄악된 거구나.’라고 누가 양보해야 돼요? 우리가 양보해야 되고 그 빈 자리에 뭐가 채워져야 돼요? 십자가 어린양의 기념, 생명책이 기념 책이니까,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이런 일을 하신 것을 기념합니다.’ 우리는 기념물로 우리는 비석이 세워지는 겁니다.
거기에 하나의 돌로서, 돌들이 모여서 ‘주님만 이렇게 탑을 쌓았습니다.’하는 기념탑을 세우는 그것이 바로 주님의 생명책 이예요. 그 돌들이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영생에 들어가고 나머지는 주님이 책임지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마귀가 가는 곳에, 마귀의 기념 조에요. 마귀가 가는 곳에 합류합니다. 그냥 행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마귀가 가는 그곳에 가게 돼 있습니다.
왜냐 하면 스가랴 4장에 나오는데 마귀가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얼레리 꼴레리’ 하거든요. ‘저 여호수아가 저런 짓을 했습니다. 멜기세덱이 저런 짓을 했습니다.’ 그 스가랴에 보면 사단이 하나님 천상회의 앞에 서서 지적 질, 고소를 해요. 욥기에 보면 마귀가 지상을 향하여 욥보고 고소를 하죠. 그러니까 정죄하는 자가 누구냐 하면 마귀에요. 마귀는 뭘 아느냐, 선악과를 알아요. 인간보다 먼저 알기 때문에 인간을 꼬신 거예요. 자기가 선악과 따먹고 따먹을 수 없는 선악과를 따먹고 저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운명이 확정된 이상 거기다 누굴 걸고 넘어가느냐 하면 인간까지 자기편으로 만든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그 인간 말고 다 죽여 버리고 새로운 인간 만들었죠. 누굽니까? 마지막 아담을 만들었어요. 그 옛날 아담 죽여 버리고 흙으로 만들고 새로운 아담 만들어서 흙으로부터 부활시켜서, 주님 죽으시면서 부활시켜서 옛날 아담이냐, 아니면 새로운 아담이냐, 그렇게 된 겁니다.
이것은 사도가 바로 예수님한테 배운 거예요. 사도 본인의 아이디어가 아니고 연구한 게 아니고 사도에게 주어진 주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사이에 있어야 돼요. 이 말씀이 있어버리면 우리는 사적으로 내가 책임질 일은 애초부터 없어요. 애초부터. 예수 믿고부터 책임 있는 게 아니고 예수 믿기 전부터 우리는 아예 없었었는데, 그 없었던 게 뭐냐 이미 미래에 이미 확정됐거든요. 결국 이걸 가지고 에베소서 1장 4절에 이걸 창세전에 예정됐다. 창세전에 예정된 것이 덮치다 보니까 이제는 슬슬 우리가 잊어버렸던 우리의 과거를 그리스도와 연계해서 다시 돌아보는 기회를 가지라고 우리로 하여금 남은 생애를 살게 하시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녹취:이한례
가락-요한복음 5장29(예수 스캔들)
141218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야 구원받습니까? 예수님을 알아야 구원받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안다는 것은 알아서 평가해서 믿을 만하면 믿고 안 맞으면 안 믿겠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러나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이거는 혈육관계 같아서 우리가 아버지를 안다는 것이 딱 보면 알지, 아버지에 대해서 연구한다고 아버지를 아는 게 아니잖아요? 새삼스럽게 아버지 관계가 수립된 게 아니죠? 예수님을 아는 것은 그거는 똑같이 아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알아서 어떤 사람은 많이 알고 조금 알게 하거든요.
로마서 12장에 보면 믿음에 뭐가 있다? 분량이 있다는 거예요. 하지만 분량이 있지만 전부 다 예수님하고 아는 사이죠. 동일하게 안다고 생각해 버리면 이건 지적인 차별이, 신앙적 차이로 이어지게 되면 이건 큰일 날 소리 나옵니다. 자칫하면 상금이 없니, 겨우 부끄러운 구원 받니, 이런 양적 논리가 나오면 안 되거든요.
여러분, 겨자씨만한 믿음을 더 키워야 구원받습니까?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구원받습니까?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구원받죠. 질의 문제에 있어서는 동일한 질이 되면 되는 거예요. 떡가래 이만큼 먹었다고 떡을 아는 게 아니고 요 하나를 먹어도 떡 맛을 알잖아요. 피자 한 조각 먹어도 피자 맛을 알듯이.
자, 여기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을, 말씀을 보다 안다고 해서 더 예수님을 아는 게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을 알고 있는 사이라는 것은 말씀을 내가 얼마나 깊이 아느냐 하고 상관없습니다. 그냥 주체로 주님의 조치가 되는 거죠.
그런데 여기 부활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이사야 26장 19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이 좀 난해하기 때문에 그때는 5분 동안 참으셔야 됩니다. 이사야 26장 19절에 보면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 이렇게 되잖아요.
만약에 이게 이사야 26장이 아니고 이게 불교에서 사용하는 불경이라고 봅시다. 불경에 만약 이런 게 나온다면 우리는 뭘 생각하겠습니까? ‘야, 부처 믿으면 우리는 나중에 영생 얻겠다.’ 이렇게 되겠죠. 아! 바로 그런 것 때문에 제가 항상 ’어렵습니다. 힘듭니다.‘란 말을 먼저 전제로 미리 깔고 하는 거예요.
성경은 요한복음 5장 39절 말씀처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 누구에 대해서“ ”내게 대해서 증거“ 하죠.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 줄 아는 거예요. 성경에서 영생을 어떻게 하면 얻을까 하고 성경을 볼 때 그 심보 자체가 이건 예수님의 성경 뜻하고는 이게 안 맞다는 이야깁니다. 이거는 마치 성경을 불경 보듯이 성경에서, 불경에서 나한테 유리한 건 어떤 게 있을까? 어떤 걸 믿으면 내가 영생 얻을 수 있을까? 이렇게 오는 것은 그건 부자 청년이 주님 찾아오는 그 심보와 똑같은 심보에요.
성경은 죽은 자들이 부활했잖아요. 이 부활은 우리가 부활한데 초점이 있는 게 아니고 장차 메시야기 부활한다는 거예요. 항성 초점은 예수님한테 가 있어야 돼요. 예수님을 경유해야 돼요. 예수님이 반환점입니다. 갈 때 우리 힘으로 가더라도, 우리 힘으로 갈 수도 없지만, 올 때는 갔던 마음은 사라져야 돼요. ‘예수 이용해서 내가 죄 지었지만 주님이 피를 이용해서 내가 용서 받아서 내가 죄 없이 깨끗하면 내가 구원받아야지.‘라는 식으로 예수를 믿더라도 정말 믿게 되게 되면 주님의 뜻으로 죄를 지었지, 내가 주님을 이용할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죠.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는데 이 섬뜩함. 하나 유치한 예인데요. 오죽했으면 제가 유치한 예를 들겠습니다. 중국집에 자장면 먹고 싶어서 들어갔는데 들어갈 때는 자기가 자장면 먹겠다고 갔는데 거기서 누굴 봤냐 하면 40년 만에 목포에 있는 엄마를 만났을 때 ‘아, 엄마’ 하고 40년 만에 엄마를 만나고 난 뒤에 엄마를 만나면서 주머니에서 ‘엄마, 자장면 값 얼마에요?’ 돈 내겠어요? 안 내겠어요? 안 내잖아요. 자장면 먹으러 갈 때 40년 만에 헤어진 엄마를 만날 줄 생각했습니까? 못했습니까? 못했잖아요.
교회 나와서 ‘교회 나오면 목사님이 예수 믿으면 구원해준다. 나도 이제부터 예수 믿어야지.’ 항상 내가 주인공이고 예수님은 나의 시다발이, 내 영생을 채워주기 위해서 뭔가 시다발이 짓을 했던 그런 분으로 알고 왔는데 와보니까 교회 오게 하신 분이 누구다? 내가 아니고, 내가 알아서 판단해서 갔던 말았던 간에, 그렇게 하도록 사전에 스케줄에 짜여 진 대로 움직이게 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죠. 그러니 모든 성경은 내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사적 구원이 아니고, 주님에 관한 이야기에요.
그렇다면 다시 이사야 26장을 보게 되면 거기에 보면 분명히 주의 죽은 자들이 살아나죠. 어려운 것을 5분 내에 한다 했으니까 5분 다 돼 가니까 빨리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신약에 오시잖아요? 구약은 뭐냐, 구약에서 방금 이사야 26장 19절 죽은 자들이 부활하잖아요. 이 부활은 ‘야, 우리가 이사야 보고 부활하자.’ 이러지 말고 이 부활은 누구의 긴 그림자가 돼야 되죠? 예수님의 부활을 보여주기 위해서 긴 그림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부활된 자들이 이 사람들이 이스라엘 죄인이잖아요? 특히 이사야 마지막에는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의 이야깁니다. 멸망한 이유가 뭔지 알아요? 그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라 하는 것은 그들이 주신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우상 숭배했기 때문에 죄를 지었어요. 죄 짓고 죽은 자들이 부활했다 이 말이죠. 주의 덕분에.
그러면 이 죄를 지은 이 사람들은 ‘내가 죄를 지었다.’가 아니고 누구를 보여주기 위해서 죄를 지어야만 했던 사람들 이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죄를 지고 가는, 십자가 지고 가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미리 앞당겨서 이 땅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태어나야만 하는 민족입니다. 성경 해석 그렇게 해야 돼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야 돼요. 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한다 하니까 사람들은 또 오해해서 ‘그래, 나는 내가 잘나서 구원받는 건 주님 덕분이야.’ 또 자기 구원을 먼저 전제로 깔아놓고 ‘나는 부처 안 믿어. 공자 안 믿어, 나 예수 믿을 거야.’ 자기 구원을 전제로 깔고 예수 끄집어 당겨서 하는 거예요.
인간은 어떤 식이냐 하면 인간은 신과 인간을 자기가 신을 끌고 오고 자기가 인간을 끌고 와서 둘이 만나게 해주는 이런 수법으로 종교생활하고 있습니다. 그게 아주 건방지죠. 신은 하나님 삼위일체 가져오고 인간은 자기 자신이라든지 가족들 끌고 와서 이 둘이 만나게 해서 자기가 감독이라. 자기가 창세전에 있지도 않은 인간이 자기가 감독인 거예요.
이 논리는 간단한 논리지만 여러분들이 아는 이야기라고 욕해도 할 수 없지만 욕하더라고 하겠습니다. 피조가 되었다는 이 말은 피조 되기 전에 사랑을 알아요? 몰라요? 모르죠. 그러면 피조 된, 만들어진 인간은 인간이 구원되고자 하는 구원의 의식은 자기가 만들어지기 전의 의식이 아니고 만들어진 상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하나님 앞에 안 먹혀요. 이게 논리적으로 맞아요. 이 논리가 미국에 뉴욕 교회 마지막 날 설교 할 때 사마리아 할 때 이 이야기를 했었어요. 만들어진 자는 만들어지기 전의 상태를 모르고 만들어진 후에야 기껏 살피면서 어떻게 하면 고진감래(苦盡甘來), 또는 생로병사, 이 어려운 인생살이를 벗어나서 편안한 해탈과 안식을 누릴까, 어떤 좋은 수가 없을까, 라고 성경 보고, 불경 보고, 이런 식으로 종교생활 해가는 겁니다. 그 아이디어 자체가 반칙 이예요.
이건 어디까지나 피조물에서 유발된 것이지, 그러니까 그런 쪽의 교회가 클 수밖에 없는 게 똑같은 또래니까 같은 상황이니까 소통이 되면서 ‘그래, 그래’ 고개 끄덕이면서 교회라는 이름을 대한 예수교 장로회 갖다 붙여 놓고 끝나는 거예요.
하지만 실제는 그게 아니에요. ‘주여, 그렇게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그것이 나는 죄인 줄 몰랐습니다. 정말 이게 죄군요. 이게 바로 죄군요.’ 내가 설친다고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있다고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 구원은 주님의 조치로서 이미 거기에 가담이 되게 돼 있어요.
로마서 9장 한번 봅시다. 로마서 9장 16절에 보면 이게 언젠가 어디서, 대구 강의에서 한 것 같은데,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구원이 원하는 자라고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릇은 누가 만든다? 진노의 그릇과 구원의 그릇은 누가 만든다? 이것은 네 소관 아니야. 이건 그릇 만드는 토기장이 소관이지, 그릇 보고 닦달내지는 않아요. 그릇보고 ‘너는 나쁜 인간이니까 너는 천히 쓰는 그릇으로 만들 거야.’ 이런 것을 그릇 보고 의논하거나 상담하거나 협상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협상의 대상이 아니에요.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그 다음에 뭡니까?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달음박질로 흔히 교회서 통하는 용어 두자로 그걸 특심이라 해요. 열심도 아니고 특심. 특심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뭡니까?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죠.
그러면 구원받는 사람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주여 어찌 저 같은 인간을 불쌍히 여겨줬습니까?” 이런 공통된 특징을 나타내줘야 그것이 진정 구원받은 사람 이예요. 그러니까 이게 영어로 하면 nothing인데 ‘아,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구원받고 난 뒤에 터져 나온 고백이 ‘아!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아, 아닌데. 뭐 성가대 봉사하고 한 주일에 10에 3조 하고 아무것도 아닌데, 아, 개척교회 10군데하고, 아무것도 아닌데. 성경 한 100독 하고 요한계시록 10000독 읽고, 아무것도 아닌데.’ 이렇게 돼야 돼요. ‘전도 한 2000명 했고 아! 그것도 아무것도 아닌데.’ 이렇게 돼야 되거든요. ‘애 셋 잘 키웠고, 아, 아무것도 아닌데.’ ‘암 걸려서 기도해서 나았고, 아, 그것도 아무것도 아닌데’ 항상 nothing,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주께서 왜 암에서 낫게 하셨나? 나아야 했기 때문에 나았고, 구원받아야 했기에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 내용이 긍휼을 담는 긍휼의 그릇이랍니다. 어렵지 않죠? 긍휼을 담는 그릇은 무슨 그릇? 긍휼의 그릇, 오늘 제일 쉽다. 그게 긍휼의 그릇이죠. 저는 긍휼의 그릇을 볼 때마다 영화관에 갈 때 젊은 애들 먹는 팝콘 그릇 있잖아요. 그게 자꾸 생각나요. 영화관에 가면서 세상에 이만큼 양도 많아. 이만큼 그릇이 있는데 훅 불면 다 날라 가겠어. 그걸 들고 영화관에 가서 앞에 광고 나올 때 계속 먹고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긍휼의 팝콘 그릇이 아니고 긍휼의 그릇 이예요.
그러면 우리는 하루하루 뭘 소비합니까? 주님이 주신 긍휼을 소비하는데 소비하면 돌아서면 또 긍휼이 차 있어요. 오병이어에요. 긍휼의 화수분. 빼내면 또 있어요. 이게 바로 주의 말씀, 우리가 죽고 난 뒤에 부활하신 주님한테 듣는 말씀이 “예전부터 내가 다 그래왔잖아.” 방금 이 이야기를 듣는 거예요. 별난 이야기 듣는 게 아니고 우리는 다 아는 이야기 듣고 불신자들은 전혀 성경에 나와 있는데 안 믿던 이야기를 다 듣고, “아들을 공경하는 자가 아버지를 공경하기 때문에 아들을 공경하는 자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과거형) 옮겼느니라” 그러니까 네가 출발 지점에서 생각하지 말고 이미 도착 지점에서 주님을 경유해서 다시 네 집에 와봐라. 그러면 네가 네 매니저가 아닌 것을. 네 매니저는 따로 있어요. 우리 매니저는 따로 있습니다. 따로 있어서 그분께서 관리해 가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러면 목사님 낼 우리가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내일 일은 야고보서에 보면 내일 일은 네가 모른다 했어요. 왜, 인생은 안개니까. 네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모른다고 했느냐 하면 내일 일을 알아버리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미래에서 땅기는 것이 내일에 미리 알아버리면 이것이 긍정이 돼요. 오늘서부터 미래 내일로 가는 요걸 미리 눈치 채버리면 요 부분만큼은 주님의 손길이 이게 무의미하게 돼 버려요. ’아는데 뭐, 아는데 뭐, 주님 이 정도 알았으니까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렇게 되잖아요.
내가 알아서 어디를 가겠다. 하는 여기서 나온 교리가 뭐냐 하면, 환란 전 재림 설이예요. 환란 전 환란 후 논리입니다. 소설 ‘휴거’라는 소설에 나오는 내용들 이예요. 이거 바코드 받으면 안 되고, 이런 논리 있잖아요. 지금 프리메이션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고, 이런 이야기, 지금 세계은행이 어떻게 돼 있으며 북한의 핵문제는 요한계시록이 어떤 내용으로 돼 있으며, 이런 거, 많이들 들었죠? 그것이 바로 대비해야 살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원리와 정 반대에요.
대비해야 살 수 있다는 그 의식은 뭐냐 하면 바로 사적 개인 구원에 빠져 있는 거예요. 완전히 구원 파에요. 어떻게 하면 내가 나 혼자라도 살아남는가. 나 혼자 살아남는 그런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왜냐 아무도 구원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주님만 구원하고 거기에 파리 붙이는 걸 뭐라 합니까? 찍찍이라 합니까? 주님 부활에 같이 솟구쳐 올라갈 때 들러붙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오직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의 몸만 구원받습니다. 아무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우리의 몸은 죽어야 돼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그 외에는 구원의 방법이 없어요. 사적인, 개인적인 독자적인 몸의 구원은 없습니다. 그리스도 몸은 하나에요. 세례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에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만 구원받습니다. 다른 몸은 없어요.
여러분 몸도 이걸 내 몸이라 생각하지 말고 주님의 몸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음행하지 마라 하는 거예요. 네 몸은 네 몸이 아니고 주님 몸이기 때문에 주님이 음행하고 싶다 할 때는 하고 안 그러면 하지 마라. 주님이 그런 마음 들겠어요? 주님의 지체인데. 고린도전서 6장에 나오잖아요. 네가 왜 창기와 한 몸이 되느냐? 또 그 대목 보고 군에 가기 전에 15년 전에 창녀촌에 갔다는 그것 때문에 가슴 치고 하는 청년들이 있어요. 웃기지도 안 해. 갔어야 해요. 갔어야 구원받아. 그렇게 이야기해도, 했어야 한다고 그렇게 이야기해도. 하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닙니다.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조심해서 그거 안 했더라면 죄인 안 돼요. 그 사람 의인 돼 버려요. 우리가 해야 될 역량입니다.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너는 네 죄 지을 죄 종류 따로 있고 나는 내 죄 지을 종류 따로 있어요. 수첩 가지고 손목 때리고 ‘나가’ 하는 죄 따로 있지만 그거 아무 돌 던질 이유 없습니다. 그 사람은 키 큰 여자는 그거 하지만 다른 사람은 다른 죄 있어요.
요한복음 5장 38절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이것은 누가 믿게 한다는 말이죠? 네가 믿는 게 아니고 네 속에 있는 말씀이 네게 말씀을 주신 분과 연결시킨다. 코드를 꽂아버린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신 말씀은 안 믿으려야 안 믿을 수가 없게 만드는 능력이 우리 속에 있는 말씀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말씀은 아는데 믿기지 않아.’ 이건 지금 말씀이 들어온 게 아니고 성경을 외운 거죠. 성경 구절 암송대회 한 거죠. 그건 성경을 본 거지 말씀이 들어온 게 아닙니다. 말씀이 들어왔으면 말씀 주신 분과의 한 통속이 됐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아버지를 연구한다고 아버지 압니까? 아버지를 많이 알면 아버지를 많이 사랑하게 돼요? 아니에요. 왜냐, 자식이 아버지를 많이 안다고 아버지가 많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식이 무슨 짓을 해도 아버지는 재산 있으면 자식한테 줄줄 압니다. 항상 우리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 대상이지, 내가 한만큼 성과급 받는 그런 우리 사장님이 아니에요. 우리 대표 이사님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저한테 물으신다면 저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아버지가 예수님 다루듯이 다루십니다. 끝. 아버지가 우리를 어떻게 다루십니까? 궁금해요? 궁금해요? 궁금하면 500원. 아버지 예수님 다루듯이 다루시는 겁니다. 어떤 방법으로? 아버지께서 요단강에서 예수님께 뭘 줬습니까? 비둘기 같이 성령을 줬죠. 그 성령이 그 다음에 우리에게 옵니다. 우리에게 오게 되면 예수님은 일을 이루기 위해서 성령 왔지만 이미 예수님이 다 이루었던 것, 그러니까 네가 너한테 손 댈 필요 없다. 모든 걸 다 이루었다는 그것을 보증금으로. 아파트 사봤죠? 보증금으로 이미 우리한테 온 거예요. 중도금도 없어요. 보증금이 끝 이예요. 보증금으로 이미 그 보증금을 성령의 인, 도장이라 하는데, 보증금이 와 버리면 이미 우리는 소유권이 등기가 돼요. 등기가 내 등기에서 주님 등기로 바뀌어버립니다.
그러면 이 속에 말씀이 작용해서 우리로 하여금 저 사람하고 나하고는 다르지만 나만의 다른 죄를 지어야 돼요. 죄를 지어야 용서가 의미가 있잖아요? 죄 없는 곳에 무슨 용서가 있습니까?
어떤 분은 저한테 요새는 그런 분 없는데 옛날에는 그런 질문 많이 했어요. 목사님, 이런 죄를 지어놓고 용서를 구하는데 용서해 줄까요? 말까요? 이런 질문을 해요. 제 답변은 한결 같아요. 용서하지 마세요. 왜, 우리는 남을 용서할 입장이 못 됩니다. 우리가 용서를 하면 우리는 그 사람의 갑 질이 돼요. 그 사람은 을이 되고. 안 돼요. 용서는 주님이 해야죠. 주님이 용서한 것을 확인해야 되지, 우리가 용서 하면 안 돼요.
우리라는 것은 주님이 시킬 일의 도구기 때문에 주님이 하신 일에 우리는 목격자일 뿐이지, 내가 단독자로 용서한다는 게 없어요.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는 말씀이 나오잖아요. 에베소서 5장에. 주께서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오게 되면 우리는 술 먹고 싶어도 술이 안 먹혀지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거는 내가 착해서가 아니라 내가 단단히 결심해서가 아니라 내 속에 말씀이 술 먹지 말라는 말씀이 나를,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놔 버렸어요.
네가 화내되 해지도록 화를 품지 말라. 라고 에베소서 4장인가에 나오죠. 요새 다 잊어버렸어요.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에베소서 4장 26절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했잖아요? 이 명령을 가지고 많은 신학자들은 ‘이제 예수 믿었으니까 네가 해야지. 전에는 성령을 안 받았을 때는 율법을 못 지켰지만 성령 받고 난 뒤에는 말씀을 지켜서 점점 더 성화하게 되면 영광도 돌리고 너도 보너스도 받고 상급도 많이 타고’ 이런 식으로 가는 거예요.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고 이 말씀은 “분을 품어도 죄를 짓지 말고 해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뭘 믿느냐 하면 ‘내가 이걸 할 수 있습니다.‘를 믿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알아요. ’예수님께서 하셨죠?‘ 이렇게, 경상도 말로 하면 ’예수님이 하셨지에?‘ 고 서울말로 하면 ’예수님이 하셨어요? 저는 절대로 이럴 위인이 아닙니다.‘ 모든 영광을 예수님께 돌리게 돼 있어요.
성령이 왔다는 것은 주님과 콘센트로 연결됐다는 말 이예요. 예수님과. 십자가로 연결됐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경상도 말로 ‘어데에? 언제에? 절대로 제가 하지 않았습니다.’를 고백하는 거. 왜, ‘저는 죄인이기 때문에, 육이기 때문에, 절대로 저는 이런 일 할 줄을 모릅니다.‘ 그러면 옆의 사람이 ’아니 당신은 화내지 않았잖아.‘ ’그거는 주께서 그렇게 하셨지, 저는 아닙니다.‘
사도행전 3장에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 할 때 베드로와 요한이 일으켜 세웠잖아요. 일으켜 세웠다고 사람들이 이해하잖아요. 할 때 ‘왜 저를 쳐다봅니까? 왜, 제가 산타크로스 할아버지입니까? 왜 저를 쳐다봐요?’ 개콘에 보면 10년후‘라는 게 나오잖아요. 빚 갚으라고 나오니까 10년 동안 빚을 안 갚았어요. 그 여자도 아주 모진 여자야. 10년 동안 빚을 안 갚으니까 나중에 10년 동안 빚 갚으라고 오는데 오다 보니까 정이 들었어. 빚쟁이가 아니고 완전히 아버지라. ’애 때리지 마.‘ 그러니까 뭐가 없으면 모자간에 쓱 봐요. 그러면 남자 하는 말이 ’왜 저를 봐요? 제가 산타요?‘ 이런다고요. 그러면서도 준비된 거 딱 주고 가지만.
뭔가 일을 보실 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네가 원치 않는 길로 띠 띠고 가죠. 베드로가 일을 하니까 사람들은 ‘야, 베드로가 하셨습니다.’ 하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저는 원하지 않았어요. 저는 원치 않는 일을 주께서 하셨습니다. 제가 뭐요? 저는 피로 씻은 구원밖에 없는데. 왜 저를 쳐다봐요?’ 그러면서도 할 거 다 하잖아요. 그러면서도 할 거 다 하죠. 베드로는 베드로 식으로, 요한은 요한 식으로, 사도바울은 사도바울 식으로, 믿음의 분량대로 은사 받은 대로, 각각 다른데 공통점이 있어요. ‘제가 뭐요?’ 이런 거.
그게 바로 말씀이 너희 속에 있다는 걸 주님이 이미 예언한 겁니다. 어렵다는 대목이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미리 이사야 26장 19절에 죽은 자가 부활했다 했잖아요. 그것이 예수님한테 해버리면 예수님이 완성을 한다고요. 완성을 해버리면 예수님이 전에 그림자 할 때 이스라엘을 죽은 자를 살렸잖아요. 고 내용으로 예수님이 하실 내용에 포함이 돼 버려요. 포함이 되면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 요 내용대로 그대로 부활시켜요. 그러니까 언약 백성만, 이스라엘만 구원받는 겁니다. 어렵죠?
예수님의 그림자가 이쪽만 있는 게 아니고 이쪽에도 있거든요. 이게 구약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구약은 하나의 모형이고 그 모형대로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부활의 적용대상이 구약에 나왔던 그들에게만 그대로 적용시켜서 부활합니다.
그렇다면 구약 때 예언된 사람들이 신약의 성도가 되고 교회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구약의 이사야 26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옛날이야기가 아니고 오늘날 누구 이야깁니까? 오늘날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에요. 요거 기본 정석 수학1에 나오는 이야기죠. 그러면 여기서 응용문제 나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겼잖아요. 그 이야기 누구 이야깁니까? 그게 바로 우리 이야기에요. 왜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할 수 있다. 재물이 오늘날 우상이 되잖아요. 우리는 백날 성경공부해도 조금 있다가 끝나고 나면 그다음부터 눈 벌게서 돈만 생각하죠. 그게 우리 이야기라니까요. 그걸 우리하게 할 때 불신자들은 말씀이 없어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아이구, 내가 정신 차려서 돈 사랑하지 말고 주님 사랑해야지.’ 이건 믿음이 없는 사람이고, 불신자들이고, 신앙인은 뭡니까? ‘내 이럴 줄 알았어, 나는 한 짓이 이것 밖에 못해.’라고 해서 다시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로 보는 거예요. 바라본다고 돈 더 주는 게 아닙니다. ‘뭐, 내가 산타야?’ 더 주는 건 아닌데 주께서 내가 또 돈 좋아하게끔 이렇게 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죠. 다시 한 번 나의 의를 인정하지 않게 해주신 조치가 이게 우리를 끌고 가시는 주님의 조치인 것을 감사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29절에 보면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 선한 일은 뭡니까? 예수님의 일이 말씀으로 삽입된 모든 자가 선한 일에 해당되어서 선한 예수님이 부활했잖아요? 따라서 선한 일이 있는 사람 그들도 예수님과 같이 영생의 부활을 얻습니다. 간단하죠.
그런데 이렇게 안 듣고 그냥 29절 봐버리면 뭐합니까? ‘그래, 이제는 예수 믿고 바르게 살아야지.’ 한번 살아보시죠? 신명기에 이런 말씀 나오잖아요? 너희 중에 자식이 있어서 말 안 듣거든 교회 어른, 이장한테 가서 이야기해서 마을사람들이 돌로 쳐죽이라,는 게 있어요. 그거 한번 지켜보렵니까? 그거 지켜볼 수 있겠어요? 뭐 평소에 착하게 살고, 착한 게 자식 위하는데 착한 게, 이런 거 따질 수가 없어요. 자식이라면 내 새끼라면 어떤 누가 욕해도 내 새끼는 내가 보호해요. 이거는 짐승도, 새도 마찬가지고, 자기 자식을 버리는 건 짐승만도 못하다 하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아브라함처럼 자기 자식을 칼로 쳐 죽이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대로 착하게 10년 동안 살다가 11년에 만약에 삐끗해서 나쁜 짓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모든 것이 다 무효로 돌아가죠. 모든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 겁니다. 그 원리가 왜 그 원리냐 하면 무서운 잠자는 거인이 있다고 합시다. 거인을 피해서 조심해서 거인이 잠 깨지 않도록 하는데 거인에서 나오는 그 터럭, 머리카락 하나를 우연히 지나가다가 밟았다. 그러면 누가 깹니까? 거인이 깨겠죠. 그 일부를 밟았는데 일부가 몸통과 연관된 일부가 돼요. 모든 말씀은 예수님처럼 완전하지 아니하면 그 누구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여러분, 엘리야하고 모세하고 변화 산에서 나타날 때 엘리야하고 모세가 어떻게 해서 천국에 가게 되었습니까? 아유, 이거 수능에 내고 싶다. 정말. 엘리야하고 모세가 어떻게 변화 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하게 되었습니까? 그 엘리야 모세가 하는 이야기 하는 식대로 답변을 해보세요. ‘주여 언제 돌아가십니까?’ 그거에요. ‘언제 별세하십니까?’ 요새 말로 ‘주님 언제 어떻게 내 죄 위해서 언제 해결하려고 십자가 지십니까?’ 그 이야깁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오직 너희가 알기는 십자가밖에, 예수님이 죽은 것만 알기를 원한다. 이거는 엘리야와 모세도 마찬가지고 사도바울도 마찬가지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성경들이 있지만 그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로 하여금 죄인으로 확인케 하는 말씀들이고, 그리고 죄인케 확인하면서 그 말씀을 말씀대로 지키는 것은 누구 몫이고? 바로 주님과 한 지체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 말씀들을 죄인인 우리를 오히려 죄인을 가지고 말씀을 드러내게 하면서 모든 공로는 누가 가져갑니까? 우리 공로로 돌리지 않고 주님이 친히 다 몽땅 다 가져가시는 방식으로 이 말씀을 활용하시는 겁니다.
그럼 제가 이렇게 하니까 ‘그럼 목사님 우리가 말씀을 부지런히 읽어야 되겠네요?’ 읽는데서 출제 안 나옵니다. 주께서는 먼저 말씀으로 주신 말씀만 기억나게 돼 있지, 우리가 읽은 데서만 나오는 게 아니에요. 범위 밖에서 출제를 냅니다. 왜냐 하면 읽을 걸 해버리면 우리가, 내가 지켰다가 되니까.
여러분, 성경이 항상 기억나던가요? 항상 위반했을 때 기억나는 게 성경이 되겠어요. 성경은 지켰다고 기억나는 게 아니고 위반했을 때, 집에 갑자기 어떤 아저씨가 와서 ‘야야, 내 아들아, 너를 양자로 했는데, 미안하다, 네 허락도 없이 양자로 해서 이제 내가 죽게 되었는데 나는 유산을 가져갈 수가 없어서 네가 한 75억을 다 가져라, 네가 양자였다. 미안하다. 사전에 말 안 해서.’ 이렇게 왔을 때 ‘아저씨, 이것은 가난한 자에게 주세요.’ 이런 사람 없어요. ‘주여 감사합니다. 드디어 지난 고생 했던 거 이제야 보상받는군요. 내가 그동안 새벽기도 한 거 드디어 응답되는군요.’ 받아오잖아요. 오는 순간 그 사람은 지금 어느 길로 갑니까? 좁은 길로 가겠어요? 넓은 길로 갈 가능성이 많습니까? 그 다음부터 골프에다 뭐 하고 차 바꾸고 아파트 넓히고 둘째 아들 집 사주고 첫째 아들 상가 사주고 이제는 난리 났어. 그게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길이죠. 그게 모든 사람이 찾는 길이죠. 그 찾는 길은 지금 좁을 길이 아닙니다. 좁은 길은 사람들이 봐도 안 가는 길이 좁은 길이거든요. 그 사람은 주님의 뜻에 의해서 졸지에 자기가 넓은 길로 가고 있다는 섬뜩함이 느껴져야 돼요.
그래서 말을 정리해 보면 떼돈 벌어서 다시 한 번 좁을 길 느끼게 하시는 주님의 작전에 걸려든 거예요. 그런 작전 좀 걸려봤으면 좋겠어. 우리 딸이 사법고시 1등하고 말이죠. 아들은 의사 고시 1등하고, 이래서 넓은 길 흉내라도 봤으면 좋겠어. 좀 그것도 대한항공에 가서 하라 하고 이쪽으로 또 다른 길이 있어요. 어떤 가수는 고생하면서도 하나님 믿는 가수가 있어요. 알리라 하는 가수가 있어요. 요새는 찬송가도 부르고 돌아다니는 모양 이예요.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다고 해서 우리도 다 같이 그런 고생할 필요 없잖아요. 그쪽은 그렇게 하란 말이죠. 소양은 소양대로 하고 알리는 알리대로 하고 노래 못하는 우리는 또 다른 길 있고 이런 거죠. 하지만 공통점은 뭐다? 그거 전부 다 주님의 작품이고 주님의 다양한 솜씨, 은사다 말이죠.
그 다음에 30절 봅시다. 보면서 또 걱정되네. 29절 이제 알았죠?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주님께서 말씀을 주신 자가 선한 일이고, 주님의 선한 일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주님의 그림자이기 때문에. 이제 딴소리하기 없기입니다. 우리가 착해야 예수 믿고 착해야 돼, 이러면 안 됩니다. 지옥 갑니다.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이렇게 돼 있죠? 이 말은 뭐냐 하면 너희들은 너희들이 아는 하나님 따로 있고 내가 아는 하나님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아는 하나님은 성경 해석을, 구약을, 당시 구약밖에 없었기 때문에, 해석을 전부 다 잘못하고 있었어요. 그 잘못한 해석에 대해서 주님께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하나님의 신이라 한 대목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하나님의 신이 된다는 거죠.
요한복음 10장 35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라 돼 있죠. 34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를 하나님의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말씀을 받는 사람들을 신이라 했죠? 그러면 지금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신들입니까?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상황 속에서 하신 말씀 이예요. 본인이 독백한 게 아닙니다. 산 속에서 혼자 한 게 아니고 ‘너희들이 이런 쪽으로 말씀을 지금 잘못하고 왔다.’ 그것을 고발하는 쪽으로 예수님이 말씀하는 거예요. 따라서 예수님 말씀 속에 뭐가 포함돼 있느냐 하면 너희들 식으로 해석하면 이런 모순점이 발생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들이 사용하는 성경의 해석법이 그대로 예수님 해석법에 담긴 경우가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굉장히 많아요.
대표적인 것이 상 같은 거. 큰 상 받으리라 하는. 너희들이 그런 식으로 양적으로 상을 했다면 그렇다면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너희들 상 없어. 하지만 이 상이란 말은 너희들 옹호한 것이 아니고 너희들 식으로 하게 되면 결국은 너희들은 나를 믿지를 못하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어떻게 하나님 말씀이? 유대인들은 이런 거예요. 모세의 법을 지킨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말씀이 어떻게 모세가 준 법을 지키면서 그 모세 속에서 왜 내가 메시야라는 것을 왜 발견하지 못하느냐,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러면 그 이야기 듣고 바리새인들이 모세 율법을 다시 보겠죠. 백날 보세요. 백날 봐도 거긴 예수님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죠. 이사야 7장에 보면 크리스마스 때 자주 인용하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이 뭡니까? 임마누엘이죠. 이거는 누가 봐도 4자에요. 누가 봐도 4자죠. 임마누엘, 4자죠. 그런데 예수이름은 임마누엘입니까? 예수입니까? 예수, 누가 봐도 두 자죠.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어떻게 돼 있습니까? 이름을 예수라 해놓고 이사야에 예언된 대로 하나님과 함께 계신 임마누엘이라. 이거 누가 장난칩니까? 예? 손가락 네 개가 어떻게 두 개가 돼요? 그 해석해 보세요. 임마누엘은 임씨고 예는 예수인데 성이 다른데 그게 어떻게 같은 말이 돼요?
요번 24일 날 저녁에 하필 수요일이 돼서 특별히 성탄절 의미를 담아서 예배한다 하거든요. 우리교회서 다과회 하려고, 다과회 한 적도 없어요. 없는데 우연히 24일 돼서 그냥 다과회 한다 하는데 이 내용을 고만 설교를 할까 갑자기 생각나는데 그 설명이 어떻게 되죠? 이것은 예수님의 일방적인 설명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아무리 문자적으로 백번을 봐도 안 나오는 설명만 예수님께서 해석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래야 그들이 못 믿죠. 그래야 그들이 자기 능력으로, 자기 지식으로 못 믿는 거예요. 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믿어버리면 더 이상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아닙니다. 뭔가 가능성이 있는 세대에요. 끝까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되려면 아무리 성경을 보고 해석을 해도 예수가 안 나오게 돼 있어요.
실제로 그런 현상들이 지금 신학교 교수들마다 다 있어요. 신학교 교수들이 예수를 안 믿습니다.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지를 않아요. 그냥 자칭 메시야, 또는 유대인의 스승으로 알고 있어요. 구약도 마찬가지고 신약도 마찬가지고. 그들은 뭘 믿느냐? 신을 믿어요. 신을 믿는 게 예수 믿는 거잖아. 예수님은 재벌 2세고, 신은 재벌 총수고, 총수 믿으면 저희 집에 아들 있겠지 뭐. 마치 이쪽을 단계를 거쳐서 그 마지막을 믿으면 뒤 중간은 그냥 들어온 걸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은 신을 믿는 것과 예수 믿는 것은 정 반대거든요. 사도바울이 그걸 증언해줬잖아요. 하나님을 믿으면서 예수 핍박하게 된다고.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을 걸림돌, 아, 뭔가 응어리 진 거예요. 응어리 진 거. ‘하나님 믿나? 그러면 넌 날 못 믿게 돼 있어. 하나님을 버려? 그럼 날 믿어.’ 그러니까 예수님은 무슨 예수님이냐, 죽는 예수, 하나님 이예요. 죽는 하나님 이예요. 하나님이 죽어요. 그것도 피조물 손에. 세상에 이런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온 아이디어입니까? 사람에서 나올 수 있겠어요? 자식도 아버지를 함부로 못 죽이는데 아니 피조물이 자기 창조주를 때려 죽여요? 일부러 하나님이 일부러 그렇게 한 거예요. 일부러. 왜냐, 인간의 배후에 악마가 있기 때문에. 악마는 예수님이 주로 되지 못하게 하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귀의 목적은 뭐냐, 중보자를 삭제하는 거예요. 중보자만 삭제하면 남는 게 뭐냐 하면 인간은 위대하다. 인간은 신이다. 인간은 신이고 인간은 가치 있다가 남아요. 가치 있는 나와 가치 있는 하나님 우리 1:1로 상대합시다. 이게 마귀가 설정한 구조에요. 거기에 신학 교수가 다 넘어간 거예요. 신학 교수들이. 신학 교수 있으면 복음 전하면 되지 않습니까? 복음 전하면 신학 교수 땡! 탈락 이예요. 복음 전하면 신학 교수 남아 있을 수가 없어요. 추방 된다니까요.
제가 아까 동영상 했지만 교목이 복음 전하면 교목 자리 못 있어요. 교목은 해야 될 게 뭐냐 하면 ‘우리 학교 애들 고3이 서울 대학에 많이 합격해서 일류 학교 되게 해주시옵소서.’ 이게 교목이 할 일이고 병원의 원목이 할 것은 뭐냐 하면 어떤 난치병도 어떤 불치병도 우리 병원에 와서 다 병이 낫도록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이 병원이 날로 부흥되게 해줘야 그게 병원 원목이 기도할 제목 이예요. 의사들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을 주셔서 남들이 수술 안 되는 수술 다 되게 하셔서 이 병원 크게 해 달라. 그래야 거기서 월급 받고 사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 목사는 뭡니까? ‘주여 이 교회 크게 부흥돼서 여기 있는 장로들 다 돈 잘 벌고 집사들 다 가정 화목해서 하나님의 살아있는 교회 되게 해주시옵소서.’ 갑자기 부흥회를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게 교회 목사의 할 일 이예요. 거기서 복음을 전해버리면 ‘여러분 교회 믿지 맙시다.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이래 버리면 그건 다음 기회에 계약이 안 돼요.
군목은 뭐해야 되는지 알아요? ‘하나님 이 병사들에게 건강을 주셔서 이 대한민국 국토를 이들의 힘으로 지키게 하옵소서.’ 이래야 군목이지, ‘주여 예수 그리스도 믿게 하시옵소서’ 이러면 군목이 땡 탈락 이예요. ‘국가는 짐승의 모습이고’ 이러면 안 돼요.
사사기 때 미가 집에 사적인 목사가 들어왔죠. 그 목사 할 일은 뭡니까? 월급 대주는 대신 그 가정에 축복을 해주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 아주 타락한 사사기 모습이죠. 그 가정의 축복이 가정, 가정 모여서 커지면 오늘 날 교회입니다. 그게 교회에요. 지옥이 보고 싶습니까? 바로 그것이 지옥 이예요.
해석할 때 우리 해석은 항상 성경해석 중에서 내가 선악과 따먹고 신이 됐잖아요. 신인 것을 증명해 주고 그걸 긍정해 주고 그 가치와 자존심을, 영광을 보장해 주는 쪽으로 성경해석을 다하게 돼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너희들마저 신이라면, 왜 나는 신이 안 되는 이유가 없잖아.‘ 이렇게 이야기해요. 둘 중에,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너희들 아비는 뭐라 했습니까? 신이 아니고 너희 아비는 마귀다. 마귀자식이 신이 될 리가 없죠. “너희들 아비는 마귀다.” 라고 질책하는 그 사람이 유일하게 너희들이 알고 있는 신의 범주 바깥에 있는 신이겠죠. 그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이 와서 우리를 지적을 해줘야죠. 그래서 말합니다.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한다.” 따라서 날 미워하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나는 너희들 눈치 보고 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
요한복음 2장 24절 “23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24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그 다음에 뭐라고 돼 있죠?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이게 뭔 뜻이냐 하면 ‘예수여 당신이 예수인 것을 우리에게 증거로 보여주시옵소서.’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 이예요. ‘너희들이 눈치 채는 식으로 내가 너희에게 증거를 줄 의무는 나한테 없다. 오히려 나는 너희를 아는데 너희들은 날 몰라야 돼, 그래야 구원이 돼요. 그래야 주님만 의지하지, 예수 알아챈 나를 의지하지 않게 되잖아요.
사마리아 여인한테 남자 다섯 명 있었고 그와 헤어지고 지금 사귀는 남자는 여섯 번째 남자라 하는 것을 사마리아 여인이 자진해서 신고했습니까? ‘주님, 사실은 제가 여섯 번째 …’ 이랬습니까? 누가 찾아냈어요? 주님이 찾아냈죠. 따라서 자신의 과거나 이런 것을 남편이나 아내한테 이야기하지 마세요. 쓸데없이. 제발 진짜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어디 신입니까? 자기가 메시야도 아닌데 왜 이야기해요? 그럼 신뢰가 안 되는데? 신뢰 필요 없어요. 언제 신뢰감 있었습니까? 앞으로도 신뢰가 없을 거예요. 절대 그러지 마세요. 과거는 남한테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아시는 이미 아시는 주님께 의지하면 돼요. 주께서 아시면 그 과거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면 주한테 맡기고 내가 알아서 이실직고 하지 마세요. 바보 같은 짓입니다. 절대로 하지 마세요. 그리고 나도 기억하지 마세요. 나도 그 과거를 잊어버리세요. 왜 지나간 나의 세월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 사라졌어요.
김광석 가수가 실수한 것은 뭐냐, 서른을 기억했다는 게 문제에요. 서른 즈음을 뭐하는데 기억해요? 서른두 살 먹으면 서른 세 살 되면 되는데 왜 서른 즈음을 해서 맨날 서른 즈음하다가 나중에 자기가 우울증 걸려서… 서른 즈음 하는 노래 있죠? 김광석이 부른, 그거 왜 삼십을 좋아해서...점점 더 멀어져가네. 왜 점점 더 가까이 가네. 이렇게 봐야지, 왜 점점 더 멀어져가네. 왜 점점 더 멀어져가는 걸 왜 기억해요?
사람이 과거를 기억하게 되면 공황장애가 와요. 공황장애, 공황장애라 하는 것이 넓은 공항에 가면 언다. 그게 아니고 패닉 상태, 공황장애가 와요. 공황장애는 뭐냐 하면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 강하게 지키다 보면 이런 패닉 상태가 오는 겁니다. 지킬 게 없으면 이게 안 와요. 아이큐 52은 절대로 안 옵니다. 아이큐 24는 절대로 공황장애 안 옵니다. 지킬 게 뭐 있어야지. 지킬 게 있으면 그것이 자기한테 화병이 된다는 거예요.
“놓으라.”고 주님이 그렇게 이야기해도 그는 너무 아까워서 자기 과거에 투자한 게 너무 많기 때문에, 찬란한 역사, 그 찬란한 역사가 너무 손 털기 너무 아까워서 그걸 쥐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걸 쥐고 있으면 하루하루 늙어가는 것이 너무 슬퍼요. 그럼 미쳐요. 김 구라처럼 공황장애로 갑자기 입원하는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 하시는 것은 지금 네 동네하고 내 동네하고 다르다 이 말이죠. 그리고 이것은 너희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 때문에 지금 내 말이 안 먹힐 것이다. 하지만 이 성경이 있는 이상은 너희들이 믿던 안 믿던 간에 성경이 너희한테 침투해 들어갈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고야 말리라. 목자는 내 양을 알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 내 손에서 어떤 권세도 내 손에 있는 양을 뺏을 자가 없으리라.
더 기쁜 소식은 내가 찾는 양은 아버지가 찾는 양은 마지막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에 다 살려낸다. 그것이 네가 너에게 그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이거는 아멘 할 것도 없어요. 들어오게 되면 ‘아! 아! 그렇구나.’ 벌써 남들이 모르는 다른 세계에, 그러니까 다른 세계가 뭐냐 하면 내가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현상이 일어나요. 손 대고 있다는 사실, 누가? 나 말고 다른 분이 나 떼고 맨날 손 대고 있다는 겁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건강하게 또 눈 뜨게 되고 이거는 분명히 내가 어제 운동한 게 아니고 ‘주께서 은혜로 또 숨 쉬도록 햇빛을 줬구나.‘ 하는 것을 남들이 느끼지 못한 걸 보게 하는 거. 친히 기르신다는 사실을 느끼는 겁니다. 이것이 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왔다. 이런 소식을 먼저 세례요한부터 먼저 이야기했는데 너희들이 ’내 그럴 줄 알았어. 세례요한이 전한 걸 너희들이 안 믿었어. 그 다음에 내가 오면 세례요한처럼 안 믿을 거야. 하지만 안 믿더라도 죽어서 깨어나는 일이 있더라도 믿게 할게.‘라는 그 전략을 그 뒤에 27절-30절까지 쭉 적어놓은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피조물이란 자체를 돌아보게 하옵소서. 창조자 없는 피조물 없다는 요 짧은 간단한 사실마저 우리가 너무 잊어버렸습니다. 우리가 피조물이기에 창조자 뜻대로 하도록 맡기는 그런 믿음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